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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5(2013-9-1)

 

우리는 종종 어떤 일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말은 대부분 그 일이 나의 우선순위가 아니라서 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은밀한 세계관 중에서)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는 어떤 의미에서 그 일이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사실을 완곡히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바로 삶의 우선순위, 방향을 정하는데 중요한 문제이기에 바른 세계관을 견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의 시간을 보내며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첫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의 여름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여름의 4개월을 누리기 위해서 나머지 8개월을 버틴다고 하던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해서 햇볕에 나가면 아주 덥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습하지 않은 날씨 탓에 아주 시원하답니다. 또한 해가 거의 저녁 9시가 넘어서 지기 때문에 저녁시간이 아주 여유롭습니다.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만 저녁식사 후에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여름 방학기간에는 수, , 토 이렇게 주 3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시간을 통해서 노동의 의미와 이런 피곤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각자 생업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시는 여러 후원자분들의 수고와 섬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느끼게 되고 이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많이 모이지는 못했지만 몇몇 학우들과 Book study를 했습니다. 매주 한번 정도 모여서 몇 권의 책(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1세기 평신도 신학)을 함께 읽었습니다. 역시 혼자 읽을 때보다 함께 나눌 때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사를 하고 나서 10여 가정 정도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것보다 가정이 함께 만나서 교제할 때 서로를 좀 더 깊이 알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아내의 음식 솜씨도 더욱 좋아져서 이제는 배추김치, 깍두기, 깻잎김치도 직접 담그게 되었답니다. 한결이와 한솔이도 손님을 초대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놀 수 있고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8/4-5일에는 langley에 있는 갈멜산 기도원으로 칠리왁 기쁨의 교회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주일학교는 성경학교를 진행했는데 이 시간에 다윗 왕과 느헤미야에 대한 설교를 아이들과 나누었습니다. 장년들은 DiSC(행동유형검사) 검사를 했습니다. 4가지 행동 유형을 나누어서 웍샵을 간단하게 진행했는데 서로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8/12-13일에는 지난 수련회 때 주일학교 성경학교 교사로 섬겨서 수고한 중고등부 학생들과 12일 엠티를 Agassiz에 있는 Pathfinder RV Park로 다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섬겨주셔서 학생들과 풍성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VIEW에서는 8/12일 철학특강(칸트와 철학사 개략)을 진행했고, 8/24일에는 제1VIEW &Jubilee 연합 Garage Sale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Garage sale 행사는 지역신문에도 광고를 했는데 예상외로 현지인들도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은 물건들을 기증해주셨고, 여러 원우들이 자원해서 섬겨주셔서 풍성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휘슬러와 콜롬비아 계곡

이곳의 여름이 날씨가 너무 좋아서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거의 방학 막바지에 정말 좋은 곳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휘슬러는 지난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치른 곳이라고 하는데 곤돌라와 케이블카를 타고 peak to peak 코스를 다녀왔습니다. WhistlerBlackcomb산 정상을 케이블카로 연결해 놓았는데 이곳을 전체 돌아보는데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산 정상은 한 여름인데도 눈이 덮여있고 바람이 심해 너무 위험해서 한솔이는 못 올라가고 한결이와 저만 다녀왔습니다. 캐나다의 높은 산과 넓은 땅을 보면서 이곳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곳이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8/19-20에는 VIEW 원우들 11가정이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콜롬비아 계곡을 다녀왔습니다. 창조론 Field Trip라는 이름으로 42(어른 21, 아이들 21)이 참석했습니다. 이곳은 창조의 명백한 증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여러 지질학적인 증거들이 있는 곳입니다. 세계 최대의 현무암 주상절리, Dry Falls, 엄청난 표석(漂石, boulder)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곳 콜롬비아 강 주변의 현무암 계곡은 엄청난 양의 빙하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깎아낸 지형으로 격변을 통해 지구가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랍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협곡을 막아서 만든 Grand Coulee 댐과 독일인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몇가지 변화들

이제 내일 화요일(9/3)에 한결이가 처음 Kindergarten에 입학합니다. 할 줄 아는 영어는 Hi, Bye, How are you?, What are you doing now?, Thank you, You’re welcome이 전부라 여러 가지로 걱정이 앞서지만 잘 적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학교에는 한국인들이 거의 없다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저는 지난 주부터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Conference관련된 일인데 학교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행사 setting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간이 되는 학생들이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재정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고 교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9월부터 교회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고 나서 교회사역을 위해서 여러 가지 고민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쥬빌리 채플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는데 이것을 함께 돕기로 했습니다. 급하게 옮기게 되어서 여러 가지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잘 정리되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감사의 제목들

이번 가을학기에 등록금이 의료보험을 포함해서 6,200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학교에서 2개의 장학금(Jireh Bursary 1,000, Elizabeth Liberg Memorial Scholarship 600)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저에게는 귀한 기도의 응답이었답니다.

