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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ayer of Faith

13 Is anyone among you suffering? Let him pray. Is anyone cheerful? Let him vsing praise. 14 Is anyone among you sick? Let him call for the elders of the church, and let them pray over him, wanointing him with oil in the name of the Lord. 15 And the prayer of faith will save the one who is sick, and the Lord will raise him up. And xif he has committed sins, he will be forgiven. 16 Therefore, yconfess your sins to one another and pray for one another, zthat you may be healed. aThe prayer of a righteous person has great power as it is working.2 17 Elijah was a man bwith a nature like ours, and che prayed fervently that it might not rain, and for dthree years and six months it did not rain on the earth. 18 eThen he prayed again, and heaven gave rain, and the earth bore its fruit.

19 My brothers, fif anyone among you wanders from the truth and someone gbrings him back, 20 let him know that whoever brings back a sinner from his wandering hwill save his soul from death and iwill cover a multitude of sins.

v [Col. 3:16]

w Mark 6:13; [Mark 16:18]

x Isa. 33:24; Matt. 9:2; Mark 2:5; Luke 5:20

y Acts 19:18

z Heb. 12:13

a Gen. 18:23–32; 20:17; Num. 11:2; 1 Kgs. 13:6; 17:22; 2 Kgs. 4:33; 19:15–20; 20:2–5; Job 42:8; Prov. 15:29

2 Or The effective prayer of a righteous person has great power

b Acts 14:15

c 1 Kgs. 17:1; 18:1

d Luke 4:25

e 1 Kgs. 18:42, 45

f [Matt. 18:15; Gal. 6:1]

g Ps. 51:13; Dan. 12:3; Mal. 2:6; [Luke 1:16]

h See Rom. 11:14

i 1 Pet. 4:8; [Neh. 4:5; Ps. 32:1; 85:2; Prov. 10: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Jas 5:13–20.

 

3장 8절을 보면 혀를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임을 말한다. 그런데 혀를 길들이는 것을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5장 16절) 

 

13-14절) 고난 당하는 자의 태도 : 기도하라. 

즐거워하는 자의 태도 : 찬송하라

병든자의 태도 : 교회의 장로들에게 청하라. 교회의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야고보는 지속적으로 시련을 당하는 자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라고 말할 뿐 아니라 고난 당하는 자와 즐거워하는 자에게 대해서 세상과는 다른 방식의 삶의 태도를 보일 것을 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불평, 불만과 아픔을 토로하는 것이 우선인데 반하여 성경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즐거운 일을 당하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자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성경은 찬송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삶의 자세이다. 

분몬의 병든(아스테네오)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약한(롬 14:1)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육체적인 질병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장로들은 교회안의 지도자들로 목사와 장로, 감독들을 말하는데 지혜와 성숙한 이들이다. 본문에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할 것을 청하고 있는데 이는 의학적인 효력이 있거나 성례적인 행동(카톨릭에서 임종할 때 종부 성사와 같은)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병든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치유의 능력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기름부음의 행위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상징적인 구별을 의미했다.

 

(출 28:41, 개정)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눅 4:18, 개정)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행 4:27, 개정)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행 10:38, 개정)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고후 1:21, 개정)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히 1:9, 개정)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결국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명했는데 이는 병을 고치는 것이 기름이 아니라 주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 Though “sick” (Gk. astheneō) can also mean “to be weak” (even spiritually weak, as in Rom. 14:1), when used (as it is here) without any qualifiers, it usually refers to physical sickness. Elders were pastors and overseers (cf. Acts 20:17, 28; Titus 1:5, 7; 1 Pet. 5:1–2), known for wisdom and maturity, who functioned as leaders in the churches. This provides evidence for a plurality of elders in all the churches to which James was writing, for he simply assumes a sick person could call for “the elders of the church.” Some think that anointing … with oil was medicinal or sacramental (as in Roman Catholic extreme unction at death), but it is best seen as a symbol representing the healing power of the Holy Spirit to come upon the sick person (cf. the use of “anointing” for symbolic consecration to God’s use and service, both in the OT [Ex. 28:41] and in the NT [Luke 4:18; Acts 4:27; 10:38; 2 Cor. 1:21; Heb. 1:9]). In the name of the Lord means it is God, not the oil, that heals.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9.

 

15-16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한다. 이 기도를 통해서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함을 허락하신다. 

 

본문에서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대상은 누구인가? 병자가 아니라 청함을 받은 교회의 장로들이다 .그러니까 병자의 믿음이 아닌 기도하는 장로들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병자가 믿음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는 것 외에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다. 아픈 이들(육적으로 혹은 영적으로)은 홀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이때에 그들이 할 일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주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본문에서 일으키다라는 의미는 병든 사람을 육체적으로 고치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경험하는 것 혹은 구원의 은혜 안에서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적, 육적 구원, 치유를 선포하셨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장로를 청하거나 스스로 충분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면 모든 질병이 고쳐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치유가 일어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모든 질병과 건강을 포함한 상황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병자의 믿음 부족이 그 병자가 고침받지 못할 이유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병자들이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혼자 힘으로 이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요청할 수 있는 통로들을 알리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서 중보하는 것이고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서로 기도할 것에 대한 요청은 단지 병자와 장로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의인의 간구에 대한 예시를 이후 엘리야로 들고 있다. 

 

  • the prayer of faith. Not the faith of the sick person but the faith of those praying. In this instance, James mentions no requirement for the sick person to exercise faith, only that he call for the elders. Christians who are ill often find personal prayer difficult. Will save perhaps carries a double meaning here: (1) the sick person will be physically healed (one meaning of Gk. sōzō), and/or (2) the sick person may also experience spiritual salvation (another meaning of Gk. sōzō), or growth in the blessings of salvation (sins … forgiven). As seen throughout the Gospels, Jesus healed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and the same double connotation may be present here as well. James is not teaching that all illnesses will be healed if people would simply call on the elders, or try to make themselves have enough faith, or pray with enough conviction. Healing, when it does come, is always a gift from God, who is sovereign over all circumstances, including sickness and health. It does not follow, therefore, that lack of faith on the part of the sick person is the reason that the sick person may not be healed. (On the gifts of faith and of healing, see note on 1 Cor. 12:9.) Some interpreters suggest that James is referring to the promise of the resurrection rather than physical healing. If, in the phrase “if he has committed sins,” implies that not all sickness is connected to specific sins, though James seems to expect that some sickness is (cf. 1 Cor. 11:30).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9.

 

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엘리야가 기도하자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 

본문의 사건은 왕상 17장의 내용으로 아합왕과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뭄이 임하게 된 것이다. 이 3년 반이라는 시간은 심판에 대한 매우 상징적인 시간으로 7년의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단 7:25; 12:7; 계 11:2; 12:6, 14; 13:5) 

(단 7:25, 개정)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단 12:7, 개정)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계 11:2, 개정)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2:6, 개정)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 12:14, 개정)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계 13:5, 개정)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9-20절) 야고보는 자신의 마지막 결론을 일반적인 서신서의 인사말이 아니라 공동체안에서 윤리적인 죄를 빠진자들을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맺고 있다. 

공동체 안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바로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고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고 말한다.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들은 그 구원과 용서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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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But above all, my brothers, udo not swear, either by heaven or by earth or by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be no, so that you may not fall under condemnation.

u Matt. 5:3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Jas 5:12.

 

 

12절) 야고보는 다시금 ‘내 형제들아’라고 부른 후에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 것을 말한다. 본문의 내용이 앞선 7-11절과 연결되는 것인지 야고보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는 것인지는(But above all이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결론의 공식이다.)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혀의 죄와 그 결과 9절에서 말하는 원망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맹세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하셨다. 마 5:33-37과 마 23:16-22절을 보면 맹세하지 말 것을, 예 혹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그 말만으로도 충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스라엘은 맹세가 허용되었다. 그리고 맹세한 사람은 반드시 그 맹세를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서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맹세를 이행하지 않을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것이 되기에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레 19:12은 거짓맹세 하지 말것을 명한다. 

(레 19:12, 개정)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마 5:33-37, 개정)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 23:16-22, 개정)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자신이 말한 것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에 대해서 야고보는 경계한다. 성경은 맹세 자체를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 맹세를 금지하고 경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말한 것을 이루어낼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맹세할 당시 우리의 마음은 정말로 그러했지만 그것을 이루어낼 힘과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바뀌면 너무나도 쉽게 자신이 말하고 맹세한 것은 변개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 The point at issue in this verse is the taking of an oath, that is, invoking the name of God in order to buttress the truthfulness of what one has said. Here James is fully in line with the teaching of the Old Testament that false swearing and the giving of oaths is forbidden. Leviticus 19:12, for instance, says, “Do not swear falsely by my name and so profane the name of your God. I am the Lord” (cf. also Jer. 5:2; Hos. 4:2; Mal. 3:5).

  • But the issue is not entirely without wrinkle. In Genesis 22:16 God swears by his own name (cf. Heb. 6:13–18). In the passage from Leviticus just cited, “false swearing” is prohibited, leaving “truthful swearing” an open question. In the Ten Commandments the taking of an oath is not strictly prohibited, but it is limited to those matters that one can accomplish (see Ex. 20:7). Here too the issue is to avoid invoking the name of God in an oath that is false. God, after all, is the one whose words always accomplish his purpose (Isa. 55:11). Human beings, on the other hand, utter words that “will not stand up” (8:10) and that “fall to the ground” (1 Sam. 3:19).

