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영속적인 문제
기독교는 현세적 생활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것과 짝하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모둔 인간적 사업이 멸망할것을 예측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6
영속적인 문제
1. 현세의 생활을 멸시하고 영생불멸을 확신하는데 열중한다.
2. 그리스도가 인간을 유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게하고 인간 자신의 성취에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3. 편협한 기독교. 로마의 관용정책과 충돌
하나님 사랑은 찬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는것은 긍휼과 용서로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하나님 사랑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사랑해야할 그대로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기를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실수 있는 강력한 긍휼로 사랑하는 이원성.
문화의 특징
1. 사회적인 성격
2. 문화는 인간의 성취이다.
3.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어떤 목적을 위해서 고안된 것)
4. 문화는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2. 문화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3.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4.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1) 새 백성과 ‘세상'
요한 1서속에서의 ‘세상’의 의미(2:15)
-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기에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충성할 것을 강조
- 2세기 기독교 문서(터툴리안) : 2세기 당시 기독교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이외의 제 3의 민족, 새백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신념에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논리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던지 다 악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다.
2) 톨스토이의 문화배척
- 베네딕트의 규칙, 메노파, 퀘이커파
-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입법자로서 그의 계명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과 타락하지 않은 이성의 명령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모든 국면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 그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폭력과 기만의 제도화를 대표한다.
- 또한 그는 경제, 철학, 과학, 예술등에 반항했다.
- 동과 서의 카톨릭, 정교회와 종파적 프로테스탄트, 천년왕국주의자와 신비주의자에게서 이러한 입장을 찾을 수 있다.
3) 필요하나 부적절한 입장
“퇴거와 포기의 운동이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에 대한 책임적인 참여운동도 그와 못지않게 필요하다. 이런 균형이 결핍될 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번영이나 공공적 평정을 위한 공리주의적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 우리는 문화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가 살고 있던 그 문화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던지,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말씀을 우리의 사회질서 안에 번역해서 받아들이든지 둘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다.
- 독신 - 결혼-재혼-신자와 결혼-일부일처-일부다처-무책임한 성관계
4) 신학적 문제들
- 이성과 계시의 문제
- 죄의 본성과 만연성의 문제
-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의 문제
- 이 견해의 문제점 : 자연의 창조주, 역사의 지배자, 그리고 피조물에 내재한 영과 기독교인 공동체 안에 있는 영, 이런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문제이다. 결국 이들은 이 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반대되는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적 영영과 영적인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는 정신적 영역의 둘로 구분하려는 유혹에 걸리게 된다. 이는 터툴리안의 몬타니즘, 영적 프랜시스주의, 퀘이커 교도의 내적 광명교리와 톨스토이의 정신주의등에서 솔 수 있다.
3장.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의 문화와의 조화
- 그리스도를 온전히 문화적 용어로 해석하고 사회적 신념 또는 관습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아무런 긴박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경향을 대표한 그룹은 헬라 문화에서의 영지주의자들이었다.(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그들은 당시의 문화에 기독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과학적, 철학적 해석을 가하였고 이는 문화속에 기독교를 동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된 기독교는 한 종교적 또는 철학적 체계로 되어 버린다.
2)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 존 로크 : 기독교의 합리성(중용지도)
- 라이프니츠 :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칸트)
- 제퍼슨 :
- 슐라이에르마허
- 칸트, 제퍼슨, 슐라이에르마허등으로부터 헤겔, 에머슨, 리츨로 옮겨져서 이성의 함계안에서의 종교가 인간성의 종교로 됨에 따라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여러가지 모양으로 다시 선포되었다.
- 리츨의 신학 : 계시와 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였다. 리츨은 그의 신학적 임무를 시작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또하나의 출발점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지를 그 원리로 삼고 있는 문화적 공동체이다. 리츨은 이처럼 교회와 문화 공동체 사이에 이원성이 있고 그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고 주장했다.
- 리츨에게 문화의 열쇠라고 느껴진 것은 칸트의 높은 윤리적 이상주의였다.
3) 문화적 신앙에 대한 변호
4) 신학적 반론
- 그 시대의 문화에 충성한다는 것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4장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
1) 중립적 교회
-중립적 교회는 반문화적 극단주의자와 문화에 그리스도를 적응시키려는 문화주의자와의 쌍방을 모두 거부했다.
- 중립적 교회의 신념
하나 :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둘 :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셋 : 죄의 보편성과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
- 중립적 교회의 세부류 : 종합론자, 이원론자, 개변주의자
2)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다 긍정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이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주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림이어서 한 인격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백한다.
- 종합주의자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는 간격이 있으며 조화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이 간격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고 극단주의자들은 당초부터 극복할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저스틴, 클레멘트, 토마스 아퀴나스(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 레오 13세
3) 종합의 문제점
- 피조물의 구조 자체 안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이성을 사용하여 그 법을 알고 또 그 법대로 자신을 통어해가야 한다는 것과 그 법이 이성적인 언어의 개념안에서 조형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 토마스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비판 : 이원론자, 개변론자, 극단주의자. 이들은 기독교적 완전을 향한 등급을 설정하려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 종합주의자가 인간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구속이 절대 필요하며 위대하다는 점을 아무리 고백한다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안에 내포된 근본악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결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5장.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1) 이원론자의 신학
- 종합론자는 온건하고 발전적인 세상을 그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나,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있다.
-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자의 해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다.
2) 바울과 마르키온의 이원론적 동기
- 바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문화적 제도와특징, 모든 인간적 업적을 상대화했고 죄아래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님의 은혜의 거룩한 침입을 향하여 열려있다.
- 종합론자는 문화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또는 교사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로 움직여 간다. 그러나 바울은 문화의 심판자 또는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적 문화로 나아간다.
