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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매달았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따분한 사람이라고 고발했던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역동적이어서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충격적인 개성을 질식시키고 그분의 주변을 지겨운 분위기로 감싼 것은 그 후의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유다의 사자의 발톱을 매우 효율적으로 깍아 주었으며, 그분께 "온유하고 부드럽다"는 증명서를 붙여 주고, 그를 창백한 성직자들과 착실한 할머니들에게 딱 맞는 애완동물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분을 결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험한 선동가라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분명 그리스도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우셨으며, 정직한 구도자들에게는 인내심이 많으셨으며, 하늘 앞에서는 겸손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존경받던 성직자들을 위선자다라고 모욕하셨으며, 헤롯 왕을 "저 여우"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잔치상에서 함께 어울렸으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다. 그분은 분에 차서, 거래하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그들과 물건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분은 성스럽고 고색 창연한 수많은 규제들을 논파하셨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병을 고쳐주셨고, 다른 사람의 돼지떼와 재산에 대해서는 충격적일 만큼 무관심하기도 했다. 그분은 부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해서도 마땅한 경의를 표하지 않으셨다."(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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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8(2013-12-31)

 

지금 이곳 밴쿠버는 20131231일 오후 6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1411일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겠지요. 동일하게 하루가 지나는 것이지만 1231일에서 새로운 해의 11일로의 하루의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2013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저 개인적으로는 타국 땅에서 나그네로, 또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좋은 환경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에 동역자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모두 새로운 한 해에 더욱 풍성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식들을 들으면서 조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안녕하지 못한 현실들로 인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지 못한 이 시대 속에 더욱 안녕함이, 평안함이, 샬롬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월터스토프는 그의 책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에서 공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즐거워하는 것이기에 샬롬이 없으면 안 되며, 샬롬은 윤리적인 공동체(ethical community)이기에 공의가 없으면 부상을 당하고 나아가 샬롬은 책임 있는 공동체(responsible community)임과 동시에 책임 있는 공동체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책임 있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곳 안에 기쁨이 실종되었다면 샬롬은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공의와 샬롬이, 정의와 평화가 얼싸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2014년에도 저의 학업과 가정,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재정으로도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Happy New Year!!



 

기도제목

1. 20141월부터 Trinity Western University안에 한국인 유학생 사역을 맡게 되었는데 잘 감당하도록

2. 113일부터 시작되는 봄학기 수업을 잘 감당하도록

3. 왼쪽 어깨가 많이 아픈데 빨리 낫도록

4. 학업, 사역, 가정에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참고로 사진이 첨부된 소식지를 보실 분들은 제 블로그를 peterjoy.tistory.com

 

20131231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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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7(2013-12-13)

 

이곳 밴쿠버는 겨울이 우기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10월부터 2월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온다고 합니다. 작년에 제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 1116일이었는데 그때도 거의 매일 같이 비가 왔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날씨가 이상해졌다고들 합니다. 비가 오면 날씨는 우중충하지만 따뜻한데 요즘은 날씨는 화창한데 매우 춥습니다. 이것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도 이제 눈이 제법 많이 오고 있다고 하는데 별 사고 없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1년을 회고하며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제 1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약속한 3년 중에 1/3이 지나간 거죠. 돌아보면 이 1년의 기간 동안 집도 이사하고, 2학기의 공부도 이제 마쳤고, 한결이가 Kinder에 입학하고, 교회에서 외국인 사역도 시작하고, VIEWACTS 학생회 임원으로 일도 하고, 경제적인 문제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바쁘게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물론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들도 많습니다.

얼마 전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너무 바쁘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했지만 가까이 있는 아내를 많이 헤아리고 돌아보지 못했던 거죠. 어느 날 아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밖에서는 Others Second의 삶을 살면서 정작 집에 와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Others Second의 삶을 살지 않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참 속상하기도 하고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재활용 센터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좀 더 가족들과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내는 지금은 아주 좋아졌습니다. 한 여인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서 이웃을,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을 잘 아는데 현실은 가장 가까운 한 여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고백하면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가 한 말에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노력할 것 같아서 고백합니다.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며

이번 학기에는 WVS500 세계관 기초, SCS503 창조론, FSC502 구약윤리 이렇게 세 과목을 수강했고 의료윤리 과목을 청강했습니다. 수업을 모두 마쳤고, 어제까지 제출해야할 paper들을 마무리해서 제출했습니다. 이곳 VIEW에서 공부하는 것의 백미는 각 과목에서 마지막에 제출하는 paper입니다. 해당 과목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해서 그에 관련된 paper를 쓰는 것인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과목들은 그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고 선지식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연구 질문을 뽑고 그것에 맞는 자료들을 모아서 읽고 정리해서 paper를 쓰는 작업이 쉽지 않지만 제게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이전에 한국에서 공부하면서는 이렇게 공부하지 못한 게 사실인데 많은 자료들을 읽고 그것을 내 말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그 주제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글재주가 없어서 내 글을 쓰는 일은 아직도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글을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각각의 수업에 다음과 같은 주제들의 글을 썼습니다.

1) 세계관 기초 : 포스트모던 시대 신앙과 학문의 통합(월터스토프를 중심으로)

2) 창조론 : 생물 진화와 우주 진화 - 그 본질적인 다름에 대한 논의

3) 구약 윤리 : 이 시대에 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을 중심으로)

 

그리고 이번학기 창조론 수업의 과제로 창조론에 대한 내용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직접 강의하고 피드백을 받아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SFUJDM 모임에서 한 번 강의를 하고, 제가 섬기는 Jubilee에 나오는 유학생들에게 강의를 했습니다. 유학생들에게는 영어로 처음 강의를 해봤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고, 유학생들은 때로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해서 이해하기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몇몇 행사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1023일에는 VIEW 학생들을 중심으로 논문 작성법과 관련된 몇 가지 강의들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Refwork와 정보검색법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처음 paper를 쓰면서 어떻게 써야하는지 막막해하는 신입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원우회에서 준비한 강의인데 다들 열심히 참여해 주었습니다.

 

매년 11월 첫째주는 VIEW day로 이곳 TWU안에 VIEW가 학위과정을 시작한 것을 기념하여 학교 채플에서 저희가 주관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올해는 15주년 되는 해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세계관 대학원 과정을 해외에서 진행하게 하신 것에 감사드리고 이것이 한국 교회 안에 의미 있는 운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1115-16에는 세계관 배우자 학교를 진행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행사입니다. 첫째는 세계관을 배우자라는 것과 둘째는 지금 학우들의 배우자들에게 우리가 배우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올해는 첫 번째로 기독교세계관 기초에 해당하는 내용을 압축해서 양승훈 교수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배우자들이 이곳에서 배우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1130일에는 북미주의 세계관 운동단체인 Summit Ministries의 대표인 Dr. Furgason을 모시고 “Developing a Biblical Worldview”라는 세계관 강의를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각의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명사 초청 강연은 111일인데 Regent의 폴 스티븐스 교수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아마 평신도 신학과 관련된 내용들을 듣게 될 것인데 벌써 기대가 됩니다.