  • To invoke God’s name falsely, then, is to involve God in a falsehood. The problem is, of course, that sometimes human beings utter falsehoods knowingly, but at other times we are unable to accomplish what we intend. The prohibition recognizes this and serves to limit and to exclude these unintentional infelicities. Certainly the Old Testament reveals a developing problem with conscious falsehood (see Jer. 5:2; 7:9–10).

  •  David P. Nystrom, Jame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301.

 

마태복음의 기록이 야고보의 진술보다 더욱 자세한 것을 볼 수 있다. 

 

야고보가 맹세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설명하는 이유는 1) 입다와 같이 어리석은 맹세를 통해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2)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의 맹세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3) 모든 말과 진술에서 높은 진리의 수준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4) 우리가 의도한 바를 성취할 수 없을 경우라도 우연히 하나님께서 이 거짓에 개입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이다. 

  • Why does James offer this counsel? (1) to avoid the situation of Jephthah, who swore an oath that bound him to disastrous consequences (Judg. 11:30–39); (2) to ensure that Christians are not influenced by pagan oath-swearing formulae; (3) to maintain a high standard of truth in all speech; and (4) to avoid involving God in a falsehood if, by chance, what we intend we are unable to accomplish. The consequences for each of these is to fall under the judgment of condemnation, and this James wants us to avoid.

  •  David P. Nystrom, Jame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303.

 

 

  • 예수와 야고보가 정말 모든 맹세를 금했는지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재세례파 전통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법정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맹세(서약)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또한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든 야고보든 공적인 맹세, 즉 정부 당국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맹세까지도 금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에 의해 언급된 맹세는 일종의 자발적인(voluntary) 맹세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도 모든 맹세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진실(truthfulness)을 회피하고자 하는 맹세만을 금지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마태복음 23:16–22에서 예수가 다루는 특정한 맥락이나,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맹세를 계속 사용하는 경우(롬 1:9; 고후 1:23; 11:11; 갈 1:20; 빌 1:8; 살전 2:5, 10)를 보면,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야고보가 마태복음 5장처럼 논쟁의 맥락이 아닌 경우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반복한 이유는 맹세의 금지가 단지 거짓 가르침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바울의 ‘증인’ 공식도 실제로 맹세의 범주에 들어가는지의 여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도 야고보도 모든 자발적인 맹세를 금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61–26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맹세의 무분별한 사용은 도리어 자신의 맹세의 무게를 약화시킨다. 본문에서 맹세는 우리가 말한 것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하게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라든지 ‘엄창”같은 말로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것이든, 더 중요한 것이 나타났을때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지 않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무엇을 통해서든지 맹세하지 말고 또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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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not grumble against one another, brothers, nso that you may not be judged; behold, othe Judge is standing pat the door. 10 As an example of suffering and patience, brothers, take qthe prophets who spoke in the name of the Lord. 11 Behold, we consider those blessed who remained steadfast. You have heard of rthe steadfastness of Job, and you have seen sthe purpose of the Lord, how tthe Lord is compassionate and merciful.

12 But above all, my brothers, udo not swear, either by heaven or by earth or by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be no, so that you may not fall under condemnation.

n Matt. 7:1

o [1 Pet. 4:5; Rev. 22:12]

p Matt. 24:33; Mark 13:29; [1 Cor. 4:5]

q Matt. 5:12; 23:34; Acts 7:52; Heb. 11:32–38

r Job 1:21, 22; 2:10

s Job 42:10, 12

t See Ex. 34:6

u Matt. 5:3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5:9–12.

 

9절) 서로 원망하지말라.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나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행동을 선택한다. 그중에 하나는 다른이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 19로 세월이 어수선하다. 말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킬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것 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원망할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마스크 사태, 중국 입국 금지 조치)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고, 신천지라는 집단에 분노를 쏟아 붓게 만든다. 신천지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라면 누구든 신천지와 같이 집단 감염의 전파자가 되어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옳지 않다. 며칠전 강경화 장관의 한 외신과의 인터뷰 내용속에 보면 한국 정부가 이 코로나를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원칙으로 "투명성(transparency)와 개방성(openness), 대중에 대한 완전한 정보 공개”를 꼽았다. 나는 이러한 원칙, 태도가 고난을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서로 원망하는 태도는 심판의 이유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심판이던 우리의 현실의 삶에서의 심판이든 말이다. 

 

  •  인내는 에베소서 4:2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고, 데살로니가전서 5:14–15에 나오는 것처럼 보복과 대조되는 것이다. 원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테나조(stenazō)는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만, 성경 헬라어에서 여기에서만 서로(against one another)라는 목적어를 가진다. 그 말은 성도가 자신의 고난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투덜대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성도가 자신의 고난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NEB 참조).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두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53.

 

10절)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투명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대중들이 듣기 싫은 하지만 들어야만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숨기지 않고 선포했기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선지자들 핍박했다. 이러한 때에 필요한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며 오래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은 받는 자세인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11절) 인내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욥의 삶에 어떤 결말을 주셨는지를 보았다. 주님의 욥의 인내를 기뻐하시고 그의 인생에 복주신 이유는 바로 주님은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당시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아내마저 그를 떠났다. 이 상황속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고난이 바로 너의 죄 때문이다.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난이었고 욥은 이를 인내함으로 통과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삶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임할 때가 있다. 이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할 때 주님은 우리를 복되다 하실 것이다. 

 

시험을 견디고 인내할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서 1:2-4, 12에서 말한바 있다. 

 

we count as blessed those who have persevered. James returns to a theme from the beginning of his letter (1:2–4, 12). Job’s perseverance. Job had plenty of questions to bring before God, but he stubbornly persisted in his faithfulness to God (Job 1:21; 2:10; 16:19–21; 19:25–27). what the Lord finally brought about. A difficult Greek phrase; can also be translated “the end [or goal] of the Lord.” The NIV takes it to refer to the blessings that God showers on Job at the end of the book (Job 42:10–17). The phrase could also refer to the “goal” of a virtuous and patient character that the Lord had in view in Job’s sufferings.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3.

 

  •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가 고난을 신실하게 견뎌낸 인내의 모델로서 욥을 언급한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특히 KJV이 ‘욥의 인내’(the patience of Job)로 번역하였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욥의 확고함(steadfastness) 또는 욥의 ‘끈기’(perseverance)라고 번역할 경우에도 여전히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욥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원망하였고, 자기-의에 의지하여 무고함을 선언하였으며, 자신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정경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야고보의 서술이 외관상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야고보가 외경인 ‘욥의 유언’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욥은 훨씬 더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온 욥이 인내의 위대한 모델로서 간주될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강하게 불평하였을지라도,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한복판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그분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욥 1:21; 2:10; 16:19–21; 19:25–27 참조). 바클레이(Barclay)가 말한 것처럼, “욥의 굴복은 비굴하고, 수동적이며, 맹목적인 굴복이 아니었다. 욥은 투쟁하였고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때로는 반항하기도 하였지만, 믿음의 불꽃은 그의 마음속에서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11 야고보는 ‘욥의 인내’와 함께, 주님의 목적 (개역개정에는 ‘주께서 주신 결말’이라고 표현함-역자 주)에 대해 서술한다.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이는 텔로스(telos)를 ‘목적’으로 번역하고(RSV; JB), 그것을 욥의 고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한다(욥 42:5–6 참조). 하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 그러한 것처럼 텔로스는 또한 ‘끝’ 또는 ‘결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파루시아(주께서 가져오시는 ‘끝’의 의미)를 의미하거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주님의 삶의 ‘끝’ 또는 ‘봉인’〈seal〉의 의미)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주께서 실제로 주신 욥의 상황의 결말 또는 결과, 이를테면 그의 가족과 재물의 회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의 해석이다(욥 42:13). 이 해석은 야고보가 말한 내용의 병행부분과도 잘 어울리고(갓의 유언 7:4; 베냐민의 유언 4:1; 참조 히 13:7), 앞에서 언급한 ‘복’의 구체적인 예를 제공해주며, 또한 욥의 결말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보여준다는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잘 설명해 준다.

  • 또한 이 해석은 욥기의 전반적인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욥기의 목적 중의 하나는 욥의 신실함이 어떻게 끝에 가서 보상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야고보는 인내의 보상이 항상 물질적인 번영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약(특히 예레미야!)과 신약에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함의 보상으로 자비롭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받을 복을 상기시켜,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고 끈기있게 인내하도록 격려한다.

  • 11 W. Barclay, Letter of James and Peter (Daily Study Bible; Saint Andrew Press, 21960), 147–148.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JB The Jerusalem Bible, 1966.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5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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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patient, therefore, brothers,1 until the coming of the Lord. See how the farmer waits for the precious fruit of the earth, being patient about it, until it receives kthe early and the late rains. You also, be patient. lEstablish your hearts, for the coming of the Lord mis at hand.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9, 10, 12, 19

k See Deut. 11:14

l 1 Thess. 3:13

m 1 Pet. 4:7; [Rom. 13:11, 12; Phil. 4:5; Heb. 10:25, 3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5:7–8.

