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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bgodliness c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for dwe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and3 we cannot take anything out of the world. But eif we have food and clothing, with these we will be content. But fthose who desire to be rich fall into temptation, ginto a snare, into many senseless and harmful desires that hplunge people into ruin and destruction. 10 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iall kinds of evils. It is through this craving that some have wandered away from th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pangs.
b [ch. 4:8]
c Ps. 37:16; Prov. 15:16; 16:8; Phil. 4:11; Heb. 13:5
d Job 1:21; Ps. 49:17; Eccles. 5:15
3 Greek for; some manuscripts insert [it is] certain [that]
e Gen. 28:20; Prov. 30:8
f Prov. 15:27; 23:4; 28:20; Matt. 13:22
g [ch. 3:7]
h [ch. 1:19]
i [Ex. 23:8; Deut. 16: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6:6–10.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6:6–10.
 
바울은 3-5절에서 부패한 거짓교사들의 실상을 지적하면서 특히 5절에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했는데 이제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이야기한다. 
 
6절) 바울은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라고 말한다. 이는 5절과 연결시켜서 볼때 마치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의 주장을 우아한 방법으로 돌려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번역된 ‘아우타르케이아스’는 스토아 학파에서 ‘상황에 구애되지 않는 초월적인 자기 만족, 삶에서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게 되는 적절함’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자족(빌 4:11)은 스토아 학파들이 자기 노력에 의해 스스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충족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되느니라’라는 표현은 ‘에스틴’으로 이는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변함없는 사실이나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자족하는 마음을 겸비한 경건이야말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함으로 성도들의 삶속에 참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6:6 ἡ εὐσέβεια (see v. 5), “religion,” with its power (in the sense of 2 Tim. 3:5b), “is” indeed πορισμὸς μέγας in contrast to (δέ, “but”) the misunderstanding of its “gain” on the part of the false teachers. Paul says this not of εὐσέβεια alone, but of εὐσέβεια μετὰ αὐταρκείας. αὐτάρκεια** (also in 2 Cor. 9:8) was the term for a favorite virtue of the Cynics and Stoics (BAGD) and meant for them “self-sufficiency.” Fee says of the analogous context of Phil. 4:11, where the adjective αὐτάρκης is used: “There [Paul] ‘turned the tables’ on the Stoics by declaring that genuine autarkeia is not self-sufficiency but Christ-sufficiency.” Christ develops in the Christian the contentment “which freely submits to and delights in God’s wise and fatherly disposal in every condition” (Burroughs, Rare Jewel, 19). αὐτάρκεια is joined to εὐσέβεια by the preposition μετά, which is used here “to show a close connection betw[een] two nouns, upon the first of which the main emphasis lies” (BAGD s.v. A.II.6). Hence εὐσέβεια, true Christianity, provides the contentment that each individual must appropriate, as Paul says in Phil. 4:11,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en the source (εὐσέβεια) is combined with the inward result (αὐτάρκεια), then there is “great” (μέγας) gain. In 4:8 Paul identifies the “gain” or “profit” of εὐσέβεια as “all things,” “life” now and future.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53.
 
7절) 원문에서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포함되어서 본절이 6절에 대한 이유임을 나타낸다. 즉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때 비로소 무언가를 얻고 취하려는 끝없는 시도속에서 좌절하는 삶에서 벗어나 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임으로 경건에 유익을 이루게 된다. 
욥기 1:21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전도서 5:14–15
14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15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욥이나 전도자,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다. 그러므로 이땅에서의 삶속에서 인간이 추구하고 누리는 부요함,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때 경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땅에서의 여정속에서 인간의 소유는 여행자의 짐에 불과하다. 가벼운 여행을 위해서는 짐을 가볍게 싸야 한다. 짐이 커지면 커질 수록 가벼운 여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 지혜와 용기가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다. 
6:7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Not only a common sense observation but also the clear teaching of the OT (Job 1:21; Ps 49:17; Eccl 5:15). It is easy to forget that what ultimately, truly matters in this world is what matters in the world to come.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5.
 
8절)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물질이나 소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기준,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서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고 말한다. 
‘먹을 것’이라고 번역된 ‘디아트로파스’는 음식을 의미하는 ‘트로페’에서 파생된 단어로 원래 ‘부양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디아트레포’에서 파생된 ‘디아트로페’의 복수형으로 생존에 필요한 ‘음식물, 양식’을 의미한다. 
‘입을 것’으로 번역된 ‘스케파스마타’는 본래 ‘덮다’를 뜻하는 동사 ‘스케파조’에서 파생된 명사로 ‘의복, 덮개’를 의미하는데 주로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을 사용하여 만든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의식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재물을 대하는 태도는 금욕주의,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영원의 가치를 알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즉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의식주에 만족하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σκέπασμα (skepasma), 명사. 입을 것, 의류, 덮개.
명사 용법
1. 덮개 — 다른 것을 덮기 위해 만들어진 것. 특별히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 천으로 만들어진 것. 관련 주제: 망 토; 덮개; 장막. 관련 존재 항목들: 병풍, 출입 장막; 추가적인 성전의 특징; 면사포.
딤전 6:8 διατροφὰς καὶ σκεπάσματα,
대체 말뭉치(Corpus) 참조 자료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 Pol. 1336a.17
아리스토텔레스 (책, 장, 단락): Aristot., Met. 7
플라톤: Pl., Stat. 279d
크세노폰: Xen., Anab. 1.5.10
요세푸스 (로엡): Wars 2.129
필로: Det 19
구약 위경: Let. Aris. 140
성경 주석 문서
Bernard, J. H. The Pastoral Epistles. Cambridge Greek Testament for Schools and Colleg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6.
딤전 6:8 로 부터 6–10. The Vanity and the Perils of Wealth
Blight, Richard C. An Exegetical Summary of 1 Timothy. Dallas, TX: SIL International, 2009.
딤전 6:8 로 부터 6:8
명사. 명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6:8 See Phil 4:11–12. food and clothing. Jesus in his temptations (Matt 4:1–11), Paul in his trials (2 Cor 11:23–27), and God’s people in their lives of faith (Heb 11:37–38) sometimes lacked even these basics. This is also true today of many persecuted Christians worldwide. Christians with little still have enough to be cont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5–2176.
 
