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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3(2013-4-23)



 

기모간사소식 93(2013년도 3번째)

 

첫학기를 마무리하며

이번 봄학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해당 과목마다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4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계관과 교육 : 포스트모던 청년대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성경공부 교재에 대한 연구

2. 과학사 : Michael Servetus에 대한 연구

3. 기독교 세계관과 철학 : 한국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하면 윌버포스와 같이 사회 부정에 맞서 싸우도록 가르칠 수 있는가?

4. Research Strategy : How Can We Teach the Younger Generation in Korea to Fight Against Social Corruption, Just as Wilberforce Did?

 

가능하면 배운 내용을 청년사역과 관련된 주제로 풀어내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교육관련 주제는 다원화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청년들에게 적용 가능한 성경공부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는 복음을 이시대의 방식으로 어떻게 전하면 좋은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고, 철학과 Research Strategy에서는 William Wilberforce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이시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보았습니다. 노예제도 폐지와 사회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이를 위해 헌신하고 인내했던 윌버포스의 삶과 그를 도왔던 Clapham Sect.의 노력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18-19세기의 영국의 모습과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 가운데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잘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사의 주제는 1600년대 이전의 과학자 중에 기독교인으로 그의 신앙과 과학적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는 내용이 거의 없었는데 과학사 수업을 진행하는 중에 알게 된 사람으로, 칼빈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한 세르베투스가 아주 탁월한 과학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부정하여서 결국에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화형 당했는데,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을 때는 저에게 세르베투스는 이단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문을 위해서 여러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보면서 정확한 fact를 아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논문의 결론 중의 일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문이 세르베투스라는 인물을 좀 더 자세하게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가 어떤 배경에서 교육을 받고, 어떤 신앙적인 토대 가운데 어떤 삶과 업적을 쌓아갔는지를 알게 되었을 ,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있게 되었다. 그를 단순히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처형당한 이단아로 쉽게 단정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고대의 전통에 맞서 싸운 용감한 학자였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세르베투스는 성격이 교만하고 고집스럽다는 평이 있지만, 종교적인 싸움에서의 순교자들보다 종교적인 편협함에 맞선 인물로, 근대 서양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사람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이론이나 폐순환이론처럼 새로운 가정이 없다면 학문적인 새로운 진보는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에 의문을 가지고 필요하다면 항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이런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을 만한 인물이다.”

 

이사 준비

지난번 소식 때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와 여름 방학 학교에서의 일자리를 위해서 기도하며 알아보고 있습니다. 원래 지금의 집을 1년 계약으로 Rent를 했기 때문에 중간에 이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부동산 임대 업체(Home Life)의 담당 매니저가 양해를 해주었고 생각보다 빨리 다른 세입자가 계약을 하게 되어서 지금 분주하게 이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4/30일에 이곳 칠리왁(Chilliwack)에서 써리(Surrey)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현재는 타운하우스에서 살고 있는데 이제 단독주택의 반지하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다가 가능하면 아이들 학교가 가까우면서 Strong Start 프로그램이 있는 지역을 알아보다가 이곳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처럼 포장이사를 하게 되면 인건비가 너무 비싸서, 트럭을 빌려서 몇몇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몇 달 이곳에서 지내면서 짐이 꽤 늘었는데 안전하게 이사를 잘 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름에 학교에서 일하는 것은 현재로는 불투명합니다. 지원서를 내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현재로는 가능한 자리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루트로 다른 일도 알아보고 있는데 필요한 자리를 잘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학기 마무리하면서 TWU GSA(Graduate Student Association-대학원 학생회)에 대의원(Representative)으로 출마했습니다. 이곳에 온지 한 학기 밖에 되지 않았지만 좀 더 캐나다 학생들과 이곳의 문화를 접하고 싶은 마음에(물론 약간의 장학금도 한 몫) 지원을 하게 되었고 대학원생들의 투표를 통해서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이곳 VIEW(세계관 대학원 과정)에서도 지난 주 정기총회(4/21)를 통해서 총무로 선출되었습니다. 겸직이 부담스럽지만 모두 열심히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기 바라고, 이를 통해 저의 지경도 넓어지리라 믿습니다. GSA 회의는 지금 한 번 했지만 회의 진행요령이나 방식도 많이 배울만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사 준비를 하며서 조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결이는 요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있고, 한솔이는 공룡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3주에 한 번 정도 주위의 도서관을 찾아서 아이들 책과 DVD를 빌려서 열심히 보고 나름 문화생활을 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찬양을 하고 성경을 한 장 읽고 제가 잠시 설명을 한 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이때 가장 열심히 기도제목 나누고 기도하는 것이 한결이랍니다. 기도제목도 많고 기도도 이제 곧잘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어린아이들의 기도를 기뻐하시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도제목

1. 이사를 안전하게 잘 할 수 있도록(4/30), 가족들이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 하도록

2. 여름 방학동안 잘 쉬고, 적당한 일을 할 수 있도록

3. 학교에서 섬기는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신입생 대표, GSA 대의원, VIEW 총무)

4. 기도와 재정의 동역자들이 더 많이 세워지도록

 

2013423일 캐나다 Chilliwack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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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면(최용준)


이 책은 현 한동대 글로벌학부의 최용준 교수 본인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역을 하면서 경험한 여러가지를 기록한 글이다. 

네델란드, 독일, 벨기에에서의 학업과 사역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삶의 전 영역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것에 대한 개인의 깨달음과 대답들을 기록하고 있다. 

수면보다 지면이 낮은 네델란드, 또한 바람이 많이 불어 어려가지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도리어 창의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배경에 개혁주의의 신앙의 힘이 있음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말뚝위에 세워진 수많은 건물들, 호수의 물을 모두 퍼내고 지은 스키폴공항, 바람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풍차의 나라...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여러 역경과 고난이 닥쳐올때 이것을 어떤 안목과 시선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됨을 말한다. 

