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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길을 묻다(최종원, 비아토르)

 

 
 
수도원이 개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함축하는 반면, 수도회는 역동성과 운동성을 포괄한다고 보기에 이 책에서는 ‘수도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부. 탄생
1장. 서론, 오늘 왜 수도회인가?
수도회 탐구 여정의 시작점에서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
마가복음 14:25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수도회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21)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를 염원한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막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수도회 존재의 핵심은 일상과 하나님 나라를 긴장속에 이어주는데 있다. 
 
수도회는 고립을 추구하는가?
수도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은 ‘혼자’라는 뜻의 ‘모노스’와 ‘장소’라는 뜻의 ‘테리온’이 결합된 용어다. 수도사를 나타내는 단어닌 ‘몽크’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풀어 쓰자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다.(22)
 
제국과 천국 사이에 선 나그네
그리스도교는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의 정점에서 탄생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제국에서 또 다른 꿈, 곧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를 꿈꾸는 것은 제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제국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보이는 제국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가치 충돌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핵심 이유였다. (25)
 
제국은 체제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안녕과 번역을 약속한다. 그 체제하에서 문명인과 야만인, 자유민과 노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은 종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화는 민족과 인종,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르쳤다. 나그네와 병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고 나눔늘 실천하는 삶을 그리스도가 가르친 인간관을 수용한 결과다. 그리스도교가 제기하는 인권과 평등의 가치는 노예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던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박애 정신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천이었다.(27)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제국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거주 외국인(resident alien)’으로,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일을 하늘나라의 '식민지 건설’로 표현했다. 바울의 식민지 유비를 빌리자면 거주 외국인들을 시온의 신을 알지 못하는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이 식민지는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문화의 섬이었으며, 거주 이방인들의 낯선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그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28) 제국의 정복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확산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건설은 철저하게 주변과 경계, 아래에서 형성되어 퍼지는 가치다. 
 
그리스도교가 만들어가는 식민지는 제국의 영토 안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더 높은 윤리와 도덕의 가치를 보여줄 책임을 지닌다…. 이 식민지에는 두가지 극단의 위험이 존재한다. 하나는 제국에 동화되어 식민지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 안에서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분리하여 고립되는 위험이다.(29)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하늘나라와 제국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수도회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도회야말로 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양립하는 현장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거센 저항이었다.(31)
 
오늘의 나와 무관한가?
고독 속에서 연대했던 수도사들의 가치와 지향을 우리 삶 속에 연결해야 한다. 
 
 
2장. 수도회의 탄생_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
4세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과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가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의 명과 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제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앙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결단 없이도 자기 편의와 향후의 기회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삶의 변화 없이 이교도의 가치관을 유지하니 교회의 질적 순도가 점점 떨어졌다. 
 
핍박받던 소수가 이제 주류 중의 주류가 되었다. 항상 제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던 가치 및 문화와 같은 방향에 서게 되었다. 점차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가 동일시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는 박해을 받았지만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수용했을 때 세속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고, 눈먼 교회는 제국의 권력을 나누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42)
 
교회의 두 가지 반응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에는 두가지로 반응했다. 첫째 제도 교회는 공인에 따른 변화를 환영하고 급속히 적응했고 둘째 일부는 그리스도교 공인과 그 이후의 교회 정책을 거부했다. 이 지점이 수도회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두가지 형태의 수도회
은둔 수도회 vs 공주 수도회
1) 은둔 수도회, 앵커라이트(anchorite) 혹은 은둔 수사((hermit)로 불린다. 창시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안토니우스이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마 19:21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35세 되던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래된 요새에 가서 20년을 은둔하며 살았다. 
 
2) 공주 수도회는 공동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케노비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코이노스’와 ‘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오스’의 합성어이다. 그들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사 공동체에서 산다. 창시자 파코미우스는 로마의 군인으로 전쟁중에 자신을 돌봐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섬김에 감화를 받고 작은 수도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나그네를 섬기는 돌봄 공동체로 순종을 어떤 가치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유럽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인 베네딕트 수도회에 영향을 준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수도사 개인의 내적 완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애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 수도회가 신적 음성을 듣기 위해 내면에 집중하며 완전을 갈망했다면, 파코미우스로 대표되는 공주 수도회는 타자 돌보기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긴장을 줄 공동체
 
 
3장. 수도사의 일상_기도와 노동, 하나님의 일이 되다
일상과 영성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기도와 노동
수도원에서는 여덟 차례 공동체 기도를 드린다(성무일도). 시 119편 164절과 62절. 
 
수도원의 기도는 읽기와 침묵으로 뒷받침된다. 독서를 통한 기도는 텍스트를 사색하여 몸과 영혼에 아로새기는 방법이며 침묵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67)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의 육체노동은, 수도사가 순종과 고행의 삶을 실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려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68)
 
또 다른 종류의 노동
야외 육체노동은 줄어들었지만 필경사들의 노동은 과중했다. 그 노동으로 생성된 책이라는 물성은 당대와 후속 세대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73)
 
유럽을 만든 회랑 안의 일상
삶이 물질로 환원되고 종교마저 내 유익을 위한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그 너머의 초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균형을 찾아갈 때 삶은 좀 더 내밀해지고 덜 흔들리게 될 것이다. 
 
 
2부. 역사
4장. 유럽을 만들다_아일랜드 수도회, 베테딕토회
무너진 제국과 수도회
초기 수도회주의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고 세속적 번영에 반동하는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났다.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 476년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손에 함락. 
 
아일랜드, 성인과 학자들의 섬
켈트 수도회를 특징 짓는 단어 : 금욕, 학문, 선교
- 고전 교육에 회의적이고 명상과 기도에서 성경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동방의 사막 수도사들과는 달리 켈트 수도사들은 학문과 교육에 열정이 넘쳤다.(84)
 
노섬브리아 궁정교사로 임명받은 앨퀸은 교약 교육의 기초로 3학(문법, 수사, 논리)과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을 정했다. 이시기 카롤링거 서체가 채택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들의 문화적 토대인 게르만의 가치위에 그리스도교를 융화하여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했다.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
켈트 수도회가 문명이 없는 황량한 산과 섬에 문명의 싹을 틔우고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면, 베네딕토 수도회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라 부르는 고전 문명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헤서 출발했다. 
베네딕토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가 50세가 지났을 무렵인 529년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설립했다. 베네딕토회 규칙의 가장 큰 장점은 금욕적인 닫힌 세계와 열린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감이었다.  기도, 노동, 학습을 강조했다. 견습 수도사 생활을 마친후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청빈’, 독신으로 사는 ‘정결’, 수도회의 규칙에 순종하는 ‘순명’을 약속하는 수도 서약을 한다.(95)
 
중심을 흔드는 주변부 공동체
수도회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세속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공동체, 주변부에서 중심을 파고들어 흔드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도회의 존재의미이자 목적이었다. 
 
