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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밴쿠버의 생활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시내 관광은 특별한 일이 없이는 별로 가기가 힘든데 부모님방문이나 친구들이 방문했을때 한번쯤을 돌아볼 만한 곳을 알아보자. 

인터넷에 아래 사이트들이 많이 나오는데 주소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편번호를 사용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듯..




1. Gas Town(Cambie street & water street, vancouver, V6B1B9)

밴쿠버 시내 관광에서 빼놓을수 없는 명물인데 실제 방문하면 별로 큰 것은 없다. 시간에 맞춰서 증기 시계가 울리는 것 정도. 그래도 항상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곳이다. 






2. Stanley Park(Vancouver, V6G1Z4)

밴쿠버 중심에 위치한 공원으로 아쿠아리움, 토템폴, 마차 관광, 다양한 트레일 코스를 제공한다. 자전거로 한바퀴돌거나 중간 중간 뷰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을듯







3. English Bay, Canada place, Kitsilano beach



4.  Samurai sushi(1108 davie street, vancouver)

밴쿠버 시내에서 저렴하게 먹을만한 스시집, 두툼하게 썰어주는 연어가 입맛을 자극한다. 주차장이 따로 없기 때문에 식당 앞에 주차해야 한다. 



5. Lynn canyon park(3663 park road, Northvancouver, V7J3G3)

Capilano bridge가 서스펜션 브리지로 유명한데 입장료가 비싸다. 그래서 카필라노 정도는 아니지만 서스펜션 브리지를 경험해 볼만한 곳이 바로 린 캐년 공원이다. 조금 올라가면 다리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서 트레일 코스도 아주 좋다. 그리고 입구에 있는 카페의 커피도 아주 좋았다. 







6. Cleveland dam(Capilano road, north montroyal boulevard, Northvancouver, V7R4J1)

린 캐년 파크를 보고 나오는 길에 클리브랜드 댐이 있다. 잠시 올라가면 댐위를 걸을수도 있고 테이들이 잘 되어 있어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곳







7. Grouse Mountain(6400 Nancy Greene way, Northvancouver, V7R4K9)

왕복을 케이블 카로 이용할 수 있고 편도로 내려올때만도 탈 수 있다. 밴쿠버 전경을 바라볼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위에 올라가면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볼 수 있고 곰을 만날수 있다. 






8. Whitecliff Park(7165 cliff rd, Westvancouver, V7W2L3)

이국적인 해변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멋진 장소, 개인적으로 이곳이 가장 좋았다. 






9. Cypress Provincial Park(Cypress bowl rd. Westvancouver, V0N1G0)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중에 몇군데 뷰 포인트가 있고 정상에는 스키장과 몇몇 볼거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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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oPark131127-SCS503 창조론 paper-Refwork 포함.hwp




생물 진화와 우주 진화 : 그 본질적인 다름에 대한 논의

Biological Evolution and Cosmological Evolution : Their Foundational Distinctiveness 



1.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고민

본 연구는 특별히 생명의 진화와 우주의 진화를 다루는 생물학과 천문학의 영역에서의 진화가 의미하는 것의 본질적인 다름을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진화, 진화이론 그리고 진화주의

Daum 국어사전을 통해서 진화(進化, evolution)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물] 생물의 종 및 상위의 각 종류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걸쳐 점차 변화해 온 과정. 

(2) 사물이 더 나은 상태로 변하여 바뀜.


넓은 의미에서 진화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 우주 진화는 복잡한 우주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물 진화는 시간에 따라 더 복잡한 종이 출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진화는 자연현상이며 큰 틀에서 보면 진화는 경험적인 데이터에 가깝다.

반면, 진화이론은 진화를 설명하는 과학이론이다. 현상 간의 인과관계나 혹은 진화가 일어나는 기작(機作, mechanism)을 다루는 것이 바로 진화이론이다. 가령 빅뱅우주론은 우주 팽창이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이론이고, 생물진화이론은 종이 발생하는 생물진화 현상을 자연선택과 유전자 변이라는 기작을 통해 설명하는 과학이론이다. 

진화주의는 진화이론에 대한 무신론적 세계관이다. 가령 진화가 진화이론으로 잘 설명된다면 더 이상 신은 필요 없다는 도킨스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진화주의는 진화를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한 철학적 입장에 불과하다. 반면, 진화는 하나님이 다양한 생물 종을 창조한 방식이고 진화이론은 그 창조의 방법을 밝힌 것이라는 프랜시스 콜린스의 견해처럼 유신론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진화주의는 거부해야 하지만, 자연현상인 진화, 그리고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설명인 진화이론은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3. 생물학에서의 진화론

1) 뷔퐁-라마르크-에라스무스 다윈

2) 다윈의 진화론 : 종의 기원(1859) -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3) 멘델의 유전법칙

4) 신다윈주의 : 현대 종합설(도브잔스키, 메이어, 심프슨)

5) 평형파괴이론 : 스티븐 굴드, 닐스 엘드리지 

6) 이기적 유전자 : 리차드 도킨스

  • 여전히 많은 Missing Link들이 존재

진화론의 영향

단순히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혁명적 세계관으로 작동, 자본론에 영향, 이데올로기로 작동


4. 천문학에서의 진화론

1) 점성술

2)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미의 천동설

3) 코페르티쿠스의 지동설 – 갈릴레이 - 케플러

4) 뉴턴의 「프린키피아」 근대 역학 체계 확립, 라플라스의 성운 가설 

5) 프리드만과 르매트르의 팽창 우주론

6) 허블 : 적색편이를 발견하고 허블의 법칙을 발표

7) 가모브 : 대폭발 이론 제시, 우주배경복사 예언

8) CMBR 발견 : 펜지아스와 윌슨

9) Big Bang이론과 힉스입자의 발견


5. 과학 연구의 한계

1) 시간과 공간의 한계


2)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의 한계

과학 실증주의는 힘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는 말 그대로 과학을 통해서 모든 것이 증명가능하다는 의미로 과학은 객관적, 경험적, 합리적으로 입증가능하기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반증 가능할 때만이 과학적이라는 것이다.(진화론은 반증 불가능한 이데올로기이다.) 



6. 나가며 : 둘 사이의 본질적인 다름에 대한 이해

1)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

생물학의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 선택에 의한 종간의 진화는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의 우주의 기원에 대한 많은 결과들은 명확한 과학적인 사실들이기에 이것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신앙인들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자연계에 부여하신 그분의 창조법칙에 따라 자연적인 방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창조주를 억지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법칙과 질서, 그 경이로움 앞에서 창조주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 


2) 연구 대상의 본질적인 차이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는 「생명 현상은 물리학과 화학을 넘어선다」라고 주장했다. 

천문학과 생물학 모두 기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천문학이 무생물의 영역이라면 생물학은 생명체의 영역으로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연구 대상의 영혼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네페쉬(vp,n<), 프슈케(yu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으로 해석된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영혼에 대한 정의도 인간 구성에 대한 견해도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나 우리의 논의를 전진시키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라도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를 제외한 영적 정신적 요소라고 정의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 영과 혼이라는 이 두 말은 사람에게 두 가지 다른 요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한 영적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영이란 말은 육체를 관리하는 생명의 원리 또는 행동 원리를 뜻하며 혼이란 말은 생각하고 느끼며 결정하는 인격적 실체를 뜻한다. 


우주의 기원을 다루는 천문학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는 빅뱅이후 현재의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도 다양한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 이론들은 모두 확정적인 법칙들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이론들 사이의 연결 고리들이 채워지면서 예측치에 수렴해 가고 있다. 반면에 생물학의 분야에 있어서는 많은 영역에서 발전이 있어왔지만 생명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다윈의 진화론 때부터 종을 뛰어넘는 대진화와 관련된 자연 선택의 증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20세기 들어 수많은 화석이 발견되었고,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분야에서 엄청난 학문적인 발전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에서 반드시 해결해야하는 무생명체에서 생물체로의 진화의 연결고리, 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로 이어지는 종을 뛰어넘는 진화의 증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남아 있다. 이처럼 생명을 다루는 이 분야는 창조주의 신비에 속한 영역으로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하여금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금지시키신 영역이 아닐까? 


정리하자면 생물학과 천문학에서 동일하게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개념 자체가 차이가 난다. 천문학에서의 「우주의 진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물학에서의 진화의 개념이 아니라 물리학과 관련되어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학문으로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학문」으로 표현을 달리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앞서 말한 대로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인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화라는 의미 자체가 이미 다윈의 진화론에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방법론적인 자연주의의 한계로서 과학이 절대적인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나타난 일반 법칙(자연 계시)을 발견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감추어진 신비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해석의 과정에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과학에서 밝혀낸 사실(fact)에 입각해서 그 진리가 보여주는 곳까지 나아가고, 보여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억지로 나아가기보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생명의 영역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이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열매인지 금단의 열매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과학이 책임 있게 되기 위해서 최고의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 신뢰할 만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과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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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00(2014-7-27)


지난 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을 보내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100번째 소식을 뭔가 특별하게 해볼까 했는데 시간만 지나가는 것 같아서 일단 소식을 전합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지난 학기 수업을 마치면서 이번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우선은 재정적인 문제로 여름 방학동안 일을 해볼까 생각을 했었는데 학교에서 여름 방학동안 풀타임 일하는 것이 안 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금 재정적으로 어렵게 지내더라도 이곳에서의 시간을 누리면서 지내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특별히 일을 하지는 않으면서 몇몇 분들과 스터디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진중권의 미학 스터디”라는 3권의 책으로 북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이곳에서 세계관이라는 학문의 이론적인 부분을 접하면서 인문학적인 면이 부족함을 많이 느꼈는데 그런 의미에서 미학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스터디를 마쳤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는 이곳 밴쿠버 세계관 대학원(VIEW)의 전성민 교수님의 지도로 “사사기” 성경공부를 진행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사사들의 이야기가 실제로 생각보다 많이 왜곡되어 있고, 우리가 너무나 영웅주의적인 시각으로 사사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6/29-7/1까지 밴쿠버 청소년 세계관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기세당당”이라는 주제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당당하게”라는 의미로 이곳 세계관 대학원에서 배우는 여러 주제들 중에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여러 강의들을 준비해서 2박 3일간의 캠프를 기획해서 진행했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몇 번에 걸쳐 진행했던 캠프인데 지난 4년 정도 담당자가 없어서 못하다가 이번에 몇몇 원우들과 의기투합해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 함께 논의하고 각자에게 맡겨진 내용을 준비하면서 저희가 배운 내용을 실천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30여명의 청소년들이 참석했고 10여명의 스텝들이 섬겨주었습니다. 5번의 강의와 workshop, 2번의 집회, activity 등을 진행했는데 참석한 학생들이 저희의 생각보다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석해 주어서 준비한 저희들이 더욱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캠프 전체 진행과 Activity, 찬양팀으로 섬겼습니다. 