 

125일에는 ACTS 학생회에서 준비하는 Christmas Banquet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의 대의원이기도 해서 함께 준비 했는데, 원우들과 교직원들, 그리고 가족들을 모두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00 여명이 참석하는 행사였는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진행되는 행사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식사도 풍성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졌습니다. 어떤 분의 말이 아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의 100%는 남편 때문이다라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짐하고 노력해도 잘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더 좋아지리라 믿습니다.(아멘)

이번주 화요일(12/10) 저녁에 한결이 학교에서 진행하는 크리스마스 발표회에 참석했습니다. 체육관에서 저녁 7시에 진행하는 행사라 일찍 간다고 30분이나 일찍 갔는데 이미 자리가 만석이었습니다. 어렵게 자리에 앉아서 아내와 이렇게 아이들 발표회에 학부모로 참석하니 감회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행사에 참석하고 진행해보기도 했지만 내 아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의 의미가 많이 다르더라구요. Kinder부터 grade 3까지 진행하는 행사였는데 전체적으로 뮤지컬 형식으로 학년별로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Kinder의 파트가 마지막 부분이었는데 역시 어린 아이들의 무대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50-60여명의 유치원생들이 나가서 노래를 하는데 한결이 목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Facebook한결이의 목소리가 들린 이유를 물었더니 몇몇 분들이 아빠니까”, “사랑하니까”, “발음이 특이해서라는 답들을 올려주셨는데 정답은 목소리가 커서였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데 주눅 들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아주 열심히 적극적으로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하기도 하고 아주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입술을 벌려 열심히 당신을 높여드릴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신음과 탄식까지도 들으시는 것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모두 기쁜 성탄 맞이하시고 소망이 넘치는 새해, 2014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이번 학기 잘 마무리 한 것에 대해서 감사

2. 아내와 가족들이 이곳의 삶을 더 잘 누리도록

3. Jubilee 채플 유학생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4. 이웃을 잘 섬길 수 있도록

5. 새 학기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데 필요들이 잘 채워지도록

 

 

참고로 사진이 첨부된 소식지를 보실 분들은 제 블로그를 peterjoy.tistory.com

 

20131213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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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3일 VIEW에서 진행한 강의 자료 입니다. 



정보 검색 및 활용법.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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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96(2013-10-22)

 

이곳 캐나다 밴쿠버는 이제 좋았던 여름은 가고 우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 속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역자 여러분 모두 풍성한 가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가을학기 수업

이제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긴 여름 방학을 보내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공부 모드로 전환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더군요. 저는 이번 학기 3과목의 수업을 듣습니다. WVS500 세계관 기초, SCS503 창조론, FSC502 사회정의 이렇게 세 과목을 수강했고 의료윤리 과목을 청강했습니다. 이곳 기독교세계관대학원과정의 강의들은 스펙트럼이 꽤 넓습니다. 그래서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들일 경우에 공부하고 paper쓰는데 어려움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이번 학기 주제들이 모두 중요한 관심사들입니다. 가능한 제가 하던 캠퍼스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이 과목들을 소화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업이 진행되면 각 과목당 읽어야 할 책들이 많고(과목당 1300페이지 이상), 수업이 한-두주간 인텐시브로 진행되기 때문에 수업주간에는 수업에 대한 부담이 굉장히 많고, 수업을 마치면 paper의 압박이 심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해당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잘 활용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응원해 주세요

 

9월 28일에는 VIEW신입생 환영회를 원우회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번학기에도 13명 정도의 신입생들이 입학해서 함께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 많이 오셔서 더 기대가 많이 됩니다.


 

원우회 임원들 중심으로 이번 학기 신입생들을 위해서 논문 작성법이라는 강의를 준비 중입니다. 양승훈 교수님께 표절을 피하면서 논문 쓰는 법”, 유승훈 박사님께 “Refworks & Endnote 사용법을 부탁드렸고, 그리고 제가 정보 검색 방법을 준비 중입니다. 저도 첫 학기 수업 듣고 논문을 쓰면서 이게 제일 필요한 부분이었고 힘든 부분이었는데 신입 원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Jubilee 채플(International Student 사역)

지난 9월초 사역지를 양승훈 교수님이 사역하시는 Jubilee 채플로 옮겼습니다. 현재 주일 예배를 저희가 공부하는 ACTS Seminary 건물(Fosmark Centre)에서 드리고 있습니다. TWU 안에는 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대학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불신자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출석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시간을 놓치거나 교통편이 없어서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한 두 명의 친구가 Jubilee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교회에서도 유학생 사역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학기 본격적으로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현재 Jubilee에서는 영어로 통역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처음 제가 교회에 인사하러 갔을 때 외국인 학생들이 4명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Seed member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학생들이 2주 동안 한명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맨땅에 헤딩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4명의 학생들이 다시 참석했고, 그래서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저녁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함께 먹고 노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ㅋㅋㅋ) 그래서 4명을 초대하기로 아내와 함께 계획하고 주일날 갔는데 그 주일에는 8명이 참석을 해서 예상을 벗어났고, 당일에는 9명이 참석해서 아주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차량을 제공해주신 정용환 집사님, 맛난 스테이크를 준비해준 아내와 안보람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현재 함께 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국적이 아주 다양합니다. 중국, 대만, 독일, 캐나다, 미국, 한국... 아직은 특별한 행사나 사역은 하지 않고 주일날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교제하고 주중에 몇몇 친구들 만나서 교제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캠퍼스 생활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의미 있는 만남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저희 가족은요...

요즘 아침이 꽤나 바쁩니다. 한결이가 Kinder에 입학해서 8:30까지 가야해서 아침식사하고 한솔이까지 준비해서 Strongstart에 갑니다. 학교에 갈 때는 제가 차로 라이드하고 돌아올 때는 뚜벅이로 돌아옵니다. 지난번 소식지에도 말씀드렸지만 다행히 한결이가 Kinder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직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해서 학교 가는 것을 happy해 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오늘 선생님과 면담이 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지난 10/14일에는 몇몇 분들과 Buntzen Lake로 소풍을 갔습니다. 밴쿠버에는 멀지 않은 곳에 좋은 국립공원, 호수들이 꽤 많습니다. 몇 번 이야기만 들었던 곳인데 참 평화스럽고 경치가 예술이더군요. 함께 식사를 마치고 호수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산책길이 아이들을 데리고, 유모차를 밀고 가기에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유모차를 밀고 간 게 아니라 막내 한솔이는 안고, 유모차를 들고 다니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양 집사님은 더 고생) 그래도 한결이는 이제 씩씩하게 형들과 함께 잘 걷더군요.(감사)





 

 

이틀 전 주일에는 주일 예배마치고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마트 내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고 나오는데 한솔이가 너무 장난을 쳐서 아내가 혼내면서 손을 끌어당겼는데 팔이 빠져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한두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한국은 병원의 접근성이 좋아서 별문제가 아닌데 이곳은 병원 한 번 가서 치료할려면 응급실의 경우에는 적어도 몇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해서 고민하다가 이번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그분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계셔서 한솔이 팔을 잘 맞출 수가 있었습니다.(정용환 선생님 감사)

 

기도제목

1. Jubilee 채플 유학생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Seed member들이 잘 세워지도록)

2. 가족들 건강을 위해서

3. 새 학기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데 필요들이 잘 채워지도록

4. 한결이가 Kindergarten에 가는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타인을 잘 배려하도록

5. 아내가 육아와 살림,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참고로 사진이 첨부된 소식지를 보실 분들은 제 블로그를 들러주세요(peterjoy.tistory.com)

 

20131022일 캐나다 Surrey에서

박기모 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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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선지자, 제사장, 왕


교회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삼중직

선지자 :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제사장 : 하나님의 임재를 중개

왕 :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역에 확장


1. 세가지 리더십 역할

모세, 사무엘은 삼중직을 모두 결합한 인물이다. 

