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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커피 안에 녹아 있는 세계관

이 책의 목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채택하도록 촉구"

이 책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벼려서 잘 인식하지 못하는 비기독교적 세계관들을 확인하고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의 삶과 신념을 형성하는 세계관은 대부분 이론이나 지식체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은 문화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일상생활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세계관을 받아들일 때,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평가하여 채택하기 보다는 문화적 접촉을 통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생활의 세계관은 대중적인 인생철학이며, 그 속에는 지성적인 요소가 별로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다. 

- 은밀한 세계관으로 선정한 여덟가지 신념체계-개인주의, 소비주의, 국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종교가된 심리 치료-는 일상생활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1) 실제적인 사람 전체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은 신념, 곧 마음의 근본적인 방향이다. 이것은 실재의 기본적인 구조에 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일관성 있게 또는 일관성 없게) 주장하는 이야기나 일련의 전제(참일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참이거나 전부 거짓일 수도 있는 가정)로 표현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살고 행동하며 존재하는 기초를 제공한다.”(제임스 사이어)

2) 이야기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접근 방식이 비체계적이고 복잡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3) 우리의 이야기와 세계관 형성

이야기(Story) : 삶의 중심적인 이야기

정체성(Identity) :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

확신(Conviction) : 현실에서 유효하다고 믿는 신념

가치관/윤리(Value/Ethics) : 마땅히 해야한다고 믿는 것과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것

도덕/행동(Morals/Actions) :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행동 영역

-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이나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4) 일관성 있는 이야기

5) 하나님의 이야기에 부합하는 근본적인 변화(멘토링, 동료, 세계관 형성)

신앙과 삶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사람들을 예외 없이 세가지를 실천했다. 우선 그들은 기독교적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멘토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둘째, 그들을 기독교적 삶을 사는데 깊이 헌신된 동료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대학을 떠난 후 당면하는 유력한 다른 세계관들의 도전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 이 책의 전제 : 우리의 삶을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세계관은 은밀한 요소에 의해 더렵혀져 희석되고 오염될 것이다(Our worldview, if we live an unexamined life, can be adulterated by hidden elements that dilute and corrupt it).

 

2장. 개인주의 :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Individualism : I am the center of the universe)

개인주의는 개인이 일차적인 실재이며 우주와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1) 나는 우주의 가장 중요한 실재다. 

2)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 

3) 내 도덕적 양심은 바로 나다. 

4) 자유와 자아실현은 나의 권리다. 

5) 성과가 가치를 결정한다. 

 

* 개인주의에 담긴 진리

1) 개인주의는 자유와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인정한다. 

2) 개인주의는 달라지려는 나의 욕구를 분명히 인정한다. 

3) 개인주의는 선택한 신념의 힘을 인정한다. 

 

* 개인주의의 잠재적 문제점

1) 개인주의는 잘못된 현실 인식에 기초한다. 

- 자아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각 개인은 자기 충족을 추구해야 하고,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한다는 것

2) 개인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 기초한다. 

3) 개인주의는 자유와 성취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다. 

 

* 결론

성경 본문에서 2인칭 복수(공동체)로 분명히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2인칭 단수(개인)로 해석함으로 성경의 명령이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이처럼 세계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하지 못할 때 그 영향력은 더 커지고 만다. 

개인주의는 우주의 중심에 개인을 놓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개인주의자가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우주의 중심이 무너지고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가치가 우주의 진정한 중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죽을 때 우리는 실재의 중심에 계신 그분과 연합하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 이야기는 인간이 만물 질서의 중심이라는 개인주의의 주장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 내가 우주에서 일차적인 실재라고 주장할 때, 이것은 다른 사람을 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나 나의 중심적 위치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한다. 

-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이런 이해 때문에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충돌한다. 

 

3장. 소비주의 : 나의 소유물이 곧 나다.(I Am What I Own)

소비주의 세계관은 처음에는 상대적이었던 선(소비)을 결국 절대적인 선으로 대체한 관점이다. 소비주의는 부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축적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소비를 절대화한다. 

 

* 소비주의의 핵심적 확신

1) 물건을 축적하고 사용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2) 돈이 곧 힘이다.

3) 소비주의는 사람을 소배 대상으로 본다. 

4) 내 욕구를 충족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린다. 

 

* 소비주의의 긍정적 측면

1) 나의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결정한다. 

2) 소비주의는 경쟁과 새로운 사고를 촉진한다. 

 

* 소비주의의 문제점

1) 소비주의는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우리의 욕구를 정의한다. 

- 우리의 욕구를 하나의 범주로 환원하고, 인격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비인격화시킨다. 또한 하나님을 돈으로 대체한다.

2) 소비주의는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의한다.

 

*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소비재를 사용하고 누리는 것이 인간성의 일부가 되도록 창조하셨다. 이과정에서 우리는 이를 누리며 동시에 관리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경제를 돌보는 책임과 소비 욕구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 소비주의의 위험, 청지기직과 영성의 관련성,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지적하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고려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에 대해 좋은 관리자가 되려면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

 

4장. 국가주의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나라(My Nation, Under God)

우리는 자국에 대한 사랑, 곧 애국심이 선하고 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균형을 잃고 특정 국가에 최고의 충성을 바치는 애국주의는 악하고 파괴적인 것이다.

 

* 국가주의의 다양한 모습

1) 우리 나라가 향후 100년이나 25년, 심지어 내년에 존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 계획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국가주의자가 될 수 있다.

2) 종교적 이유 때문에 국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 않거나 애국가를 부르지 않을 수 있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국가주의자가 될 수 있다.

3) 우리의 헌법은 결코 변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국가주의자가 될 수 있다.

4) 국가가 건국 초기의 상태로 돌아가기만 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국가주의자가 될 수 있다.

 

* 국가주의의 긍정적 측면

1) 국가 정체성은 우리가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2) 국가 정체성은 협소한 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국가는 공공선을 제공한다.

4) 국가 정체성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 국가주의의 잠재적 문제

1) 국가주의는 평가해야할 내용을 평가의 기준으로 바꿔 버린다.

2) 국가주의 아래에서 “다른 것”은 도전자로 간주된다.

3) 국가주의는 지나친 충성을 요구한다.

4) 국가주의는 기독교의 초국가적 성격을 무시한다.

- 그리스도인과 국가가 혼동될 때 기독교는 국가 목표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라는 이차적인 지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 결론

국가주의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와의 제휴를 추구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국가의 종이 아니라 국가의 심판자다. 하나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는 것을 거절하신다.

