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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the Baptist Exalts Christ
22 After this Jesus and his disciples went into the Judean countryside, and he remained there with them and xwas baptizing. 23 John also was baptizing at Aenon near Salim, because water was plentiful there, and people were coming and being baptized 24 (for yJohn had not yet been put in prison).
25 Now a discussion arose between some of John’s disciples and a Jew over zpurification. 26 And they came to John and said to him, a“Rabbi, he who was with you across the Jordan, bto whom you bore witness—look, he is baptizing, and call are going to him.” 27 John answered, d“A person cannot receive even one thing eunless it is given him ffrom heaven. 28 You yourselves bear me witness, that I said, g‘I am not the Christ, but hI have been sent before him.’ 29 i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jThe friend of the bridegroom, who stands and hears him, k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Therefore this joy of mine is now complete. 30 l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10
31 mHe who comes from above nis above all. He who is of the earth belongs to the earth and ospeaks in an earthly way. pHe who comes from heaven nis above all. 32 qHe bears witness to what he has seen and heard, ryet no one receives his testimony. 33 Whoever receives his testimony ssets his seal to this, tthat God is true. 34 For he whom uGod has sent utters the words of God, for he gives the Spirit vwithout measure. 35 wThe Father loves the Son and xhas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 36 y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zwhoever does not obey the Son shall not a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remains on him.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3:22–36.

예수께서 세례를 주시는 것을 이곳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니고데모의 사건이후에 물과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명백하게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대조하고 있다. 그는 증인이고 주님은 빛이다. 그는 소리이고 주님은 바로 그 말씀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 

24절) 요한 복음이 마가복음보다 앞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의 시간적 구성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John had not yet been put in prison alerts readers to the fact that everything that has happened up to this point in John’s Gospel takes place prior to Mark 1:14 (“after John was arrest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6.

25절) 결례에 대한 변론의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연상케 한다. 

27-28절) 요한은 자신의 역할,,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가는 것에 대해서 질투하거나 문제시 하지 않았다. / 그는 분명히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다” / 누군가 나를 좋게 평가해줄때, 그것이 실재보다 과대평가되었을때 우리는 애써서 그것을 부인하지않는다. 도리어 그것을 즐길때가 있다.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자신의 소명에 입각해서 말하고 알고 있고 그분이 높임을 받고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가는 것을(요 1:35-37) 속상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 

29절) 예수님은 신랑, 이스라엘은 신부, 신랑의 친구는 세례요한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이스라엘이 오래 고대하고 기다리던 왕이요 메시야인 것을 알고 있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로 자주 언급된다. (e.g., Isa. 62:4–5; Jer. 2:2; Hos. 2:16–20)

30절) 그는 흥하여야(to become more significant)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to become less significant) 하리라. 

34-35절) 하나님은 보내신 자, 주님은 보냄을 받은자이다.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주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제한없이, 풍성하게 받으셨다. 그리고 만물을 모두 주님께 주셨다. 

36절) 이 구절은 앞선 18절에 대한 재인용, 강조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받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영생(생명)을 경험하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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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God So Loved the World
16 “For hGod so loved ithe world,9 jthat he gave his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k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For l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mto condemn the world, but in order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18 nWhoever believes in him is not condemn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i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s not obelieved in the name of the only Son of God. 19 pAnd this is the judgment: qthe light has come into the world, and rpeople loved the darkness rather than the light because stheir works were evil. 20 tFor everyone who does wicked things hates the light and does not come to the light, ulest his works should be exposed. 21 But whoever vdoes what is true wcomes to the light, so that it may be clearly seen that his works have been carried out in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3:16–21.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표현은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선언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 15절에서 “저를 믿는 자마다, whoever believe in him”의 근거가 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감정적인,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외아들을 주신 것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 그 희생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이것의 의미는 “영원한 심판에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 영생은 풍성한 기쁨과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 아들을 믿는 것이 영벌과 영생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생은 언제 얻고 누리는 것인가?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현재 우리의 삶가운데 의미있는 수준으로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사랑을 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누구든지, whoever”,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강조한다. 

17절)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분을 나타내고 그가 맡긴 메시지를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고 예수님이 바로 보냄을 받는 자인 것이다. 16절과 연속해서 심판, 멸망이 아니라 영생,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일반적으로 본문을 통해서 구원의 긍적적인 부분, 하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데 구원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면, 심판에 대한 부분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반복, 강조한다.  John’s favorite designation of Jesus is that of the Son “sent” by the Father (see also vv. 34–36; 5:19–26; 6:40; 8:35–36; 14:13; 17: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5.
이제 주님이 보내는 분으로 그분의 제자들을 보내신다.(9:7, 20:21-22)

18절) 심판의 기준은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누어 진다. 세상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여타 다른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This verse also refutes the assertion that a sincere person following any religion can have eternal life with God (cf. 14:6; Acts 4:12; Rom. 10:13–17; 1 Tim. 2:5–6; regarding OT believers who looked forward to Christ, see John 8:56; Rom. 4:1–24; Heb. 11:13, 2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5.
-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믿지 않는 자는 독생자를 믿지 않음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 이는 불신자들에게 임할 심판, 정죄가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심판, 정죄를 피해야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앞으로 임할 심판이 아니라 이미 임한 심판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16-18절은 본문 이해를 위해서 함께 읽어야 한다. 
Verse 16 serves as a statement of fact involving the agency (the Son) God used to bring salvation to the world. Verse 17 expands on God’s intention and clearly identifies God’s Purpose in sending the son. Verse 18 provides a pointed reality statement concerning the present nature of judgment, a reality no reader should fail to understand. Only when the three verses are allowed to hang together does the reader begin to grasp the full meaning of the coming of Jesus and the Johannine message of salvation expounded here.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83.

