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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안에 나타난 계시

- 종교의 두가지 종류

1)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고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종교 : 기독교,유대교, 이슬람교

2) 과거의 스승들을 숭배하나 과거 특정한 사건과 연관성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종교 : 힌두교, 불교


2차세계대전이후 캠브리지대학의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안에서 그리고 역사의 연대기적인 범위와 동시대적인 범위 양쪽 모두에 걸쳐 살아 역사하는 작인"이라고 말했다. 15년후 제임스 바(James Barr)가 '역사와 계시의 개념'이라는 가연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계몽시대 이후로 대부분의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전제는 하나님은 역사의 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동하신다는 주장에 대한 지적인 난관들 

1) 우리가 막연히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의 지배에서 생겨난다. 

2)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역사 가운데 계시하신다고 우리가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하나님을 계시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 두가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신의 섭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믿음안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3)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타당해 보이고 또 아무리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전통이 가지는 사회적 성격

1) 계시란 이전에 몰랐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의 기록 자체도 하나님이 이런 성경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상태로도 알려질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2) 사건과 언어의 구분에 대한 공격, 제임스 바는 우리가 구약에서 계시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언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사건의 형태로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3) 그것은 단지 개인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나에게 책임이 있다. 


역사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연속성

1) 예수님의 지상사역이라는 특수한 사건 속에는 결정적이며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교회에 주신 약속) 

3) 이 선물은 교회의 사적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4) 이 증거는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들과 모순된 형태를 지닐 것이다. 

5)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란 장래일을 알리시는 것이 될 것이다. 

6) 성령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7) 성령의 이런 활동 범위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광범위하다. 


7.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서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작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주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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