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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Now may ithe Lord of peace himself jgive you peace at all times in every way. kThe Lord be with you all.
17 I, Paul, write l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This is the sign of genuineness in every letter of mine; it is the way I write. 18 m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all.
i See Rom. 15:33; Eph. 6:23
j Num. 6:26
k Ruth 2:4
l See 1 Cor. 16:21
m See Rom. 16: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16–18.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16–18.
 
이제 본문은 이 서신의 마지막 인사말에 해당한다. 마지막 인사말을 대개 축도로 이루어지는데 데살로니가 후서의 경우 16절과 18절이 축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16절) 평강의 주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평강 주시기를 구하는 바울
‘평강의 주’는 ‘호 큐리오스 테스 에이레니스’이다. 이는 살전 5:23에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한 것과 비슷한 표현이다. 바울 서신에서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흔하지만(롬 15:33; 16:20; 고전 14:23; 고후 13:11; 빌 4:9; 살전 5:23) 평강의 주라는 표현은 흔하지 않다. 
‘평강’이라는 의미인 ‘에이레네’는 혼돈, 염려, 두려움, 무질서, 싸움이 없는 완전한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여러 성품중 매우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평강의 상태의 원형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완전한 교제를 나누었을 때 가능했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이 평강한 상태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이는 영혼 깊은 곳에 두려움과 불안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 있는, 채워져야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평강의 부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막힌 담을 허심으로 평화, 평강을 다시금 이루셨다. 
 
하나님의 평강과 주님의 평강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평강, 에이레네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로부터 동일하게 임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선 내용에서 임박한 종말을 고대하며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이들과 이로 인해서 낙심한 이들을 권면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평강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진정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환난과 핍박, 임박한 종말에 대한 거짓 가르침 속에서 진정한 평강을 누리기를 원했다. 
본문에서 ‘평강의 주’라는 표현 앞에 ‘아우토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한글 번역으로는 뒷부분에 친히라고 번역되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맨 처음에 ‘아우토스’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호 큐리오스’를 강조함으로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평강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진정한 평강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사람이나 주변의 환경이 보장하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때마다 일마다’, ‘디아 판토스 엔 판티 트로포’ 이를 직역하면 ‘모든 것을 통해 모든 방식 안에서)인데 이는 시간적인 측면과 영역적인 측면을 모두 지칭하는 표현이다. 즉 평강의 주께서 평강을 주시되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빠짐없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역 성경 NIV는 이를 ‘at all times and en every’로 번역했다. ESV는 ‘at all times in every way’로 번역했다.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e with you all’, ‘호 퀴리오스 메타 판톤 휘몬’, 주님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앞서 언급한 ‘평강의 주’를 지칭한다. 평강의 주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본문에서 ‘메타’라는 표현이 바로 함께 하다, be with의 표현이다. 주님의 탄생을 통해서 ‘임마누엘’의 약속이 실현되었다(마 1:23). 이후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마 28:30) 이를 약속하셨다. 
 
The expression αὐτὸς δὲ ὁ κύριος τῆς εἰρήνης (“and the Lord of peace himself”) is unusual because it is the only instance in the NT writings where Christ is designated as “the Lord of peace.” The normal expression in Paul is “the God of peace” (cf. 1 Thes. 5:23; Rom. 15:33; 16:20; 2 Cor. 13:11; Phil. 4:7, 9), though in the salutations of most of his letters he connects peace both with “God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Christ” (cf. 2 Thes. 1:1; Rom. 1:7; 1 Cor. 1:3; 2 Cor. 1:2; Gal. 1:3; Phil. 1:2), and in Col. 3:15 he refers to “the peace of Christ.”
The Lord of peace is called upon to give peace to the readers: δῴη ὑμῖν τὴν εἰρήνην διὰ παντὸς ἐν παντὶ τρόπῳ (“may he give to you peace at all times, in every way”). The peace that Paul requests from the Lord here is more than the absence of conflict within the community. The Christians at Thessalonica were also troubled by external oppression (cf. 1:4–10). Even this may not be as inclusive as Paul intended. Peace was virtually synonymous in Jewish circles with the idea of the total well-being of individuals and the community. Such peace could only come from God. The breadth of its application in v. 16 is shown by the words “at all times, in every way.” (The textual variant τόπῳ for τρόπῳ found primarily in witnesses of the Western tradition [cf. A* D* F G itar, c, d, dem, etc. vg Ambrosiaster] probably arose in an attempt to bring the passage into conformity with such other Pauline texts as 1 Cor. 1:2; 2 Cor. 2:14; 1 Thes. 1:8.)
V. 16b is the first of two benedictions. Just as “the Lord of peace” in the first part of the verse is unique in Paul’s letters, so also is the benediction “the Lord be with all of you.” Both Rom. 15:33 and Phil. 4:9 speak of “the God of peace” being with the readers. In all probability the use of “the Lord of peace” in the first part of the verse led to the slightly unusual benediction in the second part of the verse. Whatever may be the reason for the unique formulation, Paul’s wish-prayer had the effect of reassuring the readers of the presence of their Lord with all of them.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91–292.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친필로라는 의미는 ‘내 자신의 손으로’라는 의미로 본문에 사용된 ‘에메’는 본인임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인칭 대명사로 이 같은 표현이 고전 16:21, 골 4:18에 등장한다.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통해서 본서를 자신이 직접 기록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편지를 다른 사람이 대필하고 편지 마지막에 송신자 자신이 몇마디 쓰는 것이 관행이었다. 대필자는 말그대로 불러주는 내용만을 받아적었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대의 편지들의 경우에 마지막 부분에서 문체가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흔하다. 
로마서 16:22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 16:22에 보면 더디오가 바울의 편지를 대필하였고 마지막 부분은 바울 사도가 직접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데살로니가후서의 경우 아마도 디모데가 대필한 것으로 보이고 마지막 문안 인사및 축도 부분을 바울이 직접 했을 것이다.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본문에서 ‘표시’라고 번역된 표현은 세메이온인데 이는 ‘표적, 징조, 이적, 표시’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편지와 관련된 의미로 그 편지를 기록한 저자의 독특한 서명을 가리킨다.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이와 같이 이 편지에 자신의 독특한 표시, 사인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앞선 2:2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 선지자들이 보낸 편지로 인해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서명이 없는 것은 거짓이므로 조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 바울이 사인을 직접 한 것이라기 보다는 앞선 내용을 필사자가 기록하고 마지막 인사와 축도 부분을 바울이 기록함으로 표시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친필 사인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 Paul makes explicit what would have been clear to readers of the original letter: the bulk of the letter was dictated to a secretary, and the final greeting was written in Paul’s own unique handwriting, which served as a mark of authenticity, much like signatures at the end of modern letters. Paul’s highlighting of this fact may reflect a suspicion that a forgery in his name was in existence, which may have been the source of the idea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lready come (see 2:2). This affirmation of genuineness also shows that writing in another person’s name was condemned among early Christia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0.
 
As in several of his other letters Paul took up the pen to write his own greeting and noted this point for his readers (cf. 1 Cor. 16:21; Col. 4:18; see also Phm. 19 and Gal. 6:11–18 where Paul identifies himself as writing the conclusion of the letter). Best (347) maintains that v. 16 is the greeting to which Paul refers in v. 17, but on the basis of both 1 Cor. 16:21 and Col. 4:18 this is incorrect. As Marshall (231) points out, the actual greeting is contained in the words ὁ ἀσπασμὸς τῇ ἐμῇ χειρὶ Παύλου (“greeting, with my own hand, from Paul”). The clear implication of this notice by Paul is that a change of handwriting occurred at this point in the autograph copy. This in turn means that he employed an amanuensis or secretary in the writing of the letter (see Longenecker, “Ancient Amanuenses,” for the role of the amanuensis).
To his greeting Paul adds: ὅ ἐστιν σημεῖον ἐν πάσῃ ἐπιστολῇ: οὕτως γράφω (“which is a sign in every letter [of mine]; this is the way I write”). Lindemann (“Abfassungszweck,” 39–40) claims that the author of 2 Thessalonians, someone writing after Paul’s time and seeking to replace 1 Thessalonians with his own letter, intentionally sought to call into question the authenticity of 1 Thessalonians by means of 2 Thes. 3:17 (as well as 2:2). Lindemann asserts that 1 Thessalonians lacked the mark of Pauline authenticity as described in v. 17. The author of 2 Thessalonians intended this to cast doubt on 1 Thessalonians.
Lindemann’s position is based on a misunderstanding of the “sign.” The sign to which Paul refers is not his signature (signatures were not normally written at the end of letters in any case; cf. Spicq, Épîtres pastorales, 17). The sign was, rather, the fact that the greeting itself was written in Paul’s hand. He did this, undoubtedly, because like many other letter writers of the time Paul dictated each of his letters to an amanuensis and then added the greeting and end of the letter in his own hand as an authenticating mark (see Deissmann, Light, page facing 170 for an example of the change in handwriting in the greeting based on a photograph of an original letter). For this reason we should not expect to find the “mark” in 1 Thessalonians as we do not possess the autograph copy which would have ostensibly shown the change in handwriting. That the first person singular suddenly appears in 1 Thes. 5:27, however, gives credence to the possibility that the original did in fact contain a greeting written in Paul’s hand. The comment in 2 Thes. 3:17 that “this is the way I write” identified the particular handwriting appearing in the autograph as Paul’s own. Thus if a question arose about any letter being from Paul (cf. 2:2), the greeting and conclusion of this letter provided a way of authenticating it. Marshall (232) may also be correct that Paul wrote v. 17 to underscore the authority of the letter for its recipient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92–293.
 
18절) 본절은 축도에 해당한다.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한다. 
앞선 데살로니가전서의 축도와 비교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5:28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너희에게’, 본서에서는 ‘너희 무리에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무리에 해당하는 ‘판톤’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는 ‘모든, ~마다, 각각’의 의미로 ‘all, every, each’의 의미이다. 하여 바울은 주님의 은혜가 신앙안에 굳게 서 있는 자이든, 연약한 자이든 관계없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all. This addition to the grace benediction (elsewhere in Paul’s letters only in 2 Cor 13:13; Eph 6:24; Titus 3:15) stems from the apostle’s desire to include all members, including the idlers (see also 2 Thess 3:16b).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64.
 
The concluding benediction is typically Pauline even though it is not identical with any found in Paul’s other letters (cf. 1 Cor. 16:23; Gal. 6:18; Phil. 4:23; 1 Thes. 5:28; Phm. 25). The wording of this benediction,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may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all of you”), is closest in wording to 1 Thes. 5:28 and 1 Cor. 16:23, though both of those texts lack the πάντων (“all”). But this is only a minor variation. If any theological point is to be made from the inclusion of “all,” it is perhaps that Paul asked for Christ’s grace even on those who were not holding to the Christian pattern of behavior regarding work.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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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s for you, brothers, edo not grow weary in doing good. 14 If anyone does not obey what we say in this letter, take note of that person, and fhave nothing to do with him, that he may be ashamed. 15 gDo not regard him as an enemy, but hwarn him as a brother.
e Gal. 6:9; [1 Cor. 15:58]
f See ver. 6
g See Lev. 19:17; Matt. 18:15
h 1 Thess. 5:12, 14; [Titus 3: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13–15.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13–15.
 
