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소명 이후 시대에서의 소명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에 그토록 중심적인, 기독교의 소명교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누군가에게 부름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 개인적 소명
고전 7:17절에 대한 이해 - 루터는 클레시스를 정박지라고 번역하고, 칼빈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세상적인 소명이란 개념을 발전시켰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의 정황을 떠나고 있었으며, 마치 그런 변화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대해 바울의 논점은, 비록 그러한 삶의 정황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채택되고 그 부르심에 의해 변화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오고 그 부르심은 직업, 결혼 여부, 사회적 지위 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행히 종교개혁가들은 부르심을 삶의 위치로 축소시킨 나머지, 영적인 이동성을 억제하고 사람들을 타문화권 선교 사역으로 보내는 것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황이 부르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부르심에 의해 신성해지긴 하지만, 부르심은 우리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이다.
고압적인 종교개혁가들
종교개혁가들이 소명의 신학을 발전시킨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두번째는 재침례파를 대항해 싸웠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평범한 일상사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 소명의 세속화
청교도들은 일반소명(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효력을 발휘한 소명)과 특별 소명(우리가 하나님의 소환에 직접 응답하여 섬김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는 소명)을 구분했다.
루터는 고전 7:17절의 해석을 통해 소명을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확장시켰으며 특히 삶의 정황의 견지에서 소명을 부각시켜 신분과 직분과 책무를 융합시켰다.
각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유효 소명이 있다.
둘째, 섭리적인 소명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 초자연 적인 부르심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셋째, 은사적 소명이 있다. 성부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라는 문화 명령을 주신다. 성자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며 대위임령으로 소환하신다. 성령을 어떤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키신다.(클라우스 보크무엘)
넷째, 마음속의 소명이 있다.
그레그 옥덴 소명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차원 1) 우리는 내적으로 어떤 당위성을 경험한다. 2)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이다. 3) 그것은 굉장한 만족과 기쁨을 선사한다.
2. 기독교적 소명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 유효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카라는 불러낸다라는 의미라 어떤 주권적인 존재가 이름을 불러 소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약 성경에서 부르심의 언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소환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을 구원으로의 부르심,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섬김으로의 부르심등이다. 부르심의 언어가 개개인에게 사용될 때에는 그 구원 목적과 연관되지 지도자의 자격을 확인하고 신임장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칼레오(부르다, 앞으로 소환하다)와 클레시스(부르심, 소명)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가리킬 때, 즉 회개하도록, 예수님을 향해 방향을 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초청하시는 것을 말할때 부르심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자시요, 그리스도인은 부름받은 자들이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부르심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2)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사는 것-거룩한 공동체적 삶, 3)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우리 삶의 정황의 중개, 4)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체험
소속, 존재, 행위
삼중적 부르심.
첫째 하나님께 속하라(소속)
둘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존재)
셋째, 하나님의 일을 하라(행위)
기독교적 소명과 인간적 소명
3. 인간적 소명
두개의 명령인가, 하나의 명령인가?
창조명령(창조세계)과 대위임령(구원)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인데, 그러한 분리로 인해 삶이 균형을 읽고 파편화되어 버린다. 이보다 더 나은 길은 창조, 구속, 최종적인 완성을 모두 포괄하는 언약의 견지에서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약명령
언약 아래 산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를 창조 명령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언약이다. 인간적 소명은 페리코레시스적인 것,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교통하기를 원하시고, 그 교통으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신다.
공동체 건설
사회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부적으로 사회적이며 성적인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이며 생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의무와 운명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웃됨을 표현하는 것, 공동 인간성을 경축하는 것인 바,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언약의 사회적 측면을 깨뜨려 버렸다.
공동창조성
창조 명령이라 불린다. 우리가 창조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묘사하는 또 다른 용어는 섭정자(regents)인데 이는 천상의 왕을 대표하는 지상의 지배자란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차갑고 소원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계에 관여하는 관계 중심적인 청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상호 교통이요 공동체이자 공동 창조성, 즉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적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땅을 인간답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라는 부르심은 상호 교통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은 공동체 건설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은 공동 창조성을 회복시킨다.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의 소명의식은 어떤 면에서 풍성해지는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상호 교통을 경험한다.
둘째 공동체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된다.
셋째, 공동 창조성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끈다.
제5장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존 스토트는 일이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에너지(신체적, 정신적 혹은 둘 다)를 소모하는 행위로서 일꾼에게는 성취감을,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일은 금전적 보상이 있든 없든, 정신적, 정서적 혹은 신체적 에너지, 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소요되는 목적 지향적 활동
1. 일에서의 변화
일의 성격의 변화 : 제품 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반복적인 일에서 중재적인 일로, 종신직에서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일로
생존 문화에서 정체성 문화로
일터에서의 변화
일터는 세계화 되었다.
장소의 근본적인 변화(재택근무, 모바일 환경), 도시화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
구조적 실업 문제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이슈들
일중에 하나님 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들을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2. 일의 어제와 오늘
고대 세계
일은 저주요 순전한 악이었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운이었다. 일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고 관조적인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
헬라인들의 견해는 기독교화된 형태로 중세교회로 유입되었다. 영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상하 계층적인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현대 세계와 포스트모던 세계
산업화되기 이전의 삶은 일과 가정과 교회 간에 통합이 이루어진 삶이었으나 산업혁명은 분열을 초래했다. 산업혁명을 일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돈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일은 분업화되고, 단순화되고, 틀에 박히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손수 하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묵상함으로써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프로이트는 일을 비극적인 필연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일
일꾼이신 하나님
성경은 일하시는 하나님, 즉 말씀하시고, 모양을 꾸미시고, 고안하시고, 만드시고, 조각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축복이자 저주인 인간의 일
일없는 낙원을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및 계획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셈이다. 일은 좋은 것인데 창조세계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봄으로써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 일에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온다.
