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지자, 제사장, 왕
교회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삼중직
선지자 :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제사장 : 하나님의 임재를 중개
왕 :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역에 확장
1. 세가지 리더십 역할
모세, 사무엘은 삼중직을 모두 결합한 인물이다.
이 세직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백성 전체를 대표하고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개자요 중매자인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중개하는 연계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은 성소와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일, 토라를 지키고 가르치는 일, 특히 의식상의 불결함과 관련된 문제를 재판하는 일, 끝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맡았다.(개인적, 영적 필요)
선지자는 장래를 예언하는 말을 했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었다. (공적, 사회적 필요)
왕은 나라의 질서와 정의와 평화를 도모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자였다. (조직적, 정치적 필요)
그리스도안에서
성직자 안에서
지식은 선지자적 직분으로부터, 양심을 다스리는 통치력은 왕의 직분으로부터, 인내는 희생적인 제사장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온 백성 안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모두 그분에 의해 보냄받은 자들 안에서 이차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2. 선지자적 백성
종말론의 영
요엘, 베드로의 설교
만인 선지자직
첫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고 있으므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다.
둘째, 모든 사람이 계시를 깨닫는데 필요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있는 선생이 필요없다.
셋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
넷째, 성령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써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다.
보편적인 말씀 사역
교회는 역사상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전파자이다.
첫째 각각의 신자는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고 나가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에 의해 구비된다.
둘째, 만인 선지자직의 의미는 각 그리스도인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신자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일차적인 구비요건은 지속적인 성령 충만이다.
선지자적 교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저 사회의 앰뷸런스가 되어 부상자들을 실어 나를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봉사하도록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제사장적 백성
제사장적 공동체
어거스틴은 낮은 수준의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과 성직자의 제사장직을 구별하였다.
루터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
첫째,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서 유래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제사장 사역에 참여하는데, 이것은 선택된 소수에 의해 대표적으로 혹은 대신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신자의 제사장직은 에클레시아적인 성격과 디아스포라적인 성격을 둘다 갖고 있다.
"우리가 성소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세상 속으로 더 깊이 침투하게 될것이다."
제사장직에 대한 오해
루터와 신자의 제사장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똑같이 제사장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됨으로써 그 제사장직을 공유한다."
루터 이후
볼프강 쇼펠레는 재침례파가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목사 계급과 평신도 간의 차별을 없애게 했고, 각각의 지체가 잠재적인 전파자요 선교사임을 확신하게 했다."
만인 제사장직이 칼빈의 사상에서 혹은 회중의 삶 가운데서 행한 그의 의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침례교도들은 보통 만인 제사장직을 다음과 같은 관행으로 환원시켰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 침례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투표권이 있다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자기 나름의 종교적 신념을 개발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제사장직을 경험하는 것
첫째, 예배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사역
둘째, 세상에서의 섬김을 통한 제사장 사역
셋째, 일상 생활에서 하는 제사장 사역
4. 왕 같은 백성
이 문구는 첫째, 출 19:6절에서 따온 것인데 제사장직 뿐 아니라 나라(kingdom)의 개념을 전달한다. 둘째, 바실레이온(왕의/왕)은 단순히 '히에라테우마'(제사장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다. 셋째, 신약성경의 좀더 큰 맥락에 의거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서 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하나님 나라는 영역이나 영토가 아니라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오토바실레이아', 곧 그분 속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기꺼이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지금 존재하지만 우리가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는 면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고 대표하고 섬기는 기관이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
섭정자란 군주의 대리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스로를 지배하는 왕적인 통치자들인 셈이다.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왕적인 통치자들로 머리되고 왕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동참한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통치에 동참한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소금, 빛, 정탐군의 은유
"그는 또한 정탐군으로 파견될 수도 있다. 사실상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이다. 이 세상의 핵심부에서 몰래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내부로부터 주님의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것, 이 세상에서 하나의 핵심 그룹을 만드는 것, 그 비밀을 발견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화려하게 침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자크 엘룰
왕같은 제사장과 제사장 같은 왕
왕권이 없는 제사장직은 쉽게 새로운 형태의 성직주의, 그저 순전한 종교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사장직이 없는 왕권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선행주의, 영적인 변화가 없는 세계 변혁으로 쉽게 전락한다. 이 둘이 함께 묶일때, 즉 왕같은 제사장만이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언질을 통하여, 그리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을 향해 성육신적 선교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루터는 왕같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호소하며 이렇게 탄원한다.
