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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27(2023-12-19) 

 

한 주 안에 일교차가 30도 이상되는 이상 기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2주전 주말은 반팔을 입은 사람이 보일 정도였는데 이번 주말은 꽁꽁 얼어붙어서 몸을 웅크리게 합니다. 우리 현장의 날씨가 급변하여 혼란스럽지만 이제는 바뀐 기후의 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사역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가 조변석개하면서 변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면서 전체 판을 잘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즘 제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감당하는 사역의 현장은 죠이 지원사역부, 전주대 강의, 더기쁨교회입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죠이 지원사역부

지원사역부에서 제가 루틴하게 감당하는 일들은 매월 첫째 주 월요일 간사들이 함께 드리는 월간예배, PCJF 모임 지원, 그외의 특별 행사들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특히 현장에서 시스템을 체크하는 역할, 외부 학복협 캠청연 모임 등을 통해서 간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 바로 간사 훈련이고 매년 진행하는 신입간사훈련입니다. 올해는 5명의 간사들을 대상으로 11월 6일부터 12월 2일까지 4주간의 합숙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신입간사들과 합숙을 하면서 생활 전반을 돕고 4주차에는 ‘청년 세대 전도전략’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함께 전주 지부 방문을 했습니다. 젊은 간사들과 함께 하면서 발랄함과 세대차이를 동시에 느끼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래 신입간사 훈련 리뷰 영상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youtu.be/PRDM9aDksrI 

 

내년에도 지원사역부에서 사역을 진행합니다. 함께 동역하는 간사들의 변화가 있는데 기쁘게 동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전주대 강의

이번 학기도 매주 수요일 오후면 남부터미널에서 전주대를 가는 버스에 탑승합니다. 학교에 도착하면 20-30분 정도 학교를 걷고 5시 40분정도 강의실에 들어가서 강의 준비를 합니다. 8시 30분쯤 수업을 마치면 카카오T로 택시를 예약해서 전주 고속터미널로 가서 서울행 고속버스에 탑승을 합니다. 서울 고속 터미널역에 도착하면 대략 11시 20~30분 정도이고 지하철을 타고 신정역에 도착해 걸어서 집에 가면 12시 30분 정도입니다. 3시간 강의를 위해서 길에서 오가는데 8~9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 사역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효율적이지 않지만 헛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다루면서 기독교의 진리와 가르침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강의를 마치며 강의평가를 진행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남긴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처음 기독교윤리와적성이라는 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채플도 있는데 왜 굳이 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치우쳐진 사상이 아니라 여러 영상자료나 과학에 관한 내용, 평소 많이 들어봤지만 성경에서 나온 말인지도 몰랐던 것들 등을 배우며 재밌기도 했고 지루하지 않은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번 수업을 듣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더욱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학생 1)

 

어릴 적 교회를 다녔을 적엔 성경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다. 믿지 않으면, 섬기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말이 어린 나에겐 성경이 무섭게 느껴지면서 과학적으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이가 조금 찬 뒤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반감이 세게 들어 성경을 아예 믿지 않고 교회를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과학적으로 궁금했던 성경의 이야기들과 금지하는 것들, 성경을 통한 긍정적인 효과와 여러 사례들을 보며 성경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 같다. 또 조별 토론 시간에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하고 발표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 속을 깊게 들여다보고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학생 2)

 

어찌 보면 무교인 사람들이 다소 꺼려할 종교라는 주제이지만 매끄럽고 종교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단지 학점을 챙겨가는 수업이 아닌 철학과 봉사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강의었습니다. 다음에도 기독교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면 무조건 들을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 원래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와 교회도 가 보고 대화를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강의는 저에게 철학과 봉사 정신을 알려주어 어찌 보면 인생의 길잡이와 같은 강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한 학기 동안 고생하셨습니다.(학생 3)

 

이번학기 강의 평가 설문 내용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peterjoy.tistory.com/1138

 

 

3. 더기쁨교회

2019년 10월부터 4년여간 예배를 드리던 장소 ‘커피집 이공’이 문을 닫으면서 예배 처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난 9월부터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홀리드림찬양신학원(서울 강서구 가로공원로 194, 시티빌딩 5층)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옮긴 곳이 교회 예배인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곳이어서 음향 시스템은 잘 갖추어져 있고, 5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다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올해 계속해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1:1 제자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화요일에 훈련을 진행하는데 이 시간이 저에게는 매우 기대되는 시간입니다. 현재 6명이 함께 하고 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삶을 나누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제자로 세워가는 것은 언제나 저를 흥분되게 합니다. 