10-12절에서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선을 행하는 공동체의 형제들을 향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12절 한글 번역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은 ‘데’라는 역접의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13절) 원래대로 번역하자면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는 이후에 언급된 공동체 안에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한 이들을 이야기한다. 종말을 강조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안에는 공동체 안에 부유한 지체들의 자비심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된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선을 행하다가’로 번역된 ‘칼로포이운테스’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 단어이다. 원형인 ‘칼로포이에오’는 ‘건전한, 잘, 좋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칼로스’와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의 합성어로 ‘건전하게 행하다, 좋게 행하다, 선하게 행하다’라는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완료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문맥의 흐름속에서 볼 때 규모 없이 행하는 이들과 대조하여 자기 일을 하며 규모있게 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규모 없이 행하는 이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공동체에 분란을 만들어 냈다. 종말을 이야기하며 일상의 삶을 저버리고 흥청망청 지내는 이들도 있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생계를 내팽겨치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이 소비되고 있다고 낙심하는 이들이 생겨났기에 이들을 향해서 낙심치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낙심하다’로 번역된 ‘엥카케세테’의 원형 ‘엥카케오’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다, 녹초가 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온당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지쳐서 모든 의욕과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6:9–10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The initial words of v. 13, ὑμεῖς δέ, ἀδελφοί (“but you, brothers [and sisters]”), are taken by some (e.g., Trilling, 153f.; Marxsen, 102) as introducing a new section. Trilling, however, sees only a very loose connection between v. 13 and vv. 14f. He maintains that vv. 14f. refer to the whole of the epistle rather than to the immediate context of vv. 6–12. Trilling’s view is unconvincing. The only issue addressed in the letter that could be construed as serious enough to warrant the disciplinary action described in vv. 14f. is the problem discussed in vv. 6–12, and in fact vv. 14f. are probably intended as a clarification of v. 6.
Even the seemingly general direction of v. 13 is best understood against the backdrop of vv. 6–12. The reason for the direct address of the readers in v. 13 is that in vv. 11f. Paul was speaking to the indolent members of the community indirectly, but in v. 13 he turns again to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with further directions.
He exhorts them μὴ ἐγκακήσητε καλοποιοῦντες (“do not grow weary of doing good”). How specific we should understand this exhortation to be is difficult to determine. A virtually identical direction in Gal. 6:9 (τὸ δὲ καλὸν ποιοῦντες μὴ ἐγκακῶμεν [“let us not grow tired of doing good”]) is very general in scope. But here the situation is somewhat different. The aorist subjunctive ἐγκακήσητε would appear to allude to a specific situation in which the readers are not to grow weary. As vv. 6–12 and 14f. concern the problem of the indolent, it seems likely that the direction in v. 13 relates to this.
Commentators have suggested two possible meaning for the rare compound καλοποιοῦντες. It may mean either “to do the right” (cf. Frame, 308; Morris, 257) or “to confer benefits” (cf. von Dobschütz, 315; Best, 342). Most commentators, whichever translation they accept, assume that Paul was trying to ensure charitable behavior on the part of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either toward the needy in the community except for the idle or toward all including the idle. Although Paul may have feared that his instruction regarding the idle might be construed as grounds for withholding charity from the truly needy, he does not specify this. As the text stands, it is much more probable that the apostle is exhorting his readers not to behave like the ir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8.
 
14절) 앞서 바울은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는 명령(살후 2:15)과 자기들이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살후 3:6)을 했고 본문은 다시 그 문제를 다룬다. 
‘이 편지에 한 우리 말’,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는 규모 없이 행하고, 손으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권면한 내용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주님의 명령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람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행위가 될 것이고 이에 대해서 사귀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지목하여’로 번역된 ‘세메이우스데’는 ‘세메이오오’의 명령법 현재형이다. ‘세메이오오’는 ‘표시, 표적’을 의미하는 명사 ‘세메이온’에서 유래한 동사로 ‘표시하여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지목하여 알게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명하낟. 
‘사귀지 말라’는  표현에서 사귀다라는 의미의 ‘쉬나나미그뉘미’는 문자적으로 ‘함께 섞다, 혼합하다’라는 의미인데 비유적으로 함께 교제하다라는 뜻을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3번 사용되었다.(고전 5:9, 11)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음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 술취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부정명령에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리스도인이 그런 이들과 섞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 사도의 편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과도 섞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에 물감이 섞일때 물이 변하듯이 죄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는 앞서 함께 사귀지 말라고한 목적을 의미한다. 본문에 '부끄럽게 하다’는 ‘엔트라페’인데 이것의 원형 ‘엔트레포’는 본래 ‘빙 돌다, 방향을 바꾸다, 자신에게로 돌리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제 모습으로 돌아서게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그들을 공동체 안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공개적인 부끄러움을 당함으로 자신이 외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따돌림을 당했는지를 인식하고 이를 깨달아 반성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결국 교회의 훈계와 권징의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의 부끄러움으로 인도하여 그들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마 18장 공동체안에서 죄를 지은자들에 대한 교회의 징계) 당시 사해 사본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징계를 다루고 있는데 예를 들어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를 공동체에서 2년 동안 징계처분한다. 첫해에는 성직자들의 거룩한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며, 이듬해에는 성직자들의 음료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징계 역시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In this verse Paul returns to the question of how to go about disciplining the refractory members of the community, a problem first addressed in v. 6. The initial statement, εἰ δέ τις οὐχ ὑπακούει τῷ λόγῳ ἡμῶν διὰ τῆς ἐπιστολῆς (“but if anyone does not obey our instruction through this letter”), suggests that Paul hoped for a change of behavior as a result of the letter. If a voluntary transformation did not occur, however, then the community must act decisively. λόγος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a rule of conduct, a usage rooted both in classical Greek and in Paul’s understanding of the Torah, as Rom. 13:9 and Gal. 5:14 indicate. The singular form of the term shows that Paul is thinking specifically of the theme found in vv. 6–12, and in particular the regulation given in v. 12. Hence his reference to the rule of conduct διὰ τῆς ἐπιστολῆς (“through this letter”). The use of “our” with “rule of conduct” interjects a note of apostolic authority into the passage (cf. Bruce, 209), making noncompliance with the regulation regarding work a rejection of God’s messenger.
Paul directs the obedient members of the community, τοῦτον σημειοῦσθε (“take special notice of this one”), referring to anyone who fails to comply with his injunction regarding work. Having taken note of such a person, the community is then μὴ συναναμίγνυσθαι αὐτῷ (“not to associate with the person”). συναναμίγνυσθαι occurs elsewhere in Paul’s letters (and for that matter the NT) only in 1 Cor. 5:9–11, where it is found twice. In that text Paul directs the church at Corinth to dissociate itself from anyone who claims to be a fellow Christian but is guilty of immorality. H. Greeven (TDNT VII, 855) argues that the words “not even to eat with such a person” found in 1 Cor. 5:11 are intended to exclude the person involved from the Lord’s Supper because it was central to the life of the community. Paul does not specify this in 2 Thes. 3:14, but he undoubtedly meant for the exclusion to include any form of participation in the common meals of the community where the Lord’s Supper took place.
But the command was wider than this. As it stands it “restrains members of the community from dealings with the person concerned” (Greeven, 855); that is, Paul calls for their excommunication. He indicates in v. 14 that the primary purpose of the debarment was ἵνα ἐντραπῇ (“in order that the person may be ashamed”). The apostle hoped that exclusion would have a salutary effect on the individual, leading ultimately to his or her reintegration into the community as a chastened brother or sister (cf. v. 15). But quite apart from this explicit intention, the act of debarring refractory members also served to purge the community of corrupting influences (cf.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130) that might affect other members and lead to opprobrium from outsiders.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8–289.
 
15절)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앞서 말한대로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징계의 목적이 그들을 교회나 공동체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하여 그들을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을 시작하면서 ‘카이’라는 접속사가 사용되는데 이를 한글은 ‘그러나’로 번역했지만 ‘그리고’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즉 14절과 15절은 대조, 역접의 관계가 아니라 순접의 관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목하여 사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것과 원수처럼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사귀는 것은 서로 연결되는 조화로운 사상이다. 
본문에서 ‘생각하다’는 ‘헤게이스데’인데 이것의 원형은 ‘헤게오마이’로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앞서 14절의 명령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것 같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행한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적대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자기 의가 지나치게 되면 그 잘못을 행한 자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과정속에서 생길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나는 저들과는 다른 선한 존재이다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부끄러움속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차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원수같이 여기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같이 권면하라’, ‘권면하라’에 해당하는 ‘누데테이테’의 원형 ‘누데테오’는 ‘마음, 정신’을 뜻하는 명사 ‘누스’와 ‘놓다, 두다’를 의미하는 동사 ‘티데미’의 합성어로 ‘마음 속에 놓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듣는 자가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각성할 수 있도록 심도있게 훈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속에서 살펴보자면 공동체 안에 불순종한 이가 있다고 할 때 그의 문제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과정에서 그를 원수같이 대한다면 그를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를 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를 형제와 같이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돌이키게 하기 위한 사랑어린 태도로 임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책망, 훈계, 호소, 징계’를 겸하여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 오줌싸개 아이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이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잘못을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는 것이다. 
 
Although Paul calls for excommunication of anyone who refuses to heed his instructions regarding work, at the same time he hastens to define more clearly what attitude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should have toward someone whom they have banned from their fellowship. First he exhorts them, καὶ μὴ ὡς ἐχθρὸν ἡγεῖσθε (“and do not consider [such a person] as an enemy”). Paul recognized that if someone were debarred from the church community, then in many people’s minds this would be tantamount to having declared that person an enemy of the community. This in turn would lead to behavior predicated upon this assumption. This was not Paul’s intention; rather, he appears to have hoped that if the people concerned were shunned by the community it would bring them to their senses. For this reason such people should not be treated as enemies. This would more than likely result in their complete alienation from the community.
Instead Paul urges, ἀλλὰ νουθετεῖτε ὡς ἀδελφόν (“but admonish [the person] as a brother [or sister]”). Exactly how this was to take place poses a difficulty. Best (343f.) believes that it can only refer to action to be taken while the community was assembled. If this were the case then the direction to dissociate from the individual involved was limited only to the Lord’s Supper and the common meal associated with it. Nothing in the context, however, suggests such a limited significance for the command in v. 14 (cf. v. 6 as well).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at admonishing someone excluded from the community could not take place outside the communal meeting. The point Paul wishes to make does not include precise details about how to deal with a recalcitrant individual or where admonition should take place. Instead Paul attempts to moderate the attitudes of the community toward the person and give the community a positive action to carry out in an effort to restore the individual to fellowship. Thus Paul implies that exclusion from the community should not be understood as irrevocabl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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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would give you this command: bIf anyone is not willing to work, let him not eat. 11 For we hear that some among you cwalk in idleness, not busy at work, but dbusybodies. 12 Now such persons we command and encourage in the Lord Jesus Christ to do their work quietly and to earn their own living.4
b [Gen. 3:19]; See 1 Thess. 4:11
c ver. 6
d 1 Tim. 5:13; 1 Pet. 4:15
4 Greek to eat their own brea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10–12.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10–12.
 
7-9절에서 바울은 복음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들을 본받을 것이 무엇인지를 권면하고 나서 이제 10-12절에서 규모없는 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일하여 먹을 것을 직접 명하고 있다. 
 
10절) ‘너희에게 명하기를’, 본문에 ‘명하기를’로 번역된 ‘파랑겔로멘’은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랑겔로’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과거의 반복적 행동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형 동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바울은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기회가 있을때마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는 재림에 관한 혼란스러운 사상과 가르침으로 인해 일하지 않고 게으른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본문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이라는 표현은 ‘일하다’라는 ‘에르가조마이’라는 동사앞에 ‘우 델레이’라는 ‘~하기 싫어하다’라는 표현이 합해진 것으로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일할 기회가 있지만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기생하려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성경이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죄로 타락하기 이전에도 동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일부 신자들 가운데 일상을 포기하고 재림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은 깊은 신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거절하는 불신앙의 표현이다. 이미 살전 4:11에서 이 명령을 한 바 있다. 
 
The imperfect form of παρηγγέλλομεν (“we used to command”) underscores that Paul did not simply mention the need to be self-sufficient in passing when he was with the Thessalonians but that he had repeatedly instructed them with respect to the necessity of working to provide for their own material requirements (cf. v. 6). The ὅτι at the beginning of the command probably indicates that Paul is quoting what he used to say to his converts verbatim in the words εἴ τις οὐ θέλει ἐργάζεσθαι μηδὲ ἐσθιέτω (“If anyone does not wish to work, neither let that person eat”). The command itself has the character of a maxim about it, although it is not known in the form that it has here from any other source (cf. Pr. 10:4; Gn. Rab. 2:2).
Three important points need to be noted about the command: (1) The command is qualified by the use of the verb θέλει (“wish”). Paul recognized that the important question was whether or not people were prepared to work for their living. His command, therefore, was not directed to those who were unable to work or who could not find work, but to those who refused to work. (2) The sanction against those refusing to work is that they should not be allowed to eat. Clearly it was the community’s responsibility to see that Paul’s imperative, μηδὲ ἐσθιέτω (“neither let that person eat”), was carried out in the case of anyone who was unwilling to work (cf. Did. 12:2–5). (3) By reminding the community of his instructions regarding work, Paul provided the community with the justification for stopping support to those who preferred to rely on the largesse of the wealthier members of the community rather than work themselves.
Gn. Rab. Genesis Rabbah
Did. Didach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5–286.
 