이외에도 독일교회와 벨기에 교회의 모습을 나누면서 한인교회의 나아가야할 모습들을 제시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통합을 다루고 있다. 과거 유럽연합의 비전을 처음 제시했을때 그것이 지금 수 많은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바로 한 사람의 비전제시와 노력을 통해서 그러한 일이 일루어 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는 과거로부터 단일 민족임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다문화사회속에서 이것이 결코 자랑이 될수 많은 없음을 실감한다. 서로 다른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이것들이 창의적으로 통합될 때 나타나는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훈련과 노력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 한가지를 배우는데도 힘들고, 외국인을 만나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반적으로 2-3개국어를 쉽게 해내는 유럽의 사람들과는 여러가지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현재 급속하게 우리 사회속에 들어와 있는 이런 다문화적인 요소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품고 서로 다름 속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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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선교 : 말씀, 행위, 새로운 존재


선교의 두가지 역할 : 선포(proclaiming)와 추진(propelling)

'개인'을 구원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의 문제들을 추정해 나가는 방식과 성경을 인간과 우주 역사의 유일한 해석이라고 보는 것을 시작점으로 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개인의 삼의 의미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방식이 있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가운데서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이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선교의 추진적 역할은, 사건들을 그것의 진정한 종말을 향하여 가도록 압박한다.

- 중국이나 인도의 청년들이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선 이유, 일잔 한번 과거의 존재론적 틀이 깨지고 나면 결코 다시 복구될수 없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가차없이 추진해 가고 있다. 


선교에서 행함과 복음선포의 연계성 문제

현재 복음전도, 곧 교회의 선언적 기능의 우위를 강조하는 사람들과 불의, 편견, 억압에 대항하는 행동, 곧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에 최우선을 두려는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싸움이 존재한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치유행위에 대한 설명을 통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단순 명료한 말씀으로 진술되어야 했다. 

치유만을 강조하고 복음전파가 없는 경우 vs 치유가 없는 복음전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가지는 선교적 의미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천국의 비밀을 실어 전하도록 선택된 공동체를 준비하셨는데 바로 이 공동체, 교회가 그분이 남긴 유산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곧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대변하도록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에수님과 함께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고, 자신의 삶 속에 대항에 대한 대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에수님의 오심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것은 첫째, 하나님 나라가 더이상 형식적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 새롭다는 것은 우리의 교회속에 있는 성령의 은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잘못된 이해

선교는 우리 자신이 하는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이다.


선교는 성령안에서 천국의 임재를 미리 맛보는 데서 시작한다. 

1. 말씀과 행위, 복음전파와 활동 이 두가지를 서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말씀이 행위를 설명하고, 행위는 말씀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복음전도의 주된 임무에서 이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분명히 간주되는 특정한 계획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할 수는 없다. 

4. 이런 근본적인 진리가 잘못 이해되어서 만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사는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삶 가운데서 책임감을 가지고 환여하는 것을 맏는다면 그것은 재난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5. 정의와 평화라는 거대한 문제와 연관된 교회의 주요 역할은 격식을 차린 선언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6. 교회 존재의 중심적인 실재, 즉 복음의 중심적인 진리들, 다시 말해서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고, 이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항상 있다. 


12장. 상황화 :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

복음 전달과 상황의 문제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예수님의 모습


타문화 선교와 상황화(contextualization) 논쟁

기독교의 메시지를 기독교의 영향권 밖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로 옮기려 할 때, 바로 상황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식민주의 시대가 남긴 감정상의 앙금


복음은 문화라는 옷을 입고 전해진다. 

장소와 문화에 상관없이 기독교적인 복종이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선교사의 역할(앨렌) : 거기에는 반드시 성경과 성례전 그리고 사도적 사명이 구비된 회중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선교사는 자신의 일을 다 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새로 생긴 교회는 성장해 나가면서 복음을 자신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배워 나가야 한다."


복음은 공동체 가운데서 올바른 상황화의 길을 간다. 

말씀을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세례와 성례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억압받는 상황과 여러 가지 상황 신학

-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인도 댈리트 신학 : 이들은 성경을 탄합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핵심은 투쟁이 된다. 


올바른 상황화는 먼저 하나님을 주목한다.

올바른 상황화는, 복음이 정당한 우월성을 가지며 모든 문화에 침투할 수 있고 각각의 문화 안에서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복음은 진정으로 지역적인 동시에 에큐메니컬해야 한다. 


인간을 상황의 중심에 두는 접근법의 문제점

첫째, 나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복음은 자체가 독립적인 힘을 지니며, 복음 전도자의 손에 놀아나는 도구는 결코 아니다. 

둘째, 어떤 시대 상황에 대답을 주는것만이 목적이라면 복음은 어떤 프로그램의 들러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이 진정으로 실감나게 살아 역사할 때 이런 일을 목격하는 당사자는 일을 성취하는 주권이 이제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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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Servetus에 대한 연구-최종본.docx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칼빈에의해서 화형당한 이단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가 어떤 배경에서 교육을 받고, 어떤 신앙적인 토대 가운데 어떤 삶과 업적을 쌓아갔는지를 알게 되었을 ,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있게 되었다. 그를 단순히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처형당한 이단아로 쉽게 단정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고대의 전통에 맞서 싸운 용감한 학자였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세르베투스는 성격이 교만하고 고집스럽다는 평이 있지만, 종교적인 싸움에서의 순교자들보다 종교적인 편협함에 맞선 인물로, 근대 서양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사람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앙과 학문의 영역에서 일관된 삶을 선택한 인물이다. 물론 그의 신학적인 작품이나 과학적인 발견 역시 지금에 비추어 보면 문제가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성과라고 있다. 지금처럼 학문이 세속화 되고, 파편화 되어진 상황에서는 세르베투스와 같은 업적은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학문에 있어서의 위대한 발견이나 업적은 뭔가의 새로운 독창적인 발견보다는 여러 학문의 통합(fusion) 이루어질 탁월한 발명이나 진보가 생기는 것을 있다. 또한 아쉬운 것은 세르베투스가 자신의 지적인 탁월함에, 조금만 인격적인 성숙함이 겸비되었더라면 화형까지는 가지 않을 있었을 것이다. 학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적인 성숙만큼 인격적인 성숙을 함께 겸비해 있도록 요구하고 훈련시키는 일들이 더욱 필요하다.