첫째, 왕권과 관련해서 각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의해 만물보다 높이 들리워졌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으로 인해 예외 없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아무것도 그를 해롭게 할 수 없다. .....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왕일 뿐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들인데, 이는 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그 이유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할 목적으로 그리고 서로 신령한 것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큼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세상속의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가지 직분은 리더십 차원에서 교회를 섬기는데 모두 필요하다. 제사장들은 돌보고, 선지자들은 선포하며, 왕들은 지도한다.
제8장 선교 :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백성
금세기들어 서구는 과거의 선교분야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상실했다.
선교와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 : 기독교 신앙은 유일한 것인가? 다원주의적인 지구촌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복음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인 껍데기를 수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1. 보내시는 하나님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선교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이해하는 방식, 즉 인간적인 전파 행위로서의 선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선교는 성부가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시는 것으로서 명백히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견지되었다.
그 후 적어도 1950년까지는 선교가 믿음을 전파하고 이방인을 개종시키며 교회를 개척하고 사회적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보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에 의해 보냄받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선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감소시키는 비극을 초래했다.
데이비드 보쉬 : 선교는 교회의 삶에서 이 세상적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인데, 그 목적은 자기 피조물을 최종적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통일성과 충만함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
칼 바르트 :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 운동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자체에 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선교
게오르그 비체돔 : 하나님의 선교는 한정적인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인 동시에 보냄받는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냄받은 분일 뿐 아니라 보내는 내용이기도 한데, 이는 신성의 각 위격 안에서 하나님은 전 존재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워드 스나이도 : 선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새롭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흐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공유되던 상호간의 사랑의 힘이 예수님의 선교의 근원이다.
성육신 : 성부에 의해 보냄받음, 성부를 보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보내는 분인 동시에 보냄 받은 분이고, 계시하는 분인 동시에 계시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몸소 구현하신다.
마지막 날들 : 성령에 의해 보냄받음, 성령을 보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보냄받은 분이시며, 성령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종말론의 영의 시대인 오늘날, 성령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추진력이다.
사도들 : 성자에 의해 보냄받음, 성자를 보냄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이 최종적으로 사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독특하게 임명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받아 권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도가 된것이다.
계속되는 사도직 : 삼위 하나님이 교회를 보내심
교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도적이다. 첫째, 교회는 이제 성경에 담긴 사도들의 증거와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혹으로 계속 보내시는 도구이자 결과물이다.
교회는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보냄받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곧 사랑을 보내는 원천이시기 때문에,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로 인해 교회가 태어난 것이지 교회 때문에 선교가 생긴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선교는 대위임령에 대한 의무감이나 단순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교로서 우리가 그 안에 편입된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열방을 복 주시려고 하시는 일이다. 선교 사역 자체는 세상의 필요에 의해 촉발돤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는 보내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3. 선교의 내용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사람들은 흩어져서 땅의 풍부한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와 반대로 동질 사회로 이루어진 단일한 도시를 세웠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족장들은 하나님과의 교통가운데 그분에게 속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공동체를 건설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아울러 그들은 땅에서의 공동창조성과 청지기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적 소명을 성취하는 것
인간적 소명 |
약속 |
기독교적 소명 |
상호 교통 |
하나님의 임재 |
하나님께 속함 |
공동체 건설 |
백성 |
하나님의 백성이 됨 |
공동 창조성 |
땅 |
하나님의 일을 함 |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새언약하에서 예수님은 선교사로 오시는데,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또 한 분의 하나님으로 오신다.
