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마케팅 열풍의 원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망각입니다. 비록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마케팅에 열중하는 교회는 부담스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담 없는 하나님의 친근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 인간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 주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 마케팅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더 친근해지고 만만해졌던 성경 속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점점 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아집니까?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거룩하신 하나님』에서 시간이 갈수록 변하는 바울의 정체성에 대해 관찰합니다. 바울은 그의 초창기 서신서에는 자신을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로 소개하다가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전서에 가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누구 말대로 자아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를 바로 보게 된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보면 볼수록 더 크게 벌어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간격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자신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바울은 더욱더 커지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Ⅰ. 마케팅 교회란 무엇인가

1.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마케팅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상품과 돈이 원활하게 교환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런 마케팅 중에서도 최고의 마케팅은 판매하는 상품에 대한 별도의 영업 활동이 없이도 판매되는 상품이 구매하는 고객의 욕구를 정확하게 반영함으로 상품이 스스로를 판매하도록 하는 마케팅입니다. p.25

1) 성공적 마케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마케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는 판매하는 상품이 얼마나 고객의 욕구 또는 필요를 확실히 채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상 고객의 필요를 알아내기 위해 행하는 기업의 노력이 마케팅 활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마케팅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악한 고객의 필요를 제대로 채우기 위한 활동들도 역시 마케팅입니다. 앞서 내렸던 ‘마케팅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상품과 돈이 원활하게 교환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이라는 정의에 포함된 ‘모든 활동’은 첫 번째는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기 위한 활동이고 그 다음은 파악된 필요를 채우기 위한 구체적 활동입니다. p.26

2) 성공적 마케팅을 위한 필수 요소 : 고객, 경쟁 그리고 상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

3) 성공적 마케팅을 위한 두 가지의 커뮤니케이션 전락 p.31-4

① ‘포장’의 커뮤니케이션 : 이미 파악된 고객의 필요를 더 증대시킴으로 그 필요에 대한 충족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입니다. 사람의 욕구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가치를 찾아내어 그 가치를 상품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부여하는가가 성공적 ‘포장’여부를 좌우합니다.

② ‘일관성’의 커뮤니케이션 : 고객이 어떤 상품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일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케팅이 일관된 메시지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가진 심리적 요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포장의 커뮤니케이션이 새로운 가치를 상품에 부여함으로 고객의 필요를 증대시키는 방법이라면 일관성의 커뮤니케이션은 반복을 통해 필요를 키우는 방법입니다.

2. 교회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1) 교회 마케팅의 대부 조지 바나

마케팅 교회가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기업에서 사용하는 마케팅이라는 이 개념이 오늘날 교회 속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뿌리박히게 된 최근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일명 교회 마케팅의 대부라 불리는 조지 바나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교회 성장에 필요한 삼위일체(마케팅, 심리학, 테크놀로지)중의 하나인 마케팅이 교회 속에서 상식이 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토대와 실질적 방법론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 조지 바나

- 교회컨설팅 전문회사 ‘바나 컨설팅그룹’ 설립

- 저서 : Marketing the Church(베다니출판사, 2002, 『마케팅이 뛰어난 교회가 더 성장한다』)

Church Marketing : Breaking Ground for the Harvest(미번역)

『21세기 교회를 붙잡아라』

『성장하는 교회의 9가지 습관 : 교회의 갱신과 성장을 위한 체질 개선 전략』 등.

- 조지 바나 어록 p.40-41

·목사는 우선 유능한 사업가로서 교회를 활력 있게 유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많이 참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불신자에게 전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실상 교회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마케팅 지향적인 교회는 교회의 목적과 상품(복음)을 제대로 이해한다.

·교회도 사업이다.

·예수님은 마케팅 전문가다.

이 두권의 책을 보면 조지 바나가 교회에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 교회 성장의 둔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둔화되는 교회성장을 증명하는 여러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그 실패의 원인은 교회가 제대로 마케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립니다. 조지 바나는 교회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정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급변하는 환경에 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지 바나는 복음이라는 상품을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마케팅이라고 명확하게 정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일반 기업들이 생각하는 마케팅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조지 바나는 지금까지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조지 바나가 얘기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felt-needs를 충족시키는 것”이 마케팅의 핵심임을 그는 자신의 모든 책에서 일관성 있게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마케팅 주창자들의 성경 왜곡 p.42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성경과 관계없는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친히 계획을 세우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심으로써 계획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눅14:28~30).

·어리석은 다섯 신부의 비유는 성공적인 마케팅을 위해서는 필요를 예견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마25장).

·씨 뿌리는 비유는 신앙을 마케팅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최대의 생산성을 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마13장). 이는 청중을 여러 세부 집단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과 마케팅을 지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목표 마케팅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자로 준비가 되어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 지음, 김광점 옮김, 『마케팅이 뛰어난 교회가 더 성장한다』, 베다니출판사, 2002, p44~45.

조지 바나에 의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세의 심판에 대한 열 처녀의 비유도 필요 충족을 위한 계획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둔갑했습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목표 마케팅의 한 사례로 등장합니다. 이런 식으로 볼 때 조지 바나에게 마케팅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마케팅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읽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왜곡은 그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케팅 교회의 정의 p.49

지금까지 조지 바나를 중심으로 교회와 마케팅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스스로에게 물어 볼 질문이 있습니다. “마케팅 교회를 간단히 정의해 보라”고 할 때 나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큰 교회가 무조건 마케팅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를 마케팅 교회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성장이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는 바른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마케팅 교회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마케팅의 정의에 근거해서 볼 때 마케팅교회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 상품을 갖고 있는 교회.

이 정의에서 마케팅 교회의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뽑을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마케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상품은 무엇인가?

둘째, 교회는 왜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가?

3. 교회가 마케팅 해야 할 상품은 무엇인가 p.50

교회 마케팅이란 복음이라는 상품을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

4. 왜 교회는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가 p.57

조지 바나가 정의한 마케팅의 개념 : 양측의 당사자가 서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상품과 재화가 유연하게 교환되도록 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일컫는 포괄적인 용어.

상품을 팔려고 하는 회사나 개인이 고객의 필요를 조사하고 경쟁사를 분석하는 등 각종 노력을 쏟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팔려는 상품이 사려는 사람이 지불하는 가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즉, 팔려는 내가 제공하는 A와 그 판매를 통해 고객에게 얻는 B라는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는 고객이 B라는 가치를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내가 제공하는 A외에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마케팅의 정의에 근거해서 볼 때 마케팅 교회는 필연적으로 교회가 제공하는 상품의 가치와 그 상품으로 인해 얻게 되는 가치가 동일하다고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마케팅을 할 때 상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사실은 교회 마케팅 전문가라면 예외 없이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주는 가치에 상응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가 복음을 마케팅 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그만큼 하찮게 보기 때문입니다.

5. 마케팅 교회에 대한 평가 p.61

1) 마케팅 교회의 한 가지 공헌

많은 기존의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시선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점입니다. 마케팅 교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외부에 모든 시선을 돌리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내부에서 싸울 시간도, 싸울 여유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는 마케팅 교회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마케팅 교회가 들고 나아가는 내용은 잘못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간 것까지는 좋은데 교회의 본질을 놓고 나아갔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세상이 교회 속으로 들어온 후에 나아갔습니다.

2) 마케팅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오해

무엇이 맞는지를 알기 위한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무엇이 틀린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입니다. 틀린 답부터 지우며 정답을 찾아 가는 방법이지요.

오해① : 큰 교회가 마케팅 교회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큰 것만을 목표로 하고 규모를 우상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큰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교회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는 목회자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양적으로도 자라나는데 일부러 그것을 못 자라게 하거나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봅니다. 큰 것이 선이 될 수 없듯이 작은 것도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돈이 많아질수록 돈에서 자유로워지기보다는 돈을 탐닉하듯이 교회도 성장이 주는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하면 그 성장을 더 가속화시키기 위한 마케팅의 유혹에 빠지기 더 쉬울 따름입니다.

오해② : 필요한 홍보와 시설을 갖추면 마케팅 교회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하면서 홍보도 해야하며, 새로 온 사람들을 최대한 친절하게 맞고 그들이 교회에서 최대한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상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공동의 장소이고 그에 따른 상식이 요구됩니다. 저는 이런 상식선에서 필요한 사항들을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3) 마케팅 교회의 세 가지 확신

교회가 마케팅을 사용하는 이유가 무조건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마케팅의 도움을 받으면서 교회를 운영하고 성장시키려는 데는 그만한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① :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전통에만 집착하는 교회의 모습이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조금만 부드럽게 변하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기존의 고집을 조금만 양보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교회는 사람들로 차고 넘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기존의 교회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모든 궁극적인 이유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요. 그들이 교회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그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말라 있는데 교회는 전통적 모습만 고집함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확신② : 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지만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마케팅 교회는 기존의 설교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비디오에 익숙한 오늘날의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파고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감각적 영상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가 필요하고, 비록 형식은 다양함을 취해도 그 속의 본질은 변함없다는 것이 마케팅 교회의 확신입니다.

확신③ : 당장의 욕구를 채워 주라. 그러면 사람들은 진리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갈 것이다

처음부터 부담스러운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질리게 하면 안 된다는 믿음입니다. 호기심과 관심이 생겨 마음의 준비가 된 순간 전해지는 복음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마케팅 교회가 가진 이런 확신들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그럴듯한 이 확신들이 다름 아닌 사탄이 주는 꿀 바른 독약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케팅 교회의 세 가지 확신이야말로 마케팅 교회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해 지극히 피상적이며 낙관적인 사고에 바탕을 한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Ⅱ.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1. 포스트모더니즘 p.71

1) 프리모던(Premodem)시대 p.72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고체계를 일컫음

- 초자연적인 존재, 즉 하나님을 믿던 시대.

- 공기 속에 있는 산소, 수소와 같은 물질의 존재를 믿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히 믿음.

- 초월적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눈에 보이는 이 자연 너머에 있는 그 존재의 실재를 믿음.

(예)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 ‘우상의 동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이론화함.

2) 프리모더니즘의 붕괴의 시작(이마누엘 칸트) p.74

○데이비드 흄 : 회의론

- 절대적 존재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 관계에 대한 회의.

- 회의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 또는 무관심으로 향하는 철학의 시초.

○ 이마누엘 칸트

- 인간은 경험적인 증거와 이성적인 회의를 통한 과학적 발견.

- 경험론과 인식론 통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인식될 수 없는 존재로 결론.

-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식적으로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결론지음.

- 철학의 중심에 있던 신학이 철학의 변두리로 밀려남.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 모든 것을 달성 할 수 있다는 과학이 들어옴.

=초월적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이 차지함.

3) 모더니즘시대(계몽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포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

○새롭게 깨닫게 된 시대.

- 인간 이성의 능력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

- 과학의 비학적 발전에 철학적 토대를 부여.

- 또한, 인간사회 유지를 위해 어떤 절대적인 원인, 하나님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칸트)

- 이신론 : 과학의 힘을 믿지만 동시에 종교적 흔적도 유지. 과학을 믿는 시대와 신을 믿는 시대가 혼재.

○기독교에 끼친 영향

-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 과학의 검증, 계시는 인식 아래 위치.

- 교리의 실종.

- 다윈의 진화론 :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상징적 경전으로 전락.