 

5장. 도덕적 상대주의 : 나의 판단은 너의 판단과 다르다.(The Absolute Truth About Relativism and Something Like Relativism)

이시대에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 진리에 관한 매우 간단한 역사 

1) 고대 사상가 : 진리의 초자연적 기초로 로고스, 무한자, 선한자, 하나님등의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였고, 진리가 신적 토대를 갖는다고 여겼다. 합리성은 진리에 이른다고 여김

2) 중세시대 : 플라톤의 불변하는 ‘선’은 기독교의 영원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형상’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완전하고 참된 실재로 이해되었다. 이런 신성한 진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항상 성경을 통해 합리성을 확인해야 했지만 진리 역시 이성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3) 근대 : 진리의 수호자이며 결정권자인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킨 교회 내부의 극심한 부패에 항거하여 교회가 진리의 궁극적인 해석자라는 주장에 도전했고, 제도권 교회 대신에 각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해석할 능력과 책임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근본적으로 민주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4) 데카르트 : 진리를 모든 외부적 원천을 통해 해석되고 알려진 것으로 직접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완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상을 발견할 때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는 하나님이나 교회전통, 성경을 의존하지 않고 유한하고,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개인이 실재와 진리를 결정하는 주체로 여긴다. 

5) 포스트모더니즘 : 모든 영역의 중립성 주장에 의심을 제기한다. 

 

* “도덕적 상대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

절대주의자와 상대주의자의 실제적인 불일치 문제는 진리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와 견해 혹은 기호의 문제를 구분하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 도덕적 상대주의의 사례 

1) 이 견해를 선택하는 이유는 지성적이라기 보다 감정적이다. 

2) 이기심

3) 게으름

 

도덕적 상대주의는 무신론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또한 도덕적 상대주의의 두번째 이론적 기초는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자신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만하고 편협하며 폭력적이고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의 대안은 각 사람이 개인적 진리를 자유롭게 추구하고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는 겸손하고 평화로운 관용을 장려하는 것이다. 

 

* 도덕적 상대주의의 긍정적 측면

1)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선택 가능성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2) 도덕적 상대주의는 율법주의의 불충분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신체적 안전이나 영적 안녕이 아니라 규칙이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가 될 때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된다. 

3) 도덕적 상대주의는 우리에게 윤리적 견해와 방법론에 대해 더 많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 도덕적 상대주의의 잠재적 문제

1)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지적 근거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 상대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점을 주장할 수 있는가?

2) 어떤 사람도 상대주의자로 살 수 없다. 

3) 도덕적 상대주의는 공정과 정의의 원칙을 약화시킨다. 

4)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의 공통분모를 가장 낮춘다. 

 

* 결론 

-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대응책

1) 우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인정한다. 

2) 실제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밝힌다. 

3)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4)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 속성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6장. 과학적 자연주의 : 오직 물질만이 중요하다.(Only Matter Matters)

- 과학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이며 물질적인 기본원소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자연주의자들은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흔히 ‘자연법칙’이라 일컫는 것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한다. 

- 자연법칙의 두가지 특징 : 첫째 자연법칙은 의도적으로 창조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둘째 불변하고 예외가 없다.

 

* 이성과 자연주의

원인과 결과가 대단히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세계가 논리적인 장소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성에 의지한다면, 과학기술이 훨씬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자연주의는 과학을 구원의 한 형태로 본다. 

 

* 종교로서의 자연주의

- 인본주의자 선언(1933년)을 통해서’세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동일하고, 현대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해야 하며, 전통적인 종교적 사상보다는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과학적 자연주의의 긍정적 요소

1) 과학적 자연주의는 과학의 가치를 인정한다. 

2) 과학적 자연주의는 이성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3) 과학적 자연주의는 통일성을 추구하고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는 점에서 옳다. 

 

* 자연주의의 잠재적 문제

1) 과학적 자연주의는 인간의 위상을 축소시킨다. 

2) 물질은 도덕적인가? 

- 자연법칙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이지 않고, 게다가 완전히 결정론적이라면, 과학적 자연주의의 우주에서 도덕적 책임이 존재할 가능성을 찾기는 어렵다. 

3) 과학적 자연주의는 합리성을 약화시킨다. 

4) 과학적 자연주의는 진보를 정의할 수 없거나 목적을 설명할 수 없다. 

- 자연주의의 기본적인 가정 때문에 가치, 목적, 진보에 관한 내용이 어떻게 자연주의 세계관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 결론

- 자연주의 신앙 체계가 일관성이 없는 이유는 비인격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비인격적인 물질로 구성된 폐쇄적인 시스템에서  출발하면서도 인격적이고 의미있는 삶의 모든 내용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자연주의를 선택한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특징들-객관적이고, 확실하고 완전히 합리적인 도구를 이용해 우주의 힘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약속-때문에 자연주의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자연주의는 이런 약속을 이룰 수 없다. 

 

7장. 뉴에이지 :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The New Age : Are We Gods or Are We God’s?)

뉴에이지는 개인이 자기 내면의 신성함-하나님 의식 혹은 대아와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한다. 

 

* 서양과 동양의 만남

- 서양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동양은 일원론적인 기초를 뉴에이지에 제공한다. 이원론 대신 범신론 혹은 만유내재신론을 주장한다. 

- 뉴에이지 운동은 계몽주의 시대가 옹호했던 돠뇌적이고 직선적인 형태의 논리인 이성(logos)에 의존하는 대신, 영지(gnosis)를 추구한다. 영지는 신비적이고 직관적인 지식 형태를 일컫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뉴에이지의 핵심적인 특징

1) 과학적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한다. 정신, 영혼,  하나님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뉴에이지 세계관은 물질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격하시키거나, 유일한 참된 실재인 신성한 힘 안으로 편입시켜 버린다. 

2) 뉴에이지와 과학적 자연주의는 무지를 진리와 구원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로 본다, 둘 다 깨달음을 추구한다. 거러나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역사적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이 자연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자유를 얻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성은 과거의 초현실주의의 미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그러나 뉴에이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영지는 이원론의 족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3) 집단 윤리에 댈해서는 거의 근본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지지하고, 이와 동시에 개인적 도덕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견해를 주장한다. 

- 현대 기독교에 광범위하게 미친 세 가지 뉴에이지 영향 : 개인주의/주관주의, 반지성주의, 물질 영역의 경시

 

* 뉴에이지 사상의 긍정적 측면

1) 뉴에이지는 영적 차원을 인정하고 우선권을 부여한다. 

2) 뉴에이지는 제도 종교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일깨워 준다. 

3) 뉴에이지가 진리의 수문장으로서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다. 

 

* 뉴에이지의 잠재적 문제점

1) 뉴에이지는 편협한 유물론을 편협한 영성주의로 단순히 대체한다. 

2) 뉴에이지 운동은 자기 구원을 목표로 삼는다. 

3) 뉴에이지는 자신이 내세우는 사회적 과제에 대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4) 뉴에이지는 비합리성으로 치닫는다. 