감사한 것은 이번 성탄절 예배 때 처음으로 세례식을 진행합니다. 어린 아들을 통해서 전도된 엄마가 제자훈련을 통해서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이번에 교회 앞에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처음 참여하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는 매주 20-25명 정도가 함께 모여 예배들 드립니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엄마, 아빠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더기쁨교회 예배에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 아이들의 뜨거운 찬양입니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아이들의 찬양을 들으면 은혜가 넘칩니다. 이 뜨거운 찬양을 함께 누리기 원하시는 분들을 더기쁨교회 예배에 초대합니다.

지난 주(2023년 12월 17일) 예배 설교 링크를 첨부합니다.(https://youtu.be/6Yw6tYhlpdw)

 

 

4. 가정과 다른 모임들

첫째 한결이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잘 맞는 학교에 배정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교회 주일학교는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유치원생부터 현재는 중3까지 8명 정도가 꾸준히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모임에서 한결이와 한솔이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후 식사를 하고 나면 어른들이 티타임을 가지는 데 이 시간에 결이와 솔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거나 함께 게임을 진행합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모든 부모님들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깁니다. 

둘째 한솔이는 현재 중1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축구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끔 불안하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학교 가기 전에 제게 와서 불안하지 않게 기도해달라고 하더라구요. 지난 학기 학급회장이었을 때 반 친구들이 떠들어서 떠들지 말라고 했었는데 자기 말을 안 듣는 친구들이 있었고 이런 식으로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질 때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몸도 마음도 더 자라면 그런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는데 즐겁게 1학년 생활을 잘 마무리하도록 기도해주세요. 

 

현재 저희 가정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이전에 살던 전세집 문제입니다. 지난 6월에 조합원자격으로 분양받은 아파트에 먼저 입주했고 전세 계약은 11월 13일까지였는데 계약 만기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당장 전세금을 돌려줄 상황이 안 되어서 임차권 등기를 신청했는데 하루 속히 큰 문제없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고민이 점점 깊어집니다. 장모님의 치매 증상이 악화되고 있는데 가끔 공격성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으셔서 얼마 전에는 119가 출동해서 현관문을 강제 개방하기도 했습니다. 더 안좋아지시면 케어하기가 힘들어서 심각하게 요양원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양가 부모님들 모두 말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외에 지난 여름에는 선교한국 2023대회를 포항 한동대에서 함께 섬겼고, 11월에는 학복협 캠청연에서 ‘청년과 결혼’이라는 포럼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또한 매월 한 번 정도 복음주의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고, 시찰에서는 2년간 서기로 섬겼고 이번 가을노회부터 노회 임원(회계)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곳에서 섬김을 통해 함께 함을 통해 연합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제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고 기도로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소식도 답장이나 댓글로 남겨주시면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복된 성탄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새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죠이선교회 지원사역부 안에서 감당하는 루틴한 사역들을 잘 감당하도록, 2024년 사역을 잘 준비하도록

2. 전세집 문제가 속히 잘 해결되도록

3. 한결이의 고등학교 입학과 한솔이의 학교 생활을 위해서(불안하지 않도록)

4. 더기쁨 교회 제자훈련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도록

5. 양가 부모님들의 건강과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장모님 치매가 악화되지 않도록)

 

 

 

2023년 12월 19일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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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와 적성 강의평가 2023년 2학기 (박기모 교수)

-수강인원 35명중 35명 응답 

 

 

 

 

 

 

 

 

 

16.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면서 좋았던 점, 깨달은 점, 감사했던 점 혹은 개선되어야할 점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야간수업때 수업은 사캠으로 듣고 대면으로는 모여서 토론만햇으면좋겟다

 

평소에도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지, 나는 어떤    가장 나답고 행복한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정의할  있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곤 하는데, 수업마다 다른  누구가 아닌  대해서 떠올려 보고, 제가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있어서 좋았습니다. 많은 수업  제가 가장 좋았던 내용은 침팬지 소년의 이야기였는데요. 각각의 사람들이 지닌 차별화된 특별한 가치들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빛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제게  깨달음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혼자 있을 때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친구라는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더라도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제가  많이 다르다는  느낍니다.  번은, 어느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저도 모르게 제가 그토록 바랐지만 잘되지 않았던 이상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요. 그저  사람과 함께 있었을 뿐인데 저도 몰랐던 저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해주는 내용이 그토록 인상 깊게 남았나 봅니다.