 

앞서 1-6절에서 가난한 품꾼의 삯을 주지 않는 부한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이제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 심판이 임할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앞선 내용이 불신자들에 대한 경고라면 이제 신자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심판에 날을 대비하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절) 먼저 야고보는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고 충고한다. 본문의 강림이라는 단어는 ‘파루시아’라는 헬라어로 주님의 재림을 뜻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이 재림의 날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대적들과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에서의 농사는 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는 가울에 씨뿌리기 전에 땅을 부드럽게 하고 봄에 추수하기 전에 작물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비가 파종 직전에 내리고 봄비는 추수 직전에 내린다. 이곳에서 내리는 비의 3/4는 12월에서 2월 사이에 내리는데 이 이른비와 늦은 비(렘 5:24; 욜 2:23)가 가장 중요했다. 

At Christ’s second coming, he will deliver the people of God and judge both their enemies and unbelievers (Matt 24:3–25:46; 1 Thess 4:13–5:11; 2 Thess 1:5–10; 2:1–12). autumn and spring rains. A good harvest in Israel depended on rain—either to soften the ground before sowing in the autumn or to water the crops prior to the harvest in the spring. The OT consistently uses this imagery to refer to the Lord’s faithfulness (Deut 11:14; Jer 5:24; Hos 6:3; Joel 2:23; Zech 10:1).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3.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파라’(beside, 옆에)라는 단어와 ‘에이미’(to be, 존재하다)라는 단어, ‘파레이미’라는 동사(to come, 오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임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왕의 방문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파레이미’는 24번 사용되었고 명사인 ‘파루시아’도 24번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셨고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오실 주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우리로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 속에서 그분의 오심이 임박한 미래이지만 분명한 약속임을 기억함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주님의 임재와 농부의 인내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귀한 열매를 바람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함으로 흔들리지 말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언제 비가 올지 알지 못한다. 씨앗을 뿌리고 거두기 위해서는 비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하게 약속하신대로 그 비가 오고 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처럼 주님의 오심(파루시아)도 그와 같기에 마음을 굳게 하고 인내할 것을 옥구하는 것이다. 

 

In its special NT sense, the word παρουσία is intimately bound up with the development of NT eschatology. Jesus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as imminent and the παρουσία as having a decisive effect upon the present in that we are to live now in the light of this coming event. Although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viewed as a chronological succession, the future affects the present because we make our decisions as people who must give account at the imminent appearing of the kingdom of God. With Jesus’ death, resurrection, and exaltation, the eschat. perspective becomes bound up with the church’s expectation of Christ’s appearing at the end of the age.

NT New Testament

NT New Testament

eschat. eschatology, eschatological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649.

 

  • ‘임재’ 또는 ‘오심’(coming)을 의미하는 파루시아(parousia)는 초기 교회에서 악인들을 심판하고(마 24:37, 39; 살후 2:8),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영광중에 오실 예수의 재림을 가리키는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전승을 고려할 때 여기에 언급된 주가 아버지 하나님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벧후 3:12).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50–251.

 

8절)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는 말은 유혹과 시험의 한 복판에서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수많은 유혹과 고난과 핍박이 있을텐데 이를 잘 견디어 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했다. 얼마나 가깝다는 것인가? 지금 1세기 성도들을 향해서 임박한 미래에 주님의 임재, 재림이 있을 것임을 권면함으로 인내할 것을 촉구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직도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 날과 그 때’(막 13:32)는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들은 바로 내일이 그 때인것과 같은 종말론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건강한 종말의식을 가진 성도는 시한부 종말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지만 동시에 바로 내일이 그 때인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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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now, xyou rich, weep and howl for the ymiseries that are coming upon you. zYour riches have rotted and zyour garments are moth-eaten. Your gold and silver have corroded, and their corrosion will be evidence against you and will eat your flesh like fire. aYou have laid up treasure bin the last days. Behold, cthe wages of the laborers who mowed your fields, which you kept back by fraud, are crying out against you, and dthe cries of the harvesters have reached the ears of ethe Lord of hosts. fYou have lived on the earth in luxury and gin self-indulgence. You have fattened your hearts in ha day of slaughter. You have condemned and imurdered jthe righteous person. He does not resist you.

x Luke 6:24; [Prov. 11:28; Amos 6:1; 1 Tim. 6:9]

y Rom. 3:16

z Job 13:28; Isa. 50:9; Matt. 6:19, 20

z Job 13:28; Isa. 50:9; Matt. 6:19, 20

a Matt. 6:19; Luke 12:21; Rom. 2:5

b [ver. 8, 9]

c Job 24:10; See Lev. 19:13

d Deut. 24:15

e Rom. 9:29

f [Job 21:13; Luke 16:19; 2 Pet. 2:13]

g 1 Tim. 5:6

h Jer. 12:3

i ch. 4:2

j [Acts 3: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5:1–6.

 

앞선 본문에서 상인(사업가)들을 향해서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것을 이야기하고 나서 당시 갈릴리와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부유한 지주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는 부자들의 배금주의, 잘못된 방식의 부의 축적, 노동자들의 삯을 가로채고 의로운 자들을 저주하고 죽음에 내몬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경고한다. 

앞선 4:13-17절의 내용과 5:1-6의 내용은 모두 부에 대한 세상적인 자랑과 이기심에 대해서 질책한다. 반면에 4장의 내용은 믿는 자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데 반하여 5장의 내용은 악독한 부자들을 정죄한다. 

4:13-17절이 교회와 세상을 향한 권면 이라면 5:7-11은 분명 교회를 향한 것이고 5:1-6은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다. 

 

악한 부자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재물의 이기적인 축적(2-3절), 일꾼들의 것에 대한 착취(4절), 방종한 삶의 양식(5절), 의인에 대한 억압(6절) 등이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비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 왜 야고보는 교회를 위해 기록한 서신에 비-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는가? 이에 대해 칼빈이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주요한 목적을 설명한다. “야고보는…성도들이 부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알고 그들의 재물을 시기하지 말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겪는 모든 부당함을 갚아주실 것을 알고 평온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그것을 견디어내도록 그들을 권면한다.”6

  • 6 Calvin, 342. 더 나아가 Wessel은 그 선포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예언적 시도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ISBE, 2, 965).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37–238.

 

1절) 부유한 자들을 향해서는 심판때에 울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이는 주의 날이 이를 때 그들의 기소에 대한 선지자적 표현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고생은 

마지막 심판때에 임할 괴로움과 형벌을 의미한다. 

weep and howl. Prophetic language for those under indictment by God when the day of the Lord arrives (e.g., Isa. 13:6; 15:3; Hos. 7:14; Amos 8:3). miseries that are coming. Referring to final judgment, rather than the miseries of this lif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8.

 

부자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부유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불의한 자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부자가 정죄를 받는 것은 부의 남용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부자는 불의한 부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부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있어서 강력한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마 19:23)라고 지적하셨다. 

 

  • 가난과 부

“가난과 경건에 관한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교 전승의 여러 요소 가운데 야고보서에서 다루지 않는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71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주제에 대한 야고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승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가난과 경건에 대한 전승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가난하고, 학대받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 68:5). 그 분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신 10:18).

둘째,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을 따라 무력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명기 10장은 계속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책망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암 2:6–7).

셋째, 이는 특히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아니, ‘ānî)을 경건하고, 의로운 자와 직접 연결시킨다는 것이다(특히 시 10;37:8–17; 72:2,4; 사 29:19). 여기에서는 사회적인 개념과 종교적인 개념이 서로 혼합되어 있어서 많은 혼란의 원인을 제공한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억압이 종교적 경건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가난한 자’는 억압을 당할 때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탄원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40:17). 이러한 시편이 기록된 상황에서도 분명한 것은 의로운 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부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 전승의 네 번째 요소는 바로 이 점과 연관되는데, 부자와 권력자들이 악한 자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72 이 특징은 구약성경보다는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 더 두드러진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구약-유대적 배경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야고보는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이 예수의 가르침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2:5)고 상기시킨다. 이 구절에는 우리 주님의 팔복 중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씀이 반영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주제를 직접 차용하여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참된 경건의 기본 요소로 제시한다(1:27). 선지자들의 책망과 매우 유사한 본문에서 야고보는 부자에게 심판을 선언한다(5:1–6). 그래서 시편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의 독자들도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5:7–11).

그러나 야고보도 선지자들도 부자들을 단지 그들이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에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는 ‘부자’들이 심판 받아 마땅한 특정한 죄를 열거한다. 여기에는 재물의 이기적 축적(5:2–3), 방종한 사치(5:5), 노동력 착취(5:4), 의인의 박해(5:6) 등의 죄악이 속한다. 야고보가 부자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점은 또한 1:10–11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거기에서 ‘부자’는 그리스도인 ‘형제’(본서 해당 구절 본문 주석 참조)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의 독자들의 대다수가 가난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자와 권력자에게 억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 했던 성경의 풍부한 전승을 가난과 부라는 주제의 표상과 내용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71 Mussner, 80.

