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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iSo that you also may know how I am and what I am doing, jTychicus the beloved brother and faithful minister in the Lord will tell you everything. 22 I have sent him to you for this very purpose, that you may know how we are, and that he may kencourage your hearts.

23 lPeace be to the brothers,5 and mlove with faith, from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24 Grace be with all who nlove our Lord Jesus Christ with love incorruptible.

i Col. 4:7–9

j Acts 20:4; 2 Tim. 4:12; Titus 3:12

k Col. 2:2

l Gal. 6:16; 2 Thess. 3:16; 1 Pet. 5:14

5 Or brothers and sisters

m [Gal. 5:6; 1 Thess. 5:8]

n [1 Cor. 16:2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6:21–24.

 

21-22절) 바울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인 두기고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보냈다. 그를 통해서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두디고는 바울이 신뢰하는 일군으로 신실하게 바울을 섬겼다. 아마도 에베소 성도들에게 원본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골 4:7-8절 참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두기고의 역할을 볼 때 바울은 비슷한 시기에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향해서 편지를 썼고 이를 두기고가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본 절과 골로새서의 구절은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Tychicus the beloved brother had served Paul faithfully for some time (see Acts 20:4; Col. 4:7; 2 Tim. 4:12; Titus 3:12) and probably carried the original letter to Ephesu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4.

 

These two verses echo Col 4:7–8, suggesting that Paul wrote both Ephesians and Colossians around the same time and that Tychicus carried both letters to the churches in Asia Mino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1.

 

바울은 지금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편지를 보내면서 동시에 자신이 신뢰하는 일군을 통해서 자신의 소식을 전함으로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또한 에베소 성도들을 위로하기를 원했다. 

 

23-24절) 바울의 마지막 축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구한다. 

에베소서 서두에서 바울은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구했다. 

(엡 1:2, 개정)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 그는 교회에 평안, 사랑, 믿음, 은혜를 기원하고 있다. 

(엡 6:23-24, 새번역)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⑧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 ⑧그, '형제들에게'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⑨ / ⑨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절 끝에 '아멘'이 있음』

 

은혜와 평강은 바울의 인사말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 ‘평강의 주’라는 표현을 또한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본문에서 믿음을 겸한 사랑(Love with faith)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믿음과 동반되는 사랑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축도를 할때 사용되는 고린도후서 13:14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울 구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애써서 믿음을 동반한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엡 1:15절과 연결되는 표현으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 혹은 교회 공동체원들의 신심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그들의 사랑의 소식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편지의 마지막에 그들의 이러한 소식이 지속될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최선을 다해서 믿음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 은혜를 구함으로 이들이 더욱 이러한 덕목들을 잘 수행해 나갈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마가편”이라는 말이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하는 것이다. 이미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잘 하도록 격려하고 복을 빌고 있는 모습이다. 

The grace and peace which figured in the initial greeting are repeated here in the final blessing, but in reverse order and less closely tied together. “Peace” is mentioned similarly in the letter-closing of Galatians (Gal. 6:16);105 more fully, the presence of “the God of peace” is the substance of the benedictions of Rom. 15:33 (cf. 16:20); Phil. 4:9; 1 Thess. 5:23, 106 of “the Lord of peace” in 2 Thess. 3:16, and of “the God of love and peace” in 2 Cor. 13:11.

“Love with faith” is love accompanied by faith. “Love” in a final blessing is not surprising, whether it be the love of God (as in 2 Cor. 13:14) or Paul’s own love (as in 1 Cor. 16:24). But what is the force of “faith”? Most probably its present collocation with love takes up the thanksgiving of Eph. 1:15, in which the apostle expresses his pleasure at news of the readers’ faith or fidelity as members of the Christian fellowship and their love shown to “all the saints.”107 At the end of the letter he prays that these qualities may continue to characterize them. Such qualities would be their response to the peace and grace bestowed by God; like all the Christian virtues, they have their source in God—“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cf. Eph. 1:2).

105 Cf. 1 Pet. 5:14; 3 John 15.

106 Cf. Heb. 13:20.

107 See pp. 267–68 with n. 110 for the possibility that “your love toward all the saints” has found its way into the text of Eph. 1:15 under the influence of Col. 1:4.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414–415.

 

바울의 편지 12통에는 서두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인사를 하고 있다. 그의 모든 서신의 마지막을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또한 일부 서신은 평강의 인사말을 포함한다. 하지만 에베소서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사랑을 마지막에 표현한 경우는 없다. 이는 바울이 더욱 분명히 하나님께서 평안과 사랑의 원천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Twelve of Paul’s letters have the greeting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at the beginning.5 All his letters conclude with a grace benediction, and several either include peace in the closing benediction or have some focus on peace at the end of the letter. But no other letter has the expression “peace … from God” or “love … from God” at the end. This is an obvious effort to underscore God as the source of the peace and love that is extended.

5 In 1 Thessalonians the greeting is merely “grace to you and peace.” The Pastorals are slightly differen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63–364.

 

본문 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아프타르시아’라는 단어로 오염되지 않음, 불변함, 불멸의 라는 의미이다. 본문이 ‘불사의 사랑’, ‘불멸의 사랑’, 혹은 ‘진실한 사랑’ 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변함없는 사랑이 어디에 연결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구할 것인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것인지말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라고 표현해서 이러한 사랑을 우리 성도들에게 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이 변함없는, 불멸의라는 단어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스도는 이미 죽음일 이기시고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바로 그 불멸의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다. 

A second translation difficulty comes at the end of verse 24. If translated literally the text reads: “Grace be with all those loving our Lord Jesus Christ in immortality.”9 These words emphasize the necessity and value of loving Christ, but what is the intent and connection of “in immortality”? The niv has taken “in immortality” as a description of those who love the Lord and translated the phrase as “with undying love.” The kjv has “in sincerity”;10 the neb has “grace and immortality.” The problem is primarily understanding where “in immortality” should be connected. Several possibilities exist:

(1) Connect the words to “loving,” as the niv has done.

(2) Connect them to “grace,” as the neb has done.

(3) Connect them to “the Lord Jesus Christ,” emphasizing that Christ already reigns in immortality.

(4) See them merely as a general and cryptic way to refer to the eternal consequences of the gospel.11

The third option seems the most likely, both grammatically and theologically. With this focus, readers are reminded of Christ’s exaltation (1:20–23), of their own position with Christ (2:5–6), and of the promise that all things will be summed up in Christ (1:10). God’s grace does not depend on our undying love, but on his faithfulness to his promise.12

9 A negative version of this statement appears in 1 Corinthians 16:22: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kjv King James Version

10 This should be excluded, for the other six occurrences of the Greek word all refer to immortality.

neb New English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11 See Robinson, St. Paul’s Letter to the Ephesians, 138; Caird, Paul’s Letters From Rome, 94.

12 See Ralph Martin, “Ephesians,” The Broadman Bible Commentary, ed. Clifton J. Allen (Nashville: Broadman, 1971), 177.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6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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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Stand therefore, rhaving fastened on the belt of truth, and s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15 and, tas shoes for your feet, having put on the readiness given by the gospel of peace. 16 In all circumstances take up uthe shield of faith, with which you can extinguish all vthe flaming darts of wthe evil one; 17 and take sthe helmet of salvation, and x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18 praying yat all times zin the Spirit, a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To that end, bkeep alert with all perseverance, making csupplication for all the saints, 19 and dalso for me, that words may be given to me in opening my mouth eboldly to proclaim fthe mystery of the gospel, 20 for which I gam an ambassador hin chains, that I may declare it boldly, as I ought to speak.

r 1 Pet. 1:13; [Isa. 11:5]; See Luke 12:35

s Isa. 59:17; 1 Thess. 5:8; [Isa. 61:10; 2 Cor. 6:7]

t Isa. 52:7; Rom. 10:15; [Ex. 12:11]

u [1 John 5:4]

v [Ps. 120:4]

w See Matt. 13:19

s [See ver. 14 above]

x Heb. 4:12; [Isa. 49:2; Hos. 6:5; 2 Cor. 6:7]

y Luke 18:1

z Jude 20; See Rom. 8:26

a Col. 4:2–4

b See Mark 13:33

c 1 Tim. 2:1

d Col. 4:3; 1 Thess. 5:25; 2 Thess. 3:1; [Isa. 50:4]

e See Acts 4:29

f ch. 3:3

g See 2 Cor. 5:20

h See Acts 28: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6:14–20.

 

14-17절) 하나님의 전신 갑주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

지금 바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러 장비들을 통해서 악한 세력들과 대적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적인 자원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진리와 의(14)

복음(15)

믿음(16)

구원, 하나님의 말씀, 성령(17)

앞서 13절을 통해서 말한바 이 특성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또한 메시야의 특성으로 이제 이 특성을 그리스도인들이 구비해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살전 5:8, 개정)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14절) 앞서 11, 13절에서 대적들 앞에서 굳게 서서 싸움을 하는 군사들을 묘사했듯이 본문에서도 악한 대적들과의 영적 싸움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설것을 말한다. 

