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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dow’s Offering
41 rAnd he sat down opposite sthe treasury and watched the people tputting money into the offering box. Many rich people put in large sums. 42 And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usmall copper coins, which make a penny.6 43 And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 and said to them, “Truly, I say to you, v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ose who are contributing to the offering box. 44 For they all contributed out of their abundance, but she out of her wpoverty has put in everything she had, all xshe had to live o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2:41–44.

41절) 예수님께서 여인의 뜰에 놓여있던 헌금함을 보시고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어떻게 헌금을 하는지를 보셨다.
헌금함은 여인의 뜰에 위치해 있었고 13개의 트럼펫 모양의 용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성전세와 여러가지 자발적인 헌금을 바치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다.
- The “treasury” appears to have been located in the court of women and appears to have consisted of thirteen trumpet-shaped receptacles for both the temple tax and money given voluntarily for various purposes.23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203.

42절) 본문의 렙돈(lepta)는 유대의 동전 단위로 1/128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하루치 품삯을 10만원으로 계산할때 한 렙돈은 781원에 해당하고 본문의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1562원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본문의 렙돈은 로마 제국의 화폐단위가 아니었기때문에 이를 또한 한 고드란트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Greek two lepta, which make a kodrantes; a kodrantes (Latin quadrans) was a Roman copper coin worth about 1/64 of a denarius (which was a day’s wage for a laborer)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43-44절)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라고 평가하신다. 부자들은 자신이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그 헌금의 양보다 얼마나 희생적으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얼마나를 드렸느냐보다 이 사람이 드리고 나서 자신을 위해서 얼마를 남겼느냐를 가지고 평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그 행동의 결과, 얼마나 드렸느냐보다 그 태도, 가난한 중에 자신이 가진 소유의 모든 것을 드린 그 자세,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Jesus indicated that the thing of most importance is not how much is given but the extent to which the gift is a sacrificial one. Or to put it another way, the most significant thing is not how much is given but how much is left for one’s personal use after the gift. A major element of Jesus’ teaching is that 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action. The widow’s total giving demonstrates an attitude of absolute trust in God.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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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e Son Is the Christ?
35 fAnd as gJesus taught in the temple, he said, “How can the scribes say that hthe Christ is the son of David? 36 David himself, iin the Holy Spirit, declared,
j“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ut your enemies kunder your feet.” ’
37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So lhow is he his son?” And the great throng mheard him gladly.
Beware of the Scribes
38 nAnd in his teaching he said, “Beware of the scribes, who like to walk around in long robes and like greetings in the marketplaces 39 and have the bes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othe places of honor at feasts, 40 pwho devour widows’ houses and qfor a pretense make long prayers. They will receive the greater condemnatio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2:35–40.

예수님의 목적은 서기관들의 메시야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마가의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기록을 통해서 진정한 메시야의 성격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 Jesus’ purpose probably was to expose the inadequacy of the scribes’ interpretation in general but especially their concept of the Messiah. Certainly Mark’s purpose in recording the incident was to give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the Messiah.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9.

- The question arises, What did Jesus and/or Mark mean? Some have claimed the passage denies that the Messiah was to be of Davidic descent. The idea of a Davidic origin of the Messiah, or at least an ideal king, is so firmly established in the Old Testament, however, that such a denial either on the part of Jesus or Mark is most unlikely. The most important Old Testament passages that speak to the Davidic origin of the Messiah are: 2 Sam 7:11–16; 22:51; Pss 18:50; 89; Isa 9:6–7; 11:1–9; 16:5; Jer 23:5–6; 30:8–9; 33:15, 17, 22; Ezek 34:23–24; 37:24; Hos 3:5; Amos 9:11.20 In the New Testament the title “Son of David” appears outside of Mark in Matt 1:1; 9:27; 12:23; 15:22; 20:30–31; 21:9, 15; Luke 18:38–39; 20:41. The concept is present in Luke 2:4; Rom 1:3; 2 Tim 2:8. The first certain Christian denial of Davidic descent is the so-called Epistle of Barnabas 12:10–11 (ca. a.d. 130), and that denial was forged in the heat of controversies with Jews. For Jesus to have denied the Davidic descent of the Messiah would have subjected him to attack, but there is no trace of such an attack in any Gospel. For Mark to have denied Davidic descent would have contradicted his earlier “acceptance” of the term (10:47–48, which, if it can be accepted at face value, indicates that Jesus accepted it as well). The best conclusion therefore is Jesus and Mark intended to correct an inadequate Jewish concept of the Messiah.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9–200.

35-37절) 지금까지 질문을 받으시던 주님께서 이제 성전에서 이들을 향해서 묻고 계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은 구약을 통해서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께서 나의 원수를 나의 발 아래에 둘때까지 주님의 우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해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그분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 가르침을 많은 사람이 즐겁게 들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개역개정)
36절에 언급된 표현은 시편 110:1의 내용인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첫번째 단어는 '야훼'로 두번째 주는 '아도나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 두번째 주, 아도나이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본문을 "하나님께서 나의 상관에게 말했다(God said to my superior.)"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헬라 표현에서 큐리오스, 주는 모두 다 사용된다.
- The quotation is of Ps 110:1.21 In the Hebrew the first word meaning “Lord” is Yahweh, which always refers to God; but the second is Adonai, which sometimes refers to God and sometimes not—as in the psalm where it originally referred to a king, whoever and whenever he was. One might paraphrase, “God said to my superior.” In Greek, however, the same word (kyrios, lord) is used in both place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200.

당시의 문화적으로 자신의 아들이나 먼 후손을 주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다윗이 후손을 그의 주라고 말한것은 그가 육체적인 후손 그 이상임을 언급한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의 후손, 혹은 메시야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본문의 이슈는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시다. 하지만 그 한계에 제한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 이상으로 사람의 아들, 인자이시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유대인들을 대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대표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결국 본문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혁명가, 정복자, 승리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가 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종으로, 섬기는 자로(10:45)로 오셨다.

38-40절)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갈 것을 가르치신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자들이다.
이 본문은 앞서 8:15절을 기억나게 한다. 앞서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도전받았다면 이제 그들의 행동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38절의 긴 옷은 회당에서 기도를 하거나 제의를 드릴때 입는 예복이었다. 그런데 어떤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 , 시장에서 사람들의 존경의 인사를 받기 위해서 이러한 복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 가장 중요한 자리는 회중들을 마주보는 자리나 성경의 두루마리를 담고있는 궤 앞을 말한다. 잔치의 윗자리는 주최자의 좌우나 그가 배석한 테이블을 말한다.
-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were on the bench facing the congregation and in front of the chest that contained the biblical scrolls.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were on the right and left of the host or at least at his tabl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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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Commandment
28 uAnd one of the scribes came up and heard them disputing with one another, and seeing that he answered them well, asked him, “Which commandment is the most important of all?” 29 Jesus answered, “The most important is, v‘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wthe Lord is one. 30 An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31 xThe second is this: y‘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zgreater than these.” 32 And the scribe said to him, “You are right, Teacher. You have truly said that whe is one, and athere is no other besides him. 33 And to love him with all the heart and with all bthe understanding and with all the strength, and to love one’s neighbor as oneself, cis much more than all dwhol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34 And when Jesus saw that he answered wisely, he said to him,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eAnd after that no one dared to ask him any more question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2:28–34.

28-34절의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서기관의 질문은 성전에서의 마지막 질문이다. 다른 적대적인 질문과는 다르게 이 서기관은 아마도 앞에서 진행된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과의 대화를 인상적으로 들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권위가 있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 첫째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겸손했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또한 적절한 대답이었다.
- The Greatest Commandment. This is the last question asked of Jesus during his time in the temple courts (cf. 11:27). In contrast to the preceding hostile questions (vv. 13–27), a passing teacher of the law, impressed by Jesus’ response to the Sadducees (vv. 24–27), respectfully (cf. vv. 32, 34) seeks Jesus’ summation of the law.

D. A. Carson, “The Gospels and Acts,”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043.

28절) 서기관중 한 사람이 예수님의 변론(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서기관은 당시 율법(토라)의 조문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에는 613가지의 할라카라고 부르는 율법의 조문이 있었다. 이중에 365가지는 부정 명령이고 248가지는 긍정 명령이다. 서기관들은 이 조문들중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눴다. 힐렐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율법을 요약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그는 "네가 싫어하는 일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이것에 대한 해석이다"라고 말했다.
-An example of a similar question but a different answer is found in the reply of Hillel (ca. 40 b.c.–a.d. 10) to a Gentile who asked him to summarize the law while he stood on one leg: “What is hateful to you, do not to your neighbour: that is the whole Torah, while the rest is the commentary thereof.”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7.

