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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Yet it was kind of you eto share6my trouble. 15 And you Philippians yourselves know that fin the beginning of the gospel, when I left Macedonia, gno church entered into partnership with me in giving and receiving, except you only. 16 Even in Thessalonica you sent me help for my needs once and again. 17 hNot that I seek the gift, but I seek ithe fruit that increases to your credit.718 I have received full payment, and more. I am well supplied, jhaving received from Epaphroditus the gifts you sent, ka fragrant offering, la sacrifice acceptable and pleasing to God. 19 And my God mwill supply every need of yours naccording to his riches in glory in Christ Jesus. 20 To oour God and Father be pglory forever and ever. Amen. 

Final Greetings

21 Greet every saint in Christ Jesus. qThe brothers who are with me greet you. 22 rAll the saints greet you, especially those of Caesar’s household. 

23 s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r spirit. 

 

e[ch. 1:7; Rev. 1:9]

6Or have fellowship in

fch. 1:5

g2 Cor. 11:8, 9

h[2 Cor. 9:5]

iRom. 1:13; [Titus 3:14]

7Or I seek the profit that accrues to your account

jch. 2:25

kSee Gen. 8:21

lHeb. 13:16

mPs. 23:1; 2 Cor. 9:8

nSee Rom. 2:4

oGal. 1:4; 1 Thess. 1:3; 3:11, 13

pGal. 1:5; See Rom. 11:36

qGal. 1:2

r2 Cor. 13:13

sSee Rom. 16: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4:14–23.

 

14-16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그들이 자신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후원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가운데 바울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나눈 것이다. 이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이 마게도냐를 떠나 복음 전도여행을 떠날때 후원을 한 첫번째 교회라는 것을 기억하고 이를 감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을때에도 두번이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공급했다. 

 

바울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아 선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9을 보면 절대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중노동해 가면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는 주 예수의 명령이 있지만 자신은 그 특권을 쓰지 않고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문제를 해결하며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다고 말합니다(고전 9:14–18 참조, 눅 10:7).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그는 “복음의 시초”부터 빌립보교회 하나만 예외로 삼아 그들의 물질적 도움은 마다 않고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빌립보에서의 선교를 “복음의 시초”라고 하는 이유는, 사도행전 16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와 복음 사역을 처음 시작한, 자신의 선교 역사상 분수령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핍박을 받고 떠난 바울은 그곳으로부터 약 10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에 가서 선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약 3개월 정도 복음을 선포하다가 핍박을 받아 쫓겨나, 뵈뢰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갑니다. 그런데 그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하는 그 짧은 기간에도 빌립보의 성도들은 두 번이나 헌금을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영수하는 마지막 헌금, 즉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헌금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세 번이나 보내온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은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신앙으로 치자면 어린 그리스도인들이며, 핍박도 받고 있었을 텐데,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업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보다 부유한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 데살로니가와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일체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중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무료로 선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데살로니가나 고린도 같은 부유한 항구도시들에 많은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삶의 지혜 또는 성공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강의하면서 모금행각을 하며 떠돌았던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도시들에 와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주장하면서 모금을 했다면, 그 또한 그 도시들의 주민들에게는 스토아나 냉소주의 철학자들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고, 그의 복음도 그들의 철학의 일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그들과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철저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차별화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복음을 무료로 선포함으로써 그것의 은혜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성도들의 물질적 도움을 사양하고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는 그런 오해의 여지가 없었고 또 빌립보 성도들과는 처음부터 특별히 돈독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어온 터라 그들의 물질적 지원을 사양하지 않고 받은 것 같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80–182.

 

 

17절) 나 바울은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너희에게 유익이 증가하게 하기 위한 열매를 구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을 위해서 여러차례 후원한 빌립보 성도들이 그것으로 인해서 풍성한 여매를 맺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바울의 여정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자비량 선교사로 여겼는데 그 과정에서 몇몇의 개인이나 교회의 후원을 기쁘게 받았다. 이를 통해서 바울이 공급을 받고 만족함을 여겼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를 후원한 교회나 개인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얻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과 희생은 그 후원을 받는 이들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도 기여하고 또한 그 후원을 하는 자들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맛보는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크게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18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에게 공급한 것으로 인해서 풍족하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한다.  

본문의 한글 설경에서 모든 것이 있고라는 표현에서 있고는 무언가를 받다, 정히 영수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아페초’라는 단어인데 본래의 의미는 “삼가다. 멀다. 가득 받다. 이미 받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상업적인 용도로 이 받았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 6:2; 6:16; 빌 4:18에 등장하는 의미이다. 이는 마치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후원에 감사하며 이를 잘 받았음을 확인하는 영수증을 써주는 것과 같다. 이는 재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주는 이나 받는 이나 깨끗하게 처리히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희생 제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 향기로운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과 연관되어 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 되었지만 그 원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현재 구약과 동일하게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제물을 불태움으로 그 향기를 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문자적으로 고집해서는 안되지만 구약의 그 정신을 지금 우리 시대에 이어받기 위해서 우리가 드려야할,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향해서 공급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또한 주님의 귀한 사역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을 공궤하기 위해서 물질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있다. 

Paul is well suppliedby the Philippians’ gift, and because it has been offered to him for the service of the gospel, he can return to images drawn from Israel’s worship. The gift is a fragrant offering(the Gk. osmēn euōdiasoccurs often in the Septuagint in connection with the “pleasing aroma” of sacrifices to God; see Gen. 8:21; Ex. 29:18; Lev. 4:31) and a sacrifice acceptableto God. While the literal offerings of the OT system have been done away with in Christ, the principle behind them of costly devotion to God remai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7.

 

 

Epaphroditus.Paul describes him in 2:25 as “your messenger, whom you sent to take care of my needs.” At the time of writing, he is still with Paul, and now Paul is sending him back to the Philippians, presumably with this letter. fragrant offering.Most naturally connotes the use of incense in the OT sacrificial system (e.g., Exod 30:7), though animal sacrifices could also produce an aroma; Paul calls Christ’s death for us a fragrant offering in Eph 5:2. acceptable sacrifice.Conveys a different image that usually, though not always, involved slaughtering an animal.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3.

 

 

19절) 앞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제물을 드린 이들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가운데 풍성한대로 우리들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기복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채우심,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여타의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희생이나 섬김이 아니라 주님을 기뻐함으로 자발적인 순종과 희생과 섬김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채우심이 있다라는 것이다.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의 헌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말한다. 그는 다른 교회에서는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후원을 받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는 예외로 받으면서 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보낸 헌금을 영수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의 감사를 표할 따름입니다. 그 대신 자신의 자비량 원칙에 오직 독자들(빌립보 교인들)만 예외라는 것과 자신의 자족의 원칙을 더 강조하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그는 그들의 헌금에 대한 그의 칭찬이 그러한 헌금을 더 보내 달라는 뜻으로 오해되는 것을 명백히 경계합니다. 이러한 맥락은 그와 그토록 상호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빌립보의 성도들과도 금전적 거래를 할 때는 아주 세심히 주의하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복음의 진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는 교회의 물질적 지원을 완전히 고사하고 자신의 중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런 오해를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예외적으로 헌금을 받았지만, 혹 상황이 어떻게 변하여, 어떤 대적들이 나타나 그의 사도직에 대해 또는 복음에 대해 어떤 거짓 선전을 해 댈지 모르니, 바울은 심지어 빌립보의 교회로부터 헌금을 받는 것도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깨끗하고 희생적인 재정 정책이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87–188.

 

 

21-23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할 것을 요청하고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 곧 모든 성도들이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일부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황제의 식구들을 의미할 수도 아니면 황제의 집의 하인들, 식솔들을 아니면 관용적인 표현으로 가이사의 영지나 그의 이익을 돌보는 모든 사람을 말할 수도 있다. 

이제 바울은 그의 관행대로 인사와 축도로써 이 편지를 끝맺습니다. “가이사 집안”은 로마 제국 내에서 가이사의 직할 영지나 그의 이익을 돌보는 사람들 모두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분은 고관일 수도 있고 노예일 수도 있습니다. 가이사의 시위대에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1:13)을 볼 때 시위대의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이사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일을 직접 받드는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복음이 로마의 심장부에 침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주”로 부르짖고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것은 무력으로 남들을 굴종시켜 온 세상의 “주” 노릇 하려는 로마 황제의 권위가 십자가에서의 자기희생으로 만유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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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 rejoiced in the Lord greatly that now at length zyou have revived your concern for me. You were indeed concerned for me, but you had no opportunity. 11 Not that I am speaking of being in need, for I have learned in whatever situation I am to be acontent. 12 I know how to be brought low, and I know how to abound.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facing plenty and bhunger, abundance and cneed. 13 I can do all things dthrough him who strengthens me. 
z[2 Cor. 11:9; ch. 2:30]
a1 Tim. 6:6, 8; [2 Cor. 9:8; Heb. 13:5]
b1 Cor. 4:11; 2 Cor. 11:27
c2 Cor. 11:9
d[2 Cor. 12:9]; See Eph. 3:16; 1 Tim. 1: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4:10–13.

10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으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전부터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돕기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원했으나 이를 보내지 못하다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보낸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결심했지만 실행을 이루는 것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본문은 자신의 궁핍함에 대한 불만에 대한 토로가 아니다. 도리어 사역자의 재물에 대한 자세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12-13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본절은 11절에 대한 부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비천에 처하기 보다는 풍부에 처하기를 원한다. 물론 비천에 처하는 것도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풍부에 처할 때 실족하여 넘어지는 경우들 또한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천에 처했을때 낙심하거나 염려하게 되고 비굴해져서 타협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풍부에 처하게 되었을때 자만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며 타락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 일체의 비결을 그는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12절에서는 앞의 말을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천에 처하는 방법도 알고 풍부에 처하는 방법도 안다고 말합니다. 비천에 처해도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낙망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되었어도 자만하고 방심하여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즉 배부른 상황이든지 배고픈 상황이든지, 풍부함이든지 결핍이든지, 자족하고 적절히 처신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비결을 배웠다”(memuesthai)고 번역한 말은 헬라의 신비 종교들의 신봉자들이 입교시 그 종교의 비밀을 터득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보통 이방 철학이나 종교의 냄새가 나는 용어를 피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언어들(autarkeia; memuesthai)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태도는 중요하고 어렵다는 것, 특히 궁핍한 상황에서도 자족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것에 대한 비결을 터득해 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3절에서 앞의 말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게 힘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구절인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크게 써서 집 안에도 붙여 놓고 가게에도 붙여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면 된다”는 박정희 철학의 기독교판 쯤으로 생각하거나, Norman Vincent Peal식 “긍정적 사고”의 표현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신이 사업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그 말씀을 여기저기에 써 붙여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문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핍에도 적절히 처할 수 있고 풍부에도 적절히 처할 수 있다고, 곧 이런 것들 모두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힘 주시는 분 안에서”를 덧붙여 자기 힘으로 “자족”을 이루려는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힘 주시는 하나님에 힘입어 자족함을 분명히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8–179.

