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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sons of Noah, Shem, Ham, and Japheth. Sons were born to them after the flood.

kThe sons of Japheth: Gomer, Magog, Madai, Javan, Tubal, Meshech, and Tiras. The sons of Gomer: Ashkenaz, Riphath, and Togarmah. The sons of Javan: Elishah, lTarshish, mKittim, and Dodanim. From these nthe coastland peoples spread in their lands, each with his own language, by their clans, in their nations.

oThe sons of Ham: Cush, Egypt, Put, and Canaan. The sons of Cush: Seba, Havilah, Sabtah, Raamah, and Sabteca. The sons of Raamah: Sheba and Dedan. Cush fathered Nimrod; he was the first on earth to be a mighty man.1 He was a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Therefore it is said, “Like Nimrod a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10 The beginning of his kingdom was pBabel, Erech, Accad, and Calneh, in qthe land of Shinar. 11 From that land he went into Assyria and built Nineveh, Rehoboth-Ir, Calah, and 12 Resen between Nineveh and Calah; that is the great city. 13 rEgypt fathered Ludim, Anamim, Lehabim, Naphtuhim, 14 Pathrusim, Casluhim (from whom2 the Philistines came), and sCaphtorim.

15 tCanaan fathered Sidon his firstborn and Heth, 16 and the Jebusites, the Amorites, the Girgashites, 17 the Hivites, the Arkites, the Sinites, 18 the Arvadites, the Zemarites, and the Hamathites. Afterward the clans of the Canaanites dispersed. 19 And the territory of the Canaanites extended from Sidon in the direction of Gerar as far as Gaza, and in the direction of Sodom, Gomorrah, Admah, and Zeboiim, as far as Lasha. 20 These are the sons of Ham, by their clans, their languages, their lands, and their nations.

k For ver. 1–5, see 1 Chr. 1:5–7; Ezek. 38:1–6

l Ps. 72:10; Ezek. 38:13

m Num. 24:24; Isa. 23:1, 12; Dan. 11:30

n Isa. 11:11; Jer. 2:10; 25:22; Ezek. 27:6; Zeph. 2:11

o For ver. 6–8, see 1 Chr. 1:8–10

1 Or he began to be a mighty man on the earth

p ch. 11:9

q ch. 11:2

r For ver. 13–18, see 1 Chr. 1:11–16

2 Or from where

s Deut. 2:23; Jer. 47:4; Amos 9:7

t [ch. 15:18–2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0:1–20.

 

 

1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 본문의 족보는 창세기의 네번째 ‘톨레도트’이다. 이들은 홍수 후에 자녀를 출생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노아의 세 아들의 이름은 모두 70명이다. 야벳의 후손은 14명, 함의 후손은 30명, 셈의 후손은 26명이 기록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의 완전성을 보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2-5절) 야벳의 아들들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5절을 보면 이들이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벳의 후손들 중에 고멜과 야완의 직계 자녀들에 대해서 기록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야벳의 아들들은 모두 일곱 명이며 그의 두 아들 고멜과 야완을 통해 태어난 일곱 명의 아들들의 이름을 언급하여, 모두 열네 명(2×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 언급된 이름들 중에 상당수는 다른 성경에서도 언급되지만, 그 중에 에스겔 38:2–6에서 고멜과 마곡 메섹과 두발이 미래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북방의 강한 군대로 묘사되고 있다. 마대는 사 13:17과 21:2에서 바벨론을 공격할 민족으로 언급되며, 페르시아 제국의 한 축을 형성했다. 이들은 티그리스 강 북쪽과 카스피해 인근에 살았다. 다시스는 요나가 달아난 곳이며(욘 1:3), 솔로몬의 상선이 왕래했던 항구이기도 하다(왕상 10:22). 깃딤은 이사야 23:1과 에스겔 27:6 그리고 예레미야 2:10에서 언급되며, 민수기 24:24에서는 발람이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를 학대하고 스스로도 망할 것이라고 한다. 도다님은 역대상 1:7에서 로다님으로 기록되어 있고, 70인역도 로다님으로 읽고 있다.6) 이 같은 차이는 필사자가 히브리어 알파펫 ‘다렛’(ד)과 ‘레쉬’(ר)의 유사성으로 인한 혼란에서 초래되었다.

6) Zvi Ron, “Dodanim/Rodanim: Three Approaches,” Jewish Bible Quarterly 34–2 (2006): 122–12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19.

 

6-20절) 함의 아들들

위의 표에서 보듯이 함에게 4아들이 있었는데 이중에 구스와 미스라임, 가나안이 주목을 받는다. 구스는 북동 아프리카 지역, 미스라임은 이집트,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 살 땅이다. 함의 자손들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부딪히게 된다. 함의 족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니므롯이다. 

 

8-12절) 니므롯은 히브리어로 반역하다 혹은 화살이라는 의미이다. 이후에 하가다라는 학자는 니므롯을 바벨탑을 쌓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이끌었던 자라고 묘사한다. 본족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8절)이며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9절)이었으며 시날땅에 나라를 세웠다.(10절-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 니므롯은 시날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큰 성읍을 건설하였다. 기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면 니므롯은 가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성들을 건축하고 제국을 건설하여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니므롯의 삶과 업적은 가인의 성 건축과 네피림의 삶을 합쳐놓은 것으로 보인다. 즉 니므롯은 뱀의 후손, 사탄의 후손인 가인과 네피림처럼 살았던 자이다. 

 

In Hebrew this name uses a verbal form meaning “to rebel.” He is connected with warfare, hunting, and ruling cities in Mesopotamia (modern Iraq). He is a mighty hunter and kingdom builder (vv. 9–12), and his name may suggest that he is “against Yahweh.” Later, both the Assyrians and the Babylonians are responsible for the destruction of Israel and Judah, respectively. In the light of how violence is picked up in the early chapters of Genesis, Nimrod appears to be the antithesis of what God wants, using power to build cities and kingdoms that stand in opposition to God’s kingdom and city.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41.

니므롯은 용사였다고 한다. 용사의 히브리어는 ‘기볼’(גִּבֹּ֖ר)이며, 창세기 1–10장의 배경에서 ‘기볼’(גִּבֹּ֖ר)은 심상치 않은 표현이다. 그 이유는 ‘기볼’(גִּבֹּ֖ר)은 창세기 6:4에서 네피림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11)

הֵ֧מָּה הַגִּבֹּרִ֛ים אֲשֶׁ֥ר מֵעוֹלָ֖ם אַנְשֵׁ֥י הַשֵּׁ֖ם 헤마 학깁보림 아셀 메올람 안세 하셈

창세기 6:4에서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났던 네피림을 ‘기볼’(גִּבֹּ֖ר)즉 용사라고 했는데, 그 용사가 함의 장자 구스를 통해 태어났다. 니므롯은 노아 홍수 이후의 첫 ‘기볼’(גִּבֹּ֖ר)이고 히브리어 동사 ‘하랄’(חלל, 시작하다)은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기볼’(גִּבֹּ֖ר)이 생겨났음을 보여 준다. 이 말은 니므롯이 노아 홍수 이전에 피조 세계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자들의 삶의 방식을 다시 따르기 시작한 시조임을 보여 준다.

9절은 니므롯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지만 내용은 매우 난해하다. 니므롯을 사냥의 용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여호와 앞에서라고 했을까? 니므롯은 단순히 짐승을 사냥하는 그런 사냥꾼으로 의미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그 이유는 첫째 사냥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차야드’(צַיָּד)를 사용하지 않고 ‘기볼 차이드’(גִּבֹּ֖ר־צַ֖יִד)즉 사냥의 용사라고 하였다.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니므롯의 삶과 행동을 8절의 ‘기볼’(גִּבֹּ֖ר)과 연결시켜 의미를 좀 더 발전시키거나 명확하게 만들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앞서 8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기볼’(גִּבֹּ֖ר)은 창세기 6:4에서 네피림에 대한 또 다른 호칭이었고 창세기 6:11에 의하면 폭력을 일삼고 파괴하는 자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9절에서 니므롯은 단순히 야생 동물만 사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듯 폭력을 행사하고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12)

니므롯을 왜 “여호와 앞에서” 사냥의 용사라고 했을까?13) 이 표현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와 유사한 표현인 ‘하나님 앞에서’가 창세기 6:11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라고 하였다.14) 이것은 땅의 패괴한 상태가 최악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모두 다 용사로 불린 네피림과 이들처럼 살았던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6:12의 “모든 혈육 있는 자”(콜 바살, כָּל־בָּשָׂ֛ר)와 6:3의 “육체”(바살, בּשָׂ֛ר)는 같은 말이며, 이는 6:11–12의 행위가 6:1–4의 네피림 용사의 행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사한 표현인 ‘여호와 앞에서 사냥의 용사’는 니므롯이 네피림 용사들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인 최악의 용사였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살인하는 행위는 가인을 연상시킨다. 가인은 창세기 4:8에서 하나님이 죄의 욕망을 다스리고 선을 행할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그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를 앞에 두고 아벨을 살인하였다. 마찬가지로 니므롯은 하나님 앞에서 살인과 전쟁을 일삼는 폭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인의 후손 라멕이 가인의 행동을 답습하여 사람을 살해하고 교만하게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라는 말을 유포시켰던 것처럼, 홍수 이후에 니므롯과 사람들은 니므롯처럼 폭력을 일삼는 자들을 여호와 앞에 사냥의 용사라는 속담을 유행시켰을 것이다.

11) Keil, Genesis, 165. Euan McG. Fry, Genesis (New York: UBS, 1997), 235. Mathews, Genesis 1–11:26, 450.

12) 고대근동의왕과용사들이사자를사냥하는벽화를종종발견할수있다. 사자의사냥을통해이 들은자신의용맹을과시하였다. Mathews, Genesis 1–11:26, 450. Cf. 렘16:16.

13) 니므롯을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 이라고 불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사자를 사냥하는 것으로 자신의 용맹과 힘을 과시하였다. 이 속담은 사무엘상 19:24의 사울이 예언할 때사울도선지자에속하느냐는표현과같은차원에서부정적으로이해해야한다.

14) U. Cassuto, Genesis II, 20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22–323.

 

15-20절) 가나안이 낳은 11명의 아들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다. 

 

Sidon. A coastal Lebanese city; Sidonians is another name for Phoenicians. Hittites, Jebusites, Amorites, Girgashites, Hivites. Inhabitants of Canaan who are to be removed when God gives the land to Israel (Deut 7:1; Josh 3:10). They probably originated in south Turkey (the Hittites were a kingdom in Turkey) and northwest Syria (if the Amorites are Amurru [Josh 13:4] and not the inhabitants of the hill country near the Jordan River [Deut 1:4, 7]). Arkites, Sinites, Arvadites, Zemarites and Hamathites. Kingdoms in northwest Syria. Canaan. An area known in Egyptian records of the second millennium BC and in early biblical texts (Num 13:17, 21–22; 34:3–12; Josh 1:4) but not later. Gaza. Ancient and modern city at the southern boundary of Canaan along the Mediterranean. The eastern border of Canaan is the Jordan Valley, with Sodom, Gomorrah, Admah and Zeboyim (14:2, 8) southward and Lasha (Israelite Dan; Judg 18:29) in the north.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41.

가나안의 후손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은 가장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가나안의 후손들의 이름은 이후에 부분적으로 창세기 15장, 여호수아 3장 등등에서 다시 등장한다. 가나안의 후손들의 이름은 창세기 10장에서 에벨의 아들 욕단 다음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9:1–7의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들과의 관계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25–326.

 

야벳과 함의 족보를 보았다. 대부분의 노아의 자손들이 이후에 민족을 이루고 한 지역의 이름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함의 아들 구스의 아들중의 니므롯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여전히 가인의 후손, 네피림의 후손들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은 이후에 바벨탑 사건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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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e sons of Noah who went forth from the ark were fShem, Ham, and Japheth. (Ham was the father of Canaan.) 19 These three were the sons of Noah, and gfrom these the people of the whole earth were dispersed.2

20 Noah began to be a man of the soil, and he planted a vineyard.3 21 He drank of the wine and became drunk and lay uncovered in his tent. 22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others outside. 23 Then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laid it on both their shoulders, and walked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Their faces were turned backward, and they did not see their father’s nakedness. 24 When Noah awoke from his wine hand knew what his youngest son had done to him, 25 he said,

i“Cursed be Canaan;

ja servant of servants shall he be to his brothers.”

26 He also said,

“Blessed be the Lord, the God of Shem;

and let Canaan be his servant.

