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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나서는 이를 위한 기도문

주님이 그대 앞에 계셔서 그대에게 바른 길 보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곁에 계셔서 그대를 팔로 껴안아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뒤에 계셔서 그대를 못된 사람들의 흉계에서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아래에 계셔서 그대가 떨어지면 받아주시고 그대를 덫에서 끄집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안에 계셔서 그대가 슬퍼할 때에 그대를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둘레에 계셔서 그대를 남들이 덮칠 때 막아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대 위에 계셔서 그대에게 복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그대에게 복 주시기 바랍니다.

(독일 Wurttemberg주 교회용 찬송가에 수록된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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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무 이야기

 

옛날 어느 산꼭대기에 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 세 나무가 있었는데 이들은 장차 크게 자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 장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올리브나무는 ‘나는 아름다운 보석 상자가 되어 세상의 온갖 값진 보석들을 담고 싶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 떡갈나무는 ‘나는 왕들을 태우는 튼튼한 배가 되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나는 그 산 언덕을 떠나지 않고 가장 큰 나무가 되어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무들은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명의 나무꾼들이 이 나무들을 베었습니다. 첫 두 나무들은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언덕에 남고 싶었던 세 번째 나무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나무는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달리 값진 보물을 담는 보물상자가 아니라 동물들의 밥그릇이 되어 보석 대신 건초가 그 나무를 가득 채웠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강한 왕이 타는 큰 배가 아니라 작고 평범한 고깃배가 되어 매일 어부들을 태우고 냄새 나는 물고기들을 싣고 다녔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냥 튼튼한 기둥들이 되어 목재소 마당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세 나무는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세 나무들은 이제 자신의 꿈을 거의 다 잊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산을 앞둔 젊은 부부가 마구간에 들어와 여물통을 잘 닦아 새로 태어난 아이의 요람으로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 메시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두 번째 나무는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 피곤한 여행자와 그의 친구들을 태우고 요동치는 호수 가운데 있었습니다. 곧 부서질 것 같았던 그 순간 그 피곤해하던 남자가 깨어나 폭풍을 잠잠하게 했을 때 두 번째 나무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왕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3년의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어느 금요일 아침, 세 번째 나무는 목재 더미에서 꺼내져 소리 지르는 군중들 사이로 옮겨졌습니다. 마침내 군인들이 어떤 남자의 손을 자신에게 못 박았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추하고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통나무 더미에 놓여 있던 세 번째 나무는 어떤 남자가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는 십자가로 사용된 것입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통나무로 버려졌다가 진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를 모시는 영광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올리브나무는 값진 보화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었고, 두 번째 떡갈나무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주님을 태우는 배가 되었으며, 세 번째 소나무는 온 백성의 구원자이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기둥이 되어 이제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자신들의 꿈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이 나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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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는 배제와 혐오의 대열에 서게 되었는가(최종원)-JOY-특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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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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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중립지대란 없다. 단 한 평의 땅, 단 일 초의 시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고 사탄도 거기에 대항해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There is no neutral ground in the universe. Every square inch, every split second is claimed by God, and counterclaimed by Satan."(C.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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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는 기쁨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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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교민 연합집회 

2015년 5월 23일(토), 밴쿠버 순복음교회 





주님의 교회(행 13:1)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넘어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한다. 

주님을 나의 주어로 삼고 내가 동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동사가 주어를 콘트롤하는 법은 없다. 동사는 주어에 종속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교회는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임. 에클레시아이다. 

건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를 이루고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동사가 주어를 조종하려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 모두 가난했다. 

새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천명하셨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 장로, 집사, 헌금 많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어로 모신 주님의 동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교회의 정의.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이어야 한다. 

1. 하나의
- 교회의 갯수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분이시다.(엡 4:4-6) 우리를 부리는 주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러개의 동사는 하나의 주어를 위한 것이다. 주어가 두개라면 동사는 갈라지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교회를 섬기지만 한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될 수있다. 
- 하나됨의 증거. 그 증거는 우리의 몸을 보면 알수 있다. 우리는 한몸에 여러 지체를 이루고 있다. 제 뇌가 명령하는대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지체들끼리 서로를 섬기고 돕는다는 것이다. 배고플때 입이 음식을 삼켜준다. 정상적인 지체라면 상호 봉사하게 되어있다. 
- 한 공동체를 이룬 지체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럴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 
- 사람에 대한 호칭 : 영유아, 청소년, 청년, 장년, 이후에 노인과 어른으로 갈라진다.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 된다. 노인의 특징은 자기만 안다. 자기에게만 맞춰주기를 원하는 사람들. 어른은 이전에 알지못하고 품지 못했던 사람을 품고 자신의 것을 나누고 다른이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은 절대로 절로 되지 않는다. 이 갈림은 봉사에 있다.  봉사하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산 사람이 5-60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봉사의 아름다운 마지막 단계은 밑 가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 요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아버지가 농부이심. 중요한 원칙. 교회론을 보여준다. 줄기의 첫번째 가지는 항상 가장 밑에 위치한다. 다음 가지는 그 위에 붙는다. 제일 여린 가지가 윗자리를 차지한다. 겨울이 지나고 다음해에 새로운 가지가 윗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밑가지가 되는 삶. 이 반대의 상황이 되면 나무는 부러진다. 목사, 장로, 창립멤버는 이렇게 밑거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기득권을 주장하고 서로 윗가지가 될려고 하기에 분쟁이 일어난다. 

2. 거룩한 교회
-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다.(고전 1:2)
- 우리는 추악한 죄인임에도 그분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쳐주셨다. 주어가 거룩하기에 동사로 부름받은 우리도 거룩해야할 의무가 있다. 주어에 동원되는 동사는 거룩해져야 한다.(난봉꾼의 동사는?)
- 세상은 동사인 우리를 보고 주님을 알게된다. 교회의 힘은 교인의 머리수로 나타나지 않눈다. 헌금 액수로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의 힘은 거룩에서 나타난다. 거룩은 구별이다. 
- 제네바 콩쿨 : 자유곡과 지정곡, 예선과 본선은 피아노만. 결선은 오케스트라가. 어떤 이의 소리는 오케스트라를 뚫고 들린다. 행사의 규모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지를 보기 위함이다. 공동 1위 이후에 2위. 왜소한 한국 여성. 이유는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파장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폭포를 뚫고 나가는 훈련을 한다. 득음을 위해. 다른 파장을 얻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한번도 유학을 계획하지 않으셨다. 살아생전에 팔레스타인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분의 메시지가 로마의 힘을 압도했다. 이사야의 고백.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 산상수훈.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실 때에도 지극히 절제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씀하셨을 것이다. 진리의 파장. 영원, 빛의 파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 교회가 돈으로 승부한다면 빌 게이츠를 이길수 없다. , 권력의 파장. 교회는 거룩의 파장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힘은 거룩함에 있다. 그 거룩은 구별된 삶으로 드러난다.

