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역사의 실마리이신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히브리인의 역사이해의 독특한 점은 역사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헬라인의 사고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왼전성의 핵심은 불변성이고 완전성은 인간 역사의 변화들로부터는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5)에서 '가까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보다는 공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 곧 그분의 왕권이 인간 예수 안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눅 17:21, 마 12:28)
2) 그러나 이런 임재는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다.
3) 이런 결과로 감추어진 임재는 위기와 투쟁을 유발시킨다.
4)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의 열쇠는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분명히 드러난 것의 차이이다.
5)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밖으로 분명 드러나는 영광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사이의 간격의 의미는 모든 나라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선한 파수꾼으로서의 경계와 준비태세를 요구하는 긴박감과 아버지 외에는 예수님조차도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리워진 것이 곧 벗겨질 것이라는 말씀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놓치는 것이다.
7) 초대교회, 이 시기의 특징은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처형이었다. 부활도 십자가 사건만큼이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으므로 천국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8) 이렇게 천국이 감추어진 것은 열방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9) 교회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을 추구하려는 유혹과 심판을 부정하고 편안히 머무르려는 게으음의 유혹이다. 그리기에 우리에게는 인내와 희망이 동시에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의미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등성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산과 계곡, 호수와 숲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본 주님의 날은 단 하루처럼 보였지만 그날은 새로운 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천국의 권세와 구시대의 권세가 나란히 역사하는 때이다. 이것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신앙을 갖도록 초청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1) 그리스도는 단 한번에 모든 정사와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2)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이제는 그의 모든 대적이 순복할 때까지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하신다.
3)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이고 그의 통치와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현대의 여러가지 역사 이해
18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사회는 진보가 역사의 의미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보의 신념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부유한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후에 받을 영혼의 개인적 축복만을 바라보는 사유화된 종말론(privatized eschatology)으로 빠져 들었고 이는 공적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감소시켰다.
죽음은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 각 사람을 역사로부터 떼내어 버린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사상 의미있는 행동이란 오직 어떤 미래의 목표점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계획도 인간의 삶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적일 수 있다. 동시에 죽음의 이면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을 꿈꾸지 않으면서 지금 가능한 상대적인 선을 결연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공적인 삶 가운데서의 우리의 행위들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면 천국을 위한 행동화된 기도들(acted prayers for the kingdom)이다.
역사의 목표점으로 약속 받은 것,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만들어 내는 사적인 세계과 공적인 세계의 이분법을 치유하는 것이다.
10. 선교의 논리
선교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다.
선교는 기쁨의 폭발이다.
복음 선포는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성육신 하신 주님도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역사를 오만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어떠한 주장도 단념해야 한다. 주님이 가신 길, 곧 고난받는 증인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교회는 오만하게 역사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계속되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궁극적 목표점을 대면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말해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교회는 역사의 여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적인 모델에 의해서 이해해야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의 대행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명의 장소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야기 곧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비어 예수님의 사역과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되풀이하고 재현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모습을 명확히 나타낸다.
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점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 성장, 선교의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숫자와 어떤 목표의 달성(??)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제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롬 15:23)라고 말했다. 이는 이 지방의 모든 사람을 개종시킨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복음을 전파했고 후에 복음을 믿으면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남겼다. 그들의 중요성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그분의 선교 사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교회와 선교의 일
예수님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위기를 촉발했던 것 같이, 교회의 도래가 세상에 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열방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이 완전히 끝날때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수 없다.
선교 논리의 중심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 즉 개개의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측량 못할 지혜와 은총의 깊이가 계시될 종말론적 사건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지평선은 우리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있지 않고 그분이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사건 속에 있는 것이다.
선교의 일은 신앙의 시험대이다.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게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리고 선교의 중심부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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