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캠폴로(Tony Campolo)와 그의 아들 버트 캠폴로(Bart Campolo)가 함께 쓴 《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원제: Why I Left, Why I Stayed)는 미국 복음주의 교계의 거장인 아버지와, 신앙을 잃고 세속적 인본주의자(Humanist)가 된 아들이 나눈 정직하고 치열한 대화의 기록이다. 주변에 신앙이 없는 혹은 신앙을 잃은 자녀들을 두고 있는 사역자, 목회자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애써서 숨기고 어떤 이들은 자식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책의 부자는 이 문제에 직면하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대화했다. 이 책은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 장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책을 읽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하며 읽었다.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서로에게 귀기울이려는 태도는 마땅히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믿음은 갈라졌지만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인성 안에서 예수님은 시간을 사건들의 직선적 진행으로 파악하셨지만, 신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직선적 시간에 속한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한 현재 속으로 압축하실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을지라도, 시간과 역사 속 모든 개인들과 영원히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153, 토니)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초월적 경험들을 찾거나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다만 그런 경험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을 그 세계관의 내러티브를 입증하고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신비로운 만남이 다른 사람에게는 심리학적 환경적 입력의 복잡한 조합에 의해 촉발되고 조건화된, 과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신경학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210, 바트)
우리 두 사람이 동의하는 바가 또 하나 있다.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설득해 마음을 바꾸게 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태도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고 왜 그렇게 생각하거나 믿는지, 자신의 영적 여정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상처가 된다고 말하는 부모와 자녀들을 여러 번 만나 보았다.(222)
토니는 아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경청하고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자 하며,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설명하고 옹호함으로써 응답하고 있다. 그는 아들 바트가 점차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진 이유는 그가 비록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소외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궁핍한 이웃을 늘 가정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는 고귀한 사역을 했지만, 신앙 공동체와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타당성 구조' 바깥에 머무르게 되면, 해석하기 어려운 인생의 고난과 모순을 만날 때 개인의 신념은 지속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타당성 구조는 개인이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신념 체계가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236)
코로나는 한국에 대규모 역병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뒤늦게 찾아온 성인식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 거대한 환난의 시대를 맞아 비로소 자신의 커진 몸집과 실력을 자각하게 됐다. 봄날 진달래, 개 나리, 벚꽃, 목련이 한꺼번에 터지듯 선진국으로서의 한국 사회가 곳곳에서 만개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 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타내고, BTS가 빌보드를 휩쓸고, 미국, 영 국, 프랑스가 판판이 무너진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에서 선진 한국 사회의 위용이 드러났다. K-반도체, K-조선, K-배터리가 세계 각 국의 제조업이 붕괴된 잿더미 속에서 우뚝 솟았고, 우연인가 싶던 아카데미는 윤여정을 통해 한 번 더 한국을 찾아왔다. G7은 한국 을 초청했다. 유엔경제총회인 운크타드(UNCIAD는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1964년 창설 이래 개도국을 졸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처음이다. 그래서 한국은 선진국이 된 것일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제1부 선진국의 조건
1. 눈을 떠보니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1) 정의하는 사회
한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다.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미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았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언제나 베낄 것이 있었고, 선진국의 앞선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단지 ‘어떻게’뿐이었다. 정답은 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왜’라고 물어본 적 없이 수십년을 ‘어떻게’를 풀며 여기까지 왔다.
녹서(green book) 제도 :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사회 전체의 토론을 요청하는 제안, 독일의 노동 4.0 녹서
첫째, 디지털화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도 거의 모든 인간들이 직 장을 가지게 될 것인가? 둘째, "디지털 플랫폼"과 같은 새로운 사업모델들이 미래의 노 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셋째, 데이터의 축적과 사용이 점점 중요한 이슈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개인 정보 보호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넷째, 미래의 세계에서 인간과 기계가 함께 협업하게 될 경우 인간 노동을 보조하고 역량을 강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계들을 활용하여야 할 것인가? 다섯째, 미래의 직업세계는 보다 탄력적인 방향으로 변화될 것 이다. 그러나 시간적, 공간적인 차원에서의 유연성이 노동자들을 위하여 어떠한 구체적 방식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인가? 여섯째, 더 이상 고전적인 기업의 시스템에는 상응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미래의 최첨단 기업들은 사회보장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어떠한 형태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나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단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55분은 문제를 정의하는것에 사용하고 나머지 5분은 그 문제를 푸는데 쓸 것이다.’(아인슈타인)
(2) 데이터 기반의 사회_숫자가 말을 하게 해야한다.
정부는 숫자로 된 자료들을 구조화된 형태로, 즉 분석 가능한 데이터로 제공해야 한다.
디지털 혁명의 캐치프레이즈 DNA(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3)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_목표룰 바꿔야 한다.
GDP가 선진국의 유일한 평가 지표가 아니다.
(4) 협상하는 사회_딜을 가르쳐야 한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것. 신독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 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문화지체 현상을 파악해야 한다.
2. 신뢰자본을 제대로 쓸 때다.
카페, 서울역의 검표원과 같은 신뢰자본이 연구 개발, 경제사범 재판등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사전 규제는 과감히 풀되, 징벌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과감히 해야 한다.
3. 참된 선진국의 조건, 뉴런의 자유결합
인간의 창발성의 정체는 ‘뉴런의 자유결합’의 정도에 달려 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교류하는 기회를 많이 가질 수록 더 큰 가치가 만들어진다.
(1) 1996년, 한국영화의 느닷없는 황금기
1996년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다. 뉴런이 사방으로 자유결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 아시아 시대는 K팝처럼 온다.
정태춘, 박은옥의 가요 사전심의 철폐(1993년) / BTS, 블랙핑크
(3) 최고의 플랫폼, 민주주의
4. 세익스피어가 필요한 때
(1) 만들어져 가고 있는 현대 우리 글
한글이 개화기를 거치면서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어려운 한자, 번역체를 사용한다.(구제역-입발굽병)
(2) 문법은 사후적인 정리다.
(3) 건너 뛴 근대
아주 짧은 미성숙의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이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제2부. 고장난 한국 사회
1. 물은 땅이 패인 모양을 따라 흐른다_한국 사회의 고장난 인센티브 시스템
(1) 많이 떼먹을수록 상을 준다_화이트칼라 범죄
(2) 사람을 죽이는 편이 싸다_산업안전법
(3) 강남 땅값은 왜 오르기만 할까_온 동네가 역세권
(4) 노동하면 벌을 내린다_임대차보호법
(5) 출산율이 떨어진다고?_성형수술을 하라니까
(6) 공시족들은 왜 이렇게 많은가_부실한 사회 안전판
(7) 선정적인 기사를 내놓아야 한다_포털의 보상, 클릭 수에 따라 돈을 매긴다
물은 땅이 생긴 모양을 따라 흐른다. 물을 붙잡고 설득을 하고, 교회를 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술을 사준들 물이 계곡을 벗어나 산꼭대기로 흐를 리는 없다. 물이 오게 하고 싶으면 원하는 곳으로 물길을 파면 된다. 현 사회의 자원배분의 요체는 그 사회의 보상체계, 즉 인센티브 시스템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달려 있다. 돈도, 인재도, 그사회가 파놓은 보상체계의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잘못된 인센티브 시스템은 사회의 영혼을 망가트린다.
2. AI 시대의 교육_한국 교육의 치명적인 3가지 결핍
(1) 기본이 없다_시속 150km 이상 던지는 투수가 사라진 사회
진짜로 배우고 가르쳐야할 것은 혼자서 공부하는 방법이다. 당장의 승리를 위해 커브나 슬라이더를 너무 일찍 사용하게 해서는 안된다.
(2) 움직임이 없다
한국 청소년의 94%가 운동부족이다. 아이들을 좁은 교실에 가둬놓고 몇시간씩 움직이지 말고 공부하라는 건 뇌를 죽이는 일이다.
(3) 근거가 없다
(4) AI 교육
AI 교육은 컴퓨팅적 사고력(논리적 사고력이나 수학적 사고)을 길러주는 것이다. 프로그래밍 작업의 90% 이상은 협업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경청하기와 논리적으로 말하기는 AI에 필수적인 역량이 된다.
3. 경로의 저주_사람이 길을 만들고 길이 사람을 만든다
경로의존성이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더 이상 절적하지 않게 된 과거의 제도, 법률, 관습, 문화가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1) 왼쪽으로 가는 영국 차
(2) 인장제도문화보존연맹
(3) 천국으로 가는 패스, 면죄부_경로독점
(4) 내 판결문을 탐하지 말라
(5)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6) 바뀐 물길을 찾아 떠나자
4. 3개의 질문_우리는 왜 오래된 맛집이 드물까? 우리 정치는, 혹은 초선은 왜 이리 구리지? 왜 이렇게 구속되는 군수가 많을까?