9절) 6-8절이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이라면 9-10절은 자족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이들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이 이런 물질에 대한 경계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경건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큰 문제를 야기했고 이로 인해 시험에 빠지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물욕에 대한 경계가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이러한 욕망 자체를 거세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을 인정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하려하는’으로 번역된 ‘불로메노이’는 ‘갈망하다, 의도하다’라는 ‘불로마이’의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끊일 줄 모르는 욕망으로 불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찬 이들은 자족하지 못하고 시험과 올무, 욕심,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떨어지나니’로 번역된 ‘엠핍투신’은 ‘~안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과 그 자체로 이미 ‘빠지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핍토’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함정에 빠지다’라는 ‘엠핍토’의 현재형이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 아간,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은 모두 자신들이 부하려는 욕망 곧 탐심에 이기지 못하여 죄를 짓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되었다. 
‘시험’으로 번역된 ‘페이스라몬’은 신약 성경에서 ‘시련’이란 의미와 함께 ‘유혹’이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πειρασμός -οῦ, ὁ; (peirasmos), 명사. 유혹, 시험, 시도. 히브리어 등가: מַסָּה 3 (3), מַסָּה 1 (2), עִנְיָן (1).
명사 용법
1. 유혹 — 시험을 치르는 사람에게 잘못을 유발하려는 (혹은 증명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시험. 관련 주제: 유혹; 설득하다; 예수의 시험.
마 6:13||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막 14:38|| ἵνα μὴ ἔλθητε εἰς πειρασμόν·
눅 22:40 Προσεύχεσθε μὴ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πειρασμόν.
고전 10:13 πειρασμὸς ὑμᾶς οὐκ εἴληφεν
벧후 2:9 ἐκ πειρασμοῦ
2. 시험 — 어떤 것을(실수와 같은) 면밀히 살피는 행위 관련 주제: 시험.
갈 4:14 τὸν πειρασμὸν ὑμῶν ἐν τῇ σαρκί μου
약 1:2 ὅταν πειρασμοῖς περιπέσητε ποικίλοις,
약 1:12 Μακάριος ἀνὴρ ὃς ὑπομένει πειρασμόν, ὅτι δόκιμος
벧전 1:6 ἐν ποικίλοις πειρασμοῖς,
벧전 4:12 πυρώσει πρὸς πειρασμὸν ὑμῖν
칠십인역 참조 구절
출 17:7; 신 4:34; 신 6:16; 신 7:19; 신 9:22; 시 94:8; 집회 2:1; 집회 27:5; 집회 27:7; 집회 36:1; 1마카 2:52
명사. 명사
||  || 눅 11:4
||  || 눅 22:46 || 마 26:41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올무’로 번역된 ‘파기다’는 마치 짐승을 얽어매듯이 부하려고 하는 자들의 들끓는 욕망이 오히려 그들 자신의 손과 발을 꼼짝못하게 만드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παγίς -ος, ἡ; (pagis), 명사. 덫, 올무. 히브리어 등가: פַּח 1 (22), מוֹקֵשׁ (8), רֶ֫שֶׁת (7).
명사 용법
1. 덫 (재빠름) — 새나 작은 짐승을 잡는데 사용하는 재빠르게 작동하는 덫 관련 주제: 올무; 핀 (트랩). 관련 존재 항목: 그물.
눅 21:35 ὡς παγίς· ἐπεισελεύσεται
롬 11:9 Γενηθήτω ἡ τράπεζα αὐτῶν εἰς παγίδα καὶ
딤전 3:7 καὶ παγίδα τοῦ διαβόλου.
딤전 6:9 πειρασμὸν καὶ παγίδα καὶ
딤후 2:26 καὶ ἀνανήψωσιν ἐκ τῆς τοῦ διαβόλου παγίδος,
칠십인역 참조 구절
시 9:16; 시 34:7; 시 68:23; 잠 6:5; 잠 7:23; 잠 12:13; 잠 18:7; 전 9:12; 집회 9:3; 토비 14:10; 사 24:17
명사. 명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전도서 5:10
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결국 이들의 부하려는 시도는 이들을 시험과 올무,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게 만든다. 사람은 가난한 시기에는 ‘의식주’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주’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부하려고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이제 부를 추구하고 이것에 삶의 우선순위를 둔 이들의 마지막 결과는 ‘파멸과 멸망에 빠지는 것’이다. ‘파멸’이라는 표현은 개역개정에서 ‘침륜’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물에 빠져 잠긴’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어는 ‘올레드론’으로 ‘현세에서의 파멸’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멸망’으로 번역된 ‘아폴레이안’은 ‘내세에서의 파멸’을 의미한다. 이는 ‘현세와 내세에서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사한 두 의미의 단어를 중복해서 사용함으로 ‘철저한 파멸’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빠지게’로 번역된 ‘뷔디주신’은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βυθίζω (bythizō), 동사. 가라앉다, 가라앉히다, 잠기다. 부정과거 능동태. ἐβύθισε; 부정과거 능동태. ἐβυθίσθησαν.
동사 용법
1. (물)에 가라앉다 — 물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다 (그리고 잠기다); 특히 배와 관련하여.
눅 5:7 πλοῖα ὥστε βυθίζεσθαι αὐτά.
2. 어떤 상태에 집어 넣다 ⇔ 잠기다 (어떤 것이) —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 빠지게 하다; 무엇을 물 아래에 잠기게 한다는 의미로.
딤전 6:9 αἵτινες βυθίζουσι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εἰς ὄλεθρον καὶ
칠십인역 참조 구절
2마카 12:4
동사. 동사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뷔티조’라는 이 동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베드로 그물을 던지자 많은 물고기로 인해서 배가 가라앉게되는 사건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고(눅 5:7) 오늘 본문속에서는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과 같은 철저한 파멸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6:9 The substantival participle οἱ βουλόμενοι describes a category of people in terms of their desire, which is then made specific by the infinitive πλουτεῖν: “those who want to be rich.” The verb ἐμπίπτουσιν is used metaphorically to indicate what happens to such people, i.e., they “fall (into),” with the present tense indicating that which usually or normally happens and the prepositional phrase with εἰς and three nouns indicating that into which they fall.
The first is πειρασμός, which means here “temptation” or “enticement to sin” and is used here in the passive sense of that which “can be an occasion of sin to a person” (BAGD). The second is παγίς, which means “snare” or “trap” and is used here figuratively. Since διαβόλος qualifies the other two occurrences of this word in the PE, one of which precedes this occurrence (3:7; also in 2 Tim. 2:26), and since this context refers to “temptation,” evil “desires,” “ruin,” and “destruction,” it is likely that “the snare of the devil” is intended here (so J. Schneider, TDNT V, 593–95) and that Paul felt it unnecessary to add τοῦ διαβόλου this time (3:6, 7 also uses ἐμπίπτω, the only other occurrence in the PE).
The third noun governed by εἰς is ἐπιθυμίας, “desire,” “longing,” or “craving,” which is used in both neutral (or positive) and negative senses in the NT. The negative sense far predominates (over 30x of 38), and that sense is made plain here by the qualifiers ἀνοήτους καὶ βλαβεράς. The will to be rich causes one to enslaved by “many” (πολλάς) strong desires (Tit. 3:3; contrary to contentment with what one has). These desires are said here to be ἀνόητος, “foolish,” the primary emphasis being moral rather than intellectual (cf. J. Behm, TDNT IV, 961f.), and βλαβεράς,** i.e., “harmful” or “injurious” (a NT hapax used in extrabiblical Greek as the opposite of “useful” or “profitable”; see LSJM).
There may be a progression in v. 9 from temptation to entrapment to desires (cf. Jas. 1:14–15): If this is so, the indefinite relative pronoun αἵτινες refers to “desires”; if not, it probably refers to all three preceding nouns, in which case it is feminine in agreement with the second and third. It may be used here qualitatively, “such as,” or simply in place of the relative pronoun (BDF §293.4; Robertson, Grammar, 728).
Whatever the antecedents, they “sink” or “plunge” (βυθίζω,** NT 2x: literal in Lk. 5:7; figurative here) people into “ruin and destruction.” The figure is that of causing someone to drown. Those being drowned are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The definite article refers back to the plural subject, οἱ βουλόμενοι πλουτεῖν, and perhaps even to ἀνθρώπων in v. 5.
ὄλεθρος** (NT 4x: here; 1 Cor. 5:5; 1 Thes. 5:3; 2 Thes. 1:9) means “destruction” or “ruin” (see J. Schneider, TDNT V, 167ff.; H. C. Hahn and C. Brown, NIDNTT I, 465ff.), as does ἀπώλεια (NT 18x, Pl.* 5x: here; Rom. 9:22; Phil. 1:28; 3:19; 2 Thes. 2:3; see A. Oepke, TDNT I, 394–97; H. C. Hahn, NIDNTT I, 462–65).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is combination of two nearly identical terms, which is not found elsewhere, may suggest an intensification: “utter destruction” (BAGD s.v. ἀπώλεια). A number of modern English versions render the two as “ruin and destruction” (RSV, NASB, TEV, NIV). But because ὄλεθρος is used in 1 Cor. 5:5 of “destruction of the flesh” here and now, with the hope “that his spirit may be saved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i.e., for eternity, it has been suggested that ὄλεθρος refers here also to bodily destruction and ἀπώλεια to spiritual destruction (van Oosterzee, Kelly [possible], Spicq, Dornier), or that ὄλεθρος refers here to present destruction and ἀπώλεια to destruction (perdition) in eternity (so Vine, Expository Dictionary, I, 304; NEB: “ruin and perdition”; Robertson: “destruction and perdition”). Either or both of these suggestions that see a contrast between the two terms point to the most likely solution (which is not to say that ὄλεθρος cannot refer to eternity: it clearly does in 2 Thes. 1:9; cf. 1 Thes. 5:3).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 W. Funk from the 10th German ed. Chicago, 1961.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NIDNTT C. Brown,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I–III. Grand Rapids, 1975–78.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NIDNTT C. Brown,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I–III. Grand Rapids, 1975–7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55–257.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 표현은 당시 데모크리투스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내용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악의 척도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은 척도가 아니라 뿌리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몇몇 악의 뿌리가 아니라 모든 악의 뿌리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글 성경은 ‘판톤’을 ‘일만’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판톤은 ‘모든(all)’을 의미하는 것으로 KJV은 ‘all’로, NIV와 ESV는 ‘all kinds of’로 NASB는 ‘all sorts of’로 번역했다. 물론 모든 악이 돈과만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기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악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과장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되나니’로 번역된 ‘에스틴’은 ‘에이미’의 직설볍 현재 시제로 become의 의미가 아니라 be의 의미이다. 따라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인 것’이다. ‘돈을 사랑함’은 ‘필라르기리아’인데 이는 ‘사랑하다’라는 ‘필레오’와 ‘돈, 은’을 의미하는 ‘아르기로스’의 의 합성어로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의미한다.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탐내는’으로 번역된 ‘오레고메노이’는 ‘사모하다, 욕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오레고’ 현재 중간태 분사형이다. 이를 탐하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게 열망하는 것이고 나아가 실제로 이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현재 분사형으로 쓰인 것은 이러한 열망과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렇게 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다.’ ‘미혹을 받아’로 번역된 ‘아페플라네데산’은 본래 ‘별이 일쩡한 궤도에서 이탈하여 유성처럼 돌아다니다’라는 뜻인 ‘아포플라나오’의 부정과거형이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사람은 누구나 믿음에 헌신함으로 욕심을 버리게 되거나 돈을 우상으로 섬김으로 믿음을 떠나게 된다. 바울은 나아가 돈을 따르는 자들의 두번째 결과로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는’ 것을 언급한다. ‘근심’으로 번역된 ‘오뒤나이스’는 본래 ‘애간장을 녹일 듯한 슬픔’이란 뜻을 지닌 ‘오뒤네’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깊은 슬픔’이란 뜻이 아니라 후회 그리고 양심을 버린데서 오는 고통, 물질주의가 결코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깨달음, 나아가 절망까지도 포함한다. 또한 ‘찔렀도다’로 번역된 ‘페리에페이란’은 ‘꿰뚫어 관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페이로’의 부정과거형으로 주로 고기를 갈고리로 꿰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즉 돈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미혹을 받아 믿음을 떠난 이들이 결국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고통가운데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자 아굴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잠언 30:7–9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6:10 To substantiate (γάρ) the preceding Paul presents the proverbial statement ῥίζα πάντων τῶν κακῶν ἐστιν ἡ φιλαργυρία, in which φιλαργυρία represents the desire on the part of οἱ βουλόμενοι πλουτεῖν. Statements like this were well known in both Jewish and non-Jewish works (see BAGD s.v. φιλαργυρία; Fee; Spicq; Dibelius-Conzelmann). The closest is “The love of money is the mother-city of all evil” (widely attested in Greek antiquity). It may be that Paul is citing a common proverb because it expresses truth (cf. Acts 17:28–29), or that he or the Christian community has modified such a proverbial statement (cf. again Acts 17:28–29) with the key word “root” (ῥίζα), or that he or the Christian community has coined this proverb. The second of these alternatives seems most likely, since proverbial statements about love of money are known, but none with the word “root” (ῥίζα). This may explain why the NT hapax φιλαργυρία, “love of money,” “avarice,” is used here rather than the term Paul usually uses for such, which is πλεονεξία. An equally plausible solution would be that Paul, as one who knows and uses the verb φιλέω, who uses at least five words compounded with the root φιλάο-, and who also uses the word ἀργύριον, knows, or has formed, a word like φιλαργυρία.
φιλαργυρία, “love of money,” is what characterizes one who places his or her heart on possessing money, so violating the first commandment of the Decalogue, the commandment to love God (cf. Mt. 6:24 par. Lk. 16:13). Because this is an expression of sinful self-love in opposition to love of God (cf. “lovers of self” and “lovers of money” in 2 Tim. 3:2–4, a list concluding with the contrast “lovers of pleasure rather than lovers of God”; cf. also Jas. 4:4; 1 Jn. 2:15), it also violates the inherently related second great commandment (Mt. 22:39) to love one’s neighbor.
The proverb states the matter as a principle: “Love of money is ῥίζα πάντων τῶν κακῶν,” with these latter words first in the sentence for emphasis. Does Paul mean by ῥίζα the root” (KJV, RSV, NEB) or “a root” (NASB, TEV, NIV)? Field (Notes, ad loc.) argues that the nature of the saying demands “the,” understood as a hyperbole, and gives examples of anarthrous forms for which the English idiom would require the article. This perspective may be correct, but it is still noteworthy that the article could have been included and is not and that our understanding of the verse does not necessitate that the article be understood. In the light of these considerations, it is best not to insist on “the root” (cf. Kelly). ῥίζα denotes that from which something grows (cf. BAGD s.v. 1b) and thus the term itself designates love of money as a radical source of evil. This note is further emphasized by ῥίζα being placed first in the sentence.
Should the phrase πάντων τῶν κακῶν be understood as “all evils” (RSV) or as “all sorts/kinds of evil” (NASB, NIV, TEV)? Paul presents this proverb as substantiation of what he has just written in v. 9, where he says that “the will to be rich” causes one to fall into “many desires” (ἐπιθυμίας πολλάς). He does not assert that “all” desires result from “the will to be rich” but that “many” do. It is likely that the same perspective is intended by πάντων τῶν κακῶν here, thus “all sorts of evil.” This is borne out by Paul’s previous use of πᾶς for all sorts of human beings rather than for each and every person (2:1b, 4, 6; 4:10). So the proverb says that all sorts of evil have as their root source the love of money. κακῶν is used here in the moral sense, “evils.”
Paul indicates in a relative clause that “some” (τινες) have longed for money and have wandered away from the faith and seriously harmed themselves. τινες, used here of “certain” definite people, referred to indefinitely (BAGD s.v. 1a β), may apply not only to various people Paul knows in the church at Ephesus but, in particular, to the false teachers, who are never far from his mind when he sets forth these principles. It is Paul’s reference to them as those who suppose that godliness is gain (v. 5) that precipitates this section. Furthermore, he began the section on the false teachers by referring to every such false teacher with τις (v. 3). Therefore, τινες in v. 10 may well return the discussion to the beginning in v. 3.
ἧς refers grammatically to its antecedent φιλαργυρία but logically only to the second half of the compound word, i.e., to ἀργύριον (so BAGD s.v. ὀρέγω). The verb ὀρέγομαι is used figuratively in the NT and here has the meaning “strive for, desire” or “reach for”; the participle is causal, giving the ground or reason for the action of the main verb ἀπεπλανήθησαν, which in its passive form means “wander away from.” The preposition ἀπό indicates that from which they have separated (BAGD s.v. I.1), namely, τῆς πίστεως (1:2, 19; 3:9; 4:1; 5:8). Here πίστις with the article probably indicates the Christian faith in an objective sense that does not negate the subjective element of trust (see above on 3:9): Christianity can be referred to as ἡ πίστις because faith (trust) is such an integral part of becoming and being a Christian. Those Paul is referring to have strayed from “the faith” by straying from faith or trust in God and Christ as the central desire and love of their life (cf. 2 Tim. 4:10).
They have also (καί) done great harm (περιέπειραν ὀδύναις πολλαῖς) to “themselves” (ἑαυτούς). περιπείρω** (a biblical hapax found in Greek literature from the first century b.c.) means “pierce through, impale,” here used figuratively to convey a terrible reality: They have pierced themselves (ἑαυτοὺς περιέπειραν). Their reaching out after money has brought the previously mentioned foolish and injurious sinful desires into their life (v. 9b), and these desires are the means of these self-inflicted ὀδύναις πολλαῖς. In the physical realm ὀδύνη** is used of pains like those of a wound, fracture, stabbing, or cut. When used with reference to the soul, as here and in Rom. 9:2, it refers to “mental distress” or “grief.” It may refer to “the severe and piercing … self-accusations and pangs of conscience which will smite those who have defected out of love of money” (F. Hauck, TDNT V, 115; cf. also BAGD), of which Judas would be an example (Mt. 27:3–5), but if so would be, as in Judas’s case, “the sorrow of the world” that “produces death” (2 Cor. 7:10). More likely what is referred to here are the griefs that sins themselves bring on the sinner, whether or not the sinner has any pangs of conscience. Such a person may have sorrow over the effects of sin on his or her inner self and life situation, but no “sorrow toward God” and no repentance, since he or she has turned away from the faith (cf. again 2 Cor. 7:10). Paul says here that those griefs are “many” (πολλαῖς), as were the foolish and injurious sinful desires (v. 9, ἐπιθυμίας πολλάς).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KJV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57–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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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서론
 
1. 저자와 제목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등장하는 종말론이 다른 것처럼 보이고, 데살로니가 후서의 어조가 더 차갑게 느껴진다라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면밀한 검토를 해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쓴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데살로니가후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어조가 더 차갑다는 것은 상황의 변화로 인해서 좀더 강력하게 그들을 향해 책망을 했기 때문이다. 
 
Although some scholars today have questioned Pauline authorship of 2 Thessalonians, the unanimous testimony of the early church fathers supports Pauline authorship. The main reasons given by those who question Pauline authorship include: (1) The eschatology of 2 Thessalonians is regarded as different from that of 1 Thessalonians. Specifically, the sudden/imminent expectation of Christ’s return in 1 Thessalonians 4:13–5:11 is said to be inconsistent with the requirement in 2 Thessalonians 2:1–12 that specific signs must first take place. (2) The many commonalities between 1 and 2 Thessalonians are alleged to reflect literary dependence, which is regarded as inconsistent with Paul’s authorship of both. (3) Second Thessalonians supposedly has a colder tone than 1 Thessalonians. (4) Second Thessalonians 2:2 and 3:17 are thought to make best sense if written by a pseudonymous author.
A careful evaluation of these objections, however, supports the conclusion that Paul was in fact the writer of 2 Thessalonians. The duplicity entailed in the forgery hypothesis (see 3:17) is hardly credible. In addition, the above objections can be readily refuted: (1) Both letters portray the second coming as an unwelcome and sudden surprise for unbelievers (1 Thess. 5:2–3; 2 Thess. 2:8–12) but an anticipated and welcome event for those who are in Christ (1 Thess. 5:4–8; 2 Thess. 1:6–10; 2:13–17). Moreover, certain events precede the Lord’s return in 1 Thessalonians 5:3 as well as 2 Thessalonians 2:3–4, 9–10, and imminence can be seen both in 1 Thessalonians 4:15–17 and in 2 Thessalonians 1:7, 10; 2:1. A sudden and imminent eschaton was regarded as compatible with signs in Jewish and early Christian writings (e.g., Matthew 24–25). (2) Paul probably wrote 2 Thessalonians shortly after 1 Thessalonians, and may have referred to a copy of it. (3) The idea of a colder tone in 2 Thessalonians is exaggerated (see Literary Features). (4) Second Thessalonians 2:2 and 3:17 probably reflect Paul’s concern that a forged letter may once have exist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3.
 
