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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선교 : 말씀, 행위, 새로운 존재


선교의 두가지 역할 : 선포(proclaiming)와 추진(propelling)

'개인'을 구원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의 문제들을 추정해 나가는 방식과 성경을 인간과 우주 역사의 유일한 해석이라고 보는 것을 시작점으로 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개인의 삼의 의미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방식이 있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가운데서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이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선교의 추진적 역할은, 사건들을 그것의 진정한 종말을 향하여 가도록 압박한다.

- 중국이나 인도의 청년들이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선 이유, 일잔 한번 과거의 존재론적 틀이 깨지고 나면 결코 다시 복구될수 없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가차없이 추진해 가고 있다. 


선교에서 행함과 복음선포의 연계성 문제

현재 복음전도, 곧 교회의 선언적 기능의 우위를 강조하는 사람들과 불의, 편견, 억압에 대항하는 행동, 곧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에 최우선을 두려는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싸움이 존재한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치유행위에 대한 설명을 통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단순 명료한 말씀으로 진술되어야 했다. 

치유만을 강조하고 복음전파가 없는 경우 vs 치유가 없는 복음전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가지는 선교적 의미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천국의 비밀을 실어 전하도록 선택된 공동체를 준비하셨는데 바로 이 공동체, 교회가 그분이 남긴 유산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곧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대변하도록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에수님과 함께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고, 자신의 삶 속에 대항에 대한 대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에수님의 오심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것은 첫째, 하나님 나라가 더이상 형식적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 새롭다는 것은 우리의 교회속에 있는 성령의 은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잘못된 이해

선교는 우리 자신이 하는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이다.


선교는 성령안에서 천국의 임재를 미리 맛보는 데서 시작한다. 

1. 말씀과 행위, 복음전파와 활동 이 두가지를 서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말씀이 행위를 설명하고, 행위는 말씀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복음전도의 주된 임무에서 이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분명히 간주되는 특정한 계획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할 수는 없다. 

4. 이런 근본적인 진리가 잘못 이해되어서 만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사는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삶 가운데서 책임감을 가지고 환여하는 것을 맏는다면 그것은 재난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5. 정의와 평화라는 거대한 문제와 연관된 교회의 주요 역할은 격식을 차린 선언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6. 교회 존재의 중심적인 실재, 즉 복음의 중심적인 진리들, 다시 말해서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고, 이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항상 있다. 


12장. 상황화 :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

복음 전달과 상황의 문제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예수님의 모습


타문화 선교와 상황화(contextualization) 논쟁

기독교의 메시지를 기독교의 영향권 밖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로 옮기려 할 때, 바로 상황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식민주의 시대가 남긴 감정상의 앙금


복음은 문화라는 옷을 입고 전해진다. 

장소와 문화에 상관없이 기독교적인 복종이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선교사의 역할(앨렌) : 거기에는 반드시 성경과 성례전 그리고 사도적 사명이 구비된 회중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선교사는 자신의 일을 다 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새로 생긴 교회는 성장해 나가면서 복음을 자신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배워 나가야 한다."


복음은 공동체 가운데서 올바른 상황화의 길을 간다. 

말씀을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세례와 성례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억압받는 상황과 여러 가지 상황 신학

-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인도 댈리트 신학 : 이들은 성경을 탄합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핵심은 투쟁이 된다. 


올바른 상황화는 먼저 하나님을 주목한다.

올바른 상황화는, 복음이 정당한 우월성을 가지며 모든 문화에 침투할 수 있고 각각의 문화 안에서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복음은 진정으로 지역적인 동시에 에큐메니컬해야 한다. 


인간을 상황의 중심에 두는 접근법의 문제점

첫째, 나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복음은 자체가 독립적인 힘을 지니며, 복음 전도자의 손에 놀아나는 도구는 결코 아니다. 

