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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 기독교와 선교(임태순, 한국해외선교회출판부)

 

 

아래 책 정리는 죠이선교회 정희원 간사가 한 것을 제가 추가로 수정한 것입니다.

정리 : 정희원 간사

 

들어가는 글

 

▶ 교회의 확장 역사에서 세 번의 큰 전환

① 사도행전 11:19-20에 기록된 것으로, 안디옥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를 그리스도인들의 주(Kyrios)라고 전파한 것

② 크리스텐덤 시대

③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 기독교가 남반구 대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

▶ 오늘날 변화하는 선교의 세 가지 기둥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② 번역 가능한 복음

③ 세계 기독교 현상

▶ 한때 선교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재복음화가 필요한 선교지로 바뀌고 있다. 피선교지였던 태국 교회는 또 다른 선교의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태국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복음과 선교가 흘러가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글로벌한 종교였다. 

▶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서구 유럽 교회는 오히려 급격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반대로 예전의 선교지였던 비서구(다수세계)의 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족속과 나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그 누구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 근대 선교운동은 성공의 지표를 선교지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는가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하나님의 선교' 즉 오이쿠메네 (oikoumene,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으로서의 선교 이해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아름다운 신학을 발전시킨 독일 교회가 수백 만 유대인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교회의 멤버가 되는 것이 과연 선교운동의 최종 목적지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비서구 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서구 교회 지도자들 안에서도 동일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교회를 세우고 서구적 기독교 세계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던 근대 선교운동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던 선교가 맞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관심이 교회로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전체(오이쿠메네)가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대로 회복되는 데 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 안타깝게도 이러한 주장은 이후 극단적인 사회참여 논리로 변질 되면서 복음증거와 교회개척을 밀어내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선교운동이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으로 분리되는 주요 배경이 된다.

 

1부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

 

★ 현장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 선교사는 ‘서구인'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있었다. 비서구인들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고 동서양 구별 없이 한 팀이 되어 사역하고 있었다.

 

★ 초기 기독교에서 길을 찾다.

▶ 대표적인 학자 :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21세기 선교 상황은 초기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 ‘위대한 세기' 동안의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 국가 권력의 비호와 지원 아래 진행되어 온 것에 반해, 비서구 지역의 교회들이 주도하게 될 21세기 선교는 정치적 억압, 적대감, 경제적 빈약함 속에서 진행될 것이기 때문

▶ 유대 문화의 율법적 측면, 예를 들면 할례 등은 자신들의 복음 이해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로 느껴졌다. 유대 문화에 물든 기득권 집단의 저항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적 정체성을 벗고 헬라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독교 정체성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 초기 기독교 당시의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을 검토한 뒤 크라이더는 그의 책 “회심의 변질”에서 이 비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이한 삶의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축귀로 대표되는 영적 능력이었다.

▶ “선교사는 굶주린 거지들을 향해, 어디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거지일 뿐이다.” D.T. Niles

 

★ 어디서 시작되었나?

▶ 뉴비긴은 지난 세기 서구 선교의 근간을 이루던 크리스텐덤(Chistendom) 선교방식, 즉 우월한 서구 문명을 앞세워 기독교를 전파하던 방식을 본질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

▶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1910년)는 국제적인 선교대회의 전형이 되었다. 이전에도 선교대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파와 국가를 초월해 모든 개신교 선교단체 대표들이 모인 선교대회는 에딘버러 대회가 최초였다.

▶ 일련의 결정들은 세계 선교운동이 선교 단체 중심에서 서서히 교회 중심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난 세기 동안의) 서구의 선교운동은 크리스텐덤의 마지막 절정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크리스텐덤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이었다(Walls 2016, 694).

▶ 선교사는 '자신의 안락사'를 준비하는 존재다. 선교사역이 성공해 현지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되고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즉시 떠나야 한다. 선교사는 건축이 끝나면 철거되어야 하는 비계와 같다. 크리스텐덤 방식의 선교는 성공을 거뒀고 그 성공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다.

그런데 현지 교회가 이미 뿌리내리고 성장한 뒤에도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선교지에 머물러 있었고 여전히 현지 교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비서구 지역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제기된 선교 모라토리엄(moratorium, 일시 중지) 요청이었다. by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총무인 존 가투

▶ 선교 모라토리엄의 내용은 서구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이 필요하다고 외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들이 있으니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지역의 복음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현지 교회들을 믿어달라는 것이었다.

▶ 근대 기독교 선교운동의 의미를 두 개의 단어로 요약했다.

"실패한 비전과 성취된 꿈" (Failed Vision & Accomplished Dream)이다 (Robert 2009, 67-69). 

- 서구 크리스텐덤의 세계적 확장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선교운동은 실패한 비전이다. 

