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 기독교와 선교(임태순,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
아래 책 정리는 죠이선교회 정희원 간사가 한 것을 제가 추가로 수정한 것입니다.
정리 : 정희원 간사
들어가는 글
▶ 교회의 확장 역사에서 세 번의 큰 전환
① 사도행전 11:19-20에 기록된 것으로, 안디옥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를 그리스도인들의 주(Kyrios)라고 전파한 것
② 크리스텐덤 시대
③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 기독교가 남반구 대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
▶ 오늘날 변화하는 선교의 세 가지 기둥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② 번역 가능한 복음
③ 세계 기독교 현상
▶ 한때 선교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재복음화가 필요한 선교지로 바뀌고 있다. 피선교지였던 태국 교회는 또 다른 선교의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태국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복음과 선교가 흘러가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글로벌한 종교였다.
▶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서구 유럽 교회는 오히려 급격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반대로 예전의 선교지였던 비서구(다수세계)의 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족속과 나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그 누구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 근대 선교운동은 성공의 지표를 선교지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는가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하나님의 선교' 즉 오이쿠메네 (oikoumene,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으로서의 선교 이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아름다운 신학을 발전시킨 독일 교회가 수백 만 유대인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교회의 멤버가 되는 것이 과연 선교운동의 최종 목적지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비서구 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서구 교회 지도자들 안에서도 동일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교회를 세우고 서구적 기독교 세계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던 근대 선교운동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던 선교가 맞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관심이 교회로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전체(오이쿠메네)가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대로 회복되는 데 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 안타깝게도 이러한 주장은 이후 극단적인 사회참여 논리로 변질 되면서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을 밀어내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선교운동이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으로 분리되는 주요 배경이 된다.
1부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
★ 현장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 선교사는 ‘서구인'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있었다. 비서구인들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동서양 구별 없이 한 팀이 되어 사역하고 있었다.
★ 초기 기독교에서 길을 찾다.
▶ 대표적인 학자 :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21세기 선교 상황은 초기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 ‘위대한 세기' 동안의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 국가 권력의 비호와 지원 아래 진행되어 온 것에 반해, 비서구 지역의 교회들이 주도하게 될 21세기 선교는 정치적 억압, 적대감, 경제적 빈약함 속에서 진행될 것이기 때문
▶ 유대 문화의 율법적 측면, 예를 들면 할례 등은 자신들의 복음 이해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로 느껴졌다. 유대 문화에 물든 기득권 집단의 저항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적 정체성을 벗고 헬라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독교 정체성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 초기 기독교 당시의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을 검토한 뒤 크라이더는 그의 책 “회심의 변질”에서 이 비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이한 삶의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축귀로 대표되는 영적 능력이었다.
▶ “선교사는 굶주린 거지들을 향해, 어디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거지일 뿐이다.” D.T. Niles
★ 어디서 시작되었나?
▶ 뉴비긴은 지난 세기 서구 선교의 근간을 이루던 크리스텐덤(Chistendom) 선교방식, 즉 우월한 서구 문명을 앞세워 기독교를 전파하던 방식을 본질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
▶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1910년)는 국제적인 선교대회의 전형이 되었다. 이전에도 선교대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파와 국가를 초월해 모든 개신교 선교단체 대표들이 모인 선교대회는 에딘버러 대회가 최초였다.
▶ 일련의 결정들은 세계 선교운동이 선교 단체 중심에서 서서히 교회 중심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난 세기 동안의) 서구의 선교운동은 크리스텐덤의 마지막 절정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크리스텐덤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이었다(Walls 2016, 694).
▶ 선교사는 '자신의 안락사'를 준비하는 존재다. 선교사역이 성공해 현지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되고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즉시 떠나야 한다. 선교사는 건축이 끝나면 철거되어야 하는 비계와 같다. 크리스텐덤 방식의 선교는 성공을 거뒀고 그 성공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다.
그런데 현지 교회가 이미 뿌리내리고 성장한 뒤에도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선교지에 머물러 있었고 여전히 현지 교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비서구 지역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제기된 선교 모라토리엄(moratorium, 일시 중지) 요청이었다. by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총무인 존 가투
▶ 선교 모라토리엄의 내용은 서구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이 필요하다고 외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들이 있으니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지역의 복음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현지 교회들을 믿어달라는 것이었다.