(1) 노포의 나라 일본
(2) 한국, 오래된 맛집의 비밀
경리단길,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샨(원주민 이탈)
(3) 차지차가법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고 건물주는 임대 연장을 거부하지 못한다. 또한 임대료를 함부로 올리지 못한다.
(4)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정치를 가르치는 독일_보이텐스바흐 협약
강제적인 교화와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고, 학생의 자율적 판단을 중시하며
논쟁적인 주제는 다양한 입장과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고
학생의 상황과 이해관계를 고려해 스스로 시민적 역량을 기르도록 돕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5) 타협하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들자면
(6) 전문직으로서의 정치
(7) 정치의 본질
‘사회의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하는 일’
(8) 한국의 지방자치, 군수의 무덤
단체장과 공무원의 결탁, 좁은 지역에서의 학연과 지연 그리고 실종한 ‘감시의 눈’
(9) 한국 정치, ‘라 마시아’를 운영하자
라 마시아(농장): FC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
5. 코로나 시대의 재정 정책
(1) 5G망을 정부가 구축하자
(2) 재생에너지를 위한 송배전설비를 대폭 확충하자
(3) 전기차 충전소를 확대하자
(4) ‘소부장’을 활성화하자
(5) 밀손이 많이 가는 일들
(6) 서울에 제대로 된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자
(7) 권역별 메가시티를 만들자
(8) 도심을 바꾸자
제3부 AI의 시대
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께
(1) 소프트웨어 생태계
(2) 정의가 필요합니다.
(3) 사람중심의 R&D와 신뢰자본
과학기술은 기초원천기술에 집중하도록 하고 PBS(Project Based System)이 아니라 팀과 연구소의 역량을 보고 연구주제를 상향식(Bottom up)으로 정하게 하자. 믿을 수 있는 연구소를 선정해 긴 호흡으로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R&D의 패러다임을 프로젝트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전환하자.
(4) 청년과학자 육성
(5) 데이터, 축적만큼 활용
(6) 블록체인과 3D 프린터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거나 심하게 변형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을 때 사회는 어떻게 그 기술과 과해를 할 수 있느냐. 법적, 제도적, 사회문화적 해답은 어디에 있고 그 해답을 찾는 사회적 논의 구조는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느냐. 기존의 이해관계가 부를 불가피한 저항은 어떻게 해소해나갈 수 있느냐.’
(7) 문재인 대통령께
2. In the age of AI
(1) 혁명의 시작, Beyond our Body
영국의 산업혁명 : 증기기관은 인간의 몸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아동의 노동력이 착취당했고 스모그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 두번째 혁명, Beyond our Mind
페이스복의 감정조작 실험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퀴즈 게임을 통해 5000만명의 페이스북 사용자 정보를 수집해 선거 캠페인에 이용)
나의 감정은 조금 전에 본 친구의 피드를 따라 출렁이고 유투브는 내가 즐겨 찾는 동영상과 비슷한 내요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3) 무엇을 해야 하나
1차 산업혁명의 피해자가 주로 육체노동자였다면 2차는 육체와 정신을 가리지 않는다. AI기술은 대졸자(고소득 전문가 집단)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4) Social Twin을 만들자
애플의 신용카드 신용한도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동했다.(과거의 편향된 데이터의 영향), 아마존의 채용시스템도 남성 편향이 드러났다.
신용카드 발급, 주택담보 대출등의 주요 금융 결정에 대해서 이유를 제시하도록 법적으로 강제
전 사회적 AI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공영 방송의 역할)
(5) 로봇세와 사회적 안전판
(6) AI 인재와 산업 적용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상호배제와 전체포괄)한 산업지도 필요, 겹치지 않으면서 빠짐없이 나눈 것
3. AI와 알고리듬의 작동원리_믿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향해
(1) 대용랑 분산처리와 숨겨진 패턴
엔비디아의 GPU V100은 5,120개의 CUDA core와 640개의 Tensor core, 합해서 5,760개의 코어를 가지고 있다. V100은 125테라를롭스 연산을 한다. 1테라플롭스는 1초에 1조번 실수를 더하고 곱한다는 뜻이다. V100은 1초에 125조번 실수 계산을 한다.
GPT-3는 1,750억개의 매개변수를 가진다.
(2) AI의 자연독점적 성격
데이터 양이 많을 수록, 매개변수의 양이 많을 수록, 컴퓨팅 파워가 클 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
(3) 그놈은 바둑을 둔 게 아니다
(4) 오염된 데이터, 오염된 결과
(5) 믿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향해(미국의 연방거래위원회의 지침) • 인공지능 모형의 개발에 이용되는 데이터셋 자체의 편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 • 인공지능 모형을 적용한 결과 불공정하거나 차별적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에 대한 모니터링 • 투명성과 개방성의 확보 • 개별 기업이 자신의 인공지능 기술이 공정하다거나 편향이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식의 과장된 언급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주의 • 이용자의 데이터를 이용할 경우 용도에 관한 명확한 고지 • 인종이나 성별 등이 고려된 맞춤형 광고를 제공할 경우 부당한 차별이 초래될 가능성에 유의 •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잘 준비를 할 것
(6) 한국의 인공지능 사례
요기요의 배달기사 등급 시스템, 네이버의 기사 추천 알고리듬
(7) 함께 만들어가야 할 규율
인공지능은 만능이 아니다. 집어넣은 데이터가 오염이 되어 있거나, 알고리듬을 잘못 짜면 편향되고 공정하지 않은 결과를 뱉어낼 수 밖에 없다. AI로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거나, 알고리듬으로 했기 때문에 객관적이라는 말은, 앞서 애플과 아마존의 사례에서 보듯 완전히 틀린 말이다. 전문가가 알고도 그런 말을 한다면 속임수가 된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아직 잘 모른다. 함께 익혀나가고 있다는 것, 잠재력이 큰 만큼이나 숨겨진 위험도 크다는 것을 인지하고 공통의 규범을 함께 신중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4.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_데이터 공개의 제1원칙
(1) 우리에게는 이미 수백 명의 오드리 탕(대만 사이버 대사이자 제1대 디지털 장관)이 있다.
(2)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_기계가 자동으로 처리를 할 수 있다는 뜻
개방형문서형식(ODF : Open Document Format for Office Applications)
OASIS : Organiz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tructured Information Standards)
지금 한국 교회의 많은 사역이 전통 형태(새벽예배, 구역모임, 성경공부 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 곧 본질’은 아닙니다. ➡️ 예배와 말씀, 사랑과 공동체를 유지하되 세대와 문화에 맞는 표현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예: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예배, 삶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성경 묵상 리추얼. (하늘가족)
② 참여와 자율성을 높이는 공동체 문화
MZ 세대는 참여적·자율적 구조를 원합니다. ☑ 수평적 소통 구조 ☑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갖고 스스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 ☑ 질문과 비판을 환대하는 문화 ➡️ 이런 변화는 명령과 권위 중심을 벗어나 신뢰와 참여로 교회 문화를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자유일보)
③ 삶에 연결된 신앙 경험을 제공
형식적 모임만으로는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습니다. ➡️ 신앙이 일상생활과 연결되고, 삶의 문제에 대한 실제적 해답을 제시하는 사역이 필요합니다. 예: 직장·가정·사회적 불안에 대한 신앙적 토론, 디지털 콘텐츠를 통한 성경적 사고 훈련 등. (missionpartners.kr)
④ 디지털을 포함한 시대적 도구의 수용
모바일 시대의 장점 — 소통, 연결, 접근성 — 은 교회가 활용해야 할 도구입니다. ➡️ 디지털 매체를 통해 설교·예배·소그룹을 확장하고, 성경적 콘텐츠를 세대의 언어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스24)
⑤ 세대 간의 다리 놓기
MZ 및 Z세대와 기존 세대 사이에는 문화적 단절이 있습니다. ➡️ 양쪽 세대가 이해와 존중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사역 전략이 필요합니다. 예: 복음의 본질은 지키면서 각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 구조 마련. (kosinnews.com)
📌 3) 정리 — 오늘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
방향성목표
본질 중심의 유연한 사역
전통 형식보다 신앙의 핵심을 시대 맥락에서 재현
참여적 공동체 문화
수평·자율·삶 중심의 공동체
삶으로 연결되는 신앙 전략
일상 문제를 성경적 관점으로 함께 고민
디지털과 소통의 재구성
세대가 공감하는 언어와 플랫폼 활용
세대 간 교감 강화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한 다리 놓기
원리적으로 ‘5無’은 전통의 거부가 아니라 재창조를 강조하는 진단 도구입니다. 한국 교회가 청년과 다음 세대를 품고 건강히 성장하려면,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이해하는 사역으로 사명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스24)
① 사도행전 11:19-20에 기록된 것으로, 안디옥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를 그리스도인들의 주(Kyrios)라고 전파한 것
② 크리스텐덤 시대
③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 기독교가 남반구 대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
▶ 오늘날 변화하는 선교의 세 가지 기둥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② 번역 가능한 복음
③ 세계 기독교 현상
▶ 한때 선교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재복음화가 필요한 선교지로 바뀌고 있다. 피선교지였던 태국 교회는 또 다른 선교의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태국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복음과 선교가 흘러가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글로벌한 종교였다.