3 사도적 교회
-  엡 2:20 사도와 선지자의 터위에 세워진 교회. 
- 동사의 삶은 피상적 삶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주춧돌, 주어되시는 주님. 주님의 말씀으로만 사도적 교회를 이룰수 있다. 
-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완독하신 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주님과 무관한 것이다. 결혼을 위해 서로 만나서 알아가야 한다. 
-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삶, 요 14:22. 이것이 주님을 주어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대상만을 드러내기위해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인카네이션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 동아일보 이종찬의 회고록. 존슨 대통령의 방한. 환영 만찬. 1960년대. 만찬 석상에서 정전이 됨. 모두의 시야가 캄캄해짐. 부스럭 소리. 존슨 대통령이 없어짐. 정전되는 순간 화장실로 대피시킴. 경호원이 경호원 다웠는가??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림. 자기를 위해 몸을 던진 경호원을 레이건 대통령은 살려내지 못했다. 
-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드린다고 착각한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망한다. 허사인 것이다. 녹이 쇠를 갉아먹듯이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호원이 될때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4. 보편적 교회
- 라틴어로 기록. 콘스탄티노플 신조. 캐톨릭 처치가 되어야 한다. 1517년 개신교에서는 univesal church로 바꾸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 
- 2000년전은 계급사회였다. 예배당안에서 귀족과 노예가 함께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는 것 거의 불가능했다. 
- 앞의 세가지는 개인적 영성과 관련된 것이다. 보편적 교회는 인간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가 어렵다. 
- 밴쿠버에서 한인교회를 이룬다는 것. 그런데 이곳에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고있는가? 왜 보편적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가? 우리의 주어이신 주님께서 만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나도 보편적 동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주님의 주위에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있지 않았다. 열심당원 시몬뿐만 아니라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님 곁에는 무식한 베드로와 아리마대 요셉. 창기와 니고데모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함께 할 수 없던이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되렀다. 
- 보편적 교회가 됨으로 이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거룩한, 사고적,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 거룩한 공회를 믿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회가 어디이든지 보편적 교회임을 믿는다. 
- 우리 한사람이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보편적 교회.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교회가 인간의 역사에 존재했는가? 
- 안디옥 교회의 구성 : 당회원 명단. 레위인 출신의 전통 유대인 바나바. 니그로 흑인인 시므온 노예출신, 무명의 존재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젓동생(마나엔, 친형제이거나 죽마고우-매국노), 교회를 짓밟던 폭도 바울
- 지중해 전도를 위해 예루살렘교회를 사용하지 않고 안디옥교회를 사용하신 이유. 현실속에서 이런교회가 존재했는가? 
- 양화진 : 무어 선교사, 교회와 학교를 세움. 봉주리의 마을 백정의 아들.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림. 고종의 의사 애디슨을 데리고 백정을 고쳐주기위해 옴. 무어선교사가 그 백정의 이름을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지어줌. 양반들의 항의. 따로 좌석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고 교회를 나가서 따로 교회를 세움. 이에 백정들에게 전도를 함. 나갔던 양반들이 돌아옴. 이 두교회가 다시 합하여 승동교회를 이룸. 아들은 의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고 백정은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왕손출신 이재형?이 장로가 되었다. 함께 당회를 이룸 
- 무어 선교사 한분이 보편적 교회를 이루었을때 조정이 백정을 인간으로 인정했다. 
- 우리가 보편적 교회를 이룰 때 주께서 당신의 교회를 이루실 것이다. 
- 주님을 믿는다면 참된 주님의 사람이 되자. 하나의, 가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룰 이루는 주님의 교회가 되자. 우리 주님은 살아계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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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람(시 39:5-6)





밴쿠버 교민연합집회

2015년 5월 22일(금), 밴쿠버 순복음교회



다윗의 수명 : 70세. 당시 굉장히 장수했다. 70을 살고 그의 삶을 한뼘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테파흐(손바닥) 다윗에게 70인생은 그렇게 짧았다. 인생은 오래 살수록 짧게 느껴진다. 


그마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것 같다. 100년전의 조상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든든히 서있다.(나차브, 인생의 최전성기) 로마, 바벨론의 영광은 허사이다. 

첼렘, 환영-그림자. 있는것 같은데 실은 없는것, 얼마나 많은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200만 밴쿠버, 200명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할때 99.99%가 우리에게는 그림자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헛된 일(헤벨, 공허한 숨) 으르렁거리는 삶을 묘사하는 동사(하마), 진리를 위해 으르렁 거리며 살지 않는다. 

절대 권력자 : 박정희(72)
이병철 : 돈병철(78), 재산이 그들의 삶을 책임져주지 못한다. 
어머니(86세)까지 사셨다. 
우리가 더 으르렁 거리며 살면 더 모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부모 재산 놓고 싸우는 자식들. 

세월이 흐른뒤에 그렇게 모은 재산이 누구의 재산이 될지 알지 못한다. 휘트니 휴스턴의 2000만불이 그녀의 18살(바비 크리스티나) 딸에게 물려졌는데 현재 21살에 엄마와 똑같은 상태로 호텔 욕조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되었다.(동거남, 남편, 친정 어머니의 진흙탕 싸움)

GE만이 130년을 견뎠다. 
삼성과 엘지만 남아있다. 
세계 경제사. 남아있는 기업이 얼마 없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하나님앞에서 없는것과 같고 다른이에게 환영과 같고 재산이 누구것이 될는지 일지 못한다. 
- 솔로몬의 헛되다(헤벨) 헤벨의 5제곱
- 매우 덥다. 덥다 덥다는 히브리어 표현

인생이 이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
시 39:7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허사로 끝나기에 우리의 소망을 주께두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때 주체가 내가 된다(주님을 콘트롤하려한다) 내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주체(주어)가 주님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불이익이 예상되고 모함을 당해도 주님의 사람이라면 그길을 갈 수 있다.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1. 테바(방주)의 사람이 되는 것.
- 홍수 심판 가운데 노아를 부르심. 창 6:15절. 방주의 사이즈를 알려주심 32800톤. 큰 페리호가 3000톤 정도이다. 테바는 거대함의 상징이다. 
- 애굽이 히브리인의 장자를 죽임. 출 2:3. 갈대상자안에 아기를 두고 나일강에 띄움. 이 갈대상자가 테바이다. 
- 축구장 vs 갈대상자. 하나님의 테바의 특징은 무동력에 있다. 제어시스템이 없다. 방향, 석도, 멈춤 찰저하게 하나님께 맞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테바. 
- 테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인셍의 방향, 속도, 멈춤. 하나님께 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지족과 자족 : 지금 나의 삶이 족함을 아는 것. 웅덩이와 가시덤불이 내 인생에 필요함을 알고 인정하는 것. 족한 줄 모른다. 과거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잘 사는가? 우리의 행복지수는 어떤가? 교회에서 지족의 싦을 가르치지 않고 욕망의 삶을 부추긴다. 
- 요셉 : 채색옷에 만족하지 못하던 삶. 광야 웅덩이에 빠짐. 창 37:22-24 하나님이 예비하신 웅덩이. 물이 없었다.(익사) 이 웅덩이가 그에게 테바였다.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됨
- 아브라함 : 모리아산. 가시덤불, 창 22:13 수풀(세바크, 가시덤불) 이 장애물이 수양을 준비한 것이다. 
- 나는 지금 웅덩이에 빠져 있는가? 그럼에도 테바의 사람이 되라. 