28-31절)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에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 A teachable scribe (a theological scholar, probably of the Pharisaic faction) holds a friendly dialogue with Jesus. He asks which commandment of God is of fundamental importance and central to everything else. Jesus answers directly: the most important commandment, introduced by Deut. 6:4, is to love the Lord your God completely (Deut. 6:5; cf. notes on Matt. 22:37–38 and Luke 10:27). Second to this is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Lev. 19:18, 34). The faithful, covenant-keeping God asks the objects of his love to love him and other human beings too (Rom. 13:8–10; Gal. 5:14; 1 John 4:10–11, 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21.

예수님의 대답은 쉐마라고 불리는 내용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일 두번씩 암송하는 것이었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라는 이 고백은 다신론을 섬기는 문화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고자 다짐하는 유대인들에게, 초대 교회에게 매우 중요한 고백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율법은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지는 것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본문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heart, soul, mind, strength) 우리의 전인격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둘째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 The quotation is from Deut 6:4–5, the first part of the famous Shema. In the second century the confession of faith that consisted of Deut 6:4–9; 11:13–21; Num 15:37–41 was recited twice daily by pious Jews. Matthew and Luke do not have the prefatory sentence,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but it is crucial because the obligation to love God is based on his oneness. Because he is one, love for him must be undivided. The inclusion was important for Mark’s church in their debates with Jews in order to affirm that they also were monotheists, not polytheists as the Jews sometimes accused them of being. “With all your mind” is added to the statement in Deuteronomy. The piling up of the terms “heart,” “soul,” and “mind” is just a way of saying “with your whole being” and is not intended to designate the component parts of human natur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7.

31절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레 19:18을 인용한 것이다. 본문은 이어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의 개념을 모든 사람으로 확장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그들이 미워하는 사마리아안이나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없는 하나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진다. 구약의 본문에서 이웃은 믿음의 공동체의 구성원과 그들과함께 사는 외국인을 의미했지만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웃의 개념을 모든 사람들로 확장하고 계신다. 나아가서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 The second quotation is from Lev 19:18. In the first part of that verse the neighbor is defined as “one of your people,” i.e., a fellow Israelite. Leviticus 19:33–34 extends the love command to resident aliens. It is not likely that many first-century Jews extended it any further. Therefore one of the most significant elements in the teaching of Jesus was to redefine the neighbor as everybody, including the hated Samaritans and Gentiles (cf. Luke 10:30–37, which follows immediately his account of the discussion about the greatest commandment).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8.

32-33절) 예수님의 이 대답에 대해서 서기관이 대답한다. 이 대답은 유일하게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본인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다른 이가 없다라는 말씀이 참됨을 고백하고나서 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두가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희생 제사보다 중요하다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본문의 모든 번제물과 기타제물은 제사중에 모든 것을 채워 드리는 제물과 일부를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거나 예배자들이 먹는 제물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이다. 지금 제물에 대한 서기관의 고백은 현재 드려지는 성전의 예배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12:38-40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The elevation of an ethical quality over sacrificial worship stands in the tradition of 1 Sam 15:22; Hos 6:6; and perhaps also Isa 1:11–17. The word translated “burnt offerings” refers to those offerings totally consumed on the altar. The word translated “sacrifices” refers to offerings in general, only a small portion of which was burned, and the remainder was given to the priest or returned to the worshiper to eat as a sacred meal. The two terms summarize and represent the entire sacrificial system.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9.


34절) 예수님께서 이제 그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고 대답하셨다. 지금 서기관은 어쩌면 오랜 기간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보다 주님의 가르침을 더욱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음의 고백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그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멀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회해서 그를 하나님의 나라로, 그의 삶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초청하시는 것이다. 본문 이후에 그가 주님을 따랐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질문이나 반응으로 보아 그는 이후에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 wisely. He discerned the core of Jesus’ teaching better than the disciples did (9:33–50; 10:35–41). Jesus’ earlier linking of his coming sacrifice with how one treats others (see notes on 9:35; 10:42–45) suggests that the same principle applies. For Jesus’ followers to confess his death without love of neighbor is equally empty (cf. Matt 7:12; Jas 2:10–23). not far. All that he lacks is to follow Jesus, who in himself embodies the secret of the kingdom (see notes on 4:11; 10:21). kingdom of God. See note on 1:15. no one dared ask him any more questions. Jesus is proved Israel’s teacher par excellence not only by answering well but by readily discerning between hypocritical, misconceived, and genuine questions. As the Lord of the temple (see 11:14 and note) and God’s “cornerstone” (v. 10), Jesus’ claim that doing God’s will means listening to him (3:34–35) has been vindicated by God (cf. 9:7) here in the temple’s courts before the nation and its authorities (cf. “builders” in v. 10). The lawyer is an important reminder that not every authority in Jerusalem opposed Jesus.

D. A. Carson, “The Gospels and Acts,”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044.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명령이 아니라 쉐마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성품에 대한 고백이다. 둘째는 하나님 사랑에 대하 내용으로 신 6:5의 마음과 목숨, 힘에 뜻을 추가했다. 세번째는 레 19:18절의 내용을 네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Jesus’ answer to the scribe has three distinctive features. In the first place it begins not with a commandment, but with a statement of faith, with the foundational creed of Jewish life and thought: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quoting Deuteronomy 6:4. The Shema, so-called from the Hebrew verb to hear, was recited daily in prayer by pious Jews in the first century and is a profound affirmation of God’s covenant love and character. The scribe wanted to know what was the single most important thing to do. Jesus, however, did not take conduct as his point of departure. He began with the character of God. His affirmation of this creed grounds the question of conduct in God’s love for humans, which is the only appropriate framework for our affections and actions.
Second, when Jesus quoted the commandment that follows the Shema in Deuteronomy 6:5, he specified four ways of loving God: heart, soul, mind and strength. The Hebrew and Greek versions of Deuteronomy 6:5 each contain only three—heart, soul and strength. Jesus added a fourth, mind (dianoia), to create a kind of supertotality. From the affirmation that God is one there follows a requirement for an integrity which exceeded that of the erudite people who had tried to trap him. If God is one, there should also be a oneness about each man and woman. Nineteen centuries later Danish philosopher Søren Kierkegaard pursued a similar theme when he penned a reflection on the Beatitudes titled Purity of Heart Is to Will One Thing. For Jesus, purity of heart or authenticity, to use a contemporary term, is found in loving God completely.
In a Jewish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it is impossible to make tidy distinctions between heart, soul, mind and strength, yet each of these four terms finds an echo in the charges and countercharges that Mark presents in Jesus’ disputations in the temple. The unwillingness of the chief priests, elders and teachers of the law to commit themselves on the question of John’s authority (11:33) betrays their divided hearts and strength. The teachers of the law who devour widows’ houses and make long prayers (12:38–40) represent another manifestation of the same problem. The hypocrisy of the Pharisees and Herodians (12:13–17) is a matter of the soul, and Jesus had just charged that the Sadducees did not understand either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Here then is one explanation for his opponents’ failure of nerve. Any further questions might have proven to be self-incriminating. Indeed, there was a twofold risk. On the one hand Jesus’ opponents ran the risk of exposing their divided loyalties. On the other hand, if they continued to pose questions that Jesus answered well, they would only heighten his standing before the crowd as one who loved God with his whole being.
The third distinctive feature about Jesus’ reply is that it contains not one but two commandments. In addition to Deuteronomy 6:5 Jesus also cited Leviticus 19:18: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n his exposition of the greatest commandment it is impossible to love God completely without loving our neighbors in the same way we love ourselves. History is replete with zealous figures who claimed to love God even as they mistreated and oppressed the people who lived near them. The controversies in the temple provide an example from the first century: the teachers of the law who devour widows’ houses (12:40). Loving our neighbors as ourselves is an essential part of loving God. Without it people who claim to love God fervently can become an awful, destructive presence in the community of faith.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35–237.