 

* 결론

기독교와 뉴에이지 사상이 사용하는 언어와 실천방식이 상당히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뉴에이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적인 전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또한 기독교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이 뉴에이지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신이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8장.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 나의 부족이 곧 나의 세계관이다. (Postmodern Tribalism : My Tribe/MyWorldview)

세상이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던 집단들이 등장하여 지배적인 사회 권력 내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저항해왔다. 이 모든 것들이 문화의 위치와 문화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주제, 어휘들이 있다. 바로 다문화주의, 소수집단 우대정책, 포스트모더니즘, 해방신학, 문화상대주의, 후기제국주의, 노인 차별, 메타내러티브, 소국분할화, 정체성 정치학, 해체주의, 문화 전쟁…)

이런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결속하기 위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 용광로에서 다문화주의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까지

19-20세기 초 미국은 용광로처럼 다양한 민족성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미국인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후 문화적 정체성 상실에 대한 우려와 사회로부터의 배척으로 인해 용광로라는 개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결과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다문화주의는 차이점을 녹여서 없애는 대신 보다 폭넓은 통일성 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했다(모자이크 모델).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와 진리가 정치와 권력에 관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을 근대주의에 반대하거나, 근대주의를 초월하거나, 근대주의 이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대성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확실성,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각 개인의 편견을 버리고 적절한 조사방법을 사용한다면 이런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근대주의의 목표-보편성, 확실성, 절대적 진리, 개인주의, 공정한 중립성, 합리성, 과학에 대한 신뢰, 정복-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나는 포스트모던을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했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와 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실제적이고 선하고 참된것으로 여기는 것을 해석할 때 사회적 위치가 차지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백인이고 그리스도인인 미국인 같이 유력한 부족은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원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처럼 자신을 약자로 여기는 부족은 출애굽 이야기를 그들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희망찬 비전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죄라는 비물질적인 힘으로부터 영적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한다. 

- 비교불가능성 : 표면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 성경의 이야기가 원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내용과 상관없이 그것을 읽는 독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긍정적 측면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우리가 공감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 

2)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낯선 권력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3)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죄의 제도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4) 문화는 질서 있는 생활방식을 제공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잠재적 문제점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결정론을 가정한다. 

- 문화적 차이가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아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2)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부족들을 상대화시키는 반면 내 부족을 절대화시킨다. 

3)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또 다른 권력 싸움으로 변질된다. 

4)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피해의식을 가진 문화를 만들어 낸다. 

5)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적으로 환원주의적이다. 

 

* 결론

근대주의는 흔히 진리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며 자신의 지배문화에 다른 문화를 동화시키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기독교의 대응은 모든 문화적 차이를 없애 버리는 근대주의의 노력이나 부족을 절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문화적 수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계시록 7장의 환상(어린양의 보좌앞에 모든 민족이 예배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이 특정한 국가, 부족, 언어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드릴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장. 종교가된 심리 치료 :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Salvation by Therapy ; Not as Good as It Gets)

* 심리학과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

1) 심리학이 인간의 영적, 정신적 건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성경적 상담을 강조, 심리학적 문제를 영적 실패 또는 부적응의 한 형태로 규정

2) 종교가된 심리 치료 : 영적 문제를 본질적으로 심리학적인 문제로만 정의함으로 이문제를 축소, 영적 차원은 완전히 거부

3) 심리학이 유용하지만 불완전한 학문이기 때문에 심리학적 연구와 치료방법은 충만한 삶을 향한 온전한 추구와 통합되어야 한다.

 

* 다양한 심리학파

1) 프로이트와 정신 분석 : 프로이트는 삶을 경쟁하는 내적 힘들의 요구를 중재하는 일종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이는 이드와 초자아(superego)의 긴장상태속에서 자아가 두 충동을 중재한다고 본다. 

2) 로저스와 인간중심 심리학 : 오저스는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심리학적 체계와 방법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여기며, 심리학자는 환자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 즉 독특함을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3) 스키너와 행동주의 : 로저스는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환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타고난 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스키너는 자유와 도덕적 선함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목표는 환경적 조건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잘이해함으로, 행동과학에 따라 사회구조를 완전히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4) 가족체계치료 : 가족체계치료는 상호주관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개인을 치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고 가족의 상호관계가 바뀌어야한다고 주장한다. 

 

* 심리학의 긍정적 측면

1) 심리학과 기독교의 통합은 우리가 이미 해오던 것을 인정한다. 

2) 심리학은 우리에게 가장 넓은 의미의 구원이 하나의 과정임을 기억하게 한다. 

3) 심리학은 우리가 과거나 인간관계에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워 준다. 

4) 기독교와 심리학은 치유와 건강을 추구한다. 

5) 기독교와 심리학은 인간이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랑, 수용, 존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 종교가 된 심리 치료의 잠재적 문제

1) 많은 심리학적 접근방법이 높은 수준의 결정론을 가정한다. 

2) 심리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에 기초하여 작동한다. 

3) 종교가된 심리 치료는 인간의 문제를 심리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4) 종교가 된 심리 치료가 주장하는 가치중립적 심리학이라는 가정은 신화일 뿐이다. 

 

* 결론

심리학은 일반 학문 분야보다 삶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가능성이 가장 많은 후보자로 인식된다. 그래서 심리 치료사는 종교적 권위자의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절한 심리 치료는 건강한 방식으로 하나님, 이웃,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기 기독교 세계관의 우산에서 벗어나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제공하는 태도는 도가 지나친 것이다. 

 

10장.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The Contours of a Christian Worldview)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세계의 상호교류에 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또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차적인 의도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목적은 근본적인 변화, 곧 정체성, 확신, 윤리, 행동의 변화이다. 

 

* 하나님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행동

1막) 1장-창조, 2장-인간의 창조

- 창조세계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창조세계가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창조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의 원천은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2막) 타락

3막) 언약

4막) 성육신

5막) 구원

 

* 구원이란

뉴에이지

이원론적 환상을 극복함으로써 신적 자아를 해방한다. 

자연주의

미신(종교 등) 때문에 발생한 무지를 극복하고 이성을 이용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종교가 된 심리 치료

심리 치료 방법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타인 및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개인주의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 타인의 모든 제약적 기대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특정 목적을 달성한다. 

소비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충분한 부를 축적한다.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정치적 힘을 통해 지배집단의 억압을 극복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지킨다.

국가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이용하여 국가 이익, 전통, 국토를 지킨다. 

도덕적 상대주의

타인이 우리에게 부과한 제한된 가치판단에서 해방되고, 행동의 차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됨, 노예상태에서 해방, 칭의, 용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 죄로부터 자유, 새로운 탄생-창조, 회복

 

이야기는 명제 체계보다 비체계적이다. 

기독교의 신념이 비록 성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해도, 성경은 기독교가 우리의 신앙이 타당한지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유일한 자료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11장. 기독교 세계관 개발하기

세계관이 다르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며, 세계관은 우리의 삶을 놓고 경쟁한다. 삶이 중요하다고 가정한다면,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 세계관을 정립하고 평가하기 위한 도구

웨슬리 사중 방법론(성경, 이성, 경험, 전통)

- 네가지 원천이 상호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 성경이 일차적 권위를 가진다. / 그리스도인들마다 이런 기준들에 부여하는 신뢰 수준은 저마다 다르다. 