12절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는 표현은 ‘메메마이’라는 단어로 신비를 배우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메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미스테리온’ 신비, 비밀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미스테리온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28번 등장하는데 바울 서신에서 21번, 계시록에서 4번, 그리고 나머지 복음서에 등장하는데 요한 복음에는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 4:12에서 사용된 ‘메오’라는 동사의 표현은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된다. 
NT 1The noun μυστήριονoccurs 28× in the NT, being esp. freq. in the Pauline corpus (21×, incl. 6× each in 1 Corinthians and Ephesians, and 4× in Colossians). It is found 4× in Revelation, but in only one gospel context; its complete absence from the Gospel of John is striking. The only derivative used is the vb. μυέω, and this is found once, in Phil 4:12, where Paul says that he has “learned the secret” of contentment (it seems unlikely for Paul in this context to allude to cultic initiations; see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204).
2In the Synoptics μυστήριονoccurs only in connection with the parable of the sower (Matt 13:11 par. Mark 4:11; Luke 8:10; see παραβολήG4130). With its picture of harvest—representing the revelation of the kingdom of God (see βασιλεύςG995)—this passage touches on a matter close to the heart of apocalyptic. According to the Markan version, the μυστήριον(sg.) itself is given to the disciples, whereas in Matthew and Luke the disciples are said to have been given the knowledge (γνῶναι) of the μυστήρια(pl.). This difference does not appear to be significant, though poss. the use of the pl. indicates that the decrees of God concerning Christ and his church, latent in the Scriptures of the OT but now explainable to the disciples, are at last being fulfilled (cf. the freq. refs. to the fulfillment of OT prophecies in both Matthew and Luke, e.g., Matt 2:17, 23, et al.;   V 3, p 354  Luke 24:26 et al.). In any case, Mark’s account should prob. be understood in the light of one of his basic themes, namely, that neither the people nor the disciples realized that the way to the cross was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even though the Twelve received clear teaching on the matter (Mark 8:17 et al.; cf. by contrast Matt 13:51).
3The mystery with which Paul firmly confronts his opponents in 1 Corinthians is that of the cross of Christ, revealing as it does God’s redemptive decree for the world (see σταυρόςG5089). In his preaching Paul was concerned to present Jesus Christ only, and him crucified (1 Cor 2:2; cf. 1:22–24). This message, which reveals divine wisdom, is the essence of “the mystery of God” (2:1; so אA C and a few other witnesses; the majority of mss., incl. B, read μαρτύριονG3457, “testimony”).
Although in the general context the apostle uses terminology associated with the mystery religions (τέλειοςG5455, “perfect,” 1 Cor 2:6; λαλοῦμεν … ἐν μυστηρίῳ, “we speak … in a mystery,” 2:7; πνευματικόςG4461, “spiritual,” 2:15), he interprets the mystery of the gospel in an entirely apocalyptic manner.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God in his wisdom predestined (προορίζωG4633) the cross of Christ for our glory, i.e., with a view to our glorification at the end of time (2:7; cf. Rom 16:25). That which has already been prepared in heaven and promised in OT prophecy has now taken place in time and history (note the scriptural citations in 1 Cor 1:19; 2:9). The rulers of this age have not known the secret of the divine decree (2:6), but those who have been enlightened by the Spirit acknowledge it in humble submission (2:12).
Only thus, in weakness and humility, are the apostles, as servants of the crucified Christ,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οἰκονόμους μυστηρίων θεοῦ]” (1 Cor 4:1; this is one of only 3 instances where Paul uses the pl. form [the other two are 13:2 and 14:2]). More specifically, Paul was charged with disclosing “the plan of the mystery hidden for ages in God [ἡ οἰκονομία τοῦ μυστηρίου τοῦ ἀποκεκρυμμένου ἀπὸ τῶν αἰώνων ἐν τῷ θεῷ]” (Eph 3:9 NRSV; see further below). Paul’s sole ground of boasting is that, in spite of all his weakness and insufficiency, God can still use him as an instrument of divine grace (1 Cor 1:26–31; 2 Cor 1:12).
4In almost every case where μυστήριονoccurs in the NT, the term is found with vbs. denoting revelation or proclamation. In other words, the “mystery” is not some isolated fact from the past that merely needs to be noted, but something dynamic and compelling that is being revealed (cf. TDNT4:819). This point is vividly expressed in Colossians. The “mystery of God” or the “mystery of Christ” is in fact Christ himself (Col 2:2; 4:3). Paul, by bearing in his own body that which is still lacking in the afflictions of Christ, gives practical expression to the mystery and carries it on toward its final consummation (1:24–26). The riches of the mystery are summed up a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1:27), for he, as the head of the worldwide church, has reconciled all things through his   V 3, p 355  death (1:18–20). This truth was concealed from earlier generations (1:26) but is now being proclaimed to all so that they may be presented as “perfect in Christ” (1:28; NIV, “fully mature”).
In Col 1:27 Paul links the “mystery” specifically with the revelation of the gospel to the Gentiles, and this aspect is developed esp. in Eph 3:2–6: “Surely you have heard about the administration of God’s grace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that is, the mystery made known to me by revelation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ἐγνωρίσθη μοι τὸ μυστήριον], as I have already written briefly. In reading this, then, you will be able to understand [νοῆσαι] my insight into the mystery of Christ [ἐν τῷ μυστηρίῳ τοῦ Χριστοῦ], which was not made known [οὐκ ἐγνωρίσθη] to people in other generations as i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Spirit to 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 This mystery is that through the gospel the Gentiles [τα ἔθνη] are heirs together with Israel, members together of one body, and sharers together 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 He then speaks of the gracious privilege he has received “to preach to the Gentiles [τοῖς ἔθνεσιν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the boundless riches of Christ, and to make plain [φωτίσαι] to everyone the administration of this mystery [ἡ οἰκονομία τοῦ μυστηρίου], which for ages past was kept hidden [ἀποκεκρυμμένου] in God, who created all things” (3:8–9).
Thus Christians from among the nations, no less than believing Jews, are members of the worldwide church, described fig. in Eph 2:20–21 as a building whose head or cornerstone is the pivot of all creation (see γωνίαG1224; ἐκκλησίαG1711). This saving work was God’s will and part of his great purpose before time began (1:9; 3:6, 9). It was kept secret in the past, but now, since the time is fulfilled (1:10), God has made known his will to those who proclaim the gospel (3:8). The gospel is spreading throughout the whole world but is meeting with much opp. on the way, so at the close of the first section of Ephesians Paul has every reason for urging his readers to exercise patience (3:13).
One additional Christological passage is 1 Tim 3:9, 16, which speaks of τὸ μυστήριον τῆς πίστεωςand τὸ τῆς εὐσεβείας μυστήριον. Since the former undoubtedly refers to “the mystery of the [Christian] faith,” the latter perhaps should be understood as “the mystery of our religion” (so NRSV), but the NIV prefers a different interpretation, “the mystery from which true godliness springs” (see σέβομαιG4936). In any case, both phrases allude to the confession of Christ and his redeeming work, and so μυστήριονmay be understood as the equivalent of a confession of faith.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53–355.


본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음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이 편지를 받는 독자들도 자신의 이 비결을 깨닫고 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서 바울은 자신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본문 13절을 적용하면서 본문의 모든 것을 내가 이루고 싶은 것, 그래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라는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앞서 말한 비천과 풍부, 어떠한 형편 모두를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를 주를 위해서 충성하는 삶의 과정속에서 비천에 처할 수도 있고 풍부에 처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이를 이루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상황속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이에 자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사역의 열매와 승리의 순간만을 기억하지만 그의 사역의 순간속에서도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했던 일들이 있었다. 기도의 응답이 유보되고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했지만 도리어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아야만 했고 믿었던 이들이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속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분이 함께 하시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삶의 모든 과정속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되 우리가 할 수있는 최선의 노력들을 경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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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my brothers,1whom I love and jlong for, kmy joy and lcrown, mstand firm thus in the Lord, my beloved. 
I entreat Euodia and I entreat Syntyche to nagree in the Lord. Yes, I ask you also, true companion,2help these women, who have labored3side by side with me in the gospel together with Clement and the rest of my fellow workers, o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p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reasonableness4be known to everyone. qThe Lord is at hand; r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s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t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uthe peace of God, v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jus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commendable, if there is any excellence,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about these things. What you have learned5and wreceived and heard and seen xin me—practice these things, and y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8, 21
jSee ch. 1:8
kch. 1:4; 2:16; See 2 Cor. 1:14
lProv. 16:31; 17:6
mch. 1:27
nch. 2:2
2Or loyal Syzygus; Greek true yokefellow
3Or strived(see 1:27)
oSee Luke 10:20
pch. 3:1
4Or gentleness
qSee James 5:8
rSee Matt. 6:25
s[Prov. 16:3]
tSee Rom. 1:8
u[ver. 9; Isa. 26:3; Col. 3:15]; See John 14:27
v[Eph. 3:19]
5Or these things9which things you have also learned
w1 Thess. 4:1
x[ch. 3:17]
y[ver. 7]; See Rom. 15:3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4:1–9.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따라서 주안에 견고히 서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빌립보 성도들이 그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칭찬의 표현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주안에서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올림픽 경기에서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의미하는데 최후의 심판때에 하나님께서 경주를 마친 이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바라면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3:13-14)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면류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이러한 수고로 영적인 보상,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교회 자체가 면류관이요 보상이었다. 

우리의 본문 빌립보서 4:1과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상의 이해를 더욱 뒷받침 해줍니다. 바울은 최후의 심판 때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을 건설하였다 하여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교회들이 건설되었음이 드러나는 것을 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훌륭한 교회들은 바울로 하여금 최후의 심판 때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얻게 할 근거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바울의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최후의 심판 때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시상대에 불려 올라갈 때 그들이 자신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집의 일부로 찬란히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저 만족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구원에서 “은혜로만(믿음으로만)”(sola gratia/sola fide)의 원칙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만)을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렘 9:22–23, cf. 롬 5:11, 갈 6:14, 빌 3:3)고 하며 일체의 인간적 자랑을 배격했던 바울의 사상에 더 잘 조화됩니다. 하여간,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상”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9:18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 널리 유포된 ‘상급 신학’을 경계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덧붙여 주어질 하늘의 “상급”을 강조함으로써 은혜의 복음을 공로 신학으로 왜곡하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0–161.

주안에 굳게 서라는 권면은 1:27절의 반복인데 1:27-30과 3:2-4:3은 매우 밀접한 병행을,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한다. 그리고 순두게를 권한다.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안에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자들로 보인다. 앞서 1:27; 2:2에 말한 것처럼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안에 의견이 갈라지고 분쟁이 생기는 이유는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성령께서 한 마음을 갖게 하시는데 어떤 이유로 각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력히 주장할때 서로를 품고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판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주안에 있는 것이다. 

3절) 나는 또한 당신, 나와 멍에를 같이 맨 당신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두 여자들을 도우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외의 나의 사역자들과 함께 나의 곁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애쓴 사람들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명의 한 사람, 멍에를 같이한 동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울 것을 요청합니다. 이 무명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성도들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개역 개정의 번역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 자는 본문의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시지고스’가 고유명사로 이름일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

(빌 4:3, 개정)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새번역)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힘쓰다라는 표현 ‘시나트레오’는 1:27절의 표현의 반복으로 운동경기에서 한팀이 되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4-9절) 바울은 지금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분쟁으로 기쁨을 잃고 근심에 빠져있는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서 기쁨을, 평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4-9절의 격려를 쓰고 있다. 4-7절에서는 근심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8-9절은 분쟁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은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의존하는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의 깊은 만족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래서 이는 고난의 순간에도 언제나 유효하다. 
Rejoice. The joy that Paul calls for is not a happiness that depends on circumstances but a deep contentment that is in the Lord, based on trust in the sovereign, living God, and that therefore is available always, even in difficult tim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독자들이 얼마나 힘이 빠져 있었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하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자신이 지금 이런 권면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까? 그는 지금 어쩌면 사형 언도로 끝날지도 모를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운명과 교회들의 앞날에 대해서 근심하는 사람 아닙니까?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으며 내분에까지 휩쓸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이 정황을 생각하면 여기 되풀이 하여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은 바울이 독자들에게만 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주는 권면인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모든 권면들도 바울이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9절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신앙은 이성과 반비례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이성과 대항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라고 외치는 별도의 요소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믿음의 의미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100세가 된 사라의 태가 다 죽은 것을 알았다(이성의 상황 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하여 신앙에 있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이나 그 편지를 받은 빌립보의 성도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기뻐할 근거가 없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과 독자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서서 그의 권능과 사랑을 덕 입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외적의 핍박과 경제적 가난과 내분을 일으키며 압박해 와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단을 근본적으로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므로, 모든 것이 결국 그의 선한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6–167.

4-7절) 본문에서 바울은 4개의 명령을 하고 있다.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염려를 거둬가는 해독제이다. 
본문 7절에서 지키다라는 표현은 군사 용어로 간수가 옥중의 죄수를 감독하듯이, 로마 군대가 성을 방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6절에 네 개의 명령어들이 나옵니다. 첫째, “기뻐하라”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셋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넷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7절). 바울은 그런데 이 네 개의 명령어들 중간에 하나의 신앙 고백을 끼어 넣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5절). 가운데 낀 이 신앙고백은 독자들이 전후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신앙고백은 시간적인 뜻과 공간적인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주께서 곧 재림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고난들을 참고 기뻐하며, 곧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않고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도 관용하고,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에 전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공간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높고 먼 하늘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시며 이 고난의 세상에 나를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성령)으로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아니 내 안에 내주하셔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까이 계시는 주의 권능과 사랑에 힘입어서 고난 속에서도 염려를 극복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7–168.

7절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확신 가운데,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을 관용하고, 염려를 떨쳐 버리고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키다”(phrouresei)는 동사는 군사 용어로서 마치 로마 군대가 빌립보를 감싸고 트라케의 야만인들로부터 방위하듯이,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옹위하여 외적으로부터 방위하듯이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의 로마의 군사도시로서의 역사적 그리고 지리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에서 군사적, 정치적 그림언어들을 많이 썼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여기 “지키다”도 그런 언어입니다. 여기 “마음과 생각”이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과 그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뜻합니다. 외적의 핍박이나 교회 내 형제의 험담이 우리의 심장에 자극을 주어 염려와 분노와 원한의 생각들을 낳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적 평강을 잃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바울이 권면하는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을 강력히 옹위하여 그런 외부의 자극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평강을 깨는 생각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것을 “우리의 모든 지각을 뛰어 넘는 것”, 곧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랍고도 신비스럽고 효력 있는 것이라고 수식하고 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0–171.