 
5장. 유럽을 깨우다_클뤼니 개혁운동과 시토 수도회
교회의 암흑기
수도회는 본질적으로 세속과 의 긴장 속에 형성하는 대조 공동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클뤼니 개혁과 뒷모습
중세 성직자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이지만 동시에 세속 군주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가직이기도 했다. 
 
클뤼내 개혁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매매 금지, 세제 혼인 금지, 세속 통치자의 성직자 서임 금지문제에 천착했다. 
 
시토 수도회, 엄격한 수도 생활로의 회귀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가 추구했던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 회복의 핵심이라고 파악하여 베네딕토회 규칙을 문자 그대로 읽어내교, 고립속에서 살아가며, 매우 엄격하게 완전함의 이상을 추구했다. 
클뤼니 수도원이 예배를 수도회의 특징적 중심으로 놓고 전례의 방식과 철학을 발전시켰던 반면,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 규칙이 추구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에 더 치중했다. 
시토 수도회는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세속 후원자들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를 기증받아 공동체를 일구었다. 또한 시토 수도회는 중세 신비주의 영성과 성모 마리아 공경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시대정신을 담아낸 수도회 운동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당대 사회와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가 지닌 고유한 힘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비우는 데서 나온다. 
이 수도회 운동들을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 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6장.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_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스콜라’에는 학교라는 의미와 정예부대라는 의미가 있다. 
서유럽인들의 성지순례는 고해 사제가 부과한 벌을 이행하는 참회의 길, 또 자발적 종교적 헌신을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의 의미가 있었다. 
 
무기를 든 수도사들
‘성전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다. 성전 기사단은 용감한 전사로서 비무장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성전 기사단의 확산과 몰락
성전 기사단은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순례 여정을 만들고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하려는 유럽인을 위해 땅을 매입해주고 송금을 대신하고 필요한 비용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땅을 매입해 개간하고 정착할 수 있는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전 기사단의 문어발식 확장은 비판을 받게 되고 해산을 요구받게 된다. 이는 교황권과 세속권의 갈등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프랑스 국왕의 시도였다.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 구호 기사단
구호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 형제회’이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환자를 구호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위한 무력은 정당한가?
군사 수도회는 기사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투에서 부상한 이들을 치료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군사 수도회의 역할과 지위를 옹호했다. 그는 무장한 수도사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보았다. 
수도회가 국가나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보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종교의 이름으로 제국이 제기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주의, 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 같은 수도사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7장. 세속화에 급진적으로 맞서다_탁발 수도회
사도적 청빈의 거대한 바람
13세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칠성사와 화체설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성직자 중심주의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제도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교회 본연의 길을 잃었다고 판단될 때면 항상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등장하여 제도 교회를 정화시켜왔다. 
 
이들(발도파와 탁발 수도회)은 사도적 청빈 즉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을 추구했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타인의 은총과 신뢰를 얻으며 살았다.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의 발도가 주도한 운동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교 없이 설교하는 이들은 제도 교회와의 갈등을 일으켰고 1184년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형제가된 수도사
탁발 수도회는 수도회의 재산을 만들지 않았고 그 대신 대중들의 자비에 의존하는 탁발을 생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기존 수도회는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폐쇄 공동체에 가까왔다. 탁발 수도회는그 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13세기 프린치스코회와 도미티코회의 등장)
 
프란치스코회와 청빈의 딜레마
프란치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전쟁중 부상으로 투병하며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마 10장의 설교를 들으며 감화를 받아 절대적 빈곤의 실천을 선택했다. 탁발 수도사들이 빈곤의 가치, 무소유의 가치를 강조하면 할수록 수도회에 더 많은 기부와 헌납이 이루어졌다. 이에 수도원 운영을 위한 재정을 가지는 문제로 인해서 온건파 ‘콘벤투알’과 급진파 ‘영성파’로 분열되었다. 
사도적 청빈의 궁극은 물질의 소유뿐 아니라 물질을 엄어서서 이 땅의 권력과 힘까지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포기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도미티코회, 설교와 학문의 전문성
프란치스코회가 청빈이라는 사도적 삶의 실천을 강조한 반면, 도미티코회는 사도적 삶의 또 다른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강조했다. 
도미니코회는 당시 이단인 카타리파와의 논쟁과 설교를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카톨릭 대중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중세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이끈 수도회로 악명을 쌓았으며 이와 별개로 설교법, 웅변술, 교수법으로 중세말 대학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 상태에 대한 급진적 제고
교권의 전성기에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둥장한 탁발 수도회는 견고하게 구조화된 성직주의에 불만을 가진 대중이 추구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고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탁발 수도회는 화폐경제의 활성화와 신흥 도시의 등장이라는 원시 자본주의 속에서 그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 그리스도교가 선택해야할 방향이라며 급진적으로 이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제국 한가운데서 제국의 가치 논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가치로 살며, 이 땅에 천국의 식민지를 확장해가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 
 
 
8장. 닫힌 공간에서 피어난 영성_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공동체
여성, 이브와 마리아 사이
수녀원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서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독립성이 중요한 가치이다. 동시에 수녀원의 탄생은 악의 근원을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는 여성 혐오의 부산물이었다. 
 
여성 혐오와 차별로 기획된 공간
여성에 대한 남성의 깊은 불신은 하와의 불순종 범죄로 이 땅에 악이 들어왔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남성 중심 교회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얕잡아 봤다.
 
명예남성인가? 여성성의 대표인가?
빙엔의 히데가르트와 아시시의 클라라는 각각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현한 인물이자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목소리를 낸 인물로서 대표성을 지닐 만 하다. 
 
억압과 돌파
여성의 목소리에 위기 의식을 느낀 교회는 수녀원에 엄격한 고립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부정적인 힘 때문에 남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고 구원을 위협하기 때문이며 당시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에서 확산되는 여성들의 종교 활동때문이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종교성에 대한 여성의 대안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신비 체험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판단하는 종교재판에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남성 성직자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에게 불안을 느꼈고 이에 그들의 경험을 마법술과 동일시했다. 1487년 도미티코회 수도사인 야콥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라머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악명 높은 마녀사냥 교범이다. 
 
