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지난 2009년 경인지부 겨울수양회 "부족한 기독교"라는 주제로 강의할때 옥성호씨의 책을 정리한 내용이다.
성경 말씀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르치는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어 말을 잘 하는 사람의 설교가 더 인기가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현재 기독교가 처한 위기사항을 보여주는 가슴아픈 한 단면입니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세상과 경쟁하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성경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말씀을 도와줄 구원군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 구원군이 저자가 말한대로 "심리학, 마켓팅, 언테테인먼트"이다. 이들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Ⅰ.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심리학은 하나의 종교이다.
1. 과학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설에 대한 반복적 실험이 가능해야 하고 그 실험 결과가 항상 동일하게 나올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입증하기 위한 어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50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이론과 관련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대한 분류와 관찰에 근거해서 미래에 그 관찰 주제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예측 가능하며 조정이 가능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분석 결과에 따라 동일한 결과가 미래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해야만 한다.” p. 53
2.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
“심리학은 동일한 결과의 반복적 발생에 대한 보장은 고사하고 관찰 대상의 미래 행동에 대해 ‘전혀’알지 못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추측하고 추리’할 뿐이다. 자신의 이론대로 진행되기를 믿고 바랄 뿐이다.…심리학이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는 대부분 관찰 대상자의 ‘주관적 이야기 또는 고백’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관찰 가능한 객관적 데이터가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그 관찰 대상자가 과연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을 진실로 알고 얘기를 하는지 아니면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리학이 개발한 수많은 이론의 바탕이 되는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데이터 수집과 관련해서 데이터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외에 또 하나의 문제는 관찰자 역시 데이터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데이터를 자기 마음대로 제각각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pp. 53-4
3. 인간의 정신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실험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과학적 방법의 대상은 물리적 영역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심리학을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측정 가능한 물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 치료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정신 치료의 영역이 물리적 영역을 넘어선 인간의 정신 영역,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인간의 뇌에 국한된 물리적 영역으로 볼 수는 없다.” p. 6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지 않은 다른 물질적 영역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고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영적인 존재이다. 즉, 물질적 영역을 지배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하나님을 결코 설명할 수 없듯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역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영적인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인드에 해당하는 영역인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다룰 수 없다. 인간의 마인드는 물리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p. 62
4. 진화론과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물리적 영역이 아닌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본질상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증명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은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인드에 대한 개인의 의견들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리학이 아무리 겉으로 과학적으로 들리는 용어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심리학 역시 진화론과 같이 본질상 종교일 수밖에 없다.” pp. 62-3
Ⅱ.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
- 교회가 심리학을 기독교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며, 교회가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을 일반 심리학과 차별하기 위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 심리학과 동일하다.
1. 심리학을 과학으로 오인하고 있다.
“우리는 심리학이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내가 만약 수술할 병에 걸렸을 때, 내가 아는 크리스천 의사보다 옆 동네의 무신론자 의사가 수술을 더 잘 한다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더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심리학이 이런 물질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심리학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적인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 영역에서 발견되는 과학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고 대적해야 한다.” PP. 74-5
2. 기독교 심리학은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기초를 둔 일반 심리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심리학은 그 단어 앞에 ‘기독교’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심리학은 일반 심리학과 전혀 다른 ‘성경 말씀에 근거한 심리학’이라고 착각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p. 77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한다. “‘과연 프로이트파 또는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심리학 이론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즉 신학교에서 기독교 심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관계 없이, 성경에 근거한 독립적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p. 78
저자는 직접 신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조사를 해본 결과 최소한 미국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심리학은 그 이론이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며, 본질에 있어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는 심리학과 전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 크리스천 심리학회에 제출된 한 논문을 언급함으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내세운다. “물론 우리는 심리학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기독교 심리학과 특별히 두드러지게 다르다고 인정받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심리학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비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p. 80
“표면상으로 기독교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의 이론적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프로이트, 융 또는 아들러를 중심으로 공부했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심하게 표현한다면 기존 심리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양념으로 올려놓은 것이 사실상 기독교 심리학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기독교 상담가들은 상담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 구절 몇 개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 비기독교 상담가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상담의 중심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p. 81
Ⅲ. 왜 심리학은 반 기독교적인가?