-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과 복음주의의 변화

- 뉴 에이지적 영성운동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지도자들

- 상징적 경전 속에 담겨 있는 무의미한 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용하고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함.

→하나님 부정보다 더 무서운 왜곡과 변질.

4) 포스트모던니즘시대 p.80

진리 실종의 시대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음을 결론내린 시대

○새롭게 정의한 진리

-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 진리 대신 개인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상대적 진리.

- 확실히 느껴지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

- 가장 중요한 가치 : 나의 ‘자존감’

- 가장 중요한 실재 : 내가 지금 살아서 느끼고 있다는 사실

- 인간의 근원 : 이성(근원이 아닌 통로)⇒‘느낌’

○인간에 대한 연구를 자아에 대한 연구로 대체.

‘인간이 누구인가’(human nature)⇒‘나는 누구인가’(personality)

○책임을 사라지게 한다

-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은 거부

-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책임짐 : 나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책임,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추구해야 하는 책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적 : 관용하지 않는 사람

- 상대주의적 가치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침.

- 나도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암묵적 동의가 요구됨.

- 특히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는 식으로 나에게 진리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순

-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상대적 가치의 주장 자체가 (스스로가 부정하는)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되는 자체 모순

5) 포스트모던니즘을 극복하는 길 p. 89

죄를 자기 느낌에 근거해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로부터 사랑받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불가능한 목표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너무 많은 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입니다. 마케팅 교회가 초래하는 위기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프리모더니즘의 가치관을 가진 곳입니다. 초월적 존재와 유일하고 절댁적인 진리를 믿는 공동체입니다. 초월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만이 오늘날 교회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서는 길만이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나도 옳고 너도 옳은 시대에 넘어지지 않는 길은 말씀을 바로 배우고 바로 가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제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기독교의 절대 진리에 대하여 어릴 때부터 진지하게 접근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어!’, ‘언젠가는 다 알게 돼!’라는 대답들은 ‘언젠가는 포기하고 그냥 생각이 다 없어지는 때가 올 테니까 그 때까지만 궁금해도 참아라.’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진리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기에 믿어질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하나님 말씀의 역사성과 실존적인 진실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게 완전히 대문을 열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이성적 탐구의 영역 밖으로 밀어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머리를 포기한 기독교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2. 프래그머티즘

1) 프래그머티즘의 정의와 뿌리

프래그머티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실질적인 결과에 대해 의미 또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진리 여부의 표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어떤 기술 또는 과정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면 프래그머스트와 실용주의자에게 그것은 진리가 된다. 그런데 만약 효과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프래그머티즘은 그 뿌리를 다원주의(다윈의 진화론)와 세속적 인본주의에 두고 있다. 이 사상은 내재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절대 선과 거짓과 그리고 선과 악 또한 진리와 거짓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프래그머티즘에게 있어서 진리란 유용한 것이며 의미가 있으며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효과가 없으며 관련이 없는 것은 거짓으로 간주되어 거부된다. p. 95

존 맥아더 목사가 프래그머티즘의 뿌리를 다윈의 진화론으로 본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래그머티즘은 진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진리란 변하거나 진화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래그머티즘에서 진리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바라는 결과 또는 효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를 주는 것은 참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척해야 할 거짓입니다. 동시에 나의 목표가 변하는 것에 따라 프래그머티즘의 참도 변합니다. 내 목표가 점점 더 커지는 경우 프래그머티즘의 참도 진화하고 발전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목표달성여부입니다. 그런 면에서 프래그머티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를 움직이는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사상입니다.

2) 프래그머티즘이 교회를 미친 영향 p.96

① 프래그머티즘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

이런 프래그머티즘이 파고든 교회는 그 의도와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킵니다. 무엇보다도 프래그머티즘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연하다는 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②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구원 초청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이 유발하는 가장 큰 위험은 수많은 가짜 크리스천의 양산입니다. 가짜 크리스천,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은 프래그머티즘을 통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 프래그머티즘에 빠진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고민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설교와 설교자』에서 구원 초청의 승패가 테크닉에 달려 있음을 믿는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 지음, 정근두 옮김, 『설교와 설교자』, 복 있는 사람, 2005, p.419~420.

우리는 설교하면서 진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다른 요소에 직접 접근하는 순간 곤경을 자초하게 될 것이며, 쉽사리 그 곤경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결국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하여 깨달아 ‘앞으로 나오는’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개성이나 일반적이며 막연한 두려움 또는 어떤 심리적 영향 때문에 앞으로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수년 전에 이 점이 핵심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사례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한 전도자가 주일 밤 라디오 찬송 프로그램을 담당하며 생긴 일......

○전도자가 원했던 순서 : 설교→구원초청→찬양시간

○방송된 순서 : 설교→찬양시간→구원초청

○방송 후 전도자 인터뷰 내용 : 평상시 초청에 응했던 사람들의 숫자에 훨씬 못 미친 결과가 나오자, 비교적 적은 숫자가 반응했던 이유를 ‘설교를 마치고 구원의 초청을 하기 전에 불행히도 30분의 찬양시간이 끼어들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고 대답하면서, ‘설교를 마치자마자 초청했다면 휠씬 더 많은 사람이 호응했으리라’고 말함.)

설교자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구원 초청을 안 했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사람들이 생깁니까? 그 순서 하나 때문에 천국에 갈 수도 있었던 수천 명이 지옥으로 갑니까? 순서 뿐 아니라 분위기 좋을 때 하면 천국에 갔을 수천의 영혼이 좀 썰렁한 분위기에서 구원 초청하면 그냥 지옥으로 직행할 수도 있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프래그머티즘적인 수법을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기막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이런 발버둥과 동정이 필요한 불쌍한 진리가 아닙니다.

③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간증 중심의 전도

오늘날 교회에서 간증집회가 많이 열리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증 집회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간증이 넘쳐나는 것과 설교가 예화로 넘치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교회속에서 교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간증과 자신의 상황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정말로 수많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하는 재미있는 간증에서부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간증까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수많은 간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경우, 병이 나아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또는 인생의 위기를 만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식의 간증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희한한 일이 아닙니다.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이슬람에도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잡신 종교는 집회 중에 워낙 신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 그 지역에서 선교하는 기독교 선교사들도 그 종교의 집회에 자주 참석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저주하신 거짓 선지가들의 가장 큰 자랑이 무엇입니까?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닙니까? 또한 많은 간증이 방언을 받게 된 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방언 역시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힌두교와 같은 명상을 중시하는 종교들을 중심으로 방언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들의 방언과 기독교의 방언은 언어 음성학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수없이 넘쳐나는 간증 속에서 ‘왜 기독교만이 진리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은 내용을 찾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기독교가 참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말씀을 통해 해결한 간증을 찾기가 쉽기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증들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성경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리신 진짜 간증들이 담겨 있는 책은 성경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 바울처럼 간증거리가 확실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막힌 체험을 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국을 다녀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자신의 체험을 떠들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도 남을 자기의 체험을 얘기하는 대신 바울은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왜 예수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만 증거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가 바로 성경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프래그머티즘이 본격적으로 그 위세를 떨치던 20세기 중반, 이 위험을 무엇보다 가장 잘 감지하고 있었던 로이드 존슨 목사가 당시 프래그머티즘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쓰이고 있는 간증의 위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그의 전기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첫째, 로이드 존스 목사는 간증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모습을 정형화 또는 획일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마치 간증을 하는 사람이 만난 형태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둘째, 간증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간증이 반복될수록 자신도 모르게 내용을 과장하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 간증 속에는 마치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주를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한 듯이 포장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넷째, 간증이 주는 위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개인적 체험이 기독교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④ 프래그머티즘은 성경을 몰아낸다.

프래그머티즘이 자리잡은 교회 속에 성경 말씀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 속에 파고든 구체적 모습이 프래그머티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성경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가 중요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나에게 확실한 ‘필feel’을 꽂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르고는 무엇이 효과가 있냐 없는가의 문제로 대체되었습니다.

3) 프래그머티즘의 극복 p.110

프래그머티즘이 파고든 교회는 말씀을 떠나 효과에 생명을 겁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위해 음악과 간증 등을 통한 감정 배설과 체험 중심의 장소로 예배를 왜곡합니다. 느낌과 사실을 혼돈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수련회를 통해 감정을 마음껏 배설하고 이제는 뭔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산을 내려와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비참한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프래그머티즘이 주는 악영향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바른 구원관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집회에서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상한 체험을 한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필요한 죄인 됨에 대한 깊은 각성 없이는 결코 복음이 내게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말씀뿐입니다.

Ⅲ.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1) 부흥에 대한 시각 두가지

첫 번째 시각은 성경에 기록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회성의 사건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방언을 놓고 팽팽하게 맞서는 두 가지 주장과 비슷합니다. 방언이 초대교회로 끝났다는 시각과 오늘날도 계속된다는 시각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시각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는 시각입니다.

2-①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부흥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시각

2-②부흥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일어난다는 시각

약 170년 전 만해도 2-②의 시각이 통일된 의견이었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대변되는 부흥은 인간의 노력 내지 의지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에 달려있다는 의견이었지요. 즉, 당시까지만 해도 논의는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가 끝났는가 아니면 계속되는가의 문제였을 뿐 어떤 형태로 계속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이견이 없었습니다. 단일화되어 있던 2번의 시각에 다양성을 제공한 사람은 19세기 미국에서 소위 새로운 부흥을 이끌었다는 인물, 찰스 피니입니다.

2) 찰스 피니 p.118

○1792년 출생. 변호사로 사회생활 시작. 평범한 장로교 신도

○찰스 피니의 신학

-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이성에 대한 모독이다.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중립적인 상태로 태어난다.

-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은 죄를 100% 처리하는 완전한 구속이 아니다. 언제라도 취소 가능하다.

∴프래그머티즘에서 본 이신론적인 하나님과 동일.

○찰스 피니의 부흥관

- 개인의 구원에 대한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개인에 대한 구원의 개념을 집단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

-개인의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피니는 당연히 교회가 바라는 부흥 역시 인간의 ‘하기 나름’이라고 주장.

⇒그가 이룬 대중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주게됨.

(숫자가 이룬 그의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함)

피니가 남긴 영향

○구원초청시스템의 발명자:부흥 집회에서 ‘앞으로 나오도록’하는 것.

○일반적으로 불리는 부흥회 캠페인에 최초로 ‘부흥’이라는 단어를 접목한 사람.

○정규집회가 끝난 후 음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후집회를 활성화시킴.

○설교의 변화

- 피니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로 설교가 좀더 즉흥적이고 예화를 더 많이 사용해 야 하며 청중과 가능한 한 대화하는 식으로 강조.