먼저 진리의 띠로 허리를 단단하게 맬 것을 명한다. 우리가 힘을 쓰기 위해서 허리가 중요하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기구를 들기위해서 사람들은 허리띠로 허리를 단단히 감싼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의 허리를 진리로 단단히 감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의의 호심경, 가슴을 보호해주는 갑옷을 입을 것을 말한다. 전투에서 병사들은 갑옷을 입는데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중의 하나가 바로 가슴이다. 왜냐하면 가슴에는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여러 중요한 장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기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호심경(breastplate), 흉배를 입는다. 영적 전투에서 우리의 가슴을 방어해줄 수 있는 흉배는 바로 의이다. 

Appropriate the truth of the gospel (1:13; 4:21) and be truthful with others (4:15, 25; 5:9). righteousness. Hold fast to God’s gift of justifying righteousness (Rom 3:22; 4:24; cf. Eph 1:7; 2:16), and do right and practice justice toward others (4:24; 5:9; 6:1).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0.

 

15절)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한 신발을 신어라. 

복음들고 산을 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발을 준비해야하고 언제든지 나아가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롬 10:14-15, 개정)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사 52:7, 개정)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Be ready for battle by appropriating the gospel, with its focus on peace vertically with God (2:1–10) and horizontally with other people (2:11–2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0.

 

16절)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이를 통해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 

불화살은 나무 방패나 다른 방어물을 파괴시킨다. 하지만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공격을 능히 소멸한다. 이처럼 악한 세력들을 여러 형태로 불화살을 쏘아댄다. 비난과 공격, 두려움과 거짓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하는데 이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바로 이 싸움의 대장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우리는 이 불화살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당시 로마의 방패는 나무로 만들어져서 가죽으로 둘러있었다. 그래서 불화살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물로 적셔서 사용해야만 했다 

 shield. The Roman shield, made of wooden planks and covered with leather, could be soaked in water so as to extinguish flame-tipped arrows. faith. Trust steadfastly in God’s resources (1:19–20; 3:17), and hold firm to the community’s common set of beliefs (4:5, 13). See 1 Pet 5:8–9. flaming arrows. Examples include demonic attacks, temptations, and rage (4:26–27) that confront individuals, and false teachings and divisions that threaten the community’s unity.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0.

 

17절) 구원의 투구

(사 59:17, 개정)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투구를 쓴다. 가슴과 아울러서 우리의 신체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머리이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여러 전신갑주중에 유일하게 공격 무기가 바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예리한 양날의 검처럼 잘 다루어야 한다. 

(히 4:12, 개정)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 말씀의 검을 든 사람은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이 검이 먼저 예리하게 날이 서도록 연마해야할 뿐만 아니라 검의 칼집또한 준비되어야 한다. 칼이 전문성이라면 칼집은 겸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집이 제대로 준비되어지지 않은 칼은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나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라고 말한다. 어둠의 영과의 싸움은 우선적으로 말씀으로 대적하는 것이다. 앞서 진리와 의,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의 요소들이 방어를 위해서 절대적인 것이라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을 공격하여 제압할 영적인 도구임이 분명하다. 

salvation. Appropriate the salvation that God has already accomplished for believers in Christ (2:5–6). sword of the Spirit. A weapon for self-defense and offense. Its power and effectiveness come from the Spirit (Heb 4:12). the word of God. The gospel (1:13).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0.

The only weapon of attack that is included in the equipment is the sword. It is the “sword of the Spirit,” the sword of the breath of God. Of the expected prince of the house of David it is said in Isa. 11:4 that “he shall smite the earth with the rod of his mouth, and with the breath of his lips he shall slay the wicked.” This prophecy is taken up in the vivid picture of the conquering Word of God in Rev. 19:15: “from his mouth issues a sharp sword with which to smite the nations.”75 But now the sword is used not to smite the earth or slay the wicked, but to repel the spiritual foes of the people of God. “God’s word” is his utterance—“every word that proceeds from the mouth of God” (Deut. 8:3 LXX). It is through his Spirit that his word is both uttered and received on earth. Perhaps the best example of the use of his word to repel spiritual foes is seen in Jesus’ employment of the text just quoted (Deut. 8:3) to repel the tempter in the wilderness.76 The divine utterance, the product of the Spirit, lends itself readily to the believer who has laid it up in his heart77 for effective use in the moment of danger against any attempt to seduce him from allegiance to Christ.

75 But in Rev. 19:15 the sword is an eastern ῥομφαία (scimitar), not a Roman μαχαίρα, as here.

LXX Septuagint

76 Matt. 4:4 (the quotation is shorter in Luke 4:4).

77 Cf. Ps. 119:11; also Col. 3:16a.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409–410.

 

First-century relief of Roman soldiers in their armor (belt, breastplate, boots, shield, and sword). Paul compares the armor of a soldier with the armor of God in Eph 6:10–17.

 

18-20절) 본문을 통해서 영적 전투의 목록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무기중의 하나인 기도에 대해서 설명한다. 

 

18절) 본문 14절에서 '모든, 항상, 항상, 여러’라고 표현된 단어는 모두 영어로는 ‘all’이라고 표현된 단어로 보편적으로 언제나 모든 노력을 다하여 모두를 향해서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모두를 향하여 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는 예배이고 성령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신다.  

(요 4:23-24, 개정)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롬 8:26-27, 개정)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Prayer in the Spirit is a form of worship (John 4:23–24) enabled by the Spirit of God, who intercedes on behalf of the person who prays (Rom. 8:26–2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4.

 

19-20절) 바울의 기도제목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기도 제목을 말한다. 이는 자신에게 말씀을 주사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위해서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매임의 고난이 도리어 담대히 해야 할 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복음의 비밀, 복음은 비밀이다. 그래서 이 비밀은 드러나왔고 이제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감추는 것이 이 비밀의 목적이 아니었다. 감추어 두었다가 이제 때가 되면 공개적으로 선포되어 모든 이들로 알게 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드라마나 영화의 예고편과 같다. 결정적인 요소는 숨겨두었다가 개봉일이 되면 모두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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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Finally, ebe strong in the Lord and in fthe strength of his might. 11 gPut on hthe whole armor of Go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against ithe schemes of the devil. 12 For jwe do not wrestle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k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lthe cosmic powers over mthis present darkness, against nthe spiritual forces of evil oin the heavenly places. 13 Therefore ptake up the whole armor of God, that you may be able to withstand in qthe evil day, and having done all, to stand firm.

e Rom. 4:20 (Gk.); 2 Tim. 2:1; [1 John 2:14]; See ch. 3:16

f ch. 1:19

g ver. 14; Job 29:14; See Rom. 13:12

h ver. 13; [2 Cor. 10:4]

i ch. 4:14

j See 1 Cor. 9:25

k ch. 1:21

l See ch. 2:2

m Luke 22:53; Col. 1:13

n [ch. 3:10]

o See ch. 1:3

p [1 Pet. 4:1]

q ch. 5: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6:10–13.

하나님의 전신갑주

10-13절)  끝으로 바울은 우리가 주안에서와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할 것을 구하고 있다. 이 시대가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로 이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4:24절에서 새사람을 입을 것을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이다. 

(엡 4:24, 개정)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전신갑주는 ‘파노플리아’로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갖춘 장비 전체를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이 전신갑주의 이야기를 들으면 로마의 군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 부분을 구약의 이사야서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메시야가 전신갑주를 입은 것으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 59:17, 개정)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사 11:4-5, 개정)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어 바울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혈과 육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이 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통치자들,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항하여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인간들과 그 뒤에서 이들을 주장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이 대적들이 하나님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님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해제시키셨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골 2:15, 개정)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엡 1:19-21, 개정)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This list of spiritual rulers, authorities, and cosmic powers (see 3:10) gives a sobering glimpse into the devil’s allies,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who are exceedingly powerful in their exercise of cosmic powers over this present darkness. And yet Scripture makes clear that the enemy host is no match for the Lord, who has “disarmed the rulers and authorities and put them to open shame, by triumphing over them in him” (Col. 2:15; see also Eph. 1:19–2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3.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적은 초인간적인 영적인 세력들이기에 인간적인 방편과 능력에 의존하여 그들을 대적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에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다라는 표현은 마치 오와 열을 맞춘 군인이 대적들의 공격에 맞서서 후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신갑주를 취하고 방패를 들고서 그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한다. 

이당시 로마의 전술이 이러했다. 방패를 가지고 진영을 갖추어서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내고 앞선 병사가 쓰러지만 다른이가 그 자리를 지키는 형태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 쓰러지면 진영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서 상대방의 공격, 활이나 창의 공격을 막아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을 받아내고 나서 이제 서서 공격을 하게 된다. 