27  May God enlarge Japheth,4

and let him dwell in the tents of Shem,

and let Canaan be his servant.”

28 After the flood Noah lived 350 years. 29 All the days of Noah were 950 years, and he died.

f ch. 5:32; 10:1

g ch. 10:32

2 Or from these the whole earth was populated

3 Or Noah, a man of the soil, was the first to plant a vineyard

h [Hab. 2:15]

i Deut. 27:16

j Josh. 9:23; Judg. 1:28; 1 Kgs. 9:20, 21

4 Japheth sounds like the Hebrew for enlarg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9:18–29.

 

 

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은 창세기 5:32에서 소개되어 창세기 6:10과 7:13에서 이름이 거론되지만 단 한 차례도 말과 행동의 주어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제 창세기 9:18 이하에서 이들은 제대로 무대에 등장하여 주인공 역할을 한다. 창세기 9:18의 문장의 주어는 노아의 세 아들들이다. 19절은 이들로부터 세상의 모든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말하며, 이것은 창세기 9:18 이하의 내용이 노아의 세 아들 시대에 기록되지 않고 그들의 후손들이 세상에 퍼진 후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기 9:18의 둘째 문장은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함을 주어로 내세워 그에게 초점을 맞추며 그가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밝힌다. 이것은 이어지는 기사의 주인공이 함이란 사실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창세기의 내용 전개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중요한 암시를 제공한다. 19절은 또한 창세기 9:1, 7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20)

20) Victor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1–17, 32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03.

 

20-23절)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얻어서 포도주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술에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글 성경은 농사를 시작하여라고 말하지만 영어 성경은 노아가 땅이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라고 표현하고 히브리어는 ‘이휘 하아다마’라고 표현한다. 땅이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이후에 가인이 처음 땅을 경작하지만 살인죄를 저지르고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땅은 아벨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다. 창 5:29에서 라멕은 노아를 낳고 하나님이 저주한 땅에서 안위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는데 이것이 본문 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노아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취하여 벌거벗었다. 이에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렸고 함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자기의 장막에서 벌거벗은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노아는 자신의 자식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레 10장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성막에서 술을 마시고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다. 물론 노아가 제사장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그가 홍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제단을 드린 것을 생각한다면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장막과 성막이 동일한 곳으로 여긴다면 노아의 행동은 심각한 실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함의 행동이다. 우리는 노아의 실수와 아담의 죄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은 채로 부끄러워 했다. 노아는 술을 마시고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던 것처럼 당대의 의인 노아도 중요한 실수를 범한다. 아담과 하와도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이를 감추려고 했다. 반면에 함은 노아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린다. 함의 행동에 대해서 성적으로 수치스러운 행동은 했다라고 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지 않고 이를 밝히 드러낸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게하여 아담과 하와의 벗었음을 알게 한 이는 바로 뱀, 사탄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아의 벗은 것을 알리는 함의 행동이 사탄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의 벗은 것을 알게함으로 부부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처럼 노아의 벗은 것을 알게함으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뱀과 뱀의 후손이 저주를 받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것처럼 노아의 벌거벗음을 알게한 함의 후손,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고 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옷으로 덮어주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다가 이후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그들에게 입혀주신 것과 같다. 이처럼 셈과 야벳의 행동은 하나님을 닮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셈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이어지게 된다. 

 

노아 홍수 이후 자손들이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노아는 농부가 되어(이쉬 하아다마אִישׁ הָאָדָמָה 창 2:5–6, 3:23, 4:2) 포도밭을 경작하기 시작한다. ‘이쉬 하아다마’(אישׁ הָאָדָמָה)는 창세기 1–11장에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창세기 2:5에서는 땅에 풀이 자라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세기 3:17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창세기 3:23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여 땅을 경작하게 한다. 창세기 4:2에서 가인은 처음으로 땅을 경작한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아벨을 살해한 죄로 인해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며, 땅은 그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다. 창세기 5:29에서 라멕은 노아를 낳고 그가 하나님이 저주한 땅에서의 수고와 고통으로부터 안위하여 주기를 소망하였는데, 노아는 홍수 이후에 마침내 ‘이쉬 하아다마’(אישׁ הָאָדָמָה,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경작한다.21) 이처럼 노아가 농부가 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카슈토는 노아를 ‘오베드 하아다마’(עוֹבֵד הָאֲדָמָה, 땅을 경작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이쉬 하아다마(אישׁ הָאָדָמָה)라고 한 것은 노아를 땅의 주(master)로 여기는 것이고, 창세기 5:29의 라멕의 기대의 성취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2)

마태복음 24:38에서 예수님이 말한 것처럼 노아 홍수 이전에도 포도주를 마셨겠지만, 포도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창세기 9:21이 처음이다. 이 포도주와 관련하여 노아는 중요한 실수를 범하였다. 그의 실수는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에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것이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신 것만 두고 노아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되고 창세기 9:21의 내용 전체와 관련하여 그의 실수를 살펴야 한다. 그 이유는 구약 성경은 포도주에 취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포도주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사 25:6).23) 하지만 노아가 자식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취해 있었던 것은 전혀 긍정적이지 못하다. 고대 근동의 종교에서는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이 종교 행사의 일부였다.24) 그러나 레위기 10장에 의하면 제사장은 술을 마시고 성막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25) 그 이유는 성막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갈 때 긴 옷을 입어야 했다. 하체가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심각한 일로 여겼다.26) 노아를 제사장들과 동일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는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자였고(창 8:20), 장막과 성막은 동일한 단어이다. 후대의 레위기의 제사장 규정에 비추어 평가한다면 노아의 행동은 심각한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제2의 아담이었던 노아와 세 아들은 아담과 하와와 대조된다.27) 아담과 하와는 세 명의 아들이 있고, 그 중에 한 명을 통해 3:15의 약속이 이어지고 한 명은 저주 받았던 것처럼, 노아도 세 아들이 있고 그 중 한 명인 셈을 통해 약속이 이어지고 한 명은 저주를 받는다. 노아의 실수는 아담의 죄와 대비를 이룬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벗은 채 있었던 것처럼, 노아는 장막 안에 벗은 채 누워 있었다. 의로웠던 아담이 죄를 지었던 것처럼, 의로웠던 노아도 중요한 실수를 저지른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처럼, 노아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먹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잔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서로서로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감추려고 하였다. 반면에 함은 노아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린다. 함의 행동은 단순히 아버지의 벗은 몸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28) 아담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게 하여 아담과 하와의 벗은 것을 알게 만든 일등 공신이 누구인가? 뱀 또는 사탄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벗은 것을 알리는 함의 행동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뱀과 사탄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을까?29)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을 앎으로 부부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서로 가리고 나무 밑에 숨어야 했던 것처럼, 함은 아버지의 벗은 것을 알림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파괴한다.30) 그리고 창세기 3:14에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만든 뱀과 뱀의 후손이 저주를 받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된다. 마찬가지로 노아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만든 함과 함의 후손은 저주를 받고 셈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는다. 홍수 이전에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가인이었으며, 홍수 이후에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함이 뱀의 행동을 하였다면 가나안은 함과 뱀의 행동을 따르는 뱀의 후손의 계통을 잇고 있다.31)

셈은 야벳과 함께 노아의 벗은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노아를 옷으로 덮어 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었다. 하나님은 벌거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에덴에서 쫓겨나던 아담의 몸을 가죽 옷을 만들어 직접 입혀 주었다(창 3:21). 유사하게 셈과 야벳은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옷으로 가리워 주고 있다. 그렇다면 셈과 야벳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셈과 야벳은 옷으로 노아를 덮어 그의 수치를 가리워줌으로 하나님을 닮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고, 뱀의 행동과 대조되는 행동을 하였다. 셈에게 주어진 축복에서 알 수 있듯이 뱀의 후손과 싸우게 될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셈을 통해 이어지게 된다.

21)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415–416.

22) U. Cassuto, Genesis II, 159–160.

23) 시편104:15 “사람의마음을기쁘게하는포도주와사람의얼굴을윤택케하는기름과사람의마 음을힘있게하는양식을주셨도다.”

24) C. H. Gordon, “El, Father of Snm,” JNES 35 (1976): 261. 우가릿의 최고신 엘이 술에 취해 다른신에부축받는내용도있다.

“El sits in his mrzh–shrine, drinks wine to satiety, liquor to drunkenness. El goes to his house, proceeds to his court. Tkmn and Snm carry him.”

25) 레위기 10:9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 을면하라이는너희대대로영영한규례라그리하여야너희가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 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또여호와가모세로명한모든규례를이스라엘자손에게가르치리라.”

26) 출애굽기20:26 “너는층계로내단에오르지말라네하체가그위에서드러날까함이니라.”

27)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414–415.

28) 고대로부터주석가들은함이노아에게한행동의성격에대해관음증, 거세, 또는성관계였을것 으로 생각했다. 관음증으로 주장한 학자들은 Umberto Cassuto, Gordon P. Wenham, Victor P. Hamilton, Kenneth A. Matthews 등등이 있다. 거세에 대한 주장은 b. Sanh. 70a, Gen. Rab. 36.7 등등에 나타난다. Stephen Gero, “The Legend of the Fourth Son of Noah,” Harvard Theological Review 73 (1980): 321–330. Stephen Gero에의하면노아는홍수후에 넷째 아들을 얻고 싶었지만 함이 가나안을 시켜 노아를 거세시켰고, 이로 인해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하였다는 전통이 A.D. 4세기경부터 유대인들 중에 있었다고 한다. 성관계로 보는 견해는 Robert Gagnon, Anthony Phillips 등등이 있다. O. Palmer Robertson, “Current Critical Questions Concerning the Curse of Ham(Gen 9:20–27),” JETS 41–2 (1998): 177–188. 반면에 Frederick W. Bassett과 John Sietze Bergsma는 다른 사람의 ‘하체를 보다’ 는 성관계를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아내나 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그 사람의 하체를 범하였다는 표현으 로관용어적으로사용되는것에근거하여(렘20:17)함이노아의하체를본것은노아의아내, 즉함이 자기의 어머니와 성관계를 가졌고, 가나안은 그 결과로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Frederick W. Bassett, “Noah’s Nakedness and the Curse of Canaan: A Case of Incest?,” Vetus Testamentum 21–2 (1971): 232–237. John Sietze Bergsma, “Noah’s Nakedness and the Curse on Canaan (Genesis 9:20–27),”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24–1 (2005): 25–40.

29) Anthony J. Tomasino, “History Repeats itself: The Fall and Noah’s Drunkenness,” Vetus Testamentum 42–1 (1992): 128–130. 하박국 2: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것이라더러운욕이네영광을가리우리라.”

30) Derek Kidner, Genesis, 103–104.

31) Victor Hamilton, Genesis 1–17, 324. 해밀턴은 가나안의 저주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잘 정리하고있다. 첫째, 본문은원래함이었지만여호수아의가나안정복이후가나안으로읽게되었 다. 둘째, 원래두종류의본문전통이있었다. 하나는노아의아들이셈과함과야벳이고다른하 나에서노아의아들은셈과가나안과야벳이다. 편집자가편집과정에서실수를저질렀다. 셋째, 가나안이 실제적인 범죄자이거나 공범이었을 것이다. 넷째, 아버지가 받을 형벌을 자식에게 가 하는고대근동식눈에는눈이에는이의방식이다(lex talion).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04–307.

 

24-27절) 노아가 술이 깨어저 그의 둘째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일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낸 행동으로 인해서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결국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었다. 26절에서는 이제 구체적으로 셈의 종이 될 것을 말하고 있고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셔서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임을 또한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을 선포하신다. 

본문속에서 3번에 걸쳐서 가나안은 종이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25절은 종들의 종이 될 것을 선언하는데 이는 가장 천한 종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27절의 셈의 장막에 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야벳으로 하여금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글 성경은 전자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늬 특성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말하자면 가나안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셈은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 축복의 내용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는 것이다. 