72 E. Bammel, TDNT, 6, 888–902; Davids, 41–44를 보라.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75–77.

 

2-3절) 부한 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눅 12:33, 개정)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으로 이는 썩거나 좀먹거나 도둑질 당하지 않지만 자신만을 위하여 부를 쌓으면 필연적으로 썩고 좀먹고 녹슬고 빼앗기게 되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말세에 우리를 심판하는 불의 불쏘시개가 된다. 

The selfishness of the rich is all the worse since the Lord has already come to inaugurate the last days (Acts 2:17; 2 Tim 3:1; Heb 1:2; 2 Pet 3:3; Jude 18; see “The Consummation,” p. 2695). The selfishness of the rich is all the worse since the Lord has already come to inaugurate the last days (Acts 2:17; 2 Tim 3:1; Heb 1:2; 2 Pet 3:3; Jude 18; see “The Consummation,” p. 2695).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2.

 

야고보는 부한 자들이 취하는 세가지 종류의 재화를 언급한다. 이는 재물(부, 주로 곡식)과 의복, 금과 은을 말하는데 고대 세계에 가장 흔한 형태의 재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모든 부가 썩고 좀먹고 녹슬게 될 것을 말하는데 이는 부가 영원할 것처럼 축적하고 이를 추구하지만 결국 없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땅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부는 현재에 우리의 삶에 영적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판때에 불리한 증거가 되어 유죄판결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심판의 불의 도구가 되게 될 것이다. 

  • 부자들에 대한 첫 번째 고발은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모았던 세상 재물의 무가치성과 연관된다. 야고보는 세 종류의 재물을 열거한다. 재물(플루토스, ploutos)은 때때로 곡식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그 다음에 나오는 옷 및 금과 은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흔한 부의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그러나 재물은 모든 부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일 가능성이 더 크다. 즉 썩다(세포, sēpō)는 말은 곡식의 부패가 아니라, 모든 인간 수고의 쇠퇴와 헛됨을 의미할 수 있다(집회서 14:19). 옷이 좀먹었다는 말은 ‘땅의 보물’이 좀 먹어 망가진다는 예수의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마 6:20). 금과 은같이 귀중한 금속은 실제로는 녹슬지 않기 때문에 금과 은이 녹슬었다는 표현은 야고보의 부유하지 않은 경제적 배경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녹슬다(이오스, ios)라는 말은 이미 금과 은에 적용된 적이 있으므로(예레미야의 서신 10), 그 이미지는 가장 귀중한 금속이라도 곧 사라질 것임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표현 방식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집회서 29:10 참조). ‘썩었고, 좀먹었고, 녹슬었다’라는 이 세 가지 표현은 사실상 썩어 없어질 물질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관한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39–240.

 

  • 이러한 심판의 근거는 단순히 부자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보다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데 몰두하였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마 6:19–21 참조). 다른 한편, 성경은 부자들이 부만 축적할 뿐, 가난한 자를 돕는 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한다. 집회서 29:9–11에는 “계명대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궁핍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서라면 손해를 봐도 좋다. 돈을 돌 밑에 두어 썩혀버리는 것보다 형제나 친구를 위하여 손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명령대로 네 재물을 써라. 그것이 황금보다도 너에게 더 유익하리라”라고 기록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41.

 

부자들은 이땅에서 부를 쌓지만 결국 부를 나누지 않고 쌓는 이 행위는 마지막 심판날에 자신들이 당할 고생을 쌓는 것이 되는 것이다. 

 

4절) 부한 자들이 말세에 잘못된 방식으로 재물을 쌓았다. 그들은 밭에서 추수한 품꾼의 품삯을 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서 하루 벌어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통곡이 주님의 귀에 들리게 된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를 넘기지 말것을 명령한다. 부한 자들에게는 큰 것이 아니지만 일용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하루 품삯은 자신의 가족들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지 않고 때로는 미룸으로 인해서 가난한 자들의 울음 소리가 하늘에 닿고 주님의 귀에 들리게 되는 것이다. 

 

  • 야고보가 부자들에 대해 던지는 두 번째 고발은 보다 더 구체적인데, 그들이 일꾼들의 품삯을 갈취했다는 것이다.8 야고보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실제 삶에 상당히 가깝다. 1세기 팔레스타인-특히 주후 70년 이전-은 소규모의 매우 부유한 지주들의 손에 점차로 땅이 집중되는 시기였다. 그 결과 많은 농부의 소규모 경작지가 이러한 대규모 사유지로 흡수되었고, 이 농부들은 생계를 위해 대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도원 일꾼에 관한 예수의 비유(마 20:1–16)는 이와 유사한 시골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일꾼이 날이 저물 무렵 자기의 삯을 기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율법은 이것에 대해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경고는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레위기 19:13(이는 야고보가 레위기 19장을 인용한 또 하나의 예이다)과 말라기 3:5에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말라기 3:5에서는 품꾼의 삯에 대한 압제를 ‘과부와 고아’(약 1:27 참조)의 압제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의 최저 생활수준에 머물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안정된 직업이 없는 일꾼들에게는 품삯을 제 때에 지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용 거래가 이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일꾼의 품삯을 제 때에 지불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 8 이른 연대의, 뛰어난 두 개의 사본(א과B)의 독법은 아퓌스테레오(갈취하다,aphystereō) 이나, 대부분의 사본들은 아포스테레오(주지 않는다, apostereō)로 읽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불법적인 사기행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미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43–244.

 

5절) 부자들은 자신들이 심판을 당할 것을 알지 못한다.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은 가축을 잡기 전에 이들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어서 살을 찌운다. 그리고 나서 이를 도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부자들은 이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함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6절) 부자에 대한 마지막 고발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이다. 

 

  • 이 의인은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은 종종 사악한 부자에 의해 박해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지혜 2:6–20에 의하면, ‘가난한 의인을 억압하고’(10),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안겨주려는 것’이 내일을 생각지 않고 이 땅에서의 생을 사치스럽게 사는 악인의 욕망이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부자의 과도한 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이용한 자료(약 2:5–7도 참조)가 바로 널리 퍼진 이러한 유대교 전승(시 10:8–9; 37:32도 참조)이다.

  • 부자들이 의인을 죽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은 부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지 못하고, 품꾼들의 삯을 지불하지 않은 실제적인 결과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회서 34:22에는 “이웃의 살길을 막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일꾼에게서 품값을 빼앗는 것은 그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정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디카조(katadikazō)는 법정적인 용어이고, 오히려 부자들이 소유물을 축적하고, 부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법적 절차를 이용하거나 아마도 왜곡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한 행위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예언자의 강력한 책망을 받아왔다(암 2:6; 5:12; 미 2:2, 6–9; 3:1–3, 9–12; 6:9–16 참조).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47–248.

 

불의한 부자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재물을 불의한 방법으로 쌓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썩고 좀먹고 녹이 슬게 되며 이 녹이 증거가 되어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들을 불태우게 된다. 부자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이들의 울음소리는 하나님께 들린다. 부자들은 자치하고 방종함으로 자신을 살찌우지만 결국 살육, 심판을 당하게 된다. 또한 부자들이 가난한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코로나 19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권고한다. 하지만 정말 가난한 이들은 이를 지키고 싶고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전염의 공포속에 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 없다. 그들도 재택 근무를 하면서 안전하기를 원하지만 하루 벌어 살아가야하는 이들은 여전히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으로 내몰린다. 새벽에는 녹즙을 배달하고 일과중에는 콜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엄마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싶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기침 감기로 아파하면서도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향했을 것이다.  이후에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의 확진자를 비교한 통계를 볼 수 있다면 단연 가난한 이들의 확진 판정 비율이 높게 나오리라 생각된다.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는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평등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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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sting About Tomorrow

13 Come now, you who say, s“Today or tomorrow we will go into such and such a town and spend a year there and trade and make a profit”— 14 yet you do not know what tomorrow will bring. What is your life? For t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time and then vanishes. 15 Instead you ought to say, u“If the Lord wills, we will live and do this or that.” 16 As it is, you boast in your arrogance. vAll such boasting is evil. 17 wSo whoever knows the right thing to do and fails to do it, for him it is sin.

s Prov. 27:1; Luke 12:18–20

t Ps. 102:3; [Job 7:7]

u See Acts 18:21

v [1 Cor. 5:6]

w [Luke 12:47, 48; 2 Pet. 2:21]; See John 9:4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13–17.

 

4:13-17과 5:1-6절이 동일하게 들으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두 단락 모두 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강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야고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허세에 가까운 그들의 자랑이다. 

 

13절) 들으라(아게 뉜)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을 연상시킨다.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년을 머물면서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이들의 태도는 자신감이 넘치고 신중해 보인다. 

  • 야고보가 지적하는 이들 사업가들은 신중하고 자신감 넘치는 계획의 소유자들로 표현된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언제 가며, 얼마나 머물지 결정할 뿐 아니라, 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업가의 모습은 그의 독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1세기는 상업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고, 특히 팔레스타인의 헬라도시들(예를 들면, 데가볼리)은 여러 가지 상업 활동에 왕성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업상의 왕래에 적극적이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상업적인 이유로 지중해 지역 도처의 도시에 정착했다. 야고보가 묘사하고 있는 사업가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도시 간의 거리가 더 길어졌고, 교통수단이 더 빨라졌으며, 사업 활동의 형태는 달라졌을지라도 야고보의 시대나 우리 시대에 사업의 핵심은 동일한데 그것은 곧 수익을 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구절들이 보여주듯이 야고보가 비판하는 것은 이처럼 수익을 내려는 욕망 자체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모든 계획이 오로지 세속적 관심의 맥락(this-worldly context)에서만 수립되는 것에 대해 지적한다. 이것은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더 민감한 위험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30–231.