19-21절) 이미 임한 심판은 바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지 아니함으로, 그것의 심판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두움을 사랑하기에 믿지 않고, 믿지 못하는 것으로도 연결된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믿으면 빛을 사랑하게 되고, 빛을 사랑하면 믿게 된다는 것이다. /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고 악을 행한다.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 중심적인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a
- 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우리에게 준다.  The coordination of works and faith in Jas 2:14–26, which Luther found so difficult to accept, is an integral part of New Testament thought (e.g., Eph 2:8–10; Phil 2:12–13; Heb 9:14; 2 Pet 2:8).111 The
111 Luther’s hostility to works stemmed from his historical revulsion at the church’s view of penance and from a misunderstanding of Paul’s rejection of the “works of the law” as a basis for justification. Paul did not attack law per se but the wrong perception of the role of law.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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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ust Be Born Again
Now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hNicodemus, ia ruler of the Jews. This man came to Jesus1 jby night and said to him, k“Rabbi, lwe know that you are a teacher come from God, for no one can do these signs that you do munless God is with him.” Jesus answered him,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nborn oagain2 he cannot psee the kingdom of God.” Nicodemus said to him, “How can a man be born when he is old? Can he enter a second time into his mother’s womb and be born?” Jesus answered,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qof water and the Spirit, h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r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s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3 tDo not marvel that I said to you, ‘You4 must be born uagain.’ vThe wind5 blows wwhere it wishes, and you hear its sound, but you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So it is with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Nicodemus said to him, x“How can these things be?” 10 Jesus answered him, “Are you the teacher of Israel yand yet you do not understand these things? 11 Truly, truly, I say to you, zwe speak of what we know, and bear witness to what we have seen, but zyou6 do not receive our testimony. 12 If I have told you earthly things and you do not believe, how can you believe if I tell you heavenly things? 13 aNo one has bascended into heaven except che who descended from heaven, the Son of Man.7 14 And d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so must the Son of Man ebe lifted up, 15 that whoever believes fin him gmay have eternal life.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3:1–1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번의 “진실로 진실로"
1) 3절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2) 5절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 11절 :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1-2절) 니고데모
- 바리새인
- 유대인의 관원
- 랍비
- 이스라엘의 선생(10절)
- 밤에 찾아온 의미 :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둠을 대조해서 이야기한다.(요 1:4-5) 어둠, 밤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기에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가 불신앙과 의심의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생각할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그가 유력한 인물로 낮시간이 바빠서 일 수도 있다. 밤의 한적한 시간에 주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기 원했을 수도 있다. 

3절) 거듭남(gennēthē anōthen-게네데 아노덴) 
아노덴이라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다시(again)으로 번역되지만 위로부터(from above) 혹은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으로도 사용된다. 지금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심으로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나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오해)했다. 31절에 동일한 단어가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4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이를 육체적인 거듭남, 다시 태어남으로 이해했다. 

5절) 물과 성령으로 남 : 이는 육체적인 탄생이 아니라 세례를 의미한다. 에스겔 36:25-27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깊은 거듭남에 대한 논의 :  For further discussion of being born again, see 1 John 2:29; 3:9; 4:7; 5:1, 4, 18.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4.
- 본문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한번 나온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보다 영생이라는 단어, 개념을 선호했다. 

6절) 육과 영의 대조. 
The flesh of itself is unable, because of its frailty, to attain the destiny of eternal life, but the Spirit is the empowering means of life (cf. John 6:63).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76.

8절) 바람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헬라어로 프뉴마, 히브리어 루아흐) 프뉴마는 바람, 숨결, 생명, 영, 성령의 의미를 가진다. 의도적으로 성령을 바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 초대교회의 이방인,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있어서 크리스찬들의 삶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아주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크리스찬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이다. 

9절) 니고데모의 질문 : 어지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영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요한복음속에서 니고데모는 7장, 19장에 다시 등장한다. 7장에서는 공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자로(7:50-51), 19장에서는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현장에 등장한다.(19:39-42)
 
10절)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구약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새생명과 부활을 묘사한 에스겔 37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zekiel 37 and the new heart in Deut. 30:6; Jer. 31:33; and Ezek. 36:26.)

11-12절) 본문에서 you를 11절 전반부에서는 단수로, 후반부와 12절에서는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요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에 3번 인용된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영광가운데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The reference to the Son of Man being lifted up is the first of three “lifted up” sayings in John’s Gospel (cf. 8:28; 12:32). All three sayings speak of the future “lifting up” of the Son of Man in a typical Johannine double meaning (see notes on 4:10; 8:24; 11:50–51; 19:19; cf. also 3:7–8), so that it refers to both Jesus’ death and his resurrection and exaltation to glory in heaven (cf. Acts 2:33; 5:3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5.

15절) 요한은 영생(eternal life) 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한다. 총 17번 등장하는데 여기에 처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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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leanses the Temple
13 tThe Passover of the Jews was at hand, and Jesus uwent up to Jerusalem. 14 vIn the temple he found those who were selling oxen and sheep and pigeons, and the money-changers sitting there. 15 And making a whip of cords, he drove them all out of the temple, with the sheep and oxen. And he poured out the coins of the money-changers and overturned their tables. 16 And he told those who sold the pigeons, “Take these things away; do not make wmy Father’s house a house of trade.” 17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it was written, x“Zeal for your house will consume me.”
18 So the Jews said to him, y“What sign do you show us for doing these things?” 19 Jesus answered them, z“Destroy this temple, and in three days aI will raise it up.” 20 The Jews then said, “It has taken forty-six years to build this temple,3 and will you raise it up in three days?” 21 But he was speaking about bthe temple of his body. 22 When therefore he was raised from the dead, c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he had said this, and they believed dthe Scripture and the word that Jesus had spoken.
Jesus Knows What Is in Man
23 Now when he was in Jerusalem at the Passover Feast, many believed in his name ewhen they saw the signs that he was doing. 24 But Jesus fon his part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em, because ghe knew all people 25 and needed no one to bear witness about man, for ghe himself knew what was in ma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2:13–25.


