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권위, 자율, 전통
계몽 이전이 사회에서는 이단이라 믿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원하는 결정을 내린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기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단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
자전거를 타는 지식이 당신속에 내면화 되어서 당신의 지식이 일부가 되기까지 당신은 자전거를 타는 전통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와같은 것은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이클 폴래니가 말했듯이 "과학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 : 씨름해야할 문제가 있으며 식별해야 하는 사물의 구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직관,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감줘진 상태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질서 정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직관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개인적 판단으로 인한 위험 감수없이는 적용 가능한 공식적인 규칙으로 정리될 수 없다.
인턴이 전문의의 가르침을 따르듯이 전통의 권위에 오랫동안 순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아직 미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독창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대연에 서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 이론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따라서 먼저 정당화(justification)는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믿고난 다음에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에 또한 정당화되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 주요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 : 프톨레미적인 패러다임에서 코페르느쿠스적인 패러다임으로, 뉴턴의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의 변화.
- 과학은 전통에 대한 주의 깊은 보호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전통에 대한 과격한 혁신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과학은 정체될 것이다.
과학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인간의 배움과 말과 글에 관한 것이다. 기독 공동체의 경우 전통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 즉 창조주께서 목적으로 계시하시고 성취하시는 행위에 대한 증거다.
5. 이성, 계시, 경험
성경-전통-이성의 관계
과학에서 전통이 가지는 역할
첫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논거를 할 수 없다.
둘째, 앞선 선배들의 경험, 발견, 논쟁 그리고 의견의 불일치 같은 것을 조사하면서 논거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운다.
셋째, 합리성의 전통의 발달은 그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은 불확정성(contingency), 특수성(particularity) 그리고 완전한 우연성(sheer happenness) 같은 모든 요소를 가지고 바로 그 사회속에 유형화되어 있다.
넷째, 이런 식으로 합리적 능력의 사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상대주의로 귀착된다는 반대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문화속에서 우리에게 진리같이 보이는 진리말고 모든것에 적용되는 진리란 없는 것인가?
첫째, 모든 합리적 담론의 전통은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둘째, 합리성의 전통은 언어로 유형화 된다.
- 언어를 배울때 현재 자신이 쓰는 언어를 가지고 거기에 맞는 말들을 찾는 식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똑같은 종류의 사물을 의미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이 두가지 언어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두 문화에서 그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들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모든 논거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유형되되기 때문에 진리를 안다는 어떤 주장도 지지될 수 없다고 상대주의자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과학자와 선지자 : 케플러는 "나는 그것을 빛 가운데 드러내었다."고 말한 반면 선지자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케플러가 천체의 움직임에서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 것이나 모세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드러나 보여진 것이나 모두 논법의 전통에서 새로운 출발점이다.
- 마틴 부버의 "나와 너"(I and Thou), 자율적인 이성의 세계로 이성이 주관하고 있으며 나는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세계, 여기서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다.
믿는 자는 실재가 합리적이라는 믿음, 즉 일관성 있는 목적이 경험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그런 믿음을 의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의 진실정을 증명하려고 투쟁한다. 이런 노력은 항상 합리적인 노력이고, 외견상 불합리한 사건들 속에서 최초의 계시에서 주어진 유형을 통해 합리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계속 진행되는 새로운 경험에 대처해가는 투쟁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형성되고 재충당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경의 모델을 나의 경험을 이해하는 모델로 삼고, 성경의 이야기를 나의 삶의 이야기를 그리는 단서로 삼으면서 성경적 전통 안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러한 타당성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자명한 것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명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에게 자명한 것이 나에게 자명하지 않다. 그러기에 이 두 구조사이의 계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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