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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nd God said to Noah, l“I have determined to make an end of all flesh,3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through them.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14 Make yourself an ark of gopher wood.4 Make rooms in the ark, and cover it inside and out with pitch. 15 This is how you are to make it: the length of the ark 300 cubits,5 its breadth 50 cubits, and its height 30 cubits. 16 Make a roof6 for the ark, and finish it to a cubit above, and set the door of the ark in its side. Make it with lower, second, and third decks. 17 mFor behold, I will bring a flood of waters upon the earth to destroy all flesh in which is the breath of life under heaven. Everything that is on the earth shall die. 18 But n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and you shall come into the ark, you, your sons, your wife, and your sons’ wives with you. 19 And of every living thing of all flesh, you shall bring two of every sort into the ark to keep them alive with you. They shall be male and female. 20 Of the birds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of the animals according to their kinds, of every creeping thing of the ground, according to its kind, two of every sort shall come in to you to keep them alive. 21 Also take with you every sort of food that is eaten, and store it up. It shall serve as food for you and for them.” 22 oNoah did this; he did all that God commanded him.

l Ezek. 7:2, 3, 6

3 Hebrew The end of all flesh has come before me

4 An unknown kind of tree; transliterated from Hebrew

5 A cubit was about 18 inches or 45 centimeters

6 Or skylight

m ch. 7:4; 2 Pet. 2:5

n ch. 9:9, 11

o Heb. 11:7; [Ex. 40: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13–22.

 

13-2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이다. 

 

13절) 앞서 11-12절에서 말한 것처럼 온 땅이 하나님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이 땅에 가득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끝장을 내기로 작정하셨다. 이는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땅과 인간들을 멸망시키기에 앞서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 이미 땅이 파괴되어 있었고, 인간들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괴시킨 그 땅과 그들 자신들을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파멸시킨다.49)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멸망시키는 이유가 고대 근동 지역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노아 홍수와 유사한 형태의 설화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었다. 고대 수메르의 홍수 설화에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다섯 개의 도시 건축과 통치자 이름을 언급한 후 그 지역에 대홍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수메르 시대 때부터 존재했었던 아트라하시스에는 홍수의 원인을 인간의 번성과 소음 때문이라고 한다.50)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 후 아트라하시스는 불특정 시점으로부터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나라 전체가 소떼들이 우는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신들이 인간들의 소음 때문에 쉬거나 잠을 잘 수 없게 되자 엘릴(Ellil) 신은 인간의 소음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전염병을 보냈다. 그 때 아트라하시스가 엔키 신에게 기도해서 질병을 물러가게 만든다. 다시 600년이 지난 후 여전한 인간들의 번성과 소음 때문에 신들은 쉬거나 잠을 잘 수 없었고, 엘릴 신은 가뭄을 보내어 식량부족 사태를 일으켜 인간을 없애고 소란을 줄이려고 한다. 이 재난은 아트라하시스의 기도에 아닷(Adad) 신이 비를 내림으로 역시 실패하고 만다. 인간들의 소음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무산되자 엘릴은 마침내 인간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대홍수 재앙을 내리게 된다. 고대 근동의 홍수 설화에서는 한결같이 인간의 소음 때문에 신들이 대홍수를 보내게 된다. 창세기 6–8장에서 노아 홍수의 원인은 고대 근동의 홍수 설화와 유사점이 하나 있다. 고대 근동 홍수 설화에서 홍수의 원인 중에 하나가 인간의 번성이었다. 창세기 6:1에도 인간의 번성과 함께 문제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6–7장에는 인간의 소음을 대홍수의 원인으로 결코 제시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적인 타락, 성적인 범죄와 폭력 때문에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킨다. 대홍수의 이유는 인간의 악이고, 대홍수의 목적은 악으로 파괴된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것이었다.

49) Richar M. Davidson, “The Genesis Flood Narrative: Crucial Issues in the Current Debate,” 75.

50)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18–2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44–245.

 

14-16절)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실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것을 명령하신다. 방주는 히브리오로 ‘테바’이다. 이 단어는 노아의 홍수(6-9장)과 출 2:3에서 모세의 갈대 상자를 표현하는데에서만 사용되었다. 이 둘의 규모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유사점이라면 둘다 상자 형태로 사림이 항해를 위해 직접 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물의 흐름에 맡겨져 있고 그 방주 안에 있는 대상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방주의 식양은 다음과 같다.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공간을 나누고 안과 밖은 역청으로 칠하여 방수작업을 한다. 그 크기는 길이 300규빗(135미터), 너비는 50규빗(22.5미터), 높이는 30규빗(13.5미터)의 크기이다. 그 길이는 너비의 여섯 배, 높이의 10 배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이는 축구장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약 43,000톤을 실을 수 있는 규모이다. 내부 수용 공간은 위의 크기를 직사각형으로 계산했을때 41,000 세제곱미터의 크기로 실제 배의 모양으로 계산한다면 그보다 작은 38000-39000 세제곱미터 정도로 보인다. 

또한 위에 한규빗 정도의 창을 내고 문은 옆으로 내어 만들고 상, 중, 하 3층으로 만들었다. 이를 면적으로 계산하면 한층이 3000 제곱미터이므로 약 9,000 제곱미터의 갑판 넓이를 가지는 공간이다. 이는 약 2700평정도의 크기이다. 

하나님은 방주 만드는 방법을 노아에게 알렸으며, 노아는 이 사실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알렸을 가능성도 있다. 의를 전파했다는 베드로후서 2:5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창세기 6–7장에서는 방주를 만드는 과정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방주를 만들기 위해 들어간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방주 건설에 동원된 인력은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초대형 배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만약 노아의 가족만 건설에 참여하였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초대형 배를 만드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경이롭게 생각하며 이들을 지켜봤을 텐데 이들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 아무것도 기록해 놓지 않았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혼인하였다고 말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46.

 

17절) 13절의 선언을 다시금 확인하시면 홍수를 통해서 땅의 모든 것을 다 멸절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포함해서 땅위에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를 진멸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전 지구적인 홍수 사건을 생각한다. 실제로 이후의 기록을 통해 보면 지면의 모든 높은 산들이 다 홍수에 잠겼고 산들보다 15규빗, 7미터나 높이 물이 차올랐다.(7:19-20) 이후 아라랏 산(8:4)에 방주가 머물게 되는데 이 아라랏산을 터키에 있는 산이라고 생각한다면 해발 5137미터의 높이까지 물이 차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설화에 홍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 홍수가 전 지구적인 사건이었음을 지지한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전 지구적인 홍수로 보기도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의 한계를 고려할 때 국지적인 홍수라고 볼 수도 있다. 창세기는 바벨탑 사건(11:1-9) 전까지 사람들이 온 땅에 퍼져 살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또한 많은 학자들은 온 땅이 아니라 거대한 지역에 밀어닥친 홍수라고 본다.  

 

본문에 홍수라고 번역된 단어는 ‘맙불’은 6-11장에서 12번 사용되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시 29:10에 단 한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하늘의 바다, 홍수를 의미한다. 시 29:10에서는 여호와를 홍수 위에 좌정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이를 통해 신적인 존재가 휘두르는 우주적인 물 병기의 의미로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바벨론의 ‘네르갈’이나 ‘니누르타’와 같은 신은 전쟁의 왕, 대홍수의 주로 묘사되었다. 

 

18-22절) 하나님께서 내 언약, 즉 노아 언약을 세우시겠다라고 말씀하신다.(창 9:8-17) 결국 이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은 노아와 그 아내, 세 아들인 셈, 함, 야벳과 그 아내들로 총 8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방주에 탈 대상들을 지정하시는데 혈육 있는 모든 생물들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들이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새와 가축,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각기 둘 씩 나아오게 하셔서 이들을 방주에 들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다. 

이 홍수사건이 단기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먹을 모든 양식을 하도록 하셔서 배에 타는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을 먹이셨다. 

22절은 노아가 가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다 준행했다라고 말하고 있다.(7:5)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모두 8명이 방주에 들어갔다. 다른 피조물들은 물고기를 제외한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것들로서 각각 암수 한 쌍씩이다. 방주에 타게 되는 피조물들의 목록과 함께 희망의 메시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다른 피조물들을 방주에 태워 생존하게 하는데, 그 목록에 기록된 피조물의 배치 순서가 아주 눈에 익숙하다. 바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다섯째 여섯째 날 피조 순서와 일치한다.

창세기 1장 5–6일

창세기 6:20

물고기와 새를 그 종류대로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것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하나님이 노아에게 부여하는 역할도 아담의 역할과 비교할 만 하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각종 짐승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와 그들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그 때 아담은 짐승들의 생령을 불러 주었다. 노아는 그 생령이 있는 생명체들을 보전한다. 고대 근동 홍수 설화에서는 영웅들이 깨끗하고 살진 짐승들을 골라 갈대 배에 태웠다. 노아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방주에 태울 짐승들을 노아가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20절은 암시한다.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창 6:20 שְׁנַ֧יִם מִכֹּ֛ל יָבֹֽאוּ אֵלֶ֖יךָ לְהֲחֲיֽוֹת 세나임 미콜 야보우 엘레이카 레하하요트

창 2:19 וַיָּבֵא֙ אֶל־הָ֣אָדָ֔ם לִרְא֖וֹת מַה־יִּקְרָא־ל֑וֹ וְכֹל֩ אֲשֶׁ֙ר יִקְרָא־ל֧וֹ הָֽאָדָ֛ם נֶ֥פֶשׁ חַיָּ֖ה ח֥וּא שְׁמֽוֹ

와야베 엘–하아담 릴오트 마–이크라–로 베콜 아셀 이크라–로 하아담 네페쉬 하야 후 세모

그리고 그 짐승들을 노아는 생존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창세기 9:1 이하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맺게 될 언약의 성격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언약은 재창조와 관련된 것임을 보여 준다.

21–22절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48–249.

 

 

우리는 교회의 전승을 통해서 노아가 120년에 걸쳐서 가족들과 노아의 방주를 지었다고 말한다. 또한 홍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로 들어올 것을 촉구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듣지 않고 모두 홍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얼마의 기간동안에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방주를 짓는 일에 다른 이들이 참가했는지 참가하지 않았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도리어 방주에 탈 사람들의 명단은 단 8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방주에 탈 기회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도리어 고대 신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신들이 홍수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면 그것을 믿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길가메스 서사시에는 우트나피시팀과 에아 신이 자신들이 방주를 만드는 활동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이야기 하나를 지어내는데 이는 우트나피시팀이 엔릴 신의 진노를 사서 자신이 그 도시에 머무를 경우 그 도시가 엔릴의 분노를 사게 될것이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가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도리어 홍수 심판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의 사람들이 너도 나도 배에 탑승하기 위해서 혼란이 예상되었기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지구의 반지름이 6370km이고 아라랏산의 높이 5.2km로 보았을 때 구의 부피를 구하는 공식 V =4/3πr³ 에 대입하여 계산하면 2,652,322,476km³으로 약 265만조 톤에 해당하는 물의 양이다. 이것이 전 지구적인 홍수가 났다고 가정했을때 실제 물의 양이다. 실제로 전 지구적인 홍수가 가능할까? 그리고 창세기의 기록대로 150일만에 이 많은 양의 물이 물러가는 것이 가능할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22절에서 노아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두 준행하였다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이후 7:5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당시 사람들의 패역함을 심판하셨는데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를 통해서 당신의 약속(3:15)을 지키실 것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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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are the generations of Noah. gNoah was a righteous man, hblameless in his generation. Noah iwalked with God. 10 And Noah had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11 Now the earth was corrupt in God’s sight,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 And God j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kfor all flesh had corrupted their way on the earth.

g ch. 7:1; Ezek. 14:14, 20; 2 Pet. 2:5

h Job 1:1, 8; Luke 1:6

i ch. 5:22, 24; [Heb. 11:7]

j Ps. 14:2, 3; 53:2, 3

k Job 22:15–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9–12.