모순과 역설의 공간
중세 여성에 대한 담론은 악의 통로가 된 ‘이브’로서의 여성과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구원의 통로가 된 ‘아베’마리아로 나뉘어 있었다. 수녀원은 이브 곧 하와가 속죄를 통해 아베 마리아의 길을 걷길 기대하는 공간이었다. 
제한이 있고 자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의 힘의 원천이었다. 
 
 
9장. 종교개혁, 수도원을 없애다_수도원 폐쇄와 새로운 물결들
수도원을 나온 수도사들
마르틴 루터가 교황에 반기를 들며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결과, 카톨릭 유럽이 분열되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치 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개신교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이에 수도회주의 부정과 수도회 해산이 일어났다. 
 
개신교 개혁가들은 수도회가 지향하는 정신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수도원해산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여 수도원 재산을 국가가 몰수했다. 개신교 지역의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그리스도교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루터의 수도회주의 비판
수도회와 종교개혁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가치 회복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면, 수도회 경험이 루터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루터는 수도회주의가 지닌 근본적 결점을 현실 도피라고 지적했다. 
 
카톨릭 수도회주의가 소멸하면서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는데 이제 교회 내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사처럼 소명받은 삶을 살아야 했다. 
수도원이 추구하던 기도하고 노동하는 일의 가치가 개신교 지역에서는 일상의 소명으로 이어져서 일이 곧 기도가 되었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수도원의 가치를 담벼락 너머 세속의 일상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산은 카톨릭과 결별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세속 군주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과의 결별을 끌어낸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크랜머가 주도했다. 수도원이 보유하던 엄청난 부를 국유화하고 교회의 정치적 복종을 이끌어 내려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대조 공동체가 영원히 상실되었다. 
 
전위를 차지한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카톨릭 수도회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을 포함하여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삼았다. 예수회는 은둔하거나 정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격적인 방식의 선교가 핵심이었다. 
 
제3의 길, 재세례파
메노파, 아미시파, 후터파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재세례파 공동체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와 갈등관계를 보였다. 카톨릭 국가에서 유아세례는 종교적인 행사인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호적 신고였다. 재세례파는 교회를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구원자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기로 할 때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모든 종류의 폭력 거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들이 복음서에서 끄집어 올린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었다. 
 
진화한 수도회주의
개신교가 수도사직을 폐지한 것을 단선적으로 읽기보다는 수도회 정신이 카톨릭의 예수회, 개신교의 만인사제주의, 재세례파 운동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지닌다. 
 
 
10장. 이성이 종교가 된 시대_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로 가는 여정
프랑스 혁명(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클뤼니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 탈종교화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성의 해체를 도모한 사건
수도원 개혁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요구 : 수도원 토지문제, 존립 목적에 부합하는 수도원만 유지, 각 국가내 수도회의 주도권을 교황이 더이상 가질 수 없었다. 
 
혁명과 수도회 폐쇄
프랑스는 1789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했고 교회는 면세 특권과 십일조 마저 상실했다. 
1790년 성직자 공민헌장 :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고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오던 구제사업의 책임을 떠맡았다. 이때부터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등 호적 업무가 교회에서 국가로 이관되었다. 
침묵과 기도, 신비로 대표되며 1500년 이상 이어온 수도회 정신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이성, 혁명의 종교
프랑스 혁명 기간에 수도원에서 400만권 이상의 책이 불탔다. 책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파괴함으로써 과거 문화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의 의지대로 재구성하고 하는 시도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고 전통적 종교성은 이성과 합리의 시대, 인권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로 평가절하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세속화의 길을 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럽 역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수도회에 가해진 도전도 거셌다. 청빈, 순결, 순명이 대표하는 수도회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가치에 압도되었다. 종신 수도 서약은 시대에 뒤처진 인권 유린으로 매도되었다. 혁명이 몰아낸 것은 구체제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2천년 가까이 쌓아 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통도 혁명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길을 잃은 근대, 인간을 잃은 종교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전해진 것은 우월한 유럽의 가치였다. 그들이 실천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애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정한 인종주의였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우생학이 등장한 후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인간의 우월을 가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 그로 인한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확산 앞에서 모든 것은 물질로 환원되었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힘을 주창했다. 그는 놀이의 자발성, 상상력, 순수성, 비일상성이 건전한 창조성을 낳는 힘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놀이를 무가치하게 보는 관점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기보다 기계화된 세계의 부품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는 '일과 생산은 시대의 이상이 되고 나아가 우상이 되었다'라고 했다. 
비생산적인 기도와 침묵의 삶이 주는 가치, 성찰과 기도의 삶을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며 수도원을 파괴한 근대가 제거해 버린 것은, 어쩌면 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찰하는 힘이었다. 
 
 
11장. 잿더미에서 찾는 희망의 조각들_떼제와 라브리 공동체
저항하는 부조리 인간
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할 사건이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이므로 불안이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였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 긍정과 성찰 없는 진보의 폭주 앞에서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교회는 실존하는 고통에 참여할 능동적 의지를 상실한 채 추상적인 본질에 천착했다. 
제도 교회는 현실을 읽어내고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한 채 천상의 진비와 추상의 본질에만 매달렸다.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선교회는 유신론적 가치를 매개로 신존의 고민을 풀어나가려는 시도에 가깝다. 
 
화해와 떼제 공동체
프랑스 개신교인 로제 수사가 떼제에 정착, 1940년 시작된 이 공동체는 유대인 난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전후 기부를 거절하고 자급자족을 실천하며 수도회 밖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매일의 공동체 기도를 통해, 생활에서는 예배와 침묵을 통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스도인 간의 화해, 젊은 세대를 향한 복음 전도, 그리스도교 내에서의 창조성 촉진.
 
프란시스 쉐퍼와 스위스 라브리
라브리는 프랑스어로 피난처이다. 실존의 물음을 풀어가는 일에서 떼제 공동체가 주정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라브리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이다. 
 
라브리의 지향점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다. 라브리의 존재 목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가 인격적이고 무한하며 실재하는 절대자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는데 있다. 
쉐퍼는 그리스도교와 일상의 삶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합리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라브리는 시대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질문이 달라지고 고민이 중층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쉐퍼의 답변은 단순하고 도식화되어 있다. 단순함 속에 의외의 힘이 있지만 단순할수록 자칫하면 전투적이 된다. 세상 문화는 야만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치없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다. 
 