지난 몇 달간 양승훈 교수님의 책 3(창조와 홍수-창세기 강해 / 고난, 부흥의 묘약-베드로전서 강해 / 창조와 격변)을 아내와 함께 교정보았습니다. 그냥 읽는 것보다 교정을 봐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책을 읽게 되어서 더욱 책임감 있게 보았고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제목

1. 교회 사역지를 옮기게 되는데 잘 정리되도록(칠리왁 기쁨의 교회-쥬빌리 채플), 유학생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2. 치아 치료를 위해서(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3. 학교 임원(GSA 대의원, VIEW 총무)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4. 한결이가 Kindergarten에 가는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9/3)

5. 가족의 건강과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201391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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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는 인간의 행동유형(성격)을 구성하는 핵심 4개요소인

Dominance, Influence, Steadiness, Conscientiousness 의 약자입니다.

1928년 미국 콜롬비아대학 심리학교수인 William 박사는

인간은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한 그 환경 속에서

자기 개인의 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4가지 형태로 인간을 분류하고

이러한 인식을 축으로 한 인간의 행동을

각각 주도형, 사교형, 안정형, 신중형, DISC 행동유형으로 규정했습니다.







개인스타일조사표(disc).xls


첨부파일을 다운받아 disc 약식검사를 진행해보세요^-^


검사방법

스타일조사표를 보고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을

점수결과 집계표에 체크합니다.

점수결과 집계표 상단에 DISC 순서대로 쓴 후

세로의 합을 더하면 됩니다.


DiSC(행동유형) 검사.pptx


발표자료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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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속사회의 신화

신화란 거짓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그 정의는 "어떤 사회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입증되지 않은 집단적 믿음"이다.

막스 베버는 사회에서 합리화, 산업화, 관료화의 삼중적 과정이 진행될수록 초자연적, 마법적, 초월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세속화 과정은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소멸을 서서히 초래할 것이라는 것, 세속화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 어느 사회든 합리화, 산업화, 도시화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신화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세속화는 종교 이후의 시대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을 부채질해서 내세 중심의 종교조직을 계속 재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로드니 스타크)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

1) 고등교육에의 노출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신봉이 서로 반비례한다. 이것은 애초에 학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이들이 비종교인들이기 때문이지 학문활 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더 비종교적이 된 것은 아니다.

 

2) 학문 생활과 비종교의 상관성은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의 경우가 훨씬 더 높다.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경계 설정의 문제이다.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수록 더욱 경계 설정이 어려워진다.

 

세속 사회의 이념(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세속사회의 특징)

1) 그 사회는 우주와 인간의 위치에 관한 어떤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사실상 다원적인 사회일 뿐더러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르는 사회다.

3) 따라서 아주 관용적일 것이나, 단 사회적으로 용인된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만은 관용할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4) 하지만 시민들이 다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회여야 한다.

5) 세속 사회는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6) 세속 사회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이미지, 이상적인 유형이나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세속 사회의 이념에 대한 비판

1) 먼비가 묘사하는 세속사회는 아주 특정한 사회관을 고집하고 있다.(하나님을 부정)

2) 세속 사회가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른다.

3) 세속사회는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4) 세속 사회는 재판관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적보다 더 존엄한 어떤 것을 대표한다는 건방진 소리를 일축해 버리는 사회

5) 사회가 사실을 확인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행할 수 있도록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

6) 세속 사회는 본받을 만한 공식적인 이미지나 모델이 없는 사회

 

세속 사회는 신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속사회의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그것이 거짓 신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 여호와와 발람간의 화친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나, 그 신화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권세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 제자도의 모델은 이미 예수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주어졌다. 그분의 사역은 개개인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값비싼 제자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이 세상의 통차자인 정사와 권세들에게 도전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십자가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교회는 그 동안 많은 국가와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교회는 그 주인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 시작한 그 일을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수행하는 운동이다. 교회는 지옥의 권세조차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교회는 유일무이한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치 않는 모든 권세와 이데올로기, 신화와 가정, 온갖 세계관에 도전장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갈등과 어려움과 배척당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보다 앞서 예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과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18. 복음의 해석자로서의 회중

복음이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의 한 구성 요소 정도로 편입될 수 없다. 교회의 역할도 소위 개인구원에 국한시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3세기의 교회는 종교를 개인 구원의 길로만 한정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대의 공적 교리를 거짓이라고 도전했고 그에 따른 값으로 순교를 당했다.

