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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dWe give thanks to God always for all of you, constantly1 ementioning you in our prayers, 3 remembering before four God and Father g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hlove and isteadfastness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d ch. 2:13; See Rom. 1:8; Eph. 5:20
1 Or without ceasing
e Rom. 1:9; 2 Tim. 1:3
f See Gal. 1:4
g 2 Thess. 1:11; [John 6:29; Gal. 5:6; Heb. 6:10; James 2:22]
h 2 Thess. 1:3, 4; [Col. 1:4; 1 Tim. 1:14; Rev. 2:19]
i Rom. 8:25; 15: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1:2–3.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1:2–3.
2절) 바울은 인사말에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인을 모두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하였다고 말한다. 본문의 ‘모두’는 ‘판토테’라는 헬라어이고 3절의 ‘끊임없이’는 ‘아디알레이프토스’이다. 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without ceasing)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자세는 모두를 위해서, 항상 이었다.
또한 본문에 말미암아라고 번역된 ‘페리’라는 단어는 위하여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때문에로 번역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너희 모두를 위하여, 또한 너희 모두들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으로 인한 것이다. 바울인 1-2달정도 안식일에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그곳에 교회가 생겼고 이들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으로 인하애 바울은 감사하고 있고 기도할 때에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감사하다라는 표현은 ‘유카리스테오’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감사의 표현이다.(눅 18:11; 요 11:41) 바울의 감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감사해야할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감사의 이유를 제공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신앙에 굳게 서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꿰뚤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는 표현보다는 ‘기도할 때에 너희를 언급함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해보인다. 기억함은에 해당하는 ‘므네이아’는 기억, 언급, 거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3:6에서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본문 2절에서는 언급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바울이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시간에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상황을 기억하고 기도시간에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행위야말로 목회자,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문 2절의 마지막에 사용된 단어가 개역개정에서는 3절에서 ‘끊임없이’로 번역된 ‘아디알레이프토스’인데 이는 3절의 동사인 기억하다(므네모뉴온테스)를 수식한다. 따라서 2절과 3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언급함으로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3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이다.
- The main clause of v. 2, “we give thanks always concerning you,” is followed by three dependent participial constructions: μνείαν ποιούμενοι … μνημονεύοντες … εἰδότες (“making mention … remembering … knowing”). These give a rhythmic quality to the material in vv. 2–4. The participles are not, however, logically parallel since “making mention in our prayers” does not constitute grounds for giving thanks to God, while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 and “knowing your election” do.
ἀδιαλείπτως (“without ceasing”) at the end of v. 2 may go either with the preceding words, μνείαν ποιούμενοι (“making mention”) or with the following words, μνημονεύοντες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κτλ.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 at the beginning of v. 3. In opposition to UBSGNT and many commentators (e.g., Findlay, 19; Frame, 75; Friedrich, 211) it seems better to link this word with what precedes it since this is less disruptive to the rhythmic flow of the sentence (Rigaux, 361; cf. Best, 66). It then serves a parallel function to the πάντοτε of the main clause by explaining the manner in which Paul and the others “always give thanks” for the Thessalonian Christians, namely, by “constantly mentioning” them in their prayers.
UBSGNT The Greek New Testament, ed. Kurt Aland, Matthew Black, Carlo M. Martini, Bruce M. Metzger, and Allen Wikgre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31975.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74.