독재자 이디아민이 폭정을 행하던 시기에 우간다의 주교 페스토 키벤게레가 한 말. 수십만의 사람들을(대부분 성공회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학살한 이디아민을 죽일 수 있는 총을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주교의 대답.
"이 총은 내것이 아니라 당신의 무기이다. 나의 무기는 사랑이다. "라고 대답했다.
- Festo Kivengere was the archbishop of Uganda during the awful days of Idi Amin. Idi Amin was one of the most savage tyrants in recent history. During a brutal reign from 1971 to 1979 the man who claimed to be “Lord of all the beasts of the earth and fishes of the sea” orchestrated the torture and execution of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many of whom belonged to the Anglican church that Bishop Kivengere led. Before Idi Amin was driven from power, Bishop Kivengere was asked what he would do if he found himself with a loaded gun in the presence of Idi Amin. The bishop replied: “I would hand the gun to the President and say, ‘I think this is your weapon. It is not mine. My weapon is love’ ” (Coomes 1990:397).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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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dducees Ask About the Resurrection
18 And kSadducees came to him, lwho say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And they asked him a question, saying, 19 “Teacher, Moses wrote for us that mif a man’s brother dies and leaves a wife, but leaves no child, the man5 must take the widow and raise up offspring for his brother. 20 There were seven brothers; the first took a wife, and when he died left no offspring. 21 And the second took her, and died, leaving no offspring. And the third likewise. 22 And the seven left no offspring. Last of all the woman also died. 23 In the resurrection, when they rise again, whose wife will she be? For the seven had her as wife.”
24 Jesus said to them, “Is this not the reason you are wrong, because nyou know neither the Scriptures nor othe power of God? 25 For when they rise from the dead, they neither pmarry nor pare given in marriage, but are like angels in heaven. 26 And as for the dead being raised, qhave you not read in rthe book of Moses, in sthe passage about the bush, how God spoke to him, saying, t‘I am 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quite wrong.”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2:18–27.


18절)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행 23:8; 마 22:29-30)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라고 했다. 이런 사두개인이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부활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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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ducees. Comprised of mostly aristocrats and prominent priestly families (8:31; 11:18) who dominated Israel’s ruling council, the Sanhedrin (see note on 14:55). Religiously conservative, they recognized only the five books of Moses (Genesis–Deuteronomy) as divinely authoritative and rejected the idea of resurrection since, on their reading, it did not support resurrection.

D. A. Carson, “The Gospels and Acts,”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043.

사두개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그들의 적대자들이 남긴 기록만이 남아있는데 그 이름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인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사두개인들은 기원전 2세기경 마카비왕조 말이나 하스모니안 왕조초기에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집단에 가까왔다. 신학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성전과 밀접하게 관계되어있고 대제사장직을 중시했다. 모세 오경만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이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구전 전통을 거부했다.
 
- The Sadducees are mentioned explicitly only here in Mark’s Gospel. Comparatively little is known about them, and there is uncertainty about several items. None of their own literature has survived, and all references to them are in the writings of their enemies (the New Testament, Josephus, rabbinic literature). The name is thought to be derived from that of Zadok, a high priest in David’s time (2 Sam 20:25).
The Sadducees seem to have emerged as an identifiable party during late Maccabean or early Hasmonean times, i.e., the second century b.c. They were wealthy aristocrats and were probably among the absentee estate owners alluded to in 12:1. Politically they were very liberal and were quite willing to cooperate with the authorities of the Roman occupation in order to preserve their favored position. In fact, they were more of a political than a religious party, despite the following considerations. Theologically they were quite conservative. They usually were associated with the temple, the high priesthood itself, and the high priestly officialdom, although only one high priest was explicitly identified as a Sadducee.13 It is uncertain whether they accepted only the Pentateuch as Scripture, as was claimed by later Christian writers, or whether they merely ascribed more authority to it than the Prophets and the Writings. What is certain is that they rejected the oral tradition of the scribes (“teachers of the law,” NIV) and Pharisees. Very important for the present passage is their denial of resurrection of the body.14 According to Acts 23:8 they also denied the existence of angels and other spirits, but this claim has been questioned because references to angels are in the Pentateuch (e.g., Gen 19:1; Deut 33:2). The Sadducees perished in the debacle of a.d. 70.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4–195.

19절)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형사취수 제도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구약의 전통으로 형제가 자손을 잇지 못하고 죽으면 그의 형제가 대신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으로 형의 이름이 이어지도록 또한 그의 기업이 그의 부족과 가족안에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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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lusion is to the law of levirate15 marriage, as recorded in Deut 25:5–10. Actually the practice preceded the time of Moses, as can be seen in Gen 38, especially v. 8. Ruth 3–4 exemplifies the application of this law. The law provided that if a man died without a male heir, his brother was to marry his wife and impregnate her so that his brother’s name might be preserved and his property kept within the tribe and family.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5.

20-23절) 좀더 구체적인 질문은 이렇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아내를 취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해서 죽고 둘째도 그 형수를 취했다가 아들을 얻지 못하고 죽고 그렇게 일곱이 모두 여인을 취했지만 아들을 낳아 상속자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면 과연 부활이 있다면 그때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일반적인 대답은 부활시에 첫째의 아내다일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들이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주님께서는 대화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리고 계신다.

24-25절)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핵심은 부활때에는 하늘의 천사와 같이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부활 후에 자신들의 배우자가 없음으로 행복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에 그곳에서는 어떤 의미있는 관계도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상실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안에서의 의미있는 관계들로 인한 놀라운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Twice before, Jesus revalued family relationships (3:31–35; 10:29–30). Here Jesus taught that resurrection life will be different from earthly life. People will not marry and have children but in some sense will be like angels, either sexless or concerned only with serving and worshiping God. Some persons have feared that a future life without their spouses will not be happy. As a result some have argued that Jesus meant only that there will be no further marriages in heaven. Probably the best understanding is that no Christian will be deprived of any meaningful relationship with believing family members and friends. Not the grief of loss but the surpassing joy of new and equally meaningful relationships marks life in God’s family, whether now in the church or in the futur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6.

예수님께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부활 후에는 이러한 역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늘에서 천사들과 같아질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하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미래는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형사취수와 같은 제도는 더이상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Jesus began by asserting that there would be no marriage after the resurrection. His choice of words is particularly interesting. To marry was a male role. To be given in marriage was a female role. According to Jesus neither role is to apply after the resurrection. Both men and women will be like the angels in heaven, he affirmed. Apparently, then, neither marriage nor the sexual stereotyping that is so much a part of this world has any place in the next. Beneath that assertion lay a very serious issue. The Sadducees’ expected the future to be like the past. That expectation was the premise for the vexing little problem they had invented. Jesus maintained, however, that the future would not be like the past. It would be so different that the levirate law could not apply.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32–233.

26-27절) 예수님께서는 출 3:6을 인용하시면서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가시나무 떨기가운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아브라하미 이후 수세기 이후의 인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미래의 삶과 부활에 대한 확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언약의 신실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 아니라 지엽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 The crux of the argument is the use of the present tense in Exod 3:6. Abraham, Isaac, and Jacob had been dead for centuries at the time God spoke to Moses. Yet God told Moses that he was still their God at the time he spoke—thus implying tha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surrection, they were still alive. In making the statement Jesus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ife after death and resurrection, which elsewhere is a future event.
Jesus’ line of reasoning has not commended itself to many modern interpreters, but it was quite acceptable in his own day. The matter must be judged in part on that basis. The reasoning, however, is not as superficial as some have thought. One of the most important reasons for a Christian’s assurance of future life and resurrection is the nature of his or her relationship to God. The fact that the phrase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carried with it the idea of the covenant faithfulness of God emphasizes the central truth of Jesus’ words for Mark’s original readers and for believers today: God is faithful, and we can rely on his promise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96.

- The Pharisees whom the chief priests, elders and scribes sent to trap Jesus might very well have applauded this policy. They were ardent nationalists who nurtured the hope that God would send a messiah to defeat the foreign powers and expel them from the land. The Herodians who accompanied them lived at the other end of the political spectrum. They were in many ways collaborators with Rome. They were not an official political or religious party. Herodians is a loose term that designated a range of Jewish people attached to Herod’s court. In the world of first-century Judea it is difficult to imagine a stranger political alliance than the ad hoc committee of Pharisees and Herodians sent to Jesus. It was the same strange pairing that first plotted to destroy him in 3:6.
They came to trap him in his own words, and despite their flattery they posed a particularly thorny question: Is it right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Should we pay or shouldn’t we? If Jesus had said that Caesar had a right to collect taxes in Judah, the Herodians would have been satisfied, but the Pharisees would have denounced him to the crowd as a man who sided with their oppressors. If, on the other hand, he had denied Rome’s right of taxation, the Herodians would have had everything they need to denounce him to the Roman authorities in Judea. That was an interesting dilemma, but it was only the tip of the iceberg.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29–230.