아직은  삶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시간도 언젠간 다시 돌아올  없는 추억들로 회상할 날이  것이란  알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하나하나 곱씹어 가며 모든   기억하다 보면 삶의 의미를 만들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별히 종교를 지니지 않았더라도, 종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닌, 그냥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배울  있는 시간이었던  같아  좋았습니다.

좋은 직업을 갖는 , 참된 사회복지사를 위해 살아가는  또한 매우 의미 있고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어릴 적부터 꾸던 꿈은 특정한 직업 아니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저의  다른 목표이자 꿈이었는데요. 아직도 인상 깊게 떠오르는 강의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겪게  인생 속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을 준비해야 한단 내용도  인상 깊었어요. 결혼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저의 가치관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준  같아 유독 좋았던  같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식이 생겼다.

 

기독교적 바탕을 많이 알게 

 

교수님  학기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강의중 노래를 틀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고 소그룹 토론을 통해 서로 교류가 있는 수업을 만들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없음

 

기독교에대해 알게되었다.

 

조별수업도 재미있었고 마냥 성경에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작설과 미세조정도 의미있게 봤습니다! 사랑에대해 성경에 대해 많이   있어 좋았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기준을 맞춰 강의 내용과 수업 방식을 고려 해주신 부분에 있어  섬세했던 강의 같아서 편하게 강의를 들을  있었고 개선  점은 없습니다!

 

타학과 학생들과 토론할  있어서 좋았다

 

기독교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제가 나가야  방향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부분이 저를 가장 성장하게 도와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에게 있어서  수업시간은 지친 일상 속에서 바쁘게 사느라 놓친 것이 있다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졌을 때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의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있었으며, 현실적인 세상의 모습과 타락해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속에서 내가 지켜야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너무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시간에는 수업 내용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해결해야 하고 직면해야 하는 문제  대해 파고들고,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그런 과정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좋았습니다.  수업시간마다 깨달은 점을 적으며 그날 배운 내용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시선을 느낄  있었으며 하루하루 지날수록 성장해가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있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고 세상에서 접할  있는 다양한 지식과 책과 영상 등의 매체를 통해 학생들에게 건강한 매체를 소개하고, 세상 속에서 거부감없이 접할수 있는 지혜로운 명언과 섬김을 하며 살았던 이들에 대해 알아가며 섬김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 또한 섬기는 삶의 아름다움, 그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으며  모든 과정을 이끄셨음에 대해 깊게 알고 삶으로 느낄  있어서 너무나 뜻깊고 감사한 시간이였습니다.

 

이번 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볼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진  같아서 좋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을 평소에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서 서로의 의견을 들을  있는 자리는 살면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각도 우물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서 서로의 의견도 들어보고  의견이 나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지,  다른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있었습니다. 이번 수업을 하면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다양한 의견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볼  있어서 좋았고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과  마음들을 다양하게 들을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교수님이 굉장히 이해를  수있도록 쉽게 알려주셔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처음 기독교윤리와적성이라는 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채플도 있는데  굳이 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치우쳐진 사상이 아니라 여러 영상자료나 과학에 관한 내용, 평소 많이 들어봤지만 성경에서 나온 말인지도 몰랐던 것들 등을 배우며 재밌기도 했고 지루하지 않은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엇는데 이번 수업을 듣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학생들도 생기게   같아 감사하다,

 

팀별 활동을 하면서 팀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며 사람마다 느끼는  다르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가장 많이 깨달았던  같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목사님께 기도 받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팀원의 이야기를 듣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봉사, 배려, 존중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알아가서 좋았고 조원들하고 여러 이야기를 할수있는시간이라 좋았습니다

 

이번 "기독교 윤리와 적성" 통해서 이제부터 제가 나아가야  인생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는 시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듣고 나서 기독교에 대한  보다는 인생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간이였습니다

 

수업을 들으며 기존에 알던 기독교에 대한 배경과 지식을 강화할  있었다. 그리고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의 폭을 넓힐  있었다.

 

내용이 좋았다

 

나는 예전에 기독교였음에도 기독교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성격에 대해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가 되었다. 그래서  수업이 나에게는 뜻깊었고, 기억에 남을  같다.