밴쿠버의 여름은 매우 환상적입니다. 대낮에는 날씨가 매우 덥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선선하고 매우 쾌적합니다. 게다가 위도가 높아서 여름에는 9-10시까지 태양이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녁시간에 주변의 공원이나 비치를 나가보면 피크닉 나온 사람들이 대단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비를 맞으면서 벨카라(Belcarra)에서 게잡이(Crab fishing)을 나갔는데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현장에서 게찜과 게라면을 맛나게 먹었답니다. 저희가 그곳에서 잡는 게는 던지스게로 16.5cm이상의 수컷만 잡을 수 있고 반드시 라이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게틀을 던져놓고 잠시 후에 건지면 많은 게가 잡혀있지만 대부분 작은 것뿐이어서 모두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미국 비자

이곳 밴쿠버는 미국 국경과 아주 인접한 지역으로 시애틀까지는 차로 2-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쇼핑이나 관광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국경을 통해서 왕래합니다. 저희도 I-94(비이민 비자 면제 입국)를 작성하고 미국에 몇 번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 록키와 엘로스톤을 여행하기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경에서 이 I-94라는 양식을 매번 작성하는데(유효기간 3개월)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것을 간소화하려면 ESTA를 신청하면 된다고 아는 분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우리 ESTA를 신청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미국 비자가 거절된 기록이 있는 사람은 ESTA가 거절되게 되고, 일단 ESTA가 거절되게 되면 정식 비자 없이 I-94만 가지고 미국을 왕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 여행일정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미국 여행을 취소할까 아니면 정식으로 미국 여행 비자(B1/B2)를 신청할까 말입니다. 가족이 함께 신청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고, 신청했다가 안 나오면 정말 미국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생길 것 같아서 며칠 고민하다가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안 나오더라도 시도는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제가 이전에 행동유형검사(DiSC)를 하면 극단적인 D형입니다. D형은 장애물이 있으면 폭파 후 통과하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신청한지 며칠 후에 밴쿠버 미국 영사관에서 인터뷰를 했고 다행히 가족 모두 B1/B2비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 여행을 준비 중입니다. 

이곳 캐나다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해보고 싶은 많은 일들 중에 하나가 가족들과 여행을 많이 다녀보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바램으로 있고 시도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아직 어려서 먼 거리를 차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도 않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어렵게 발급받은 비자를 최대한 이용해보고 싶습니다. 북미 지역에 있는 친구, 선후배들을 가능하면 많이 만나고 교제하는 시간을 이곳에 있으면서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방학은 특별한 일 없이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곳에서의 시간을 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곳에 있으면서 먼저 가족들에게 죠이 스피릿을 실천하고, 주변에 함께 하는 이들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잘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기도제목

1. 여름 가족 여행(8/4-16)을 안전하게 잘 다녀오도록

2. 교회의 인터네셔날 학생 사역과 TKC 한인 학생 모임을 위해서 

3. 가을 학기 준비를 잘 하도록

4. 가족모두 건강하도록



참고로 사진이 첨부된 소식지를 보실 분들은 제 블로그를 peterjoy.tistory.com


2014년 7월 27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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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이전 책 “The Transforming Vision”에는 고통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고통은 성경의 중심 주제중의 하나이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1장. On Imaging God in Babylon
- 현재 문화속에 있는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과 같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출애굽이 필요하다. 
- 바벨론의 창조신화와 창세기의 창조신화의 차이 : 바벨론에서는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서 마르둑이 킹구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 바로 이렇게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의 이야기인 것이다. 

2장. Beyond Worldview to way of Life : Diagnosis
- 우리의 세계관과 우리의 삶의 방식의 차이(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 하웃츠바르트가 말하는 세가지 우상 : Scientism, Technicism, Economism

- 진보, 발전을 추구하는 이시대의 문화가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후대의 안전한 미래를 앗아갔다.(몰렉에게 자신의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우리의 모습, 요란한 드럼소리때문에 아이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 선지자적 반응
- Prophetic critique, prophetic hope, prophetic imagination
-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세상의 역사에 방관자가 아니라 열정적인 참여자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이 역사의 하나님이 시라는 사실을 상상할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3장. Waiting for a miracle : Christian grief at the end of history
- 이시대는 슬픔, 상실의 시대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선지자)이 필요하다.
* The end of history
- 후쿠야마는 물질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헤겔 주의자로 역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을 “Ideas”라고 했다. 그는 사상과 의식이 물질에 대해 독립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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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목사의 역할
1) 목사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2) 평신도들을 구비시킴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 목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연스런 삶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역이다. 
3) 평신도들의 사역의 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1장. 평신도가 되기로 결심한 어느 목사 이야기
- 엡 4:12
- 새언약은 가장 약하고 가장 부적합한 사람들을 봉사의 일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후 3:4-6)
“리더십과 관련된 신약의 용어들은 피라밋 형태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다…. 안수 제도는 오히려 이 수평적인 관계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장벽이 없는 곳에 장벽을 세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제도는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벽을 세우며 서로서로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한다.”(24)
- 어려운 것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만족하는 것이다. 
- 두가지 종류의 평신도 사역 : 흩어져 있는 교회(디아스포라-기능, 경력, 전문직업, 가사)와 모여있는 교회(에클레시아-일반 교회안에 있는 사역)
- 평신도들은 엄청난 시간을 집 안팎에서 일을 하는데 소모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삶의 전부를 바치도록 평신도를 구비시키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단순히 껍데기만 남은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위해 망치질하는 것이며 정확히 톱질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영적 안목을 갖는 비결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어두움 가운데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눅 11:33-35)
- 구비시킴(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은 엡 4:12에만 사용되는 단어로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게 건강하도록 뼈나 마디 마디마다 또 부분 부분마다 잘 맞추는 것을 뜻하며, 탈구한 수족을 교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2장. 평신도층을 폐지하자
- “교회 전체, 즉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성직자이다.”
- 성도들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다양함 때문에 이상적인 일치가 교회에 존재한다.
첫째 교회지도자들은 우선적으로 성도를 구비시키는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부르심은  설교나 상담의 사역에 비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목사의 존재이유이다. 
둘째,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부족한 일들을 위해서 또는 교회의 부서의 일에 평신도들을 종사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목사의 일을 분담시키는 것도 아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고유한 사역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구비되어야 한다. 

제2부.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구조
-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에서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 즉 사역의 일을 위한 구조

3장. 가장 훌륭한 신학교-지역교회
-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시키려는 세력들 : 세속주의(Secularism), 사제 제도주의(Sacerdotalism), 성례주의(Sacramentalism),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
- 신약에 나타난 모델 : 이동성 신학교(walking seminary), 세상속의 개방학교(open school in the marketplace), 전진-후퇴 모형(advance-retreat pattern)

4장. 구비사역에 합당한 교회 구조
“가죽부대는 포도주와 세상이 만나는 접촉부분이다. 또 포도주의 품질과 세상에서부터 오는 압력에 맞추어 가죽부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인간 문화에 접할 때 가죽부대가 생긴다.”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간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들을 모아 놓은 집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우에 그러한 교제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 성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구조(80)
유기체적인 교회 조직의 성격
1) 적당한 규모
2) 단순성
3) 주인의식
4) 융통성
5) 개기인의 차이점
6) 성령의 인도하심에 항상 열려있는 융통성

* 구조적 변화를 촉진하라
1) 기도하라
2) 가르치라
3) 선포하라
4) 찾으라
5) 초대하라
6) 시범을 보이라
7) 허용하라
8) 기도하라

제3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신학
- 교회의 디아스포라의 역할, 즉 일의 사역을 위해 교회를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면

5장. 일이 먼저인가, 사역이 먼저인가?
- 일과 사역의 관계에 대한 세가지 분류
1) 전문 직업적인 그리스도인(Professional Christian) : 풀타임 사역자, 
2)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문인(Christian professional) : 요셉
3) 자비량 사역자(tentmaker) : 바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우리는 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쉽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구러나 우리는 신자들이 일 가운데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을 구비시켜야 한다. 

-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서 안식을 추구할때 경험하는 불안
1) 우리 자신의 성취감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는 유혹
2) 안전을 위해 의를 타협하려는 유혹
3) 정체성을 일에 연관시키려는 유혹
“의심할 것 없이 주일에 우리가 교회에서 입으로 고백하는 신학과 세상에서 우리가 주중에 행하는 행동신학간의 제일 큰 격차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용납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든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우리의 정체와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얼마나 잘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믿는 신앙이 행동을 통해 무심코 드러나게 된다.”
“석공 세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분필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쪼아가던 삶은 “나는 이 돌을 자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사람은 “나는 돈을 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세번째 석공은 “나는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6장.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선교의 목적은 우리를 종교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있다. 선교명령을 주신 이유는 창조명령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 교회 선교의 다양성은 교회의 모이고 흩어지는 리듬에서 뿐 아니라 다양한 영적 은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비 콕스는 “세속 도시”에서 사회를 겨냥한 교회의 선교를 디아코니아(섬김), 고이노니아(교제), 케리그마(선포 혹은 구두로 하는 의사소통)으로 나누었다. 
- 소금은 두가지 치명적인 독약, 나트륨과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제4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전략
7장. 독불장군식의 사역을 피하기 위한 여섯가지 방법
* 구비사역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1) 아르티오스 : 온전함, 건전함(딤후 3:17)
2) 카타르티스모스 : 준비(엡 4:12), 섬기는 일이나 행동을 위해 준비시키거나 유능하게 함
3) 카타르디시스 : 온전케 되어짐(고후 13:9)
4) 카타르티조 : 질서를 잡다, 회복하다, 준비하다.

* 구비자로서의 목사에 대한 여섯가지 이미지
1) 의사이다(목회사역) : 헬라의 의사들을 탈골한 뼈를 제자리에 다시 맞추어 넣어 몸의 다른 부분과 바른 관계를 회복시킴으로써 몸을 구비시켰고, 금이 간 곳이나 빠진 부분을 교정함으로써 환자를 구비시켰다. 
2) 그물을 고치는 어부이다.(개인 사역) : 카타르티조는 첫번째 방금전에 하던 일로 인해 생긴 해로운 것과 손상된 것을 없애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3) 석공이다.(구조적인 사역) :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를 카타르티조로 번역했다.(스 4:12),
4) 토기장이이다.(지도하는 사역) : 창조하다. 형성하다.(롬 9:22, 히 10:5, 벧전 5:10, 히13:21)
5) 부모이다.(모범을 보여주는 사역) : 모방하게 하는 과정이다. 
6) 설계자이다.(방향 있는 사역) :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성장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후 13:9, 11)

* 다섯가지 불변하는 진리
1) 성령님을 사역을 위한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이 분배하신다. 
2)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들은 창조때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교회는 이 차이점을 존중해야 한다.
3) 교회의 질서에 관해서 서신서들과 관계된 구절들을 읽은 결과 결혼 생활과 회당안에서 남자가 머리 역할 하는 구약의 모형은 교회가 어느 정도는 계승해야 한다. 
4) 교회 지도자들은 부부관계에서 교회에서 모본을 보여야 한다. 
5) 무조건 교회 전통에 따르거나 내용이 텅 빈 상징을 유지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와 관심사들이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 고전 11:10의 권위 (144) 

8장. 자비량 목회 사역을 하라 - 롤랜드 알렌 목사와의 인터뷰

9장. 자비량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영성
* 자비량 사역자의 훈련과정
1) 천천히, 지속적으로, 2) 사회적으로, 3) 모험을 하면서 훈련받았다. 

