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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소명 이후 시대에서의 소명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에 그토록 중심적인, 기독교의 소명교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누군가에게 부름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 개인적 소명

고전 7:17절에 대한 이해 - 루터는 클레시스를 정박지라고 번역하고, 칼빈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세상적인 소명이란 개념을 발전시켰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의 정황을 떠나고 있었으며, 마치 그런 변화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대해 바울의 논점은, 비록 그러한 삶의 정황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채택되고 그 부르심에 의해 변화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오고 그 부르심은 직업, 결혼 여부, 사회적 지위 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행히 종교개혁가들은 부르심을 삶의 위치로 축소시킨 나머지, 영적인 이동성을 억제하고 사람들을 타문화권 선교 사역으로 보내는 것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황이 부르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부르심에 의해 신성해지긴 하지만, 부르심은 우리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이다. 


고압적인 종교개혁가들

종교개혁가들이 소명의 신학을 발전시킨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두번째는 재침례파를 대항해 싸웠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평범한 일상사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 소명의 세속화

청교도들은 일반소명(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효력을 발휘한 소명)과 특별 소명(우리가 하나님의 소환에 직접 응답하여 섬김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는 소명)을 구분했다. 

루터는 고전 7:17절의 해석을 통해 소명을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확장시켰으며 특히 삶의 정황의 견지에서 소명을 부각시켜 신분과 직분과 책무를 융합시켰다. 


각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유효 소명이 있다.

둘째, 섭리적인 소명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 초자연 적인 부르심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셋째, 은사적 소명이 있다. 성부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라는 문화 명령을 주신다. 성자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며 대위임령으로 소환하신다. 성령을 어떤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키신다.(클라우스 보크무엘)

넷째, 마음속의 소명이 있다. 

그레그 옥덴 소명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차원 1) 우리는 내적으로 어떤 당위성을 경험한다. 2)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이다. 3) 그것은 굉장한 만족과 기쁨을 선사한다. 


2. 기독교적 소명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 유효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카라는 불러낸다라는 의미라 어떤 주권적인 존재가 이름을 불러 소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약 성경에서 부르심의 언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소환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을 구원으로의 부르심,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섬김으로의 부르심등이다. 부르심의 언어가 개개인에게 사용될 때에는 그 구원 목적과 연관되지 지도자의 자격을 확인하고 신임장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칼레오(부르다, 앞으로 소환하다)와 클레시스(부르심, 소명)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가리킬 때, 즉 회개하도록, 예수님을 향해 방향을 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초청하시는 것을 말할때 부르심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자시요, 그리스도인은 부름받은 자들이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부르심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2)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사는 것-거룩한 공동체적 삶, 3)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우리 삶의 정황의 중개, 4)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체험


소속, 존재, 행위

삼중적 부르심. 

첫째 하나님께 속하라(소속)

둘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존재)

셋째, 하나님의 일을 하라(행위)


기독교적 소명과 인간적 소명


3. 인간적 소명

두개의 명령인가, 하나의 명령인가?

창조명령(창조세계)과 대위임령(구원)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인데, 그러한 분리로 인해 삶이 균형을 읽고 파편화되어 버린다. 이보다 더 나은 길은 창조, 구속, 최종적인 완성을 모두 포괄하는 언약의 견지에서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약명령

언약 아래 산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를 창조 명령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언약이다. 인간적 소명은 페리코레시스적인 것,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교통하기를 원하시고, 그 교통으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신다. 


공동체 건설

사회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부적으로 사회적이며 성적인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이며 생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의무와 운명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웃됨을 표현하는 것, 공동 인간성을 경축하는 것인 바,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언약의 사회적 측면을 깨뜨려 버렸다. 


공동창조성

창조 명령이라 불린다. 우리가 창조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묘사하는 또 다른 용어는 섭정자(regents)인데 이는 천상의 왕을 대표하는 지상의 지배자란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차갑고 소원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계에 관여하는 관계 중심적인 청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상호 교통이요 공동체이자 공동 창조성, 즉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적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땅을 인간답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라는 부르심은 상호 교통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은 공동체 건설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은 공동 창조성을 회복시킨다.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의 소명의식은 어떤 면에서 풍성해지는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상호 교통을 경험한다. 

둘째 공동체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된다. 

셋째, 공동 창조성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끈다. 



제5장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존 스토트는 일이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에너지(신체적, 정신적 혹은 둘 다)를 소모하는 행위로서 일꾼에게는 성취감을,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일은 금전적 보상이 있든 없든, 정신적, 정서적 혹은 신체적 에너지, 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소요되는 목적 지향적 활동


1. 일에서의 변화

일의 성격의 변화 : 제품 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반복적인 일에서 중재적인 일로, 종신직에서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일로

생존 문화에서 정체성 문화로


일터에서의 변화

일터는 세계화 되었다. 

장소의 근본적인 변화(재택근무, 모바일 환경), 도시화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

구조적 실업 문제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이슈들

일중에 하나님 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들을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2. 일의 어제와 오늘

고대 세계

일은 저주요 순전한 악이었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운이었다. 일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고 관조적인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

헬라인들의 견해는 기독교화된 형태로 중세교회로 유입되었다. 영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상하 계층적인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현대 세계와 포스트모던 세계

산업화되기 이전의 삶은 일과 가정과 교회 간에 통합이 이루어진 삶이었으나 산업혁명은 분열을 초래했다. 산업혁명을 일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돈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일은 분업화되고, 단순화되고, 틀에 박히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손수 하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묵상함으로써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프로이트는 일을 비극적인 필연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일

일꾼이신 하나님

성경은 일하시는 하나님, 즉 말씀하시고, 모양을 꾸미시고, 고안하시고, 만드시고, 조각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축복이자 저주인 인간의 일

일없는 낙원을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및 계획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셈이다. 일은 좋은 것인데 창조세계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봄으로써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 일에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온다. 