종이라는 히브리어는 ‘에베드’인데 이는 동사 ‘아바드’에서 나온 단어로 앞서 땅을 경작하는이라는 표현속에 사용되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에서 가장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종의 히브리어는 ‘에베드’(עֶבֶד)이며, 동사는 ‘아바드’(עָבַד)이다. ‘아바드’는 창세기 2–4장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2:5에서 땅의 식물이 자라지 않는 이유를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고 할 때 ‘경작할’의 히브리어가 ‘아바드’이다. 그러나 이어서 3장에서는 선악과을 따먹은 결과로 징벌을 받은 인간이 그 결과로 땅을 ‘아바드’(עָבַד)하게 된다. 그리고 땅을 경작(עֹבֶד)하던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저주를 받은 가인에게 땅을 경작(עָבַד)해도 더 이상 땅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에베드’와 ‘아바드’가 창세기 9:25–27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면서 가나안은 셈의 ‘에베드’(עֶבֶד, 종)가 된다고 한다. ‘종이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주종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복과 지배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명기 28:47–48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저주를 내려 대적에게 정복당하고 그 결과로 노예로 섬기게 한다(cf. 예레미야 27장). 창세기 9:25–27도 가나안이 저주를 받고 종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 같은 차원에서 정복당하고 노예가 되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9:25–27의 축복과 저주는 창세기 3:15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창세기 3:15에서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을 공격하여 그 머리를 발아래 두고 있는 것처럼, 셈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발 아래에 두어 지배하게 된다. 둘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도 있다. 창세기 3:15에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창세기 9:25–27은 셈과 가나안의 이름을 밝힘으로 둘의 정체를 좀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10–311.

 

28-29절) 홍수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았고 950세에 죽었다. 

 

이미 밝힌 것처럼, 창세기 5장에 있는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계보는 하나의 패턴을 일관되게 따르고 있다.

  A. a가 x년에 b를 낳고,

  B. b를 낳은 후 y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며

  C. z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노아의 경우 창세기 5:32에서 A에 해당되는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는 말이 언급된 후 나머지 B와 C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홍수 기사가 대신 이어진다. 그러다가 창세기 9:28–29에서 마침내 B와 C에 해당되는 “홍수 이후 350년 살았고 향년 950세에 죽었더라”는 표현이 나온다. 노아의 패턴은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A를 창세기 5:32에 두고 B와 C를 창세기 9:28–29에 둠으로 홍수 기사 전체를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계보 속으로 흡수 소화시켜버렸다.33)

                  A : 노아홍수 : B, C (노아의패턴)

창세기 9:8–29의 노아의 패턴이 창세기 5장의 족보의 패턴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하나 있다. 창세기 5장의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y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는 표현이 있는데 반해 노아는 ‘홍수 후에 350년을 지내었고’고 끝나 버린다. 즉 노아가 자녀를 낳았다는 말이 없다. 결국 노아의 자녀는 셈과 함과 야벳 뿐이며, 이들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민족이 생겨난다.

29절에서 노아는 950살을 살고 죽었다고 한다. 노아는 홍수 이전의 장수의 축복인 900살 이상을 산 마지막 사람이다. 노아를 끝으로 홍수 이후를 살아간 사람은 더 이상 이렇게 오래 살지 못하며, 인간의 수명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이제 인간은 메시아 시대에 있을 영생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이런 형태의 장수를 꿈꿀 수 없게 되었다.

33) Kenneth Mathews, Genesis 1–11:26, 42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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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God said to Noah and to his sons with him, “Behold, zI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and your offspring after you, 10 and with every living creature that is with you, the birds, the livestock, and every beast of the earth with you, as many as came out of the ark; it is for every beast of the earth. 11 aI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that never again shall all flesh be cut off by the waters of the flood, and never again shall there be a flood to destroy the earth.” 12 And God said, b“This is the sign of the covenant that I make between me and you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is with you, for all future generations: 13 I have set cmy bow in the cloud, and it shall be a sign of the covenant between me and the earth. 14 When I bring clouds over the earth and the bow is seen in the clouds, 15 dI will remember my covenant that is between me and you and every living creature of all flesh. And the waters shall never again become a flood to destroy all flesh. 16 When the bow is in the clouds, I will see it and remember ethe everlasting covenant between God and every living creature of all flesh that is on the earth.” 17 God said to Noah, “This is the sign of the covenant that I have established between me and all flesh that is on the earth.”

z ch. 6:18; 8:20–22

a Isa. 54:9, 10

b ch. 17:11

c Ezek. 1:28; [Rev. 4:3; 10:1]

d [Lev. 26:42, 45; 1 Kgs. 8:23; Ezek. 16:60]

e ch. 17:7, 13, 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9:8–17.

 

 

하나님께서는 창 6:18에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것을 명령하시면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이 제단을 쌓고 나서 그 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창조시에 아담과 맺은 언약의 갱신이라고 볼 수 있다. 8-10절은 언약의 대상, 11절은 언약의 내용, 12-17절은 언약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 

 

8-10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울 것이다. 즉 방주에서 나온 모든 모든 것 즉 땅의 모든 짐승과 세울 것이다."

본절은 언약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언약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과 노아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과 모든 동물들이다. 동물들과 언약을 맺은 유일한 구절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인간에게 먹도록 하럭하셨지만 이 언약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언약의 대표자는 노아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고 있다. 

 

본문 9절은 ‘내 언약’이라고 말한다.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베리트’이다.  

노아의 언약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언약을 ‘나의 언약’(בְּרִיתִי. 브리티)이라고 한다. 창세기 17장의 나의 언약이 15장에서 이미 체결한 언약을 가리키는 것처럼, 창세기 9:8의 ‘나의 언약’도 같은 차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역사서와 선지서에서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로서 주로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을 가리킨다. 둘째는 사용된 동사가 ‘쿰’(קוּם, 세우다)이다. 언약 체결을 나타내는 동사는 주로 카라트(כָרַת 자르다, 언약을 체결하다)인데, 창세기 9:9에 사용된 동사는 쿰(קוּם)이다. 둠브렐(W. J. Dumbrell)에 의하면 언약을 처음 체결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카라트(כרַת)이며, 쿰(קוּם)은 이미 세워진 언약을 다시 세울 때 쓰는 용어이다.13) 이것은 창세기 17:7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9:9과 17:7은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동사도 둘 다 ‘나의 언약’(בּרִיתִי)과 쿰(קוּם)을 사용하고 있다.14) 그렇다면 노아 언약은 이미 체결된 언약의 갱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갱신하려는 원래 언약은 무엇일까? 둠브렐에 의하면 창세기 9:8–17의 언약의 원래 언약은 창세기 1–2장의 창조 언약이며, 노아 언약은 이 언약의 갱신이다. 호세아 6:7은 창세기 1–2장에 있는 아담의 창조 과정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일종의 언약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15) 호세아 6:7은 이스라엘의 언약 파기를 아담이 언약을 어긴 것에 비교하고 있다. 창세기 1–3장에서 언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언약 체결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창세기 9장이 창세기 1장을 거듭 반복하는 점을 고려하면 노아 언약을 창조 언약의 갱신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창세기 1:26–28과 창세기 9장을 비교해 보면 최소한 다음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하나님은 창세기 1:26–28에서 언약이란 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담의 창조와 함께 언약을 맺었고,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은 그 언약을 노아와 함께 갱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아 언약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모든 인간과 피조물의 대표로 언약을 체결한다. 창세기 9:9에서 언약 체결의 대상은 노아와 그의 아들과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방주에서 나온 모든 피조물들을 언약 체결의 대상으로 열거되고 있다. 하나님은 짐승들을 인간의 양식으로 주었지만 이들을 노아 언약의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6:18에서 하나님은 언약 체결의 당사자로 노아를 지목하며 노아를 이 언약의 대표로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노아를 모든 피조물을 대표한 제2의 아담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있다.

13) W. J. Dumbrell, Covenant and Creation (Grand Rapids: Baker, 1984), 20–33.

14) Gordon Wenham, Genesis 1–15, 194. Cf. 출애굽기6:4, 레위기26:9, 신명기8:18, 열왕기하 23:3, 예레미야 34:18.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창세기 9:9에서는 대명사 접미사가 복수형 ‘켐’(כֶם, 너희)이 사용된 반면에 창세기 17:7에서는 단수형 ‘카’(ךָ, 너)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Victor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1–17, 316. 해밀턴은 다시 세우는 언약의 원형은창세기6:18에서노아에게먼저말했던언약에대한약속이라고주장한다.

15) W. J. Dumbrell, “The Covenant with Noah,”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38–1 (1979): 1–9. 이사야24:5 “땅이또한그거민아래서더럽게되었으니이는그들이율법을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예레미야 33:20, 2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수 있을찐대.”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outh Hamilton, MA: Gordon–Conwell, 1993), 1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97–299.

 

 

11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다.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반복 강조하고 있다. 

 언약의 내용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시는 모든 생물을 물로,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라고 약속하신다. 

In a covenant God guarantees to all mankind blessings that come through Noah. He shows mercy, based on sacrifice (8:21), pointing forward ultimately to the mercy that comes through the sacrifice of Christ (Heb. 10: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635.

11절은 피조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는다는 언약의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9:1과 9:7에서 말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유사한 명제이며, 창세기 1:22과 28의 축복을 땅이 존재하는 동안 지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언약의 내용은 15절에서 다시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다. 12절에서 이 언약의 내용은 대대손손 영원에 이를 것이며, 16절에서는 언약 자체를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에게 한 약속을 노아 방주를 통해 살아남은 피조물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00.

 

12-17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족들, 모든 생물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거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구름속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시면 '내 언약’,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를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무지개를 바라보고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즉 기억의 주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혹 자들은 이때 무지개가 처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게 제한할 필요는 없다. 자연현상으로서의 무지개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언약의 증거로 사용하신 것이다. 

내 무지개( Ezek. 1:28; [Rev. 4:3; 10:1])

여러가지 언약들에는 각각의 증거들이 있다. 본문의 노아 언약에서는 무지개가 등장하고 아브라함 언약(창 17장)에서는 할례가, 시내산 언약에서는 안식일(출 31:12-17)이 그것이다. 

본문 12, 13, 17절에 언약의 증거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주체는 결국 하나님이시다. 노아 언약은 노아와 하나님께서 맺으신 것이지만 결국 이 노아언약의 내용을 9장으로 한정하느냐 아니면 8장 21절부터로 확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은 달라진다. 9:8-17로 한정해서 보면 노아 언약에서 노아에게 주어지는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거인 무지개를 보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9:1-7절의 내용으로 확장하면 ‘번성하라’, ‘피를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도 언약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고기를 양식으로 먹는 것과 사람의 피를 흘리면 죽음이 따른다는 징벌도 함께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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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to them, q“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rThe fear of you and the dread of you shall be upon every beast of the earth and upon every bird of the heavens, upon everything that creeps on the ground and all the fish of the sea. Into your hand they are delivered. sEvery moving thing that lives shall be food for you. And tas I gave you the green plants, I give you everything. But you shall not eat flesh with its ulife, that is, its blood. And for your lifeblood I will require a reckoning: vfrom every beast I will require it and wfrom man. From his fellow man I will require a reckoning for the life of man.

x“Whoever sheds the blood of man,

by man shall his blood be shed,

yfor God made man in his own image.

And you,1 be fruitful and multiply, increase greatly on the earth and multiply in it.”

q ch. 1:22, 28; 8:17

r [Ps. 8:6–8; James 3:7]

s Deut. 12:15; 1 Tim. 4:3, 4

t ch. 1:29

u Lev. 17:10, 11, 14; Deut. 12:16, 23; 1 Sam. 14:33; Acts 15:20, 29

v Ex. 21:28

w ch. 4:10, 11

x Ex. 21:12, 14; Lev. 24:17; Num. 35:31, 33; [Matt. 26:52; Rev. 13:10]

y ch. 1:27; 5:1; James 3:9

1 In Hebrew you is plural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9:1–7.

 

 

9장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노아와 세우시는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1절)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 복은 다음과 같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내용은 앞서 창 1:22과 28절에서 이미 베푸신 복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복은 이후 7절에서도 반복된다. 

또한 이 축복은 앞선 8:17과도 비교된다. 8장에서는 피조물 전체를 대상으로 축복을 하고 있지만 9장은 인간에게 그 대상을 한정시킨다. 9장의 표현은 노아가 아담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제2의 아담으로 우주적 차원에서 언약의 대표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신학에서 이를 노아 언약이라고 부른다. 

(창 8:17, 개정)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피조물들을 통해 새 창조의 장을 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의지는 고대 근동 신화와 비교할 때 놀랍기 짝이 없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신들은 인간이 만든 소음 때문에 인류에게 가뭄과 전염병을 보내고 마침내 홍수를 보내어 멸망시키려 하였다. 홍수 이후에도 홍수를 보낸 신은 인간이 살아남은 것을 알고 분노하는 가운데, 다른 신들과 타협하여 인류의 번성을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땅 위의 인간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한다.1)

Instead of your imposing a flood, let a lion come up and diminish the people.… Until now Ut–napishtim was mortal, but henceforth Ut–napishtim and his woman shall be as we gods are. Ut–napishtim shall dwell far off at the mouth of the rivers.