1) 성경(Scripture)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세계, 인간의 본성과 목적,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성장하는 방법에 관한 참된 지식을 충분하게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성경은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때 살펴보고 의지할 수 있는 첫번째 자료이자 최후의 권위다.

2) 이성(Reason)

이성의 핵심적인 기능 : 현대의 많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성경을 보완한다. / 성경을 해석 / 이성을 통해 사상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조리있는 세계관으로 만든다. 

3) 경험(Experience)

삶의 경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이성에서 끌어낸 결론을 테스트하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4) 전통(Tradition)

전통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다양한 상황과 문제에 적용해 온 것을 말한다. 전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유지하는 여러 방법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 전통은 인간 본성의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고, 이성은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경험은 우리의 심리적, 물질적 구성요소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인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풍부한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다. 끝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의도하신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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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에 대하여 기록한 것 즉 역사 서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행하고 경험한 것 즉 역사 과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 

 

* 역사 서술과 역사 과정이 불일치 하게 되는 두가지 이유

1) 사료의 문제 : 연구 대상인 소재와 과거를 직접 접하거나 재연할 수 없다. 여러 사료들 중에는 허위 문서와 위조 문서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역사가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 역사는 새롭게 발견되었거나 새롭게 해석된 사료를 토대로 기존의 견해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역사는 비판적인 정신 구조를 요구한다. 

2) 역사가 자신의 문제 : 역사가가 기술하는 역사는 그의 가치관, 관점, 세계관에 의해서 구성되기에 자신이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속에서 자신의 판단력이 활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중립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무의식적인 전제들을 피할 수 없다. 역사가 자신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역사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 역사의 개연성

* 역사의 사실성

 

* 역사철학

1) 순환 사관 : 오리엔트와 고대 세계 모두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남, 자연계에서 계절이 순환하는 것으로부터 유추하여 역사도 순환 유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니체, 토인비)

2) 유대-기독교 역사관(직선 사관) : 역사 과정은 특별한 시점 즉 창조에서 시작되어 섭리적인 인도를 따라 그 마지막 목표점까지 계속된다.(피오레의 요하임, 라인홀드 니버, 허버트 버터필드) 

3) 진보 사관 : 기독교적 유형의 일직선은 유지되었으나 신학의 이론적 근거는 거부되고 신 대신에 인간을 역사의 유일한 행위자로 본다.(콩도르세, 콩트, 플룸, 시드니 폴라드) 

4) 역사주의 사관 : 역사가 일직선적이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그 중심 동기는 개별 국가가 독특한 문화를 향유한다는 사상이다. 이 유형에 따르면 역사는 다양한 문화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비코, 헤르더, 랑케, 콜링우드)

5) 마르크스주의 사관 : 인간이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역사 과정이 창출된다는 신념이다.(마르크스, 헤겔, 크리스토퍼 힐, 톰슨)

 

 

 

 

기독교 역사관의 세가지 요소 

1) 하나님의 개입

2) 일직선론

3) 종말론

 

천국과 제국 :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의 번영(교회의 운명과 제국의 운명을 연관)

but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역사 개입 사이에는 정확한 상관관계가 없다. 

 

어거시틴의 7시대론(하나님의 도성 마지막 장)

1) 아담으로부터 홍수기

2) 아브라함까지

3) 다윗까지

4) 바벨론 포로기까지

5) 성육신까지의 시기

6) 투쟁하는 교회의 시기

7) 엿새 동안의 창조후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던 것처럼 교회를 위한 안식기

 

 

진보사상

- 특징 : 직선적 유형, 미래에 대한 낙관론, 객관적 기준

기독교 역사관이 세속화된 결과로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서 진보사상이 생겨났다. 

과학혁명으로 인한 산업혁명,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사상이 힘을 얻었다. 

- 뉴턴의 경험론과 로크의 감각주의, 이어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통해서 자연 선택이 개체의 유익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모든 육체적 정신적 자질은 완전을 향하여 진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 진보의 기준 : 인간의 행복, 합리성

 

역사주의 

-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역사주의

- 모든 문화가는역사에 의해서 형성된다. 특수한 가치관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근거로 민족을 강조

-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했다. 이에 역사주의자들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 관념론(칸트)와 낭만주의(괴테), 니버, 딜타이(해석학적 순환논법), 하이데거와 샤르트르(실존주의-역사주의의 논리의 극단)

 

마르크스주의

- 인간이 자신의 생존 수단들을 생산해 내는 방법이야말로 역사 변화의 열쇠이다.

(물질생활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역사적 행위이다. 생산 양식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시대 구분론과 혁명-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등 생산양식에 따른 인류사의 계기적() 단계로서의 4시대구분론)

- 변증법적 유물론 : 다윈은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발견, 마르크스는 역사라는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계급 투쟁을 발견했다. 

- 헤겔의 영향(정반합),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당신이 여행을 계속하여 그 여행의 끝에, 내가 “당신은 왜 지금 여기 있는가?”라고 물으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오고 싶었기 때문에” 또는 “기차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이 모든 대답은 아마 동시에 그리고 서로 다른 차원에서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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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듥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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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미스(통역:곽수광)
제임스 스미스 교수와 인증샷

You are what you love: Why everybody worships something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가장 적절한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원하고 욕망하고 그것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왜 생각과 원함이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이 습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사랑을 미덕(virtue)라고 하고 미덕은 좋은 도덕적 습관이다. 미덕과 도덕법은 다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미덕과 법은 반비례 관계가 있다. 덕스러운 사람은 외적 법이 덜 필요한 반면 악한 사람은 법이 더 필요하다. 아이가 어릴때 법과 외부적 규올로 훈련시키는데 이것의 목적은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선에 대한 감각을 내면화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라면 나는 어떻게 사랑을 배우는가?  고대 철학자와 인지과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습득한 습관이 우리 의식 아래에 형성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의 첫 번째 지향은 이지적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우리가 습관으로 주입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행동 양식을 형성한다.  우리의 사랑과 원함(want, desire)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유인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비전을 형성한다. 원하고 사랑하는 ‘습관’은 무의식에 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습득하는 습관이 무의식일 뿐만 아니라 습관을 의식하는 과정도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당신의 습관들뿐만 아니라 습관화되는 과정 자체가 무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굶주린 마음은 무엇인가 예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은 곧 우리 자신을 무엇인가에 내어 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의 습관은 우리가 자신을 내어주는 의식과 행동, 일상에 의해 형성, 조준, 습득된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을 헌신한다.(devoting) 당신이 헌신하는 바로 그것 또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실천과 루틴은 예전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예전은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하는 실천들이다. 예전들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은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지루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 안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논리적 사고의 결과로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무의식적인 동기로 소비한다.(예 : 아이폰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을때 인터페이스를 통해 바라보는 내용자체가 아니라 이 아이폰과 관계하고 작동하는 관계 양상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할지 예배할지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많은 예전들은 사실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한다.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물건들(물질, 우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강요한다. 400년 전에 파스칼은 말했다.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의 불행은 오직 한 가지로부터 발생하는데, 그가 한 방에서 조용히 머무를 능력이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지루함은 궁극적인 것을 직면하기 때문에 분주함을 향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기독교 예전들은 인간의 망가진 상황에 정직하다. 생각한 것과 추구하는 것의 괴리에 대해 정직하다. 기독교의 참회, 고백의 예전은 나를 야단치는게 아니라 나를 용납하는 창조주 앞에 정직해질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면에서 은혜가 핵심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

만약 기독교가 진리이고 어거스틴이 옳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미친 듯 찾지만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 절망 가운데 있지만,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시도들 뒤에 우리는 누군가의 메아리를 듣는다. 