이 세직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백성 전체를 대표하고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개자요 중매자인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중개하는 연계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은 성소와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일, 토라를 지키고 가르치는 일, 특히 의식상의 불결함과 관련된 문제를 재판하는 일, 끝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맡았다.(개인적, 영적 필요) 

선지자는 장래를 예언하는 말을 했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었다. (공적, 사회적 필요)

왕은 나라의 질서와 정의와 평화를 도모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자였다. (조직적, 정치적 필요)


그리스도안에서


성직자 안에서

지식은 선지자적 직분으로부터, 양심을 다스리는 통치력은 왕의 직분으로부터, 인내는 희생적인 제사장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온 백성 안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모두 그분에 의해 보냄받은 자들 안에서 이차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2. 선지자적 백성

종말론의 영

요엘, 베드로의 설교


만인 선지자직

첫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고 있으므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다. 

둘째, 모든 사람이 계시를 깨닫는데 필요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있는 선생이 필요없다. 

셋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 

넷째, 성령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써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다. 


보편적인 말씀 사역

교회는 역사상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전파자이다. 

첫째 각각의 신자는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고 나가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에 의해 구비된다. 

둘째, 만인 선지자직의 의미는 각 그리스도인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신자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일차적인 구비요건은 지속적인 성령 충만이다. 


선지자적 교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저 사회의 앰뷸런스가 되어 부상자들을 실어 나를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봉사하도록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제사장적 백성

제사장적 공동체

어거스틴은 낮은 수준의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과 성직자의 제사장직을 구별하였다. 

루터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

첫째,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서 유래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제사장 사역에 참여하는데, 이것은 선택된 소수에 의해 대표적으로 혹은 대신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신자의 제사장직은 에클레시아적인 성격과 디아스포라적인 성격을 둘다 갖고 있다. 

"우리가 성소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세상 속으로 더 깊이 침투하게 될것이다."


제사장직에 대한 오해


루터와 신자의 제사장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똑같이 제사장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됨으로써 그 제사장직을 공유한다."


루터 이후

볼프강 쇼펠레는 재침례파가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목사 계급과 평신도 간의 차별을 없애게 했고, 각각의 지체가 잠재적인 전파자요 선교사임을 확신하게 했다."

만인 제사장직이 칼빈의 사상에서 혹은 회중의 삶 가운데서 행한 그의 의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침례교도들은 보통 만인 제사장직을 다음과 같은 관행으로 환원시켰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 침례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투표권이 있다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자기 나름의 종교적 신념을 개발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제사장직을 경험하는 것

첫째, 예배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사역

둘째, 세상에서의 섬김을 통한 제사장 사역

셋째, 일상 생활에서 하는 제사장 사역


4. 왕 같은 백성

이 문구는 첫째, 출 19:6절에서 따온 것인데 제사장직 뿐 아니라 나라(kingdom)의 개념을 전달한다. 둘째, 바실레이온(왕의/왕)은 단순히 '히에라테우마'(제사장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다. 셋째, 신약성경의 좀더 큰 맥락에 의거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서 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하나님 나라는 영역이나 영토가 아니라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오토바실레이아', 곧 그분 속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기꺼이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지금 존재하지만 우리가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는 면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고 대표하고 섬기는 기관이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

섭정자란 군주의 대리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스로를 지배하는 왕적인 통치자들인 셈이다.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왕적인 통치자들로 머리되고 왕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동참한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통치에 동참한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소금, 빛, 정탐군의 은유

"그는 또한 정탐군으로 파견될 수도 있다. 사실상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이다. 이 세상의 핵심부에서 몰래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내부로부터 주님의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것, 이 세상에서 하나의 핵심 그룹을 만드는 것, 그 비밀을 발견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화려하게 침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자크 엘룰


왕같은 제사장과 제사장 같은 왕

왕권이 없는 제사장직은 쉽게 새로운 형태의 성직주의, 그저 순전한 종교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사장직이 없는 왕권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선행주의, 영적인 변화가 없는 세계 변혁으로 쉽게 전락한다. 이 둘이 함께 묶일때, 즉 왕같은 제사장만이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언질을 통하여, 그리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을 향해 성육신적 선교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루터는 왕같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호소하며 이렇게 탄원한다. 

첫째, 왕권과 관련해서 각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의해 만물보다 높이 들리워졌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으로 인해 예외 없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아무것도 그를 해롭게 할 수 없다. .....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왕일 뿐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들인데, 이는 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그 이유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할 목적으로 그리고 서로 신령한 것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큼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세상속의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가지 직분은 리더십 차원에서 교회를 섬기는데 모두 필요하다. 제사장들은 돌보고, 선지자들은 선포하며, 왕들은 지도한다. 



제8장 선교 :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백성

금세기들어 서구는 과거의 선교분야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상실했다. 

선교와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 : 기독교 신앙은 유일한 것인가? 다원주의적인 지구촌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복음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인 껍데기를 수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1. 보내시는 하나님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선교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이해하는 방식, 즉 인간적인 전파 행위로서의 선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선교는 성부가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시는 것으로서 명백히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견지되었다. 

그 후 적어도 1950년까지는 선교가 믿음을 전파하고 이방인을 개종시키며 교회를 개척하고 사회적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보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에 의해 보냄받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선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감소시키는 비극을 초래했다. 

데이비드 보쉬 : 선교는 교회의 삶에서 이 세상적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인데, 그 목적은 자기 피조물을 최종적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통일성과 충만함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

칼 바르트 :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 운동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자체에 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선교

게오르그 비체돔 : 하나님의 선교는 한정적인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인 동시에 보냄받는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냄받은 분일 뿐 아니라 보내는 내용이기도 한데, 이는 신성의 각 위격 안에서 하나님은 전 존재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워드 스나이도 : 선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새롭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흐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공유되던 상호간의 사랑의 힘이 예수님의 선교의 근원이다. 


성육신 : 성부에 의해 보냄받음, 성부를 보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보내는 분인 동시에 보냄 받은 분이고, 계시하는 분인 동시에 계시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몸소 구현하신다. 


마지막 날들 : 성령에 의해 보냄받음, 성령을 보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보냄받은 분이시며, 성령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종말론의 영의 시대인 오늘날, 성령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추진력이다. 


사도들 : 성자에 의해 보냄받음, 성자를 보냄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이 최종적으로 사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독특하게 임명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받아 권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도가 된것이다. 


계속되는 사도직 : 삼위 하나님이 교회를 보내심

교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도적이다. 첫째, 교회는 이제 성경에 담긴 사도들의 증거와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혹으로 계속 보내시는 도구이자 결과물이다. 

교회는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보냄받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곧 사랑을 보내는 원천이시기 때문에,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로 인해 교회가 태어난 것이지 교회 때문에 선교가 생긴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선교는 대위임령에 대한 의무감이나 단순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교로서 우리가 그 안에 편입된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열방을 복 주시려고 하시는 일이다. 선교 사역 자체는 세상의 필요에 의해 촉발돤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는 보내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3. 선교의 내용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사람들은 흩어져서 땅의 풍부한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와 반대로 동질 사회로 이루어진 단일한 도시를 세웠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족장들은 하나님과의 교통가운데 그분에게 속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공동체를 건설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아울러 그들은 땅에서의 공동창조성과 청지기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적 소명을 성취하는 것

인간적 소명 

약속 

기독교적 소명 

상호 교통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 속함 

공동체 건설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공동 창조성 

땅 

하나님의 일을 함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새언약하에서 예수님은 선교사로 오시는데,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또 한 분의 하나님으로 오신다. 

바울의 선교적 비전은 교회를 성령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었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국경을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함께 하나님의 새 사람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신약 성경의 최종적인 비전은 창세기의 첫 두장에 나오는 선교사명,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선교적 약속, 에스겔 40-48장의 선지자적 비전등이 결국 성취되는 장면이다. 