 그의 신학적 이론이나 폐순환이론처럼 새로운 가정이 없다면 학문적인 새로운 진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진보를 위해서는 기존 질서에 의문을 가지고 필요하다면 항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이런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을 만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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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의 실마리이신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히브리인의 역사이해의 독특한 점은 역사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헬라인의 사고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왼전성의 핵심은 불변성이고 완전성은 인간 역사의 변화들로부터는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5)에서 '가까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보다는 공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 곧 그분의 왕권이 인간 예수 안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눅 17:21, 마 12:28)

2) 그러나 이런 임재는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다. 

3) 이런 결과로 감추어진 임재는 위기와 투쟁을 유발시킨다. 

4)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의 열쇠는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분명히 드러난 것의 차이이다. 

5)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밖으로 분명 드러나는 영광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사이의 간격의 의미는 모든 나라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선한 파수꾼으로서의 경계와 준비태세를 요구하는 긴박감과 아버지 외에는 예수님조차도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리워진 것이 곧 벗겨질 것이라는 말씀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놓치는 것이다. 

7) 초대교회, 이 시기의 특징은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처형이었다. 부활도 십자가 사건만큼이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으므로 천국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8) 이렇게 천국이 감추어진 것은 열방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9) 교회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을 추구하려는 유혹과 심판을 부정하고 편안히 머무르려는 게으음의 유혹이다. 그리기에 우리에게는 인내와 희망이 동시에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의미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등성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산과 계곡, 호수와 숲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본 주님의 날은 단 하루처럼 보였지만 그날은 새로운 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천국의 권세와 구시대의 권세가 나란히 역사하는 때이다. 이것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신앙을 갖도록 초청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1) 그리스도는 단 한번에 모든 정사와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2)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이제는 그의 모든 대적이 순복할 때까지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하신다. 

3)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이고 그의 통치와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현대의 여러가지 역사 이해

18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사회는 진보가 역사의 의미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보의 신념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부유한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후에 받을 영혼의 개인적 축복만을 바라보는 사유화된 종말론(privatized eschatology)으로 빠져 들었고 이는 공적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감소시켰다. 

죽음은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 각 사람을 역사로부터 떼내어 버린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사상 의미있는 행동이란 오직 어떤 미래의 목표점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계획도 인간의 삶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적일 수 있다. 동시에 죽음의 이면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을 꿈꾸지 않으면서 지금 가능한 상대적인 선을 결연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공적인 삶 가운데서의 우리의 행위들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면 천국을 위한 행동화된 기도들(acted prayers for the kingdom)이다. 

역사의 목표점으로 약속 받은 것,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만들어 내는 사적인 세계과 공적인 세계의 이분법을 치유하는 것이다. 


10. 선교의 논리

선교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다. 


선교는 기쁨의 폭발이다.


복음 선포는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성육신 하신 주님도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역사를 오만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어떠한 주장도 단념해야 한다. 주님이 가신 길, 곧 고난받는 증인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교회는 오만하게 역사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계속되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궁극적 목표점을 대면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말해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교회는 역사의 여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적인 모델에 의해서 이해해야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의 대행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명의 장소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야기 곧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비어 예수님의 사역과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되풀이하고 재현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모습을 명확히 나타낸다. 


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점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 성장, 선교의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숫자와 어떤 목표의 달성(??)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제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롬 15:23)라고 말했다. 이는 이 지방의 모든 사람을 개종시킨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복음을 전파했고 후에 복음을 믿으면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남겼다. 그들의 중요성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그분의 선교 사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교회와 선교의 일

예수님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위기를 촉발했던 것 같이, 교회의 도래가 세상에 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열방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이 완전히 끝날때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수 없다. 


선교 논리의 중심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 즉 개개의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측량 못할 지혜와 은총의 깊이가 계시될 종말론적 사건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지평선은 우리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있지 않고 그분이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사건 속에 있는 것이다. 


선교의 일은 신앙의 시험대이다.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게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리고 선교의 중심부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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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어거스틴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오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외에 다란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레야 뗄 수 없게끔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분은 그 비밀을 공동체에 전하시고 세상의 삶 가운데 그 비밀을 전하도록 그들을 세상에 다시 보내시고 새로운 화녕이 올 때마다. 항상 그 상황에 비추어서 그 비밀을 다시 전용하고 해속하도록 하신 것이 바로 문제의 요체가 된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속에서 이해하기 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고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보는 방식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체이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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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안에 나타난 계시

- 종교의 두가지 종류

1)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고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종교 : 기독교,유대교, 이슬람교

2) 과거의 스승들을 숭배하나 과거 특정한 사건과 연관성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종교 : 힌두교, 불교


2차세계대전이후 캠브리지대학의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안에서 그리고 역사의 연대기적인 범위와 동시대적인 범위 양쪽 모두에 걸쳐 살아 역사하는 작인"이라고 말했다. 15년후 제임스 바(James Barr)가 '역사와 계시의 개념'이라는 가연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계몽시대 이후로 대부분의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전제는 하나님은 역사의 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동하신다는 주장에 대한 지적인 난관들 

1) 우리가 막연히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의 지배에서 생겨난다. 

2)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역사 가운데 계시하신다고 우리가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하나님을 계시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 두가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신의 섭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믿음안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3)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타당해 보이고 또 아무리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전통이 가지는 사회적 성격

1) 계시란 이전에 몰랐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의 기록 자체도 하나님이 이런 성경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상태로도 알려질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2) 사건과 언어의 구분에 대한 공격, 제임스 바는 우리가 구약에서 계시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언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사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3) 그것은 단지 개인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나에게 책임이 있다. 