 

결국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의 세계관의 패러다임, 지성의 전통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전통이라기 보다는 저자는 어거스틴이 제시한 전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해아래 새 것은 없고, 과거의 전통속에 이 시대를 새롭게할 무언가를 찾아내야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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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배제되는 위험과 세상 전체로 침투하는 위험 모두를 극복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1장. 신앙의 기능 장애
* 상승 기능 장애(기능 축소와 우상으로 대체)
- 기능 축소 : 겉으로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여 전망하고 실천하나 실상은 그 내용과 추진하는 방법이 신앙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의 핵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 우상으로 대체함 : “어느 날 예언자들이 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돌판에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금송아지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이상한 연금술을 통해 “내가 너를 승리하게 하리라”는 말로 변형되고 십자가가 적대감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사랑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 회귀 기능장애
1) 신앙의 나태함 : 유혹의 미끼, 체제의 힘(개인으로서는 결코 하려고 하지 않을 일들을 부대안에서 군인은 기꺼이 하고자 한다.), 신앙에 대한 오해(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게 하고, 그길을 인도하며,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의미를 부여할 때라야 고유한 과업을 수해하는 것이다.)

2) 신앙의 강요 
- 신앙이 억압의 수단이 되는 모든 경우, 사실은 신앙의 기능장애가 일어난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억업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온 이유 : 신앙의 왜소화(수단의 경시는 신앙의 왜소화로 이어진다. 그러 인해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신앙과 상관없는 가치에 의해 세워진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신앙에 의해 목표를 설정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신앙이 현실에 부적절하게 보인다는 문제, 좁은 길로 가기를 꺼리는 문제

2장. 나태함
- 신앙이 나태해지는 이유 : 1)신앙인의 인격, 2)체제안에 갇혀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하여 신앙의 요구사항보다 체제의 규칙을 따름, 3)신앙자체와 관련
신앙의 네가지 기본방식 1)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2) 어떻게 실패에 대처할 수 있는가? 3)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않아도 되는가? 4) 왜 어떤 활동에 꼭 참여해야 하는가?

- 우리의 행동에 대한 신앙의 지침 : 개인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분별하는 것 : 전쟁을 개전함에 있어서의 정의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정의, 한 국가는 전쟁을 일으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 자체는 부당하게 수행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이라 해도 우리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윤리적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을 분간해야 하고 그러한 결정에 의거해서 행동해야 한다. 도덕적인 문제는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또한 적절하게 기능하는 신앙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탁월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 하나님이 우리 일의 의미와 관계를 맺는 방식 : 고용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 하나님과 협력, 보존

3장. 강요
오늘날 종교의 재부상은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 볼때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폭력과 더불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약화 혹은 무력화 하고 더 나아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 표층적이면서 열정적인 신앙의 실천은 폭력을  촉진하기 쉬우나 심층적이면서 전적으로 헌신된 실천은 평화의 문화를 낳고 유지된다. 

* 유일신 신앙
- 유일한 신의 도덕적 형이상학적 성격에 관한 진리 주장이 보편성을 띠면 불가피하게 공적 주장이 된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주장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이와 반대되는 주장과 마주칠 때 충돌을 야기한다. 

유일신 신앙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특징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하는 데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믿음의 일부가 폭력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오용이다. 이러한 행동은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표층적이게 만듦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예언자적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은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여 우리의 노고를 축복하고 우리의 실패를 위로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도덕적인 지침이 되어 주며 우리의 삶과 활동을 지지하는 의미의 체계를 제공해준다. 

예언자적 종교에는 두가지 근본적인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 메시지를 따라 이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과정 모두 필수적이다. 상승이 없으면 전할 것이 없고, 회귀가 없으면 전할 대상이 없다. 

* 구속
-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적인 행위로 악한 자들을 정복하러 세상에 오신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4장. 인간의 번영
낙관주의(푸투룸)는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
희망(아드벤투스)은 외부,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과 연관

* 인간의 번영을 파악하는 세가지 단계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보편적인 선행, 경험적 만족감
- 델반코는 무한하신 하나님에서 구원자 미국이라는 이상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기자신이라는 소멸점에 이르기까지 희망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 예언자적 종교에는 두가지 근본적인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 메시지를 따라 이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과정 모두 필수적이다. 상승이 없으면 전할 것이 없고, 회귀가 없으면 전할 대상이 없다. 

*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도전
1)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번영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번영을 위한 열쇠라는 주장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은 하나님이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5장. 정체성과 차이
-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원화된 세상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1) 현대사회의 네가지 주요 특성
- 자발성, 차이, 다원주의, 상대적 자족

2) 이러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 부적절하게 보이는 세가지 방식
- 적응(자유주의적 프로그램), 순응의 방향의 반전(후기 자유주의 프로그램), 세상으로부터 철수(분리주의 프로그램)

3) 보다 나은 대안
- 떠나지 않으면서 다르게 사는 것 :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의 어떠한 요소들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어진 문화안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문화의 요소중 그리스도인이 거부해야 할 것들이 있다.
-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이다.(137)
*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와 해야하는 한가지
-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적응도 불가능하다 : 그렇다면 문화적 변화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 차이를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기독교의 정체성은 외부적인 것을 거부하고 싸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핵심요소를 포용하고 강조함으로 생긴다, 외부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는 사랑으로 지배되어야 한다, 경계는 투과성이 있어야 한다) 
- 참여가 답이다 :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의 전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며, 이 참여는 문화의 모든 차원과 연결된다.(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문화의 모든 영역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하나도 완전히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한다. 범위로는 전체적이지만 정도로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한은 개인적 제도적 혹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한 저항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유한성과 연약함 때문에 나타나며 변화를 추구하면서 선한 방법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기도 한다.)

6장. 지혜를 나누며
- 이 시대는 만족의 근원은 상관하지 않고 만족을 경험하는 것, 즉 자신의 만족만이 중요하게 되었다. 
- 다원적인 세상에서 모든 종교의 주된 사명은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희망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사람을 살게 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 지혜는 조언의 작은 조각, 삶의 방식, 거룩한 인격등의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왜 지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가?
- 그리스도인에게는 지혜를 나눠야 하는 의무가 있다. 지혜를 나누는 의무는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안에 거하는 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 지혜를 나누는 핵심적인 방법(증언)이 아닌 것은?
- 증인은 무엇을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다, 증인은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아니다.(무언가를 팔고자 하는 이는 상품을 구매자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라도 판매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처럼 지혜를 사고 팔면 지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형성하기 보다 기껏해야 마음속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쓰일 뿐이다.) 뭔가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증인은 단지 산파가 아니다.