 

 

9-10절) 노아의 족보, 노아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고나서 그의 세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족보(톨레도트)는 이러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흠이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에게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트는 그들의 후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홍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본문에서 완전한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타밈’이다. 이 단어는 흠이 없는 것, 곧 명백한 결점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욥 1:1, 개정)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8, 개정)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눅 1:6, 개정)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는 ‘할락’의 히트파엘 분사형으로 ‘히트할락’이다. 할락이 가다, 걷다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의 히트파엘 분사형은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의 표현으로 사용되곤 한다. 앞서 창 3:8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고 겔 28:14에서는 하나님께서 두로왕에게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다’라며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A special nuance of הָלַךְ occurs with the hitp. stem, which views walking or stepping as tantamount to the exercise of sovereignty. Whether this is expressed in literal or metaphorical terms, the symbolism of dominion remains the same. In its first occurrence with this meaning God is described as “walking in the garden,” a clear allusion to his appearance to Adam and Eve as their Creator and Lord (Gen 3:8). The same imagery is used in Job where God is said to walk (יִתְהַלָּךְ) on the “circle” (or “vault”) of heaven (Job 22:14). Satan also walked about on the earth.

On a human level (though with mythic and even primordial allusions) the king of Tyre is chided by Yahweh for having walked about in the midst of the stones of fire (Ezek 28:14). However the linkage between the king and the “anointed … guardian cherub” (vv. 14, 16) is to be understood, it is evident that he/they were manifesting incredible hubris by seeking to arrogate to themselves the sovereignty that belongs to God. The hitp. stem of the vb. הָלַךְ and the context of the entire pericope put this beyond any doubt.

Historically the use of the hitp. as a code for dominion may be illustrated in the case of Abraham and that of the Israelites sent out by Joshua to reconnoiter the land. Upon his return to Canaan from Egypt, the patriarch was told to rise up and walk about through the land, for Yahweh was about to give him all the territory on which he trod (Gen 13:17). Joshua commanded the tribal leaders to send three men from each tribe to walk about through Canaan, an operation that was tantamount to the assertion of dominion over the land (Josh 18:4, 8). To walk about on the land, then, was to recognize one’s claim upon it.

The prophet Zechariah uses הָלַךְ in the hitp. 4× as a way of describing divine sovereignty. The four horsemen of the first vision are sent out by Yahweh to “walk to and fro through the earth” (Zech 1:10–11), and those of the seventh vision are dispersed on the identical mission (6:7). In each instance the result is the subjugation of the earth to Yahweh’s regency (1:11; 6:8). In the third use of הָלַךְ in this way, Zechariah describes the glorious return of redeemed Israel in eschatological times in these terms: “I will strengthen them in the Lord and in his name they will walk” (10:12). The walking here unmistakably refers to the final victory of God’s people and of their dominion over all their enemies (cf. v. 11).

The collocation of the vb. הָלַךְ in its several stems with other morphemes, especially prepositions, is also theologically significant. For example, Moses threatens a curse upon the people of Israel if they are inclined “to follow (walk after)” (לָלֶכֶת אַחֲרֵי) other gods (Deut 11:28). To “follow” or “walk after” is to suggest commitment of life and purpose (cf. also Judg 2:19; Ruth 3:10; 1 Kgs 11:10; 21:26; 2 Kgs 23:3; Jer 7:9). A similar idea is expressed by the preposition בְּ + הָלַךְ. Israel is commanded to observe the statutes by “following (walking in)” them (לָלֶכֶת בָּהֶם, Lev 18:4; cf. Deut 8:6; 13:5 [6]; 30:16; Judg 2:22), and Solomon is commended for having done so (1 Kgs 3:3). Finally, to walk “with” (עִם) is tantamount to being identified with someone, either a wicked person (Job 34:8) or even God himself. Thus, Micah defines God’s utmost requirement as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Mic 6:8).

See Journey, going, marching, walking, wandering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034–1035.

 

9절은 노아의 톨레도트이다.39) 일반적으로 톨레도트는 거론된 사람 사물의 이야기 보다는 그들의 후손들이나 후속으로 일어난 일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예외적이다. 10–11장에서 노아의 후손들의 기록이 담겨 있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노아와 노아의 홍수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노아의 톨레도트는 창세기 5장의 노아의 조상들의 기록 패러다임을 둘로 나누어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즉 창세기 5장의 노아의 조상들의 삶은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되어 있다.

a) A가 X년을 살고, B를 낳다.

b)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c) A가 산 전체 햇수는 Z이며, 그 후에 죽었다.

이 중에 a)에 해당하는 노아의 기록은 창세기 5:31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세기 6:10에서 이를 변형시켜 다시 표현한다. 그리고 b)와 c)에 해당하는 부분은 노아 톨레도트의 마지막 부분인 창세기 9:28–29에 기록되어 있다.40)

창 6: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 9: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차이점이 있다면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6:9–10은 창세기 5장을 연상시키는 두 가지 표현을 가지고 있다: 첫째,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언급하고 있으며, 둘째,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는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톨레도트와 창세기 6:1–9:29의 노아의 톨레도트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즉 창세기 6:1–9:27을 창세기 5장에 있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명의 패러다임 중에서 노아의 패러다임 속에 두어 둘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노아 홍수를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계보와 연속선 상에서 또는 창세기 3:15에서 시작된 구속사적 역사관을 가지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41)

노아의 톨레도트는 창세기 전반부에서 천지 창조와 함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부분이다. 노아 톨레도트는 노아의 경건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9절). 노아의 경건은 세 가지로 묘사되었다. 노아는 의인이었으며, 당세의 완전한 자였으며, 그리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의 경건을 묘사하는 첫째 표현인 히브리어 형용사 ‘체덱’(צַדִּיק, 의로운)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노아의 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42)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후서 2: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베드로후서 2:5은 노아를 의를 전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노아의 의는 그 악한 시대의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은 삶에 대해 경고하고 의롭게 살도록 권면하는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노아의 경건에 대한 둘째 표현은 당세의 완전한 자이다. ‘완전한’의 히브리어 ‘타밈’(תָּמִים)은 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흠 없고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밖에도 사물의 완전한 상태나 사람의 정신 건강 그리고 도덕적 종교적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창세기 6:9에서 ‘타밈’은 9절에서 ‘의인’과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들과 함께 사용된 점을 감안하면 노아의 삶이 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 완전하였음을 나타낸다.43) 노아의 완전함은 노아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로만 제시되지 않고, ‘당세의’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 노아만 종교적 도덕적으로 완전하였음을 보여준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외면적인 행동에서 육체에 속한 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내면적으로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전인격적으로 흠집 투성이였지만 노아는 흠 없고 완전하였다.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대비되었던 것처럼, 창세기 6:9에서는 노아와 당대의 사람들이 대비되고 있다.

노아의 경건에 대한 셋째 묘사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녹에 대한 표현과 동일하다.44) 에녹의 경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음을 두 차례에 걸쳐 반복하여 표현함으로 강조되었다. 노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도치법을 통해 목적어 ‘에트 하엘로힘’(תֶא־הָאֱלהִֹים, 하나님과)을 문장의 앞에 배치시키고 있다.

창 5:24וַיִּתְהַלֵּ֥ךְ הֲנ֖וֹךְ אֶת־הָֽאֱלֹהִ֑ים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창 6:9אֶת־הָֽאֱלֹהִ֖ים הִֽתְהַלֶּךְ־נֹֽחַ 하나님과 노아는 동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경건에 대한 표현은 노아의 이름을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다.45)

노아 이쉬 차딕 타밈 하야 베도로타브 에트–하엘로힘 히트하렉–노아

즉 노아의 이름을 문장 시작과 끝부분에 각각 배치하여 노아에게 포커스를 맞춤으로 그의 경건함을 강조하고 있다. 노아의 경건한 삶은 당대의 문화와 가치관과 큰 차이가 있다. 모두가 아름다운 여인 몇 명을 아내로 데리고 사는 것을 자랑하고 있을 때, 노아는 한 여자만 아내로 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는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고 한다. 도덕적인 죄악으로 땅이 더럽혀 졌고,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 풍습 속에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살아 냈다. 하지만 노아조차도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구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아도 여호와의 은혜가 필요했다.

39) Kevin Hall은 노아의 톨레도트가 창세기 1–11장에 있는 다섯 개의 톨레도트 중에 셋째라는 점 에 근거하여 다섯 톨레도트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한다. Kevin Hall, “The Theology of Genesis 1–11,”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57–58.

40) Gordon Wenham, Genesis 1–15, 203–204.

41)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50–351.

42) Derek Kidner, Genesis, 87.

43) Terence E. Fretheim, The Book of Genesis, 390.

44) Jack M. Sasson, “Word–Play in Gen 6:8–9,”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7–2 (1975): 36–37.

45) Victor P. Hamilton, Genesis: Chapters 1–17, 277. 해밀턴은 노아의 경건에 관한 문장이 10 개의 단어로 구성된 것을 두고 노아가 아담에서부터 열 번째 세대로 제시된 것을 염두에 둔 일종 의 언어유희라고 여긴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36–239.

 

11-12절) 그 당시 온 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패하여 포악함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 그 땅이 부패함을 보셨다. 이는 땅위의 모든 육체의 행위가 부패했기 때문이다. 

11-12절은 6:3과 6:5-7의 주제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6:3의 인간의 죄악은 엘로힘의 아들들 같았고 여러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성적인 타락이다. 반면 11-12절의 범죄는 폭력(하마스)이다. ‘하마스’는 사람을 거칠게 다루거나 무기등을 이용하여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여러명의 아내를 취하고 사소한 이유로 타인을 살인하는 가인의 후손 라멕을 연상시킨다. 

창세기 6:11–12은 13절과 함께 ‘땅’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 구절에서 ‘땅’은 무려 6번이나 등장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땅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창세기 6:11은 땅이 하나님 앞에서 더럽혀져 있다고 한다.47) 구약 성경에서 ‘더럽히다’는 동사는 주로 ‘타메’(טָמֵא)를 사용한다. 이 경우 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 사물의 더럽힘을 의미한다. 창세기 6:9 의 동사 ‘사하트’(שּׁחת)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더럽힘의 의미가 있지만, 물리적인 폭력과 파괴로 더럽혀진다는 의미도 있다. 창세기 6:9의 땅이 더럽혀진 이유는 6:9 후반부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땅이 하마스 또는 폭력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땅이 더럽혀졌다고 판단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 준다. 12절은 11절의 하마스가 누구에 의한 하마스인지 밝히며, 인간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히브리어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וַתִּשָּׁחֵ֥ת הָאָ֖רֶץ לִפְנֵ֣י הָֽאֱלֹהִ֑ים וַתִּמָּלֵ֥א הָאָ֖רֶץ חָמָֽס׃11 

와티사헤트 하아레츠 리프네 하엘로힘 와팀마레 하아레츠 하마스

וַיַּרְא אֱלֹהִ֛ים אֶת־הָאָ֖רֶץ וְהִנֵּ֣ה נִשְׁהָ֑תָה כִּֽי־הִשְׁחִ֧ית כָּל־בָּשָׂ֛ר אֶת־דַּרְכּ֖וֹ עַל־הָאָֽרֶץ׃12 

와얄 엘로힘 에트–하아레츠 베힌네 니스하타 키–히스히트 콜–바살 에트–달코 알–하아레츠

첫째, 12절 둘째 문장은 11절의 첫째 동사 ‘사하트’(שּׁחת)를 반복하며 땅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감탄사 ‘힌네’(הִנֵּ֣ה, 보라!)를 문장의 서두에 두었다. 둘째, 땅이 손상된 이유는 전적으로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다. 12절 후반부에는 11절의 ‘하마스’(חָמָֽס)를 사용하는 대신에 11절의 ‘사하트’(שּׁחת)를 다시 사용하여 땅의 손상이 인간의 행위 때문임을 밝힌다. 즉 12절 후반부는 모든 육체가 땅 위에서 자신의 삶의 길을 또는 인생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노아의 삶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노아 이쉬 차딕 타밈 하야 베도로타브 에트–하엘로힘 히트할렉–노아 창

키–히스히트 콜–바살 에트–달코 알–하아레츠

창세기 6:9과 6:12은 각각 ‘걸어 다니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하락’(הָלַךְ)과 길의 의미를 가진 명사 ‘데렉’(דֶּרֶךְ)을 사용하여 노아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48)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길을 걸었지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들의 삶의 길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성적인 범죄와 폭력으로 자신들의 삶을 파멸로 몰아 갔던 것이다. 레위기 18:24–30에 의하면 인간의 죄(성적인 범죄나 폭력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를 포함한 모든 죄악)는 그 사람만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더럽히며, 더럽혀진 땅은 사람을 토해내어 멸망시킨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47) Anne Gardner, “Ecojustice: A Study of Genesis 6:11–13,” The Earth Story in Genesis, 117–129.