- This was a stunning interpretation of an Old Testament text that was a cornerstone of first-century Judaism. While it did not deny that God promised the land to Abraham’s descendants, it did open a much broader vision of the future. The traditional reading, which focused so narrowly on the question of land, did not have much room for other peoples. The Gentiles had to be expelled from the land for those promises to be realized. Jesus had already made his differences with that ideology quite clear, and precisely here in one of the definitive texts of that dogma Jesus opened up a vision of the future that could be large enough to include the nations. His vision was not tied to a piece of real estate that only one people could possess. It was not tied to the hope that Israel would reemerge as a major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His vision was inclusive, and nothing in his teaching in Mark supports the idea that the nations would be subjugated to Israel.
Does the resurrection replace the land as the focal point for the future? And if it does not, how are the two ideas related? Mark leaves these two questions unresolved at this point. He has, however, given us an important clue and invited us to pursue it. In the previous controversy the Pharisees hypocritically said that Jesus taught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12:14). Despite their hypocrisy they were right. That is a form of irony that appears increasingly in the second half of Mark. Unfounded accusations, hypocritical testimony and the mockery to which Jesus was subjected often unintentionally contained a great deal of truth. In the final analysis even hypocrisy and unfaithfulness may confirm the sovereignty of God.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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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ing Taxes to Caesar
13 yAnd they sent to him some of zthe Pharisees and some of zthe Herodians, to atrap him in his talk. 14 And they came and said to him, “Teacher, bwe know that you are true and do not care about anyone’s opinion. For cyou are not swayed by appearances,3 but truly teach dthe way of God. Is it lawful to pay etaxes to fCaesar, or not? Should we pay them, or should we not?” 15 But, knowing gtheir hypocrisy, he said to them, “Why hput me to the test? Bring me ia denarius4 and let me look at it.” 16 And they brought one. And he said to them, “Whose likeness and inscription is this?” They said to him, “Caesar’s.” 17 Jesus said to them, j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And they marveled at him.

13절)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서로 공모하여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하였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로마권력에 반대하는 무리였다면 헤롯당원들은 종교세력이라기 보다는 헤롯을 등에 업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무리들이었기에 이 두 그룹은 둘은 앙숙에 가까왔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서로 힘을 합쳐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나아온 것이다. 본문 처음의 그들은 앞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11:18)이다. 
  • The pronoun “they” must refer again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11:18). For the identity of the “Herodians” and their relationship to the “Pharisees,” see the comments on 3:6. The word translated “catch” (“entrap,” RSV; “trap,” NRSV, NEB, REB, NASB, GNB) often was used to refer to catching an animal in a snare or hooking a fish. The use of the word implies deceit and treachery.

14절) 이들이 가지고 온 질문은 바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었다. 먼저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당신은 참되시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인데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예수님에 대한 진술이 모두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의도는 그분을 예배하고 높이기 보다는 그런 주님께 매우 곤란한 질문을 해서 그분을 올무에, 덫에 빠뜨리려고 한 것이다. 
본문의 세금이라고 표현된 헬라어는 ‘켄소스’라는 단어로 직접세로 이단어라 라틴어로 ‘센서스(sensus)’로 자역되었다. 이는 로마에 의해 당시 그 지역에 부과된 세금으로 1년에 한 데나리온을 바치게 되어있었다. 한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치 품삯으로 그 액수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이방세력의 압제를 싫어했고 그 동전에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있어서 이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두세(poll tax)였다. (Mt 17:25; 22:17, 19; Mk 12:14+)
  • The Greek word translated “taxes” (it is singular in Greek) is kēnsos and is a transliteration of the Latin word census. The reference is to the census, poll, or head tax that was imposed on all residents of Judea, Idumea, and Samaria in a.d. 6. At that time Archelaus (cf. Matt 2:22), the Jewish client-king (actually his modest title was “ethnarch”) of that part of Palestine, was deposed by Rome. It was annexed as an imperial province, and a legate was appointed by the emperor to govern it.11 The tax amounted to only a “denarius” a year (v. 15), i.e., a day’s wage of an agricultural laborer. It was opposed at its inception by Judas the Galilean (cf. Acts 5:37), who led an abortive revolt,12 and it was still deeply resented in Jesus’ time. The tax was hated not because of its amount but because it was a symbol of foreign domination and because it had to be paid with a coin that bore an image of the emperor and an offensive inscription (see the comments on v. 16). The “Caesar” or emperor at the time was Tiberius (a.d. 14–37).

15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며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내게 보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질문에서 예수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로마에 반역을 행하는 것이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 라고 말하면 로마의 세력을 추종하는 매국노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예수님을 매장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 Identical in intent to their earlier question on divorce (see note on 10:2), the Pharisees calculate that Jesus’ answer will either alienate the crowds (11:8–10) or enable them to denounce Jesus to the Roman authorities as a rebel.
본문에서는 시험(페이라조)라는 단어를, 13절에서는 책잡다(아그레우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3절의 단어는 사냥꾼이 짐승을 사냥할때 주로 사용하던 단어이다. 15절의 페이라조는 예수님이 시험받으실때 주로 사용된 단어이다. 

16-17절) 이에 예수님께서 데나리온에 새겨져있는 글과 형상이 누구의 것인지를 물으신다. 무리들이 가이사의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라워했다. 데나리온의 한 면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다른 한면에는 ‘Son of divine Augustus’라고 적혀 있었다. 
  • Jesus rejects their either-or approach. Obligations to God and state are not necessarily in conflict (e.g., Rom 13:1–7; 1 Tim 2:1–3; Titus 3:1–2; 1 Pet 2:13–17), though obedience to God takes unquestioned priority (1 Sam 13:13–14; 2 Sam 12:1–15; 1 Kgs 13:1–3; Jer 20:3–6; Acts 5:29). Jesus might also imply, as he had earlier (see note on 3:27), that Israel’s fundamental problem is not Rome but their own need to give God his due, namely, repentance (1:4–5, 15) coming from wholehearted love (12:30) of the one whose image they bear (in contrast to image on the coin, cf. note on v. 16).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정부의 요구, 국민으로서의 책무를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볼 수 있다. 본문은 단지 정치와 종교, 세속 정부와 교회로 나누는 이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우리의 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충돌되지 않을때 세속 권력에 따를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처럼 국가 권력, 권제잡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설명한다. 
  • This famous statement by Jesus does not provide a full account of the Christian’s obligation to the state. It does not justify the medieval concept of two empires, the ecclesiastical and secular, each supreme in its own sphere. It does not justify the modern dichotomy between politics and religion. It simply affirms that obedience to a secular power does not necessarily conflict with obligation to God. The lesser obligation may be included in the greater. Other passages on the subject are Rom 13:1–7; 1 Tim 2:1–3; Titus 3:1–2; 1 Pet 2:13–17.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인가? 동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 넣으면 하나님의 것일까?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 것을 명했다. 또한 성경은 만물이 그에게로부터 나오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라고 말한다. 한시적으로 이땅의 권세에게 맡기신 것이다. 우리는 이땅의 권력을 절대화해서도 안되고 주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이땅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그들을 세우시고 허용하시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온 만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그러한 창조신앙이 우리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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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ble of the Tenants
12 bAnd he began to speak to them in parables. “A man planted ca vineyard dand put a fence around it and dug a pit for the winepress and built a tower, and eleased it to tenants and fwent into another country. When the season came, he sent a servant1 to the tenants to get from them some of the fruit of the vineyard. gAnd they took him and beat him and sent him away empty-handed. gAgain hhe sent to them another servant, and ithey struck him on the head and jtreated him shamefully. gAnd he sent another, and him they killed. And so with many others: some they beat, and some they killed. He had still one other, ka beloved son. lFinally he sent him to them, saying, ‘They will respect my son.’ But those tenants said to one another, m‘This is the heir. Come, nlet u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And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o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What will the owner of the vineyard do? pHe will qcome and destroy the tenants and rgive the vineyard to others. 10 sHave you not read tthis Scripture:
u“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2
11 this wa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12 And vthey were seeking to arrest him wbut feared the people, for they perceived that he had told the parable against them. So they xleft him and went away.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을 향해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인가를 물으신 주님께서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의 포도원의 농부들을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한 이스라엘, 성전을 허무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2절)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세우고 포도주짜는 구멍을 파고 망대를 세우고나서 이를 관리하도록 농부들에게 세로주고 다른 나라를 갔다. 주인은 많은 비용과 수고로 포도원을 세웠고 농부들에게 이를 맡겼다. 주인이 이 농부들에게 포도 열매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요구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 The landlord goes to great expense, which justifies his rightful expectation for a share in the profit. The allusion to Isa. 5:1–5 (vineyard, fence, tower) suggests that Jesus continues the theme of “fruit of worship and righteousness for God” (see note on Mark 11:13–14). Immense Herodian-era manor houses with walls, towers, and a winepress have been excavated near Caesarea Maritima.
이에 열매 맺는 때가 되어서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을 얻고자 주인은 한 종을 대리인으로 농부들에게 보냈다. 