▶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서구 유럽 교회는 오히려 급격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반대로 예전의 선교지였던 비서구(다수세계)의 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족속과 나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그 누구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 근대 선교운동은 성공의 지표를 선교지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는가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하나님의 선교' 즉 오이쿠메네 (oikoumene,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으로서의 선교 이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아름다운 신학을 발전시킨 독일 교회가 수백 만 유대인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교회의 멤버가 되는 것이 과연 선교운동의 최종 목적지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비서구 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서구 교회 지도자들 안에서도 동일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교회를 세우고 서구적 기독교 세계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던 근대 선교운동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던 선교가 맞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관심이 교회로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전체(오이쿠메네)가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대로 회복되는 데 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 안타깝게도 이러한 주장은 이후 극단적인 사회참여 논리로 변질 되면서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을 밀어내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선교운동이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으로 분리되는 주요 배경이 된다.
1부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
★ 현장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 선교사는 ‘서구인'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있었다. 비서구인들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동서양 구별 없이 한 팀이 되어 사역하고 있었다.
★ 초기 기독교에서 길을 찾다.
▶ 대표적인 학자 :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21세기 선교 상황은 초기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 ‘위대한 세기' 동안의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 국가 권력의 비호와 지원 아래 진행되어 온 것에 반해, 비서구 지역의 교회들이 주도하게 될 21세기 선교는 정치적 억압, 적대감, 경제적 빈약함 속에서 진행될 것이기 때문
▶ 유대 문화의 율법적 측면, 예를 들면 할례 등은 자신들의 복음 이해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로 느껴졌다. 유대 문화에 물든 기득권 집단의 저항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적 정체성을 벗고 헬라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독교 정체성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 초기 기독교 당시의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을 검토한 뒤 크라이더는 그의 책 “회심의 변질”에서 이 비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이한 삶의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축귀로 대표되는 영적 능력이었다.
▶ “선교사는 굶주린 거지들을 향해, 어디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거지일 뿐이다.” D.T. Niles
★ 어디서 시작되었나?
▶ 뉴비긴은 지난 세기 서구 선교의 근간을 이루던 크리스텐덤(Chistendom) 선교방식, 즉 우월한 서구 문명을 앞세워 기독교를 전파하던 방식을 본질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
▶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1910년)는 국제적인 선교대회의 전형이 되었다. 이전에도 선교대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파와 국가를 초월해 모든 개신교 선교단체 대표들이 모인 선교대회는 에딘버러 대회가 최초였다.
▶ 일련의 결정들은 세계 선교운동이 선교 단체 중심에서 서서히 교회 중심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난 세기 동안의) 서구의 선교운동은 크리스텐덤의 마지막 절정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크리스텐덤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이었다(Walls 2016, 694).
▶ 선교사는 '자신의 안락사'를 준비하는 존재다. 선교사역이 성공해 현지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되고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즉시 떠나야 한다. 선교사는 건축이 끝나면 철거되어야 하는 비계와 같다. 크리스텐덤 방식의 선교는 성공을 거뒀고 그 성공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다.
그런데 현지 교회가 이미 뿌리내리고 성장한 뒤에도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선교지에 머물러 있었고 여전히 현지 교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비서구 지역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제기된 선교 모라토리엄(moratorium, 일시 중지) 요청이었다. by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총무인 존 가투
▶ 선교 모라토리엄의 내용은 서구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이 필요하다고 외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들이 있으니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지역의 복음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현지 교회들을 믿어달라는 것이었다.
- 서구 크리스텐덤의 세계적 확장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선교운동은 실패한 비전이다.
- 선교운동을 통해 세워진 세계화된 기독교(World Christianity)가 바로 성취된 꿈이다. 각 문화에 뿌리내린 교회들은 다양한 기독교 정체성들로 발전했고 이 다양성은 다시 하나의 글로벌한 기독교로 연결되고 있는데 이것을 초기 기독교가 바라던 꿈의 성취로 보았다.
▶ 파송 받은 전임 선교사들보다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아마추어 선교가 활성화될 것이다. 즉, 비영리 NGO 단체가 주된 선교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고 삶의 총체적 변 화를 지향하는 선교가 될 것이다.
▶ 사무엘 에스코바의 관점 :
- 1999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 WEA)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학자) 회의”
- 삼위일치 하나님의 선교/ 번역 가능한 복음 / 지구촌화된 교회/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반응
▶ 마이클 고힌 :
- 21세기 선교학의 새로운 방향성 네 가지
① 서구로부터 비서구로 향하는 일방통행식 선교 패러다임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흐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
②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으로의 변화
③ 확장 패러다임으로부터 소통(communication)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선교는 더 이상 지리적 확장이 아니며 전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토착교회들의 삶과 행위를 통한 복음의 소통으로 이해
④ 영혼 구원을 위한 영적 복음을 넘어 삶 전체의 변화를 위한 총체적 복음을 지향
2부 21세기 선교 패러다임의 기둥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 복음주의 진영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선고 개념을 수용을 결정한 계기는 세계복음주의연맹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회의(1999년)였다.
▶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교적 사건들은 하나님이 선교의 주도자임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당시의 이해 : 이 용어는 복음주의 관점과 대립되는 에큐메니컬 진영이 선호하는 선교학 용어로, 영혼구원을 무시하고 복음을 세상 변혁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 한다.
▶ ‘나“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교‘를 하기 위해 몇 가지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먼저, 반복적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선교를 거들기 위해 부르심 받은 존재임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사역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사역을 위해 자신을 몰아 부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역의 기쁨이 사라지면 즉시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 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 는 복된 과정이다.
▶ 선교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그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전의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핵심적인 틀은 영혼구원과 교회 개척, 그리고 기독교의 전 세계적 확장이었다. 즉 교회 중심적 사고가 선교운동을 지배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교회 중심의 선교 이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확산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관심이 피조 세계, 즉 오이쿠메네(oikumene) 전체의 회복에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에 선교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교회 중심적(church-centric)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란 관점으로 선교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계몽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한 바르트의 영향 : 선교의 토대를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에 둘 것을 촉구했고 특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선교라는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시는 행위를 의미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 보내심의 목적은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라는 보다 큰 틀을 지향한다.
▶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기존의 교회 중심적 선교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당시 선교학계의 요구와도 맞아떨어졌다.
▶ 무엇보다 기독교 세계였던 유럽에서 벌어진 제 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 우려 : 무엇보다 회심과 선교의 영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 위험이 있었고 피조세계 변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개척 중심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못해 생명력 있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은 선교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가 절정이었던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웁살라 대회에 대한 맥가브란의 비판 : ① 대회 기간 중 십자가 구속의 복음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② 선교라는 용어가 수없이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은 불신자의 회심과는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③ 타종교와의 대화, 사회의 개혁은 강조되었으나 이에 반해 복음 선포의 긴급성은 주된 논의의 밖으로 밀려났다. ④전 세계에는 아직도 복음 듣지 못한 20억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향한 복음증거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문 선교 단체는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었다.
▶ 이후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주요 배경이 된다. 한편 '복음을 들을 기회 자체가 없는 20억'에 대한 호소는 후에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 제 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복음주의 진영은 전도와 사회 참여 모두를 선교로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일부 수용했지만, 동시에 ‘전도의 우선성'을 명시함으로써 전통적 복음주의 선교관을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 로잔언약은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을 담아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몸된 교회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 이름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비록 "전도는 교회의 최우선적 사명"이라는 전제가 뒤따르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서는 전도와 함께 사회참여 역시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서 선교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 두 영역 모두의 통합을 주장한 또 다른 학자는 레슬리 뉴비긴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지만 그는 이 운동이 지나치게 세상의 변혁에 치우친 것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존 스토트나 레슬리 뉴비긴은 각기 다른 진영을 이끄는 지도자였지만, 양 극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가 하나로 통합되는 관점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었다.
▶ 복음주의 진영이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주는 사례 :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난 사건(1994 년 4월 6일)
극단주의적인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시작하면서 인종대학살 사태가 발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3개월 만에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태가 발생할 당시 르완다는 전 인구의 95%가 기독교였다. 기독교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르완다는 가장 성공한 선교 현장이었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화되었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잔악한 살육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 이과수 선교회의에서 “하나님의 선교” 결의문 작성에 영향을 미친 두 학자 : 한 사람은 남미 페루 출신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시아 스리랑카 출신인 아지쓰 퍼난도(Ajith Fernando)였다.
▶ 에스코바 : 복음주의 선교학을 지역(유럽, 북미주, 비서구)에 따라 세 개의 흐름으로 요약. ① 영국과 유럽 중심으로 진행된 “후기 제국주의적 선교학” ② 미국 중심의 "관리적 (경영학적) 선교학" ③ 피선교지였던 다수세계 교회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주변부에서 나온 비판적 선교학”
▶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관점은 (서구) 기독교 확산으로서의 선교 개념을 내려놓고, 창조와 타락,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의 관점에서 선교를 조망하도록 도전 / 교회개척보다는 이 교회들이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
②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를 하나님이 펼치시는 위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이며 동시에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임을 일깨운다. 성경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해 준다.