As with joy, peace for Paul is a fruit of the Spirit (Gal 5:22). It is especially associated with God and his relationship to his people. Here it is called “the peace of God”53because God is “the God of peace” (v. 9), the God who dwells in total shalom(wholeness, well-being) and who gives such shalomto his people. And it is the “peace of God” that “transcends54all understanding.”55This could mean “beyond all human comprehension,” which in one sense is certainly true. More likely Paul intends that God’s peace “totally transcends the merely human, unbelieving mind,” which is full of anxiety because it cannot think higher than itself.56Because the God to whom we pray and offer thanksgiving, whose ways are higher than ours, is also totally trustworthy, our prayer is accompanied by his peace. And that, not because he answers according to our wishes,57but because his peace totally transcends our merely human way of perceiving the world. Peace comes because prayer is an expression of trust, and God’s people do not need to have it all figured out in order to trust him!
Such peace will therefore “guard”58their “hearts and thoughts.” In the Hebrew view the heart is the center of one’s being, out of which flows all of life (e.g., Mark 7:21). God’s peace will do what instruction in “wisdom” urged the young to do: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Prov 4:23). In the present context “God’s peace” will be his “garrison” around their “hearts” so that they do not fall into “anxiety.” It will also guard their “thoughts.”59Since God’s peace surpasses merely human understanding in any case, it will protect the mind from those very thoughts that lead to fear and distress and that keep one from trusting prayer.
53Only here in Paul; but peace is regularly noted as coming from God (most Pauline salutations), which is what this genitive intends. Cf. “peace of Christ” in Col 3:15.
54Gk. ὑπερέχουσα; for this word see on 3:8 above (n. 19).
55Gk. πάντα νοῦν, the word for “mind,” which here takes on the associated sense of “understanding.”
56Cf. Lightfoot, Meyer, Vincent, Jones, Plummer, Müller, Collange, Martin, Hawthorne, Silva; contraCalvin, Alford, Kennedy, Hendriksen, Kent, O’Brien, many of whom base their view on the alleged parallel with Eph 3:19 (the parallel seems to exist far more in our minds than in the actual language of Paul; cf. Schenk). Michael and Beare are ambivalent.
57Cf. several (Meyer, Plummer, O’Brien) who note that God’s peace is not contingent on “answered prayer,” but on his character.
58Gk. φρουρήσει, used literally by Paul of the ethnarch Aretas in 2 Cor 11:32, who set a guard at the city gates, and figuratively of the Law in Gal 3:23, in the sense of “keep in custody” until “faith” should come. This is a military metaphor, where a garrison, such as the one always stationed in Philippi, “guards the Roman pax.”
59Gk. τὰ νοήματα, found only in Paul in the NT and elsewhere only in pejorative contexts (2 Cor 2:11; 3:14; 4:4; 10:5; 11:3). As over against the “mind” (νοῦς, found in the preceding phrase, “which exceeds every mind”), this word, as with most nouns ending in -μα, denotes the concrete expression or activity of the mind, hence “your thoughts.” Cf. J. Behm, TDNT, 4.960–61.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0–411.

In a post-Christian, post-modern world, which has generally lost its bearings because it has generally abandoned its God, such spirituality is very often the key to effective evangelism. In a world where fear is a much greater reality than joy, our privilege is to live out the gospel of true shalom, wholeness in every sense of that word, and to point others to its source. We can do that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is first sense, by the Spirit who turns our present circumstances into joy and peace, and who prompts our prayer and thanksgiving. And we should be at that task with greater concern than many of us are,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e eschatological sense as well.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2–413.

8-9절)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겅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상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미덕, 탁월함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행하라.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빌 4:8, 새번역) 『마지막으로, ④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 ④그, '형제들이여'』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덕목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 한 것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생각하시오”(개역 성경의 “무엇에든지”는 옳지 않음). 이 권면은 얼핏 보면 감옥에 갇혀 사형 판결이 날지도 모를 재판을 기다리며 교회들을 걱정하고 있는 바울에게나, 핍박과 내분에 휩싸여 있는 빌립보의 교회에게나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충고인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것은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겨야 할 권면입니다.
인간은 그 머리 속을 무슨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그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하루 종일 돈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수전노(守錢奴)가 됩니다. 하루 종일 성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의 머리를 채우는 사람은 성적 노예가 됩니다. 하루 종일 적대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씩씩대며 사는 사람은 아주 불행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고상한 가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핍박자에 대한 원한으로 불타거나, 교회 내 반대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며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저열한 인격체가 되어 내적 평강을 얻을 수 없고, 공동체의 삶에서도 평강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예를 든 고상한 가치들과 덕목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머리를 채우라고 권합니다. 심지어 적대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면들만 생각하여 분노와 복수심으로 치를 떨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참됨이나 의로움이나 사랑할 만한 것이나 무슨 덕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고상한 가치들에 생각을 집중시키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1–174.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평강을 빌고 있다.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구 염려하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찬양받을 것들을 생각하고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고 설교한대로 살아간 진실한 사역자였다.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의 지배를 받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감옥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감옥 밖에서도 속박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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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rothers, ujoin in imitating me, and keep your eyes on those who walk vaccording to the example you have in us. 18 For wmany, of whom I have often told you and now tell you xeven with tears, walk as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19 yTheir end is destruction, ztheir god is their belly, and athey glory in their shame, with bminds set on earthly things. 20 But c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dfrom it we eawait a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21 who will transform four lowly body gto be like his glorious body, hby the power that enables him even i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u[ch. 4:9]; See 1 Cor. 4:16
v1 Pet. 5:3
wSee 2 Cor. 11:13
x[Acts 20:31]
y2 Cor. 11:15; [2 Thess. 1:9; 2 Pet. 2:1, 3]
zSee Rom. 16:18
a[Hos. 4:7; 2 Cor. 11:12; Gal. 6:13; Jude 13]
bRom. 8:5; Col. 3:2
cSee Eph. 2:19
dActs 1:11
eSee 1 Cor. 1:7
f[1 Cor. 15:43–53]
g[ver. 10; Col. 3:4]; See Rom. 8:29
hSee Eph. 1:19
i1 Cor. 15:2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7–21.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는 우리의 본을 따라 걷는 그러한 자들을 눈여겨 보라. 
바울은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회 있는대로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따라서, 그들을 모방하며 자라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본을 보이느냐, 우리들에게 어떤 멘토, 본받을 믿음의 선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Much Christian growth comes through imitation of other Christians (4:9; 1 Cor. 11:1; 2 Thess. 3:8–9; 1 Tim. 4:12, 15–16; 2 Tim. 3:10–11; Heb. 13:7; 1 Pet. 5: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바울이 자신의 양떼에게 자신을 모방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11:1에서 명백히 밝히는데, 우리의 본문 빌립보서 전체에서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 2:6–11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모범을 그립니다. 그런 뒤, 빌립보서 2:17에서 그 모범을 따라 바울 자신도 독자들의 믿음의 섬김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어떠한 자기희생으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고 있는가도 보여 주었습니다. 3장에서 는 자기가 유대인으로서의 특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손해로 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되는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3장 끝까지 그리스도를 모방함에 대해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바울 자신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권합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도 이미 그런 사람들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천거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 까닭은, 그들 외에도 바울이 보여 준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본받아 살라는 당부를 독자들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3–144.
이렇게 자신을 따르라고 이야기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제시하는 삶의 모범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본절의 본받으라라고 말하는 이 주제는 본서 전체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1:30; 2:18에서 등장하는 데 바울은 그리스도와 자신의 모범을 모두 이것에 투영하고 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바욿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가치있다라는 것 때문에 이전에 가치있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마침내 그의 죽음에 동참한 것처럼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도전한다. 바울이 본받을 것을 도전하는 부분에는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따르는 삶으로의 변혁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This language occurs in two kinds of contexts in Paul: suffering for the sake of Christ and the gospel, and behavior that conforms to the gospel.8In every case “imitation” of Paul means “as I imitate Christ” (expressly so in 1 Cor 11:1; cf. 1 Thess 1:6).
8See esp. 1 Cor 4:16, where the Corinthians are to be reminded of Paul’s “ways in the Lord.” The early believers in Christ did not live by “principles” or by “the Book,” but by the living example of those who taught by doing as well as by instruction. Thus the nature of Paul’s argument with the Thessalonians in 2 Thess 3:7–10. See the discussion in Fee, First Corinthians, 187–88.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64.
당시 빌립보라는 도시는 크지 않은 도시였고 이 도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더욱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도 우리 주위에 주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는 것은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무엇에 우리의 눈을 드리느냐, 무엇을 주목하느냐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눈 여겨 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게 된다. 

18-19절)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번 이야기했고 이제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우상)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이들을 이러한 사람들이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2. 그들의 마침은 멸망인 이들
  3.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위장)인 이들
  4. 그들의 영광이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는 이들
  5. 그들의 마음이 세상일에 있는 이들

이 19절의 묘사를 보건대, 그들은 철저한 유물론자들로서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며, 식욕이나 성욕 등을 자유분방하게 추구했던 에피퀴루스 학파의 추종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들로 염두에 두어 왔음을 생각할 때 여기 18–19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도 그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특히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는 부분이 로마서 9:1–5에서 그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표현하는 슬픔과 아픔과 잘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당연히 믿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구원을 이방인들보다 먼저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롬 1:1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사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두 마음(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앙과 적대 행위에 대해서 말할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이 맞다면, 그들은 예수가 신적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쳐부수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자신들에게 자유와 정의와 풍요의 세상을 이루어 주지 못한 것을 꼬집는 자들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율법(신 21:23)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낙인찍혔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히 분개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등 원수 노릇을 한 것입니다(고전 1:22–23, 살전 2:14–16, 사도행전 여러 곳들).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고 욕하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철저한 정결의 법, 특히 음식 가림의 법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가리는 정결의 법에 몰두하는 것, 배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의 문제가 우상화의 수준에 이른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술 안 마시는 것과 담배 안 피우는 것을 기독교 윤리의 전부로 알고 그것들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경향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인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킴과는 관계가 멉니다. 그런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이었기에 레위기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몰두가 우상화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들의 부끄러운 것”이란 할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3:2에서 이미 할례를 남성 성기의 표피 한 조각을 떼어 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악평하였는데, 여기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대 헬라-로마 세계에서 유대인들의 할례는 놀림거리였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운동 경기를 할 때 옷을 벗었고 로마의 문화 자체가 목욕 문화였기에 할례는 쉽게 이방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 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이미 난 할례 자국을 일부러 수술하여 없애려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그것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의 표징으로 보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됨의 표징으로 자랑하는 할례나, 자신들의 거룩성을 지켜 구원의 공동체가 되게 하리라고 본 정결의 법 등을 전혀 무가치한 것들로, 그들이 결국 멸망에 이를 때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것들은 이 아래 “땅 위의 것들”로서 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는 하늘의 것들(골 3:1–2)과 대조되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초월에서 오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그의 구원을 덕 입어야 우리도 그 초월의 생명(신적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것은 외면, 핍박하고 대신 할례나 음식 가림 등 이 땅 위의 문제들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5–147.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부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본문 속에서는 앞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그들과 우리를 비교 대조한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들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구원자이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당시 빌립보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그 시민권을 누렸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면 세금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로 이러한 권리를 자랑할 수 없었다.(3절, 행 16:37)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There is an explicit contrast here between “us,” Christians whose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those whose minds are “set on earthly things” (v. 19). There is also an implied contrast with the Roman citizenship that the Philippians enjoyed: they were grafted into an ancient Roman family line that is celebrated in a number of first-century inscriptions from the city, and they received a number of taxation privileges. As a mere earthly matter, they cannot put their confidence in Roman citizenship (cf. v. 3; see Acts 16:37), since they are citizens of heaven. we eagerly await.Christians anticipate Christ’s return and the bodily resurrection (Rom 8:23).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1.

본문에 사용된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폴리테우마’라는 단어로 연방, 국가라는 의미로 본 절에서만 등장한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폴리스’로 도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폴리테우로마이’라는 동사가 살다, 생활하다, 시민으로서 생활하다라는 의미인데 행 23:1과 빌 1:27에 사용된다. 
(빌 1:27, 개정)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The vb. πολιτεύομαιclearly has the general sense “to lead one’s life, conduct oneself” in Acts 23:1, which records Paul’s words to the Sanhedrin, “Brothers, up to this day I have lived my life with a clear conscience before God [πεπολίτευμαι  V 4, p 96  τῷ θεῷ]” (NRSV; NIV, “I have fulfilled my duty to God in all good conscience to this day”). In the only other use of this vb., Phil 1:27, godly living is also in view: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ἀξίως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τοῦ Χριστοῦ πολιτεύεσθε]” (NIV, both 1984 and 2011 eds.). The TNIV, however, has a different rendering: “as citizens of heaven live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is expansive transl. reflects the view of many commentators that here πολιτεύομαιalludes to the civic duties of citizenship, suggesting: “You know the pride and responsibility attached to living in a Roman colony: remember that you have a higher allegiance calling you to faithful conduct” (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80).
Such an interpretation is tied to Phil 3:20, which contains the only NT occurrence of the noun πολίτευμα. The apostle had pointed out the ungodly way in which “the enemies of Christ,” whose mind is on “earthly things [τὰ ἐπίγεια],” conduct themselves (3:18–19, using the vb. περιπατέωG4344; see πατέωG4251). By contrast, he asserts, ἡμῶν τὸ πολίτευμα ἐν οὐρανοῖς ὑπάρχει. The KJV takes the noun here in a general sense, “our conversation [i.e.,conduct] is in heaven.” Most scholars view this rendering as inappropriate, though there is disagreement regarding its precise meaning. The transl. “citizenship” (so NIV, NRSV, etc.) indicates the status of the believers. M. Dibelius suggests “colony” (An die Thessalonicher I, II. An die Philipper, 2nd ed. [1925], 71). Others prefer “capital or native city, which keeps the citizens on its registers” (E. Stauffer, New Testament Theology[1955], 296–97). There is much to be said for the sense “commonwealth,” suggesting a dynamic nuance: “the state as a constitutive force regulating its citizens” (A. T.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Studies in the Role of the Heavenly Dimension in Paul’s Thought, with Special Reference to His Eschatology[1981], 99, 101).
In any case, R. P. Martin rightly states that “the background of the word, in this context, is the situation of the readers who live in a city which was a Roman military colony directly related to the capital city of Rome” (The Epistle of Paul to the Philippians[1959], 160–61). As Roman subjects, the Philippian Christians owed an allegiance to the far-off capital city of Rome. At the same time, they had “another king, one called Jesus” (Acts 17:7). Hence, on earth they are resident aliens who dwell temporarily in a foreign country; their true home is elsewhere (cf. Heb 11:13; 1 Pet 1:1; 2:11; Jas 1:1; Diogn.5.4–5, 9–10).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95–96.