48) John H.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12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40–242.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동물과 식물)들에게도 자신의 지배권을 공격적으로 난폭하게 사용하였다. 이들의 포악함은 네피림들의 특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용사였고 자신들의 힘으로 피조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다. 결국 땅이 부패했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고대 근동의 길가메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도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의 시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홍수를 일으켰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는 사람들의 악함과 부패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을 멸하려고 홍수를 사용하신 것으로 말한다. 

 

노아는 당대의 부패하고 포악한 이들의 삶과 대비되어서 더욱 돋보인다.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은 선명하다. 대낮에 촛불 하나는 아무런 영향력을 드러낼 수 없다. 하지만 칠흑같은 밤, 촛불 하나는 우리 주위를 환히 비추인다.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떠한가? 한낮과 같이 살만한 시간들도 있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시간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촛불 하나를 잘 준비하여 켜고 있느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두움가운데 당신의 빛을 비추일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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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he Lor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cinten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And d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egrieved him to his heart. So the Lord said, “I will blot out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land, man and animals and creeping things and birds of the heavens, for I am sorry that I have made them.” But Noah f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b Ps. 14:2, 3

c ch. 8:21; Job 14:4; 15:14; Ps. 51:5; Jer. 17:9; Matt. 15:19; Rom. 3:23

d 1 Sam. 15:11; 2 Sam. 24:16; Joel 2:13; [Num. 23:19; 1 Sam. 15:29]

e Isa. 63:10; Eph. 4:30

f ch. 19:19; Ex. 33:12, 13, 16,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5–8.

 

 

5절) 네피림,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낳은 자식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땅에 많아질수록 이땅의 상태는 죄악이 가득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죄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든 계획이 악하다. 인간들은 우리의 문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죄의 영향력을 거절하지 못하고 죄악을 행했다. 본문의 사람들은 가인의 후손, 셋의 후손 모두를 포함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아담과 셋의 후손들 마저도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인의 길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결국 악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며 파괴적으로 셋의 후손을 모두 가인의 길로 가게 만들었고 유일하게 소수, 노아만이 여인의 후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는 모든 설화들에 홍수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홍수의 이야기속에서는 홍수의 원인이 인구 과잉과 이로 인해 발생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소음에 신이 진노하여 홍수를 일으켰다라고 말한다. 노아의 홍수 속에서는 이렇게 다른 신들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죄가 임계점(critical point)를 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땅을 바라보시며 인내하고 참으시는데 그 참을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섰다고 판단하셨기에 이제 심판을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6-7절)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는 주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지은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이 깊은 근심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심하신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 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지었음을 한탄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에 서있는 인간들을 향해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악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이 죄는 모든 피조세계를 타락으로 이끌었다. 이제 세상은 총체적인 타락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락의 상태를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라는 표현을 한다. 우리가 어떤 일에 후회하는 것은 슬픔을 표현함으로 우리가 한 어떤 행동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표현이다. 우리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후회하신다거나, 마음을 바꾸셨다라는 표현은 신학적인 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세가지 방법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단지 재고하는 방법, 신의 개방성(openness of God)

2) 신인동형표현으로 이해, 하나님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행동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3) 이 표현의 번역이 바르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방법, 의미란 사전이나 어휘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용례를 평가함으로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시적 분석(동시대 작가들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분석)에서 첫 단계는 세밀히 묘사된 사전적인 근거를 검토하는 것이다. 조사의 범위를 그 문맥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어근을 가진 동사들의 용례에 주로 국한해 한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근 '나함’ 니팔형 어간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먼저  단어가 언급된 모든 인용구를 모으고, 이어서 그 문맥에서 제시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NIV가  단어에 대 10개의 전혀 다른 번역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다른 번역들과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한 단어가 얼마나 복합적인지를보여 준다. 사전 편찬자의 임무는 어떤 단어에 대해 존재하는 의미의 범주들을 이해하고, 각 범주와의 연관성을 규명하여 연결해 주는 공통분모들을 밝히는 것이다. 전통

적인 번역에서는 나함' 대해 결국 두손을 들고 포기하고 말았으며, 한탄하다, 후회하다, 위로하다, 가없게 여기다, 위로받다, 마음을 바꾸다 둥과 같은 범주들과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재검토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번역들이 정말로 적절히 분리된 범주들인지, 아니면 그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가 인정받지 못한 방식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둥을 물어야 한다. 필자의 분석 결과,  단어에 대해 예전에 주장된 것 이상으로 광범위한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필자는 이 단어를 회계 용어로 볼 가장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기에서 원장부들은 항상 일치해야한다. 즉 차변 기입액과 대변 기입액이 똑같아야 한다. 만약 장부들의 대차가 맞지 않다면, 조정해야 한다. 거래가 있을 때마다 거기에 맞춰 기입도 정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나함 의 니팔형은 개인적,국가적 혹은 우주적 '원장부들 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위로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개인적인 손해로 괴로워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면, 먹구름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보는 것 같이 그가 다시 마음을 잡게 해주는 어떤 행동이나 의해서 ‘원장부들’은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창 24:67; 삼하 13:39).  하나님은 처벌의 과정을 정하실 때, 이따금씩 대사면을 통해 처벌을 하시고 ‘원장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심으로 균형을 유지하실 수 있다(렘 26:13; 욘 3:9-10).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자신들의 악함으로 장차 도래하게 될 불균형의 결과들에 대하여 경고 받았는데도, 회개하여 원장부의 균형을 회복하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렘 8:6). 하나님은 그 원장부에 악이 적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자비로(욜 2:13; 욘 4:2) 혹은 처벌로(렘 18:10)로 그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다. NIV의 10가지 다른 번역들은 모두 이런 식의 표현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정보를 가지고 창세기 6장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사사기 21장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다. 거기 보면 베냐민 족속의 수가 줄어들었고, 다른 족속의 지도자들이 그 상황을 논하려고 함께 모였다. 6절에서 그들은 베냐민을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기"( 나함’ 의 니팔형 ; NN에서는 “grieved’ 로, 개역개정 “뉘우쳐”로 번역함- 역자 주) 시작했다. 그들이 결정한 조치의 과정은 8-14절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균형은 맞춰지지 않았고, 급기야 15절에서 그 백성들은 더욱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설명이 부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즉 “이는(히브리어로 ‘키’ ki) 여호와께 스라엘 지파들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은 창세기 6:6-7에 나오는 ‘나함’이 후회, 슬픔, 유감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상황을 교정하고자 노력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기에(히브리어로 ‘키’) 그 계좌들을 감사하고(auditing the account) 계신 셈이다. 하나님이 취하신 조치의 과정 속에는 지상에서 거의 전 인구를 쓸어버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 계좌들을 감사하는 조치는 인류의 악함으로 균형이 깨어진 ‘원장부의 균형을 잡으려는’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의 일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견제와 균형의 체계’(system of checks and balances)를 시행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뉘앙스 보여 수 있는 영어 동사가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필자는 6-7절을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그 땅에 인류를 지으셨기에 그 계좌들을 감사하셨고 그 때문에 그의 마음이 그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그분이 괴로워하셨다). 그래 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그들을 만든 이후에 그 계좌를 감사해 왔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번역에 사용할 영어 단어가 없어 곤란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번역 그 어근의 의미와 신뢰할 만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으며, 하나님이 후회하거나 반성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성을 제거해줌으로써 그와 관련된 신학적 난제들을 해결해 준다.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도 없으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분은 그 상황을 달아보시고” 그에 따라 그분의 정의감이 그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참조.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단 5:27) 

There are three ways to seek resolution. (1) We can simply rethink our view of God. This is exactly what is happening in the new theology called the “openness of God.”3 (2) We can justify the terminology by seeking to understand ways in which anthropomorphic language is used in describing God’s actions without imputing human limitations to him. This is the path followed in most commentaries. (3) We can reassess the lexical data to see if we are on the right track when we translate terms in particular ways. We must remember that meaning is established by usage, not by dictionaries or lexicons. The latter arrive at meaning by evaluating usage, and sometimes their conclusions must be reevaluated by starting from the beginning and checking the data they used to draw their conclusions. The need for this is especially evident when there is a lack of cohesion in how a term is translated or when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a translation indicate that something may be amiss. Both of these situations exist in the word used here, so a reexamination is in order.

In synchronic analysis (that which explores how contemporary authors used the word), the first step is to examine a narrowly delineated lexical base. This means that the investigation must initially be limited to usage of verbs of the same stem as that used in this context.4 In this verse we are dealing with the Niphal stem of the root nḥm. The procedure is to gather all the references and consider what the contexts suggest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The fact that the niv uses ten different translations for this word,5 some exactly the opposite of others, indicates how complex a word it is.

The job of the lexicographer is to come to an understanding of categories of meaning that exist for a word and to identify the common denominators that define and bring cohesion to each category. Traditional translation has in effect thrown up its hands on nḥm and contented itself with categories such as grieve, repent, console, relent, be comforted, and change one’s mind. In a reexamination, we must ask whether these really are legitimately separate categories or whether some or all of them cohere in ways that have not been recognized. My analysis has concluded that a broader cohesion exists than previously maintained.

I propose that this word can be best understood in accounting terms. In bookkeeping, the ledgers must always be kept in balance; debits equal credits. If the books get out of balance, something must be adjusted. Whenever transactions are made, entries must be made accordingly. The Niphal of nḥm can be viewed in terms of acting to keep personal, national, or cosmic “ledgers” in balance.

If someone has suffered personal loss and is in mourning, his “ledgers” are brought into balance by some action or situation that gets him back on his feet by a silver lining he sees to the cloud (Gen. 24:67; 2 Sam. 13:39). When God has set a course for punishment, it can at times be counterbalanced by an act of grace that revokes that punishment and brings the “ledger” back into balance (Jer. 26:13; Jonah 3:9–10). God is disturbed when people have sinned and been warned of the coming consequences of the imbalance represented by their wickedness, but they refuse to balance their ledgers with repentance (Jer. 8:6). God is known as a God who does not allow evil to stand on the books but balances it with either grace and mercy (Joel 2:13; Jonah 4:2) or with punishment (Jer. 18:10). All of the niv’s ten different translations can be understood in these terms.6

Taking this information back to Genesis 6, we must first make a stop in Judges 21. Here the tribe of Benjamin has been decimated, and the other tribal leaders have gathered to discuss the situation. In verse 6 they begin seeking to “balance the ledgers” (niv “grieved,” the Niphal of nḥm) for Benjamin. The course of action they decide on is described in verses 8–14. Still balance is not achieved, and in verse 15 the people seek to “balance the ledgers” further, here with the important explanation, because (Heb. ki) the Lord has made a gap.

We are now in a position to suggest that nḥm in Genesis 6:6–7 has nothing to do with regrets, grief, or being sorry. Yahweh is seeking to redress the situation. He is auditing the accounts7 because (Heb. ki) he had made humankind. His course of action entails wiping almost the entire population from the earth. This action of auditing the accounts is the first part of his ultimate intention to “balance the ledger” that has been put out of balance by the wickedness of humankind.8 We can say, then, that God is enforcing a system of checks and balances as part of the equilibrium that he is maintaining in the world.

It would be wonderful if there were an English verb to capture this nuance, but alas, I can think of none. Consequently, I must resort to circumlocution: “The Lord audited the accounts because he had made humankind in the earth and his heart tormented him (i.e., he was distressed) over it. So the Lord said, ‘I will wipe humankind,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earth … because I have audited the accounts since I have made them.’ ” Despite the discomfort of not having an English term to use in translation, this proposal lends a credible cohesion to the meaning of the root and resolves the theological difficulties by eliminating any need to explain how God could be sorry or repent. This does not suggest that God is without emotion or feeling about what he is doing. It simply suggests that his action is motivated by his sense of justice as he “weighs” the situation (cf. “You have been weighed on the scales and found wanting,” Dan. 5:27).