③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파송한 존재이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적' 존재다. 하나님의 선교는 영혼구원과 교회 확장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④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화된 기독교의 타문화 선교운동이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을 수 있도록 돕는다.
★ 번역 가능한 복음
▶ 기독교 역사는 지속적인 복음의 번역 과정이었다. 번역으로 인해 복음의 변질이나 기독교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고 넓어졌다.
▶ 우리는 내가 속한 교회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좀더 넓은 시야 속에서 교회를 보지 못한다. 신앙은 자기가 믿는 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내가 익숙한 교회도 역사상 등장한 수많은 교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월스는 "문화의 포로이자 해방자로서의 복음”이라는 논문에서, 서로 다른 교회들이 하나의 기독교로 묶일 수 있었던 근거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② 동일한 경전 중심의 신앙과 성례 ③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정체성 등이다.
▶ 복음의 번역 가능성을 수용하고 다름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이해한다면 교회의 다양성은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고 세상에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복음의 통로가 될 것이다.
▶ 유대인의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로 계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가능했다. 요한복음 1장에 사용된 ‘로고스’ 이 개념을 유대적 세계관을 가진 신자가 읽는다면 어땠을까? 왜 굳이 이방 철학 개념을 가져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하나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 바른 번역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하나는 의미(meaning)의 ‘보전'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form)의 ‘변경’이다.
▶ 20세기 말 복음의 번역 가능성 이슈를 처음 제기한 학자는 라민 사네(Lamin Sanneh)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어로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들은 코이네 헬라어였다. 당시 교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람어를 모르는 헬라어 사용자였기 때문에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기록한 것이다. 아람어로의 기록을 고집했다면 번역 과정의 내용 왜곡의 위험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독특한 종교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번역 과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 성령이 행하신 최초의 사역이 하나님의 복음을 “난 곳 방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되새겨볼 만하다.
▶ 라민 사네보다 앞서 번역 가능한 복음과 관련한 내용을 주장한 복음주의 학자는 선교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Paul Hiebert)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삼자원칙" 즉 자전(self-propagation), 자립(self-support), 자급(self- support), 자치(self-governance)에 더해 네 번째 자아(the fourth-self)인 신학적 영역에서의 '스스로 서기' 즉 “자신학화”에 대한 문제 제기
▶ 자신학화가 자칫 신앙의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에 관하여 히버트는 비판적 실재론(critical-realism)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상대적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reality)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히버트는 객관적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① 하나님 계시인 성경이며, ②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이며, ③ 역사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즉 전 세계 교회의 존재이다(히버트 1997, 131). 특히 세 번째 영역과 연관해 히버트는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해석학적 공동체의 형성을 제안한다.
▶ 히버트는 각 문화를 초월하는 초문화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가능하다고 보았다.초문화 신학은 다음 세 가지 유익을 준다. ① 초문화 신학은 각 지역의 토착신학의 오류로부터 교회들을 보호해 준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지체로 세워지도록 돕는다. ② 지구상의 모든 교회들이 세계선교를 위해 연합과 동역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③ 각 문화권의 교회들이 세속주의에 오염되거나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그는 사람들의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신뢰했으며, 동일한 성령이 다 른 문화권의 신자들의 삶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 서양 건축자들이 버린 돌들이 서구 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는 건물의 추축인 모퉁이돌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후기 계몽주의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종종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초월적 능력에 의한 치유와 축귀 사역 등은 전 세계 많은 기독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바로 그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본질이라는 자기 확신에는 반대한다.
★ 세계 기독교
▶ 세계 기독교는 '다양성 위에서 그려지는 통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선교학 개념이다.
▶ 그때까지 선교사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 일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주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샬 박사가 보여준 삶과 사역의 모습은 그 반대였다. 철저히 자신을 낮췄고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일이 되게 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의 왕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 21세기 세계 기독교 현상을 초기 기독교 현상으로의 복귀라고 주장한 대표적 학자는 앤드류 월스다. 월스는 초기 기독교에 관한 연구를 통해 기독교는 처음부터 복수의 다양한 정체성으로 발전했다고 이야기한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하나의 몸이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형성된 다양한 기독교적 정체성이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였다.
▶ 역사적으로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란 기독교의 특성이 사라진 것은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로마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다양성이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된 탓이었다.
▶ 존 파라트는 인구학적 무게중심의 전환으로 인해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에서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해석된 기독교 정체성들의 총합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교회가 물러난 빈자리를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함께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 세계기독교의 중심축으로 변화되고 있는 남반구(비서구) 기독교는 신학적, 윤리적으로 더욱 보수주의적 입장을 건지하며, 초자연적 신앙현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며 성경해석에서도 근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려 한다.
▶ 세계 기독교는 자신학화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지역화(토착화) 과정과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정체성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화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3부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실제
★ 하나님의 선교와 현장 사역
▶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전도와 교회개척만이 선교의 본질이라 본 반면, 개혁적인 입장은 피조세계 전반의 변화 즉 부조리한 세상의 변혁까지도 선교의 본질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 에 멈추지 않고 전인격적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회복되는 것을 지향한다.
▶ 기독교 선교의 본질은 서구(또는 한국)의 기독교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세계의 회복과 온 세상의 사람들의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권리를 갖고 있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아 참여하는 자일뿐이다.
▶ 하나님의 선교가 선교 현장에 주는 또 다른 의미는 가시적 성과 중심으로 평가되고 경영학적 전략이 중시되는 실용주의적 선교 현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영혼 구원, 교회 성장 등을 포함하는 보다 큰 그림을 지향한다고 봐야 한다.
▶ 뉴비긴의 설명은, 예수를 모른 채 영원한 멸망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필자를 자유케 해 주었다.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취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떠밀려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뉴비긴은 선교를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그 소식을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기쁨의) 분출이다.
▶ '평화의 사람을 통한 전도법' : 교회가 없는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게 될 때, 전도자는 그 지역에 있는 '평화의 사람‘을 찾아 그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 번역으로서의 선교
▶ 선교지로 떠날 때 선교사는 다 자란 나무를 가져가지 않는다. 한 움큼의 씨앗을 놓고 간다. 씨뿌리기 비유는 복음이 번역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다. 새로운 문화라는 토양에 심긴 복음이라는 씨앗이 새로운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 성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음을 각 나라의 방언들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인도에서 사역한 스탠리 존스 : “우리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는 인도의 길에서 만나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 복음은 서구 문화의 옷을 입은 기독교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 세계 기독교 상황에서의 선교
▶ 세계 기독교는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로컬화(localization)의 두 방향성 이 공존하는 글로컬화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자기비판적 주장 :
- 첫째 겸손과 회개가 필요하다. 겸손은 교회 성장과 세계복음화에 관한 엄청난 양의 책, 프로그램 그리고 전략 등이 활발한 성장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장기적인 생존여부를 염려해야 하는 그런 교회가 있는 세계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골똘히 숙고하게 만든다. •• 전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회에 우리는 기성복 같은 전략들을 뻔뻔스럽게 수출하고 있다. 둘째 진정한 동반자 정신이 필요하다. ··· 이전에 복음을 받았던 국가들이 지금은 자신들이 받았던 10배나 더 많은 선교사들을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보내고 있는 (인도의 경우처럼)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보내는 국가와 받는 국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
▶ 마이클 고힌이 분석한 남반구 기독교의 특성 :
- 남반구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남반구 기독교에는 서구 교회와는 다른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 이들 남반구의 교회들은 또한 신학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신앙과 실천 방면에서 훨씬 더 헌신적이기도 하다.‘ 예배는 그들의 문화가 지닌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러한 특징은 서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외 지역의 교회는 훨씬 더 열정적이고, 예언, 환상, 황홀경 상태에서 말하는 것 그리고 치유를 통해 표현되는 즉각적인 초자연적 사역들에 훨씬 더 중점을 기울이며 관심을 두고 있다. 남반구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이해하 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남반구에 속한 교회들이 21세기 세계 기독교를 위한 리더십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전문 파송단체의 미래
▶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결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파송 선교단체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교지 교회들은 선교단체와의 긴장 관계 가운데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비서구 세계에 개척된 교회들을 배제한 채) 서구 선교단체들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1970년대 모라토리엄"(선교 일시중지) 요청 역시 선교단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충격적인 도전이었다. 선교단체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토착교회들의 반발과 도전의 표현이었고 전문선교단체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 제기였다. 서구 기독교가 쇠퇴하고 세계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비서구 교회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서구로부터 비서구로의 일방적 기독교 확장"이란 패러다임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근대 선교구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또 다른 배경은 비서구 출신 선교사의 수적 우위라는 상황이다.