본문의 비유는 분명하게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울타리는 동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포도주를 짜는 틀은 포도를 짓이겨서 그 즙을 만드는 장치, 구멍이고 망대는 동물이나 도적을 감시하기 위한 높은 감시대를 의미했다. 이사야가 제기한 문제는 열매 없음이었다. 하지만 현재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농부들의 완악함이다. 말할것도 없이 이 농부들은 사두개인, 기득권을 지닌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 The allusion is to Isa 5:1–7, where the vineyard clearly is Israel, and the owner is God. The same identifications are to be made in the parable here. No attempt should be made, however, to identify the wall, the pit, or the tower as the law, the altar, and the temple, respectively, as did the medieval church in its excessive allegorical interpretations. They simply are part of the apparatus of the story. They do accurately describe a first-century Palestinian vineyard. The wall (“hedge,” RSV, NKJV; but not “fence,” NRSV, GNB) was to keep animals rather than people out. The “pit for the winepress” was actually a trough into which the juice ran after having been crushed from the grapes. The tower was to provide an elevated observation point and shelter for those who kept watch against animals and thieves.
  • In Isaiah the problem is a fruitless vineyard, i.e., a nation that failed to produce the fruits of righteousness. In the present parable the emphasis is on the wickedness (greed, dishonesty, violence, murder) of the tenants, who seem to represent the leaders of the nation. Unfortunately such things actually characterized the Sadducees, the priestly aristocracy.

3-5절) 그런데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 이어 다른 종이 왔으나 이제는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모욕을 주었다. 이어 다른 종을 보내자 농부들은 그 종을 죽였고 그 외에 많은 종들을 이어 보내었는데 그들을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본문에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단어들을 보면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종들을 잡아(물리적으로 포박하여) 때리고 그들을 빈손으로 보냈다. 이어서 다른 종를 보내자 그의 머리를 때리고 모욕을 주었다. 이제 또다른 종을 보내자 그를 죽였다. 이후에 보낸 종들은 때리고 죽였다. 
본문 4절에 머리에 상처를 내고라는 단어는 ‘케팔리오’라는 단어로 뒤에 나오는 모퉁이의 머릿돌에서 나오는 ‘케팔레’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유대인들은 본문을 들으면서 농부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을 때리고 함부로 대했다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6절) 이제 주인은 오직 한 사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최후로 보내면서 자신의 아들은 존경할 것을 바랬다. 본문의 아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 The “son, whom he loved” is of course Jesus (see 1:11; 9:7). Whether the original hearers of the parable realized this is unlikely, but the original readers/hearers of Mark’s Gospel certainly did. The Greek could be translated simply, “He still had one beloved son.” Commentators and lexicographers differ, however, on whether in context the word means “beloved” (RSV, NASB, REB; cf. NEB) or “only” (NEB, REB margin). The NIV (as well as the GNB) attempts to convey both ideas. Etymologically the word is related to the word “love,” but in Gen 22:2, 12, 16 LXX it means only, in the sense that Isaac was certainly the only child of the promise.

7-8절) 이에 농부들은 주인이 죽고 아들을 보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주인이 죽으면 그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으로 여기고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포도원 밖에 내던졌다. 이처럼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행동이다. 
  • The ultimate insult was to leave a corpse unburied. That was not the fate of Jesus, and again the early church does not appear to have invented the parable on the basis of what had happened previously. Jesus, rather, suffered outside the city (cf. Heb 13:12).

9절) 포도원 주인은 이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것이다. 본문의 다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것을 거부했다. 이제 이 약속은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새 이스라엘이고 진정한 이스라엘이다. 주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교회에 이 사명을 맡기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The origin of this verse has been denied to Jesus because elsewhere he did not answer his own questions. He may not have done so in the present instance, as Matt 21:41 indicates. Mark simply was not concerned to identify who gave the answer. The “others” to whom the vineyard was given were, of course, the Gentile church. The church is the inheritor of the position formerly held by Israel, the recipient of many of the promises originally made to Israel. It is the new Israel, the true Israel. By recording the statement of Jesus, Mark may have wanted to make that point.

10-11절) 이제 마가는 포도원 비유에서 건물의 비유로 관심을 돌린다. 건축자(이스라엘의 지도자들)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머릿돌(the cornerstone)은 건물의 건축시에 첫번째로 놓는 돌로 건물 외벽의 코너, 즉 두 벽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지는 돌을 의미한다. 원어로 ‘케팔레 고니아’로 케팔레는 머리를 의미하고 고니아는 모퉁이, 코너를 의미한다. 이는 모퉁이의 머리리는 의미라 말그대로 모퉁이의 머릿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에는 5번 등장하는데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벧전 2:7이다. 
  • Here the metaphor changes from a vineyard to a building. The quotation is from Ps 118:22–23, a passage quoted two other times in the New Testament in addition to the parallels in Matt 21:42 and Luke 20:17 (Acts 4:11; 1 Pet 2:7). The Jews understood the stone to be their own nation, which was rejected by other nations but which would be restored by the Lord. The early Christians understood it to be Jesus Christ (note especially Eph 2:20). Other “stone” passages are Rom 9:33 and 1 Pet 2:8, which quote Isa 8:14, and 1 Pet 2:6, which quotes Isa 28:16. As the NIV note indicates, the Greek word Mark used can mean either the capstone of an arch or the cornerstone of a wall.
또한 머리를 상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6:27)

실제로 유다의 멸망이후에 예루살렘은 훼파되었다. 성전은 파괴되고 성문은 불타버렸다. 실제로 솔로몬의 성전은 잿더미가 되었고 그 쓰레기더미안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후에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버려졌던 건축재료들은 찾아냈고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나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헤게모니에 관심이 없으셨다. 그분의 비전은 하나님과의 화해였다. 

예수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라고 묻는 무리들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답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말씀하신다. 복음서의 비유는 흔히 심판의 사인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지속적으로 실패한 결과이다. 
  • Jesus had declined to give the leaders of Jerusalem a direct answer about his authority, but as he began to speak in parables, he gave them an indirect one. In this Gospel parables are often a sign of judgment. They indicate that someone has stopped listening to God. A parable is the first consequence of a persistent failure to listen. A parable makes understanding what God is saying more difficult, and the parable brings with it a set of new conditions. In order to understand God it is necessary to see oneself through the lens of the parable, something that is typically unflattering. Parables are a witness that a profound alienation has occurred, and repentance in some form becomes a requirement for understanding what God says. Speaking in parables was not, then, a concession to Jesus’ opponents. It was an escalation of the argument.