 

 

14절) 이익을 얻고자 하는 상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에 아무런 준비나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명의 본질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묻고 생명은 안개와 같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안개(연기로도 번역 가능)라는 표현은 인생의 덧없음, 헛됨을 강조하는 것으로 전도서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의 메시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사람이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말해준다. 야고보는 이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의 비유로 지적하고 있다.(눅 12:15-21) 

  • 질병, 사고,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마치 아침의 태양이 안개를 소멸시키거나, 바람의 이동이 연기를 날려버리는 것처럼 빠르게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이처럼 생명의 덧없음과 불확실성에 대한 진술과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들은 성경에서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잠언 27:1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경고하고, 욥기 7:7, 9, 16과 시편 39:5–6에서는 생명을 ‘호흡’으로 표현한다. 야고보의 가르침과 특히 유사한 것은 늘 그렇듯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누가복음 12:15에서 예수는 군중들에게 탐심에 대해 경고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신다. 그 분은 한 짧은 비유에서, 야고보가 언급한 사업가처럼 더 많은 곡식을 확보하기 위해 분명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죽음으로 인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부자의 예를 들어 동일한 요점을 설명하신다(눅 12:16–20). 이 예수의 비유에 야고보가 이곳과 5:1–6에서 사용한 몇 가지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비유가 야고보의 권면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32–233.

 

15절) 그래서 우리는 도리어 "만일 주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도 행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야고보는 주의 뜻과 대조되는 것이 허탄한 자랑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은 허탄한 자랑, 교만에 빠질 수 없다. 이 허탄한 자랑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자랑은 결국 악인데 자랑하는 태도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주님의 뜻,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17절) 죄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청하신 것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앞선 죄가 작위의 죄라면 후자는 부작위(不作爲)다.  

  •  성경이 충분히 증언하고 있는 대로, 행하지 않는 죄(sins of omission)는 저지르는 죄(sins of commission)만큼이나 실제적이고 심각한 죄이다. 예수의 비유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돈을 사용하지 않은 종(눅 19:11–27)과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돌보지 않아 ‘염소’의 편에 든 사람들(마 25:31–46)은 그들이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정죄 받는다.5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이 17절에 나온 야고보의 권면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누가복음 12:47에서 예수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 5 Tasker, 106–108의 부록을 보라.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36.

 

말한대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없이 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뜻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와 재능을 활용하여 주님과 이웃,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안에서 행하는 ‘이것과 저것’이다. 주님은 믿는 우리에게 획일적인 삶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주의 뜻안에서 다양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신다. 결국 일상의 삶이 주님의 뜻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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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Do not speak evil against one another, brothers.4 The one who speaks against a brother or njudges his brother, speaks evil against the law and judges the law. But if you judge the law, you are not a doer of the law but a judge. 12 There is only oone lawgiver and pjudge, he who is able to save and qto destroy. But rwho are you to judge your neighbor?

m 2 Cor. 12:20; 1 Pet. 2:1; [ch. 5:9]

4 Or brothers and sisters

n See Matt. 7:1

o Isa. 33:22

p ch. 5:9

q Matt. 10:28

r Rom. 14: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11–12.

 

야고보는 다시금 말의 잘못된 사용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1절) 본문에서 비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타랄레오’라는 단어이다. 이는 ~에 대해 거슬러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카타라는 접두사와 랄레오라는 동사로 이루어져있는데 ‘카타’는 ~에 대항하는, 반대하는 의미이고 ‘랄레오’는 말하다라는 동사이다. 바로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 비방이다. 

James restates the basic problem behind the issues discussed in 3:1–4:10: the misuse of the tongue to speak evil or to slander others. Speaking ill of others is the result of all the arrogant boasting (3:5), jealousy (vv. 14, 16), self-centered desires (4:1, 3), and pride (v. 6) that James is warning against. Such slanderous conduct is decried in both the OT (Lev. 19:16; Ps. 50:20; Jer. 6:28) and NT (Rom. 1:30; 2 Cor. 12:20; 1 Pet. 2:1). judges the law. The “law” likely refers to these OT laws against slander, particularly Lev. 19:16, which leads to 19:18,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which James calls “the royal law” (James 2:8). Yet it also includes in a broader sense Jesus’ kingdom laws regarding love for neighbor (Matt. 22:39) and for one another (John 13:34–35; 15:12, 17). Those who inappropriately judge others (Matt. 7:1–5; Rom. 2:1; 1 Cor. 4:5) break God’s law and show contempt for Go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7.

 

한 마디로 [비방]이란 본인이 없는 곳에서 “ 비난하고- 모략중상하고- 헌담하고- 욕하고- 악담하면서- 과거를 들추어 망신을 시키고- 모든 잘못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하여 낙인찍히게 만들고- 그 사람의 은밀한 죄를 폭로시키면서 매장시켜 버리는 행위 ”를 말한다다. 이러한 행위는 보복심리에서- 저주와 미움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무서운 죄이다다. 바울은 이를 사형에 해당한 죄라고 규정했다(롬1:29-32).

 

하지만 본인을 훈계하기 위해서- 본인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죄를 짓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 직접 본인에게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비방이라는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나 불순종의 삶을 살다간 인생선배들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듣는다. 선지자들이나 설교자들은 그들의 선한 행위와 그 결과- 그들의 악한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수없이 설교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향해서 비방했다고 정죄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설교 그 자체가 영혼을 구원하려는 선한 목적에서 출발한 영적 충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방은 다르다. 비방은 이웃을 격리시키고- 화목을 거부하면서- 이웃에 대한 미움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진심으로 구원해 보려는 그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비방]이란 있을 수 없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랑은 할찌라도 절대로 비방은 하지 않는다. 비방은 [미운감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살인죄에 해당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판단하다라는 단어는 ‘크리노’이다.  [판단]은 법정적 개념의 단어로 이를 표현하는 두개의 단어가 있다. άνακρινω(아나크리노)와- κρίνω(크리노)입니다. ακρινω(아나크리노)는 “ 자세히 조사하다. 심문하다. 묻다(행12:19. 고전2:15)”로 죄를 [조사과정]을 의미하여- κρίνω(크리노)는 “ 구별하다. (사법상으로) 결정하다. 함축적으로 ---에 의해 언도하다. 벌하다. 복수하다. 결말짓다. 정죄하다. 판결하다. 간주하다. 판단하다. 정하다. 심문하다. 선고하다 ”로 [조사결과]를 의미한다. 

 

고전4:5-6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άνακρινω(아나크리노)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κρίνω-크리노)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2:1-5그러므로 남을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κρίνω-크리노)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κρίνω-크리노)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κρίνω-크리노)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κρίνω-크리노)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본문에서 말하는 [판단]이란 [평가]가 아니라 재판장 위치에서 – 하나님 위치에 서서 결정적인 [정죄]를 말하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율법의 준행자일 뿐이며 그 율법을 기준으로 재판하는 자(재판장)의 위치는 아니라는 것이다율법은 자기를 돌아보는 척도(신앙과 행위의 기준)일 뿐이며남을 비판, 판단하기 위한 척도가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므로 “ 저 사람은 이 구절에 해당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벌을 받아야 한다 라는 결정적인 말을 우리들은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바로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죄인된 인간이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12절) 그래서 야고보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로 율법을 제정하시고 이를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우리들이 그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이다.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만이 판단의 주체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동료 성도를 ‘판단하는 것’(judging)이 어떻게 이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야고보가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율법을 행하는 것’을 서로 대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율법의 불이행이 곧 율법의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부인과 연관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견해가 아무리 고상하고 옳다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그것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만방에 알리는 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순종이란 척도에 의해서만 그 실제가 드러난다고 하는 야고보의 의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행위는 비단 ‘율법을 판단하는 일’과 연관되기 때문에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웃을 판단하는 일’과도 결부되기 때문에 잘못된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판적인 판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에 불순종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권리를 교만하게 남용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그의 피조물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입법자요,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마 10:28 참조).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경우,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이미 그들의 영성과 운명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 여기에서 야고보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건전하고 필요한 분별력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믿음의 기준을 명백하게 어기는 사람들을 내쫓거나, 공동체 구성원 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공동체의 권리를 금하지도 않는다(고전 5장과 6장). 다만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는 비판적인 말에 있다. 바울이 어떤 제의적 율법을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상대방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었던 로마의 교인들을 책망한 것도 바로 이런 형태의 판단 때문이었다(롬 14:1–13; 특히 3–4절 그리고 10–13절 참조). 이와 같은 상황이 야고보가 권면한 상황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하고 이기적인 마음(3:13–18)이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 다툼과 논쟁을 일으켰을 것이고(4:1–2), 이러한 논쟁 과정 속에서 늘 그렇듯이 서로에 대한 저주(3:10)와 각종 비방(4:11–12)을 포함한 통제되지 않은 말들(3:1–12)이 오고 갔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들은 세속적인 정신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3:15; 4:1, 4), 관용과 양순함과 화평의 특성을 지닌 ‘위로부터 난 지혜’로 대체되어야 한다(3:17). 이처럼 세상과 벗된 태도는 자기 백성의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질투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4:4–5).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 된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돌아서서 은혜를 베푸신다(4:6–1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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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u adulterous people!3 Do you not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enmity with God? bTherefore whoever wish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makes himself an enemy of God. Or do you suppose it is to no purpose that the Scripture says, “He yearns jealously over the spirit cthat he has made to dwell in us”? But dhe gives more grace. Therefore it says, e“God opposes the proud but dgives grace to the humble.” Submit yourselves therefore to God. f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g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hCleanse your hands, you sinners, and ipurify your hearts, jyou double-minded. kBe wretched and mourn and weep. Let your laughter be turned to mourning and your joy to gloom. 10 lHumble yourselves before the Lord, and he will exalt you.