모든 종류의 일

성경에서는 육체 노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육체노동보다 격상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과 함께 하지 않는 일


일꾼이신 예수님

신약에서는 일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이유는 첫째, 신약을 구약성경을 전제로하기 때문이고 둘째, 사도들의 우선과제는 복음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일

신자의 일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인과 종(퀴리오스와 둘로스)


종말론적 관점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상급이 유업으로 주어질 뿐더러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형태를 만드시고 제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신다. 사랑하는 분이신 하나님은 관계적인 일을 하시고, 존엄성과 건강의 의미를 부여하신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구속의 일, 고치는 일, 하나로 묶는 일, 구하는 일을 하신다.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부의 일 : 청지기직

성자의 일 : 하나님 나라의 사역

성령의 일 : 은사와 능력 부여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제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사랑하는 일, 회복시키는 일, 복음사역, 인도하는 일

하나님의 일은 누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아직 신자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 행해지는가? 교회와 세상에서 후자에는 물리적인 창조세계, 가정, 사회, 공동체, 정치, 문화, 교육, 재정 분야, 우리가 제작하고 고치는 모든 세계들이 포함된다. 

왜 우리는 일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인 완성점에 도달하게 하시는 동안, 우리를 동역자로 초청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5. 일은 좋은 것이다. 

일의 외향적인 가치 : 생산하는 것으로 인해 일은 선하다. 

일의 내재적인 가치 : 일은 그 자체로 선하다. 


세계를 위해 좋은 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복음적인 일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평안과 의미와 용서와 소망을 선사해준다. 


우리를 위해 좋은 일

일은 깊은 치료의 매개체이다. 일은 우리에게 좋고, 세계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좋고, 심지어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다. 



제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1. 오늘날의 사역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역을 정의할때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설교, 성례집전,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것 등.


현대의 판단 기준

사역이란 아코디언과 같아서 우리가 그 속에 어떤 공기를 불어 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해진다. 

1) 장소, 2) 기능, 3) 필요, 4) 호칭, 5) 지명

사역은 "교회를 대신해서 공공연하게 행해진 행위이자 섬기는 은사의 결과로서, 교회내에서 성례의 형태로서 선포되고 명시화되고 경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으로 구체화하는 행위이다."-마이클 롤러


2. 성경에 나타난 사역

사역은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섬김이다. 사역자는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아바드

구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일하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와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있는 용어이다.(야곱이 라반에게 한 봉사) 


사랏

두가지 범주로 첫째는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이고 둘째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이다.(요셉이 애굽에서 중요한 죄수들에게 한 봉사) 


주님의 종

에베드가 주님의라는 말로 수식이 될때 사역자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사역을 사람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나 교회의 종이 되는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필요가 섬김으로의 부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봉사

사역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봉사를 뜻하는 말로, 본래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라는 뜻이지만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 준비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땅에 종을 두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만족시키지 못하자 하나님이 스스로의 종이 되신 셈이다. 


교회는 곧 사역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된 자는 종이다. 

초대교회 당시 선택된 공식적인 사역자들과 평범한 신자들의 사역을 서로 구별시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3. 삼위일체적 사역 신학

하나님 안에 사역이 있으며, 하나님은 곧 사역이시다. 

세상이 있기전에 사역이 있었는데, 그 사역은 하나님의 존재안에 있었다.(페리코레시스)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사역은 단지 하나님을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

사역이란 그리스도적이다. 즉 성령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라오스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고 이땅에서 하나님의 봉사를 감당하는 것이다. 


사역의 특징은 사랑이다.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것은 이세상이 있기도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사랑안에서 사역하던 하나님의 공동적인 삶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사역은 위임된 활동이 아니라 파생적이고 참여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인 활동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이며 "그분안에 있는 우리의 종 된 존재를 구체화시키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우리 가운데 순전한 사랑과 연민으로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사역은 성육신을 통하여 창조 세계를 축복한다. 

교회는 세상에 실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역안에서 세상과 관계하는 것이다. 선교의 본질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동감하는 데서 발견된다. 


사역은 종말론적이다. 


4. 사역하는 지도자들

기능인가 직분인가?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거룩함과 사랑이 지상에 나타나는 이미지인 공동체 안에서 그 형상이 드러난다. 이는 구성원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각자의 기능을 함으로써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지도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정해진 역할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직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위해, 예수님의 머리 되심안에서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봉사를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조력자 들이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한 선

신약 성경 기자들은 선택된 한 명의 공식적인 사역과 일반 신자의 사역을 구별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했다.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은 특별한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한 사람이 사역의 일을 맡게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소환되거나 초청받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내적인 확신이나 체험"(리처드 니버의 사역으로의 소명)

위 내용에 저자는 반대한다. 

바울의 부르심에서 회심과 사명 위탁 :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역사를 통틀어 다른 모든 신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 위탁으로서의 브르심은 반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리더십으로 부름받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인 소명을 다루면서 논의한 바 유효한, 섭리적인, 카리스마적인, 마음속의 부르심에 덧붙여서 교회지도자의 경우에는 교회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교회적인 부르심이란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 교회 리더십에 적합한지 여부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은사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성품의 측면이다. 


안수

안수라는 관행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이에 대해 루터는 "안수는 교회의 교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수 없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수의 개념 :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또한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것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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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


제 1장 한 백성 신학의 정립

지난 교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교회는 줄곧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역을 하는 주체와 사역의 대상이 되는 객체다.

정작 필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포괄적인 성경적 기초를 놓는 일이다. 가정주부, 간호사, 의사, 하수도 수리공, 증권 중개인, 정치가, 농부 등을 위한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온백성의 신학 : 성직자 중심의 신학을 넘어서

총체적인 교회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몇가지 오해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평신도 신학을 찾으려는 것은 헛수고 일뿐이다. 평신도(laos)는 하나님의 온 백성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내포하는 대단히 영예로운 호칭이다. 성직자(clergy)란 단어는 클레로스라는 헬라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지명된 혹은 상속받은 자들이란 뜻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는 그 구성원가운데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신도는 없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직자,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봉사와 사명을 계속하도록 임명되고, 상속받고, 사명을 받은자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한명의 사역자를 갇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역 곧 하나님의 사역체인것이다. 교회는 한가지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명이다. 그리고 한백성, 하나의 삼위일체적인 백성,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한 백성만 있을 뿐이다. 