둘째, 어떤 시대 상황에 대답을 주는것만이 목적이라면 복음은 어떤 프로그램의 들러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이 진정으로 실감나게 살아 역사할 때 이런 일을 목격하는 당사자는 일을 성취하는 주권이 이제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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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의 실마리이신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히브리인의 역사이해의 독특한 점은 역사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헬라인의 사고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왼전성의 핵심은 불변성이고 완전성은 인간 역사의 변화들로부터는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5)에서 '가까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보다는 공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 곧 그분의 왕권이 인간 예수 안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눅 17:21, 마 12:28)

2) 그러나 이런 임재는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다. 

3) 이런 결과로 감추어진 임재는 위기와 투쟁을 유발시킨다. 

4)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의 열쇠는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분명히 드러난 것의 차이이다. 

5)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밖으로 분명 드러나는 영광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사이의 간격의 의미는 모든 나라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선한 파수꾼으로서의 경계와 준비태세를 요구하는 긴박감과 아버지 외에는 예수님조차도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리워진 것이 곧 벗겨질 것이라는 말씀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놓치는 것이다. 

7) 초대교회, 이 시기의 특징은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처형이었다. 부활도 십자가 사건만큼이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으므로 천국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8) 이렇게 천국이 감추어진 것은 열방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9) 교회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을 추구하려는 유혹과 심판을 부정하고 편안히 머무르려는 게으음의 유혹이다. 그리기에 우리에게는 인내와 희망이 동시에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의미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등성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산과 계곡, 호수와 숲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본 주님의 날은 단 하루처럼 보였지만 그날은 새로운 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천국의 권세와 구시대의 권세가 나란히 역사하는 때이다. 이것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신앙을 갖도록 초청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1) 그리스도는 단 한번에 모든 정사와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2)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이제는 그의 모든 대적이 순복할 때까지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하신다. 

3)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이고 그의 통치와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현대의 여러가지 역사 이해

18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사회는 진보가 역사의 의미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보의 신념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부유한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후에 받을 영혼의 개인적 축복만을 바라보는 사유화된 종말론(privatized eschatology)으로 빠져 들었고 이는 공적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감소시켰다. 

죽음은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 각 사람을 역사로부터 떼내어 버린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사상 의미있는 행동이란 오직 어떤 미래의 목표점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계획도 인간의 삶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적일 수 있다. 동시에 죽음의 이면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을 꿈꾸지 않으면서 지금 가능한 상대적인 선을 결연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공적인 삶 가운데서의 우리의 행위들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면 천국을 위한 행동화된 기도들(acted prayers for the kingdom)이다. 

역사의 목표점으로 약속 받은 것,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만들어 내는 사적인 세계과 공적인 세계의 이분법을 치유하는 것이다. 


10. 선교의 논리

선교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다. 


선교는 기쁨의 폭발이다.


복음 선포는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성육신 하신 주님도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역사를 오만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어떠한 주장도 단념해야 한다. 주님이 가신 길, 곧 고난받는 증인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교회는 오만하게 역사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계속되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궁극적 목표점을 대면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말해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교회는 역사의 여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적인 모델에 의해서 이해해야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의 대행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명의 장소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야기 곧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비어 예수님의 사역과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되풀이하고 재현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모습을 명확히 나타낸다. 


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점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 성장, 선교의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숫자와 어떤 목표의 달성(??)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제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롬 15:23)라고 말했다. 이는 이 지방의 모든 사람을 개종시킨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복음을 전파했고 후에 복음을 믿으면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남겼다. 그들의 중요성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그분의 선교 사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교회와 선교의 일

예수님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위기를 촉발했던 것 같이, 교회의 도래가 세상에 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열방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이 완전히 끝날때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수 없다. 


선교 논리의 중심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 즉 개개의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측량 못할 지혜와 은총의 깊이가 계시될 종말론적 사건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지평선은 우리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있지 않고 그분이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사건 속에 있는 것이다. 