- 선교운동을 통해 세워진 세계화된 기독교(World Christianity)가 바로 성취된 꿈이다. 각 문화에 뿌리내린 교회들은 다양한 기독교 정체성들로 발전했고 이 다양성은 다시 하나의 글로벌한 기독교로 연결되고 있는데 이것을 초기 기독교가 바라던 꿈의 성취로 보았다.

▶ 파송 받은 전임 선교사들보다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아마추어 선교가 활성화될 것이다. 즉, 비영리 NGO 단체가 주된 선교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고 삶의 총체적 변 화를 지향하는 선교가 될 것이다.

▶ 사무엘 에스코바의 관점 :

- 1999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 WEA)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학자) 회의”

- 삼위일치 하나님의 선교/ 번역 가능한 복음 / 지구촌화된 교회/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반응

▶ 마이클 고힌 : 

- 21세기 선교학의 새로운 방향성 네 가지 

① 서구로부터 비서구로 향하는 일방통행식 선교 패러다임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흐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

②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으로의 변화

③ 확장 패러다임으로부터 소통(communication)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선교는 더 이상 지리적 확장이 아니며 전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토착교회들의 삶과 행위를 통한 복음의 소통으로 이해

④ 영혼 구원을 위한 영적 복음을 넘어 삶 전체의 변화를 위한 총체적 복음을 지향

 

2부 21세기 선교 패러다임의 기둥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 복음주의 진영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선고 개념을 수용을 결정한 계기는 세계복음주의연맹이 주최한 이과수 선교회의(1999년)였다.

▶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교적 사건들은 하나님이 선교의 주도자임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당시의 이해 : 이 용어는 복음주의 관점과 대립되는 에큐메니컬 진영이 선호하는 선교학 용어로, 영혼구원을 무시하고 복음을 세상 변혁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 한다. 

▶ ‘나“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교‘를 하기 위해 몇 가지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먼저, 반복적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선교를 거들기 위해 부르심 받은 존재임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사역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사역을 위해 자신을 몰아 부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역의 기쁨이 사라지면 즉시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 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 는 복된 과정이다. 

▶ 선교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그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전의 근대 선교운동을 이끌던 핵심적인 틀은 영혼구원과 교회 개척, 그리고 기독교의 전 세계적 확장이었다. 즉 교회 중심적 사고가 선교운동을 지배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교회 중심의 선교 이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확산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관심이 피조 세계, 즉 오이쿠메네(oikumene) 전체의 회복에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에 선교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교회 중심적(church-centric)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란 관점으로 선교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계몽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한 바르트의 영향 : 선교의 토대를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에 둘 것을 촉구했고 특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선교라는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시는 행위를 의미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 보내심의 목적은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이라는 보다 큰 틀을 지향한다.

▶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기존의 교회 중심적 선교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당시 선교학계의 요구와도 맞아떨어졌다.

▶ 무엇보다 기독교 세계였던 유럽에서 벌어진 제 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 우려 : 무엇보다 회심과 선교의 영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 위험이 있었고 피조세계 변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개척 중심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못해 생명력 있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은 선교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가 절정이었던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웁살라 대회에 대한 맥가브란의 비판 : ① 대회 기간 중 십자가 구속의 복음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② 선교라는 용어가 수없이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은 불신자의 회심과는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③ 타종교와의 대화, 사회의 개혁은 강조되었으나 이에 반해 복음 선포의 긴급성은 주된 논의의 밖으로 밀려났다. ④  전 세계에는 아직도 복음 듣지 못한 20억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향한 복음증거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문 선교 단체는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었다. 

▶ 이후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주요 배경이 된다. 한편 '복음을 들을 기회 자체가 없는 20억'에 대한 호소는 후에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 제 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복음주의 진영은 전도와 사회 참여 모두를 선교로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일부 수용했지만, 동시에 ‘전도의 우선성'을 명시함으로써 전통적 복음주의 선교관을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 로잔언약은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을 담아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몸된 교회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 이름의 영광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비록 "전도는 교회의 최우선적 사명"이라는 전제가 뒤따르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서는 전도와 함께 사회참여 역시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서 선교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 두 영역 모두의 통합을 주장한 또 다른 학자는 레슬리 뉴비긴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지만 그는 이 운동이 지나치게 세상의 변혁에 치우친 것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존 스토트나 레슬리 뉴비긴은 각기 다른 진영을 이끄는 지도자였지만, 양 극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가 하나로 통합되는 관점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었다.

▶ 복음주의 진영이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주는 사례 :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난 사건(1994 년 4월 6일)

극단주의적인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시작하면서 인종대학살 사태가 발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3개월 만에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태가 발생할 당시 르완다는 전 인구의 95%가 기독교였다. 기독교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르완다는 가장 성공한 선교 현장이었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화되었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잔악한 살육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 이과수 선교회의에서 “하나님의 선교” 결의문 작성에 영향을 미친 두 학자 : 한 사람은 남미 페루 출신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시아 스리랑카 출신인 아지쓰 퍼난도(Ajith Fernando)였다. 