▶ 전문 파송단체는 계속되어야 한다. 미전도 지역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평신도 아마추어 선교 자원들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지역 언어와 문화에 능통하고 복음에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생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전문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 당시 많은 선교학자와 선교사들이 저널 제목의 Missions(복수)에서 'S'를 떼어내고 저널 이름을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단수)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Missions에서 'S'를 떼어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먼저
missions(복수-'선교사역'으로 번역)는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감당해야 하는 (하나의) 사명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담아낼 수 없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mission(단수)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둘째,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서구 교회들이 선교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에 사용된 용어로 이 표현에는, 서구는 선교 본부, 비서구는 선교지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비서구 지역은 단지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비서구 교회 출신 선교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단수로서의 선교 (mission)가 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저널 이름에서 ‘S'를 제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 미전도 지역 선교에 대한 뉴비긴의 관심은, 선교를 선교적 차원 (missionary dimension)과 선교적 의도(missionary intention), 두 가지로 나눠 설명한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선교적 차원은 지역교회의 존재 또는 삶 자체가 선교라는 의미다. 단수로서의 선교(Mission)를 의미한다. 한편, 선교적 의도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을 향한 의도적 선교를 의미하며 복수로서의 선교사역(Missions)을 의미한다. 교회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교회가 자민족 복음화의 열정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역들은, 외부로부터의 ‘의도적인' 선교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될 수 없다.
나가는 글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21 세기 선교운동이 디디고 선 기초에 해당한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이다. '세계화된 기독교'(세계 기독교 또는 글로컬 기독교)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선교운동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21 세기 선교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다. 한편 ’번역 가능한 복음' 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터 위에 '세계 기독교'라는 건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연결고리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는 초청장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1989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당시에는 하늘같이 여겨지는 선배들로부터 균형잡힌 신앙을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비전’(리차드 미들턴)이라는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후 캠퍼스 사역을 하다가 2013년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에서 3년간 공부했다. 이때 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가 매우 방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성경, 과학 등등의 다양한 주제를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배웠다.
본 강의는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또한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을 성경이라는 안목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으로 한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worldview)은 말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나 여자나,노인이나 젊은이나, 식자나 무식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다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을 배우지 않아도,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알지 못해도, 모두는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일반적인 정의와 다양한 세계관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세계관은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어로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로 정의된다. 모든 이들은 이러한 인식의 틀을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기에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에 비해서는 논리적이지 못하며, 신념에 비해서는 의지적이지 못하고, 신앙에 비해서는 초월적인 면이 부족하지만 철학, 상식, 신념, 신앙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공기와 같은데 이는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평상시에는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활용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가 제시하는 8가지 질문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와 리차드 미들턴(J. Richard Middleton)이 제시하는 4가지 질문을 사용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자신의 책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The universe next door)’을 개정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의 정의를 수정하고 세계관 질문을 확장시키고 있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8) 이 세계관과 일치하는 개인적이고 삶의 방향을 정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언 왈쉬는 그들의 책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을 통해서 4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우리는 누구인가?
3) 무엇이 문제인가?
4)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처럼 위의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창조주(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기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 진화론, 유물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인식의 틀)을 통해서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문화)에 의해서 나의 세계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을 안경으로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사용하는 안경이 빨간색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이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보이고 유신론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신의 흔적으로 가득 차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 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하기에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윤회나 인과업보에 대한 관념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당성 구조안에 이러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에 대해서 안점식은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外現化)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內面化)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은 세계관 형성 또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들음이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세계관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분의 제자로 만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이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이렇게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서 세계관(worldview), 가치체계(value system),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이 모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복음을 전함으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은 문화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문화와 삶 속에 체화되어 있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위치하는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하고 이는 반드시 세계관끼리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20세기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이를 추구하면서 이러한 본질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모만 커지고 외형만을 바꾸는데 그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관 자체가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바로 혼합주의다. 그렇다고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의 변화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바로 전하면 듣는 이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먼저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창조, 타락, 구속, 삼위일체, 구원, 영생, 천국, 부활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즉 그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불신자들과 비교해서 매력적이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가운데 우리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이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구별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불신자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될 것이고 이 “소망에 관한 이유”(벧전 3:15)를 묻는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2.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Factfulness)
모두들 컴퓨터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윈도우 시스템이다. 1985년 Windows 1이 발매되었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지금은 Windows 10을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점점 좋아지고 소프트웨어가 복잡해지면서 더 다양한 기능들이 요구되기에 적기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 우리들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를 직접 테스트해보자.(테스트 결과가 마음에 드는가??)
우리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는데는 여러 가지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데이터가 현실에 적실하냐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배운 지식의 내용이 1900년대 것이라거나 1990년대의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들은 지식을 업데이트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앞선 세계관에 대한 정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이란 바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인도에서 40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한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이 인도보다 더 선교가 필요한 나라가 되어버린 상황에 통탄했다. 뉴비긴의 눈에 비친 영국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은 사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교회는 다니고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성경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지는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은 바라볼(look at) 책이 아니라 통해서 볼(look through) 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단순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성경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할 때 어떤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인가?
기독교 세계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창조-타락-구속”과 “구조와 방향”이다.
1) 창조(Creation)
창조가 중요한 이유는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바르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처음을 열면서 시작되는 창조의 선언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면서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바로 여기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창조이기에 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1) 말씀에 의한 창조, 2)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3) 목적이 있는 창조, 4)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시는 창조, 5) 보시기에 좋은 완전한 창조의 특징을 갖는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처럼 바른 창조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앞서 제시한 세계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첫걸음이 된다.
2) 타락(Fall)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범죄, 불순종 행위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에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죄는 결혼이라는 창조 제도를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혼이나 혼외정사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깨뜨려서 가정의 파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규례로서의 국가는 오늘날 전체주의, 민족주의, 독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땅의 소망인 하나님의 교회는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는 일반 기업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임으로 도리어 세상의 근심이 되어버렸고,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렸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인간의 타락,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이라면,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창조와 타락의 관계에서 볼 때 구조는 잘못된 방향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다. 이러한 타락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기대하게 한다.
3) 구속(Redemption)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은 원래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로 화해(reconciliation), 새롭게 함(renewal), 구원(salvation), 재창조(re-creation), 거듭남(regeneration, born again) 등이 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 위의 영어 단어에서 접속사로 사용되는 “re”를 볼 때 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계시록의 구속, 완성의 이야기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또한 선한 창조의 원래의 모습(original design)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 왜곡된 우리의 모습을 어떤 모습, 어떤 방향으로 수정해야할 지를 바로 선한 창조가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간 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고 타락은 모든 피조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시켰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 1:28, 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의 본문을 우리는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땅과 모든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령하셨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이름을 명명하고 땅의 소산을 누리면서 문화 명령에 순종했다. 하지만 선악과를 통한 타락의 영향으로 인간과 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 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영역인데 이것이 타락으로 인해서 왜곡되었고, 우리의 역할은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문화의 흐름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화, 청년 문화에 영향을 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알아보자.
4.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사람들은 근대(modern)의 출현을 서구의 정신사에서 ‘제2의 계몽’이라고 한다. '제1의 계몽'이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에게서 구현된 신화(Mythos)에서 철학(Logos)에로의 변화였다면, '제2의 계몽'은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와 타율에서 비롯된 숙면으로부터 이성이 깨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종교개혁을 지나 16-17세기의 신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를 거쳐, 17-18세기의 신고전주의, 19세기 낭만주의,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이성은 수많은 일을 수행했다.
근대는 이성을 절대시했고 이성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근대의 이상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핵폭탄 한방으로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끝을 알리면서 철학사조에서는 실존주의와 해체주의가 등장했고 이후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after)라는 의미와 모더니즘 너머(beyond)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성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전광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리요타르(Lyotard)와 데리다(Derrida)등이 주장한 해체주의(deconstruction)이다. 여기서 해체란 파괴의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 형이상학과 같은 텍스트를 철저히 비판하고 상대화함으로써 텍스트 안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구조들과 상호작용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와 탈중심을 지향한다.
둘째, 모더니즘의 상징인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에 반대하여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내지 탈합리주의(Irrationalism)적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욕망, 충동, 감성을 중요시 여긴다.
셋째, 일의성(一義性)보다는 다의성(多義性), 동질성보다는 이질성, 단수성보다는 복수성에 가치를 둔다. 이를 통해 "경계를 넘어선 시야, 가능한 변경,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가능하게 되었다.
넷째, 탈인간중심주의 내지 주체의 상실을 나타낸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자연의 힘과 우주의 질서 속에 함몰되어 간다.