바울의 선교적 비전은 교회를 성령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었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국경을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함께 하나님의 새 사람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신약 성경의 최종적인 비전은 창세기의 첫 두장에 나오는 선교사명,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선교적 약속, 에스겔 40-48장의 선지자적 비전등이 결국 성취되는 장면이다.
선교는 이중적인 초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미시적으로는 이생과 이 세계에 오는 실질적인 구원을 주시하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천국가는 것 이상의 것)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포괄성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구현된 복된 소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에게 회심을 종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 전체와 삶의 구조를 대상으로 의와 정의를 이룩하며, 가난한 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억압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람들의 사고 및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한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 세계 전체, 자원 보존, 환경 친화적인 개발, 지구의 회복등과 관련된다.
끝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권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구조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이 포함된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인간 및 창조 세계와 관련되며, 현세적이면서도 영원한 성격을 갖고 있다. 선교는 재활과 예방의 특징을 둘다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나라의 대변자(선지자들)요, 그나라의 종(왕들)이며, 공동체적으로 그 나라의 현존을 구현하는 실체(제사장들)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안에서 하는 사역은 선포(케리그마)와 봉사(디아코니아)와 교제(코이노니아)를 포함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안식적 '살롬'이다. 이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와 인류사이의 삼중적인 조화로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 보냄받은 백성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
전통적인 그림 : 하나님 -> 교회 -> 세상
호켄다이크 : 하나님 -> 세상 -> 교회
보쉬 : 하나님, 교회, 세상을 삼각 구도로 보았다.
크리스 라이트 : 하나님, 백성, 땅의 삼각 구도
보냄받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선교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파악
교회의 선교는 교회를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를 확장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창조, 구원, 성화, 완성 등에 의해 이루고 계시는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구현하며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성취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처에 침임하는 것을 인식하고 환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등대요 하나님 나라의 출현으로서 또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현시로서 섬기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선교
교단 공동체와 교회 병행단체라는 선교기관은 설교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접근이 아니다. 그것들을 교회의 삼위일체적 표출 중 어느 한 형태를 띤 교회다. 삼위일체적 통일성은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도직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언약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선교사인 것이다.
5. 선교를 위해 구비시킴
선교와 관련하여 교회를 구비시키는 출발점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구비자라는 진리다. 그분이야말로 비전과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며, 동기를 유발시키고 앞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선교의 동기
카아퍼는 모든 선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선교사역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함께 세상속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때때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와 비슷한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흔히들 선교는 예배라고 말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영광이 선교의 최우선 동기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예배행위,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교가 예배인 까닭은 정확히 말해서 선교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서 하는 일이요 삶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예배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을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자기의 수고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선교 구비자는 하나님이시다.
구비의 원리들
첫째, 주권적인 하나님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특정한 일터와 동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각각 위치시킨다는 점을 교회내에서 인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모여 있을때는 피가 정화되고 산소를 공급받는다.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질병과 싸우고 에너지를 공급한다.
둘째, 가라의 구조를 오라의 구조와 병행해서 잘 개발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목회 사역을 할 사람들에게 안수를 줄 때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사회내의 선교를 담당할 사람들을 안수하고 파송해야 한다.
넷째, 고든 프리스는 교회가 일터에서의 선교를 위해 교인을 구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하는데, 즉 교인들로 하여금 일터야말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차적인 장소요 따라서 자연스런 전도 장소로 보게하는 것이다.
제9장 저항 : 권세를 상대로 한 씨름
이처럼 복잡다단한 사항은 그저 인간 개인의 부정과 죄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광범위한 어떤 것으로 말미암는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삶의 보이는 전면에는 그 각각에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후면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 권세에 대한 묘사 : 현대의 혼동
이중적인 언급
바울이 롬 13:1에서 권세들을 언급할 때 정치 지도자들과 영적인 존재들 둘다를 지칭했다.
그런데 권세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인간 외적 언급을 배척하는 입장이 주로 서구 신학자들에게서 나왔는데 이들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우리가 마귀를 잃고 구조들을 얻는 것은 정사와 권세가 위장된 구조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무척 복잡다단함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두면서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침노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권세 위에 군림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우월성에 집중한다.