신들은 인간의 수적 증가를 억제하는 대신에 홍수의 영웅인 우트–나피쉬팀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고 강의 입구로 표현된 낙원에 신들처럼 살게 해준다. 그러나 노아 홍수가 끝나자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피조물들을 대하고 있다. 창세기 9:1은 하나님이 첫 창조에서 즉 창세기 1:22, 28에서 피조물들에게 베푼 축복을 반복하고 있다. 창세기 9:1의 메시지는 창세기 8:17에서도 나오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창세기 8:17은 피조물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창세기 9:1은 인간에게 그 대상을 한정시키고 있다. 창세기 8:17에는 축복이란 말이 없지만, 창세기 9:1은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다. 창세기 9:1의 표현은 노아가 아담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제2의 아담으로서 우주적 차원의 언약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1–9:1에서 ‘축복하다’는 최소한 창세기 2:3을 제외하고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를 동반한다. 하지만 창세기 9:1은 창세기 1:28의 인간에게 준 축복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창세기 1:28은 남자와 여자가 축복의 대상이지만, 창세기 9:1은 노아와 그의 아들에게 축복하고 있다. 이것은 여자가 없으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남자에게만 축복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9:1의 의도는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재창조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2) 특이하게도 노아 홍수 이후 노아는 350년을 더 살지만, 창세기 5장에 나오는 그의 조상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자녀를 낳았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고 번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창세기 10장은 보여준다. 특히 창세기 11:10에 의하면 셈은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는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창세기 9:1은 방주 이후 노아의 후손들을 통한 재창조의 축복이다. 창세기 9:1의 내용은 9:7에서 반복하면서 9:1–7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클루지오(inclusion)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재창조의 축복을 강조하고 있다.3)

1)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115–116. 35절에있는아트라하시스서사시에 서는닌투와엔키신이엔릴의분노를가라앉히기위해불임과유산으로아이를갖지못하게악마 를만든다.

In addition let there be one–third of the people, Among the people the woman who gives birth yet does not give birth (successfully); Let ther be the pasittu–demon among the people, to snatch the baby form its mother’s lap. Establish ugbabtu, entu, egisitu–women. They shall be taboo, and thus control childbirth.

2) W. J. Dumbrell, Covenant & Creation: A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Covenants (Grand Rapids: Baker, 1984), 27. 스킨너는 이 축복에서 여자와 동물이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John Skinner, Genesis (Edinburgh: T. & T. Clark, 1976), 169.

3)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1993), 15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88–290.

 

2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너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임할 것이다. 너희의 손에 그들이 주어질 것이다. 

노아의 홍수이후에 놀라운 변화는 피조 세계와 인간사이에 생겨났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들을 다스렸다. 에덴에서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문 2절을 통해서 분명한 변화가 보여지는데 그것은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것들과 물고기 까지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로 인한 타락의 결과인지 홍수의 결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노아 언약의 내용을 통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4절) 모든 살아있는 움직이는 것은 너희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푸른 채소를 준것과 같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지만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와 함께 먹지 말라. 

3절은 육식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다. 이미 죽은 짐승이 아니라 산 짐승을 죽여 양식으로 삼게 하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인간이 육식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벨과 야발이 목축을 했고 이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것을 보면 육식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본문에서 육식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노아 홍수 이후의 재창조의 사역을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창 1:26-28 생육하고 땅에 충만 - 다스림- 식물 양식

- 창 9:1-7 생육하고 땅에 충만 - 다스림- 동물 양식

창세기 1:28–29에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한 후 식물을 양식으로 준 것에 대비하여 창세기 9:1–3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짐승을 또 다른 양식으로 줌으로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 인간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짐승을 인간의 식용으로 주었다고 해서 사람이 짐승의 생명을 경시해도 된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짐승의 생사를 무작정 사람의 손에 붙여버린 것이 아니다. 식물을 식용으로 주었을 때와는 달리 짐승을 식용으로 허락하면서 중요한 제약이 뒤따른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먹지 않으므로 짐승의 생명을 존중하라고 한다.6)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가 생명을 대표하며, 동물의 생명을 하나님의 소유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인 짐승의 피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붇도록 시켰다. ‘피채 먹지말라’는 창세기 2:17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창세기 1–11장에 있는 유일한 금지 명령이다. “피채 먹지 말라”에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6) 레위기 17:10–16, 신명기 12:23–28. Sarna, Genesis, 61. 피조물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출애 굽기 23:10–1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면서 소와 나귀도 쉬게 하라고 하며, 안식년 동안 거두지 않은 곡식과 열매를 들짐승들이 먹게 하라고 하였다. 짐승들을 식용으로 주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짐승들의 생명까지도 기억하시고 생각하 시고 배려하고 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John Olley, “Mixed Blessings for Animals: The Contrasts of Genesis 9,” The Earth Story in Genesis, 130–13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92.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서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다. 에덴 동산과의 상황과는 달리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 되었고 그래서 음식을 얻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더욱 그런 문제가 심해졌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신다. 지금도 전 세계에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이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고기를 허락하실 때 두가지의 제한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죽은 동물이 아니라 산 동물을 먹으라고 하셨고 이 때 그 생명되는 피는 먹어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고기를 먹기전에 그 피를 빼는 것은 그 동물의 생명력을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그 생명을 취한 것이며 하나님의 초대 손님으로서 그분과 함께 식탁을 한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구에 식사전에 축복의 말이나 기도를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5-6절) 내가 너희의 생명의 피를 요구할 것이다. 모든 짐승으로부터 내가 요구하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사람의 형제들로부터 내가 사람의 생명을 요구할 것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본문의 생명의 피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사람의 피이다. 본문속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내가 찾을 것이다.(요구할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내가 찾을 것이다’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에드로쉬’(אֶדְרֹ֔שׁ)를 세 번 반복 사용하여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8) 짐승과는 달리 사람을 말할 때는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라고 하였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처럼 친 형제나 친척에 의한 살인을 정죄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짐승과 대비하여 형제라고 가깝고 친근하게 표현한 것이다. 형제나 다름없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 심지어 짐승이 사람을 죽인 경우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짐승을 죽이겠다고 하신다.9) 비록 사리 판단이 되지 않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해치면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21:28–32에서는 짐승이 사람을 죽게 하면, 그 짐승을 돌로 쳐 죽이게 하였다.

8) Lloyd M. Barre, “The Poetic Structure of Genesis 9:5,” Zeitschrift fü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96–1 (1984): 101–104.

9) Terence E. Fretheim, The Book of Genesis, 399. Victor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1–17, 314.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402–40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93–294.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제사를 드릴때 동물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서 쏟아 버리지만 사람의 피는 쏟아지면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그 유일한 이유는 다른 생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함부로 대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해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다. 

창세기 9:6에서 사람의 피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팍(שָׁפַךְ)흘리다, 쏟다)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 동사가 피와 관련하여 사용된 경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제사로 드린 짐승의 피를 번제단 옆에 쏟아 버리는 것, 둘째, 짐승을 양식으로 취할 때 피를 먹지 않고 땅에 쏟아 버리는 것(신 12:16, 15:23). 둘 사이의 공통점은 짐승의 생명을 취하더라도 그 피는 땅에 쏟아 버려야 한다. 이를 6절과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짐승의 생명을 존중하여 피를 땅에 흘려 버렸는데 반하여 인간의 피는 땅에 흘려서도 안 된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 가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땅을 더럽히게 된다고 한다.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시 106:38).

사람의 피를 흘린 사람이 피 흘림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반면 창세기 9:6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되는 유일한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형상은 그 소유자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감안하면, 창세기 9:6은 하나님이 인간의 피 흘림을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짓는 심각한 죄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재판관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살인한 자를 공적으로 징벌해야 한다. ‘바아담’(בָּֽאָדָ֖ם)을 개인을 이해하여 개인적인 보복이 허용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10)

10)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404–406. Johan Lust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사람에 의해 살인자를 죽임으로 또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를 죽이는 것은 모순이라고 한다. 그는 이 모순을 해결하고 사형제도 폐지 를옹호하기위해 ‘베아담’(בְאָדָם)의전치사 ‘베’(בְ)를by(–에의해서)가아니라because of(–때문에)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피를 흘리게될것이다.” Johan Lust, “For Man shall his Blood be Shed” Gen 9:6 in Hebrew and in Greek,” Tradition of the Text: Studies offered to Dominique Barthelemy in Celebration of his 70th Birthday, eds. Gerard J. Norton and Stephen Pisano (Fribourg, Switzerland: Universitätsverlag, 1991), 91–102.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94–295.

 

7절) 본절은 앞선 1절의 반복이다. 그런데 7절에서는 번성하다라는 단어, '레부’가 두번 반복되어 사용된다. 이를 번성할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번성하다라는 단어 ‘레부'와 창세기 1:28의 다스리다라는 표현 ‘레두’가 매우 비슷해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레두’의 오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다시 세우시는 것으로 그것을 다스릴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 된다. 

 

노아 언약은 분명한 두가지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첫째로 앞선 문화명령이 피조물들과의 긍정적인 관계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본 명령은 피조물들과의 부정적인 관계,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로 인간에게 육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기를 피째 먹지 말것을 명하신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아가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것을, 그리고 그 피를 흘렸을때 ‘생명은 생명으로’의 원리, 동해 복수법이 적용된다. 이는 매우 무자비한 표현처럼 보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이상의 상해를 금지하고 있는것이다. 앞서 라멕은 77배의 상해를 공언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아의 홍수는 피조 세계에 대한 심판, 파괴임과 동시에 새창조로 나아간다. 노아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메시야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약속의 씨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노아 언약은 홍수이후 새로운 세계에 주어진 새로운 질서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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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Then Noah built an altar to the Lord and took some of every clean animal and some of every clean bi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on the altar. 21 And when the Lord smelled kthe pleasing aroma, the Lord said in his heart, “I will never again lcurse1 the ground because of man, for mthe intention of man’s heart is evil from his youth. nNeither will I ever again strike down every living creature as I have done. 22 oWhile the earth remains, seedtime and harvest, cold and heat, summer and winter, pday and night, shall not cease.”

k Ex. 29:18, 25, 41; Lev. 1:9, 13, 17; See Ezek. 16:19; 20:41; 2 Cor. 2:15; Eph. 5:2; Phil. 4:18

l ch. 3:17; 6:17

1 Or dishonor

m ch. 6:5; Ps. 58:3; Rom. 1:21; [Matt. 15:19]

n ch. 9:11, 15; Isa. 54:9

o Jer. 5:24

p Jer. 33:20, 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8:20–22.

 

 

 

20절) 노아가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처음 한 행동은 바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 번제는 홍수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키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속죄이 표현이었다. 또한 이후에 자신들은 다시금 안전하게 지키실 것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It is appropriate that the offerings he presents to Yahweh are holocausts or “whole burnt offerings” (ʿōlōṯ). It is probable that this is the oldest and most frequent of all the OT sacrifices. A continual burnt offering (ʿōlaṯ tāmîḏ) was made twice daily, morning and evening (Exod. 29:38–42). Leviticus and Numbers mandate this offering after some kind of crisis, such as after childbirth (Lev. 12:6–8), after bodily discharges (Lev. 15:14–15, 29–30), and after defilement during a Nazirite vow (Num. 6:10–11). The priestly legislation attaches an expiatory function to it (Lev. 1:4; 9:7; 14:20; cf. 1 Sam. 13:12; Job 1:5; 42:8). But whenever the whole burnt offering is presented, the motive is joyful, indicated by the fact that this holocaust is called a freewill offering (Lev. 22:17–25; Num. 15:1–11). It is anything but dour. In addition to expiation, this sacrifice serves at least two other functions. It is connected both with petition (1 Sam. 13:12) and with thanksgiving (Lev. 22:17–25; Num. 15:1–11). As such the whole burnt offering is “all-encompassing; it answers to all the emotional needs of the worshiper.”2

2 J. Milgrom, “Sacrifice and Offering, OT,” IDBS, p. 769.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7–308.

 

21-22절) 여호와께서 노아의 번제로 그 향기( Ex. 29:18, 25, 41; Lev. 1:9, 13, 17; See Ezek. 16:19; 20:41; 2 Cor. 2:15; Eph. 5:2; Phil. 4:18)를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이제 다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 땅이 존재하는 동안에 씨뿌림과 추수,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번제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레 1:4, 9, 13, 17) 한글에서 그 향기로 번역된 표현은 영어로 the pleasing aroma로 그 기쁘시게 하는 향기라고 할 수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레아흐 니호아흐’이다. 본문이 ‘니호아흐’라는 표현은 위로, 평온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노아(노아흐)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다.(창 5:29) 게다가 이 단어는 진정시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곧 번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홍수로 인해서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셔서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땅을 다시 저주하지 않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홍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노아가 저주받은 땅으로 인해 받는 고통으로부터 위로를 가져올 것이라는 라멕의 약속의 성취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앞서 3:17-18절의 땅의 저주가 여전히 유효하지만 노아는 땅으로부터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9:20)

 

저주와 관련해서 3:17에서는 히브리어 동사 ‘아루르’가 사용되었고 8:21에서는 ‘칼랄’이 사용되었다. 