다섯째,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표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정치 활동을 비롯한 모든 담론을 욕망을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체주의, 구조주의, 보편주의 대신에 해체주의와 탈중심주의를, 로고스와 논리적 절대주의 대신에 파토스와 탈합리주의를, 의미의 일의성과 절대주의 대신에 개별성과 다양성, 상대성을, 인간중심주의 대신에 탈인간중심주의를, 그리고 정치적, 역사적 관심 대신에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근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싸우고 극복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싸움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함과 동시에 내가 싸우고 있는 전투의 현장의 특성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절대유일의 진리를 부인하며, 또 초월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보편적인 가치와 전통, 역사와 인생의 의미마저도 부인한다. 또 이 시대의 인간은 상대주의와 다의성을 이야기하고, 개방성을 말하며, 지성 못지않게 감성적, 욕망적, 의지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종교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위기와 기회가 상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기에 기독교를 뿌리째 흔드는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계몽주의 이후 근대를 지나면서 지나치게 합리주의, 과학만능주의, 이성주의를 강조하여 편협해진 기독교의 복음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포스트모던의 특성이 이 시대 문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에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일상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5. 우리의 일상
1) 일상이란 무엇인가?
칼 라너(Karl Rahner)는 일상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평범한 매일의 생활이라고 이해하면서 짧은 책 「일상」에서 일상에서의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라너는 일상은 주일과 대비되는 주중의 시간, 즉 매일 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시간들로 그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드러낸다. 라너는 일하는 것, 가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라너는 이 일곱 가지 일상생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일상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일상을 살고자 한다. 그에게 일상은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며 그의 거룩성과 은혜를 경험하는 바로 그 장소이다. 때로는 고단한 일상사는 우리를 낙담하거나 절망에 이르게 할 때도 있으나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힘으로 영원한 삶이라는 진정한 축제에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종교성이 강해질수록 종교, 교회생활에 매몰된 신앙을 요구받지만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삶은 결코 성전에 제한되거나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호 6:6; 사 58:6-7)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일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적 소명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일상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홍정환의 「호당 선생, 일상을 말하다」에서는 다양한 일상의 주제들을 다룬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설거지, 잠, 똥, 휴대전화, 신용카드, 연애, 드라마, 성, 운전, 죽음, 식사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들은 성속 이원론의 영향으로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자동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한다.
"예언자 스가랴는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슥 14:20)고 말했단다.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를 타듯 옛 사람들이 말을 탔다고 생각해 보거라. 말방울이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 차가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자동차 경적 역할이었겠지. 본디 제사장의 의복에만 새겨지는 문구인 '여호와께 성결'이 말방울에 기록된다는 것은 가장 거룩하기 힘든 운전석이 거룩한 성소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단다."(운전, pp.202-3)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꿈꾸지만, 영웅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축적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일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중의 하나는 일, 직업일 것이다.
2)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오래전부터 일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학자마다 조금씩 달랐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일을 ‘정신과 관련한 고상하고 가치 있는 활동을 방해하는 저주’라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이 신성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자본론》을 쓴 카를 마르크스는 일을 ‘자아실현을 위한 행동’으로 정의했다.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혹은 즐거움과 자아성취의 밑거름이라는 생각까지 인식의 폭이 매우 넓다.
일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자.
벽돌공 세 사람이 돌을 쌓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첫 번째 벽돌공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몰라요?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벽돌을 기계적으로 쌓아 올리며 첫 번째 벽돌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던 행인은 두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돈을 벌고 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서둘러 벽돌을 쌓고 있었다. 행인은 더 묻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다 세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세 번째 벽돌공은 콧노래를 부르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신나세요?"
"당연히 신나죠. 내가 새로 만든 성당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세 번째 벽돌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인은 완성될 건물을 상상해보았다.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성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을 떠나는 행인은 생각했다.
첫 번째 벽돌공은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벽돌공은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번 돈만큼 행복할 것이다.
세 번째 벽돌공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생각하며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힌트를 주자면 세 번째 벽돌공이 쌓은 담이 가장 튼튼했고 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하게 되고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만족감, 즐거움이 다른 것이다. 일에 대한 관점이 일의 시작이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따라 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게 된다. 직업에 관계없이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상 생활이 활기차고 행복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위대한 청소부
"만일 어떤 사람이 거리의 청소부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베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창작하듯 거리를 쓸어야 한다.
그는 하늘의 천군천사와 땅의 백성들이
여기 '자신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위대한 청소부가 살았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깨끗하게 거리를 쓸어야 한다!"
3) 성경이 말하는 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처음 맡기신 일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일은 아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형상의 발현으로서, 그의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는 일(work)이었다. 우리는 일을 노동과 연결시키면서 하기 싫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타락 이전의 일은 기쁘고 즐거운 행위였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의 은사와 재능의 발현으로서의 즐거운 일은 땀 흘리고 수고해야만 하는 노역(drudgery)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것을 믿으며 이를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양한 삶의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일상의 영성을 회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회복해야할 것은 바로 이 타락한 일을 구속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부패함 가운데 빠져버린 우리의 모든 일상을 구속하는 일이며 바른 성경적인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나가면서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 일이나 연애, 오락이나 정치와 문화등의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내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시해주는 방향이 우리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들이 처하는 각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올바른 신앙의 결단을 위해서는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을 분별해내고,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개별화, 분자화되어지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도리어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역은 권위적 인물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개인 스스로가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역 대상인 청년들의 현실적인 필요(Felt need)와 진정한 필요(Real need)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하고 영적인 필요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전도의 문을 닫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안전감을 느끼며 자신의 일상을 깊이 나눌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앞서 호당 선생의 말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오덕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먹고, 싸고, 자는 것과 같은 평범한 삶, 곧 일상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란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 유튜브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 이전에도 유튜브는 많은 사람 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해진 콘텐츠 가 있다면 단연 유튜브이다. 유튜브는 기독교인들의 일상에서도 익숙한 콘텐츠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유튜브로 CCM을 듣고 설교를 듣는다. 이른바 유튜브 에반젤리즘(Youtube Evangetsm), 유빈 젤리즘(Your vangelsm)의 시대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홀로 부흥회를 할 수 있다. 혼자 유튜브로 성경말씀 낭독을 듣고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는다.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부르는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유튜브로 바로 검색하고 성경공부도 한다. 유명한 성지순례 장소도 단번에 갈 수 있다. 과거에는 특정 장소를 직접 가야만 가능했던 일들이 이제는 핸드폰 하나면 언제든 방문이 가능하다. 검색 한 번으로 성경의 배경이 되는 땅과 당시 문화를 생생히 알 수 있다. 예배는 이제 유튜브 하나로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유반젤리즘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반젤리즘 시대에도 효과적인 목회가 가능할까? 유튜브로 대체할 수 없는 교회의 기능과 사역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유반젤리즘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들이다. 이제 유반젤리즘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익숙한 현상들과 그것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더불어 이런 변화가 목회 현장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지 모색해본다.
2. 멘탈 케어 커뮤니티(Mental Care Community)
급격한 기술발전과 글로벌화, AI의 발달, 고도화된 경제시스템 등은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루며 유토피아를 꿈꾸게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경쟁과 사회적 불평등, 노동시장의 급변으로 인한 일자리의 불안정,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과 부조리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역기능적 결과를 초래한다. 정신건강의 문제는 그 대표적 증상이다. 특히 한국 사회 속에서 스트레스와 우울, 불안 같은 정신적 문제는 이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 무한 경쟁하며 살아가는 삶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담을 만든다. 일과 학업, 가족과 사회적 관계에서의 성공과 성취, 자아실현 등을 향한 추구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있으며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정신건강에 있어서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신자들에게는 정신건강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다. 건강한 정신심리적 상태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건강한 신앙생활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이 장에서는 개신교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교회의 사역을 일곱 가지로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는 교인들이 삶의 스트레스에 압도되지 않도록 성숙한 신앙적인 삶의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교인들이 정신건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교회는 정신건강 지원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넷째, 교회는 특정 세대와 특정 사안별로 정신 건강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정신건강에 관련된 편견, 낙인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교회는 교 회 내에 정신건강 관련 특정 이슈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작은 공동체를 구성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여건이 된다면 사회를 향한 활동에까지 확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 교회는 자살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3. 포텐셜 레이어티(Potential Laity)
지역 교회 부교역자를 구할 수 없어 평신도를 활용한 사역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교회학교 부교역자나 교육전도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 빈 자리를 평신도로 채우는 것이 최근 중소형 교회를 대상으로 활발하다. 경험과 은사를 가진 성도를 선발해 일정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거쳐 그 역할을 감당케 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교역자를 대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교회 부교역자 사역 기피 현상과 신학교 지원자 감소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신학교 지원자가 감소하는 데다가 지원자들도 시니어 세대 졸업생이어서 일선 교회 교육전도사로 청빙을 받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렇게 부교역자 구인난이 심각해지자 일선 교회들은 영성과 전문성을 가진 평신도를 교역자화해 사역에 투입하고 있다. 평신도 사역자화는 부교역자를 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비롯됐지만 평신도는 본질적으로 교회와 사회에 파송된 사역자요 선교사라는 목회자들의 인식 변화도 그 이유로 꼽힌다. 평신도 사역은 이미 고 옥한흠 목사의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를 비롯해 폴 스티븐스의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IVP) 등의 저서가 소개되면서 교회 안의 평신도 사역을 비롯해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소명이 강조된 바 있다. 하지만 일부 교회를 제외 하고 평신도 사역은 요원했다. 여전히 평신도는 목회적 돌봄을 받는 수동적 위치에 머문 채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속에 살았다. 평신도는 주체적으로 교회 사역에 참여하지 못하고 목회자 위주의 교회 사역이 주를 이뤘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침체와 위기는 평신도를 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코로나19는 그 전환점이었다.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가정예배와 온라인 예배, 소그룹 활동이 빛을 발하면서다. 이를 통해 목회자들이 평신도에 대한 중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교회 사역 전반에서 평신도들을 활용하고 있다. 교육전도사 역할을 비롯해 심방, 새신자 양육, 성경공부, 기도회 등 그 영역은 다양하다. 봇물 터진 평신도 사역의 큰 흐름은 어디로 흘러갈 것 인가, '한국 교회 트렌드 2025 조사’에서는 그 양상을 목회자와 평신도를 통해 직접 확인했다. 그 결과 이제 포텐셜 레이어티(Potenital Laity)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게 됐다.