 

자신에대한 생각을 하는시간이 많아졌고 깊이있는 답변을 찾게 된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일깨워주는 교수님의 강의가 적절하고 좋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있는 고민들에 대해서 다른사람들과 토의하면서 대화 함으로써 사람마다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있었습니다.

 

교양 필수 과목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어도  들어야 했던 강의 였기에 지루할  같았고  기대가 없는 강의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매주 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심도 없는 기독교에 대한 수업이라 생각하였지만 수업의 내용은 신학적인 내용 뿐만이 아닌 우리의 실생활  밀접한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자세, 인품 등을 한단계 성장   있게 되었던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신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와 수업 시간 동안만이라도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소그룹 토론을 통해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조원들의 생각들까지 들을  있어서 다양한 관점에서의 깨달음을 얻을  있어서 좋았습니다.  수업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해 이해 시키는 강의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잊고 지낸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미덕을 배울  있었던  같습니다.

 

어릴  교회를 다녔을 적엔 성경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으면, 섬기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말이 어린 나에겐 성경이 무섭게 느껴지면서 과학적으로 믿을게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이가 조금  뒤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반감이 세게 들어 성경을 아예 믿지 않고 교회를 싫어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과학적으로 궁금했던 성경의 이야기들과 금지하는 것들, 성경을 통한 긍정적인 효과와 여러 사례들을 보며 성경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화된  같다.  조별 토론 시간에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하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을 깊게 들여다보고 되돌아   있어서 정말 좋았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고민해볼  있었던 시간이 좋았던  같다.

 

기독교에 관해 알려주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본래 무교에 무신론자였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멍청하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창피한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이름 아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중에 하나가 봉사인데, 금전 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려고 한다. 나눌수록 기쁨이 배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가 1퍼센트의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고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평소에  또한 봉사를 했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 다소 이기적인 봉사를 하였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그러한 생각을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는 내가 부끄러워 졌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한 그러한 철학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수업을 수강하는 것에 있어서 어디서  것인지 모르겠는 거리감과 회의감이 들어 저학년 때부터 수강하는 것을 미뤄온 강의였다. 졸업을 위해서는  수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수강 신청을 진행하였다. 시간표를 짜고 기독교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수업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수업을 듣고   개강 전까지 들었던 감정들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종교적인 활동을  강요하는 거지?라는 생각은 성경에 담긴 교훈이나 깨달음을 전파함으로써 좋은 감정과 건강한 생각을   있는 거름을  기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성경에 담긴 이야기들이나 성경 제작 과정을 자세하게 알게 됨으로써 종교적인 활동에 대한 이해가 생겨났다.

추가적으로 봉사나 남을 위한 활동에 대한 영상, 인생의 교훈을 얻을  있는 사례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다는 점을 포함해서 3학년 2학기 겨울에 맞이한 매주 수요일 저녁 강의 시간이 따뜻한 수업 시간이 되고 수업이 기대되는 학기를 보낸  같아 만족스럽다.

 

부족한점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기독교 수업을 통해 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고, 20살까지 다니다가 떠났던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며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되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교회에 대해 다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하여 교회에 나아가 나눔과 섬김으로 이전과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깨닮음을 주는 수업이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데 그들을 이해라  있었던 시간이어서 좋았다. 기독교와 성경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않고 있기에 이해가  되었지만 존중의 의미로 그래?하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친구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있다는 점이 좋다.

 

 

17.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박기모 교수에게 하고 싶은 질문 혹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딱히없습니다.

 

 수업마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많이 배려해 주신다는  느꼈습니다. 부득이하게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을 경우, 동영상 강의 수강 후에 과제를 제출하면 결석이 아닌, 지각으로 처리해 주신 것도 저희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주차마다 워크북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 아닌, 크게 기한을 정해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과제를 제출하지 못한 학생들이 뒤늦게라도 과제를 제출할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도 교수님께서 저희를 위해 하신 섬세한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강의도 강의이지만, 이론 수업이 끝난 , 팀원들과 함께 나눔 가졌던  시간이 너무 인상 깊은데요. 특히,  팀원의 대표가 나서서 전체를 대상으로 나눔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용에 경청하며 반응해 주시던 교수님이 너무나 인상 깊습니다. 매번 수업 때마다 계속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열심히 호응과 반응해 주시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열심히 반응해 주시니 정말 얘기할 맛이 났어요. 사회복지 면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술  하나가 적극적으로 경청하기인데요. 그것이  이리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교수님을 보며    깨달았던  같습니다. 이번 학기 동안  깊은 강의를 선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은 항상 수업에 최선을  하시고 열정적이셨지만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교수님 수업 열심히  주셔서 감사하고 저를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  교수님이 계서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강의 너무  들었고 서울  올라간다면 교수님이 계신 교회도  한번 나가보고 싶습니다.  학기동안 감사했습니다!