▶ 에스코바 : 복음주의 선교학을 지역(유럽, 북미주, 비서구)에 따라 세 개의 흐름으로 요약. ① 영국과 유럽 중심으로 진행된 “후기 제국주의적 선교학” ② 미국 중심의 "관리적 (경영학적) 선교학" ③ 피선교지였던 다수세계 교회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주변부에서 나온 비판적 선교학”

▶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관점은 (서구) 기독교 확산으로서의 선교 개념을 내려놓고, 창조와 타락,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의 관점에서 선교를 조망하도록 도전 / 교회개척보다는 이 교회들이 피조세계 전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

②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를 하나님이 펼치시는 위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이며 동시에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임을 일깨운다. 성경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해 준다.

③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파송한 존재이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적' 존재다. 하나님의 선교는 영혼구원과 교회 확장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④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화된 기독교의 타문화 선교운동이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을 수 있도록 돕는다.

 

★ 번역 가능한 복음

▶ 기독교 역사는 지속적인 복음의 번역 과정이었다. 번역으로 인해 복음의 변질이나 기독교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고 넓어졌다.

▶ 우리는 내가 속한 교회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좀더 넓은 시야 속에서 교회를 보지 못한다. 신앙은 자기가 믿는 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내가 익숙한 교회도 역사상 등장한 수많은 교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월스는 "문화의 포로이자 해방자로서의 복음”이라는 논문에서, 서로 다른 교회들이 하나의 기독교로 묶일 수 있었던 근거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② 동일한 경전 중심의 신앙과 성례 ③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정체성 등이다.

▶ 복음의 번역 가능성을 수용하고 다름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이해한다면 교회의 다양성은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고 세상에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복음의 통로가 될 것이다.

▶ 유대인의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로 계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가능했다. 요한복음 1장에 사용된 ‘로고스’ 이 개념을 유대적 세계관을 가진 신자가 읽는다면 어땠을까? 왜 굳이 이방 철학 개념을 가져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하나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 바른 번역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하나는 의미(meaning)의 ‘보전'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form)의 ‘변경’이다.

▶ 20세기 말 복음의 번역 가능성 이슈를 처음 제기한 학자는 라민 사네(Lamin Sanneh)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어로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들은 코이네 헬라어였다. 당시 교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람어를 모르는 헬라어 사용자였기 때문에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기록한 것이다. 아람어로의 기록을 고집했다면 번역 과정의 내용 왜곡의 위험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독특한 종교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번역 과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 성령이 행하신 최초의 사역이 하나님의 복음을 “난 곳 방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되새겨볼 만하다.

▶ 라민 사네보다 앞서 번역 가능한 복음과 관련한 내용을 주장한 복음주의 학자는 선교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Paul Hiebert)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삼자원칙" 즉 자전(self-propagation), 자립(self-support), 자급(self- support), 자치(self-governance)에 더해 네 번째 자아(the fourth-self)인 신학적 영역에서의 '스스로 서기' 즉 “자신학화”에 대한 문제 제기

▶ 자신학화가 자칫 신앙의 상대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에 관하여 히버트는 비판적 실재론(critical-realism)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상대적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reality)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히버트는 객관적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① 하나님 계시인 성경이며, ②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이며, ③ 역사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즉 전 세계 교회의 존재이다(히버트 1997, 131). 특히 세 번째 영역과 연관해 히버트는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해석학적 공동체의 형성을 제안한다.

▶ 히버트는 각 문화를 초월하는 초문화 신학(transcultural theology)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초문화 신학은 다음 세 가지 유익을 준다. ① 초문화 신학은 각 지역의 토착신학의 오류로부터 교회들을 보호해 준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지체로 세워지도록 돕는다. ② 지구상의 모든 교회들이 세계선교를 위해 연합과 동역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③ 각 문화권의 교회들이 세속주의에 오염되거나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그는 사람들의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신뢰했으며, 동일한 성령이 다 른 문화권의 신자들의 삶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 서양 건축자들이 버린 돌들이 서구 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는 건물의 추축인 모퉁이돌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후기 계몽주의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종종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초월적 능력에 의한 치유와 축귀 사역 등은 전 세계 많은 기독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바로 그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본질이라는 자기 확신에는 반대한다.  

 

★ 세계 기독교

▶ 세계 기독교는 '다양성 위에서 그려지는 통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선교학 개념이다.