한계와 의미
그리스도교는 힘이 아니라 갈망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본원적 가치를 향한 갈망 말이다.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수도회 영성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맞춘 인물은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이다. 
수도회주의는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가치로 돌아가자는 복고적이거나 반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조각을 찾자는 것이다. 
 
 
3부. 유산
12장. 예것을 익혀 새것을 깨닫다_베내딕토회 규칙의 현재적 의미
왜 오늘 베네딕토회 규칙인가?
베네딕토회 규칙은 독창적인 문서라기 보다는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가지 수도 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유연성, 개방성, 탄력성
 
공동체 만들기
베네딕토는 허물과 결점이 명백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영성이 구현될 수 있다고 이해했다. 베네딕터회는 기도와 노동, 공부, 식사와 휴식, 수면시간등을 균형있게 배치했다. 
 
듣기 위한 침묵
상대적인 침묵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자 말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는 성찰이다. 
침묵의 목적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듣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침묵과 대조를 이룬다.(눅 22:61-62)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남이시기도 하다. 기록된 말씀 못지 않게 비언어적 텍스트, 침묵의 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침묵으로 완성되었다. 
 
청빈의 의미
베네딕토회가 말하는 청빈이란 개인의 재산권 대신 공동의 소유권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청빈의 핵심은 삶의 방향성이다. 순결과 복종 역시도 우리 인간이 가진 말초적인 육신의 욕망과 힘에 대한 재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무모하게 시도하는 장소다. 이성과 합리, 이 땅의 구조를 넘는 불가능에의 요구를 실천하는 장소다.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교회가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때에 체험하는 신비다. 가난이란 물질이 주는 영향력을 포기하는 저항이다. 
 
복종, 부름받은 대가
복종은 결국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참다운 복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란 값없는 은혜를 남용하는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제자되기란 값없는 은혜를 향유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삶이다. 
자본과 소비 중심의 세계에서 단순한 삶, 소박한 삶을 사는 것도 복종의 한 모습이다. 
 
환대, 수도회 정신의 정수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타락한 세속을 멀리하는 공동체와 세속에서 찾아오는 낯선 나그네를 기꺼이 맞아주는 공동체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라는 것은 긴장을 유발한다. 
 
오늘에도 적용가능한가
현대의 소비주의, 욕망의 무한 긍정, 성취 지향의 문화에서 청빈, 순결, 복종, 환대가 가능할까 싶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가난과 차별이 여전하고 타자에 대한 편견이 지속되는 세상,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로 탄식하고 신음하는 지구 앞에 정의와 평화를 책임감있게 공유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짊어지고 풀어갈 과제다. 
 
 
13장. 전위에 선 저항자들_디트리히 본회퍼와 토마스 머튼
구도자의 길
간디의 평화주의, 흑인 인권문제, 유대인 문제와 같은 인종주의,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등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수도회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독일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8살때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형 둘이 전장에 나갔다가 둘째 형 발터는 사망하고 다른 형은 부상을 안은 채 돌아왔다. 본회퍼는 21살때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가 되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교류하며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유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25세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6년 나치정부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 피레네산맥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부모님 밑에서 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했다. 5살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15살때 아버지마저 악성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18살때 영적 강성을 경험했지만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후 성적으로 방탕하게 지내다가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카톨릭 친구들과 교류하며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핑겐발데, 제국의 한복판에서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 정책에 저항하며 고백교회를 시작해 제국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고백하고 나치의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핑겐발데 신학교에서 ‘신수도회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제자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회복은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것과 공통점이 없으며,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사랍들을 모을 때가 왔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제국교회에 물들지 않은 예배와 성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공동체의 목표는 공동체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배운대로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무력과 공포로 통치하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동시대인들과 후대에 제시해 주었다. 이땅을 뒤덮고 있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했고 제국 내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처럼 핑겐발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를 위해 연대하도록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겟세마네, 제국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1939년 토마스 머튼은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후 수도사의 길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프란체스코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전 친자 관련 소송문제로 거절당했다. 1941년 그는 가장 엄격한 시토회의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향했다. 머튼은 수도회의 생활을 통해 평화, 침묵, 고독 등의 가치를 문장속에 녹여냈다. 1948년 ‘칠층산’은 큰관심을 얻었다. 그는 점점 더 심오한 관상의 삶으로 들어갈수록 세속에서 멀어지고 천상으로 이끌려 가기보다, 자신이 세상과 떨어질 수 없으며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58년 루이빌의 교차로에서 갑자가 자신이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압도되었다. 그에게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몸부림에 동참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욱 현실 세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갔다. 동서 냉전, 베트남전, 미국 내 흑인 인권이나 원주민 문제등 첨예한 대립과 불공정의 문제들을 직시하며 그 속에서 정의를 회복할 길과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경계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진정한 복종과 영적 갈망은 홀로 떨어져 자신의 내면 완성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분열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그 세계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쓰기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지고 선명해졌다. 반전, 인권, 자본주의의 한계 등에 대해 글을 썼다. 
 
변방과 중심, 다시 만나다
핑겐발데 신학교가 폐쇄되고 나치의 감시가 심해져 미국의 친구들이 본회퍼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9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후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참여했고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주전인 1945년 4월 9일 사형당했다. 
 
토머스는 루이빌 경험이후 교회, 국가 권력과 갈등을 겪었다. 1960년대 그가 쓴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에 묶여 출판될 수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복종은 교회나 권위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복종이 침묵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눈감는 행동이 침묵이었다. 그는 영성가의 자리를 넘어 시대의 예언자의 자리에 섰다. 1966년 그는 전쟁, 인종차별, 가난 등의 사회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을 출판했다. 1968년 ‘마르크스주의와 수도훤의 관점’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구조의 혁명을 주장한 반면 수도주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고 주장했다. 
 
전위에 선 저항자들
본회퍼는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함께 신음하는 그리스도를 위해 폭력의 방법을 선택했다. 머튼은 자본주의 제국의 긴장 없는 동행을 비판적으로 읽어가기 위해 마르크스가 사회와 역사, 종교를 읽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본회퍼와 머튼의 삶은 깊은 영성 추구와 급진적인 제자됨의 실천이 결국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수도사의 삶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만드는 삶, 더 이상 이 땅과 분리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14장. 오늘, 수도회를 다시 묻다_신수도회주의 운동
새로운 수도회 요청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어떻게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라는 가치를 개신교에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수도회는 대항문화의 성격을 가졌지만 제도 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도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촉매였다. 그 제도 교회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반드시 필요했다. 
핑겐발데에서 시작된 신수도회주의는 독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국가 주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제국의 주변부를 향했다. 
 