▶ 근대 기독교 선교운동의 의미를 두 개의 단어로 요약했다.
"실패한 비전과 성취된 꿈" (Failed Vision & Accomplished Dream)이다 (Robert 2009, 67-69).
- 서구 크리스텐덤의 세계적 확장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선교운동은 실패한 비전이다.
- 선교운동을 통해 세워진 세계화된 기독교(World Christianity)가 바로 성취된 꿈이다. 각 문화에 뿌리내린 교회들은 다양한 기독교 정체성들로 발전했고 이 다양성은 다시 하나의 글로벌한 기독교로 연결되고 있는데 이것을 초기 기독교가 바라던 꿈의 성취로 보았다.
▶ 파송 받은 전임 선교사들보다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아마추어 선교가 활성화될 것이다. 즉, 비영리 NGO 단체가 주된 선교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고 삶의 총체적 변 화를 지향하는 선교가 될 것이다.
▶ 사무엘 에스코바의 관점 :
- 1999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 WEA)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학자) 회의”
- 삼위일치 하나님의 선교/ 번역 가능한 복음 / 지구촌화된 교회/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반응
▶ 마이클 고힌 :
- 21세기 선교학의 새로운 방향성 네 가지
① 서구로부터 비서구로 향하는 일방통행식 선교 패러다임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흐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
②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으로의 변화
③ 확장 패러다임으로부터 소통(communication)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선교는 더 이상 지리적 확장이 아니며 전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토착교회들의 삶과 행위를 통한 복음의 소통으로 이해
④ 영혼 구원을 위한 영적 복음을 넘어 삶 전체의 변화를 위한 총체적 복음을 지향
2부 21세기 선교 패러다임의 기둥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 복음주의 진영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선고 개념을 수용을 결정한 계기는 세계복음주의연맹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회의(1999년)였다.
▶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교적 사건들은 하나님이 선교의 주도자임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당시의 이해 : 이 용어는 복음주의 관점과 대립되는 에큐메니컬 진영이 선호하는 선교학 용어로, 영혼구원을 무시하고 복음을 세상 변혁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 한다.
▶ ‘나“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교‘를 하기 위해 몇 가지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먼저, 반복적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선교를 거들기 위해 부르심 받은 존재임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사역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사역을 위해 자신을 몰아 부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역의 기쁨이 사라지면 즉시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 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 는 복된 과정이다.
▶ 선교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그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전의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핵심적인 틀은 영혼구원과 교회 개척, 그리고 기독교의 전 세계적 확장이었다. 즉 교회 중심적 사고가 선교운동을 지배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교회 중심의 선교 이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확산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관심이 피조 세계, 즉 오이쿠메네(oikumene) 전체의 회복에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에 선교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교회 중심적(church-centric)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란 관점으로 선교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계몽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한 바르트의 영향 : 선교의 토대를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에 둘 것을 촉구했고 특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선교라는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시는 행위를 의미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 보내심의 목적은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라는 보다 큰 틀을 지향한다.
▶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기존의 교회 중심적 선교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당시 선교학계의 요구와도 맞아떨어졌다.
▶ 무엇보다 기독교 세계였던 유럽에서 벌어진 제 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 우려 : 무엇보다 회심과 선교의 영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 위험이 있었고 피조세계 변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개척 중심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못해 생명력 있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은 선교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가 절정이었던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웁살라 대회에 대한 맥가브란의 비판 : ① 대회 기간 중 십자가 구속의 복음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② 선교라는 용어가 수없이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은 불신자의 회심과는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③ 타종교와의 대화, 사회의 개혁은 강조되었으나 이에 반해 복음 선포의 긴급성은 주된 논의의 밖으로 밀려났다. ④ 전 세계에는 아직도 복음 듣지 못한 20억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향한 복음증거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문 선교 단체는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었다.
▶ 이후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주요 배경이 된다. 한편 '복음을 들을 기회 자체가 없는 20억'에 대한 호소는 후에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 제 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복음주의 진영은 전도와 사회 참여 모두를 선교로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일부 수용했지만, 동시에 ‘전도의 우선성'을 명시함으로써 전통적 복음주의 선교관을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 로잔언약은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을 담아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몸된 교회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 이름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비록 "전도는 교회의 최우선적 사명"이라는 전제가 뒤따르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서는 전도와 함께 사회참여 역시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서 선교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 두 영역 모두의 통합을 주장한 또 다른 학자는 레슬리 뉴비긴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지만 그는 이 운동이 지나치게 세상의 변혁에 치우친 것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존 스토트나 레슬리 뉴비긴은 각기 다른 진영을 이끄는 지도자였지만, 양 극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가 하나로 통합되는 관점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었다.