역사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연속성

1) 예수님의 지상사역이라는 특수한 사건 속에는 결정적이며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교회에 주신 약속) 

3) 이 선물은 교회의 사적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4) 이 증거는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들과 모순된 형태를 지닐 것이다. 

5)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란 장래일을 알리시는 것이 될 것이다. 

6) 성령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7) 성령의 이런 활동 범위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광범위하다. 


7.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작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주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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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권위, 자율, 전통

계몽 이전이 사회에서는 이단이라 믿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원하는 결정을 내린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기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단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 

자전거를 타는 지식이 당신속에 내면화 되어서 당신의 지식이 일부가 되기까지 당신은 자전거를 타는 전통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와같은 것은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이클 폴래니가 말했듯이 "과학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 : 씨름해야할 문제가 있으며 식별해야 하는 사물의 구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직관,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감줘진 상태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질서 정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직관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개인적 판단으로 인한 위험 감수없이는 적용 가능한 공식적인 규칙으로 정리될 수 없다. 

인턴이 전문의의 가르침을 따르듯이 전통의 권위에 오랫동안 순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아직 미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독창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대연에 서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 이론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따라서 먼저 정당화(justification)는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믿고난 다음에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에 또한 정당화되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 주요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 : 프톨레미적인 패러다임에서 코페르느쿠스적인 패러다임으로, 뉴턴의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의 변화. 

- 과학은 전통에 대한 주의 깊은 보호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전통에 대한 과격한 혁신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과학은 정체될 것이다. 


과학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인간의 배움과 말과 글에 관한 것이다. 기독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 즉 창조주께서 목적으로 계시하시고 성취하시는 행위에 대한 증거다. 


5. 이성, 계시, 경험

성경-전통-이성의 관계

과학에서 전통이 가지는 역할

첫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논거를 할 수 없다. 

둘째, 앞선 선배들의 경험, 발견, 논쟁 그리고 의견의 불일치 같은 것을 조사하면서 논거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운다. 

셋째, 합리성의 전통의 발달은 그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은 불확정성(contingency), 특수성(particularity) 그리고 완전한 우연성(sheer happenness) 같은 모든 요소를 가지고 바로 그 사회속에 유형화되어 있다. 

넷째, 이런 식으로 합리적 능력의 사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상대주의로 귀착된다는 반대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문화속에서 우리에게 진리같이 보이는 진리말고 모든것에 적용되는 진리란 없는 것인가?

첫째, 모든 합리적 담론의 전통은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둘째, 합리성의 전통은 언어로 유형화 된다. 

- 언어를 배울때 현재 자신이 쓰는 언어를 가지고 거기에 맞는 말들을 찾는 식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똑같은 종류의 사물을 의미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이 두가지 언어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두 문화에서 그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들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모든 논거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유형되되기 때문에 진리를 안다는 어떤 주장도 지지될 수 없다고 상대주의자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과학자와 선지자 : 케플러는 "나는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내었다."고 말한 반면 선지자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케플러가 천체의 움직임에서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 것이나 모세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드러나 보여진 것이나 모두 논법의 전통에서 새로운 출발점이다. 

- 마틴 부버의 "나와 너"(I and Thou), 자율적인 이성의 세계로 이성이 주관하고 있으며 나는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세계, 여기서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다. 


믿는 자는 실재가 합리적이라는 믿음, 즉 일관성 있는 목적이 경험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그런 믿음을 의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의 진실정을 증명하려고 투쟁한다. 이런 노력은 항상 합리적인 노력이고, 외견상 불합리한 사건들 속에서 최초의 계시에서 주어진 유형을 통해 합리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계속 진행되는 새로운 경험에 대처해가는 투쟁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형성되고 재충당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경의 모델을 나의 경험을 이해하는 모델로 삼고, 성경의 이야기를 나의 삶의 이야기를 그리는 단서로 삼으면서 성경적 전통 안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러한 타당성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자명한 것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명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에게 자명한 것이 나에게 자명하지 않다. 그러기에 이 두 구조사이의 계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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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


"기독교 이야기(Christian story)는 우리가 어떤 것을 그냥 바라보게 하는(look at)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look through) 안경(set of lenses)을 제공해 주는 것" p.10


1. 다원주의 문화속의 교의와 의문

기독교 세계관을 공격하는 인본주의적 전통 p.16

1. 합리주의적 전통 : 그리스와 스토아 학파의 전거(source)에 의지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만을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인정

2. 영적인 전통 : (유럽과 인도) 인간의 영혼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존재와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

- 이 둘의 공총점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궁극적인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기위해 저술된 책들 가운데 특히 18세기 동안의 특징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가정들을 상당히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이런 가정들 안에 수용될 수 있다고 변호한 것이다. p.19


교의(dogma)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교회사 속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 세계에서는 교의에 서슴지 않고 의문을 가하는 것이 지적인 성숙과 능력을 나타내는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권위적으로 부여되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p.21


다원주의의 원칙은 우리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p.24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 : 특정한 사회 안에서 더 타당하게 간주되는 신념이나 실천이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Peter Berger)


소경과 코끼리 이야기 : 우리는 소경일 뿐이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켜보는 자가 있는가? 


복음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1. 교의를 거부하는 부분적인 원인은 오랫동안 강압이나 정치적 세력 그리고 자유를 부정하는 것과 얽혀져 왔다.

2. 우리는 복음을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 안에서 상황에 맞게 동화시켜 가면서 변론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보다 인간의 경험을 훨씬 더 전체적으로 잘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새로운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것이 모든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4. 우리가 신앙안에서 수용하도록 주어진 것은 일련의 영원한 명제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이며,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종말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2. 다원주의의 근원

-문화적 다원주의 : 한 사회안에 있는 여러 당양한 문화들과 생활방식들을 환영하고 이런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고 믿는 태도이다.(문화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종교적 다원주의 :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믿음에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00년간의 자연과학에서의 엄청난 성공은 목적에 관한 물음은 제쳐두고 발생하는 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가치와 사실의 구분)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하늘 아래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성하는 사실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성실한 태도이다. 