 

22절은 자연의 세계에 있어서 예측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 홍수 심판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예측할 수 없는 재앙으로 임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으로 계절의 주기가 예측가능하게 주기적으로 일어날 것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악하고 불규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세계에 그 주기의 규칙성을 약속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는것과 그분이 행하시겠다고 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이다.  

 

20–22절은 새로운 세상에서 인간은 전혀 새로워지지 않고 이전처럼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태생적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물로 세상의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않겠다며 은혜의 선포를 한다. 새로운 세상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유지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데에 노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자원하는 번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6–9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서 지엽적인 일들 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고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로 끝을 내고 다음 사건이나 행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창세기 6–9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행동하시지 노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8:20에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원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다. 창세기 8:20의 제단은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번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처음 행한 것이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었다. 창세기 4장에서 에덴 동산에서 나온 인간의 첫 활동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던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갈등을 초래한 것과는 달리,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노아가 바친 제물은 21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한 속죄의 용도로 번제를 드린 것이다. 노아는 자기 죄 때문에 속죄 제물 드린 것이 아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했던 것처럼 노아는 하나님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원하여 제사장의 역할을 취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렸다.

노아가 바친 제물의 성격은 큰 논쟁거리이다. 전통적으로 노아의 제물은 속죄의 성격을 지닌다고 여겼다. 하지만 카슈토는 노아의 제물은 감사제의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26) 그에 의하면, 노아 홍수는 인간의 죄악을 다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속죄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제물은 고대 근동의 종교들처럼 신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마술적 성격을 지녔다고 주장한다.27) 인간이 마술로 하나님을 조정하여 더 이상 진노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술적으로 보기에는 창세기 8:22의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항구적인 자연 법칙과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아의 제물에서 감사제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8:21에 있는 피조 세계를 징벌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의 제물이 속죄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26) U. Cassuto, Genesis II: From Noah to Abraham (Jerusalem: Magnes Press, 1997), 117.

27)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30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80–28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마치 잘못된 아이의 행동(동생을 때리거나 거짓말을 하는등)을 교정하기 위해서 아이를 체벌하는 것이나 살인을 막기 위해서 살인을 집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지은 사람과 그를 처벌하는 사람의 행동의 차이점이 과연 절제와 책임속에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효과적인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를 체벌하면서 절제되지 않은 자신의 난폭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을 훈육이 아니라 학대가 된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집행하는 공권력의 경우에도 이것이 공정한 규율 안에서 절제와 책임 속에 집행되지 않으면 독재의 씨앗이 된다. 그러니까 적법한 절차를 통하지 않고 체포, 구금, 사형을 집행한다면 이는 폭정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만연한 악을 바라보시면서 이러한 절제와 책임 가운데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홍수는 우리의 편에서 볼때 엄청난 재앙임에 틀림없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제아래 있으며 효과적으로 노아를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전세계적, 혹은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인 혼돈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 속에 있는 개인은 이 혼돈의 이유를 당시에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예) 찰스 콜슨 : 인격과 청렴을 가훈으로 삼는 가정에서 태어나 40세가 되기 전체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강한 충성심과 탁월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청렴성을 잃어간다. 그는 공화당의 대통령 임기 연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가다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서 민주당 본부를 도창한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복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회심하게 되고 교도소 선교회를 세워 사역을 시작한다. 그는 국가적인 혼돈의 사건의 중심에서 개인의 혼돈을 경험하고 그 혼돈으로부터 삶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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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In the six hundred and first year, in the first month, the first day of the month, the waters were dried from off the earth. And Noah removed the covering of the ark and looked, and behold, the face of the ground was dry. 14 In the second month, on the twenty-seventh day of the month, the earth had dried out. 15 Then God said to Noah, 16 “Go out from the ark, iyou and your wife, and your sons and your sons’ wives with you. 17 Bring out with you every living thing that is with you of all flesh—birds and animals and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that they may swarm on the earth, and jbe fruitful and multiply on the earth.” 18 So Noah went out, and his sons and his wife and his sons’ wives with him. 19 Every beast, every creeping thing, and every bird, every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went out by families from the ark.

i ch. 7:13

j ch. 1:22, 28; 9: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8:13–19.

 

 

13-14절) 노아 601년 1월 1일에 땅위의 물이 걷혔다. 이에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고 이어 둘째달 27일에 땅이 말랐다. 

본문에서 1월 1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날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방주 외부의 지면에서 물이 걷혔지만 노아는 쉽사리 방주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달 17일 까지 노아의 방주에서 기다린다. 그가 기다린 것은 바로 15절의 하나님의 말씀, 사인이었다. 

13절에서 노아는 감탄사 힌네’(be hold)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와우 보아라 지면에 물이 걷혔다’라는 것이다. 

 

13절의 물이 걷혔다라는 표현은 ‘하랍’이고 14절의 땅이 말랐다라는 표현은 ‘야바스’이다. ‘하랍’은 물기가 없는 이라는 의미이고 ‘야바스’를 물이 완전히 없는, 마른의 의미이다. 이 표현은 창 1장의 마른 땅(야바사)에서 사용된 것으로 홍수로 완전히 파괴된 땅에 이제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Three comparisons may be made between these two verses. First, each uses a different verb for “to dry up.” In v. 13 the verb is ḥāraḇ, which means “to be free of moisture.” In v. 14 it is yāḇaš, which refers here to the complete absence of waters. This verb is related to the noun “dry land” (yabbāšá) used in Gen. 1. Creation, destroyed in the Flood, is now resurfacing. The world of Gen. 1 that had recently been overturned is now righting itself. It is only logical that the action contained in ḥāraḇ precedes that contained in yāḇaš. To reverse them would be unusual.

Second, both verses begin with different datelines: v. 13—year 601, month one, day one (i.e., New Year’s Day); v. 14—year 601, month two, day twenty-seven. If one compares this last date given in the Flood event with the first date given (7:11), an interesting point appears:

flood begins (7:11): 17th day/2nd month/600th year of Noah

flood has gone (8:14: 27th day/2nd month/601st year of Noah

The Flood “lasted twelve months and eleven days, the exact period required to equate the year of twelve lunar months, 354 days, with the solar year of 365 days.”7 The Flood lasted one solar year.

The third comparison to note in these two verses is the distinct perspective of each. V. 13 records the drying of the ground from Noah’s observation—“he looked.” V. 14 records the same result, but here it is an objective reporting statement. We have encountered the same dual reporting of the Flood’s beginning: objective statement about earth’s corruption (6:11), followed by God’s personal observation of corruption in the earth (6:12). Whenever God and the narrator report or observe, or whenever Noah and the narrator report or observe, both parties are in agreement.

7 R. de Vaux, Ancient Israel, 1:188–89. This does not mean, for de Vaux, that a truly solar year ever prevailed in Israel. The reference throughout the Flood story to months by ordinal numbers (“first, second,” etc.) would argue more for a lunar calendar. The inner coherence of the Flood dates has been established by E. Nielsen, Oral Tradition, SBT 1/11 (Chicago: Allenson, 1954), pp. 93ff. N. P. Lemche (“The Chronology in the Story of the Flood,” JSOT 18 [1980] 52–62) sees only incoherence, and attributes the confusion to the redactor of J and P, with his penchant for advancing the dates of P.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5–306.

 

15-19절) 홍수가 시작된지 370일만에, 노아 600년 2월 17일에 시작된 홍수로부터 그가 방주에서 내린 것은 601년 2월 27일 이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노아와 네 아내, 너의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와라. 또한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고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은 방주에서 종류대로 나왔다. 

본절에서 나오다라는 표현이 모두 다른 용법으로 4번 반복된다. 이는 완전히 방주에서 나왔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무언가를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면 이를 떠벌리며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진짜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본문속에서 노아는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순종할 뿐이다. 그리고 그 순종이 놀라운 구원을 이루었다. 

- Noah already knows that the earth is prepared for reoccupation, for the dove has not returned. Why not just leave the ark? Evidently, when Noah’s future is at stake, he subordinates his own experiments, however noble and adroit, to a message from God.

Once again, in vv. 15–19, because Noah rather than Yahweh is the thematic participant, it is God (ʾĕlōhîm) who speaks to Noah. And God speaks only to Noah, never to his family or to the entourage in the ark. Thus God will release Noah, and Noah will release the family and the animals.

Four times in these verses the verb yāṣāʾ occurs, and each time in a different form: (1) ṣēʾ, Qal imperative, v. 16; (2) hōṣēʾ, Hiphil imperative, v. 17; (3) wayyēṣēʾ, Qal imperfect form with waw consecutive, v. 18; (4) yāṣeʾû, Qal perfect form, v. 19. By highlighting this particular verb, the author emphasizes the departure from the ark. Noah and his companions are not consigned to an ark existence. The ark is only a shelter, not a domicile.

Once again, as in 6:13–22 and 7:1–5, the sequence is a divine speech followed by the observation that Noah did what he was told to do. Quietly he implements the message from God. Noah has yet to speak, to utter a word to anyone. He is a doer more than he is a talker.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7.

 

17절) 노아와 방주의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는 앞서 1장에 등장하는 문화 명령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동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명령을 주셨었는데 이제 노아 홍수 심판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도 동일하게 이 명령을 내리고 계신다.

 

multiply … be fruitful and increase. See 1:22, 28, where God gave this command to animals and humans after creating them. God repeats it here as a new world begins, with the land having been cleansed from the defilement caused by the spilling of blood due to human violence.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37.

 

16–17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 밖으로 나오게 하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의 가족과 모든 짐승들은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로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노아 방주를 통해 살아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리라고 축복하였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전통과는 크게 다르다. 아트라하시스에 의하면 대홍수 재앙을 통해 인류 멸망을 주도했던 전쟁 신 엘릴은 홍수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격분하면서 인간을 도운 신들과 살아남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23)

In addition let there be one–third of the people. Among the people the woman who gives birth yet does not give birth (successfully). Let there be the pasittu–demon among the people, to snatch the baby from its mother’s lap. Establish ugbabtu, entu, egisitu–women: They shall be taboo, and thus control childbirth.

아트라하시스에서 대홍수의 결론은 신들이 인류의 수적인 번영을 차단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으로 유산과 유아 사망을 야기시키며, 악마를 시켜 엄마의 무릎에서 아기를 빼앗아 가게 하는 구조적인 재앙을 도입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 살아남은 모든 피조물들 바로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게 되라고 선언하고 있다. 창세기 1:22에서 물고기와 새 그리고 인간에게 했던 축복을 창세기 8장에서는 물고기를 제외한 모든 새와 짐승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노아 방주에서 나온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이 제2의 천지창조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매튜(Kenneth A. Mathews)가 지적하는 것처럼 창세기 8:17뿐만 아니라 창세기 8장 전체에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상기시키는 메시지로 가득하다.24)

23)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35.

24)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7–278.

 

노아의 방주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준비하시고 비를 보내시고 이제 마르게 하신 후에 노아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방주에서 이제 나오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순종하는 노아에게도 일말의 걱정과 의심이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비로 인한 홍수로 과연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속에서 드디어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그 비를 거두어 가시고 땅이 마른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노아의 마음은 감격적이었다. 하지만 방주밖의 세상은 어땠을까? 에덴동산과 같이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 아니라 철저히 파괴된 세상이었다. 모든 기식있는 동물들과 사람들의 죽음이 넘쳐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와서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이제 수고하지 않으면 양식을 얻을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땅에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노아의 가족과 방주안에 타고 있는 동물들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하신다. 이제 그들로 나오게 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아는 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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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end of forty days Noah opened the window of the ark that he had made and sent forth a raven. It went to and fro until 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the earth. Then he sent forth a dove from him, to see if the waters had subsided from the face of the ground. But the dove found no place to set her foot, and she returned to him to the ark, for the waters were still 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So he put out his hand and took her and brought her into the ark with him. 10 He waited another seven days, and again he sent forth the dove out of the ark. 11 And the dove came back to him in the evening, and behold, in her mouth was a freshly plucked olive leaf. So Noah knew that the waters had subsided from the earth. 12 Then he waited another seven days and sent forth the dove, and she did not return to him anymor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8:6–12.