선교는 이중적인 초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미시적으로는 이생과 이 세계에 오는 실질적인 구원을 주시하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천국가는 것 이상의 것)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포괄성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구현된 복된 소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에게 회심을 종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 전체와 삶의 구조를 대상으로 의와 정의를 이룩하며, 가난한 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억압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람들의 사고 및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한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 세계 전체, 자원 보존, 환경 친화적인 개발, 지구의 회복등과 관련된다. 

끝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권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구조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이 포함된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인간 및 창조 세계와 관련되며, 현세적이면서도 영원한 성격을 갖고 있다. 선교는 재활과 예방의 특징을 둘다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나라의 대변자(선지자들)요, 그나라의 종(왕들)이며, 공동체적으로 그 나라의 현존을 구현하는 실체(제사장들)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안에서 하는 사역은 선포(케리그마)와 봉사(디아코니아)와 교제(코이노니아)를 포함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안식적 '살롬'이다. 이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와 인류사이의 삼중적인 조화로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 보냄받은 백성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

전통적인 그림 : 하나님 -> 교회 -> 세상

호켄다이크 : 하나님 -> 세상 -> 교회

보쉬 : 하나님, 교회, 세상을 삼각 구도로 보았다. 

크리스 라이트 : 하나님, 백성, 땅의 삼각 구도


보냄받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선교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파악

교회의 선교는 교회를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를 확장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창조, 구원, 성화, 완성 등에 의해 이루고 계시는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구현하며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성취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처에 침임하는 것을 인식하고 환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등대요 하나님 나라의 출현으로서 또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현시로서 섬기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선교

교단 공동체와 교회 병행단체라는 선교기관은 설교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접근이 아니다. 그것들을 교회의 삼위일체적 표출 중 어느 한 형태를 띤 교회다. 삼위일체적 통일성은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도직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언약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선교사인 것이다. 


5. 선교를 위해 구비시킴

선교와 관련하여 교회를 구비시키는 출발점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구비자라는 진리다. 그분이야말로 비전과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며, 동기를 유발시키고 앞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선교의 동기

카아퍼는 모든 선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선교사역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함께 세상속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때때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와 비슷한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흔히들 선교는 예배라고 말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영광이 선교의 최우선 동기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예배행위,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교가 예배인 까닭은 정확히 말해서 선교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서 하는 일이요 삶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예배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을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자기의 수고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선교 구비자는 하나님이시다. 


구비의 원리들

첫째, 주권적인 하나님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특정한 일터와 동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각각 위치시킨다는 점을 교회내에서 인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모여 있을때는 피가 정화되고 산소를 공급받는다.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질병과 싸우고 에너지를 공급한다. 

둘째, 가라의 구조를 오라의 구조와 병행해서 잘 개발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목회 사역을 할 사람들에게 안수를 줄 때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사회내의 선교를 담당할 사람들을 안수하고 파송해야 한다. 

넷째, 고든 프리스는 교회가 일터에서의 선교를 위해 교인을 구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하는데, 즉 교인들로 하여금 일터야말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차적인 장소요 따라서 자연스런 전도 장소로 보게하는 것이다. 



제9장 저항 : 권세를 상대로 한 씨름

이처럼 복잡다단한 사항은 그저 인간 개인의 부정과 죄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광범위한 어떤 것으로 말미암는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삶의 보이는 전면에는 그 각각에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후면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 권세에 대한 묘사 : 현대의 혼동

이중적인 언급

바울이 롬 13:1에서 권세들을 언급할 때 정치 지도자들과 영적인 존재들 둘다를 지칭했다. 

그런데 권세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인간 외적 언급을 배척하는 입장이 주로 서구 신학자들에게서 나왔는데 이들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우리가 마귀를 잃고 구조들을 얻는 것은 정사와 권세가 위장된 구조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무척 복잡다단함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두면서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침노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권세 위에 군림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우월성에 집중한다. 


성경의 용어들

성경에서 정사, 권세, 덕, 권능, 보좌,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구조를 갖춘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이세상에서 삶에 영향을 주는 가시적, 비가시적 실재의 차원인 권세들을 묘사하는 성경의 용어

- 하나님의 회, 천사들, 마귀/사단, 귀신들, 세상, 정사와 권세, 맘몬, 육신, 율법, 죽음


2. 권세에 대한 경험 : 다차원적 저항

타락한 사회 구조들

종교와 삶, 성적 이미지, 거대 기업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맘몬, 사회내 모든 권력의 외적 표출의 내적 측면

오브라이언 : 새로운 이론의 옹호자들은 구조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구조 자체를 마귀화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두가지 극단을 모두 피해야 한다. 


인격적인 영적 존재들

그들은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고 목적 지향적인 활동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기로 작정한 존재들이다. 

서구 사회는 대개 삶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배척해 버렸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사회적 분석에 의존하여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지적 : 뉴턴의 작업은 자연가운데 비합리적인 원칙이 존재할 여지가 없게 만들었고, 다윈의 그림은 마귀와 주님의 나라간의 우주적 전쟁을 묘사하는 성경의 그림을 완전히 능가하는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경쟁을 묘사했으며, 프로이트는 흑암의 권세들을 그들 최후의 보루인 영혼으로부터 쫓아냈는데 그들을 결국 심리적인 콤플렉스와 신경증 그리고 그와 비슷한 유의 질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발터 윙크 : 우리 현대인은 아무리 의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해도 전통적으로 정사와 권세라는 범주 아래 집어넣었던 이 같은 신화적인 실체가 진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성경은 복잡다단한 조직 계통적인 악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조직 계통적인 악

붉은 용-두마리 짐승-음녀-바벨론

초자연적이고 인간 외적인 세력과 인격적인 존재가 인간의 제도와 구조, 문화적 및 사회적 삶의 패턴에 영향을 주고 그것들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악마적인 것과 사회 구조를 쓸모없는 것인양 내다 버려서는 안되고 그것들의 변혁에 참여할 필요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3. 권세에 대한 이해 : 성경신학

선한 권세들

이 권세들은 타락의 결과도 아니고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간의 육신성을 억제하려는 필수 불가결한 조치도 아니며, 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일부다.

일상적인 네가지 틀 : 결혼, 가족, 나라, 법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권세들 - 인간적 차원과 인간 외적 차원


권세에 압도된 권세

예수님은 그들을 멸하시고, 벗기시고, 개선 행진을 뒤따르게 하거나 포로로 삼으셨으며, 무릎 꿇게 하시고, 그들을 평정하고 화목케 하셨다. 

오스카 쿨만은 권세들을 죽기전에 발버둥치는 쇠사슬에 묶인 짐승에 비유했다. 


4. 권세와의 싸움 : 선교와 사역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순응적인 자세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육신에 대해서는 금욕함으로써 그리고 열망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마귀에 대해서는 대척하고 피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복음 전파

권세들의 거짓 주장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로 무장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공적인 제자도

권세에 대처하는 여러가지 방법


 

축사, 중보 

무력함으로 감수 

창조적 참여 

정당한 혁명 

소명 

영적 해방 

타락된 상태임을 증거 

섭정 

사회적 변동 

수단 

기도 

무력함 

일/정치 

시민 불복종 

형이상학 

악마적 

식민지화된 구조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구조 

없음 

교단 

은사주의

재침례파 

주류파 

해방 신학 

주요 저자 

왓슨, 윔버, 슬리에르 

요더 

마우, 베르코프, 엘룰 

보니노, 구티에레즈 

사회 정의와 공적인 제자도는 선행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포사이드가 말했듯이,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복음은 "영원 및 그 사회적 책임에 준거점을 두고 있다." 다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 준거점을 견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때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분들고 있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심정을 품게 된다. 