찰스 피니가 추구함 ‘개심’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인간의 결심을 유도하는 데에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추구한 ‘부흥’은 철저하게 인간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캠페인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이벤트 성의 행사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감정입니다. 피니는 우리가 앞 장의 프래그머티즘에서 살펴본 감정주의가 교회 속으로 파고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도록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p.129

-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

1) 슐라이어마허의 신학

모더니즘 시대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한 구절로 얘기한다면 ‘교리실종의 초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 시대를 지나면서 기독교의 신학은 사실상 지식 세계에서 학문으로서 진지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신학은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계몽주의 시대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18세기에 등장한 인물이 독일에서 피니보다 더 빨리 태어난 프레드릭 슐라이어마허(1768~1834)입니다. 칸트 이후 이론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진 신학을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립하여 제시한 최초의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찰스 피니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신학의 토대는 성경이 아니라 대신 개개인이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성경이란 애초에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주관적인 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슐라이마허가 이룬 놀라운 업적은 성경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무시하거나 아예 전면 부정하더라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가 이룬 신학적 업적이란 신학의 대상을 성경 말씀에서 인간 내부로 전환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신학은 종교 의식을 비롯한 인간 연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그 중심에 인간을 둔 신학 아닌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의 도전에 응답한 신학적 방법이었습니다.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현대 세계의 사상을 신학을 빙자한 인본주의를 통해 온몸으로 끌어안은 최초의 신학자

2)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위에서 살펴본 찰스 피니가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끼친 해악 못지않게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피해는 끔찍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굳이 의식 세계 속에서 구현되지 않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이 자유 신학의 길은 성경을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실종시켰습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찰스 피니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과 결합하여 말씀을 점점 더 신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 냈습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크리스천의 충분조건이 채워졌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에 무지한 신자들에게는 교리와 관계 없이 뭔가를 확실히 느끼게 해 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성령운동파 또는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알란 울프는 오늘날 교회를 분석합니다.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p.136

1) 복음주의의 정의

복음주의와 마케팅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둘 다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복음주의 경우 이 개념을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념concepts'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복음주의의 시작을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찾습니다. 오래된 복음주의와 대비해 20세기의 복음주의를 신복음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주의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알려진 것을 의미하며,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생애와 그의 교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초점을 둔 신학을 말한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은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복음에 헌신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복음을 보존하고 선포하려는 기독교의 역동적 운동의 중심 취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p.137

2) 빌리 그레이엄 p.143

빌리 그레이엄을 미국에서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데뷔시킨 1949년 LA 집회는 빌리 그레이엄과 풀러 신학교간의 긴밀한 관계의 시작이 됩니다.

①풀러 신학교 이사로 참여 : 크리스차너티 투데이 발간(1956)

⇒분명 하나님 나라 확장의 거룩한 소명으로 시작했을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점점 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으로 바뀌어 갑니다.

②영국집회(1954) : 근본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광범위한 지지를 영국 교회들로부터 받음.

⇒영국집회의 성공은 그레이엄으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그레이엄은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근본주의 적 이미지(자유주의 신학에 반발해서 등장한 근본주의 신학은 교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임)를 버리기만 하면 훨씬 더 큰 영향을 세상에 끼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연합과 일치의 상징’으로 나아감.

③캐나다의 한 기독교 잡지와의 인터뷰(1978)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BGER(빌리 그 레이엄 복음협회)이 나중에 서둘러 그 발언을 취소하는 등 큰 소동을 일으킴.

④로버트 슐러와의 인터뷰(1997), 미국의 시사 주간지‘뉴스위크’와의 인터뷰(2006)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부정 : 다원주의적 구원관

3) 오늘날 복음주의의 모습 p.156

①가톨릭과의 연합

②관용과 은혜의 혼돈

(예) 필립 얀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그의 글은 사실상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라’라는 ‘관용’에 대한 메시지로 넘쳐납니다. 그가 생각하는 ‘은혜’의 정의로 볼 때 분명 이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타인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넘칩니다. 그러나 관용과 은혜를 구분하지 않는 필립 얀시의 눈에는 분명 오늘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세상이지요. 그러나 관용에 대한 목마른 세상을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다면 분명 하나님을 먼저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14:2~3).

4) 일치보다 중요한 것 p.164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으로 하나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복음을 중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나 됨에 대한 노력은 복음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어떤 ‘열정’ 또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하나 됨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을 교단으로 나누는 것은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대형 교회들은 형식상 속한 교파의 신학과는 관계없이 대표적인 모든 교파의 모습들을 다 섞어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들일수록 분명한 신학 대신 각종 방법만이 넘쳐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호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교회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의 초에 들어선 지금, 교회는 마케팅의 모든 가르침을 철저히 아무런 의문도 없이 수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너무 큰 반면에 교회가 가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틈 사이를 파고든 마케팅의 교묘한 유혹을 교회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교회는 약해졌습니다. 교회는 마케팅의 유혹을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적 상황’이라는 말로 정당화하기에 더 바빴습니다.

Ⅳ.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1.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복음의 변질

1) 상품화된 복음에서 제거되는 것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너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중심에는 ‘너는 죄인이다.’, 즉 ‘지금 너는 무엇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라는 메시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메시지를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복음을 상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죄는 심리학의 한참 이전부터 존재했다…그 누구도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죄라고 볼 수 있는 대상을 심리적 관점에서 말하는 ‘기능 장애’로 대체하여 파악함으로 이 걸리적거리는 죄와 관련한 주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오늘날 심리학적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미국의 주류 종교들의 설교와 출판물들 그리고 소그룹 속에 파고들었다. “낮은 자존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고 우정을 쌓지 못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어느 감리교 잡지는 청소년들을 향한 기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기사는 “낮은 자존감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제 어디든지 심리학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죄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p.175

자, 이제 가장 큰 장애물인 죄를 효과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사라지자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죄와 함께 복음 상품의 약점으로 부각되었던 성경의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까지 사라져 버리면 기독교의 내용 자체가 너무 빈약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죄와 관련시키지 않은 채 계속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 또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친한 친구처럼 우리 곁에서 위로해 주는 분으로 계속 남아 계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간직하면 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이 부분을 잘 강조해야 합니다. 죄가 사라지게 되자 사랑의 하나님만 제외한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도 함께 사라집니다. 죄가 사라지자 회개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려서 형식상 회개라는 말을 뺄 수 없으니 그냥 반성 정도의 개념으로 수정합니다. 워낙 다양한 심리학이론들이 있어서 죄니 회개니 하는 단어들을 다 빼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할 말이 차고 넘칩니다. 교회 안에서 죄인이라는 정죄함 대신 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데 부족함 없는 최고의 이론적 배경을 심리학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와 함께 복잡한 기독교의 많은 교리가 동시에 사라지자 복음은 필요한 핵심기능만을 갖춘 기막힌 상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①상품화된 복음이 강조하는 것 : 고난과 핍박이라는 부정적 용어들 외에 성경 여러 곳에 영생, 평안, 범사에 잘 됨 등의 긍정적인 문구가 많이 등장합니다.

②약점은 더 감추고 강점은 더 드러내기 위한 노력들 : 약점이 제거된 복음을 바탕으로 세상이라는 ‘갑’을 향해 손을 내밀 강점들은 전능한 하나님을 통한 축복, 건강, 천국에의 보장, 사랑스러운 나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교회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감정의 배설입니다. 이러한 강점들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설교는 이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새 옷은 다름 아닌 새로운 설교 형태입니다. 오죽하면 요즘 성공적인 설교자의 3대 요소가 목소리, 노래실력, 그리고 외모라고 하겠습니까?

③상품이 된 복음 속에 등장한 새로운 죄 : 복음의 약점인 죄를 제거한 마케팅 교회에 죄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마케팅 교회 속에서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죄가 아니라 바로 나를 향한 죄입니다. 죄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인간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바로 상대를 지겹게 하는 것입니다. (곽선희목사의 예) 즉 앞에 앉은 교인을 졸게 하는 그 목사는 다름 아닌 마케팅 교회의 가장 큰 죄인입니다. 따라서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깊이 파는 강해 설교 등은 마케팅 교회의 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겹게 하는 죄를 지을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④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새로운 죄의 개념의 등장

⑤용어도 가치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라

⑥종교라는 단어를 최소화하고 영성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라

마케팅 교회가 눈을 뜨고 보아야 할 사실은, ‘고객 만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반복음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개념은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결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오로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고객 만족’에서 ‘하나님의 만족’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2.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예배 실종

1) 상품 주인을 위해 예배를 개조하라

복음이라는 상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독교의 메시지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내게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날 예배에서 점점 더 중요시되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감정적인 고조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감정의 고조를 맛본 예배는 ‘은혜로운 예배’ 또는 ‘영감 있는 예배’로 정의됩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통해 영광 받으실까요? 두 손을 올리고 무아지경에 가까운 상태가 된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까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다’는 말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적한 대로 단순히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는’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안다’의 개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보고 깨달은 하나님을 실존적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앎’이 필요합니다. 이런 ‘앎’은 그 속에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서는 능력이 됩니다. 이러한 앎의 세계를 알도록 하시는 분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3) 진정한 희열은 추구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감정은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체험하는 그런 희열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이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는 희열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발걸음을 죽음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희열을 아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기독교의 교리임을 알게 됩니다. 교리가 상품을 복잡하게 만드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하는 본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4) 바른 찬양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자

오늘날 감정 고조가 주는 위험과 관련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불리는 찬양의 내용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윤리실종』에서 오늘날 불리는 찬양의 약 60%가 말씀의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주관적 느낌에 의거한 가사들로 채워져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 지음, 윤석인 옮김, 『윤리실종』, 부흥과 개혁사, 2007, pp.77~79. 저는 찬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중요한 예배의 한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을 통해 우리는 찬양의 중요함과 찬양의 위대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떠나 감정만으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많은 종교의 목표는 나를 잊는 것입니다. 나를 벗어난 상태,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는 것이 수많은 종교들의 목표입니다. 무아지경을 ‘은혜’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3.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설교 실종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설교는 설득의 효과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설교가 선포의 개념으로 이해될 때만이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됩니다. 구원이 인간의 말솜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달렸다는 성경의 주장이 의미를 갖습니다. 상황에 따라 분명히 예화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선포해야 할 교리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이야기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의 설교는 많은 경우 교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런 설교 속에서의 예화는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감동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개인의 꿈을 충족시켜 주는 종교로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잡아서 성경 말씀은 본문의 의미를 상실한 채 너무 자주 개인의 동기 부여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교회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입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아마도 면죄부를 발행한 교황일 것입니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중세 기독교의 타락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오로지 믿음으로’, ‘오로지 성경으로’를 외치며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신앙이 상품화될 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오늘날 사탄은 면죄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모습으로 교회 속에서 복음을 상품화시키고 있습니다.

Ⅴ. 마케팅 교회의 모델 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1.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의 신선한 등장

약 15년 전쯤 어디선가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교회’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거의 혁명적 발상으로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던 ‘구도자예배’,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는 그 교회는 담임하는 빌 하이벨스라는 목사는 당시 30대에 불과한 청년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혜성과 같이 등장해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게 한 그 교회는 바로 윌로우크릭이었습니다.