▶ 복음주의 진영이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주는 사례 :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난 사건(1994 년 4월 6일)
극단주의적인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시작하면서 인종대학살 사태가 발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3개월 만에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태가 발생할 당시 르완다는 전 인구의 95%가 기독교였다. 기독교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르완다는 가장 성공한 선교 현장이었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화되었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잔악한 살육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 이과수 선교회의에서 “하나님의 선교” 결의문 작성에 영향을 미친 두 학자 : 한 사람은 남미 페루 출신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시아 스리랑카 출신인 아지쓰 퍼난도(Ajith Fernando)였다.
▶ 에스코바 : 복음주의 선교학을 지역(유럽, 북미주, 비서구)에 따라 세 개의 흐름으로 요약. ① 영국과 유럽 중심으로 진행된 “후기 제국주의적 선교학” ② 미국 중심의 "관리적 (경영학적) 선교학" ③ 피선교지였던 다수세계 교회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주변부에서 나온 비판적 선교학”
▶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관점은 (서구) 기독교 확산으로서의 선교 개념을 내려놓고, 창조와 타락,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의 관점에서 선교를 조망하도록 도전 / 교회개척보다는 이 교회들이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
②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를 하나님이 펼치시는 위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이며 동시에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임을 일깨운다. 성경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해 준다.
③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파송한 존재이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적' 존재다. 하나님의 선교는 영혼구원과 교회 확장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④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화된 기독교의 타문화 선교운동이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을 수 있도록 돕는다.
★ 번역 가능한 복음
▶ 기독교 역사는 지속적인 복음의 번역 과정이었다. 번역으로 인해 복음의 변질이나 기독교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고 넓어졌다.
▶ 우리는 내가 속한 교회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좀더 넓은 시야 속에서 교회를 보지 못한다. 신앙은 자기가 믿는 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내가 익숙한 교회도 역사상 등장한 수많은 교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월스는 "문화의 포로이자 해방자로서의 복음”이라는 논문에서, 서로 다른 교회들이 하나의 기독교로 묶일 수 있었던 근거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② 동일한 경전 중심의 신앙과 성례 ③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정체성 등이다.
▶ 복음의 번역 가능성을 수용하고 다름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이해한다면 교회의 다양성은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고 세상에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복음의 통로가 될 것이다.
▶ 유대인의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로 계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가능했다. 요한복음 1장에 사용된 ‘로고스’ 이 개념을 유대적 세계관을 가진 신자가 읽는다면 어땠을까? 왜 굳이 이방 철학 개념을 가져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하나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 바른 번역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하나는 의미(meaning)의 ‘보전'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form)의 ‘변경’이다.
▶ 20세기 말 복음의 번역 가능성 이슈를 처음 제기한 학자는 라민 사네(Lamin Sanneh)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어로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들은 코이네 헬라어였다. 당시 교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람어를 모르는 헬라어 사용자였기 때문에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기록한 것이다. 아람어로의 기록을 고집했다면 번역 과정의 내용 왜곡의 위험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독특한 종교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번역 과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 성령이 행하신 최초의 사역이 하나님의 복음을 “난 곳 방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되새겨볼 만하다.
▶ 라민 사네보다 앞서 번역 가능한 복음과 관련한 내용을 주장한 복음주의 학자는 선교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Paul Hiebert)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삼자원칙" 즉 자전(self-propagation), 자립(self-support), 자급(self- support), 자치(self-governance)에 더해 네 번째 자아(the fourth-self)인 신학적 영역에서의 '스스로 서기' 즉 “자신학화”에 대한 문제 제기
▶ 자신학화가 자칫 신앙의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에 관하여 히버트는 비판적 실재론(critical-realism)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상대적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reality)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히버트는 객관적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① 하나님 계시인 성경이며, ②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이며, ③ 역사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즉 전 세계 교회의 존재이다(히버트 1997, 131). 특히 세 번째 영역과 연관해 히버트는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해석학적 공동체의 형성을 제안한다.