둘째, 이와같은 유감스러운 현실로 인해서 소위 평신도 신학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보충적인 과업에 해당된다. 우리가 정립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의 성직주의, 곧 기능상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차별이 없는 한 백성, 기존의 성직주의를 초월하는 한 백성의 신학이다. 

셋째,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는 삶뿐 아니라, 직장, 정부기관, 사무실, 학교, 가정 등 세상에서의 흩어진 삶을 포함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은 당대의 상황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마땅하다. 


2.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신학 : 비실천 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온백성을 위한 신학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신학의 실천성에는 신학 이론의 적실성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에 나오는 궁극적인 실재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실재에 부합되는 것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단계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행습은 최근에야 생겨난 것이다. 

셋째, 우리는 신학이 실천적인 지혜의 위상을 회복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데 해방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현대 신학자들과 세계 전역에 걸친 토착화된 신학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3.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 신학 : 학문적인 신학으 넘어서

비판적인 사고라는 시험을 통과한 훌륭한 신학이냐, 검토되지 않는 개념과 편견과 느낌으로 뒤죽박죽된 신학이냐. 

첫째, 일상 생활은 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신학적 과업이란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삶을 해석하고 이 두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많은 중요한 신학자들이 비성직자, 비전문인 신학자였다. 

셋째, 오늘날에도 신학은 보통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아래로부터 하는 신학, 토착신학, 즉흥적인 신학은 종종 일종의 반작용으로 등장하지만 기도교 진리의 미지의 측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넷째, 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그저 호기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학세계 전체에서 근본이 된다. 

- 정규적인 교의학 : 멜랑히통, 칼빈

- 비정규적인 교의학 : 아타나시우스, 루터

다섯째, 하나님의 온 백성에 의한 신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의 과업을 재설정해야 한다. 

여섯째, 온백성의 신학을 회복하는 데는 전문적인 신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제2장 평신도와 성직자 개념의 재정립

1. 평신도가 없는 한 백성

평신도는 기능, 지위, 장소, 교육, 보수, 생활 방식등의 견지에서 규정되는데 "-하지 않는자"와 같이 부정적인 말로 정의된다. 

부정적으로 평신도란 1) 교회의 성직자 계층에 속하지 않은, 법적으로는 예배의식과 관련해서든 적절한 권한이 없는 사람, 2) 수도사와 수녀처럼 서약을 통해 종교인의 삶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

긍정적으로 평신도란 1) 세상에 남아 사회속에서 구체적인 과업을 가진자로서 그로 인해 교회 내의 위상이 정해지는 자, 2) 부름 받고 입양되고 사명받은 축복된 자로서, 세례와 견진으로 인해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에 완전히 함께 하는 동역자를 지칭한다. 


신약성경은 새 언약하의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할때 두가지 용어를 거부했다. 

첫째는 '라이코스'인데 평범한 무리에 속한 자 라는 뜻이다. 

둘째는 '이디오테스'인데 바보라는 영어의 어근으로 전문가나 전공자에 대비되는 범인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라오스'

라오스는 군중, 한 국가의 백성을 의미했다. 

백성됨과 관련해서는 옛 언약하의 하나님의 백성과 놀라운 연속성이 있지만,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구약과 뚜렷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즉 옛 언약하에서는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새언약하에서는 그 기능이 폐지되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속으로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2. 성직자가 없는 한 백성

현대적인 성직자 개념에는 네가지 차원이 내재되어 있다. 1) 대리적인 기능, 2) 절대적인 안수와 연계된 존재론적 차이, 3) 성례전적 기능, 4) 전문가적 지위


성직자로 가득찬 교회

성직자(clergy)의 어원인 클레오스는 분깃, 몫, 누군가에게 할당된 것이라는 의미였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의 기업이 이제 모든 신자 사이에 공유되었다. 신약성경의 교회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평신도가 없었고,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로 가득 차 있었다. 


구약 성경의 근거

백성 됨에서는 신구약간에 연속성이 있으나, 리더십에서는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구약성경에는 보편적인 (백성의) 사역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물론이다. 


구약 성경에 암시된 성직주의

모세의 이야기속에서 성직을 찬성하는 듯한 이야기들은 모세의 리더십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것이지 성직 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는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에 암시된 성직주의를 인정할 때는 제사장의 기능이 배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 성경의 성취

그리스도의 주되심, 성령의 강림, 종말의 시작이 구약의 라오스를 새로이 제정된 백성으로 변모시켰다. 


사역하는 백성으로서의 교회

전 교회가 참 사역체 곧 일주일 내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공동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직자인데 하나님의 기업으로 존귀케 되고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성직자인 셈이다. 모두가 성령의 시대에 속한 능력과 복의 분깃을 공유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 됨에 뿌리를 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평신도인 셈이다. 모든 이가 사역을 베푼다. 모든 이가 사역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속성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 들어서면 우리는 이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3. 성직자의 출현

1세기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의 시대대였던 데 비해, 2-3세기는 대체적으로 성직자-평신도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1) 헬라-로마 세계의 세속 구조의 모방, 2) 구약의 제사장직 모델을 교회의 리더십에 전이함, 3) 주의 만찬을 신비로 격상시켜 제사장의 집전이 필수인것처럼 만듦


교부들


제사장직 내의 제사장들


사역이 지닌 신비

크리소스텀의 말에서도 신플라톤 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여 육신을 벗어난 영성을 부추기는 이단적인 영향을 간파하게 된다. 

서방은 성직자 리더십의 위계적 원칙을 강조한 반면, 동방은 공동체적 원리를 강조한다. 


점진적인 성직주의화 현상

4-16세기 동안 성직자-평신도의 구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만인 제사장직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를 존귀한 백성의 지위로 되돌려 놓는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불완전한 개신교 종교개혁

- 종교개혁은 교회론 보다는 구원론에 더 치중했다. 

- 설교자가 사제를 대치했다. 

- 갱신에 부적합한 구조

- 가톨릭의 신학교 체제가 결국에는 채용되었다. 

-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교회 사역에 의해 거의 완전히 잠식당했다. 