이후 지배 권력이 교회로 들어오며 천년에 걸쳐 유럽에 기독교 문명을 수립했다. 동시에 세속적 권력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강요하는 치명적 시험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내부 분열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기독교 세계는 와해되고 17-18세기에 걸쳐 유럽은 새로운 과학의 성취와 세속사회의 이념으로 고무되었다.

눈을 열어 십자가에 무력하게 못박힌 자가 궁극적인 권력의 원천임을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구원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고 놀라운 하나님의 실재, 곧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분의 통치가 밝히 드러나고, 그분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바로 그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열방의 회심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의 종의 역할

그분은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필요에 즉시 반응하기도 하셨지만 통치권을 손에서 놓으신 적은 없었다. 스스로 행동과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정하셨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셨다.(오병이어 사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시면서도 풍성한 생명을 얻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완전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신다.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에 관해서는 잘못된 사상을 용납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면 부드러운 자비와 준엄한 통치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까?

 

회중 중심의 교회 회복

어떻게 해야 복음이 믿을 만한 메시지로 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나의 주장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할 경우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게끔 되어 있다. 교회의 특성은 그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자기 소명에 충실할 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세상을 이해하고 또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렌즈, 곧 이해의 틀을 복음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명에 충실한 공동체가 지니는 특징

1) 찬양의 공동체일 것이다.

- 근대적 관점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주된 특징은 회의와 의심이다. 근대의 탈마법화(각성)의 양상으로 자기보다 더 위대하고 나은 인물을 흠모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태도는 소위 '성숙한' 사람, 평등을 인간 존엄성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자신의 참 자유, 참 존엄성, 참 평등을 발견하는 곳이다.

- 교회의 찬양에는 감사도 포함된다. 우리가 자선 대신에 공평한 대접을 받았더라면 지금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라고 다함께 고백한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도덕 운동의 소산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 흘러넘친 결과라는 점이다.

 

2) 진리의 공동체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행위는 '타당성 구조'안에서 일어나고 그 구조에 따라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은 것이 좌우된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도전하는 일은 다른 구조에 완전히 몸담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의 회중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참 이야기를 계속 기억하고 재연함으로써 건전한 회의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로서, 이런 회의는 교인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되 세속적 신념에 사로잡히고 미혹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예수의 제자다운 소박함, 침착성, 현실성)

 

3)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보살피는데 깊이 관여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지역성을 가진 교회이지, 교인이 되고 싶다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이다.

지역교회야 말로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다.

 

4)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지원해 주는 공동체일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 앞에 서는 것이다. 교회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등 예수께서 하신 일을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수행하도록 세상에 보냄 받은 공동체다.

공식적인 성명과 개인적인 헌신사이에는 호혜적인 관계가 있다.

- 교회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고 지원하고 양육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각 지체마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고, 각각 다른 섬김의 장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5)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일 것이다.

서구문화의 질병의 뿌리인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신실하고 책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6) 소망의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가 정말 복음의 이야기에 '내주하고' 있을 때에만, 즉 우리가 이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타당성 구조'로 받아들인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참여할 때에만, 우리는 뜨거운 소망을 품고 한결같이 확신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몸담고 있는 '타당성 구조'는 이런 기독교적 소망을 부정하는 것 같다.

지역교회에서 새 창조의 실체가 나타나고 알려지고 경험되며, 거기로부터 남자와 여자들이 공적 영역 구석구석까지 나아가 그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되찾고, 그동안 숨겨져 있던 환상을 벗겨 버리고 모든 영역을 복음의 빛으로 환히 들춰 내는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으려면 먼저 교회가 자기만 챙기는 교회 중심적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그 존재 목적이 교인이 아닌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고속의 은혜를 보여주는 표지, 도구, 맛보기가 되는 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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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성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8.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어느 힌두교도의 불평 "내가 성경을 읽어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역사를 쓴다거나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p.176)

