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
"기독교 이야기(Christian story)는 우리가 어떤 것을 그냥 바라보게 하는(look at)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look through) 안경(set of lenses)을 제공해 주는 것" p.10
1. 다원주의 문화속의 교의와 의문
기독교 세계관을 공격하는 인본주의적 전통 p.16
1. 합리주의적 전통 : 그리스와 스토아 학파의 전거(source)에 의지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만을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인정
2. 영적인 전통 : (유럽과 인도) 인간의 영혼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존재와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
- 이 둘의 공총점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궁극적인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기위해 저술된 책들 가운데 특히 18세기 동안의 특징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가정들을 상당히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이런 가정들 안에 수용될 수 있다고 변호한 것이다. p.19
교의(dogma)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교회사 속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 세계에서는 교의에 서슴지 않고 의문을 가하는 것이 지적인 성숙과 능력을 나타내는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권위적으로 부여되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p.21
다원주의의 원칙은 우리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p.24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 : 특정한 사회 안에서 더 타당하게 간주되는 신념이나 실천이 사회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Peter Berger)
소경과 코끼리 이야기 : 우리는 소경일 뿐이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켜보는 자가 있는가?
복음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1. 교의를 거부하는 부분적인 원인은 오랫동안 강압이나 정치적 세력 그리고 자유를 부정하는 것과 얽혀져 왔다.
2. 우리는 복음을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 안에서 상황에 맞게 동화시켜 가면서 변론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출발점이 되고 결국에는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보다 인간의 경험을 훨씬 더 전체적으로 잘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3. 새로운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것이 모든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4. 우리가 신앙안에서 수용하도록 주어진 것은 일련의 영원한 명제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이며,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종말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2. 다원주의의 근원
-문화적 다원주의 : 한 사회안에 있는 여러 당양한 문화들과 생활방식들을 환영하고 이런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고 믿는 태도이다.(문화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종교적 다원주의 :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믿음에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300년간의 자연과학에서의 엄청난 성공은 목적에 관한 물음은 제쳐두고 발생하는 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가치와 사실의 구분)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하늘 아래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성하는 사실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성실한 태도이다.
3. 아는 것과 믿는 것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만,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 않다.
뉴턴이전의 17세기까지만 해도 신학도 천문학이나 역사과목처럼 인간지식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다. 망원경의 발명이후 사람들은 사물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아주 똑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300년의 유럽의 역사가운데 체계적인 회의론이 등장하였고 진리로 생각되던 모든 것은 새롭게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의심할 수 없는 확도한 토대를 찾았고 그 출발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에서 찾았다. 그런데 첫째 이 말 자체에 굉장한 믿음의 행위가 들어 있다. 둘째 이 말을 의심할수 없는 증거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각하는 자아가 외부의 어떤 실재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좀더 철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정확한 단어의 사용)
- 외과의사의 내시경 사용(처음에는 내시경을 의식하지만 이후에 이것의 사용이 능숙해지면 신체내부의 상태에 집중하게 됨, 새로운 언어(상황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용)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단어, 언어, 관념 등)
문화란 함께 사용하는 언어와 공통의 이야기를 통해 가능해지는 모든 형태의 사회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배열하는 전체적인 양식이다.
사실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세계는 어떤 목적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과 인과성이라는 두가지 요인의 작용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스스로 만들어져서 스스로 존재하는 기계란 인간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아무거나 다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들에게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하기 힘든 생각이 존경받는 과학자들에의해 널리 유포되었고, 아직도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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