2. 엑소도스의 사람이 되는 것
탈출의 의미. 엑소 밖으로, 도스 그길. 이집트는 죄와 어둠과 사망의 상징이었다. 홍해를 열어주셔서 건너가게 하셨다. 
갈라진 홍해가 갈라진 채로 있지 않았다. 애굽로 돌아갈 길을 차단하신 것이다. 되돌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다. 
-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다. 벗어나게 하신것이 은혜라면 성화의 삶은 우리의 의지이다. 
- 광야에서 헤벨이 되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던, 미련을 가진 히브리인. 
- 아이스호도스, 주님의 길을 가야한다. 
- 퇴장의 의미가 있다. 연극 무대의 배우들. 인생이라는 무대도 마찬가지다. 밤에 화장을 지운다. 인생의 화장을 지울때가 온다. 인생의 스폿라이트를 받을때가 있지만 안젠가 꺼진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 천년만년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
- 퇴장을 아는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기 원했던 내일이다."
- 오늘도 평생 처음 맞는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무의미한 삶을 살겠는가. 
- 변화산의 모습 : 모세와 엘리야. 이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가 눅 9:29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심. 이 죽음이 엑소도스다. 엑소도스의 세번째 의미. 왜 이 메시지를 주시는가? 내가 십자가에 죽지만 이 죽음이 끝이 아니다. 저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온 하늘의 출입문이다. 
- 외과의사 : 예수믿는 사람일수록 안죽으려한다. 기를 쓰고 안죽으려한다. 입에 발린 영생이 아니라 죽음이 영원과 접속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죽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바울이 어떻게 참수형을 당할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진짜 믿지 않는다. 

3. 에네의 사람이 되는것 
시 19:8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눈을 밝게 한다.  이세상을 바로 보게하는 눈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메. 눈들이다. 
- 우리말은 단수로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개의 눈을 주셨다. 이세상은 평면이 아니다. 
- 문명의 발달과 역사의 미래를 볼줄 아는 두눈이 필요하다. 
- 본질이 아니라 외형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두눈이 필요하다. 두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본다. 폭풍속에서 정적을. 모함 속에서 진실을 본다. 
본질을 꿰뚫어 봐야한다. 두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있음을 본다. 유럽의 몽블랑 4807미터. 3842미터. 케이블카. 1905년시작. 1,2차 대전으로 중단. 알프스의 눈덮힌 산. 노약자, 장애인들도 오를 수 있다. 110년전에 보았다. 몽블랑에서 없음에서 있음을 보았다. 
수에즈 운하 192킬로미터. 150년전에. 두눈을 가진 사람들이 이 청년들의 제안을 도왔다. 
- 교회는 이런 청년들을 키우고 밀어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두눈을 가진 청년들을 외눈박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 미국의 독립. 1776년. 하와이(미국 동부에서 8500키로)?
- 1897년 일본이 유큐왕국을 합병했다. 4000키로. 
- 역사의 두눈을가지고 미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땅을 넓히던 시대에 조선땅에서는 부정부패로 땅을 일제에게 빼았겼다. 
- 한국의 청년들은 두눈을 가져야 한다
- 두눈을 가진 사람만 주님의 사람이 될수 있다. 변화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보여주는데 베드로는 외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을 꾸짖고 있다. 외눈을 가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심. 
- 롯과 아브라함. 먼저 선택하게 함. 롯이 보니 소돔과 고모라가 에덴 동산 같았다. 한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멋지고 화려해 보였다. 
- 바울의 고향 다소. 소위 바울의 생가라는 유적터. 우리가 주목하는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쇠퇴하고 사라진다. 건축하는 순간 쇠퇴가 시작된다. 인생은 가는 것이다. 

테바, 엑소도스, 에네의 시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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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5년 5월 21일 오전 10시
장소 : 밴쿠버 소망교회(5825 nelson ave, Burnaby)
강사 : 이재철 목사 




화두 : 어떤 목사가 살아남겠는가?

구약의 중심 메시지 : 그날이 온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다. 먼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심판 대상이다. 

목회자(목사)의 위치 : 목사는 스님이나 신부와는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1) 목사 사모의 편지 : 14살때 부터 반주자로, 26살에 목회자와 만나 결혼, 두번의 유산(남편의 무관심), 전임사역, 남편의 욕설, 아내의 잘못은?(사랑받기 원하는, 제대로 목회하기를 바라고 내조하는...)
- 유영모 :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되고, 이 삶이 터지면(열매가 터지듯) 사랑으로 터진다. 목회자는 삶의 전문가이다. 그럴려면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아내를 모르는 이 목사가 교인들의 삶을 알 수 있겠는가? 성경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2) 젊은 목사 부인 : 이상한 팝업창, 계속 성인 사이트에 접속(집, 교회), 아내의 꿈, 강단을 걸고 약속, 목사에게 설교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진정한 설교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목사와 세상 남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돌중, 신부(땡신부), 땡목사 / 목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 목사는 자기 삶을 구별하는 사람이다. 요즘 왠만한 목사 다 그래(교육, 세습, 포르노), 내가 다른 사람을 아는 만큼 나를 알아야 한다. 내 욕망의 산물이 되는 이유는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교인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3) 여집사 : 설교 표절, 주일 설교를 준비하지 못한 목회자의 메마름, 설교를 표절했을때의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가? 설교 도용을 멈추는 것, 하나님을 모르는 목사(고후 2:17-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전하는 자세), 내가 설교하는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지,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야망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고 있는지

4) 하와이에서 사역하는 목사 : 10명정도의 개척목사, 식당에서 일하며 사역중, 자신이 설교를 도용했다는 것을 회개, 

주님 오실때 나는 목사로 살아남겠는가? 나는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겠는가? 

