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사람들이 뉴스를 고통의 포르노로 소비하며 자신이 처한 안전한 자리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평소에 보지 않았던 곳으로 눈길을 돌리길 바라며(p.122)

 

이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독서모임에서 '황계찬 목사'가 정리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 저자 : 김인정(경계를 넘나드는 저널리스트)

  -前 광주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現 프리랜서 기자(미국)

 

▣ 저자가 목격한 고통

·이태원 참사 ·기후 위기의 불공평함 ·서울과 비非서울 ·서울 뉴스와 지역뉴스 사이의 권력 관계
·산업재해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 운동 ·가난한 사람의 기부
·환경미화원 ·젠더 갈등 ·홍콩 시위 ·미국 내 아시아계 증오 범죄
·텐더로인의 마약거리

 

 

 

prologue   구경하는 인간(Homo spectators)

 

 

-세계 3대 구경 : 1.                      2.                     3.                    

-걸프 전쟁

-911 테러

-쌍용자동차 사태

-세월호 참사

-10.29 참사  

 

 

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목격(目擊)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求景)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p.24-25). 

카메라가 한 대씩 탑재된 스마트폰과 이미지 전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를 발판 삼아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사람을 향하여 고통의 중개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중개하는 일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붙는다. 전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할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는 딜레마(P29-30).

 

구경과 대면 역시 현실에선 정확하게 갈라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서 일어난다. 흥미 때문에 모여든 군중의 수가 역설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격자가 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 구경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p.30).

 

오늘날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은 범람하는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사고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p31).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기도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p.34-35).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p.37).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p.49).

 

 

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된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우리는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p.74).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궂은 날씨의 스펙터클이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를 꽤 이상하게 오염시키거나, 비틀어버릴 때가 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여지고, 재난 현장은 대상화되어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한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반지하 침수 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의 사진이 고통을 굽어살피는 지도자의 이미지인 양 홍보자료로 유포된다(p.79-80).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Jeff Goodell)은, 폭염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도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p.89).

 

우리는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지구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끔 잊는다(p.90).

 

침묵이야말로 산업재해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이다. 위급한 상황에도 사고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119 신고를 미루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입을 닫으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산업재해는 주로 인재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지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안전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는, 뻔한 패턴이다. 산업재해는 이미 입력되어 있는 설계 오류다(p.91-92).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p.94).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p.96).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숨진 김 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석탄 이송 컨베이어 밸트에 끼여 숨진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p.100).

 

5.18이 국가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서 인정받고도 북한 특수군이 광주 시민인척하며 저지른 일이라느니, 폭동이라느니 하는 끈질길 거짓말에 수십 년간 시달리는 이유다. 문제는 “5.18은 폭동”이며 “북한 소행”이라는 가짜 뉴스와 역사 왜곡이, 전라도에 대한 오랜 지역 차별과 맞물려 새로운 인터넷 ‘밈’이 된 현상이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오는 즐거운 놀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폭력적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사이트, 이른바 일베에 게재됐던 ‘홍어 택배’ 게시글이었다. 일베에는 이런 글 외에도 신군부의 논리를 조악하게 이식받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짜 뉴스, 희생자와 유공자에 대한 혐오가 넘쳐났다(p.107).

 

혐오가 뉴스가 되는 현상은 인터넷의 관심 끌기 문화와 결합해 주체할 수 없이 증폭했다. 이슈가 되니까 원래 있던 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p.108).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p.120-121).

 

이게 일종의 포르노처럼 소비되어 안방의 시청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위무하는 데,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계층 안에 더욱 깊숙하고 안온하게 머무르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서로를 돌아보기 힘든 팍팍한 사회 안에서, 억지로라도 더 약한 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돕는 게 뉴스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뉴스의 주제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적당한 ‘예시’가 되어 인터뷰를 요구받는 것 역시, 약자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 아닌가 싶기도 했다(p.122-123).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곳에서 쉴 권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의 휴식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쉬는 모습을 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취재 끝 무렵에야 깨달은 것이다.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 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p.124).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p.136).