11절) 아마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중 일부가 찾아와서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했고 바울은 이를 듣고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에게 이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으르게 행하여’, ‘게으르게’라는 표현은 ‘아닥토스’로 앞선 3: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이는 규율과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질서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대오를 이탈한 병사의 모습을 나타낸다.  
‘게으르게’에 해당되는 표현은 ‘아닥토스’로 개역한글은 이른 ‘규모 없이’로 번역하였다. 이는 앞서 살전 5:14에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바르게 베치하다’라는 의미의 ‘탓소’와 부정 접두사 ‘아’의 합성어로 ‘대열에서 벗어난, 규율을 지키지 않는’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군사 용어로 대열에서 이탈한 낙오된 병사의 모습이다. 본절에서 이렇게 게으르게 행한다는 것은 교회의 정해진 질서를 따르기 않고 제멋대로 규율없이 행하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단지 게으름으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제멋대로 행하여 도리어 골치 아픈 일을 만들어낸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기에 이전 번역의 ‘규모없이’가 더 타당해 보인다. 비슷한 의미로 3:7에서 무질서하게 행하다라는 표현도 이 단어의 동사형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이 표현이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행하여’라는 표현은 ‘페리파툰타스’로 이것의 원형은 ‘페리파테오’이다. 이는 ‘페리’라는 접두어와 ‘밟다, 짓밟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테오’의 합성어로 주로 ‘걷다, 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하니’, 앞서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었다면 본절 11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다. ‘일하다’는 ‘에르가조마이’인데 이는 ‘행위, 행실,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의 동사형이다. 
본문에 ‘일만 만드는’으로 번역된 ‘페리에르가조메누스’의 원형 ‘페리에르가조마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쓰인 독특한 단어이다. ‘두루’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와 힘써 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르가조마이’의 합성어로 이리 저리 두루 다니면서 힘써 일한다는 의미로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며 일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오지랖넓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not 에르가조마이 but 페리에르가조마이’한 것이다. 이는 워드플레이이다. 이처럼 본인이 힘써야할 일을 하지 않고 불필요한 다른 이들의 일에 참여하며 한담하는 자들로 인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홍역을 앓고 있었다. 
교회안에 믿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생산적인 일에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때 그 힘은 비생산적인 더 나아가 파괴적인 곳에 사용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생산적인 노동을 하거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The opening words of this verse, ἀκούομεν γάρ τινας περιπατοῦ ντας ἐν ὑμῖν ἀτάκτως (“for we hear that some among you are living in an idle manner”) suggest that Paul had received a report regarding the indolent who were forcing the community to care for them through their own refusal to work. Paul does not specify that the whole church sent him word about the situation. Possibly someone representing a patron of the community had come with word of the emerging problems, as happened in the case of the Corinthian church (see 1 Cor. 1:11; 16:17). Alternatively, Paul may have received a secondhand report regarding the situation, perhaps from someone from another church in the region. This latter suggestion would account for Paul’s lack of clarity about the origin of the misunderstanding regarding the day of the Lord in chap. 2. The phrase περιπατοῦντας ἀτάκτως (“living in an idle manner”) has been picked up from v. 6 and has the same meaning here.
Paul gives some specificity to the meaning of “living in an idle manner” in the wordplay μηδὲν ἐργαζομένους ἀλλὰ περιεργαζομένους (“not working but meddling” or, as the NIV renders it in idiomatic English: “they are not busy; they are busybodies”). (For other wordplays in Paul see Rom. 12:3; 1 Cor. 11:29–34; 2 Cor. 1:13; 3:2; 6:10; Phil. 3:2f.) This amplification of the phrase “living in an idle manner” demonstrates that the fundamental issue was, from Paul’s perspective, one of indolence, not of rebelliousness, as some have suggested (cf. Spicq, “Les Thesaloniciens ‘inquiets,’ ”; Jewett, Thessalonian Correspondence, 105). The term περιεργαζομένους, found only here in Paul, probably requires the meaning “meddling” or “interfering,” with the sense of people being busybodies involved in affairs that are none of their business (cf. the admonition in 1 Thes. 4:11 for the readers to live quietly and mind their own affairs).
What precisely led to this criticism is impossible to say. Paul may have simply intended the criticism in a general way, since idle people are more likely to interfere in other people’s affairs than those who are busily engaged in their own affairs and earning a living for themselves. Such people were either potentially or actually disruptive for the community and needed to be disciplined. In addition, as Bruce (207) notes, the type of behavior described by Paul in this passage might also have brought the community into disrepute with outsiders and might therefore have needed to be brought under control (cf. 1 Thes. 4:12).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6–287.
 
12절) 바울은 앞서 이런 자들, 일하기 싫어하고 도리어 일을 만드는 이들에게 명하고 권면한다. 명하고라는 표현은 ‘파랑겔로멘’이고 ‘권하기를’은 ‘파라칼루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명령과 권면의 권위는 바울 자신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본문은 ‘히나’ 가정법 구문으로 직역하면 ‘조용하게 일하면서 자기 자신의 양식을 먹도록’이라는 표현이다. 
‘조용히’로 번역된 ‘메타 헤쉬키아스’는 ‘고요하게, 조용하게’라는 의미이다.(살전 4:11) 즉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임박한 재림의 소식으로 인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조용하게 자기 집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것을 명하는 것이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표현은 ‘톤 헤아우톤 아르톤 에스디오신’이다. ‘헤아우투’는 ‘스스로’, ‘아르토스’은 ‘떡, 음식’, ‘에스티오’는 ‘먹다, 소비하다’라는 의미이다. ‘에스티오’라는 명사는 대부분 먹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절에서만 자급자족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대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하여 번 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양식을 먹느냐가 아니라 그 양식을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이다. 결국 본문은 잘못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자신이 일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일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빌붙어 생활하면서 공동체 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향해서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다. 
 
- Having begun by instructing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about how they should deal with their aberrant fellow believers, Paul now turns to those leading indolent and irresponsible lives in order to give them specific instructions. Paul employs strong and coercive language (cf. v. 6) when he says τοῖς δὲ τοιούτοις παραγγέλλομεν καὶ παρακαλοῦμεν ἐν κυρίῳ Ἰησοῦ Χριστῷ (“but we command and require such people in the Lord Jesus Christ”). The relation between παραγγέλλομεν and παρακαλοῦμεν necessitates comment. Some commentators detect a softening of the more forceful expression παραγγέλλομεν (“we command”) by παρακαλοῦμεν understood in the sense of “we exhort” or “we beg” (cf. Frame, 306; Morris, 256; Best, 340). This interpretation seems somewhat doubtful. παρακαλοῦμεν can also mean “we demand” or “we require,” and in the context this seems the more probable sense because Paul implicitly threatens the indolent members of the community with exclusion through his directives to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in vv. 6 and 14. Moreover, “in the Lord Jesus Christ” is parallel to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in v. 6. This means that it expresses the idea of personal agency, namely, that the full authority of the Lord stands behind the command (on the use of the expression “in the Lord” in such situations see 1 Thes. 3:8 and Moule, Origin of Christology, 58–60). If this is the case, then the command has coercive power: to reject it is to reject the Lord Jesus Christ himself and therefore to exclude oneself from the community.
The command itself is contained in the ἵνα clause: ἵνα μετὰ ἡσυχίας ἐργαζόμενοι τὸν ἑαυτῶν ἄρτον ἐσθίωσιν (“that working with quietness they eat their own bread”). The verbal cognate ἡσυχάζειν (“to be quiet”) of the noun ἡσυχία (“quietness”) appears in 1 Thes. 4:11 and is directed there to the same general theme. Paul undoubtedly intended the practice of “working with quietness” as an alternative to the indolent members’ tendency to meddle in other people’s business (v. 11). Best (341) argues that the reference to working quietly probably indicates that it was to calm the “excitement” caused by the expectation of the parousia, but Marshall (225) points out that a more general reference is intended since in neither 1 nor 2 Thessalonians does Paul ever directly connect his commands about living quietly with the issue of the parousia. In light of 1 Thes. 4:11f. and Rom. 13:1–7, the claim of Trilling (151) that the instruction to work quietly reflects a later middle-class form of Christianity not typical of Paul’s day is untenable. The ultimate goal of people working quietly is that they should provide for themselves (on the meaning of “eat their own bread” cf. v. 8) and stop being a drain on the resources of either the community as a whole or more likely its wealthier members. Ironically, Paul’s emphasis upon familial love and commitment among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may have given rise to the situation. The order that the idle must work was not only in their interest, but also in the interest of the wealthier members of the community who would have increasingly found themselves burdened by the indolent if Paul had not intervened.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7–288.
 
앞서 8절에서 바울은 이것의 본을 이미 보였다. 그는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주야로 애써 일했다.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바울은 너희들도 나와 같이 행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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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we command you, brothers, s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that you keep away from any ubrother vwho is walking in idleness and not in accord with the tradition that you received from us. For you yourselves know whow you ought to imitate us, because x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nor did we eat anyone’s bread without paying for it, but ywith toil and labor we worked night and day, that we might not be a burden to any of you. It was znot because we do not have that right, but to give you in ourselves aan example to imitate.
s 1 Cor. 5:4
t ver. 14; [Matt. 18:17; 2 Tim. 3:5]; See 1 Cor. 5:9; 2 John 10
u 1 Cor. 5:11
v ver. 11; 1 Thess. 5:14
w [Acts 20:35]; See 1 Thess. 1:6
x 1 Thess. 1:5
y See 1 Thess. 2:9
z 1 Cor. 9:4; 1 Thess. 2:6
a ver. 7; 1 Pet. 5: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6–9.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6–9.
 
3장 6-15절은 앞선 바울의 기도 요청과 중보 기도에 이어 마지막 본론부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실생활의 영역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게으름을 경고하면서 규모있게 행할 것을 요청한다. 
이마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기를 명령했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12
11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바울이 동일한 내용을 더욱 강력한 어조로 반복한 것을 보면 앞선 충고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더욱 자세하고 강력하게 이 부분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생 교회였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본이 되는 교회였다. 하지만 그런 교회 안에도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땅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를 소망하는 공동체이다. 여전히 문제 있는 이들이 모여있기에 문제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느냐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6절 이하의 내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히 명하고 있다. 
 
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매우 강력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뜻을 전하는 대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하노니’, ‘파랑겔로멘’으로 원형은 ‘파랑겔로’이다. 이는 ‘권위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도록 지시를 내리거나 명령을 내리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의 어근은 ‘앙겔로스’ ‘사자, 천사’로 동사형은 ‘앙겔로’로 ‘알리다, 전하다’의 의미이다. 천사가 권위를 가지고 옆에서 알려주는 것이 바로 본문의 의미이다. 바울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힘입어서 이들에게 명하고 있다.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게으르게’에 해당되는 표현은 ‘아닥토스’로 개역한글은 이른 ‘규모 없이’로 번역하였다. 이는 앞서 살전 5:14에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바르게 베치하다’라는 의미의 ‘탓소’와 부정 접두사 ‘아’의 합성어로 ‘대열에서 벗어난, 규율을 지키지 않는’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군사 용어로 대열에서 이탈한 낙오된 병사의 모습이다. 본절에서 이렇게 게으르게 행한다는 것은 교회의 정해진 질서를 따르기 않고 제멋대로 규율없이 행하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단지 게으름으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제멋대로 행하여 도리어 골치 아픈 일을 만들어낸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기에 이전 번역의 ‘규모없이’가 더 타당해 보인다. 이후에 11절에서 이를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교회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었다. ‘전통’에 해당하는 ‘파라도시스’는 앞서 2:15에 사용된바있다. 
이 단어는 원래 ‘넘겨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명사로 ‘전통, 전승, 넘겨줌, 내어줌, 양도’라는 의미이다. 이는 존경받는 권위자들로부터 전해 내력오는 구체적인 관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육과 관련해서는 지식과 교훈이 스승으로부터 학생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3번 사용되었는데 복음서 8번, 바울 서신의 2회는 모두 유대 랍비들, 장로들, 조상들이 전해준 전승을 말한 반면 2:15과 3:6, 그리고 고전 11:2에서는 복음의 전승을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랍비들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바울 일행을 통해서 가르쳐진 복음 진리가 성도들에게 전승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전한 것은 바로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고전 11:23)이었다. 
고린도전서 11:23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모든 것, 그의 말이나 편지를 통해 전한 것은 그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바울은 규모 없이(게으르게) 행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복음의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날것을 명령한다. ‘떠나라’는 ‘스텔레스다이’로 원형은 ‘스텔로’의 중간태 부정사형이다. 이는 ‘피하다, 조심하다’라는 의미로 이는 앞의 직설법 동사인 ‘파랑겔로멘’에 걸린다. 이를 직역하면 ‘모든 형제들로부터 너희 스스로 물러나라’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 이런 이들에 대해서 떠남으로 자신을 자신을 지킬 것을 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죄에는 오염, 전파성이 강하기에 이런 이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접촉할 때 필연적으로 죄의 영향력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떠나라는 명령은 영원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함으로 돌아오게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마 18장 공동체 안의 권징)
 
앞선 살전 5:14에서는 이 게으름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 바울이 ‘권면’했다면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심각한 단계로 이르렀기에 ‘명령’하고 있다. 당시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는 조치는 출교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는 공동 사회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삶의 중심에 해당되며 교회에서 성찬과 같은 공동 식사를 진행했기에 이것에서 제외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징계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 게으름에 빠진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추측해보건데 첫째는 주의 날, 재림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일상의 삶을 도외시하고 포기했었을 것이고 둘째는 공동체안에 몇몇 게으른 이들이 교회안의 부유한 이들의 자비심에 기대어 이를 악용했고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일에 부적절하게 참견함으로 교회안에 문제를 일으켰다. 
3:6 command. The problem of some believers living idly became worse, so Paul switches from the softer language of “urge” (1 Thess 5:14) to the stronger “command” (here and also in v. 12). keep away. This verb, along with “do not associate with” in v. 14, refers to social ostracism or excommunication: exclusion from corporate worship and the meal that was part of the Lord’s Supper celebration (1 Cor 5:11; 11:17–34). Such exclusion would be devastating for the idle in Thessalonica, who lived in a communal culture in which honor and shame were powerful forces controlling social behavior. idle and disruptive. Translates one Greek word whose root (atakt-) occurs three times in this passage (vv. 6, 7, 11). See note on 1 Thess 5:14. Paul never states why some were living in idleness. One possibility is that the Thessalonians’ excitement over the imminent return of Jesus caused them to abandon ordinary earthly activities as not worthwhile. Another possibility is that some were merely lazy and took advantage of the generosity of wealthier believers and then used their free time to meddle in the affairs of others (v. 11; 1 Thess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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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64.
 