▶ 히버트는 각 문화를 초월하는 초문화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초문화 신학은 다음 세 가지 유익을 준다. ① 초문화 신학은 각 지역의 토착신학의 오류로부터 교회들을 보호해 준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지체로 세워지도록 돕는다. ② 지구상의 모든 교회들이 세계선교를 위해 연합과 동역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③ 각 문화권의 교회들이 세속주의에 오염되거나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그는 사람들의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신뢰했으며, 동일한 성령이 다 른 문화권의 신자들의 삶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 서양 건축자들이 버린 돌들이 서구 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는 건물의 추축인 모퉁이돌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후기 계몽주의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종종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초월적 능력에 의한 치유와 축귀 사역 등은 전 세계 많은 기독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바로 그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본질이라는 자기 확신에는 반대한다.
★ 세계 기독교
▶ 세계 기독교는 '다양성 위에서 그려지는 통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선교학 개념이다.
▶ 그때까지 선교사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 일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주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샬 박사가 보여준 삶과 사역의 모습은 그 반대였다. 철저히 자신을 낮췄고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일이 되게 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의 왕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 21세기 세계 기독교 현상을 초기 기독교 현상으로의 복귀라고 주장한 대표적 학자는 앤드류 월스다. 월스는 초기 기독교에 관한 연구를 통해 기독교는 처음부터 복수의 다양한 정체성으로 발전했다고 이야기한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하나의 몸이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형성된 다양한 기독교적 정체성이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였다.
▶ 역사적으로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란 기독교의 특성이 사라진 것은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로마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다양성이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된 탓이었다.
▶ 존 파라트는 인구학적 무게중심의 전환으로 인해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에서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해석된 기독교 정체성들의 총합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교회가 물러난 빈자리를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함께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 세계기독교의 중심축으로 변화되고 있는 남반구(비서구) 기독교는 신학적, 윤리적으로 더욱 보수주의적 입장을 건지하며, 초자연적 신앙현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며 성경해석에서도 근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려 한다.
▶ 세계 기독교는 자신학화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지역화(토착화) 과정과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정체성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화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3부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실제
★ 하나님의 선교와 현장 사역
▶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전도와 교회개척만이 선교의 본질이라 본 반면, 개혁적인 입장은 피조세계 전반의 변화 즉 부조리한 세상의 변혁까지도 선교의 본질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 에 멈추지 않고 전인격적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회복되는 것을 지향한다.
▶ 기독교 선교의 본질은 서구(또는 한국)의 기독교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세계의 회복과 온 세상의 사람들의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권리를 갖고 있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아 참여하는 자일뿐이다.
▶ 하나님의 선교가 선교 현장에 주는 또 다른 의미는 가시적 성과 중심으로 평가되고 경영학적 전략이 중시되는 실용주의적 선교 현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영혼 구원, 교회 성장 등을 포함하는 보다 큰 그림을 지향한다고 봐야 한다.
▶ 뉴비긴의 설명은, 예수를 모른 채 영원한 멸망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필자를 자유케 해 주었다.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취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떠밀려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뉴비긴은 선교를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그 소식을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기쁨의) 분출이다.