1) 빌 하이벨스 목사의 중요한 세 명의 스승

①빌 하이벨스의 경영스승, 피터 드러커

피터 드러커의 영향은 단지 빌 하이벨스 목사 한 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러커의 책 『효과적인 관리』는 윌로우크릭의 모든 직원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입니다. G. A. 프리차드 지음, 강부형 옭김, 『윌로우크릭 구도자 예배』, 서로사랑, 2001, p. 59. 오늘날까지 매년 리더십 컨퍼런스를 열고, 윌로우크릭의 교육 목사들 세명은 아무도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 경영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보다 더 중요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은 윌로우크릭에서의 설교들이 성경 구절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강해 설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대신 특정 주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 대신 각종 실용적인 이론들을 가져다가 가르치는 ‘주제 설교’가 윌로우크릭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②빌 하이벨스의 신학스승, 빌리즈키안 교수

빌리즈키안 교수에게 배운 빌 하이벨스 목사는 그의 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빌리즈키안 교수가 갖고 있는 아르미니안적인 신학은 빌 하이벨스 목사로 하여금 구도자 예배를 시작하도록 하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 선택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해 효과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구도자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빌리즈키안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믿는다. 요컨대 빌리즈키안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다소 쾌활한 아르미니안주의이다. G. A. 프리차드 지음, 강부형 옭김, 『윌로우크릭 구도자 예배』, 서로사랑, 2001, p. 67.

빌 하이벨스 목사는 빌리즈키안 교수에게 받은 중요한 영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멀리 떨어져서 거룩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생각하던 하나님을 자신의 ‘친구’로 인식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빌리즈키안 교수입니다. 그로 인해 빌 하이벨스 목사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③빌 하이벨스의 목회 스승, 로버트 슐러

1975년 윌로우크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는 로버트 슐러가 운영하는 ‘성공적 교회 리더십’에 참석해 더 구체적인 교회에 대한 비전을 세웁니다. 슐러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가 성경 말씀보다는 심리학에 치중한 메시지가 되도록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슐러는 자신이 자신의 스승 노먼 빈센트 필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지식을 빌 하이벨스 목사에게 전수했습니다. 바로 ‘사람의 필요와 상처에 중점을 두는 심리학적 가르침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오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은 교회로 모여든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적극적 사고 방식) ⇒ 로버트 슐러(긍정적 사고 : 내용은 동일) ⇒ 빌 하이벨스

○인간에게 필요한 심리학적 메시지 : 자존감의 회복

○‘죄’의 새로운 정의 : 인간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것.

2. 윌로우크릭 교회의 첫 번째 특징 : 심리학에 물든 교회

사실상 윌로우크릭을 형성하는 핵심은 곧 알아볼 구도자 예배이고 그 예배를 구성하는 중심 사상은 불신자 해리와의 관계성 확립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을 확립하기 위해 윌로우크릭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심리학입니다. 윌로우크릭을 면밀히 조사하다 보면 이 교회를 움직이는 두 가지의 원동력은 음악과 심리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심리학이라는 이 두 단어를 관통하는 개념은 ‘관련성’입니다.

심리학이 지배하는 윌로우크릭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심리학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집어삼킬 때 나타나는 결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죄의 자리에 상처가 들어오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치료를 권하게 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기독교와 심리학이 결코 손잡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심리학이 자리잡은 가르침 속에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들어설 자리가 애초부터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피해자이고 울고 있는 아이를 마음 속 깊이 한 명씩 안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결국 심리학적 이론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의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더 중요한 윤리를 알도록 하는 데는 도리어 해가 됩니다.

왜 심리학이 이토록 교회 속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심리학은 인간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 줍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니까요. 게다가 교회에서는 그 메시지에 성경 구절까지 첨가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성경까지 동원해서 말하는데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3. 윌로우크릭 교회의 두 번째 특징 : 구도자 예배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윌로우크릭을 비즈니스 성공 사례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윌로우크릭의 성공 원인은 대부분의 교인들을 고객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전통적인 비즈니스 개념을 바로 실천한 데 있다.” 윌로우크릭이 고객의 필요를 채움으로 이룬 성공의 중심에는 바로 구도자 예배가 있습니다.

윌로우크릭은 특히 전도의 목표롤 삼는 사람들을, 남자의 경우 해리, 여자의 경우 메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붙는 수식어는 ‘교회 다니지 않는’이라는 의미의 Unchurched라는 윌로우크릭이 만들어 낸 신조어입니다.

1) 구도자 예배의 방법

구도자 예배를 통해 해리에게 다가가기 위한 윌로우크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기독교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해리가 납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해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먼저 보여 줄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윌로우크릭이 가장 조심하는 것은 불신자 해리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윌로우크릭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관련성’입니다.

①메시지를 통한 관련성의 극대화 : 복음의 희석

복음 선포를 위해 모인 집회에서 실상 복음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해당하는 진리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온유함’이란 단어는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②메시지를 통한 관련성의 극대화 : 예화와 유머

과도한 예화들과 유머의 사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설교의 정체성을 선포로 파악하는 대신 설득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 해리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메시지가 해리를 즐겁게 하는 데 치중하면 할수록 그 메시지는 복음의 본질을 담아 내는 데 점점 더 취약해진다는 점입니다.

③메시지 전달 방식을 통한 관련성의 극대화 : 현대적 음악과 드라마

빌 하이벨스 목사의 최초의 사역은 1970년대 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현대 음악을 사용해서 모임을 하던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빌 하이벨스 목사야말로 현대 음악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음악이 사람에게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알고 그 음악을 누구보다 잘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 해리와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한 구도자 예배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 예배는 언어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미지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그리고 사고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감정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었다.’ 라고요.

2) 구도자 예배의 문제점들

①구도자 예배는 관련성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을 변질시킨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그러나 이 관련성을 강조하게 될 때 한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쉽게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해리가 느끼는 관련성에 치중하는 메시지는 또 하나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복해서 오는 해리에게 처음의 감동과 같은 수준의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메시지의 관련성이 ‘더욱더’높아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②구도자 예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끌어내린다.

③구도자 예배는 불신자에 대한 잘못된 미래를 전제로 한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도자예배에서는 결코 불신자 해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교회 다니지 않는 해리’라고 부릅니다. 즉, 윌로우크릭이 파악하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해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임을 보여 주는 호칭인 셈입니다.

4. 윌로우크릭 교회가 미친 영향

윌로우크릭은 미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내에서 진정한 의미의 메가처치(출석 교인 수가 이천 명이 넘는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윌로우크릭은 어떻게 교회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윌로우크릭 전까지 교회에 비약적인 수적 성장을 가져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되었습니다. 개인의 삶 전체를 희생할 정도의 헌신을 요구하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통한 성장과 오순절 계통으로 대표되는 화끈한 체험을 통한 성장이었습니다. 전자의 방법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대표적 형태는 각종 이단들입니다. 윌로우크릭은 사람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위의 두 가지 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마케팅과 조직 관리로 대표되는 경영 기법을 기독교 속에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수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증명해 보인 것이지요. 결국 윌로우크릭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을 손 내밀면 잡힐 정도로 줄여 주었습니다.

1) 윌로우크릭 교회의 위기

윌로우크릭의 성장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해리가 부담 없이 올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담 없이 온 해리는 언제나 부담 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을 윌로우크릭은 그 동안 간과했습니다. 윌로우크릭의 의도와는 달리 구도자 예배를 찾는 해리들의 대부분은 불신자 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딴 교회 다니던 해리들”입니다. 어차피 이 해리들은 호기심으로 옮겨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더 좋은 것이 나오면 항상 다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해리들입니다. 그리고 복음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회 속에 도입한 각종 방법 자체가 가진 위험 요소입니다. 현대성이 잠식한 20세기 미국 문화에 대한 윌로우크릭의 순진한 접근과 무분별한 수용은 윌로우크릭이 믿지 않는 해리들에게 가진 열정이 크면 클수록 도리어 복음의 본질을 더 왜곡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Ⅵ. 마케팅 교회의 모델 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1. 릭 워렌과 목적 열풍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고 완전한 이론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이론 중 99%가 옳고 1%가 틀린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다면 우리는 그 1%에 대해서까지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게다가 그 1%가 매우 중요한 부분에 관련되었다고 한다면 그 1%는 더 이상 숫자1%에 그치치 않습니다. 제가 이 장에서 하는 릭 워렌 목사에 대한 비판을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릭 워렌 목사에 대한 저의 비판은 앞서 빌 하이벨스 목사에 대한 비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하는 비판입니다. 제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비판한 조엘 오스틴(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에 대한 비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p.280

1) 윌로우크릭과 새들백 접근의 차이

빌 하이벨스 목사는 릭 워렌 목사와 한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릭 워렌 목사와는 달리 자신의 신학과 목회 철학에 대해 본격적인 저술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과 목회 철학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설교들, 그의 많은 책속에 단편적으로 흩어진 정보들, 인터뷰, 그리고 무엇보다도 1995년에 나온 G.A.프리차드가 논문 차원에서 쓴 후 출판한 『윌로우크릭 구도자 예배』를 참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릭 워렌 목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목회 철학과 신학을 그의 두 권의 메가 베스트셀러인 『새들백 교회 이야기』와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완전히 공개했습니다. 그렇기에 빌 하이벨스 목사에 비해 릭 워렌 목사는 오늘날 휠씬 더 철저하게 검증받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특히 『목적이 이끄는 삶』이 출판된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한 릭 워렌 목사에 대한 비판서들을 읽어 보면 그의 구체적인 신학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의 메시지가 포함하고 있는 뉴 에이지 성향에 대한 비판이 매우 많은 양을 차지합니다. 뉴 에이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여지가 그의 책에서는 수도 없이 발견됩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는 사실 그 전에 수도 없이 나온 교회 성장 관련 도서들과 이론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릭 워렌 목사에 대한 비판들은 대부분이 『목적이 이끄는 삶』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장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 집중할 것입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가 교회 마케팅의 원칙에 매우 충실한 대표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장에서 릭 워렌 목사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본질이 윌로우크릭 교회와 더불어 우리가 지금까지 정의한 마케팅 교회의 모습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그들을 이끌고 유지시켜야 한다는 그의 목회 철학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펴보는데, 첫 번째 이유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진 마케팅 요소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워낙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우리가 과연 바른 복음을 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2. 새들백 교회의 핵심 :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라

『새들백 교회 이야기』는 왜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뿐 아니라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들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느끼는 필요felt needs를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이 책의 전반에 걸쳐 강조됩니다.

1) ‘종교’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점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접근하는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은 그들이 가진 ‘종교’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그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로 ‘분열’을 의미하며, ‘기독교 진리’라는 말 대신 ‘기독교 영성’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 종교는 ‘삶’이다라는 주장은 듣기에 따라 매우 감동적이지만 그 속에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종교에는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있지만 삶에는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위협과 경고를 혼동

릭 워렌 목사의 기존 전통적인 교회들에 대한 반감은 그의 책 많은 곳에서 등장합니다. 그는 기존 전통 교회의 복음 전파를 사람들에 대한 ‘위협’ 내지 ‘협박’으로 인식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메시지를 위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런 협박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처럼 ‘지옥’에 대해 자주 그리고 자세히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계신 것인가요? 우리는 위협이라는 단어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협과 경고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의 모든 가르침 속에 경고를 봅니다. 경고해야 할 때 경고하지 않는 것처럼 큰 죄가 없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이런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듯 합니다.

3) 삶으로서의 기독교

종교라는 단어 대신 삶으로 인식되는 기독교에 있어서 삶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인 각종 방법에게 그 자리를 내줍니다.

그러나 릭 워렌 목사가 필요를 채움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기독교의 복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릭 워렌 목사에게 필요 충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낙관론적 사고입니다. 릭 워렌 목사는 인간은 당장 급박한 삶의 문제가 기독교의 방법들을 통해 해결되면 자연히 기독교의 진리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라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릭 워렌

이 장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는 것이 성경의 방법이고 또한 예수님이 사역하신 핵심 방법이었습니까?