a Isa. 54:5; Jer. 2:2

3 Or You adulteresses!

b John 15:19; 1 John 2:15; [Matt. 6:24]

c 1 Cor. 6:19; 2 Cor. 6:16

d Isa. 54:7, 8; See Matt. 13:12

e 1 Pet. 5:5; Cited from Prov. 3:34 (Gk.)

d Isa. 54:7, 8; See Matt. 13:12

f 1 Pet. 5:8, 9; [Eph. 4:27; 6:11]

g 2 Chr. 15:2; Lam. 3:57; Zech. 1:3; Mal. 3:7; [Luke 15:20]

h Isa. 1:16

i Jer. 4:14

j ch. 1:8

k [Matt. 5:4]

l ver. 6; Isa. 57:15; [Luke 1:52]; See Matt. 23: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4–10.

 

4절) 본문은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해왔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원하시지만 우리들은 세상과 벗되어서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본문은 간음한 여인들로 여성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사 54:5-6)

The form of the Greek word this translates is feminine. Picking up widespread OT imagery, James compares God’s people to God’s bride or spouse (e.g., Isa 54:5–6) and, as often in the OT, rebukes them for unfaithfulness (e.g., Hos 2:5–7; see also Isa 57:3; Jer 3:20; Ezek 16:38; 23:45).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1.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은혜로 선택하여 그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셨다. 이러한 관계는 흔히 결혼 이미지로 묘사된다(사 54:1–6; 렘 2:2). 그런데 이 관계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로 위태로워질 때, 그 상태에 ‘간음’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다(렘 3:20). 이러한 간음의 주제는 호세아에서 가장 통렬하게 표현된다. 호세아가 부정한 여인과 결혼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상황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은 음행을 저질렀고(호 2:5), 다른 ‘사랑하는 자’ 바알과 다른 거짓 신을 따라가기 위해 그의 첫 번째 남편인 하나님을 버렸다(호 2:7).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약속하신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 부를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20)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도 이런 이미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음란한 세대’로 부르셨다(마 12:39; 16:4).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의 전승은 늘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하였다.

  • 이와 같이 야고보가 ‘간음하는 여인’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독자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지 못한 백성으로 책망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세상과의 벗됨을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영적인 간음’을 저질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 이런 태도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적대감 뿐 아니라,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감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계약을 깬 당사자들을 심판하셔야만 한다. 물론 야고보의 독자들이 하나님을 명백하게 부인하고 그 대신에 의도적으로 세상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기’와 ‘경쟁심’, 그리고 ‘통제되지 못한 정욕’은 결국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을 추구하는 태도(3:15)이기에, 그와 같은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어떤 라이벌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세상의 특성에 따라 행동할 때 야고보는 바로 그 점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따른 행위라고 지적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세속적인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를 끌어냄으로써 독자들의 양심을 찔러 회개하도록 촉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다투기 좋아하는 행위가 실제로 심각한 문제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14–215.

 

5절)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역사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성령은 우리 속에서 시기하시고 아파하신다. 이 시기와 아픔은 사랑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경배와 찬양, 사랑을 받기 원하시기에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보트로 지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셨다. 프로그램화된 경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본문의 시기하는 주체에 대해서 NIV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기도 한다. 

 

6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말씀하신다. 

God’s grace will be extended to those who are humble before him; cf. Prov. 3:34 (cf. also James 4:10; 1 Pet. 5:5). God opposes means he resists and sends judgment, for the proud have chosen the praise and the methods of the world and are acting as God’s enemies (James 4: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6.

 

  • 그러나 이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이 겸손이 잠언 3:34에서 끌어온 인용문의 참 뜻이고, 7–10절에 나오는 권면의 주도적인 모티브가 된다. 은혜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기꺼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교만한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배척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다(시 18:27; 34:18; 51:17; 72:4; 138:6; 사 61:1; 습 3:11–12 참조). ‘교만’(휘페레파니아, hyperēphania)이 종종 시기와 연관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야고보는 3:13–4:3에서 책망한 이기적이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을 여기에서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19–220.

 

7-8절)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너희를 피할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죄인 들아 너의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잠 3:34) 

마귀를 대적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패배하고 우리를 피할 수 밖에 없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마치 ‘호가호위’하듯이 주님의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함께 하시기에 마귀가 우리를 피하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제례의식을 위해서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을 표현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분을 따르는데 도움이 된다. 

 

  •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야고보가 앞에서 의심하고 불안정한 믿음의 소유자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헬라어 딥쉬코스(dipsychos, ‘two-souled’)를 번역한 말이다(1:6–8). 현재의 문맥에서 그 용어는 ‘세상의 벗’(4절)이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성’(doubleness)을 강하게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오는 시대와 현 시대 사이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세상’을 허용해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곧 충성심이 나뉘고 ‘두 마음을 품어’ 영적으로 정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야고보의 독자들은 이 세상의 전형적인 특성에 속하는 시기와 이기심을 보이고(3:15 참조), 자기들이 듣고 말한 것을 행하지 않으며(1:19–26), 혀를 ‘이중적’으로 사용하고(3:9–10), 서로에게 언어 폭력을 감행함으로써(4:1–2), 이처럼 두 마음을 품는 죄를 짓고 있다.

  •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인 행위(손을 깨끗이 하라)와 내적인 행위(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에 대한 철저한 회개이다. ‘깨끗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기물을 관장하는 제사장의 성결과 연관된 규정에서 유래하며, 후에 윤리적 성결에도 적용되었다. 또한 행위와 동기를 의미하는 손과 마음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도 구약성경에서 유래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설 사람들에게 ‘깨끗한 손’과 ‘성결한 마음’을 요구한다(시 24:3–4).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한다.

  • 만일 8절 하반부의 언어가 제사장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면, 9절의 진지한 명령은 예언자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 올 대 재난을 서술하기 위해 애통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 애통의 언어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회개할 것을 요청할 때도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면서 하나님을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2:12)고 자기 백성을 초청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야고보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애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또한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5:8), 독자들에게 참된 회개의 표시로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을 요구한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슬픔’이다(고후 7:10).

  •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웃음과 기쁨을 배제하려는 그런 무뚝뚝한 사람(killjoy)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웃음’은 종종 죄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냉소적인 웃음을 말한다(전 7:6; 집회서 27:13). 그 웃음은 다가 올 세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사람의 표시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화 있을 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b) 라고 경고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덮칠 때 사람이 해야 할 애통과 슬픔을 지금 여기에서 하게 되면 그 때는 그것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예수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마 5:4)이라고도 말했다. 교회 밖에 있든 교회 안에 있든, 피상적인 기쁨과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을 외면한 채,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쾌락주의 철학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헌신된 그리스도인조차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로운 성품을 과신한 나머지 죄에 대해 안일한 태도로 미끄러질 수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야고보가 철저한 회개를 요청하는 그 대상에 포함된다. 그러한 회개만이 참된 기독교의 기쁨, 즉 죄 용서의 깨달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그 기쁨을 가져올 수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2–224.

 

9절) 죄의 문제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말한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 것을 명령한다. 이는 애통과 근심이 목적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민감해야 하는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죄를 정결케 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본문은 6절을 다시금 반복, 강조하고 있다. 주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높이신다라는 것이다. 

  Returning to the theme emphasized in v. 6, it is the humble whom God will exalt (cf. Matt. 23:12 par.; Luke 1:52; 14:11; 18:14; 1 Pet. 5:6). But as long as people exalt themselves, God will not exalt them.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7.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적 가난을 인식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며,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 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겸손의 모범적인 예는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긍휼을 구할 뿐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는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다음과 같이 요약하신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마 23:12; 눅 14:11)과 더불어 주 앞에서 낮추라는 이 말씀은 초기 교회에서 인기 있는 모토로 받아들여졌다(고후 11:7; 벧전 5:6). 이 말씀은 영적 생명력과 승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통해서 온다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원칙을 알려준다. 우리의 능력이나 지위 또는 돈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는 오로지 실패와 심판을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 앞부분에서 이와 유사한 권면을 제공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낮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격려하고,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의 ‘낮음’을 자랑하라고 경고했다(1:9–1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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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causes quarrels and what causes fights among you? Is it not this, that your passions1 are yat war within you?2 You desire and do not have, so you murder. You covet and cannot obtain, so you fight and quarrel.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 You ask and do not receive, because you ask zwrongly, to spend it on your passions.