Seven Signs Pointing to Jesus as the Messiah
The first half of John’s Gospel features Jesus’ demonstration of his messianic identity by way of seven selected signs (cf. 20:30–31):

2:1–11
Changing water into wine
4:46–54
Healing the official’s son
5:1–15
Healing the invalid
6:5–13
Feeding the multitude
6:16–21
Walking on the water*
9:1–7
Healing the man born blind
11:1–44
Raising Lazarus
* John does not explicitly identify this event as a sig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3.

성전 청결 사건에 대한 내용이 연대기적으로 요한복음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초기에 등장하기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실수라고도 하고, 두번의 청결 사건이 있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는 것이 신문 기사를 작성하는 것과 같은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별 문제 될 것이 없다. 요 20:30-31절에서 말하는 기록 목적과 부합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했기에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복음서를 작성한 시점은 이미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3절) 유대인의 유월절
Here and in v. 23 are the first references to a Jewish festival in John’s Gospel and the first references to the Jewish Passover (see Ex. 12:1–28). Later, John refers to two more Passovers—at John 6:4 (Jesus in Galilee) and 11:55; 12:1 (Jesus’ final Passover in Jerusalem). Apart from these Passover references, John also mentions Jesus’ activities at an unnamed Jewish festival in 5:1 (possibly Tabernacles), at the Feast of Tabernacles (or Booths) in 7:2, and at the Feast of Dedication (or Hanukkah) in 10:22. People went up to Jerusalem because it was located at a higher elevation than Galilee and because it was the capital.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3.
-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한 예표로 유월절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유월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고 더이상 필요없는 예식이 된 것이다.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았고, 실제로 예루살렘은 산, 언덕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올라갔다라는 표현은 정당하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14-17절) 성전안에서 제물로 사용되어질 소, 양, 비둘기를 판매하고, 성전세(성인 일인당 반세겔, 출 30:13)를 내기 위한 돈을 바꾸어주는 모습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짐 / 처음에는 멀리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제공되던 서비스가 이제 몇몇 기득권층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성전에서 판매된 제물이 아닌 것들은 제물로 인정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자가 있는 제물들을 비싼 가격에 판매했다. 제사를 위해서 먼곳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에 동물은 산채로 데려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외국의 화폐를 인정하지 않기에 유대의 화폐로 바꾸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신다. 채찍으로 양과 소를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어주는 자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에게는 이것을 가지고 나가라고 명령하신다. 분노를 발하는 과정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는 이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명시한다.(막 11:17)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의 열심, 분노는 구약의 하나님의 분노를 떠올리게 한다.(출 32:10, 신 9:14)

18절)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이런 일을 행하는 근거,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마술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표적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라면 이것이 바로 그 표적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19절)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
I will raise it up implies that Jesus himself would have a part in raising himself from the dead, though other verses mention that the Father and the Holy Spirit were also involved (see Acts 2:24; Rom. 6:4; 1 Cor. 6:14; Gal. 1:1; Eph. 1:20; also Rom. 1:4; 8:11; and note on John 10:17). In fact, Jesus says that he i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11:2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4.
- 여기서 주님은 분명히 성전을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 말씀하고 계신다. 자신이 분명히 사흘만에 죽은자가운데서 부활 것을 염두에 두시고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0-2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해서 46년 동안에 지어진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세운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이 예수님의 발언에 대한 오해가 있다.  Matthew (26:61; 27:40) and Mark (14:58; 15:29).

23-25절) 23절의 표적은 복수이다. 하지만 요 4:54절의 표적이 주님의 두번째 표적이기에 이것이 편집의 오류(여러 소스들을 러프하게 편집함)라고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이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그분의 표적을 보고 그 분을 믿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인 고로 그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믿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 우리의 믿음의 불완전성, 얕음, 천박함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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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dding at Cana
On hthe third day there was a wedding at iCana in Galilee, and the mother of Jesus was there. Jesus also was invited to the wedding with jhis disciples. When the wine ran out, the mother of Jesus said to him, “They have no wine.” And Jesus said to her, k“Woman, lwhat does this have to do with me? mMy hour has not yet come.” His mother said to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
Now there were six stone water jars there nfor the Jewish rites of purification, each holding twenty or thirty ogallons.1 Jesus said to the servants, “Fill the jars with water.” And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And he said to them, “Now draw some out and take it to the master of the feast.” So they took it. When the master of the feast tasted pthe water now become wine, and did not know where it came from (though the servants who had drawn the water knew), the master of the feast called the bridegroom 10 and said to him, “Everyone serves the good wine first, and when people have drunk freely, then the poor wine. But you have kept the good wine until now.” 11 This, the first of his signs, Jesus did at Cana in Galilee, and manifested qhis glory. And r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12 After this he went down to Capernaum, with his mother and shis brothers2 and his disciples, and they stayed there for a few day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2:1–12.

1절) 사흘 되던 날, 이날은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시고 이틀 지났을때이다. (1:29, 35, 43 참조) / 갈릴리 가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지역이다. 

3절)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짐, 이는 영적인 황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에 대한 상징이다. 이시대도 포도주가 떨어진, 기쁨이 상실된 시대이다. 주님이 바로 이 시대에 기쁨을 회복시키는 기적을 자신의 첫번째 기적으로 행하고 계신 것이다. 
-  The wedding party’s running out of wine may be seen as symbolizing the spiritual barrenness of first-century Judaism, especially against an OT background that viewed wine (but never drunkenness) as a sign of joy and God’s blessing (Ps. 104:15; Prov. 3:10; cf. Matt. 26:2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2.