- 안수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보수를 받는 교회의 전임 사역자에게 주어지는 형편이고, 사회에서 하는 평신도 사역을 제대로 공인하는 절차는 전무하다. 

- 적절한 평신도 영성을 가르치거나 촉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큰 발걸음을 내디딜 기회는, 마치 우리 선조들이 성경 읽기를 보통 그리스도인에게 열어 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통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열어 주는 데 놓여있다. 이것을 하는 것은 일면 새로운 종교개혁의 개시를 의미하고, 다른 면에서는 이전의 종교개혁을 논리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을 뜻한다. 


제3장 한 하나님, 한 백성


1. 두 백성인가, 한 백성인가?

성직주의란 보통 그리스도인이 특권과 권력을 가진 훈련받고 안수받은 자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뜻한다. 로렌스는 말하기를 "평신도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예배당처럼 보이는 건물을 원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복장을 한 성직자를 원하며, 익숙한 방식의 예배를 원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홀로 가만두기를 원한다."

반성직주의란 평신도에 대한 지배 그리고 안수받은 교회 리더십을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존 관계가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가 상호 보완적으로 각각 자기 위치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미지들

- 교회

- 성도

- 택하신 자

- 왕 같은 제사장

- 하나님의 집

- 하나님의 이스라엘

- 그리스도의 몸

- 주 안에서의 성전

- 하늘의 시민 / 하나님의 국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들

하나님은 포도원지기요, 목자요, 아버지, 건축가, 머리이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마디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것이다. 


2. 한 하나님, 세 위격

라오스의 정체성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 소명 역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나온다. 


삼위일체적 정체성과 소명

라오스의 사역은 백성이 단독으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성부는 창조하고, 섭리하며, 모든 존재를 위한 언약적 틀을 만드신다. 성자는 육신이 되고, 중보하고, 변형되고, 구속하신다. 성령은 능력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신다. 하지만 각 위격은 다른 위격의 사역에 동참하므로 각 위격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부적합하다. 


편향된 강조


 

 백성됨

소명 

리더십 

 성부

언약 공동체 

창조적 청지기직

계층적

 성자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그리스도 지배적인 섬김 

종 

성령 

은사적 공동체 

은사 사용

능력 부여 

은사 중심적 


페리코레시스

하나님의 본질이 관계적이라고, 하나님은 상호 교통으로 하나님된 채 차별성 있는 위격의 복수성 가운데 존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집합주의와 개별주의 둘다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페리코레시스'(상호성, 상호교환, 차별성을 없애지 않는 가운데 주고 받음)에 관해 말했다. 

페리코레시스 교리는 셋 됨을 하나됨으로 축소시키거나 하나됨을 셋 됨 속에 용해시키지 않으면서, 셋 됨과 한됨을 탁월한 방식으로 함께 연결한다. 


3. 교통인가, 합일인가?

라오스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을 얻고 생기를 받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는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다양성을 통한 하나됨

라오스는 사람들이 때때로 주장하듯이 개성이 완전히 무시되는 하나됨이 아니라 풍성한 사회적 하나됨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서 각 지체는 자신을 초월한 공동체적 삶을 경험함으로써 더욱더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하나됨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됨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요, 사역이다. 


페리코레시스적 교회

첫째, 개별적인 지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사역의 위계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라오스의 모든 지체는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사역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고, 풍성한 하나됨과 전체 사역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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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 is not a summary of "the necessary truths of reason";rather, it is a revelation that shatters and reshapes human reason in light of God's foolishness. The Word is known in contingent human form, and only there. That is the scandal of the gospel. (p.300)

복음은 '이성의 펼연적 진리들'의 요약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미련함의 관점에서 인간의 이성을 부수고 다시 형성하는 계시이다. 말씀은 우발적인 인간의 형태로, 그리고 오직 그러한 형태로만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것이 복음의 스캔들이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61) 



만일 신약 성경의 도덕적 비전과 특정 구약 본문의 비전 사이에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긴장이 존재할 경우, 신약의 비전이 구약에 앞서도록 해야 한다. 신약의 본문이 구약의 할례와 음식물 규례의 요구를 대체하는 판단을 내렸듯이, 또한 신약의 이혼 금지가 구약의 허용을 대체했듯이, 비폭력에 대한 예수님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범은 원수를 죽이는 것이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는 선택이 되도록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언약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재형성한다.(p.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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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속사회의 신화

신화란 거짓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그 정의는 "어떤 사회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입증되지 않은 집단적 믿음"이다.

막스 베버는 사회에서 합리화, 산업화, 관료화의 삼중적 과정이 진행될수록 초자연적, 마법적, 초월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세속화 과정은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소멸을 서서히 초래할 것이라는 것, 세속화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 어느 사회든 합리화, 산업화, 도시화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신화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세속화는 종교 이후의 시대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을 부채질해서 내세 중심의 종교조직을 계속 재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로드니 스타크)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

1) 고등교육에의 노출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신봉이 서로 반비례한다. 이것은 애초에 학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이들이 비종교인들이기 때문이지 학문활 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더 비종교적이 된 것은 아니다.

 

2) 학문 생활과 비종교의 상관성은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의 경우가 훨씬 더 높다.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경계 설정의 문제이다. 자연과학보다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수록 더욱 경계 설정이 어려워진다.

 

세속 사회의 이념(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세속사회의 특징)

1) 그 사회는 우주와 인간의 위치에 관한 어떤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사실상 다원적인 사회일 뿐더러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르는 사회다.

3) 따라서 아주 관용적일 것이나, 단 사회적으로 용인된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만은 관용할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4) 하지만 시민들이 다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회여야 한다.

5) 세속 사회는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6) 세속 사회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이미지, 이상적인 유형이나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세속 사회의 이념에 대한 비판

1) 먼비가 묘사하는 세속사회는 아주 특정한 사회관을 고집하고 있다.(하나님을 부정)

2) 세속 사회가 원칙적으로 다원주의를 따른다.