3절) 3절은 바울의 감사와 기도의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믿음, 사랑, 소망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망이 가장 마지막의 자리에 위치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세와 관련된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1)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투 에르구 테스 피스테오스) :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라는 의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본문에 역사라고 번역된 ‘에르곤’은 일, 행위에 해당되는 의미로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말과 태도와 행위를 통해서 외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약 2:26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했을때 행함이 ‘에르곤’이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역사, 우리의 행위로 드러나고 증명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짓되고 생명없는 우상을 가차없이 버리는 믿음을 발휘했고(9절),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중에서도(행 17: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발휘하였다(살전 3:8)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야고복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강조했다. 그 증거 본문으로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어서를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공격한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믿음의 역사를 말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들에 따라서 다른 강조점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 이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 사랑에 의해서 촉진된 수고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랑에 해당되는 단어는 ‘필리아’, ‘스톨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수고로 번역된 ‘코포스’는 피곤할 정도의 노동 또는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수고는 이타적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수고를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소망의 인내(endurance of hope-테스 휘포모네스 테스 엘피도스) : 이는 소망으로 말미암은 인내, 소망에 의해 고무된 인내라는 의미이다. 소망의 원형은 ‘엘피스’인데 이는 성도와 교회 가운데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빌 1:6) 이러한 소망이 있을때에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다.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는 ‘~아래에’에 해당되는 ‘휘포’와 ‘머물러 있다’에 해당되는 ‘메노’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 견디기 힘들지만 지고 있는 짐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소망의 근거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죄한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통을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성도는 죄 많은 세상에서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다가올 영광과 주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롬 8:23-25; 히 12:2)
- faith … love … hope. A common Pauline triad (cf. 5:8; Rom. 5:2–5; 1 Cor. 13:13; Gal. 5:5–6; Eph. 4:2–5). The prominent final position here belongs to hope, which seems fitting in a letter so concerned with the end times (1 Thess. 1:10; 2:12, 19–20; 3:13; 4:13–18; 5:1–11, 23–24). work … labor … steadfastness. These are the practical outworking of the Thessalonians’ conversion. The “work” the Thessalonians do is a result or consequence of their “faith.” So, too, their “labor” flows from “love,” and their endurance or “steadfastness” comes from “hop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5.
- 1:3 When Paul gives thanks to God for his readers he does so because he remembers their response to the gospel: μνημονεύοντες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καὶ τοῦ κόπου τῆς ἀγάπης καὶ τῆς ὑπομονῆς τῆς ἐλπίδος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toil of love, and steadfastness of hope”). This thanksgiving statement clearly serves as a word of praise. Rhetorically it is intended to create a positive emotion or pathos in the readers (on the use of pathos in rhetoric see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15) in order to make them well disposed to Paul’s parenetic advice (cf. Stowers, Letter Writing, 80). The well-known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recurs often in Pauline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f. 1 Thes. 5:8; Rom. 5:1–5; 1 Cor. 13:12; Gal. 5:5f.; Col. 1:4f.; Eph. 4:2–5; Heb. 6:10–12; 10:22–24; 1 Pet. 1:3–8, 21f.; Barn. 1:4; 9:8; Pol. 3:2f). Paul uses it here to express the essence of his readers’ experience as Christians. He does this by using each member of the triad as a subjective genitive to the verbal idea contained in the governing noun. Thus Paul remembers “their work that proceeds from their faith,” “their labor that proceeds from their love,” and “their steadfastness that proceeds from their hope.”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meaning can be distinguished between ἔργος and κόπος in v. 3. Both, in connection with their respective subjective genitives, refer to activities that mark the addressees as Christians in a pagan and hostile world.
“Your work of faith”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is of particular interest in the context of Pauline theology. The radical disjunction that Martin Luther claimed to have found in Paul’s writings between faith and human striving (work) and that led him to reject the letter of James as a “strawy epistle” needs careful qualification. In Galatians where Paul attacks “works” most vigorously and contrasts them with “faith,” he has a particular type of “works” in mind. He condemns those works proceeding from the Jewish Torah and what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calls “covenantal nomism” (cf. Gal. 2:15f.; 3:2–5). His attack on “works of the law” in Galatians was a theological polemic designed to distinguish the new religion to which he belonged from the mother religion from which it and he had come (though obviously Paul would not have articulated it this way). The loss of the original context of the debate, especially since the Reformation, has led to a fundamental misunderstanding of Paul and Pauline theology (see Wanamaker, “Case”). Our text clearly indicates that Paul did not conceive of Christian faith as radically opposed to works. For him Christian activity proceeds from faith, and thus he would probably have endorsed the views of Jas. 2:14–17. Paul does not specify what the “work of faith” consisted in here, but his readers probably would have understood it in terms of the totality of their new Christian life-style that distinguished them from the pagans around them and from their own past.