 

없음

 

끝가지 열심히 수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재밌는 수업 감사합니다! 야간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알차고 재밌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당일 안으로  거리를 왔다 가셨던  모습에서 저는 대단하다고 느꼈고  열정을 너무  받고 싶었고 항상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복지학과 22학번 조민경입니다. 처음 기독교 수업을 들을 때에 기독교적 관점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전주대가 기독교 학교이지만 비종교인과 비기독교인도 많기에 어떻게 거부감 없이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실까?’ 대한 기대감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같습니다. 매주 수업이 끝나고 조별토론을   저와 조장님 제외하고는 비종교인 분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수업 초창기 때는 비종교인분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고 하였으나 나눔과 섬김의 , 배려를 실천하고 사랑을 전하는 삶에 대해 배우며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의 이미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며 긍정적으로 변화해  조원을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에게 너무나도 감사하였습니다. 함께 조별토론을 하며 내가 아는 하나님을 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였고, 조원들  이전에 교회에 다니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는 조원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라도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식이 긍정적인 인식으로 변화하여 다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마음이 생기길 바란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조별 토론 시작 전에는 이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인 시선에서 조금  나아지고,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을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로 이끄실 줄을 믿는다는 기도를 조원들을 위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동안 늦은 시간  지역까지 오셔서 강의 해주시느라 정말 감사했습니다. 수업 중간중간 영상도 많이 넣어주셔서 지루하지 않게 수업을 들을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업내용 전부 유익하고 다른 과목과 다르게 공부라는 개념보다 사람을 배운다 라는 내용이 너무 좋았습니다.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학기동안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교회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수업 전에는 혐오감과 불쾌감이 있었다면  수업 이후에는 저와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에 이로운 부분이 있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무언가를 싫어하더라도 최소한 싫어하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느꼈습니다.  수업이 저에게는 노력하는 과정이었고  과정 속에서 교회를 싫어하는  아닌 교회 안에서 모순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싫어하고 있었다는  알게 되었습니다.

 

2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 시간동안 수업으류진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인생에 대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학기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청년, 대학생의 이야기에 관심 기울여주시고 저마다의 의견에 궁금한 점을 표해주셔서 진심으로 소통하는 강의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모습에 기독교의 참된 포옹하는 마음을 배울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기독교에 대해 새로 알게 되었고,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삶을 살면서  수업을 잊을  없을  같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시 한번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의가 의외로 재밌었고 내용이 너무 알찼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수업을 통해 좋은 기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교수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비종교인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거부감없이  들을  있었습니다.

 

한학기 동안 열정을 다해 강의해주시고  길을 달려오시는 교수님을 생각하며 수업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던  같습니다. 모든 학생을 배려해주시는 모습과 솔직하고 담백하게 기독교에 대해 알려주신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에 수업 들을  내가 성경을 믿지 않는데 집중하고  들을  있을까 싶었는데 교수님의 수업 내용이 정말 유익했고 얻어 가는 것이 많은 수업인  같아  수업을 수강하길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수업을  듣는다면 교수님 수업 듣고 싶습니다. 좋은 수업 감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좋은 강의였지만 사이버캠퍼스에 과제를 제출하는 것도 좋았지만 워크북으로 진행했으면  좋았을  같다.

 

수업 재밌었습니다!

 

어찌 보면 무교인 사람들이 다소 꺼려할 종교라는 주제이지만 매끄럽고 종교에 대한 흥미를 가질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단지 학점을 챙겨가는 수업이 아닌 철학과 봉사 정신을 배울  있는 강의었습니다. 다음에도 기독교 수업을 들을  있으면 무조건 들을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 원래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와 교회도 가보고 대화를 많이 하게   같습니다.  강의는 저에게 철학과 봉사 정신을 알려주어 어찌 보면 인생의 길잡이와 같은 강의었습니다. 다시   감사드리고  학기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복음 전파 활동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고, 교수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 전파를 경험하였는데 교수님 덕분에 반감이 들지 않은 활동을 경험한  같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선의 강의와  강의를 위해 아침부터 서울에서 여기까지  주시며 강의를 준비하시고 전달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생겨났습니다. 조별 활동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참여하였지만, 유독 저희 (1) 조용했던  같아서 다음에 조를 구성할 때에는 다양한 성격을 섞어서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좋은 경험과 좋은 말을 많이 듣게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학기 동안 강의를 진행해 주시고 복음을 전파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수업  들었습니다!