파편화된 사회와 공동체의 도덕
1998년 조너선 윌슨은 ‘파편화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라는 책을 통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책 ‘덕의 상실’을 분석하면서 신수도회주의를 정의하는데 디딤돌을 놓았다. 윌슨은 현대 교회가 문화의 파편화와 계몽주의 프로젝트 실패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보았다. 
매킨타이어는 현대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편화된 사회라고 도발한다. 전통이 사라진 곳엔 야만이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가져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기대어왔던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근대가 약속한 진보 대신 암흑이 깊게 드리웠다. 매킨타이어는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토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의 야만이 쓸고 지나간 부조리한 자리에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공동체를 기대했다. 
제국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를 강제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 가치에 저항하기른 쉽지 않다. 그 야만의 제국은 외부의 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의 삶에 익숙하게 뿌리내렸다. 유럽인들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와 근대화의 이름으로 식민 침탈을 정당화했다. 오랫동안 제국이 약속하는 풍요와 제국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인 폭력을 방관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유럽 문명이 마주한 전대미문의 암흑기에 시민성을 갖추고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 곧 덕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 지역 공동체는 제국이 지배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이에 윌슨은 또다른 베네딕토를 기다리는 일을 새로운 수도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읽었다. 
 
교회와 세속 문화 사이의 긴장이 상실되어,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닮아 갔다. 국가와 교회 모두가 확장을 위한 효율과 통제를 추구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배와 통제의 방식은 전체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비단 나치즘이나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이 아니다. 효율과 효과를 극상의 가치로 놓고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한 근대성의 부정적 특성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곳이 되었고, 성장을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실천의 장이 되었다. 또한 교회는 국가주의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혹은 내밀하게 지지하는 정신적 지지 세력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나치게 친밀하게 얽히면, 제국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고등 종교의 자리는 줄어든다. 
 
공인과 제도화를 경험한 이래 교회는 역사 속에서 늘 세속 문화에 개입해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에 제국의 중심부, 심장을 향한 추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패배적, 도피적, 심지어 급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현실에서 선택해야 할 길은, 교회의 엣 영향력 회복이 아니라 제국과 교회가 긴장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리이다. 그 자의식이 신수도회주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신수도회주의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각하고 자발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의 자취를 따라, 21세기 제국 문화 속에서 같은 자각을 가진 이들이 건설해 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새로운 수도회의 열두가지 표지
셰인 클리어본의 ‘심플웨이’와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가 시작한 ‘룻바하우스’, 심플웨이와 룻바하우스 모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인종과 계급 분열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공동체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버려진 곳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중산층의 혜택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1) 제국의 버려진 곳으로 이동한다.
2) 공동체 구성원 및 가난한 이들과 경제 자원을 공유한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겸손히 복종한다. 
4)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산다. 
5)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6)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동생활을 발전시킨다. 
7) 마태복음 18장을 따라 지역사회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든다. 
8) 교회와 공동체 내의 인종적 분열을 애통해하고, 정의로운 화해를 적극 추구한다. 
9)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돌보고 지역 경제를 지원한다. 
10) 부부와 자녀들 및 독신자들을 지원한다. 
11) 오랜 수련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삶과 공동체 규칙을 익힌다. 
12) 관상 생활을 훈련하는데 헌신한다. 
 
이 12가지 표지의 특징적 범주
첫째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향한다. 제국의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향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연계를 강조한다.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파라처치가 아닌 프로처치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셋째 공동체 규율과 개인의 덕성을 훈련한다. 
 
이 운동은 수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가치에 젖어 있는 제도 교회이 현실을 오랜 과거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한다. 개신교의 열광적이고 분주한 이미지 또는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 전부라고 상정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다른 모습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끈다. 
 
대안이냐는 질문에 대해
제국이 정해 놓은 틀과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파격한 형태의 저항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도사가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수도사의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표면적으로는 수도사 제도를 없앤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성, 타자를 향한 배제 대신 환대, 폭력과 갈등 속에서의 평화 추구, 지구 공동체의 환경에 대한 책임은 물질 만능과 무한 경쟁의 사회속에 개개인 모두가 성찰하며 살펴야할 주제들이다. 
 
 
나가는 말
수도원은 제국의 가치와 삶에 대한 저항이다. 제국의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너머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다르게 살기, 거슬러 살기는 오늘날 가장 어렵고 거대한 저항이다. 소비가 미덕이고 자본이 가장 강력한 종교가된 시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그 구조에 저항하는 건 웬만한 작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도사가 보여주는 삶의 키워드는 주변성을 유지하며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는 것이다. 제국의 중심부를 향하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주변으로 가는 삶 말이다. 
주변에서 생성되어 마침내 중심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불어난 것, 그것이 수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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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듥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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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마이클 호튼)

-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닭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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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세계관(양승훈, CUP)

 

 

헬라적(그리스적) 사고 : 추상적, 분석적, 사변적, 이원론적

히브리적 사고 : 실제적, 계시적, 유기적, 통합적

 

- 서구인들의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주로 서구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동양의 반기독교적 사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서구인들에게 이원론의 문제는 주로 세계를 보는 정신 세계에서 나타나는 데 비해 동양에서는 주로 생활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에게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이분화된 정신 세계를 통일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고 동양인들에게는 기독교 세계관 내에서 일관성 있는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16) 

 

1장 세계관, 세계를 보는 관점

* 한국에서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고려되어야할 점

1) 기독교 세계관이 공허한 철학적 사변으로 흐르지 않도록 일차적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내용에 있어서 논리성을 가져야 하지만 지나치게 복잡해서는 안된다. 

3) 기독교 세계관과 전통 사상의 이원 대립적인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4) 이원론에 대한 바른 접근이 필요하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형성(form)된 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deform)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에 의해 개혁(reform)되어야 한다. 

 

2장 창조, 시작에 대한 커다란 믿음

- 범신론 : 피조물과 창조주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며, 신을 피조 세계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 유물론적 자연주의 : 하나님 없이 물질 세계만을 받아들임

- 이신론 : 창조주는 세계를 창조한후 더이상 세계를 돌보지 않는다. 피조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사의 진행을 부정

- 이원론 : 초월적인 영역과 자연적인 영역을 이분하여 신을 초월적인 영역에 제한

- 성경의 하나님은 “내재하시면서 동시에 초월하시는 분”이다. 내재성을 강조하면 범신론으로, 초월성만을 강조하면 이원론이나 이신론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성경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이고 영적인 것에 있으며 생물학이나 지질학, 연대기 등과 같은 과학적인 해석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은 성경 기록이 역사적, 과학적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성경이 현대의 역사가나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논리 전개 방법이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은 역사적 시공의 영역에서 이들의 연구 범위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비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초역사적이요, 비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초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58)

 

* 창조의 의미 

1) 창조주와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2) 만물은 의존적이다. 