① 성경은(예수님은) 사람의 필요(이스라엘 민족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당시 상식에 가까운 민족의 가장 큰 필요(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 받는 동족의 아픔을 생생히 보면서 자라나심. 로마의 꼭두각시인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도 잘 알고 계심)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바로 왕 앞에서 당당하게 맞섰듯이 로마의 황제 앞에서 그를 굴복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진정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독립이었고 선민 이스라엘의 자존심의 회복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원하는 이 필요를 채우는 데 열중하셨다면 오늘날 교회도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필요를 채워 주는 데 모든 사역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②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즉각적 필요를 채우는 데 민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필요를 채워 주시기는커녕 당신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보신 후 도리어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배고픔을 해결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또 하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배고픔을 해결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님, 이제는 배가 안 고픕니다. 그러니 진리를 알려 주세요. 배고플 때는 그 문제가 너무 급박해서 진리에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진리를 알고 싶네요.” 필요가 채워지는 순간 진리를 갈급하기는커녕 올챙이적 시절을 까맣게 잊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릭 워렌 목사의 목회 철학과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입니다.

③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 기적들은 모세 시대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집중됩니다. 왜냐하면 그 두 시대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가장 집중적으로 주어지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를 위해 기적이라는 수단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이 초대 교회에 기적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데 필요한 권위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의 가장 큰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것과는 관계없이 더욱더 자신의 필요만을 찾는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의 필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게 될 때 드러나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영혼 구원입니다. 릭 워렌 목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다 동일하게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릭 워렌 목사 말대로 일단 필요를 먼저 충족시켜 준 후 그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나서 복음을 전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셨을까요?

5)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워 주지 않으셨는가

①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첫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당장 느끼고 있었던 필요는 단지 자신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항상 먼저 느끼는 필요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충족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의 필요를 모르는 이유를 성경은 인간이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먼저 살리시기 전에는 결코 그 사실을 스스로 먼저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거친 복음이 그 완강한 마음을 때려 부수기 전에는 결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53:1~3).

②필요의 충족이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유도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일차적인 필요가 채워지면 자연히 진리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릭 워렌 목사의 생각은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인간에 대한 너무 낙관적인 사고입니다.

③인간의 필요를 채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④필요를 추구하는 순간 기독교는 프래그머티즘의 함정에 빠진다

진리의 여부가 충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⑤얼마든지 거짓 필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⑥사람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우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하나님이 구원사역에 있어서 그토록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하신 인간의 지혜 속으로 끌어들이는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마케팅 교회의 주장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자랑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줍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3.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평가

앞서 저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 중요한 마케팅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릭 워렌 목사가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서 일관적으로 주장한 필요 충족의 목회 철학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꽃을 피웠습니다. 새들백 지역을 넘어 인류 전체가 가장 갈구하는 필요를 찾아 낸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 말입니다. 생존이 아닌 삶을 영위하고 싶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 필요말입니다. 그들이 상실한 단어 ‘목적’을 제시함으로 그는 인류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온 세상이 ‘목적’이라는 단어에 환호했습니다.

1) 『목적이 이끄는 삶』의 프랜차이즈화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은 ‘목적이 이끄는 40일’이라는 이벤트를 탄생시켰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40일’은 교회 마케팅을 최초로 본격 프랜차이즈화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2)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는 목적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 과연 바른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다른말로 하면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 바른 복음의 메시지가 있는지를 묻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의 목적을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인생의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바른 복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는 자로 거듭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말은 사치일 뿐입니다. 따라서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 복음이 재대로 선포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 제대로 된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3)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교리다

릭 워렌 목사는 종교 또는 교리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는 교리라는 단어가 단 네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네 번 등장하는 교리도 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교리를 떠나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잘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여기서 “그리스도의 교훈”은 영어 성경에 보면 the doctrine of Christ(KJV), 즉 그리스도의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가 우리가 바른 교리 속에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구원의 문제를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대신 인간의 결정에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마케팅 교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집니다. 인간이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각종 분위기와 기법들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마케팅 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은 인간 중심의 신학man-centered theology이며 동시에 결정 중심의 신학decision-based theology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 많은 크리스천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말은 다 맞는 것 같고 다 좋은 말인데 어딘지 허전해…왜 그렇지?”

제가 생각하기에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본질상 하나이지만 편의상 두 가지로 구별하겠습니다. 첫째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우리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알려 주는 책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바로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목적을 얘기하고 있지만 목적 전에 다루어져야 할 주제인 인간의 본질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적은 본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본질이 망각되거나 왜곡될 때 역시 그 자체가 결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4) 필요 충족을 약속하는 교회가 약속하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새들백 교회를 통해 필요 충족을 통해 복음 전파하고자 하는 마케팅 교회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 필요 충족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약속하시지 않는 것을 주겠다고 한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물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약속해야 하는 것은 비록 고통스러운 삶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저는 릭 워렌 목사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조엘 오스틴과 다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필요를 먼저 채움으로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려는 목회 철학을 고수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이 부담감 없게 기독교를 접하도록 하기 위한 그의 열정과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그 방향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저는 릭 워렌 목사가 그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향력을 하루라도 빨리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Ⅶ.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1. 교회 속의 경쟁 모습

(모습1) 10개 개척 교회 중 8개 교회 3년 내 문닫아...개척 교회도 고급화…개척 자금 수십 배 증가

(모습2) 미국 교회를 본받아 성장해야 한다고 한 기독교 신문 기사

미국 교회 경쟁에서 배우라...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휴스턴 레이크우드 교회가 2005년 말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로 조사됐다..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알려진 시카고에 있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윌로우크릭커뮤니티 교회는 2005년 30위에서 8위로 수직 상승했다. 반면에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는 2005년 5위에서 39위로 추락했다...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장이 둔화 조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미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들이 성장한 것을 단순히 놀라워할 일이 아니고 그들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선교 전략을 세우고 있는지 선교적 경영 기법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 : 컨설팅

1) 교회는 왜 컨설팅을 필요로 하는가

기업들이 컨설팅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불안을 이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교회도 예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경쟁 구도 역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 공급이 수요를 훨씬 넘치는 교회가 성공과 성장을 약속하는 컨설팅의 매력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이제 컨설팅이 들어가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입니다. 각종 찬양과 관련한 컨설팅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기도에 대한 컨설팅도 생겨났습니다.

2) 교회 컨설팅의 중심, 교회 성장 연구소

교회 성장 연구소의 홈페이지에서 ‘교회 성장의 본질’이라는 자료는 왜 교회가 성장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의 본질..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명령이다(고전3:6, 엡4:16). 영적 성숙을 양적 성장으로 갖다 붙이는 에베소서의 말씀도 전혀 관계가 없지만 여기서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니님뿐이니라.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한 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이 구절에 단지 ‘자라난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교회 성장의 성경적 근거가 이 구절이라고 갖다 붙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문맥과 관계없이 성경 구절 속에 있는 단어 하나로 신학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에 못 만들 이론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는 부족한 기독교를 만든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 성장 연구소는 원래의 의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이상 필연적으로 무리한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립 서비스는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성장을 주장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통계 수치에 따라 이론화된 교회 성장 원리의 하부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얘기해도 각종 조사 등을 통해 나타난 성장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제 각종 설문에 의해 수치화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3) 성경은 경쟁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경쟁이 판을 치는 곳은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경쟁 대신 소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가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비록 수많은 교회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모든 교회의 주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한 주인을 모신 많은 교회들은 마치 한 지체 속에서 조화롭게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몸의 여러 기관과 같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는 점입니다. 나날이 복잡해지는 경쟁 구도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경쟁으로 남는 대상은 교회들 간의 경쟁입니다. 교회는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Ⅷ.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1. 마케팅 교회의 최고 가치는 숫자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크고 작으냐의 문제는 가치 중립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마케팅이 교회에 도입되는 순간 가치 중립적던 숫자는 모든 가치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가 마케팅에 의존한다는 것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를 떠나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숫자 너머 존재하는 초월적transcendence가치(말씀을 통해 드러나신 하나님을 더 알아 가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교회가 마케팅을 의지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의 효용성은 인정하나 오류가 없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말씀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절대성에 대한 무시 또는 부정은 현대인에게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한 채 절대적 가치로 다가오는 각종 사상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킵니다.

우리가 21세기에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주관적 감성 또는 감정에 근거하여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무엇보다도 크고 많은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옳고 진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숫자가 주는 유혹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성공 여부가 이와 같이 사람의 숫자에 좌우될 때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놓고 본질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교회가 얼마나 매력적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복음을 가감없이 전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그 방법들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2. 성경은 교회의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1) 예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성령 하나님을 기다렸던 사람은 120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모든 역사를 통해 남기신 사람 수가 120여 명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집도 가족도 없이 하루 24시간 전체를 투자하며 피땀을 쏟아 개척해 3년 동안 목회한 성적이 100명이 좀 넘는 교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때 아주 ‘성공적인’목회였다고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판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숫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교회와 관련해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의 중요성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2)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기준은 교인 수의 증감이 아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바라보실 때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우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 단 한 마디의 칭찬도 없이 오로지 책망만 듣는 교회는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심각한 자기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는 죽었는데 살아 있는 줄 알고 있고 한 교회는 가장 비참한 상태인데 스스로 풍족한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보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결코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결코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 교회에서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아서 매우 잘 채워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교인들이 스스로 살아 있고 스스로 풍족한 줄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필요의 충족이 자기 만족은 가져왔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바른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칭찬을 들은 교회도 교인 수가 늘어서 칭찬을 받은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생명을 걸고 지켜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하는 구절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교회는 양적으로 매우 큰 교회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중요한 것은 책망을 받은 교회들 역시 “왜 그렇게 수적으로 성장을 못 했니?”하는 책망은 전혀 없습니다. 책망의 이유는 자기 착각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거짓 가르침의 수용입니다.