 

 학기동안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짦을 시간이였지만 교수님의 수업으로 교회에 기능에 대해 알아가고 기독교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학기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강잉기에 중간 쉬는 시간에 출석 1, 끝나고 1 체크하면 좋을  같아요

 

 

2023년 2학기 기독교윤리와적성 강의평가(박기모).pdf
1.38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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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뉴스를 고통의 포르노로 소비하며 자신이 처한 안전한 자리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평소에 보지 않았던 곳으로 눈길을 돌리길 바라며(p.122)

 

이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독서모임에서 '황계찬 목사'가 정리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 저자 : 김인정(경계를 넘나드는 저널리스트)

  -前 광주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現 프리랜서 기자(미국)

 

▣ 저자가 목격한 고통

·이태원 참사 ·기후 위기의 불공평함 ·서울과 비非서울 ·서울 뉴스와 지역뉴스 사이의 권력 관계
·산업재해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 운동 ·가난한 사람의 기부
·환경미화원 ·젠더 갈등 ·홍콩 시위 ·미국 내 아시아계 증오 범죄
·텐더로인의 마약거리

 

 

 

prologue   구경하는 인간(Homo spectators)

 

 

-세계 3대 구경 : 1.                      2.                     3.                    

-걸프 전쟁

-911 테러

-쌍용자동차 사태

-세월호 참사

-10.29 참사  

 

 

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목격(目擊)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求景)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p.24-25). 

카메라가 한 대씩 탑재된 스마트폰과 이미지 전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를 발판 삼아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사람을 향하여 고통의 중개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중개하는 일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붙는다. 전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할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는 딜레마(P29-30).

 

구경과 대면 역시 현실에선 정확하게 갈라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서 일어난다. 흥미 때문에 모여든 군중의 수가 역설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격자가 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 구경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p.30).

 

오늘날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은 범람하는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사고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p31).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기도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p.34-35).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p.37).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p.49).

 

 

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된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우리는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p.74).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궂은 날씨의 스펙터클이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를 꽤 이상하게 오염시키거나, 비틀어버릴 때가 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여지고, 재난 현장은 대상화되어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한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반지하 침수 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의 사진이 고통을 굽어살피는 지도자의 이미지인 양 홍보자료로 유포된다(p.79-80).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Jeff Goodell)은, 폭염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도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p.89).

 

우리는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지구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끔 잊는다(p.90).

 

침묵이야말로 산업재해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이다. 위급한 상황에도 사고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119 신고를 미루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입을 닫으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산업재해는 주로 인재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지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안전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는, 뻔한 패턴이다. 산업재해는 이미 입력되어 있는 설계 오류다(p.91-92).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p.94).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p.96).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숨진 김 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석탄 이송 컨베이어 밸트에 끼여 숨진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p.100).

 

5.18이 국가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서 인정받고도 북한 특수군이 광주 시민인척하며 저지른 일이라느니, 폭동이라느니 하는 끈질길 거짓말에 수십 년간 시달리는 이유다. 문제는 “5.18은 폭동”이며 “북한 소행”이라는 가짜 뉴스와 역사 왜곡이, 전라도에 대한 오랜 지역 차별과 맞물려 새로운 인터넷 ‘밈’이 된 현상이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오는 즐거운 놀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폭력적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사이트, 이른바 일베에 게재됐던 ‘홍어 택배’ 게시글이었다. 일베에는 이런 글 외에도 신군부의 논리를 조악하게 이식받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짜 뉴스, 희생자와 유공자에 대한 혐오가 넘쳐났다(p.107).

 

혐오가 뉴스가 되는 현상은 인터넷의 관심 끌기 문화와 결합해 주체할 수 없이 증폭했다. 이슈가 되니까 원래 있던 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p.108).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p.120-121).