3 See fuller discussion on pp. 106–7.

4 The “stems” in Hebrew refer to the various verbal forms that indicate that the verb is active (e.g., Qal), passive (e.g., Niphal), causative (e.g., Hiphil), and so on. Additionally, we will achieve the best results if we can eliminate those occurrences that are clearly in a different time period or genre or are used in specialized contexts or phrases. In the present case, however, these issues turn out not to be relevant.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5 The lxx likewise uses ten different translations.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6 The most difficult occurrence is probably 1 Sam. 15:29, which, in apparent contradiction to Joel 2:13, says that God is not like people to go about “changing his mind.” This needs to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parallel term used in this verse, “lie”; it means that he doesn’t balance his words so as to deceive. The English term for this is “equivocat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 Obviously this is a modern concept that would not have occurred to the Israelites—but translation always has to find a point of communication in the modern world of discourse if it is to succeed. Israel would be inclined to think of balancing a scale rather than balancing books.

8 In a similar way, the verses with the closest phrasing to this (1 Sam. 15:11, 35) depict Yahweh’s seeking to balance the ledger of kingship by removing Saul from office and appointing David.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308–311.

 

히브리어 ‘나함’ 후회하다, 한탄하다라는 단어는 매우 복잡한 단어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2. The meaning of be sorry, repent, change one’s mind. (a) The word is used to express two apparently contrasting sentiments in 1 Sam 15, where God says, “I am grieved (נָחַם) that I have made Saul king” (v. 11; cf. v. 35), but where Samuel also announces that “the Glory of Israel does not lie or change his mind (נָחַם),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change his mind (נָחַם)” (v. 29). The explanation seems to be that God does not capriciously change his intentions or ways of acting. It is the change in Saul’s behavior that leads to this expression of regret. The reference is notable as being one of the rare occasions when God is said to repent or change his mind concerning something intended as good (cf. Gen 6:6).

(b) In many cases the Lord’s “changing” of his mind is a gracious response to human factors. Thus in Jeremiah we often read that repentance on the part of the people (usually שׁוּב, but נָחַם in Jer 8:6 and 31:19) will make it possible for God to repent, change his mind (נָחַם): 18:8, 10; 20:16; 26:3, 13, 19; cf. 42:10. Note also God’s response to Amos’s pleas on behalf of Israel (Amos 7:3, 6).

(c) In other places we are told or are left to infer that the change is due to feelings of compassion for a person or people. The ni. sometimes means “have compassion.” So the Lord “had compassion” on the people because of their groaning, although they deserved their punishment (Judg 2:18), and the people of Israel had compassion for Benjamin (Judg 21:6, 15) after they had vowed not to give them their daughters in marriage; having made a decision to punish them they tried to find a way of lessening the effects of the punishment (cf. Ps 90:13; Jer 15:6).

(d) In all but five occurrences of נָחַם the subject is God. The vb. occurs in the set formula describing God as “gracious (חַנּ֤וּן) and compassionate (רַחוּם),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love (חֶסֶד), and he relents (נִחָם) from sending calamity” (Joel 2:13; Jon 4:2, cf. 3:9–10).

ni. niphal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82.

 

8절) 하나님께서는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맞게 되는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비추어주신다. 바로 그것은 노아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죄악이 관영한 세상속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눈에 합한 삶을 살아간 것이다. 

 

노아는 당시의 모든 인물들과 차별적인 사람이다. 노아와 모세만이 유일하게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인물이다.(출 33:12, 13, 16, 17) 한명을 더 추가한다면 아브라함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창 18:3; 19:19)

Noah is distinguished from the rest of humanity. Apart from Noah, the only other person in the OT who is described as finding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is Moses, in Ex. 33:17 (and possibly Abraham; cf. Gen. 18:3). Placed on a par with Moses, Noah is rescued from the looming annihila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1.

 

A에 해당되는 창세기 6:6a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만든 것을 한탄하고 있고, A’에 해당되는 창세기 6:7d에서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을 만든 것을 한탄하고 있다. B에 해당되는 창세기 6:6b에서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고 있는 반면에 B’에 해당되는 창세기 6:8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은혜를 입고 있다. C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제거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7절의 ‘와요멜’(וַ֣יֹּאמֶר)의 ‘아말’(אָמַר)은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화의 상대가 없을 경우 화자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를 모두 땅에서 쓸어 버리겠다고 한다. 사실상 창세기 1장의 5–6일에 창조된 생명체를 언급하고 있다. 물고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인 물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리고 창세기 6:7은 창세기 6:3에서 인간의 날이 120년이라고 했던 말과 상호 관련이 있다.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는 한결같이 급격하게 늘어난 인간들 만들어 낸 소음 때문에 분노한 신들이 홍수를 통해 멸망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의도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분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였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교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 의롭고 완전한 자가 노아였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35–236.

 

 

당시 죄악이 관영하였고 사람들은 항상 악한 생각을 했다. 악함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바라보시면 한탄 하셨고, 혹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하셨다. 그의 일환으로 모든 것을 리셋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발견되었다라는 표현은 바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후 9절을 통해서 노아가 의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이다. 

하나님은 견제와 균형의 체계를 운영하시는 분이시다. 주식 시장은 강세장과 약세장으로 나뉘는데 이것에 영향을 미치는 요이는 수천 가지에 달한다. 정부가 혹은 중앙은행이 균형이 깨어졌을때 사이드카를 발동하여 시장 상황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상을 감독하시고 조정하신다. 우리의 삶이 죄로 인해서 왜곡되고 망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감사하신다. 감찰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시는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초월적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조정하시기 위해서 홍수라는 방식을 선택하신다. 우리는 이 심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가 가득찬 세상을 해결하시고 그분이 원히는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대홍수를 준비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혼돈을 사용하실 수 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에 빠진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혼돈을 사용하시기도 한다.(하나님의 몽둥이, 찰스 콜슨-워터 게이트-유죄 인정후 복역-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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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man began to multiply on the face of the land and daughters were born to them,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an were attractive. And they took as their wives any they chose. Then the Lord said, z“My Spirit shall not abide in1 man forever, afor he is flesh: his days shall be 120 years.” The Nephilim2 were o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also afterward, when the sons of God came in 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ore children to them. These were the mighty men who were of old, the men of renown.

z 1 Pet. 3:19, 20; [Neh. 9:30; Gal. 5:16, 17]

1 Or My Spirit shall not contend with

a Ps. 78:39

2 Or giant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1–4.

 

네피림(Nephilim)

 

1절) 본문에서 사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담’이다. 앞서 5장 1-3절에서도 아담이라는 단어를 일반명사로서의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사람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고유명사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남자인 아담을 나타내기도 한다. 본문 1절에서 사용된 아담도 아담 자신을 포함한 남자와 여자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이다. 앞서 5장에서는 아들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6장에서는 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세기 6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노아 홍수의 원인이고(6:1–8), 둘째는 홍수에 앞서 노아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다(6:9–22). 창세기 6:1–8의 내용은 창세기 5장에서 시작된 톨레도트의 결론 부분이다. 창세기 6:1–8과 창세기 5장은 같거나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어의론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1)

한글 성경이 사람으로 번역한 창세기 6:1의 아담은 누구인가? 창세기 6:1의 아담은 최소한 창세기 5:1–3의 아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5:1–3의 아담은 창세기 5:1과 3의 경우처럼 아담 자신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는 일반 명사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6:1의 아담도 아담 자신을 포함한 일반 명사이다.

창 6:1 וַיְֽהִי֨ כִּֽי־הֵחֵ֣ל הָֽאָדָ֔ם לָרֹ֭ב עַל־פְּנֵ֣י הָֽאֲדָמָ֑ה וּבָנ֖וֹת יֻלְּד֥וּ לָהֶֽם

와여히 키–헤헬 하아담 라로브 알–페네 하아다마 우바노트 울레두 라헴

그 이유는 6:1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우바노트 울레두 라헴’(וּבָנ֖וֹת ילֻּדוּ֥ לָהֶֽם)이 란 표현에서 ‘라헴’(לָהֶֽם)의 ‘헴’은 대명사 접미사 3인칭 남성 복수이며 앞에 있는 ‘하아담’(הָאָדָ֔מ)을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5:2의 ‘아담’(אָדָ֔מ)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처럼 창세기 6:1의 아담도 보편 인간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5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복을 준 것을 언급한 후 5:3에서 아담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6:1은 아담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창세기 5:3 이하에서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출생을 언급하면서 아들들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에 창세기 6:1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딸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2)

1) Kenneth A. Mathews, Genesis, 321. Willem A. VanGemeren, “The Sons of God in Genesis 6:1–4,”

2)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369–370. “It describes mostly an action that takes its beginning in an event or process that is continuously and constantly going on.”Gordon Wenham, Genesis 1–15, 139. Victor P. Hamilton, Genesis Chapters 1–17, 262. 43–2 (1981): 325–327.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08–209.

 

본문의 번성하다라는 표현은 앞서 창 1:28의 문화명령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당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번성해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죄악도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베네 엘로힘’으로 표현된 '엘로힘의 아들들’은 본문의 엘로힘을 장엄의 복수로 볼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진다. 

 유대인들의 외경 에녹 1서 6:1-2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 6장 1-2절의 내용을 타락한 천사들로 보고 있다. 

61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children of men had multiplied that in those days were born unto them beautiful and comely daughters. 2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the heaven, saw and lusted after them, and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us wives from among the children of men and beget us children.’

 Robert Henry Charles, ed., Pseudepigrapha of the Old Testament, vol. 2 (Oxford: Clarendon Press, 1913), 191.

 

일반적으로 두번째 견해를 따르지만 앞서 창 3:5에서 엘로힘이 천사들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창 3장 15절의 뱀이 타락한 천사라면 이 뱀의 후손을 엘로힘의 후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본문의 2절과 3장 6절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saw … attractive(good) … took)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된 것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사용되면 결국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 하와가 보기에 좋았던 것이 하나님께 악했던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2절)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악했다.(5절) 에덴 사건 이후의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다. 

 

첫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

첫째 주장은 엘로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인간의 딸이며, 천사와 인간의 딸이 결혼하여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이다.5) 이 주장은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의 외경 에녹 1서 6–11에 나올 뿐만 아니라 초대 교부들 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6) 이 주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욥기 1:6과 38: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사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7)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38:7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욥기 1:6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번역하고 있다.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 표현을 천사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욥기 38:7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의 일을 두고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기뻐하며 노래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엘로힘의 아들들은 인간이 아니라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근거는 유다서 1:6–7이 이 사건을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간 부패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마치 천사들과 인간의 성적인 관계를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천사와 인간의 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문자적인 해석이고, 창세기 6:2에서 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서로 대조를 이루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신화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8) 고대 근동의 창조와 홍수 기사들은 신들간의 전쟁을 비롯한 신화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반면에 구약 성경의 창조 및 홍수 기사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였고, 하나님이 홍수를 보냈다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신들의 개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구약 성경이 창세기 6:1에서 홍수로 인한 인류 멸망을 이유로 신화적인 내용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심지어 아트라하시스와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홍수 설화에서 홍수의 원인은 신적인 존재들과 인간의 성적인 타락이 아니다.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 홍수의 원인은 항상 인간이 너무 시끄럽게 함으로 신들을 괴롭게 하였다는 것이다.9)

둘째, 엘로힘의 아들들(베네 엘로힘, בְנֵי־הָוֹאֱלֹהִים)이 천사들이라면 천사들의 죄악 때문에 왜 대홍수라는 끔찍한 징벌을 사람이 받아야 하는가? 창세기 6–8장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홍수의 책임이 천사들에게 있다는 말이 없다. 혹시 천사의 유혹을 사람들이 뿌리치지 못하고 응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여자들인데 왜 남자들도 함께 책임을 지고 멸망 당해야 하는가? 여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당시 남성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신약의 지지가 의문스럽다. 유다서 6–7절의 그 이웃 도시들도 천사들에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려고 시도했는가?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천사의 정체를 알고 성범죄를 범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단지 너무 잘생겨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구분 못하고 덤벼 들었나? 그리고 유다서 6절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려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저버린 사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것은 에덴 사건과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7절의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에서 저희는 지시 대명사 ‘투토이스’(τούτοις)이며 “이들과 같은 모양으로”로 번역해야 적절하며, ‘이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유다서 1:4에서 거론된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10)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넷째, 마태복음 22:23–33에서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을 두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천사들처럼 산다고 했다. 이 말은 천사들처럼 결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성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창세기 6:2–4의 천사들과 인간의 결혼 가능성을 근원부터 흔들어 버린다.