성경의 용어들
성경에서 정사, 권세, 덕, 권능, 보좌,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구조를 갖춘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이세상에서 삶에 영향을 주는 가시적, 비가시적 실재의 차원인 권세들을 묘사하는 성경의 용어
- 하나님의 회, 천사들, 마귀/사단, 귀신들, 세상, 정사와 권세, 맘몬, 육신, 율법, 죽음
2. 권세에 대한 경험 : 다차원적 저항
타락한 사회 구조들
종교와 삶, 성적 이미지, 거대 기업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맘몬, 사회내 모든 권력의 외적 표출의 내적 측면
오브라이언 : 새로운 이론의 옹호자들은 구조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구조 자체를 마귀화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두가지 극단을 모두 피해야 한다.
인격적인 영적 존재들
그들은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고 목적 지향적인 활동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기로 작정한 존재들이다.
서구 사회는 대개 삶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배척해 버렸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사회적 분석에 의존하여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지적 : 뉴턴의 작업은 자연가운데 비합리적인 원칙이 존재할 여지가 없게 만들었고, 다윈의 그림은 마귀와 주님의 나라간의 우주적 전쟁을 묘사하는 성경의 그림을 완전히 능가하는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경쟁을 묘사했으며, 프로이트는 흑암의 권세들을 그들 최후의 보루인 영혼으로부터 쫓아냈는데 그들을 결국 심리적인 콤플렉스와 신경증 그리고 그와 비슷한 유의 질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발터 윙크 : 우리 현대인은 아무리 의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해도 전통적으로 정사와 권세라는 범주 아래 집어넣었던 이 같은 신화적인 실체가 진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성경은 복잡다단한 조직 계통적인 악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조직 계통적인 악
붉은 용-두마리 짐승-음녀-바벨론
초자연적이고 인간 외적인 세력과 인격적인 존재가 인간의 제도와 구조, 문화적 및 사회적 삶의 패턴에 영향을 주고 그것들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악마적인 것과 사회 구조를 쓸모없는 것인양 내다 버려서는 안되고 그것들의 변혁에 참여할 필요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3. 권세에 대한 이해 : 성경신학
선한 권세들
이 권세들은 타락의 결과도 아니고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간의 육신성을 억제하려는 필수 불가결한 조치도 아니며, 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일부다.
일상적인 네가지 틀 : 결혼, 가족, 나라, 법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권세들 - 인간적 차원과 인간 외적 차원
권세에 압도된 권세
예수님은 그들을 멸하시고, 벗기시고, 개선 행진을 뒤따르게 하거나 포로로 삼으셨으며, 무릎 꿇게 하시고, 그들을 평정하고 화목케 하셨다.
오스카 쿨만은 권세들을 죽기전에 발버둥치는 쇠사슬에 묶인 짐승에 비유했다.
4. 권세와의 싸움 : 선교와 사역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순응적인 자세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육신에 대해서는 금욕함으로써 그리고 열망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마귀에 대해서는 대척하고 피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복음 전파
권세들의 거짓 주장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로 무장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공적인 제자도
권세에 대처하는 여러가지 방법
|
축사, 중보 |
무력함으로 감수 |
창조적 참여 |
정당한 혁명 |
소명 |
영적 해방 |
타락된 상태임을 증거 |
섭정 |
사회적 변동 |
수단 |
기도 |
무력함 |
일/정치 |
시민 불복종 |
형이상학 |
악마적 |
식민지화된 구조 |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구조 |
없음 |
교단 |
은사주의 |
재침례파 |
주류파 |
해방 신학 |
주요 저자 |
왓슨, 윔버, 슬리에르 |
요더 |
마우, 베르코프, 엘룰 |
보니노, 구티에레즈 |
사회 정의와 공적인 제자도는 선행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포사이드가 말했듯이,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복음은 "영원 및 그 사회적 책임에 준거점을 두고 있다." 다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 준거점을 견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때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분들고 있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심정을 품게 된다.