제5부. 구비자를 구비시키려면
10장. 구비자의 영적 준비
* 영적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세가지 : 깊이(Depth), 분별력(Discernment), 연단(discipline)
- 필요는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경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바쁜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필요때문에 바쁜것은 특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는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 참된 영성을 위한 훈련 : 위를 향한 여행, 안으로 향한 여행, 밖으로 향한 여행

11장.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무엇이 사역자를 만드는가?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그들을 만드신다…. 주님은 금간 곳을 고치시는 의사시요, 그물을 고치시는 어부시요, 벽을 재건하는 석공이시요, 진흙을 빗으시는 토기장이시요, 모범적인 부모요, 강요함이 없이 모든 부서진 조각들을 적절하게 다시 붙이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얼어붙은 자원을 녹이는 일, 즉 그의 백성, 그의 평신도를 해방시키는 것에 우리보다 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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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영속적인 문제
기독교는 현세적 생활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것과 짝하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모둔 인간적 사업이 멸망할것을 예측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6

영속적인 문제
1. 현세의 생활을 멸시하고 영생불멸을 확신하는데 열중한다. 
2. 그리스도가 인간을 유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게하고 인간 자신의 성취에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3. 편협한 기독교. 로마의 관용정책과 충돌

하나님 사랑은 찬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는것은 긍휼과 용서로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하나님 사랑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사랑해야할 그대로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기를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실수 있는 강력한 긍휼로 사랑하는 이원성. 

문화의 특징
1. 사회적인 성격
2. 문화는 인간의 성취이다.
3.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어떤 목적을 위해서 고안된 것)
4. 문화는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2. 문화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3.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4.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1) 새 백성과 ‘세상'
요한 1서속에서의 ‘세상’의 의미(2:15)
-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기에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
- 2세기 기독교 문서(터툴리안) : 2세기 당시 기독교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이외의 제 3의 민족, 새백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신념에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논리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던지 다 악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다. 

2) 톨스토이의 문화배척
- 베네딕트의 규칙, 메노파, 퀘이커파
-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입법자로서 그의 계명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과 타락하지 않은 이성의 명령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모든 국면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 그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폭력과 기만의 제도화를 대표한다. 
- 또한 그는 경제, 철학, 과학, 예술등에 반항했다. 
- 동과 서의 카톨릭, 정교회와 종파적 프로테스탄트, 천년왕국주의자와 신비주의자에게서 이러한 입장을 찾을 수 있다. 

3) 필요하나 부적절한 입장
“퇴거와 포기의 운동이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에 대한 책임적인 참여운동도 그와 못지않게 필요하다. 이런 균형이 결핍될 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번영이나 공공적 평정을 위한 공리주의적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 우리는 문화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가 살고 있던 그 문화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던지,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말씀을 우리의 사회질서 안에 번역해서 받아들이든지 둘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다. 
- 독신 - 결혼-재혼-신자와 결혼-일부일처-일부다처-무책임한 성관계

4) 신학적 문제들
- 이성과 계시의 문제
- 죄의 본성과 만연성의 문제
-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의 문제

- 이 견해의 문제점 : 자연의 창조주, 역사의 지배자, 그리고 피조물에 내재한 영과 기독교인 공동체 안에 있는 영, 이런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문제이다. 결국 이들은 이 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반대되는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적 영영과 영적인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는 정신적 영역의 둘로 구분하려는 유혹에 걸리게 된다. 이는 터툴리안의 몬타니즘, 영적 프랜시스주의, 퀘이커 교도의 내적 광명교리와 톨스토이의 정신주의등에서 솔 수 있다. 


3장.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의 문화와의 조화
- 그리스도를 온전히 문화적 용어로 해석하고 사회적 신념 또는 관습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아무런 긴박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경향을 대표한 그룹은 헬라 문화에서의 영지주의자들이었다.(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그들은 당시의 문화에 기독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과학적, 철학적 해석을 가하였고 이는 문화속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된 기독교는 한 종교적 또는 철학적 체계로 되어 버린다. 

2)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 존 로크 : 기독교의 합리성(중용지도)
- 라이프니츠 :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칸트)
- 제퍼슨 :  
- 슐라이에르마허 
- 칸트, 제퍼슨, 슐라이에르마허등으로부터 헤겔, 에머슨, 리츨로 옮겨져서 이성의 함계안에서의 종교가 인간성의 종교로 됨에 따라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여러가지 모양으로 다시 선포되었다. 
- 리츨의 신학 : 계시와 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였다. 리츨은 그의 신학적 임무를 시작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또하나의 출발점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지를 그 원리로 삼고 있는 문화적 공동체이다. 리츨은 이처럼 교회와 문화 공동체 사이에 이원성이 있고 그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고 주장했다. 
- 리츨에게 문화의 열쇠라고 느껴진 것은 칸트의 높은 윤리적 이상주의였다.

3) 문화적 신앙에 대한 변호

4) 신학적 반론
- 그 시대의 문화에 충성한다는 것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4장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
1) 중립적 교회
-중립적 교회는 반문화적 극단주의자와 문화에 그리스도를 적응시키려는 문화주의자와의 쌍방을 모두 거부했다. 
- 중립적 교회의 신념 
하나 :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둘 :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셋 : 죄의 보편성과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
- 중립적 교회의 세부류 : 종합론자, 이원론자, 개변주의자

2)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다 긍정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이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주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림이어서 한 인격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백한다. 
- 종합주의자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는 간격이 있으며 조화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이 간격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고 극단주의자들은 당초부터 극복할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저스틴, 클레멘트, 토마스 아퀴나스(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 레오 13세

3) 종합의 문제점
- 피조물의 구조 자체 안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이성을 사용하여 그 법을 알고 또 그 법대로 자신을 통어해가야 한다는 것과 그 법이 이성적인 언어의 개념안에서 조형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 토마스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비판 : 이원론자, 개변론자, 극단주의자. 이들은 기독교적 완전을 향한 등급을 설정하려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 종합주의자가 인간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 필요하며 위대하다는 점을 아무리 고백한다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안에 내포된 근본악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결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5장.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1) 이원론자의 신학
- 종합론자는 온건하고 발전적인 세상을 그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나,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있다. 
-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자의 해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다. 

2) 바울과 마르키온의 이원론적 동기
- 바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문화적 제도와특징, 모든 인간적 업적을 상대화했고 죄아래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님의 은혜의 거룩한 침입을 향하여 열려있다. 
- 종합론자는 문화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또는 교사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로 움직여 간다. 그러나 바울은 문화의 심판자 또는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적 문화로 나아간다. 
-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에 항복한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윤리와 모든 불의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총괄적인 진노에 유의하는 윤리로 나눌 수 있다. 
- 마르키온(영지주의자, 마니교) : 세계를 하나님과 악의 권세로 구분, 참된 이원론자는 두 서로 잡아당기는 양극 사이의 긴장안에서 산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그 두 극성을 따로따로 분리시켜버렸다. 
 
3) 루터와 현대의 이원론
-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요 세상나라는 진노와 가혹의 나라로 이해했다. 
- 복음서에서 발진티푸스의 치료법을 찾을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 가운데서 국가적 범죄자를 처리하는 특수한 법률을 찾을 수 없다. 
- 신앙과 과학은 서로 같은 표준에서 비교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이 두영역에 살고 있는 위대한 양서류이다. 
- 윌리엄스는 정치 복음을 연합하려는 영국국교와 청교도등의 종합주의, 개변주의를 배격했다. 

4) 이원론의 장점과 결점
- 이원론은 기독교인을 반율법주의로 인도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에 빠지게 한다. 
- 이원론은 일시성 또는 유한성을 죄와 긴밀하게 괸련시킴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매우 가깝게 접근시켰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1) 신학적 신념 
- 이들의 기독론은 종합론자나 이원론자와 비슷하다. 그리스도가 새 율법을 주신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은 인류의 촤선의 정신적 원천을 표징하는 분이라는 것 보다도 인간이 만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죄관은 이원론자에 더 가깝다. 개변론자(Conversionist)가 이원론자로부터 구별되는 요점은 그들이 이원론자보다도 문화에 대한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적극적, 희망적)로 첫번째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속량에 너무나 치중하기때문에 창조는 속량의 위대한 행위의 일종의 서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둘째로 창조때의 선에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된다. 그러나 그는 그 타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며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로부터 구별하는데 극히 날카롭다. 그의 문화는 부패를 향한 질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부패된 질서이다. 이것은 존재의 나쁜면이 아니라 전도로서의 악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문제는 개변의 문제이지 새창조로 대치할 문제는 아니다. 
셋째로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작용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이다. 
“배타적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교회 혹은 기독교 문화의 발흥과 이교문명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자연과 정신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종합론자에게서 역사란 영혼이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교제를 율법, 이성, 복음 그리고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원론자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신앙과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완성될 때의 중간기간인 것이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 있어서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2) 제4복음서의 개변주의적 동기
- 요한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창조와 그 말씀이 육신을 이룰데 대한 그의 신념에서 물질계나 정신계를 막론하고 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정적 태도를 확신했다. 
- 세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피조물 전체, 특히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어둠속에 거하는 악한 일을 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그런 인간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된다. 
- 요한은 개변주의자들의 동기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그룹의 분리주의를 결합시켰다. 

3) 어거스틴과 문화의 개변
- 개변주의자들은 배타적 기독교의 반문화주의에 대항하며 동시에 문화적 기독교의 타협적 태도에 대항해야 했다. 
- 어거스틴은 그가 훈련받고 가르쳤던 도덕위에 은혜의 경험의 결과에 따라서 가치 변이 또는 방향 재지정을 꾀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이다. 그 뜻은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방향을 전환시키고 다시 생기를 불어 넣으며 거듭나게 한다는데 있다. 
- 칼빈에게 있어서 복음이 현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게 하려는 의도는 루터보다 강하다. “인간은 각자의 직업활동에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그이 보다 역동적인 직업관, 국가는 다만 악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다는 소극적인 직책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그의 국가관,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 타락의 폐허 가운데서도 여전히 빛나는 인간성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견해, 육체의 부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그의 교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과 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어서 인류의 본성과 문화를 변혁시켜 마음속에 기록된 뮬법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로 될게 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게 했다. 