7절) 바울은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을 본받지 말고 자신들을 본받을 것을 요청한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본받다’라는 표현은 ‘미메이스다이’로 원형은 ‘미메오마이’이다. 이는 ‘흉내, 광대’를 의미하는 ‘미모스’에서 유래한 동사이다. 광대가 어떤 인물을 분장하여 연기하는 것처럼 모방하는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신앙은 본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을 본받느냐이다. 바울은 자신들을 본받을 것을 명하고 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현상의 핵심은 말씀을 듣고 이를 먼저 실천한 이들을 본받고 본이 되고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것인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들을 본받을 것을 말한다. 이는 자신들은 규모없이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7-8절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무질서하게 행하다’는 ‘에탁테사멘’으로 6절에사 사용된 ‘아닥토스’의 동사형이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오를 이탈한 패잔병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8절이 부연한다. 
 
 The introductory formulation of v. 7 makes two points. First, γάρ (“for”) implies that what Paul is about to say provides a motivation or reason for avoiding any Christian brother or sister who is living in idleness. Second, αὐτοὶ οἴδατε (“you yourselves know”; cf. 1 Thes. 2:1; 3:3; 4:2; 5:2) evinces that what follows is already recognized among Paul’s readers, that is, it is part of the ethical tradition received from Paul. He and his missionary colleagues had furnished the Thessalonians with an example of self-sufficiency (see vv. 8f.) having the character of an ethical imperative. Thus Paul reminds them that they know πῶς δεῖ μιμεῖσθαι ἡμᾶς (“how [you] ought to imitate us”; cf. 1 Thes. 4:1 for the use of πῶς δεῖ in the sense of an ethical imperative). In 1 Thes. 1:6f. and 2:14 Paul notes the way in which the Thessalonians became imitators of the experience of suffering endured by various other Christians as well as Christ himself, but here he calls for ethical conformity to his own pattern of behavior, as he does in other texts, such as 1 Cor. 4:16; 11:1; and Phil. 3:17.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3.
 
8절)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음식’으로 번역된 ‘아르톤’은 ‘빵, 떡, 덩어리’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인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모든 식품을 의미하고 나아가서 일상의 삶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의미한다. ‘값없이’로 번역된 ‘도레안’은 ‘거저, 값없이, 무익하게, 헛되이’라는 의미인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취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바로 값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값없이’이루어졌다. 바울은 수고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바울은 동일하게 살전 2:9에서도 수고하고 애씀의 태도로 노력했다. ‘일함’은으로 번역된 ‘에르가조메노이’는 힘을 당하여 일하는 것을 나타내는 ‘에르가조마이’의 현재 분사이다. 이는 그러한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주야로’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뉙토스 카이 헤메라스’라는 표현으로 소유격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이 일을 하면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함께 병행했다.(행 18:3)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동일한 표현이 살전 2:9에 등장한다. 
바울이 이처럼 밤낮으로 땀흘리며 일하는 모습은 그의 사역이 돈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에 대한 반박임과 동시에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게으름에 빠져 있는 데살로니가의 일부 성도들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부담을 덜 주기 위한 목자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본문에서 ‘폐를 끼치다’라는 표현은 ‘에피바레오’라는 표현인데 이는 ‘~위에’를 의미하는 ‘에피’라는 단어와 ‘짐을 지우다’라는 ‘바레오’의 합성어로 ‘~위에 짐을 지우다’라는 의미이다. 앞서 살전 2:7절에서 권위를 주장하다라는 표현이 ‘바로스’이다. 
바울이 이처럼 복음 전하는 자가 물질적인 제공을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고전 9:9-11) 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이유는 1)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줌으로써 복음 전파에 장애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2)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앞서 살전 2장 3, 5절에서 당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철학이나 값싼, 변질된 복음을 가르치며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의 일행이 이러한 자들과 같다라는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다. 3) 미쉬나에서는 유대 랍비들이 돈을 받고 율법을 가르치는 행위를 삼갔다. 이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바울은 아마도 첫번째 이유, 어린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위해서 애쓰며 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후원을 받기도 했고(빌 4:16)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후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했던 자비량선교를 이름하여 ’tentmaking’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밤낮으로 했던 일이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행 18:3) 당시 장막은 주로 길리기아 지방에서 나는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바울은 아려서부터 이 일을 배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는 청년들까지도 한가지씩의 기술을 배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했다. 
 
9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이를 직역하면 ‘우리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이다. ‘권리’에 해당하는 ‘엑수시안’의 원형 ‘엑수시아’는 ‘권한, 권리, 능력’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는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능력을 의미한다(마 28:18)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서 말씀을 전한 사례를 청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 권리이다. 
마태복음 10:10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신명기 18:1
1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바울은 분명히 전도 사역에 필요한 경비 혹은 생계비를 성도들에게 청구하는 것은 마땅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본인은 자신의 복음 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요청하지 않았으며(고전 9:12-15)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마찬가지 였다. 마땅히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바울은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ἐξουσία -ας, ἡ; (exousia), 명사. 권한, 권리, 능력. 아람어 등가: שָׁלְטָן (7), שׁלט (1), שַׁלִּיט (1), תִּפְתָּי (1).
명사 용법
1. 판결 기관 — 영역에 드리운 권위나 영향권; 대개 정치적 혹은 종교적 영역과 관련된다. 관련 주제: 정부; 사법권; 주권; 왕좌; 권위.
막 1:22|| ὡς ἐξουσίαν ἔχων καὶ οὐχ ὡς οἱ
막 11:28||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롬 13:1 οὐ γὰρ ἔστιν ἐξουσία
유 25 δόξα μεγαλωσύνη κράτος καὶ ἐξουσία πρὸ παντὸς
계 13:2 καὶ ἐξουσίαν μεγάλην.
2. 통치자 ⇔ 권위 — 타인들에 대한 지배력(행정적)을 행사하는 사람.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κυριότης. 관련 주제: 규칙; 통치하다; 총독; 섭리; 주권; 왕좌; 주권적인; 주권과 힘.
롬 13:1 ἐξουσίαις ὑπερεχούσαις
엡 1:21 ὑπεράνω πάσης ἀρχῆς καὶ ἐξουσίας καὶ δυνάμεως
엡 2:2 κατὰ τὸν ἄρχοντα τῆς ἐξουσίας τοῦ ἀέρος,
골 1:16 ἀρχαὶ εἴτε ἐξουσίαι· τὰ
딛 3:1 ἀρχαῖς ἐξουσίαις ὑποτάσσεσθαι
3. 권위 — 명령이나 결정을 내릴 권리나 권한.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ἐπιταγή. 관련 주제: 정부; 사법권; 주권; 왕좌; 권위.
막 6:7|| καὶ ἐδίδου αὐτοῖς ἐξουσίαν τῶν πνευμάτων τῶν
눅 12:5|| φοβήθητε τὸν μετὰ τὸ ἀποκτεῖναι ἔχοντα ἐξουσίαν
요 10:18 ἐξουσίαν ἔχω θεῖναι αὐτήν,
계 9:3 καὶ ἐδόθη αὐταῖς ἐξουσία ὡς ἔχουσιν ἐξουσίαν
계 11:6 οὗτοι ἔχουσιν τὴν ἐξουσίαν κλεῖσαι τὸν οὐρανόν,
4. 권리 ⇔ 권위 —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한 배타적인 특권(사회적 혹은 법적 성격의). 관련 주제: 사법권.
요 1:12 ὅσοι δὲ ἔλαβον αὐτόν, ἔδωκεν αὐτοῖς ἐξουσίαν
요 5:27 καὶ ἐξουσίαν ἔδωκεν αὐτῷ κρίσιν ποιεῖν, ὅτι
고전 9:4 μὴ οὐκ ἔχομεν ἐξουσίαν φαγεῖν καὶ πεῖν;
살후 3:9 ἔχομεν ἐξουσίαν,
계 22:14 ἵνα ἔσται ἡ ἐξουσία αὐτῶν ἐπὶ τὸ
5. 지배하다 ⇔ 권위 — 권위자를 통해 이해되는 통치가 필요한 영역. 관련 주제: 주권; 사법권.
눅 4:6 τὴν ἐξουσίαν ταύτην ἅπασαν
눅 23:7 ἐκ τῆς ἐξουσίας Ἡρῴδου
골 1:13 ὃς ἐρρύσατο ἡμᾶς ἐκ τῆς ἐξουσίας τοῦ
6. 재량 (자유) —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거나 판단하는 자유. 관련 주제: 자유; 재량.
고전 8:9 ἡ ἐξουσία ὑμῶν αὕτη
7. 권위 (상징) — 어떤 사람의 권위 아래 있거나 어떤 것을 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나타내는 공적인 표시.
고전 11:10 διὰ τοῦτο ὀφείλει ἡ γυνὴ ἐξουσίαν ἔχειν
8. 소유물 ⇔ 권위 — 특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행위. 관련 주제: 사법권; 소유물.
행 5:4 ἐν τῇ σῇ ἐξουσίᾳ
칠십인역 참조 구절
왕하 20:13; 에스드라 A 4:28; 시 113:2; 시 135:8–9; 지혜 10:14; 단 3:97; 단 4:14; 단 4:28; 단 7:14; 1마카 11:58
명사. 명사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은 자신의 본을 따르는 이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는 ‘헤아우투스 튀폰 도멘’으로 ‘우리 스스로를 본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본’에 해당하는 ‘튀폰’의 원형은 ‘튀포스’로 이것에서 파생된 것이 영어로 ’type’이다. 이는 ‘모형, 형상, 양식, 본보기’라는 의미이다. 
 
어떤 본을 따르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한데 바울은 권리포기를 통한 본을 보여줌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신들을 본받기 원한 것이다. 이후에 ‘본받게’라는 표현은 ‘미메이스타이’로 원형은 ‘미메오마이’로 이 동사는 신약에서 4번 사용된다. 이것의 명사형이 살전 1:6에 사용된 ‘미메테스’이다. 
 
 
- Through a parenthetical remark Paul distinguishes between his and his colleagues’ rights and their actual practice as an example for their converts to follow. The first part of his statement, οὐχ ὅτι οὐκ ἔχομεν ἐξουσίαν, is elliptical and means “(it is) not that we did not have the right (to be supported).” In 1 Cor. 9:4–18 Paul appeals to the law of Moses and to temple practices for warrants to substantiate his right to support in the sight of God. At the same time he denies ever having invoked this right in his dealings with the Corinthians. From 1 Cor. 9:4–6 it would appear that Paul was exceptional among apostolic missionaries in not exercising this right. His reason, as mentioned above, was twofold: First, as 1 Thes. 2:4f. and 9f. suggest, he did not exercise his right to maintenance as a matter of principle; he did not wish anyone to think that he preached out of an impure motive or for his own gain. Second, as he indicates in the purpose clause of the second part of 2 Thess. 3:9, he did it ἵνα ἑαυτοὺς τύπον δῶμεν ὑμῖν εἰς τὸ μιμεῖσθαι ἡμᾶς (“in order that we might give ourselves as an example to you in order that we might be imitated”). Once again the expression is elliptical, but the context makes it clear that Paul’s ethical example was intended to teach his converts to be self-sufficient. The reason for having inculcated this type of behavior is explained in v. 12.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5.
 