4. 오소프락시(Orthopraxy)
오늘날 양극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부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심지어 대형 교회와 소형 교회의 양극화까지. 여기에 기독교인의 신앙 양극화라는 새로운 과제가 떠오르고 있다. 신앙의 양극화는 다른 양극화와는 결이 약간 다르다. 대부분 양극화는 골치 아픈 부정적, 극단적 현상인데 반해 신앙 양극화는 부정적 차원을 내포하는 동시에, 기회와 방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탈교회화와 가나안 성도 현상은 수년 전부터 한국 교회가 마주한 과제였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에 양극화의 부정적 축이 분명하다. 그런데 신앙의 양극화는 하향평준화가 아니다. 다른 반대 축에서는 신앙의 깊이와 진정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신앙 양극화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마치 먹구름 속의 한 줄기 빛과 같다. 기독교 교세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영적 필요에 대한 갈망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 교회 트렌드 2025 조사에서는 신앙 양극화의 긍정 축인 신양의 깊이를 추구하는 흐름을 포착했다. 전체적인 신앙생활이나 교회 활동에서 신앙의 깊이와 수준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이 있다. 조사에서는 신앙이 깊어진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참여 활동이 소그룹과 지역 사회 봉사로 나타났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신앙 양극화의 초점은 '오소프락시’라는 신앙의 정통 실천으로 향하고 있다.
5. 패밀리 크리스천(Family Christian)
한국 교회의 가족 종교화 현상이 뚜렷하다. 다른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배우자 및 자녀와의 종교 일치율이 더 높다. 개신교인이 배우자와 종교가 일치하는 비율은 71.6%로 가톨릭(59.3%), 불교(58.3%)보다 높고 자녀와의 일치도 67.2%에 달한다. 이는 가톨릭(57.6%), 불교(35.1%)보다 높은 수치다. 20년 전 일치율이 90% 안팎이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다른 종교에 비하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가구주 배우자를 기준으로 보면 가족 간 종교 일치율은 더 높다. 대다수 가정의 가구주가 남성이라고 볼 때 어머니가 개신교일 경우 가족 전체가 개신교일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자녀 기준으로 보면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청소년이나 청년 상당수는 개신교인 가정에 속해 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진다. 기독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모태신앙이 52.9%였고, 초등학교 입학 전 교회에 나온 비율은 64.6%로 3분의 2에 가까웠다. 기독 청소년들의 경우 가족 종교화 현상은 더욱 심하다. 모태신앙이 60.4%로 나타났고, 초등학교 입학 전 교회를 나온 비율은 79.9%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것은 개신교 역사가 길어지면서 개신 교인 가족 안에서 신앙 계승이 이루어지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신앙이 일치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교회에 나가게 된 사람들,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개신교의 가족 종교화는 자녀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으나, 어려서부터 본인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로 갖게 된 신앙이 성인이 되어서는 오히려 약화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다. 이와 함께 교회에서는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는 교인들을 더 배려하고 살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기도 한다. 가족 중교회는 개신교의 확장성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족들끼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교인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은 전도를 통해 새로 유입되는 전입 신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비개신교인 가족 중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비율은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한국 개신교는 그들만의 종교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6. 스피리추얼 Z세대(Spiritual Gen Z)
Z세대는 1995년 이후 출생한 소위 20대 청년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로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세대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나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Z세대는 대한민국 인구 전체의 13.8%를 차지하며 전 세계 소비자의 40%를 구성한다. 이들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경제, 사회,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하다. Z세대는 공정하지 않은 사회와 미래의 경제적 풍요에 대해 비관적이며 ‘나' 중심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들은 디지털을 통해 사회문제와 이슈를 접하고 착한 소비와 독특한 경험에 관심이 많다. 취미 활동, 일, 진로 고민, 자아성찰 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한편 크리스천 Z세대는 신앙생활을 중시하며 디지털 매체를 통해 신앙적인 자료에 접근하고 교회와 사회적 가치관을 조화시키려 한다. 스피리추얼 Z세대인 것이다. 그들은 인생에서 행복한 가정, 건강, 신앙생활, 경제적 부를 중요하게 여긴다. 주요 고민으로 진로와 연애, 결혼이 있으며, 고민 해결 방법으로는 혼자 해결, 기도, 친구와 상의 순으로 나타났다. 신앙적 방법보다 개인적 방법으로 고민을 해결하려 한다. 교회 내 이성 교제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고 결혼에 긍정적이며 자녀 계획도 적극적이 다. 처음 교회에 나온 시기는 대부분 초등학교 이전이며 신앙생활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교회 활동에서 교제와 소그룹 활동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한다. 목회자 및 어른에게 실망한 경험이 많고 위선적인 모습에 가장 실망한다. Z세대는 오프라인 예배를 선호하며 교회는 이에 따라 Z세대 의견 수용, 수평적 의사소통, 전통적 예배 형식의 변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Z세대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이들의 특성과 관심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경청과 공감이 중요하다. 둘째,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소통해야 한다. 셋째, 멘토링과 관계 구축을 통해 개인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넷째, 투명성과 진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해야 한다.
7. 싱글 프렌들리 처치(Single Friendly Church)
싱글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공부하고 일하고 교회활동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새 30대 중반, 40대이 들어서게 됐다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삶의 고민이나 어려움에 대해 터놓고 대화할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목회자들도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느낀다. 싱글들이 목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교회에는 싱글들을 결혼 대기자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싱글에 대한 편견도 강한 편이다. 이 상황에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싱글로 있는 사람들은 현재 삶에 어떻게 대처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의 어려움을 깊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관심 밖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싱글라이프는 현재 결혼 상태에 있지 않은 싱글에만 해당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 그리고 결혼을 했더라도 이혼하거나 사별하게 되면 다시 싱글 상태로 돌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싱글라이프는 삶의 주기 가운데 상대적으로 길거나 짧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의 삶의 여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싱글라이프는 나와 상관없는 삶이 아니라 현재 결혼 상태에 있더라도, 언젠가 내가 다시 맞이할 삶임을 기억해야 한 다. 이에 따라 싱글들과 함께 삶을 공유하고 이들을 배려하는 교회 분위기와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싱글 인구의 증가 주세를 볼 때 결혼하지 않고 평생 싱글로 살거나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이 중가하는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이제 싱글들의 삶을 존중하고 이들을 섬기는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싱글들의 삶과 교회생활, 싱글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이들을 어떻게 섬기면 좋을지, 더 나아가 싱글친화적인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그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8. 시니어 미니스트리(Senior Ministry)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빠른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2025년 초고령 사회진입 후에는 더 빠른 고령화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고령화율이 가장 높은 일본을 30년 내에 추월해 OECD 최고령 국가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초고령사회와 같이 고령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시대는 고령화 문제를 개인이나 가족 차원에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고령화 문제를 활동적 노화(active aging), 즉 적극적 노화의 개념으로 전적인 방향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해결되기 힘들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결론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제 사회는 고령화 시대에 최적화된 대안 패러다임으로 '고령친화성(age friendliness)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는 '고령친화도시와 지역 사회(age-frendy cities and communities)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고령친화대학 국제네트워크(age friendly university global network)가 연령 통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대학으로 그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해 심각한 고령화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는 지속가능한 성장 및 고령화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위해 본격적으로 '고령친화성’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선교적 교회 모델로서 고령친화교회(age friendly church)의 토대를 갖추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향후 10년 내에 고령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될 활동적 노화를 추구하는 엑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강점과 노인의 취약성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고령친화교회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른다면 초고령사회는 한국 교회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고령화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령친화교회는 초고령사회에 활동적 노화를 위해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
9. 솔트리스 처치(Saltless Church)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이러한 말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를 포함한 성도와 교회를 둘러싸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불미스러운 일들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세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맛을 잃은(Saltless) 교회와 같다. 한국 교회 일련의 세속화 현상은 심화하고 있으며 더 강화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세속화란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세속화는 제도적 측면 외에도 개인적 측면이 존재한다. 즉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이 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준점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성을 지녀야 할 대안 공동체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 채, 세상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세속화란 성도와 교회가 세상의 영향을 받아 그 본연의 비전을 상실해가는 현상인 동시에 세상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직면한 세속화 환경(다원주의, 물질주의, 이성주의 등의 환경)이 강해질 수록 개신교 역시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개신교 신앙 고유의 정체성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구별이 점점 사라지는 ‘교회 세속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세속화’란 신앙인의 믿음이 약화되고 선한 삶의 열매가 사라지는 것, 교회가 세상에 목소리를 발신하지만 세상이 듣지 않으며,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고 세상과 같아지는 것 등을 의미한다.