▶ 그때까지 선교사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 일을 돌파해내기 위해서는 주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샬 박사가 보여준 삶과 사역의 모습은 그 반대였다. 철저히 자신을 낮췄고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일이 되게 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의 왕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 21세기 세계 기독교 현상을 초기 기독교 현상으로의 복귀라고 주장한 대표적 학자는 앤드류 월스다. 월스는 초기 기독교에 관한 연구를 통해 기독교는 처음부터 복수의 다양한 정체성으로 발전했다고 이야기한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하나의 몸이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형성된 다양한 기독교적 정체성이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였다.

▶ 역사적으로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란 기독교의 특성이 사라진 것은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로마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다양성이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된 탓이었다.

▶ 존 파라트는 인구학적 무게중심의 전환으로 인해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에서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해석된 기독교 정체성들의 총합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교회가 물러난 빈자리를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이 함께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 세계기독교의 중심축으로 변화되고 있는 남반구(비서구) 기독교는 신학적, 윤리적으로 더욱 보수주의적 입장을 건지하며, 초자연적 신앙현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며 성경해석에서도 근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려 한다.

▶ 세계 기독교는 자신학화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지역화(토착화) 과정과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정체성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화 과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3부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실제

 

★ 하나님의 선교와 현장 사역

▶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전도와 교회개척만이 선교의 본질이라 본 반면, 개혁적인 입장은 피조세계 전반의 변화 즉 부조리한 세상의 변혁까지도 선교의 본질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나님의 선교는 단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 에 멈추지 않고 전인격적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회복되는 것을 지향한다.

▶ 기독교 선교의 본질은 서구(또는 한국)의 기독교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세계의 회복과 온 세상의 사람들의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권리를 갖고 있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아 참여하는 자일뿐이다. 

▶ 하나님의 선교가 선교 현장에 주는 또 다른 의미는 가시적 성과 중심으로 평가되고 경영학적 전략이 중시되는 실용주의적 선교 현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영혼 구원, 교회 성장 등을 포함하는 보다 큰 그림을 지향한다고 봐야 한다.

▶ 뉴비긴의 설명은, 예수를 모른 채 영원한 멸망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필자를 자유케 해 주었다.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취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떠밀려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뉴비긴은 선교를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그 소식을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기쁨의) 분출이다.

▶ '평화의 사람을 통한 전도법' : 교회가 없는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게 될 때, 전도자는 그 지역에 있는 '평화의 사람‘을 찾아 그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 번역으로서의 선교

▶ 선교지로 떠날 때 선교사는 다 자란 나무를 가져가지 않는다. 한 움큼의 씨앗을 놓고 간다. 씨뿌리기 비유는 복음이 번역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다. 새로운 문화라는 토양에 심긴 복음이라는 씨앗이 새로운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 성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음을 각 나라의 방언들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인도에서 사역한 스탠리 존스 : “우리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는 인도의 길에서 만나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 복음은 서구 문화의 옷을 입은 기독교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 세계 기독교 상황에서의 선교

▶ 세계 기독교는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로컬화(localization)의 두 방향성 이 공존하는 글로컬화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자기비판적 주장 :

- 첫째 겸손과 회개가 필요하다. 겸손은 교회 성장과 세계복음화에 관한 엄청난 양의 책, 프로그램 그리고 전략 등이 활발한 성장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장기적인 생존여부를 염려해야 하는 그런 교회가 있는 세계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골똘히 숙고하게 만든다. •• 전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회에 우리는 기성복 같은 전략들을 뻔뻔스럽게 수출하고 있다. 둘째 진정한 동반자 정신이 필요하다. ··· 이전에 복음을 받았던 국가들이 지금은 자신들이 받았던 10배나 더 많은 선교사들을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보내고 있는 (인도의 경우처럼)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보내는 국가와 받는 국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

▶ 마이클 고힌이 분석한 남반구 기독교의 특성 : 

- 남반구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남반구 기독교에는 서구 교회와는 다른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 이들 남반구의 교회들은 또한 신학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신앙과 실천 방면에서 훨씬 더 헌신적이기도 하다.‘ 예배는 그들의 문화가 지닌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러한 특징은 서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외 지역의 교회는 훨씬 더 열정적이고, 예언, 환상, 황홀경 상태에서 말하는 것 그리고 치유를 통해 표현되는 즉각적인 초자연적 사역들에 훨씬 더 중점을 기울이며 관심을 두고 있다. 남반구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이해하 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남반구에 속한 교회들이 21세기 세계 기독교를 위한 리더십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전문 파송단체의 미래

▶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결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파송 선교단체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교지 교회들은 선교단체와의 긴장 관계 가운데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비서구 세계에 개척된 교회들을 배제한 채) 서구 선교단체들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1970년대 모라토리엄"(선교 일시중지) 요청 역시 선교단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충격적인 도전이었다. 선교단체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토착교회들의 반발과 도전의 표현이었고 전문선교단체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 제기였다. 서구 기독교가 쇠퇴하고 세계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비서구 교회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서구로부터 비서구로의 일방적 기독교 확장"이란 패러다임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근대 선교구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또 다른 배경은 비서구 출신 선교사의 수적 우위라는 상황이다.