3. 아는 것과 믿는 것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만,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 않다. 

뉴턴이전의 17세기까지만 해도 신학도 천문학이나 역사과목처럼 인간지식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다. 망원경의 발명이후 사람들은 사물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아주 똑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300년의 유럽의 역사가운데 체계적인 회의론이 등장하였고 진리로 생각되던 모든 것은 새롭게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의심할 수 없는 확도한 토대를 찾았고 그 출발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에서 찾았다. 그런데 첫째 이 말 자체에 굉장한 믿음의 행위가 들어 있다. 둘째 이 말을 의심할수 없는 증거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각하는 자아가 외부의 어떤 실재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좀더 철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정확한 단어의 사용)

- 외과의사의 내시경 사용(처음에는 내시경을 의식하지만 이후에 이것의 사용이 능숙해지면 신체내부의 상태에 집중하게 됨, 새로운 언어(상황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용)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단어, 언어, 관념 등)

문화란 함께 사용하는 언어와 공통의 이야기를 통해 가능해지는 모든 형태의 사회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배열하는 전체적인 양식이다. 

사실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세계는 어떤 목적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과 인과성이라는 두가지 요인의 작용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스스로 만들어져서 스스로 존재하는 기계란 인간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아무거나 다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들에게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하기 힘든 생각이 존경받는 과학자들에의해 널리 유포되었고, 아직도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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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을 위한 학술적 글쓰기에서의 표절문제와 인용방법

-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I. 표절의 유형


1. 내용 표절 (아이디어 표절)


원저자의 고유한 생각, 논리, 표현, 자료, 분석틀 모방하고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출처가 부정확한 경우를 말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사안에 부딪히면 판단하기 상당히 까다롭다. 어디까지가 고유한 생각인지가 것이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공식이나 이론이라면 정확히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피카고라스 저서를 찾아서 페이지까지 인용할 필요는 없다. 물론 여기서도 어디까지를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용표절을 할 때 표현까지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표절판정이 쉽다. 지난 몇 년 동안 언론지상에 오르내린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의 표절은 대부분 내용표절과 표현표절이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였다. 최소한의 성의교묘함도 없이 표현과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런 표절은 적발하기도 쉽고 판정하기도 쉽다. 하지만 문제는 표현은 바꿨지만 내용을 베낀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혐의'를 잡을 수는 있지만, '표절'이라고 확실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내용만 베끼면서도 표현이나 구성을 교묘하게 바꾸면 적발하기도 어렵고 판정하기는 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표절 논란은 비교적 쉬운 '게임'이었다. 해당 학문에 문외한이어도, 형광펜만 있으면 두 편의 논문을 비교해 가며 표절을 적발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문제는 교묘하고 성의있는(?) 표절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언론지상을 통한 단죄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학계의 자정노력을 통해 관행이 형성되면서 해결될 문제이다.)



2. 표현 표절 (텍스트 표절)


출처표시 없이 특정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경우나, 출처표시는 했지만 인용부호 없이 다른 저술의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는 경우를 말한다. 간혹 표절 시비가 제기되면, “논문의 핵심 내용이 아닌 부분에서 일부 문장을 베꼈을 뿐이다라고 변명을 하는데, 어림없는 얘기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적절한 인용없이 남의 문장을 줄줄이 베끼면 표절이다. 그 내용이 독창이건 아니건, 핵심내용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교육부의 논문표절 가이드라인 모형”(2008)에서는 여섯 단어가 연속해서 일치한 경우, “서울대학교 연구지침”(2008)에서는 두 문장이 연속해서 일치한 경우에 표절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섯 단어또는 두 문장이 연속해서 일치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남의 글을 베낀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출처표시를 하더라도 인용부호 없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안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려면, 인용부호로 묶거나 왼쪽여백을 줘서 원문임을 분명히 표시하거나, 아니면 표현을 완전히 바꿔줘야 한다. 전자를 직접 인용’, 후자를 간접 인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래에서 다시 설명한다



3. 자기표절 (중복게재, 이중게재)


본인이 저술한 출판물의 전체 또는 일부를 재활용하여 저술한 경우를 말한다. 내가 쓴 글을 다른 곳에 또 활용하는 것에 문제를 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출판사의 출판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맺으면 출판사가 보통 3년의 계약기간 동안 출판권을 갖게 되는데, 이 기간 중에 그 책의 저자가 책 내용의 일부를 다른 곳에서 출판하면 당연히 출판권을 침해하게 된다. 둘째, 업적이 중복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가 대학에서 업적 평가를 받을 때 동일한 논문을 이곳저곳에 발표하여 중복하여 업적을 인정받아서는 안된다. 셋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편집자(출판사, 저널, 신문 등)는 기고문이 처음 발표되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청탁을 한다. 그런데 만약 기고한 글이 이전에 다른 곳에서 발표가 되었던 글이라면, 편집자의 신뢰를 훼손하는 것이 된다. 만약 처음 발표되는 글이 아니라면 편집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상의해야 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위의 경우가 아니라면, 일단 자기 글을 재활용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다만 과거의 자신의 글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본인이 쓴 학술지 논문이나 신문 칼럼을 모아서 단행본으로 재출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관례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저작권 관념이 엄격한 미국에서는 이 경우에도 해당 학술지 편집장이나 해당 신문에 양해를 얻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미국 출판물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양해를 구했음을 책에 표시하는 경우를 여러번 보았으나, 유럽출판물이나 한국출판물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정보제공 차원에서라도 원출처는 적어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4. 기타 표절 문제


재인용 표절

원저자가 인용한 출처(2차 출처)를 인용하면서 2차 출처를 밝히지 않고, 1차출처만 제시한 경우를 말한다. 그러니까, 재인용은 말 그대로 남이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는 것이다. 이 때는 원저 출처와 재인용한 출처를 모두 명시해줘야 한다.