3) 세속사회는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4) 세속 사회는 재판관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적보다 더 존엄한 어떤 것을 대표한다는 건방진 소리를 일축해 버리는 사회

5) 사회가 사실을 확인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행할 수 있도록 감정과 비합리적 충동을 제거

6) 세속 사회는 본받을 만한 공식적인 이미지나 모델이 없는 사회

 

세속 사회는 신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속사회의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그것이 거짓 신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 여호와와 발람간의 화친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나, 그 신화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권세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 제자도의 모델은 이미 예수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주어졌다. 그분의 사역은 개개인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값비싼 제자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이 세상의 통차자인 정사와 권세들에게 도전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십자가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교회는 그 동안 많은 국가와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교회는 그 주인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 시작한 그 일을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수행하는 운동이다. 교회는 지옥의 권세조차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교회는 유일무이한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치 않는 모든 권세와 이데올로기, 신화와 가정, 온갖 세계관에 도전장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갈등과 어려움과 배척당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보다 앞서 예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과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18. 복음의 해석자로서의 회중

복음이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의 한 구성 요소 정도로 편입될 수 없다. 교회의 역할도 소위 개인구원에 국한시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3세기의 교회는 종교를 개인 구원의 길로만 한정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대의 공적 교리를 거짓이라고 도전했고 그에 따른 값으로 순교를 당했다.

이후 지배 권력이 교회로 들어오며 천년에 걸쳐 유럽에 기독교 문명을 수립했다. 동시에 세속적 권력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강요하는 치명적 시험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내부 분열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기독교 세계는 와해되고 17-18세기에 걸쳐 유럽은 새로운 과학의 성취와 세속사회의 이념으로 고무되었다.

눈을 열어 십자가에 무력하게 못박힌 자가 궁극적인 권력의 원천임을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구원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고 놀라운 하나님의 실재, 곧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분의 통치가 밝히 드러나고, 그분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바로 그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열방의 회심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의 종의 역할

그분은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필요에 즉시 반응하기도 하셨지만 통치권을 손에서 놓으신 적은 없었다. 스스로 행동과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정하셨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셨다.(오병이어 사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시면서도 풍성한 생명을 얻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완전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신다.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에 관해서는 잘못된 사상을 용납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면 부드러운 자비와 준엄한 통치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까?

 

회중 중심의 교회 회복

어떻게 해야 복음이 믿을 만한 메시지로 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나의 주장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할 경우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게끔 되어 있다. 교회의 특성은 그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자기 소명에 충실할 때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세상을 이해하고 또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렌즈, 곧 이해의 틀을 복음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소명에 충실한 공동체가 지니는 특징

1) 찬양의 공동체일 것이다.

- 근대적 관점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주된 특징은 회의와 의심이다. 근대의 탈마법화(각성)의 양상으로 자기보다 더 위대하고 나은 인물을 흠모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태도는 소위 '성숙한' 사람, 평등을 인간 존엄성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자신의 참 자유, 참 존엄성, 참 평등을 발견하는 곳이다.

- 교회의 찬양에는 감사도 포함된다. 우리가 자선 대신에 공평한 대접을 받았더라면 지금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라고 다함께 고백한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도덕 운동의 소산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 흘러넘친 결과라는 점이다.

 

2) 진리의 공동체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행위는 '타당성 구조'안에서 일어나고 그 구조에 따라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은 것이 좌우된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도전하는 일은 다른 구조에 완전히 몸담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의 회중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참 이야기를 계속 기억하고 재연함으로써 건전한 회의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로서, 이런 회의는 교인이 사회생활에 참여하되 세속적 신념에 사로잡히고 미혹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예수의 제자다운 소박함, 침착성, 현실성)

 

3)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보살피는데 깊이 관여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지역성을 가진 교회이지, 교인이 되고 싶다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이다.

지역교회야 말로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다.

 

4)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지원해 주는 공동체일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 앞에 서는 것이다. 교회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등 예수께서 하신 일을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수행하도록 세상에 보냄 받은 공동체다.

공식적인 성명과 개인적인 헌신사이에는 호혜적인 관계가 있다.

- 교회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제사장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고 지원하고 양육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각 지체마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고, 각각 다른 섬김의 장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5)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일 것이다.

서구문화의 질병의 뿌리인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신실하고 책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6) 소망의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가 정말 복음의 이야기에 '내주하고' 있을 때에만, 즉 우리가 이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타당성 구조'로 받아들인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참여할 때에만, 우리는 뜨거운 소망을 품고 한결같이 확신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몸담고 있는 '타당성 구조'는 이런 기독교적 소망을 부정하는 것 같다.

지역교회에서 새 창조의 실체가 나타나고 알려지고 경험되며, 거기로부터 남자와 여자들이 공적 영역 구석구석까지 나아가 그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되찾고, 그동안 숨겨져 있던 환상을 벗겨 버리고 모든 영역을 복음의 빛으로 환히 들춰 내는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으려면 먼저 교회가 자기만 챙기는 교회 중심적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그 존재 목적이 교인이 아닌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고속의 은혜를 보여주는 표지, 도구, 맛보기가 되는 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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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택의 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편애의 대상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자그마한 부족 하나를 골라내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이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신 분이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인도 : 독자(the alone)대 독자, 구루

근대 서양 : 자율적 개인(이성)

성경 : 관계의 측면, 영원한 동반자 관계

 

인도에서는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해서 구루(guru)를 찾거나 직접 절대자를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알기위해 용기있게 도전하라"라는 말로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기존의 전통을 담대하게 의심하라는 자율적인 인간이성을 향한 요청을 하였다. 인도의 전통처럼 그 길을 가는데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여 그 것을 붙잡아야 할 자는 결국 자율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성경이 보여주는 전반적 이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관계를 통해 보고 있다. 인간됨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역사의 사건들을 벗겨 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남녀, 부모와 자식, 가족과 부족, 열방의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여정중에 단지 선생이나 인도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동반자로서 있는 것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정하신 사자로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사자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을 때만 잠깐 취했다가 버리는 그런 선생이나 인도자로서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우리의 집을 함께 사용할 분으로 모셔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담지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얻는 구원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도 없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하나님이 모든 나라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배척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로 자기 뜻대로 피조물을 처분할 자유가 있으시다.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여행마다 유대인은 복음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며,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선택받은 백성이 선택받지 못한 백성, 곧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선택의 논리가 완성된다. 시종일관,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의 전달자로 선택하시는 이웃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구원은 없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1) 선택이란 하나님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

- 그분이 한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진리의 전달자와 온 백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운반하는 자로 세우시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진리와 사랑 둘 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 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선택받고 부름받은 자들이 주어진 명령을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 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곧 몇 사람을 택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담지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일이며 감사드릴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기로 선택하시지 않는다.