둘째, 우리의 기도는 제아무리 청산유수와 같다하더라도 성령의 간구에 비하면 한갓 신음소리와 우물거림에 불과하므로 성령의 중보에 의존하게 된다. 

셋째, 일종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넷째,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된다. 


순교


5. 권세에 대한 최종적 평정 : 종말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때 권세들을 최종적으로 화평케 하실 것을 비전으로 바라보지 않고는, 현재에 권세들과 신실하게 씨름할 수 없다. 위르겐 몰트만은 종말론이야말로 신학 분야 가운데 가장 목회적인 영역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삶의 정오에 사는 것도 아니고 황혼녘에 사는 것도 아니며, "새 날이 동터오는 지점, 곧 밤과 낮, 지나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이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살고 있음을 종말론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성을 공유하는 인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세속적인 일에 거리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저 도시의 빌딩의 일부를 구성할 만큼 훌륭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내밀한 기도로부터 가장 공적인 정치 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죄로 얼룩진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죽음과심판의 골짜기로 내려가야 마땅함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아버지께 바칠 때 그것이 그분과 함께 보존되어 그리고 불로 깨끗하게 되어 결국에는 거룩한 도시(성)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기. 신학적으로 사는 인생

이 책에서 우리는 교회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이라는 것과 어떻게 교회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소환을 받아 구비되는지 살펴 보았다.(목사의 이력서는 보통 그 아내의 얼굴에 쓰여 있다)


1. 정통 교리(Orthodoxy)

일상적인 삶의 구속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 하여금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으며, 따라서 그들도 사랑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돌보아야 할 청지기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교리를 사물에 대한 태도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급진적인 기독교적 물질관을 정립하게 한다. 속죄의 교리는 자비를 베풀며 살도록 우리를 구비시킨다. 교회론은 모래알과 같은 신자 개개인이 그저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경험을 하면서 살도록 촉구한다. 종말론은 시간이 관리할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비실천 신학의 위험

정통교리는 단지 하나님에 관해 옳게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해 말한 반면 욥은 하나님께 말했다. 단지 지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정통 교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리 충만한 삶

정통 교리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학과 일상 생활의 연계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교리들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교리들은 일상의 삶을 축복한다. 


2. 정통 행위(Orthopraxy)

온전한 의미의 신학적 삶

정통 행위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조화를 이루는 행습, 즉 세상에 가치와 선을 가져다 주는 실천이다. 

모든 이론에는 암시적으로 행동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행동도 암시적으로 이론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적 행습의 핵심

남편이 아내가 자기를 잘 받아주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아내의 마음을 사기 위해 굳이 거창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의거해서 사는 사람은 "상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했거나 의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자 여러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기독교적 행동(정통 행위)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던 계략이나 계산된 생각 혹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것을 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 저것을 해주신다는 식의 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정통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삶은 본질상 자발적인 것이다. 


3. 정통 심성(Orthopathy)

선지자는 하나님의 파토스, 즉 하나님이 마음에 품고 계신 것을 체현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마음의 수양이야말로 포스트모던 문화가 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한 성경적 반응은 이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까지 미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학은 머리와 가슴을 하나로 묶는 바 하나님을 아는 실천적 지식이므로 지혜의 특성을 갖고 있다. 


마음을 교육하라

첫번째 학교는 물론 가정이다. 

크리소스톰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 부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동시에 에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이웃


하나님을 향한 열정

사실 욥은 치유를 간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바랬던 것은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그래서 욥의 발언은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서, 거룩한 인내심을 품고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탐구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정통 교리를 믿고 정통 행위를 하는 신학자들)는 과격하고 열정적인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는 것,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정통 심성이다. 

정통 교리, 정통 행위, 정통 심성. 이 셋은 모두 신학과 일상 생활의 결혼, 즉 찬미(정통 교리)와 행습(정통 행위)과 열정(정통 심성) 가운데 신학과 삶이 연계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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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소명 이후 시대에서의 소명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에 그토록 중심적인, 기독교의 소명교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누군가에게 부름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 개인적 소명

고전 7:17절에 대한 이해 - 루터는 클레시스를 정박지라고 번역하고, 칼빈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세상적인 소명이란 개념을 발전시켰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의 정황을 떠나고 있었으며, 마치 그런 변화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대해 바울의 논점은, 비록 그러한 삶의 정황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채택되고 그 부르심에 의해 변화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오고 그 부르심은 직업, 결혼 여부, 사회적 지위 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행히 종교개혁가들은 부르심을 삶의 위치로 축소시킨 나머지, 영적인 이동성을 억제하고 사람들을 타문화권 선교 사역으로 보내는 것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황이 부르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부르심에 의해 신성해지긴 하지만, 부르심은 우리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이다. 


고압적인 종교개혁가들

종교개혁가들이 소명의 신학을 발전시킨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두번째는 재침례파를 대항해 싸웠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평범한 일상사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 소명의 세속화

청교도들은 일반소명(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효력을 발휘한 소명)과 특별 소명(우리가 하나님의 소환에 직접 응답하여 섬김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는 소명)을 구분했다. 

루터는 고전 7:17절의 해석을 통해 소명을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확장시켰으며 특히 삶의 정황의 견지에서 소명을 부각시켜 신분과 직분과 책무를 융합시켰다. 


각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유효 소명이 있다.

둘째, 섭리적인 소명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 초자연 적인 부르심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셋째, 은사적 소명이 있다. 성부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라는 문화 명령을 주신다. 성자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며 대위임령으로 소환하신다. 성령을 어떤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키신다.(클라우스 보크무엘)

넷째, 마음속의 소명이 있다. 

그레그 옥덴 소명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차원 1) 우리는 내적으로 어떤 당위성을 경험한다. 2)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이다. 3) 그것은 굉장한 만족과 기쁨을 선사한다. 


2. 기독교적 소명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 유효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카라는 불러낸다라는 의미라 어떤 주권적인 존재가 이름을 불러 소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약 성경에서 부르심의 언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소환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을 구원으로의 부르심,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섬김으로의 부르심등이다. 부르심의 언어가 개개인에게 사용될 때에는 그 구원 목적과 연관되지 지도자의 자격을 확인하고 신임장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칼레오(부르다, 앞으로 소환하다)와 클레시스(부르심, 소명)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가리킬 때, 즉 회개하도록, 예수님을 향해 방향을 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초청하시는 것을 말할때 부르심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자시요, 그리스도인은 부름받은 자들이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부르심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2)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사는 것-거룩한 공동체적 삶, 3)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우리 삶의 정황의 중개, 4)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체험


소속, 존재, 행위

삼중적 부르심. 

첫째 하나님께 속하라(소속)

둘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존재)

셋째, 하나님의 일을 하라(행위)


기독교적 소명과 인간적 소명


3. 인간적 소명

두개의 명령인가, 하나의 명령인가?

창조명령(창조세계)과 대위임령(구원)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인데, 그러한 분리로 인해 삶이 균형을 읽고 파편화되어 버린다. 이보다 더 나은 길은 창조, 구속, 최종적인 완성을 모두 포괄하는 언약의 견지에서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약명령

언약 아래 산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를 창조 명령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언약이다. 인간적 소명은 페리코레시스적인 것,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교통하기를 원하시고, 그 교통으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신다. 


공동체 건설

사회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부적으로 사회적이며 성적인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이며 생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의무와 운명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웃됨을 표현하는 것, 공동 인간성을 경축하는 것인 바,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언약의 사회적 측면을 깨뜨려 버렸다. 