선교의 일은 신앙의 시험대이다.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게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리고 선교의 중심부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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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어거스틴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오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외에 다란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레야 뗄 수 없게끔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분은 그 비밀을 공동체에 전하시고 세상의 삶 가운데 그 비밀을 전하도록 그들을 세상에 다시 보내시고 새로운 화녕이 올 때마다. 항상 그 상황에 비추어서 그 비밀을 다시 전용하고 해속하도록 하신 것이 바로 문제의 요체가 된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속에서 이해하기 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고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보는 방식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체이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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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안에 나타난 계시

- 종교의 두가지 종류

1)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고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종교 : 기독교,유대교, 이슬람교

2) 과거의 스승들을 숭배하나 과거 특정한 사건과 연관성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종교 : 힌두교, 불교


2차세계대전이후 캠브리지대학의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안에서 그리고 역사의 연대기적인 범위와 동시대적인 범위 양쪽 모두에 걸쳐 살아 역사하는 작인"이라고 말했다. 15년후 제임스 바(James Barr)가 '역사와 계시의 개념'이라는 가연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계몽시대 이후로 대부분의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전제는 하나님은 역사의 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동하신다는 주장에 대한 지적인 난관들 

1) 우리가 막연히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의 지배에서 생겨난다. 

2)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역사 가운데 계시하신다고 우리가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하나님을 계시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 두가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신의 섭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믿음안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3)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타당해 보이고 또 아무리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전통이 가지는 사회적 성격

1) 계시란 이전에 몰랐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의 기록 자체도 하나님이 이런 성경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상태로도 알려질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2) 사건과 언어의 구분에 대한 공격, 제임스 바는 우리가 구약에서 계시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언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사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3) 그것은 단지 개인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나에게 책임이 있다. 


역사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연속성

1) 예수님의 지상사역이라는 특수한 사건 속에는 결정적이며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교회에 주신 약속) 

3) 이 선물은 교회의 사적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4) 이 증거는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들과 모순된 형태를 지닐 것이다. 

5)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란 장래일을 알리시는 것이 될 것이다. 

6) 성령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7) 성령의 이런 활동 범위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광범위하다. 


7.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작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주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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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권위, 자율, 전통

계몽 이전이 사회에서는 이단이라 믿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원하는 결정을 내린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기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단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 

자전거를 타는 지식이 당신속에 내면화 되어서 당신의 지식이 일부가 되기까지 당신은 자전거를 타는 전통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와같은 것은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이클 폴래니가 말했듯이 "과학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 : 씨름해야할 문제가 있으며 식별해야 하는 사물의 구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직관,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감줘진 상태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질서 정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직관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개인적 판단으로 인한 위험 감수없이는 적용 가능한 공식적인 규칙으로 정리될 수 없다. 

인턴이 전문의의 가르침을 따르듯이 전통의 권위에 오랫동안 순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아직 미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독창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대연에 서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 이론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따라서 먼저 정당화(justification)는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믿고난 다음에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에 또한 정당화되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 주요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 : 프톨레미적인 패러다임에서 코페르느쿠스적인 패러다임으로, 뉴턴의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의 변화. 

- 과학은 전통에 대한 주의 깊은 보호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전통에 대한 과격한 혁신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과학은 정체될 것이다. 


과학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인간의 배움과 말과 글에 관한 것이다. 기독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 즉 창조주께서 목적으로 계시하시고 성취하시는 행위에 대한 증거다. 


5. 이성, 계시, 경험

성경-전통-이성의 관계

과학에서 전통이 가지는 역할

첫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논거를 할 수 없다. 

둘째, 앞선 선배들의 경험, 발견, 논쟁 그리고 의견의 불일치 같은 것을 조사하면서 논거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운다. 

셋째, 합리성의 전통의 발달은 그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은 불확정성(contingency), 특수성(particularity) 그리고 완전한 우연성(sheer happenness) 같은 모든 요소를 가지고 바로 그 사회속에 유형화되어 있다. 

넷째, 이런 식으로 합리적 능력의 사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상대주의로 귀착된다는 반대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문화속에서 우리에게 진리같이 보이는 진리말고 모든것에 적용되는 진리란 없는 것인가?