 

 

6-12절)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지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들을 날려 보내 땅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려고 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놓았는데 까마귀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까마귀가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는지 아니면 돌아오지 않았는지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이어서 비둘기를 세번에 걸쳐서 날려 보낸다. 첫번째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 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알려고 했으나 온 지면에 물이 아직 있어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는데 이때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안으로 받아들였다. 이어 7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았는데 저녁때에 비둘기가 노아에게로 돌아올 때 그 입에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 이에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줄 알았다. 하지만 신중한 노아는 바로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후 7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고 그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본문의 모습속에 노아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 배안의 가족들과 모든 동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땅의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성급하게 내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서 땅의 상태가 어떠한지, 내리기에 적합한지를 확인하고 자 한 것이다. 

One gets a strong impression that Noah does not wish to leave the ark precipitately. He wants to make sure that all is safe before he disembarks. Thus it is not the side door that he opens (6:16), but a hatch (ḥallôn), presumably on the ark’s roof or side. It is Noah’s responsibility to ascertain whether the land is sufficiently dry so that he and the others may leave the ark. But the actual moment of departure awaits God’s command (8:15–17). The forty days can refer only to the period of time that Noah waited from the time the peaks of the mountains became visible (v. 5) until he sent out the birds. Perhaps Noah thought that such a period would give even more time for more of the submerged earth to reappear.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2–303.

 

과거 교부들은 까마귀는 자신을 찾는 악한 자이고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것을 찾는 악한 자라고 영해했다. 유대인들에게 비둘기는 희고 정결한 새로 상징되고 까마귀는 부패한 시체를 먹는 검고 부정한 새로 상징된다. 하지만 본문속에서 까마귀는 그 임무에 실패했고 비둘기는 성공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7절 본문은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했다고 말하고 있다.

 

7-12절에 내놓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살라’가 5번 사용된다. 7, 8, 10, 12절에서는 Qal형으로 내놓다(to send)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9절에서는 Piel형으로 손을 내밀다(to stretch)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Qal형은 단순 능동, Piel형은 강조 능동의 패턴이다. 히브리어 ‘살라’가 9절에서 Qal형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명을 위해 내보내지는 것으로 돌아올것을 기대하고 내보내는 것을 의미할때 사용된다.(민 13:3, 수 2:1) 하지만 Piel형은 돌아올 것을 전제로하지 않고 내보내지는 것을 의미한다.(창 3:23) 

지금까지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나 누구와 어떤 동물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낼지, 언제 방주에 들어가고 홍수가 임하는지를 알려주셨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언제 다시 땅에 거주 가능한지를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 8:15에 가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서 땅을 정탐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장인인 이드로로부터 재판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듣는다.(출 18) 여호수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내어 보고를 받는다. 이러한 행동이 믿음없는 행동인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과 계시를 받으면서도 인간적인 충고와 노력을 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아의 방주는 항해에 적합한 배가 아니라 안정성을 목적으로 한 배였다. 따라서 그 배안에는 천정의 창과 옆으로 난 몇개의 문밖에 없었다. 엄청난 홍수 속에서 방향을 확인할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약 이 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전문적인 항해사들이 아니었고 날씨를 분간할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 방주에 탑승한 이들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In order to determine how suitable the ground was for habitation, Noah sent out first a raven, and then a dove (the latter 3 times, vv. 8, 10, 12). released. Every time Noah sends forth one of these two birds the Hebrew uses the Piel of šālaḥ (e.g., v. 7, wayyešallaḥ). This use contrasts with the Qal of šālaḥ used in v. 9 to refer to Noah’s “stretching out” his hand to retrieve the dove. Now, at many places in the OT the Qal and Piel of this verb seem to be interchangeable. But sometimes the Qal means to send forth on a mission, with the expectation that those sent will return. Thus Moses (Num. 13:3) and Joshua (Josh. 2:1) “sent” (šālaḥ, Qal) the spies who will return with the needed information. The Piel of šālaḥ may mean to send away, to banish with no possibility of returning, as in Gen. 3:23: “Yahweh sent him forth [wayyešalleḥēhû] from the garden of Eden.” Applied to 7:7–12 the meaning would be that Noah does not send these birds forth on a trial run. He does not expect them to return to their nest in the ark.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Noah sends forth birds in order to determine the conditions on the earth. Up until this point Noah has received all his information from God. God informed him about the corruption in the earth. God told him to build an ark and what to take into that ark. God briefed him about the impending storm.

But God does not tell Noah when the ground is habitable again. Indeed, all revelation from God to Noah is halted once Noah is locked inside the ark—until the announcement in 8:15. He who had received direct revelation from God must now resort to ornithology (or augury) for further data. The Creator speaks to Noah, but so does the creature. Moses receives direct revelations from God, but it is his father-in-law who gives him the information about the best and most efficient way to administer juridical matters (Exod. 18). Joshua receives a direct promise from God that he will be given all the land (Josh. 1), yet he still sends spies to reconnoiter Jericho and then to report back to him (Josh. 2).

Earlier we noted that Noah takes no navigational equipment or sailors aboard as did his counterparts in the mythical flood stories of Mesopotamia. The reason for this omission is deliberate. It allows the biblical record to testify to the effect that if Noah is saved from drowning it will be only because of the grace of God. He has no professional crew with him who, when they put their skills together, will be able to weather this storm.

Still, there is an implicit reference to navigational equipment on the ark—the window (for reading the stars) and the birds (homing pigeons who help find directions). Thus Noah’s releasing of the birds should be seen as a reflection of actual navigational practice, rather than as a bit of folkloristic coloring.4

4 “If the ancients sailed the seven seas before the age of literacy, they must have had a science and technology that gave them their capabilities. And if they lacked modern methods of science and instrumentation, they had other methods that enabled them to score their successes. A cage full of homing pigeons is not a bad method of direction finding. If it sounds quaint, it is only because we have devised methods more to our liking, but not necessarily better in all circumstances even today” (C. H. Gordon, Before Columbus [New York: Crown, 1971], p. 7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3–304.

 

비둘기는 쉴 장소(마노아)를 찾지 못해 노아(쉼이라는 의미)에게로 돌아온다. 쉴 곳을 찾지 못한 비둘기가 노아에게 돌아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두번째 비둘기가 돌아올 때 그 잎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왔다. 원문에는 감탄사 ‘힌네’(보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감람나무는 생명이 기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징조이다. 감람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으로 미와 풍요를 상징했으며 실제로 기름을 생산했고 이 기름은 선정의 등대를 밝히고 성직에 임명할때 사용되기도 했다. 

홍수로 모든 것이 쓸려간 이 땅에 ‘루아흐’ 하나님의 영, 바람이 임하고(8:1) 이제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문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와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은 갈대 배가 물 위에 떠 다니는 동안 배의 문을 열고 땅을 뒤덮고 있는 물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이에 반해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연 것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땅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노아가 멸망 당한 세상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그들을 위해 울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노아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방주를 떠나지 않는다. 땅의 형편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보내는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노아는 자신과 가족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달려있는 만큼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있다.15)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냈다. 방주를 떠난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왕래하였지만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피조물들이 기다리던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16) 결국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서는 물의 감소 여부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둘기를 세 번 내어 보낸다. 첫 외출에서 비둘기는 접족하여 쉴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온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은 신소리(wordplay)를 도입하고 있다. 비둘기는 쉴 장소 ‘마노아’(מָנוֹחַ)를 찾지 못해 이름에 쉼의 뜻을 가진 노아(נֹחַ)에게 돌아 온다. 비둘기는 방주의 창을 통해 스스로 날아 들어 올 수 있었을 것인데, 노아가 내민 손에 앉아 방주 안으로 들어 온다. 쉴 자리를 찾지 못한 비둘기를 맞아 들이는 노아의 모습은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있어야 할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림이다.17) 희고 정결한 새인 비둘기와는 달리 검고 부정한 새인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였지만 방주에 들어 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창세기 8:6–12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서로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18)

칠일 후 둘째 외출에서 비둘기는 저녁 때에 돌아 온다. 이것은 비둘기가 쉴만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방주로부터 제법 멀리까지 날아 다녔음을 보여준다.19) 그리고 비둘기는 돌아 올 때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온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은 니무쉬 산에서 7일을 지낸 후 비둘기, 참새 그리고 까마귀 순으로 배 밖으로 내어 보내어 땅의 형편을 확인한다. 비둘기와 참새는 갈대 배로 돌아 왔지만, 마지막으로 내어 보낸 까마귀는 물이 감해지는 것을 보고 먹이를 먹으며 배회하다가 우트나피스팀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에 우트나피스팀은 배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사방으로 내어 보낸다.20)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우트나피스팀이 보낸 새들이 지구에 생명체가 다시 나타났다는 희소식을 가져 오지 않는다. 반면에 노아 홍수에서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온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는 그 자체로 새로운 시작의 징조였다. 뿐만 아니라 감람나무는 사시사철 크고 푸른 잎 때문에 미와 풍요를 상징하였다.21) 이에 더해 감람나무에서 감람 기름을 생산하였고, 이 기름은 성전의 일곱 등대를 밝혔으며, 성직을 임명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감람 나무 새 잎사귀를 비둘기가 물고 온 것은 방주에 탄 모든 사람과 동물들에게 새 시대 새 창조에 대한 밝은 희망을 품게 만들고, 기쁨의 함성으로 방주를 가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8:11은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표현 앞에 감탄사 ‘힌네’(הִנֵּה, 보라)를 두었다. 홍수로 완전히 파괴된 땅에 하나님의 ‘루아흐’(영, 바람)가 다시 임하고(8:1), 부정한 새의 범주에 속하는 까마귀는 떠나고(8:7),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문 비둘기가 방주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은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찬 그림이다.

다시 칠일 후에 비둘기를 내어 보내자 비둘기는 돌아 오지 않았다. 이것은 땅 위의 물이 다 걷혀 비둘기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이 까마귀가 떠나가자 즉시 모든 짐승들을 떠나 보내고 자신도 갈대 배에서 나온다. 하지만 노아는 까마귀를 한 차례 그리고 비둘기를 세 차례나 내어 보내 땅의 상태를 신중하게 확인하였지만 방주에서 즉시 나오지 않았다. 오랜 방주 생활에 땅이 그리웠겠지만 노아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225일을 더 방주 안에 계속 머물며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15)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302–303.

16) 까마귀가돌아오지않은이유에대해초대교부들과랍비들은다양한의견을제시하였다. Philo 는 노아가 까마귀의 마음에 있는 어둠의 찌꺼기를 보고 쫓아 냈다고 말한다. C. D. Yonge, The Works of Philo (Peabody, Mass: Hendrickson, 1993), 825. Augustin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영해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까마귀는 자신의 것을 찾는 자이고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것을 찾는 자이다. 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7 (Grand Rapids: Eerdmans, 1991), 40.

17) 잠언12:10 “의인은그육축의생명을돌아보나악인의긍휼은잔인이니라.”

18) Gordon J. Wenham, Genesis 1–15, 186. Cf. 레위기11:15, 신명기14:14.

19) Sarna, Genesis, 58.

20)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114.

21) Sarna, Genesis, 58. John H. Walton, Genesis, 314–31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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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God dremembered Noah and all the beasts and all the livestock that were with him in the ark. And eGod made a wind blow over the earth, and the waters subsided. fThe fountains of the deep and fthe windows of the heavens were closed, the rain from the heavens was restrained, and the waters receded from the earth continually. At the end gof 150 days the waters had abated, and in the seventh month, on the seventeenth day of the month, the ark came to rest on the mountains of hArarat. And the waters continued to abate until the tenth month; in the tenth month,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the tops of the mountains were seen.

d ch. 19:29; 30:22; Ex. 2:24; 1 Sam. 1:19

e Ex. 14:21

f ch. 7:11

f ch. 7:11

g ch. 7:24

h 2 Kgs. 19:37; Isa. 37:38; Jer. 51:2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8:1–5.

 

 

1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셨다. 이 홍수 사건의 반전은 바로 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누군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복, 복지를 위하여 행동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멈추시고 남은 자들을 위하여 시작하신 행동은 바로 바람을 땅위에 불게하심으로 물이 줄어들게 하신 것이었다. 