▶ '평화의 사람을 통한 전도법' : 교회가 없는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게 될 때, 전도자는 그 지역에 있는 '평화의 사람‘을 찾아 그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 번역으로서의 선교
▶ 선교지로 떠날 때 선교사는 다 자란 나무를 가져가지 않는다. 한 움큼의 씨앗을 놓고 간다. 씨뿌리기 비유는 복음이 번역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다. 새로운 문화라는 토양에 심긴 복음이라는 씨앗이 새로운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 성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음을 각 나라의 방언들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인도에서 사역한 스탠리 존스 : “우리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는 인도의 길에서 만나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 복음은 서구 문화의 옷을 입은 기독교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 세계 기독교 상황에서의 선교
▶ 세계 기독교는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로컬화(localization)의 두 방향성 이 공존하는 글로컬화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자기비판적 주장 :
- 첫째 겸손과 회개가 필요하다. 겸손은 교회 성장과 세계복음화에 관한 엄청난 양의 책, 프로그램 그리고 전략 등이 활발한 성장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장기적인 생존여부를 염려해야 하는 그런 교회가 있는 세계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골똘히 숙고하게 만든다. •• 전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회에 우리는 기성복 같은 전략들을 뻔뻔스럽게 수출하고 있다. 둘째 진정한 동반자 정신이 필요하다. ··· 이전에 복음을 받았던 국가들이 지금은 자신들이 받았던 10배나 더 많은 선교사들을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보내고 있는 (인도의 경우처럼)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보내는 국가와 받는 국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
▶ 마이클 고힌이 분석한 남반구 기독교의 특성 :
- 남반구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남반구 기독교에는 서구 교회와는 다른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 이들 남반구의 교회들은 또한 신학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신앙과 실천 방면에서 훨씬 더 헌신적이기도 하다.‘ 예배는 그들의 문화가 지닌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러한 특징은 서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외 지역의 교회는 훨씬 더 열정적이고, 예언, 환상, 황홀경 상태에서 말하는 것 그리고 치유를 통해 표현되는 즉각적인 초자연적 사역들에 훨씬 더 중점을 기울이며 관심을 두고 있다. 남반구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이해하 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남반구에 속한 교회들이 21세기 세계 기독교를 위한 리더십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전문 파송단체의 미래
▶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결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파송 선교단체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교지 교회들은 선교단체와의 긴장 관계 가운데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비서구 세계에 개척된 교회들을 배제한 채) 서구 선교단체들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1970년대 모라토리엄"(선교 일시중지) 요청 역시 선교단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충격적인 도전이었다. 선교단체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토착교회들의 반발과 도전의 표현이었고 전문선교단체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 제기였다. 서구 기독교가 쇠퇴하고 세계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비서구 교회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서구로부터 비서구로의 일방적 기독교 확장"이란 패러다임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근대 선교구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또 다른 배경은 비서구 출신 선교사의 수적 우위라는 상황이다.
▶ 전문 파송단체는 계속되어야 한다. 미전도 지역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평신도 아마추어 선교 자원들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지역 언어와 문화에 능통하고 복음에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생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전문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 당시 많은 선교학자와 선교사들이 저널 제목의 Missions(복수)에서 'S'를 떼어내고 저널 이름을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단수)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Missions에서 'S'를 떼어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먼저
missions(복수-'선교사역'으로 번역)는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감당해야 하는 (하나의) 사명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담아낼 수 없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mission(단수)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둘째,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서구 교회들이 선교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에 사용된 용어로 이 표현에는, 서구는 선교 본부, 비서구는 선교지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비서구 지역은 단지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비서구 교회 출신 선교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단수로서의 선교 (mission)가 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저널 이름에서 ‘S'를 제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 미전도 지역 선교에 대한 뉴비긴의 관심은, 선교를 선교적 차원 (missionary dimension)과 선교적 의도(missionary intention), 두 가지로 나눠 설명한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선교적 차원은 지역교회의 존재 또는 삶 자체가 선교라는 의미다. 단수로서의 선교(Mission)를 의미한다. 한편, 선교적 의도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을 향한 의도적 선교를 의미하며 복수로서의 선교사역(Missions)을 의미한다. 교회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교회가 자민족 복음화의 열정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역들은, 외부로부터의 ‘의도적인' 선교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될 수 없다.
나가는 글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21 세기 선교운동이 디디고 선 기초에 해당한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이다. '세계화된 기독교'(세계 기독교 또는 글로컬 기독교)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선교운동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21 세기 선교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다. 한편 ’번역 가능한 복음' 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터 위에 '세계 기독교'라는 건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연결고리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는 초청장이다.
함께 생각해볼 내용들
- 베빙턴이 정의한 복음주의의 4가지 특징
- 회심주의(conversionism) :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삶이 바뀌어야 한다.
- 행동주의(activism) : 복음을 실현하려고 노력
- 성경주의(biblicism) : 성경의 권위를 강조
- 십자가 중심주의(cruicentrism) :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강조
그렇다면 학생 선교단체혹은 파라처치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변화를 추동하겠는가?
학생 선교단체들은 출구전략, 혹은 안락사를 준비하고 있는가?
선교지의 질문과 지역 교회(한국)의 상황과의 연관성과 차별성은?
현재 사역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과정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로 가득한 세상(르완다의 학생 장면, 95% 기독교화된 나라 하지만...) 교회는 탁월한 제자를 키워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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