 

4) 선택의 교리를 기독론(doctrine of Christ)와 분리시킴

- 어떤 신학 주제이던지 선택의 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선택받았다는 것 즉 선민이 된다는 것은,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자이고 나머지는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논리는 복음의 논리와 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우리를 역사 바깥으로 불러내어, 구체적인 역사를 우회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역사 안에서 또 역사를 가로질러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상징적인 환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

1) 특정한 인간사회와 무관한 모종의 합리성이라는 게 있어서 그것이 여러 인간 공동체가 개발한 모든 전통을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는 관념

2) 보편구원론을 말하는 것인가? 복음의 성격 자체가 우리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실패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되거나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받을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것을 모두 피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어떤 확신은 안일함을 낳기 쉽고, 또 어떤 염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자기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 두가지 모두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내가 하나님이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각이 나를 그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 갈 것이다.

 

8. 보편적 역사로서의 성경

어느 힌두교도의 불평 "내가 성경을 읽어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성경은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 내용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 우주적 역사에 대한 조망을 펼쳐 보이고, 하나의 인간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열방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역사의 의미를 전달하는 나라로 택함받은 한 나라에 대한 미래의 모습과 그 나라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담지자로 부름받은 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성경은 보편적인 역사이다.

 

역사를 쓴다거나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p.176)

-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을 기록할 수 없기에 거기에는 선택 행위가 개입된다. 여기서 선택이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고르는 작업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는 그 사람이 그 이야기의 핵심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거스틴 이후 유럽의 역사는 성경의 미래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필연적인 진보라는 신조로 세속화 되었다. 이 신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붕괴되었다. 몰트만의 말처럼 현대 유럽의 책들은 차가운 낭패감과 미래의 꿈에 대한 상실, 체념 그리고 냉소주의가 그 특징을 이룬다.

 

역사의 목적을 알 수 있는가?

역사에 무슨 지향점이 없다면, 나의 행동도 지향점이 없게 된다. 그 이야기가 무의미하다면 나의 모든 행동도 무의미할 뿐이다. 이래에 대한 비전의 상실은 사회학자들이 아노미(anomie)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공적으로 용인되는 규범과 가치관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지향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의 저자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줄 경우다. 이는 계시를 의미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계시 대신에 이성을 대안으로 내세운다면, 이는 사고의 혼란으로 인한 잘못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이성이란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모든 사실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을 가리킨다면, 인류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전혀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우주의 역사가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귀납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수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존 폴킹호른이 말했듯이, 고정되고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우주의 이야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면 오직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도록 허락해 주어야만 한다.

 

성경은 역사의 비밀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성경은 바로 그 비밀을 위탁받은 자들이 그 전달자로서, 그 일꾼으로서, 그 증인으로서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어떤 함의가 있는가?

1) 비밀을 전달하는 일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압적인 증거는 없다. 그런데 있다면 계시가 불필요할 것이다. 그 비밀은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오직 두 인격 간의 상호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달 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뢰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2)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의 여정 가운데 발행한 사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학문적 세계에서 성서학을 연구할 때 객관적인 언어(objective language)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소위 고백적인 언어(confessional language)는 대학의 분위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을 바꾸기 위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에는 간섭하실 수 없다는 가정은 명백하게 용인할 수 없다. 또한 신적 행위에 대한 언급을 빼버린 역사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신적행위 개념을 포함시키는 해석법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고 고백적인 자세의 일부라고 가정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문제는 역사를 해석해 내는 그 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오직 신앙의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종교사의 방식과 신앙고백의 방식의 차이는, 전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를 반영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의문시 한다는데 있다.

 

3) 분명히 사건들은 언어로 이해되고 기록된다. 이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하지만 말이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게 마련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자연세계의 여러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신앙의 문제에 속하는 이런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연구를 시작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의 목표가 그가 출발한 그 신앙의 진리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그 원의 외부에 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물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또 다른 원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해석이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해석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글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한 공동체에게 전달하여 그 공동체가 비밀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그에 비추어 그것을 다시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5)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이해할 때 이것이 가지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바로 현대 서구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사명의 핵심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18세기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 속에서 이해하기보다, 이 현대사상을 성경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성을 성경과 전통과 나란히 놓거나, 그것들을 보완하는 권위로 들먹인다는 것은 예수가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선교사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기존의 타당성 구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복음, 성경에 대한 확신)과 한계(성경을 모든 일에 관해 오류가 전혀 없는 명제들의 요약으로 취함)를 명확히 알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건서적들이 아주 많다. 성경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예수의 성육신, 사역, 죽음, 부활)

 

6)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어떻게 현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대항하는 근거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증거를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는 성경이 성경의 인물들과 증인들의 중단 없는 연속성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 내주한다.

성경을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문 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위치에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들, 우리의 모든 타당성 구조 속에 내주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우연한 일에 의해 그 구조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없음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타당성 구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형태로 우리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는 바깥에 서서 그것을 검토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내주하면서 거기서부터 저 밖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의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시각의 여섯가지 의미

1)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타당성 구조안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모든 인간 공동체 가운데서 실제 역사적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2) 그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나의 이야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응답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의 이야기가 속한 그 포괄적인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응답될 수 있다.

 

3)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일, 매순간 내리는 결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4) 무슨 이유로 현대의 타당성 구조가 아닌 성경의 타당성 구조를 공유하고자 하는가? 첫째 타당성 구조란 정의상 어떤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틀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 하나님이 그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서 내가 부분적으로밖에 모르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나를 택해서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비밀을 온 세상과 나누라고 이 믿음의 공동체 일원이 되도록 부르신 부름이다.

 

5)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구별되는 특징은 소망(희망)이다.