공동창조성

창조 명령이라 불린다. 우리가 창조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묘사하는 또 다른 용어는 섭정자(regents)인데 이는 천상의 왕을 대표하는 지상의 지배자란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차갑고 소원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계에 관여하는 관계 중심적인 청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상호 교통이요 공동체이자 공동 창조성, 즉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적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땅을 인간답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라는 부르심은 상호 교통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은 공동체 건설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은 공동 창조성을 회복시킨다.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의 소명의식은 어떤 면에서 풍성해지는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상호 교통을 경험한다. 

둘째 공동체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된다. 

셋째, 공동 창조성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끈다. 



제5장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존 스토트는 일이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에너지(신체적, 정신적 혹은 둘 다)를 소모하는 행위로서 일꾼에게는 성취감을,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일은 금전적 보상이 있든 없든, 정신적, 정서적 혹은 신체적 에너지, 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소요되는 목적 지향적 활동


1. 일에서의 변화

일의 성격의 변화 : 제품 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반복적인 일에서 중재적인 일로, 종신직에서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일로

생존 문화에서 정체성 문화로


일터에서의 변화

일터는 세계화 되었다. 

장소의 근본적인 변화(재택근무, 모바일 환경), 도시화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

구조적 실업 문제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이슈들

일중에 하나님 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들을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2. 일의 어제와 오늘

고대 세계

일은 저주요 순전한 악이었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운이었다. 일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고 관조적인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

헬라인들의 견해는 기독교화된 형태로 중세교회로 유입되었다. 영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상하 계층적인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현대 세계와 포스트모던 세계

산업화되기 이전의 삶은 일과 가정과 교회 간에 통합이 이루어진 삶이었으나 산업혁명은 분열을 초래했다. 산업혁명을 일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돈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일은 분업화되고, 단순화되고, 틀에 박히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손수 하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묵상함으로써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프로이트는 일을 비극적인 필연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일

일꾼이신 하나님

성경은 일하시는 하나님, 즉 말씀하시고, 모양을 꾸미시고, 고안하시고, 만드시고, 조각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축복이자 저주인 인간의 일

일없는 낙원을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및 계획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셈이다. 일은 좋은 것인데 창조세계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봄으로써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 일에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온다. 


모든 종류의 일

성경에서는 육체 노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육체노동보다 격상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과 함께 하지 않는 일


일꾼이신 예수님

신약에서는 일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이유는 첫째, 신약을 구약성경을 전제로하기 때문이고 둘째, 사도들의 우선과제는 복음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일

신자의 일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인과 종(퀴리오스와 둘로스)


종말론적 관점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상급이 유업으로 주어질 뿐더러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형태를 만드시고 제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신다. 사랑하는 분이신 하나님은 관계적인 일을 하시고, 존엄성과 건강의 의미를 부여하신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구속의 일, 고치는 일, 하나로 묶는 일, 구하는 일을 하신다.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부의 일 : 청지기직

성자의 일 : 하나님 나라의 사역

성령의 일 : 은사와 능력 부여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제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사랑하는 일, 회복시키는 일, 복음사역, 인도하는 일

하나님의 일은 누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아직 신자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 행해지는가? 교회와 세상에서 후자에는 물리적인 창조세계, 가정, 사회, 공동체, 정치, 문화, 교육, 재정 분야, 우리가 제작하고 고치는 모든 세계들이 포함된다. 

왜 우리는 일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인 완성점에 도달하게 하시는 동안, 우리를 동역자로 초청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5. 일은 좋은 것이다. 

일의 외향적인 가치 : 생산하는 것으로 인해 일은 선하다. 

일의 내재적인 가치 : 일은 그 자체로 선하다. 


세계를 위해 좋은 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복음적인 일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평안과 의미와 용서와 소망을 선사해준다. 


우리를 위해 좋은 일

일은 깊은 치료의 매개체이다. 일은 우리에게 좋고, 세계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좋고, 심지어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다. 



제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1. 오늘날의 사역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역을 정의할때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설교, 성례집전,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것 등.


현대의 판단 기준

사역이란 아코디언과 같아서 우리가 그 속에 어떤 공기를 불어 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해진다. 

1) 장소, 2) 기능, 3) 필요, 4) 호칭, 5) 지명

사역은 "교회를 대신해서 공공연하게 행해진 행위이자 섬기는 은사의 결과로서, 교회내에서 성례의 형태로서 선포되고 명시화되고 경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으로 구체화하는 행위이다."-마이클 롤러


2. 성경에 나타난 사역

사역은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섬김이다. 사역자는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아바드

구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일하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와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있는 용어이다.(야곱이 라반에게 한 봉사) 


사랏

두가지 범주로 첫째는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이고 둘째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이다.(요셉이 애굽에서 중요한 죄수들에게 한 봉사) 


주님의 종

에베드가 주님의라는 말로 수식이 될때 사역자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사역을 사람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나 교회의 종이 되는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필요가 섬김으로의 부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봉사

사역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봉사를 뜻하는 말로, 본래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라는 뜻이지만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 준비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땅에 종을 두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만족시키지 못하자 하나님이 스스로의 종이 되신 셈이다. 


교회는 곧 사역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된 자는 종이다. 

초대교회 당시 선택된 공식적인 사역자들과 평범한 신자들의 사역을 서로 구별시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3. 삼위일체적 사역 신학

하나님 안에 사역이 있으며, 하나님은 곧 사역이시다. 

세상이 있기전에 사역이 있었는데, 그 사역은 하나님의 존재안에 있었다.(페리코레시스)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사역은 단지 하나님을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

사역이란 그리스도적이다. 즉 성령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라오스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고 이땅에서 하나님의 봉사를 감당하는 것이다. 


사역의 특징은 사랑이다.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것은 이세상이 있기도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사랑안에서 사역하던 하나님의 공동적인 삶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사역은 위임된 활동이 아니라 파생적이고 참여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인 활동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이며 "그분안에 있는 우리의 종 된 존재를 구체화시키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우리 가운데 순전한 사랑과 연민으로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사역은 성육신을 통하여 창조 세계를 축복한다. 

교회는 세상에 실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역안에서 세상과 관계하는 것이다. 선교의 본질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동감하는 데서 발견된다. 


사역은 종말론적이다. 


4. 사역하는 지도자들

기능인가 직분인가?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거룩함과 사랑이 지상에 나타나는 이미지인 공동체 안에서 그 형상이 드러난다. 이는 구성원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각자의 기능을 함으로써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지도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정해진 역할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직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위해, 예수님의 머리 되심안에서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봉사를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조력자 들이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한 선

신약 성경 기자들은 선택된 한 명의 공식적인 사역과 일반 신자의 사역을 구별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했다.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은 특별한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한 사람이 사역의 일을 맡게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소환되거나 초청받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내적인 확신이나 체험"(리처드 니버의 사역으로의 소명)

위 내용에 저자는 반대한다. 

바울의 부르심에서 회심과 사명 위탁 :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역사를 통틀어 다른 모든 신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 위탁으로서의 브르심은 반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리더십으로 부름받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인 소명을 다루면서 논의한 바 유효한, 섭리적인, 카리스마적인, 마음속의 부르심에 덧붙여서 교회지도자의 경우에는 교회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교회적인 부르심이란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 교회 리더십에 적합한지 여부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은사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성품의 측면이다. 


안수

안수라는 관행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이에 대해 루터는 "안수는 교회의 교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수 없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수의 개념 :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또한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것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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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


제 1장 한 백성 신학의 정립

지난 교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교회는 줄곧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역을 하는 주체와 사역의 대상이 되는 객체다.