 
바울은 형제들을 향해서 규모없이 게으르게 행하고 받은 전통(말씀, 복음)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에게 떠나라고 명한다. 이를 위해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고 자신이 행한 것처럼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으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것은 명한다. 바울의 가르침이 힘이 있는 것은 자기는 노력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르치는 이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땅히 누릴 권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려놓고 그는 수고하며 애를 썼고 이 본을 따르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본을 따르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따라야할 본을 찾고 그것을 분명히 찾았다면 이를 마음을 다해서 행해야 할 것이다. 살후 3:6-9 바울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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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 nthe Lord is faithful. He will establish you and oguard you against pthe evil one.3 And qwe have confidence in the Lord about you, that you are doing and will do the things that we command. May the Lord rdirect your hearts to the love of God and to the steadfastness of Christ.
n See 1 Cor. 1:9
o Matt. 6:13; John 17:15
p See Matt. 13:19
3 Or evil
q See 2 Cor. 2:3
r 1 Thess. 3: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2–5.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3–5.
 
1-2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서 3-4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격려와 위로와 확신, 5절은 그들을 위한 기도이다. 
 
3절) 본문은 부정 접두사 ‘데’로 시작한다. 2절의 마지막 내용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는 미쁘시다로 연결되는 것이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반대한다. 하지만 주님은 미쁘심으로 성도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지키실 것이다. 
 
본절의 미쁘다라는 표현은 ‘피스토스’이다. 이는 ‘충성된, 진실한, 신실한’이라는 의미로 히브리어에서 이에 대응하는 표현으로는 ‘에문’, ‘에무나’등이 있다. 히브리어 ‘에문’은 충성, 성실을 의미하고 ‘에무나’는 ‘확고함, 성실, 진리, 믿음, 진실’을 의미한다. 특별히 ‘에무나’라는 표현은 신실함, 정직, 믿음을 의미하는데 합 2:4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에 바울의 이신칭의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이 표현이 반복되어 사용된다. 
하박국 2:4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πιστός -οῦ, ὁ; (pistos), 형용사. 충성된, 진실한, 신실한. 히브리어 등가: אמן 1 (9), אֵמוּן 2 (2), נְאֻם (2).
형용사 용법
1. 충실한 —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견고한 애정 또는 충성으로 특징된. 관련 주제: 충성심; 충성심.
엡 1:1 Ἐφέσῳ] καὶ πιστοῖς ἐν
골 1:2 τοῖς ἐν Κολοσσαῖς ἁγίοις καὶ πιστοῖς ἀδελφοῖς
살후 3:3 πιστὸς δέ ἐστιν ὁ κύριος,
딤후 2:13 εἰ ἀπιστοῦμεν, ἐκεῖνος πιστὸς μένει·
요삼 5 Ἀγαπητέ, πιστὸν ποιεῖς ὃ ἐὰν ἐργάσῃ εἰς
2. 책임을 져야 할 — 책임감이나 신뢰를 가질 가치가 있거나, 또는 책임이 있는. 관련 주제: 충성심; 충성심.
눅 16:10 Ὁ πιστὸς ἐν ἐλαχίστῳ
골 4:7 ὁ ἀγαπητὸς ἀδελφὸς καὶ πιστὸς διάκονος καὶ
딤전 1:12 ὅτι πιστόν με ἡγήσατο θέμενος εἰς διακονίαν,
딤후 2:2 ταῦτα παράθου πισ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히 3:2 πιστὸν ὄντα τῷ ποιήσαντι αὐτὸν ὡς καὶ
3. 확실히 — 분명히 발생하는; 운명적이거나 피할 수 없는.
딤전 1:15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καὶ πάσης ἀποδοχῆς ἄξιος,
딤전 4:9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καὶ πάσης ἀποδοχῆς ἄξιος,
딤후 2:11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딛 1:9 τὴν διδαχὴν πιστοῦ λόγου,
딛 3:8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4. 신뢰하는 것 — 신앙, 신뢰 그리고 의존(예수의 구원에)하는 특징을 가지는.
요 20:27 καὶ μὴ γίνου ἄπιστος ἀλλὰ πιστός.
갈 3:9 σὺν τῷ πιστῷ Ἀβραάμ.
딤전 3:11 πιστὰς ἐν πᾶσιν.
딤전 6:2 οἱ δὲ πιστοὺς ἔχοντες δεσπότας
딛 1:6 τέκνα ἔχων πιστά, μὴ ἐν κατηγορίᾳ ἀσωτίας
명사 용법
1. 신자 — 구원 얻기 위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사람. 관련 주제: 자신감; 대담함; 믿음; 신뢰; 기독교; 개종자; 믿음.
고후 6:15 ἢ τίς μερὶς πιστῷ μετὰ ἀπίστου;
딤전 4:3 εὐχαριστίας τοῖς πιστοῖς καὶ
딤전 4:10 μάλιστα πιστῶν.
딤전 4:12 τύπος γίνου τῶν πιστῶν ἐν λόγῳ, ἐν
벧전 1:21 τοὺς διʼ αὐτοῦ πιστοὺς εἰς θεὸν
2. 여성 신도 — 여자인 신자. 관련 주제: 자신감; 대담함; 믿음; 신뢰; 기독교; 개종자; 믿음.
딤전 5:16 τις πιστὴ
형용사. 형용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주님은 미쁘시기에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자에게서 지키실 것이다. 본문에 ‘굳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스테렉세이’와 ‘지키시리라’에 해당하는 ‘필락세이’는 모두 미래 직설법 표현이다. 헬라어에서 미래 직설법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확신의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분명한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미쁘시기 때문이다. 
 
본문에 ‘악한 자’로 번역된 ‘투 포네루’는 이를 중성 명사로 볼 것인지 남성 명사로 볼 것인지에 따라 약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이를 중성으로 볼 경우 ‘도덕적 의미에서의 악’을 지칭한다. 이 경우 바울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악한 생활로부터 지키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 된다. 반면 남성 명사로 볼 경우에 이는 ‘낙한 자, 사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2절의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대상이다. 이 경우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3:3 The transition from the thought of v. 2 to that of v. 3 seems somewhat abrupt even though a word link exists in the use of πίστις/πιστός (“faith-faithful”). Paul shifts from talking about human faith or trust in the gospel to the Lord’s faithfulness. At the same time he moves from his own situation to that of his readers. The connection becomes clearer when we realize that Paul’s awareness of his own need for divine deliverance from evildoers and their wicked designs causes him to assure his readers of divine protection from the evil deeds perpetrated by their opponents. δέ in the phrase πιστὸς δέ ἐστιν ὁ κύριος (“but the Lord is faithful”) is genuinely adversative. The contrast in vv. 2b and 3a is between the faithlessness of non-Christians, who act maliciously toward believers, and the abiding faithfulness of the Lord, who protects and cares for his peopl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76.
 
4절) ‘우리가 확신하노니’에 해당하는 ‘페포이다멘’의 원형은 ‘페이토’이다. 이는 ‘설득하다, 확신시키다’의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사용되었다. 이 확신의 근거는 ‘엔 큐리오’이다. 바울과 그 일행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인간적인 수고나 노력, 어떤 조건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 안에서, 주님의 미쁘심안에 거할 때 주께서 그들을 견고하게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확신의 내용은 ‘우리가 명한 것을 행하고 행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명한’에 해당하는 ‘파랑겔로멘’은 직설법 현재로 우리가 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의 의미는 이전에 명한 것이 아닌 지금 편지로 명하고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의 6-15절에서 제시되는 성도의 규모있고 순종하는 삶, 게으름을 멀리하는 삶을 의미한다.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금 자신이 명하고 있는 이 내용들을 행하고 있고 이후에도 행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앞서 살전 1:3-4을 통해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에 견고히 서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행하는 삶을 살았다. 
데살로니가전서 1:3–4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인정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말씀대로 살 것을 기대하고 이를 격려하는 표현으로 이에 대해서 확신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어떠함을 알고 그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예측하려면 그가 살아온 과거아 어떠했는 지를 보면된다. 과거 없이 현재가 없으며 동시에 현재 없이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을 요청받고 있었다. 
 
5절) ‘인도하여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는 ‘카튜뒤나이’로 원형은 ‘카튜듀노’로 ‘인도하다, 이끌다’는 뜻으로 무엇을 곧거나 단순하게 만들어 비뚤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정과거 능동태 기원법 표현이다.  앞서 3:11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평탄하게 인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인도함을 받아야하는 대상은 ‘너희 마음’이다. 마음은 ‘카르디아’이다. 이는 '중심, 마음, 심장'을 의미하는데 ‘사람의 생각, 의지, 감정, 그리고 마음으로써 이해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의 좌소’를 의미한다. 
 
바울이 간구하는 내용은 ‘주께서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들어가게 하시기를’원하고 있다. 본문에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두번 사용되는데 이는 ‘안으로(into)’의 의미이다. 방향과 진입의 의미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에 해당하는 ‘투 데우’와 ‘그리스도의’에 해당하는 ‘투 크리스투’는 모두 소유격의 표현인데 이것의 해석은 주격적 소유격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주격적 소유격 :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신 그 인내에 들어가게 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말로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무죄한 독생자를 보내 희생하게 함으로써 구원하시는 사랑을 나타낸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내를 나타내는 ‘휘포모넨’의 원형 ‘휘포모네’는 문자적으로 무거운 짐 아래 머물러 있는 것을 나타내며 곧건한 자세와 능동적 태도로 이를 참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인내는 십자가 위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롬 5:5; 8:39, 고후 13:13) 
2) 목적격적 소유격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내에 들어가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리 사랑하는 주체와 인내하는 주체는 성도들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내라는 것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것이다. 
 
3:5 The general exhortation begun at 3:1 ends with a benedictory wish-prayer. As with the thoughts in the preceding verses, the connection with what has come before is not immediately obvious, but on closer reflection it would appear that Paul intends the wish-prayer to support the indirect call for obedience in v. 4 and the explicit call for obedience in the following verses.
The opening phrase, ὁ δὲ κύριος κατευθύναι ὑμῶν τὰς καρδίας (“now may the Lord direct your hearts”) is reminiscent of a number of LXX texts employing κατευθῦναι (“to direct”) in a metaphorical sense. Particularly interesting in this respect are 1 Ch. 29:18; Pr. 21:2; and Sir. 49:3, which speak specifically of the Lord directing the heart. καρδίας (“heart”) denotes the inner existence of individuals. In the present context it probably includes the thinking and willing dimension of human existence because Paul apparently wishes his readers to reflect on the love of God and the patience of Christ with a view to encouraging obedience in the area of Christian behavior.
The genitive τοῦ θεοῦ (“of God”) goes with τὴν ἀγάπην (“the love”) and may either be objective, referring to human love directed toward God, or subjective, denoting God’s love for the followers of Christ. Most commentators, on the basis of normal Pauline usage (cf. Rom. 5:5; 8:39; 2 Cor. 13:13), maintain that τοῦ θεοῦ is subjective genitive after ἀγάπη (cf. Frame, 296; Rigaux, 699; Best, 330; Marxsen, 98). But Trilling (139), who rejects the Pauline authorship of 2 Thessalonians, argues that Paul’s customary usage cannot serve as a criterion for determining the meaning of “the love of God” here. On the basis of the reference in 2:16 to God’s love for the Thessalonians, he contends that in 3:5 the pseudonymous author of the letter wished to direct his readers’ hearts to love for God. Trilling’s position is, however, doubtful for three reasons: (1) The idea that the Lord should direct people to love for God seems somewhat unusual; love for God should be the response of individuals to God’s prior love. Such a response should hardly require the direction of the Lord. (2) If the author, whoever he was, had wished to call his readers to love God, then it would have been much more natural and decisive to have employed the infinitive τὸ ἀγαπᾶν with the object τὸν θεόν. (3) The context necessitates that v. 5 encourage obedience in areas of Christian behavior. Reflection on the character of God’s love and commitment to the followers of Christ would appear to be a stronger motivational force for Christian behavior than a call for Christians to love God without at the same time offering a precise reason for doing so. Trilling’s reference to 2:16 is unconvincing as it is too distant to serve this purpose. Thus I would conclude with the majority of commentators that Paul is concerned in v. 5 to direct his readers to God’s love for them as a motivating factor in proper Christian behavior (cf. Best, 330).
A similar grammatical complication exists with the second prepositional phrase εἰς τὴν ὑπομονὴν τοῦ Χριστοῦ (“to the perseverance of Christ”) since the genitive τοῦ Χριστοῦ may be either objective or subjective. Scholars taking it as objective genitive have offered several different interpretations. Von Dobschütz (309) sees it as a reference to the need for the Thessalonians to have a patient expectation for the coming of Christ. Trilling (330f.) claims that it means steadfastness directed toward Christ in the face of “distress and disturbance” (cf. Turner, Syntax, 212). Two factors militate against either of these possibilities: (1) The two prepositional phrases should be grammatically parallel as they are linked by a coordinating conjunction. If the first genitive is subjective, then we should also expect τοῦ Χριστοῦ to be subjective. (2) Both von Dobschütz’s and Trilling’s interpretations necessitate amplifying the text with ideas not contained in the immediate context.
In light of τοῦ θεοῦ being subjective genitive, it seems probable that τοῦ Χριστοῦ should also be rendered as subjective genitive. Once this possibility is accepted it is still necessary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perseverance of Christ.” Best (330) offers two possibilities. Either it refers to taking Christ’s perseverance as an example (cf. Jas. 5:11; Pol. 8:2), or accepting the perseverance that comes from Christ (cf. Rom. 15:4f.). In keeping with the interpretation suggested above for the first prepositional phrase, the former seems the more likely possibility. The perseverance exercised by Christ is a more obvious topic for Christian reflection than the steadfastness given by Christ. Similarly, it is a more powerful force in motivating Christian behavior. Thus Paul’s wish-prayer is for the Lord to direct the readers’ hearts to God’s love for them and to the perseverance which Christ demonstrated as a basis for encouraging what Paul considers proper Christian behavior.
Pol. Polycarp, To the Philippian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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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brothers,1 jpray for us, that kthe word of the Lord may speed ahead and be honored,2 as happened among you, and lthat we may be delivered from wicked and evil men. For mnot all have faith.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6, 13
j See 1 Thess. 5:25
k Ps. 147:15; [1 Thess. 1:8]
2 Or glorified
l Rom. 15:31
m [Deut. 32: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1–2.
 