현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가치있는 미래가 없는 것이라면, 성경의 반문화적 특징중 하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희망에 가득 찬 행동을 가능케 하는 자신감 넘치는 희망일 것이다.(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

 

6) 희망이 가득찬 행동은 자신감 있게 고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행동에 대한 지평은 바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Q. 유럽의 역사인식을 한국사회에, 동양 문화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어거스틴 이후 18세기까지 역사인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전제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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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논문은 자료를 수집하고, 비판적 사고로 평가하여,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써야 한다. 


연구 논문의 다섯단계

1단계 : 제목 선정

2단계 : 자료 수집

3단계 : 자료 평가

4단계 : 내용 조직

5단계 : 논문 기술


논문 개요

1) 해당분야의 지금까지 연구 소개

2) 논문의 목적(문제 제기와 중요성)

3) 주제의 범위

4) 가상 논지 또는 예상되는 연구성과

5) 연구 방법

6) 기본 자료의 소개

7) 참고 서적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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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방법


책이나 논문을 비평할때 크게 4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1)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2) 그것을 어떻게 증명했는가?

3) 그 과정이 올바른가?

4) 그 결과 이 분야에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공헌했는가?


비평은 세가지 과정을 가진다. 즉 해석, 분석, 비판이 그것이다. 해석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여 위의 4가지 질문중 첫번째에 답하는 것이다. 분석은 그 책의 저자가 논지를 증명하려고 취한 기술적 방법 즉 두번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은 작품을 평가해서 그 작품의 목적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씌어졌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세번째와 네번째 질문에 대답을 준다. 


서평을 위한 질문들

1) 어떤 관심, 입장, 편견등이 저자의 분석에 영향을 주었나? 어떤 입장에서 이것들이 출발했나?

2) 이 작품의 주요논지가 무엇인가?

3) 어떤 특별한 장점을 이 논지가 소유했는가? 이 논지로 인해서 어떤 질문들이 일어나는가?

4) 이 논지가 옳다고 생각되는가? 그 논지를 위해서 어떤 증거를 사용했는가?

5) 이 작품이 해당 주제에 관해서 학문적인 이해를 돕는데 어떤 공헌을 했는가?

6) 주제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소홀히 되거나 불명료하거나 잘못 다루어지지 않았나?

7) 이 작품의 범위가 해당 현상에 대해서 적절한가? 

8) 연구방법이나 서술방법이 이 주제에 적합한가?

9) 이 작품에 포함된 다른 개념들, 예를 들어 인간본성, 세계관, 역사관, 기타등은 무엇인가?

10) 이 작품의 조명하에서 현재 상태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서평 쓰기

1) 저자를 소개한다. 

2)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나 노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3) 서평의 내용에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나 예화로부터 시작한다. 

4) 작품의 목적을 잘 표현하는 인용구절을 그 작품이나 다른 책에서 뽑아 쓴다.

5)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간단하고 개괄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6) 그 작품을 같은 종류의 다른 작품과 비교 분류함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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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오해


1. 누구나 노력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2. 말하듯이 글을 쓰면 된다. 

3. 많이 읽고 많이 써보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4. 글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5. 글은 문장력이다. 

6.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을 닦는 것이다.


위 질문에 대해서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시오. 



글쓰기를 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로 나눈다면 문학적 글쓰기(시, 소설, 수필...)는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하며 실용적 글쓰기(논문, 보고서, 프리젠테이션)등은 논증을 기본으로한다. 


실용적 글쓰기에 초점을 맞출때 위의 6가지 항목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학기 논문, 글쓰기가 너무 힘들게 느껴져서 빌려 본 책이다. 나자신을 볼때 기본적으로 문학적 글쓰기에는 재능이 없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학적 글쓰기가 아닌 실용적 글쓰기에 좀더 도전해 보자. 철저한 논증을 통해 나의 논지를 잘 설명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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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가능할까?


서구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 곧 계몽주의의 과학적 합리주의가 무너지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그 잔해에서 일어났다. 모더니즘은 과학과 합리주의 위에 세운 큰 건물이며 모더니즘 시대의 도시는 힘과 능률을 입증했다. 즉 자연과 무지와 가난을 정복했다. 그러나 200년이 흐른 후, 모더니즘이 무너졌다. 모더니즘은 인간 영혼이 느끼는 가장 깊은 갈망을 더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제 내면의 삶을 세울 토대로 다른 철학과 세계관을 찾는다. 그래서 영성 세계 종교, 뉴에이지의 인기가 높아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모더니즘의 토대를 침식하는 지하 공동체를 건설한다.(p.37)


이머징 교회가 던지는 몇가지 질문(p. 40)

- 우리 믿음을 변해가는 세상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우리 문화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게 할 것인가?

- 개인주의 세상에서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 교회는 도시에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 교회가 주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게 무슨뜻인가?


"칼뱅주의자의 불안"(리차드 마우)


이머징 교회의 외부자라고 느끼는 이유(p.42-44)

1. 연령별 사역의 장단점

2. 뿌리가 필요하다.(역사적 연결, 고대예배)

X세대 예배는 문화 장벽을 허물고, 성과를 지향하지 않고 진정성을 추구했다. 

- 주변문화에 다가가겠다며 지나치게 세상과 비슷해졌고 문화에 맞서는 모습이 부족해 보이는 x세대 예배

3. 복음을 중심에 두는 모습의 부족



2장 이머징 교회란 무엇인가?

- 변하는 문화의 한가운데서 선교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교회


이머징 교회의 과제는 "해체와 재건"이다. 


이머징 교회는 무엇에 항의 하는가?

1. 전통교회는 계몽적 합리주의에 사로잡혔다. 

2. 전통교회는 구원관이 편협하다. 

3. 전통교회는 속하기보다 믿기를 앞세운다. 

4. 전통교회는 상황에 맞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 

5. 전통교회는 설교가 효과적이지 못하다. 

6. 전통교회는 교회론이 약하다. 

7. 전통교회는 종족주의를 좇는다. 