둘째, 우리의 기도는 제아무리 청산유수와 같다하더라도 성령의 간구에 비하면 한갓 신음소리와 우물거림에 불과하므로 성령의 중보에 의존하게 된다.
셋째, 일종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넷째,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된다.
순교
5. 권세에 대한 최종적 평정 : 종말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때 권세들을 최종적으로 화평케 하실 것을 비전으로 바라보지 않고는, 현재에 권세들과 신실하게 씨름할 수 없다. 위르겐 몰트만은 종말론이야말로 신학 분야 가운데 가장 목회적인 영역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삶의 정오에 사는 것도 아니고 황혼녘에 사는 것도 아니며, "새 날이 동터오는 지점, 곧 밤과 낮, 지나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이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살고 있음을 종말론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성을 공유하는 인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세속적인 일에 거리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저 도시의 빌딩의 일부를 구성할 만큼 훌륭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내밀한 기도로부터 가장 공적인 정치 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죄로 얼룩진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죽음과심판의 골짜기로 내려가야 마땅함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아버지께 바칠 때 그것이 그분과 함께 보존되어 그리고 불로 깨끗하게 되어 결국에는 거룩한 도시(성)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기. 신학적으로 사는 인생
이 책에서 우리는 교회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이라는 것과 어떻게 교회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소환을 받아 구비되는지 살펴 보았다.(목사의 이력서는 보통 그 아내의 얼굴에 쓰여 있다)
1. 정통 교리(Orthodoxy)
일상적인 삶의 구속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 하여금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으며, 따라서 그들도 사랑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돌보아야 할 청지기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교리를 사물에 대한 태도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급진적인 기독교적 물질관을 정립하게 한다. 속죄의 교리는 자비를 베풀며 살도록 우리를 구비시킨다. 교회론은 모래알과 같은 신자 개개인이 그저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경험을 하면서 살도록 촉구한다. 종말론은 시간이 관리할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비실천 신학의 위험
정통교리는 단지 하나님에 관해 옳게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해 말한 반면 욥은 하나님께 말했다. 단지 지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정통 교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리 충만한 삶
정통 교리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학과 일상 생활의 연계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교리들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교리들은 일상의 삶을 축복한다.
2. 정통 행위(Orthopraxy)
온전한 의미의 신학적 삶
정통 행위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조화를 이루는 행습, 즉 세상에 가치와 선을 가져다 주는 실천이다.
모든 이론에는 암시적으로 행동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행동도 암시적으로 이론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적 행습의 핵심
남편이 아내가 자기를 잘 받아주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아내의 마음을 사기 위해 굳이 거창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의거해서 사는 사람은 "상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했거나 의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자 여러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기독교적 행동(정통 행위)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던 계략이나 계산된 생각 혹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것을 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 저것을 해주신다는 식의 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정통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삶은 본질상 자발적인 것이다.
3. 정통 심성(Orthopathy)
선지자는 하나님의 파토스, 즉 하나님이 마음에 품고 계신 것을 체현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마음의 수양이야말로 포스트모던 문화가 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한 성경적 반응은 이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까지 미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학은 머리와 가슴을 하나로 묶는 바 하나님을 아는 실천적 지식이므로 지혜의 특성을 갖고 있다.
마음을 교육하라
첫번째 학교는 물론 가정이다.
크리소스톰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 부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동시에 에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이웃
하나님을 향한 열정
사실 욥은 치유를 간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바랬던 것은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그래서 욥의 발언은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서, 거룩한 인내심을 품고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탐구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정통 교리를 믿고 정통 행위를 하는 신학자들)는 과격하고 열정적인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는 것,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정통 심성이다.
정통 교리, 정통 행위, 정통 심성. 이 셋은 모두 신학과 일상 생활의 결혼, 즉 찬미(정통 교리)와 행습(정통 행위)과 열정(정통 심성) 가운데 신학과 삶이 연계되는 것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