▶ 전문 파송단체는 계속되어야 한다. 미전도 지역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평신도 아마추어 선교 자원들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지역 언어와 문화에 능통하고 복음에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생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전문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 당시 많은 선교학자와 선교사들이 저널 제목의 Missions(복수)에서 'S'를 떼어내고 저널 이름을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단수)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Missions에서 'S'를 떼어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먼저

missions(복수-'선교사역'으로 번역)는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감당해야 하는 (하나의) 사명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담아낼 수 없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mission(단수)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둘째,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서구 교회들이 선교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에 사용된 용어로 이 표현에는, 서구는 선교 본부, 비서구는 선교지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비서구 지역은 단지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비서구 교회 출신 선교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단수로서의 선교 (mission)가 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복수로서의 missions(선교사역)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저널 이름에서 ‘S'를 제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 미전도 지역 선교에 대한 뉴비긴의 관심은, 선교를 선교적 차원 (missionary dimension)과 선교적 의도(missionary intention), 두 가지로 나눠 설명한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선교적 차원은 지역교회의 존재 또는 삶 자체가 선교라는 의미다. 단수로서의 선교(Mission)를 의미한다. 한편, 선교적 의도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미전도지역을 향한 의도적 선교를 의미하며 복수로서의 선교사역(Missions)을 의미한다. 교회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교회가 자민족 복음화의 열정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역들은, 외부로부터의 ‘의도적인' 선교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될 수 없다. 

 

나가는 글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21 세기 선교운동이 디디고 선 기초에 해당한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이다. '세계화된 기독교'(세계 기독교 또는 글로컬 기독교)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선교운동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21 세기 선교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다. 한편 ’번역 가능한 복음' 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터 위에 '세계 기독교'라는 건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연결고리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는 초청장이다. 

 

 

함께 생각해볼 내용들

2025 로잔 서울선언문

  • 베빙턴이 정의한 복음주의의 4가지 특징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삶이 바뀌어야 한다.
  2. 행동주의(activism) : 복음을 실현하려고 노력
  3. 성경주의(biblicism) : 성경의 권위를 강조
  4. 십자가 중심주의(cruicentrism) :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강조

그렇다면 학생 선교단체혹은 파라처치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변화를 추동하겠는가?

학생 선교단체들은 출구전략, 혹은 안락사를 준비하고 있는가?

선교지의 질문과 지역 교회(한국)의 상황과의 연관성과 차별성은?

현재 사역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과정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로 가득한 세상(르완다의 학생 장면, 95% 기독교화된 나라 하지만...) 교회는 탁월한 제자를 키워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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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과 일상

기독교 세계관과 일상(박기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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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이선교회 박기모 목사 

 

들어가며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1989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당시에는 하늘같이 여겨지는 선배들로부터 균형잡힌 신앙을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비전’(리차드 미들턴)이라는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후 캠퍼스 사역을 하다가 2013년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에서 3년간 공부했다. 이때 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가 매우 방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성경, 과학 등등의 다양한 주제를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배웠다.  

본 강의는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또한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을 성경이라는 안목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으로 한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worldview)은 말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식자나 무식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다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을 배우지 않아도,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알지 못해도, 모두는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일반적인 정의와 다양한 세계관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세계관은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어로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로 정의된다. 모든 이들은 이러한 인식의 틀을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기에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에 비해서는 논리적이지 못하며, 신념에 비해서는 의지적이지 못하고, 신앙에 비해서는 초월적인 면이 부족하지만 철학, 상식, 신념, 신앙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공기와 같은데 이는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평상시에는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활용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가 제시하는 8가지 질문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와 리차드 미들턴(J. Richard Middleton)이 제시하는 4가지 질문을 사용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자신의 책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The universe next door)’을 개정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의 정의를 수정하고 세계관 질문을 확장시키고 있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8) 이 세계관과 일치하는 개인적이고 삶의 방향을 정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언 왈쉬는 그들의 책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을 통해서 4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우리는 누구인가?

3) 무엇이 문제인가?