 
2. 저작 연대
데살로니가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2차 선교여행기간 중 고린도에서 전서를 기록한지 몇개월 이후에 작성했을 것이다. 
바울은 전서를 기록한 이후 얼마되지 않아서 데살로니가의 상황이 급변했다라는 보고를 받았고(살후 3:11) 이를 위해 후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3. 주제
전서와 마찬가지로 후서의 주제는 재림이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배교와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말하고 있다. 이때에 주 예수께서 강림하심으로 불법한 자들을 폐하실 것이다.(2:8) 억눌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의를, 그들을 박해하던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진노를 베푸실 것이다.(1:5-10, 2:9-15) 
 
4. 목적, 계기, 배경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중 일부는 거짓된 편지를 통해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라는 거짓된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로인하여 미혹되어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일하지 않고 게으른 이들을 양산했고 교회는 이로 인해 여러 어려움들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은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이들을 안심시키고, 여러 박해에 직면한 이들을 격려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를 거부하는 일부 교회의 지체들의 게으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서신을 썼다. 
The “reasons” for the letter seem to be two, with perhaps a third one sitting in the wings, as it were. What is not easy to decide from our distance is whether one of these is more important than the other, or whether their order was dictated in this case simply by “new things first.” As for the “occasion” itself, most likely it had to do with the return of Timothy to Paul and Silas in Corinth with “mixed news” about the situation in Thessalonica. On the one hand, the issue of the disruptive-idle turned out to be a matter of much greater consequence than Paul had apparently assumed in writing the first letter; and if our reading of the order and timing of these letters is correct, then this issue was being addressed by letter for the first time in our 1 Thessalonians, the letter Timothy was just then bringing with him on that trip to Thessalonica. Thus with Timothy’s return Paul now needed to deal with it in greater detail and severity than had been done before; and probably it comes at the end so as to be “heard” better by those for whose sake it was written.
On the other hand, the matter of the timing of the “day of the Lord” had become a new issue altogether; and Paul’s own uncertainty as to how this misinformation had been presented as from him in some way (see the commentary on 2:2 and 15) only adds to its complication for later readers of the letter. But because this has happened, we also now become privy to a part of Paul’s eschatological perspective that he would otherwise have had no reason to include in any of his letters.
But almost certainly lying behind the tensions created by these two matters is the increasing severity of the outside persecution that Paul deals with in the “thanksgiving” in 1:5–10. Whereas this material also adds to our larger understanding of his eschatology as such, one should never lose sight of its first purpose—to reassure these beleaguered believers that their persecutors have their own divinely appointed destiny. And therefore, even though such knowledge would not necessarily lessen their present pain, it should have served as comfort to know that God has not forgotten them, while at the same time it reassured them of God’s ultimate justice regarding their persecutors.
All of this is to say, then, that even though this is not the most significant of the Pauline letters in terms of our overall theological and ethical/behavioral insights into his gospel, it is not thereby so irrelevant as to assign it “cinderella” status among his letters. Here is another Pauline moment which as a whole helps us better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final outcome of the gospel itself, while at the same time giving us insight into the “everyday” nature of living Christ in a very pagan culture.
 Gordon D. Fee,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9), 241–242.
 
 
5. 문예적 특징
본서는 일반적인 서신서의 양식을 따른다. 인사말로 시작하여 기도와 축도로 끝난다. 본론은 일련의 주제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에 비하여 흔들리고 거짓된 가르침에 빠져있는 이들을 향해 직설적인 명령을 통해서 책망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전서에 비해서 차가운 어조로 보이는 것이다. 
 
6.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히실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때 불신자들은 정죄를 받고 신지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l:5~10, 2:9~14).
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다(1:10, 12, 2:14).
3)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과 인류의 마지막 반역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2:3~4, 9~12),
4) 불법의 사람은 복음을 거부한 모든 들을 속여서 예수님이 재렴하실 때에 확실히 심판받게 할 것이다(2:3, 6~12).
5)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의 자비심을 이용해선 안 된다 (3:6~15).
 
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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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서론
 
데살로니가 : 로만 마케도니아의 수도, 현재 그리스의 데살로니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분화한 동서 방향의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자연 항구에 위치해 있었다. 
 
1. 저자와 제목
본문 1장 1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이다.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한 선교팀임을 소개함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러 오지 않고 디모데를 보낸것에 대한 실망을 상쇄하기 위함일 것이다. 
 
2. 저작 연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이 2차 선교여행기간 중(행 18:1-18) 고린도에 18개월 머무는 동안 기록한 것으로 본다. 행 18:12절에 언급된 갈리오라는 총덕은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델파이시에 보낸 서신의 내용과 일치한다. 당시 갈리오가 51-52년경에 총독으로 재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주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재림은 이 책에서 장마다 언급된다(1:10, 2:19~20, 3:13, 4:13~18, 5:1~11, 23~24) 예수님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산 자들과 함께 꿀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4:15~17). 불신자들은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노에서 구출되어 진노 대신 구원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1:10, 5:2~4, 9~10). 성도(‘거룩한 자들’)로서 재림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이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며 (3:11~4:8, 5:23)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시는 이들의 삶 속에서 거룩함이 생겨나게 히실 것이다 (5:24).
 
4. 목적, 계기, 배경
사도행전 17장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했고 많은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과 이방인들이 믿고 따랐다. 하지만 유대인들중 바울을 시기하는 이들이 바울을 공격하였고 가이사에게 반역을 한다는 명분으로 구금하였다가 풀어주었다. 이후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 무리를 보냈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게 하고 아덴으로 이동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자들이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걱정하여 소망없는 슬픔에 빠졌다(4:13) 이에 바울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재림때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재확인 시켜주었다.(4:13-5:11) 뿐만 아니라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않고 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부양해 줄 것을 기대했는데 이에 대해서 성실하게 자기일을 다할 것을 충고한다.(4:10-12; 5:14; 살후 3:6-15)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의 진정성을 강조했고(1:5; 2:1-12)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것임을 설명했다.(3:3-4) 또한 최근에 회심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의 성적인 거룩함(4:3-8)을 강조했다. 
 
5.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진노는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임한다 (2:16, 5:3).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다 (4:14, 5:10).
3)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진노가 아닌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1: 10, 5:4, 9).
4) 죽음을 겪는 그리스도인도 재림에 온전히 참여할 것이다 (4:14~17, 5:10).
5)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은 역사 이전에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으며 이 땅에 사는 내내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심 받는다(1: 4, 2:12, 4:7, 5:9, 24).
6) 그리스도인은 전반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3 : 13, 4:3~8, 5:23).
7) 그리스도인은 일해야 할 의무를 회피해선 된다 (4:9~12, 5:14).
8) 복음의 신뢰성은 복음 전파자들의 진실성을 통해 확인된다(1: 5, 2:1~12).
9) 특별히 고난 가운데서의 기쁨은그리스도인의 한 특징이다(1: 6, 5:16).
10) 그리스도인은 예언된 새 언약의 실재를 경험한다 (4:8~9).
11)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이다(1: 2~3, 5:8).
 
6. 문예적 특징
이 서신은 일반적인 바울의 서신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이 편지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정, 바울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 등을 다룬다. 
이 편지의 뚜렷한 문예적 특정들은 다음과 같다. 강력한 변증적 자전적 요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쁨 가득한 감사의 표현, 펀지의 수신자들에 대한 반복적인 직접적 호칭, 일부 도덕적 권면마저도 재림 교리와 관련될 만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 각 장이 그리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점이다. 
- ESV 스터디 바이블 내용 정리
 
CITY OF THESSALONICA
There are four unique features of the city of Thessalonica that are important for understanding Paul’s letters to this place:
1. A Strategic Location. Thessalonica enjoys the best natural harbor in the Aegean Sea. The city was located at a juncture of the Via Egnatia (a major east-west Roman highway) and a road north to the Danube. These two geographic features caused Thessalonica to become the most populous (100,000 people) and important (provincial capital) city in Macedonia.
2. A Favored Status. As a reward for siding with the victorious Octavian in the Roman civil wars, Thessalonica was granted the designation “free city.” This favored status resulted in more autonomy over local matters, the right to mint its own coins, tax concessions, and freedom from military occupation.
3. A Unique Political Structure. As a free city, Thessalonica was allowed to keep its traditional city institutions. The lowest level involved the “citizen assembly” (“crowd” in Acts 17:5), and the highest level involved the city council, made up of unique officers called “politarchs” (“city officials” in Acts 17:6, 8).
4. A Religiously Pluralistic Setting. Archaeological and inscriptional evidence indicates the presence of various Greco-Roman deities, such as Dionysus, Asclepius, Aphrodite, Demeter, and Zeus. The Egyptian gods Isis and Serapis were also popular, as was the imperial cult with its worship of the Roman Empire. The city also housed a large Jewish synagogue consisting of “a large number of God-fearing Greeks and quite a few prominent women” (Acts 17:4). Most of the Thessalonian church had participated in these various cults before they “turned to God from idols” (1 Thess 1:9).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48.
 
데살로니가 시에 대한 4가지 특징
1) 전략적 위치 : 에게해 연안의 자연 항구로 동서로는 에그나티아 가도(로마의 동서 주요 도로)를 북쪽으로는 다뉴브강에 이르는 위치로 당시 10만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한 마케도냐의 주요 도시였다. 
2) 우호적인 지위 : 로마 시민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편에 선 대가로 자유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우호적인 지위는 지역 문제에 대한 많은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는데 자체 주화를 주조할 권리, 세금 혜택 및 군대 주둔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왔다.
3) 독특한 정치 구조 : 자유도시로서 데살로니가는 전통적인 도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가장 낮은 수준인 시민 모임(행 17:5의 군중)과 가장 높은 수준인 정치가(행 17:6, 8의 시 관리들)로 불리는 독특한 관료들로 이루어져있다. 
4)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환경 : 고고학 및 비문 증거는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 아프로디테, 데메테르, 제우스와 같은 다양한 그리스-로마 신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집트 신들인 아이시스와 세라피스도 인기가 있었고 로마 제국을 숭배하는 제국 숭배도 인기가 있었다.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수의 헬라인과 소수의 저명한 여인들’(행 17:4)로 구성된 유대 회당이 있었다. 대부분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살전 1:9)’전에 이러한 다양한 우상에 참여했었다. 
 
 
As a result of the support it lent to the Second Triumvirate in the civil war after Julius Caesar’s murder, Thessalonica was made a free city in 42 BC by Marcus Antonius (Mark Antony). This had several important consequences, as Jewett (Thessalonian Correspondence, 123) observes. First, it meant that the city was given a degree of local autonomy, as well as the right to mint both its own and imperial coins (see Larsen, “Roman Greece,” 449). Second, the city was promised freedom from military occupation and granted certain tax concessions. Third, it meant that the city did not become a Roman colony. This had two important effects: (1) Ius Italicum, which would have replaced local legal institutions, was not imposed, and (2) Thessalonica did not have to absorb a large settlement of demobilized Roman soldiers as happened at Philippi, Cassandra, and elsewhere. This naturally left the local ruling elite in control of the city with its traditional institutions intac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3.
 