-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이며, 인간을 선하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이며, 인간은 현재 타락한 죄인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근본적인 주장과 반대 된다.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내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내면의 ‘상처 치료’이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심리 치료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던 상태가 어느 시점에서 너무 사랑스럽게 바뀌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심리 치료의 핵심 과제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더 예뻐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pp. 116-7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가 결코 사랑받을 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이다.” p. 119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아니 선함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이 최소한 중립의 상태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할 인간이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과 관계 없이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 때문”이라고 본다. p. 120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즉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내면 전체가 죄로 물든 존재라는 것이다.……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의 방법은 심리 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pp. 121-2
3. 프로이트(Sigmund Freud)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도덕적인 원칙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들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4. 카를 융(Carl Jung)
-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유형검사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강신술에 접촉된 융의 성장배경,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며 저술활동을 한 융
Ⅳ.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
- 심리학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사랑,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이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
1. 심리학의 첫 번째 가면: 자기 사랑(Self-Esteem, Self-Love, Self-image)
1) 자기 사랑의 전파자들
- 카를 융(Carl Jung)
융에게 인간은 (드러나지 않은) 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융에게 인간이 하나의 신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며 그 표현이 사랑을 넘어 자신에 대한 숭배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p. 155
- 에릭 프롬(Erich Fromm)
에릭 프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잠재력과 지성을 사용해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나와 같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장은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악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에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p. 160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에릭 프롬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 부분과 관련하여 칼빈이야말로 인류의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p. 161
- 칼 로저스(Carl Rogers)
정신 분석 시장에 있어서 칼 로저스의 공헌은 ‘심리치료란 일반적으로 환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필요한 것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간접적 또는 고객 중심(non-direct or client-centered)의 상당법을 개발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또한 심리 치료를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며 자아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심리 치료는 더 참되고 더 완성된 자기 자신을 이루려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p. 162
2) 자기 사랑이 가진 오류
“첫 번째로 자기 사랑을 하나의 치료약, 다른 말로 하면 결과를 내기 위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자기 사랑은 단순히 교회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에서도 각종 사회 문제까지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주는 하나의 만병통치와 같이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자존감의 결여가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식으로까지 오해를 주고 있다. 그러나 현신을 살펴보면 진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엄청나게 높은 자존감,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존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 범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 유도된 자존감은 오히려 인간이 가진 죄성을 합리화시키며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까지도 있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냥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지 강제로 심은 후 빨리 뿌리를 내리고 빨리 자라도록 하기 위해 마구 그 위에 비료를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내가 좋아.”를 반복하거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상기키시는 책의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등의 ‘조작’을 통해 강제로 생기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사랑은 어느 날 돌아보니 전보다 더 책임감 있고 남에 대해 배려하는,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보고 그냥 씩 웃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 pp. 165-6
“두 번째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 사랑이 너무 모자라서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렇기 에 이 부족한 자기 사랑을 키워 주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기 사랑이 부족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지 결코 모자라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p. 166
3) 자기 사랑에 대한 성경의 경고
“성경은 자기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자기 사랑이야말로 말세에 드러나는 가장 조심해야 할 위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위의 구절에서 자기 사랑 이후에 나열되는 돈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이나 교만이나 모두 어떻게 보면 자기 사랑에 대한 결과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pp. 167-8
4) 성경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렘 9:23~2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며 살라고 말하지 하나님을 아는 나 자신에 감동하며 살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내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마치 내가 스스로 창조한 듯이 자랑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왜 네가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재능과 관련해서 찬양을 받으실 분은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이시지 그 재능을 거저 받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실 수 있지만 굳이 내게 주신 것은 내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빚진 마음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성경은 ‘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지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라고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도 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긍지에 차서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존재’를 하나님께 빚지고 살고 있다. 내 스스로 숨쉬고 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빚진 자’이다. 여기서 무슨 자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감탄하는 나의 재능도 그 재능이 발휘되기 위한 존재를 하나님이 유지시키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상황에 내가 나를 보면서 감탄할 것이 무엇이 그리 있겠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창조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진실이고 우리의 현주소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우리의 만족은 내가 나를 보면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어 낸 창조자가 아니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pp. 177-8