-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을 기록할 수 없기에 거기에는 선택 행위가 개입된다. 여기서 선택이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고르는 작업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는 그 사람이 그 이야기의 핵심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거스틴 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역사에 무슨 지향점이 없다면, 나의 행동도 지향점이 없게 된다. 그 이야기가 무의미하다면 나의 모든 행동도 무의미할 뿐이다. 이래에 대한 비전의 상실은 사회학자들이 아노미(anomie)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공적으로 용인되는 규범과 가치관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지향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의 저자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줄 경우다. 이는 계시를 의미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계시 대신에 이성을 대안으로 내세운다면, 이는 사고의 혼란으로 인한 잘못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이성이란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모든 사실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을 가리킨다면, 인류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전혀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우주의 역사가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귀납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수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성경은 바로 그 비밀을 위탁받은 자들이 그 전달자로서, 그 일꾼으로서, 그 증인으로서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어떤 함의가 있는가?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압적인 증거는 없다. 그런데 있다면 계시가 불필요할 것이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 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종교사의 방식과 신앙고백의 방식의 차이는, 전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를 반영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의문시 한다는데 있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한 공동체에게 전달하여 그 공동체가 비밀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그에 비추어 그것을 다시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 속에서 이해하기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성을 성경과 전통과 나란히 놓거나, 그것들을 보완하는 권위로 들먹인다는 것은 예수가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기존의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예수의 성육신, 사역, 죽음, 부활)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 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 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구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는 바깥에 서서 그것을 검토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내주하면서 거기서부터 저 밖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의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시각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그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나의 이야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응답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의 이야기가 속한 그 포괄적인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응답될 수 있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 하나님이 그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서 내가 부분적으로밖에 모르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나를 택해서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비밀을 온 세상과 나누라고 이 믿음의 공동체 일원이 되도록 부르신 부름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소망(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 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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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논문은 자료를 수집하고, 비판적 사고로 평가하여,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써야 한다. 


연구 논문의 다섯단계

1단계 : 제목 선정

2단계 : 자료 수집

3단계 : 자료 평가

4단계 : 내용 조직

5단계 : 논문 기술


논문 개요

1) 해당분야의 지금까지 연구 소개

2) 논문의 목적(문제 제기와 중요성)

3) 주제의 범위

4) 가상 논지 또는 예상되는 연구성과

5) 연구 방법

6) 기본 자료의 소개

7) 참고 서적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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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방법


책이나 논문을 비평할때 크게 4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1)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2) 그것을 어떻게 증명했는가?

3) 그 과정이 올바른가?

4) 그 결과 이 분야에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공헌했는가?


비평은 세가지 과정을 가진다. 즉 해석, 분석, 비판이 그것이다. 해석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여 위의 4가지 질문중 첫번째에 답하는 것이다. 분석은 그 책의 저자가 논지를 증명하려고 취한 기술적 방법 즉 두번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은 작품을 평가해서 그 작품의 목적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씌어졌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세번째와 네번째 질문에 대답을 준다. 


서평을 위한 질문들

1) 어떤 관심, 입장, 편견등이 저자의 분석에 영향을 주었나? 어떤 입장에서 이것들이 출발했나?

2) 이 작품의 주요논지가 무엇인가?

3) 어떤 특별한 장점을 이 논지가 소유했는가? 이 논지로 인해서 어떤 질문들이 일어나는가?

4) 이 논지가 옳다고 생각되는가? 그 논지를 위해서 어떤 증거를 사용했는가?

5) 이 작품이 해당 주제에 관해서 학문적인 이해를 돕는데 어떤 공헌을 했는가?

6) 주제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소홀히 되거나 불명료하거나 잘못 다루어지지 않았나?

7) 이 작품의 범위가 해당 현상에 대해서 적절한가? 

8) 연구방법이나 서술방법이 이 주제에 적합한가?

9) 이 작품에 포함된 다른 개념들, 예를 들어 인간본성, 세계관, 역사관, 기타등은 무엇인가?

10) 이 작품의 조명하에서 현재 상태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서평 쓰기

1) 저자를 소개한다. 

2)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나 노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3) 서평의 내용에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나 예화로부터 시작한다. 

4) 작품의 목적을 잘 표현하는 인용구절을 그 작품이나 다른 책에서 뽑아 쓴다.