-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에 항복한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윤리와 모든 불의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총괄적인 진노에 유의하는 윤리로 나눌 수 있다.
- 마르키온(영지주의자, 마니교) : 세계를 하나님과 악의 권세로 구분, 참된 이원론자는 두 서로 잡아당기는 양극 사이의 긴장안에서 산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그 두 극성을 따로따로 분리시켜버렸다.
3) 루터와 현대의 이원론
-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요 세상나라는 진노와 가혹의 나라로 이해했다.
- 복음서에서 발진티푸스의 치료법을 찾을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 가운데서 국가적 범죄자를 처리하는 특수한 법률을 찾을 수 없다.
- 신앙과 과학은 서로 같은 표준에서 비교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이 두영역에 살고 있는 위대한 양서류이다.
- 윌리엄스는 정치 복음을 연합하려는 영국국교와 청교도등의 종합주의, 개변주의를 배격했다.
4) 이원론의 장점과 결점
- 이원론은 기독교인을 반율법주의로 인도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에 빠지게 한다.
- 이원론은 일시성 또는 유한성을 죄와 긴밀하게 괸련시킴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매우 가깝게 접근시켰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6장.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1) 신학적 신념
- 이들의 기독론은 종합론자나 이원론자와 비슷하다. 그리스도가 새 율법을 주신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은 인류의 촤선의 정신적 원천을 표징하는 분이라는 것 보다도 인간이 만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죄관은 이원론자에 더 가깝다. 개변론자(Conversionist)가 이원론자로부터 구별되는 요점은 그들이 이원론자보다도 문화에 대한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적극적, 희망적)로 첫번째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속량에 너무나 치중하기때문에 창조는 속량의 위대한 행위의 일종의 서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둘째로 창조때의 선에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된다. 그러나 그는 그 타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며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로부터 구별하는데 극히 날카롭다. 그의 문화는 부패를 향한 질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부패된 질서이다. 이것은 존재의 나쁜면이 아니라 전도로서의 악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문제는 개변의 문제이지 새창조로 대치할 문제는 아니다.
셋째로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작용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이다.
“배타적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교회 혹은 기독교 문화의 발흥과 이교문명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자연과 정신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종합론자에게서 역사란 영혼이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교제를 율법, 이성, 복음 그리고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원론자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신앙과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완성될 때의 중간기간인 것이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 있어서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2) 제4복음서의 개변주의적 동기
- 요한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창조와 그 말씀이 육신을 이룰데 대한 그의 신념에서 물질계나 정신계를 막론하고 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정적 태도를 확신했다.
- 세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피조물 전체, 특히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어둠속에 거하는 악한 일을 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그런 인간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된다.
- 요한은 개변주의자들의 동기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그룹의 분리주의를 결합시켰다.
3) 어거스틴과 문화의 개변
- 개변주의자들은 배타적 기독교의 반문화주의에 대항하며 동시에 문화적 기독교의 타협적 태도에 대항해야 했다.
- 어거스틴은 그가 훈련받고 가르쳤던 도덕위에 은혜의 경험의 결과에 따라서 가치 변이 또는 방향 재지정을 꾀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이다. 그 뜻은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방향을 전환시키고 다시 생기를 불어 넣으며 거듭나게 한다는데 있다.
- 칼빈에게 있어서 복음이 현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게 하려는 의도는 루터보다 강하다. “인간은 각자의 직업활동에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그이 보다 역동적인 직업관, 국가는 다만 악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다는 소극적인 직책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그의 국가관,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 타락의 폐허 가운데서도 여전히 빛나는 인간성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견해, 육체의 부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그의 교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과 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어서 인류의 본성과 문화를 변혁시켜 마음속에 기록된 뮬법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로 될게 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게 했다.
4) 모리스의 견해
-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 안에 나타난 완전주의의 주요 대표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생활의 변혁자이다.
- 에드워즈는 창조, 죄, 칭의에 대한 민감하고 심오한 관점과 천년왕국적인 희망과 회개의 방법에 대한 그의 이해등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그 문화의 갱신자라는 사상의 운동을 수립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 모리스는 요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비사회적인 기독교인, 비기독교적인 사회주의자 모두와 충돌했다.
7장. 하나의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
1) 결정적인 결론
제한된, 적은 믿음을 받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최후 단언을 내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찬탈행위가 될것이다.
- 이 결론은 이론적인 통찰이나 전망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찰에서 행동으로, 통찰에서 결단으로 이동함으로써 꾀해지고 획득되는 것이다.
2) 신앙의 상대주의
결론들은 개인의 부분적이고 분완전하며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에 상대적이다.
해결책과 결단은 다 상대적이다.
우리의 추론과 결단이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가치의 상대성
- 우리 개인들, 사물들, 운동들의 상대적 가치를 다룰 때, 이 모든 실재가 그들의 상호관계에서 여러 가지 가치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사회적 실존주의
- 결단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색적인 탐구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라 자기에게 참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순간에서 행동하는 책임적 주체로서 자유롭게 내려야할 결단인 것이다.
- 우리는 역사와 사색에서 뛰어나와 행동으로 얾겨가야 한다. 결단한다는 것은 개인적 책임 아래서, 우리에게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신앙의 열정으로써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결단에서 우리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 구러면서도 이지적인 것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
4) 의존적 자유
- 우리에게는 믿음안에서 선택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신앙은 초월적 원인의 현존안에 있는 자아들의 공동체 내에만 실재한다.
“믿음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그룹 또는 한 역사적 시간이 교회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부분적, 상대적인 일을 하고 또 거기에 의존하는 신앙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가 교회의 머리실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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