3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1–2.
 
 
앞선 2장에서 주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서 불법한 자의 출현과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제 3장에서는 바른 재림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일상생활에서의 합당한 삶의 자세를 교훈한다. 1-2절은 자신을 위한 기도 요청이다. 
 
1절) ‘끝으로’라는 이 표현은 ‘로이폰’으로 개역에서는 ‘종말로’라고 번역했다. 이는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이제 마지막으로’라는 의미이다.(고후 13:11; 빌 3:1; 4:8; 살전 4:1)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너희는 기도하기를’에 해당하는 ‘프로슈케스데’는 ‘하나님께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프로슈코마이’의 현재 명령법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복음 전도 사역이 본인들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을 이 사역가운데 부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도 이를 위해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향하여 중보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복음으로 가르치고 이끈 이들을 향해서 기도 요청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각 구성원의 중보기도의 끈으로 묶이기를 원하신다(요 17:6-26; 행 12:5; 약 5:14).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바울은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고 영광스럽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를 요청한다. ‘퍼져 나가’라고 번역된 이 표현은 개역에서는 ‘달음질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치 주의 말씀이 힘차게 내달려 우승함으로 상을 얻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퍼져 나가’라고 번역된 ‘트레케’는 ‘급히 달려가다, 뛰다, 분투하다, 진행하다’라는 의미의 ‘트레코’의 가정법 현재 능동태로 말씀이 급속히 처져나가는 것, 말씀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시 147:15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시편 147:15
15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안에서 주의 말씀이 퍼져 나갔다. 바울은 복음이 자유롭게 강력하게 역사하여 데살로니가 현상을 통해서 불신자들이 구원을 받고 복음의 영향력이 널리 퍼진것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이것이 퍼져나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요청을 하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되고’에 해당하는 ‘독사제타이’는 ‘독사조’의 가정법 현재 수동태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의 힘에 압도되어 변화받아 그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사조’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그 명사형은 ‘독사’이다. 
 
2절)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두번째 중보기도의 내용은 마찬가지로 바울과 동료들을 향한 것으로 자신들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로부터 건져달라는 것이다. 
‘우리를 건지시옵소서’로 번역된 ‘뤼스도멘’은 위험으로부터 구조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뤼오마이’의 가정법 부정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신적 수동태로 구조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시 50:15).
바울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지칭한다. ‘부정하고’로 번역된 ‘아토폰’의 원형’아토포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자리’를 의미하는 ‘토포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제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벗어난’이라는 의미로 ‘적합하지 않은, 어울리지 않은, 옳지 못한, 해로운’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약에서 4번 사용되었는데 신체적 이상(행 28:6)과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것(3회)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악한’으로 번역된 ‘포네론’의 원형 ‘포네로스’는 ‘악’을 의미하는 ‘포노스’의 형용사로 악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가르’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왜냐하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복음이 선포되었을때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그 복음을 듣고 마음이 악하여져서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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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So then, brothers, dstand firm and hold to ethe traditions that you were taught by us, either fby our spoken word or by four letter.
16 Now may our Lord Jesus Christ himself, and God our Father, gwho loved us and gave us eternal comfort and good hhope through grace, 17 comfort your hearts and iestablish them in every good work and word.
d See 1 Cor. 16:13
e ch. 3:6; 1 Cor. 11:2
f ver. 2
f ver. 2
g John 3:16; 1 John 4:10; Rev. 1:5
h 1 Pet. 1:3
i ch. 3:3; 1 Thess. 3: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15–17.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15–17.
 
앞선 13-14절에서 성도들의 구원을 인해 감사하는 내용이라면 15절은 자신이 전한 가르침,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 결국 구원 자체가 신앙 생활의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이며 이를 위해서 구원을 통해서 가르침 가운데 굳게 서서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5절) 바울은 앞서 2절을 통해서 영으로나 말로나 편지를 통해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을 주의 할 것을 말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으로부터 말과 편지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전통에 굳건하게 서서 이를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 ‘아라 운’을 사용하여 본절을 열고 있다. 구원을 얻는 자는 당연히 말씀을 따르고 지킴으로 견고한 신앙을 살아내야 한다. 
본문을 직역하면 ‘형제들아 굳게 서라 그리고 굳게 붙들어라’가 된다. ‘굳건하게 서서’는 ‘스테케테’로 원형 ‘스테코’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그러한 태도를 변치 않고 항상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지키라’로 번역된 ‘크라테이테’는 원형 ‘크라테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무언가를 점유함으로 굳게 붙잡는 것, 어떤 것에 굳게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히 4:14; 계 2:25)
이처럼 어떤 가르침에 굳게 서서 그것을 지키는 것은 매우 큰 힘과 노력, 헌신이 필요하다. 당시 거짓 가르침이 횡횡했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우상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이를 분별하고 흔들림없이 서 있는 것, 나아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에게 요구된다. 
 
stand firm. A fitting antidote to the problem of being “unsettled” (v. 2). hold fast to the teachings. Clarifies how the Thessalonians are to stand firm: by holding fast to the teachings that Paul personally gave them, either orally (“by word of mouth”) or in written form (“by letter”). Significant by its omission is the third possible means of transmission: “by a prophecy” (v. 2), which Paul likely considers to be the source of the false claim about the day of the Lord.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63.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 ‘전통, 유전’으로 번역된 ‘파라도세이스’는 ‘파라도시스’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원래 ‘넘겨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명사로 ‘전통, 전승, 넘겨줌, 내어줌, 양도’라는 의미이다. 이는 존경받는 권위자들로부터 전해 내력오는 구체적인 관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육과 관련해서는 지식과 됴훈이 스승으로부터 학생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3번 사용되었는데 복음서 8번, 바울 서신의 2회는 모두 유대 랍비들, 장로들, 조상들이 전해준 전승을 말한 반면 본절과 3:6, 그리고 고전 11:2에서는 복음의 전승을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랍비들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바울 일행을 통해서 가르쳐진 복음 진리가 성도들에게 전승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전한 것은 바로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고진 11;23)이었다. 
고린도전서 11:23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모든 것, 그의 말이나 편지를 통해 전한 것은 그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은 ‘로고스’로 선포된 말씀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의미하고, 편지는 앞서 보낸 데살로니가 전서를 지칭한다. 
 
바울은 2장 1-12절을 통해서 주의 재림에 대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고, 13-14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구원을 감사했으며, 15절에서는 자신이 전한 사도적 가르침, 전통을 굳게 지킬 것을 권면한 이후에 16-17절에서 두번째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첫번째는 1:11-12) 여기서 16절은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에 대한 내용이고 17절은 기도의 내용에 대한 서술이다. 
 
16절) 바울의 기도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을 부연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이라고 표현한다. 
첫번째로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사랑하시고’에 해당하는 ‘아가페사스’는 ‘아가파오’의 과거 분사로서 이타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을 하셨다는 사실을 아타낸다. 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희생적 사랑을 나타낸다. 
두번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위로를 은혜로 주셨다. 여기에서 ‘영원한’은 ‘아이오니안’으로 시간의 영원성과 불변의 이미지가 포함된 단어이다. 즉 ‘영원한 위로’는 한순간도 변함없고 끝도 없으며 반드시 효과를 내는 위로와 격려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요 14:16) 
세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셨다. 여기서 ‘좋은 소망’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선한 것임을 의미한다. 불법한 자가 약속하는 소망은 사람을  악으로 이끌고 심판으로 이끌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소망은 절대 신실한 그분의 성품과 언약에 기초한 것이기에 우리의 어떠함이나 상황에 의해서 취소되거나 변하지 않는다. 이 좋은 소망을 붙들때에 성도는 고난의 현실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다. 
 
17절) 본절은 접속사 ‘카이’를 중심으로 두개의 서술어가 등장한다. 먼저 ‘위로하시고’에 해당하는 ‘파라칼레사이’와 ‘굳건하게 하다’라는 ‘스테렉사이’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희구법 동사로 본문이 바울의 기원, 간구임을 보여준다. 이 두개의 희구법 동사는 모두 3인칭 단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앞선 16절에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일 본질성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위로’와 ‘굳게 하심’의 주체는 본질상 한분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먼저 위로의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라고 구한다.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본래 신체의 중심 기관인 ‘심장’이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뇌가 아닌 심장이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 자리라고 생각했으며 성경에서도 종교적 생활과 도덕적 생활을 결정하는 곳을 나타낼 때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눅 16:15; 롬 5:5; 엡 3:17) 
‘위로하다’라는 표현인 ‘페라칼레사이’는 ‘카라칼레오’의 부정과거 능동태 희구법표현이다. 이는 ‘파라’라는 표현과 ‘칼레오’라는 표현의 합성어로 '옆에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성도의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위로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파클레토스’는 ‘보혜사, 성령, 조력자, 중재자’라는 의미이며 ‘에클레시아’는 ‘회중, 교회’를 의미한다. 
 
‘굳게 하다’라는 표현인 ‘스테릭사이’는 ‘스테리조’의 부정과거 능동태 희구법 표현이다. 이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기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라는 표현(눅 9:51)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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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But xwe ought always to give thanks to God for you, ybrothers beloved by the Lord, because God chose you zas the firstfruits4 ato be saved, bthrough sanctification by the Spirit and belief in the truth. 14 To this he called you through cour gospel, aso that you may obtain the glory of our Lord Jesus Christ.
x ch. 1:3
y 1 Thess. 1:4; [Deut. 33:12]
z Eph. 1:4
4 Some manuscripts chose you from the beginning
a 1 Thess. 5:9; [2 Tim. 1:9]
b See 1 Thess. 4:3
c 1 Thess. 1:5
a [See ver. 13 abov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13–14.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1)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 헬, 참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13–14.
 
 
 
13절) 앞서 1-12절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는 헛소문에 미혹되지 말것을 당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불법의 사람의 출현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다. 이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하고 있다. 바울은 앞서 불신자들과 대조되게(10-12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서 그들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께 구원받도록 선택받은 자임을 입증했다. 
 