4) 모리스의 견해
-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 안에 나타난 완전주의의 주요 대표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생활의 변혁자이다. 
- 에드워즈는 창조, 죄, 칭의에 대한 민감하고 심오한 관점과 천년왕국적인 희망과 회개의 방법에 대한 그의 이해등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그 문화의 갱신자라는 사상의 운동을 수립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 모리스는 요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비사회적인 기독교인, 비기독교적인 사회주의자 모두와 충돌했다. 

7장. 하나의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
1) 결정적인 결론
제한된, 적은 믿음을 받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최후 단언을 내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찬탈행위가 될것이다. 
- 이 결론은 이론적인 통찰이나 전망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찰에서 행동으로, 통찰에서 결단으로 이동함으로써 꾀해지고 획득되는 것이다. 

2) 신앙의 상대주의 
결론들은 개인의 부분적이고 분완전하며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에 상대적이다. 
해결책과 결단은 다 상대적이다. 
우리의 추론과 결단이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가치의 상대성

- 우리 개인들, 사물들, 운동들의 상대적 가치를 다룰 때, 이 모든 실재가 그들의 상호관계에서 여러 가지 가치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사회적 실존주의
- 결단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색적인 탐구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라 자기에게 참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순간에서 행동하는 책임적 주체로서 자유롭게 내려야할 결단인 것이다. 
- 우리는 역사와 사색에서 뛰어나와 행동으로 얾겨가야 한다. 결단한다는 것은 개인적 책임 아래서, 우리에게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신앙의 열정으로써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결단에서 우리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 구러면서도 이지적인 것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 

4) 의존적 자유
- 우리에게는 믿음안에서 선택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신앙은 초월적 원인의 현존안에 있는 자아들의 공동체 내에만 실재한다. 
“믿음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그룹 또는 한 역사적 시간이 교회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부분적, 상대적인 일을 하고 또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가 교회의 머리실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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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9(2014-4-7)


어느 덧 올해의 1/4이 지나갔습니다. 정신없이 봄 학기를 보내다 보니 소식을 전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오늘에야 쓰게 되네요. 지금은 모든 이번 학기 모든 수업은 마쳤고 페이퍼의 압박을 받으며 마감의 힘을 의지해서 페이퍼를 쓰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바쁠 때 소식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그럼 지난 3개월간의 저의 삶을 나눕니다. (이 소식도 4월 3일날 썼다가 마무리 못하고 오늘에야 보냅니다)


이번학기 수업들

이번 학기에는 3개의 수업(경제, 성경속의 세계관, 중세교회사)을 듣고 1개의 수업(환경문제)을 청강했습니다. 경제관련 수업(Financial Stewardship)은 조성표 교수님과 김승욱 교수님이 재정과 경제문제를 나눠서 강의해주셨습니다.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재정 사용에 대한 자세, 교회안의 재정 문제등과 기독교 경제학이 가능한가? 세계화의 문제등의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속의 세계관>은 전성민 교수님께서 출애굽기를 주해하는 것을 통해서 진행되었습니다. 역시 전문 구약학자답게 다양한 자료들을 가지고 출애굽기의 다양한 해석을 접하는 것을 통해서 세계관을 평가하고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시대가 성경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외치지만 여전히 문제인 이유는 바르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에 나의 입맛에 맞추어 성경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지를 바르게 먼저 해석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중세교회사>는 지금 대전에 계신 배덕만 교수님이 오셔서 강의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인하 JOY에서 처음 단계 성경공부를 했을 때 저의 1-2단계 리더였던 숙경 누나의 남편이기도 하고 죠이선교회에서 몇 번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수업을 듣게 되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원래 목사들은 중세교회사 과목을 면제 받는데 제 경우에는 특별히 담당자가 초대교회사를 면제해주어서 중세교회사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아니면 청강을 할 생각이었지요) 수업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들은 여러 수업들 중에 최고의 명강의였습니다. 초대교회부터 현대 복음주의의 역사까지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고 강의해주시는데 모두에게 아주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듣는 교회사는 일반 교회사라기보다는 장로교회사에 가까운데 장로교회의 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서로 다른 교파들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알게해주는 좋은 강의 였습니다.(다음 사이트에 접속하시면 현재 테스트중인 시험강좌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moodle.worldview-media.com) 








여러 행사들

1. 쥬빌리 신년 수련회(1/1-2)

쥬빌리 채플의 신년 수련회를 Hope에 있는 Camp Squeah retreat centre에서 가졌습니다. 캠프장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쉼이 되었습니다. 교회 식구들과 함께 야외로 나와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했습니다. 야외에서 함께 발야구, 축구를 하고 예배(쥬빌리의 비전을 나눔)를 드리고 Disc 검사를 한 후에 유형별로 웍샵을 진행했습니다. 한 공동체안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와 성향의 사람들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고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2. 다양한 특강들

이곳에 있으면 좋은 것이 한국에서는 책이나 소식으로만 접할 수 있는 좋은 강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기회가 되면 직접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월 11일에는 저희 VIEW에서 폴 스티븐스 교수님을 모셔서 <일터 신학> 특강을 들었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대가의 강의에서 역시 포스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가을학기에는 폴 스티븐스 교수님이 VIEW에서 직접 강의를 해주시기로 해주셨습니다. 

1월 28-29일에는 크레이그 바돌로뮤(성경은 드라마다의 저자) 교수님의 “Doctrine of Creation”, “Reading the Bible” 강의를, 3월 25일에는 리젠트에서 열린 이안 프로반 교수님의 “Seriously Dangerous Religion” 출판 강연회에 전성민 교수님과 몇몇 원우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런 강의 들을 들으면 먼저 잘 안들리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간혹 들리는 내용들과 영어공부에 대한 도전을 받습니다. 






3. 다양한 행사들

이번 학기 제가 담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역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쥬빌리 채플에서 인터네셔날 학생들 모임, TWU 한인 학생 모임(매주 목요일), VIEW 임원, TWUGSA의 ACTS 대의원, 학교내의 Conference job...



여러가지 모임을 하지만 큰 부담은 없이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TKC(Trinity Korean Community) 모임은 매주 목요일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전 11-12시에 모이기에 시간에 부담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입니다. 이 TKC학생들과 2월 26-27일 VGC(View Global Centre)에서 엠티를 가졌습니다. 삽겹살 파티와 이후에 런닝맨, 쟁반 노래방등의 게임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새벽까지 세어링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의 밤샘을 하면서 이제 20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마지막 사진은  Trinity Japaness 모임과 함께 한 시간)


VFM은 매달 한번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1월 11일에는 폴스티븐스 특강으로, 2월 1일(토), 3월 2일(주일), 3월 29일(토)에 VIEW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교제를 함께 하고 예배와 나눔, 기도회, 그리고 마지막 모임에서는 White Elephant라는 행사를 가졌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이트 참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3296)




4. 밴쿠버 시내 관광

이곳 캐나다에 와서 벌써 1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 제대로 밴쿠버 시내를 돌아보지 못했었는데 함께 공부하는 문요셉 목사님 가정과 함께 밴쿠버의 여러 유명 장소들을 돌아봤습니다. 다운타운에 있는 15분마다 증기로 연주가 나오는 Gastown Sream Clock,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스탠리 파크, 스키장이 있는 Seymour 산을 들렀습니다. Seymour에서는 눈썰매를 준비해가서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한솔이는 아직 어려서 눈썰매를 무서워했지만 한결이는 너무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기쁜 소식

이곳은 가을학기와 봄학기가 바로 연결되서 진행되어서 봄학기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학비도 만만치 않고 의료 보험과 차량 보험이 거의 맞물려 있어서 모두 목돈이 들어가야하는 일이어서 어려웠는데 JOY 몇몇 선배님들이 특별후원금을 보내주셨고 VIEW에서는 지난 가을학기 성적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적 장학금은 전체에서 1-2등에게 주는 목적헌금인데 이번에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세밀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어서 감사드립니다. 




기도제목

1. 이번 학기 논문들을 잘 마무리 하도록

2. 왼쪽 어깨가 계속 아픈데 빨리 낫도록

3. 교회의 인터네셔날 학생 사역과 TKC 한인 학생 모임을 위해서 

4. 여름방학의 시간을 잘 보내도록

5.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참고로 사진이 첨부된 소식지를 보실 분들은 제 블로그를 peterjoy.tistory.com


2014년 4월 7일 캐나다 TWU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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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링크는 아래입니다. WCC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반대가 많은데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 비판내지는 찬성을 하는게 필요할듯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2419


입력 : 2013.03.27 18:19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

WCC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로운 확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2006년 포르토알레그레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이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확언을 채택하기 위해 수고하며 공헌하였다. 이 새로운 성명서는 2013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총회에 제출될 것이다. 1961년 뉴델리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된 이후 선교와 전도에 대해 WCC가 발표한 공식성명서는 1982년에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선교성명서는 2012년 9월 5일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린 WCC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성명서는 변화하는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비전과 개념과 방향을 찾는 에큐메니칼 통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성명서는 WCC회원교회들과 그 협력선교기구들을 너머 더 광범위하게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물을 위한 생명의 풍요를 향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

1.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oikoumene)을 당신의 형상 안에서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계속 일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요 3:16)으로 믿는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생명을 지탱시키고, 생명에 힘을 주시며,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창 2:7, 요 3:8). 생명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로 초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하게 생명을 누리는 비전을 증거하도록 권능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2.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거룩한 삼위를 하나로 묶는 그 사랑은 온 인류와 피조물에게로 넘쳐흐른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이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요 20:21) 소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주신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생명을 축하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산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요 20:22)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령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 선교를 어떻게 다시 계획할 수 있을까?

3. 성령 속에 있는 생명은 선교의 본질이며, 우리가 무엇을 왜하는가 어떻게 우리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의 핵심이다. 영성은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거룩한 선물이며 생명을 긍정하고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이러한 선교적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람들의 영적 헌신을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변혁의 역동성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으로서 선교를 회복할 수 있을까?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부분적 구원을 주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피조물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를 우주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명백한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5. 기독교 선교역사는 선교의 한 중심지로부터 “미전도 지역”, 혹은 땅 끝까지 이르는 지리적 확장의 개념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의 다수가 남반구와 동양에 살고 있거나 그 곳에서 태생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고 표현되는 급속한 교회의 지형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민은 전 세계적인, 다 방향적인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지형을 재형성하고 있다. 강력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이 다양한 지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무게 중심의 변화”가 선교와 전도의 신학과 의제와 실천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는가?