- 주는 것과 받는 것, 이 두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지혜를 나누는데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 자신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지혜를 나눠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지혜를 나눈 통로가 되는 것이다. 
- '예언의 역전’이 필요하다. :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외부로부터 그들의 신념과 관행을 흔들어 놓을 예언적 자극과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아니 그런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에 좀더 일치하게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 

- 우리는 지혜가 사람들의 삶에 자리잡게 되는 것을 돕기 위해 사람들을 기만하고 강압해서 지혜를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된다.
- 우리는 지혜를 통해 기꺼이 회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지혜가 매력적이고 합당하고 유용한 것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 우리는 신앙의 지혜를 입맛에 맞고 먹기 쉬운 지혜의 조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려는 계획속에 삽입하여 적용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7장. 공적 참여
종교가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세속화론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근대화의 길 가운데 경제성장, 기술발전, 그리고 지식의 증대와 전파 같은 현상이 번성하는 종교와 편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 오늘날 빠르게 자라나는 세계관들 : 기독교, 이슬람, 불교, 세속적 휴머니즘

* 종교적 다양성
- 근대화론자들이 품었던 세속 세계에 대한 동경은 ‘기독교적인 유럽’이나 ‘기독교적인 미국’에 대한 기대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깨지게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종교
- 자유주의는 자신의 해석이 어떠하든지 각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서 살아갈 자유와 개인의 인생관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을 두가지 기본개념으로 하고 법 앞에 평등한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자신이 택한 신앙이 시키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 세속주의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고 한 묶음의 연관된 가치들과 진리주장들인데 이는 부분적으로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과 시장에서 생성된 것 그리고 자연과학으로부터 뽑아낸 것들로 구성된다. / 종교적 이성을 공적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정교분리를 철저히 시행할 때 세속주의는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선호되며 이는 신앙인들에게 아주 불공평하다. 
- 이에 대안으로 월터스토프는 사회적 협의(consocial)라고 부르는 자유민주주의 형태를 제안한다. / 다수 공동체의 공존의 정치

* 다원주의를 정치적 과제로 지지해야할 충분한 이유
1) 신은 한분뿐이시므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2) 유일하신 신이 중심적으로 명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는 황금률에서 표현된 대로 네가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3)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는 타인의 권리를 우리와 우리가 소속된 집단을 위해 주장하지 못한다. 
4) 내면적으로나 외적 행동에 있어서나 종교는 강요될 수 없다.

*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상이한 인생관으로 폭력적 충돌이 생겼을때 평화의 문화를 길러 낼 내적 자원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자신의 종교적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말한다는 것은 두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하여 ‘해석학적 호의’를 베풀고 서로 선물을 교환해야 한다.(191)
- 논쟁만 하는 것으로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을 멈출 수 없다. 논쟁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정치체계에서 행동하는 중요한 방식은 투표하는 것이다. 논쟁하고 나서 투표하고 또 논쟁한다.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잘 운영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이 취하는 방식이다. 

결론 
- 오바마 대통령의카이로 연설(2009년)-문명의 충돌의 주장에 반대 /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해석하게 되면 종교적 전체주의에 반대하며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 현대 문화 속에서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추진력이 사랑을 즐거워하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만 진정으로 인간이 번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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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종교 문화(안점식, 죠이선교회)

 

 

서문

한국에서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학생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주로 개혁주의 전통의 기독교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당시 이 운동은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로 지식 차원에만 머무르고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주춤해졌다. 하지만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포스트모던 환경속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된 상황 속에서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세계관 훈련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1. 세계관의 변화 없는 신앙은 혼합주의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를 보고 두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첫째는 단기간에 유례없는 성장을 한 것이고, 둘째는 인구의 20%이상이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외형적인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교회 구성원들의 균형잡힌 성숙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겉으로 보여지는 종교적인 행동, 행동 양식의 변화에는 성공했지만(예를 들면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 금연등), 그들의 가치체계나 더 본질적인 세계관은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은 신앙은 반드시 혼합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샤머니즘의 기반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타당성 구조위에 기독교가 전해졌기에 더더욱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추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2. 세계관 운동은 체질 변화 운동이며 성숙 운동이다. 

삶의 질은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성경적인 세계관은 하나님, 나 자신, 타인, 자연, 사회, 역사를 잘못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의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해준다. 

세계관 운동은 지적 성향이 강한데 사실 세계관은 단순히 지적 차원이 아니라 지정의 모든 영역에 걸쳐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존재방식이자 체질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변화란 지식이나 인식의 전환을 넘어 삶의 존재방식과 체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 세계관을 체질화 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차원에서 세계관을 정립해야 하고 나아가서 올바른 감정과 결정을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3. 세계관 운동은 영적 전쟁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비성경적 세계관을 전파한다. 사탄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결론으로 인간을 매료한다. 

기독교 학문 운동은 성경적 세계관을 인식적 차원에서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다. 학문 또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문가 집단이 비성경적 세계관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할 때,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와 진화론, 마르크시즘의 영향력을 체험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된 비성경적 세계관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바로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 안에 침투한 비성경적 세계관(물신주의와 기복신앙)이다. 이러한 비성경적 세계관은 교회 바깥에 있는 명백한 적이 아니라 내부로 교묘하게 침투한 적이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4. 한국 교회 안의 바알적 신앙을 뿌리 뽑아야 한다. 

한국 교회안에 두드러진 비성경적 세계관은 권위주의와 성공주의이다. 

 

1장.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세계관은 실재를 보는 안경이다. 무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고, 범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범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 세계관은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되는 체질.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함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 세계관은 전제로서 받아들여지는 관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을 통해서 생겨난다.(롬 10:17)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2장. 문화와 세계관

세계관은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나며 그 문화의 영향 아래 있는 가정,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사회화되고 문화화된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혼합주의이다. 

선교 사역은 진공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문화가 있는 곳에 들어가 이미 존재하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의 토양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불러온다. 이러한 세계관 대결은 영적 대결의 본질이다. 