데살로니가(Θεσσαλονίκη, 테살로니케). 현대의 테살로니키 또는 살로니카.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점유되는 몇 안 되는 그리스 도시 중 하나. 사도행전 17:1-13, 27:2; 빌 4:16; 딤후 4:10에 언급됨.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그곳에 기반한 초대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
서론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중해의 핵심 도시로 기능했다.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Cassander)는 BC 315년 무렵에 데 살로니가를 세워서 아내인 테살로니케("테살리아의 승리")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명명했다. 이 도시는 고대 테르메의 자리 또는 그 근처에 건설되었으며, 이 지역에 있던 약 25개의 다른 마을을 통합했다. 이는 그것이 초기부터 엄청난 규모였음을 보여 준다(Strabo, Geography. 7.7, 21; Papagiannopoulos, History, 14).
로마의 통치하에서(BC 167년–AD 395년), 데살로니가는 주요 무역 경로를 따라 있는 광대한 항구와 우세한 위치를 가진,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기능했다. 사도행전 17:1-9에 따르면,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 및 실라와 함께 빌립보를 통해 이르는 경로로 데살로니가를 방문했다(대략 AD 50년). 이러한 선교 활동의 결과로, 데살로니가는 영향력 있는 주교가 있는 중요한 교회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 도시는 초기 교회 공의회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비잔틴 제국 내에서 강력한 재정적, 정치적 독립체로 남아 있었다.
위치
도시의 남쪽 가장자리는 자연의 항구인 테르마이코스만에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으로 호리아테스 산맥을 향해 뻗어나가면서 가파르게 상승했다. 항구를 통해 에게 해와 연결된 데살로니가의 지리적 위치는 그 도시를 때때로 더 넓은 지중해를 괴롭히는 악천후로부터 보호했다. 항해가 가능한 악시오스 강과 할리아크몬 강의 하구도 데살로니가 주변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마케도니아 통치자들과 이후의 로마 지도자들은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 도시를 가치 있게 여겼다.
 Andrew R. Talbert, “데살로니가,”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지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에게 해(Aegean Sea)의 페르메스 만(灣)에 있던 항구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 동쪽에는 빌립보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동쪽에는 비잔티움이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를 거쳐 아폴로니아(Apollonia)와 뒤라큠(Dyrrhacium)이라는 두 도시까지 이어진 도로가 있었습니다. ‘비아 에그나시아(Via Egnatia)’라고 하는 이 도로는 로마의 중요한 군사 도로이며, 데살로니가는 바로 이 도로상에 있었습니다. 뒤라큠과 아폴로니아에서 바다를 건너면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부른디지움(Brundisium)이라는 도시에 이릅니다. 부른디지움은 ‘비아 압피아(Via Appia)’라는 고속도로를 통해 로마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와 이 두 고속도로를 통해 로마까지 이르는 중요한 군사 도로이자 무역로에 있던 도시입니다.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두란노, 2002), 11.
 
 
 
 
 
종교적 배경
그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에는 소위 신비 종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신비 종교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디오니소스 컬트(Dionysus-cult)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비루스 컬트(Cabirus-cult)라는 것입니다. 이 두 종교가 특히 아주 성행했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 컬트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으로 삼고, 성적 탐닉을 통해 디오니소스 신을 예배하고 그 신의 힘을 얻는 생식(生殖) 종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성적으로 심하게 문란했는데, 특히 바알을 숭배하던 종교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어서, 성적으로 지나치게 문란한 문화가 그 지역에 꽃피게 되었습니다.
카비루스 컬트는 카비루스라는 신이 무참히 살해되자 그 동생들이 카비루스를 왕으로 떠받들면서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신비 종교였습니다. 그 동생들이 데살로니가의 큰 산 밑에 카비루스를 묻었는데, 언젠가 카비루스가 부활해서 데살로니가로 돌아온다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교가 카비루스 컬트였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시가 위험에 처하면 부활하여 돌아온 카비루스 신이 데살로니가 시와 그 시민들을 구원한다는 신화를 중심으로 한 신비 종교였습니다.
실제 시민들의 삶에는 이 두 종교가 거의 혼합 종교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며 술을 많이 마시고 파티를 자주 하는 종교 생활이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시민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두란노, 200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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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23(2021-12-21)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올해 애프터 코로나를 기대했지만 우리는 위드 코로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강요당했습니다.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도리어 새로운 온라인의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는 시기였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2의 주제어는 ‘TIGER OR CAT’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호랑이가 될 수 있고 고양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Transition into a 'Nano Society' 나노사회

Incoming! Money Rush 머니러시

'Gotcha Power' 특템력

Escaping the Concrete Jungle - 'Rustic Life' 러스틱 라이프

Revelers in Health - 'Healthy Pleasure' 헬시플레저

Opening the X-Files on the 'X-teen' Generation 엑스틴 이즈 백

Routinize Yourself 바른생활 루틴이

Connecting Together through Extended Presence 실재감테크

Actualizing Consumer Power - 'Like Commerce' 라이크커머스ᅠ

Tell Me Your Narrative 내러티브 자본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2 정리(https://peterjoy.tistory.com/993)

 

1. 사역연구소 사역

연구소에서는 사역현장을 이해하기 위한 “입체적으로 죠이어 알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Part 1은 계층화, Part 2는 젠더화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작년의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의 청년들의 삶이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연구에 참여한 고은미, 최승진(외부 연구위원)에게 감사드립니다. 복음을 또한 우리의 사역의 대상을 너무 단편적으로, 납작하게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풍성하게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회자 북스터디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줌(Zoom)으로 진행했습니다. ‘센터처치’(팀 켈러)를 마무리하고 ‘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그만)과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최종원)를 함께 읽고 나누었습니다. 다른 분들과의 나눔을 통해서 혼자 읽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후에는 ‘풍성한 삶의 초대, 첫걸음, 기초(김형국)‘ 시리즈를 해볼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죠이선교회 내부적으로 성윤리 정책 1기, 2기 TF를 정희원 간사 주관으로 진행했습니다. 1기에서는 ‘성폭력 예방 가이드’를, 2기에서는 ‘성폭력 사건 처리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내부적인 의견 조율을 거쳐서 죠이선교회 성윤리 규정을 확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역연구소 사역

 

2. 죠이선교회의 사역적인 변화

저는 1998년부터 죠이에서 간사로 24년째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역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학원사역부 성공회대(1998-1999), 인하대(사랑, 은혜 00-03), 홍익대(2001-02)

천안지부 대표간사(2004-2006) 백석대, 상명대, 단국대, 호서대, 나사렛대 

경인지부 대표간사(인하대, 2007-2011)

- 해외사역부 디렉터(2011-2012)

- 밴쿠버 기독교세계관대학원(2013-2015)

- 학원사역부, 간사훈련원(연구소) 디렉터(2015- 2018)

- 사역연구소 디렉터(2019-현재)

 

올해는 손창남 대표님으로 리더십이 바뀌면서 조직 개편을 위해서 논의를 진행해왔습니다. 학원사역부, 해외사역부, 전문사역부, 출판사역부, 사역연구소, 법인사무국으로 운영되던 체제를 현장사역부와 지원사역부로 이원화하여 구조개편을 진행했습니다. 2021년 11월부로 현장사역부에는 신재호 간사, 지원사역부에는 정희원 간사가 부대표로 각각 세워져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원사역부에서 간사들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돕는 업무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역할은 아직 논의 중입니다. 내년 초 TOT(Training of Trainer)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공동체 내의 강사자원에 대한 역량강화를 도모하려고 하는데 좋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박기모 간사 사역들

 

3. 전주대 강의(기독교 윤리와 적성) 진행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로 인해서 수업을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매주 강의 영상을 올리고 Webex를 통해서 온라인 실시간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소그룹 토론 기능도 십분 활용해서 강의를 마치고 세부 세션으로 나눠서 조별 토론을 하고 이를 마친 이후 다시 함께 모여서 조별 발표를 듣는 것으로 진행했습니다. 비대면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온라인이지만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의미 있었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유년기에 고모와 여름방학동안 교회를 다녔던 추억들이 떠올랐고, 동영상 강의를 통해 학습을 하는데 워크북과 병행하여 진도를 나가니 이해도 쏙쏙되고 실시간 수업 때 피피티를 넘기면서 복습 차원으로 교수님께서 한 번 더 훑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실상 비대면 수업은 집중하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는데 학우들과 조를 이루어 매 주마다 그 주의 소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시스템이라 더욱 더 집중하게 되었고 팀 활동이라 책임감있게 참여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하고 토론을 통해서 학우들의 생각과 삶의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어 의미있었습니다.“

 

“기독교 과목이라고 해서 기독교에 관한 내용 (성경 등)만 계속 다룰 줄 알았는데 사회적 문제나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기독교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강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또한 그런 점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금방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자신도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비대면 수업이지만 조별모임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점이 좋았습니다.”

 

전주대 강의와 더기쁨교회

 

4. 가정과 교회

이제 한결이는 중학교 1학년, 한솔이는 5학년을 마치게 됩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주로 하고, 오랜 시간 둘만 있다보니 많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결이는 키가 부쩍 커서 엄마를 추월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올해 가정에서 제일 열심히 진행했던 것이 가정예배로 매일 저녁 ‘드라마 바이블’을 이용해서 성경읽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저녁시간이 되면 20-30분씩 성경을 함께 읽고 아이들이 읽은 내용 중에 인상깊은 내용이나 질문을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일독을 마치고 신약과 시편을 한 번씩 더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영적인 루틴이 가족들 모두에게 형성되기를 기대합니다. 

아내는 올해 1학년 부장을 맡아서 정신없이 한해를 보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1-2학년은 매일 등교를 진행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계속 긴장하며 업무를 진행하느라 많이 힘들어했지만 제가 옆에서 볼 때 아주 좋은 선생님임에 틀림없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저녁 아이들은 태권도 도장에 가고(아이들은 올해 3품을 땄습니다) 저와 아내는 산책을 나갑니다. 지금은 주 2-3회 정도 집주변 산책코스를 6km 정도 걷습니다. 이를 통해 건강을 잘 관리하고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교회도 코로나로 인해서 모임이 위축된 것이 사실입니다. 1-4월, 7-8월은 비대면 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올해 비대면이 강화되면서 줌을 이용한 금요 성경읽기 기도회 모임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교회도 드라마 바이블을 이용해서 공동체적 성경읽기 200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매주 금요일 함께 줌으로 성경을 읽고 읽은 내용을 나누고 개인 기도와 공동체를 위한 중보 기도를 진행했습니다. 내년은 교회 사역(일대일 제자훈련)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더기쁨교회’가 더 건강하고 든든하게 세워져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기도제목

1. 죠이선교회 지원사역부 안에서의 역할을 잘 찾아가도록

2. 전주대 강의 사역과 교회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3. 개인 경건의 시간을 잘 확보하도록

4. 아내(관절염)와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건강하시도록

 

2021년 12월 21일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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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의 선교(크리스토퍼 라이트, IVP)

 
이전이 책 ‘하나님의 선교’는 성경 전체에 대한 선교적 해석학에 관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성경 전체를 통합해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에서는 하나님이 구원과 및 자신과의 언약관계로 부르신 이들이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이 주된 질문은 ‘신구약에 걸쳐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이다. 
 
서론 
((교리*역사적 신앙고백)/교파적 차이 + 이단의 의심) - 교리 = ? (신학과 선교가 공통으로 지닌 부분)
 
신학과 선교의 관계 : 신학은 선교로부터의 입력과 출력 없이 진행되는 반면, 선교는 신학의 안내나 평가 없이 진행될 위험이 있다. “신학과 선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학은 교회의 선교와 관련없는 신학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학은 교회의 선교 속에서 생산되어야 하며, 교회의 선교에 영감을 불어넣고 선교의 틀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선교는 성경의 토양에 깊이 신학적 뿌리를 내리고 수행되어야 한다. 선교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적 기초가 없는 선교는 선교가 아니다. 
 
 
1부. 인생 최대의 물음
 
1장.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1. 선교인가, 선교 사역인가
1) 하나님의 보내심 : 선교(mission)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근에는 보내고 보냄받는다라는 개념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위해 보냄을 받는 것인가? (요셉, 엘리야, 예레미야, 예수님, 제자, 바울과 바나바, 디도, 아볼로, 수많은 익명의 형제자매들)
2) 하나님의 목적 :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mission, 사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이들은 실제로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서, 그분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선교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세계적인 백성이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3) 단수와 복수 : 선교(mission)라는 범주 아래에 다양한 선교 사역(missions)을 포함시킬 수 있다. 
- 과학(science)와 과학 활동(sciences), 예술(art)와 예술 활동(the arts), 스포츠(sport)와 스포츠 활동(sports) 
-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는 수많은 종류들이 있다. 한 종류의 선교에 대한 우월 의식이나 열등 의식은 건강하지 않다.(청년-어린이 선교, 빈민 선교, 문화 선교…)
 
2. 온세상
1) 하나님의 선교 목표인 온 세상
2) 우리의 선교 영역인 온 세상
3) 우리의 선교 무대인 온 세상 : 성속의 구분, 일의 세계, 공적 영역, 사업, 교육, 정치, 의료, 스포츠 세계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 백성의 선교 무대인가? 이 세계에서 전도하는 것만이 선교인가? 우리의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 ‘온 세상’이라는 단어는 지리적,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이다. 
 
3. 온 교회
1)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 신약에서의 교회의 선교는 구약 이스라엘의 정체성 및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신약 교회는 세계 선교의 과제를 수행할 때 실제로 신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사명을 가진 백성인지 주의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백성인가?
- 우리이 선교가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라면, 우리는 좋은 소식의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복음은 단지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3) 우리 선교의 우선순위와 한계는 무엇인가?
- 교회의 선교는 일차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 언어적 요소가 정말로 중요한 전부인가? 교회의 선교는 삶과 행동으로 그 메시지를 구현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때 이 문제는 선포(proclamation)과 현존(presence)간의 긴장으로 나타난다. 또는 말(words)과 행위(works)간의 긴장으로 나타난다. 이는 교회가 말해야 할 것과 되어야 할 것의 통합의 문제이다. 
 