4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여기서 내 때는 언제를 의미하는가? 요한에게 있어서 그 때는 주님의 십자가의 시간이다.  (see 7:30; 8:20; 12:23, 27; 13:1; 17:1; also note on 7:30). 결국 사람들은 주님의 때에 대해서, 그리고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메시야로서 행하실고자 하는 사역과 사람들이 메시야로서 그분에게 기대하는 사역의 때와 모습이 달랐던 것이다. /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볼때 요한은 주님의 공적인 사역보다 그분의 개인적인 사역을 더욱 강조하여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삶은 긍극적으로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 목적의 중심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를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이다. 

5절) 마리아의 반응, 하인들에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명함, 지금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주님의 때와 그분의 십자가의 사역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그녀는 이 문제를 주님께 토스했고 자신은 완전히 무대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복음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해야할 일이 바로 이러한 일들이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마리아와 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고 어떤 이들은 하인들과 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지만 완전히 맡기고 내려올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6절) 유대인의 결례 : 정결 예법, 두세통 드는 돌 할항아리(20-30 갤런, 1갤런-3.8리터)

11절)  주님이 행하신 처음 표적,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주님,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이 믿음
- 관원의 아들을 살려주시는 주님(4:47, 49-50) / 38년된 병자를 고치심(5:5) / 오병이어(6:13) / 날때부터 소경된 이를 고치심(9:1-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7) / 이러한 기적은 전능한 창조주와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 또한 그분의 백성들의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In each of the signs that John includes, the emphasis is on the way in which the “sign” reveals Jesus’ messianic character (cf. 12:37–40; 20:30–31) and on the exceptional and striking nature of the feat accomplished by Jesus—such as the large quantity and high quality of wine (2:6, 10), the fact that the official’s son is healed a long distance away by the sheer power of Jesus’ word (4:47, 49–50), the invalid’s recovery from a 38-year-long ordeal (5:5), the large quantity of food produced by Jesus (6:13), the man’s recovery from lifelong blindness (9:1–2), and the raising of Lazarus after four days in the tomb (11:17, 39). and manifested his glory. This miracle showed the glory of Jesus as the sovereign Creator and ruler of the material universe and also as the merciful God who provides abundantly for his people’s needs (cf. 1:1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3.
- sign과 miracle의 차이. 
- 이 표적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주님, 이로 주님을 믿는 제자들. 
But glory in John is derived from the Old Testament idea of God’s kābōd, which implies the mighty power of God evidenced in epiphanies or perceived manifestations of that power (e.g., Exod 16:6–10; 24:15–17; 33:18–23; 40:34). In John the mighty God is to be perceived as acting in Jesus. The signs therefore point the reader to the reality that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has acted anew in Christ Jesus.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57–158.

갈릴리 가나의 기적(포도주)과 이후 6장의 오병이어(떡)의 기적과 연관되어 생각하면 주님의 성만찬을 예표하는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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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alls Philip and Nathanael
43 qThe next day Jesus decided rto go to Galilee. He found Philip and said to him, “Follow me.” 44 Now sPhilip was from Bethsaida, the city of Andrew and Peter. 45 Philip found tNathanael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him of whom uMoses in the Law and also the prophets wrote, Jesus vof Nazareth, wthe son of Joseph.” 46 Nathanael said to him, x“Can anything good come out of Nazareth?” Philip said to him, “Come and see.” 47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ward him and said of him, “Behold, yan Israelite indeed, zin whom there is no deceit!” 48 Nathanael said to him, “How ado you know me?” Jesus answered him, “Before Philip called you, when you were under the fig tree, I saw you.” 49 Nathanael answered him, b“Rabbi, c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dKing of Israel!” 50 Jesus answered him, “Because I said to you,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do you believ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ese.” 51 And he said to him, “Truly, truly, I say to you,11 you will see eheaven opened, and f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gthe Son of Ma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43–51.

43절)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발견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누구를 만난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을 발견한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빌립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를 것을 청하고 계신 것이다. 
But it is intriguing to ask the very simple question concerning these stories: Who really finds whom? Christians have frequently been known to say that they found Christ or found faith as Andrew and Philip reported, but maybe Jesus’ perspective in these stories could profitably alter such a self-centered view of salvation. It was not Jesus who was lost!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6.


45절)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의 개인적인 이름일 것이다. 바돌로매의 뜻은 “son of Tholomaios”이다. 공관복음에서 항상 빌립과 함께 등장한다. (Matt. 10:3; Mark 3:18; Luke 6:14)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바로 그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다. 오시리라 한 바로 그분을 만났다는 것을 설명하는 빌립
What is meant is that Scriptures bear witness to Jesus, a theme that is repeated elsewhere in this Gospel (e.g., 5:39–40; 19:36; cf. Luke 24:27).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6.

46절) 이에 대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증언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사렛은 의미없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사렛 출신의 예수의 등장을 의미없게 여겼다. 하지만 여기서 빌립은 이부분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고 “와 보라”라고 말한다. 복음은 그 진정성을 통해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복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게 만드는 것이다. 

47절)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심. 야곱과 대조적으로 이야기하시는 주님
Jesus designated Nathanael as a true or authentic (alēthōs, here used adjectivally) Israelite in whom there was no deceit or guile (dolos, John 1:47). In making this statement, Jesus contrasted Nathanael with his forefather Jacob, the usurper (Gen 25:26), who by duplicity or guile (dolou, Gen 27:35, LXX) deceived his father and cheated his brother out of the blessing, to say nothing of his dealings with his uncle Laban, who also was skilled in guile.
LXX Septuagint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7–148.