10. 미션 비욘드 트래디션(Mission Beyond Tradition)
선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최근 30년간 국제 사회 전반에 일어난 변화의 정도와 범위는 그 유래를 찾기 어렵다. 선교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화, 도시화, 인구이동, 기술발전 그리고 세계 기독교 시대 등의 다양한 영향,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변화의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세계 선교 상황도 급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환경은 한국 교회 선교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뜨거운 열정의 한국 교회였지만 지금은 적절한 변화와 선택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오늘의 환경을 이해하고, 마주한 상황을 적절하게 판단하고 반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대적 필요와 요청 가운데 부상하는 선교의 영역들을 준비하고 수행해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 선교가 과거의 빛나는 유산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를 기꺼이 감내할 용기와 함께 미래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미션 비욘드 트래디션(Mission Beyond Tradition)이 시급하다. 이번 '한국 교회 트렌드 2025 조사’에서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의 향후 전망에 대해 낙관보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또 젊은 선교사일수록 한국 선교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어두운 미래 선교 전망을 다시 희망으로 바꾸어 갈 수 있을까?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현장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가 속한 시대 환경을 살펴보고 지역 교회가 참여하고 준비할 사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윌리엄 윌리몬은 설교자들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분으로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감독이자 듀크대학 신학부 교수였다.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여러 저명한 기독교 저자들의 책에 그의 글이나 설교가 인용된 내용들을 보면서 원저를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죠이북스에서 윌리엄 윌리몬의 책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 책을 받아들었다. 이 책의 부제는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이다. 저자는 미국의 반이민법이 강화되던 시기에 이를 반대하는 이들을 지지하면서 이 책을 썼다. 현대의 정치인들은 계층간의 갈등을 조장하거나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표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자가 된 경험들이 부족하다. 나 자신도 나의 성별이나 인종, 종교, 출신 배경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나의 어떤 행동이나 언행이 타자를 혐오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강조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글로벌화 되어가면서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노동자, 국제 결혼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과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나의 삶 가까이 타자들이 성큼 다가왔고 때로 나도 누군가의 타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주 '젠더 폭력에 맞서는 주변인 접근 전략'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나는 성인 남성으로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의를 통해서 약간의 이해가 넓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던, 아니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의 '타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타자의 자리에 서보지 않았기에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했고 도리어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미국 교회의 상황과 한국 교회의 상황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국 교회가 미국 교회를 시차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교회도 의도적으로 '타자'에 대한 감수성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추천한다.
책 속의 구절들
하나님은 우리가 타자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형제 자매로 보내신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의 됨됨이를 시험하실 뿐 아니라, 제자도의 모험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 사역을 통해, 우리는 자기 힘에 의존할 때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13)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타자'이자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주위의 '타자'를 사랑할 때, 이는 실로 기독교적이고 반문화적이며 거의 기적과도 같은 사랑이 된다.(19)
우리는 환대를 명령받았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런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24)
참된 화복은 힘있는 주류층이 자신들의 긍정적인 자아상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 특권을 조금 나눠 준다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36)
타자와의 대화는 늘 위험이 따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며, 우리가 결코 원치 않던 말들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42)
타자 혐오증을 뜻하는 '제노포비아'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우리 뇌의 변연계는 위험 앞에서 본능적으로 강렬한 반응을 유발하는 일련의 '비상 신호'들을 통해 활성화된다.... 어떤 위협이 닥쳐올 때 우리 몸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경계 내부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강한 확신을 품고 어떤 판단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 놓인다. 이 때 우리는 외부의 위협 앞에서 더방어적이고 덜 사려 깊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깊은 불안감에 빠져 일종의 비상 체제에 돌입하며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51-52)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올바른 일을 행할 때 생겨난다.(70)
건강한 교회는 쉽게 두려움에 빠지는 우리 자신의 성향을 적절히 경계하게끔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릇된 일들을 그릇된 방식으로 두려워하던 데서 벗어나 합당한 일들에 관해 올바른 두려움을 품게 된다.(72)
우리의 참된 문제는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시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데 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한다.(75)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 타자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로운 동시에 죄악 되며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존재로 여기는 것 뿐이다.(81)
우리가 타자에게 다가가서 두 팔을 벌리는 것은 그를 우리의 벗이 될만한 존재로 재정의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그분의 벗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83)
'우리는 당신을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안에 거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누군가를 포옹할 때 우리는 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렸다가 꼭 끌어안은 뒤에 다시 놓아주게 된다.(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옹) 타자를 포옹하며 환대한 뒤 다시금 그의 인격을 인정하고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포옹은 타자를 자신의 정체성 속으로 흡수하거나 그의 타자 됨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그들 자신의 길로 행하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87)
결혼은 '타자를 영접하기 위한 평생의 훈련', 내 옆에 함께 거하는 '타자'를 평생에 걸쳐 날마다 포용하고 환대할 기회를 억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적과의 동침'이 아니다. 아내는 물론 나의 일부가 아니지만 나보다도 나를 잘 안다. 아내는 내 삶의 영역을 세심하게 넓혀주며 내 안에서 최선의 모습들을 이끌어 낸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인이 한몸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경이로운 일이다.(94)
타자를 대면하며 포용하라는 결단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신이다. 사랑은 실제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며 이는 그저 올바른 태도를 품거나 유익한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듯이 '막연한 꿈속의 사랑'보다는 행동하는 사랑이 훨씬 중요하다.(105)
우리로 타자를 행해 나아가게 이끄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쓰시는 주된 방편중 하나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던 이기적인 소비자의 태도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너그럽게 베푸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때 우리는 별 요구사항이 없는 신들을 만들어내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섬기게 만들려는 인간적인 성향(우상숭배)에서 해방된다.(111)
우리는 그를 '타자'로 여길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타자'는 미국의 원수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원수가 아니시다. 설령 그 '타자'가 우리와 하나님을 미워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114)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로 타자를 향한 환대에 동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교회의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교회의 경계를 느슨하게 유지하는 일은 우리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역사적인 소명을 제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사도행전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을 기독교 선교의 핵심으로 여긴다.(123)
미로슬라브 볼프는 '의심의 해석학'에서 '환대의 해석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1)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그에게서 무언가 장점이 될만한 일들을 찾아보려 한다. 2) 열린 태도로 타인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평가한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함을 알기 때문이다.(134)
요즈음 청년들은 우리 교회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낡고 진부한 사고방식에 빠져있으며 인종차별적일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폭력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이 지난밤에 행한 일을 차갑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곳이라고 여기지요. 교회에 나오라고 원면할 때 이는 그들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우리에게 내어놓으라는 뜻이 됩니다. 이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환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타자'가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타자'에 대한 적개심이 애국심으로 칭송받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낯선 이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 되었다.(136)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줄 지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타자'. 우리가 몹시 두려워하며 꺼리지만 그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 내줄 그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154)
이 낯선 세상에서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버린(혹은 '타자'에 대한 김은 두려움에 갇힌) 우리에게도 여전히 참된 소망이 남아 있다. 그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와 과감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만큼 강하다는 데서 온다.
요한1서 4:18–21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내가 보기에 인간의 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심리 문제는 바로 여러 가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이다.’(스캇 펙)
나르시시스트 : 이들은 연인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늘 서열을 정하려 들고, 관계에서 자신이 강자가 되어 지배력과 결정권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 ‘러브 바밍(love bombing)’을 시도한다. 이는 마치 폭탄을 추하하듯이 강렬하게 그리고 과도하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러브바밍 시기가 지나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기(devalue)를 시도한다. 이어서 상대를 무시하고 버려두기(discard)를 시작한다.
에코이스트(echoest) : 나르시시스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으로 이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거짓말을 싫어하며 특별 대우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로 보통 사람들보다 매우 신중하고 생각이 깊다.(41)
우리 주변에 다양한 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절대 사과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거나 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거짓말도 너무나 뻔뻔하게 한다. 한 두번 그런 상황에서 분쟁이나 마찰이 불편해서 넘어가다보면 결국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의 부모일수도 있고, 배우자나 직장 상사, 연인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을때는 참고 먼저 사과하기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모라면 물리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야하고 연인이나 친구라면 분명하게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