5) 나 중심의 종교가 위험하다.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다. 그 속에서 ‘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잊혀지게 되고 기독교는 어느 새 하나님 중심의 종교에서 ‘나’ 중심의 종교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p. 181
2. 심리학의 두 번째 가면: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1) 긍정적 사고방식의 전파자들
-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 사고’라는 말로 사실상 심리학의 긍정적, 적극적 사고를 교회 내로 유입시킨 원조이다.”……그는 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생명 에너지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에너지이시다.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숨을 통해 들이마심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의 에너지를 마음에 그릴 수 있게 되고 당신은 새로운 에너지로 재충전될 것이다.” Noman Vincent Peale, “No more stress or tension,” in Plus:The Magazine of Positive Thinking, May 1986, pp. 22~23
“하나님은 이제 하얀 안개 속의 에너지로 전락한 채 우리가 호흡을 통해 들이마시는 존재가 되었다.” p. 185
-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지금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오염시킨 긍정적 사고의 일등공신은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이다. 로버트 슐러가 시작한 교회의 ‘수적인 성공’이 그를 일약 기독교 내에서 긍정적 사고의 대부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사실 노만 빈센트 필의 수재자이다.”p. 186
“슐러는 1926년생이다. 슐러의 나이와 관련해서 그가 출연했던 한 기독교 대담 방송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로버트 슐러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환으로 왜 하나님이 자신을 수많은 년도 가운데 1926년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하나님은 슐러의 인생이 마태복음 19장 26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장 16절이 바로 1926년이라는 논리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즉, 이 말씀을 바탕으로 볼 때 자신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p.187
“로버트 슐러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말씀, 소위 말하는 ‘평생 말씀’으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이 예레미야 29장 11절이라고 한다.” p. 188 (렘 29:1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는 흘러갔거나 흘러가는 세대이다. 현재 이들의 후계자는 여러 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군계일학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엘 오스틴이다. 조엘 오스틴의『긍정의 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 127)
“오스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하나님,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실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단순하신데 우리 인간이 괜히 신학이니 조직신학이니 성경신학이니 하는 말들로 하나님의 그 단순한 진리를 학문화시키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식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복잡한 과정들,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초대 교회의 순교등을 거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그냥 ‘하나님은 긍정적이시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존재하실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스틴이 자신의 설교에서 죄니 십자가니 하는 주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pp. 199-200
오스틴은 사라가 이삭을 가지게 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라가 실제로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아이를 마음에 품자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다. 나는 이삭이 더 빨리 태어나지 못한 주 원인, 즉 약속의 실현이 그토록 오래 지연된 이유가 사라의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중략……하지만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작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마음 상태가 복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려운 사실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자칫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 두란노, 2005, pp. 97~98 )
“조엘 오스틴에 따르면 사라가 가졌던 애초의 불신앙은 하나님이 아무리 이삭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가 없도록 만든, 하나님을 뛰어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라가 ‘제발’믿음을 가져서 당신이 하신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제발’실현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셔야만 했다. 마침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기회가 왔다. 마침내, 마침내, 사라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비로소 채워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는 존재이니 우리 스스로를 위해 또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엘 오스틴의 주장이다.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고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불쌍한 하나님을 당신과 내가 도와 드려야지 누가 돕겠냐는 것이다.” p. 205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의 실현 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마치 사라가 당연히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간주하고 그런 약속을 하고 계신다. 나이 많은 사라가 행여 믿음을 가져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행여 이 사라가 이삭을 순산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믿음을 못 가진다면 또 어떻게 되는가? 이삭이 태어나다가 산모와 태아가 다 죽으면 어떡할까? 사라가 순산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p. 206
“조엘 오스틴 믿음 이론에 따르면 사라의 신앙 상태에 따라 이삭은 사라가 80세에 나왔을 수 있었고 아니면 150세가 되어서야 나왔을 수도 있다. 계속 사라가 믿음을 안 가지는 것에 대비해 아마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라가 죽지 않고 계속 살도록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중요하지만 사라의 믿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라의 믿음과 관계 없이 이삭이 나왔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이삭이 그 때 태어나도록 계획하셨고 그래서 그 때에 태어난 그것이 사라의 의지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pp. 207-8
