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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어거스틴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오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외에 다란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레야 뗄 수 없게끔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분은 그 비밀을 공동체에 전하시고 세상의 삶 가운데 그 비밀을 전하도록 그들을 세상에 다시 보내시고 새로운 화녕이 올 때마다. 항상 그 상황에 비추어서 그 비밀을 다시 전용하고 해속하도록 하신 것이 바로 문제의 요체가 된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속에서 이해하기 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고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보는 방식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체이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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