3)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4)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문화명령을 주셨다. 

5)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인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피조 세계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3장 타락, 창조주와의 결별

* 우상숭배와 관련한 성경적 견해

1)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대신 다른 것을 섬길 수 밖에 없다. / 인간은 본성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중립적인 상태에 있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섬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어거스틴은 종교적 집중이라고 불렀다. 

2)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 간다. 

3) 인간은 자기가 숭배하는 대상을 닮아 갈 뿐만 아니라 그 닮은 모습에 따라 문화를 형성한다. 

 

4장 구속, 피묻은 십자가의 수용

- 구속은 원래 상태로의 회복을 위미한다. 회복으로서의 구속이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처음의 완전하고도 무흠한 상태가 있었으며 이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회복이란 말 그대로 돌아가는 것, 혹은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 개인적 구속의 의미

1) 구원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죄인-의인), 하나님의 자녀가 됨

2) 구속에는 재창조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 구속은 일종의 과정이다. 

 

- 세계관은 아르키메데스의 고정점과 같아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기준 틀이 된다.(108)

 

5장 인간, 고개 돌린 하나님의 형상

* 유물론적 인간관 : 인간을 물질, 복잡한 기계로 여김

* 진화론적 인간관 : 모든 생물체가 물질로부터 저절로 생겨났다고 여김

* 성경적 인간관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아다는 의미

1)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이며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제하며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2)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의미

3) 인간에게 영적 특성이 남아 있음 

 

6장 죽음, 숨겨진 교만의 진실

- 죽음을 끝,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는 유물론적 혹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세계관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끝없는 윤회의 한단계로 보는 세계관(불교, 힌두교)

* 성경에서의 죽음의 의미

1) 죽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죄로 인하여 왔다.  

2) 죽음은 소멸이 아니며 죽음 후의 세계가 있다. 

3) 죽음은 절망이 아니며 죽음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해결되었다. 

4) 죽음 후의 세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이 땅 위에서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7장 윤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윤리학의 세가지 기본 질문

1) 인간 행동의 동기는 무엇인가?

2) 인간 행동의 표준은 무엇인가?

3) 인간 행동의 목표나 목적은 무엇인가?

 

- 인간을 자연 발생된 존재로 보는 유물론적, 진화론적 견해에서는 시대, 지역, 민족, 상황에 따라 인간의 필요가 변하면 도덕의 기준도 변한다고 보는데 이것을 상황윤리라고 한다.(142)

-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보는 인본주의

- 무속적 윤리 : 현세적이며 삶을 구속한다. / 기복성 / 

- 불교의 불가지론 : 선과 악은 하나

 

* 기독교적 윤리

1)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주권적이며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도덕적인 가치와 선택을 수용한다. 

3)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8장 역사, 구속을 향해 가는 달력

- 순환적 사관 : 무한 반복, 중국, 인도

- 진보주의적 사관 :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 헤겔의 변증법 /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논리적 변증법을 통해서 역사속에서 자신을 실현시켜 나가는 절대정신을 보았으나 마르크스는 절대정신을 제거해 버리고 역사는 계급간의 투쟁, 갈등, 긴장을 통해서 계급없는 사회를 향해 나간다고 보았다. 

* 기독교는 구속의 역사 : 처음부터 역사는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가진것으로 생각한다. / 역사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9장. 결혼, 하나됨의 미학

* 결혼에 대한 다양한 견해 : 진화론적 결혼관(종족 번식 본능), 기계론적 입장(화학물질, 호르몬의 분비), 쾌락주의(DINK-Double Income, No Kid), 한탕주의와 물질주의(신데렐라, 온달 신드롬), 여성해방 운동

 

* 자녀에 대한 견해

1) 저주로서의 자녀관, 2) 우상으로서의 자녀관, 3) 축복과 상급으로서의 자녀관(성경적)

 

* 성경적 결혼관에 대한 실제적 제안

1) 거룩한 삼각관계, 2) 옆으로 서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3) 레디 메이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 결혼은 사람과 하는 것임을 기억하라(조건만을 보지 말라)

 

10장 노동, 땀 흘리는 수고의 기쁨

- 노동 :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이나 즐기기 위한 오락이 아니라 수고하여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노동이란 일정한 목적을 두고 생산성 있게 일하는 행위이다. 

 

* 노동에 대한 비기독교적 견해

1) 저주설 : 고대 그리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 불교나 힌두교, 유교나 노장사상

2) 방편설 : 생존의 방편 / 자아실현과 성취의 수단 / 노동을 헌금의 방편으로만 보는 것

 

*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노동

1) 신성한 하나님의 창조 법칙이요 명령이다.(문화 명령)

2) 노동을 예배의 한 부분으로 본다.(삶 전체를 예배로 보는 견해)

3)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연결된다.(소명)

4) 이웃 사랑의 표현

 

11장 국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제도

* 국가와 교회의 관계

1) 적대적 관계

2) 국가는 교회의 일부라는 견해 : 카톨릭

3)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 종교개혁전통

- 우리는 불의가 판치는 현실속에서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용기와 불의에 참여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1) 정부나 모든 제도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

2)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한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3) 국가의 권세와 제도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지만 인간의 본성적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날 수 있다.