- 목회자의 이중직 : 콜링의 문제(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냐 내가 찾아가는 것이냐), 출발점이 중요한 것이지 이중직은 문제가 아니다. 이 한분을 위해서 인생을 던질수 있는가? 이중직을 갖는 동기가 무엇인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이 아닐때, 한사람에게라도 내 인생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확신이라면 이중직은 아무 문제 없다. 그것을 믿는 전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믿지 못하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항상 왜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 목회자의 자기 관리 : 그리스도인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구별이다. 이것이 숙명인 동시에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큰문제가 생겼을때 큰 이득이 관계되어 있을때 이것을 어떻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들을 주셨다. 하난님께서 왜 우리에게 눈들을 주셨을까? 어떤 큰 유혹이 있어도 현재를 보는 눈과 미래를 보는 눈,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유혹에 빠질 수 없다. 한 눈이기 때문에 돈, 섹스의 문제에 빠딘다. 보이는 것을 보는 눈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가? 이것이 동시에 작동하는가? 

- 설교준비 & 세월호 사건 : 순서 설교, 주일 설교만 하게 되면 목회자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필요한 본문을 설교하게 된다. 구절 설교를 하지만 나머지 본문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설교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spiritual insight를 얻는다. / 세월호 : 방사선 치료(홍천-이시형, 요양마을), 스파의 옷장(소쿠리), 속옷을 접어놓는 사람이 없다. 세월호 자체의 문제로 보면 세월호는 또 터질 수 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준법, 공익 정신, 

- 주님의 사랑, 주님의 교회 / 교회 개혁을 위한 제안 / 이상과 현실의 괴리 : 교회 개혁을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다. 단지 목사라면, 교회라면 이렇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도를 좇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이런 모습이 개혁으로 보여졌다. 한경직 / 이성철 스님 / 법정 / 김수환 추기경 : 이들의 공통점을 자신의 종교의 기득권을 누리지 않았다. 자신의 교회가 커지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많은 목사들이 있다. 개혁은 내가 당연히 누릴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목사를 신뢰한다. 내가 목사로서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내가 이정도는 누릴 수 있어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개혁은 시작된다. 우리의 이상은 나의 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사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 앞장서서 선봉장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자녀들 교육 : 세상의 KS마크를 달지 않아도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게 된다. 
해야된다는 것이 싫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그 현실을 수용해 주는 것이고 그 토대위에 그의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듣지 않아도 미래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현존하는 미래”를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주어야 한다.(학교, 정부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교회마저...)

- 본문연구 / 기도생활 : 한주간 그 본문을 묵상한다. 월요일에 원문 연구를 마쳐진다. 이 원문의 내용을 가지고 한주간 묵상한다. 무릎꿇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분의 관점에서 살아가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 국제 시장 / 이민 목회의 통합(1세대, 2세대) : 이민 역사이후 60년대 이민, 국제시장(시체 딱기, 독일 탄광 사고 현장), 광부, 간호사 출신의 장로 권사님들이 이민 교회의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기득권을 놓치 못하기 때문에, 갑질이 심하다.) 당한만큼 교회에서 행한다. 미국 동부의 교회(네비게이션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장로님들), 노인이 아니라 어른으로 세워드려야 한다. 목회자들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갑질하는 행태 자체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상처와 한을 해결해주어야 한다. 

- 백주년 기념교회 : 본당은 500석, 19지역에서 설교, 39세 미만이 62%이다. 바르게 성령의 통로가 된다면 연령을 초월한다. 

- 목회자가 가져야하는 2개의 눈, 미래 목회의 패러다임  :  각자 자신이 살던 시대가 과학이 발달하고 타락한 시대였다. SNS의 발달(정보의 속도), 2000년전 원형 경기장의 잔인함, 성경에 죄성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 저지를수 있는 모든 죄악이 들어있다. 모양만 다르게 반복된다. 성경 어디에도 절대다수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었던 시대는 없다. 언제나 당신의 그루터기, 좁은문을 걸어가는 소수들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지금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김교신(차전도사) : 1920년대상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이라고 더 어려운 것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 교회다움을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앵글리칸 성공회, 루터란 처치, 루마니안 정교회 : 민족주의에 빠져서 보편적이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면 지금 사람이 많다가 언젠가는 줄어들게 된다. 

-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의 본질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가 놀랐다.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이 가르치는것과 같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분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자 무리들이 놀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하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의 삶의 자리에 충실한 것이다. 

- 동성애 : 성경적인 관점으로 분명히 안되는 것이다. 조계종 이성철 스님 : 스님들이 육식을 하는 것의 문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폐하면 불교의 집이 무너진다. 불교 신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명때문이다. 그 계명만 무너지겠는가? 세월지나면 모든 계명이 무너지는 것이다. 서구사회 교회가 무력해진 것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하나씩 무력화하였다. 그 순간부터 교회는 비는 것이다. 동성애를 무너뜨리면 그것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약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에서 말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것에 동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케이스에 표시해서 흡연이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의 문제(항문 성교의 문제점), 동성애자들 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해야함과 공시에 유해성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신랑 아버님이 결혼 사진을 찍는데 한 청년을 부름(청년의 큰형이 동성애자) 공개장소에서 그를 며느리로 인정할것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 성경적으로 목사로서의 입장은 분명해야하지만 유해성도 정확히 알려야 한다. 무조건 포용만하자는 것은 안된다. 

- 주님의 교회 사역, 가정생활 : 교회와 교인을 위해서 목회자가 희생하는 부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직업적인 목사만은 아니다. 내가 무언가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의 열매가 맺히겠는가? 아내와 자식들도 대상에 포함된다. 가족들과의 시간은 시간의 양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짦은 시간이라도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라. 넥타이도 풀기전에 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가 있다고 아버지의 자리가 빈자리가 되지 않도록 아내가 노력한다. 지금쯤은 아빠가 성경연구할꺼야, 지금쯤 아빠가 심방중일꺼야. “애들아 아빠 오셨다.” 아이들과 아빠의 벽이 없게 만드는 것은 아내의 역항이 중요하다. 시간적인 길이는 짧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교회의 쇠퇴현상, 기독교의 생명력 :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영이신 하나님께는 손과 발이 없다. 그 생명을 전하는 통로가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생명을 주실때 여자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은 희생없이는 전해지지 않는다. 희생은 봉사하고 다르다. 좋은 교회는 봉사자가 많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이다. 희생하면 반드시 생명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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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6일 주일 칠리왁 기쁨의 교회에서 진행한 자녀교육 특강입니다. 

엡 6:4 말씀을 통해 "네 자녀를 노엽게 말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강사이신 박진경 교수님은 "하나님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요?"의 저자이자, 양승훈 교수의 아내이며 4아이의 어머니이시다. 

자녀들을 노엽게하고 쓰라리게 하는 행동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녀 양육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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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로 기윤실 이사장으로 죠이 선배로 멀리서 지켜보며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었던 김인수 장로님.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가셨지만 그분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그분의 유지를 기리며 모이고 있다. 