And they are citizens of the heavenly commonwealth “already,” even as they await the consummation that is “not yet.”20Although Paul’s language will not quite allow the translation, “we are a colony of heaven” (Moffatt), the point of the imagery comes very close to that. Just as Philippi was a colony of Rome, whose citizens thereby exemplified the life of Rome in the province of Macedonia, so the citizens of the “heavenly commonwealth” were to function as a colony of heaven in that outpost of Rome. That this is Paul’s concern lies in the context. They are to imitate Paul in their “walk,” because (“for”) their true “commonwealth” is in heaven; as such they live God’s righteousness as an outpost of heaven in Philippi. And that life is cruciform in expression, which knows Christ in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y being “conformed” to his death on the cross. Thus this passage serves as the basis for the preceding appeals, as well as for those that follow (calling for “steadfastness” and “unity”).
20Cf. the anonymous Ep. Diog.5.9 (ἐπὶ γῆς διατρίβουσιν, ἀλλʼ ἐν οὐρανῷ πολιτεύονται, “[Christians] go about their business on earth, but they live as citizens of heaven”), which is almost certainly dependent on a combination of this text and 1:27 (which also serves as evidence that the verb in 1:27 and this noun were understood to reflect the same reality).
Moffatt James Moffatt, The New Testament: A New Translation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9.

21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 영광의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그분의 몸은 육체적인 물질적인 속성을 지닐뿐만 아니라 영광스럽다. 부활하신 주님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다. 뿐만 아니라 신비하게 인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잠겨진 방을 통과하셨고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육체적인 존재로 계시기 보다는 40일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지셨으며 다시 나타나셨다. 
his glorious body.Can be explained from the Gospels, especially Luke and John, which describe Jesus’ body as physicalbut also glorious and not limited by being material. The risen Lord could be touched (Luke 24:39; John 20:27), and he could eat (Luke 24:42–43). On the other hand, he was also mysteriously unrecognizable (Luke 24:16; John 20:15) and could pass into a locked room (John 20:26); rather than being a constant physical presence with the disciples as he was before the crucifixion, he appeared, disappeared, and reappeared over 40 days (Luke 24:31; John 21:14; Acts 1:3).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들로서 하늘나라의 식민지에 사는 것이며, 하늘에서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앞서 1:27에서 쓰인 헬라어 폴리테우에스타이(politeuesthai)와 함께 이곳에 쓰인 폴리테우마(politeuma, 시민권)는 빌립보가 야만세계에 박혀 있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이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교회)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의 시민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로마로부터 받은 사람들로서 주위의 야만세계 에토스와 그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삶으로써 로마의 높은 문명을 야만세계에 과시합니다. 그렇듯이 교회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땅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사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높은 가치를 이 암흑의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장을 실존의 원칙으로 삼는 이 땅 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희생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치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가치들을 사모하며 그것들을 실현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또 하늘에서 오시는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온 세상의 구원자(soter)로 선포했습니다. 빌립보의 시민들 가운데는 그것을 믿는 아우구스투스 직할 부대의 제대 군인들과 그들의 후예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진정한 구원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들, 땅 위의 것들은 피조물적 제한성 때문에 구원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도 거짓 구원자이고,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구원받으려는 유대인들의 노력도 헛된 것입니다. 오로지 하늘의 초월에서 오시는 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질서를 세움으로써 이룬 평화(pax romana)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초월에서 오신 신적 구원자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agape)만이 진정한 평화, 곧 구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의 죽음 후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로 높여지신 그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2:9–11)가 하늘로부터 오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천한 몸을 자기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양(symmorphon)으로 변형시킬(metaschematizein)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런 몸을 가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체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한(3:11)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을 완성된 구원을 우리가 자신이 본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 하나님의 영광으로 휩싸인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살덩어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 즉 죄악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때 죄와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신적 생명(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을 이루어 주실 터인데, 그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2:9–11에서 이미 본 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우편에 높여 만유를 다스리는 주권까지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위임받은 권세로(고전 15:25 참조) 우리의 비천한 몸에 눌어붙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깨뜨리고 우리로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고 자신의 부활의 생명을 갖게 할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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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6 진정 신뢰할 만한 것  (0) 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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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Not that I have already lobtained this or mam already perfect, but I press on to make it my own, because Christ Jesus has made me his own. 13 Brothers, I do not consider that I have made it my own. But one thing I do: n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strain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othe prize of the upward pcall of God in Christ Jesus. 15 Let those of us who are qmature think this way, and if in anything ryou think otherwise, sGod will reveal that also to you. 16 Only tlet us hold true to what we have attained. 
l[1 Tim. 6:12, 19]
mHeb. 11:40; 12:23; [Heb. 5:9]
n[Ps. 45:10; Luke 9:62; Heb. 6:1]
o1 Cor. 9:24
p[Heb. 3:1; 1 Pet. 5:10]; See Rom. 8:28
q1 Cor. 2:6; See Matt. 5:48
r[Gal. 5:10]
s[John 7:17]
tGal. 6: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2–16.

12절) 바울은 자신이 이미 소유했다거나 이미 완전하게 되었다라고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그리스도 예수 께서 나를 그분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기에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달려간다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이 여전히 죄악된 세상가운데서 분투하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부활의 영광은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의 것이므로 그는 여전히 현재의 삶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속하신 것을 의지하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달려간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신자들의 응답을 의미한다. 
Paul stresses that he is not already perfect—he is still involved in the struggles of life in a fallen world and hence he still sins; the full glory of the resurrection remains in the future. I press on to make it my own, because Christ Jesus has made me his own. There is a balance of faith and works, of God’s call and the believer’s respons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혔으므로 나도 붙잡을 수 있도록 매진할 따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뒤의 “붙잡다”라는 동사에 대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앞의 3:7–10에서 밝힌 자신의 목적(목표)을 요약하여 표현한 말이므로 그 생략된 목적어는 “그리스도”입니다. “붙잡다”(katalambanein)라는 말은 영어의 “grasp”이나 우리의 한자 용어 “파악(把握)하다”와 같이 물리적으로 “붙잡다, 손아귀에 쥐다”의 뜻과 함께 “터득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붙잡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의 다매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두고 말합니다. 그는 그때 그리스도에 의해서 체포되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그의 사도로 징집되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앎”의 대상이 된 사건, 즉 그로부터 선택받아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 사건이었습니다(고전 13:12 참조). 그것이 그의 구원의 시작이요 동시에 사도로서의 섬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붙잡는 은혜를 베풀어 그는 그리스도를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음”- 그를 온전히 얻음(앎), 그의 구원을 온전히 덕 입음- 은 아직 미래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것을 위해 아직 매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미리 은혜를 베풀어 그를 붙잡았으므로, 그는 그 은혜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붙잡으려” 매진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4–135.
12절과 13절에 잡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사용되는데 이는 ‘카타람바노’라는 단어로 붙잡다. 얻다, 파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약에서 13번 등장하고 있다. 
καταλαμβάνωoccurs 13× (plus 2× in the story of the woman “caught” in adultery, John 8:3–4). In negative contexts, it is used of an evil spirit “seizing” a boy and throwing him to the ground (Mark 9:18), of darkness not “overcoming” or “understanding” the light (John 1:5; sim. 12:35), and of the final day “overtaking” unprepared Christians (“surprise you like a thief,” 1 Thess 5:4). The remaining occurrences are positive. Paul does not claim that he has “already obtained [λαμβάνω]” or “taken hold of [καταλαμβάνω]” the goal of his high calling (Phil 3:12a, 13), but rather: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διώκω δὲ εἰ καὶ καταλάβω, ἐφʼ ᾧ καὶ κατελήμφθην ὑπὸ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3:12b). In contrast to Israelites who have not responded to the gospel, Gentiles have “obtained” righteousness through faith (Rom 9:30; NRSV, “attained”). Believers are exhorted to run their spiritual race so they can “win” the victor’s imperishable crown of eternal life (1 Cor 9:24, in par. with λαμβάνω). The mid. voice can denote mental grasping, thus “to comprehend, understand, realize” (Acts 4:13; 10:34; 25:25), and it is used in Eph 3:18 of understanding the extent of God’s love (cf. Eng. comprehend, from Lat. prehendere, “to grasp”).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83.

13- 14절)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바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만 일한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한 푯대(목적)을 향해서 달려간다. 
본문의 푯대는 ‘스코포스’로 달리기 경주의 결승점 혹은 화살의 과녁을 의미한다. 바울의 삶을 하늘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목표를 가진 삶 이었다. 그 부름의 상은 다가올 시대의 풍성한 축복과 보상인데 특별히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완벽한 교제를 누리를 것이다. 
Goal(Gk. skopos) could also refer to the finish line in a race or an archery target. Paul’s life is purposeful, for he constantly aims toward a heavenly goal. The prizeis the fullness of blessings and rewards in the age to come, most especially being in perfect fellowship with Christ foreve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이 두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내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를) 완전히 붙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해서 나의 몸을 앞으로 빼며 푯대를 좇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로 부르시는 상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삶을 단거리 주자가 자기 몸을 앞으로 쭉 내밀고 두 눈은 저 멀리에 놓여 있는 푯대에 집중하여 전력으로 달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단거리 주자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잊어버리고자 하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자신이 과거 유대인으로서 성취한 것들과 교회의 핍박자로서의 저지른 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가 자신의 과거의 성취에 연연하면 그는 자만해져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경주에 매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과거의 실패니 죄에 대한 애석함과 죄책감에 짓눌려 있어도 심령이 병들고 믿음이 뒤틀려 건전한 성화의 길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한 죄를 잊기 어려워했음을 보여 줍니다. 구체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5:8–10에서 사도로 부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에서 그는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아를 적대하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등 원수 노릇 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6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적대했었다는 대적들의 공격을 시인합니다. 고린도후서 5:11–21은 그의 대적들이 자신의 사도됨을 부인하고 공격하는 데 대한 바울의 변호입니다. 그의 대적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그에게 환상(vision) 가운데 나타나 자신을 사도로 불렀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황홀경(ecstasy)에 빠진 미친 사람이 하는 주장이라고 비아냥거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 메시아라고 욕하며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을 들어 공격해 댔던 것입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 변증하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에서 그들의 말을 받아 자신이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6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욕하고 교회를 핍박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육신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했을 때의 과오나,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서 예수가 참 메시아(그리스도)인 것을 알고는 그를 더 이상 그런 “육신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의 관점에서 메시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정의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가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 욕하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시고 그를 자신의 우편에 높여 참 메시아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것을 보고는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은 “육신적” 이해에 불과하고 예수가 하신 일이 참 메시아적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15에 그가 그때 얻은 메시아적 사역에 대한 참된 이해를 적고 있습니다.
메시아(그리스도, 즉 종말의 구원자)는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인 인류를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대속적 죽음을 이루신 분, 그리하여 그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토론을 종결하는 마지막 절(고후 5:21)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지고 그것에 대한 대속의 제사로 스스로를 내어 주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든 분이 참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우리를 위해 대속적 죽음을 한 메시아 예수를 믿어 대속적 죽음을 덕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앞에서 설명한 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고 그와 연합되어 죄인으로서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죄가 깨끗이 씻어지고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지음 받음(새 피조물 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17의 그 유명한 말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다.” 이 말은 이제 일반화하여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자서전적인 언명으로서 바울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그의 유대교 시절에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육신적 이해로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교회를 핍박했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임을 계시 받고 그의 메시아적 행위에 힘입어 새 피조물이 되고 의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한 흉악한 죄인이라고 공격해 대는 대적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물고 늘어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6–139.