다섯째,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보는 견해이다. 요세푸스와 필로가 이 견해를 가졌으며, 그 외에도 에녹 1서와 쥬빌리 그리고 바룩 2서에서도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여긴다.11) 둘째 전통은 정통 랍비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지 않고 지배자나 권력자들의 아들들로 생각했다. 탈굼이나 랍비 시대의 문헌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을 왕족으로 생각했다. 탈굼 온켈로스와 탈굼 슈도 조나단은 창세기 6:2과 6:4의 엘로힘의 아들들을 이렇게 생각했으며, 미드라쉬 랍바와 탈굼 네오피티는 사사들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심마쿠스도 창세기 6:2를 지배자들의 아들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필로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여기면서도 다른 책에서는 이들을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Q. Gen. 1.92).

둘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셋의 경건한 후손들

둘째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경건한 후손들로, 그리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의 딸로 생각하며, 이들의 결혼은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이기 때문에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줄리어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가 제창하여 A.D. 2–3세기 이후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해 자리잡게 되었으며,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을 거쳐 현재까지 지배적인 주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2) 이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경건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착안하였다. 예를 들면, 시편 2:7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메시아 왕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한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표현한다. 신명기 14:1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라고 한다. 그리고 호세아 11:1과 이사야 43:6도 마찬가지이다.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사 43: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호세아 11:1에서는 출애굽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을 내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고, 이사야 43:6에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베풀 것을 약속하며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주장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여기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을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이를 노아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도 적용 가능한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째,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 10명은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이었다. 이들의 가정 생활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담과 노아 그리고 노아의 아들들은 모두 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한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5–6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들 중에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창세기 6:1에서 “딸들이 사람에게 났다”는 말이나 6:2의 “사람의 딸들”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창세기 6:2의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딸들로 규정하고 한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셋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들—지배자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신의 아들이란 호칭은 권력과 힘을 가진 왕들이나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붙여졌다.13) 출애굽기 21:6; 22:8–9, 28; 시편 82:6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5장에 왕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클라인(M. Kline)이 제시하는 것처럼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손들은 일종의 권력자였을 가능성이 있다.14) 가인과 라멕이 휘두른 폭력과 라멕이 복수의 아내를 취한 것과 그의 후손들이 금속과 악기와 목축을 하게 되는 것이 당대의 권력자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리고 창세기 4:17에서 가인이 성을 건축한 것은 가인의 의도와 목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가인이 건축한 것은 전원 주택 한 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벽을 갖춘 작은 도시를 건축하였고, 그 도시의 이름에 자식의 이름을 붙였다. 가인이 그 도시의 소유자라는 말이고, 이는 가인을 일종의 왕이나 작은 영토의 지배자로 볼 수 있게 한다. 권력자들이 사람의 딸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딸들을 취하는 장면은 창세기 12:10–20; 20:1–11; 26:6–11에서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 발단이긴 하였지만, 공교롭게도 이집트 왕이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여 갔다. 엘로힘의 아들들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딸들을 마음대로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을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전통적인 견해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창세기 6:2의 엘로힘의 아들들을 문자적 해석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창세기 1–6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문의 배경을 고려할 때 엘로힘의 아들들은 뱀의 후손 또는 가인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아담과 셋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5) 엘로힘의 아들들의 정체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창세기 6:2–4만 제한적으로 읽고 이해해서는 안되고 창세기 1–6장과 노아 홍수와 관련된 다른 성경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선 창세기 6:1–8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창세기 6:1–8은 다음과 같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A. 아담 후손, 번성 6:1

B. 엘로힘의 아들들의 범죄 6:2

C. 여호와의 심판, 독백 6:3

B’. 엘로힘의 아들들의 범죄 6:4

C′. 여호와의 심판, 독백 6:5–7

A′. 아담 후손, 노아의 의 6:8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B와 B’은 범죄 사실을 기록하고 C와 C’는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결심을 기록하여 대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B와 B’는 범죄 행위자를 엘로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C와 C’는 심판 대상을 각각 사람으로 표현한다. C와 C’의 여호와의 독백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을 여호와로만 표현하고 엘로힘이란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B와 B’의 범죄 행위자와 C와 C’의 심판 대상의 관계는 무엇일까? 동일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면 6:2에서 사람의 딸들을 빼앗은 자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인데 이들 때문에 사람이 비난 받고 심판 받을 이유가 없다.

창세기 6:2과 4의 ‘엘로힘의 아들들’에서 엘로힘의 의미는 ‘엘로힘의 아들들’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엘’(אֵל)또는 ‘엘로아흐’(אֱלוֹהַּ)의 복수로서 신들 또는 천사들을 의미하지만, 장엄복수로 사용되었을 경우 하나님으로 해석된다. 창세기 6:2과 4절에서는 구문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단순 복수인지 장엄 복수인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6) 그러므로 엘로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엘로힘을 창세기 1–6장의 배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1–6장에서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표현하는 장엄복수이지만, 천사들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바로 사탄이 하와에게 했던 창세기 3:5에서 천사들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כִּי יֹדֵ֣עַ אֱלֹהִ֔ים כִּ֗י בְּיוֹם֙ אֲכָלְכֶ֣ם מִמֶּ֔נּוּ וְנִפְקְח֖וּ עֵֽינֵיכֶ֑ם וִהְיִיתֶם֙ כֵּ֖אלֹהִ֔ים יֹדְעֵ֖י ט֥וֹב וָרָֽע׃

키 요데아 엘로힘 키 베욤 아칼켐 밈멘누 베니프케후 에이네이켐 비이템 케로힘 요드에이 토브 와 라아

창세기 3:5의 주석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첫 번째 ‘엘로힘’(אֱלֹהִ֔ים)은 동사 ‘요데아’(יֹדֵ֣עַ)가 단수이기 때문에 장엄복수로서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두 번째 엘로힘은 동사 ‘요데에’(יֹדְעֵ֖י)가 복수이기 때문에 장엄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 복수의 신들 또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에스겔 28:16은 이 천사들 중에 교만하여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포함되어 있고, 창세기 3:15의 뱀이 바로 이 타락한 천사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창세기 3:15의 뱀의 후손을 엘로힘의 후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6:2과 6:4의 베네 엘로힘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창세기 3장의 엘로힘의 후손 또는 뱀의 후손에 대한 표현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둘 중의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동을 살펴봐야 한다.

창세기 6:5의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들의 행동이 창세기 3:6에서 타락한 천사의 유혹에 이끌려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창 3:6 וַתֵּרֶא הָאִשָּׁה כִּי טוֹב הָעֵץ 와테레 하이사 키 토브 하에츠

창 6:2 וַיִּרְאוּ בְנֵי־הָאֱלֹהִים אֶת־בְּנוֹת הָאָדָם כִּי טֹבֹת הֵנָּה 와일우 베네–하엘로힘 에–베노트 하아담 키 토보트 헤나

창 6:5 וַיַּרְא יְהוָה כִּי רַבָּה רָעַת הָאָדָם 와얄 야웨 키 랍바 라아트 하아담

창세기 3:6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며 했던 표현(וַתֵּרֶא … כִּי טוֹב הָעֵץ)과 동일하게 6:2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보기에 좋았더라’고(וַיִּרְאוּ … כִּי טֹבֹת הֵנָּה)한다. 하와가 보기에 좋았던 것이(טוֹב), 하나님께는 악(רָעַת)했던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았던(טוֹב, 창 6:2) 것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악했다(רָעַת, 창 6:5). 에덴 사건 이후의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다. 창세기 6:2–4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을 임의로 빼앗아 여러 명의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1–6장에서 가인의 후손 라멕에게서만 볼 수 있다.17)

신약 성경의 유다서와 베드로전서 2:5는 창세기 6:1–4의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위가 가인의 삶의 길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유다서를 살펴보자.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서 1:19는 당시의 이단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분명히 노아 홍수 때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고 있다. 유다서 1:19은 창세기 6:3과 아주 흡사하다.

유 1:19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리고 유다서 1:15에서 “뭇사람을 심판하사”는 노아 홍수 심판를 가리키며, 그들의 죄목과 유사한 표현을 베드로전서 2:5의 노아와 관련된 말에서 볼 수 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받을 사람들에 대해 유다서 15(ἀσεβεῖς)와 베드로전서 2:5(ἀσεβῶν)은 공통적으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들이 동일한 행위를 한 자들이며, 이런 자들이 최소한 에녹 시대 때부터 노아 시대 때까지 존재하다가 노아 홍수를 통해 심판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유다서에서 에녹이 예언한 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베드로전서 2:5의 노아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과 동일하며 이들은 모두 창세기 6:1–4에 있는 엘로힘의 아들들이다. 그렇다면 유다서에서 말하는 “모든 경건치 않은 일”은 6:2의 “자기의 보기에 좋은 모든 자들”을 아내로 삼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강팍한 말”은 무엇일까? 혹시 자칭 ‘엘로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이들의 정체에 대해 유다서 1:11은 결정적인 말을 하고 있다.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그의 시대의 이단들을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라고 말한다. 유다가 이들을 에녹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인의 길에 행한 자는 유다서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에녹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도 포함된다. 즉 유다서 1:11은 에녹과 노아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었고 뱀의 후손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5)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이쉬타 여신은 길가메쉬에게 청혼하지만 길가메쉬는 이를 거절한다. ANET 83–84. F. B. Huey, Jr. and John H. Walton, “Are the Sons of God in Genesis 6 Angels?,” The Genesis Debate, 184–209.

6) 에녹 1서 6:1–2 In those days, when the children of man had multiplied, it happened that there were born unto them handsome and beautiful daughters.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heaven, saw them and desired them;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wives for ourselves from among the daughters of man and beget us children.” Irenaeus, Against Heresies 4.36.4. Augustine, City of God 15.23.

7) Cassuto, Genesis I, 292. Sarna, Genesis, 45.

8) 창세기 6:1–4을 고대 근동의 신화로 여기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Hermann Gunkel, Genesis, 56–57. David J. A. Clines, “The Significance of the Sons of God Episode (Genesis 6:1–4) in the Context of the Primeval History (Genesis 1–11),” JSOT 13 (1979): 33–46. David L. Petersen, “Genesis 6:1–4, YAHWEH and the Organization of the Cosmos,” JSOT 13 (1979): 47–64. Ronald S. Hendel, “Of Demigods and the Deluge: Toward an Interpretation of Genesis 6:1–4,” JBL 106–1 (1987): 13–26. Helge S. Kvanvig, “Gen 6,1–4 as an Antediluvian Event,” Scandinavian Journal of the Old Testament 16–1 (2002): 79–112.

9)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Creation, the Flood, Gilgamesh, and Oth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20.

10) 유다서 8절에서도 4절의 ‘가만히 들어온 자들’ 을 지시대명사 후토이(οὗτοι)를 사용하여 지시하 고 있다.

11) Josephus, Ant. 1:73; Philo, On the Giants 6; Q. Gen. 1:92; CD 2:18; 1 Enoch 6:2, 6; 106. 13–14; Jubilees 5:1; 10:1–6; 2 Baruch 56:12–15.

12) John H. Walton, Genesis, 291. Calvin, Genesis, 238. “It was, therefore, base ingratitude in the posterity of Seth, to mingle themselves with the children of Cain, and with other profane races; because they voluntarily deprived themselves of the inestimable grace of God.”