첫째, 모든 합리적 담론의 전통은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둘째, 합리성의 전통은 언어로 유형화 된다. 

- 언어를 배울때 현재 자신이 쓰는 언어를 가지고 거기에 맞는 말들을 찾는 식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똑같은 종류의 사물을 의미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이 두가지 언어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두 문화에서 그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들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모든 논거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유형되되기 때문에 진리를 안다는 어떤 주장도 지지될 수 없다고 상대주의자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과학자와 선지자 : 케플러는 "나는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내었다."고 말한 반면 선지자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케플러가 천체의 움직임에서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 것이나 모세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드러나 보여진 것이나 모두 논법의 전통에서 새로운 출발점이다. 

- 마틴 부버의 "나와 너"(I and Thou), 자율적인 이성의 세계로 이성이 주관하고 있으며 나는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세계, 여기서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다. 


믿는 자는 실재가 합리적이라는 믿음, 즉 일관성 있는 목적이 경험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그런 믿음을 의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의 진실정을 증명하려고 투쟁한다. 이런 노력은 항상 합리적인 노력이고, 외견상 불합리한 사건들 속에서 최초의 계시에서 주어진 유형을 통해 합리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계속 진행되는 새로운 경험에 대처해가는 투쟁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형성되고 재충당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경의 모델을 나의 경험을 이해하는 모델로 삼고, 성경의 이야기를 나의 삶의 이야기를 그리는 단서로 삼으면서 성경적 전통 안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러한 타당성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자명한 것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명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에게 자명한 것이 나에게 자명하지 않다. 그러기에 이 두 구조사이의 계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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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


"기독교 이야기(Christian story)는 우리가 어떤 것을 그냥 바라보게 하는(look at)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look through) 안경(set of lenses)을 제공해 주는 것" p.10


1. 다원주의 문화속의 교의와 의문

기독교 세계관을 공격하는 인본주의적 전통 p.16

1. 합리주의적 전통 : 그리스와 스토아 학파의 전거(source)에 의지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만을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인정

2. 영적인 전통 : (유럽과 인도) 인간의 영혼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존재와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

- 이 둘의 공총점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궁극적인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기위해 저술된 책들 가운데 특히 18세기 동안의 특징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가정들을 상당히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이런 가정들 안에 수용될 수 있다고 변호한 것이다. p.19


교의(dogma)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교회사 속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 세계에서는 교의에 서슴지 않고 의문을 가하는 것이 지적인 성숙과 능력을 나타내는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권위적으로 부여되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p.21


다원주의의 원칙은 우리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p.24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 : 특정한 사회 안에서 더 타당하게 간주되는 신념이나 실천이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Peter Berger)


소경과 코끼리 이야기 : 우리는 소경일 뿐이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켜보는 자가 있는가? 


복음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1. 교의를 거부하는 부분적인 원인은 오랫동안 강압이나 정치적 세력 그리고 자유를 부정하는 것과 얽혀져 왔다.

2. 우리는 복음을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 안에서 상황에 맞게 동화시켜 가면서 변론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보다 인간의 경험을 훨씬 더 전체적으로 잘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새로운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것이 모든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4. 우리가 신앙안에서 수용하도록 주어진 것은 일련의 영원한 명제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이며,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종말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2. 다원주의의 근원

-문화적 다원주의 : 한 사회안에 있는 여러 당양한 문화들과 생활방식들을 환영하고 이런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고 믿는 태도이다.(문화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종교적 다원주의 :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믿음에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00년간의 자연과학에서의 엄청난 성공은 목적에 관한 물음은 제쳐두고 발생하는 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가치와 사실의 구분)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하늘 아래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성하는 사실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성실한 태도이다. 


3. 아는 것과 믿는 것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만,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 않다. 