본문 12절과 14절에서 달려가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디오코’라는 단어로 박해하다, 따라가다, 힘쓰다, 추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앞서 ‘카타람바노’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면서 힘써서 달려가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님의 부활을 소망하며 믿음의 삶을 살기위해서 분투하는, 단거리 경주에서 결승점을 통과하기위해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The meaning “to persecute”—in the specific sense of oppressing people because of their faith—is distinctive to the NT, though of course it has its roots in the OT usage summarized above (note also that many of the occurrences in 1 Maccabees, while found in military contexts, reflect an attempt to suppress the Jewish religion). According to the NT, God’s messengers meet persecution. Such was already the experience of the prophets (Matt 5:12; Acts 7:52) and will equally be that of Jesus’ disciples (Matt 5:11–12, 44; 10:23), the more so as they are followers of the Lord, who had to suffer persecution himself (John 5:16; Acts 9:4–5). This connection is clearly expressed in John 15:20: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Persecution is caused by the world’s hatred of God   V 1, p 751  and his revelation in Christ (15:18–19; cf. also Matt 10:22; Mark 13:13; Luke 21:17; Rev 12:13). Such suffering may be a sign that one is on God’s side; thus Jesus calls those blessed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Matt 5:10; see also vv. 11–12).
Paul, once the persecutor of the church (Acts 22:4; 1 Cor 15:9; Gal 1:13; 23; Phil 3:6; 1 Tim 1:13), experienced persecution himself after the glorified Lord had made him his messenger (Gal 5:11; 2 Tim 3:11). In 2 Tim 3:12 he warns that being a Christian will always be linked with persecution (on suffering, see πάσχωG4248). Paul sees behind it the contrast between flesh and Spirit—the hostility of the flesh against God and so also against those who are led by God’s Spirit (Gal 4:29; see σάρξG4922).
There is the danger of corrupting the message in order to avoid persecution (Gal 6:12). Christians are therefore challenged to maintain their faith during such times. Indeed, they are to meet the hatred of their persecutors by a word of blessing (Rom 12:14; cf. esp. Matt 5:44). But it is esp. in persecution that Christians experience the help, strength, and saving power of Christ (Rom 8:35–39; 2 Cor 4:7–12; 12:10). Paul himself set an apostolic example by enduring hostility patiently (1 Cor 4:12). It is a special reason for giving God thanks when believers endure persecution with faith (2 Thess 1:3–4).
The fig. meaning of διώκωis used to express—like its partial synonym ζητέωG2426 (“to seek”), but with greater intensity—the striving that must characterize believers. They should pursue hospitality (Rom 12:13), mutual peace (14:19; 1 Pet 3:11; Heb 12:14), holiness, love (1 Cor 14:1), doing good (1 Thess 5:15), and righteousness (1 Tim 6:11; 2 Tim 2:22; in Rom 9:30–31, using δικαιοσύνηG1466 in a different sense, roughly equivalent to “salvation,” Paul says that righteousness cannot be attained if we pursue it apart from faith [here he also uses both καταλαμβάνωG2898—as in Sir 27:8, cited above under JL—and φθάνωG5777]). Such qualities are lasting objectives in the life of faith, which has as its goal the attaining of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see ἀνίστημιG482). Paul sees the Christian life as ultimately directed to this goal, and he presses on toward it like the runner set on winning the victor’s prize (βραβεῖονG1092, Phil 3:12–14; here again we find καταλαμβάνω, while the use of διώκωin the context of a race is attested elsewhere, as in Diod. Sic. 4.73.4; see al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173–77).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750–751.


15-16절) 우리중에 누구든지 온전한 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해라.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다르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저것도 나타내실 것이다. 오직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얻었던지 그대로 행하라. 
앞선 12절에서 바울자신도 아직 온전히 이루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너희가 온전한 자라고 여긴다면 그 온전함을 나타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전함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 온전함을 향해서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를 향해서 멈추지 않고 행할 것을, 그 자리를 지킬 것을, 그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온전히 율법을 지켰다고 여기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이전의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서 달려갔다. 그가 이 경주를 달려가는 동안 주위에서 그의 회심을 비난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렇게 자신을 잡아 끄는 이들의 손길로 인해서 뒤를 돌아보며 자기 연민 혹은 두려움에 빠질 수 있었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에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 달려가기에 힘썼다. 우리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여정을 달려가고 있다. 이 여정을 온전히 마치기 위해서는 그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만 한다. 내가 달려갈 푯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아야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때로는 주위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달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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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awhatever gain I had, bI counted as loss for the sake of Christ. Indeed, I count everything as loss because of cthe surpassing worth of d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e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f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gthat which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from God that depends on faith— 10 hthat I may know him and i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jmay share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that by any means possible I may k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Luke 14:33]
b[Heb. 11:26]
c[2 Cor. 5:15]
dIsa. 53:11; Jer. 9:23, 24; John 17:3; 2 Pet. 1:3
eLuke 9:25 (Gk.)
fRom. 10:5; [ver. 6]
gSee Rom. 9:30; 1 Cor. 1:30
h[Eph. 4:13]
i[Rom. 1:4; 6:5]
j1 Pet. 4:13; See 2 Cor. 1:5
kActs 26: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Php 3:7–11.

이전에 율법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변화되었다. 
7-8절) 이전에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의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아니 전 삶에 대한 가치, 우선순위의 변화이다. 이전까지 바울에게 유익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항목들이 이제는 손실, 해라고 여겨지는 것이고 반대로 이전에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항목들이 이익, 가치있는 일의 항목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후 10절에 이야기하듯이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 부활은 분명하게 해에 해당하는 계정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가치있는 항목외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손해와 이익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마 16:25-26)
Paul’s accounting, however, has now changed completely: what formerly went into the gaincolumn—his power, prestige, and “obedience”—now goes into the losscolumn. Likewise, the crucified Messiah, whom he had assumed must be a “loss,” is now seen as the ultimate “gain.” The language of loss and gain probably alludes to Jesus’ teaching (see Matt. 16:25–2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그런데 바울은 7절을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쓴 것들에 대해 반전을 이룹니다. 자신에게 인식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회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말하기 위해 상업적인 손익 대조표(balance sheet)의 용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족보(뛰어난 혈통)와 성취(바리새인, 열성, 흠 없는 의)를 과거에는 “이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이익”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손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가치가 뒤집어지는 가치전도(價値顚倒; Umwertung aller Werte)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6–127.

바울은 자신의 회심 또는 인식 변화의 근거를 먼저 “그리스도 때문에”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는(7절, 8절 하반), 그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우월성 때문에”라고 부연하고(8절),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고 부연합니다(8–9절). 이 회심을 그는 또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를 갖게 됨”이라고 설명합니다. 4절부터 6절까지 나열한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과 성취들은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나의 의”를 이루는 것들인데, 자신의 의와 그것을 얻게 하는 그런 것들이 “이익”이 아니라 “손해”임을 깨달았으므로 손비(損費) 처리해 버렸고 개똥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유효한 것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7–128.

본문에서 배설물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스키발론’으로 똥, 쓰레기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앞선 3:2과 연관하여 본다면 개에게 던져질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NTThe only NT usage is Paul’s in Phil 3:8. After recounting the natural and religious privileges that once seemed sweet and precious, he affirms that, for the sake of Christ, τὰ πάντα ἐζημιώθην, καὶ ἡγοῦμαι σκύβαλα, ἵνα Χριστὸν κερδήσω,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I regard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NRSV). Some have thought that Paul here deliberately uses language that is vulgar, or at least crude, perhaps comparable to Eng. crap(cf. Spicq 3:265; the orig. French is crotte, “dung”). However, the use of the term by various writers (see above, GL, esp. the refs. to Philo) does not indicate such a nuance; the rendering of the NIV 2011 is prob. on target: “I consider them garbage.” If Paul and his contemporaries associated the term with the notion of “what is thrown to the dogs” (see above, GL, ref. to Suda), there might be a wordplay with his previous warning regarding the Judaizers: “Beware of the dogs” (3:2; 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158). For further discussion of this passage see κέρδοςG3046.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26.

9절)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바울이 이러한 선택을 한 가장 근본적인 중요한 이유는 그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그는 율법에 열심을 품고 의로운자처럼 살면 그분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난 이후로 칭의가 율법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의지하고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해로 여기고 이제 자신이 몸에 고난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때에 무죄선고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평생에 걸친 완벽한 순종의 기록을 전가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시며 따라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선다."
Found in himmeans being spiritually united to Christ and therefore found not guilty before God as divine judge. Paul had trusted in a righteousness of my ownbased on obedience to the law rather than the right standing before God that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God “imputes” Christ’s lifelong record of perfect obedience to the person who trusts in him for salvation; that is, he thinks of Christ’s obedience as belonging to that person, and therefore that person stands before God not as “guilty” but as “righteous.” This is the basis on which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s considered “fair” in God’s sight. As explained in Rom. 10:1–8, righteousness cannot come by the law because all human beings sin, and therefore right standing before God as the divine judge is possible only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who isthe believer’s righteousness before God. See note on Gal. 2:1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10-11절)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였고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어떻게든 가능하다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의 목표는 그분을 아는 것, 즉 인격적 관계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그 부활의 권능 즉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행하시는 권능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능을 신자들이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직면하셨던 같은 종류의 고난, 타락한 세상에서 신실한 증인이 받아야만 하는 고난을 경험해야 한다.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The goal of trusting in Christ is to know him, that is, to know Christ in a personal relationship, and also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namely, the power Christ exerts now from the right hand of God. But this power is made known as the believer shares the same kind of sufferingsJesus faced—the sufferings that attend faithful witness in a fallen world. The good news is that those who suffer with and for Christ will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even as he di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우리를 위해서(우리 대신/대표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우리 대신(대표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 안에 내포시켜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격과 하신 일에 동참하도록 만듭니다. 그의 죄에 대해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이 되고, 그의 새 생명으로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며, 그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고,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옛 아담적 자아(죄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아담적 자아(새 사람/ 새 피조물/ 의인)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1–11, 갈 3:27). 요컨대 믿음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속죄행위의 덕을 입게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이루어졌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도 덕 입을 수 있지만,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출범(出帆)을 하고 구원이 이미 제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사단의 악과 고난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도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의 “첫 열매” 또는 “보증금”을 받은 셈입니다(롬 8:23, 고후 1:22).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받을 우리의 완성된 구원은 악과 고난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죽음의 힘을 완전히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온전히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그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부활의 새 생명이라는 구원의 완성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대신(대표)하여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그와 함께 죽고 부활함을 체험한 믿음 안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와 함께 옛 아담적 자아(죄인, 육신으로서의 자아)가 죽고 새 아담적 자아(의인)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로서,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현재적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좇음으로써 “육신”(사단의 사주 아래 하나님에 대항해 자기 주장하려는 옛 아담적 자아)을 죽이고 자신의 의인(새 아담적 자아)됨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현재적 실존은 믿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실재화(actualized)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자기 주장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어 주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순종하는 과정이므로 이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 손해를 보고 아픔을 당하는, 즉 고난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은 죽어 가는 것이고, 그의 반비례로 우리의 의인적 자아는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두고 “우리의 겉 사람(옛 아담적 자아, 육신으로서의 자아)은 날로 닳아 없어지나, 우리의 속 사람(새 아담적 자아, 의인으로서의 자아)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고후 4:16). 그는 이 과정을 또 “예수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도록 우리의 몸에 예수의 죽임 당함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과정이라고도 말합니다(고후 4:10). 이 과정을 전통적인 신학 용어로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바울의 언어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같은 형상되어 감”(symmorphosis; conformation) 또는 그 형상으로 “변형되어 감”(metamorphosis; transformation)이라고 하고(고후 3:18, 골 3:9–10, 롬 12:2),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입는” 과정이라고도 합니다(갈 3:27, 골 3:9–10, 에 4:22–24).
이와 같이 실존에서 믿음의 실재화를 통해 우리의 옛 아담적 자아가 점점 닳아 없어지고 새 아담적 자아가 새로워짐, 즉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되어 감(변형되어 감)의 궁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완전히 “변형됨(같은 형상됨)”입니다(고전 15:42–45, 롬 8:29–30).
바울은 이 궁극적인 변화에 대한 소망을 빌립보서에도 표현하고 있습니다(빌 3:20–2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영광스런 형체에로 온전히 변형됨”(metaschematizein/transform)은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부활에 온전히 동참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1절에 표현된 소망은 곧 21절에 표현된 소망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현재 자신의 믿음의 실재화, 즉 자신의 옛 아담적 자아(육신)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실재화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육신”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었던 것들을 다 손해 봐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의 죽음과 같은 형상되는(symmorphosis; conforming) 삶”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0절).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0–132.

우리의 현재적 실존은 믿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실재화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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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my brothers,1krejoice in the Lord. l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is no trouble to me and is safe for you. 
Look out for mthe dogs, look out for nthe evildoers, look out for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For owe are the circumcision, pwho worship qby the Spirit of God2and rglory in Christ Jesus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sthough I myself have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also. If anyone else thinks he has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I have more: t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uof the people of Israel, vof the tribe of Benjamin, ua Hebrew of Hebrews; as to the law, wa Pharisee; xas to zeal, ya persecutor of the church; zas to righteousness under the law,3blameless.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3, 17
kch. 4:4; 1 Thess. 5:16
l[2 Pet. 1:12]
mPs. 22:16, 20; Isa. 56:10, 11; Rev. 22:15; [Gal. 5:15]
n[2 Cor. 11:13]
oSee Rom. 2:29
p[John 4:23]
q[Gal. 5:25; Jude 20]
2Some manuscripts God in spirit
rRom. 15:17; [Gal. 6:14]
s2 Cor. 11:18
tSee Gen. 17:12
u2 Cor. 11:22
vRom. 11:1
u2 Cor. 11:22
wActs 23:6; 26:5
xActs 22:3, 4; Gal. 1:13, 14
ySee Acts 8:3
z[ver. 9]
3Greek in the law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6.

이 구절에서 4:4로 곧장 가면 의미가 매우 잘 통합니다. 그러나 3:1에서 3:2로의 연결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3:2–21(또는 4:3)은 끼어 들어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앞서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이 감옥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여러 날을 두고 이 편지를 구술해 가는 중 빌립보교회에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표증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온전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서도 일치와 화평과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는 1:27의 권면을 일단 중단하고 그 유대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설명하는 내용을 구술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3장입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4:1부터 구술한 것 같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7–118.