1 Greek pleasures; also verse 3

y Rom. 7:23; 1 Pet. 2:11

2 Greek in your members

z [1 John 5: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1–3.

 

4:1-12절의 내용은 앞선 다툼(3:14)로 인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표현이다. 

 

1절) 우리들 중에 다툼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중에 싸우는 정욕이 아니냐? 

앞선 3장의 마지막은 위로부터 온 지혜를 따르는 이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로 의의 열매를 가져온다라고 말했다. 이제 4장은 이 화평과 대조를 이루는 이들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다툼과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야고보는 이를 자기 중심적인 욕망으로 분석한다. 여기 등장하는 정욕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헤도네’라는 단어로 여기에서 ‘hedonosm’, ‘쾌락주의’라는 단어가 나왔다. 본문에서 싸우는이라고 표현된 ‘스트라테우오’라는 단어는 전쟁을 치르다라는 표현으로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다툼이나 싸움의 파괴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이다. 

 

1절이 표현은 앞선 3:13절의 표현과 유사하다. 질문을 통해서 주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툼이나 싸움은 의견 충돌, 말싸움에서 나아가 물리적인 충돌까지를 포함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러한 싸움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복음의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과 관용을 크게 외쳐도 세상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바라보고 우리를 평가하고 복음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다툼의 원인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정욕(passions)은 헬라어 헤도네(hēdonē)의 번역인데, 단순히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죄 많고 방종한 즐거움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이 단어에서 hedonism(쾌락주의)이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늘 이러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다(눅 8:14; 딛 3:3; 벧후 2:13). 여기에서 야고보가 이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카비4서 1:25–26의 내용을 통해 입증된다. “정욕(헤도네)에는 모든 감정들의 가장 큰 복합체인 사악한 경향이 존재한다. 영혼의 관점에서 그것은 자랑, 탐욕, 명예욕, 경쟁심, 악의요, 몸의 관점에서 그것은 무분별한 폭식과 대식과 같은 식욕이다.” 야고보는 이 목록에 시기(4:2)와 경쟁심(3:16)을 추가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7–208.

 

2-3절) 네가 간절히 원하여도(욕심을 부려도) 갖지 못하여 살인한다. 너는 탐내어도 얻지 못하여서 싸우고 다툰다. 

네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얻지 못한다. 네가 너의 정욕을 위해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네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에피티메오’ 열망하다. 음욕을 품다, 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16번 사용되었고 이것의 명사형이 ‘에피티미아’로  원함, 강렬한 열망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40번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 열망은 여러 방향으로 드러난다. 이는 성적 욕망, 물질적인 즐거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함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우리가 관심을 보이는 방향에 따라서 우리는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한다. 결국 모든 의지의 결정은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으로 열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Desires can find their expression in every direction: sexual lust, material enjoyment, coveting another’s possessions (cf. Rom 1:24; Gal 5:16–21; 1 Tim 6:9; Titus 3:3). By directing our attention, they can bring us completely under their domination. The recognition expressed in Rom 6:12—that those who allow themselves to be driven by their desires are already under the reign of sin—recurs freq. in the Pauline writings (Eph 2:3; 2 Tim 3:6; Titus 3:3). Desires are deceitful and can enslave us (Eph 4:22). When that happens, the “heart,” i.e., the center of one’s whole personality, comes under their control (cf. Rom 1:24). As a result, all decisions of the will, and even the best and highest impulses and powers of a person, are determined by these desires. Only the life that is turned to the will of God, subject to him, and determined by him presents the opp. picture (Rom 6:12–14; Eph 4:22–24; Titus 2:12–14).

cf. confer (compare)

freq. frequent(ly)

i.e. id est (that is)

cf. confer (compare)

opp. opposite, (in) opposition (to)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243.

 

그래서 우리의 죄, 즉 살인이나 시기와 다툼의 원인은 우리의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열망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성적인 욕망, 물질적인 욕망, 권력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좌절은 우리를 더 갈급하게 하여 죄를 짓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나아가 우리의 욕망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하는데 얻지 못하는 이유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서 구함에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의 욕망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마 7:7을 통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구함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개인의 정욕을 위해 구하는 것은 응답받을 수 없고 도리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다. 

 

  • 다음은 RSV의 번역이다.

  • 너희는 원하지만 얻지 못한다. 그래서 살인한다.

  • 또한 너희는 시기하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다투고 싸움을 벌인다(NEB, NASB, GNB도 참조, 개역개정도 이 구조를 따름-역자 주).

  • 이 구조에 따르면, 좌절된 욕심이 폭력을 초래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 헬라 세계에서 흔한 도덕적 권면 형태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이 구조가 더 타당성이 있다. 존슨(L.T.Johnson)20에 의해 충분하게 설명된 이 구조 형태는 ‘질투’(프토노스, phthonos)와 ‘시기’(젤로스, zēlos), 그리고 그와 연관된 감정이 어떻게 다툼과 싸움, 살인과 같은 적대적인 행위를 일으키는지 그 방식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형태를 설명하는 데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열 두 족장의 유언에 나오는 시므온(Simeon)의 유언에는 ‘질투(프토노스)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유언의 중심 주제는 질투가 어떻게 시므온을 사로잡아 형제 요셉을 살해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시므온은 자녀들에게 “질투가 인간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여 자기가 질투하는 대상을 파괴하도록 부추긴다”고 경고한다.

  • 주후 2세기의 도덕가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카이사르가 사람들을 ‘전쟁과 싸움’(폴레모이와 마카이)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지만, ‘질투’(프토노스)로부터는 해방시킬 수 없음을 본 후 질투와 폭력 간의 유기적 관계를 지적한다.21 또 신약성경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의 결정이 ‘질투’(프토노스)때문이었다고 기록하며(막 15:10), 초기 교회에서 자행된 박해가 ‘질투’와 ‘시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한다(행 5:17; 13:45; 빌 3:6). 야고보의 가르침은 이러한 잘 알려진 형태(pattern)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프토노스(전승에서는 이 단어가 훨씬 더 선호된다) 대신에 어근 젤로스의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지만, 두 단어는 서로 교체 사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마카비1서 8:18; 시므온의 유언 1:6; 4:5), 젤로스도 이러한 전승에 자주 발견된다. 야고보가 이 패턴을 이용하고 있다면, ‘살인’과 ‘다툼과 싸움’이 앞에서 서술한 시기와 질투, 탐욕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RSV가 이런 관계를 잘 보존하고 있다.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NASB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20 “James 3:13–4:10”, NovT 25, 1983, 327–347.

  • 21 Discourses, III. 13.9.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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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 from Above

13 Who is wise and understanding among you? mBy his good conduct let him show his works nin the meekness of wisdom. 14 But if you have bitter o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s, do not boast and be false to the truth. 15 This is not pthe wisdom that comes down from above, but is earthly, unspiritual, qdemonic. 16 For where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exist, there will be disorder and every vile practice. 17 But r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speaceable, gentle, open to reason, t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uimpartial and vsincere. 18 And wa harvest of righteousness x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m ch. 2:18

n ch. 1:21

o ver. 16; Acts 5:17; Rom. 2:8; 2 Cor. 12:20; Gal. 5:20; Phil. 1:17; 2:3; [Rom. 13:13]

p ch. 1:17

q [1 Kgs. 22:22; 2 Thess. 2:9, 10; 1 Tim. 4:1; Rev. 2:24]

r [1 Cor. 2:6, 7]

s Heb. 12:11

t [Luke 6:36]

u ch. 2:4 (Gk.)

v Rom. 12:9

w Prov. 11:18; Isa. 32:17; Hos. 10:12; Amos 6:12; Phil. 1:11

x Matt. 5:9; Gal. 6:7, 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3:13–18.

 

13절)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 안에서 그의 행함을 보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지혜는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헬라 세계에서는 온유함을 약한 것으로 여겼다. 헬라어 ‘프라우테스’로 표현되는 온유함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온유함은 비겁함이나 소극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로부터 자유롭다. 

 

야고보는 본문을 도전적인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렇다면 참된 지혜가 드러나는 행함을 통해서 너희의 지혜를 보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성도들, 좀더 나아가서 이해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참된 지혜는 참된 믿음처럼 행함을 통해서 드러나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지혜가 온유함으라는 덕목을 통해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16절) 앞서 지혜의 온유함으로 드러나는 행실과는 다르게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개인적인 야망)이 있는 자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랑을 일삼는다. 이처럼 온유는 독한 시기와 다툼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땅 위의 것으로 그 특성은 정욕의 것이요 마귀적이고 이러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행실이 있다. 

물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34:14, 신 4:24, 약 4:5)이시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질투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 대해서 충선된 헌신과 그분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반면에 독한 시기와 다툼을 지닌 이들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한다. 이처럼 다툼(selfish ambition)은 개인적인 권력과 특권을 얻기 위해 공동체를 나누려는 분열적인 태도를 말한다. 