마가는 사 5장의 포도원 비유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첫번째 이사야의 비유에서 사랑받는 자는 하나님인데 예수님의 비유에는 사랑받는 자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다. 마가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가난한자를 착취한 유다의 지도자에게 죄를 물은 것처럼 하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쓴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 경고했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포도원의 소산을 농부들이 정당하게 주인에게 드리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대리인, 종들을 통해서 정당한 요구를 했음에도 이를 거절한 것이다. 도리어 그들은 그러한 요구를 하는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나아가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세번째로 이사야의 비유는 포도원이 황무지가 될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마쳐진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농부들을 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는 포도원은 파괴되지 않고 단지 농부만이 바뀔 것을 말하고 있다. 
  • The parable of the tenants is a revision of the parable of the vineyard found in Isaiah 5:1–17. In the original parable the vineyard represented the people of God. When God came to gather fruit from the vineyard, there were no sweet grapes to pick—only bitter ones. The bitter grapes symbolize the bloodshed and oppression that the people of Israel and Judah had produced instead of the justice and righteousness God had hoped to harvest. Isaiah’s parable ends with a pronouncement of judgment against the people; the fertile land of Judah would become a wasteland.
  • Although Jesus borrowed the themes of the vineyard, the beloved, the winepress and the watchtower from Isaiah’s parable, he made three fundamental changes that give his parable a different focus. Isaiah’s parable is set as a song to the beloved one, that is, to God. In Jesus’ parable the beloved one is the son of the owner of the vineyard. In the Gospel of Mark the term beloved occurs in two other places. At both the baptism of Jesus and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God called Jesus the son whom I love. Reading the parable in the broader context of Mark, it appears that Jesus has put himself inside this parable.
  • Second, Jesus did not charge the rulers of Judah with exploiting the poor, as Isaiah did. The thrust of this parable is not that the vineyard produces bitter fruit. The problem is that the tenants will not give the owner any of the vineyard’s produce. These tenants refuse to recognize the owner’s rights and the authority of his representatives. They are guilty of robbery, the same charge Jesus made in Mark 11:17, and ultimately of murder. There is plenty of bloodshed in this parable, but this violence is not exercised by the rich and powerful against those beneath them. In killing first the servants and finally the beloved son, the tenants attacked the owner. This is more like a rebellion—violence from the bottom upward.
  • Third, Isaiah’s parable ends with a warning that the vineyard would become a wasteland. His parable was a prophecy of doom for the people of Judah. Jesus’ parable ends with a different scenario: the owner will destroy the tenants and give the vineyard to others. This parable envisions the destruction of only the tenants. The vineyard is not to be destroyed, but the tenants will be replaced.

본문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비유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포도원 주인께서 이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실 것이고 이제 이것을 관리하고 열매를 맺게해서 주인에게 바칠 책임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주인이 열매를 요구할때 우리는 어떤 열매를 그분께 돌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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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ity of Jesus Challenged
27 vAnd they came again to Jerusalem. And as he was walking in the temple,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and the elders came to him, 28 and they said to him, w“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or who gave you this authority to do them?” 29 Jesus said to them, “I will ask you one question; answer me, and I will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30 Was the baptism of John xfrom heaven or from man? Answer me.” 31 And they discussed it with one another, saying, “If we say, ‘From heaven,’ he will say, y‘Why then did you not believe him?’ 32 But shall we say, ‘From man’?”—zthey were afraid of the people, for they all held that John really was aa prophet. 33 So they answered Jesus, “We do not know.” And Jesus said to them,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27절)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이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예수님의 선포(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후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모의를 한다. 다시 예수님께서 성전을 거니실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분앞에 적대적으로 나아온 것이다. 본문의 무리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인물로 공회는 당시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가진 기구로 70명의 멤버들과 이를 주제하는 대제사장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에서 대표단을 구성해서 지금 주님께 나아와 적대적인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다. 
  • Some have questioned whether Jesus could have walked around in the temple after clearing it. The encounter could have taken place at an earlier time and could have been placed here by Mark for topical reasons. But even on the assumption that it did take place the day following the clearing, Jesus’ popularity may have prevented the authorities from taking immediate action against him (cf. v. 18).
  • “The chief priests,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e elders” comprised the Sanhedrin, the Jewish executive, legislative, and judicial council. It consisted of seventy members plus its presiding officer, the high priest. The reference here, however, is not to the entire Sanhedrin but to a delegation sent from it. The reference is not necessarily to Caiaphas, the chief priest at the time, or to Annas and other former chief priests but to officials in the priestly hierarchy, to the Sadducees in general.

28절)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을 행할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의 이적과 가르침, 행동이 적절한 권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의도였다. 본문의 이런 일은 일차적으로는 바로 앞서 벌어진 성전 청결 사건이다. 또한 앞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친 것들이나 그분이 베푸신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권위를 부여하는 자신들에게 허락을 받지 않은 예수님의 행동이나 가르침은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의 권위는 ‘엑수시아’라는 단어로 마가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대답을 해도 불리한 대답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위를 줄 수 있는 산헤드린이 이것을 반대하고 적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준 사람이나 기관이 없고, 하늘로부터라고 해도 신성모독이라고 할 판이었다. 
  • The purpose of the question was to force Jesus to admit that he had no authority to teach and act the way he did. The Sanhedrin claimed it was the authority in religious matters. “Authority” (exousia) is an important term in Mark (1:22, 27; 2:10; 3:15; 6:7; 13:34 in addition to four times in the present passage). “These things” (twice in the Greek text, “this” in the second instance in the NIV to avoid redundancy) probably refer to the clearing of the temple, the public entry into Jerusalem, and Jesus’ teaching in the temple.



29-30절) 적대적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역질문을 제기하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질문하신다. 요한의 세례는 요한의 용서의 필수조건으로서의 회개에 대한 가르침과 그가 선포했던 오실이뿐만 아니라 세례 그 자체를 포함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사역과 가르침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이 질문을 통해서 분명히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에 요한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이라면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또한 하늘의 권위를 득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요한이 영감되어 선포한 하늘은 하나님을 대치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 The expression “John’s baptism” embraces John’s preaching of repentance as a prerequisite of forgiveness and his proclamation of a “coming one” (cf. 1:1–8) as well as the act of baptism itself. In fact, what Jesus said here suggests the reason Mark began his Gospel the way he did. The clear implication of the question is that John’s ministry was divinely authorized. If John’s message had God’s approval, then Jesus and his message also had to have divine authority because of John’s inspired attestation. “Heaven” is a reverential substitute for “God.”

31-32절) 예수님의 역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열심히 의논했지만 만일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어찌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요한을 따르는 이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겼기에 백성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자신들이 알지 못한다고 자신들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 The religious officials immediately recognized their dilemma. They did not believe that John was a prophet from God, but they dared not say so publicly because of the high esteem in which John was held. Nor in the present situation could they admit that John’s baptism was from heaven because Jesus would castigate them for not repenting and being baptized as a sign of their repentance. The only way out, even though it was not a good one, was to confess inability to decide. What they did not realize was that such inability disqualified them from being religious authorities.

33절)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인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한 무리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나도 너희에게 내가 무슨 권세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이스라엘의 리더들(목자들)은 이사야가 말한대로 자신들이 치고 있는 양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이고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행동은 이러한 이들을 꾸짖고 계신 것이다. 
  • We don’t know. An admission that ironically reveals their true condition. A few verses after the Isa 56:7 text that Jesus cites in v. 17 to justify his temple action, Isaiah describes Israel’s leaders as “shepherds who lack understanding” and “seek their own gain” (Isa 56:11; cf. Jer 3:15 in view of Jer 7:11). This applies equally to the temple authorities who now confront Jesus.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행동과 선포는 그들의 기득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해를 끼치는 행위로 판단해서 대표단을 구성해서 주님앞에 나아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무리들은 두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한이 말한대로 오실 이를 예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리들은 이 둘중에 그 어느것도 인정하기 싫었다.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이나 그를 보내신 분을 믿지 않았다. 단지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선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한 것이다. 
  • Jesus’ question offered the chief priests, elders and scribes two possibilities. They might affirm that John was a prophet, or they might stipulate that John was merely a popular figure whose claim to authority was no larger than the following he had attracted. They chose to do neither and answered: We don’t know. As Mark describes their deliberation (11:31–32), however, that was not a true statement—it was an evasion. They did not think John’s authority came from God because they had not believed John. They thought his authority had purely human origins but were afraid to say so because they feared the people.
  • Mark refers to their fear of the crowd twice in this engagement. In 12:12 their fear also prevented them from acting against Jesus on the spot. This double reference is particularly significant in the context of an argument about who was acting for God. Psalm 111:10 and Proverbs 1:7 affirm that the fear of God is the beginning of wisdom, but in this confrontation about worship the leaders of Jerusalem were constrained by their fear of people. Any claim they might have made to act for God had been undermined by the fear that actually governed their condu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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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 from the Withered Fig Tree
20 iAs they passed by in the morni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away to its roots. 21 And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him, j“Rabbi, look! The fig tree that you cursed has withered.” 22 And Jesus answered them, “Have kfaith in God. 23 lTru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m‘Be taken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does not ndoubt in his heart, but obelieves that what he says will come to pass, it will be done for him. 24 Therefore I tell you, pwhatever you ask in prayer, obelieve that you qhave received3 it, and it will be yours. 25 And whenever ryou stand praying, sforgive, t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so that uyour Father also who is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trespasses.”4

20-21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제 아침에 지나가실때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있었다. 마가의 경우 본문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마태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혀야 함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바로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이다. 
  • The fig tree had withered within 24 hours, perhaps sooner (Matt. 21:19). It represents the judgment of God on Israel (Isa. 34:4; Joel 1:7–12; Amos 4:9; see note on Mark 11:13–14).