4. 온전한 복음
1) 당신의 복음은 얼마나 큰가?
우리 선교의 핵심인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의 구속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복음을 개인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천국 문을 통과하게 해주는 전자카드 정도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이를 교정해준다. 
2) 다른 이름은 없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의 유일성에서 나오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 안에서 우리에게 최고로 계시되었다. 이것이 우리 선교의 근원이며 또한 우리 선교의 내용이다. 다른 이름은 없다.(행 4:12)
 
 
2부 우리가 찾은 대답들
2장. 자신이 속한 그 이야기를 아는 백성
1. 세계 선교와 성경 이야기
많은 이들이 선교를 대위임령에서 시작하지만 실제 주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이 교회의 선교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또한 당시의 다른 종교나 철학들이 대답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약간의 진실일 뿐이다. 예수님의 최초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1) 그 이야기 알기
최초의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그 이야기, 구약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행 15장의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사건으로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위임령을 언급함으로 해결한것이 아니라 아모스 9장을 인용함으로 예언서의 그 이야기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바로 그날 오후와 저녁에 구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셨다. 
2) 메시야와 선교
첫번째 강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구약 정경 전체를 들어서(모세와 모든 예언자의 글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메시아이신 그분을 가리키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실상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는 방법이 되는지 설명하셨다.(눅 24:13-27)
두번째 강의는 구약이 이끄는 곳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눅 24:44-48)
구약은 예수님께로 이끌 뿐만 아니라 열방 선교로 이끄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2. 그 이야기를 전체로 보기
이 책은 ‘교회의 선교를 위한 성경신학’을 추구한다. 
 
성경이야기의 네가지 중요 부분(창조, 타락, 역사속의 구속, 새 창조)
 
1) 창조
성경은 단순히 우리의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심판 날에 살아남는 방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창조에서 시작해서 새 창조로 끝난다. 창조는 세계관의 기초 질문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2) 타락
인간이 불순종과 반역은 하나님 창조세계의 모든 면과 인간성과 지상에서의 삶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친다. 육체적으로 부패와 죽음, 지적으로 인간이 지닌 합리성의 능력을 자신의 악을 설명하고 변명하고 정상화하는데 사용하며 사회적으로 모든 관계는 분열된다. 또한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며, 그분의 선하심과 권위를 부인한다. 
 
3) 구속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세계를 포기하거나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구속하기로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의 부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역사안에서 그 일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 구약 : 아브라함, 출애굽, 시내산 율법, 가나안 정착(사사시대-군주시대), 예언자들 / 하나님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상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신약 :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육신은 선교 신학에 두가지 새로운 요인을 제공하는데 첫째는 도래한 하나님 나라이고 또한 둘째는 성육신의 모델과 원리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활동과 그분의 제자들의 선교는 삶과 가치와 우선순위를 변화시켰으며, 타락한 사회의 권력 구조에 급진적인 도전을 제기했다. 출애굽 구속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 내었듯이, 부활절 구속은 오순절 성령이라는 종말론적 선물을 만들어 내고 교회를 탄생시켰다. 
우리의 선교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두가지는 바로 성령의 존재와 교회의 존재이다. 
 
4) 새 창조  
심판의 실재는 복음의 일부로 악이 최종 발언권을 갖지 못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다. 
- '엄마 오신다’ 게임(시 96편-하나님이 오신다)
선교는 그 원대한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이 보장하신 이야기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창조는 우리에게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와 원리를 제공한다.
• 타락은 저주받은  땅의 현실과 인간  사탄의 사악한 마수 속으로 우리를 떨어뜨린다.
구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범위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특정한 사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구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그리고 기쁘시게 하지 않는) 실제 반응의 종류를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율법, 이야기예언자들, 지혜서와 이스라엘의 예배를 통해) 보여 준다.
성육신은 몸부림치며 싸우는 우리 바로 옆으로 하나님을 모셔 온다. 그리고 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고 대행하는 대리인이 것을 요구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화해와 사랑과 소망과 평화의 능력을 경험하고 공유하게 한다. 또한 도저히 구속받을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죄와 구속의 사역을 추구하게 해준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인도와 힘을 공급하심으로써 우리가 일상생활과 사회 속에서 참된 변화를 기대할 있게 한다· 그와 함께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 차원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해준다.
창조의 원대한 희망은 현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안에서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희망은 이미 드러난 미래의 모습으로 인해 현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형성한다.
 
3.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는 타락하고 죄악된 창조세계를 새 창조의 구속받은 세계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 복음을 거부한다. 복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찮은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통합된 세계관을 찾고 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없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창조 없이 십자가를, 또는 심판없이 구원을, 또는 정반대로 구원없이 심판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오늘날의 세계는 더 큰 복음, 성경에 기록된 온전한 복음, 바울이 나중에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경륜’(the entire plan of God)이라고 부른 것을 필요로 한다.” - 존 스토트 행 17장 설교중에서
 
성경 전체에서 교회의 선교에 대한 성경 신학을 끌어낼 수 있으며 끌어내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할 때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방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3장. 창조세계를 돌보는 백성
성경은 창조에서 시작해서 창조로 끝난다. 문제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끝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악과 죄로 황폐해지는 우주를 보시고 모든 창조세계를 완전히 구속하고 회복하기로 결심하셨으며,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것을 미리 성취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새 창조세계에서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의 창조와 새 창조라는 두개의 큰 기둥사이에서 성경은 창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1. 정복하고 다스리라-섬기고 보존하라 : 창세기 1-2장
태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해야할 것을 명령하셨다. 
1) 창조세계의 왕 : 창세기 1:26-28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세계를 통치하길 원하셨다. 땅을 정복하고(카바스) 나머지 피조물을 다스리라(라다)라고 하셨다. 땅을 정복하라는 농사짓는 일과 관련이 있고 다스리라는 단어는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책임을 묘사한다. 고대의 왕과 황제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의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자신의 형상을 세웠다. 그 형상은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시편 145편에서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지혜, 능력, 은혜, 자비, 신실함, 관대함, 공급, 보호, 정의 및 사랑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권의 특징과 가치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폭군이 아니라 선한 왕이 되어야 한다. 
2) 창조세계의 종 : 창세기 2:15
경작하다(아바드)라는 단어는 섬기다라는 의미이다. 지키다(샤마르)라는 단어는 어떤 것을 안전하게 지키다라는 의미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환경을 섬기고 돌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땅을 다스리는 요점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땅의 유익을 위함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하여’가 되어야 한다. 그 예배와 섬김의 첫 번째 요소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 왕으로서 나머지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비인간 피조물(말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정의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잠 31:8-9)
 
2.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위해, 영원히
1) 창조세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모든 피조물(생물과 무생물)은 이미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세계를 돌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목적에 동참하는 것이다. 
2) 인간의 삶과 창조세계는 완전하게 결속되어 있다.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지면 또는 흙을 뜻하는 단어는 ‘아다마’이다. 
땅은 우리에게 제공한다. 또한 땅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 
2) 하나님의 구속은 창조세계를 포함한다. 
우리는 창조세계 바깥으로 구속받는 것이 아니라, 구속된 창조세계 자체의 일부로서 구속받는 것이다.(사 65:17-25)
 
3.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교이며 십자가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창조는 그중 어디에 위치하는가?
1) 만물이 십자가를 통해 화해되었다. (골 1:15-23)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뿐만 아니라 창조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수단이다.(골 1:20)
개인 → 교회 → 세상 → 천국.  이것이 우리의 궤도인데 이 안에는 이원론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바울은 창조세계에서 시작한다. 
2)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좋은 소식
우리의 선교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에도 좋은 소식을 전한다.(롬 8:19-23)
결론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를 돌보는 것이다. 
 
4. 요약
그리스도인들은 친환경적인 방식(환경 보호, 지구 온난화를 대처)으로 살아내고, 생태학적 선교(피조물 돌보기, 서식지 보존등)를 고민해야 한다. 
 
 
4장. 열방에 복이 되는 백성
1. 열방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
바울의 복음 사역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유래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열방에서 아브라함을 닮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2.  창세기 1-11장의 암울한 맥락에서 살펴본 아브라함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이로 인해 창조세계 안에 확립된 모든 관계가 철저히 깨진다. 이후 점차 커지는 인간의 죄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가 거듭해서 나타난다. 뱀의 머리는 상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이 주어진다. 가인은 보호를 받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피조물을 언약 아래서 보존된다. 창조세계는 인간의 죄의 무게로 쩔룩거린다. 
창세기 1-11장에서 생생하게 전개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죽을 때 하늘나라에 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저주가 제거되고 생명나무로 이르는 길이 열리려면, 죽음 자체가 멸망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완수하기 위해 창 12장에서부터 계 22장까지 성경 이야기의 나머지 전체가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삶을 선교 전체의 발사대로 삼으신 것이다. 
 
3.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놀라운 소식 - 열방을 위한 복
창 12:1-3에서 복을 주다와 복이라는 단어(바락)가 다섯 번 나타난다. 이제까지 죄와 반역으로 심판과 저주로 기울어져있던 상황에서 복음 말씀하신다. 
1) 복과 창조세계의 선함
창 1장에서 하나님은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에게 복을 주시고, 여섯째 날 인간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 이처럼 창 1장의 복은 생육함, 풍성함,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거룩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바탕으로 창조세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창 12장의 복은 수직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속에서 사는 것이다. 한편 수평적인 면에서 볼 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뻗어 나간다.(라반과 야곱, 보디발과 요셉, 바로는 야곱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복은 자기복제를 하는데 이는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2) 역사 속의 복과 희망
선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복이 퍼져 나가는 역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역사다. 
3) 복, 구원, 순종
구원의 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언약적 순종의 반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 복이나 구원이 순종을 통해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그와 반대로, 복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해 확립된 언약 관계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순종은 복을 얻거나 받을 자격을 갖추는 방법이 아니라 복의 영역안에 살면서 그 복을 누리는 방법이다. 
 
4. 아브라함 : 하나님의 선교와 우리의 선교
1) 하나님의  보편적 선교 : 모든 열방(창 12:3; 18:18; 22:18; 26:4; 28:14)
2) 하나님의 특정한 수단 : 한 나라
한 나라가 선택 받지만, 모든 열방이 그 선택의 수혜자가 된다. 결국 그 한 나라가 한 사람, 메시아 예수에 의해 대표된 것이며, 그분을 통해 모든 열방에 하나님의 구속적 복이 임할 것이다. 
3) 선교를 위한 선택
한 사람을 선택함은 나머지를 거부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을 위한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모든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다. 
4) 선교적 교회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인가? 예수를 메시아요 구세주로 믿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씨에 포함되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다. 이처럼 교회는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받고 부름받은 백성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확산시키는 사명을 받는다. 
창 12장의 내용은 마 28장의 대위임령과 같다. 
선교적이 아니라면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5. 성경신학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메아리
1) 이스라엘의 예배와 구원 앞으로 나아오는 열방
시 22:27-28; 47:9; 67편; 72:17; 86:9; 87편; 96편; 102:15, 21-22; 117편
사 19:19-25; 45:22-23; 56:3-8; 60장; 렘 4:1-2; 암 9:11-12; 슥 2:10-11
2) 복음서에 나타난 아브라함
눅 13:10-16; 16:19-31; 19:1-10; 행 3:1-26
3) 바울의 복음에 나타난 아브라함
바울의 복음 신학과 선교 신학은 둘 다 아브라함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유대인이 아니라 모든 열방이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심으로써 아브라함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고 그분의 의와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다. 
4)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된 선교
계 5:9-10; 7:9-10; 22:2
 
6. 우리의 선교 모델인 아브라함
1) 떠나감-‘너희는 가서’
2) 믿음과 순종
 
7. 요약
‘우리는 누구이며(아브라함의 자손),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하나님의 약속된 선교에 참여)’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시작하는 대신에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인간의 죄와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작동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복을 가져오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물려받는다면 아브라함의 사명 또한 물려받는다. 가서 복이 되고 하나님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5장.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백성
1.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말씀
하나님이 이 백성,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열방이라는 역사적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그 선교를 수행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다.(창 18:19)
(창 18:19, 개정)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그에게 부과하신 책임을 상속할 자이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위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도리는 윤리적 기준에 따라 사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고 열방에 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윤리와 하나님의 선교는 완전하게 묶여 있다. 
 
2. 소돔 :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델
1) 열방의 불순종
소돔은 타락한 세상의 방식을 나타낸다. 창 18:20의 ‘체아카’, 부르짖음이라는 단어는 억압이나 침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 혹은 도움을 바라는 외침을 뜻하는 전문 용어이다. 소돔의 죄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성적 부도덕(창 19장), 고삐 풀린 우상 숭배(신 29:23), 유혈 사태와 부패와 불의(사 1:9-23), 교만과 냉담함(겔 16:48-50)로 표현된다. 이처럼 소돔은 억압, 학대, 폭력, 왜곡된 성, 우상숭배, 교만, 탐욕스러운 소비가 가득 찬 곳이었으며 궁핍한 자들에 대한 자비나 돌봄이 없는 곳이었다. 
2) 열방 가운데서의 순종
바울의 선교는 믿음과 순종의 공동체, 소돔의 도를 행하는 열방의 세계에서 야워의 도를 행하는 데에 헌신한 공동체, 주변에 있는 모든 소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변화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열방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행해야만 한다. 
 