6.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사회특권층으로부터 소외계층으로 발생하는 운동이라고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교의 주된 역할을 하는 대리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하고 있다. 선교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러한 역할의 반전은 강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들을 택하셔서(고전 1:18-31)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선교를 진전시키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부를 향한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로 개념의 전환이 일어났다면, 그 주변부 출신 사람들의 독특한 공헌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선교와 전도를 재 구상 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경험과 비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7. 우리는 돈에 대한 숭배가 복음의 신뢰성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시장 이념은 글로벌 시장이 무한대로 성장하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선전을 퍼트리고 있다. 이러한 신화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 인간성만이 아니라 온 피조세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글로벌 시장 안에서 어떻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시장의 영을 이길 수 있을까? 전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생태적 부정의와 위기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8. 모든 기독교인들, 교회들, 그리고 회중들은 구원의 좋은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름 받았다. 전도는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담대하지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나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당연한 참된 신앙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 안에서 교회는 전도에 대해 새롭게 헌신해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방법 가운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을까?

9. 교회는 다종교, 다문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도 세계인들이 서로의 정체성과 일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역적으로 또한 세계적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 평화, 정의가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종사한다.  다원성은 교회가 만나는 도전이며 종교 간의 대화와 문화 간의 소통에 대한 진지한 참여는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있는 세계 안에서 생명 살리기 선교를 공동으로 증언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에큐메니칼 신념들을 가져야 하는가?

10.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하기 위해 세상에 주신 선물이다. 교회가 맡은 선교는 세상 속에서 새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세상 속에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믿고 하나가 되기 위해(요 17:21) 우리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일치 가운데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상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갱신하여 충만한 생명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11. 이 선교성명서는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선교(mission Dei) 안에 성령의 선교를 이해함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성명서의 본문은 네 가지 제목으로 내용을 다루었다.

●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
● 해방의 영: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 오순절의 영: 만유를 위한 복음

이러한 관점들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기독교 지형 속에서 역동성(dynamism), 정의, 다양성, 변혁을 선교의 중심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오늘날 선교와 전도에 대한 10가지 확언을 응답으로 제시하면서 마칠 것이다.

Ⅰ.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

1. 성령의 선교

12. 하나님의 영(ru’ach)은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창 1:2) 생명과 인간 숨결의 근원이 되셨다(창 2:7).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지혜(잠 8)와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사 61:1), 마른 뼈에서 생명을 일으키시고(겔 47), 꿈꾸게 하시고(욜 2),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으로 개혁을 일으키셨다(대하 7:1).

13. 창조 때에 수면 위를 운행하던 영과 동일한 하나님의 영은 마리아에게 임하여(눅 1:35) 예수를 낳으셨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권능을 부으시고(막1:10), 선교하도록 파송하신(눅 4:14, 18) 분은 성령이셨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영혼을 버리셨다(요 19:30). 그분은 죽음 속에서, 무덤의 냉기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다(롬 8:11).

14.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동체에 나타나셨고, 그의 제자들을 선교로 파송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22).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의 은사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 증거 하는 새 공동체를 형성했다(눅 24:49, 행 1:8). 초대교회는 일치의 영 안에 함께 살면서 성도들 사이에 소유를 나누었다(행 2:44-45).

15. 피조물 가운데 성령의 경륜의 보편성과 성령의 구속 사역의 특수성은 둘 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고전 15:24-28)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성령의 선교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은 종종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일하신다(눅 1:34-35, 요 3:8, 행 2:16-21).

16. 성경은 성령의 선교적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음을 증언한다. 어떤 견해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완전히 의존적이고, 보혜사이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이후에 위로자와 변호자로서 오실 분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은 선교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파송과 확장을 강조하는 선교학을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에 대해 성령론적으로 집중하면 선교는 본질적으로 기독론에 근거하며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련된다고 인정하게 된다.

17. 또 다른 견해는 성령은 우리를 “온전한 진리”(요 16:13)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며 온 우주를 끌어안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시는(요 3:8) 것을 강조하면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근원(source)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종말론적 모임(synaxis)으로 선포한다. 이러한 두 번째 견해는 성도들이 성만찬 모임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감지하고 미리 맛보는 체험을 한 후에 평화롭게 (선교로) 나아가는 것을 이론화 했다. 이처럼 파송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예배 후에 예배”라고 부른다.

18.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삼위일체의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랑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중단 없이 선포하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온 피조세계 안에 역동적으로 참여하심을 지속적으로 확증하는 신앙 증언이 일어난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2. 선교와 피조물의 번성

19.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하나님 선교는 창조행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피조세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서로 얽혀있다.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항상 은혜를 주시는 활동 속에 우리 모두를 포함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소한 인간 중심적인 접근을 넘어서 모든 피조생명체와 우리들과의 화해된 관계성을 표현하는 선교 유형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땅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땅이 인간의 부정의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창 4:10).

20.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사실상 생태정의,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그리고 피조세계를 존중하는 영성의 발전 등의 캠페인들을 통해 사실상 우리 교회 안에서 이미 긍정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온 피조물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인 화해된 일치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다(고후 5:18-19). 우리는 피조물은 버림받고 오직 영혼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피조세계와 우리의 몸은 둘 다 성령의 은혜로 변화될 것이 틀림없다. 이사야의 비전과 요한 계시록이 증언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은 새로워질 것이다(사 11:1-9; 25:6-10; 66:22; 계 21:1-4).

21. 우리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 우리 존재가 창조세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은 상호 변혁적이기에 하나로 엮여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둘 없는 하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면, 이웃에 소속 됨 없이도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고 잘못 믿는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일탈하고, 다른 피조물들이 아파하고 호소하는 동안 단지 자기 기분을 달래주는 영성에 빠지게 된다.

22. 우리는 우리의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의 선교와 관련하여 새로운 겸손을 요구하는 새로운 회개(metanoia)가 필요하다. 우리는 선교에 대해 인간이 다른 대상을 향해 행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들은 창조주의 사역을 찬양하는 가운데 모든 피조물과 친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연은 인간을 향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 세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혜문서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한다고 확언한다(시 19:1-4, 66:1, 96:11-13, 98:4, 100:1, 150:6). 피조세계 안에서 창조주의 기쁨과 경이는 우리의 영성의 근거들 중에 하나가 된다(욥 38-39장).

23.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영적인 관계를 확언하고 싶지만, 지구는 오염되고 있으며 착취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주의는 무한성장 대신 끝없는 자원 착취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탐욕은 지구온난화와 다른 형태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되고 땅이 치명적으로 손상되면, 우리는 구원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상상할 것인가? 다른 피조세계가 멸망하는데 인간만 구원받을 수는 없다. 생태정의는 구원과 분리될 수 없고 땅위의 모든 생명의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성 없이 구원은 올 수 없다.

3. 영적 은사와 영분별

24.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고전 12:7; 14:26)과 온 피조물의 화해(롬 8:19-23)를 위해 나누어야 하는 은사를 값없이 공평하게 주신다(고전 12:8-10; 롬 12:6-8; 엡 4:11).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는 영분별이다(고전 12:10). 우리는 억압된 사람들이 해방되고, 깨어진 공동체에 치유와 화해가 나타나고, 피조물의 회복을 포함하여 모든 차원에서 생명의 충만함이 긍정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분별한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세력과 생명파괴가 만연한 곳에서 악령들이 있음을 분별한다.

25. 초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많은 영들이 있는 세계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은 악령들, “섬기는 영들”(천사들, 히 1:14), “통치자들”과 “권세들”(엡 6:12), 짐승(계 13:1-7), 그리고 선하고 악한 다른 권세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들에 대해 증언한다. 사도바울은 또한 일부 영적투쟁(엡 6:10-18, 고후 10:4-6)에 대해 진술하며 악을 대적하라(약 4:7, 벧전 5:8)고 명령한다. 교회들은 세상에 파송되어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고,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실현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행 1:6-8).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분별할 때, 종종 하나님의 성령은 질서를 뒤흔들고, 우리를 한계 밖으로 이끌어내시고,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응답하도록 요청받는다.

26.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적이고, 개인적, 공동체적이지만, 또한 밖으로는 선교적인 노력으로 인도한다. 성령에 대한 전통적 상징과 명칭(가령 불, 빛, 이슬, 샘, 기름부음, 치료, 녹임, 따뜻함, 위로, 위안, 힘, 휴식, 씻김, 빛냄)들은 성령이 우리의 삶과 친숙하며, 또 선교가 관심 갖는 관계성, 생명, 자연의 모든 측면과 성령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양한 상항과 순간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점들, 만남의 공간, 그리고 중요한 투쟁 장소로 인도함을 받는다.

27. 성령은 지혜의 영(사 11:3, 엡 1:17)이며, 모든 진리로 인도한다(요 16:13). 성령은 인간의 문화와 창의성을 고취시킨다. 그래서 모든 문화와 상황(context) 안에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것과 협력하는 것이 우리 선교의 부분이 된다. 우리는 식민지 건설과 연결된 선교활동이 종종 지역 주민의 문화를 폄하하고 그들의 지혜를 인정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생명을 긍정하는 지역의 지혜와 문화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우리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멸시와 조롱을 받아온 전통들 속에 살아 온 사람들의 진술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지혜가 피조물 안에서 성령의 생명과 우리를 다시 연결할 수 있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는 방법을 사고하도록 돕는 긴요하고 새로운 정위력(定位力)을 제공하기도 한다.

28.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포함하는 성령의 열매(갈 5:23)를 맺으라고 교회를 격려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성령의 사랑과 능력이 활동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4. 변혁적 영성

29. 기독교인의 참된 증언은 우리가 선교에서 행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교적으로 사는 방식에도 해당된다. 선교하는 교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친교 안에 깊게 뿌리내린 영성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영성은 우리의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극과 동기가 되고, 삶의 여정에 동력을 준다. 그것은 충만한 삶의 에너지이며 생명을 거부하고, 해치고, 축소하는 모든 세력, 권력 그리고 제도에 저항하는 헌신을 요구한다.

30. 선교 영성은 늘 변혁적이다. 선교영성은 경제와 정치 안에 심지어 우리의 교회 안에 생명을 파괴시키는 가치와 제도가 있다면 그 모든 것에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값없는 생명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우상숭배 수준의 거만함, 불공평한 제도, 독재정치, 현 세계경제질서 속에 있는 착취와 대결하게 한다. 경제와 경제적 정의는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의 핵심에 해당하기 때문에 늘 신앙의 문제가 된다.” 선교 영성은  하나님의 생명의 경제에 기여하고, 개인의 탐욕을 만족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생명을 나누고, 현상 유지를 원하는 권력자들의 자기 이익에 도전하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31.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하고 말씀하셨다. 무한성장정책은 세계 자유 시장을 통해 가난한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면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부와 번영을 창출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거짓 약속을 한다.”  그것은 끝없는 착취를 통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부(富)가 무제한 성장하도록 보호하는 돈의 세계적인 제도이다. 이러한 탐욕의 탑은 하나님의 온 가족을 위협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돈의 제국에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32. 변혁은 파스카 신비의 빛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2). 억압과 차별과 고통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전 1:18). 우리 시대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제자도가 치러야 하는 모든 희생을 깨닫게 하면서 신앙적 증언을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순교에 직면해서도 신념에 따라 살도록 용기를 준다.