-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적인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8장 19절과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자청해서 따르겠다는 사람을 쫓아 내는 것도 모자라서 예수님 당신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시었다. “‘나는 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고 매일 긍정적 언어로 도배해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은 아예 자신의 처지를 동물들과 비교할 정도로 부정적인 언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도저히 부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부정적 미래를 계속 반복하시니 긍정적 사고와 긍정적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으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피난을 하면서 자주 옮겨 다녀 친구를 못 사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가난한 환경이 주는 정신적 상처가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pp. 235-6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하지 않겠다’라는 긍정적 선언을 한 베드로에게 “격려를 하고 북돋아주지는 못할망정 ‘너는 분명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그의 신념에 찬물을 끼얹으셨다.” p. 23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부정적 메시지 앞에서 절규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그 진심을 이해하며 따뜻한 격려 한 마디는 못 해 줄망정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에게 도대체 어떤 긍정적 사고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눈과 팔이 잘못하면 아예 눈을 빼 버리고 팔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긍정적인가?” p. 237
- 딤후 3:16절은 심리학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반성경적임을 선명히 보여준다.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KJV)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첫째 성경의 목적은 바른 교리(doctrine)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책망(reproof)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바르게하는(correction) 것입니다.
넷째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자라도록 훈련하는(instruction in righteousness) 것입니다.
3.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 두 개의 종교 :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
초자연 종교의 특징 : 자연을 초월하는 독립적인 창조신이 있다.
자연종교의 특징 : 모든 종교는 자연의 일부다. 자연 종교는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자연주의 종교가 믿는 자연법칙의 핵심은 마음먹은대로 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 종교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일부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성을 활용하면서 신처럼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과,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의 능력을 모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뉠 수 있다. 즉, 자신이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미운 오리가 되어 사는 사람들과 백조가 되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p. 257
“자연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법칙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된다는 마음(mind)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 어떤 현실을 품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p.258
“자연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결국 비인격체입니다. 즉 한마디로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이 거대한 에너지는 자연히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한한 인격체이십니다. 무한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무한한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통해 우주를 통치하기도 하시지만 자연법칙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p.261-2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방법은 말과 상상이다.
1) 성공의 법칙 1: 말한 대로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마치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이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키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p. 263
-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법칙 1: 주문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말의 첫 번째 종류는 힌두교에서 흔히 만트라(mantra)라고 부르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우리말로 하면 주문이다.” p. 264 만트라를 통한 수행의 모습은 여덟 살 때에 이미 힌두교의 요기(요가의 달인을 일컫는 말)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스승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자신이 여덟 살 때 했던 전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적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정통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주문 그 자체 속에 어떤 신성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 자체로 그 주문이 요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정확하게 반복함으로 또 매일 태양을 향해 바른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문은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 p. 265
- 남묘호렌게쿄의 주문 p.265-68
-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인격체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주문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 달 전 참석했던 한 새벽기도회에서 강단에 혼자 앉은 담임 목사가 30분이 넘도록 “인 치시옵소서.”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꼭 “특별한 억양과 발음을 포함한 이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을 통해 주문 같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즉 기도를 의미 없는 반복,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점이었다.” p. 269
- 현실을 만들어 내는 말의 법칙 2: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말의 두 번째 종류는 ‘긍정적인 말’이다. 단순한 긍정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말의 사용이 이 법칙의 핵심이다.” p. 271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의 사용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사용된다.……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 사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피조물의 믿음이 아닌 성공의 법칙을 알고 활용하는 지배자의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p. 271 조엘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부르라. 승리를 부르라. 건강을 부르라.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p. 272 Lskewood Community, 2005. 6. 28
조엘 오스틴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의 여부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 15:7)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말 또는 말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하는 말을 기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말한 대로 된다고 하는 말의 법’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도 없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p.285
2) 성공의 법칙 2: 상상하는 대로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우리 속에 작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 크게는 우주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 286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러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처럼 설교되고 있다.” p. 296
저자는 한 실례로서 얼마 전 여호수아 18장 1~10절을 바탕으로 국민일보에 “축복 그림을 그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설교 일부분을 소개한다.