4)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처럼 위의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창조주(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기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 진화론, 유물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인식의 틀)을 통해서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문화)에 의해서 나의 세계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을 안경으로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사용하는 안경이 빨간색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이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보이고 유신론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신의 흔적으로 가득 차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 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하기에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윤회나 인과업보에 대한 관념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당성 구조안에 이러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에 대해서 안점식은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外現化)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內面化)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은 세계관 형성 또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들음이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세계관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분의 제자로 만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이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이렇게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서 세계관(worldview), 가치체계(value system),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이 모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복음을 전함으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은 문화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문화와 삶 속에 체화되어 있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위치하는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하고 이는 반드시 세계관끼리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20세기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이를 추구하면서 이러한 본질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모만 커지고 외형만을 바꾸는데 그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관 자체가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바로 혼합주의다. 그렇다고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의 변화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바로 전하면 듣는 이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먼저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창조, 타락, 구속, 삼위일체, 구원, 영생, 천국, 부활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즉 그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불신자들과 비교해서 매력적이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가운데 우리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이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구별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불신자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될 것이고 이 “소망에 관한 이유”(벧전 3:15)를 묻는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2.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Factfulness)

모두들 컴퓨터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윈도우 시스템이다. 1985년 Windows 1이 발매되었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지금은 Windows 10을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점점 좋아지고 소프트웨어가 복잡해지면서 더 다양한 기능들이 요구되기에 적기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 우리들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를 직접 테스트해보자.(테스트 결과가 마음에 드는가??)

 

우리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는데는 여러 가지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데이터가 현실에 적실하냐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배운 지식의 내용이 1900년대 것이라거나 1990년대의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들은 지식을 업데이트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앞선 세계관에 대한 정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이란 바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인도에서 40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한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이 인도보다 더 선교가 필요한 나라가 되어버린 상황에 통탄했다. 뉴비긴의 눈에 비친 영국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은 사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교회는 다니고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성경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지는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은 바라볼(look at) 책이 아니라 통해서 볼(look through) 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단순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성경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할 때 어떤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인가? 

기독교 세계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창조-타락-구속”과 “구조와 방향”이다. 

 

1) 창조(Creation)

창조가 중요한 이유는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바르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처음을 열면서 시작되는 창조의 선언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면서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바로 여기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창조이기에 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1) 말씀에 의한 창조, 2)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3) 목적이 있는 창조, 4)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시는 창조, 5) 보시기에 좋은 완전한 창조의 특징을 갖는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처럼 바른 창조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앞서 제시한 세계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첫걸음이 된다. 

 

2) 타락(Fall)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범죄, 불순종 행위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에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죄는 결혼이라는 창조 제도를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혼이나 혼외정사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깨뜨려서 가정의 파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규례로서의 국가는 오늘날 전체주의, 민족주의, 독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땅의 소망인 하나님의 교회는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는 일반 기업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임으로 도리어 세상의 근심이 되어버렸고,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렸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인간의 타락,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이라면,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창조와 타락의 관계에서 볼 때 구조는 잘못된 방향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다. 이러한 타락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기대하게 한다. 

 

3) 구속(Redemption)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은 원래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로 화해(reconciliation), 새롭게 함(renewal), 구원(salvation), 재창조(re-creation), 거듭남(regeneration, born again) 등이 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 위의 영어 단어에서 접속사로 사용되는 “re”를 볼 때 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계시록의 구속, 완성의 이야기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또한 선한 창조의 원래의 모습(original design)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 왜곡된 우리의 모습을 어떤 모습, 어떤 방향으로 수정해야할 지를 바로 선한 창조가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간 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고 타락은 모든 피조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시켰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 1:28, 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의 본문을 우리는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땅과 모든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령하셨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이름을 명명하고 땅의 소산을 누리면서 문화 명령에 순종했다. 하지만 선악과를 통한 타락의 영향으로 인간과 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 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영역인데 이것이 타락으로 인해서 왜곡되었고, 우리의 역할은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문화의 흐름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화, 청년 문화에 영향을 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알아보자. 

 

4.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사람들은 근대(modern)의 출현을 서구의 정신사에서 ‘제2의 계몽’이라고 한다. '제1의 계몽'이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에게서 구현된 신화(Mythos)에서 철학(Logos)에로의 변화였다면, '제2의 계몽'은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와 타율에서 비롯된 숙면으로부터 이성이 깨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종교개혁을 지나 16-17세기의 신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를 거쳐, 17-18세기의 신고전주의, 19세기 낭만주의,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이성은 수많은 일을 수행했다. 

근대는 이성을 절대시했고 이성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근대의 이상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핵폭탄 한방으로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끝을 알리면서 철학사조에서는 실존주의와 해체주의가 등장했고 이후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after)라는 의미와 모더니즘 너머(beyond)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성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전광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리요타르(Lyotard)와 데리다(Derrida)등이 주장한 해체주의(deconstruction)이다. 여기서 해체란 파괴의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 형이상학과 같은 텍스트를 철저히 비판하고 상대화함으로써 텍스트 안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구조들과 상호작용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와 탈중심을 지향한다. 

둘째, 모더니즘의 상징인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에 반대하여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내지 탈합리주의(Irrationalism)적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욕망, 충동, 감성을 중요시 여긴다. 