48절) 무화과나무 아래에 나다나엘이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 
fig tree often serves as a metaphor for Israel and its standing before God (e.g., Jer. 8:13; Hos. 9:10, 16; Joel 1:7). Here the cursing of the fig tree signifies the judgment of God on the “fruitless” Jewish people (cf. Mark 7:6), who had turned away from God into empty ritual and legalism (cf. Hos. 9:10–17). It is a visual parable to signify Jesus’ unrequited search for the true fruit of worship, prayer, and righteousness in the Jewish nation and its religious practic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18.
- 유대전통에 랍비들이 포도나무나 무화과, 올리브 나무 아래서 율법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나다나엘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기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9절) 나다나엘의 고백 : 하나님의 아들이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함. 

50-51절)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이 표현은 복음서에 25번 등장한다. 이 표현은 정말 중요하고 간과해서는 안되는 내용들에 사용된다. 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표현은 복음서에 13번 등장한다. 
The term “Son of Man” occurs thirteen times in this Gospel, and its major use seems to be closely akin to the eschatological use of the term in the Synoptics. The theological motifs that are most in focus in the use of this designation are the lifting up, raising, and glorification of the Son of Man (3:14; 6:62; 8:28; 12:23, 34; 13:31), the descent and ascent of the Son of Man (3:13; 6:62), and the judgment role of the Son of Man (5:27).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9.
나다나엘로 하여금 야곱이 베델에서의 경험을 기억하게 함으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중요한 교훈들이 시작되었다. 야곱의 위기의 순간에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자존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셨다. 지금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는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신 것이다. 지금 나다나엘은 베델(하나님의 집)이 자신의 눈앞에 실존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The expectation of the coming king was at the center of Jewish hopes, but Nathanael’s evaluation of Jesus was hardly yet all encompassing. He and all the disciples had a great many lessons to learn concerning their teacher. Jesus was prepared to open their eyes. The process was begun by reminding Nathanael of Jacob’s great Bethel experience. In the midst of Jacob’s fearful crisis, Yahweh (the “I AM” of Gen 28:13) had to teach Jacob that God was really present in the world. Here in the Nathanael story Jesus illustrated the meaning of the word becoming flesh and tenting (presencing himself) in our midst (John 1:14) by informing Nathanael that the rabbi he was facing was none other than the personal embodiment of Bethel (“meaning house of God”). And here Jesus introduced his statement by the typical Johannine double emphatic amēn amēn (truly, truly, which occurs twenty-five times in the Gospel). When the evangelist used this expression, he sought to make clear that the point was so important that it was not to be missed by the reader.154
154 For a discussion of amēn see R. A. Culpepper, “The AMHN, AMHN Sayings in the Gospel of John,” in Perspectives in John, ed. R. Sloan et al. (Lewiston: Edwin Mellen, 1993), 57–101.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8–149.

요한 복음 1장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 하는 고백
- 세례 요한 : 29절)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33절)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34절) 하나님의 아들, 36절) 하나님의 어린양
- 안드레(시몬 베드로의 형제) : 41절) 메시야
- 빌립 : 45절)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나다나엘 : 49절)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

29, 35, 43절)에 반복해서 이튿날이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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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alls the First Disciples
35 The next day again John was standing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and he looked at Jesus as he walked by and said, “Behold, ithe Lamb of God!” 37 The two disciples heard him say this, and they followed Jesus. 38 Jesus turned and saw them following and said to them, j“What are you seeking?” And they said to him, k“Rabbi” (which means Teacher), “where are you staying?” 39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So they came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for it was about the tenth hour.8 40 lOne of the two who heard John speak and followed Jesus9 was Andrew, Simon Peter’s brother. 41 He first found his own brother Simon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mthe Messiah” (which means Christ). 42 He brought him to Jesus. Jesus looked at him and said, “You are Simon the son of nJohn. You shall be called oCephas” (which means pPeter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35–42.

35-36절)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들과 함께 서있다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다. 이 두 제자중 하나는 안드레(49절)이고 다른 한명은 세배대의 아들 요한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 혹자들은 나머지 한명이 빌립이나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빌립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6:57; 12:21-22에 안드레와 함께 등장하고있기 때문이다. 
Because Philip is mentioned in both other places of this Gospel (6:57; 12:21–22) where Andrew was involved—though he also was associated with Thomas in the farewell discourse (14:5–9)—and because Philip is linked with the hometown of Andrew and Peter in the next pericope, some have argued rather forcefully that Philip is the unidentified second disciple.139 Others have argued just as forcefully that since the two sets of brothers (Andrew and Peter, James and John) are usually mentioned together early in the Gospels and since the unnamed (beloved?) disciple has in tradition been identified with John, the opinion is that John should be regarded as the unnamed disciple here.140
139 E.g., see M. Boismard, Du baptême à Cana, Jean 1:1–2:11 (Paris: Cerf, 1956), 72–73.
140 R. Brown, John, 1.73.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2–143.