3) 참된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교회로 직접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교회에 더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각종 마케팅 기법을 써서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그 날 집회에서 불렸던 노래의 종류에 따라 10명이 되었다 100명이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숫자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

오늘날 세계가 다 주목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흥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의 잣대로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교회들을 보고 위기를 부르짖는 사람이 많습니다. 크고 많은 것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흥이 아닌 것을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열매를 보고 똑똑히 인식해야만 합니다.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왜 개혁이 필요했습니까? 교회가 슬럼프에 빠져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는 속된 말로 엄청 잘나갈 때였습니다. 십자가 전쟁으로 교황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새로운 성전 건축을 준비하며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을 중심으로 면죄부를 팔아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세며 세계를 정복하는 가톨릭을 꿈꿀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때 개혁이 필요했습니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부흥과 위기를 가늠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부흥이냐 위기이냐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교회가 지금 말씀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말씀 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규모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속에 파고든 가장 무서운 적은 숫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우상을 만들어 내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미덕은 소비이고 소비하지 않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죄인입니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사회 속에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설 자리는 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 시대를 향해 사고 팔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의 마케팅으로 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한 많고 큰 것은 이제 진리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고 큰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있다고 여전히 선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500년 전 루터가 이룬 개혁을 꿈꾸게 하실 것입니다. 루터가 500년 전 이룬 개혁은 숫자를 늘린 개혁이 아니라 교리의 회복이었습니다. 숫자에 대한 유혹을 바른 가르침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진리는 숫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Ⅸ.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1. 복음의 능력 회복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결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단단히 작정하시고 만드신 방법입니다. 인간이 결코 십자가를 믿은후 “내힘으로 믿었다. 나의 결정으로 이 십자가를 선택했다”라는 말이 아예 원천적으로 나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드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믿는 것 외에는 결코 다른 길로는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말이 안되는 구원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어쩌면 가장 간단하고 믿기 쉬워 보이는 이 십자가가 예수님 당시 십자가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은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감내해야 하는 그런 메시지였습니다.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마케팅 교회 속에서 복음이 상품으로 인식되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복음의 가치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을 얻어 내는 데 필요한 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늘날 나의 현실에 유용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 속에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 현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복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하나님의 보복’으로 완성되도록 짜여진 철저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결코 복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부와 건강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하나 확실히 약속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핍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고난과 핍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 ‘하나님의 보복’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보복은 이 땅에서 고통받은 성도들의 보복이며 핍박하던 성도들의 승리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땅에서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복음을 믿고 사용하는 순간 그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사탄이 우리가 복음이 주는 미래적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사탄은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좋은 것을 누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 귀에 속삭이는 가장 큰 두 가지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는 죽지 않아. 그리고 너는 신이야!”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속삭였던 말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바울에 대해 크게 놀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의 바울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는 중심 사상은 종말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신학은 ‘종말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준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날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는 복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바울과 같은 종말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속에 가리워진 미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처음의 진노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드러내신 장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십자가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드러내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진노는 바로 미래에 있을 심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미 받으신 진노의 잔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는 심판 날 일어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가 있습니다. 왜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까? 복음이 건강, 돈, 좋은 인간관계를 주기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복음이 복된 소식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 대신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를 내가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래서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가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①회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즉 구원이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②회심은 단순한 감정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심의 역사는 무슨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엄청난 감정적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그런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③회심은 죄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회심했다고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죄에 패배하지만 죄를 미워합니다. 죄를 증오합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요구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④회심은 내 자신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⑤회심은 행동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⑥회심한 자는 말씀의 진리를 사모한다.

⑦회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는다.

6) 복음 선포의 한 사례 : 바울의 아테네 전도

마케팅 교회들은 복음이 세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전도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9장 20절과 사도행전 17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아테네 전도를 자주 인용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바울은 철학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던 다소 출신답게 자신이 갖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해박함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등장하는 주요 세 단어, 삶, 기동, 존재는 그리스 철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 중에서 가장 적절한 위치에 이 세 단어를 배치함으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이 그의 말에 더욱더 빨려들어가도록 합니다. 바울이 당시의 유행했던 철학에 얼마나 정통한지를 잘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한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접근 방법과 관련한 해석의 두 가지>

①바울이 그리스 철학을 근거해 전도를 시작했듯이 우리도 세상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

②듣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바울이 필요 이상으로 철학적인 내용들을 설교에 포함시킴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입장.

그렇다면 사도행전 17장에서 당시의 철학적 접근으로 시작하는 바울의 전도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비판했던 마케팅적 사고에 젖은 희석된 복음이 아닌가요?

<결론1>

새로운 사상에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오늘날의 구도자 해리를 많이 닮았습니다. 머릿속에 뭔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충족이 되지 않아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던 그들이나 물질적으로는 풍요해도 마음은 항상 텅 빈 해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그들의 언어로 접근하는 것과 오늘날 마케팅 교회가 해리들을 향해 접근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마케팅 교회는 해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고 해리가 갖고 싶은 것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철학적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사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접근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결론2>

많은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 후 조롱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바울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알면 알지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지적 권위는 그가 사용한 단어들과 논리로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영합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한 손에 분명 신문을 들고 그 신문을 다른 손에 든 성경에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한 손에 들어야 할 신문을 두 손으로 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신문만을 보게 될 때 교회는 진리가 사라진 뜬 구름 같은 영성만을 좇는 이상한 곳이 됩니다.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을 말하여 거룩이 없는 친절한 하나님을 소개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마저도 세상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자기 계발과 자기 치료의 메시지만이 넘쳐나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성경을 신문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성경에 비추어 조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분명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 믿음을 갖게 하실 하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마케팅 열풍의 원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망각입니다. 비록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마케팅에 열중하는 교회는 부담스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담 없는 하나님의 친근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 인간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 주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 마케팅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더 친근해지고 만만해졌던 성경 속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점점 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아집니까?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거룩하신 하나님』에서 시간이 갈수록 변하는 바울의 정체성에 대해 관찰합니다. 바울은 그의 초창기 서신서에는 자신을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로 소개하다가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전서에 가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누구 말대로 자아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를 바로 보게 된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보면 볼수록 더 크게 벌어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간격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자신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바울은 더욱더 커지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①하나님의 거룩을 실종시키지 않는 한 마케팅은 있을 수 없다

②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필연적으로 예배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절한 하나님으로 바뀐 마케팅 교회의 예배는 단지 단어만 예배일 뿐 사실상 공연에 불과합니다. 마케팅이 원하는 예배는 나와 하나님 간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간격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감정의 고조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난 은혜는 단지 공허한 용어로 전락하여, 죄인들이 자체적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현대적 에티켓으로 장식된 창구가 되었다. 우리의 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났으며 수많은 대안적 자구론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의 공공 도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나 경쟁하는 사사로운 이익 사이의 흥정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나 그저 단순한 오락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실재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반기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분출이자 승리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안다는 것은 삶을 진정 있는 그대로 아는 열쇠이며, 그리스도를 본래 모습 그대로 알고, 그리스도가 왜 왔는지를 알며, 인생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를 아는 열쇠이다. 데이비스 웰스 지음, 김재영 옮김, 『신학실종』, 부흥과개혁사, 2006, pp. 438~439.

③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복음의 실종을 의미한다

④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가장 무서운 시대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경계’도 하나씩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⑤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마케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사탄의 도구입니다. 마케팅은 고객이 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표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 되도록 하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탄은 그 목표를 위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냈습니다. 바로 동양의 세계관을 서구 사상과 혼합하는 것입니다.

서구는 원래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흑과 백’을 단호하게 구별화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상은 ‘무경계’를 특징으로 한 각종 동양사상들입니다. 이 동양적 무경계의 세계관이 서양의 마케팅과 만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조차도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 중심의 가르침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심리학이 교회속에 이토록 깊이 자리잡은 것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사탄의 거짓말도 ‘믿음’이라는 단어로 포장만 하면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연합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 성숙으로 사라져 버린 우리에게 필요한 경계를 긋기 위해 거룩한 분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심리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우리 형상의 본질인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교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로 선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글을 닫으며

사탄은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로 복음을 교회 밖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관련성을 높이고 필요를 채워 주는 것으로 복음을 소리 없이 사라지도록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 위장한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걷어 내고 우리가 정작 지켜야 할 복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지켜야 할 복음이 얼마 남지 않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우리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복음을 지키기 위한 기도와 각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절박감이 듭니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가 초래하는 위험은 오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 사라져 가는 복음이 초래하는 진짜 위험은 미래에 있습니다.

채워 줄 수도 없으면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겠다는 헛된 약속을 하는 마케팅 교회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빠졌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마케팅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결국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마케팅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마케팅 교회에서 당장의 필요를 채우면 채울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영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뭔가 더 확실한 것’을 찾아 마케팅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릴 것입니다. 그들이 향할 곳은 어디일까요? 초자연적 경험을 약속하는 신비주의입니다. 과거를 현대에 되살리는 신비주의적 기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떠오르는 교회”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해졌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말씀을 떠나 신비주의로 나아가는 데 마케팅 교회가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케팅 교회는 성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심리학을 비롯한 각종 세상의 가르침 아래 종속시키는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마케팅에 물든 교회는 진리보다 숫자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마케팅 교회가 교인 수의 증가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진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케팅 교회가 무엇이며, 마케팅 교회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며, 마케팅 교회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케팅 교회가 사용하는 전략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마케팅 교회를 넘어 영광스러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보고자 했습니다.

저는 제가 존경하는 영적 스승들과 좋은 신앙선배들의 어깨 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무엇이 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인가?’, ‘무엇이 더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와 전달 방식인가?’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토로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분 중에 저와 같이 오늘날 마케팅 교회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시는 분이 있다면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항상 어느 시대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지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진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교회가 바른 성경의 진리대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행동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사의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진리가 그만큼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살며,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진리는 다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있습니다.

728x90

아래 내용은 지난 2009년 경인지부 겨울수양회 "부족한 기독교"라는 주제로 강의할때 옥성호씨의 책을 정리한 내용이다.

성경 말씀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르치는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어 말을 잘 하는 사람의 설교가 더 인기가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현재 기독교가 처한 위기사항을 보여주는 가슴아픈 한 단면입니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세상과 경쟁하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성경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말씀을 도와줄 구원군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 구원군이 저자가 말한대로 "심리학, 마켓팅, 언테테인먼트"이다. 이들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Ⅰ.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심리학은 하나의 종교이다.

1. 과학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설에 대한 반복적 실험이 가능해야 하고 그 실험 결과가 항상 동일하게 나올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입증하기 위한 어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50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이론과 관련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대한 분류와 관찰에 근거해서 미래에 그 관찰 주제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예측 가능하며 조정이 가능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분석 결과에 따라 동일한 결과가 미래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해야만 한다.” p. 53

2.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

“심리학은 동일한 결과의 반복적 발생에 대한 보장은 고사하고 관찰 대상의 미래 행동에 대해 ‘전혀’알지 못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추측하고 추리’할 뿐이다. 자신의 이론대로 진행되기를 믿고 바랄 뿐이다.…심리학이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는 대부분 관찰 대상자의 ‘주관적 이야기 또는 고백’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그 관찰 대상자가 과연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을 진실로 알고 얘기를 하는지 아니면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리학이 개발한 수많은 이론의 바탕이 되는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데이터 수집과 관련해서 데이터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외에 또 하나의 문제는 관찰자 역시 데이터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데이터를 자기 마음대로 제각각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pp. 53-4

3. 인간의 정신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실험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과학적 방법의 대상은 물리적 영역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측정 가능한 물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 치료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정신 치료의 영역이 물리적 영역을 넘어선 인간의 정신 영역,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인간의 뇌에 국한된 물리적 영역으로 볼 수는 없다.” p. 6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지 않은 다른 물질적 영역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고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영적인 존재이다. 즉, 물질적 영역을 지배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하나님을 결코 설명할 수 없듯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역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영적인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인드에 해당하는 영역인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룰 수 없다. 인간의 마인드는 물리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p. 62

4. 진화론과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물리적 영역이 아닌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본질상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은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인드에 대한 개인의 의견들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리학이 아무리 겉으로 과학적으로 들리는 용어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심리학 역시 진화론과 같이 본질상 종교일 수밖에 없다.” pp. 62-3

Ⅱ.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

- 교회가 심리학을 기독교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며, 교회가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을 일반 심리학과 차별하기 위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 심리학과 동일하다.

1.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하고 있다.