 

 

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p.140).

 

서구 언론이 우크라이나전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건 편견을 노출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다분히 의도적이며, 여러 맥락이 있다. 전쟁터는 폭력과 죽음과 비극이 도처에 널려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전쟁 보도는 인권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이라도 간단히 믿어지기도 하지만 개별의 보도와 언론사들의 관점을 살피면 그 안에서 부글거리는 이해관계의 날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전쟁터에 만연한 참상의 증언을 주워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는 숱한 관점과 의도와 무의식에 스민 계산이 개입되곤 한다(p.144). 

‘우리’와 닮은 것들은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간단히 반대쪽으로 밀어내는 이런 발언은 거의 당연하다 싶게 나빠 보인다. 인권에 대해 말하며 편견과 배타주의를 끄집어 쓰는 당혹스러운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p.145).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Paul Bloom)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페이스북을 만든 메타 최고 경영자 마크 저커버스(Mark Zuckerberg)는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당장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더 큰 관심사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p.148).

 

더구나 개인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를 주축으로 뉴스의 소비가 극도로 개인화되고 에코 체임버(echo chamber)효과(폐쇄된 환경에서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하며 기존의 신념을 증폭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에 갇히게 된 시대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와닿지 않는 뉴스는 점차 존재하지 않는 뉴스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에게 ‘신경 쓰이는’ 뉴스만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p.148).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p.155).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로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쏠리던 시기인데다 팬데믹과도 연관된 이슈라는 데 힘입어 주류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의 인종차별 의제가 전례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p.158).

 

알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고통받는 몸》에서 “때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p.167).

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고통과 상실을 겪어낸 한 사람이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같은 이름의 다른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슬픔과 우울, 기억이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쓰려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적인 애도를 겪어내는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p.212). 

 

그렇다면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하며 뉴스를 전할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울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보고 들어줄 가능성. 대개 자신의 일로 꽉 차 있을 머리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소식을 끼워 넣고 염려해 줄 가능성. 다 보고 난 뒤에도 기억해 줄 가능성.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가능성. 나아가 뒷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가능성. 줄여 말하면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p.236).

 

뉴스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만들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없이 순진한 희망에 기대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줄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이 약간 변할 수도 있다는 천연덕스러운 믿음, 이걸 믿는 일은 정말 가능한가?(p.237)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머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p.237).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p.237-238).

 

한국사회를 취재할 때는 자주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나? 나는 과연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이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누굴까? 이 고통을 이야기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중산층 기자들이 ‘사회적 약지’를 대변한다며 쪽방촌에 들이닥치는 풍경이 얼마나 침략적인지 계속해서 묻게 했다. 이민을 와서 당장 생계를 위해 스파에 취직해야 했던 여성들보다 훨씬 안전한 지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기만 아닐까? 우리는 인종과 언어, 계급을 모두 뛰어넘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p.248-249).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p.253).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도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게끔 한다(p.259).

 

애도는 이때 정치로 흐른다. 공적 애도 안에서 자주 가치를 다투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힘겹게 겨루기를 펼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유하고 고쳐나가려는 시도 안에는 성실한 슬픔이 깔려있다. 이럴 때 사회적 애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며 사적인 영역에만 밀어 넣으려 하는 건, 개인의 애도 과정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사적이라는 건 보이지 않도록 감춘다는 것과도 비슷한 질감의 단어다. ‘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는 국가나 기업이 다루기에 까다로운, 감정을 가진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애도의 사적인 속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위로 이어지는 공적 애도의 진정성을 두고 매번 시비가 붙는 건, 사회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도 보인다. 

공적 애도의 상황에서 이야기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죽은 이를 숫자로 남겨두지 말고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할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259-260).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p.262). 

 

epilogue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릴 뿐이다.”

 

 

■ 질문-1 : 목회자와 기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질문-2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목사로 살고 있는가?

 

■ 질문-3 : 우리 시대의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질문-4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구경꾼인가? 목격자인가? 증인인가?

 

■ 질문-5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