Because the Christian’s enemies are superhuman spiritual forces, he cannot rely upon mere human resources but must take up the whole armor of God (see note on v. 11). The divine armor and “sword of the Spirit”—which belong to the Lord himself and to his Messiah in Isa. 11:4–5 and 59:17—are made available for believers. withstand. Along with “stand” in Eph. 6:11 and stand firm later in v. 13, Paul portrays Christians as soldiers in the battle line holding fast against the enemy’s charg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3.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싸우는 상대가 어떤 대상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만으로도 힘겹다. 먹고 사는 문제, 그 과정에서 겪는 불공정과 부당한 오해들. 그런데 이 혈과 육의 싸움뒤에 어둠의 권세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혈과 육의 싸움과 영의 싸움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의 배후에 악의 영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는 세력들, 그 이면을 자리잡고 있는 힘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영적 싸움이다. 어떤 영의 지배를 받느냐가 그사람의 세계관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또한 신본주의를 빙자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선택의 순간순간에 이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를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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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Bondservants,1 obey your earthly masters2 with fear and trembling, wwith a sincere heart, xas you would Christ, not by the way of eye-service, as ypeople-pleasers, but as bondservants of Christ, doing the will of God from the heart, rendering service with a good will as to the Lord and not to man, zknowing that whatever good anyone does, this he will receive back from the Lord, awhether he is a bondservant or is free. Masters, do the same to them, band stop your threatening, knowing that che who is both their Master4 and yours is in heaven, and that dthere is no partiality with him.

v See 1 Pet. 2:18

1 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also verse 6 likewise for bondservant in verse 8

2 Or your masters according to the flesh

w [2 Cor. 11:3]

x [ch. 5:22]

y See Gal. 1:10

z See Ps. 62:12

a Gal. 3:28; Col. 3:11

b Lev. 25:43

c John 13:13; [Job 31:13–15]

4 Greek Lord

d See Deut. 10: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6:5–9.

 

골 3:22-4:1의 내용과 유사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당시 노예 제도는 고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에 해당하는 제도였다. 에베소 도시의 경우 전체 인구의 1/3이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노동력을 제공했고 해당 가정의 핵심적인 구성원의 일부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앞선 부부나 부모의 관계처럼 가족 관계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속에서 노예들은 일부 제한된 권리만을 가질 수 있었고 착취와 학대의 대상이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이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당시의 사회적 관점에서는 매우 혁명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바울은 노예 제도를 용납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인정하면서 믿는 그리스도인 노예들과 상전들에게 주님안에서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지침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당시의 법적 사회적 질서안에서 어떻게 그들이 행동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영향을 통해서 고대 사회의 노예 제도는 서서히 사라졌다.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권력에 대한 복종의 태도이다. 우리는 문화적, 사회적, 법적 테두리 속에서 인정한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는 만약 합법적인 권력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것을 요구한다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할 경우이다.(행 4:19-20) 

See note on 1 Cor. 7:21. It is estimated that slaves composed   p 2273  about one-third of the population of a city like Ephesus. They were considered an integral part of a family, so Paul’s instructions for slaves were a natural part of his dealing with family relationships. In both Greek and Roman culture, slaves had limited rights and were subject to exploitation and abuse. Paul does not condone the system of slavery but instead provides instructions to believing masters and slaves regarding their relationship to each other in the Lord, and how this should be lived out within the bounds of their social and legal culture. The result, as is often observed, is that slavery slowly died out in antiquity through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see Introduction to Philemon: Purpose, Occasion, and Background). The principles in this passage apply today in terms of submission to any lawfully constituted authority, the only exception being if such a lawfully constituted authority were to require a believer to disobey God’s Word or to fundamentally compromise one’s commitment to Christ (as in the case of Acts 4:19, 20). Christ. It would be natural for Christian slaves to despise their earthly masters in the name of their heavenly one; however, fulfilling one’s earthly obligations is, in fact, service to the Lord (cf. Eph. 6:6–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2–2273.

그리스도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이 종과 상전의 관계를 상대화시킨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변화된 개인은 이후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중요한 원리를 우리는 우리 시대의 노사관계의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다. 

The ultimate lordship of Christ relativizes the slave-master relationship, transforming individuals who will then influence society. Although Paul does not seek to abolish slavery, he nevertheless instructs believers elsewhere not to become slaves, and he encourages slaves who are able to obtain freedom to do so (1 Cor 7:21, 23; see Introduction to Philemon: Occasion and Purpose). While acknowledging substantive differences with the ancient world, we can cautiously apply the general principles from this passage to our various socioeconomic authority structures, such as the workplace, prison, and the military.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9.

 

본문에서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주 언급한 표현이다.(고전 2:3; 고후 7:15; 빌 2:12)

(고전 2:3, 개정)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후 7:15, 개정)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빌 2:12, 개정)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7절) 종들의 순종의 태도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결국 핵심은 주께하듯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마음을 다하여 성실함으로 행해야만 한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눈가림을 당연하게 여긴다.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하지만, 주인이 없으면 딴짓을 하거나 농땡이를 부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이 행할 것을 명령한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미련하다고 하겠지만 이 미련함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방식이다. 

 

8절) 종이나 자유자나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주께로부터 이후에 그대로 받게 될 것이다. 

이타적인 섬김, 주께 하듯 하는 마음을 다한 섬김은 하나님이 무시하시거나 잊어버리시지 않으신다. 주님께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가 종이든 자유자이든 모든 성실한 종에게 똑같이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9절) 상전들아. 

상전들은 종에게 이와 같이 행하고 위협하는 것을 멈춰라. 종들의 상전과 너희의 상전이 되시는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는 것을 알라. 그에게는 사람을 편견을 가지고 취하심이 없다. 

바울은 상전들에게도 종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이 태도, 주께하듯 하라고 명하고 있다. 

고대에는 상전, 주인들이 자신의 노예에 대한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을 때리고 감금하고 팔아넘기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 속에서 바울은 상전들을 향해서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요청한다. 종들에게 요구되어시는 삶의 태도를 동일하게 주인들에게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종을 통제하기 위해서 그들을 위협하는 행동을 그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도 종과 상전의 관계는 아니지만 갑과 을의 관계가 우리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피고용인들을 임금이나 승진을 빌미로 위협하는 경우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하늘에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께서 종이나 상전이나 모두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중심을 보시는 이심을 깨닫는다면 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Masters in antiquity had the power of life and death over their slaves. Beatings, imprisonment, or sale into harsher servitude were other punishments masters meted out. The duty of masters and all in authority is to do good to those in submission and not to take advantage of their authority by threatening them. There is no partiality with the Lord (see 1 Sam. 16:7; 2 Chron. 19:7; Rom. 2:11): he will judge fairly both masters and servant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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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the Lord, for this is right. t“Honor your father and mother” (this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that it may go well with you and that you may live long in the land.” Fathers, do not provoke your children to anger, ubut bring them up in the discipline and instruction of the Lord.

s Prov. 1:8; 6:20; 23:22

t Cited from Ex. 20:12

u Gen. 18:19; Deut. 4:9; 6:7; 11:19; Ps. 78:4; Prov. 19:18; 22:6; 29:17; [2 Tim. 3: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6:1–4.

 

 

1-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십계명의 제 5계명이다. 

(출 20:12, 개정)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 5:16, 개정)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Prov 6:20; 30:17; Rom 1:30; Col 3:20; 2 Tim 3:2.

신명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십계명중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첫번째로 준 명령이며 동시에 유일하게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그 약속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어떤 땅을 말하는 것인가? 일차적으로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말함과 동시에 지상의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거듭남을 통해서 시작되고 장차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우리는 물론 일차적으로 부모 공경이 이 땅 가운데 기업을 받게 될 것으로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되는,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계명으로 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의 시작이며 증거임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오계명을 인용하심을 통해서 랍비들의 전통을 폐하신다.(고르반-막 7:9-13)

(막 7:9-13, 개정)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The fifth commandment was cited by Jesus as an example of a divine ordinance which was nullified in practice by a rabbinical ruling, current in his day, regarding the law of vows (Mark 7:9–13).9

9 The ruling criticized by Jesus, according to which money which might have been used to help one’s parents must not be used for that purpose if it had already been devoted to God (qorbān), was effectively annulled before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A.D. by Eliezer ben Hyrcanus and his colleagues (Mishnah, Nedārîm 9.1).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398.

 

4절) 자녀 양육에 있어서 아비들을 향한 명령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골 3:21에는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들이 낙심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골 3:21, 개정)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본문에서 바울은 노엽게 하지 말 것(부정 명령)을 먼저 말하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것(긍정 명령)을 말한다. 어떤 행동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가? 부모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권위자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자녀의 안전과 생존을 책임지는 존재이다. 반면에 부모들의 경우에 자신의 권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의 어린 자녀들이다. 밖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해도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을 자녀들에게 투사하는 경우에 자녀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특별히 순종적인 자녀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더 부모에게 의존적이고 상처 받기 쉽다. 부모가 생각없이 함부로 아이들을 대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태도로 아이들을 양육할 때 아이들은 노엽게 된다. 이 노여움이 어린 시절에는 힘이 없기에 표출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더욱 반항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일차적으로 자녀를 낙심시키고 나아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부부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가정이 우리들이 가장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공간, 관계가 되도록 해야한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관계야말로 자존감이 자라고 건강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 6:1-9, 개정)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스라엘이 마음에 새겨야할 또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침으로 집에 앉았을때나 길을 갈때, 누워있을때나 일어날 때에 잊지 말고 가르쳐야할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다. 이런 주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칠 때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되고 생명이 길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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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gHusbands, love your wives, as Christ loved the church and hgave himself up for her, 26 that he might sanctify her, having cleansed her by ithe washing of water jwith the word, 27 so kthat he might present the church to himself in splendor, lwithout spot or wrinkle or any such thing, that she might be holy and without blemish.1 28 In the same way mhusbands should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He who loves his wife loves himself. 29 For no one ever hated his own flesh, but nourishes and cherishes it, just as Christ does the church, 30 because nwe are members of his body. 31 o“Therefore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hold fast to his wife, and p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32 This mystery is profound, and I am saying that it refers to Christ and the church. 33 However, qlet each one of you love his wife as himself, and let the wife see that she rrespects her husband.

g ver. 28, 33; [1 Pet. 3:7]

h ver. 2

i Titus 3:5; [Rev. 7:14]

j ch. 6:17; Heb. 6:5; See John 15:3

k 2 Cor. 11:2; See ch. 1:4

l Song 4:7

1 Or holy and blameless

m ver. 25, 33

n [Gen. 2:23]; See 1 Cor. 6:15

o Matt. 19:5; Mark 10:7, 8; Cited from Gen. 2:24

p 1 Cor. 6:16

q ver. 25, 28

r 1 Pet. 3:2, 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5:25–33.