댄 킴벌 : 변해가는 주변 문화를 선교 관점으로 파고드는 모든 교회를 이머징 교회에 포함


이머징 계열의 주요 세 그룹

1. 연결주의자 : 역사적 형태의 교회와 같은 복음을 취하지만 예배형식과 설교 기법과 교회 지도체제를 쇄신하는데 관심을 둠

2. 재건주의자 : 같은 복음을 취하지만 현재 교회 형식과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형식을 탈피하고 성육신 적이며 유기적 형태의 교회를 실험한다. 

3. 수정주의자 : 신학과 문화에 관한 복음주의의 핵심 교리에 거리낌 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교회형태에도 의문을 제기.


3장. 순전한 기독교를 찾아서


존스토트 "복음의 연합" / 토머스 오덴 "새로운 에큐메니즘"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방으로 직접 이어지는 넓은 홀에 더 가깝다.(루이스)


서로 다름에 집중할 것이냐, 서로 일치(연합)에 집중할 것이냐?


리디머 장로교회의 깊은 연합

1) 매주 최고 기독교 역사가 물려준 역사적 전례에 예배의 뿌리를 둔다.

2) 깊이 있는 교회의 특징을 설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한다. 

3) 태도를 조심한다.

4) 오만을 경계한다.

5) 문턱이 낮다.

6)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4장 깊은 진리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 후기 근대주의 : 대부분의 전통주의자들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속으로 본다. 

- 탈 근대주의 : 이머징교회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극복한 대안으로 인식한다. 


정초주의와 강경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네가지 선언

전통교회의 실재론은 옳으나 전통교회의 정조주의는 옳지 않으며, 이머징 교회의 탈정초주의적 비평은 정확하나 이머징 교회의 형이상학은 정확하지 않다면 그 대안은?

- 제3의 길은 고전적 정초주의(절대적 인식론)와 강경 포스트모더니즘(반실재론)을 거부한다. 

1) 깊이있는 교회는 탈정조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2) 깊이있는 교회는 정초(기초)를 믿는다. 

3) 적절한 자신감을 소유한다.

4) 탈정초주의적이란 말은 우리가 소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울타리를 칠것인가 샘물을 공급할 것인가?(경계집합형 교회와 중심집합형 교회)


5장 깊은 전도

이머징 교회의 주장 : 속하기가 믿기보다 우선이다. 


공관복음의 세부분

1) 갈릴리와 북쪽 지역의 사역(마 1:1-16:12 ; 막 1:1-8:26 ; 눅 1:1-9:17)

2)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여정(마 16:21-20:34 ; 막 9:2-10:52 ; 눅 9:51-19:10)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마 21:1-28:20 ; 막 11:1-16:8 ; 눅 19:11-24:53)

- 예수님은 단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나아가 그분이 누구신지 고백하고 그분의 제자로 헌신할것을 요청하신다. 


6장 깊은 복음

브라이언 맥클라렌, 존 하워드 요더, 스탤리 하우어워스, 짐 월리스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대한 평가 : 전통교회는 그가 십자가와 속죄교리를 축소시키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교회는 이머징 교회가 복음을 사회행위로 축소했다고 주장하고 이머징 교회는 전통교회가 메시지를 개인구원으로 축조햇다고 주장한다. 


복음-공동체-선교-샬롬


7장 깊은 예배

댄 킴벌 : 거룩한 공간과 다감각적 예배


1) 예스럽고도 새로운 예배

2) 성경 드라마가 있는 예배(부르심, 씻음, 구범, 성찬식, 파송)

3) 기쁨과 엄숙함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

4) 모든 신자가 제사장인 예배

5) 심오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설교

6) 매주 성찬식을 행하는 예배

7) 손님에게 친절한 예배 : 영화로운 전도


8장 깊은 설교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배웠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능력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스피칭을 넘어서

진리 찾기


9장 깊은 교회론

교회는 유기적이어야 하는가? 제도적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늘 쌍둥이 위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문화의 포로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와 괴리되는 것이다."

1) 균형

2) 하나님은 리더를 부르신다.

3) 은혜의 수단인 예배

4) 전통을 세워나가라

5) 전통은 현실에 아주 적절하다.


10장 깊은 문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의 적절한 균형


세상과 분리된(isolated) 삶이 아니라 구별된(distinguished) 삶이 필요하다.


결론 깊이 있는 교회를 향하여

1) 공동체 모임을 시작하거나 기존 모임에 들어가라

2) 용서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모임의 중심으로 삼으라

3) 선교하라

4) 샬롬 메이커가 되라

5) 깊이 있는 예배자가 되라

6) 중심 집합형 사고의 본을 보이라

7) 리더에게 요구하기전에 먼저 자신이 깊이 있는 교회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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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면(최용준)


이 책은 현 한동대 글로벌학부의 최용준 교수 본인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역을 하면서 경험한 여러가지를 기록한 글이다. 

네델란드, 독일, 벨기에에서의 학업과 사역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삶의 전 영역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것에 대한 개인의 깨달음과 대답들을 기록하고 있다. 

수면보다 지면이 낮은 네델란드, 또한 바람이 많이 불어 어려가지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도리어 창의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배경에 개혁주의의 신앙의 힘이 있음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말뚝위에 세워진 수많은 건물들, 호수의 물을 모두 퍼내고 지은 스키폴공항, 바람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풍차의 나라...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여러 역경과 고난이 닥쳐올때 이것을 어떤 안목과 시선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됨을 말한다. 

이외에도 독일교회와 벨기에 교회의 모습을 나누면서 한인교회의 나아가야할 모습들을 제시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통합을 다루고 있다. 과거 유럽연합의 비전을 처음 제시했을때 그것이 지금 수 많은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바로 한 사람의 비전제시와 노력을 통해서 그러한 일이 일루어 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는 과거로부터 단일 민족임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다문화사회속에서 이것이 결코 자랑이 될수 많은 없음을 실감한다. 서로 다른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이것들이 창의적으로 통합될 때 나타나는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훈련과 노력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 한가지를 배우는데도 힘들고, 외국인을 만나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반적으로 2-3개국어를 쉽게 해내는 유럽의 사람들과는 여러가지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현재 급속하게 우리 사회속에 들어와 있는 이런 다문화적인 요소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품고 서로 다름 속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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