22-23절) 지금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응답은 어쩌면 생뚱맞은 것이다. 지금 한창 시들어 버린 무화과 나무를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과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주님의 관점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을 옮기는 이 비유, 상징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다. 
  • Have faith in God. Jesus’ response must have surprised the disciples. (What does faith have to do with the cursing of the fig tree?) His point is that they should trust God to remove whatever hinders them from bearing fruit for God. Moving a mountain was a metaphor in Jewish literature for doing what was seemingly impossible (Isa. 40:4; 49:11; 54:10; cf. Matt. 21:21–22). Those who believe in God can have confidence that he will accomplish even the impossible,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절) 기도하고 구하는 바를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성급하게 일반화 시켜서는 안된다. 불가능한일을 “믿씁니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앞에 떼를 쓰면 하나님이 우리의 열정과 열심에 감복해서 들어주실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일반화시키거나 예외없이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동시에 이 본문의 내용이 오직 사도들에게만 한정되기에 우리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제껴놓아서도 안된다. 믿음은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  The statement is not to be universalized and applied without exception, but neither is it to be localized and confined to the original disciples or ignored as having no practical value. Faith is an indispensable element in answer to prayer.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다면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당시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마가는 본문에서 응답되는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앞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용서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다. 
  • Standing probably was the most common Jewish posture for prayer, but both standing and kneeling are well attested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Mark seems to have understood that forgiveness of others is another prerequisite for answer to prayer. Some think the verse indicates that Mark and his readers knew the Lord’s Prayer, but no confident decision seems possible. What is certain is that effective prayer must be offered in faith with a spirit of forgiveness.

  • It is possible then that 11:25 describes a corporate prayer by an oppressed community that is asking God to rectify the injuries it has suffered. In that case the request for justice is to be tempered by forgiveness. It must be tempered also by the recognition that oppressed groups can injure other people as well, a concern that the disciples’ own conduct justifies (9:34; 10:13, 37). Viewed in this light, a prayer for justice is also ultimately a prayer for reconciliation.

  • Jesus’ use of the word father at the end of 11:25 should not be overlooked. This is the first time in the Gospel of Mark that God is described in this way. Jesus has been described as God’s “son” in 1:11 and 9:7, but heretofore no one has referred to God as father. One of the major themes in the previous sections of the Gospel is the creation of a new family (3:31–35), in which the will of God is the defining factor. The reference to God as father here is entirely consistent with that passage. We might wonder then why we have not seen it before or why it appears here. The best answer is that in this passage the will of God is startlingly and clearly revealed. Against the backdrop of nationalistic dreams and all the roiling patriotic fervo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are revealed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God’s will.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성전 청결을 명하시고나서 이제 이 성전이 있는 산을 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명하여 옮기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또한 용서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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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leanses the Temple
15 aAnd they came to Jerusalem. And he entered the temple and began to drive out those who sold and those who bought in the temple, and he overturned the tables of bthe money-changers and the seats of those who sold cpigeons. 16 And he would not allow anyone to carry anything through the temple. 17 And he was teaching them and saying to them, “Is it not written, d‘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the nations’? But e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18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heard it and fwere seeking a way to destroy him, for they feared him, because gall the crowd was astonished at his teaching. 19 hAnd when evening came they2 went out of the city.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1:15–19.

15절) 앞서 11-12절의 상황을 볼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을 전날 둘러보셨고 베다니에서 묵으신 이후에 예루살렘에 다시 들어오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이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테이블과 비둘기 파는 자의 자리를 둘러 엎으셨다. 마태와 누가와는 다르게 마가는 시간 순서에 따라 비교적 정확하게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상을 둘러엎은 사건은 성전의 바깥뜰, 소외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로마 화폐를 세겔로 바꿔주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에 바쳐야하는 성전세를 내기위해서였다. 미쉬나에 따르면 이 성전세의 마감이 니산의 첫날인데 이는 유월절 2주전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렇게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는 테이블은 일반적으로 이 마감일 5일전부터 준비되어서 운영되었다. 이로 볼때 예수님께서 유월절 한주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맞아 보인다. 
  • Whereas Matt 21:12 and Luke 19:45 appear to indicate that Jesus intervened in the temple the same day he entered the city, Mark clearly indicates that it was the following day when he did so (see v. 12). Again the best explanation is that the Gospel writers were not concerned to produce an exact chronology.
  • The scene is the outer courts, the so-called court of the Gentiles, the only area into which Gentiles could go. The money changers were those who exchanged Roman money for the Tyrian shekel, which was required for the annual temple tax imposed upon all Jewish males (Exod 30:11–16). The Tyrian shekel was the nearest available equivalent to the Old Testament shekel. According to the Mishna, the tax was due on the first of Nisan (two weeks before the Passover); and the exchange tables were set up in the temple during the five days prior to the due date.7 Doves were the prescribed offering for the poor who could not afford an animal (Lev 12:6; 14:22; 15:14, 29; cf. Luke 2:22–24).
  • Šeqal. 1.1–3. This may constitute additional evidence that Jesus was in Jerusalem for more than a week before his death. The Mishna, however, was not put together until two centuries after Jesus’ time; and there is always the problem of how accurately it describes the situation prior to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in a.d. 70.

17절) 예수님께서는 내집(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지금 이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문은 구약의 인용이다. 주님은 지금 성전을 유대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한정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이 유일하게 예배드릴 수 있던 이 장소가 상인들의 돈벌이를 위한 소굴로 전락되어 소음과 매연으로 더렵혀질때 주님께서는 그들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 곳을 청결케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상인들을 내보내심으로서 이방인들을 위한 예배의 장소를 마련해주신 것이다. 
  • The quotation in the middle part of the verse is from Isa 56:7, and the allusion in the last part is to Jer 7:11. Jeremiah continued in vv. 12–15 to say that God was going to do to the temple of Solomon what he did to the shrine at Shiloh—utterly destroy it. By quoting from Jeremiah, Jesus suggested that God would do the same to the temple of Herod that existed in his day.
  • Interestingly, only Mark included the words “for all nations” in his quotation. This may be significant. Isaiah predicted that the Gentiles would have a place among the people of God and in the temple of God. In Herod’s temple, however, they were always excluded from the inner shrine (cf. Acts 21:27–32). With the conversion of the court of the Gentiles into a bazaar with all its noise and commotion and stench, they were deprived of the only place in the temple where they could worship. By clearing out the traders Jesus literally and symbolically provided a place for Gentiles in the temple of God, although as indicated reforming the temple was not his primary purpose.

18절) 예수님의 행동과 그분의 말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놀랍고 두려워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고칠 기회를 얻었지만 도리어 이를 걷어차고 그분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은 군중들의 마음을 빼앗는 예수님의 인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입지가 두려워질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 Paradoxically,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who are in favor of commerce in the temple) seek to destroy the Purifier (3:6; 15:31–32) rather than to be purified themselves. Their actions are motivated by fear of Jesus’ popularity, fear of losing power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and fear of a public uprising (in which case the Romans would intervene). The Jewish leaders correctly saw Jesus’ act as a challenge to their authority in the most sacred space in the world.

19절) 날이 저물매 주님께서는 그 성밖으로 나가셨다. 예수님의 행동으로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을 맞이하여 성안에 그분이 머물만한 숙소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분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이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 Jesus may have left the city at night because it was unsafe to remain there or because there were no accommodations available during the crowded Passover season or because he wanted to be with friends at Bethany (cf. 11:11; 14:3).

예수님의 성전 청결사건은 성전의 본연의 기능을 모든이들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분명히 이 당시에도 힘이 있고 명성이 있는 이들은 안락한 공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자들의 경우에 멀리서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하러 들렀지만, 또한 그중에 이방인의 경우라면 더더욱 성전의 뜰안으로 나아갈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야만 했던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많은 무리들이 오가며 돈을 바꾸고 희생 제물을 구입하기위해서 흥정하는 그러한 장소였을 것이다. 지금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내집은 힘있는 자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만민(가난하고 힘없고 빽없는 이들을 위한 곳)이 기도하는 곳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민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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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urses the Fig Tree
12 wOn the following day, when they came from Bethany, xhe was hungry. 13 yAnd seeing in the distance a fig tree in leaf, he went to see if he could find anything on it. When he came to it, he found nothing but leaves, for z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14 And he said to it, “May no one ever eat fruit from you again.” And his disciples heard it.