2. 아브라함 : 하나님 선교의 모델
1) 임박한 심판 : 궁극적 축복
당장 필요한 것은 심판이었다. 하지만 궁극적-보편적 목적은 (언제나 그랬듯이) 축복이다. 
2) 세상을 위한 약속
천사들이 길을 멈추고 아브라함과 식사를 한 이유는(창 18:2) 이 노부부에게서 역사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야웨의 도 : 하나님 백성의 모델
핵심 구절인 창 18:19속에서 우리는 선택과 선교 사이에서 윤리를 발견하게 된다. 
1) 윤리 교육
야웨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뒤따르거나 어떤 사람의 설명을 따라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 10:12-19과 미 6:8은 율법 전체를 경외하라, 행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순종하라는 다섯 가지 단어로 요약한다. 
야웨의 도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이들에게 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을 그들에게 해주는 것, 좀더 상세히 말하면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에게 해주신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 가서, 그와 같이 하라. 
2) 의와 공도를 행함
⓵ 의 : 체다카, 어원적 의미는 ‘곧다’이다. 고정되어 있고 마땅히 되어야할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규범이나 기준을 의미할 수 있다. 의는 특정 환경과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⓶ 공도 : 샤파트(미슈파트), 광범위한 법적 활동으로 입법자로 활동하는 것, 분쟁중인 당사자들을 중재하는 재판관으로 활동하는 것, 누가 유죄이고 무죄인지 선언함으로써 심판을 선고하는 것등을 포함한다. 넓게 보면 바로 잡다, 잘못되었거나 억압적이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개입하여 고치다라는 의미이다. 
‘미슈파트’는 사람과 환경이 ‘체다카’에 따라 회복되기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슈파트’는 일련의 행동들, 즉 당신이 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체다카’는 일의 상태, 즉 당신이 이루고자 목표하는 그 무엇이다. 
이 두 단어는 함께 어울어져서 더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아브라함은 이 야웨의 도를 배우고 가르쳐야했다. 그는 어떻게 이것을 배울 수 있었는가? 
소돔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게서 억압당하는 이들의 고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셨다.(부르짖음-체아카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또한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셨다. 
3) 선교적 논리
창 18:19은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윤리적 삶의 목적을 설명하는, 근본적으로는 선교적 선언이다. 특히 윤리가 선택과 선교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윤리는 선택의 목적이자 선교의 기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나타내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동체가 실제로 존재함으로 인해 열방에 복을 전하는 하나님의 선교가 실현될 것이다. 
 
창 18:19을 선교적 논리에 따라 읽으면 다음과 같다. 뒤에서 부터 읽으면 
- 하나님의 궁극적 선교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열방 복을 가져오는 (선교).
-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의와 공도 가운데 야웨의 도를 따라 살도록 가르침 받을 공동체가 세상에 존재함으로(윤리)
-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어떻게 생겨날 것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창시자가 되도록 선택하셨기 때문에(선택).
앞에서 부터 읽으면
- 아브라함은누구인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인격적 우정의 관계를 맺으신 사람 (선택).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가? 소돔의 길을 따라가는 세상에서 야웨의 와 그분의 의와 공도에 헌신할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윤리).
- 무슨 목적이 있기에 아브라함의 백성은 그처럼 높은 윤리적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열방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실 있도록(선교)
 
하나님 백성의 삶의 윤리적 특성은 그들의 부르심과 그들의 선교를 연결시키는 중대한 연결 고리이다. 성경적 윤리 없는 성경적 선교는 있을 수 없다. 
 
4. 요약
분열되고 찢어지고 싸우는 교회는 분열되고 깨어지고 폭력적인 세상에 대해 말하거나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야웨의 도를 행하지 못하거나 진실, 정직, 정의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망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6장. 구속적 삶을 살도록 구속받은 백성
Are you redeemed? 당신은 구속받았습니까? 혹은 포인트를 사용하겠습니까? 
이 장을 통해서 첫째, 구속 경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의미했으며 그 위대한 구약 이야기가 어떻게 십자가 성경 신학을 위한 기초가 되는지, 둘째,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 얼마나 깊고 넓게 영향을 끼쳤는지, 셋째, 사명을 가지고 구속적으고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것이다. 
 
1.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함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구속자로 행동하셨고 출애굽 사건 자체가 구속 행위로 불린다. 출애굽은 신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취를 해석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1) 구속자 :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는 친족의 대변자
- 구속하다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되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어 동사로는 가알’, 명사로는 ‘고엘’이다. 이 단어는 친족 보호자, 가족 수호자로 번역된다. 
⓵ 살인자를 재판에 회부함(민 35:6-34)
⓶ 가족이 빛이나 종노릇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줌(레 25장)
⓷ 형제의 이름을 보존함(신 25:5-10; 룻 3:9-13)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고 옹호하고 해방시키기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시고, 얼마의 비용이 들든 지불하실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 
2) 출애굽 : 노예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출
⓵ 정치적 차원 : 거대 제국안에 있는 이민자, 소수 인종. 정치적 노에 상태의 종식
⓶ 경제적 차원 : 그들에게 땅을 주는 것
⓷ 사회적 차원 : 애굽의 경제적 착취와 국가 주도 학살로부터 이들을 보호하여 새로운 사회를 출범
⓸ 영적 차원 : 노예로 섬기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것 모두 ‘아보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출애굽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출애굽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상태에서 언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3) 출애굽 : 총체적 모델
출애굽의 동기는 이중적인데 첫째는 잔인한 억압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어린 관심, 곧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 때문이고 둘째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출애굽 형태의 구속은 출애굽 형태의 선교를 요구한다. 
4) 십자가 : 적대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
구약과 신약에서 구속은 하나님이 그분 백성의 위대한 대변자로 활동하셔서, 전능한 힘을 행사하시고, 그 백성을 적대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비용 일체를 지불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2. 하나님의 구속에 반응하다. 
1) 기뻐하도록 부름받음
구속을 기뻐하는 것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적이고 또한 명령으로 부과된 의무였다. 
“당신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올바를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의무이며 우리의 기쁨입니다.”(영국 성공회 성만찬 기도문 중에서)
2) 본받도록 부름받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그들의 신적 ‘고엘’로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 고엘의 중요한 자격 조건 : 대가를 지불하는 긍휼, 정의에 대한 헌신, 배려하는 관대함, 구속적 결과를 낳는 행동
3) 노예 해방(신 15:1-18)
4) 관대함 
5) 구속과 희년(레 25장)
6) 용서와 빚
빛을 탕감받는 기쁨을 누린 자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구속의 경험은 구속적 삶을 낳아야 한다. 
 
3. 사명을 띠고 구속적 삶을 살기
출애굽은 개인적 죄사함의 영적 차원과 더불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심 및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교 신학들을 취한 탁월한 성경적 근거로 간주되어 왔다. 출애굽은 성경적 복음의 포괄적인 좋은 소식 안에 이러한 모든 차원을 통합시키는 성경적 기초다.
1)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음
‘모든 기독교 선교는 십자가에서 나온다. 십자가가 선교의 근원과 능력이며 선교의 범위를 결정한다.’
- 십자가 안에서만 최책을 지닌 죄인을 위한 용서, 칭의 및 깨끗하게 함이 있다. 
- 십자가 안에서만 악한 권세를 격파할 수 있다. 
- 십자가 안에서만 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사망이 궁극적으로 멸망한다. 
- 십자가 안에서만 가장 다루기 어려운 원수까지도 화해시킬 수 있다. 
-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는 마침내 모든 피조물이 치유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2) 출애굽 및 희년 공동체로서의 교회
우리는 십자가를 출애굽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를 출애굽의 성취로 본다. 
 
4. 요약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능력을 이미 경험한 자로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모든 형태의 억압과 노예 상태로부터 모든 창조세계와 인류의 궁극적인 해방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7장.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대표하는 백성
1. 그 이야기를 기억함
1)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이야기(출 19:3-6)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한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믿는 그 이야기에 달려 있다. 
2) 이제까지의 이야기
애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출 19:3-6은 이스라엘에게 정체성, 역할, 세상 속에서의 사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특권및 책임감도 함께 제공했다. 
 
2. 과거의 은혜 : 하나님의 구원 - 출 19:4
(출 19:4, 개정)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것에 대한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난 반응이다. 
 
3. 미래의 은혜 : 하나님의 선교 - 출 19:5b
(출 19:5, 개정)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 특별한 백성, 그러나 유일한 백성은 아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특정한 한 민족을 속박에서 구출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열방에 구원을 제공하시는 것이었다. 
2) 미완성 과업
우리는 하나님이 속박과 좌에서 구속하신 백성이며(과거) 하나님이 땅의 모든 열방에 복을 전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백성이다.(미래)
 
4. 현재의 은혜 : 하나님의 세상에 있는 하나님 백성 - 출 19:6
(출 19:6, 개정)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을 제사장이 되고 거룩해져야 했다. 
1) 제사장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간에 서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백성의 제물을 드렸다. 또한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일을 한다. 이는 구심적, 원심적 기능을 포함한다. 
복음전도는 제사장적 과제다.(벧전 2:9-12)
2) 거룩 
거룩이라는 단어, ‘카도스’는 다르거나 구별된다는 뜻을 지닌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독특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어 그 목적을 위해 불=ㄴ리된 상태로 있을 때 거룩하다. 
⓵ 거룩함 : 주어진 사실(레 20:26)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로 ‘거룩하도록’, 곧 그분 자신을 위해 구별되도록 선택하신 사람, 성도이다. 
⓶ 거룩함 : 주어진 과제(레 18:3-4)
다르게 행동하는 것, 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리의 소명이다. 
⓷ 거룩함 : 삶의 전 영역에서(레 19장)
이스라엘은 열방과 같기보다는 야웨와 같아야 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신들과 다른 하나님을 예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실제로 개인적-사회적 삶의 모든 차원에서 다르게 살고 행동했다.(마 5장. 빛과 소금) 선교의 필소 요소는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⓸ 언약 순종
제사장이 되고 거룩해지는 열쇠는 순종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시는 일 때문에 순종하도록 요구받는다. 하지만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5. 요약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구약이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과거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구악의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에 의해 전진하는 선교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려는 사람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그 은혜에 응답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대표하고, 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가운데 보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거짓 신들의 타락한 추함 및 무력함을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출 19:4-6을 상기시키며 벧전 2:9-12에서 ‘열방 가운데서 선한 삶을 살라’라고 말했다. 
 
 
8장.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백성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미용(코스메오)이다. 코스메오는 사람이나 물건을 장식해서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딛 2:9-10)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지금까지의 부분은 후자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을 정말로 그들의 존재 및 행동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다. 
 
1. 호기심을 불러일으킴 - 신 4:5-8
(신 4:5-8, 개정)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1) 볼 수 있음
이스라엘은 세상 한 복판, 세 대륙(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한복판에 살았다. 

 

하나님 백성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들이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했다. 선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데 메시지를 전하는 자는 그 메시지에 의해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눈에 보여야만 한다. 
2) 비교할 수 있음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구약 율법은 공개적 조사 및 비교를 권하며 심지어 환영한다. 
‘메시지 담지자의 성품과 행위’안에 진실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3) 도전할 수 있음
우리의 선교는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과 우리가 사는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경계너머의 열방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볼 것이다. 
 
2. 모여드는 구도자들 - 왕상 8:41-43, 60-61
1)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14-21절) 
솔로몬의 통치시기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다. 큰나라가 되었고 풍부한 복을 주셨고 약속하셨던 그 땅에서 안전을 제공받았다. 
2)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이방인(41-43절)
성전의 기도에서 놀라운 개방성, 긍휼, 비전이 담겨있다. 
⓵ 가정
솔로몬은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평판을 들을 것을 가정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의 응답을 구할 것을 가정하며, 하나님이 외국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기를 원하실 것이라고 가정한다. 
⓶ 내용
솔로몬은 예수님보다 훨씬 오래 전에, 오직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을 위해 구한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도 보장하지 않았던 약속을 이방인들을 위해 해 달라고 구한다. 
⓷ 동기
그러면 하나님은 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방인의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 자신의 평판이 더욱 멀리 퍼져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선교의 가장 큰 동기는 주의 이름이 땅끝가지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동기라면 우리의 태도와 실천 또한 그 동기와 일치할 필요가 있다. 
3)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백성(60-61절) 
(왕상 8:60-61, 개정) 『[60]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61]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3. 감탄할 만한 매력 - 렘 13:1-11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입기 원하신다.(이름, 명예, 영광)
이스라엘이 열방 중에서 어떤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받게 되든, 그것을 실제로 야웨, 곧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입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입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기 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마치 여러달 동안 옷을 젖은 흙속에 넣어 둔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가져다주기는 커녕 수치와 모욕을 가져다주었다. 
 
4. 열방이 예배로 나아옴 - 사 60장
이사야 60장은 빛으로 시작해서 빛으로 끝나는 장이다. 
1)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신다.(1-2절) 
2) 세상이 하나님께 나아온다.(3-16절)
⓵ 열방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나아온다.(4, 9절)
⓶ 열방이 선물을 갖고 온다.(5, 9, 11절)
⓷ 열방이 예배하며 나아온다.(6, 7, 9, 13절)
3) 세상에 평화가 온다.(17-22절) 
 
5. 사람들의 인정을 받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눈에 잘 보이는 매력적인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 빛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 또 그 윤리적 빛의 특성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끌어들여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행 2:44-47, 빌 2:14-16)
 
우리가 복음을 단순히 선포하기만 하면 복음은 가시성이 부족하다.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가 영혼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육체, 상황,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복음은 신뢰성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음에 부족할 가시성이나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사랑을 그 자체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사랑을 필요를 볼 때마다 그저 섬긴다. 
 