4) 세상의 권세와 제도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어느정도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12장 지식, 앎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

* 지식에 대한 견해

1) 그리스적 앎이란 :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 자충족적이고 본질적으로 선하며 그 이성을 통하여 지식과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2) 히브리적 앎(성경적 앎) : 참된 지식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또는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었다.(잠 1:7; 9:10)

- 안다라는 의미의 차이 : 그리스적 지식관에서는 지식이란 차가운 이성적 추론의 결과 얻어진 관조적인 것이나 명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적 지식에서는 행함과 유리된 관념적이고 사변적 지식은 아직 아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식의 결과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앎과 더불어 실제적인 행함이라는 불가분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는 인식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책임이나 대상과의 관계성까지 포함하는 말이다.(234)

-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이유 : 히브리적 앎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안다는 말은 곧 악을 행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성경이 보여주는 지식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행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점

1) 신앙의 개인주의화

2) 교회 중심의 종교 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신앙의 형식화를 조장

3)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의 형식화(구원의 확신 공식을 강조)

 

-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식도 실천과 연결되지 못하고 이론적인 지식으로 남게 된다면 의미가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단순히 세계를 보는 정적인 입장으로만 남아 있는게 아니라 생동감 있게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때 바른 지식, 살아 있는 지식이 될 수 있다.(243)

 

13장 학문, 다양한 창조 질서의 연구

- 학문이란 :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의심스러운 것을 묻는 것(역경), 지혜를 사랑하는 것

 

* 학문에서 기독교적 조망이 중요한 이유(허만)

1)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2) 사람은 자기들이 섬기는 대상의 형상에 따라 자기를 형성해가기 때문에

3)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그들이 경배하는 대상을 따라 형성되어 가기 때문에

 

-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 :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자연과 은총, 신앙과 이성이 나뉘었다. 이는 학문과 신앙, 과학과 종교, 영혼과 육신, 전도와 사회참여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기독교적 학문 연구란 : 학문의 전 과정, 즉 학문의 의미, 과정, 방법, 목적, 응용, 심지어 학문의 동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적 기초위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온전한 기독교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255)  

 

14장 이데올로기, 얼굴없는 우상

- 이데올로기란 혁명이라는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계몽주의자들이 사용한 가치, 개념, 신념, 규범의 체계 / 즉 이데올로기는 의식의 산물, 즉 관념의 체계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을 위한 프로그램

 

* 이데올로기의 특징 : 1) 자신의 존재에 근본적은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 20 자신과 객관적 주변 조건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가져다주는 분석 체계를 가진다. 3) 원망과 확신에 의해서 자기의 잠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신념 체계, 4) 구체적인 사회적 쟁점에 대한 수단과 태도를 선택하는 행동체계를 갖는다. 

-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인 신관, 인간관, 윤리관, 세계의 이해에 대해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한다. 

- 도여베르트는 이데올로기란 다양한 양상을 가진 피조세계에서 오직 한 양상만을 확대시켜 나머지 모든 양상들을 그 양상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 기독교가 현실 문제의 해결만을 지상 목표로 삼는다거나 반대로 현실문제도 도외시하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기독교 신앙도 또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위험이 크다.(270) / 그러므로 초월 세계를 상실한 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고, 따라서 다른 이데올로기를 초월적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다.(271)

 

15장 과학, 물질계에 대한 청지기적 과업

- 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엄청난 영향력 그리고 지나치게 분화된 과학과 다원화된 사회구조는 과학의 이데올로기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무지는 경외심을 일으키고, 경외심에서 공포가, 공포감에서 우상숭배가 시작된다.(275-6)

- 갈릴레오는 "성경도 자연현상도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유래하고 있다. 전자는 성령의 명령을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집행한다”라고 말했다.(283)

- “극한의 가난과 처참한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페스트로 아내와 자식을 잃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케플러로 하여금 일생 천문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한 것은 자신의 연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성직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처럼 자신은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여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솜씨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천문학으 제사장이라고 생각했다.”(286)

 

16장 기술, 다스리며 지키기 위하여

* 우상화된 기술 :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화 / 환경파괴(지구온난화, 로마클럽 보고서) / 시스템적 세계관의 한계(문제는 굶주림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기꺼이 나누려고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 기술에 대한 바른 청지기적 자세

1) 기술 이데올로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첨단 기술에 대한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의 도구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 과학의 절대화로 생긴 성부 과학주의, 과학주의가 낳은 성자 기술주의, 물질적 부요라는 영감으로 과학주의와 기술주의를 가속화시키는 성령 경제주의의 삼위일체

3) 기술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세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기술 분야에서 선한 청지기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더이상 이 세상에서 문화 추종자(Culture follower)가 아닌 문화 형성자(Culture former)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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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이름짓기(제임스 사이어, IVP)

 

 

코끼리 이름 짓기(세계관 개념의 역사와 재정의) 

-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다. 

 

1. 낙타, 캥거루, 코끼리

- 제임스 사이어는 그가 이전 그의 책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기독교 유신론,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원론,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루면서 제기한 7가지 기본 질문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서 그가 생각하는 부족한 항목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 “무엇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낙타, 캥거루, 코끼리)

 

2.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세속 철학자들이 세계관을 이해한 방식 4가지

1. 빌헬름 딜타이 : “어떤 세계관이든 궁극적 뿌리는 인생 그 자체다.”, 한 사람이 인지하는 것은 주로 본인의 정신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저기에 있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신 속에 내재된 구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29) / 세계관은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지적으로는 실재의 인식으로, 정서적으로는 삶의 평가로, 의지적으로는 능동적인 뜻의 이행으로 표현된다.(30)

2. 프리드리히 니체 : 그는 허무주의자인 동시에 실존주의자이다. / 모든 세계관이 시대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여긴다.(33)

3.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플라톤은 존재론(존재하는 그 무엇)을 지지하고 데카르트는 인식론(어떻게 알 수 있는가?)을 주요 관심사로 주장한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문법과 언어를 지도적 원리로 지명했다. 요컨데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관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했다고 볼 수 있다.(34)

4. 미셀 푸코 : 세계관은 언어적 권력의 옷을 차려 입고서 궁극적 실재를 해석하는 체하는 가짜에 불과하다.(38)

 

* 기독교적 정의

1. 제임스 오르 : 완전하고 정합성 있고 이성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기독교를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지적, 문화적 도전에 대처하는 것이 그의 목적(39)

2. 아브라함 카이퍼 : 그는 칼빈주의 기독교를 하나의 포괄적 세계관으로, 삶의 체계로 제시했다.(하나님, 인간,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3. 헤르만 도여베르트 : 그는 한사람의 세계관의 바탕에 있는 것이 이론적 사상이 아니라 마음의 종교적 혹은 신앙적 지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관은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 전이론적 결단이며, 지성이 아니라 마음과 경험 그리고 실질적인 삶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43)

 

* 최근의 복음주의적 정의들

1) 한 개인의 전반적인 사상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전 이론적, 전제적 개념들에 뿌리박고 있음, 2) 범위가 포괄적, 3)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지만 이상적으로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춤, 4) 모든 사물과 관계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 5) 굳이 비이성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성에 의해 최종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결단의 성격을 가진 신념(44)

1. 제임스 올시우스 :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와 우리의 소명과 장래를 조망하는 하나의 틀 혹은 일련의 근본 신념(45)

2. 알버트 월터스 : 한사람이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 틀

3. 로널드 내쉬 : 세계관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신념이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적 틀로서, 그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정돈하고, 실재를 해석하고 판단한다.(47)

4. 존 콕 : 삶으로 실천된 세계관이야 말로 우리의 신념을 실제로 나타낸다.(47)

 

* 노글이 말하는 기독교적 세계관 : 1) 객관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신념을 품고 2) 주관적으로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하나의 관점이며 3) 설화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언어체계다. 즉 실재는 본질상 객관적이며, 인해의 측면에서는 주관적이며, 그 의미를 파악하고 전달하는 면에서는 언어적이라는 것이다.(65)

 

3장. 무엇이 먼저인가?(존재인가 인식인가?)