33. 십자가는 선교와 교회 안에서 힘의 오용과 부당한 권력남용에 대해 대해 회개를 요청한다. “교회와 세계 안에서 우리를 분열시키고 괴롭히는 힘의 불균형과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을 겪으면서, 우리는 회개하며, 권력 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권력 구조를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성령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강한 자가 스스로 자기의 특권을 버리도록 도전하신다.

34. 성령 안에서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생명을 충만히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존재하도록 지속시키는 만물을 축하하며, 절망과 염려(시 23편, 사 43:1-5)의 강을 건너기 위해 함께 행진하면서, 생명을 향한 운동을 증거 하도록 부름 받았다. 선교는 성령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도전하시며, 우리의 사적이고 집단적인 여정의 장소와 시간에 새로움과 변화를 주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 안에 자극한다.

35.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반자이지만 결코 길들여지거나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변부로 보이는 장소에서 배척당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방법은 성령의 놀라운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Ⅱ. 해방의 영성: 주변부로부터의 선교

36.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과 지혜로 창조하신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억압된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임재를 선포하기 위함(눅 4:16-18)이라고 선언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시대에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시기로 선택하시고 그의 선교를 완수하시려 두루 다니셨는데, 그것은 온정주의적 자선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 세상의 죄악을 증명했고, 그들의 삶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37.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결하시고 변혁하기 위해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맞이하셨다. 그것은 빈곤, 차별, 비인간화를 낳고 유지시키며 사람과 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와 제도를 포함한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권력의 역학, 세계적인 제도와 구조, 그리고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이 지닌 복합성을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기독교 선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변부로 계속 밀려나는 사람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었다. 그러므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만물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사명으로서 선교를 재구상하도록 교회를 초대한다.

1. 왜 주변부 사람이며 주변화인가?

38.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삶과 교회와 선교 안의 부당함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오직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특권 있는 자가 소외된 자에게 선교할 수 있다는 인식에 반대하며 대안적인 선교운동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접근은 억압과 주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 주변부로부터의 선교는, 주류가 되는 것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와 개성이 확인되고 존중되는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주변부에 사는 것은 정의와 존엄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주변부에 사는 것은 스스로 교훈을 만들어 낸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리권이 있고 주류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연약하지만 배제시키는 세력이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과 그들의 투쟁의 절박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특권층 사람들은 주변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투쟁에서 배울 것이 많다.

39. 주변부 사람들은 능력부여의 박탈, 기회와 정의에 대한 거절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한다. 주변부 사람들은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겪으면서 활발한 희망과 집단적 저항, 그리고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인내의 담지자들이 된다.

40. 선교활동의 현장(context)은 선교의 범위와 성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모든 선교사역자들은 사회적 위치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선교적 관점들을 형성하는 다양한 가치정향(value-orientation)을 인정하는 선교학적 성찰을 해야 한다.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주변부에서 힘의 중심지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변부에 남아 있게 함으로써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힘의 구조를 변혁하도록 요구받는다.

41. 과거와 현재에서 선교에 사용된 유력한 표현들은 주로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을 향해서 사용되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주변부 사람들을 선교 활동의 적극적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보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된 선교는 종종 억압적이고 생명을 부정하는 제도들과 연루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특권층 주류와 제휴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들에 도전하는데 실패했다. 주류에서 출발하는 선교는 온정주의적 태도와 우월의식이 동기로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동일시했고, 그러한 주변화로 희생된 사람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42. 주변부 사람들의 공동의 주요 관심은 사회, 문화, 문명, 국가, 심지어 교회까지도 모든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화와 억압을 가져오는 불평등의 근거에는 부정의가 있다.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은 하나님의 본성과 주권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그러므로 모든 선교행동은 모든 인간과 땅의 신성한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참조 사 58).

2.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

43. 하나님 선교(missio Dei)를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와 자연 및 시간과 현장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활동하시며, 정의, 평화, 화해를 통해 온 세상에 생명을 충만하게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진행되는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에 참여하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로 만드는 악령을 분별하고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적 이념을 해체하고, 원주민들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인종차별과 카스트제도의 사회적 정착에 도전하는 것을 수반한다.

44. 교회의 희망은 약속된 하나님 통치가 성취되는 것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올바른 관계회복을 수반한다. 이러한 비전은 비록 종말론적 실재를 말하고 있지만,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에게 깊은 활력과 정보를 준다.

45.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고(막 10:45),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눅 1:46-55), 상호의존적이고, 호혜적인 사랑의 특징을 가진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정의, 인간존엄, 생명의 대의를 지키는 운동과 솔선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흔쾌히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한다.

3.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46.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좋은 소식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된다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포용성은 인간과 피조물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이 서로를 인정하고, 각각의 신성한 가치를 서로 존중하고 유지하는 정당한 관계를 촉진시킨다. 그것은 또한 각 개체가 공동체의 삶 속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같은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평생의 임무를 부여 받는 것이다(갈 3:27-28). 그러므로 인간을 해치는 어떤 종류의 차별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다.

47. 예수님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마 20:16). 교회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철저한 호의를 베푸는 만큼,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가치를 구현하는데 헌신하는 것이다(사 58:6). 교회가 자기중심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택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하나님 통치가 인간실존에 스며드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적인 상호작용은 물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 안에서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표명을 할 때 폭력을 포기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것이다.

48. 그러나 현실에서 선교, 돈, 정치권력은 전략적 동반자들이다. 비록 우리의 신학적, 선교학적 대화는 교회의 선교가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많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실천적인 면에서 부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교회의 관료제 유지를 위한 재정확보를 위해 로비 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거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권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어떤 것인지 성찰하도록 특별히 도전한다.

49.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생명을 긍정하는 계획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가치와 관습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형태의 차별이 지닌 죄성을 인정하고 부정의한 구조를 변혁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러한 소명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기대가 생겨난다. 교회는 그 서열 안에 억압적인 힘이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 대신 반지배문화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로서 활동해야 한다. 신구약성경 안에서 언약공동체를 향한 명령은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마 20:16)는 언명으로 특징 지워진다.

4. 치유 및 온전성으로서의 선교

50.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치유와 온전성을 추구하는 행동은 선교의 중요한 표현이다. 치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적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역을 지속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의 특징이기도 하다(마 10:1). 치유는 또한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 12:9, 행 3). 성령은 생명을 양육하는 선교를 하라고 교회에게 권능을 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기도, 목회적 보살핌, 전문적 의료 활동을, 다른 한편으로는 고난의 근원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 부정의한 구조의 변혁 그리고 과학적 연구를 포함한다.

51. 건강은 육체적, 정신적 복지 이상의 것이고, 치유는 본래 의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건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성경적, 신학적 전통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다차원적 통일체로 보고 몸·혼·정신을 서로 관계된 것, 서로 의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생태학적 차원 및 온전성을 확언한다. 건강은 온전성이라는 의미에서 현재에 실질적 가능성이고, 종말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조건이 된다. 온전성은 정(靜)적인 조화의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동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부정의는 공동체 건설에 방해물이며 그래서 온전성에도 방해물이다. 에이즈와 면역결핍증을 포함하여 의학적 조건이나 장애를 근거로 한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거역하는 것이다. 방치되었던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삶의 모든 부분들이 포용될 때 그리고 차별받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사랑으로 함께 모이는 곳마다 그러한 온전성이 경험될 수 있고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통치의 징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52. 사회는 장애와 질병을 죄의 결과로 혹은 해결되어야 할 의학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학적 모델은 개인의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을 교정하거나 치료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주변화 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함이 있다”거나 “병든”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성경은 많은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치유하셨고, 공동체 구조 안에 그들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치유는 결함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을 고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에 해당한다. 물론 온전해지기 위해서 손상된 부분들은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치료를 고착화시키는 것은 성경적 관점을 진척시키기 위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선교는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와 사회의 삶 속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촉진시켜야 한다.

53. 기독교 의료선교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질 높은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만인 건강의 성취라는 목적이 있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교회는 건강과 치유에 참여할 수 있고 현재에도 참여하고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교회는 진료소와 선교병원들을 세우고 지원하며, 상담과 보살피는 단체 및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역 교회들은 병든 교우들을 방문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할 수 있다. 치유과정에는 병자와 함께하는 기도 혹은 병자를 위한 기도, 고백과 용서, 안수, 기름 바르기, 카리스마적인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고전 12장)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용하여 치유자가 영광을 누리거나 거짓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승리주의적 치유집회 등, 부적절한 예배형태는 사람들에게 깊은 해악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경우처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일어나는 치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54. 기독교 공동체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고통 속에 신음하며 구속을 바라는 피조물의 일부분이지만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고, 이곳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 될 수 있다(롬 8:22-24). 성령은 여러 방법으로 정의와 치유를 위해 일하시며 그리스도의 선교를 구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특별한 공동체 안에 거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Ⅲ.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1. 하나님 선교와 교회의 생명

55. 교회의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선교는 창조와 구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친교(koinonia)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운동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열게 한다(고후 5:18-21).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도록 부름 받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의 나눔은 모든 선교와 전도의 근원이다.

56. 성령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문화와 상황을 위하여 온 인류에게 주시는 영감 있는 선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내주(內住) 하시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시어 그러한 목적들이 실현되도록 참여하게 하신다.

57. 교회는 역사 안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 경험적으로, 선교를 위해 탄생되었다. 교회와 선교는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서로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숙한데 그것은 교회에게 선교하도록 권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에 파송 하시는 것과 동시에 교회 안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타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58. 하나님 선교에서 출발하면 것은 “아래로부터”(from below)의 교회론적 접근으로 인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가 교회를 소유하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 확장 계획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현하는 교회의 계획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교회의 사도성에 대해 역동적인 이해가 나온다. 사도성은 시대를 통해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 선교와 교회 일치

59.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은 선교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속해 있는 형제와 자매가 된다(히 10:25). 교회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교회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그 존재 안에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언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함께 모임(coming together)이고 평화 가운데 흩어짐(going forth)이다.

60. 선교와 일치는 실천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서로에게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통합된 것은 중요한 발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선교와 교회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으로 선교적이 되도록 새롭게 시도하면서 우리의 세기(世紀)에 이 여정을 지속해 가야 한다.