 

앞서 아내를 향한 명령은 3절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편들을 향한 명령은 9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한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으로 자신을 주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25절)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드리는 희생적인, 헌신적인 사랑을 할 것을 바울은 명령한다. 바울은 아내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의 태도는 바로 주님의 방식,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자기 희생적인 방식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방식은 이 시대의 제왕적인 방식으로 군림하는 이 시대의 방식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특히 동양의 가부장적인 문화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착취했다. 당시 1세기의 상황이 이러했다. 여성은 자신의 인권을 보호받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속에서 지금 바울은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 교회는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 머물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Paul now turns to the duty of husbands. He does not command the husband to submit to his wife but instead tells the husband that he must give himself up for her. Thus, husbands are to love their wives in a self-sacrificial manner, following the example of Christ, who “gave himself up for” the church in loving self-sacrifice. Clearly the biblical picture of a husband laying down his life for his wife is directly opposed to any kind of male tyranny or oppression. The husband is bound by love to ensure that his wife finds their marriage a source of rich fulfillment and joyful service to the Lord. Notably, Paul devotes three times more space to the husband’s duty (nine verses) than to the wife’s (three vers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2.

 

26-27절) 

(엡 5:26-27, 개정)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6-27, 새번역)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5:26-27, 쉬운) 『[26]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27] 마치 아름답고 깨끗한 신부처럼 교회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본절은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주님이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주님은 당신의 신부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마치 티나 주름이 없는 깨끗한 신부로 만드신 것이다. 본문의 초점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 정결한 신부로서의 교회를 위해서 주님께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남편이 아내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남편과 아내 모두 거룩해지는 것이다. 

본문의 물로 씻음은 세례를 연상케 한다. 겔 16:1-13절을 보면 여호와는 어린아이인 이스라엘을 씻기시고 양육하시며 마침내 이스라엘을 존쥐한 자리에 높여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시는데 이는 본문에서 말하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혼인 자리에 신부로 세우시는 일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 교회의 궁극적인 거룩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은 부활의 영광 속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십자가 위애서 그리스도의 신성하게 구별된 희생으로부터 나온다. 

The focus in these verses is on Christ, for husbands do not “sanctify” their wives or “wash” them of their sins, though they are to do all in their power to promote their wives’ holiness. Sanctify here means to consecrate into the Lord’s service through cleansing. washing of water. This might be a reference to baptism, since it is common in the Bible to speak of invisible, spiritual things (in this case, spiritual cleansing) by pointing to an outward physical sign of them (see Rom. 6:3–4; and note on John 4:15). There may also be a link here to Ezek. 16:1–13, where the Lord washes infant Israel, raises her, and eventually elevates her to royalty and marries her, which would correspond to presenting the church to himself in splendor at his marriage supper (see also Ezek. 36:25; Rev. 19:7–9; 21:2, 9–11). without blemish. The church’s utter holiness and moral perfection will be consummated in resurrection glory, but is derived from the consecrating sacrifice of Christ on the cros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2.

 

그리스도는 신부된 교회의 죄를 용서하셨을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다. 바로 그리스도는 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May refer to water baptism or the bridal bath (cf. Ezek 16:9). But regardless of interpretation, it is clear that Christ spiritually cleanses his bride, the church (Rev 19:7; 21:9), “through the word” of the gospel (cf. John 15:3; 17:17; Jas 1:18; 1 Pet 1:23). Other passages that speak of cleansing, washing, and water include John 3:5; Titus 3:5; Heb 10:22; 1 Pet 3:21.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9.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단어, sanctify는 약혼의 개념으로 '그에게 그녀를 약혼시키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자신을 주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거룩함, 성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깨끗케 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정결케함은 자신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본문의 씻음이라는 단어는 딛 3:5에만 등장한다. 바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이다. 이는 세례가 물의 씻음을 통한 외적인 깨끗케함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적인 거룩하게 하심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22:16)  

When Ananias of Damascus said to Paul, “Rise and be baptized, and wash away101 your sins, calling on his name” (Acts 22:16), he implied that the external washing symbolized the more important inward cleansing from sin. And the participial clause, “calling on his name”102 (that is, the name of Christ), throws light on the phrase “with the word” or “with a word” in our present text: the “word” or “utterance” is the convert’s confession of the name of Christ as baptism is administered.103 A similar emphasis, in slightly different language, is found in 1 Pet. 3:21: “baptism … now saves you, not as a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as a pledge to God proceeding from a good conscience [a conscience cleansed from sin],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The “pledge”104 in which the convert’s purified conscience makes its response to the saving act of God in Christ is the “word” which here accompanies the “washing of water.”

101 Both imperatives are in the middle voice, βάπτισαι καὶ ἀπολουσαι, where βάπτισαι might mean “get yourself baptized” or (as with verbs of washing) “baptize yourself.”

102 Gk. ἐπικαλεσάμενο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a locution (with Joel 2:32 as a precedent) common in Acts and Paul (Acts 2:21; 9:14, 21; Rom. 10:13; 1 Cor. 1:2).

103 Gk. ἐν ῥήματι (ἐν being comitative). Another possibility is that the ῥῆμα was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Christ by the baptizer on the person being baptized (cf. Acts 15:17 [quoting Amos 9:12]; Jas. 2:7); so H. Schlier, Der Brief an die Epheser, p. 257.

104 Gk. ἐπερώτημα. For the meaning “pledge” see LSJ; cf. also G. C. Richards, “I Peter iii.21,” JTS 32 (1931), 77; E. G. Selwyn, The First Epistle of St. Peter, pp. 205–06. The meaning “prayer to God for a good conscience” is defended by H. Greeven, TDNT 2, pp. 688–89 (s.v. ἐπερώτημα).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388–389.

 

28-30절)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남편들도 이와 같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함과 같이 하라.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양육하고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심과 같이 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는 한 몸이다. 마땅히 우리는 우리 자신, 몸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함과 같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를 이끄시고 이 둘이 한 몸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한몸된 여인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31절) 바울은 본문에서 창 2:24절을 인용한다. 

(창 2:24, 개정)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장에서 말하는 결혼은 이 땅에 죄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이다. 

이 본문은 막 10장과 마 19장에 등장하는 이혼을 반대하는 것과 관련된 논쟁속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연관된다. 

 

 

32절) 그리고 이 둘이 한몸이 되는 이는 놀라운 비밀이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서 한 몸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어지는 것의 비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야 말로 이땅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성취되어지는 공동체인 것이다. 

The imagery of the church as the bride of Christ draws upon the OT imagery of Israel as the bride of Yahweh (Isa 54:5; 62:5; Jer 31:32). Paul goes further in Eph 5:31 by quoting Gen 2:24 to show that Christ and the church are one body (see v. 30). The union of man (Adam in Gen 2) and wife in marriage prefigures and points to the reality of the union between Christ, the last Adam, and his bride, the church. This is a “profound mystery” because no one could have understood Gen 2:24 this way apart from God’s revelation (cf. Dan 2:18–19, 30). The union of Christ and the church finds its ultimate consummation in the wedding of the Lamb and the new Jerusalem (Rev 19:7–8; 21:2, 9).

OT Old Testament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9.

 

So here, Gen. 2:24, which on the surface explains why a man will leave his parents’ home and live with his wife, is taken to convey a deeper, hidden meaning, a “mystery,” which could not be understood until Christ, who loved his people from eternity, gave himself up for them in the fullness of time. In the light of his saving work, the hidden meaning of Gen. 2:24 now begins to appear: his people constitute his bride, united to him in “one body.” The formation of Eve to be Adam’s companion is seen to prefigure the creation of the church to be the bride of Christ. This seems to be the deep “mystery” contained in the text, which remains a mystery no longer to those who have received its interpretation.140

140 Cf. J. Coppens, “ ‘Mystery’ in the Theology of St. Paul and its Parallels at Qumran,” E.T. in Paul and Qumran, ed. J. Murphy-O’Connor (London, 1968), pp. 132–58, especially pp. 146–50.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394–395.

 

33절) 이 본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절을 떠오르게 한다. 

(레 19:18, 개정)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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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zWives, asubmit to your own husbands, bas to the Lord. 23 For cthe husband is the head of the wife even as dChrist is the head of the church, his body, and is ehimself its Savior. 24 Now as the church submits to Christ, so also wives should submit fin everything to their husbands.

z For ch. 5:22–6:9, see Col. 3:18–4:1

a See Gen. 3:16

b [ch. 6:5]

c 1 Cor. 11:3

d See ch. 1:22, 23

e [1 Cor. 6:13]

f [Col. 3:20, 22; Titus 2: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5:22–24.