이땅의 청년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꼭 일독을 권한다.(페북에 올라온 글을 옮깁니다.) 



새 시대의 젊은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생각되는 경제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위기는 외환과 금융시스템관리의 미숙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전문성의 결여, 부정직과 이기심이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부정부패, 경직된 사회조직 등에서 기인한 국가와 사회의 경쟁력 저하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당한 이 시대의 문제를 풀기 위해, 또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이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복음을 받은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직된 사회조직도 유연한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겠지만 각자가 전문성을 제고하고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여름 시카고에서 개최된 재미유학생수련회에는 1,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며 많은 유학생들과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상담했던 유학생들을 그 내용에 따라 분류해 보면 세 집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적 기본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학생들입니다.
둘째는 자기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며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목사, 선교사, 또는 사모가 되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원론적 사고에 고착
되어있는 학생들입니다.
셋째는 유학생활이 여의치 않아 상당히 좌절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이 글은 이미 복음의 확신을 가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첫째 문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이 사회에서의 우리 역할이 달라질 것이며 위에서 언급한 사회문제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도 달라질 것이기에 이들 문제를 중심으로 제 생각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이 선교광주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제 개인의 경험까지를 포함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셨기에 외람 되지만 제 경험의 일부를 곁들이기로 하였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두 곳에서 보냅니다.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직장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가지의 변수를 가지고 인생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가정에서 신나게 살고 직장에서도 신나게 사는 인생입니다. 직장에서 신나게 산다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출세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신이 나서 즐겁게 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가정에서도 화목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둘째는 가정에서는 신나게 살고 있지만 직장에서 힘들게 사는 인생입니다. 사회적으로 보아서는 별로 대단한 인생이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소시민적 행복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가정에서 불행하지만 직장에서 야단스럽게 사는 인생입니다. 밖에서 보면 꽤 괜찮은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가정에서는 불행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바깥일에 쏟아 붙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마음 한구석은 항상 텅 비어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 두 곳에서 다 신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둘 중 하나 밖에 얻을 수 없다면 저는 가정에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한 인간으로서는 더 행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가정에서도 문제가 심각하고 직장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직장에 가기 싫고, 저녁에 직장이 끝나면 집에 가기 싫어합니다. 퇴근하면 갈 곳이 술집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10년쯤 살다 보면 코끝이 빨갛게 채색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이 네 가지 인생 중 몇 번째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그 인생은 바로 자기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가정에 대한 얘기는 여기에서 생략하고, 오늘은 직장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직장이나 직업을 단순히 생활의 수단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업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게 되니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직장이 삶의 본질이 되어야지 수단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소명인 직업

많은 젊은이들이 생각하듯이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목회자, 사모님, 선교사 등의 직분은 하나님의 일이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종사하고 있는 직업은 세상의 것이라는 말입니까? 직업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많지만 그 중에 하나는 Calling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신(神)의 소명(召命)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천직(天職)이라는 단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맡긴 직분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맡아 하는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여러분의 천직인 것입니다. 적어도 천직인 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진정 신의 소명이라고 할만큼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신부, 목사, 수사, 수녀라면 혹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가 맡아 하는 일 중에서 신의 소명이라고 여길 만큼 의미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 44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왔습니다. 온갖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기능공으로 시작하여 교수의 자리에까지 오면서 10여 종류의 직업을 가져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골로세서 3장23-2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은 그 당시 노예로 일하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업 중에서 가장 고생스럽고 희망도 없고 의미도 없는 노예의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소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 말씀을 적용해 봅시다. 네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라면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종일 근무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책 한 페이지 읽을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한탄하면 먼저 본인의 심신이 어려워지고 그 일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교통순경이 생각을 바꾸어 '내가 오늘 일을 잘함으로써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분 좋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본인의 심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전에 학교에서 똑같은 강의를 하루에 세 번 반복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첫 번째 강의는 힘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강의는 별로 신나지 않았지만 그런 대로 할만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강의실에 들어가기조차 싫었습니다. 이런 때에 생각을 바꾸었더니 새로운 힘이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같은 강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재미없었지만, 그 강의를 처음 듣게되는 학생들이 제 얘기를 듣고 인생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라고 생각하니 세 번 반복해서 강의하는 것도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 여행을 갔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다음 비행기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그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까 생각하다가 오랫동안 뉴욕타임스를 못 읽은 생각이 났습니다. 매점에 들어가 뉴욕타임스 한 부를 들고 50대 중년의 흑인 여인이 서 있는 카운터에 계산하려 갔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저를 보고, 'How are you today?'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사에는 그 부인의 온 정성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I am fine. How are you?' 라고 인사를 하며 돈을 건네자 그 부인은 영수증을 건네주면서 'Have a nice day today.' 라고 다시 축복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Same to you.' 라고 축복을 돌려드리며 나왔습니다. 그분과 제가 스친 것은 약 10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눈 말은 단 두 마디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따뜻함과 온 정성을 제게 다 쏟아주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분은 그 직장에서 가장 말단에 있고, 월급도 제일 작고, 교육도 별로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일을 할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감동을 전해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아도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드리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때 할 만한 가치가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직업은 그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 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할 만큼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일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확신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할만한 맛이 날 것입니다.

3. 최선을 다 하여 탁월성을 추구해야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간 재직하다가 귀국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미국인 동료 교수가 우리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바쁜 생활 중에도 자기 집 뒤뜰에 있는 잔디밭 한쪽을 일궈서 채소를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그 채소밭에서 상추와 고추, 토마토 등을 따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인생의 귀한 교훈 하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상추를 심은 곳에는 상추가 났고, 토마토를 심은 곳에는 토마토가 났고, 고추를 심은 곳에는 고추가 났으며 아무 것도 심지 않은 곳에는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정7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흘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즉,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은 심은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여러분의 위치는 지나온 과거의 매 순간에 그 분야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영어를 얼마나 잘 하느냐하는 것은 매 순간 영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하는 것은 과거 매 순간 성경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가 하는 것은 과거 매 순간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교제하며 살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원만한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과거에 얼마나 사랑과 용서를 심으며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 심리학자인 Kurt Lewi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성과를 내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욕(motivation)과 능력(ability)에 의해서 좌우된다.'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제공해 주는 말입니다. 네 가지의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1. 능력도 대단한데 계속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2. 능력은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
3. 능력은 없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4.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여러 해 전, 자마이카 태생으로 이민 1세대인 콜린 파울이란 흑인이 미 합참의장이 되었습니다. 신문들은 그가 만약 백인이었다면 대통령 감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은 범죄와 빈민의 소굴인 뉴욕 할렘가에 위치한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초청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4성 장군이 되어 리무진을 타고 금의환향하여 후배들에게 특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특강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건설회사에 세 사람의 건설공이 있었답니다. 한 사람은 더운 땡볕에 나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하루종일 열심히 땅을 파며 일을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땅에 삽을 꽂고 다리를 걸친채 '두고 보라고 내가 20년 후에 이 회사의 사장이 될 거야'라고 큰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감독만 사라지면 그늘에 가서 낮잠을 자고 저녁이면 일당을 받아가면서 ‘나는 종일 낮잠만 자고도 이렇게 일당을 다 받아간다'며 자랑했다고 합니다. 20년 후에, 하루종일 땅을 판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삽을 꽂아두고 사장이 되겠다며 큰소리쳤던 사람은 정신병원에 갔고, 나무 그늘에서 요령 피우며 낮잠 자던 친구는 20년 후에도 요령을 피우며 일당을 받아 가는 신세를 계속하고 있더랍니다.