61. 오늘날 교회는 여러 면에서 아직도 하나님 선교의 적절한 구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때로 선교와 교회 분열의식은 여전히 팽배하다. 선교에서 온전하고 진실한 일치가 부족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선교의 성취에 대한 진정성과 신뢰성이 손상되고 있다.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다(요 17:21). 이처럼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일치에 대한 성찰을 더 광범위한 일치이해로, 즉 인류의 일치 및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전체의 우주적 일치로 개방할 필요가 있다.

62. 자유시장경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환경은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과 파라처치(para-church) 운동들이 남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기를 추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런 환경은 심지어 기존교회 교인들에게 소속교파를 바꾸라고 설득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타인 존중의 태도와 양립될 수 없다. 예수님은 권력과 돈이 아니라 자기 비움(kenosis)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손한 이해는 우리의 선교 방법을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며 진수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 선교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63.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책임지는 전도형태를 포함하여, 동반자 관계와 협력 정신을 가지고 공동 증언하는 방법을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요구 받는다. 공동 증언이란 “비록 분열되었지만, 교회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진리와 생명의 거룩한 은총을 함께 나누고 경험하였는지 표명함으로써 함께 전달” 하는 것이다.

64. 또한 교회의 선교적 본성은 교회와 파라처지 조직이 더 친밀하게 관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MC와 WCC의 통합은 교회일치와 선교에 대해 사고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일치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제도적인 문제에 관계되지만 선교 단체들은 선교에 유연성이 있고 자체 결정구조를 갖는다. 파라처치 운동은 교회의 중심 진리를 통해서 책임성과 방향성을 찾을 수 있는 반면, 파라처치 조직은 교회가 그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65. 협력과 일치에 솔선을 보였던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선교 안에 일치(unity in mission)를 표현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구조이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 이후, CWME는 세계도처의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복음주의, 오순절, 토착교회들로부터 나오는 선교와 일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WCC의 상황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가까운 실무관계를 촉진시켰다. 복음주의자들과의 협력증진은, 특히 로잔 세계복음화운동(LMWE)과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관계는 일치 안에 선교(mission in unity)라는 주제에 대해 에큐메니칼 신학적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는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증거 해야 한다는 공동의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다.

66. 일치의 영이신 성령은 또한 다양성 속에 일치를 알리기 위해 주도적이고 건설적으로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포용적이고 상호책임적인 공동체를 성장시키도록 하기 위해 안전하고 적극적인 육성환경(nurturing environment)에서 서로의 차이를 탐구하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동적 상황과 자원을 제공하신다.

3. 교회에 선교하는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

67.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내주하시며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신다. 그래서 선교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요구에 근거한 절박한 내적 충동이 되고(고전 9:16),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진실한 삶을 평가하는 시험이며 척도가 되기에,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충만함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일은 특별한 개인들이나 전문단체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68. 인류와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를 신뢰성 있게 하는 것은 가능한 곳에서 일치된 소리를 내고, 공동으로 증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소망(벧전 3:15)을 공동으로 증언하고 설명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그래서 교회는 풍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왔는데, 그 선언들의 일부는 연합교회(uniting) 혹은 연합된 교회(united)들로부터, 또한 일부는 교회 간 대화 모임들을 통해 생산되었는데 하나의 살아있는 치유와 화해의 유기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 회복을 추구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치유와 화해 안에서 재발견하는 일은 오늘날 선교신학의 중심이 되었으며 중요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69. 교회들 사이에 “가시적” 일치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구조 차원에서만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선교의 대의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선교 안에 일치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되며 교회 직제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일치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정의를 찾으라는 성경적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의 소명은 때로는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일치를 타파하는데 관련된다. 진실한 일치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성과 존경을 수반한다.

70. 오늘날 광범위한 규모의 세계적인 이민 현상은 교회가 아주 실천적인 방법으로 일치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말씀을 듣고 있다. 교회는 이민 공동체를 위한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또한 문화 간의 교류를 위해 의도적인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 선교를 섬기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았고, 다양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공동 증언을 하는 다문화 목회와 선교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이민정책에 대해 정의를 옹호하고, 외국인혐오증과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성, 어린이, 미등록노동자는 모든 상황의 이주민들 사이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여성들은 또한 자주 새로운 이민정책의 첨단에 서게 된다.

71. 하나님의 환대는 문화적으로 유력한 집단을 주인으로 이주민과 소수자를 손님으로 보는 우리의 이원적 개념을 극복할 것을 요청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환대 안에서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모두 겸손하게 우애를 가지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성령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4. 지역교회: 새로운 주도자

72. 하나의 교회(the one Church) 안에서 성령의 일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각 지역교회가 자신들의 구체적인 정황에 응답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날 변화된 세계는 지역교회가 새로운 주도권을 발휘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속화되고 있는 북반구에서 “신수도원주의”(new monasticism),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황적 선교(contextual mission)가 교회를 재정의하고 재활성화 하고 있다. 상황에 알맞게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북반구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대중술집(pubs), 커피숍, 개조된 영화관에서 모이고 있다. 온라인을 교회의 삶에 끌어들이는 것은 비선형적(non-linear), 시각적, 실험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73.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같이 지역교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조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인되기를 수용하거나 거절 하는 것은 지역교회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과 연관이 있다. 그러한 경험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변혁의 동인(動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선교의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전선이며 주요 대리자이다.

74. 예배와 성례전은 변혁적 영성과 선교를 교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상황적 성경읽기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와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우리가 공동체 안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 선교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 만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정직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편안한 자리를 벗어나야하고 경계선을 넘어가야 한다.

75. 오늘날 지역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와 인종의 경계를 넘도록 강조하고, 문화적 차이를 성령의 선물로 확신시키는데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민을 문제로 인식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민은 지역 차원에서 문화간 교회와 다문화교회를 설립하는 기회를 창조하기 위한 기회를 준다. 모든 교회는 다양한 문화공동체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을 제공하고, 우리 시대에 상황에 알맞게 문화간 선교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76. 지역교회는 또한 과거에는 결코 불가능했던 세계적 연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다른 상황에 거하는 교회들 사이에 영감(靈感) 있고 변혁적인 연결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혁신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점점 대중화 되는 단기 “선교여행”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일부의 경우에 가난한 지역교회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거나 현지 교회들을 전부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행은 위험과 염려가 있기만 다양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정황에 노출되는 기회는 그 여행자가 자국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장기 사역을 결정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 지체 안에 전 교회(the whole church)를 건설하는 영적 은사들을 행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고전 12-14).

77. 정의를 옹호하는 일은 국회나 중앙 관청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증언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WCC의 폭력극복 10년(WCC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1)은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담(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에서 “교회는 인권, 젠더 정의, 기후 정의, 그리고 일치와 평화를 악용할 수도 있고 진척시킬 수도 있는 일상의 선택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탄원으로 결론을 맺었다.
일상생활에서 교회가 제공하는 기초 원리들은 지역교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데 명분과 동기를 제공한다.

78. 교회는 각 지역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정황 가운데서 봉사(diakonia)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증언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지닌 신앙과 소망을 삶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종 되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봉사를 통해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는 봉사의 힘이 지배의 힘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 생명 가능성을 육성하며,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설명하는 봉사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변혁하는 은총을 증언하는 봉사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79.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선교적 공동체로서 더 깊게 발견할 때, 자신의 외적인 특성이 전도 안에 나타나게 된다.

Ⅳ.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

1. 전도의 소명

80. 증언(martyria)은 전 세계 안에 있는 전 인류에게 전 복음을 전한다는 구체적인 전도의 모양을 갖는다. 그 목적은 세계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하는 선교활동이다. 전도는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의 삶을 경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81.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행 2:4, 4:20).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해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 하는 것을 포함해서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을 전도자로 부르시지만(엡 4:11),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3:15). 개인들뿐만이 아니라 전 교회가 함께 전도하도록 부름 받았다(막 16:15, 벧전 2:9).

82. 오늘날 세계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신념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진 단체들이 공동체를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개종(proselytism)은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령은 사람들의 설교와 복음의 증언과 동역하시기를 선택하시지만(참조. 롬10:14-15,  고후 4: 2-6), 새 삶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하신다(요 3:5-8, 살전 1:4-6).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폭력적 수단이나 권력의 남용으로 개종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때때로 전도가 왜곡되고 그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상황에서, 정체성이 억압된 비인간적 조건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지배 집단의 의도에 따라 강제 개종에 대한 고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83. 전도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들을 제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은 신뢰와 겸손으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표현으로서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그들과 복음을 나누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혹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직성에 대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대해 나누고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84. 전도는 회개와 믿음과 세례로 인도한다. 죄와 악에 직면하여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요구한다(요 4:28-29, 참조. 막 10:22). 전도는 회심을 일으키며 태도와 우선권과 목적에 변화를 수반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의 구원, 병든 자의 치료, 억압된 자와 온 피조물의 해방을 가져온다.

85. “전도”는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하는 것을 포함해서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교회들 안에는 성령께서 우리의 상황에서 전도하도록 우리는 부르시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적 회심으로 이끄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는 억압받는 사람과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 기독교적 증언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도란 하나님 선교의 한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서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은 선교와 전도의 양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leitourgia)가 증언(martyria), 봉사(diakonia), 친교(koinonia)와 엉켜있는 지역교회의 삶 속에 근거를 둔 전도에 대해 이해하도록 성령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2.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전도하기

86. 전도는 말과 행동으로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언어적 선포 혹은 복음설교(kerygma)를 통한 전도는 완전한 성경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말의 선포와 가시적인 행동이 결합되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게 된다. 전도는 일치와 밀접하게 관계된다. 즉 서로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증명이다(요 13:34-35). 반면 분열은 복음에 방해가 된다(고전 1장).

87. 생명의 충만함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의 동역(同役)을 받아 자신의 지역 현장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의 충성되고 겸손한 섬김의 본보기들이 역사 속에 있고 현재에도 있다. 또한 자신의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교사로서 살면서 사역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겸손과 상호성, 그리고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 일을 했다. 하나님의 성령도 또한 변혁을 가져오기 위해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활동하셨다.

88. 유감스럽게도 이따금 복음을 성육화하기 보다 배반하는 방식으로 전도가 실천되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선교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권리를 긍정하는 것이 수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고(참조. 막 10:45, 마 25:45) 선전이나 어떤 형태의 미끼사용도 없어야 한다. 현대처럼 개인주의화된 상황에서는 전도를 사고파는 “상품”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고, 어떤 모습의 기독교인의 삶을 택할 것인지 자신이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의 복음이 자본주의적 용어들 아래 소비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절하신다. 또한 성령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회심과 변혁을 일으키고 만인을 위한 생명의 충만함을 선포하도록 인도하신다.