37절) 요한의 이 이야기를 듣고 두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을까 아니면 그분은 흥하여야 하기에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하나님의 제자로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떠나보내는 역할을 해야할때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38절) 예수께서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신다. 이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선생)이라고 부르며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제자들, 이 질문은 제자가 된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당시 제자는 스승과 함께 거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걷고, 삶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기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소는 사람들에게 안정감 혹은 안전감을 제공해준다. 이에 이러한 질문은 그분이 있는 그곳에 나도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의미로, 자신의 안전을 모두 그분께 맡기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드레의 역할
In terms of Andrew’s position in the Synoptics, he seems to function in a kind of swing role within the inner group, being present both in the early stages of the calling of the disciples (cf. Matt 4:18–21; Mark 1:16–19, 29; though not in Luke 5:10) and during the Olivet discourse (Mark 13:3) But he is not mentioned in the important private scenes of the raising of Jairus’s daughter, the transfiguration, nor among those who were close to Jesus during the prayers at Gethsemane (Matt 17:1; 26:37; Mark 5:37; 9:2; 14:33; Luke 5:37; 9:28).138 In the Johannine Gospel Andrew is mentioned in two contexts other than in chap. 1. In 6:8 he brings to Jesus the lad with the five loaves and two fish, and in 12:22 he is linked with Philip in bringing Jesus a message of interest from the Greeks. He is thus pictured in John as a model helper or aid. It is from the Johannine portrayal of Andrew that the idea of Andrew fellowships have arisen in some churches, fellowships that stress the role of being helpers and of bringing people to Christ.
138 For a discussion of Andrew see E. J. Goodspeed, The Twelve (New York: Collier, 1962), 25–28.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42.
이처럼 안드레는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시몬을 주께로 인도했고 헬라인 몇을 주님께로 인도함(빌립과, 요 12:22), 오병이어 이적을 베푸실때 아이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이처럼 누군가를 주님께로 이끄는, 주님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41절) 메시야, 그리스도 / 이 두 이름은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자 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가르치고 구원할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의미로 구약의 기대를 한껏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 예수님에 대한 세가지 호칭
메시야
그리스도

42절) 요한의 아들 시몬(게바, 베드로 / 반석)을 예수께로 데리고 나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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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old, the Lamb of God
29 The next day he saw Jesus coming toward him, and said, “Behold, xthe Lamb of God, who ytakes away the sin zof the world! 30 This is he of whom I said, a‘After me comes a man who ranks before me, because he was before me.’ 31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bfor this purpose I came baptizing with water, that he might be revealed to Israel.” 32 And John cbore witness: d“I saw the Spirit descend from heaven like a dove, and eit remained on him. 33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fhe who sent me to baptize gwith water said to me, ‘He 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 and remain, hthis is he who baptizes gwith the Holy Spirit.’ 34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29–34.

29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 고백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땅 가운데 오셔서 어떤 삶을 살아가실 것인지, 세상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어떤 희생을 감당하실지에 대한 예언적인 고백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린 양의 이미지는 희생 제물의 이미지로 피흘림을 통해서 얻게 되는 죄사함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은 다른 희생제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Jesus, by his sacrifice, fulfills the symbolism of the Passover lamb and other OT sacrifices (Lev. 1:1–5:19; 1 Cor. 5:7; Eph. 5:2; Heb. 10:1–14). Deliverance through the blood of a lamb prefigured the coming of Jesus as the Lamb of God to obtain final salvation for God’s people through his death, which in turn redeemed them from death, sin, and Satan (Col. 1:13–14; Heb. 2:14–15). See also Isa. 53:7 and other OT passages about sacrifices for sins (Gen. 22:8; Lev. 14:25; 16:15–22). This lamb imagery will later culminate in John’s vision of Jesus as the apocalyptic warrior Lamb who will bring judgment and universal victory (Rev. 5:6–13; 7:17; 21:22–23; 22:1–3).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refers to Jesus’ sacrificial, substitutionary death and his appeasement of the divine wrath by way of atonement for sin (his propitiation; cf. Rom. 3:25; Heb. 2:17; 1 John 2:2; 4:10; and notes on 1 Pet. 2:24; 3:18).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1.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유월절과 관련된 모티브가 포함된다. 
피흘림을 통한 속죄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지금은 신학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자동적으로 이해하지만 당시로서는 직접 제사장이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수반된 매우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몸소 피흘리시고 죽으신 것이다. 

30절)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 그분의 선재성에 대한 요한의 고백이다. 물리적으로 그가 주님보다 먼저 태어나서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지만 주님이 먼저 계시고 자신은 그분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32-34절) 요한이 주님을 알아보는 앎은 내재적인 앎이 아니라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계시의 방법중 하나이다. 증거자로서 요한의 사명은 그를 보내신 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셔서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이 그위에 임하는 것을 볼때 바로 그이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 인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내려서(descend-카타바이논) 그분 위에 머물렀다.(remain-에메이넨)
이 성령의 임재와 관련된 내용이 기독론의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신적 속성이 임함으로 신이 되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문맥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례 요한이 주님을 알아보았는가에 관심이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아보는 징표로 성령이 비둘기와같이 주님께 임하였던 것이다.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 :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The same basic distinction is made in the other Gospels between the baptisms of John and Jesus (Mark 1:7–8; Matt 3:11; Luke 3:16) except that in Matthew and Luke “fire” is added to the Spirit baptism of Jesus. The fire there probably is intended to convey the cleansing power of the Spirit. In this Gospel the evangelist did not use the fire motif because of his interest in the Spirit per se. Doubtless the writer saw parallels of this Spirit experience with Jesus’ role of sending the Spirit, the other Paraclete (the Supporter or Counselor of 14:15–17), and of his breathing on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in which he bestowed the Spirit upon them (20:21–22).127
127 See, e.g., G. Johnston, The Spirit-Paraclete in Joh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17–21.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38–139.