그 다음 그분은 자기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여름방학이 되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해 갔다고 합니다. 당시는 흑인을 대단히 차별하던 때였습니다. 아르바이트 일은 코카콜라회사의 청소부였는데 청소를 깨끗하게 해놓으면 백인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이 검둥이야, 골탕먹어라' 하고는 더러운 물을 엎지르더랍니다. 그것을 닦아놓으면 또 엎지르고 그러기를 몇 번씩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끝내게 되었을 때 그를 유심히 관찰해오던 감독이 "이봐 콜린, 다음 여름방학 때 또 와. 내가 일거리 줄게." 라고 말해주더랍니다. 다음 여름방학에 갔더니 청소 감독의 자리로 승진을 시켜주더랍니다. 또 다음 여름방학 때는 그 보다 더 좋은 자리를 주고요. "흑인으로서 오늘 합참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건에 상관없이 그저 바보스러울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것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열심히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한 시점에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한 발 한 발을 얼마나 착실하게 내딛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몇 해 전에 새로 입학한 대학원생 6명이 제 밑에서 논문을 쓰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사실 제가 학생들에게 굉장히 까다롭게 공부를 시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제 과목 한 강좌를 듣느니 차라리 다른 과목 둘을 듣겠노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다들 내게서 도망가는데 웬일인지 6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5명은 학부에서 가르친 낯익은 얼굴인데 비해 1명은 전혀 모르는 학생이더군요. 알고 보니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모두 정리하고 대학원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제 소문을 익히 들은 그 학생은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저는 '걱정할 것 없다. 자네가 이 시점에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네가 오늘부터 얼마나 한발 한발을 착실하게 딛고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 학생의 실력이 1년이 지나자 놀랍게도 동료들과 비슷해졌습니다. 2년 뒤에 석사학위과정을 끝내고 박사학위 입학시험에서 그 학생만 합격한 것입니다. 지금 그 학생은 서울시내 모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 여러분들, 지나간 세월을 한탄할 것 없습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직업은 우리 생활의 수단이 아니고 생활의 본질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상급학교 입학시험공부를 한번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도 중학교 입학 시험치는 날 친구들을 따라 시험을 쳤습니다. 합격하였지만 합격자 발표하는 날 저녁 아버지가 물어셨을 때 저는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돈도 없는데 잘 됐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시장 바구니 잔돈을 모아 제 입학금을 납부해 주셨고,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중등교육을 마쳤습니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쳤습니다. 다행히 합격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난 그 다음날 아침에 제 반 친구가 어머니를 오시고 제 집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를 따라 그 집에 가서 맛있는 쌀밥과 고기국을 얻어먹고 제 합격한 특권을 그 친구에게 양보하는 각서에 서명해 주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삭의 맏아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서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는 고기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는 고등학교 합격증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저는 정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직업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남들은 대학 입학시험 공부로 여념이 없을 때 저는 전보치는 법 우편 취급하는 것 등을 배우며 3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영어, 수학, 국어 등은 1학년 때 이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을 마친 후 9급 공무원 임시기능직으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에 심취하게 된 것은 그 때였습니다. 많은 성경 말씀이 저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 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어서 6장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여건이 너무 열악하여 “미래의 꿈” 같은 것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대로 매 순간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힘들고 버티기 어려웠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9절의 말씀과 같이 낙심하거나 집어치우지 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한발을 디디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 디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직업학교를 졸업한지 11년 후 제 아내가 대학교수가 되던 해에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입학하여 나이 35에 뒤늦게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해에 미국정부 장학금시험에 합격하여 유학 가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근본적으로 기초가 약했지만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과 같이 느껴지던 미국 대학원과정도 단시일에 끝내게 되었고 John H. Edwards Fellow라는 최고의 영예까지 받으며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명문학교라고는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제가 미국MIT와 KDI에서 연구하게 되었고, KAIST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가르친 후 지금은 고려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보다는 열심히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따라 열심히 살았지만, 심고 가꾼다고 저절로 거두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씨를 심고 잘 가꾸더라도 비와 햇빛이 적당히 공급되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열심히 살았지만 때를 따라 베푸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형광등 인생