13) Stephen Hre Kio, “Revisiting the Sons of God in Genesis 6.1–4,” The Bible Translator 52–2 (2001): 234–239.

14)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2–114.

15) Meredith G. Kline, “Divine Kingship and Genesis 6:1–4,”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4–2 (1962): 187–204.

16)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철저한 직역을 선호한 Aquila는 ‘베네 엘로힘’(בני אלהים)을 ‘호이 휘오이 톤 데온’(οἱ υἱοὶ τῶν θεῶν)으로 번역하여, 엘로힘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들로 보 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헬라어 역본들은 엘로힘을 단수로 보았다. P. S. Alexander, “The Targumim and Early Exegesis of Sons of God in Genesis 6,” Journal of Jewish Studies 23–1 (1972): 60–71. Meredith Kline은 ‘베네 엘로힘’ 을 “sons of gods” 로 여긴다.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1–117.

17) Keil and Delitzsch, First Book of Moses, 13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11–221.

 

3절) 앞서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여인들을 취함으로 죄를 짓고 있는 이들에대한 하나님의 후회가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왜먀하면 그들이 육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함께 하다라고 번역된 ‘야돈’이라는 단어는 ‘재판하다, 논쟁하다’(contend with)라는 의미와 ‘머무르다, 함께하다’(abide in)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ESV와 NIV는 이를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앞선 재판하다라는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의 신이 더이상 인간을 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배려하여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받게 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배려가 더이상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인 함께 하다라는 의미라면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더이상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후에 그들은 육체다라는 표현은 그들이 타락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될 인간 육체의 나약함을 표현한 것이다. 엘로힘의 아들들처럼 사람도 차락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더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창 6:3,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Gn 6:3, NIV11) 『Then the LORD said, “My Spirit will not contend with* humans forever, for they are mortal**; their days wi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 *Or My spirit will not remain in / **Or corrupt』

NIV성경은 ‘야돈’(יָד֨וֹן)의 원형을 ‘딘’(דִין, 재판하다)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NRS는 70인역처럼 ‘둔’(דוּן, 머무르다)을 원형으로 간주하고 번역 하였다.18) 둘 중에 어느 것이 정확한 의미인지 확증하기 어렵다. ‘딘’(דין)이 동사의 원형이라면, 그 의미는 하나님의 신이 더 이상 인간을 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배려하여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받게 된다고 하며 보복 금지 같은 하나님의 배려가 더 이상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둔’(דוּן)이 원형이라면,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에서 인간을 생령이 되게 하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핵심 요인이었던 하나님의 성령이 더 이상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19) 창세기 1–6장의 배경에서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하지만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의 영이 다시 물로 뒤 덮인 지구 위에 강림하는 것으로 보아 70인역 번역 전통을 따라 ‘머무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18)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3.

19) Sarna, Genesis, 46. 사르나는 나의 신을 창세기 2:7의 생령으로 생각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2–223.

 

하나님께서 그들의 날을 120년이 되게 하셨다. 이는 이제 인간의 수명을 120살이 되게 하셨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본문의 120년을 앞으로 노아 홍수의 심판까지의 남은 시간으로 보기도 한다. 

 120년의 의미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이를 인간의 수명으로 여긴다. 창세기 5장에는 사람들이 평균 900살을 살며 장수한다. 그러나 마음에 항상 악한 일만 생각하는 인간의 수명을 하나님께서 치명적으로 단축시켰다고 이 견해는 주장한다. 이 견해의 약점은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이 수백 년씩 장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12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평균 900년을 살던 인간이 노아 홍수 이후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 들게 되었기 때문에 이 표현이 인간 수명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두 번째 견해는 120년을 노아 홍수 심판까지 남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견해의 약점은 창세기 5:31에서 노아의 나이가 500살이었음을 밝힌 후 6:1–4의 메시지가 나왔기 때문에 노아의 나이 500+120은 620년이 되는데 반해 노아 홍수는 노아 나이 600살에 발생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6:1–4의 메시지가 반드시 노아 나이 500살에 주어졌다고 볼 필요는 없다. 창세기 6:5–7은 둘째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6:5–7은 6:3의 내용과 대비된다. 6:3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이 더 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과 그들의 죄악에 대해 부정적이다. 6:5–7도 역시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창조한 것 자체를 후회한다. 6:3에서 인간의 날을 120년이라고 했는데, 6:7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땅에서 제거하되 짐승과 기는 것과 새들까지 모두 제거하겠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6:3의 120년은 홍수 때까지 남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4–225.

 

4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네피림은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존재들이다.  

네피림,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구약에서 민 13:33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거인족을 가리킨다. 이 둘이 같은 대상이라면 이들은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며 민수기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이 네피림들을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면서,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였다. 히브리어에서 ‘네필림’은 ‘넘어진 사람들, 타락한 자들'을 의미하는데 70인 역에서 이를 헬라어로 ‘기간테스’(거인들)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민 13:33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70인역이 오역이라면 네피림을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거인으로 이해하는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네피림은 전쟁에 능한 용사들, 이땅에 포악함이 가득하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Nephilim. The meaning of this term is uncertain. It occurs elsewhere in the OT only in Num. 13:33, where it denotes a group living in Canaan. If both passages refer to the same people, then the Israelite spies (Num. 13:33) are expressing their fears of the Canaanites by likening them to the ancient men of renown. Although in Hebrew Nepilim means “fallen ones,” the earliest Greek translators rendered it gigantes, “giants.” This idea may have been mistakenly deduced from Num. 13:33; one must be cautious about reading it back into the present passage. The Nephilim were mighty men or warriors and, as such, may well have contributed to the violence that filled the earth (see Gen. 6: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1.

A final subject for investigation is the identity and fate of the enigmatic Nephilim (Gen 6:4; Num 13:33). The term itself almost certainly means “fallen ones,” whether morally fallen in the general sense or fallen from (i.e., cast out of) heaven in a more specific sense. It has been plausibly proposed that the Nephilim were princes born into the royal houses of the “sons of God” (Gen 6:4) and that they were “the mighty tyrants who … esteemed their might to be their right” (Kline, 196). Certain Jewish exegetes have ingeniously assumed that the later Nephilim strain of Num 13:33 was preserved through the Flood in the persons of Noah’s daughters-in-law (cf. Kline, 197, n. 30). Others, positing a local or regional flood, have suggested that the Nephilim survived through migration (Van Broekhoven, 519).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78.

네피림은 일반적으로 동사 ‘나팔’(נפל)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떨어지다,’ ‘넘어지다’ 또는 ‘숙이다’이다. 이에 근거하여 타락한 자들, 즉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전통이 있었다.29)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후대의 신학적인 해석이지 창세기 자체에는 아주 생소한 내용이다. 창세기 6장 이전 배경에서 ‘나팔’(נפל)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 사건이다. 창세기 4:6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을 때,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나팔, נפל).30) 창세기 4:6–7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있는(나팔, נפל)모습을 지적하면서, 그가 선을 행하면 그의 얼굴을 들 수 있다(나사, נשׁא)고 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나팔’(נפל)과 반대되는 표현 ‘나사’(נשׁא)를 사용하여 가인의 선을 행하지 않음을, 또는 그의 악을 지적하였다. 가인은 하나님이 그와 그의 제물을 죄 때문에 받아 주지 않음으로 얼굴을 떨어뜨린 일종의 네피림이었다.

엘로힘의 아들들과 네피림은 냉소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31) 예를 들면, 함의 후손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기이한 사냥꾼이라고 불렸고, 당대의 용사라고 불렸다.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무엘을 찾은 사울이 예언한 것을 두고 “사울도 선지자에 속하느냐”는 속담이 된 것처럼 이 표현도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29) Sarna, Genesis, 46.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6.

30) Victor P. Hamilton,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70. 해밀턴은 네피림을 능동 분사 ‘노페림’(נֹפֵלִים, the falling ones)으로 스스로 떨어뜨리는 자나 자연스럽게 떨어져서 죽은 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31)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6.32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8–229.

 

 

앞서 가인의 계보와 아담(셋)의 계보를 보았다. 이렇게 땅위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에덴을 확장했어야했지만 도리어 이 사람들의 많아짐은 죄악의 번성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자(셋)의 후손으로 보던, 가인의 후손이나 지배자, 타락한 천사들로 보던 간에 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육신이 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이 네피림인데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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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eth had lived 105 years, she fathered Enosh. Seth lived after he fathered Enosh 807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Thus all the days of Seth were 912 years, and he died.

When Enosh had lived 90 years, he fathered Kenan. 10 Enosh lived after he fathered Kenan 815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1 Thus all the days of Enosh were 905 years, and he died.

12 When Kenan had lived 70 years, he fathered Mahalalel. 13 Kenan lived after he fathered Mahalalel 840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4 Thus all the days of Kenan were 910 years, and he died.

15 When Mahalalel had lived 65 years, he fathered Jared. 16 Mahalalel lived after he fathered Jared 830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7 Thus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895 years, and he died.

18 When Jared had lived 162 years, he fathered tEnoch. 19 Jared lived after he fathered Enoch 800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0 Thus all the days of Jared were 962 years, and he died.

21 When Enoch had lived 65 years, he fathered Methuselah. 22 Enoch uwalked with God2 after he fathered Methuselah 300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3 Thus all the days of Enoch were 365 years. 24 Enoch u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3 vfor God took him.

25 When Methuselah had lived 187 years, he fathered Lamech. 26 Methuselah lived after he fathered Lamech 782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7 Thus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969 years, and he died.

28 When Lamech had lived 182 years, he fathered a son 29 and called his name Noah, saying, “Out of the ground wthat the Lord has cursed, this one shall bring us relief4 from our work and from the painful toil of our hands.” 30 Lamech lived after he fathered Noah 595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31 Thus all the days of Lamech were 777 years, and he died.

32 After Noah was 500 years old, Noah fathered xShem, Ham, and yJapheth.

s ch. 4:26

t Jude 14

u ver. 24; ch. 6:9; [Mic. 6:8; Mal. 2:6]

2 Septuagint pleased God also verse 24

u [See ver. 22 above]

3 Septuagint was not found

v Heb. 11:5; [2 Kgs. 2:11]

w ch. 3:17

4 Noah sounds like the Hebrew for rest

x ch. 6:10

y ch. 10:2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5:6–32.

 

본문은 이제 셋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다. 이 기록은 계보의 공식을 정확히 따른다. 

A라는 사람은 X년에 B를 낳았고, B를 낳은 후 Y년을 더 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는 Z년(X+Y)을 살고 죽었더라.

이름

출산 나이

아들이름

출산후 수명

전체 수명

출생연대

사망연대

아담

130

800

930

0

930

105

에노스

807

912

130

1042

에노스

90

게난

815

905

235

1140

게난

70

마할랄렐

840

810

325

1235

마할랄렐

65

야렛

830

895

395

1290

야렛

162

에녹

800

962

460

1422

에녹

65

므두셀라

300

365

622

987

므두셀라

187

라멕

782

969

687

1656

라멕

182

노아

595

777

874

1651

노아

500

셈, 함, 야벳

100+350

950

1056

2006

아담-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

여기에 등장하는 10명의 수명을 보면 에녹을 제외하고 거의 900세 이상을 산 것으로 보인다. 

 

21-24절)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가운데 유일하게 아담의 7대손인 에녹에게서 다른 패턴이 발견된다. 에녹이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점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다라는 표현은 ‘walked with God’라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한다. 

(창 6:9, 개정)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미 6:8, 개정)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 2:6, 개정)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에녹의 삶, 하나님과 동행한 삶은 믿음의 본을 보여준다.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데려감을 당한 사건은 우리 믿는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영원한 부활을 소망할 수 있게 해준다. 