세례 요한의 고백의 중요성
1) 예수님이 바로 구속의 때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실 분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요한의 기독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4가지 고백을 제공한다. 
1)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신다. 
2) 그분은 선재하시는 분으로 이러한 신적인 임무를 완수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3) 그분은 과거 십자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로서 우리의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4)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신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여 나타나심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역시 성령의 역사의 중요한 포인트는 성령이 임하여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 이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고 알게하기 위해서 인 것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역사만을 추구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보고 세례 요한이 추구한 것은 나도 그 성령을 힘입어 능력을 행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힘있게 증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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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stimony of John the Baptist
19 And this is the otestimony of John, when the Jews sent priests and Levites from Jerusalem to ask him, p“Who are you?” 20 qHe confessed, and did not deny, but confessed, “I am not the Christ.” 21 And they asked him, “What then? rAre you Elijah?” He said, “I am not.” “Are you sthe Prophet?” And he answered, “No.” 22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We need to give an answer to those who sent us. What do you say about yourself?” 23 He said, “I am t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Make straight7 the way of the Lord,’ as the prophet Isaiah said.”
24 (Now they had been sent from the Pharisees.) 25 They asked him, u“Then why are you baptizing, if you are neither the Christ, nor Elijah, nor the Prophet?” 26 John answered them, v“I baptize with water, but among you stands one you do not know, 27 even whe who comes after me, the strap of whose sandal I am not worthy to untie.” 28 These things took place in Bethany across the Jordan, where John was baptizing.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19–28.

19절) 유대인들(Jews)라는 표현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예도 있다.(요 4:22) 이들은 성전이나 회당의 관리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난뒤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난 이후 다시금 유대 신앙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얌니아(Jamnia)”라는 호칭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그들의 질문을 통해서 증인으로서의 세례자의 역할을 설명하게 된다. / 질문하는 이들은 요한에 대해서 그가 메시야, 엘리야, 그 선지자인지 궁금해 했다. 
- 유대인들에게 에녹과 모세,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이기에 종말의 시기에 이상적인 인물로 여겨진다.(변화산의 사건, 주님, 모세, 엘리야-변화된 모습/ 막 9:4-5)
- 우리는 유대인들의 질문에서 신학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도리어 사회,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히 중요한 이슈였을 것이다. 이 복음이라는 주제가 가지는 함의, 그 시대를 향해 외치는 강력한 외침, 삶의 변혁을 추동하는 의도가 세례 요한의 외침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The same awareness of social and political power struggles is evident in the Johannine account of the plot by the high priest’s executive committee to condemn Jesus (John 11:47–53). Nevertheless, the evangelist concentrated more on the theological dimensions of his stories than on the political perspectives (e.g., 11:51–52). Sometimes contemporary students and readers miss these points and consider the Gospel writer to have been naive about such issues. But this evangelist was not unaware of social and political concerns in the coming of Jesus. Rather, his purpose in writing the Gospel was his agenda, and the reader who wants to understand the Gospel must never forget to account for that life-altering purpose in analyzing the Johannine stories (see 20:30–31).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8.

20-21절) 요한은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니며 엘리야나 오리라한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삶의 모습은 엘리야를 닯았고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 많은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따르고 추앙하고자 할때 그것을 부인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너희가 바라는 그 메시야, 능력의 선지자다라고 말하고 싶은 욕심이 그에게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소명을 분명히 알았기에 이를 거부한다.  
John denies being the Christ (cf. v. 8, 15; 3:28), Elijah, or the Prophet. the Christ. See note on 1:41. Elijah, who never died (2 Kings 2:11), was expected to return in the end times (Mal. 4:5) to “restore all things” (Matt. 17:11; cf. Luke 1:17). Though the Baptist resembled Elijah in his rugged lifestyle (Matt. 3:4; cf. 2 Kings 1:8), he denied that he himself was Elijah (though Jesus, understanding more about this than John, saw John   p 2021  as fulfilling the prophecy about Elijah; cf. Matt. 11:14). The coming of the Prophet was predicted by Moses in Deut. 18:15, 18 (cf. Acts 3:22; 7:37) and was expected in Jesus’ day (John 6:14; 7:40). John denied being this Prophet as well (though he was a prophet; see Matt. 11:11–14; John 10:40–4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0–2021.
- 요한의 세번의 대답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아니다. 아니다 / 베드로의 부인(요 18장) / 세번의 자기 고백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두세증인을 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The threefold answers of the Baptizer and of Peter seem to be related to the concept of witness and to the familiar theme in the Bible that it takes two or three witnesses to confirm an issue (e.g., Deut 17:6; Matt 18:20; 1 Cor 14:27, 29; 2 Cor 13:1; 1 Tim 5:19; Heb 10:28; note the necessity of two or three witnesses in Deut 19:15). Among the many ideas related to this concept of witness,100 it is noteworthy that the sheet of animals that was let down from heaven in Peter’s well-known vision on the housetop at Joppa occurred three times (Acts 10:16) when God sought to redirect Christianity to include the Gentiles. As Peter then considered the implications of the vision, he was summoned by three messengers from Cornelius (Acts 10:19). The implication was obvious. God’s new perspective had been mandated and attested. Therefore it needed to be obeyed.
100 In Exod 23:14, 17; Deut 16:16 all males were to appear in witness before the Lord three times a year to confirm their relationship to the covenant, and God set three cities of refuge in the mainland as a sign that there was mercy in the midst of justice (Num 35:14; Deut 19:2–9). In God’s rendering of judgment he went beyond the normal pattern required as he announced repeatedly in Amos that violation had occurred not merely three times but at least four (Amos 1:3, 6, 9).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9.

23절) 사람들의 질문,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 자신의 답,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사 40:3을 인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한다.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 40:3.