열심히 노력하여 얻어지는 전문성인 실력은 학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학습은 경험을 통한 학습입니다. 두 살 먹은 아이는 뜨거운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요리하는 곳에 와서 자꾸 불을 만지려고 합니다. 엄마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접근합니다. 이런 경우 그 아이가 가장 확실하게 학습하는 것은 약간 뜨거운 냄비에 손을 얹어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불 근처에 오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경험은 가장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70, 80년 인생을 살아봤자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험을 통해서만 학습하는 사람을 형광등 인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깨달음이 한참 후에야 오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IMF 이전의 일입니다. 졸업을 앞둔 한 학생이 취직을 부탁하려 저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다들 좋은 대기업에 취직이 되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취직을 시켜달라고 찾아온 것이 이상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서류를 내면 서류 심사에서 계속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성적이 4.5 만점에 겨우 1.73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4.5 만점에 겨우 1.73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적표는 학생이 자기 생활에서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성실하지 않는 학생을 아무도 채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미안해, 나도 자네를 취직 추천해 줄 수 없네. 내가 자네를 추천해 주면 그 회사는 나를 믿을텐데, 나는 자네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네." 그때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1학년 때부터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하고 후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4년 형광등 인생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1학년 때를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대가 되어서야 20대의 일을 후회하는 30년 형광등 인생이 많습니다. 30년 후에야 불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한 50대 남자 분이 운전기사로 일하기에는 심각한 신체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해가 지면 앞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안경을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주 교통사고를 냈고, 또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막상 감옥에서 나오면 다른 일은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다시 운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또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고를 낸 후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분은 '내가 젊었을 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 이 고생 안하고 살텐데‘ 라며 후회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만 학습하는 사람은 형광등 인생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부를 통하여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공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경험을 짧은 시간에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공부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책이란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을 집약한 것입니다. 제가 첫 번째 쓴 책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15년간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니 그 책을 쓰기 위해 족히 20년간의 공부와 연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제 책에는 전 세계의 유명한 선배학자들이 수 십년 동안 경험하고 연구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책을 한 학기 동안에 다 공부해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년간 경험하고 연구하고 고민한 것들이 그 책 한권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것을 한 학기에 소화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결국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다 농축해 버리는 “축시(縮時) 및 축지법(縮地法)”을 사용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형광등 인생이 되지 않고 착실하게 성장하려면 책을 잠시도 손에서 떼어서는 안됩니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학교에서만 공부하고 졸업하면 공부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계획을 짜주는 역할 정도를 할뿐입니다. 공부는 우리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학습은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한다는 것은 책을 보는 것입니다. 요즘 좋은 책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으세요. 최근 보도에 의하면 지식은 매 7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추세로 증가하면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 4년 동안 배운 지식의 반 정도는 벌써 진부한 지식이 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잠시도 공부를 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의 확신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축복되고 아름다운 가를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순간 순간 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에 그 의사결정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할 수 있도록 가치기준을 마련해주는 것도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겨울이었습니다. 군 입대 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들어갈 때 신약성경을 한 권 가져갔습니다. 그 전에도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한번도 그 지루한 마태복음 1장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지루하게 계속되는 익숙지 못한 이름들의 나열은 시작서부터 저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마태복음 1장을 끝내고 2장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생활을 7년 정도 했지만 신앙이 없었던 저는 성경을 펴 읽기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 계십니까? 저는 알지 못하지만 일단 계신다고 가정하고 이 성경을 읽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계신다면 저로 하여금 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3개월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처음으로 통독하게 되었고, 두 번째는 두 달만에, 세 번째는 한 달만에 통독했습니다. 가장 빨리 신약성경 전체를 통독했던 것은 8일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첫 일년 반 사이에 약 30번 정도 신약성경을 통독한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말씀에는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쳐놓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에는 의문부호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계속 읽으면서 앞에서 표시한 의문에 대한 답을 뒤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도 없었고 또한 성경공부에 대한 책도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독학으로 성경 본문을 읽어 나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남에게 배우지 아니하고 남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성경본문을 열심히 읽은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동안 읽다가 발견한 것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말씀이 다른 복음에도 나오고 하물며 서신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노트를 사서 관련되는 구절들을 상호 연결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후 서점에 갔다가 성경사전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전에 그러한 정리가 벌써 다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성경 전체의 흐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구의 전도를 받아 믿게 된 것도 아니고, 위기를 당하여 하나님을 붙잡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 가를 알게 되었고,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인생에게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성경말씀이 오늘까지 저로 하여금 주위환경 변화에 상관없이 신앙을 확실히 지킬 수 있게 해주었고, 불안, 두려움, 허무, 욕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5.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이 시대 우리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또 한가지 갖추어야 할 측면은 삶에 있어서의 정직성입니다. 1997년 말 경제위기를 맞게 되자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체결한 길지 않은 약정서에는 같은 단어가 무려 7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투명성의 결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사회 어디를 보아도 부정부패와 거짓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의 부패, 은행과 기업간 거래에 있어서의 뒷거래, 기업간 거래에 있어서의 리베이트, 공금지출에 있어서의 부정직, 접대비의 낭비, 부실공사 등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부정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고급요정이 잘 되는 것은 직장의 돈으로 흥청망청 낭비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기관의 경영책임을 맡고 있을 때 간부들과 공식적인 회식을 근처 일본음식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점에는 비싼 것부터 상당히 싼 것까지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관장인 제가 먼저 주무해야 한다기에 저는 제일 값이 싼 5천원짜리 냉동대구탕을 주문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직원이 “소장님 생 대구탕이 더 맛있습니다”라고 조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값을 보니 두 배나 비싼 것이었습니다. “저는 냉동 대구탕이 더 맛있습니다.”라고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회식을 할 때마다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제가 주문하는 것 보다 비싼 것을 주문하는 직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직원들에게 “공식적 회식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불하는 것이니 자기 호주머니에서 낼 수 있는 수준 이상을 쓰지 말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그 기관에 일하던 2년 반 동안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예산을 담당하는 간부가 “소장님 생각은 맞습니다만 다른 기관 사람들에 비해 우리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고, 예산이 남게 됩니다”라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산이 남으면 반납하세요.”라고 제 생각을 분명하게 말해주었더니, “예산을 반납하면 내년 예산에서 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라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정직하고 검소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원칙을 제가 철저히 지키게 되었던 것은 미국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명문학교였던 그 곳에는 출장을 가는 경우 ‘학교의 품위에 맞는 수준을 유지’하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미국인 교수와 함께 미국상무성의 부탁으로 해양산업을 연구하기 위해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출장을 가면서 그 교수는 키가 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은 차를 렌트하고, 허름한 호텔에 머물면서, 음식도 비교적 싼 것으로 주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 돈이라면 내 마음대로 쓰지만 납세자의 공금이니 아껴 써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상당히 시들어 버렸지만 그 조상들이 신앙을 바탕으로 정립해놓은 기독교적 정직성과 검약이 그대로 그들의 삶 안에 깊이 내재화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의 4분지 1 정도 된다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썩어갔습니까? 4사람 중 한 사람이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코너에서 정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이 사회가 이렇게 부패해 질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정직해야할 그리스도인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투명성이 결여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관계하고 있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Catch phrase중 하나가 ‘정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정직해야 하는데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나라의 비극적 현실입니다. 밤거리에 십자가의 물결이 온 땅에 넘쳐흐르고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는 모습은 별로 보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최근 메스 미디아를 장식한 큰 사건들에는 대개 기독교인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닷물은 대단히 짭니다. 그러나 바닷물에는 소금이 3.4%밖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소금이 3.4%만 들어있어도 그렇게 짠데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일컫는 그리스도인이 20%나 되는 이 사회가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5장13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독교를 지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99년 어느 사회조사 전문기관에서 종교에 관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종교로부터 전도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80%가 “한번 이상 기독교로부터 전도를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만약 앞으로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종교를 갖겠느냐”고 다시 질문하니 40%의 사람은 ”불교를 믿겠다“고 대답하였고, 30%의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겠다“고 대답하였고, 기독교를 믿겠다는 사람은 제일 낮은 20% 정도였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짓을 보니 당신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사회를 짊어지고 가야할 여러분들은 의욕이외에도 정직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살면서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사회의 중요한 책임을 맡길 수 있습니다. 서양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덕목을 가지고 통치해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덕성에 문제가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서양사회입니다. 특히 정직은 지도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미래사회학자 Francis Fukuyama는 그의 “신뢰”라는 책에서 한국사회를 정직성이 결여된 신뢰가 없는 사회라고 지목하고 있고 이러한 사회는 발전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직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그 그리스도인들이 몸담고 있는 관청, 기업, 은행, 사업장 등을 정직한 조직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정직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시편 112편1절 말씀을 삶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며 살면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변수가 들어있습니다. 경외와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대할 때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움의 존재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고로 경외라는 말을 영어에서는 fear(두려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항상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실수를 적게 할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계명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즉, 계명은 우리가 살아야할 길과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1상한의 사람은 경외심도 강하고 계명을 열심히 공부하여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2편1절에서는 이런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에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정직하게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여 묵상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가며 살 수 있습니다.