1절) 마지막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이 내용은 이후 4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무엇인지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표현인지 이후 2절부터 등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로 3:18에서도 밝혔듯이 이를 여러번 반복했던 것이다. 
3:2–21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를 발하는데, 3:18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미 그것을 여러 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똑같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나에게 수고로운 일이 아니요, 여러분들에게는 안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번 했던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에 대한 경고를 다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확실하게, 안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양떼의 올바른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거듭 경고하는 것이 사도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3:1절 전반부까지 구술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다시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3:2 후반부터 3:21(또는 4:3)까지 새로운 내용을 구술하여 덧붙이고, 4:1(또는 4:4)에 가서 원래의 주제로 복귀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3:1(전반부)에서 문단이 끊어지고, 3:1(후반부)에서 새 문단이 시작되어 3:2이하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8–119.

형제들아라는 표현은 3:1, 13, 17; 4:1에 등장한다. 

2-3절)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복음의 적대자들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조하고 있다. 
적대자들(유대주의자들) :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이들이다. 이들을 삼갈 것을 명령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진정한 할례파)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본문의 개들이라는 표현은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조롱, 욕에 해당하는 말로 유대인들이 정결예법에 벗어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구약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율법의 선한 행실을 찬양하는 이들을 향해서 행악자들이라고 말하며 할례(페리토메)를 강조하는 이들을 향해서 몸을 상해하는 자들(텐 카타도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유다주의자들의 자랑의 상징이 그들의 멸망의 징표로 드러난 것이다. 
육체의 할례를 높이는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이다.(요 4:23-24)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빌 1:26) 육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Dogswas not only a general term of derision in the ancient world, it was particularly a word used by some Jews in reference to Gentiles, who were considered ritually unclean. With biting irony, Paul says that the Judaizers, not the Gentiles, deserve that label. Paul’s irony continues as he labels those who extol good works of the law as evildoersand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This last phrase (Gk. tēn katatomēn) is a play on words with circumcision (Gk. peritomē). The Judaizers’ supposed badge of pride turns out to be the sign of their destruction. On Jewish views of circumcision, see note on Acts 15:1.
In contrast to those promoting physical circumcision (v. 2), the true people of God (the circumcision) are those who worship by the Spirit of God(cf. John 4:23–24). They glory in Christ Jesus(cf. Phil. 1:26)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that is, as Calvin put it, in “everything that is outside of Christ”). This verse mentions all three members of the Trinity: “God” (the Father), “Christ Jesus” (the Son), and “the Spirit of God” (the Holy Spiri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중요시했는데 바울은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됨의 징표인 할례를 몸을 상해하는 일, 즉 살점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비하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하는 할례가 그저 몸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sarx; flesh)을 가끔 “몸”(soma; body)과 함께 인간의 외형, 즉 살 덩어리를 지칭하기 위해 쓰기도 합니다만, 더 많은 경우에서 “육신”이나 “몸”에 특수하고 깊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씁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바울의 중요한 신학 용어들 중에 속합니다. “몸”은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 전체와의 연대성 속에서 제한성(결핍성)을 가지고 사는 인간을 특히 그 외형적인 관점에서 지칭할 때 쓰는 인간론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현재는 제한성을 가지고 죄와 죽음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쳐질 수도 있으며(롬 12:1), 종말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영적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빌 3:20–21, 고전 15:42–44). 이 “몸”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내재 자원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좇아 자신의 구원(의, 안녕, 행복)을 확보하려 할 때, 바울은 그런 인간을 “육신”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 언어에서의 “몸”은 인간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뜻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인 개념인 반면, “육신”은 자신을 신뢰하며(자신의 우상화)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기 주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개념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0–121.

레 21:5과 왕상 18:28을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을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깍지 말것을 명령한 바 있다. 
The Greek word for circumcision is peritomē(= “to cut around”); katatomē, used here, denotes “cutting to pieces,” hence “mutilate.” This wordplay, especially the emphatic For it is we who are the circumcision(v. 3), makes it certain this is the primary issue between Paul and them. This is the most “cutting” epithet of all, the ultimate derogation of circumcision, since the cognate verb occurs in Leviticus 21:5 (LXX) prohibiting priests (who serve God) from cutting their flesh as pagan priests did (cf. 1 Kings 18:28).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Westmont, IL: IVP Academic, 1999), 133.

4-6절) 바울은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데 만약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것 같으면 나는 더욱 신뢰할 것이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 내용으로는 바울은 
  1.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2.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3.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4.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5.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6.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유다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반대는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특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봤을때 바울은 완벽한 자격(육체를 신뢰할 만한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벽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자신이 어느 지파의 소속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면서도 아람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가장 엄격한 종교적 분파인 바리새인(행 26:5) 출신이었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이러한 열심은 비느하스나 엘리야의 따라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면을 볼때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전혀 의가 아니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표현했다. 
Paul’s opposition to the Judaizers was not because he himself in any way lacked a Jewish “pedigree.” When it came to the things of the flesh—the whole system of life that held sway before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giving of the Spirit—Paul had perfect credentials. He was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in accord with OT law (Lev. 12:3). He was an ethnic Israelite and knew the tribe from which he came. Hebrew of Hebrewsprobably indicates his descent from Jewish ancestors, and many think it also means that he spoke Aramaic (the national language of Israel in his day), even though he came from Greek-speaking Tarsus. He was from the strictest religious sect—the Pharisees (Acts 26:5). His zealwas such that he had even been a persecutor of the church. He probably had thought of himself as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Phinehas (Num. 25:11) and Elijah (1 Kings 19:10, 14) in his zeal. If anyone could be said to be blamelessin following the law, it was Paul. But before God it was no righteousness at all, for though Paul thought he was pleasing God, in persecuting the church he had shown himself to be the “foremost” of sinners (1 Tim. 1: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바울이 자신의 베냐민 지파 소속을 특별히 내세우는 이유는 베냐민이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아내 라헬로부터 난 두 아들 중 하나였으며,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조로 갈릴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조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지속했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첫 왕을 배출하였으며(자신의 이름이 그 왕의 이름을 따른 사울이었음), 전쟁 때 영웅적으로 싸운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매우 자랑스러운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 부모들 사이에서 난 히브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은 헬라파 유대인(Hellenistes)과 구별해서 쓰인 용어입니다. 후자는 로마 제국 등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헬라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들을 지칭한 반면, “히브리인”(Hebraios)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히브리”어(실제로는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행 6:1–6 참조). 당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민 1세대로서 아람어를 모어로 쓰며 아람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출석하는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남부) 다소 출신이지만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가정의 출신이었음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을 두 부류를 구분할 때는 사용 언어가 주된 기준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분은 문화적 차이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자신을 히브리인 부모로부터 출생한 히브리인이라고 내세우는 데는 자신이 헬라 문화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관점에서 자신의 출생이 가져다준 자랑거리들을 열거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개인적 성취들을 덧붙여 열거합니다. 그것들은 세 가지입니다. 곧 “율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리새인이요, 열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교회의 핍박자요, 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흠이 없는 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주의는 출애굽기 19장 5, 6절에 반영된 이상(理想), 곧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들의 왕국이어야 한다는 이상을 성취하려는 중산층 평신도 성결운동이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위한 정결법들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었지만, 그 법들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불결로부터 분리, 곧 정결과 성별을(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의 기원)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주의는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자신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려 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열성”(zelos; zeal)은 단순히 심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열성을 보이는 것이 비느하스 전통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인들이 그곳의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한 열성(개역 성경: 질투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이 열성이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거두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민 25장). 구약 성경은 이러한 비느하스의 열성을 속죄 제사로 그리고 의의 행위로 기념합니다(시 106:31). 주전 168년에는 모딘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마카비 형제들)이 유대교를 말살하려는 시리아의 통치자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들은 비느하스의 열성을 재현하려 하였고, 또 주후 1세기 중반에 당시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투사들도 비느하스의 열성을 본받고자 했기에 열성당(zealots)이라 불리었던 것입니다.
이 전통에서 “열성”(zelos)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범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잔해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더 열성적인, 유대교의 정통과 순결을 위해서는 폭력을 불사한 맹렬파로서 비느하스, 마카비 운동, 바울 당시 세력을 얻어 갔던 열성당과 같은 신학적 전통에 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바리새적 헌신과 유대교에 대한 전투적 열성은 바울을 유대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온전한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출생의 특권들과 자신의 개인적 경건의 성취들을 종합하여, 특히 후자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결론하는 것입니다. 과거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삶을 율법이 요구하는 또는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의의 관점에서 보면 “흠 없는 자”였다고 말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이 말로 자신들의 특권과 율법 지킴을 자랑하며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지켜 온전한 의인이 되라고 선동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여 과거 자신의 삶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운, 온전한 의의 삶이었다고 결론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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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I hope in the Lord Jesus wto send Timothy to you soon, so that I too may be cheered by news of you. 20 For I have no one xlike him, who will be genuinely concerned for your welfare. 21 For they all yseek their own interests, not those of Jesus Christ. 22 But you know Timothy’s4zproven worth, how aas a son5with a father bhe has served with me in the gospel. 23 I hope therefore to send him just as soon as I see how it will go with me, 24 and cI trust in the Lord that shortly I myself will come also. 
25 I have thought it necessary to send to you dEpaphroditus my brother and fellow worker and efellow soldier, and your messenger and fminister to my need, 26 for he has been longing for you all and has been distressed because you heard that he was ill. 27 Indeed he was ill, near to death.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ly on him but on me also, lest I should have sorrow upon sorrow. 28 I am the more eager to send him, therefore, that you may rejoice at seeing him again, and that I may be less anxious. 29 So greceive him in the Lord with all joy, and hhonor such men, 30 for he nearly died6ifor the work of Christ, risking his life jto complete what was lacking in your service to me. 
w[1 Cor. 4:17; 1 Thess. 3:2]
x[1 Cor. 16:10]
y[2 Tim. 3:2]; See 1 Cor. 10:24
4Greek his
z2 Cor. 2:9
a1 Cor. 4:17; 1 Tim. 1:2; 2 Tim. 1:2
5Greek child
b[2 Tim. 3:10]
c[ch. 1:25; Philem. 22]
dch. 4:18
ePhilem. 2
f[ch. 4:18]
gRom. 16:2
h1 Cor. 16:18; 1 Thess. 5:12, 13; 1 Tim. 5:17
6Or he drew near to the point of death; compare verse 8
i[Acts 20:24]
j[ch. 4:10]; See 1 Cor. 16: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19–30.

디모데를 보내는 내용은 살전 3:2-6절을 함께 보라. 

앞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을 촉구한다.(2:5) 자신이 이러한 마음을 가진 것을 보여준 바울은 이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도 그것을 가지고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절)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속히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라는 이유는 자신도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알아 안위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현재 갇혀있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디모데를 보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주안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는데 그 이유는 너희의 사정을 듣고 자신이 안위와 기쁨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은근한 압박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16절에서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수고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함으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주님의 훌륭한 교회가 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기쁨인 것이다. 
지금 옥중의 바울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소식은 바로 복음이 능력있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가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20-21절) 바울이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는 이유는 같은 혼을 가지고 진실되게 염려할 사람이 바로 디모데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는 이유는 그와 같이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 바울과 “같은 혼”(뜻을 같이 하여/개역 성경)을 가지고 진실 되게 염려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은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든 사람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익을 추구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바울 주변에 바울의 사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들을 디모데만큼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헌신이 이기심으로 혼탁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 디모데가 빌립보교회의 안녕을 위해 염려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익을 돌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안녕을 돌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꿔 말해도 역시 같은 뜻이 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0–111.
 

22절) 디모데가 어떠한 연단의 과정을 거쳤는지 너희도 알텐데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종노릇 했다. 
본문의 연단이라는 단어는 ‘도키메’라는 헬라어로 증명, 검증, 평판, 특성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시험을 하다, 시험을 통과한, 자질이 입증된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디모데는 연단을 통해서 그의 신뢰성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23-24절) 바울은 지금 자신의 일, 아마도 좋은 재판결과를 가지고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를 방문할 것을 고대하며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바라고 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도 속히 그들에게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확신할 수 없으나,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주의 도움을 힘입어”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1:19에서 표현한 자신의 확신을 여기서 다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예수님의 영의 도움으로 자신이 무죄 석방되어, 그들에게 가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앞서 19절에서 디모데를 보낼 계획을 말할 때는 그것을 “바란다”고 한 바울이 여기 자신의 미래에 관해서는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후자보다 전자의 실현이 더욱 용이하고 성취될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보고 말하기에, 인간적인 또는 이성적인 판단과는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어법은 우리에게 그가 로마서 4:17–21에서 설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기시킵니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이 더 이상 소망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확신하는 것입니다(in hope against hope). 믿음은 이렇게 이성의 판단에 대항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라고 부르짖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이성은 반비례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히브리서 11:1의 믿음에 대한 정의도 상기시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2–113.