셋째, 일의성(一義性)보다는 다의성(多義性), 동질성보다는 이질성, 단수성보다는 복수성에 가치를 둔다. 이를 통해 "경계를 넘어선 시야, 가능한 변경,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가능하게 되었다. 

넷째, 탈인간중심주의 내지 주체의 상실을 나타낸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자연의 힘과 우주의 질서 속에 함몰되어 간다. 

다섯째,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표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정치 활동을 비롯한 모든 담론을 욕망을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체주의, 구조주의, 보편주의 대신에 해체주의와 탈중심주의를, 로고스와 논리적 절대주의 대신에 파토스와 탈합리주의를, 의미의 일의성과 절대주의 대신에 개별성과 다양성, 상대성을, 인간중심주의 대신에 탈인간중심주의를, 그리고 정치적, 역사적 관심 대신에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근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싸우고 극복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싸움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함과 동시에 내가 싸우고 있는 전투의 현장의 특성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절대유일의 진리를 부인하며, 또 초월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보편적인 가치와 전통, 역사와 인생의 의미마저도 부인한다. 또 이 시대의 인간은 상대주의와 다의성을 이야기하고, 개방성을 말하며, 지성 못지않게 감성적, 욕망적, 의지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종교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위기와 기회가 상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기에 기독교를 뿌리째 흔드는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계몽주의 이후 근대를 지나면서 지나치게 합리주의, 과학만능주의, 이성주의를 강조하여 편협해진 기독교의 복음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포스트모던의 특성이 이 시대 문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에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일상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5. 우리의 일상

1) 일상이란 무엇인가? 

칼 라너(Karl Rahner)는 일상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평범한 매일의 생활이라고 이해하면서 짧은 책 「일상」에서 일상에서의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라너는 일상은 주일과 대비되는 주중의 시간, 즉 매일 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시간들로 그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드러낸다. 라너는 일하는 것, 가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라너는 이 일곱 가지 일상생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일상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일상을 살고자 한다. 그에게 일상은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며 그의 거룩성과 은혜를 경험하는 바로 그 장소이다. 때로는 고단한 일상사는 우리를 낙담하거나 절망에 이르게 할 때도 있으나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힘으로 영원한 삶이라는 진정한 축제에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종교성이 강해질수록 종교, 교회생활에 매몰된 신앙을 요구받지만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삶은 결코 성전에 제한되거나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호 6:6; 사 58:6-7)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일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적 소명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일상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홍정환의 「호당 선생, 일상을 말하다」에서는 다양한 일상의 주제들을 다룬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설거지, 잠, 똥, 휴대전화, 신용카드, 연애, 드라마, 성, 운전, 죽음, 식사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들은 성속 이원론의 영향으로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자동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한다. 

 

"예언자 스가랴는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슥 14:20)고 말했단다.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를 타듯 옛 사람들이 말을 탔다고 생각해 보거라. 말방울이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 차가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자동차 경적 역할이었겠지. 본디 제사장의 의복에만 새겨지는 문구인 '여호와께 성결'이 말방울에 기록된다는 것은 가장 거룩하기 힘든 운전석이 거룩한 성소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단다."(운전, pp.202-3)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꿈꾸지만, 영웅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축적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일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중의 하나는 일, 직업일 것이다. 

 

2)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오래전부터 일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학자마다 조금씩 달랐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일을 ‘정신과 관련한 고상하고 가치 있는 활동을 방해하는 저주’라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이 신성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자본론》을 쓴 카를 마르크스는 일을 ‘자아실현을 위한 행동’으로 정의했다.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혹은 즐거움과 자아성취의 밑거름이라는 생각까지 인식의 폭이 매우 넓다.

 

일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자. 

 

벽돌공 세 사람이 돌을 쌓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첫 번째 벽돌공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몰라요?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벽돌을 기계적으로 쌓아 올리며 첫 번째 벽돌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던 행인은 두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돈을 벌고 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서둘러 벽돌을 쌓고 있었다. 행인은 더 묻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다 세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세 번째 벽돌공은 콧노래를 부르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신나세요?"

"당연히 신나죠. 내가 새로 만든 성당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세 번째 벽돌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인은 완성될 건물을 상상해보았다.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성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을 떠나는 행인은 생각했다.

첫 번째 벽돌공은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벽돌공은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번 돈만큼 행복할 것이다.

세 번째 벽돌공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생각하며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힌트를 주자면 세 번째 벽돌공이 쌓은 담이 가장 튼튼했고 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하게 되고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만족감, 즐거움이 다른 것이다. 일에 대한 관점이 일의 시작이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따라 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게 된다. 직업에 관계없이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상 생활이 활기차고 행복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위대한 청소부

"만일 어떤 사람이 거리의 청소부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베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창작하듯 거리를 쓸어야 한다.