5)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간단하고 개괄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6) 그 작품을 같은 종류의 다른 작품과 비교 분류함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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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4(2013-6-21)

 

 

거처를 옮기고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430일 칠리왁(Chilliwack)에서 써리(Surrey)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난 첫학기를 칠리왁에서 통학을 했는데 거리가 너무 멀고, 올해 한결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는데 이것 때문에 써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벌써 이사와서 정리를 마쳤고, 생활한지도 한달반의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타운하우스에서 지하, 베이스먼트로 이사를 하게되어 햇빛이 좀 덜 들어서 아침, 저녁으로는 추운 느낌입니다. 아마도 여름은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 주인 부부는 인도분들로 아주 좋은 분들이고, 뒷 뜰은 잔디밭으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이사하고 며칠 지나서 생선전을 만들어서 접시에 담아 드리러 갔는데 그분들이 완전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아이쿠) 저희는 육식위주의 식탁이라 식사교제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몇 주전 한결이의 유치원(kindergarten) 입학 설명회에 다녀왔습니다. 60여명정도의 아이들이 이번 가을학기(9)에 유치원에 들어오는데 여기에 한국학생은 한결이 한명밖에 없더군요. 한결이와 한솔이를 위해 스트롱스타트(Strongstart) 프로그램이 있는 학교 근처에 집을 얻은 것은 좋았는데, 한국인들이 너무 없는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금만 나가면 원우들이 있지만 집 근처에는 거의 없더군요. 그런데 며칠 전에 저희 바로 옆집에 사는 애기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려서 캐나다에 와서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근처에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요즘 이사를 하면서 함께 도와주셨던 여러 분들과 주위의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5가정 정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때마다 아내가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ㅎㅎㅎ) 좋은 사람들과의 좋은 교제와 나눔이 더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아르바이트

지난 5월 한달은 거의 주 5-6일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주로 VGC(View Global Center)와 재활용 센터에서 일을 했습니다. VGC에서의 작업은 아주 노동강도가 꽤 높은 일들 이었습니다. 전기톱 혹은 도끼로 나무 베기, 나무 옮겨 심기, 제초작업, 블랙베리 제거 작업, 삽질등을 했습니다. 원우들 몇 명과 함께 일했는데 함께 땀흘리며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또한 땀의 의미를 실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귀가하면 온몸이 피곤하고, 전기톱을 많이 사용했는데 무겁기도하고 위험해서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사용했더니 손목터널 증후군이 생겼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보니 이제 공부가 너무 쉬웠어요라는 고백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맛동산과 맞바꾼 이빨

몇 주전 교회를 가다가 차안에서 아내가 준 맛동산(과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먹다가 이빨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저녁부터 이빨이 흔들리는 것 같더라구요. 이미 몇 년전에 치료하고 해 넣은 이빨인데 맛동산을 먹다가 이것이 빠졌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 이곳 치과에 가서 X-ray를 찍어 봤더니 이빨이 빠진 것이 아니라 이빨이 부러졌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뿌리만 남아 있어서 임플런트를 해야하는데 그 비용이 3,000불정도 든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3,000불짜리 맛동산을 먹은 셈이 되었네요. 일단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중입니다. 이곳에서 임플런트를 할지, 몇 년간 이빨이 없는 상태로 버텨야 할지, 아니면 한국을 나갔다 와야할지 고민중이랍니다.

 

학교 임원활동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ACTS의 대의원과 View 원우회 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너무 좋은 분들과 함께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배경과 은사를 가진 분들이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참 행복합니다. 제가 좀 일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도 다들 즐겁게 함께 도와주어서 재미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68()에는 VFM에서 귀국 원우 환송식을 하면서 VGC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습니다. 야외 잔디밭에서 고기를 굽고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보물찾기, 축구도 함께 했습니다. 사모님들 몇분은 요즘 VGC 밭에 한창 자라고 있는 열무를 따서 열무김치를 담그기도 했습니다.(제 아내도 난생 처음 열무김치를 담가 보았습니다.)