* 제임스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의 일곱가지 질문(68)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존재론이 우선하는 경우(유신론과 기독교적 유신론)

-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무든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이 인식론보다 앞선다.(74)

- 근본적 실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곧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며, 선하신 놀라운 인격이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주가 이해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인식론이 우선하는 경우

- 데카르트 : 자아의 자율성 - 자기존재의 확실성 -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 - 외부 세계의 존재의 확실성

 

* 결론 : 세계관의 정립에서 존재론이 인식론을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세계관을 인간의 자아라는 깨지기 쉬운 구조 위에 올려 놓는 셈이다. 달리 말해서 이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 곧 각 개인의 자아 혹은 각 공동체의 의식이 지닌 자율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뜻이다.(101)

 

4장. 살과 뼈(이론적 성격과 전이론적 성격)

- 세계관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전이론적(직관적)이면서 전제적 성경을 갖고 있다. 

* 전이론적 : 우리의 정신적 구조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도무지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

* 전제적 : 아퀴나스나 칼빈이 말하는 신 관념(파스칼 : 마음은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 도여베르트는 세계관의 근원을 각 사람의 전이론적인 영적 중심에서 찾았다.

-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인간 경험이 하는 역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우리의 추구 방법 등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기에 계신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내재적 현존에 관한 지식을 우리가 선물로 받는 일이다.(124)

 

5장. 합리적 체계, 삶의 방식, 으뜸 이야기

- 각 사람의 세계관은 다른 사람의 것과 약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은근히 무의식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구나 세계관을 갖고 있다.(130)

 

* 제임스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의 일곱가지 질문(68, 132)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브라이언 왈쉬와 리처드 미들턴의 질문 4가지(135)

1)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인간의 본성과 사명과 목적은 무엇인가?

2) 나는 어디에 있는가? 혹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3)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혹은 나의 성취를 막는 근본적인 문제나 장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나는 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4) 치료책은 무엇인가? 혹은 나의 성취를 막는 이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발견하는가? 

 

* 삶의 방식으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은 신학이나 철학 같은 사상의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다. / 세계관은 결코 삶에 대한 시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삶을 위한 시각이다.(138)

 

* 으뜸 이야기(거대 담론)로서의 세계관

- 성경은 규범적이고 표준적인 이야기로서 궁극적으로 전체주의화를 반대한다. 그 이유는 성경 이야기에 스며있는 고난에 대한 철저한 민감성과 그 이야기를 자기 편을 위해 편협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창조의도 때문이다.(146)

- 레슬리 뉴비긴은 세계관을 이야기로 간주함으로써 그 실존적 적실성을 잘 전달하고 있다.

 

- 세계관에 대한 재정의 :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지적으로는 실재의 인식으로, 정서적으로는 삶의 평가로, 의지적으로는 능동적인 뜻의 이행으로 표현”된다.  

 

6장 세계관(공적 측면과 사적 측면)

*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것 :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인 동시에 호모 소시우스이다. 

* 이상형으로서의 세계관

*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 타당성 구조란 사회의 대다수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서 그들이 무의식저긍로 혹은 아주 확고하게 품고 있어서 그것이 참인지를 물어 보지도 않는 신념들의 망이다.(158) / 한 개인의 세계관이 사회의 세계관과 동일할 경우에는 자기 세계관이 참된 것임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162)

 

7장 세계관의 새로운 정의

- 다원주의(다소 상반된 세계관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 세계관의 재정의 :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173) 

- 마음의 성경적 개념 : 지혜(잠 2:10), 감정(출 4:14; 요 14:1), 욕구와 의지(대상 29:18), 영성(행 8:21), 지성(롬 1:21)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175) /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과 더불어 그리고 그 세계관 때문에 생각을 하는 것이지, 우리의 세계관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176)

- 아브라함 카이퍼 : 모든 사상은 단 하나의 원리, 고정된 출발점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181)

- 우리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려면 우리의 세계관에 담긴 모순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오르의 말처럼 우리는 “사물들을 통일체로 묶고 이해하려는 노력, 곧 단 하나의 보편적 관점을 추구해야”한다.(187) /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환생을 믿는 것(인지 부조화로 세계관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 세계관을 재정의한 결과 

- 초점을 명제와 이야기에서 그런것을 포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옮겼다.

- 누구든 세계관의 명시적 전제들은 잘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그 전제들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세계관의 대들보가 존재론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이 하나님이나 자연 혹은 자신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8장 낮에 서로 부딪히는 유식한 사람들(분석 도구로서의 세계관)

- 세계관 분석이 다원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비슷한 동시에 왜 그토록 다른지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196)

- 자연 과학 분야에 속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전반적인 세계관은 유신론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과학적 연구를 할때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자가 된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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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로부터의 창조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4) 질서있는 창조

5) 그 종류대로 창조

6) 선하신 창조

 

"창세기 1장의 날들의 길이와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결정에 이르기에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으시기로 선택하셨다고 할만하게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의 참된 시금석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대해서 어느정도 관대하고 친절하게 행동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려는지도 모른다" -그루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함의

1) 인간이 다른 동물로 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관념을 거부한다.

2) 하나님을 잘 반영하는 형상 역할을 잘 감당해야만 한다.

3)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치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 양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수 있다. 보수주의의 관점에서는 창조를 이해할때 6000년이라는 시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무리하게 접근하기도 하고, 진화론자의 경우에는 빅뱅이나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면서 45-200억년을 도입하기도 한다. 모두 극단의 위치이고 이부분에서는 칼빈이 이야기한대로 성경이 말하는곳까지 가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멈춰서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특징들에서 나타난 하나님 창조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부분이며, 그렇기에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창조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것과 과학적인 해석의 접근을 통해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과의 간극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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