과도한 분량의 인용

출처를 인용하긴 했지만, 너무 많은 분량을 그대로 옮겨와서는 안된다. 옮겨온 분량이 지나치게 많을 경우에는 출처표시를 하고 인용부호까지 달았어도 문제가 된다는 얘기다. 너무 많이 옮겨올 경우 (출처표시를 했더라도) 남의 글이지 자기 글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타인의 논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오면서 추임새만 넣은 논문이 있다면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나침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확고한 관례는 없지만, 대략 한 단락 이상을 연속해서 그대로 옮겨올 때는 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만약 이보다 많은 분량을 옮겨오고 싶다면, 원저자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짧은 글이라도 글 전체(: 칼럼 한 편)을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에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이 때 양해는 원저자와 원출판사(신문사)에 구해야 하고, 연락은 출판사가 해도 되고 저자가 직접 해도 무방하다. 이 때 그 양해의 내용은 명확해야 한다. 정확히 어느 부분을, 어떤 맥락에 옮겨다 놓는지, 그리고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지 아니면 일부 수정할 것인지 등등을 명확히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5. 학술논문 이외의 경우


학술논문 이외의 경우라고 해서 원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글의 성격에 따라서 조금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 칼럼이라면, 인용한 출처의 페이지는 생략하고 저자의 이름만 괄호 안에 넣고 인용해도 큰 문제는 없다. 칼럼 분량에서 정식인용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트위터 등 SNS도 언론칼럼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문칼럼이건 트위터건,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길 때는 꼭 인용부호표시를 해서 내 표현이 아님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용부호(따옴표) 안에 들어간 타인의 말을 함부로 수정하면 안된다. 트위터에서는 RT 등 트위터에서 약속된 표시도 정확히 지켜줘야 한다. 반면 블로그의 경우에는 학술논문과 달리 생각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분량도 충분하고 편집상의 문제도 없기 때문에 원칙대로 인용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인용을 하더라도 저자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맥락으로 인용을 하면 곤란하다. 글이 놓여 있는 맥락이 달라지만, 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서 지인들끼리 댓글로 주고받은 사적인 대화는 비록 그것이 공개된 상태라고 해도 신문기사화하는 것은 안된다고 본다. 굳이 하고 싶다면 양해를 구하는게 맞다. 트위터의 경우는 사적인 성격도 있고 공적인 성격도 있어 조금 애매하지만, 트윗글을 기사화할 때는 원칙적으로 저자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리고 그 트윗글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서 인용하는게 좋을 것이다.



II. 표절/인용 예제


표절과 인용 문제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다음의 원문을 놓고 어떻게 인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문)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구조적 참사는 물론이고, 대구지하철방화사건이나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기도 하다.”

-> 출처: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77

 

사례1: 간접인용

인용)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처벌로 해결하려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1)


-------------------------

1)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77쪽 참조


원문과 표현은 다르지만, 자기 생각이 아니니까 위와 같이 인용을 해야 한다. 이걸 간접인용이라고 한다. 내용은 같지만 표현은 다른 경우다. 표현이 다르니 인용부호는 안달아도 되지만, 출처표시까지 빠지면 표절이 된다. (*인용방식은 다양하지만, 아래에서는 각주를 다는 방식으로 해보았다.)



사례2: 문장 중 직접인용



인용)

구조적 참사가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라는 지적에 주목해 봐야 한다.1)


--------------------------

1)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77쪽 참조.

 

이 부분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원문(홍성수의 글)에서 착안한 것이기 때문에 인용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라는 부분은 표현이 원문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게 내용뿐만 아니라 표현까지 옮겨오는 경우에는 원문의 표현을 인용부호(큰따옴표)를 달아 정확히 표시해 줘야 한다. 자기 표현이 아니라 원저자의 표현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다. 그게 싫으면 아예 다른 표현으로 사례1)에서처럼 아예 다른 표현을 쓰어야 한다. 올바른 인용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인용)

구조적 참사가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 홍성수는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라고 말한다.1)

---------------------------

1)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77.


이렇게 인용표시를 해야, 원저자의 내용을 옮겨왔을 뿐만 아니라, 일부표현은 아예 그대로 가져왔음을 분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



사례3: 문장 중 직접인용


사례2에서처럼 인용표시 없이 함부로 원문 표현을 그대로 옮겨오면 안되지만, 중요하지 않은 단어 몇 개 정도는 괜찮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과도하면 안된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표절 가이드라인에서는 6단어 또는 2문장이 연속해서 일치하면 표절이라고 본다. 설사 독창적인 문장이 아니더라도, 연속해서 일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걸 거꾸로 얘기하면 6단어/2문장 이하는 괜찮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6단어/2문장 이하라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

 

원문)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형태입니다.

- 출처: 신영복,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2007, 174


인용)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역시 입장의 동일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1)


------------------------

1) 신영복,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2007, 174.

 

이렇게 인용해줘야 한다. “입장의 동일함은 단 두 단어지만 원저의 맥락상 사태의 핵심을 꿰뚫는 핵심어이다. 따라서 따옴표로 표시하여 나의 표현이 아니라 원저자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용표시를 안했다면 당연히 표절이고, 인용표시는 했더라도 인용부호가 생략되었다면 표절이 된다는 얘기다. 즉, 아무리 독창적이지 않은 표현이라고 해도 6단어 이상 연속해서 일치하면 표절이 될 수 있고, 2단어라고 해도 독창적이고 중요한 표현이면 표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례4: 직접인용

인용)

흔히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 대형참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책임자 처벌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홍성수는 체계이론에 기반해서 이렇게 말한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구조적 참사는 물론이고, 대구지하철방화사건이나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그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기도 하다.”1)

 

특히 구조적인 참사 뿐만 아니라, 살인사건 같이 개인범죄 같이 보이는 범죄에도 특정 개인의 문제로 지적하지 않는 이유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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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77. ‘특정 개인는 필자가 강조한 것이다.

