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성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8장.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어느 힌두교도의 불평 "내가 성경을 읽어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역사를 쓴다거나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p.176)
-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을 기록할 수 없기에 거기에는 선택 행위가 개입된다. 여기서 선택이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고르는 작업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는 그 사람이 그 이야기의 핵심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거스틴 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역사에 무슨 지향점이 없다면, 나의 행동도 지향점이 없게 된다. 그 이야기가 무의미하다면 나의 모든 행동도 무의미할 뿐이다. 이래에 대한 비전의 상실은 사회학자들이 아노미(anomie)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공적으로 용인되는 규범과 가치관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지향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의 저자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줄 경우다. 이는 계시를 의미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계시 대신에 이성을 대안으로 내세운다면, 이는 사고의 혼란으로 인한 잘못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이성이란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모든 사실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을 가리킨다면, 인류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전혀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우주의 역사가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귀납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수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성경은 바로 그 비밀을 위탁받은 자들이 그 전달자로서, 그 일꾼으로서, 그 증인으로서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어떤 함의가 있는가?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압적인 증거는 없다. 그런데 있다면 계시가 불필요할 것이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 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종교사의 방식과 신앙고백의 방식의 차이는, 전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를 반영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의문시 한다는데 있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한 공동체에게 전달하여 그 공동체가 비밀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그에 비추어 그것을 다시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 속에서 이해하기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성을 성경과 전통과 나란히 놓거나, 그것들을 보완하는 권위로 들먹인다는 것은 예수가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기존의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예수의 성육신, 사역, 죽음, 부활)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 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 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구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는 바깥에 서서 그것을 검토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내주하면서 거기서부터 저 밖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의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시각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그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나의 이야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응답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의 이야기가 속한 그 포괄적인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응답될 수 있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 하나님이 그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서 내가 부분적으로밖에 모르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나를 택해서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비밀을 온 세상과 나누라고 이 믿음의 공동체 일원이 되도록 부르신 부름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소망(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 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