(히 11:5-6, 개정)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롬 8:11, 개정)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앞에서 걷는(walking before)’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인 앞에서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의 행위와 신뢰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나란히 동행하다(walking with)’는 영적인 사귐과 교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거닐 때(미트할렉, מִתְהַלֵּ֥ךְ)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 숨었고 가인은 하나님을 피해 도망다니며 성에 숨어 살았지만, 에녹은 그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한다(이트할렉, יִּתְהַלֵּ֨ךְ). 에녹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하게 하는 굉장한 표현이다. 덧붙여서 에녹을 선지자라고 불렀다. 에녹이 했던 일은 유다서 1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4–15)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마침내 365세를 향수한 후 땅에서 사라진다. 창세기 5:24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ואְֵינֶנּוּ כִּֽי־לָקַ֥ח אֹת֖וֹ אֱלֹהִֽים׃ 베에이넨누 키–라카 오토 엘로힘

‘그리고 그는 거기에 없었다’는 표현의 히브리어 베에이넨누(וְאֵינֶנּוּ)는 욥기 7:21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을 완곡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כִּֽי־עַ֭תָּה לֶעָפָ֣ר אֶשְׁכָּ֑ב וְשִׁ֖חֲרְתַּ֣נִי וְאֵינֶנִּֽי׃ 키–앝타 레아팔 에쉬카브 베시할타니 베에이넨니

하지만 창세기 5장에서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죽음을 말할 때는 일관되게 동사 무트(מוּת, 죽다)를 사용하는 반면에, 에녹에게는 예외적으로 에이넨누(וְאֵינֶנּוּ)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가 5장의 다른 인물들과 구별된 최후를 맞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다”는 말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불수레에 태워 하늘로 올라간 것을 묘사할 때에 사용되었다(왕하 2: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02–203.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은 유일할 인물들이다.(왕하 2:1-12)

 

28-31절) 라멕은 182살에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노아라 하였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 동사 ‘누아흐’에서 유래된 것으로 위로, 안위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라멕은 노아가 땅을 갈고 일궈야 하는 힘겨운 일(창 3:17-19)로부터 안식과 위로를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라멕은 777세에 죽었는데 이는 가인의 후손중의 동명이인인 라멕이 언급한 77배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The genealogical pattern is disrupted by the inclusion of Lamech’s explanation for the name Noah. Lamech’s comment on the name “Noah” (Hb. noakh), which strictly speaking means “rest” (Hb. nuakh), introduces the related concept of “comfort” (Hb. nakham). Lamech expects that Noah will bring both rest and comfort from the painful toil of working the soil (see 3:17–19). Lamech’s 777 years provides an interesting point of contact with his namesake in 4:18–24 and seventy-sevenfold vengeanc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1.

라멕은 노아가 선악과로 인해 일어난 땅의 저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구해주고 에덴의 시절로 되돌려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어셔 주교는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창조의 연도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도 했다.( Why the World was Created in 4004 B.C.: Archbishop Ussher and Biblical Chronology 논문 참조)

하지만 창세기 5장의 목적은 앞서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조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나이를 문자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손들과 창세기 5장의 아담–셋의 후손들의 이름은 서로 같거나 유사하다.9) 이름의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가인의 후손들 중에 이랏의 이름은 ‘들 나귀’이고, 므후야엘의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제거됨 또는 죽임 당함’이며, 므두사엘의 이름은 ‘지옥의 사람’ 또는 ‘신의 사람’이란 뜻으로 추정된다.10) 아담/셋의 후손의 후손 중에 마할랄렐은 ‘하나님 찬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라멕의 자녀들의 이름의 뜻은 이미 창세기 4장에서 살펴 보았다. 가인의 후손들의 삶은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가인은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땅에서 ‘유리하는 자’ 즉 떠돌아 다니며 사는 벌을 내렸지만, 즉시 성을 쌓아 하나님께 저항하였다. 라멕은 여러 부인을 두고 살인 그리고 교만한 말과 행동을 한 자였다. 가인과 라멕은 살인자이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했고,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붙임으로 불멸을 사모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서로 사소한 일로 죽이고 죽는 일을 반복하였다. 이에 반해 아담/셋의 자손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담의 후손들의 삶에서는 장수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삶은 뚜렷한 틀에 따라 기록되고 있다.

A가 X년을 살고, B를 낳다.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A가 산 전체 햇수는 Z이며, 그 후에 죽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모두 이 공식에 따라 기록되었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평균 약 900살 정도씩 살았다.11) 그리고 에녹은 이 땅에서 365살만 살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들의 삶도 가인의 후손들과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주석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9) Cassuto, Genesis 1, 265–267. 두 계보의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이 두 계보가 원 래 별개의 것들이었지만 함께 모아지면서 부분적으로 섞여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David T. Bryan, “A Reevaluation of Gen 4 and 5 in Light of Recent Studies in Genealogical Fluidity,” Zeitschrift fü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99–2 (1987): 180–188.

10) 므후야엘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다’ 를 의미할 수도 있고, 므두사엘은 ‘신의 사람’ 을 뜻할수있 다. Keil, Genesis, 117. Gordon Wenham, Genesis, 111–112.

11) Donald V. Etz는 창세기 5장의 인물들의 수명은 편집가들에 의해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Donald V. Etz, “The Numbers of Genesis V 3–31: A Suggested Conversion and its Implications,” Vetus Testamentum 43–2 (1993): 171–18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98–199.

 

32절) 노아는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장의 족보의 마지막은 노아와 그의 자녀들로 마무리된다. 노아의 족보는 앞선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고 자녀들은 세명이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이후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 노아의 기록은 그의 조상들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른 조상들의 경우 한 명의 아들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노아의 경우 세 명이 언급된다. 이들은 노아 홍수에서 살아 남을 자들이다. 둘째, 다른 조상들의 경우 첫 아들을 낳고 몇 년을 살며 자녀들을 낳았다는 기록과 개개인의 사망 시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노아의 경우 이 부분이 빠져 있다. 대신에 창세기 9:28–29에서 ‘노아가 홍수 후에 350년을 살았고 950세에 죽었다’며 창세기 5:30에서 빠졌던 나머지 부분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노아 홍수를 창세기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5장의 기록은 여자의 후손의 수가 매우 소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어 마침내 노아의 가족들 외에는 달리 하나님을 믿는 의인이 없음을 보여 준다. 장수와 불멸을 사모하는 자들이 이들의 장수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을 텐데도 이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고, 심지어 이들이 낳은 자식들 중에도 이들의 신앙을 계승하지 않고 신앙을 저버렸다. 결국 여자의 후손은 홍수 심판 때에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고대 인류들은 결코 창세기 5장의 사람들처럼 오래 살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우리와 동일한 신체 구조를 지녔고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가졌다는 것을 창세기 11:10–32의 첫 아이를 낳은 시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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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book of the generations of Adam. When God created man, ohe made him in the likeness of God.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and he blessed them and named them Man1 when they were created. When Adam had lived 130 years, he fathered a son in his own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pnamed him Seth. qThe days of Adam after he fathered Seth were 800 years; and he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Thus all the days that Adam lived were 930 years, rand he died.

o See ch. 1:26, 27

1 Hebrew adam

p ch. 4:25

q For ver. 4–32, see 1 Chr. 1:1–4; Luke 3:36–38

r ch. 3: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5:1–5.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계보,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 족보는 간단한 공식을 따르는데 그 공식은 이렇다. 

A라는 사람은 X년을 살았으며, 그는 B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B가 태어난 뒤 A는 Y년을 더 살았다. 그래서 그는 모두 Z년(X+Y)을 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죽었다. 

어떤 족보에서 ‘~를 낳았고’라는 표현은 ‘~의 아버지, 조상이 되었고’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족보를 표현하면서 몇 세대를 건너뛰면서 ‘~를 낳았다’라고 언급할 수도 있다. 여러 구약의 족보들을 비교해보면 이렇게 몇 세대가 생략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장의 족보의 특징은 노아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수명이 매우 길다라는 것이다. 고대 수메르 왕조의 왕들의 명단에 의하면 흥미롭게 홍수 이전에 통치했던 왕들은 28800년, 36000년, 43200년을 살았다고 한다.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의 평균 수명과 비교할 때 이들의 나이는 매우 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숫자들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숫자가 아니라 이를 5, 7, 14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노아의 홍수로 인해서 인류가 사는 지구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했다라고도 말한다. 여전히 충분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이후 인간의 수명이 70-80으로 안정화 되었다는 것이다. 

 

1-2절)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 

본문의 계보의 시작은 ‘세페르 톨레도트’, 계보의 책이라고 표현된다. 다른 족보의 표제어와는 다르게 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속에서 다양한 아담이 등장한다. 먼저 처음 등장하는 ‘아담의 계보’에서 아담은 고유 명사로서 첫번째 남자를 의미한다. 이후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라는 표현에서의 사람도 아담이다. 여기서 아담은 보통명사로서 사람을 의미한다. 이후에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에서도 아담으로 사람, 인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은 아담의 계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바라)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음을 설명하고 있다. 

 

(창 1:27-28, 개정)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5:1-2, 개정)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1–2는 창세기 1:27–28로 부터 세 가지 주제를 반복한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 둘째, 남자와 여자를 창조, 그리고 셋째, 복을 주심. 이 반복은 다른 톨레도트들이 이전의 중요한 주제를 반복하는 것과 같으며, 이를 통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의 축복이 창세기 5장 이하의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3)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

3) Sarna, Genesis, 4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91–192.

 

3-5절) 아담은 130세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했고, 아담은 셋을 나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다. 

 

본문의 계보에는 앞선 가인과 아벨이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아담의 계보가 장자 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셋을 통해 계승되기 때문이다. 창 4장에는 하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하와가 셋의 이름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5장 3절에서는 아담이 셋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나온다. 이는 4장이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의 출생을 하와의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면 5장은 아담의 톨레도트라는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앞에 설명한 본문의 계보의 공식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아담은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셋은 아담의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이는 아담의 후손,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앞선 가인의 계보와 대조시키고 있다. 가인의 계보는 7세대 만에 살인자 라멕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반하여 아담의 계보는 7세대 만에 에녹으로 그리고 이후에 노아로 연결시키고 있다. 

 

3-5절은 앞선 1-2절의 세가지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창세기 5:1-2

창세기 5:3-5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

형상이 같은 아들을 낳아

복을 주시고

 

이름을 사람이라

이름을 셋이라

첫째, 아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셋을 낳았다. 이는 셋이 아담을 닮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담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자식 셋과 그의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4) 둘째, 하나님이 아담에게 복을 주었다. 이 복은 가인의 계보와 아담과 셋의 계보를 대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가인을 저주한데 반해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는 복을 주고 있다. 이 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복은 창세기 1:26 이하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후에 복을 준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둘째 복은 장수하며 자손을 낳는 것일 것이다. 위의 도표를 비교해 보면 창세기 5:3–5은 창세기 5:1–2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1) 형상으로 창조, 2) 이름을 지어줌. 창세기 5:3–5에서 복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을 확인할 수 없다. 대신에 장수하며 자녀를 낳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 장수는 창세기 5:1–2의 복의 결과일 것이다. 이것은 4장의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삶과 비교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그의 후손 라멕은 어른(이쉬, אִישׁ)과 아이(에레드, יֶלֶד)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취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여 자신을 해치는 자는 77배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아담과 셋의 후손들은 장수하며 많은 자녀를 낳았다.

셋째, 아담은 자식을 낳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창세기 4장에서도 사람들이 자녀를 낳고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창세기 5장의 특징은 창세기 5:2에서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이어서 하나님처럼 아담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 주며 이름 짓기는 대물림 된다. 이를 통해 아담의 계보와 기원이 하나님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4) Jefferey H. Tigay는 아담이 셋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고 하지 않고 그의 형상을 따라 낳 았다고 말하는 것에 착안하여, 이 표현은 단순히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Jeffrey H. Tigay, “He Begot a Son in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Tehillah le–Moshe: Biblical and Judaic Studies in Honor of Moshe Greenberg, eds. Mordechai Cogan, Barry L. Eichler, and Jeffrey H. Tigay (Winona Lake: Eisenbrauns, 1997), 139–147.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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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And Adam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o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she said, “God has appointed7 for me another offspring instead of Abel, for Cain killed him.” 26 To lSeth also a son was born, and he called his name mEnosh. At that time people began nto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7 Seth sounds like the Hebrew for he appointed

l 1 Chr. 1:1; Luke 3:38

m ch. 5:6

n Ps. 116:17; Zeph. 3:9; Zech. 13: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4:25–26.