24절) 요한복음에는 사두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전이후 시대에 사두개인은 등장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공관복음과는 다르게 요한복음에는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25-26절)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의 관심은 세례를 베푸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27절) 유대인들과 세례 요한의 차이. 요한은 오직 그분을 선포하고 그분의 길을 예배하기 위해서 왔다. 요한은 자신의 부르심,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본문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인지를 질문한다. 
(마 11:2-6, 개정)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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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nd zthe Word abecame flesh and bdwelt among us, cand we have seen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Son from the Father, full of dgrace and etruth. 15 (fJohn bore witness about him, and cried out, “This was he of whom I said, g‘He who comes after me ranks before me, because he was before me.’ ”) 16 For from hhis fullness we have all received, igrace upon grace.4 17 For jthe law was given through Moses; kgrace and truth came through Jesus Christ. 18 lNo one has ever seen God; mthe only God,5 who is at the Father’s side,6 nhe has made him know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14–18.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빌 2:6-7) / 성육신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영원하신, 전능하신, 무소부재하신,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자 인간으로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This is the most amazing event in all of history: the eternal, omnipotent, omnipresent, infinitely holy Son of God took on a human nature and lived among humanity as one who was both God and man at the same time, in one pers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0.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 사건은 초대 교회의 가현설이나 영지주의자의 관점과는 전혀 달랐다. / 성육신의 교리는 이단을 판별하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다. 
In the polemical context of 1 John 4:1–3 the incarnation is defined as the test for determining whether the presence of the Spirit of God or the spirit of antichrist is in the community.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19.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중에 함께 거하신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원래 의미는 텐트를 치다라는 의미이다.(출 25:8-9, 33:7)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성막과 성전에 거하시며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성육신 하셔서 당신의 백성가운데 그들의 육체를 가지고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고전 3:16, 고전 6:19) / 그래서 요한복음 7-8장에 장막절에 대한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 유대인들의 역사속에서 성막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 함께 함에 대한 약속(요 14:16-17, 마 28:20)
Dwelt among us means more literally “pitched his tent” (Gk. skēnoō), an allusion to God’s dwelling among the Israelites in the tabernacle (cf. Ex. 25:8–9; 33:7). In the past, God had manifested his presence to his people in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Now God takes up residence among his people in the incarnate Word, Jesus Christ (cf. John 1:17). Thus, the coming of Christ fulfills the OT symbolism for God’s dwelling with man in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Later, through the Holy Spirit, Christ will make into a temple both the church (1 Cor. 3:16) and a Christian’s body (1 Cor. 6: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0.

독생자의 의미는 영어로는 only를 사용하는데 'one of a kind, unique’의 의미이다. 

독생자의 영광 : 이 영광은 회막 가운데 가득 임재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출 40:34)이다. 이는 빛으로 표현되고 동시에 그분의 부활과 연관된다.(요 17:1) 왜냐하면 모든 복음서는 주님의 부활 이후 시점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명확한 경험과 시각을 포함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 이러한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기독교를 다른 여타의 혼합주의 종교와 구별되게 만든다. 우리가 온전히 그분의 영광을 깨닫게 된다면 절대로 혼합주의 종교의 모습을 띨 수 없다는 것이다. 
This text makes it absolutely clear that the mission of the Logos was uniqu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This uniqueness of the Son makes it impossible for Christianity to be a syncretistic religion. In our mission to the world we cannot say “Jesus and Caesar” or “Jesus and Buddha,” and so forth. Our confession is Jesus, the one and only! The early Christians suffered and died because they refused to recognize any other pattern than that which was revealed in Jesus Christ.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1.


15절) 5:31-47절을 참조
세례 요한의 가르침, 내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섰다는 의미,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출생한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분의 길을 평탄케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계신 분으로서 당연히 세례 요한보다 앞선 분이신 것이다. 
 

16-17절) 은혜와 진리, 구약에서는  “steadfast love [Hb. hesed] and faithfulness [Hb. ’emet]” in Ex. 34:6 (cf. Ex. 33:18–19), where the expression refers to God’s covenant faithfulness to his people Israel.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20.
헤세드와 에멧, 카리스와 알레데이아 /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Whatever may be its origin and whether it refers to the Logos, the only Son or to glory, the meaning seems to be that God’s messenger has the full incorporation of two characteristics that are usually ascribed to God. The first term “grace” (charis), which occurs only here in the Gospel but which is a frequent term in the Pauline corpus, is closely related to the Hebrew (c) ḥesed and can be rendered by such tender expressions as “loving-kindness” or “gracious mercy.” The second term “truth” (alētheia) is one of the major Johannine themes and is rooted in the Hebrew ʾĕmet, which carries the ideas of “faithfulness,” “steadfastness,” and “consistency.”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1.

17절) 율법은 모세로부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율법과 은혜를 과도하게 분리하려는 이분법적인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 / 문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는 것에 있다. 모세 율법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In the Gospel of John, Moses is regarded as a positive servant of God (e.g., 5:45–47; 6:32; 7:19–23).86 The problem for Jesus in this Gospel was not with Moses and the law; the problem was with the disobedient Jews who misused Moses and the law (e.g., 6:31–32; 9:28–29). Moses and the law were together viewed as a gracious gift from God.
86 For discussion on Moses see A. Hanson, “John i:14–18 and Exodus xxxiv,” NTS 23 (1976): 90–101; T. F. Glasson, Moses in the Fourth Gospel (Naperville, Ill.: A. Allenson, 1963), especially at 24–30 and 70–86, and W. Meeks, The Prophet-King: Mosaic Traditions and Johannine Christology (Leiden: Brill, 1967), a reprint of his earlier dissertation “Jesus as King and Prophet in the Fourth Gospel” (Ph.D. diss., Yale University, 1965).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3.

18절) 독생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므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땅 가운데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결국 신자들이 변혁적인 삶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The mention of the Father and the stress on the uniqueness of Jesus reminds the reader of the opening verse of the Prologue. This discussion has thus come full circle, and in doing so it presents a tightly constructed, complex introductory theological rationale for reading this Gospel. But reading is not to be merely an intellectual exercise. Instead, Jesus’ purpose in coming to the world was to empower people to become children of God (1:12). Likewise the purpose of the incarnate Logos and the purpose of the entire Gospel are one in focus because the Gospel was written to engender believing in this Jesus to the end that readers might experience the transformation of life (20:30–31).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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