모든 종류의 일
성경에서는 육체 노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육체노동보다 격상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과 함께 하지 않는 일
일꾼이신 예수님
신약에서는 일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이유는 첫째, 신약을 구약성경을 전제로하기 때문이고 둘째, 사도들의 우선과제는 복음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일
신자의 일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인과 종(퀴리오스와 둘로스)
종말론적 관점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상급이 유업으로 주어질 뿐더러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형태를 만드시고 제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신다. 사랑하는 분이신 하나님은 관계적인 일을 하시고, 존엄성과 건강의 의미를 부여하신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구속의 일, 고치는 일, 하나로 묶는 일, 구하는 일을 하신다.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부의 일 : 청지기직
성자의 일 : 하나님 나라의 사역
성령의 일 : 은사와 능력 부여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제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사랑하는 일, 회복시키는 일, 복음사역, 인도하는 일
하나님의 일은 누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아직 신자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 행해지는가? 교회와 세상에서 후자에는 물리적인 창조세계, 가정, 사회, 공동체, 정치, 문화, 교육, 재정 분야, 우리가 제작하고 고치는 모든 세계들이 포함된다.
왜 우리는 일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인 완성점에 도달하게 하시는 동안, 우리를 동역자로 초청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5. 일은 좋은 것이다.
일의 외향적인 가치 : 생산하는 것으로 인해 일은 선하다.
일의 내재적인 가치 : 일은 그 자체로 선하다.
세계를 위해 좋은 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복음적인 일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평안과 의미와 용서와 소망을 선사해준다.
우리를 위해 좋은 일
일은 깊은 치료의 매개체이다. 일은 우리에게 좋고, 세계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좋고, 심지어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다.
제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1. 오늘날의 사역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역을 정의할때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설교, 성례집전,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것 등.
현대의 판단 기준
사역이란 아코디언과 같아서 우리가 그 속에 어떤 공기를 불어 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해진다.
1) 장소, 2) 기능, 3) 필요, 4) 호칭, 5) 지명
사역은 "교회를 대신해서 공공연하게 행해진 행위이자 섬기는 은사의 결과로서, 교회내에서 성례의 형태로서 선포되고 명시화되고 경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으로 구체화하는 행위이다."-마이클 롤러
2. 성경에 나타난 사역
사역은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섬김이다. 사역자는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아바드
구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일하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와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있는 용어이다.(야곱이 라반에게 한 봉사)
사랏
두가지 범주로 첫째는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이고 둘째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이다.(요셉이 애굽에서 중요한 죄수들에게 한 봉사)
주님의 종
에베드가 주님의라는 말로 수식이 될때 사역자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사역을 사람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나 교회의 종이 되는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필요가 섬김으로의 부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봉사
사역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봉사를 뜻하는 말로, 본래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라는 뜻이지만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 준비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땅에 종을 두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만족시키지 못하자 하나님이 스스로의 종이 되신 셈이다.
교회는 곧 사역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된 자는 종이다.
초대교회 당시 선택된 공식적인 사역자들과 평범한 신자들의 사역을 서로 구별시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3. 삼위일체적 사역 신학
하나님 안에 사역이 있으며, 하나님은 곧 사역이시다.
세상이 있기전에 사역이 있었는데, 그 사역은 하나님의 존재안에 있었다.(페리코레시스)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사역은 단지 하나님을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
사역이란 그리스도적이다. 즉 성령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라오스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고 이땅에서 하나님의 봉사를 감당하는 것이다.
사역의 특징은 사랑이다.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것은 이세상이 있기도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사랑안에서 사역하던 하나님의 공동적인 삶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사역은 위임된 활동이 아니라 파생적이고 참여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인 활동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이며 "그분안에 있는 우리의 종 된 존재를 구체화시키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우리 가운데 순전한 사랑과 연민으로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사역은 성육신을 통하여 창조 세계를 축복한다.
교회는 세상에 실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역안에서 세상과 관계하는 것이다. 선교의 본질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동감하는 데서 발견된다.
사역은 종말론적이다.
4. 사역하는 지도자들
기능인가 직분인가?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거룩함과 사랑이 지상에 나타나는 이미지인 공동체 안에서 그 형상이 드러난다. 이는 구성원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각자의 기능을 함으로써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지도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정해진 역할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직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위해, 예수님의 머리 되심안에서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봉사를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조력자 들이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한 선
신약 성경 기자들은 선택된 한 명의 공식적인 사역과 일반 신자의 사역을 구별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했다.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은 특별한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한 사람이 사역의 일을 맡게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소환되거나 초청받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내적인 확신이나 체험"(리처드 니버의 사역으로의 소명)
위 내용에 저자는 반대한다.
바울의 부르심에서 회심과 사명 위탁 :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역사를 통틀어 다른 모든 신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 위탁으로서의 브르심은 반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리더십으로 부름받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인 소명을 다루면서 논의한 바 유효한, 섭리적인, 카리스마적인, 마음속의 부르심에 덧붙여서 교회지도자의 경우에는 교회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교회적인 부르심이란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 교회 리더십에 적합한지 여부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은사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성품의 측면이다.
안수
안수라는 관행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이에 대해 루터는 "안수는 교회의 교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수 없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수의 개념 :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또한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만이 내집은 아닙니다. (0) | 2014.01.14 |
---|---|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7-9장) (0) | 2013.09.26 |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1-3장) (0) | 2013.09.24 |
신약의 윤리적 비전중에서 (0) | 2013.09.12 |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17-18장 요약) (0) | 2013.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