뉴턴이전의 17세기까지만 해도 신학도 천문학이나 역사과목처럼 인간지식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다. 망원경의 발명이후 사람들은 사물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아주 똑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300년의 유럽의 역사가운데 체계적인 회의론이 등장하였고 진리로 생각되던 모든 것은 새롭게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의심할 수 없는 확도한 토대를 찾았고 그 출발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에서 찾았다. 그런데 첫째 이 말 자체에 굉장한 믿음의 행위가 들어 있다. 둘째 이 말을 의심할수 없는 증거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각하는 자아가 외부의 어떤 실재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좀더 철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정확한 단어의 사용)

- 외과의사의 내시경 사용(처음에는 내시경을 의식하지만 이후에 이것의 사용이 능숙해지면 신체내부의 상태에 집중하게 됨, 새로운 언어(상황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용)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단어, 언어, 관념 등)

문화란 함께 사용하는 언어와 공통의 이야기를 통해 가능해지는 모든 형태의 사회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배열하는 전체적인 양식이다. 

사실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세계는 어떤 목적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과 인과성이라는 두가지 요인의 작용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스스로 만들어져서 스스로 존재하는 기계란 인간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아무거나 다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들에게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하기 힘든 생각이 존경받는 과학자들에의해 널리 유포되었고, 아직도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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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영웅족보와 창조론 연구를 보면서


이 주제는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가끔 진지하게 고민해보던 주제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아벨의 죽음 이후 쫓겨난 가인이 아내를 맞이하는 부분, 노아의 홍수와 족보의 나이에 대한 계산 등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 고민해본 주제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어셔 주교는 구약의 맛소라 사본의 족보를 근거로 천지창조는 주전 4004, 노아의 홍수는 주전 2348년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이에 반해 사마리아 오경은 주전 2998, 요세푸스는 주전 3146, 70인역(Septuagint)에서는 주전 3246년을 각각 노아 홍수의 연대로 잡고 있다. 그런데 미국창조과학연구소(ICR)에서 알스마 박사가 탄소연대측정실험을 통해 나무의 나이테분석을 한 결과를 보면 주전 12000년으로 노아의 홍수를 추정한다. 이 결과는 노아의 홍수가 제4기 홍적세 최후의 빙하 홍수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차이와 간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먼저 성경의 족보기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눅 3, 1, 5, 10-12, 대상 1-10장 등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이를 기계적으로 기록하기 보다는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한 세대 혹은 여러 세대들을 생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42대로 잡고 있지만 누가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총 75대를 기록하며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도 55대로 기록하고 있다.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했던 마태는 예수님의 왕통을 강조하기 위해서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다윗으로부터 솔로몬, 르호보암을 거쳐 남쪽 유대의 여러 왕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누가는 다윗까지는 동일하지만 다윗 이후는 구약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영웅족보의 관점에서 보면 족보 기록이 매우 선택적이며, 이 결과로 성경 기자에 따라 족보의 대수가 달라지게 되고, 성경 기자들뿐 아니라 성경의 사본들마다 족보도 제각각 다르며, 족보에서 동일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발음을 조금씩 다르게 표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족보는 필요한 사람들, 특히 기록자가 생각할 때 의미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만을 선별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질학적 연구와 비교해 볼 때 신생대 제3기에는 중생대의 온난한 기후가 지속되다가 제3기 후반부터 추워지기 시작하여 제4기에는 4번의 빙하기와 3번의 간빙기가 있었다고 본다. 빙하기와 간빙기의 해수면은 약 100-130m 정도의 차이를 나타냈으며, 홍적세 후기에 대규모의 전 지구적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이 홍적세 말기가 12000년임으로 노아의 홍수의 연대(4400)과의 불일치가 있는데 이것을 영웅족보로 해석하면 큰 무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선아담인류론(Pre-Adamites Hypothesis)도 해결된다. 아담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다는 이 이론은 최근 영국의 복음주의자 죤 스토트가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 등의 현생 인류가 3-10만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되기에 이 객관적인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하던지 아니면 노아의 홍수를 부정해야 하는 난처한 지점에 위치하기에 이런 주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생인류들의 유골에 대한 연대측정을 인정하면서 선아담인류론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의 족보가 영웅족보로 이루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또한 영웅족보설은 성경의 몇몇 난제들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많은 성경의 족보가 성경기자의 목적에 따라 선택적이라는 사실은 대수 기록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대에 속한 사람들이라도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생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과 셋만을 낳은 것이 아니다. 비록 성경은 이 세 사람만을 언급하지만 창 5:4을 보면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이외에 많은 아들과 딸들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창 4:1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아담의 장남과 차남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성경에서 아담이 자녀를 생산한 나이를 기록한 것은 셋을 낳았을 때 130세뿐이다.( 5:3)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를 몇 살의 성인으로 만들었을까? 만약 70세의 어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 60년이 지난 것이고, 70세에 태어나서 130년이 지난 시점으로 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맞다면 셋을 낳기까지 130년 동안 아담과 하와는 60명 이상의 자녀들을 생산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셋을 낳을 때 이미 손자나 증손자를 둔 적어도 500명 이상의 대가족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담에게 가인 이전에 이미 다른 자녀들이 많았다고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날 때 두려워했던( 4:14) 이유나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구했을까( 4:17) 등 성경의 난제들을 설명할 수 있다