- 타락한 이 세상의 원리는 힘과 물질이다. 권력과 재물, 즉 기득권 때문에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연합하려면 힘과 물질, 즉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현하려고 해야 한다. 연합은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원리를 거슬러 힘써야(엡 4:3) 가능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국가의 권력과 종교의 권력은 손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과 달리 가난한자의 편에 서지 않게 되었다. 50

- 새 예루살렘 문화, 즉 천국 문화와 타락 이후 발생한 세상 문화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일반은총의 산물은 연속적일 것이지만, 이 세상 문화 안에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의 산물은 불연속적일 것이다. 53

 

3장. 종교와 문화

전통 사회일수록 종교와 문화가 거의 같이 간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종교는 우주의 기원과 목적, 인간의 기원과 본질, 인생의 목적등을 제시한다. 또 종교는 세상에 있는 죽음과 고통과 악의 기원과 본질, 이런 것들의 극복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 공식종교(고등종교)와 민간종교(하등종교) : 민간 종교는 형통함(where, what)에 관심이 많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식능력이 전락하였고 왜곡된 인식 능력이 인간에게 내재된 선천적 종교성과 결부되어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 63

-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이해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이 자기가 놓인 상황(context), 즉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선호(favor)과 편견(bias)이 있을 수 있다. 신학이란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해석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어도 신학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67

- 종교는 일반 계시에 대한 반응,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섞여 있다.(크리스토퍼 라이트, 해롤드 네틀랜드) 69

- 진리에는 능력이 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니다. 73

- 진리, 즉 옳음의 기본은 ‘관계적 옳음’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관계적 옳음에서 시작된다. 관계적 옳음은 인식의 옳음을 가져오고 인식의 옳음은 행위의 옳음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옳음, 즉 관계적 옳음이 인식론적 옳음과 윤리학적 옳음에 선행한다. 존재는 항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관계적 옳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존재 상태는 옳게 된다. 사랑은 내가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음을 나타내며 올바른 존재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으로써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게 된다. 76

 

4장 궁극자, 절대자

* 세계관 유형을 결정하는 중요 3요소 : 궁극자, 인간, 자연

유신론 : 인격적이고 초월적이며 유일한 신을 궁극자 또는 절대자로 간주하는 관점

범신론 : 우주를 초월한 궁그가 또는 절대자는 없으며 만물 속에 궁극성, 절대성, 신성이 내재한다는 관점

유물론 :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가 전부이며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물질에서 우연히 파생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관점

 

사회 규범이나 도덕 규범에 대한 관점(예 : 살인하지 말라)

유신론 : 신의 명령

범신론 : 우주의 질서 또는 자연의 질서

유물론 : 인간의 경험이 규범의 기초

 

5장 인간

- 각 세계관에 따라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공산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계몽주의의 정신은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이다. 

인간성에 대한 낙관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은 공산주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두개의 큰 기둥이었다. 이슬람, 유교도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인간성과 이상 사회론을 따른다. 그런데 이 세계관들이 역사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 

공산주의는 잉여 생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힘과 재물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 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잘 간파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바로 이 타락한 문화의 원리를 그대로 좇아서 계급투쟁(힘)을 통한 잉여 생산물(재물)의 평등 분배를 추구했다.(91)

정교 일치를 추구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율법주의가 가지는 경직성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6장. 자연

기독교 :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불연속성,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범신론 : 궁극자, 인간, 자연의 삼자를 수평적 관계로 이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적이다. 하지만 헬라적 범주개념(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데아와 현실)이 기독교 신학으로 들어오면서 이원론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16-7세기 과학혁명을 지나면서 뉴턴과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이신론적 사고방식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속화의 문제가 발생했다. 

초자연은 종교영역으로서 주관적이고 사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자연은 과학 영역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사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세속화로 정부, 공공 교육기관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애니미즘(정령숭배)-기독교 세계관-세속주의

 

애니미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귀신들림으로 간주하고, 세속주의에 물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정신질환으로 간주해 버린다. 

세속주의 세계관은 이신론과 무신론을 포함한다. 초자연이 있지만 자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신론이고, 초자연과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가시적으로 보이는 자연계, 즉 물질 세계만이 궁극적 실재라는 주장이 무신론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은 인격적인 신이 자연법칙이든 도덕법칙이든 법칙 위에 있어서 인격적으로 법칙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초월의 의미(하나님은 비과학이 아니라 초과학)

구원은 곧 회복이라고 할 때 자연계의 회복도 구원의 내용 안에 들어 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는 힘의 원리에 따른 굴복이 아니라 영적 원리에 따른 순복이다. 

 

7장 죽음

-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런데 기독교는 죽음을 비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타락의 결과로 사망이 들어왔고 언젠가는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110)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진심으로 눈물 흘리시는 주님(요 11:35) 사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공감하시는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을 철학자로 계시하시지 않는다. 생명의 부여자이자 창조자이심을 계시하신다.(112) / 예수님과 석가모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112)

- 영생 불사를 위한 인간의 노력, 탄트리즘 : 성적 합일과 종교적 합일, 성적 엑스터시와 종교적 엑스터시는 일맥상통한다고 봄, 바알 신앙의 경우 풍요와 다산이라는 현세기복주의와 성적 합일을 통한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신비주의 vs 과학 : 불사를 위한 노력, 인과율을 다른 방식으로 추구

-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고 영생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 : 연속, 불연속, 윤회

 

8장 고통

- 약함은 고통의 문제와 악함은 죄의 문제와 연관된다.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다. 

- 세계관이 일단 형성되고 나면 폐쇄성을 띠고 굳어지므로 세계관이 바뀌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폐쇄성과 경직성이 바로 고집과 강퍅함으로 나타난다. 이집트에서 형성된 물질주의 세계관의 뿌리가 너무 깊었기 때문에 생존과 안전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다.(출 16:2-3; 민 11:4-5)(126)

- 타락한 인간에게 생존과 안전은 체감적 필요(felt need)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진정한 필요(real need)이다.(통전적 사역-주님의 사역)

- 인간의 문제가 무지의 문제인가?(불교) 반역의 문제인가?(기독교)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기독교는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고통에 대한 설명체계 : 소경으로 난 사람에 대한 질문,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144-7)

1) 인과업보 : “이사람의 죄 때문이다” 전생의 죄라고 여김

2) 애니미즘적 설명 “ “가계에 흐르는 저주” / 초자연적 영에게 저주의 실효적 능력이 있다고 봄, 기계적 공식, 모든 불행을 악한 영들의 소행으로 여김

3) 성경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 자신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 애매한 고난(벧전 2:19-21)

- 기독교 세계관의 탁월성은 바로 열매에 있다. 

 

- 그리스도인은 고통이 있지만 죄를 짖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생존 문제가 심각하지만 생존에 급급히 매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도록 부름받은 자이다.(151) /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하늘 소망의 개념으로 탈바꿈한 이유(각주)-데이비드 보쉬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나라가 이 땅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나라라고 변호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 대신 불변하는 영원한 나라의 관념이 강해졌으며, 그 결과 저세상적이고 내세적인 장소로서의 '하늘나라'의 관념이 더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9장 세계관과 영적 전쟁

- 비성경적 세계관은 반드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비성경적 행동양식을 유발하는데, 바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은 다름 아닌 죄이다.(155) / 죽지않음, 눈이 밝아짐, 하나님과 같이 됨, 선악을 알게 됨, 이 네가지 거짓말은 비성경적 세계관의 기본 유형이다.