 

22-24절) 아내들을 향한 명령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되었기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명하심. 

본문에서 말하는 복종이라는 단어는 ‘히포타쏘’라는 단어로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 따르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원레 ‘타쏘’라는 단어는 정렬하다, 지명하다는 의미인데 ‘휘포’라는 단어, 곁에, 아래에 라는 단어와 합성되어 아래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복종은 순종의 동의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은 신이 정한 관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빚진 복종에 달려있다. 게다가 복종은 열등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기능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신것과 같이 역할에 있어서의 다름을 의미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자발적인 복종의 동기는 바로 주님께 하듯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하듯이 그녀는 또한 주님께 복종한다. 

submit. Frequently synonymous with “obey” (cf. 1 Pet 3:5–6). Nevertheless, submission recognizes a divinely ordered set of relationships, and submission to another human is conditioned on the submission that one ultimately owes to God. Moreover, submission does not imply inferiority (cf. Gal 3:28) but a difference in role since Christ functionally submits to the Father (1 Cor 15:28). as you do to the Lord. The motivation for a wife’s submitting voluntarily to her husband. As the wife submits to her husband, she is also submitting to the Lord.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8.

 

NIDNTTE에서 말하는 ‘히포타쏘’의 용례중에

It is of some interest that in Rom 13:1–2, Paul’s important statement regarding civil government, there are four occurrences of the word group: “Let every soul be subject [ὑποτασσέσθω] to the authorities; for there is no authority except by God, and those that exist have been appointed [τεταγμέναι, pass. ptc. of τάσσω] by God. Therefore the one who opposes [ἀντιτασσόμενος] authority resists the ordinance of God [τῇ τοῦ θεοῦ διαταγῇ], and those who resist will receive judgment to themselves” (lit. transl.). Other significant uses of τάσσω include the statement that the nature of Paul’s career of service had been divinely assigned (Acts 22:10, where the implied agent of the pass. vb. is certainly God) and the claim that “all who were appointed for eternal life believed” (13:48).

The compound διατάσσω is used of Jesus’ instructions to his disciples (Matt 11:1), of the orders that a master gives to a slave (Luke 17:9–10), of Emperor Claudius’s edict expelling the Jews from Rome, of Paul’s instructions to the Corinthians (1 Cor 7:17; 11:34; 16:1), and of God’s commands (Acts 7:44; 1 Cor 9:14). The term προστάσσω, with its emphatic and rather official sense of “command,” is used with the angel of the Lord (Matt 1:24), Moses (Mark 1:44), Peter (Acts 10:48), Jesus (Matt 21:6), and God as its subject. In Acts 10:33 it refers to what God has charged Peter to say, and in 17:26 to God’s determining appointed or definite epochs in human history (ὁρίσας προστεταγμένους καιρούς; the KJV has “times before appointed,” following the TR reading, προτεταγμένους). The stronger vb. ἐπιτάσσω is used, e.g., of Jesus’ commands to demons (Mark 1:27; 9:25; Luke 8:31) and to natural forces (8:25), of the order by the high priest Ananias that Paul be struck (Acts 23:2), and of Paul’s instructions to Philemon (Phlm 8).

  V 4, p 462  The freq. usage of ὑποτάσσω calls for special discussion. As with the LXX, only context can determine whether the subordination is compulsory or voluntary. When Luke 2:51 states that Jesus ἦν ὑποτασσόμενος (lit., “was being subjected or being obedient”) to his parents, we should not understand that he was forced into obedience against his will, as it were. Rather, the Son of God was voluntarily submissive to his earthly parents. In several passages, most of which quote or allude to Ps 8:6 (LXX 8:7), God is said to put everything under subjection to the exalted and cosmic Christ (1 Cor 15:27–28; Eph 1:22; Phil 3:21; Heb 2:5, 8; 1 Pet 3:22). We read also that “the creation was subjected [ὑπετάγη] to frustration, not by its own choice, but by the will of the one who subjected it [τὸν ὑποτάξαντα]” (Rom 8:20). In Luke 10:17 the disciples report that demons submitted themselves to them (presumably involuntarily). According to Paul, the sinful mind does not submit itself to God’s law (Rom 8:7). Likewise, the Jews who refused God’s provision of salvation in Christ “did not submit to God’s righteousness” (10:3).

Other uses of ὑποτάσσω (in the pass.) involve Christian behavior in the context of established authority structures. Thus all believers should voluntarily “submit to the Father of spirits” (Heb 12:9). They should also be submissive to governing authorities, both secular (Rom 13:1, 5; Titus 3:1; 1 Pet 2:13) and ecclesiastical (5:5). Christian slaves likewise should freely serve their masters (Titus 2:9; 1 Pet 2:18), wives should be submissive to their husbands (Eph 5:24; Col 3:18; 1 Pet 3:1, 5), and in a more general sense all believers should “submit to one another out of reverence for Christ” (Eph 5:21). On the controversial passages 1 Cor 14:34–35 and 1 Tim 2:11–12, see γυνή G1222 NT 3 (a).

pass. passive

ptc. participle

lit. literal(ly), literature

transl. translate(d), translation

pass. passive

vb. verb

KJV King James (Authorized) Version

TR Textus Receptus (Received Text)

vb. verb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freq. frequent(ly)

LXX Septuagint

lit. literal(ly), literature

LXX Septuagint

pass. passive

NT New Testament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461–462.

 

여기서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는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지 않고 또한 이를 일반적으로 확장하여 모든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든지 혹은 모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창 1:26-28) 또한 약속대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것이다.(갈 3:28-29) 이 복종은 결혼 관계가 건강하고 조화롭게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남편의 권위, 리더십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와 같다. 마치 거울로 비추고 있는것과 같다. 

 

성경은 분명히 결혼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임을 밝히고 있다.(고전 11:3, 창 2:21-24) 그리스도가 그의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구주가 되심은 문화나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듯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남편의 머리됨과 아내가 범사에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해야하는 것도 바뀌는 것이 아니다. 머리라는 단어 ‘케팔레’는 지도자, 머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명백히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를 표현한다. 일부 다른 이들은 이 단어의 의미가 여기에서 ‘원천’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도 남편은 육체적, 영적으로 아내의 원천이 아니다. 50개 이상의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사용된 ‘케팔레’의 용례로 볼 때 “A라는 사람이 B의 머리이다’라는 표현은 A가 B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라는 의미이다. 

The submission of wives is not like the obedience children owe parents, nor does this text command all women to submit to all men (to your own husbands, not to all husbands!). Both genders are equally created in God’s image (Gen. 1:26–28) and heirs together of eternal life (Gal. 3:28–29). This submission is in deference to the ultimate leadership of the husband for the health and harmonious working of the marriage relationship.

5:23–24 the husband is the head of the wife. This is the grounds of the wife’s submission to her husband and is modeled on Christ’s headship over the church. Just as Christ’s position as head of the church and its Savior does not vary from one culture to another, neither does the headship of a husband in relation to his wife and her duty to submit to her husband in everything. “Head” (Gk. kephalē) here clearly refers to a husband’s authority over his wife and cannot mean “source,” as some have argued. In fact, there is no sense in which husbands are the source of their wives either physically or spiritually. In addition, in over 50 examples of kephalē in ancient Greek   p 2272  literature, with the idea “person A is the head of person(s) B,” person A has authority over person(s) B in every case (see also 1:22; Col. 2:10; see note on 1 Cor. 1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1–2272.

 

범사에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일을 제외한 모든 일에 복종하라는것이다. 

In every area of life except in matters that are contrary to God’s commands (Acts 5:29). Paul presents an ideal picture of Christian marriage: just as the church submits to Christ for her benefit, so the wife submits to her husband, presupposing a relationship in which the husband loves her and has her best interests in view. Each party serves the other unselfishly.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9.

 

 

주께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1)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복종의 방식과 같이, 2) 남편이 주님이신 것처럼, 3)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우리의 복종의 일부분으로서 복종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 그리스도와 남편을 동격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많이 통용된다. 그리스도와 아내의 관계가 그녀의 남편에 대한 그녀의 복종의 기초이며 동기이고 자질인 것이다. 본 23절은 신약에서 가장 오용되는 구절중의 하나이다. 여기의 초점은 남편의 특권이나 지배에 있지 않다. 바울은 결코 아내를 종으로 남편의 어떤 그리고 모든 욕구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은 여성들이 그들의 남편들에게 순종할 것을 말하는 것도, 남편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도록 하는 어떤 자격을 주기위한 것도 아니다. 

What Paul meant by saying wives should “submit to [their own] husbands as to the Lord” is unclear. The words could mean (1) in a similar manner as the submission they give to the Lord, (2) as if the husband were the Lord, or (3) as part of their submission to the Lord. While it is hard to imagine Paul suggesting the second option, either of the other two would be legitimate, but the theology implicit in the third choice clearly underlies the text. The wife’s relation to the Lord is the basis, motivation, and qualification of her submission to her husband. In verse 24 the words “in everything” indicate that all spheres of life are included in this submission, provided, of course, that it is in keeping with life lived “to the Lord.”