6. 요약 
교회의 전도 사역은 세상을 위해 구세주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인데,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예들의 삶과 행위에 변화가 있어야 했고 그랬기에 그들이 전하는 교훈은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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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22(2020-12-30)

 

2020년 마지막 날에 서 있습니다. 올해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오다가 소식을 전합니다. 

코로나로 시작되었던 올해 초, 새로운 재확산의 위기를 맞으며 올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국의 해군 장교 스톡데일이 베트남 전쟁 중 포로가 되어 8년간 온갖 고문과 고초를 겪을 때, 포로수용소에서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번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이 지나면 풀려나겠지’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낙관론자들은 희망이 좌절될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자살을 선택한 반면, 비관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강한 생존의지를 보였던 부류의 사람들은 이 가혹한 포로 생활을 견뎌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희망을 가지더라도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캠퍼스 선교단체나 교회, 교육기관(초·중·고·대학교)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누구도 전에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새학기 신입생들을 만나 홍보 할 수 없고, 정기모임이나 제자훈련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모일 수 없는 상황, 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학교, 주일 예배를 온라인으로 진행해야 하는 교회. 이들에게 헛된 희망을 약속하기보다 이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올해 초 정희원 간사와 함께 고민하며 연구소의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를 다시금 새롭게 정했습니다. 이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사역해 나가려고 합니다. 함께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1. 주제구절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For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2 Corinthians 4: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 : 18)

 

2. 사역연구소의 비전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일로”

죠이선교회의 국내외 현장 사역을 담당하는 간사들을 케어하고 재교육하며,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급변하는 세상을 통찰하여 이 땅에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을 세워 하나님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지혜를 모색합니다. 이를 위해 훈련팀과 연구팀을 두어 훈련, 연구, 세미나와 스터디, 연합사역 등을 도모합니다.

 

3. 사역연구소의 미션 : CREATE

① Care (간사들을 케어하고)

② Research (이 시대를 연구하며)

③ Educate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고)

④ Associate (다른 단체들과 연합하여)

⑤ Train (함께 훈련하고 성장하며)

⑥ Empower (서로에게 동기와 힘을 부여하기)

 

4. 사역연구소의 핵심가치 : “R맞게”

① Responsible (책임감 있고)

② Relevant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하게)

③ Reliable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④ Rare-tem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을)

⑤ Reasonable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⑥ Resilient (굴하지 않고) 

 

올해 코로나로 모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양한 사역들을 진행했습니다. 언택트 사회에 Zoom과 같은 온라인 도구를 사용해서 시간과 거리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1. 고정공원(Ko 고은미의 고 / Jung 정희원의 정 / Park 박기모의 파알크)으로의 초대

고정공원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을 계절별로 2권(인문학, 비인문학 각 1권) 읽고 함께 나눕니다.  

- 봄 :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 피프티피플(정세랑)

- 여름 :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숨(테드 창) 

- 가을 :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아무튼 메모(정혜윤)

- 겨울 : 일하는 마음(제현주), 부지런한 사랑(이슬아)

 

2. 사역연구소 소식지

사역연구소에서 진행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소식지로 배부했습니다. ‘고정공원으로의 초대‘ 이외에 연구소에서 스터디한 내용이나 함께 고민해야할 이슈, 연구 자료들을 정리해서 직원예배를 통해서 간사들에게 나누고 이후 원하는 분들에게는 PDF나 웹진 형태로 나누려고 합니다.

- 소식지 1호 4월 : 고정공원(봄), 트렌드 코리아2020(MIGHTY MICE)

- 소식지 2호 6월 : 조직문화 개선 프로젝트(연구소)

- 소식지 3호 7월(전도) : 포스트모도니즘 시대의 전도(박선영), 복음 전도에 대한 대담(황재욱), 고정공원(여름), 새로운 복음전도는 어떻게 오는가(김성한), 그들로 질문하게 하라(박정욱) 

- 소식지 4호 11월 : 동시대의 비동시대성(경의영), 고정공원(가을)

- 소식지 5호 12월 : 트렌드 코리아 2021(COWBOY HERO) 

 

3. 연구소 스터디 & 목회자 북스터디 진행

연구소에서는 사역의 현장과 대상을 이해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책들을 선정해서 이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크리스토퍼 라이트),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팩트풀니스(한스 로슬링), 광야를 걷고 있는 그대에게(김유복), 트렌드 코리아 2021, Good to Great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좋은 조직을 넘어 위대한 조직으로“등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내용들을 잘 연구하여 정리해두었다가 적재적소에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목회자 모임은 대면으로 모일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진행하다가 도리어 코로나 상황에서 온라인(Zoom)으로 진행하면서 시간과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아서 2주에 한 번씩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지금은 다시 한 달에 한번 모임) 

센터 처치(팀 켈러), 팩트풀니스-Factfulness(한스 로슬링), 다시 성경으로(레이첼 에반스)를 읽고 함께 나눔을 가졌습니다. 사역에 빠져 있으면 환경에 매몰되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새로운 인사이트를 가지기 쉽지 않은데 좋은 책을 통해서 앎의 지경을 넓히면서 동시에 다양한 새로운 안목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4. 전주대 강의와 온라인 도구 세미나

전주대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코로나로 인해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새로운 강의 영상을 제작해서 올리고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만나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온라인 도구들을 접하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익힌 내용들을 기반으로 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언택트 사회로의 준비를 위해서 사역자들이 갖추면 좋을 온라인 사역 도구중에 Zoom, Webex, OBS 사용법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위 프로그램들은 온라인 모임이나 회의 진행, 동영상 녹화나 유투브 송출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도구들인데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직접 사용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5. 가정과 교회

이제 한결이는 6학년, 한솔이는 4학년을 마치게 됩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오랜 시간 둘만 있다보니 많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동성의 형제가 있으니 서로 잘 놀아서 다행입니다. 집에만 있으면서 주로 게임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하다가 자전거 타기를 시도했습니다. 중고 마켓을 통해서 자전거를 구입하고 아이들에게 헬멧을 씌워서 안양천변으로 라이딩을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10km 이후에 15, 20km 거리를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찬 바람과 햇살을 맞으면서 운동을 하고 나면 뭔가 모를 성취감과 아울러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온몸의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에 사용해보지 않았던 근육들을 사용하느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좀 더 연습해서 한강변을 나가 라이딩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내는 올해 연구부장 업무를 맡아서 많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학생들의 등교 일수가 수시로 바뀌고 이에 대응하느라 아주 바쁜 한해를 보냈습니다. 힘들어하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코로나로 피트니스 센터는 가지 못하고 가능한 매일 저녁 함께 걷고 있습니다. 

 

교회도 코로나로 모이기 어려울 때는 온라인(Zoom)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접속하는 것도 서툴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되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도 만나서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 찾아가는 성탄송을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한가정 한가정 온라인에서 만나 성탄축하를 함께하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하는 것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격려하고 주님의 나심을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새벽송 : https://youtu.be/jXx6pstRKFE)

 

6. 2021년을 준비하면서

6년간 죠이 대표로 섬겼던 김수억 간사 후임으로 손창남 선교사님이 대표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현사역진이 아닌 외부에서 대표를 세우는 것은 처음이라 쉽지 않지만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기대와 소망이 생기고 신나게 사역하는 간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기획중인데 ‘죠이 데카메론’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연구소에서 진행해볼려고 합니다. Zoom과 같은 온라인 도구를 이용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죠이어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마련해볼 생각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도해주시고 함께 동참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제목

1. 사역연구소에서 감당할 훈련, 연구들을 잘 진행하도록

  - 연구소의 비전에 맞는 사역들을 잘 준비해나가도록 / 죠이 데카메론을 기획중인데 잘 진행되도록

  - 1월 학복협 캠청연 정기포럼(1/18, 25)을 위해서

2. 죠이의 새로운 리더십체제에서 사역을 잘 조율해 나가도록

3. 개인 연구 시간을 잘 확보할 수 있도록

4. 아내와 양가 부모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한결이가 중학교에 잘 적응하도록 

 

 

 

2020년 12월 30일 목동 집에서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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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19  (0)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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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21(2019-06-25)

 

최근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20-30대들의 특징을 다룬 책으로 저자는 그들의 특성을 세가지 키워드로 정리합니다. “간단”, “재미”, “정직”입니다. 저자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로서 신입사원들을 연구하면서, 또한 소비자로서 20-30대를 의미있게 통찰했다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들의 특성에 맞게 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의 캠퍼스 현장의 사역의 대상인 “00년생”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역연구소에서는 

현재 죠이선교회 사역연구소에는 3명의 간사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훈련팀과 연구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사역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간사 모임 때 함께 모여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누며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서, 사역 현장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사 재교육차원에서 김수형 간사의 인도로 “JOY 간사님들을 위한 설교 클리닉”을 진행했고 C국 사역을 위해서 파송되는 간사를 위해서 긴급하게 4주간 “설교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3월에는 양승훈 교수님을 모시고 세미나와 “창조연대논쟁”에 대한 북토크를 진행했고 7월에는 최종원 교수님을 모시고 “초대교회 다시읽기 & 한국교회 미리읽기” 세미나를 기획하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5월에는 한국 부부상담연구소 이지영 부소장님을 모시고 “Imago식 커플 대화법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 연인관계에 있어서 공감적 경청과 대화의 중요성을 배우고 실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목회자 북스터디는 매월 한번씩 진행하는데 “창조연대논쟁”,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외 1권”, “90년생이 온다”, “초대교회사 다시읽기”를 가지고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목회자들과 책을 통한 공부와 나눔이 서로에게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모임 시간에는 함께 공부하는 유승범 목사님의 검단참좋은교회를 방문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라기는 연구소 차원에서 간사들과 우리의 사역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찾기 위해서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며, 타단체들과 만나서 대화를 통해서 접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사역의 대상들을 연구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김수형(10주년 근속), 정희원(20주년 근속) 축하 / 출판부 국제도서전에서

 

전주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수업

이번 학기에도 매주 수요일 저녁 기독교와 문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지난 학기는 수강인원이 28명이었는데 이번 학기는 38명으로 늘었습니다. 야간 수업이라 피곤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예상외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격려가 많이 됩니다. 지난주 종강을 하면서 설문을 진행했는데 기독교에 대한 이해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일반 학생들에 경우 기독교에 대해서 접하는 이야기들이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은데 수업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기독교의 중요 교리와 사회에 대한 섬김의 예들을 들으면서 생각들이 변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설문 결과 그림 참조)

섬김과 나눔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면서는 푸드뱅크에 라면을 후원하는 시간도 함께 진행했는데 여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습니다. 이번 주중에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보면서 채점을 하고 있는데 몇몇 학생들의 과제(유언장, 부모님께 사랑합니다 고백하기, 감사 제목 10가지)의 내용은 그 내용이 매우 솔직하고 감동적입니다. 이 수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던 친구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미 신앙이 있는 친구들은 조금 더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교와 문화 수업중에

 

기독교와 문화 강의평가 설문 문항 중에서

 

작년초부터 건강을 위해서 아내와 함께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슬링 운동”이라는 조금은 낯선 방식의 운동인데 천정에 매달린 줄을 이용해서 본인의 체중을 통해서 코어 근육들 기르고 몸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방식의 운동입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격일로 진행하는데 트레이너의 코칭에 따라 운동을 하는데 신기하게 운동을 하고 나면 온몸이 뻐근하고 아픕니다. 개인적으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몸의 부위와 근육들을 전체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도 이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공동체안에 리더나 멘토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가 선호하지 않는 방식의 영성을 훈련하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매주 토요일은 매우 바쁩니다. 아침에는 동네 조기 축구회(양천 FC)에 가서 운동을 하고 잠시 쉰 후에 주일 설교를 준비합니다. 매주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1월부터 로마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2주전에 로마서를 마쳤습니다. 1년 반동안에 걸쳐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지난주 부터는 에베소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교회론을 잘 다룰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되어서 준비하고 있는데 말씀을 통해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인 교회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첫째 한결이는 이제 5학년, 한솔이는 3학년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가 어찌도 이리 다른지. 서로 달라서 티격태격 대면서 잘 싸우면서 잘 놉니다. 가끔은 서로 치열하게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잘 싸워야 논리적으로 논쟁하는 것도 배우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4남매중에 둘째로 크면서 치열하게 말싸움을 잘 하지는 못했다라는 생각도 합니다.(T.T.) 아내는 올 해 학교에서 연구부장을 맡아서 아주 바쁩니다. 여러 가지 학교 행사와 교과과정을 준비하느라 야근이나 출장도 잦은데 그래도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성민, 이택환, 제임스 스미스, 김봉선 교수님과의 만남~~(만남은 축복입니다.)