25절) 그러나 혹은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수발들도록 보낸 사자로,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한 동역자였다. 자신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바울은 그를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다시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본절은 에바브로디도를 묘사하면서 나의 형제-함께 수고한 자-함께 군사된 자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점차 강조하는 크레센도의 효과를 내고 있다. 동료 그리스도인 -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사역하는 동료 그리스도인 -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싸우고 힘써 투쟁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이라고 점층적으로 묘사한다. 
이어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너희의 사자로 내가 쓸것을 돕는 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이후 4:18절을 통해서 입증된다. 본 서신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인들에게 전달했다면 이후에 빌립보인들이 바을의 쓸것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26절)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으로 인해서 빌립보 성도들이 근심한다라는 것을 알기에 에바브로디도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기에 돌려보낸 것이다. 
본문속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그의 병든 것을 인해 근심하고 또한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으로 인해서 근심한 다는 것으로 인해서 근심하는 것을 통해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 지를 알 수 있다. 

2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아파서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근심 위에 근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실제로 아파서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나았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상황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수형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자기를 수발드는 에바브로디도까지 죽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에게 베푸신 자비를 곧 자신에게도 베푸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바울은 자기 연민의 글을 한 줄이라도 씁니까? 자기 불평의 말을 한마디라도 합니까? 이 편지를 읽으면(3장의 첫 몇 절을 제외하고) 바울의 영혼의 잔잔함을 느낍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그의 심령에 물결이 인다면 그것은 도리어 기쁨의 물결입니다. 근심과 원한의 물결이 아닙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4–115.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나음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고백한다. 이미 그는 여러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고치심으로 그로 인해 근심하지 않도록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28절) 바울이 그를 급히 보낸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며 내 근심도 덜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문에서 보냈다는 부정과거형인데 편지의 시제를 편지가 당도해서 읽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썼기 때문이다. 

29-30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주안에서 수고하는 이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섬김으로 주를 위한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사역을 하다보면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이들도 있는가하면 그 싸움을 위해서 뒤에서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이들도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는 역할을 자신의 생명을 걸고 했다는 것이다. 
30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섬기는 여러분들의 사명 중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나를 섬기는 여러분들의 사명 중 부족분”이라고 번역한 다소 복잡한 표현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을 지원하는 일에 부족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멀리 떨어진 그들로서는 할 수 없는 그들의 사명을 그들의 대표인 에바브로디도가 완수하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섬김으로써 그의 복음 선포 사역(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 결과로 죽을 뻔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하면서 맺는말로 그가 2:6–11의 찬송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따른 사람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2:5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신과 디모데에 이어 에바브로디도를 예시하고 그런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까? 우리의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의 일을 빙자하여 자기 일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빙자하여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빌립보서 2장을 어떻게 읽습니까?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6–117.

바울은 지금 기쁜 마음으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보내고 있다.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 기쁨, 위안을 얻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에게 이런 한, 두 사람의 동료들이 있다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또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팔로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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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erefore, my beloved, fas you have always gobeyed, so now, not only as in my presence but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13 for hit is God who works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ihis good pleasure. 
14 Do all things jwithout grumbling or kdisputing, 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lchildren of God mwithout blemish nin the midst of o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pas lights in the world, 16 holding fast to qthe word of life, so that in rthe day of Christ sI may be proud that tI did not run in vain or labor in vain. 17 Even if I am to be u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upon vthe sacrificial offering of your faith, I am glad and rejoice with you all. 18 Likewise you also should be glad and rejoice with me. 
f[ch. 1:5; 4:15]
gHeb. 5:9; [2 Cor. 10:5; 1 Pet. 1:2]
h1 Cor. 12:6; [Heb. 13:21]; See 1 Cor. 15:10
i[1 Tim. 2:4]
j1 Pet. 4:9
k1 Tim. 2:8
l[Matt. 5:45; Eph. 5:1]
mJude 24
n1 Pet. 2:12
oSee Deut. 32:5
pMatt. 5:14, 16; [Titus 2:10]
q[Acts 5:20]
rSee 1 Cor. 1:8
sSee 2 Cor. 1:14
tGal. 2:2; 1 Thess. 3:5; [Gal. 4:11]
u[1 John 3:16]; See 2 Cor. 12:15
v[Rom. 15: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12–18.

본문은 구원의 현재 시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제 그 구원을 이루어내야하고 주님께서 오시는날 영광스럽게 그 구원을 이룰 것이다. 
이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는 공동체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구원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개인과 가정을 넘어서서 가정과 나라와 민족, 세계를 지나 광대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이루어내는 주체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안에 함께 하심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일을 이루어 낼 것이다. 이 구원이 공동체 적인 이유는 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독은 바로 원망과 시비이다. 불만에 차 수근거리는 태도는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에 굳게 서서 빛으로 살아낼때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 구원이 자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깝지 않다라고 고백한다. 

12-13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여, 여러분들이 항상 나에게 순종하였듯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 더더욱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들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 일하려는 의지도 갖게 하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계시니까요.
개역의 번역은 약간 오역으로 보인다. 1:5, 4:15에서 보는 것처럼 이미 항상 순종하였던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룰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구원을 개인적인 구원으로 볼 것인가, 공동체적 구원(평안, 안녕)으로 볼 것인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만족할 수 없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숙해가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렵고 떨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만큼 선해질 수 없다고 걱정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들 속에서 역사하셔서 그들을 돕는다. 12절이 행위를 통한 구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울은 분명히 이런 가르침을 거부한다.(3:2-11) 
The Philippians have obeyed(cf. Christ’s obedience, v. 8) in the past and should continue to do so as they work outthei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They cannot be content with past glories but need to demonstrate their faith day by day as they nurture their relationship with God. But while God’s justice is a cause for sober living (“fear and trembling”), it is not as though Paul wants the Philippians to be anxious that they can never be good enough to merit God’s favor. Rather, it is God’s love and enabling grace that will see them through: it is God who works in you. They can rejoice in God’s empowering presence even as they work hard at living responsible Christian lives. While v. 12 may seem to suggest salvation by works, it is clear that Paul rejects any such teaching (cf. 3:2–11). In 2:12 Paul means “salvation” in terms of progressively coming to experience all of the aspects and blessings of salvation. The Philippians’ continued obedience is an inherent part of “working out” their salvation in this sense. But as v. 13 demonstrates, these works are the resultof God’s work within his people.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Even the desire (“to will”) to do what is good comes from God; but he also works in the believer to generate actual choices of the good, so that the desires result in actions. (On fear of God, see notes on Acts 5:5; 9:3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1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빌립보의 독자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즉 교회의 일치를 통한 안녕)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의지(will)를 발동시키시고, 이룰 수 있는 능력(energy)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구원”(즉 공동체의 안녕)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3절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의 역사하심을 상기시켜, 12절에 한 권면을 그들이 이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그리하여 그것을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12절의 “구원”을 개인의 종말론적인 구원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12절은 알미니안주의자에게 합당한 것이고, 13절은 칼빈주의자에게 적절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12절의 “구원”이 공동체의 안녕을 의미하는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12절은 독자들에게 성화를 통한 교회의 일치와 안녕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는 알미니안적 강조를, 13절은 하나님께서 독자들에게 바로 그것을 이루려는 의지와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칼빈주의적 강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절과 13절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관점들이 온전한 균형을 이루며 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두려움과 떨림”, 즉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성화를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리 와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시키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후자의 확신이 없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지 않은 채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그런 성화는 당연히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런 성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화를 이루려는 의지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실상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주의적 관점이 없는 알미니안주의는 인본주의에 불과하고, 성화를 위한 알미니안적 강조가 없는 칼빈주의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1–103.



14-15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어그러지고 뒤틀린(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그런 자들 가운데서 너희가 세상의 빛처럼 비춰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상속에서 빛으로 살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삶을 상기하는 표현을 인용한다. 
(신 32:4-5, 개정)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진보는 원망과 시비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다. 
Paul continues the theme of “working out” one’s salvation (vv. 12–13). The Philippians should shine as lightsamid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Paul’s choice of words recalls the wilderness generation of Israel, who in Deut. 32:5 are described by these very words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nd whose spiritual progress was thwarted by grumblingand questioning(cf. 1 Cor. 10:1–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하나님은 반석이시며 그분의 길은 정의롭고 진실하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바르신데 반하여 이스라엘은 악을 행함으로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롬 9:25-26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 아닌 자들을 내 백성 삼으셨다라고 말한다. 
Paul refers to Moses’ song (Deut 32:5), also a free-standing hymn in Paul’s day. It contrasts the crookedness of the people with God’s rock-like faithfulness (Deut 32:4), expressing that the people are no longer God’s children because of their wickedness. Paul says that God has now fulfilled his promises, however, and made people his children again (cf. Rom 9:25–26, where God changes “not my people” into “my people” so that they are then his “children”; cf. also “adoption” in Rom 8:23; Eph 1:5).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8–2419.

16절)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 내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수 있도록 하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결국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굳게 하는 사역인데 그렇지 못할 때 자신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될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헛되지 않도록, 도리어 자랑할 것이 있도록 말씀위에 굳게 설 것을 요청하고 있다. 본문의 ‘밝혀’라는 단어는 ‘에페코’로 굳게 붙들다, 제시하다, 제공하다, 주목하다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The Philippians’ obedience to the word of lifeis not merely a matter of private concern. As an apostle and fellow sharer in the gospel, Paul’s own laborwould be in vainif they failed to hold fast until the day of Christ(cf. 1:6; 1 Thess. 5:2–11; 2 Pet. 3:10–13; Rev. 20:11–21:8) and thus proved not to be genuine believers. Holding fastmeans both believing God’s Word and following it. Since the Greek epechōcan mean either “hold fast” or “hold out to, offer,” some think that Paul may have in mind “holding forth,” i.e., proclaiming, the word of lif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이 에페코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5번 사용되는데 눅 14:7, 행 3:5, 딤전 4:16에서는 바라보다, 주목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행 19:22에서는 유지하다, 계속 머물다의 의미를 빌 2:16에서는 굳건히 붙들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The compound ἀντέχωoccurs 4× (“hold firmly to” in Matt 6:24 par. Luke 16:13; Titus 1:9; “to help” in 1 Thess 5:14), while ἐπέχωoccurs 5×, once with the meaning “hold fast [orhold forth]” (Phil 2:16), otherwise “hold [the mind] toward,” i.e., “give attention” (Luke 14:7; Acts 3:5; 1 Tim 4:16) and “hold back, stay” (Acts 19:22).
par. (and) parallel(s)
i.e. id est(that is)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47.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세(두렵고 떨림)로 노력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그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여 일러 줍니다. 첫째로 모든 것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불만스러워 수군거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고 하여 불만에 차 수군거리며 그들의 해방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의 지도력과 지침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합니다(출 16:2–3, 민 14장과 16장, 고전 10:10). 물질적으로 쪼들리거나, 핍박이 있거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해 특히 지도자에 대해 원망하고 시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원망과 시비야말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공동체의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서 설령 신앙생활이 여러모로 어렵더라도 원망과 시비 없이 공동체의 모든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들과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들처럼 멸망 받을지도 모르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의 자세를 가지고 원망과 시비를 자제함으로써 자신과 교회 공동체가 멸망 받지 않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뒤틀리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흠 없는, 순전한, 마치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고, 그런 암흑의 세상에서 별(발광체)로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별로 빛난다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말합니다. 빛을 발하는 자들로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 다른 사람들이 빛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들이 순전한 자들이 되고 원망과 시비가 없는(그러니까 화평과 일치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 수행의 기본 조건이며, 지금까지 말한 바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해야 할 일 하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말씀을 밝힘’입니다. 여기서 ‘밝힌다’라고 번역된 말은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는 동작을 그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동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듦,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내밈(즉 선포함)”. 이것은 첫째 외적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그것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듯이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앞으로 내밀어(즉 선포하여) 사람들을 흑암의 세계에서 건져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물론 복음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복음이 생명(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3–105.

17-18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희생 제물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기뻐하고 너희 모든 무리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와 같이 너희, 빌립보 성도들고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자신을 전제로 드릴 것을 말한다. 
(딤후 4:6, 개정)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민 28:7, 개정)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 
그 전제는 위의 민수기의 기록과 같이 희생 제물위에 독주나 포도주를 붓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전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어진 삶을 표현하는 생생한 묘사이다. 
(롬 12:1, 개정)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전제’는 원래 짐승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로서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붇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그것도 그림언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그림을 쓰는 목적은 자신의 현재 처지에서 사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때 뿌려질 희생의 피, 포도주같이 붉은 피를 독자들에게 연상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가 1:27부터 권면해 온 대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또는 복음)에 입각한 올바른 삶,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를 세워 올리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의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붉은 피를 “관제”(붉은 포도주)로 쏟아 붓게 되어도 그는 그들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도 그는 역시 “너희 무리”(“여러분 모두”)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을 한데 묶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희생적 사고와 삶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라고 권면해 온 바울이 자기도 빌립보교회의 온전한 믿음의 삶을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도 바울 자신도 본받아서 공동체의 “구원”(안녕)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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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1pwho, though he was in qthe form of God, did not count equality with God ra thing to be grasped,2but semptied himself, by taking the form of a tservant,3ubeing born in the likeness of men.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he humbled himself by vbecoming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weven death on a cross. xTherefore yGod has z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a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10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bevery knee should bow, c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d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e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oRom. 15:3; See Matt. 11:29
1Or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pSee John 1:1
qSee 2 Cor. 4:4
rJohn 5:18; 10:33; [John 14:28]
2Or a thing to be held on to for advantage
s2 Cor. 8:9; 13:4; See Mark 9:12
tSee Isa. 42:1; Matt. 20:28
3Or slave(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uRom. 8:3; Gal. 4:4; See John 1:14
vHeb. 5:8; [Matt. 26:39; John 10:18; Rom. 5:19]
wHeb. 12:2
xJohn 10:17; [Isa. 52:13; 53:12; Heb. 2:9]
ySee Matt. 28:18
zActs 2:33
aEph. 1:21; Heb. 1:4; [Acts 5:41]
bIsa. 45:23; Rom. 14:11
c[Rev. 5:3, 13]; See Eph. 1:10
d[Rom. 10:9; 1 Cor. 12:3]
e[Rom. 14:9]; See John 13: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5–11.