Bitter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are the antithesis of true wisdom as characterized by “meekness” (v. 13). They are also far different from the righteous character of a “jealous God” (Ex. 20:5; 34:14; Deut. 4:24; see James 4:5), who appropriately yearns for his own honor and the loyal devotion of his people, while the envious yearn for what does not belong to them. “Selfish ambition” is a divisive willingness to split the group in order to achieve personal power and prestige (it is translated “rivalry” in Gal. 5:20; Phil. 1:17; 2: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6.

 

selfish ambition. Translates a Greek word that Aristotle used to describe the political factions that were convulsing Athens in his day (Politics 5.3.1302b; cf. Rom 2:8; 2 Cor 12:20; Gal 5:20; Phil 1:17; 2:3). do not boast about it. Do not brag about having wisdom when you are filled with selfishness. the truth. The “truth” of Christianity is something we must not simply understand but live (5:19; 1 John 1:6; 2 John 4) and obey (Gal 5:7; 1 Pet 1:22). When believers do not live in accordance with the gospel they profess, they in effect deny that truth (2 Pet 2: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1.

 

독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의 특성은 점진적으로 더욱 악화된다. 이는 위의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영에 속한 것이 아닌) 나아가 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만이 있을 뿐이다. 이 혼란이라는 단어는 ‘아카타스타시아’로 교회 안에서의 혼란한 싸움의 광란을 의미힌다. 이와 연관된 형용사 ‘아카타타토스’는 정함이 없는(1:8), 쉬지 아니하는(3:8)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14절)  온유의 반대는 독한 시기(bitter jealousy)와 경쟁심(selfish ambition, 개역개정에는 다툼으로 번역-역자 주)이다. 물론 시기(젤로스, zēlos)가 늘 나쁜 것은 아니다. 비느하스(Phinehas)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zeal)으로 인해 찬사를 받았고(민 25:11–13), 예수 자신도 비슷한 열심에 사로잡힌 적이 계셨다(요 2:17).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참되고 순수한 열정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냉혹하고 폭력적인 광신(fanaticism)과 혼동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바울이 자주 책망하고 있고(롬 13:13; 고후 12:20; 갈 5:20), 야고보가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시기’(zealousy) 또는 ‘열심’(zeal)이다. 그러한 열정은 흔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비판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른바 ‘시기심’이라고 부르는 용어에 가깝다. ‘경쟁심’(selfish ambition)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리테이아(eritheia)는 비교적 드물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바울이 젤로스(열심)와 밀접하게 연관해서 세 번 사용하는 유사한 단어 에리스(다툼, eris)와 혼동되기 쉽다. 그러나 두 단어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에리테이아는 신약성경 이전의 문헌에는 단 한번(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당파를 일삼는 탐욕스런 정치인의 이기적인 야심, 편협한 당파적 열심을 의미한다. 바로 이 의미가 야고보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다. 자신의 지혜와 이해력을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 참된 지혜로부터 나온 온유와는 정반대로 시기와 독한 경쟁심(partisanship)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8.

 

  • 15절)  약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야고보는 이제 시기하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위로부터 내려 온 지혜와 대조시킨다. ‘위로부터 내려온’이란 표현은 1:17에서 신적 기원을 가리키기 위해 야고보가 이미 한번 사용한 바 있다.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여호와는 지혜를 주신다(잠 2:6).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하나님께 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약 1:5). 그러나 이기심과 시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지혜’의 본질과 기원은 이와는 꽤 다르다. 야고보는 그것을 세 가지 형용사로 서술하는데, 그 의미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의 특성과 정확하게 대조된다.

  • 첫째, 이 지혜는 하늘의(heavenly) 것이 아니라, 땅 위의(earthly) 것이다. 땅위의 것(에피게이오스, epigeios)이란 말은 전반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요 3:12 참조), 일시적이고 연약하고 불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린도전서 15:40에 나오는 ‘땅에 속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의 대조 참조; 고후 5:1도 참조). 이 단어가 경멸적인 투로 사용된 예는 빌립보서 3:19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한다.

  • 둘째, 이 지혜는 영적인 (spiritual) 것이 아니라, 정욕적인(unspiritual) 것이다. ‘정욕의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쉬키코스(psychikos)는 명사 프쉬케(혼, psychē)로부터 파생된 형용사로, 신약성경에서는 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부분과 관계있다(Knowling). 신약성경의 모든 용례를 보면 그 단어는 ‘영적인’ 것과 분명하게 대조된다(고전 2:14; 15:44, 46; 유 19). 셋째, 이 잘못된 지혜는 귀신의 것(다이모니오데스, daimoniōdēs.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귀신에 속한’이란 의미를 지닌다)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아마도 그 지혜가 본성상 악마적이거나 기원상 악마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더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선행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지혜는 ‘세상과 육과 귀신’의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각각의 특성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와 정반대이다. 즉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의 특성은 본성상(in nature) 하늘의 것이고, 본질상(in essence) 영적인 것이며, 기원상(in origin) 신적인(하나님의) 것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9–200.

 

17-18절) 혼란과 악한 일과 반대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본절의 7개의 형용사들은 지혜가 무엇인가 보다는 지혜가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혜에 대한 명제적 진술이라기 보다는 지혜가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갈 5:22-23의 ‘성령의 열매’를 연상케 한다.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가 지혜의 열매인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첫번째 특성은 바로 성결함, ‘하그노스’로 순수한, 잘못이 없는 상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화평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화평을 심는 삶을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툼과 시기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결함과 화평함을 좇아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 17절)  지혜의 첫 번째 속성은 성결(purity)인데,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성결한(하노스, hanos)이란 말은 더렵혀지지 않는 처녀 신부의 순결과 같이(고후 11:2 참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얼룩이나 흠하고도 거리가 먼 지혜가 악한 일(16절)을 초래할리 만무하다. 야고보는 이어서 열거되는 형용사들을 청각적 효과에 따라 배열하였다. 처음에 나오는 네 개의 형용사(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이 가득하고)는 모두 헬라어로 ‘에’(e) 소리로 시작하여-에이리니케(ēirenikē), 에피에이케스(epieikēs), 유페이테스(eupeithēs), 엘레우스(eleous)-두운을 형성한다. 또한 마지막에 나오는 두 단어도 ‘아’(a) 소리로 두운을 형성할 뿐 아니라, 거의 운율상의 유사성도 가진다.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 아뉘포크리토스(anypokritos)(아가톤〈agathōn〉 도 참조).

  • 그 목록이 화평한(peaceable)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데, 그 이유는 야고보가 전후문맥에서 경쟁과 논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혜가 거짓으로 판명된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다(3:14, 4:1–2). 또한 구약성경에 의하면, 지혜는 평화를 가져오고(잠 3:17), 바울도 ‘화평’(peace)을 성령의 열매로 열거한다. 지혜는 왜 평화적(peaceable)인가? 그것이 또한 관용하고 양순하기 때문이다. 관용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에피에이케스(epieikēs)는 친절하고, 기꺼이 양보하며, ‘남을 엄격하게 대하지 않는 것’(호르트)을 말한다. 지혜에 의해 동기 부여되고 힘을 얻은 성도가 그러한 관용적인 태도로 무장한다면, 친히 ‘온유와 관용’(고후 10:1)으로 살아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양순한(유페이테스, eupeithēs) 사람은 문자적으로는 ‘설득하기 쉬운’ 사람을 말하지만, 약하고, 잘 속아 넘어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원칙의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혜는 또한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야고보는 2:8–13에서 직접 ‘긍휼’의 정의를 내려주는데, 그것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이웃사랑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긍휼을 선한 열매와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이 놀랍지 않다. 선한 열매는 긍휼의 행위로서 참된 믿음처럼, 참된 지혜가 가져와야만 하는 그러한 ‘열매’를 말한다.

  • 그 다음에 나오는 지혜의 속성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정의내리기가 어려운 단어이다. 그 단어는 편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공평한’(NIV; 참조 KJV, GNB)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솔직한’(NEB), ‘확실한’(RSV) 또는 ‘흔들림이 없는(NASB)’, ‘단순한’, ‘의심이나 나뉨이 없는’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1:6에서(아마도 2:4에서도) 이 단어와 유사한 디아크리노(diakrinō,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연관)가 사용된 것을 볼 때, 마지막에 언급한 두 의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야고보가 ‘나뉘지 않은’, ‘두 마음이 아닌’의 태도를 얼마나 강조했는지 앞에서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 야고보는 기독교와 사람에 대한 차별성이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점(2:1–4)을 강조하고, 그 문맥에서도 여기처럼 긍휼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처음에 언급한 의미, 즉 ‘공평한’(impartial)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15 마지막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거짓이 없다(without insincerity). 이는 어떤 허세나 가식이 없이 진실한 것을 말한다. 지능과 영리함을 높이고자 하는 현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야고보가 여기에서 열거한 가치(덕목)들이 참으로 귀하고 영원한 것임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NASB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 15 부사형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ōs)가 또한 스불론의 유언 7:2에서 긍휼을 베푸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 문맥에서는 ‘차별 없이’란 번역이 지지를 받는다(Charlesworth, 806 참조).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2–204.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여러 특성중에 화평을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 당시의 교회안에 일어나고 있는 다툼과 분쟁(3:16, 4:1-2)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평이 너무나 요청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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