 

아예 문장을 그대로 옮겨올 때는 이렇게 단락을 바꿔서 인용하는 것이 좋다. 따옴표 표시를 해야 하고, 따옴표 안에 들어간 원문의 문장은 조사, 문장부호, 강조표시 그 어느 것도 함부로 바꾸거나 생략해서는 안된다. 중간에 생략한 경우에는 중략이라고 하거나 말줄임표 ()로 표시해야 한다. 원문에 없는 문장부호(감탄사 등)를 임의로 넣는다거나, 굵은 글씨로 강조표시를 해도 안된다. 수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무엇을 어떻게 수정했는지를 표시하고, 원저자가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정했다는 점을 표시해줘야 한다.


 

사례5: 재인용


 

원문)

, 루만의 사회이론의 대상인 사회적 체계는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작동적, 폐쇄적 사회체계이다.1)

---------------------------

1)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Suhrkamp, 1997, 205.

 

출처: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54

 

이 부분을 인용을 하고 싶은데, Luhmann의 저서를 찾아서 확인하지 못했고, 홍성수의 논문만 보고 인용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표시한다.

 

인용)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작동적, 폐쇄적 사회체계라고 설명한다.1)


--------------------------

1)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Suhrkamp, 1997, 205-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010, 254쪽에서 재인용.

 

재인용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가능하면 재인용된 문헌을 직접 보고 그걸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위에서 Luhmann의 저서를 찾아서 읽어보고 독일어원문을 직접 번역해서 인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원출처를 확인해 보긴 했지만, 번역표현이 홍성수의 번역을 참조해서 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인용)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소통에 기반을 두고 작동하는 폐쇄적 사회체계라고 설명한다.1)

----------------------------

1)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Frankfurt: Suhrkamp, 1997, 205; 번역표현은 홍성수, “인간이 없는 인권이론? 루만의 체계이론과 인권”, 법철학연구, 13권 제3, 254쪽을 참고하여 약간 수정했다.

 

다만, 일치하는 번역표현이 너무 뻔한 경우에는, 굳이 번역할 때 참고한 문헌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참고: 학위논문 일부의 재출간 문제


마지막으로, 학위논문을 재출간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하거나, 두 편이나 세 편까지는 무방하다는 식의 기계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경우도 일부 있는데, 개인적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한국에서(그리고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학위논문은 기본적으로 '미간행논문'(unpublished dissertations)이다. 즉 '출판물'(publications)이 아니라는 얘기다. '출판'이라는 뜻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된다는 뜻인데, 학위논문은 대개 본인과 지도교수가 한 부씩 나눠 갖고, 그 대학의 도서관에 한 부 비치되는 것이 원칙이다. 출판된 것이 아니니,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몇 차례 재활용하건 간에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학술대회 발표문도 (예외적으로 학술대회 proceedings이 그대로 publications인 경우가 이공계쪽에서 있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출판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학술대회 발표장에 가서야 '학술대회 자료집'(proceedings)으로 받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학술대회 발표문을 저널에 다시 싣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학위논문이 데이터베이스화되어서 공개되거나 학술대회 자료집 원문 파일이 홈페이지에 탑재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것을 출판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필자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는 대학원생 논문쓰기워크숍에서는 박사논문을 쪼개서 여러 편으로 출판하는 방법에 대한 노하우에 대한 강의를 들어본 적도 있다. 각 논문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자기완결성을 갖는 한, 몇 편으로 쪼개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업적평가나 임용심사 시에 학위논문학위논문을 활용해 출판된 논문을 중복해서 업적으로 인정해줄 것인가는 별개 문제다. 당연히 어느 한 쪽을 제외하는 것이 맞다.


참고: 자기표절의 문제


자기표절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다. 출판권을 침해하거나 업적 부풀리기를 하면 안되겠지만, 본인의 생각을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외국저널에 실린 영어논문을 한국어저널에 한국논문으로 다시 내면 자기표절이라고들 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양쪽 저널 편집자의 양해만 구한다면 얼마든지 중복게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의 석학들이 이렇게 독일어, 영어로 영국-독일 저널에 각각 동시에 게재하는 사례는 꽤 많다. 독자층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법사회학연구'에 '베버의 근대법'이라고 쓴 A의 논문이 있는데, '사회학연구'라는 저널의 편집자가 '근대법과 사회학' 특집호를 내면서, 그 논문을 게재하길 원할 수가 있다. 법사회학연구와 사회학연구의 독자층이 다르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고, 베버에 관련된 논문이 꼭 들어가야 균형이 맞는 상황인데, A 이외에는 다른 저자를 구하기 어렵고, A는 그 주제로 새로운 논문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면, '법사회학연구'에 실렸던 논문을 '사회학연구'에 재게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단, 양쪽 저널의 편집자가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양해해야 하며, '사회학연구'의 논문에 이전에 발표되어던 논문이라는 사실이 표시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 첨부하는 고려대 지침에는 경우에 따라 이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물론 어느 경우에나 업적이 중복계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로, 서울대학교 연구지침”(2008, 2010) 중 '중복게재'에 관한 부분을 소개한다. 대체로 적절하게 규정되었다고 본다.


제9조 (중복게재ㆍ출간의 제한)

① 연구자는 이미 게재ㆍ출간된 자신의 논문이나 저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확한 출처표시 및 인용표시 없이 동일 언어 또는 다른 언어로 중복하여 게재ㆍ출간하여서는 아니 된다. 연구 데이터나 문장이 일부 다르더라도 전체적으로 동일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또한 같다.