Verse 23 is surely one of the most abused and debated texts in the New Testament. Its focus is not on the privilege and dominance of the husband, and Paul never intended to suggest that wives were servants, compelled to follow any and every desire of the husband. The text does not tell women to obey their husbands, nor does it give any license for husbands to attempt to force submission.23

The debate has intensified in recent years over the meaning of kephale, the Greek word for “head.” Many have assumed that kephale means “boss,” “person in charge,” or “leader,” since the word has those metaphorical meanings in English. And the Hebrew word for “head” (roʾsh) is often used metaphorically in the Old Testament for tribal leaders or other persons in authority.24 The problem is that this metaphorical meaning is not common in Greek. Most of the time the lxx uses some other word (such as archon) to translate roʾsh. Kephale was used only sixteen times in the lxx to translate roʾsh when the idea of “authority over” is present (about 180 occurrences).25 Consequently, some have suggested that the metaphorical use of kephale should be understood as “source.” A few scholars have suggested a meaning such as “prominence” or, for Ephesians 5:23, “one who brings to completion.”26 Unfortunately, no one involved in this debate is objective and evenhanded with the evidence.

Although the debate will no doubt continue, the most important factor for determining the meaning is the context of Ephesians and Paul’s other writings. The argument for “source” as the meaning of kephale is not convincing. Although it may mean this in a few extracanonical texts, it is rare. Furthermore, “source” does not fit well in most of the Pauline texts. Paul is not arguing in 5:22–24 that the husband is source of the wife as Christ is source of the church. Scholars appear to have chosen this meaning only to avoid negative connotations for the discussion of male-female relations in modern times. The use of kephale in 1:22 and Colossians 2:10, where the issue is the subjection of all things under Christ, precludes the idea of source as the meaning in those texts. Paul is not arguing that Christ is the source of 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but that he has authority over them. Some connotation of authority appears to be included in Paul’s metaphorical uses of kephale.

Still, Ephesians 5:23 does not focus on authority, but on the self-giving love of both Christ and the husband. “Head” in this context suggests “responsibility for.” The husband has a leadership role, though not in order to boss his wife or use his position as privilege. Just as Jesus redefined greatness as being a servant (Matt. 20:26–27), Paul redefines being head as having responsibility to love, to give oneself, and to nurture. A priority is placed on the husband, but, contrary to ancient society, it is for the benefit of the wife. The activity of both wife and husband is based in their relation to Christ and in his giving himself for the church.

Although Paul makes explicit the priority or responsibility of the husband, the text also assumes the oneness and equality of husband and wife in 5:28 and 31. Both headship and equality must be given their due. As elsewhere, the truth is in the tension of the text.

The parenthetical statement in 5:23 that Christ is the Savior of the body (i.e., the church) does not mirror the husband’s relation to the wife. The niv does not show it, but 5:24 actually begins with a contrast (“but”) to 5:23. Although the husband has responsibility for the wife’s welfare, he is not her savior and plays no role in her salvation.

In the summary statement in 5:33 the wife is asked to “fear” (niv, “respect”) her husband. This provides a ring composition that recalls 5:21 and offers another way that the husband-wife relation mirrors that of Christ and the church. But there is no thought of terror or fear of harm. The translation of the Greek word used here as “respect”—if joined to love—comes close to the idea intended for the attitude toward husbands. A wife is to show recognition of her husband’s role and responsibility. No doubt, the fear due Christ is far different from the fear due husbands. The latter do not love as greatly, are not inherently holy, and are not end-time judges.

23 The only time that “obedience” and “submission” are brought close is in 1 Peter 3:1–6.

24 See Numbers 1:16; Deuteronomy 1:13; 2 Samuel 22:44; Isaiah 7:8.

lxx Septuagint

lxx Septuagint

25 Depending on which manuscripts one follows, for there are variants.

26 An overview of the debate can be found in Wayne Grudem, “The Meaning of Kephale (‘Head’): A Response to Recent Studies,” TrinJ, 11 (1990): 3–72.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294–296.

 

본문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머리를 무엇을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의미로 본문을 해석할 수 있다. 머리의 역할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역할로 볼 수도 있고 머리를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로 볼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마 20:26-27)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머리가 되는 것을 자신을 주고, 양육하고 사랑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재정의한다. 어떤 자리의 머리가 되는 것은 인사외 재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권한을 가지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임시 대행으로서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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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pLook carefully then how you walk, not as unwise but as wise, 16 pmaking the best use of the time, because qthe days are evil. 17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rthe will of the Lord is. 18 And sdo not get drunk with wine, for that is tdebauchery, but ube filled with the Spirit, 19 addressing one another in v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ing and making melody to the Lord with your heart, 20 wgiving thanks always and for everything to God the Father x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21 ysubmitting to one another out of reverence for Christ.

p Col. 4:5; [Prov. 15:21]

p [See ver. 15 above]

q ch. 6:13; Eccles. 12:1; Amos 5:13; Gal. 1:4

r Rom. 12:2; 1 Thess. 4:3; 5:18

s Prov. 20:1; 23:20, 31; 1 Cor. 5:11

t Titus 1:6; 1 Pet. 4:4

u [Luke 1:15]

v Acts 16:25; 1 Cor. 14:26; Col. 3:16; James 5:13

w Col. 3:17; 1 Thess. 1:2; 2 Thess. 1:3

x Heb. 13:15; [John 14:13]

y [Phil. 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5:15–21.

 

15절) 어떻게 행할지, 어디를 걸을지를 주의깊게 살펴서 지혜없는 자가 아니라 지혜있는 자가 되라. 지혜없는 자와 지혜있는 자의 차이는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 말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의 유무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The distinction between unwise and wise living is rooted in OT wisdom literature, where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Job 28:28; Prov 1:7; 9:10). Wisdom is obeying God’s revealed will (Deut 4:5–6; Pss 19:7; 119:98; Matt 7:24; Jas 3:13–17).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8.

 

16절) 세월을 아끼라(골 4:5), 선용하라. 왜냐하면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아끼다라는 단어는 ‘엑사고라조’라는 단어로 되사다, 갚다, 구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동을 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만 한다.(시 90:!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분별할 때까지 악한 시대에는 거룩함에 이르는 여정이 즉시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지혜가 특별히 요구된다. 

 This phrase translates the Greek exagorazō, which can also mean “redeem” or “purchase.” Christians must actively take advantage of the opportunity to do good (cf. Ps. 90:12). Wisdom is especially needed in an evil age where the pathway of holiness is not always immediately clear until one reflects upon God’s Word and discerns his holy will.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1.

 

고전 7:29에서는 "그 때가 단축하여진고로”라고 말한다. 시대의 악함이 점점 심판의 때를 앞당기고 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하기 전에 기회되는대로 우리는 이시대를 아끼고 구속해야 한다. 

 

17절) 악한 시대에 세월을 아끼지 않는 삶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월을 아끼고 선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그의 숨겨진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지침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a person tries to discern God’s secret counsel (his “hidden will”) but that he applies God’s general guidelines for life as found in the Bible (his “revealed will”; cf. Deut. 29:29 and note on Eph. 5:1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1.

 

본문에서 이해하라는단어의 의미는 인지적인 이해를 넘어선 적용되는 앎을 의미하는 것이다.(잠 2:1-9)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노력은 단지 개인의 미래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1:9-10) 이렇게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18절) 주의 뜻을 이해함으로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자로서의 삶을 위해서 바울이 제시하는 명령은 우리의 삶을 방탕하게 하는 술취함을 멈추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통제를 받는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거룩으로 충만한가 아니면 술취함으로 충만한다. 

 

당시의 술은 포도주로 고대 근동, 지중해의 주된 음료로 식초로 변하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해서 발효된 것이다. 바울은 앞서(4:28) 보았듯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만두어야할 일과 긍정적인 층면에서 시작해야할 일을 표현한다. 술은 우리의 마음을 재배하고 우리의 판단력과 적절한 감각을 파괴시켜 방탕으로 이끄는데 반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선, 온유”와 더불어 절제로 이끈다. 본문에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표현은 ‘플레루”라는 단어로 명령법 현재형인데 이는 어느 과거 한 시점에서의 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구칙적인 삶의 패턴으로서의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한번 받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가야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Wine was the staple drink of the ancient Mediterranean world and was fermented in order to preserve it from turning into vinegar. be filled with the Spirit. As earlier (see note on 4:28), Paul expresses a negative exhortation (what the saints are to stop doing) along with a positive command (what the saints are to start doing). Whereas wine can control the mind and ruin one’s judgment and sense of propriety, leading to debauchery, in contrast with this,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leads to self-control along with the other fruits of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and] gentleness” (Gal. 5:22–23). The command in Greek (plērousthe) is a present imperative and does not describe a onetime “filling” but a regular pattern of lif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1.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술이 아니라 성령의 영향, 통제, 충만함을 받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술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방탕함으로 이끌지만 성령은 이후 19-21절의 결과(찬양, 감사, 복종)들로 이끌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전체를 통해서 충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3:19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말하고 4:13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을 말한다. 본문에서 성령의 충만을 이야기함으로 교회안에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채워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임배로 가득참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Greek plēroō. Paul’s exhortation recalls earlier passages about being filled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Greek plērōma] of God” (3:19) and the “fullness [Greek plērōma] of Christ” (4:13). Together they present a picture of the church being filled with the presence of the triune God in much the same way as the OT temple was filled with the presence of God (see 2:21–22; 3:19 and notes).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8.