 

 

기도제목

1. 사역연구소에서 감당할 훈련, 연구들을 잘 진행하도록

  • 사역 대상에 대한 연구를 기획하고 있는데 잘 준비되도록
  • 7/15일(월), 최종원 교수님, “초대교회 다시읽기 & 한국교회 미리읽기” 행사를 기획중인데 잘 진행되도록
  • 연구소 내의 스터디와 목회자 북스터디가 잘 진행되도록

2. 전주대 기독교와 문화 강사 웍샵(7/1-3)이 잘 진행되도록

3. 개인 연구 시간을 잘 확보할 수 있도록

4. 교회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말씀 선포와 성경연구모임 인도) / 새로운 모임 장소 물색

 

 

 

2019년 6월 25일 제기동에서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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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원제는 “How I Changed My Mind About Evolution”이다. 번역하면 '나는 어떻게 진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었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판의 제목은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이다. 아마도 조금더 도전적인 제목이 되기를 원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지적 여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둘 중에는 전문 과학자, 신학자, 목회자등 다양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진화라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신앙과 크게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지적 여정중에 그런 갈등의 시기를 통과한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는 독법과 자연을 읽어내는 독법이 같을 수 없다. 각각의 분야의 전문가로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우고 연구하고 또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제 그 창조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진행되었는지를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은 과학의 역할이다. 성경은 누가,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를 밝힌다면 과학은 언제,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해서 성경과 과학이 서로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갈등처럼 보이는 여러 삶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플때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면서 동시에 병원에 가서 의상의 진찰을 받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받는다. 아프면 오로지 기도만 해야한다거나, 병원을 가야만 한다는 배타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과 과학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25명의 저자들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은 영국의 톰 라이트가 쓴 “영국인이 본 미국의 진화 논쟁”이라는 부분이었다. 미국에서는 1925년 스콥스 재판 이후에 ‘창조와 진화’의 대결구도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유럽도 진화론의 공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그 강도가 특별히 컸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주의의 발흥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첨예한 편가르기의 경험이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톰 라이트는 미국 사회에서의 창조와 진화 논쟁은 단지 이 주제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노예제도의 정당성, 미국 흑인들의 사회적 위상과 관련된 상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곪아 있다가 과학 대 종교 혹은 진화대 성경의 논쟁으로 촉발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논점은 한국적 상황과 맞닿아 있다. 전세계적으로 젊은 지구론의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미국과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도 일제 치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과 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보수와 진보로 편가르기를 강요하는 시대적인 문화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투적인 젊은 지구론, 창조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톰 라이트의 미국에 대한 문제의식을 한국적인 상황에 적용해서 연구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논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 등장하는 모든 저자들이 표면적으로 혹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상은 바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성경의 주장과 과학의 주장이 갈등하는 것 같아도 그 갈등의 이유는 각각의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의 한계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겸손과 상호의존'이라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학문은 반드시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이라기 보다는 도그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진리를 밝혀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반대하고 거부하기보다 정말로 그러한가 상고하여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진화에 대한 내 생각도 한걸음더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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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18(2018-05-25)


지난주에 죠이 창립 60주년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 경황없이 지내다보니 올해 첫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GJC(Global JOYers Conference, 5/18-19, 팀비전센터)와 60주년 창립예배(5/19 오후3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지난 1958년에 한국 청년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죠이 선교회가 올해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매해가 모두 중요하지만 6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와 의미를 기억하면서 올해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해왔습니다. 작년부터 이 행사를 위해서 미주 지역을 방문하여 시니어 죠이 선배님들을 만나 뵙고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옛 영광을 넘어, 새 영광으로(Declare His Glory in the New Era!)”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행사를 기획하며 준비했는데 지난 4월말 역사자료실을 오픈했고 지난 주 GJC(Global JOYers Conference)와 창립 60주년 기념예배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이 두 개의 행사를 담당했는데 참 은혜 가운데 이 행사들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GJC는 김수형 간사가 맡아서 시니어 분들에게 많은 추억이 많은 장소인 불광동 팀비전센터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분들이 60-70년대에 주님을 만나고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던 장소인데 이곳에서 지난 60년의 시간을 돌아보고 새 역사를 열어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개회예배는 문정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주셨고. 저녁 패널 모임은 이상훈 교수님의 인도로 심상권, 장지희, 김현수, 조흥진, 김귀복 선배님이 패널로 과거 죠이에 대한 경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다음날 오전은 교육과 선교라는 주제로 최연신 목사님, 이병문 선교사님이 섬겨주셨습니다. 전체를 “죠이, 과거를 통해 미래를 모색하다”라는 소주제로 진행했는데 여러 행사들이 자연스럽게 이러한 흐름과 일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커피MBA의 최영하 대표가 직접 와서 커피 부스를 섬겨주어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향기로운 대화들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60주년 창립예배는 종로 5가의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성훈 간사가 전체 진행을 담당해서 진행했습니다. 1부는 기념예배, 2부는 비전 선포식으로 진행되었는데 1부 순서가 딜레이되어서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순서 진행자들의 노력으로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메시지는 김흥수 목사님이 축사와 격려사는 이태웅, 심상권 박사님께서 섬겨주셨습니다. 저는 1부 순서 사회를 보며 20주년 근속 시상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2008년도 50주년 기념식 때 10주년 근속을 받았는데 올해 20주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공동체 안에 필요한 역할을 잘 감당해내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축하 영상과 리뷰 영상, 축하 공연과 생일축하, 대합창등의 여러 순서들이 있었는데 이를 잘 맡아서 진행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아래 행사를 위하여 준비했던 영상과 뉴스 기사내용을 링크합니다. 

60주년 리뷰 영상 : https://youtu.be/W5Grvbfmr0s

60주년 웰컴 영상 : https://youtu.be/FK1wmPvoEEA

60주년 홍보 영상 : https://youtu.be/0uBEAZTALaw

CGNTV 뉴스 영상 : http://news.cgntv.net/player/home.cgn?c=102&v=122026&y=2018&m=05


이 정규 행사 이외에도 지난주(5/17)에 창립자 분들과 함께 하는 Fellowship Meeting을 세종호텔에서 가졌습니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창립자 분들과 시니어 선배님들을 모시고 먼저 이런 시간을 가진 것이 전체 행사를 부드럽게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행사를 마치고 이번 주에는 미주에서 오신 선배님들을 모시고 5/22-23 양일간 속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찬양(영어로)과 간증과 나눔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큰 행사를 진행하면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여러 선배님들의 열정과 흥을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올해도 매주 화요일마다 전주대에서 진로채플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2-4학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채플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게 하고 일의 의미와 직업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부족하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학생들 개인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으로 돌아보게 하고 바른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반기 신입간사훈련을 준비해야합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사역자를 말씀으로 세우고 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반기 신입간사 지원 절차가 잘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잘 준비하고 필요한 준비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죠이 창립 60주년 GJC와 60주년 기념예배를 잘 마친 것에 감사하고 이후 후속조치를 잘 하도록

2. 하반기 신입간사 훈련 준비를 위해서

3. 개인 연구 시간을 잘 확보할 수 있도록

4. 교회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말씀 선포와 성경연구모임 인도)

5. 건강을 위해서 아내와 운동을 꾸준히 잘 할 수 있도록

 

2018년 5월 25일 제기동에서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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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For circumcision indeed is of value nif you obey the law, but if you break the law, your circumcision becomes uncircumcision. 26 So, if oa man who is uncircumcised keeps pthe precepts of the law, will not his uncircumcision be regarded2 as circumcision? 27 Then he who is physically3 uncircumcised but keeps the law qwill condemn you who have rthe written code4 and circumcision but break the law. 28 For sno one is a Jew twho is merely one outwardly, nor is circumcision outward and physical. 29 But a Jew is one uinwardly, and vcircumcision is a matter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letter. wHis praise is not from man but from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Ro 2:25–29.

육신의 할례
25절) 만약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참으로 유익하지만 만약 율법을 범하면 너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네가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한다면 네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너에게 유익이 될 것이지만 만약에 그 율법이 명하는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는 네가 할례를 받지 않았었던 것과 같이 된다. 즉 무할례가 될 것이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증표로 그의 몸에 받는 것이다.(창 17:9-14) 당시 이방 사회속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들은 몸에 할례를 행하고, 음식 규정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기원전 2세기경 아티오쿠스 4세가 유대교를 낙인찍는 것으로 이 할례가 사용된 이후에 특별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 Circumcision. God instructed Abraham to circumcise every male in the Israelite household as “the sign of the covenant” (Gen 17:11) that God entered into with Abraham and his descendants (Gen 17:9–14). Circumcision became an important distinguishing mark of the people of Israel, gaining special prominence in the aftermath of the attempt of the pagan king Antiochus IV to stamp out the Jewish religion (167–164 BC). Many Jews in Paul’s day lived where they had to struggle to preserve their identity among pagans, so they emphasized outward distinguishing marks of their Jewish faith such as circumcision, dietary rules, and Sabbath observance. has value if you observe the law. Again, “doing” is what counts in God’s judgment of humans (see note on v. 7).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5.

- 신구약 중간기 시절, 아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하지만 이 결과로 도리어 할례는 유대인이 되는 확실한 징표가 되었다. 시약시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 예식이 바로 이 할례이다.
In the intertestamental period, Antiochus Epiphanes banned circumcision (1 Maccabees 1:48, 60–61), and as a result it was made even more the single definitive sign of being Jewish (see Schreiner 1998:137). In the New Testament period it was the concluding rite when a Gentile became a Jew; and when the sages “went over land and sea to make a convert” (Mt 23:15), the emphasis was on talking God-fearers into taking the final step of circumcision.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6.

26절) 무할례자,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기지 않겠느냐? 본문의 여기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의미론적 방식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한편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들이 율법의 명령을 준행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그들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주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Paul continued his emphasis on obeying the law rather than simply knowing what it teaches. In the previous paragraph Paul demonstrated that the possession of the law in and of itself did not grant the Jew a position of privilege. Now he said the same thing about circumcision130 unaccompanied by an observance of the law.   p 101  Circumcision did have value but only if a person continued to do what the law required.131 Otherwise circumcision was no better than uncircumcision. Fitzmyer comments that “Paul’s bold declaration, equating a good pagan with a circumcised Jew, would have been an abomination to Pharisaic ears.”132 Elsewhere Paul wrote: “Circumcision is nothing and uncircumcision is nothing. Keeping God’s commands is what counts” (1 Cor 7:19; cf. Gal 6:15). The Jew who habitually breaks the law133 has become for all practical purposes an uncircumcised pagan. What Paul taught here about circumcision for the Jew is equally true of baptism for the Christian. Both function as signs; they do not themselves effect what they signify.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00–101.

28절)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며 할례는 율법 조문에 맞춰서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영으로 해야한다.
"반면에 진정한 유대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되어진 사람이지 율법 조문으로 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유대인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2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진정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할례가 진정한 것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겉모습, 외양이나 종교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이 사람을 진정한 유대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진정한 할례는 겉으로,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면에, 심령의 할례만이 의미 있다. 진정한 할례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는 율법 조문을 기계적으로 지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유대인됨은 내면에 영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할례는 오래된 죄악의 성품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를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다.
- In the last paragraph of chap. 2 Paul summarized what it meant to be a real Jew141 and what kind of circumcision was considered authentic. People were not Jews if their Jewishness was no more than outward appearance. Going through the ceremonial activities of Judaism did not make a person a Jew. And real circumcision was not that which was merely external and physical. A person was a Jew only if he or she was one inwardly. The circumcision that counted was a circumcision of the heart (cf. Deut 30:6).142 Real circumcision was the work of the Spirit.143 It did not come through the mechanical observance of the written code.144 Authentic Jewishness was inward and spiritual. Authentic circumcision was the cutting away145 of the old sinful nature. It could be accomplished only by the sanctifying Spirit of God. Those who had experienced it received their praise from God, not from others.146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02.

바울은 왜 더이상 할례가 더이상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가르는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 속에서 몇가지 대조가 등장한다. 표면적/이면적, 육체/마음, 율법 조문/영, 사람에게서/하나님에게서.
- Paul then tells why (gar) circumcision no longer makes one right with God by differentiating between a professing Jew and a true Jew (2:28–29). One cannot be in right relationship with God merely by possessing the covenant signs of the law and circumcision. Such are outward or external realities, and they no longer make one right with God. Since Christ has come, it is the inward or internal reality that matters.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act of circumcision but circumcision of the heart that God demands. This was also demanded in the Old Testament, as in Deuteronomy 10:16 or Jeremiah 4:4 (“circumcise your hearts”); cf. also Jeremiah 9:25–26. Of course, Paul gives this an entirely new meaning, for this internal reality is now completely realized in Christ and made possible by the Spirit, and only in both can it occur. There are several contrasts here—outwardly/inwardly, physical/of the heart, written code/Spirit, from men/from God.* Each is important. For instance, the written code is the Mosaic law, and the Spirit is not the human spirit (e.g., nrsv, “it is spiritual and not literal”) but the Holy Spirit. As several commentators point out (Käsemann 1980; Moo 1996; Schreiner 1998), this is a salvation-historical switch—the Old Testament covenant centering on the law has now given way to the New Testament covenant centering on the age of the Spirit. Therefore, the true follower of God seeks praise not from people but from God, most likely again a reference to the final judgment (see 2:16). The message is just as important for our day as it was for Paul’s. It is just as easy today to center on the external (church attendance, activity or external piety) rather than on one’s relationship with God. As Stott says (1994:94), “Human beings are comfortable with what is outward, visible, material and superficial. What matters to God is a deep, inward, secret work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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