- 프라이드를 탄 돈키호테 중에서(양승훈, S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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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설명할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고는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p.151) 


본 책은 이어령 교수가 하나님을 영접하기까지의 여정을 개인이 기록한 글입니다. 이책의 내용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지성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분의 은사대로 문학적인 필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기독교 서적, 신학서적, 간증집등을 읽어 보았지만 이런 문학적인 아름다운 언어로도 생명에 이르는 길을 기록할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닙니다. 이어령 교수의 경우 성서의 내용을 가지고 불신자의 입장에서 신학자들과 논쟁을 할 정도로 이미 성경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지금 이런 통찰을 가지고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기록할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울을 바울되게 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것처럼 이어령 교수를 통해서 불신자들중에 구도자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길을 궁금히 여기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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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장은 내용의 정확성 여부에 관심이 있지만, 진리 주장은 내용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있습니다. 진리주장은 규범적이지만 사실주장은 기술적입니다. 사실주장은 귀납적이지만 진리주장은 선언적이요 연역적입니다. 사실주장은 윤리와 무관하지만 진리주장은 윤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일 뿐이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바르지 않은 사람, 때로는 비윤리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지와 그 가운데 모든 생명체들을 누가, 무엇을 위해 창조했는가 하는 것은 진리 주장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확하게 언제,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우주와 생명체를 창조했는가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요, 사실 주장의 대상입니다. 우주와 지구의 연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엄격한 과학적 사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주와 지구가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화론과 타협한 것이고, 진화론은 무신론이고, 무신론은 비성경적이며 비질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주장과 진리주장을 잘못 관련지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원 논쟁의 폭력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주장에 대해서는 성실한 연구자세가 필요하고, 진리주장에 대해서는 겸손한 경청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관섬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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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격변창조론(양승훈, SFC)

 

이책은 현재 캐나다 TWU(Trinity Western University)에서 기독교 세계관 과정(VIEW)을 가르치고 있는 양승훈 교수의 창조론 대강좌 시리즈(전 8권)중 제1권에 해당하는 책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가 단순히 믿음의 영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과학적으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이 최근에 창조과학자들을 통해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대홍수설(노아 홍수설)"이나 "동일과정설(국부 홍수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양승훈 교수는 다중격변론을 통해서 설명해내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하루를 24시간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창조도 이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의 역사가 6000년이므로 이 지구상의 모든 지구과학이나 생물학적인 모든 자료들을 그 6000년의 역사안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짧은 창조로, 또한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6000여년으로 해석하는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저자는 수많은 지구과학적 자료(화석, 지사학, 지층퇴적모델)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특히 소행성의 충돌과 관련해서 K-T 경계멸종과 빙하기의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창조과학에 대해서 이전부터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이책을 읽으면서 많은부분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해결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다음 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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