12-21절 사이에 마가는 무화과 나무와 성전 청결, 무화과 나무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The way in which Mark organizes his material in these verses (fig tree/cleansing of temple/fig tree) suggests a connection between the cleansing of the temple and the cursing of the fig tree.
본문의 무화과 나무 사건과 이후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사건은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임박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적인 행동이다. 
The cursing of the fig tree and the expulsion of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11:15–19) are prophetic actions that symbolize the same thing, the coming judgment on unfaithful Israel by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d its temple. Israel, like the fig tree, appeared to be thriving; but the appearances were deceiving because Israel and the fig tree were bearing no fruit. The magnificence of the temple masked the corruption and false security associated with it. Just as the fig tree was cursed and withered, so Israel was about to be condemned and decline in importance. Just as the merchants were expelled from the temple, so the religious establishment that authorized the merchants was about to be expelled from its favored place.
Both the cursing and the expulsion are acted or dramatized parables in the tradition of the Old Testament prophets. Compare Isaiah’s walking around naked and barefoot to symbolize the “stripping” of Egypt (20:1–6), Jeremiah’s retrieving a rotten waistband to symbolize the humiliation of Judah (13:1–11), Jeremiah’s breaking of an earthen jar to symbolize the “breaking” of Judah (19:1–3, 10–11), and Jeremiah’s wearing a yoke around his neck to symbolize enslavement to the king of Babylon (27:1–15; 28:10–17; see also 2 Chr 18:10 and Ezek 4–5).
The fig tree symbolizes faithless Israel. It is so used in the Old Testament: Jer 8:13; 29:17; Hos 9:10, 16–17; Joel 1:6–7; Mic 7:1. The fig tree is an object of judgment in Isa 34:4 and Hos 2:12.

12절) 앞서 군중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전날 성전을 둘러보신 후에 이틑날 베다니에서 나와 성전을 향하고 계셨다. 이때에 주님께서 시장하셨다 

13-14절) 이때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것에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나가셨지만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는데 왜냐하면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주님께서 그 무화과 나무에게 영원토록 열매가 나지 않을 것을 저주하셨다. 
Since the fruit of the fig tree begins to appear about the same time as the leaves (or a little after), the appearance of leaves in full bloom should have indicated that fruit (in the form of green figs) was already growing. Jesus’ actions here have symbolic importance, signifying the hypocrisy of all who have the appearance that they are bearing fruit but in fact are not. The specific reference, though, is to Israel, since in the OT the fig tree often serves as a metaphor for Israel and its standing before God (e.g., Jer. 8:13; Hos. 9:10, 16; Joel 1:7). Here the cursing of the fig tree signifies the judgment of God on the “fruitless” Jewish people (cf. Mark 7:6), who had turned away from God into empty ritual and legalism (cf. Hos. 9:10–17). It is a visual parable to signify Jesus’ unrequited search for the true fruit of worship, prayer, and righteousness in the Jewish nation and its religious practices.

당시 일반적으로 6-11월 정도에 무화과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이사건은 유월절에 발생한 것으로 4월정도니까 2-3개월정도 이른 시점에 예수님께서 열매를 요청하신 것이다. 예외적으로 4월에도 덜 익은 무화과를 먹을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제 철이 아니다.
 - Leaves are found on Palestinian fig trees except for the three winter months, and ripe figs are present from June until November. Therefore the event must have taken place during March, April, or May. Of course the Passover usually came in April. According to some, small green figs, which in an emergency could be eaten but ordinarily were not, appear in March even before the leaves; but it is doubtful that anything should be made of this. Mark’s parenthetical statement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alerts the reader/ hearer to look for symbolic meaning (such parenthetical statements are another element of Markan style; cf. 1:16; 5:42; 7:3–4; 13:14). The statement may be an allusion to Mic 7:1 and/or Jer 8:13. If so, it could mean that at the time Jesus spoke Israel was not producing the fruit God expected. Israel, like the fig tree, was barren when Jesus came to it. This understanding would ease some of the difficulty.

이 열매 없는 무화과를 향해 저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임을 알았을까?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열매를 요구하시는데 정말 필요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할때, 열매가 없을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열매들을 저주하셔서 더이상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만 백성을 향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요구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행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심판을 향하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2-25절을 통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하신다. 
  • Jesus’ statement in the first part of the verse indicates that Israel would not again be the primary instrument of accomplishing God’s purpose. The statement that the disciples heard him means that they grasped the truth. Although Mark did not record it, they must have been horrified. Mark felt a need to present the encouraging statements of vv. 22–25 because later disciples were also perplexed about the fate of Israel.

성전 청결을 하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이 사건을 설명하시면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계신 것이다. 어쩌면 무화과 나무로서는 너무 속상한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닌데 자신에게 열매를 요구하시고 열매를 맺지 못하신다고 나무를 말라죽게 하시니 말이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은 바로 성전 청결에 있다. 당시 로마는 절대 강국으로 모든 도시에 신당을 세우고 그 신당에 우상을 섬기도록 했다. 메베소, 아테네, 고린도, 알렉산드리아에 가이사의 상이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 우상앞에 절하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만은 달랐다. 구약에 따라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혐오했고 우상을 섬기지 않으려는 시도를 유대인들은 했다. 이런 신앙적인 이유로 이방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예배드릴때 이런 편의를 돕기 위해서 성전에서는 희생 제물을 판매하고 동전을 바꿔준 것이다. 당시 각국에서 발행되는 화폐에는 황제의 상이 그려져 있어 이것이 우상으로 여겨져 성전에 직접 드려지는 것을 꺼려했기에 성전에서는 동전을 바꿔주는 일을 한 것이다. 처음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때는 온전히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위한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본래의 의도를 망각하고, 아니면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본질을 놓치게 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통렬하게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The cursing of the fig tree is a disturbing event (Anderson 1976:265), especially so because Mark clearly states that figs were out of season. Some try to soften this story by claiming that Jesus expected to find first fruits on the tree, the few figs that would have appeared in advance of the full crop which would come later (Gundry 1993:636). While the story might be read in that way, the unqualified statement because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cannot be reconciled with this line of interpretation. The plain implication of this simple statement is that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the fig tree. The fig tree, then, is a sign or symbol of something else, and Mark’s intercalation points to the temple.
The setting for what Jesus did in the temple is the days leading up to Passover, perhaps during the Festival of Sukkoth. Both Passover, which celebrates God’s deliverance of the Jewish people from Egypt, and Sukkoth, which commemorates God’s provision in the wilderness, were celebrations of national pride. In the first century when the Jewish people lived under the administration of Rome, these festivals were also a flash point for patriotic hopes. They brought out the deepest religious and patriotic feelings of the people, yet as Jews from around the world streamed into Jerusalem to celebrate their day of liberation, foreigners held the reigns of power in the Promised Land.
There was one place, however, where the Jewish people were still in control—the temple. Caesar permitted them to practice their religion unhindered by the politics of Rome. In Ephesus the temple of Artemis housed statues of the goddess Roma and Caesar Augustus. Temples in Athens, Corinth and Alexandria held similar statues. Throughout the Mediterranean world, houses of worship displayed tokens of their allegiance to Rome, but it was not so in Jerusalem. The temple in Jerusalem housed no statues of any kind. It was unpolluted by the trappings of foreign gods, and the keepers of the temple were committed to keeping it pure.
Rome’s tolerance and a Jewish commitment to keep the temple pure help to explain the presence of the moneychangers. Church governing boards and pastors often cite what Jesus did in the temple as a reason to prohibit the sale of anything on church patios on Sunday mornings. There is very little in this Gospel to support such a prohibition. Despite efforts to prove otherwise (Anderson 1976:266), Mark contains no hint that the animals offered for sacrifice were overpriced or that the rate of exchange was artificially inflated. In fact, an argument might be made that the sellers and moneychangers were providing an important service. The pilgrims who streamed in from all parts of the Roman Empire to celebrate Passover needed a ready supply of animals to sacrifice, and the money they brought with them was typically inscribed with the image of a god or goddess. It would not do to have pious Jews purchase sacrifices for the one true God with idolatrous currency, so the temple authorities authorized the striking of money that contained no offensive symbols. Those who came to Jerusalem to worship were required to use this currency to purchase their sacrifices.

본문의 무화과나무 사건은 다음에 등장하는 성전 청결과 반드시 연결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성전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을 향한 통렬한 심판을 무화과 나무로 예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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