“우리는 심리학이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내가 만약 수술할 병에 걸렸을 때, 내가 아는 크리스천 의사보다 옆 동네의 무신론자 의사가 수술을 더 잘 한다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이 이런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심리학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적인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학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고 대적해야 한다.” PP. 74-5

2. 기독교 심리학은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기초를 둔 일반 심리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심리학은 그 단어 앞에 ‘기독교’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심리학은 일반 심리학과 전혀 다른 ‘성경 말씀에 근거한 심리학’이라고 착각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p. 77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한다. “‘과연 프로이트파 또는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심리학 이론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즉 신학교에서 기독교 심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관계 없이, 성경에 근거한 독립적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p. 78

저자는 직접 신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조사를 해본 결과 최소한 미국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심리학은 그 이론이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며, 본질에 있어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 크리스천 심리학회에 제출된 한 논문을 언급함으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내세운다. “물론 우리는 심리학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기독교 심리학과 특별히 두드러지게 다르다고 인정받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심리학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비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p. 80

“표면상으로 기독교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의 이론적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프로이트, 융 또는 아들러를 중심으로 공부했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기존 심리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양념으로 올려놓은 것이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기독교 상담가들은 상담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 구절 몇 개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 비기독교 상담가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상담의 중심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p. 81

Ⅲ. 왜 심리학은 반 기독교적인가?

-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이며, 인간을 선하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이며, 인간은 현재 타락한 죄인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근본적인 주장과 반대 된다.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내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내면의 ‘상처 치료’이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심리 치료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던 상태가 어느 시점에서 너무 사랑스럽게 바뀌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심리 치료의 핵심 과제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더 예뻐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pp. 116-7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가 결코 사랑받을 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이다.” p. 119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아니 선함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이 최소한 중립의 상태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할 인간이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과 관계 없이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 때문”이라고 본다. p. 120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즉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내면 전체가 죄로 물든 존재라는 것이다.……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의 방법은 심리 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pp. 121-2

3. 프로이트(Sigmund Freud)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도덕적인 원칙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들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4. 카를 융(Carl Jung)

-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유형검사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강신술에 접촉된 융의 성장배경,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며 저술활동을 한 융

Ⅳ.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

- 심리학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사랑,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이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

1. 심리학의 첫 번째 가면: 자기 사랑(Self-Esteem, Self-Love, Self-image)

1) 자기 사랑의 전파자들

- 카를 융(Carl Jung)

융에게 인간은 (드러나지 않은) 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융에게 인간이 하나의 신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며 그 표현이 사랑을 넘어 자신에 대한 숭배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p. 155

- 에릭 프롬(Erich Fromm)

에릭 프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잠재력과 지성을 사용해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나와 같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장은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악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에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p. 160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에릭 프롬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 부분과 관련하여 칼빈이야말로 인류의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p. 161

- 칼 로저스(Carl Rogers)

정신 분석 시장에 있어서 칼 로저스의 공헌은 ‘심리치료란 일반적으로 환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필요한 것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간접적 또는 고객 중심(non-direct or client-centered)의 상당법을 개발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또한 심리 치료를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며 자아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심리 치료는 더 참되고 더 완성된 자기 자신을 이루려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p. 162

2) 자기 사랑이 가진 오류

“첫 번째로 자기 사랑을 하나의 치료약, 다른 말로 하면 결과를 내기 위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자기 사랑은 단순히 교회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에서도 각종 사회 문제까지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주는 하나의 만병통치와 같이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자존감의 결여가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식으로까지 오해를 주고 있다. 그러나 현신을 살펴보면 진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엄청나게 높은 자존감,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존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 범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 유도된 자존감은 오히려 인간이 가진 죄성을 합리화시키며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까지도 있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냥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지 강제로 심은 후 빨리 뿌리를 내리고 빨리 자라도록 하기 위해 마구 그 위에 비료를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내가 좋아.”를 반복하거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상기키시는 책의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강제로 생기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사랑은 어느 날 돌아보니 전보다 더 책임감 있고 남에 대해 배려하는,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보고 그냥 씩 웃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 pp. 165-6

“두 번째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 사랑이 너무 모자라서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렇기 에 이 부족한 자기 사랑을 키워 주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기 사랑이 부족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지 결코 모자라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p. 166

3) 자기 사랑에 대한 성경의 경고

“성경은 자기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자기 사랑이야말로 말세에 드러나는 가장 조심해야 할 위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위의 구절에서 자기 사랑 이후에 나열되는 돈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이나 교만이나 모두 어떻게 보면 자기 사랑에 대한 결과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pp. 167-8

4) 성경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며 살라고 말하지 하나님을 아는 나 자신에 감동하며 살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마치 내가 스스로 창조한 듯이 자랑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왜 네가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재능과 관련해서 찬양을 받으실 분은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이시지 그 재능을 거저 받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실 수 있지만 굳이 내게 주신 것은 내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빚진 마음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성경은 ‘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지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라고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도 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긍지에 차서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존재’를 하나님께 빚지고 살고 있다. 내 스스로 숨쉬고 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빚진 자’이다. 여기서 무슨 자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감탄하는 나의 재능도 그 재능이 발휘되기 위한 존재를 하나님이 유지시키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상황에 내가 나를 보면서 감탄할 것이 무엇이 그리 있겠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창조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진실이고 우리의 현주소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우리의 만족은 내가 나를 보면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어 낸 창조자가 아니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pp. 177-8

5) 나 중심의 종교가 위험하다.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다. 그 속에서 ‘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잊혀지게 되고 기독교는 어느 새 하나님 중심의 종교에서 ‘나’ 중심의 종교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p. 181

2. 심리학의 두 번째 가면: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1) 긍정적 사고방식의 전파자들

-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 사고’라는 말로 사실상 심리학의 긍정적, 적극적 사고를 교회 내로 유입시킨 원조이다.”……그는 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생명 에너지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에너지이시다.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숨을 통해 들이마심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마음에 그릴 수 있게 되고 당신은 새로운 에너지로 재충전될 것이다.” Noman Vincent Peale, “No more stress or tension,” in Plus:The Magazine of Positive Thinking, May 1986, pp. 22~23

“하나님은 이제 하얀 안개 속의 에너지로 전락한 채 우리가 호흡을 통해 들이마시는 존재가 되었다.” p. 185

-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지금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오염시킨 긍정적 사고의 일등공신은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이다. 로버트 슐러가 시작한 교회의 ‘수적인 성공’이 그를 일약 기독교 내에서 긍정적 사고의 대부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사실 노만 빈센트 필의 수재자이다.”p. 186

“슐러는 1926년생이다. 슐러의 나이와 관련해서 그가 출연했던 한 기독교 대담 방송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로버트 슐러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환으로 왜 하나님이 자신을 수많은 년도 가운데 1926년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하나님은 슐러의 인생이 마태복음 19장 26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장 16절이 바로 1926년이라는 논리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즉, 이 말씀을 바탕으로 볼 때 자신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p.187

“로버트 슐러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말씀, 소위 말하는 ‘평생 말씀’으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이 예레미야 29장 11절이라고 한다.” p. 188 (렘 29:1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는 흘러갔거나 흘러가는 세대이다. 현재 이들의 후계자는 여러 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군계일학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엘 오스틴이다. 조엘 오스틴의『긍정의 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 127)

“오스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하나님,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단순하신데 우리 인간이 괜히 신학이니 조직신학이니 성경신학이니 하는 말들로 하나님의 그 단순한 진리를 학문화시키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식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복잡한 과정들,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초대 교회의 순교등을 거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그냥 ‘하나님은 긍정적이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존재하실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스틴이 자신의 설교에서 죄니 십자가니 하는 주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pp. 199-200

오스틴은 사라가 이삭을 가지게 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라가 실제로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아이를 마음에 품자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다. 나는 이삭이 더 빨리 태어나지 못한 주 원인, 즉 약속의 실현이 그토록 오래 지연된 이유가 사라의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중략……하지만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작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마음 상태가 복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자칫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p. 97~98 )

“조엘 오스틴에 따르면 사라가 가졌던 애초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아무리 이삭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도록 만든, 하나님을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라가 ‘제발’믿음을 가져서 당신이 하신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제발’실현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셔야만 했다. 마침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기회가 왔다. 마침내, 마침내, 사라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비로소 채워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는 존재이니 우리 스스로를 위해 또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엘 오스틴의 주장이다.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고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불쌍한 하나님을 당신과 내가 도와 드려야지 누가 돕겠냐는 것이다.” p. 205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의 실현 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마치 사라가 당연히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간주하고 그런 약속을 하고 계신다. 나이 많은 사라가 행여 믿음을 가져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행여 이 사라가 이삭을 순산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믿음을 못 가진다면 또 어떻게 되는가? 이삭이 태어나다가 산모와 태아가 다 죽으면 어떡할까? 사라가 순산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p. 206

“조엘 오스틴 믿음 이론에 따르면 사라의 신앙 상태에 따라 이삭은 사라가 80세에 나왔을 수 있었고 아니면 150세가 되어서야 나왔을 수도 있다. 계속 사라가 믿음을 안 가지는 것에 대비해 아마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라가 죽지 않고 계속 살도록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중요하지만 사라의 믿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라의 믿음과 관계 없이 이삭이 나왔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이삭이 그 때 태어나도록 계획하셨고 그래서 그 때에 태어난 그것이 사라의 의지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pp. 207-8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적인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8장 19절과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자청해서 따르겠다는 사람을 쫓아 내는 것도 모자라서 예수님 당신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시었다. “‘나는 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고 매일 긍정적 언어로 도배해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은 아예 자신의 처지를 동물들과 비교할 정도로 부정적인 언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도저히 부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부정적 미래를 계속 반복하시니 긍정적 사고와 긍정적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으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피난을 하면서 자주 옮겨 다녀 친구를 못 사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가난한 환경이 주는 정신적 상처가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pp. 235-6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하지 않겠다’라는 긍정적 선언을 한 베드로에게 “격려를 하고 북돋아주지는 못할망정 ‘너는 분명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그의 신념에 찬물을 끼얹으셨다.” p. 23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부정적 메시지 앞에서 절규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그 진심을 이해하며 따뜻한 격려 한 마디는 못 해 줄망정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에게 도대체 어떤 긍정적 사고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눈과 팔이 잘못하면 아예 눈을 빼 버리고 팔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긍정적인가?” p. 237

- 딤후 3:16절은 심리학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반성경적임을 선명히 보여준다.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KJV)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첫째 성경의 목적은 바른 교리(doctrine)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책망(reproof)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바르게하는(correction) 것입니다.

넷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자라도록 훈련하는(instruction in righteousness) 것입니다.

3.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 두 개의 종교 :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

초자연 종교의 특징 : 자연을 초월하는 독립적인 창조신이 있다.

자연종교의 특징 : 모든 종교는 자연의 일부다. 자연 종교는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자연주의 종교가 믿는 자연법칙의 핵심은 마음먹은대로 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 종교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일부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성을 활용하면서 신처럼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과,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의 능력을 모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뉠 수 있다. 즉, 자신이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미운 오리가 되어 사는 사람들과 백조가 되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p. 257

“자연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법칙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된다는 마음(mind)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 어떤 현실을 품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p.258

“자연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결국 비인격체입니다. 즉 한마디로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이 거대한 에너지는 자연히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한한 인격체이십니다. 무한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무한한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통해 우주를 통치하기도 하시지만 자연법칙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p.261-2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방법은 말과 상상이다.