“……중략……그녀가(오프라 윈프리) 오늘 최고의 성공자가 된 것은 성경을 통해 꿈을 갖게 됐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중략……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며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 계획을 그리고 꿈꾸며 이루었습니다.……중략……. 성도 여러분, 행복을 결단하십시오. 축복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pp. 296-7 국민일보 2007년 3월 6일자 31면.
-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상기법과 관련해서 가장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단어는 ‘비전’ 또는 ‘꿈’”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상상기법에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라는 내용이 요즘은 교회에서 ‘꿈을 가지라.’, ‘비전을 품으라.’라는 말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비전과 꿈을 좋아하는지 꿈과 비전이 들어가는 교회 이름이 많이 생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꿈과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과 비전을 품는다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 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참된 교회, 참된 크리스천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비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비전이다.” pp. 298-9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참된 비전, 참된 꿈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드워즈를 통해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을 자기 신학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p. 299 백금산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부흥과개혁사, 2003, p. 154.
“자신의 욕망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말과 상상이라는 기법을 통해 이 비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말한 대로 된다.’ 혹은 ‘상상한 대로 된다.’는 성공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p. 300
-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
“말과 상상력이라는 성공의 법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힌두교 구루의 말처럼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 겉으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병이 치료되는 성공의 법칙을 알고 적용한 사람에게 ‘병 고침’이란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반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즉, 믿음을 발휘하는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 불과한 하나님을 부르는 이들에게 무슨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식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네가 신이 된다.’는 노골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믿음을 발휘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식의 잘못된 기독교 가르침은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p. 301
Ⅴ.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
- 기독교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1.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3가지 오해
오해 1. 나한테 확 필이 꽂혀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첫째는 나한테 확 필이 꽂힐 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느낌이 팍 살아서 내게 꽂히든 꽂히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지는 가장 잘못된 자세 중의 하나가 바로 ‘느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성경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p. 311
오해 2.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져서 기도를 열심히 안 하게 된다.
이것은 가장 무지한 오해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의 가슴은 차가울 수 없다. “말씀과 기도와 관련된 또 다른 위험한 생각은 ‘말씀은 몰라도 기도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경이 금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 28:9).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자기 욕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나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모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말씀은 모른 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자신의 ‘의지력’을 마치 무슨 신앙의 훈장이라도 되듯이 자랑하는 잘못은 더더욱 범하면 안 된다.” pp. 312-3
오해 3. 성경의 가르침 중 상당수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고대에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유행하는 사조대로 살면서 성경의 내용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p. 313 그러나 로마서 1장은 인간의 동성애를 지적하고 있으며 창세기 9장 6절에는 살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참으로 성경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할 수 있는 책이다. 문제는 성경을 충분히 읽거나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되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벧전 2:2)하여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믿고 순종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 더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짜 진리true truth’이며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pp. 324-5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인간이 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며 또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길과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해 성경과 정반대 되는 진리를 가르치는 심리학의 이론에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 p.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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