5-11절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불리는 유명한 구절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 모범을 설명하면서 그분의 선재, 성육신, 죽음, 부활,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심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삶은 진정한 영적인 진보의 본을 보여준다. 그분은 높은 자리를 위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투쟁을 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이 구절이 바울의 저작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겸손과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며 본문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요약이 독특한 것이 아니고 같은 주제들이 신약 전체를 통해서 발견된다. 
Christ’s Example of Humble Service.This passage is often referred to as the “hymn of Christ.” Paul depicts Christ’s example of service in a stirring poem that traces his preexistence, incarnation,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to the right hand of God. Paul wrote this magnificent theology to encourage the Philippians to consider other people’s interests first (see v. 4). Jesus is the paradigm of genuine spiritual progress: not a self-aggrandizing struggle for supremacy, but a deep love for God and neighbor shown in deeds of service. Verses 6–11 have some clear indications of poetic structure, leading some to believe that this is a pre-Pauline hymn adapted by Paul. It is just as likely, however, that Paul composed the hymn for this setting. In view of the myriad theological questions that arise in these verses, it is critical to keep two things in mind: (1) these verses were written not to spur Christians to theological debate but to encourage greater humility and love; and (2) the summary of Christ’s life and ministry found here is not unique: the same themes are evident throughout the N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먼저 이 찬송시를 헬라어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셔서/형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누릴/취하는 것(하르파그모스)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스스로를 비우셔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
인간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셨고
죽음,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예수 이름에 하늘의 존재들이나 땅 위의 존재들이나 땅 아래의
존재들이나 모두 무릎 꿇게 하셨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3–84.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본문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받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모범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이 가능하다. 본문속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를 모두 본보기로 제시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볼때는 후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이 좀더 우세해 보이지만 앞선 1-4절의 내용, 한마음과 사랑에 하나되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볼때 두가지 모두로 해석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소유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연합하는 삶,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는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The believer’s mindneeds to reflect on the proper model, if life is   p 2283  to be lived for God. There is some debate as to whether this mind-set is something Christians receive by virtue of being united to Christ(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or whether it is to be based on the model of Christ(ESV footnote: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The Gk. has no verb; either “is” or “was” has to be supplied.) In light of the consistent theme of behavior modeling in this letter (Jesus, Paul, Timothy, and Epaphroditus are all held out as examples), many interpreters have adopted the latter meaning. Both ideas are theologically true. In either case, the central theme of vv. 1–5 is the same—that the Philippian church would be of one mind (v. 2), united by love (v. 2) and humility (v. 3), and looking out for the interests of others (v. 4).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2–2283.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권면을 받고 있으며, 일치하게 하는 영, 즉 성령이 북돋우는 교제가 있으므로 성도들 간에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상호 관계를 해야 합니다. 자기 이익, 자기 의견, 자기 주장보다 남의 이익, 의견과 주장에 귀 기울임으로써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루어 감”입니다. 이제 바울은 2:5–11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려냄으로써 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을 더욱 북돋우려 합니다. 따라서 5절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었던 이 마음을 여러분들 안에 품으시오”,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 여러분들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시오”.
두 번째 번역을 따르면,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2:6–1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찬송시는 그리스도를 윤리적 모범으로 제시하기보다 구원의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시를 여기 담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을 받은 자들인 만큼 당연히 겸손과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첫 번째 번역을 따르면, 2:6–1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찬송시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어 그들도 이 시가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모범으로 제시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0–81.

모든 신학자들은 2:6–11 구절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라는 데 동의합니다. 또 다수의 학자들이 이 시가 원래 바울 이전의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선포인데 바울이 이곳에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꽤 많은 수의 소수 학자들은 바울이 이 시의 저자라고 믿습니다. 필자도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데, 그 주된 이유인즉 이 시에 바울만 쓰는 중요한 신학 언어인 “형상”(morphe/eikon: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함. 롬 8:29, 고전 15:45–49, 고후 3:18, 4:4–6 등)이 나오고, 어휘나 내용면에서도 이어 나오는 빌립보서 2–3장(특히 3:20–21)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가 바울이 지은 것이라면, 그가 전부터 지어 사용하여 오던 것을 여기 활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비로소 지었는지는 따로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시의 깊은 내용과 정교한 형식을 볼 때 아마 전자가 옳은 견해일 것입니다. 바울이 원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선포하는 노래로 지은 것을 이곳에서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해석하여 인용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이 시의 기원에 대한 토론은 초대 기독교의 신학 발전 과정을 추적하거나 바울 신학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는 중요할지 몰라도 빌립보서의 본문을 강해하는 데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2–83.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성육신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데우)로 계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말한다. 여기서 본체는 어떤 것의 모든 특징과 특성을 소유한, 어떤 것의 참되고 정확한 본성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본체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7절의 종의형체를 가지는 것과 직접적으로 대비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지셨지만 그 특권을 끝까지 고수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를 취하시 않으시고 도리어 섬김의 자세를 가지셨다. 
The Son of God is and always has been God. “Form” could also be a reference to Christ being the ultimate image of God, “the exact imprint of his nature” (Heb. 1:3). It might also refer to the fact that he is the visible expression of God’s invisible glory (Col. 1:15). Remarkably, Christ did not imagine that having “equality with God” (which he already possessed) should lead him to hold onto his privileges at all costs. It was not something to be grasped, to be kept and exploited for his own benefit or advantage. Instead, he had a mind-set of service. “Christ did not please himself” (Rom. 15:3). In humility, he counted the interests of others as more significant than his own (Phil. 2:3–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3.

이 그리스도의 찬송시를 해석할 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6절에 나오는 “하르파그모스”(harpagmos)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탈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본문 6절에서 그 말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상이한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첫째 “탈취할 것” (res rapienda),둘째 “탈취해서 얻은 것, 즉 노획물( 누릴 것)” (res rapta), 세째 “탈취하기”(raptus). 헬라어로 씌어진 고대 문서들에서 발견한 “하르파그모스”의 용례에도 이 3가지 뜻은 모두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의 정확한 내용과 바울 신학 전체의 규명을 위해서라도 이 시에서 그 말이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는가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첫 번째의 가능성을 따른다면 6절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손만 내밀면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 시는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 즉 종말의 아담으로 보고, 첫 아담과 모형론적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창 1:26–28), 그런 높은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완전한 동등됨을 탈취하려고, 즉 하나님같이 되려고 과일을 취하였습니다 (창 3:5).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형상의 위치에서 굴러 떨어져 사단과 피조물 그리고 죄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첫 아담의 자손들로 그와 같이 스스로를 하나님같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허영과 교만(hybris)에 빠져 하나님같이 되려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과 같이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높은 위상에서 타락하여 비인간화합니다. 즉 사단과 피조물, 죄와 죽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리스도께서 종말(“오는 세상”)의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숙명을 극복한 것입니다. 아담과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인간과 같이 되고, 죽음의 세력에 대한 인간의 노예적 실존에 참여하였으며, 스스로를 낮추어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첫 아담이 자기를 높여 하나님같이 되려 했던 시도가 그를 인간 이하로 굴러 떨어지게 한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자기를 낮춤과 순종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높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퀴리오스 - 주”)과 만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첫 아담적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찬송시가 바로 그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며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아담 기독론(롬 5:12–21, 고전 15:20–22, 45–49 등)과 잘 조화를 이루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찬송시도 바울의 아담 기독론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선재 상태(즉 성육신하기 전 상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동등함을 갖지 못한 존재, 즉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였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해석을 배격하고 두 번째 해석을 취합니다. 둘째 해석을 따른다면, “하르파그모스”를 이미 취해 얻은 것(노획물)(res rapta)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선재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었지만 그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됨을 누릴 수 있는 노획물(booty)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완전한 동등성을 천명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신론과 기독론에 부합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 위의 두 해석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하고 오랫동안 논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하르파그모스”를 “탈취하기”(raptus)라는 행위 자체로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이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앞의 두 해석들은 6절의 시작하는 분사구를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라는 양보구로 번역하나,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시었기에”라는 이유구로 번역합니다. 또한 앞의 두 해석들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하르파그모스” 의 목적어로 이해하는 데 반해, 이 셋째 해석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하르파그모스”의 의미상 주어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기를 의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첫째와 둘째 해석: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노획물로
여기지 않았다.”
- 셋째 해석: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첫째 해석이 이 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종말의 아담으로 그려 첫 아담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셋째 해석은 이 시가 신성과 인간성의 대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적인 존재, 빈곤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성의 본질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채우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갈등을 일으키고 죽음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온전한 분이기에 남의 것을 취해 스스로를 채울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성의 본질은 자신의 “충만함”(pleroma)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 있습니다. 셋째 해석에 의하면, 이 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성의 표현을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곧 신성의 존재이셨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은(즉 신성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이 은혜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기 주장하여 서로의 것을 빼앗아 살려는 불가능한 게임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요한복음 1:1–18의 시와 근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가집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보다 자세히 본 뒤 이 해석들을 음미해 봅시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4–88.

7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서 자기를 비워라는 표현이 많은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에 사용된 ‘케노오’라는 단어는 ‘비우다, 쏟아 내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지위와 특권을 버리다’라는 의미를 포함함다. 여기에서 ‘케노시스’ 이론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 사역기간동안 자신의 신적 속성을 일시적으로 포기하셨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던가 몇가지 신적 속성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으로 모든 특권을 소유한 분이지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할 평범한 유대인의 아기가 되시기 위해서 그 특권들을 버리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심으로 자기를 비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계셨던 능력의 자리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권리가 있으셨지만 그분의 사랑은 죄 많은 인류를 위해서 그를 연약함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 것이다.(고후 8:9) 이 비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진정한 신성을 포기함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되심으로 이루어졌다. 
Made himself nothinghas occasioned much controversy. Greek kenoōcan mean “empty, pour out” or also (metaphorically) “give up status and privilege.” Does this mean that Christ temporarily relinquished his divine attributes during his earthly ministry? This theory of Christ’s kenosisor “self-emptying” is not in accord with the context of Philippians or with early Christian theology (see the article on The Person of Christ). Paul is not saying that Christ became less than God or “gave up” some divine attributes; he is not even commenting directly on the question of whether Jesus was fully omnipotent or omniscient during his time on earth. Nor is he saying that Christ ever gave up being “in the form of God.” Rather, Paul is stressing that Christ, who had all the privileges that were rightly his as king of the universe, gave them up to become an ordinary Jewish baby bound for the cross. Christ “made himself nothing” by taking the form of a servant, being born in the likeness of men(roughly equivalent phrases). While he had every right to stay comfortably where he was, in a position of power, his love drove him to a position of weakness for the sake of sinful mankind (cf. 2 Cor. 8:9,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 he became poor, so that you by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The “emptying” consisted of his becoming human, not of his giving up any part of his true deit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3.

이 단어를 전통적인 루터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때 자신의 신성을 비워 버렸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는 신성을 비워 버린 순전히 한 인간이 되므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도 대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할 수도 없고 우리의 구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대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요 1:14–18). 이와 같은 신약의 공통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본문의 “비웠다”는 동사를 후기 개신교 신학의 한 부류인 케노시스 기독론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성의 존재가 인간과 같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오심, 인간의 가난한 처지에 참여하심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가 신성의 충만함을 견지하면서 어떻게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이 시의 의도가 아닙니다. 이 시는 다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운명에 동참했다는 것, 그것을 위해 그가 스스로를 비우셨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8–89.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심지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앞선 7절의 구체적인 구현이 8절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특권을 버리시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최고의 모욕이었고 경멸할 가치조차 없다는 로마의 공적인 선언에 해당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비하와 수치로 더 가중되었다. 이러한 십자가형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부께 대한 최고의 순종의 표현이다. 

여기 “낮추셨다”의 헬라어는 ‘에타페이노센’입니다. 이것은 앞의 3절에서 언급한 “겸손”이라는 말과 3:21에 나오는 “낮은 몸”과 같이 “타페이노(tapeino-)” 어간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신 것입니다. 이미 3절의 권면을 받은 독자들은 이 절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도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낮추셔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극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Cicero)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한 죽음”이라 칭하고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이고, 그러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90.

9절)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를 그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이 이름이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인 여호와를 가리킬 것이다. 이 여호와라는 표현은 70인역에서 헬라어 ‘큐리오스’로 번역된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지위와 권세(마 28:18, 행 2:33)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 전체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은 그분의 낮아지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귀를 통해서 결국 낮아짐이 높아짐이 되는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높아지기 위해서 나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진심을 다해서 낮아지셨다. 겸손함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 힘을 바로 사랑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금 모든 이름위에 높여주심으로 모든 무릎을 그분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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