610()에는 이번에 귀국하는 이강일 목사님(IVF 청년사역 연구소장)을 모시고 포스트모던시대의 복음주의에 대해서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종교개혁이후에 복음주의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지금 우리의 복음주의가 경건주의와 개혁신학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철학(학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이중 언어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이곳 View에서의 공부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을 길러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에서 요즘 한결이가 좋아하는 시간은 산책하는 시간입니다. 집에서 10-20분 거리에 꽤 큰 규모의 체육공원이 있는데 이곳 놀이터에 6월 이후부터 항상 분수가 나오고 아이들이 그곳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저녁시간에는 아직은 추워서 물놀이는 힘들지만 그곳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가족들과 이런 시간을 많이 가져야지 하면서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함께 나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이곳에 있으면서 인터넷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한국의 상황들을 듣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 나도 아파하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 나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귀 기울이시는 것에 나도 귀 기울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이사 이후 이곳 생활에 잘 정착하도록

2. 학교 아르바이트일이 생기도록

3. 치아 치료를 위해서

4. 학교에서 섬기는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GSA 대의원, VIEW 총무)

5. 기도와 재정의 동역자들이 더 많이 세워지도록

 

2013621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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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오해


1. 누구나 노력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2. 말하듯이 글을 쓰면 된다. 

3. 많이 읽고 많이 써보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4. 글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5. 글은 문장력이다. 

6.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을 닦는 것이다.


위 질문에 대해서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시오. 



글쓰기를 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로 나눈다면 문학적 글쓰기(시, 소설, 수필...)는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하며 실용적 글쓰기(논문, 보고서, 프리젠테이션)등은 논증을 기본으로한다. 


실용적 글쓰기에 초점을 맞출때 위의 6가지 항목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학기 논문, 글쓰기가 너무 힘들게 느껴져서 빌려 본 책이다. 나자신을 볼때 기본적으로 문학적 글쓰기에는 재능이 없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학적 글쓰기가 아닌 실용적 글쓰기에 좀더 도전해 보자. 철저한 논증을 통해 나의 논지를 잘 설명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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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6일 주일 칠리왁 기쁨의 교회에서 진행한 자녀교육 특강입니다. 

엡 6:4 말씀을 통해 "네 자녀를 노엽게 말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강사이신 박진경 교수님은 "하나님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요?"의 저자이자, 양승훈 교수의 아내이며 4아이의 어머니이시다. 

자녀들을 노엽게하고 쓰라리게 하는 행동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녀 양육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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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가능할까?


서구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 곧 계몽주의의 과학적 합리주의가 무너지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그 잔해에서 일어났다. 모더니즘은 과학과 합리주의 위에 세운 큰 건물이며 모더니즘 시대의 도시는 힘과 능률을 입증했다. 즉 자연과 무지와 가난을 정복했다. 그러나 200년이 흐른 후, 모더니즘이 무너졌다. 모더니즘은 인간 영혼이 느끼는 가장 깊은 갈망을 더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제 내면의 삶을 세울 토대로 다른 철학과 세계관을 찾는다. 그래서 영성 세계 종교, 뉴에이지의 인기가 높아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모더니즘의 토대를 침식하는 지하 공동체를 건설한다.(p.37)


이머징 교회가 던지는 몇가지 질문(p. 40)

- 우리 믿음을 변해가는 세상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우리 문화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게 할 것인가?

- 개인주의 세상에서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 교회는 도시에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 교회가 주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게 무슨뜻인가?


"칼뱅주의자의 불안"(리차드 마우)


이머징 교회의 외부자라고 느끼는 이유(p.42-44)

1. 연령별 사역의 장단점

2. 뿌리가 필요하다.(역사적 연결, 고대예배)

X세대 예배는 문화 장벽을 허물고, 성과를 지향하지 않고 진정성을 추구했다. 

- 주변문화에 다가가겠다며 지나치게 세상과 비슷해졌고 문화에 맞서는 모습이 부족해 보이는 x세대 예배

3. 복음을 중심에 두는 모습의 부족



2장 이머징 교회란 무엇인가?

- 변하는 문화의 한가운데서 선교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교회


이머징 교회의 과제는 "해체와 재건"이다. 


이머징 교회는 무엇에 항의 하는가?

1. 전통교회는 계몽적 합리주의에 사로잡혔다. 

2. 전통교회는 구원관이 편협하다. 

3. 전통교회는 속하기보다 믿기를 앞세운다. 

4. 전통교회는 상황에 맞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 

5. 전통교회는 설교가 효과적이지 못하다. 

6. 전통교회는 교회론이 약하다. 

7. 전통교회는 종족주의를 좇는다. 


댄 킴벌 : 변해가는 주변 문화를 선교 관점으로 파고드는 모든 교회를 이머징 교회에 포함


이머징 계열의 주요 세 그룹

1. 연결주의자 : 역사적 형태의 교회와 같은 복음을 취하지만 예배형식과 설교 기법과 교회 지도체제를 쇄신하는데 관심을 둠

2. 재건주의자 : 같은 복음을 취하지만 현재 교회 형식과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형식을 탈피하고 성육신 적이며 유기적 형태의 교회를 실험한다. 