 

이게 일종의 포르노처럼 소비되어 안방의 시청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위무하는 데,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계층 안에 더욱 깊숙하고 안온하게 머무르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서로를 돌아보기 힘든 팍팍한 사회 안에서, 억지로라도 더 약한 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돕는 게 뉴스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뉴스의 주제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적당한 ‘예시’가 되어 인터뷰를 요구받는 것 역시, 약자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 아닌가 싶기도 했다(p.122-123).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곳에서 쉴 권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의 휴식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쉬는 모습을 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취재 끝 무렵에야 깨달은 것이다.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 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p.124).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p.136).

 

 

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p.140).

 

서구 언론이 우크라이나전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건 편견을 노출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다분히 의도적이며, 여러 맥락이 있다. 전쟁터는 폭력과 죽음과 비극이 도처에 널려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전쟁 보도는 인권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이라도 간단히 믿어지기도 하지만 개별의 보도와 언론사들의 관점을 살피면 그 안에서 부글거리는 이해관계의 날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전쟁터에 만연한 참상의 증언을 주워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는 숱한 관점과 의도와 무의식에 스민 계산이 개입되곤 한다(p.144). 

‘우리’와 닮은 것들은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간단히 반대쪽으로 밀어내는 이런 발언은 거의 당연하다 싶게 나빠 보인다. 인권에 대해 말하며 편견과 배타주의를 끄집어 쓰는 당혹스러운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p.145).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Paul Bloom)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페이스북을 만든 메타 최고 경영자 마크 저커버스(Mark Zuckerberg)는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당장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더 큰 관심사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p.148).

 

더구나 개인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를 주축으로 뉴스의 소비가 극도로 개인화되고 에코 체임버(echo chamber)효과(폐쇄된 환경에서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하며 기존의 신념을 증폭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에 갇히게 된 시대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와닿지 않는 뉴스는 점차 존재하지 않는 뉴스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에게 ‘신경 쓰이는’ 뉴스만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p.148).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p.155).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로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쏠리던 시기인데다 팬데믹과도 연관된 이슈라는 데 힘입어 주류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의 인종차별 의제가 전례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p.158).

 

알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고통받는 몸》에서 “때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p.167).

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고통과 상실을 겪어낸 한 사람이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같은 이름의 다른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슬픔과 우울, 기억이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쓰려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적인 애도를 겪어내는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p.212). 

 

그렇다면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하며 뉴스를 전할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울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보고 들어줄 가능성. 대개 자신의 일로 꽉 차 있을 머리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소식을 끼워 넣고 염려해 줄 가능성. 다 보고 난 뒤에도 기억해 줄 가능성.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가능성. 나아가 뒷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가능성. 줄여 말하면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p.236).

 

뉴스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만들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없이 순진한 희망에 기대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줄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이 약간 변할 수도 있다는 천연덕스러운 믿음, 이걸 믿는 일은 정말 가능한가?(p.237)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머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p.237).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p.237-238).

 

한국사회를 취재할 때는 자주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나? 나는 과연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이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누굴까? 이 고통을 이야기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중산층 기자들이 ‘사회적 약지’를 대변한다며 쪽방촌에 들이닥치는 풍경이 얼마나 침략적인지 계속해서 묻게 했다. 이민을 와서 당장 생계를 위해 스파에 취직해야 했던 여성들보다 훨씬 안전한 지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기만 아닐까? 우리는 인종과 언어, 계급을 모두 뛰어넘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p.248-249).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p.253).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도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게끔 한다(p.259).

 

애도는 이때 정치로 흐른다. 공적 애도 안에서 자주 가치를 다투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힘겹게 겨루기를 펼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유하고 고쳐나가려는 시도 안에는 성실한 슬픔이 깔려있다. 이럴 때 사회적 애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며 사적인 영역에만 밀어 넣으려 하는 건, 개인의 애도 과정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사적이라는 건 보이지 않도록 감춘다는 것과도 비슷한 질감의 단어다. ‘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는 국가나 기업이 다루기에 까다로운, 감정을 가진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애도의 사적인 속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위로 이어지는 공적 애도의 진정성을 두고 매번 시비가 붙는 건, 사회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도 보인다. 

공적 애도의 상황에서 이야기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죽은 이를 숫자로 남겨두지 말고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할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259-260).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p.262). 

 

epilogue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릴 뿐이다.”

 

 

■ 질문-1 : 목회자와 기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질문-2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목사로 살고 있는가?

 

■ 질문-3 : 우리 시대의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질문-4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구경꾼인가? 목격자인가? 증인인가?

 

■ 질문-5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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