1) 성공의 법칙 1: 말한 대로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마치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이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키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p. 263

-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법칙 1: 주문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말의 첫 번째 종류는 힌두교에서 흔히 만트라(mantra)라고 부르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우리말로 하면 주문이다.” p. 264 만트라를 통한 수행의 모습은 여덟 살 때에 이미 힌두교의 요기(요가의 달인을 일컫는 말)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스승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자신이 여덟 살 때 했던 전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적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정통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주문 그 자체 속에 어떤 신성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 자체로 그 주문이 요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정확하게 반복함으로 또 매일 태양을 향해 바른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문은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 p. 265

- 남묘호렌게쿄의 주문 p.265-68

-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인격체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주문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 달 전 참석했던 한 새벽기도회에서 강단에 혼자 앉은 담임 목사가 30분이 넘도록 “인 치시옵소서.”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꼭 “특별한 억양과 발음을 포함한 이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을 통해 주문 같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즉 기도를 의미 없는 반복,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점이었다.” p. 269

- 현실을 만들어 내는 말의 법칙 2: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말의 두 번째 종류는 ‘긍정적인 말’이다. 단순한 긍정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말의 사용이 이 법칙의 핵심이다.” p. 271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의 사용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사용된다.……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 사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피조물의 믿음이 아닌 성공의 법칙을 알고 활용하는 지배자의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p. 271 조엘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부르라. 승리를 부르라. 건강을 부르라.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p. 272 Lskewood Community, 2005. 6. 28

조엘 오스틴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의 여부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 15:7)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말 또는 말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하는 말을 기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말한 대로 된다고 하는 말의 법’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도 없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p.285

2) 성공의 법칙 2: 상상하는 대로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우리 속에 작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 크게는 우주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 286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러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처럼 설교되고 있다.” p. 296

저자는 한 실례로서 얼마 전 여호수아 18장 1~10절을 바탕으로 국민일보에 “축복 그림을 그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설교 일부분을 소개한다.

“……중략……그녀가(오프라 윈프리) 오늘 최고의 성공자가 된 것은 성경을 통해 꿈을 갖게 됐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중략……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며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 계획을 그리고 꿈꾸며 이루었습니다.……중략……. 성도 여러분, 행복을 결단하십시오. 축복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pp. 296-7 국민일보 2007년 3월 6일자 31면.

-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상기법과 관련해서 가장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단어는 ‘비전’ 또는 ‘꿈’”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상상기법에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라는 내용이 요즘은 교회에서 ‘꿈을 가지라.’, ‘비전을 품으라.’라는 말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비전과 꿈을 좋아하는지 꿈과 비전이 들어가는 교회 이름이 많이 생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꿈과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과 비전을 품는다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 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참된 교회, 참된 크리스천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비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비전이다.” pp. 298-9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참된 비전, 참된 꿈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드워즈를 통해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을 자기 신학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p. 299 백금산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부흥과개혁사, 2003, p. 154.

“자신의 욕망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말과 상상이라는 기법을 통해 이 비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말한 대로 된다.’ 혹은 ‘상상한 대로 된다.’는 성공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p. 300

-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

“말과 상상력이라는 성공의 법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힌두교 구루의 말처럼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 겉으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병이 치료되는 성공의 법칙을 알고 적용한 사람에게 ‘병 고침’이란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반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즉, 믿음을 발휘하는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 불과한 하나님을 부르는 이들에게 무슨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식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네가 신이 된다.’는 노골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믿음을 발휘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식의 잘못된 기독교 가르침은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p. 301

Ⅴ.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

- 기독교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1.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3가지 오해

오해 1. 나한테 확 필이 꽂혀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첫째는 나한테 확 필이 꽂힐 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느낌이 팍 살아서 내게 꽂히든 꽂히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지는 가장 잘못된 자세 중의 하나가 바로 ‘느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성경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p. 311

오해 2.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져서 기도를 열심히 안 하게 된다.

이것은 가장 무지한 오해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의 가슴은 차가울 수 없다. “말씀과 기도와 관련된 또 다른 위험한 생각은 ‘말씀은 몰라도 기도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경이 금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 28:9).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자기 욕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나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모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말씀은 모른 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자신의 ‘의지력’을 마치 무슨 신앙의 훈장이라도 되듯이 자랑하는 잘못은 더더욱 범하면 안 된다.” pp. 312-3

오해 3. 성경의 가르침 중 상당수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고대에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유행하는 사조대로 살면서 성경의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p. 313 그러나 로마서 1장은 인간의 동성애를 지적하고 있으며 창세기 9장 6절에는 살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참으로 성경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할 수 있는 책이다. 문제는 성경을 충분히 읽거나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되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벧전 2:2)하여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믿고 순종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 더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진리true truth’이며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pp. 324-5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인간이 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며 또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길과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해 성경과 정반대 되는 진리를 가르치는 심리학의 이론에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 p. 327

728x90

아래 글은 작년 11월 죠이 월간지에 반값 등록금 사태와 관련되어서 실은 원고의 전문입니다.

 

반값등록금 사태와 관련해서

  박기모 간사

본인는 80년대말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의 마지막인 89학번이다. 이때는 한창 캠퍼스에서 이념투쟁을 하며 데모를 하던 시기였다. 학기초만 되면 캠퍼스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수업은 데모 때문에 동맹휴업을 하기 일쑤였고 캠퍼스 주위에 소위 닭장차들이 수십대씩 줄지어 있는 광경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당시 나는 데모나 휴업에 찬성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단순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둘째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이념투쟁에 대해서 전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1학년때는 학과 동기들이 모두 동맹휴업을 한다고 했을 때 수업을 들어갔었다. 100여명이 듣는 물리학 강의시간에 단 3명의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왔었고, 그나마 나머지 둘은 밖에서 동기들의 눈총에 못이겨 수업도중에 나갔고, 나홀로 교수님과 수업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그때 욕도 많이 먹었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캠퍼스에서는 더 이상 이념 투쟁은 찾아볼 수 없다. 운동권의 학생회가 있더라도 이런 이슈로는 학생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나마 학생들의 당장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만 조금 반응을 보일뿐이다.

본인은 이렇게 캠퍼스를 다녔고 1998년 이후로는 캠퍼스의 간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섬기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서 학생들의 삶은 여러 가지로 팍팍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초까지만해도 졸업하면 취업을 골라서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기말이 되면 학과 사무실에는 취업관련 전단이 붙어있었고 그래서 원하는 기업의 원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어렵지 않게 취업을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 신입생들도 취업을 고민하며 캠퍼스의 낭만이라는 것을 누릴 여유가 없다. 취업을 위해서 좀더 나은 스펙을 쌓기 위해 학점을 관리하고, 계절 학기를 듣고, 영어 학원을 다니고 인턴을 준비한다. 누구도 이러한 사회의 요구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인적인 기억에 내가 대학생 시절에는 방학기간동안 조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 얼추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다른 것 안하고 알바만 해도 등록금은커녕 생활비 마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로 대학진학률의 증가이다. 교육과학기술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198022.6%에서 2008년에는 83.8%, 전체 학령인구 가운데 대학 재학 비율을 나타내는 취학률은 같은 기간 11.2%에서 70.5%로 급상승했다. 재적생 기준으로는 전문대 학생 수가 같은 기간 16.5만명에서 77.2만명으로, 대학생 수는 41.2만명에서 212.9만명으로 급증했다. 또 정부의 대학설립 자율화 바람에 편승해 대학 수도 같은 기간 96개교에서 197개교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전문대 수도 같은 기간 128개교에서 147개교로 늘어났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학구열이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설립인가가 완화되면서 무분별하게 많은 사립대학들이 생겨났고,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대학은 지성의 상아탑(象牙塔)’이라고 불리웠지만 이제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우골탑(牛骨塔)’ 내지는 입시학원이라고 불리고 있다.

두 번째로 사립대학의 등록금 의존 비율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경우 등록금 수입이 전체 수입의 20%에 불과한 반면 하버드대재단의 기금운용수입금이 34%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정부 지원(15%)과 기부금(7%) 수입 등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의 경우도 총수입 가운데 학생 납부금(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8.2%에 불과한 반면 의료수입(17.0%)와 자산매각 수입(15.9%), 자산운용수입(9.5%), 기부금 수입(6.9%), 보조금 수입(7.2%) 등 다양한 수입원을 갖추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립대 전체 교비회계의 총수입 가운데 약 68% 가량을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입금 수입이 6%, 기부금 수입이 3% 정도에 불과한 매우 기형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학 재정의 2/3 가량을 등록금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추세를 보더라도 총수입에서 등록금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년 높아지고 있는 반면 재단전입금 수입 비중은 갈수록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사립대학들은 2004년 이후 매년 전체 운영지출 예산의 10%가 넘는 기금을 적립하고 있다. 사립대들은 교육부령에 따라 예산 혹은 추경 예산에 없는 적립금은 쌓을 수 없도록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언론의 추적조사에 따르면 사립대 적립금의 거의 대부분이 교육부령을 무시하고 적립금을 쌓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등록금을 마구잡이로 걷어들인 뒤 남는 돈을 학생들의 학비 감면 혜택 등으로 돌리지는 않고 각종 명목으로 적립금으로 쌓아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년 물가 상승이나 재정 부족 등을 호소하며 등록금을 가파르게 인상해온 것이다.

바로 이땅의 청년들은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고, 우리들은 바로 미래를 꿈꿔야할 시기에 꿈을 잃어버린 청년들을 대상으로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신앙의 성장, 인격의 성숙,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미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예전에는 방학에는 가능하면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고 훈련을 받는데 힘쓰라고 강권하며 이야기했지만, 당장의 생존의 어려움에 처해있는 학생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조금 여유가 있는 친구들의 경우에는 등록금을 부모님들이 마련해주지만, 또 많은 학생들은 대출을 통해 등록금을 마련하는 상황이어서 졸업과 동시에 수천만원의 부채를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최근에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책의 중요 내용은 아파도 참고 이겨내란 이야기인데, 청년의 때에 어려움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아프면 왜 참아야 하는가? 나이 많거나 어린 사람은 아프면 소리도 지르고 도망도 가는데, 왜 청춘들은, 청년들은 아플 때도 참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책의 저자나 나오는 이야기들은 소위 엘리트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교수와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소위 기득권층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현재 청년들에게 아픔을 강요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청년 대학생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청년학생단체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어떤 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 아닌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런 아픈 청춘들의 문제에 귀기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다. 반값등록금 문제는 최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번 정부 들어서면서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국민들의 반값등록금 요구가 거세지자 이 반값등록금 이야기가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심정적인 부담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투쟁이 가시화 되었고 각각의 캠퍼스와 광화문에서는 산발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다가 날라리 선배부대의 가세로 시위의 양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최근 본인은 이러한 상황을 트위터를 통해서 접하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내용을 주위에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이런 현실을 해결하기 원하신다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정부나 대학이 이 문제에 좀더 전향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변화해나가도록 두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주세요.

앞서 나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이런 시위현장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특별히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청년대학생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그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혹시 이후에 이런 시위현장에서 나를 발견하더라고 놀라지 마시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