 

“Be filled with the Spirit” is literally “Be filled in spirit”;57 this has given rise to the question whether the human spirit of the believer or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same phrase, “in spirit,” occurs in three other places in this letter—in Eph. 2:22, with regard to the new community of believers as the dwelling-place of God; in 3:5, with regard to the revelation of the “mystery” of the new community to 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 and in 6:18, with regard to the prayer life of Christians. In those three places the Holy Spirit is certainly intended, and equally certainly it is he that is intended here. The Holy Spirit is given to believers to fill them with his presence and power. The choice of drunkenness as an antithesis to the fullness of the Spirit is not unparalleled: when the disciples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sultant phenomena moved some of the spectators to say in derision that they were “filled with new wine” (Acts 2:13),58 and Paul had to warn the Corinthians that a stranger, coming into their company when they were all exercising the spiritual gift of tongues, would conclude that they were mad (1 Cor. 14:23). But the Spirit given by God to his children is the Spirit “of power and love and self-control” (2 Tim. 1:7);59 the normal exercise of intelligence is not eclipsed but enhanced when he is in control.

57 πληροῦσθε ἐν πνεύματι. The Holy Spirit is “at once the Inspirer and the Inspiration,” says J. A. Robinson (Ephesians, pp. 203–04); he discusses the force of the preposition ἐν (whether it denotes the instrumentality or the sphere) and finds support for taking it to denote instrumentality (or agency) in 1 Cor. 12:3, 13; Rom. 15:16. He takes the interpretation to be “Let your fulness be that which comes through the Holy Spirit,” but concludes that the rendering “Be filled with the Spirit,” while “not strictly accurate, suffices to bring out the general sense of the passage.”

58 Gk. γλεύκους μεμεστωμένοι εἰσίν.

59 Gk. πνεῦμα … δυνάμεως καὶ ἀγάπης καὶ σωφρονισμοῦ.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379–380.

 

19-21절) 성령 충만함의 결과(찬양, 감사, 복종)

성령충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한다. 여기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골 3:16)들을 구분하는데 이는 구약의 정경으로서의 시편의 찬양과 현대적인 다양한 노래들을 함께 언급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노래를 공동체적이며 우리의 마음에서 울리는 것이다. 

이어 충만함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이끈다. 충만하지 않은 우리들은 모든 일의 성취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판치고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면 안달이 난다. 하지만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면 그분이 이루셨음을 인정하고 이를 감사하는 이들이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술 취한 사람들은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취한,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도 노래한다. 

 

20절에서 범사에라고 표현된 것은 “언제나 모든 일에”의 의미로 이는 “네가 무엇을 하던지, 무슨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모두다”를 의미한다. 

 

21절) 5:21-6:9은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먼저 21절은 서로 복종할 것을 이어 가족관계안에서의 복종을, 종과 상전사이의 복종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자신의 길, 방식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비우시고 복종하셨다.(빌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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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And kwalk in love, las Christ loved us and mgave himself up for us, a nfragrant o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But psexual immorality and all impurity or covetousness qmust not even be named among you, as is proper among saints. Let there be rno filthiness nor foolish talk nor crude joking, swhich are out of place, but instead tlet there be thanksgiving. For you may be sure of this, that ueveryone who is sexually immoral or impure, or who is covetous (vthat is, an idolater), has no inheritance in the kingdom of Christ and God. wLet no one xdeceive you with empty words, for because of these things ythe wrath of God comes upon zthe sons of disobedience. Therefore ado not become partners with them; for bat one time you were c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dWalk as children of light (for ethe fruit of light is found in all that is good and right and true), 10 and ftry to discern what is pleasing to the Lord. 11 gTake no part in the hunfruitful iworks of darkness, but instead jexpose them. 12 For kit is shameful even to speak of the things that they do in secret. 13 But when lanything is exposed by the light, it becomes visible, 14 for anything that becomes visible is light. Therefore it says,

m“Awake, O sleeper,

and narise from the dead,

and oChrist will shine on you.”

j [ch. 4:32; Matt. 5:7, 48; Luke 6:36]

k Rom. 14:15; [Col. 3:14]; See John 13:34

l See Rom. 8:37

m See Rom. 4:25

n See Gen. 8:21

o Heb. 7:27; 9:14; 10:10, 12

p 1 Cor. 6:18; See Gal. 5:19

q [ver. 12; Ps. 16:4]

r ch. 4:29; [Eccles. 10:13]

s [Rom. 1:28]

t ver. 20

u See 1 Cor. 6:9

v Col. 3:5

w See Matt. 24:4

x Col. 2:8

y Rom. 1:18; Col. 3:6

z ch. 2:2; [1 Pet. 1:14]

a ch. 3:6

b See ch. 2:1, 2

c See Acts 26:18

d Isa. 2:5; See Luke 16:8; John 12:35, 36

e [Gal. 5:22]; See Rom. 7:4

f 1 Thess. 2:4; 5:21

g See 1 Cor. 5:9

h Rom. 6:21

i Rom. 13:12

j Lev. 19:17; 1 Tim. 5:20

k [ver. 3]

l John 3:20, 21; [ver. 9]

m [Isa. 51:17; 52:1; 60:1; Mal. 4:2]; See Rom. 13:11

n Isa. 26:19

o Luke 1:78, 7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5:1–14.

 

1-2절) 본 단락은 전환구절로 이 후에 거룩한 생활을 위한 일반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받는 자녀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나아가 우리가 본받아야할 대상은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말그대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들, 그리스도를 닮은,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자녀는 그들의 삶속에서 그 사랑이 묻어난다. 자녀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부모들의 문제이다. 부모가 제대로 본을 보이지 못한 것, 그래서 그 모습을 본받은 자녀들이 여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신자들은 댓가를 받으려는 종이나 노예들처럼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들처럼 그분을 닮아야 한다. 

Paul’s discussion of love serves also as an introduction to further instructions on holy living (vv. 3–20). imitators. Believers are to imitate God’s holiness in all of their conduct. They are to be like him, not as slaves trying to earn a wage but as children—and beloved children at tha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0.

 

 

3-7절) 

 

3절) 본문에 음행이라고 번역된 ‘포르네이아’는 결혼관계 밖에서 진행되는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성적인 행위로 혼전 성관계, 창기와의 성행위, 동성애, 근친상간, 간음, 간통을 포함한다. 

sexual immorality. Greek porneia; refers broadly to all illicit sexual acts outside marriage, such as premarital sex, sex with prostitutes, homosexual activity, incest, and adultery.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7.

 

바울은 성도들에게 음행(간음, 간통, 동성애)에 해당하는 성적인 죄와 더러운 것들과 탐욕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는 성도들에게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성적인 죄나 더러운 것이 틈타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을 생각하고 묵상한다는 것이다. 현 시대 SNS나 유투브와 같은 매체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사안, 내용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그 이름을 부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속적으로 대하고 부르는 그 내용이 음행과 더러운 것일 때 우리는 그 죄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4절) 본문에 누추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추잡한, 음란한 행동을 의미한다. 추잡한 행동이나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은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으므로 대신에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말한다. 앞서 3절에서 본 것처럼 말하는 내용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잘못된, 죄악된 언어 습관을 피하는 길은 주님께 감사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입으로 주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어리석을 말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경향성이다. 우리의 입술이 점점 감사의 말로 채워질 수록 점점 어리석은 말의 비중은 줄어들게 된다. 

 

5절) 5절은 3절의 반복이다. 3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타 남의 것을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게 기업을 얻지 못한다. 

탐욕은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세는 종국에 큰 죄로 이어진다.(왕상 21:1-19) 이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다(골 3:5)

(골 3:5, 개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고 계신다고 말한다.(1:20-22; 롬 8:34; 고전 15:24-27, 골 3:1)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재림때 궁극적으로 완성되겠지만(고전 15:20-24; 딤후 4:1) 신자들은 이미 그분의 구속의 나라에 들어와있다. (엡 2:6; 골 1:13-14)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들이 부활의 불멸성을 통해 마침내 완전히 들어가야할 영원한 영역이지만(고전 15:50; 살전 2:12) 지금 이시대에서도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어느 정도 경험되어야 하는 곳이다. 

Paul speaks of Christ ruling now from the right hand of God (see 1:20–22; cf. Rom. 8:34; 1 Cor. 15:24–27; Col. 3:1; etc.). Believers have already been brought into his redemptive kingdom (see Eph. 2:6; Col. 1:13–14), although it will be consummated only at his second coming (1 Cor. 15:20–24; 2 Tim. 4:1). For Paul the kingdom of God in its fullness is the eternal realm that believers will finally and fully enter through resurrection immortality (1 Cor. 15:50; 1 Thess. 2:12), but it should also be experienced in some measure now in this age, through the indwelling presence of the Holy Spirit (Rom. 14: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0.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시대인가 오는 시대인가는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확인해나가야 한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현세대 지금 누리며 구현해나감과 동시에 앞으로 완성될 그나라의 복락을 고대하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는 그 기업을 누림이 두차원에서 모두 적용가능하다. 

 

6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그렇다면 이 본문의 문맥속에서 우리를 속이는 헛된 말은 무엇인가? 