3. 수정주의자 : 신학과 문화에 관한 복음주의의 핵심 교리에 거리낌 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교회형태에도 의문을 제기.


3장. 순전한 기독교를 찾아서


존스토트 "복음의 연합" / 토머스 오덴 "새로운 에큐메니즘"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방으로 직접 이어지는 넓은 홀에 더 가깝다.(루이스)


서로 다름에 집중할 것이냐, 서로 일치(연합)에 집중할 것이냐?


리디머 장로교회의 깊은 연합

1) 매주 최고 기독교 역사가 물려준 역사적 전례에 예배의 뿌리를 둔다.

2) 깊이 있는 교회의 특징을 설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한다. 

3) 태도를 조심한다.

4) 오만을 경계한다.

5) 문턱이 낮다.

6)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4장 깊은 진리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 후기 근대주의 : 대부분의 전통주의자들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속으로 본다. 

- 탈 근대주의 : 이머징교회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극복한 대안으로 인식한다. 


정초주의와 강경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네가지 선언

전통교회의 실재론은 옳으나 전통교회의 정조주의는 옳지 않으며, 이머징 교회의 탈정초주의적 비평은 정확하나 이머징 교회의 형이상학은 정확하지 않다면 그 대안은?

- 제3의 길은 고전적 정초주의(절대적 인식론)와 강경 포스트모더니즘(반실재론)을 거부한다. 

1) 깊이있는 교회는 탈정조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2) 깊이있는 교회는 정초(기초)를 믿는다. 

3) 적절한 자신감을 소유한다.

4) 탈정초주의적이란 말은 우리가 소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울타리를 칠것인가 샘물을 공급할 것인가?(경계집합형 교회와 중심집합형 교회)


5장 깊은 전도

이머징 교회의 주장 : 속하기가 믿기보다 우선이다. 


공관복음의 세부분

1) 갈릴리와 북쪽 지역의 사역(마 1:1-16:12 ; 막 1:1-8:26 ; 눅 1:1-9:17)

2)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여정(마 16:21-20:34 ; 막 9:2-10:52 ; 눅 9:51-19:10)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마 21:1-28:20 ; 막 11:1-16:8 ; 눅 19:11-24:53)

- 예수님은 단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나아가 그분이 누구신지 고백하고 그분의 제자로 헌신할것을 요청하신다. 


6장 깊은 복음

브라이언 맥클라렌, 존 하워드 요더, 스탤리 하우어워스, 짐 월리스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대한 평가 : 전통교회는 그가 십자가와 속죄교리를 축소시키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교회는 이머징 교회가 복음을 사회행위로 축소했다고 주장하고 이머징 교회는 전통교회가 메시지를 개인구원으로 축조햇다고 주장한다. 


복음-공동체-선교-샬롬


7장 깊은 예배

댄 킴벌 : 거룩한 공간과 다감각적 예배


1) 예스럽고도 새로운 예배

2) 성경 드라마가 있는 예배(부르심, 씻음, 구범, 성찬식, 파송)

3) 기쁨과 엄숙함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

4) 모든 신자가 제사장인 예배

5) 심오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설교

6) 매주 성찬식을 행하는 예배

7) 손님에게 친절한 예배 : 영화로운 전도


8장 깊은 설교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배웠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능력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스피칭을 넘어서

진리 찾기


9장 깊은 교회론

교회는 유기적이어야 하는가? 제도적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늘 쌍둥이 위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문화의 포로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와 괴리되는 것이다."

1) 균형

2) 하나님은 리더를 부르신다.

3) 은혜의 수단인 예배

4) 전통을 세워나가라

5) 전통은 현실에 아주 적절하다.


10장 깊은 문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의 적절한 균형


세상과 분리된(isolated) 삶이 아니라 구별된(distinguished) 삶이 필요하다.


결론 깊이 있는 교회를 향하여

1) 공동체 모임을 시작하거나 기존 모임에 들어가라

2) 용서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모임의 중심으로 삼으라

3) 선교하라

4) 샬롬 메이커가 되라

5) 깊이 있는 예배자가 되라

6) 중심 집합형 사고의 본을 보이라

7) 리더에게 요구하기전에 먼저 자신이 깊이 있는 교회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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