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세속사회의 신화
신화란 거짓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그 정의는 "어떤 사회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입증되지 않은 집단적 믿음"이다.
막스 베버는 사회에서 합리화, 산업화, 관료화의 삼중적 과정이 진행될수록 초자연적, 마법적, 초월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세속화 과정은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소멸을 서서히 초래할 것이라는 것, 세속화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 어느 사회든 합리화, 산업화, 도시화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신화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세속화는 종교 이후의 시대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을 부채질해서 내세 중심의 종교조직을 계속 재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로드니 스타크)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
1) 고등교육에의 노출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신봉이 서로 반비례한다. 이것은 애초에 학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이들이 비종교인들이기 때문이지 학문활 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더 비종교적이 된 것은 아니다.
2) 학문 생활과 비종교의 상관성은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의 경우가 훨씬 더 높다.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경계 설정의 문제이다.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수록 더욱 경계 설정이 어려워진다.
세속 사회의 이념(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세속사회의 특징)
1) 그 사회는 우주와 인간의 위치에 관한 어떤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사실상 다원적인 사회일 뿐더러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르는 사회다.
3) 따라서 아주 관용적일 것이나, 단 사회적으로 용인된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만은 관용할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4) 하지만 시민들이 다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회여야 한다.
5) 세속 사회는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6) 세속 사회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이미지, 이상적인 유형이나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세속 사회의 이념에 대한 비판
1) 먼비가 묘사하는 세속사회는 아주 특정한 사회관을 고집하고 있다.(하나님을 부정)
2) 세속 사회가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른다.
3) 세속사회는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4) 세속 사회는 재판관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적보다 더 존엄한 어떤 것을 대표한다는 건방진 소리를 일축해 버리는 사회
5) 사회가 사실을 확인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행할 수 있도록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
6) 세속 사회는 본받을 만한 공식적인 이미지나 모델이 없는 사회
세속 사회는 신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속사회의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그것이 거짓 신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 여호와와 발람간의 화친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나, 그 신화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권세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 제자도의 모델은 이미 예수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주어졌다. 그분의 사역은 개개인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값비싼 제자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이 세상의 통차자인 정사와 권세들에게 도전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십자가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교회는 그 동안 많은 국가와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교회는 그 주인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 시작한 그 일을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수행하는 운동이다. 교회는 지옥의 권세조차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교회는 유일무이한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치 않는 모든 권세와 이데올로기, 신화와 가정, 온갖 세계관에 도전장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갈등과 어려움과 배척당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보다 앞서 예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과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18장. 복음의 해석자로서의 회중
복음이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의 한 구성 요소 정도로 편입될 수 없다. 교회의 역할도 소위 개인구원에 국한시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3세기의 교회는 종교를 개인 구원의 길로만 한정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대의 공적 교리를 거짓이라고 도전했고 그에 따른 값으로 순교를 당했다.
이후 지배 권력이 교회로 들어오며 천년에 걸쳐 유럽에 기독교 문명을 수립했다. 동시에 세속적 권력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강요하는 치명적 시험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내부 분열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기독교 세계는 와해되고 17-18세기에 걸쳐 유럽은 새로운 과학의 성취와 세속사회의 이념으로 고무되었다.
눈을 열어 십자가에 무력하게 못박힌 자가 궁극적인 권력의 원천임을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구원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고 놀라운 하나님의 실재, 곧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분의 통치가 밝히 드러나고, 그분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바로 그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열방의 회심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의 종의 역할
그분은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필요에 즉시 반응하기도 하셨지만 통치권을 손에서 놓으신 적은 없었다. 스스로 행동과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정하셨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셨다.(오병이어 사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시면서도 풍성한 생명을 얻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완전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신다.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에 관해서는 잘못된 사상을 용납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면 부드러운 자비와 준엄한 통치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까?
회중 중심의 교회 회복
어떻게 해야 복음이 믿을 만한 메시지로 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나의 주장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할 경우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게끔 되어 있다. 교회의 특성은 그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자기 소명에 충실할 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세상을 이해하고 또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렌즈, 곧 이해의 틀을 복음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명에 충실한 공동체가 지니는 특징
1) 찬양의 공동체일 것이다.
- 근대적 관점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주된 특징은 회의와 의심이다. 근대의 탈마법화(각성)의 양상으로 자기보다 더 위대하고 나은 인물을 흠모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태도는 소위 '성숙한' 사람, 평등을 인간 존엄성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자신의 참 자유, 참 존엄성, 참 평등을 발견하는 곳이다.
- 교회의 찬양에는 감사도 포함된다. 우리가 자선 대신에 공평한 대접을 받았더라면 지금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라고 다함께 고백한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도덕 운동의 소산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 흘러넘친 결과라는 점이다.
2) 진리의 공동체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행위는 '타당성 구조'안에서 일어나고 그 구조에 따라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은 것이 좌우된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도전하는 일은 다른 구조에 완전히 몸담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의 회중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참 이야기를 계속 기억하고 재연함으로써 건전한 회의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로서, 이런 회의는 교인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되 세속적 신념에 사로잡히고 미혹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예수의 제자다운 소박함, 침착성, 현실성)
3)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보살피는데 깊이 관여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지역성을 가진 교회이지, 교인이 되고 싶다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이다.
지역교회야 말로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다.
4)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지원해 주는 공동체일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 앞에 서는 것이다. 교회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등 예수께서 하신 일을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수행하도록 세상에 보냄 받은 공동체다.
공식적인 성명과 개인적인 헌신사이에는 호혜적인 관계가 있다.
- 교회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고 지원하고 양육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각 지체마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고, 각각 다른 섬김의 장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5)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일 것이다.
서구문화의 질병의 뿌리인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신실하고 책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6) 소망의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가 정말 복음의 이야기에 '내주하고' 있을 때에만, 즉 우리가 이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타당성 구조'로 받아들인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참여할 때에만, 우리는 뜨거운 소망을 품고 한결같이 확신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몸담고 있는 '타당성 구조'는 이런 기독교적 소망을 부정하는 것 같다.
지역교회에서 새 창조의 실체가 나타나고 알려지고 경험되며, 거기로부터 남자와 여자들이 공적 영역 구석구석까지 나아가 그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되찾고, 그동안 숨겨져 있던 환상을 벗겨 버리고 모든 영역을 복음의 빛으로 환히 들춰 내는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으려면 먼저 교회가 자기만 챙기는 교회 중심적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그 존재 목적이 교인이 아닌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고속의 은혜를 보여주는 표지, 도구, 맛보기가 되는 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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