② 제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게재ㆍ출간을 할 수 있다. 다만, 제1호부터 제6호까지의 경우에는 정확한 출처표시 또는 인용표시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전공 분야의 특성과 해당 학계의 의견을 고려하여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

1. 학위논문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별개의 논문 또는 저서로 게재ㆍ출간하는 경우

2. 연구용역 보고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논문 또는 저서로 게재ㆍ출간하는 경우

3. 이미 게재된 논문들을 모아 저서로 출간하는 경우

4. 동일한 논문이나 저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동일 또는 다른 언어로 게재ㆍ출간하면서 해당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은 경우

5. 학술지에 짧은 서간논문(letter, brief communication 등)을 게재한 후 이를 긴 논문으로 바꾸어 게재ㆍ출간하거나, 연구 데이터, 해석 또는 자세한 연구수행과정의 정보 등을 추가하여 게재ㆍ출간하는 경우

6. 이미 게재ㆍ출간된 논문 및 저서의 전부 또는 일부가 저자의 승인 하에 다른 편저자에 의해 선택, 편집되어 선집(anthology)의 형태로 출간되거나, 학술지의 특집호에 게재되는 경우

7. 이미 게재ㆍ출간된 논문 또는 저서의 내용 전부 또는 일부를 교양서, 대중잡지 등 비학술용(非學術用) 출판물에 쉽게 풀어 써서 게재ㆍ출간하는 경우

8. 그 밖에 위 각 호에 준하는 게재ㆍ출간으로서 학문적 진실성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경우

③ 이미 발표된 연구결과를 지식재산권으로 등록하는 것은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과 관계없이 허용된다.

고려대학교 교원연구윤리지침”(2007)에서는 학술지 중복게재 절차를 규정해 놓고 있다는 점이 참고할 만 하다.

 

 

312항 이미 출간된 논문을 인지할 수 없는 다른 독자군을 위하여 중복게재를 하는 경우에는 두 학술지의 편집인이 중복게재에 대해 동의해야 하고, 저자는 학술지의 독자들에게 동일 논문이 다른 학술지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한 언어로 출간된 논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다른 학술지에 출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얘기는 논문을 통째로 중복게재하는 경우였다. 그렇다면 이미 출간된 자신의 논문의 '일부'를 자신의 다른 논문에서 '재활용'하는 경우는 어떨까? 먼저 타인의 논문의 일부를 자신의 논문에 인용없이 활용했다면, 그것은 타인의 생각을 훔친 것이므로 문제의 소지가 간단하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자기가 훔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자기표절'이라는 말 자체는 언어도단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 논문 일부의) '재활용'이라는 말이 이 문제를 더 직관적으로 표현해준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의 생각을 훔쳤다'는 일반적인 '표절'문제가 아니라 '저작권침해'다. 법적으로, 자신이 투고한 논문의 저작권이 학술지에 이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법적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른바 '논문 저작권 이양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다.) 즉, 자신의 논문이라도 저작권은 학술지가 소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논문의 일부를 자기가 다른 논문에 재활용했다면 그 학술지의 저작권을 침해한 셈이 된다.


하지만, 논문 일부의 '재활용'을 '타인의 논문을 베낀 경우만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타인의 논문은 단 몇 글자라도 무단으로 인용하면 안되겠지만, 자신의 글에는 그런 기준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단 '연속 6글자'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남의 생각을 '도둑질'하지 않고서는 연속해서 6글자가 동일한 '우연'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전제인데, 자기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우연'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학자의 논문은 '연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즉, 논문A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서 또 다른 새로운 논문B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부 내용의 중복이 불가피하다. 또한 해당 학술지의 저작권의 문제를 따져봐도 그렇다. A학술지의 글이 B학술지에 그대로 게재된다면 당연히 저작권 침해가 문제가 되겠지만, 같은 저자가 일부 표현이나 문장을 다른 B학술지의 논문에서 재활용했다고 해서, A학술지의 저작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가 저작권 전문가가 아니어서 권위있는 얘기를 하긴 어렵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저작권 침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작권 침해가 아니더라도, 이미 출판된 자신의 글을 재활용할 경우 정확한 출처를 표시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정보 제공 차원에서)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글 인용이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일부 표현의 재활용을 문제 삼는 것은 연구자의 학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판단할 부분은 '새로운 논문'임이 명백한지의 여부일 뿐이라고 본다.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논문을 쓴게 맞다면, 일정한 수준의 자기논문 재활용은 (인용이 없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챕터 하나를 그대로 재활용하는 정도라면, 정보제공 차원에서 자기 글을 명확히 인용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정도가 되면 이전 논문 학술지의 저작권 침해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질적으로 새로운 논문이라는 전제 하에)


1) 한 두 문장 정도 자신의 논문을 재활용하는 것은 인용이 없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2) 단, 재활용한 분량이 한 챕터를 넘는다면 인용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에 대하여 서울대 연구윤리지침(2008, 2010)은 아예, "한 단락 또는 5개 이상의 문장을 연속적으로 재사용하는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장단점이 있겠지만, 참고가 될 만한 기준이다.


제8조 (자신의 연구성과 사용)

① 연구자는 연구문헌을 작성함에 있어 원칙적으로 자신의 연구 아이디어, 연구데이터 및 문장을 사용하여야 하고, 이전에 발표한 적이 없는 연구 결과물을 담아야 한다.

② 연구자는 연구문헌을 작성함에 있어 당해 연구의 독자성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미 게재ㆍ출간된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부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연구데이터는 정확한 출처 표시와 함께 사용하여야 하며, 당해 연구에서 처음 발표하는 것처럼 제시해서는 아니 된다. 과거에 작성한 논문에서 최소한 한 단락 이상, 또는 5개 이상의 문장을 연속적으로 재사용하는 경우에는 정확한 출처와 인용 표시를 하여야 한다.

③ 연구자는 이미 발표된 자신의 연구성과가 이미 교과서 또는 공개적으로 출간된 데이터 파일에 게재되어 일반적 지식으로 통용되는 경우에는 그 연구성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출처표시 및 인용표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점은 표절 문제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인재 교수 ["연구부정행위로서 표절과 올바른 글쓰기", 물리학과 첨단기술, 2008년 4월]의 견해와 필자의 생각이 미묘하게 다르다. 이 교수는 자기표절이 "기만에 속하며 연구의 어느 수준에서나 용인될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나, 필자는 "경우에 따라 용인될 수 있으며, 타인표절의 경우를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정리하고 싶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이며 학계에서 좀 더 활발한 공론이 형성되었으면 한다.



표절/인용에 대한 참고 사이트: 기타 표절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연구윤리정보센터에 가보면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http://www.cr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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