정작 필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포괄적인 성경적 기초를 놓는 일이다. 가정주부, 간호사, 의사, 하수도 수리공, 증권 중개인, 정치가, 농부 등을 위한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온백성의 신학 : 성직자 중심의 신학을 넘어서

총체적인 교회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몇가지 오해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평신도 신학을 찾으려는 것은 헛수고 일뿐이다. 평신도(laos)는 하나님의 온 백성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내포하는 대단히 영예로운 호칭이다. 성직자(clergy)란 단어는 클레로스라는 헬라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지명된 혹은 상속받은 자들이란 뜻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는 그 구성원가운데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신도는 없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직자,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봉사와 사명을 계속하도록 임명되고, 상속받고, 사명을 받은자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한명의 사역자를 갇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역 곧 하나님의 사역체인것이다. 교회는 한가지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명이다. 그리고 한백성, 하나의 삼위일체적인 백성,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한 백성만 있을 뿐이다. 

둘째, 이와같은 유감스러운 현실로 인해서 소위 평신도 신학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보충적인 과업에 해당된다. 우리가 정립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의 성직주의, 곧 기능상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차별이 없는 한 백성, 기존의 성직주의를 초월하는 한 백성의 신학이다. 

셋째,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는 삶뿐 아니라, 직장, 정부기관, 사무실, 학교, 가정 등 세상에서의 흩어진 삶을 포함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당대의 상황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마땅하다. 


2.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신학 : 비실천 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온백성을 위한 신학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신학의 실천성에는 신학 이론의 적실성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궁극적인 실재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실재에 부합되는 것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단계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행습은 최근에야 생겨난 것이다. 

셋째, 우리는 신학이 실천적인 지혜의 위상을 회복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데 해방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현대 신학자들과 세계 전역에 걸친 토착화된 신학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3.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 신학 : 학문적인 신학으 넘어서

비판적인 사고라는 시험을 통과한 훌륭한 신학이냐, 검토되지 않는 개념과 편견과 느낌으로 뒤죽박죽된 신학이냐. 

첫째, 일상 생활은 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신학적 과업이란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삶을 해석하고 이 두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많은 중요한 신학자들이 비성직자, 비전문인 신학자였다. 

셋째, 오늘날에도 신학은 보통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아래로부터 하는 신학, 토착신학, 즉흥적인 신학은 종종 일종의 반작용으로 등장하지만 기도교 진리의 미지의 측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넷째, 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그저 호기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학세계 전체에서 근본이 된다. 

- 정규적인 교의학 : 멜랑히통, 칼빈

- 비정규적인 교의학 : 아타나시우스, 루터

다섯째,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 신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의 과업을 재설정해야 한다. 

여섯째, 온백성의 신학을 회복하는 데는 전문적인 신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제2장 평신도와 성직자 개념의 재정립

1. 평신도가 없는 한 백성

평신도는 기능, 지위, 장소, 교육, 보수, 생활 방식등의 견지에서 규정되는데 "-하지 않는자"와 같이 부정적인 말로 정의된다. 

부정적으로 평신도란 1) 교회의 성직자 계층에 속하지 않은, 법적으로는 예배의식과 관련해서든 적절한 권한이 없는 사람, 2) 수도사와 수녀처럼 서약을 통해 종교인의 삶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

긍정적으로 평신도란 1) 세상에 남아 사회속에서 구체적인 과업을 가진자로서 그로 인해 교회 내의 위상이 정해지는 자, 2) 부름 받고 입양되고 사명받은 축복된 자로서, 세례와 견진으로 인해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에 완전히 함께 하는 동역자를 지칭한다. 


신약성경은 새 언약하의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할때 두가지 용어를 거부했다. 

첫째는 '라이코스'인데 평범한 무리에 속한 자 라는 뜻이다. 

둘째는 '이디오테스'인데 바보라는 영어의 어근으로 전문가나 전공자에 대비되는 범인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라오스'

라오스는 군중, 한 국가의 백성을 의미했다. 

백성됨과 관련해서는 옛 언약하의 하나님의 백성과 놀라운 연속성이 있지만,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구약과 뚜렷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즉 옛 언약하에서는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새언약하에서는 그 기능이 폐지되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속으로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2. 성직자가 없는 한 백성

현대적인 성직자 개념에는 네가지 차원이 내재되어 있다. 1) 대리적인 기능, 2) 절대적인 안수와 연계된 존재론적 차이, 3) 성례전적 기능, 4) 전문가적 지위


성직자로 가득찬 교회

성직자(clergy)의 어원인 클레오스는 분깃, 몫, 누군가에게 할당된 것이라는 의미였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의 기업이 이제 모든 신자 사이에 공유되었다. 신약성경의 교회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신도가 없었고,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로 가득 차 있었다. 


구약 성경의 근거

백성 됨에서는 신구약간에 연속성이 있으나, 리더십에서는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구약성경에는 보편적인 (백성의) 사역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물론이다. 


구약 성경에 암시된 성직주의

모세의 이야기속에서 성직을 찬성하는 듯한 이야기들은 모세의 리더십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것이지 성직 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는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에 암시된 성직주의를 인정할 때는 제사장의 기능이 배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 성경의 성취

그리스도의 주되심, 성령의 강림, 종말의 시작이 구약의 라오스를 새로이 제정된 백성으로 변모시켰다. 


사역하는 백성으로서의 교회

전 교회가 참 사역체 곧 일주일 내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공동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직자인데 하나님의 기업으로 존귀케 되고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성직자인 셈이다. 모두가 성령의 시대에 속한 능력과 복의 분깃을 공유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 됨에 뿌리를 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평신도인 셈이다. 모든 이가 사역을 베푼다. 모든 이가 사역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속성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 들어서면 우리는 이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3. 성직자의 출현

1세기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의 시대대였던 데 비해, 2-3세기는 대체적으로 성직자-평신도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1) 헬라-로마 세계의 세속 구조의 모방, 2) 구약의 제사장직 모델을 교회의 리더십에 전이함, 3) 주의 만찬을 신비로 격상시켜 제사장의 집전이 필수인것처럼 만듦


교부들


제사장직 내의 제사장들


사역이 지닌 신비

크리소스텀의 말에서도 신플라톤 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여 육신을 벗어난 영성을 부추기는 이단적인 영향을 간파하게 된다. 

서방은 성직자 리더십의 위계적 원칙을 강조한 반면, 동방은 공동체적 원리를 강조한다. 


점진적인 성직주의화 현상

4-16세기 동안 성직자-평신도의 구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만인 제사장직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를 존귀한 백성의 지위로 되돌려 놓는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불완전한 개신교 종교개혁

- 종교개혁은 교회론 보다는 구원론에 더 치중했다. 

- 설교자가 사제를 대치했다. 

- 갱신에 부적합한 구조

- 가톨릭의 신학교 체제가 결국에는 채용되었다. 

-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교회 사역에 의해 거의 완전히 잠식당했다. 

- 안수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보수를 받는 교회의 전임 사역자에게 주어지는 형편이고, 사회에서 하는 평신도 사역을 제대로 공인하는 절차는 전무하다. 

- 적절한 평신도 영성을 가르치거나 촉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큰 발걸음을 내디딜 기회는, 마치 우리 선조들이 성경 읽기를 보통 그리스도인에게 열어 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통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열어 주는 데 놓여있다. 이것을 하는 것은 일면 새로운 종교개혁의 개시를 의미하고, 다른 면에서는 이전의 종교개혁을 논리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을 뜻한다. 


제3장 한 하나님, 한 백성


1. 두 백성인가, 한 백성인가?

성직주의란 보통 그리스도인이 특권과 권력을 가진 훈련받고 안수받은 자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뜻한다. 로렌스는 말하기를 "평신도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예배당처럼 보이는 건물을 원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복장을 한 성직자를 원하며, 익숙한 방식의 예배를 원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홀로 가만두기를 원한다."