(창 9:15, 개정)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창 19:29, 개정)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30:22, 개정)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출 2:24, 개정)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32:13, 개정)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 25:6-7, 개정)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74:2, 개정)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계 16:19, 개정)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삼상 1:19-20, 개정)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 창세기 6:9–9:19 내용에 따른 홍수 기사 분해

A. Transitional introduction (6:9–10)

    B. Violence in creation (6:11–12)

        C. First divine speech: resolve to destroy (6:13–22)

            D. Second divine speech: “enter ark” (7:1–10)

                E. Beginning of flood (7:11–16)

                    F. The rising flood (7:17–24)

                        G. God remembers Noah (8:1)

                    F’ The receding flood (8:1–5)

                E’ Drying of the earth (8:6–14)

            D’ Third divine speech: “leave ark” (8:15–19)

        C’ God’s resolve to preserve order (8:20–22)

    B’ Fourth divine speech: covenant (9:1–17)〈–〉 6:18

A’ Transitional conclusion (9:18–19)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홍수 기사의 정점은 8:1이다. 8:1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탄 모든 짐승들을 기억하였다. ‘자칼’(זָכַר, 기억하다)은 잊고 있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칼’은 종종 하나님이 자신이 한 언약과 약속에 신실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출애굽기 6:4에서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생활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였다고 한다.4)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은총을 베풀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8:1의 ‘자칼’은 하나님이 창세기 6:18–20에서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나타낸다.5)

4) 창세기19:29에서하나님은아브라함을기억하고롯을소돔과고모라의멸망으로부터구해주며, 창세기30:22에서는라헬을기억하고요셉을잉태하게해준다.

5)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299.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2–38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69–270.

 

기억하다, 권념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칼’이다. 특히 기억하는 주체가 누구이냐가 중요한데 하나님이 이 기억하심의 주체가 되었을때 심판과 은혜가 베출어지는 단초가 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혹은 우리가 그 기억의 주체가 될때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한데 이 기억함이 바로 우리의 예배의 본질이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기억하라 예수의 산같은 믿음을”

6. Remembering God is often a dynamic phenomenon that leads to the situation of the believer or the believing community being transformed, especially in the Psalms. Recalling God’s past saving work becomes a bridge from a grim present to a blessed future. In Ps 77:11 [12] his saving activity at the Exodus is seen to be relevant to Israel’s disastrous situation and an implicit promise that the God who saved them will save again. In 143:5 the recollection of God’s past salvation changes despair into hope and prayer. Jonah, at death’s door, remembered God and turned to him in a prayer for rescue (Jon 2:7 [8]). In Ps 78:35 seeking God in repentance is triggered by memories of God as Savior. Similarly, in Isa 63:11, after sinning and being punished, Israel is represented as recalling the Exodus and turning back to God, while in Zech 10:9 those of Israel still in exile were to remember God and turn to him again in faith, as a prelude to their return to the land. Many of these examples focus on the Exodus not simply as an event in history but as a window through which to glimpse God’s redemptive will for his people and individual believers in every generation. To this end the Exodus was to be personally remembered in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Exod 13:3; Deut 16:3).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102–1103.

 

그렇다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신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을 물러가게 하거나 증발시키기 위해서 바람을 불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창 1:2을 떠올리게 된다. 

(창 1:2, 개정)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본문에 부는 바람과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영은 모두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이다. 땅이 혼돈한 상황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심으로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난것처럼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하시자 물에 잠겨버려 혼돈가운데 있던 지구에 물이 줄어들어 산봉우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땅에 ‘루아흐’(רוּחַ)를 보내는데, 이는 영 또는 바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길가메쉬와 아트라하시스에서도 남풍이 등장한다. 남풍이 강렬하게 불자 산들이 물에 잠기게 되고 폭풍이 몰아친다. 제7일에 남풍이 수그러들자, 바다는 잠잠해 지고 홍수는 멈추게 된다.6)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에서 바람은 자연 현상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루아흐’는 단순한 바람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하나님이 보낸 바람을 일반적인 자연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바람 때문에 폭풍이 일어나고 지구를 덮고 있는 물은 광란의 춤을 추어야 한다.7)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루아흐’는 메소포타미아 홍수 설화에 있는 그런 자연 현상을 일으키지 않고, 물이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사칵’(שָׁכַךְ)은 ‘줄어들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잠잠해지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물이 감소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방주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억함과 물의 감소는 노아의 방주를 아라랏 산에 도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렇듯 창세기 8:1의 하나님의 기억함과 하나님의 바람 또는 신은 파멸과 재앙의 수단이 아닌 살아남은 피조물의 회복의 출발점이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8:1은 창세기 1:2의 지구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창세기 1:2에서 지구가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음이 그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신(루아흐, רוּחַ)이 수면 위에 운행하였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8:1의 지구는 대홍수로 인하여 혼돈한 상태이며 방주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이며, 그리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물이 지구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루아흐’(רוּחַ)를 보낸다.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창조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던 물이 한 곳에 모여 뭍이 드러났던 것처럼, 창세기 8:1에서는 하나님이 루아흐를 보내자 물이 감소하여 산봉우리들이 드러나게 만든다. 이러듯, 창세기 8:1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신 또는 성령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처럼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표출임에는 틀림이 없다.8)

6) ANET, 94.

7) 수메르 홍수 설화에서 영웅 지우수드라가 탄 배는 폭풍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다(ANET 44).

8)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0–271.

 

2-5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서 150일 후에 줄어들었다. 일곱째달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이후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열렸던 것(7:11)들이 닫힘으로 홍수가 마쳐지고 있다. 

‘닫다’의 히브리어 ‘와이사케루’(וַיִּסָּֽכְרוּ)는 동사 ‘사칼’(סָכַר)의 닢알 수동형이다. 창세기 7:11에서 깊음의 샘이 터지고(닙케우, נִבְקְעוּ֙)하늘의 창이 열리는(닢타후, נִפְתָּֽחוּ)것을 묘사하는 동사들도 닢알 수동형으로 사용되었다. 홍수의 시작과 종료에서 모두 수동형 동사를 사용하여, 홍수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9) 창세기 8:3은 창세기 7:24를 이어가고 있다. 물이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한 후 마침내 물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9)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30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1–272.

 

창세기 8:4은 물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7월 17일은 홍수가 시작되었던 2월 17일(창 7:11)로부터 정확하게 5개월 후의 일이다. 아라랏 산은 고대 앗시리아 문헌에서 우라르투(Urartu=Ararat)로 기록되어 있다.10)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우트나피스팀이 인류의 멸망을 슬퍼하는 동안 갈대배가 니느웨에 있는 니무쉬 산에 도착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라르투 산은 터키와 러시아 이란 3개국의 접경에 위치해 있는 빅 아리 다(Byk Ari Da) 산으로 본다. 이 산은 높이가 약 5,185m이며,11)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에 인접해 있다.12) 하지만 이 산을 아라랏 산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성경은 방주가 도착한 곳을 아라랏의 산들(하레 아라랏, הָרֵ֥י אֲרָרָֽט)이라고 한다. 성경은 방주가 도착한 곳을 아라랏 지역에 있는 산들이라고 아주 포괄적인 지역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13)

‘안착하다’의 히브리어 ‘와타나흐’(וַתָּ֤נַח)는 동사 ‘누아흐’의 칼 능동형이며, 안식일 규정에서 ‘쉬다’의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창세기 8:4에서는 방주가 홍수의 격랑으로부터 아라랏 산에 안전하게 정박하였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안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 이유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600년 7월 17일은 쥬빌리 달력에 따르면 금요일이다.14)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을 고려할 때 동사 누아흐의 사용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동사 누아흐(נוּחַ)는 노아(נֹח)의 이름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10)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5–386.

11) 아라랏 산은 열왕기하 19:37, 이사야 37:38, 예레미야 51:27에서도 언급되며, 토비야 1:21도열왕기하19:37처럼산헤립의자식들이아버지를살해한후도망간장소로언급되고있다.

12) Sarna, Genesis, 57.

13) Jubilees 5:27은 방주가 도착한 산을 아라랏의 산들 중에 하나인 루발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고한다.

14) 쥬빌리 카렌다는 안식일을 고정시키기 위해 일년을 7×52로 계산하여 일년을 52주 364일로 만든달력이다. 쥬빌리달력은매7년마다추가로한주를더하여그레고리안달력의365을기준으로 볼 때 부족한 하루를 7년마다 해소시켰다. S. Najm and Ph. Guillanume, “Jubilee Calendar Rescued from the Flood Narrative,” Journal of Hebrew Scriptures 5–1 (2004): 1–11. Gordon J. Wenham, Genesis 1–15, 18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2–273.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이제 반전이 시작되었다. 150일동안 홍수는 이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2월 17일 시작된 홍수는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른 것을 기점으로 150일동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홍수가 줄어드는데 있어서 인간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물을 물러가게 하셨고 인간을 이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다른 홍수의 설화와는 달리 창세기의 기록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대상은 노아(인가)만이 아니라 모든 들짐승과 가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자연은 총체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총체적인 구원을 이루어내고 계신 것이다. 홍수를 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홍수를 물러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이 바랄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억하심속에 붙들리는 것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바랄때,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때 하나님을 우리를 기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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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On the very same day Noah and his sons, Shem and Ham and Japheth, and Noah’s wife and the three wives of his sons with them entered the ark, 14 they and every beast, according to its kind, and all the livestock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according to its kind, and every bird, according to its kind, every winged creature. 15 They xwent into the ark with Noah, two and two of all flesh in which there was the breath of life. 16 And those that entered, male and female of all flesh, went in yas God had commanded him. And the Lord shut him in.

17 The flood zcontinued forty days on the earth. The waters increased and bore up the ark, and it rose high above the earth. 18 The waters prevailed and increased greatly on the earth, and the ark floated on the face of the waters. 19 And the waters prevailed so mightily on the earth that all the high mountains under the whole heaven were covered. 20 The waters prevailed above the mountains, covering them fifteen cubits4 deep. 21 And aall flesh died that moved on the earth, birds, livestock, beasts, all swarming creatures that swarm on the earth, and all mankind. 22 Everything on the dry land bin whose nostrils was the breath of life died. 23 He blotted out every living thing that was on the face of the ground, man and animals and creeping things and birds of the heavens. They were blotted out from the earth. Only cNoah was left, and those who were with him in the ark. 24 And the waters prevailed on the earth 150 days.

x ch. 6:20

y ver. 2, 3

z ver. 4, 12

4 A cubit was about 18 inches or 45 centimeters

a ver. 4; ch. 6:13, 17; 2 Pet. 3:6

b ch. 2:7

c 2 Pet. 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7:13–24.

 

 

13-15절) 곧 그 날은 앞서 노아가 600세 되돈 해 둘째달 17일로 보인다. 여기서는 노아의 가족들이 다 방주로 들어갔고, 모든 들짐승과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방주로 들어갔음을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을 모두 총칭해서 15절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아셀-보 루아흐 하임)이라고 다시 언급하며 모두 둘씩 방주로 들어갔음을 기록한다. 이는 앞선 6:17절의 성취이다. 

(창 6:17, 개정)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앞서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생령(루아흐)를 불어 넣으셨다면 이제 그 루아흐를 제거하신 것이다. 그렇게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에 탑승한 ‘루아흐’를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게 된다. 

 

16절) 노아 앞에 나아온 모든 것의 암수를 들이시고 여호와께서 문을 닫으신다. 본문의 표현에서 앞선 하나님은 ‘엘로힘’, 뒤의 여호와는 ‘야훼’로 하나님을 표현한다. 결국 이 구원의 방주를 계획하시고 이것을 노아에게 명령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을 방주에 들여보내시고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결국 노아의 방주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는 노아가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의 결과임을, 또한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7절) 이제 홍수가 땅에 40일 동안 계속되었다.(7, 12절) 여기서의 홍수는 일반적인 비가 아니라 앞서 11절에서 언급한대로 큰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림으로 쏟아지는 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엄청난 비로 말미암아 물이 땅을 덮었고 결국 방주가 땅에서 떠오르게 되었다.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도리어 본문에서는 물이 많아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많은 비로 강과 바다가 범람하여서 국지적으로도 큰 홍수의 피해를 받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의 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홍수의 패턴을 읽다보면 7일, 40일, 150일이 패턴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A. 7일 (창 7:4, 10)

    B. 40일 (창 7:4, 12, 17)

        C. 150일 (창 7:24, 8:3)

    B’ 40일 (창 8:6)

A’ 7일 (창 8:10, 12)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63.