The expression “labor of love” (κόπου τῆς ἀγάπης), like the preceding phrase “work of faith,” cannot easily be given a specific content. Like much theological language it is evocative and allows the reader to fill in the detail from his or her own experience. Nevertheless, we may safely say that the love that Paul refers to is both his converts’ love for God and their love for one another (cf. 1 Thes. 4:9; 2 Thes. 3:5). Love was neither a mere emotion for Paul nor simply a social virtue, as Enslin (Ethics, 74) describes it. Instead, as Furnish (Love Command, 94) points out, for Paul love was “the necessary manifestation within Christ’s body of the new creation already underway in the working of God’s Spirit,” and like faith, it was inextricably linked to the activities that proceeded from it. It would appear from 4:10 that the Thessalonians had shown their Christian love toward their fellow believers in Macedonia (cf. 2 Cor. 8:1–5), and this may have been the specific fact in Paul’s mind as he wrote of their “labor of love.” Whether this is correct or not, Paul’s inculcation of love among his converts had an important social function, as we shall see later (see on 3:12).
The choice of ὑπομονῆς (“steadfastness”) to go with ἐλπίδος (“of hope”) would appear to have particular significance in the context of 1 Thessalonians. The letter makes it abundantly clear that Paul’s readers had experienced serious opposition from their fellow citizens (cf. 2:14). Nevertheless, they had remained faithful to the gospel (cf. 3:6) because their hope was fixed on the Lord Jesus Christ. Thus Paul uses the objective genitive phrase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our Lord Jesus Christ”) with the verbal idea contained in the noun ἐλπίδος: their hope was in Jesus, whom they believed would soon return from heaven to bring about their deliverance (cf. 1:10; 2 Thes. 1:3–10). Therefore, from Paul’s perspective it was their firmly fixed hope in Jesus Christ that gave them the strength to persevere in their new Christian beliefs and behavior in spite of considerable adversity from their non-Christian fellow citizens.
The concluding words of v. 3, ἔμπροσθε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πατρὸς ἡμῶν (“before our God and Father”), may go either with the preceding words “the hope of our Lord Jesus Christ” or with the participle “remembering” at the beginning of the verse. Bruce (12f.) argues in his comment on 1:3 that “before our God and Father” is too far removed from the participle to be taken with it and therefore takes it with “work of faith,” “labor of love,” and “steadfastness of hope.” But when he comments on 3:9, where “before our God” occurs in a context concerning prayer, he refers back to 1:3 and implies that the phrase relates in 1:3 to the participle “remembering” (68). This seems the better choice because, if the phrase is taken with μνημονεύοντες, it becomes clear that Paul’s “remembering” of the Thessalonians “before our God and Father” refers specifically to his prayers of thanksgiving for them. Thus v. 3 provides part of the grounds for his thanksgiving to God concerning the Thessalonians.
Barn. Letter of Barnabas
Pol. Polycarp, To the Philippian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74–76.
아래 NIV의 해석은 흥미롭다. 믿음의 의해 만들어진 역사, 사랑에 의해 촉진된 너의 수고, 소망에 의해 고무된 너의 인내라고 말한다.
- 3 We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g your work produced by faith,h your labor prompted by love,i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j in our Lord Jesus Christ.
g See Php 4:20
h Gal 5:6; 2 Th 1:11; Jas 2:14–26
i 1 Th 3:6; 2 Th 1:3; See 1 Co 13:13
j Ro 8:25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살전 1:3.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는 주체는 바로 본서의 공동발신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이다. 본문의 기억하다라는 ‘므네모뉴온테스’는 1인칭 복수 현재분사로 이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을 듣고 이를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래지 않은 기간동안 데살로니가에 머물렀음에도 그들의 소식으로 인해서 너무나 감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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