반성직주의란 평신도에 대한 지배 그리고 안수받은 교회 리더십을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존 관계가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가 상호 보완적으로 각각 자기 위치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미지들

- 교회

- 성도

- 택하신 자

- 왕 같은 제사장

- 하나님의 집

- 하나님의 이스라엘

- 그리스도의 몸

- 주 안에서의 성전

- 하늘의 시민 / 하나님의 국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들

하나님은 포도원지기요, 목자요, 아버지, 건축가, 머리이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마디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것이다. 


2. 한 하나님, 세 위격

라오스의 정체성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 소명 역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나온다. 


삼위일체적 정체성과 소명

라오스의 사역은 백성이 단독으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성부는 창조하고, 섭리하며, 모든 존재를 위한 언약적 틀을 만드신다. 성자는 육신이 되고, 중보하고, 변형되고, 구속하신다. 성령은 능력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신다. 하지만 각 위격은 다른 위격의 사역에 동참하므로 각 위격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부적합하다. 


편향된 강조


 

 백성됨

소명 

리더십 

 성부

언약 공동체 

창조적 청지기직

계층적

 성자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그리스도 지배적인 섬김 

종 

성령 

은사적 공동체 

은사 사용

능력 부여 

은사 중심적 


페리코레시스

하나님의 본질이 관계적이라고, 하나님은 상호 교통으로 하나님된 채 차별성 있는 위격의 복수성 가운데 존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집합주의와 개별주의 둘다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페리코레시스'(상호성, 상호교환, 차별성을 없애지 않는 가운데 주고 받음)에 관해 말했다. 

페리코레시스 교리는 셋 됨을 하나됨으로 축소시키거나 하나됨을 셋 됨 속에 용해시키지 않으면서, 셋 됨과 한됨을 탁월한 방식으로 함께 연결한다. 


3. 교통인가, 합일인가?

라오스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을 얻고 생기를 받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는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다양성을 통한 하나됨

라오스는 사람들이 때때로 주장하듯이 개성이 완전히 무시되는 하나됨이 아니라 풍성한 사회적 하나됨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서 각 지체는 자신을 초월한 공동체적 삶을 경험함으로써 더욱더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하나됨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됨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요, 사역이다. 


페리코레시스적 교회

첫째, 개별적인 지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사역의 위계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라오스의 모든 지체는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사역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고, 풍성한 하나됨과 전체 사역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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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훈련 성경암송.hwp




세계관 훈련 성경 암송팩

 

세계관

1. 관점의 중요성 : (11:3, 개정)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2. 영적 분별력 : (12:2, 개정)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영적 전투 : (6:12, 개정)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4. 복음의 변증 : (1:8, 개정)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5. 이원론 극복 : (딤전 4:4-5, 개정)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6. 풍성한 삶 : (3:8, 개정)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7. 성육신 신학 : (1:14, 개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8. 하늘과 땅의 권세 회복 : (28:18, 개정)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9.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 (1:10, 개정)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함 : (1:15-17, 개정)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1. 삶의 목적 : (고전 10:31, 개정)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12. 제사장적 소명 : (벧전 2:9, 개정)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창조

1. 창조주 하나님 : (1:1, 개정)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무에서 창조 : (1:2-3, 개정)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 존재와 인식의 기원 : (11:36, 개정)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4. 그 종류대로의 창조 : (1:24, 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5. 완전한 창조 : (1:31, 개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6. 목적 있는 창조 : (1:16, 개정)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7. 만물, 하나님의 작품 : (19:1,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8.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 : (1:19-20, 개정)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9. 창조명령 : (1:28, 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0. 관리명령 : (2:15,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1. 유지하시는 하나님 : (1:13, 개정)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2. 지키시는 하나님 : (121:3-4, 개정)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타락

1. 인간의 불순종 : (2:2, 개정)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 존재론적 죄인 : (51:5, 개정)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 어릴 때부터 악함 : (8:21, 개정)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4. 조상으로부터 죄인 : (5:12, 개정)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 : (6:5-6, 개정)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 : (17:9, 개정)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7. 허망한 생각 미련한 마음 : (1:21, 개정)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8.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 (3:8, 개정)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책임전가, 깨어진 인간 관계 : (3:12, 개정)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0. 자신과 깨어진 관계 : (7:19, 개정)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11. 피조물들과 깨어진 관계 : (3:17, 개정)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2. 우상 숭배 : (1:25, 개정)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구속

1. 화목제물이 되심 : (고후 5:18-19, 개정)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 (3:13,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 죄와 억압에서 해방 : (4:18-19, 개정)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 사망의 권세를 이김 : (고전 15:54-55, 개정)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 피조물들이 관계 회복 : (65:25, 개정)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 화해와 회복 : (1:20, 개정)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7. 신분의 변화 : (8:16, 개정)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8. 열방에 아브라함의 축복 : (3:14, 개정)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9.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 전함 : (16:15, 개정)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0.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 (12:28, 개정)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 : (6:10, 개정)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2. 만물을 새롭게 하심 : (21:5, 개정)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기본적용

1. 인간, 하나님의 형상 : (1:26, 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씀 : (8:3-5, 개정)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3. 역사, 구속의 수레바퀴 : (46:9-10, 개정)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4. 윤리, 하나님의 성품 : (11:44, 개정)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5. 죽음, 또 하나의 문 : (고후 5:1, 개정)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6. 결혼, 타락 전 제도 : (19:4-5, 개정)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7. 온전한 부부 연합 : (2:23, 개정)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8. 신자, 하나님의 성전 : (고전 3:16, 개정)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9. 최고의 지상명령 : (4:18-19, 개정)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0. 선교는 교육명령 : (28:19-20, 개정)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1. 다원주의 부정 : (4:12, 개정)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2. 그리스도, 진리의 원천 : (1:17, 개정)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삶의 적용

1. 학문, 청지기적 소명 : (12:3, 개정)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2. 지식, 행함과 불가분 : (요일 2:3-5, 개정)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3. 지식의 근본 : (1:7, 개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4. 교육의 의미 : (22:6, 개정)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5. 그리스도인과 정부 : (13:1, 개정)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6. 정부에 순종하는 한계 : (4:19-20, 개정)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7.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 (고후 10:3-5, 개정)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8.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고? : (20:13, 개정)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9. 사형, 제도적 살인인가? : (1:32, 개정)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10. 직업, 주께 하듯 하라 : (3:23, 개정)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11. 낙태, 침묵의 살인 : (139:16, 개정)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2. 인간복제, 과학의 불장난 : (139:13-14, 개정)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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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 is not a summary of "the necessary truths of reason";rather, it is a revelation that shatters and reshapes human reason in light of God's foolishness. The Word is known in contingent human form, and only there. That is the scandal of the gospel. (p.300)

복음은 '이성의 펼연적 진리들'의 요약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미련함의 관점에서 인간의 이성을 부수고 다시 형성하는 계시이다. 말씀은 우발적인 인간의 형태로, 그리고 오직 그러한 형태로만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것이 복음의 스캔들이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61) 



만일 신약 성경의 도덕적 비전과 특정 구약 본문의 비전 사이에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긴장이 존재할 경우, 신약의 비전이 구약에 앞서도록 해야 한다. 신약의 본문이 구약의 할례와 음식물 규례의 요구를 대체하는 판단을 내렸듯이, 또한 신약의 이혼 금지가 구약의 허용을 대체했듯이, 비폭력에 대한 예수님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범은 원수를 죽이는 것이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는 선택이 되도록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언약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재형성한다.(p.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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