 

18-20절) 본문은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져서 물이 온 땅을 덮는 장면을 매우 강렬하게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넘치매라는 히브리어 ‘가발’이 4번 반복되어 사용된다.(18, 19, 20, 24) 이 단어는 사움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군사적 용어이다.(출 17:11)성경의 본문은 물로 모든 산들이 잠겨서 15규빗 위로 물이 찼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전지구적인 홍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적, 과학적인 증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 대홍수에 대해서 창세기의 저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베루 하마임’גָּבְר֖וּ הַמָּ֑יִם(빗물이 강렬하였다)?—3번

    ‘메오드’מְאֹ֖ד(매우)—3번

    ‘알 하아레츠’עַל־הָאָ֑רֶץ(땅 위에)—2번

    ‘와예쿠수 헤하림’וַיְכֻסּ֖וּ הֶהָרִֽים(산들을 덮었다)—2번

이 중에서 동사 ‘가발’(גּבר)은 아주 인상적이다. 창세기 6:4에서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을 ‘기보림’(גִּבֹּרִ֛ים, 용사)이라고 했다. 창세기 7:18–20에서는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명사 ‘기보림’(גִּבֹּרִ֛ים)의 동사인 ‘가발’(גּבר, 강하다)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며, 24절에서 한 번 더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홍수가 엘로힘의 아들들의 범죄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6) 19절의 “전체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높은 산들”이란 표현은 홍수로 인해 지구 전역의 산을 물로 뒤덮였음을 보여준다. 구약 성경에서 ‘전체 하늘 아래’라는 표현은 모두 6번 사용되었으며, 한결같이 지구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17) ‘콜–하샤마임’(כָּל־הַשָּׁמָֽיִם)도전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모든 높은 산들’도 홍수의 범위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 전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높은 산들’은 20절의 15규빗과 함께 홍수의 규모를 나타낸다. 즉 빗물이 모든 산을 뒤덮고 산봉우리 보다 약 6m 75cm 더 높이 차 올라, 지구 전역이 깊은 물로 뒤덮였고, 호흡하는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18)

16)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79.

17) 신명기 2:25; 4:19; 욥기 28:24; 37:3; 41:11; 다니엘 9:12. Richard M. Davidson, “The Genesis Flood Narrative: Crucial Issues in the Current Debate,”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42–1 (2004): 49–77.

18) 노아 홍수의 시기와 정도에 대한 논쟁은 지엽적인 홍수와 지구 전역에 걸친 홍수로 크게 두 가지 로 나뉘어진다. 지엽적인 홍수는 성경의 기록과 모순되며, 지구 전역에 걸친 홍수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Paul H. Seely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에 일어난 대홍수에 창세기 저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이해하자고 제시한다. Paul H. Seely, “Noah’s Flood: its Date, Extent, and Divine Accommodation,” WTJ 66 (2004): 291–31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64–265.

 

21-24절) 결국 이 비로 말미암에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수중 생물들을 제외하고 육지에서 코로 숨을 쉬는 모든 것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생명이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다’는 표현은 ‘기운이 진하여 죽다’(25:8, 17; 35:29)는 죽음의 과정을 묘사한다. 이는 6:17의 성취이다. 또한 이는 앞선 7:15과 대조를 이룬다. 죽은 순서는 창조의 순서대로 나열되고 있다. 

 

이 대격변의 홍수 속에서 오직 노아와 노아의 방주에 남은 자들과 동물들만이 살아 남았다. 모두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는 상황에서 노아와 방주에 있던 자들만이 남김을 받은 것이다. 본문의 쓸어버림을 당하다와 남겨지다라는 표현은 모두 히브리어 니팔형으로 이 두 수동태 동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남은 자 사상(Remnant)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여러 위험과 환난에서 남겨진 자들로 하나님이 미래에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직접 참여할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러한 표현 자체가 종말론적인 소망을 포함한다. 

40일간 쏟아진 비의 양을 계산했을때 이 비가 전 지구적으로 와서 터키의 아라랏산위로 15규빗이나 왔다고 계산하면 어림잡아 260만조톤, 260경톤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아라랏 산을 5100미터라고 할때 40일간 비가 쏟아졌다면 매일 127.5m가 온 것이고 매시간 5.3m, 그러니까 5300mm의 양이 쏟아진 것이다. 시간당 100-200mm의 비가 쏟아져도 홍수가 나고 강이 범람하는데 이런 정도의 양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주는 물에 떠올랐고 비가 사라질 때까지 물위에 둥둥 떠다녔다. 선박전문가들에 의하면 방주는 항해가 목적이 아니라 안정성이 목적인 배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배에는 여러 동물들을 안전하게 싣고 격변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이들을 어디론가 항해를 통해 데려가는 목적이 아니었다. 이런 엄청난 비를 견디기 위해서는 배의 복원력,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The flood brought a whole world to an end (2 Pet. 2:5; 3:6). It prefigures the final judgment, which ends the present heavens and earth and brings a new world (Rev. 21:1). God preserves those who belong to Christ, the final Noah.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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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the Lord said to Noah, p“Go into the ark, you and all your household, for I have seen that qyou are righteous before me in this generation. Take with you seven pairs of all rclean animals,1 the male and his mate, and a pair of the animals that are not clean, the male and his mate, and seven pairs2 of the birds of the heavens also, male and female, to keep their offspring alive on the face of all the earth. For in seven days sI will send rain on the earth forty days and forty nights, tand every living thing3 that I have made I will blot out from the face of the ground.” uAnd Noah did all that the Lord had commanded him.

Noah was six hundred years old when the flood of waters came upon the earth. And Noah and his sons and his wife and his sons’ wives with him went into the ark to escape the waters of the flood. Of clean animals, and of animals that are not clean, and of birds, and of everything that creeps on the ground, two and two, male and female, went into the ark with Noah, as God had commanded Noah. 10 And after seven days the waters of the flood came upon the earth.

11 In the six hundredth year of Noah’s life, in the second month, on the seventeenth day of the month, on that day all the vfountains of the great deep burst forth, and wthe windows of the heavens were opened. 12 And rain fell upon the earth forty days and forty nights.

p Matt. 24:38, 39; Luke 17:26, 27; Heb. 11:7; 1 Pet. 3:20; 2 Pet. 2:5

q ch. 6:9

r ch. 8:20; [Lev. 11]

1 Or seven of each kind of clean animal

2 Or seven of each kind

s ver. 12, 17; [Job 37:11–13]

t ch. 6:17

3 Hebrew all existence; also verse 23

u ch. 6:22

v ch. 8:2; Prov. 8:28; [Amos 9:6]

w ch. 8:2; 2 Kgs. 7:19; Isa. 24:18; Mal. 3:10; [Ps. 78: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7:1–12.

 

 

 

1-5절) 이는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와 노아의 온 집으로 하여금 방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셨다. 이는 이 세대 중에 노아가 의로움을 여호와께서 보셨기 때문이다. 

본문 1절의 노아에 대한 평가는 6:8-9절과 비교된다. 

(창 7:1, 개정)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6:8-9, 개정)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앞서 9절은 당대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완전한 자라고 했다면 1절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의로왔다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쌍을, 부정한 것은 암수 두쌍을,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쌍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살아남도록 할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부정한 짐승들을 히브리어 성경은 한쌍을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처럼 앞서 6:19-20절을 볼때 방주에 들어간 짐승의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정은 이후 레 11장과 신 14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당시에 정확한 규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홍수 이후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8:20) 동물을 먹도록(9:3) 허락받은 것을 볼때 만약 암수 한쌍만이 방주에 탔다면 희생제물로 바쳐지거나 먹이가 된 동물들은 멸종되었을 것이기에 그에 해당되는 동물들은 일곱쌍씩 방주에 타도록 했을 것이다. 

3절에서 새들에 대해서는 암수(자칼 우네케바 זָכָ֣ר וּנְקֵבָ֑ה)라고 했지만, 2절에서 각종 짐승들의 암수를 표현할 때에는 가족의 개념을 강하게 풍기는 이쉬 베이쉐토(אִ֥ישׁ ואְִשְׁתּֽוֹ), 남편과 그 아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였다.

노아에 대한 묘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님은 종종 노아에게 말씀하시지만, 노아는 홍수 상황이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단 한번도 말하지 않는다. 아트라하시스와 길가메쉬 서사시의 영웅들이 그들의 신에게 기도한 것처럼 노아도 기도하며 하나님과 홍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없다. 뿐만 아니라 방주를 짓고 짐승들을 모으는 일들을 하느라 엄청난 수고를 하였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창세기 6:22과 7:5 그리고 7:9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단 한 마디의 말만 남기고 있다. 이러한 것은 노아의 순종을 강렬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홍수의 주인공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56–257.

 

6절) 홍수가 노아가 600살 되던 해, 11절의 기록에서는 2월 17일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시기를 기록한 것은 홍수 사건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노아와 세 아들(셈, 함, 야벳), 아내와 그 며느리들 총 8명은 홍수를 피하여 방주로 들어갔다. 앞서 말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다. 이처럼 짐승들이 방주로 나아와 들어가는 모습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각종 심승을 아담에게 나아오게 했던 모습과 비슷하다. 하나님이 데려온 짐슴들에게 아담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네페쉬 하야’(생령)를 불렀고, 노아는 생령있는(루아흐 하임) 것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맡았다.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 600세 둘째달 10일에 방주에 들어갔는데 이제 7일후에 홍수가 오기 시작했다. 그 비는 40일 밤낮을 쉬지 않고 퍼부었는데 일반적인 비가 아니라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는 듯한 비였다. 이는 하늘의 궁창의 물이 쏟아지고 땅이 갈라져 지하수가 솟구치는 것으로 보인다. 

 

11절은 그 7일 후가 구체적으로 노아가 600살 되던 해의 제2월 17일이었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힌다. 열왕기상하에서 이스라엘 왕들의 재임 기간 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일자를 밝히는 것처럼 노아 홍수의 연월일을 제시하는 것은 노아 홍수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의도가 담겨있다.9) 11절은 또한 홍수가 깊은 지하수와 하늘의 창이 열리면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밝힌다. 그리고 12절은 그 물이 40일 주야로 지속되었음을 밝힌다. 11절의 깊음은 창세기 1:2에서 물에 덮여있는 지구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테홈’(תְּהֹ֣ום)이다. 바다 또는 깊은 물의 의미를 가진 ‘테홈’을 나누어 하나님은 하늘의 궁창과 땅과 바다를 나누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창세기 7:11에서는 바로 이 ‘테홈’의 샘들이 터져 나오고 궁창의 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셋째 날 창조를 무위로 되돌리면서 지구를 창세기 1:2의 상태로 돌이켜 버린다. 창세기 1장이 ‘테홈’을 나누면서 창조(creation)를 시작하였다면, 창세기 7:11에서 그 ‘테홈’의 물과 궁창의 물이 땅 위에 다시 합치면서 창조 세계의 파괴(de–creation)가 시작된다.10)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홍수는 배를 만들라고 에아가 우트나피쉬팀에게 말한 지 7일째 되는 날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길가메쉬에 의하면 대홍수에서 비를 내리는 역할을 폭풍과 비와 관련된 신들이 일제히 참여한다. 아닷(Adad)은 구름 속에서 천둥 소리를 내고 니눌타(Ninurta)는 물이 둑을 넘치게 만들고 에라칼(Erakal)은 댐의 기둥을 뽑아 버린다.11)

9) Gordon J. Wenham, Genesis 1–15, 179.

10) Nahum M. Sarna, Genesis, 55. Terence E. Fretheim, Genesis, 392.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76. Derek Kidner, Genesis, 91.

11) ANET 9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60.

 

A peculiar feature of the flood narrative is the number of detailed chronological notices (cf. 8:4–5, 13–14). By pinpointing the exact date of the flood within Noah’s life, the text underlines that it was a real event. all 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 burst forth, and the windows of the heavens were opened (7:11). Powerful imagery is used here to capture the intensity of the flood. From below and above, water poured out to cover the land. Rain fell continuously for forty days and forty nights (v. 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3.

 

본문은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노아는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심판을 허락하셨는지, 이 심판으로부터 사람들과 동물들을 구원해달라고 간구하거나, 방주를 지으면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자신들의 가족들만 방주에 들어가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이 없다. 성경의 기록자는 이처럼 노아가 이 홍수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의 주인공이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신 이 홍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홍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벧후 2:9, 개정)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3:9, 개정)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으로 홍수의 사건이나 이후 최후의 심판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의 위협으로 우리를 겁주시기를 원하시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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