한글 성경은 번역하고 있지 않지만 원어나 영어 성경에는 역접 접속사인 ‘데’, ‘but’가 있다. 이를 직역해보자면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땅히’로 번역된 ‘오페일로멘’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 동사이다. 원형 ‘오페일로’는 본래 빚을 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처럼 행하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는 의무를 지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감사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성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을 성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선택과 사랑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자를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한 자를 사랑으로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원래 하나님께서 선택 밖에 있던 이방인인 그들을 택하사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앞서 10절에서 멸망하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했다. 반대로 형제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한글 성경은 ‘처음부터’로 번역한 이 단어는 ‘아파르켄’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아파르케’는 첫 열매(롬 8:23; 16:5; 고전 15:20; 16:15; 약 1:18)라는 뜻이다. 이를 첫 열매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첫 열매로 택하사 구원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에베네도가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이듯(롬 16:5),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이듯(고전 16:15), 또한 성도가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에 대한 엇 열매이듯(약 1:18)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택함 받은 첫 열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첫 열매는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롬 11:16; 겔 48:14) 구약 율법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드려지게 되어 있다.(출 34:26; 레 23:10-14) 반면 이를 ‘처음부터 택하셨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는 ‘아르케스’의 원형 ‘아르케’는 ‘기원, 시작, 출발’의 의미를 지닌다(요 1:1; 히 7:3; 벧후 3:4) 그렇다면 본문에서 ‘아르케’는 세상의 시작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선택하셨다는 의미로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하기 이전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 대한 선택이 ‘창세 전에’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엠 1:4의 진술과 상통한다. 
에베소서 1:4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선택받은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당시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였다(살전 1:4-5) 즉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주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요 6:65) 
선택의 궁극적 지향점은 구원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이는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 방편을 설명하는 전치사구이다. ‘성령의’로 번역된 ‘프뉴마토스’는 프뉴마의 소유격으로 성령께서 주도하신다는 의미이다.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하기아스모’는 ‘성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령에 의하여 진행되는 성도의 성화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며(살전 4:7) 주의 재림때에 성도를 하나님앞에 서게하는 원동력이기도하다(살전 3:13). 하지만 기억할 것은 성화가 성령의 일방적인 역사가 아니라 성도의 협력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롬 8:14) 거룩한 열망을 품게 되고 하나님앞에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진리를 믿는 다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의 특성(12)과 정 반대되는 특성이다. ‘진리’, ‘알레데이아’는 복음의 진리를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맥이 닿아 있다.(여 14:6) 곧 진리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은 신자들의 머리에만 마물러 있지 않고 모든 믿는 사람의 삶 속에서 역사한다.(살전 1:3) 
 
2:13 ought. See 1:3. give thanks. This is technically the second thanksgiving in the letter (see 1:3; cf. 1 Thess. 1:2; 2:13). beloved by the Lord … God chose you. See note on 1 Thess. 1:4. This may echo Deut. 26:18, where the reference is to God’s choice of Israel. as the firstfruits. This indicates that the Thessalonians, as early Christians, are the firstfruits of the new humanity, or of Thessalonica. (On firstfruits offerings, see Ex. 23:19; 34:26.) However, as the ESV footnote indicates, some manuscripts read “from the beginning” (Gk. ap’ archēs) rather than “as firstfruits” (Gk. aparchēn; see note on 1 Cor. 15:20). In that case, Paul’s point is that God’s choice was in eternity past. Either way, Christians were divinely elected to be saved, and this was to be the ultimate end of a journey marked by sanctification by the Spirit and belief in the truth, in contrast to the way of unbelievers, who are marked by unrighteousness and will believe the Antichrist’s lie (2 Thess. 2:10–12). Note the involvement of each person of the Trinity: the Father elects, the Son loves, and the Holy Spirit make s holy.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8.
 
14절) ‘이를 위하여’, 이것은 앞선 13절에서 형제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이다.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앞서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당신의 말씀의 종들을 통하여 부르신다. 우리의 복음은 앞서 살전 1:5에서도 이미 등장한 바 있다. 직역하면 우리의 그 복음을 통하여라는 의미이다. 바로 그 복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 없고, 듣는 것이 없으면 믿을 수 없고, 믿는 것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게 된다.(롬 10:13-14) 
여기서 우리의 복음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에게서 기원한 복음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좀더 부연하면 ‘하나님께서 택정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하여 바울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부르사’는 ‘에칼레센’로 이 원형은 ‘칼레오’로 ‘부르다, 이름하다, 칭하다’라는 의미로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렇게 복음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사람의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되고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의 고난을 끝내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행 7:55-56) 그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하신다.(빌 2:10)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면 바로 이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결국을 알게 된다면 이 땅에서 현재 당하는 고난은 경한 것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18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17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본문에서 ‘얻게’로 번역된 ‘페리포이에신’은 명사 ‘페리포이에시스’로 이는 영구적 취득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앞서 살전 5:9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결국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백성으로서 누리고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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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not remember that when I was still with you I told you these things? And you know what is restraining him now so that he may be revealed in his time. For lthe mystery of lawlessness mis already at work. Only he who now restrains it will do so until he is out of the way. And then nthe lawless one will be revealed, whom the Lord Jesus owill kill with pthe breath of his mouth and bring to nothing by qthe appearance of his coming. The coming of the lawless one is by the activity of Satan rwith all power and false signs and wonders, 10 and with all wicked deception for sthose who are perishing, because they refused to love the truth and so be saved. 11 Therefore tGod sends them a strong delusion, so that they may believe uwhat is false, 12 in order that all may be condemned vwho did not believe the truth but whad pleasure in unrighteousness.
l Rev. 17:5, 7
m 1 John 2:18; 4:3
n See ver. 3
o [Dan. 7:10, 11]
p Isa. 11:4
q [1 Tim. 6:14; 2 Tim. 1:10; 4:1, 8; Titus 2:13]
r [Rev. 13:14]; See Matt. 24:24
s See 1 Cor. 1:18
t [1 Kgs. 22:22; Ezek. 14:9; Rev. 17:17]
u [1 Thess. 2:3; 1 Tim. 4:2]; See Rom. 1:25
v Rom. 2:8
w See Rom. 1:3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5–12.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1)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1)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 헬, 참
1) 헬, 참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5–12.
 
5절) 바울은 이미 이전에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주의 날에 일어날 일들, 적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말했었다. 
‘말한’으로 번역된 ‘엘레곤’은 말하다인 ‘레고’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바울이 과거에 그와 관련된 일들을 줄곧 말했었음을 보여준다. 
기억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것, 주께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매우 칭찬받는, 또한 매우 빠른 속도로 믿음에 성장하고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 였지만 유독 이 부분을 기억하지 못함으로 교회안에 혼란이 야기되었다. 바울은 지금 이 부분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6절) 주님께서 그분의 때에 다시 오시는 것처럼, 적그리스도 또한 자신의 때에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은 그의 때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지금이 그의 때가 아닌 이유는 그를 막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그를 막는 것이 없어지면 그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게 하려 하여’로 표현된 ‘아포칼륍데나이’의 원형은 ‘아포칼립토’로 이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져 있던 것을 벗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불법한 자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가 되기 전에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때’는 그 자신이라는 의미를 지닌 ‘해아우투’와 때를 의미하는 ‘카이로’가 사용되었다. ‘카이로’의 원형 ‘카이로스’는 연대기적인 시간(크로노스)가 아닌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결정적인 시간, 때를 의미한다. 즉 불법한 자가 나타나는 시기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들어 있는 때인 것이다. 이렇게 불법한 자가 활동하는 시기는 주님의 재림 직전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하실 환난의 때를 의미한다(마 24:21, 29) 
그렇다면 ‘막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막는 것’에 해당하는 ‘토 카테콘’은 중성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것, 억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추측들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로마 제국, 로마 황제으로 로마제국의 법질서가 확고하게 서 있는 한 불법의 사람이 역사의 장에서 활개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천상적 존재, 천사 특히 미가엘을 지칭한다고 한다. 단 10:13, 20-21에 따르면 미가엘은 사단의 지배력을 억제하며(계 12:7) 랍비 전승과 단 21:1의 70인역에서는 미가엘이 대 환난이 시작되기 직전 적그리스도가 유대땅에 장막을 칠 때(단 11:45) 사라진다고 한다.  
셋째는 성령, 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는 견해이다. 초월적 힘을 지닌 불법한 사람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월등한 힘을 가져야하기에 이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지칭한다는 견해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불법의 사람은 활동할 여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될 무렵(마 24:14) 세상의 종말이 무르익고 그 때에 불법한 자가 활동할 것이라는 것이다. 복음이 다 전파되면 더이상 거치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막는 자가 누구인지는 풀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저 불법한 자는 활동을 억제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안에 퍼져 있는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κατέχω (katechō), 동사. 고수하다, 억누르다. 미래 능동태. καθέξω; 부정과거 능동태. κατέσχον; 완료 능동태. κατέσχηκε; 부정과거 능동태. κατεσχέθη; 완료 중간태. κατέσχηνται. 히브리어 등가: אחז 1 (5). 아람어 등가: חסן (1).
동사 용법
1. 주의하다 — 듣다, 경청하거나 주의를 기울이다, 그리고 보통 순응하여 응답하다.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προσέχω. 관련 주제: 듣다; 주의하다.
눅 8:15|| τὸν λόγον κατέχουσιν καὶ
2. 소유하다 — 어떤 것에 대해 소유하거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주장이나 권리로 장래에 수여받을 것을 포함하여. 관련 주제: 소유하다.
요 5:4 ᾧ δήποτε κατειχετο νοσήματι
고전 7:30 καὶ οἱ ἀγοράζοντες ὡς μὴ κατέχοντες,
고후 6:10 ὡς μηδὲν ἔχοντες καὶ πάντα κατέχοντες.
3. 방지하다 (지킴) — 어떤 것을 행하거나 특정 상태에 있기를 중단하다. 의미상 반의어: 하게 하다.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κωλύω. 관련 주제: 명하다; 만나다.
눅 4:42 καὶ κατεῖχον αὐτὸν τοῦ μὴ πορεύεσθαι ἀπʼ
몬 13 ὃν ἐγὼ ἐβουλόμην πρὸς ἐμαυτὸν κατέχειν, ἵνα
4. 굳게 붙들다 — 단단히 고수하다. 물리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관련 주제: 보류하다.
고전 15:2 εἰ κατέχετε,
살전 5:21 τὸ καλὸν κατέχετε,
히 3:6 τῆς ἐλπίδος κατάσχωμεν.
히 3:14 τέλους βεβαίαν κατάσχωμεν.
히 10:23 κατέχωμεν τὴν ὁμολογίαν τῆς ἐλπίδος ἀκλινῆ,
5. 취하다 (가정) — (어떤 물리적 위치나 장소를) 점유하거나 차지하다. 관련 주제: 차지하다.
눅 14:9 ἔσχατον τόπον κατέχειν.
6. 확인하다 ⇔ 억누르다 — 강도, 기질을 약화시키거나, 억제하여 붙잡고 제한 아래에 두다; 물리적으로 무엇을 잡아 누른다고 이해하여. 관련 주제: 보류하다.
롬 1:18 ἐν ἀδικίᾳ κατεχόντων,
살후 2:6 τὸ κατέχον
살후 2:7 κατέχων ἄρτι
7. 고수하다 — 지정된 방향으로 향하는 경로를 유지하거나 이끌다; 배에 사용.
행 27:40 κατεῖχον εἰς τὸν αἰγιαλόν.
8. 저지되다 ⇔ 유지되다. — 완화되거나 덜 강렬하게 되다. 억제되거나 제한되다. 물리적으로 잡혀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관련 주제: 보류하다.
롬 7:6 ἀποθανόντες ἐν ᾧ κατειχόμεθα,
칠십인역 참조 구절
창 24:56; 창 39:20; 창 42:19; 룻 1:13; 왕하 12:12; 시 72:12; 렘 13:21; 렘 27:16; 단 7:18; 단 7:22; 겔 33:24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7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지만 그것의 활동을 막는 자가 있음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막는 자가 옮겨질 때 그 힘을 드러낼 것이다. 
‘불법’은 ‘아노미아’, ‘비밀’은 ‘미스테리온’이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본문의 불법의 비밀이라는 표현은 그런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깨달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미 활동하였으나’로 번역된 ‘에데 에네르게이타이’는 현재 시제로 ‘이미 활동하고 있다’(is already at work)의 의미이다. ‘에네르게이타이’의 원형은 ‘에네르게오’로 ‘활발하게 운동하다, 역동적으로 일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현재 직설법으로 매우 역동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활동이 현재에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에베소서 2:2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린도전서 12:6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이 표현은 악한 영이 불법한 자들 가운데 역사한다라고 말할 때, 성령이 모든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신다고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외적 활동 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내포한 영적 활동을 말한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불법의 비밀은 감추어진채 이미 우리가운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막는 분께서 지금은 막고 계시지만 때가 이르면 불법한 자가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게 될 것이다. 
 
Paul is apparently surprised that his own teaching on the end times had not stopped the Thessalonians from believing the false claim (v. 5; cf. v. 2), so he rehearses that teaching (vv. 6–7). The man of lawlessness cannot be unveiled while what is restraining (Gk. to katechon, neuter participle of katechō, “to prevent, hinder, restrain”) him now is at work. In v. 7 Paul refers to he who now restrains (Gk. ho katechōn, masculine participle of the same word). Scholarly theories on the identity of this restrainer include the Roman Empire/emperor, the Holy Spirit, and the archangel Michael. According to Dan. 10:13, 20–21, Michael restrains satanic principalities (cf. Rev. 12:7), and in rabbinical traditions and the Septuagint of Dan. 12:1, Michael is said to “pass away” when the Antichrist pitches his tents in Judea (Dan. 11:45) just before the great tribulation begins (Dan. 12:1). The restrainer functions to make sure that the man of lawlessness is revealed (see 2 Thess. 2:3) in his time and not before. Prior to the revelation of lawlessness personified, it operates as an impersonal mystery, stirring up hostility to Christ and his people. Lawlessness remains in mystery form until the restrainer is taken out of the wa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8.
 