그는 하늘의 천군천사와 땅의 백성들이 

여기 '자신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위대한 청소부가 살았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깨끗하게 거리를 쓸어야 한다!"

 

3) 성경이 말하는 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처음 맡기신 일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일은 아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형상의 발현으로서, 그의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는 일(work)이었다. 우리는 일을 노동과 연결시키면서 하기 싫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타락 이전의 일은 기쁘고 즐거운 행위였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의 은사와 재능의 발현으로서의 즐거운 일은 땀 흘리고 수고해야만 하는 노역(drudgery)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것을 믿으며 이를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양한 삶의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일상의 영성을 회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회복해야할 것은 바로 이 타락한 일을 구속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부패함 가운데 빠져버린 우리의 모든 일상을 구속하는 일이며 바른 성경적인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나가면서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 일이나 연애, 오락이나 정치와 문화등의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내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시해주는 방향이 우리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들이 처하는 각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올바른 신앙의 결단을 위해서는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을 분별해내고,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개별화, 분자화되어지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도리어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역은 권위적 인물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개인 스스로가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역 대상인 청년들의 현실적인 필요(Felt need)와 진정한 필요(Real need)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하고 영적인 필요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전도의 문을 닫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안전감을 느끼며 자신의 일상을 깊이 나눌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앞서 호당 선생의 말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오덕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먹고, 싸고, 자는 것과 같은 평범한 삶, 곧 일상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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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32(2025-06-13)

 

1. 전주대 수업

전주대 1학기 수업이 이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매학기 기말고사를 보면서 강의평가를 진행하는데 이번에 학생들의 피드백을 함께 나눕니다. 제가 중요하게 보는 항목은 아래의 내용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목적중 하나가 학생들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반감을 줄이고 관심을 높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의미있는 수업을 했다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학생들의 피드백입니다. 

 

이번 한학기 동안 기윤 수업을 듣고 느낀점은 가장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긍정적으로 변화 하였습니다. 교수님께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재미있게 전달해주셔서 제 인식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기독교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따로 질문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수업시간 중간중간에 나오는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느껴져서 일단 짧은 요약본이나 동영상을 시청한 다음 성경에 도전할 생각입니다.(학생 1)

 

처음 이 수업을 들을 땐 '기독교 윤리와 적성'이라는 과목명 때문에 종교적 강요나 부담이 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교수님께서 여자친구를 사귀시기 위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며, 수업 내내 강요 없는 태도로 편안하게 이끌어 주셨기에 낯설기만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오해와 부정적 인식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평소 삶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고 사는 저에겐 강의를 통해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신념보다는 인간적인 윤리와 삶의 방향성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수업이었기에 저에게는 이 수업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따뜻하고 배려 깊은 강의 방식 덕분에 저와 같은 무교 학생들도 부담 없이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조교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처럼 열린 자세로 다양한 학생들을 배려해 주시는 수업을 이어가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학 학기 동안 마음을 다해 강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학생 2)

 

수강 신청을 할 때 단지 야간 수업이라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였는데 수업을 듣고 나니 발표를 할 때마다 진심으로 눈을 맞추어 주셔서 조금 부담이었던 발표 수업도 약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을 늘 강조하셨는데 발표를 통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학생 3)

 

전주대 사역을 2017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진로 채플을 맡아서 시작했고 이후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 윤리와 적성’이라는 과목을 강의해오고 있습니다. 청년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해주고 있는 사역이라 기쁘게 해오고 있는데 한 학기 수업을 통해서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학생들을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그중 몇명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저의 모든 수고를 채워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몇몇 학생들에게 추가 과제로 교회 출석을 요청했는데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 전체 강의 평가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https://peterjoy.tistory.com/1156

 

 2. DOP(Day of Prayer)

매학기 한 번씩 죠이의 간사들이 함께 모여서 온종일 기도회를 가집니다. 오전과 오후 두번의 예배를 드리고 각각 전체 기도와 개인 소그룹 기도를 하면서 공동체를 위해서, 간사 개인의 기도제목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우리의 사역보다 하나님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함께 고백하며 나아갑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 사역을 준비합니다. 죠이 여름 수양회와 선교한국, 학복협 캠청연의 포럼(청년과 정치), 교회의 여름 수련회등 여러 사역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잘 진행되기를 기도해주세요. 

기도제목

1. 죠이선교회 지원사역부, 대외협력팀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2. 요양원에 계시는 장모님, 혼자 생활하시는 장인 어른이 건강하시도록 

3. 더기쁨 교회 제자훈련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도록
4. 여름 사역(죠이 여름 수양회, 선교한국, 캠청연 포럼, 교회 여름 수련회)를 위해서

 

 

 

2025년 6월 13일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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