89. 진정한 전도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겸손과 존중에 근거하고 있으며 대화 속에서 잘 이루어진다. 전도는 말씀과 행위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 및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촉진 시킨다. “연대 없는 전도는 없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의 메시지를 나누지 않는 기독교 연대는 없다.” 그러므로 전도는 개인 간 관계성과 공동체 관계성을 건설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러한 진정한 관계성은 지역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육성되어지고,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증언은 말뿐만이 아니라 현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진술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단순하게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마도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0. 서로 다른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 증언에 관한 다른 해석들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진정한 전도는 아래의 진술처럼 항상 생명을 긍정하는 가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 교황청종교간대화평의회, 세계복음주의연맹의) 공동성명서 “다 종교적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의 증언: 행동지침”(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의 진술:

a.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권력 남용을 포함해서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에 의해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차별과 억압을 거부한다.
b. 보복이나 협박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 없이 신앙을 준수하고 고백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정의와 평화와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의 선을 증진하는 일에 서로 서로 존중하며 연대한다.
c. 모든 사람들과 인류문화에 대해 존중한다. 반면, 우리의 문화 안에 가부장제도, 인종차별제도, 카스트제도 등등 복음에 도전을 받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분별한다.
d. 거짓증언을 포기하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해하기 위해 들어야 한다.
e. 개인과 공동체가 결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f. 더 깊은 서로 간의 이해와 화해, 공동선을 위한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 혹은 종교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립한다.

9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도전하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다른 이념들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기만과 부정의와 억압을 일삼는 세력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전도는 또한, 그 영향력의 범위만큼, 소망과 사랑 속에서 권력을 향하여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이다(행 26:25, 골 1:5, 엡 4:15).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들을 창설한다는 전망을 가지고 사회 변화에 관계해야 한다.

92. 악과 부정의에 대항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때때로 억압과 폭력과 만나게 되며, 그 결과 고난과 박해,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진정한 전도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우신(빌 2:5-11)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연약하게 되는 것과 관계된다. 로마의 박해 아래서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 된다. 예수는 주님을 따르라는 부름과 영원한 구원을 자기부인(self-denial)과 연결시키셨다(막 8:34-38).

3. 전도,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인의 현존

93. 오늘날 세계의 다원성과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많은 신앙과 이념과 신념을 만난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이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긍정하는 모든 문화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령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시기에 우리는 다른 신앙전통들 안의 성령의 활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다양한 영성들 안에 고유한 가치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다른 사람”을 선교에 동반자로 만들며, 선교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94. 대화는 생명과 피조물의 통전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동의 삶과 목표를 확증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대화란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보다 앞서서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해 오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대와 더불어 시작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그곳에 계시기에(행 17장),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모셔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가 개방적이고, 참을성 있고, 존중하는 태도로 테이블로 나올 수 있게 진솔한 만남을 제공한다.

95. 전도와 대화는 별개이지만 서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지만, 전도가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화는 “서로 간의 책임 있는 만남”이기 때문에, 대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은 정당하다. 더 나아가 진정한 전도는 삶과 행동의 대화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대화의 정신” 즉 “존중과 우정의 태도”에서 이루어진다. 전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을 선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다른 사람에 의해 도전을 받고 경험을 넓히는 것까지 포함한다(행 10장).

96. 특히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대화는 다종교적 상황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도 중요하다. 소수집단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보호해서 모든 사람이 공동의 선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다 사실에 근거한(창 1:26) 인간존엄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와 신앙의 신봉자들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4. 전도와 문화

97. 복음은 특별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실제들과 관계하면서 서로 다른 상황들 안에 뿌리를 내린다. 복음이 그러한 다양한 실제들 안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사람들과 문화적 · 상징적 삶의 세계를 존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미 그곳에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이미 어디에서 활동하고 계시는지 분별하기 위해서 복음은 더 넓은 상황에 참여하고 그 상황과 대화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98. 선교역사에서 복음과 식민지 권력의 결합은 서구형 기독교를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충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만들었다. 경제적 힘이나 문화적 패권을 즐기는 사람들의 전도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 소유를 빼앗긴 사람, 소수자들과 협력해야 하며 그들의 신학적 자원과 비전을 통해 다듬어져야 한다.

99.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개인의 유일성을 손상시킨다. 바벨은 획일성을 강요하려고 시도하였던 반면에 오순절 날에 제자들의 설교는 개인의 특수성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는 일치를 가져왔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방언으로 복음을 들었다.

100.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을 보여 주시고 “땅 끝까지” 가서 각자의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의 정의∙자유·평화의 증인이 되라고 성령으로 권능을 주심으로, 우리 자신의 왕국, 우리 자신의 해방, 우리 자신의 독립(행 1:6)이라는 좁은 관심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신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제도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지시하는 것이고,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보는 것이다(참조. 빌 2:3-4). 우리는 특정 지배문화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의 복잡성을 장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다양성은 우리의 믿음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성령의 선물이다. 가령, 다문화공동체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문화간(intercultural) 신앙공동체는 다양한 문화들이 진정하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고 문화가 복음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장소이다. 동시에 복음은 문화우월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하고 사람들의 문화 속에 성육화(肉化)하거나 뿌리를 내려야 한다 … 우리는 어떤 곳에서 복음이 문화에 도전을 주는지, 문화를 승인하는지, 문화를 변혁하는지 더 잘 분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령의 통찰을 추구해야 한다.”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잔치: 결론적 확언

101. 우리는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특별히 생명의 충만함을 고대하는 억압받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증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눅 14:15)로 부르는 초대이다. 교회의 선교는 그 연회를 준비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잔치는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창조와 풍작에 대한 경축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적인 온 피조물의 해방과 화해에 대한 징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이 성명서의 처음에 제시했던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102. 우리는 하나님 선교의 목적은 생명의 충만함(요 10:10)이며 그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생명이 있는 곳에서, 특히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그리고 온 피조물의 회복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분별 하도록 부름 받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안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영들을 식별하고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는 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도전받고 있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세력들과 생명에 대한 거부가 경험되는 곳에서 악령들을 분별하고 대적한다.

103. 우리는 선교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부터 시작되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재창조 가운데 지속됨을 확언한다. 오순절에 불의 혀와 같이 부어진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셨던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켜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스타일로 이끄시며, 우리가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신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시고 권능을 주사 귀신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게 하신다. 구속 받은 공동체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생명수를 나누며 온 피조물을 치유하고, 화해시키고, 갱신하기 위하여 일치의 영을 찾는다.

104. 우리는 영성이 선교적 활동력의 근원이며 성령 안에서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와 영성과 피조물 사이에 우리의 관점을 재정위(定位) 하려고 노력한다. 예전과 예배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교 영성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더 넓은 피조물을 재연결 한다. 우리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 우리의 존재가 창조세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은 상호 변혁적이기에 함께 엮여 있다고 이해된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우리를 초대하여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경축하도록 한다.

105.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가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생명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창조를 보전하는 책임자이다. 지속되는 자연파괴를 가져오는 과도한 탐욕과 무절제한 소비는 중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구원을 온 피조물의 갱신에서 분리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목적을 넘어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하나님 선교는 모든 생명을 향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선교방법으로 그것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한 지금 행동해야 한다. 선교는 창조세계가 그 중심에 있다.

106. 우리는 오늘날 다방향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선교운동이 남반구와 동양으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확언한다.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남반구와 동양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지역의 상황, 문화, 영성에 근거한 선교학적 표현들을 탐구하도록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상호우애와 동반자 관계를 더 발전시켜야 하고,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 상호의존성을 확언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적 실천은 고난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 및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전도는 자기 비움의 겸손 가운데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또한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전도는 이러한 지형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가치에 모순되는 억압과 비인간화의 구조와 문화에 대해 맞서야 한다.

107. 우리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선교의 대리자이며 선교를 만물의 생명의 충만함으로 이해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다고 확언한다. 사회에서 주변화 된 사람들은 하나님 선교의 주요 동역자들이다. 주변화 되고, 억압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그들의 위험해진 삶에 나쁜 소식인지를 구별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부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주변부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향해 선교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정의와 연대와 포용성은 주변부로부터의 선교의 중요한 표현들이다.

108.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기초해 있으며, 변혁적 선교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우상숭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경제 지구화는 사실상 생명의 하나님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신, 돈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부당한 부의 축적과 번영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는 그러한 우상숭배적인 비전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면서 반-문화적이 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 정의, 평화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과 자연에게 불행과 고난을 가져오는 이러한 거짓 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탐욕의 경제를 규탄하고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거룩한 경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10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성령 안에서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와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서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중심성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제도를 가리키기보다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전도는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교회의 예언자적 소리는 선포되도록 요청 받는 그 때에 침묵해서 안 된다. 교회는 설득, 감동, 확신을 가지고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방법을 갱신해야 한다.

110.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서 필수적이라고 확언한다.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인류를 위하여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폭력적인 수단, 경제적인 이익제공, 혹은 권력남용을 통해 이루어진 개종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 전도할 때에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경과 신뢰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각각의 혹은 모든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복음은 특정 단체에 의해 소유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선교지로 하나님을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행17: 23-28). 성령과 연합한 우리는 생명을 향해 함께 일하기 위해서 문화적 · 종교적 장벽들을 극복할 수 있다.

1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며 권능을 주심을 확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할 때에 역동적이 되고 변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증언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하면서 함께 여행하고, 사도들의 선교를 지속하며 살아 움직여야 한다. 실천적으로 이 사실은 교회와 선교가 일치해야 하며, 서로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생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11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라고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확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온 피조물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소망 가운데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세계기독교미래연구원 원장) 번역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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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탄생


루터는 1521년 4월 18일 라인강변의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철회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대해서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자비로 부탁합니다. 전하와 영명한 군주들, 또는 지위의 높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가능하시다면 선지자나 복음서 저자들의 글을 사용해 증거를 보여주시고, 저의 실수를 드러내 주셔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단 깨닫게 되면 저는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저의 주장을 포기할 것입니다. 동시에 저의 책을 불 속에 던저 버리는 첫번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위 대답에서 그의 입장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 법정은 그에게 분명하게 철회를 할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전하와 군주들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기를 원하시니, 저는 투쟁적이거나 악의를 가지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납득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없다면(저는 단지 교황이나 공의회라 해서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잘못을 저지르며 모순된 행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일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에 저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루터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즉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성경의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권위에 앞서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 루터의 성경에 복종함으로 권력의 압력에 저항하는 행동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태동하였다. 

(터닝 포인트, 7장 마틴 루터의 보름스 국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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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 교수님 강의안 노트필기



강의노트 1강 기독교 경제관이란-노트필기 140116.hwp


강의노트 2강 경제분석의 틀 140116.hwp


강의노트 3강 시장경제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140117.hwp



기독교 경제관이란-노트필기(종합) 140116.hwp


 네번째 파일에 1,2,3강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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