교회사를 통한 일반적인 속임수 중에 하나는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회심한 이후에 죄악된 생활을 해도 그 결과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심판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 

인류 최초의 죄인 선악과도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창 2:17)라고 맗씀하셨는데 여자는 죽을지도 몰라(창 3:2)라고 말했고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창 3:4)라고 속였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마귀의 헛된 말이다. 죄를 짓도록 요구하면서 결코 죽지 않을꺼야라고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한 형벌의 댓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죄의 유혹은 우리에게 헛된 말로 죄를 지어도 죽지 않는다고, 그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종국에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게 됨을 우리는 목도하게 될 것이다. 

 

7절) 바울은 그런 연유로 그들,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모든 불신자들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죄를 짓는 일에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가지고 고립되어서는 안되고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속으로 나아가야한다. 

 

8절) 에베소 성도들은 이전에 그리스도를 알기전에는, 복음을 듣기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바울은 요청한다. 

See 1 John 1:5–7. Cf. also Ps. 27:1; Isa. 9:2; 42:6; 49:6; John 9:5; Acts 13:47; 26:18.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0.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빛의 열매는 갈 5:22-23절의 성령의 열매와 비슷하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행해야하는데 이러한 삶은 궁극적으로 빛의 열매를 맺는다.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통해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착함(아가토시네), 의로움(디카이오시네), 진실함(알레데이아)

 

10절) 빛의 자녀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본문에 시험하여 보다라는 단어는 ‘도키마죠’로 시험하다. 인정하다.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시험을 당하는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하고(롬 12:2)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한다.(빌 1:10; 엡 5:10) 

두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다. 

(고후 13:5, 개정)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바울은 너희 자신을 ‘페이라조’하고 너희 자신을 ‘도키마조’하라고 말한다. 세번째는 자신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이다. 

네번째는 시련가운데 소망가운데 굳게 서는 것이다. 

That one has stood the test is manifested in various ways. (i) By a serious effort to know the will of God. The gift of the Holy Spirit enables us to recognize God’s will (Rom 12:2) and to test what is well-pleasing to God (Phil 1:10; Eph 5:10) and what is best (1 Thess 5:21). The gift of testing and distinguishing of the spirits (1 John 4:1) is also part of the Christian’s duty. (ii) By one’s loyalty to God. The vb. δοκιμάζω is used side-by-side with πειράζω G4279 and ἐπιγινώσκω (see γινώσκω G1182) in 2 Cor 13:5 so as to move the Corinthians to the crucial task of testing their own faithfulness. (iii) By love to one’s neighbor. In the instructions regarding the collection (2 Cor 9:13), Paul writes that because of the Corinthians’ “testing” (or proving themselves) in this service many praise God. (iv) By holding fast to hope in the midst of tribulation. The church is exposed to attacks from within and without, from satanic powers and godless people. It lives by faith, not by sight. In this position willed by God it maintains its living hope by remaining under God’s hand, by the overflowing of the riches given by God and of the goodness created by the Spirit to others (2 Cor 8:2), by patience (Jas 1:2–3), and by overcoming temptations (1 Pet 1:6–7).

vb. verb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759.

 

11절) 빛의 자녀들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지 고민하며 행해야 하고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이를 책망해야 한다. 빛의 자녀로서의 열매를 맺는 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둠의 일들은 어둠의 열매를 맺는다. 빛의 자녀들의 일들은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12절)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어둠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3절)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 말하기 부끄러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결국 빛으로 드러나게 된다. 빛은 비추는 역할을 한다. 어둠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면 어둠은 물러가고 사물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삶의 가치로 살아가게 될때 그러한 삶에는 필연적으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역사가 생겨난다. 진리가 함께할때 어둠과 죄악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4절) (사 60:1, 개정)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우리 잠자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비추이시면 우리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일어난 우리들은 우리에게 비추어진 빛을 비추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The quotation is not of any one OT passage but is probably a combined reference to several places, especially in Isaiah: “Arise, shine, for your light has come, and the glory of the Lord has risen upon you” (Isa. 60:1; see 9:2; 26: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0.

 

결국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은 빛의 자녀들로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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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Therefore, having put away falsehood, let each one of you uspeak the truth with his neighbor, for vwe are members one of another. 26 wBe angry and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on your anger, 27 and xgive no opportunity to the devil. 28 Let the thief no longer steal, but rather ylet him labor, zdoing honest work with his own hands, so athat he may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anyone in need. 29 bLet no corrupting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such as is good for building up, as fits the occasion, that it may give cgrace to those who hear. 30 And d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eby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fredemption. 31 gLet all bitterness and wrath and anger and clamor and slander be put away from you, along with all malice. 32 hBe kind to one another, tenderhearted, iforgiving one another, as God in Christ forgave you.

u Zech. 8:16; Col. 3:9; [ver. 15]

v Rom. 12:5

w [Ps. 37:8]

x See James 4:7

y Acts 20:35; Gal. 6:10

z 1 Thess. 4:11; 2 Thess. 3:8, 11, 12

a [Prov. 21:26]

b ch. 5:4; Col. 3:8; [Matt. 12:34]

c Col. 4:6; [Eccles. 10:12]

d Isa. 63:10; [1 Thess. 5:19]

e ch. 1:13

f See ch. 1:7

g Col. 3:8, 19

h Col. 3:12, 13; 1 Pet. 3:8

i [2 Cor. 2:7, 10]; See Matt. 6: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4:25–32.

 

멈춰야할 것과 시작해야할 것

 

바울은 25-32절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옷을 입은 이들로 하여금 어떤 방식의 실천하는 삶을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25절)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사람이다. 본문의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표현은 슥 8:16절의 인용이다. 

(슥 8:16, 개정)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본문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 속에서 이런 강조를 하고 있다. 

(골 4:5, 개정)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골 3:9, 개정)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너무나 당연한 요구이고, 이러한 차별성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현대 우리의 기독교가 세상속에 선한 영향력, 충격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세상이 기독교인들의 말이 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초대교회에 기독교인들은 정직함, 진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수가 적지만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참을 말하지 않고 세상이 그런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이 회복되어야 한다. 

 

26-27절) 모든 분노가 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에 압도되지 않고 그 분노를 조절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분을 품고 하루를 넘기는 행위가 바로 마귀에게 틈을 주는,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분을 품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분노가 죄, 악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바울은 해가 지기전에 화해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없는 상황일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롬 12:19, 개정)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바울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분노는 자칫 그 공정성을 잃기 쉽다. 우리가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기 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이를 맡겨야 한다. 분노가 없는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지만 그 분노가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해야하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분노를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성숙함의 증표가 된다. 

(잠 30:33, 개정)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분노를 누르려고 하면 도리어 폭동이 일어난다. 

 

28절) 바울은 도둑을 예로 들면서 회개한 자의 삶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회개는 부정적인 것을 멈추고 긍정적인 것을 시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도둑질 하는 자는 반드시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도둑질은 게으름과 탐욕으로부터 기인되기에 회개한 도둑은 바로 그 정반대인 노동에 있어서 근면과 자원해서 나눔을 보여주어야 한다. 

Paul uses the thief to illustrate how repentance impacts one’s lifestyle. Repentance involves both stopping (negative) and starting (positive). The thief must stop stealing and start doing honest work. Stealing arises out of laziness and greed, so the repentant thief must display the opposite: diligence at labor and willingness to shar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9.

"도둑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8계명이다. 바울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로 하여금 도둑질 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그 손으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수고하여 선한일을 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를 미워한 자는 이미 살인한 자다. 간음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다. 도둑질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는 자는 이미 도둑질 한 자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이웃 사랑) 

 

(마 5:21-22, 개정)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7-28, 개정)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절) 28절에 이어서 바울은 다시금 새사람을 입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멈춰야할 것과 시작해야할 것을 말한다. 악한 말을 멈추고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선한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혀, 말은 작지만 모든 것을 불태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약 3:5-6). 이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사람을 살릴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셜리의 죽음)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쏟아내는 분노에 찬 말들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더러운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사프로스’라는 단어로 못된(썩은) 열매(눅 6:43) 혹은 못된(부패한) 물고기(마 13:48)을 의미한다. 

As with the “stopping” and “starting” noted in v. 28, Christians are to stop evil speech, substituting talk that is good for building up and giving grace. “Corrupting” (Gk. sapros) also applies to “bad” (rotten) fruit (Luke 6:43) or “bad” (putrid) fish (Matt. 13:48). To “give grace” in speaking means to benefit others rather than corrupt them through what is sai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9.

 

30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것을 요청하고 있다. 

(사 63:10, 개정)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특별히 25-31절에 언급된 죄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파괴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하나됨을 가져다주시는(3절)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때로 비인격적인 존재, 어떤 힘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성령은 근심하시는 존재이다. 이는 성령께서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들로서 기뻐하시면서 동시에 슬퍼하시고 근심하신다. 

 

(엡 1:13, 개정)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치셨다. 우리에게 구원의 날에 함께 동참할 것을 보증하신 것이다.

 

32절) 서로 친절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삶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하나님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이는 우리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강력한 변화가 부족한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값싼 복음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건을 너무나 값싸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의 깊은 차원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성품이 착해서 다른이를 친절히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우리로 그런 삶을 살도록 추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고후 5:19절을 말한다. 

(고후 5:19, 개정)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끊임없이 그렇듯이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값없는 은혜는 그의 자녀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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