제2상한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면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외견상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삶의 뒷면에는 구린내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훌륭한 설교와 체계적인 성경공부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역을 하면서도, 성적 부도덕, 경제적 부패 등으로 그 삶이 대단히 부끄러운 위선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영적으로 훌륭한 지도자라고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제3상한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지만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신을 섬기며 두려워하는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혹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하여 전혀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설교만 듣고는 신앙이 별로 자라지 못합니다. 스스로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최근 QT프로그램이 많이 보급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4상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말씀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속하겠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크게 즐거워함으로써 복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 다는 사실을 알아 항상 정직하게 살기 바랍니다.

6. 최선의 삶과 정열

이 과정에 참여한 여러분들은 이십대나 삼십대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30년 내지 40년 정도 이 사회를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이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젊은이들에게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한 젊은이가 “교수님, 꼭 그렇게 빡빡하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으면서 이해인 수녀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바쁜 속에도 기쁨과 평화가 있다.
유순한 마음, 좋은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때는
정신없이 바빠도 짜증이 나지 않고 즐겁다.
나의 삶이 노래가 된다는 것은 그럭저럭 시간을 메우는데 있지 않고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며 정성껏 살아가는 데 있는 것이다.

유순한 마음, 좋은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아무리 정신없이 바빠도 즐거움과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또한 사무엘 울만이란 시인이 쓴 청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 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일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의 청년보다 60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땀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60세이든 16세이든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도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라는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20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라는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80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일 것이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일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열정이나 의욕을 영어에서는 Enthusiasm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뜯어보면 In Theo 라는 두 단어가 합쳐 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in Theo) 소명으로 받아드릴 때 의욕과 열정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7. 한 쪽문이 닫히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풍을 만난 돛단배 같이 우리의 삶이 항상 순탄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외부환경의 변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면 실업률은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의 실업률이 10% 내외라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의 실업률이 6.5% 정도라니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갑니다.

선진국의 경우 한 사람이 평생을 사는데 서너번 정도는 실직을 당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 Guidepost라는 잡지에 한 미국인 교수가 실직을 당한 후 겪은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10여 년간 가르치던 대학에서 실직을 당한 후 일년이 넘도록 교수채용 공고가 날 때마다 이력서를 보냈지만 아무 대학에도 자리를 얻지 못한 나머지 교수로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사위가 경영하는 자동차수리공장에 견습수리공으로 취직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진국에서의 경우 그런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그 동안 성장 일변도로 걸어왔습니다. 이제 고도성장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금년에 6~7% 정도 반짝 성장하는 것은 전년도에 너무나 성장을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IMF가 지나가도 이전만큼 성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반드시 구조조정이 되어야만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았던 환경변화로 오래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는 하던 사업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 Sound of Music에 보면, 수녀인 마리아가 해군대령 집의 가정교사로 갔다가 짝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대령에서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너무 상심한 나머지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갑니다. 마리아가 울며 자기의 상심한 심경을 털어놓을 때 수녀원장께서는 이런 말로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문을 열어 주신다.” 많은 사람들은 문이 닫혔을 때 닫힌 문만을 향해 분노하고 두드리느라 뒤쪽에 열린 다른 문을 못 볼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한쪽 문이 닫히거든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저는 44년 전 기능공으로 일했던 첫 직장의 동료들이 만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참 오래 만에 친구들을 만나 보니 이미 환갑을 한참 전에 넘겼고 대부분이 정년 퇴임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9급 말단 임시직으로 일하던 그곳을 그만 두게 된 이유는 예산이 깎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리의 분위기가 한참 옛날 이야기로 무르익어 갈 무렵 한 친구가 “김인수 교수, 너는 뭐야? 우리는 다 은퇴해서 이렇게 사는데 너는 어떻게 교수가 되어 아직도 활개를 치고 다니며 사느냔 말이다” 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는 ”너희들이 나를 계속 붙여주었더라면 그대로 남아있었겠지. 너희들이 부쳐 주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그만두고 나와 이리저리 헤매다가 보니 여기까지 온 거야“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그때 그 문 닫힌 게 얼마나 다행했는지 모릅니다. 그 문이 닫히지 않았더라면 거기 계속 있었을 테니까요.

젊은 여러분들, 혹시 한쪽 문이 닫히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열어주신 다른 쪽 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그 문으로 나가 열심히 살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8. 축복을 함께 나누어야

이렇게 열심히 살면 대개의 경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잠언 10장4절에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얻은 것이라고 우리 마음대로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사랑의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신의 장애로 말미암아 노력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받은 바 축복을 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고, 부익부 빈익빈에서 발생하는 영구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희년 제도를 두어 모든 빗을 무조건 탕감해주고,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는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평생 남을 위하여 살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찰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경제생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열심히 일하라, 둘째, 열심히 일하여 생긴 재물을 열심히 아껴 써라. 셋째, 열심히 아껴서 남는 것은 열심히 남과 나누어라. 참으로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우리가 독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단지 우리가 잠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누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잠언11장24절에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스스로의 마음이 풍족해지며, 주위사람들도 존경하게 되고,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사랑을 배우며 자라게 되어 좋은 신앙인격을 갖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축복이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일이 더 잘 되게 마련입니다. 또한 혹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주기 때문에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여 제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마음이 인색하여 평안을 잃게 되며, 자녀들도 이기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새 생명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를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된 이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종일 병든 자와 귀신 들린자들을 치료하시다가 나중에는 그 일을 다 그만두고 전도를 하려 갈릴리로 몰래 도망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8절에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을 고치는 사랑의 생활을 하시던 예수께서 속 사람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뒤에 두고 갈릴리로 가십니다. 39절 말씀을 보면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고 쓰여 있습니다. 속 사람을 고쳐주려고 가시다가 귀신들린 자들을 만나자 또 겉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삶과 전도의 삶을 동시에 하시며 살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모두가 전도입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 하여 사는 성실한 삶도 믿는 사람이 가진 온전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재물과 재능과 시간을 들여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생활도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보이는 삶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씀을 준비하여 복음의 멧세지를 전하는 것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장15절에 보면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적혀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면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대답할 준비를 잘 해 두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듯이 그것이 우리의 이웃에게도 큰 축복이 되도록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로마서 2장24절에서 보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되었도다” 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로마서12정2절의 말씀 같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마태복음5장16절 말씀 같이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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