8절) 본문의 그 때는 앞선 7절의 ‘그것을 막는 자가 그 중에서 옮겨질 때’를 의미한다. 곧 불법의 비밀을 막는 자가 그 활동을 중단할 때에 ‘불법한 자가’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나타나리니’로 번역된 ‘아포칼륍데세타이’의 원형 ‘아포칼륍토’는 앞선 3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감추어져 있던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불법한 자는 비밀스럽게 활동하다가 이제 막는 자가 활동을 중단했을 때 그 모습을 완전히 공개하여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불법한 자는 3절의 불법의 사람을 지칭한다. 
‘불법한 자’로 번역된 ‘호 아노모스’는 단수로 3절의 ‘저 불법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처럼 불법한 자가 나타나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인데 바울 당시에는 ‘불법한 자’가 나타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가 이미 재림했다라는 소문은 근거없는 억측이다라는 의중이 담겨있다.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본 절은 불법한 자가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그분에 의해서 영멸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운’으로 번역된 ‘프뉴마티’의 원형 ‘프뉴마’는 ‘영혼, 정신, 바람, 숨결, 성령’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앞선 2절에서는 영으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breath’로 번역하였고 KJV은 ’spirit’로 번역하였다. 기운, 호흡이라는 표현은 구약 사 11:4과 일치한다. 
이사야 11:4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여기서 그 입의 기운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입의 기운, 호흡’일 수도 있고 그분이 강림하실 때 그분에게서 찬란하게 발하는 섬광과 광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프뉴마(호흡, 기운)’은 적그리스도를 단숨에 죽이고도 남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죽이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넬레이’의 원형 ‘아나이레오'는 ‘죽이다, 폐지하다, 최소하다, 데려가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죽이거나 살인하여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파루시아’라는 표현 하나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표현할 수 있는데 본절에서는 ‘에피파네이아’와 ‘파루시아’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에피파네이아’는 그 자체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위에’를 의미하는 ‘에피’라는 전치사와  ‘번쩍이다’(마 24:27), ‘비취다’(요 5:34)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파이노’의 합성어로 ‘위에서 번쩍이며 나타나다’라는 의미로 신적 존재의 출현을 의미한다. 바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신적 위엄을 지니고 오실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폐하다’라는 의미의 ‘카타르게오’는 어떤 인격체로 하여금 더 이상의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힘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법한 자,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멸절될 것이며 이로 인해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불법한 자를 너무 크게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본문은 분명하게 그날이 오면 주께서 한 호흡에 그를 죽이시고 폐하실 것이다. 
 
9-10절) 본절은 3절과 8절에서 그 출현이 예고된 불법의 사람, 불법한 자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 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 악한 자도 파루시아, 그리스도의 임재와 같이 임할 것이다. ‘파루시아’는 황제나 통치자의 방문을 가리키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인데 불법한 자도 큰 영광가운데 임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탄의 활동을 따라’, 불법한 자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여기서 ‘활동’이라고 번역된 ‘에네르게이안’의 원형 ‘에네르게이아’는 ‘힘, 활력’을 가리키는 ‘energy’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다른 것의 내부에까지 활동력있게 작용하는 힘을 의미한다.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문장 앞에 전치사 ‘엔’은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한다. 악한 자가 ‘엔’ 이하의 것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능력, 표적, 기적’은 행 2:22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사도행전 2:22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불법한 사람, 적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기사들을 동일하게 행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능력’은 ‘뒤나미스’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다. 폭발적인 힘을 가리킨다. ‘표적’은 ‘세메이온’으로 그가 어떤 신적 존재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어떤 비상한 일을 가리킨다. 
‘기적’에 해당하는 ‘테라스’는 사람들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신약에 16번 등장하는데 이곳을 제외한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모두 ‘기사’로 번역되었다(마 24:24; 요 4:48; 행 2:22).
 
9절에서 ‘모든’에 해당하는 ‘파세’와 ‘거짓’에 해당하는 ‘프슈두스’가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한글 개역 개정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라고 번역하지만 ESV는 ‘모든 능력과 거짓 표적들과 기적들(with all power and false signs and wonders)’로 번역한다. 말하자면 모든 능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인데 불법한 자가 나타나 거짓된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된 표적들과 기적들은 불법한 자가 진리와 사랑안에서 행하는 표적들이 아니기에 거짓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표적과 기적자체가 거짓, 속임수라는 의미가 아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단의 활동, 능력을 힘입은 불법의 사람은 분명 특별한 능력을 행함으로 인간을 미혹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깨어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9절에 이어 불법한 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이는 불법한 자의 속성이다. ‘불의’를 의미하는 ‘아디키아’는 부정 접두어 ‘아’와 정의, 공의를 의미하는 ‘다케’의 합성어이다. ‘의, 올바름’은 ‘디카이오슈네’이고, ‘의로운, 정직한’은 ‘디카이오스’이다.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여기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아폴뤼메노이스’로 원형은 ‘아폴뤼미’로 이는 현재 분사인데 ‘그 때에 멸망하게 될 자들’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이 멸망하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구원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멸망하는 자들은 첫째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진리(알레데이아)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관계된 것이다.(요 14:6; 엡 4:21) 그 진리의 특징은 아가페 사랑이다.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자체가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멸망하는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멸망하는 자들은 구원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The coming of the lawless one. The Antichrist has a “coming” (Gk. parousia) which is a poor substitute for Jesus’ coming (Gk. parousia, v. 8). Satan is the power behind the Antichrist, working with unrestricted power on his behalf through signs and wonders—which (though they are false) lead people to believe that the Antichrist is God. Unbelievers are those who are perishing because they have failed to embrace the gospel, God’s only way of salva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8.
 
11-12절) 이는 불의한 자, 멸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이다. 본절의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디아 투토’는 ‘이것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즉 멸망의 사람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그들의 죄에 대한 방치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다른 방법일뿐 하나님께서 죄를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구약 왕상 22:17-23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합 왕을 심판하시기 위해 천상 회의를 개최하신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심판 방법을 논의하셨는데, 한 영이 나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겠다고 고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신다. 이 과정에서 아합은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을 믿고 전장에 나갔다가 아람군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범죄자 아합의 심판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영의 역사를 활용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됨을 이용하셔서 멸망하는 자들로 하여금 미혹에 빠지게 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절에서 ‘심판을 받다’라고 번역된 ‘크리도신’의 원형 ‘크리노’는 하나님의 법정적 심판을 말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분명하고 합당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유혹으로 역사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본절에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은 앞선 10절의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부연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가 미련한 것으로 여겨져 믿지 않고 배척한다.(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이 된다는 사실(롬 3:23-24; 5:18)이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서(롬 1:18) 오히려 그 불의를 좋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Because unbelievers have rejected God’s offer of salvation in the gospel, God sends them a strong delusion. As part of his righteous judgment, God is instrumental in causing these unbelievers to embrace the Antichrist (believe what is false) so that they advance to a whole new level of rebellion and are thus condemned as allies of the Antichrist at the second coming.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8.
 
나는 과연 무엇을 믿고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가? 온전한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공의를 좋아한다면 나는 구원받은 자이다. 하지만 반대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다면 나는 멸망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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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t no one deceive you in any way. For that day will not come, hunless the rebellion comes first, and ithe man of lawlessness2 is revealed, jthe son of destruction,3 who opposes and exalts himself against every so-called god or object of worship, so that he takes his seat in the temple of God, kproclaiming himself to be God.
g Eph. 5:6
h 1 Tim. 4:1
i [ver. 8; Dan. 7:25; 8:25; 11:36; Rev. 13:5, 6]
2 Some manuscripts sin
j John 17:12; [Matt. 23:15]
3 Greek the son of perdition (a Hebrew idiom)
k [Isa. 14:14; Ezek. 28: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3–4.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3–4.
 
앞서 주의 날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미혹되어 두려워하는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제 주의 날이 임하기전에 어떤일이 먼저 일어나게 될지를 설명한다. 
 
3절) 본절에서는 주의 날에 앞서 2가지 일이 먼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첫번째는 배교이고 두번째는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본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어느 누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너희를 미혹시키지 못하게 하라’이다. 말하자면 앞선 2절에서 영이나 말, 편지를 통해서 미혹하는 일들이 있을 텐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것을 명령하고 있다. 
본문에서 ‘미혹되지’로 번역된 ‘엑사파테세’의 원형 ‘엑사파타오’는 ‘철저히, 완전히’라는 강조적 의미를 가진 ‘에크’라는 접두어와 ‘속이다, 유혹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파타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 철저히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온 천하를 꾀는 자는 바로 사단이다.(계 12:9) 
여호와의 증인은 1914년에 예수가 영으로 재림하여 천년 왕국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미혹하고 있으며 다미 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가 재림한다는 주장으로 많은 이들을 미혹한바 있다. 
 
‘배교하는 일이 있고’, 베교하는 일로 번역된 ‘아포스타시아’는 ‘변절, 배교, 탈당’등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수 22:22; 렘 2:19)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하나님 편으로부터 떠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권위에 극렬하게 도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배교의 주체는 누구인가? 본절의 바울의 표현을 보면 ‘아포스타시아’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헤’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미 언급한 적이 있고 당시 독자들이 잘 알고 있었던 대상을 의미한다. 즉 일차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이후의 9-12절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류 전체의 배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 들어간 것 같이(롬 1:18-32) 적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 인류는 하나님께 더욱 전면적인 반역을 일으킬 것이다.(2:4)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불법의’에 해당하는 ‘아노미아스’는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와 부정 불변사 ‘아’가 결합된 단어로 ‘법이 없는 상태, 법을 어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법이 없는 상태의 사람, 불법의 사람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이후 4절에서 설명하는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출현할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바울은 이 불법의 사람을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연한다. ‘~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한 속성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멸망의 아들’은 그 자신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자로 멸망이 운명지워져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불법의 사람에게는 멸망이 운명처럼 임하게 될 것이다. 
 
신약에서 아노미아, 불법이라는 표현은 16번 사용되었다. 이는 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상태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과학에서는 ‘아노미’라는 표현으로 ‘사회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혼돈 상태’를 의미할 때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이들로 빛의 아들이 아니라 어둠의 아들들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여 자신이 그 자리를 뺏앗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을 말한다. 
 
4절) 4절은 앞선 3절의 불법의 사람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직역하면 ‘그는 대적하는 자요, 스스로 높이는 자이다’가 된다. 
‘대적하는’으로 번역된 ‘안티케이메노스’는 ‘~에 반대하여’라는 전치사 ‘안티’와 ‘서 있다’라는 의미의 ‘페이마이’의 합성어로 ‘반대하여 서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어 ‘자기를 높이는 자’로 번역된 ‘휘페라이로메노스’의 원형은 ‘휘페라이로’인데 이는 ‘~을 넘어, 훨씬 위쪽으로’를 의미하는 ‘휘페르’와 ‘들어올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이로’의 합성어로 어떤 것 위쪽으로 들어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중간태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올리다’(고후 12/ㅣ7)라는 의미가 된다. 불법의 사람의 이 자고함은 단순히 자기 높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불신앙적이고 반역적인 자고함이다.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개역개정은 ‘신’이라고 번역한 것을 개역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다. 마찬가지로 ESV는 이것을 ‘god’로, NIV는 이것을 ‘God’로 번역했다. 하나님 혹은 신이라고 불리고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들위에 자신을 높이는 자라는 것이다. 결국 저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이건 혹은 다른 숭배함을 받는 신이건 간에 관계없이 자신이 그들보다 더욱 월등한 대상임으로 높임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성전’에 해당하는 ‘나온’의 원형 ‘나오스’는 성전의 외적 형태를 나타내는 ‘히에론’과는 구별되어 성전의 내부인 성소를 지칭하는 표현이다.(눅 1:9; 마 27:51) 그래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성소 위에 좌정하시는 것처럼 불법의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엄청난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구약시대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고 했던 것처럼, 두로왕이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겔 28:2)고 했던 것처럼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인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떠들어 댈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너희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 13:!4)이라고 하신것처럼 불법의 사람이 실제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후자로 본다면 마지막 때에 교회 안에 불법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내세우다’라는 ‘아포케이크닌타’는 ‘낸호다, 나타내 보이다, 선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포데이크뉘미’의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직역하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주장하는’이라는 의미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이다. 말세에는 이러한 거짓 가르침이 횡횡할 것이고 진리안에 거하지 않는 이들은 그 주장에 미혹되어 거짓 선지자, 불법의 사람을 따르게 될 것이다. 
 
The Authentication of Paul’s Letters
In 2 Thess. 2:2 Paul warns against letters that claim to come from him but do not. Thus in 11 of his letters Paul either identifies himself or gives his signature. These features support the conclusion that all the NT letters attributed to Paul are in fact authentic (rather than having been written by someone else “pseudonymously” in Paul’s nam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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