- 사탄의 거짓말에 속으면 미성숙하고 비생산적이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히틀러는 신비주의와 진화론(그리고 멜더스의 인구론)에 따른 형질인류학적 견지에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확신함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157)

- 목적론적 세계관의 회복 : 풍성한 삶이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삶, 질병이나 사고, 실패가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알적 신앙은 이런 고통없는 삶을 풍성한 삶이라고 하지만 야훼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라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한 삶을 살아가는 것, 즉 합목적적 삶을 사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 내에 던져진(피투성, Geworfenheit)” 존재가 되었다. 

-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싸움인 동시에 인간에게는 평화, 즉 샬롬이 걸린 싸움이다.(160)

-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 즉 샬롬이 실현되는 곳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샬롬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나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나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타인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며, 나아가서 다른 피조물과도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165)

 

10장 문화의 토양과 한국인의 의식구조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 한국의 문화 토양은 샤머니즘, 불교, 유교, 세속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공영방송에서 노자의 도덕경, 불교의 금강경, 논어등을 강의했다면 크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영방송에서 기독교의 성경을 강의한다면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우고 수학여행동안 많은 불교와 유교의 문화재를 방문한다. 사찰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통해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가르침을 흡수한다. 우리는 이처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불교적, 유교적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흡수하고 내면화한다.(170-1)

- 한국 그리스도인은 유교적 그리스도인이고 샤머니즘적 그리스도인이다. 

- 한국인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껴 가까이 잘 지내고 싶어도 위아래 서열이 결정되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묘한 긴장을 형성할때가 많다. / 사람을 처음 만나면 나이를 먼저 묻는 문화(172)

- 유교적 서열의식은 권위주의로 나타난다. / 성경적 가치체계에서 교회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섬기는 곳이다. / 한국의 유교적 토양에서 성장한 한국 그리스도인은 위계와 질서, 신분과 직분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174-5) / 177표

- 한국처럼 약점 은폐형 문화에서는 약점 노출형 문화보다 훨씬 위선적이 되기 쉽다. 

- 샤머니즘적 권위주의가 능력지향적이라면 유교적 권위주의는 권력지향적이다.(180)

- 샤머니즘의 특징은 진리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능력은 성공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 성공주의는 결과주의와 외형주의를 가져오고 이는 적당주의와 과시주의로 나타난다.(188)

- 참된 믿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라면 무데뽀는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확신으로 믿는 것이다. 무데뽀와 믿음 사이에는 혼동할 만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둘 다 인간적인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는 반면, 무데뽀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이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194)

-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잘못된 태도)

- 정(관계윤리는 발달 but 대중윤리는 미약)과 체면문화

- 귄위주의의 오류 : 권위의 남용, 권위의 포기, 권위에 대한 도전, 한국은 권력거리가 큰 문화이다. 

 

11장 문화의 토양과 영성

- 선교는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일으키며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문화 바깥층인 가치체계와 행동양식만 변화시킨다면 혼합주의가 나타나고 명목적인 신자만 양산하게 된다.(212)

- 성경적 관점에서 볼때 영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의 측면이라고 정의한다면 타락한 인간의 영은 죽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실체적 죽음이라기 보다는 관계적 죽음이자 기능적 죽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을 잃어버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혼과 육의 측면은 죄성에 지배당하고, 전적 부패와 무기력 상태로 전락하였다.(219)

-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지킴은 단지 내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는 차원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이 세계의 질서와 원리에 대한 거짓말, 즉 비성경적 세계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정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보고, 하나님,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의 영성 수련법이 마음공부라면 기독교 영성수련법은 하나님 공부다. 기독교는 마음을 탐구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골 1:10)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228)

- 온전한 영성은 약 1:27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수직적 경건은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이고, 수평적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는 사랑이다. 거룩이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이라면(사 6:3; 계 4:8) 사랑은 피조물과의 관계적 속성이다.(요일 4:16) / 순결이 수직적 차원의 영성이라면 지혜는 수평적 차원의 영성이다.(마 10:16)(229)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 순종, 거룩함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적 영성은 자기의나 휴머니즘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초월성만 강조할 뿐 역사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 아래 지정의를 의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롬 12:2) 세상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연, 사회, 세계, 역사, 개인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영적인 사람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 실재,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넘어(요일 2:16)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 기독교의 영적 훈련이 타종교 수행법과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성경적 계시로 체험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한편 동양의 체험주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도 체험의 종교지만 동시에 계시의 종교이며 정경에 기초한 교의의 종교이다. 체험과 계시가 충돌하면 체험을 포기해야 한다. 체험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시를 자의적으로 자신의 체험에 짜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된다. (234)

- 성경적 예언의 목적은 회개를 촉구하고 현재, 바로 지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지, 사사롭게 미래를 미리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240)

- 설교자는 성경말씀뿐 아니라 상황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고 초월적 원리를 이끌어내는 통찰력은 물론 상황을 해석하고 성경말씀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하다.(241)

- 잡신의 방법이 강압적 소유(possession)라면 하나님의 방식은 인격적 감화(inspiration)이다.(244)

- 성경적인 관점에서 영적인 사람은 대속사역의 기초위에서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한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외감과 친밀감을, 자기 자신안에서 평안과 기쁨, 내적 고요함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관용의 성숙함을, 사회에 대해서 정의로움과 공평무사함을, 자연에 대해서 긍휼함을 가지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안으로는 평강을 실현하고 밖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248)

- 영성의 다섯가지 차원 : 지성적, 감성적, 도덕적, 사회적, 신체적 차원(248-250)

- 정체성의 기반을 타인에게 두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따라 늘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런 사람은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게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속칭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끄덕이지 않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행복할지 몰라도 독불장군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건전한 자존감을 가진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만 잘난 것처럼 남의 평가를 무시하지도 않는다.(253)

- 진리대결(Truth encounter), 능력대결(Power), 충성대결(Allegiance)(256)

 

12장 복음과 상황

- 복음은 칭의로서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을뿐 아니라 성화로서의 구원도 관련되어 있다.(261)

- 우리의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험으로 실제화한 사람은 낮은 자존감이나 우월감,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아, 부끄러운 자아, 두려운 자아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치유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목표는 자아의 치유가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다. 자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자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주재권을 자리바꿈하는 것이다.(273)

- 회개는 불순종을 인식하고 그것을 후회하고 슬퍼하며 의지적으로 돌아키는 것이다.(지정의, 274)

- 상황화 : exegesis vs eisegesis, 주해와 자기해석

- 세계관 차원에서의 상황화(279) : 세계관 차원의 상황화는 세계관의 본질을 파고들어 하나님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경적 영성, 즉 성령의 열매와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282)

- 한국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순결함을 상실했다.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사회에서 증인이 될 만한 지혜로움을 상실했다. / 서구적 시각에서 진리주장을 검증하는 기준은 논리적 정합성과 실재와의 부합성이라면 동양에서는 이론과 실천, 지와 행, 앎과 삶의 일치를 더 중요한 진리주장의 검증 기준으로 본다.(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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