 

 

25절) 1절에 이어서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인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이에 하와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도다’

셋이라는 이름은 이후에 사용된 ‘주셨다’라는 단어, ‘셋’(appoint, 지명하다, 정하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하와는 아벨 대신에 다른 씨, 후손을 기다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3:15절의 여인의 후손과 관련된 예언을 믿었음을 보여준다 .

 

아담은 동물들과 그의 아내의 이름을 지었다. 반면에 하와는 그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다. 적어도 가인과 셋. 하와는 가인이 태어났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1절) 했는데 반하여 셋이 태어났을 때는 ‘하나님이 내게 다른 씨를 주셨다’(25절)라고 고백한다. 이는 하와가 영적으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Adam names the animals and his spouse, but Eve names their children, at least Cain and Seth. The father first assumes that responsibility in the next verse. The explanation Eve provided at the birth of Cain focused on herself: “I have.…” The explanation Eve provides at the birth of Seth focuses on God: “God has.…” This may indicate a spiritual maturation taking place in Eve, or simply the human role and the divine role present in all births.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242.

 

26절) 이후에 셋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일차적으로 ‘사람(man)’이라는 의미인데 흔히 ‘연약한,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 103:15이나 욥 7:1에서 에노스는 유한한 인생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담’과 ‘에노스’를 사람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Seth’s son is Enosh, which is another Hebrew word for “man,” often related to a Hebrew root meaning “to be weak, frail” (cf. Akk. enēšu, “to be weak, feeble”). It is not apparent, however, that ʾĕnôš by itself carries the idea of feebleness or frailty. ʾĕnôš does occur in contexts dealing with man’s mortality (e.g., Ps. 103:15, “As for man [ʾĕnôš], his days are like grass; he flourishes like a flower of the field”) or man’s hardships in life (e.g., Job 7:1, “Has not man [ʾĕnôš] a hard service upon earth?”). But ʾāḏām occurs in similar contexts (e.g., Num. 16:29; Ps. 144:3–4), sometimes parallel to ʾĕnôš (e.g., Ps. 73:5; Isa. 13:12), and ʾĕnôš is also used in contexts implying strength (e.g., Ps. 56:2 [Eng. 1]; 66:12). Thus ʾĕnôš, like ʾāḏām, seems to be a general term for “man.”3

Akk. Akkadian

3 See the study of ʾĕnôš by F. Maass, TDOT, 1:345–48.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242–243.

 

아담과 하와 셋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가인이 자식의 이름을 붙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가인의 자손 라멕의 경우 여호와께서 가인을 위한 표를 준 것을 알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와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왜 기록하였을까? 이 표현은 창세기 12:8; 13:4; 21:33; 26:25에서도 나오며, 한결같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 사용하였다.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께 예배 드리는 신앙 공동체였음을 말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88.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이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예배 행위는 홍수 이전의 예배로 특별히 이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만민이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창 4:26 vs 출 3:13; 6:3) 

 

앞서 가인의 후손들이 성을 쌓고 문화를 장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의 계보를 준비하시면서 아벨을 대신할 새로운 희망의 싹을 준비하신다. 본문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셋이 아벨을 대신할 믿음의 자녀, 여인의 후손임을 고백한다. 창 3:15절의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을 다시금 사용해서 다른 씨, 다른 후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하와가 다른 씨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아벨을 한 씨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본 절을 통해서 하와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셋이 가인의 후손이 아니라 아벨의 신앙을 이어 받아 온전한 제사를 드릴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에 하와에게 셋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셋을 통해서 이후 5장의 아담의 계보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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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Then Cain went away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settled in the land of Nod,6 east of Eden.

17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ore Enoch. When he built a city, he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 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fathered Mehujael, and Mehujael fathered Methushael, and Methushael fathered Lamech. 19 And Lamech took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 Adah bo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ose who dwell in tents and have livestock. 21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all those who play the lyre and pipe. 22 Zillah also bore Tubal-cain; he was the forger of all instruments of bronze and iron.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 Lamech said 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ou wives of Lamech, listen to what I say:

I have killed a man for wounding me,

a young man for striking me.

24  kIf Cain’s revenge is sevenfold,

then Lamech’s is seventy-sevenfold.”

6 Nod means wandering

k ver. 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4:16–24.

 

 

 

16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 

앞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것 처럼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난다. 그 쫓겨난 곳이 에덴이 동쪽 놋 땅인데 놋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유리함(wandering), 유랑하며 떠돌아 다님’이라는 의미이다. 말그대로 그는 유리함이라는 땅에서 유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인간의 삶의 종국은 유리함, 놋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17-24절은 가인의 자손들을 다룬다. 

가인-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라멕(아다와 씰라)-야발, 유발, 두발가인(누이 나아마)

이렇게 7세대를 다루는데 라멕의 경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여서 77배로 복수했다고 자랑한다. 이처럼 라멕은 자신이 조상 가인을 나쁜 측면에서 더 많이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17절)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그 성의 이름을 에녹성이라 하였다. 

본문에서 아내와 동침하다라고 표현된 영어 포현은 'Cain knew his wife’로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히브리어 ‘야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처럼 알다라는 이 단어는 성관계를 가지다라는 표현으로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가인이 만난 이 여인은 누구일까? 창세기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계획을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을 통해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의 해답을 직접적으로 구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가인이 만난 여인은 자기 누이와 결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신학과 일치한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류가 아니라 오직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본다면 그 외의 사람이 에덴 동산 바깥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학적인 연관성을 위해서는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은데 이후 성경의 기록, 예를 들면 레 18:9에서는 근친상간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이러한 율법이 적용되기 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 가인은 에녹을 낳고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성을 쌓은 사람이 가인인지, 아니면 그의 아들 에녹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찌되었던 창세기의 초기 독자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인류가 에덴동산 주위에 도시를 세우고 그곳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것을 암시했다고 추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성을 쌓아간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이 성을 쌓는 행위는 유리함을 벗어나 한곳에 정주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타락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이루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성, 도시는 더욱 깊은 타락으로 나아가게 된다. 

Cain knew his wife. No explanation is given as to the origin of Cain’s wife. As is often the case in Genesis, the limited and selective nature of the account leaves the reader with unanswered questions (see Introduction: Reading Genesis in the Twenty-first Century). Presumably, Cain married his sister—a reasonable assumption, since the whole human race descends from Adam and Eve (and the laws later forbidding this practice, such as in Lev. 18:9, would not have been relevant at this stage; cf. Gen. 5:4). he built a city. The precise identity of the city-builder is open to debate. While Cain would appear to be the builder (on the basis that it is named after his son, Enoch), the Hebrew text could also be taken as indicating that Enoch was the builder. Although the opening two chapters make no specific mention of a “city,” the early readers of Genesis would have automatically assumed that the instruction to fill the earth implies that humanity would establish a city or cities around, and then spreading out from, Eden. While this was part of God’s design for the earth, Genesis observes that some people engage in city building without any reference to God (see esp. 11: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8.

 

놋(נוֹד)은 가인이 받은 벌 ‘유리하다’의 히브리어 동사 누드(נוּד)에서 파생된 말이다. 놋 땅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며, 가인이 머무는 모든 곳이 놋 땅일 수 있다. 가인의 아내는 창세기 4장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딸들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리고 17절은 가인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32) 수메르 홍수 신화에 의하면 홍수가 있기 전에 한 신이 인간을 파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거주지로 돌아가서 벽돌로 집을 만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메르 홍수 설화와 성격이 다르지만, 가인도 성을 건축하였다.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규모를 알 수는 없지만 성을 쌓았다고 한다. 가인이 성을 쌓았다는 표현은 바벨탑과 바벨 도시를 건축하는 것과 비슷하다.

창 4:17וַֽיְהִי֙ בֹּ֣נֶה עִ֔יר 와여히 보네 일

창 11:4נִבְנֶה־לָּ֣נוּ עִ֗יר וּמִגְדָּל֙ 니브네–라누 일 우미그달

가인은 인류 최초로 성을 건축한 사람이 된다. 가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저항이었다. 건물을 만드는 것이 죄가 될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가인의 경우는 다르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유리 방황하는 삶을 살도록 벌을 내렸는데, 가인은 집을 지어 정착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거대한 공간인 성을 쌓아 그 속으로 숨어 들었다.33) 이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했던 행동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담하와나뭇잎으로 가림

아담/하와하나님나무 속으로 숨음

가인하나님성 속으로 숨음

가인은 성을 만들고 아들의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며 자신의 이름을 항구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죽음의 벌을 받게 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고대 수메르의 홍수 신화에서는 홍수가 있기 이전에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섯 개의 도시들을 건축한 후 이름을 붙여주고 종교적 중심 센터로 만든다.34) 아카드의 창조 신화에서 마르둑을 위해 만든 도시 바벨론이 신전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최초의 도시들은 신들을 위한 종교 센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35) 가인이 만든 도시의 역할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바벨성과 바벨탑을 쌓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창세기 11:1–9의 사건과 비슷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이 하나님을 개탄하게 만든 것처럼, 가인의 행위는 하나님의 징벌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36) 가인은 특이하게도 성을 쌓고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을 붙이고 또 부르고 있다. 이 성에 살거나, 이 성과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가인의 아들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이런 가인의 행동과 대조되는 행동을 하와와 그의 아들 셋이 하고 있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4:17 וַֽיְהִי֙ בֹּ֣נֶה עִ֔יר וַיִּקְרָא֙ שֵׁ֣ם הָעִ֔יר כְּשֵׁ֖ם בְּנ֥וֹ חֲנֽוֹךְ

와여히 보네 일 와이크라 셈 하일 케셈 베노 하녹

창 4:26וַיִּקְרָ֥א אֶת־שְׁמ֖וֹ אֱנ֑וֹשׁ אָ֣ז הוּחַ֔ל לִקְרֹ֭א בְּשֵׁ֖ם יְהוָֽה

와이크라 에트–세모 에노쉬 아즈 후할 리크로 베셈 야웨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그의 자식의 이름을 붙인 그 성에서 숨어 살면서 그 성의 보호를 받으며 그 성의 이름 곧 가인의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 가인은 그의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담과 하와도 아들에게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와 그녀의 후손들은 자식의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32) Derek Kidner, Genesis, 77. Victor Hamilton, Genesis 1–17, 237. Jubilees 4:9. “And Cain took his sister, Awan, as a wife, and she bore for him Enoch at the end of the fourth jubilee. And in the first year of the first week of the fifth jubilee, buildings were constructed in the land. And Cain built a city and he named it tiwh the name of his son, Enoch.”

33) John Calvin, Genesis, 216. Gordon Wenham, Genesis 1–15, 111. Victor Hamilton, Genesis 1–17, 238.

34) ANET 43. ANET 265. 수메르 왕의 목록에 의하면 최초의 왕권은 에리두(Eridu)에서 시작되었 다고 한다. 에녹의 아들 이라드와 수메르 최초의 도시 에리두는 발음이 유사하다. Gordon Wenham, Genesis 1–15, 111–112.

35) ANET 69.

36) Gunther Wittenberg, “Alienation and Emancipation from the Earth: The Earth Story in Genesis 4,” eds. Norman C. Habel & Shirley Wurst (Sheffield: Sheffield Press, 2000), 105–116.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81–183.

 

18절) 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라멕

 

19-22절) 라멕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아다(장식)와 씰라(하나님은 나의 보호자)

아다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야발과 유발이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이처럼 라멕의 아들들은 목축과 음악과 금속 가공의 조상들이 되었다. 말하자면 문화와 기술 발전의 선구자들인 것이다. 앞서 2절에서 아벨이 양치는 자였다면 야발은 가축(소, 나귀, 낙타)를 쳤다고 언급된다. 

 

라멕의 아들들은 각기 고대 문명의 시조가 된다. 첫째 아들 야발은 가축을 키우며 천막 생활하는 첫 번째 인물이다. 아벨이 양치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발을 목축과 천막 생활 하는 자의 시조로 여긴다. 아벨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시조 자리를 야발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이 같은 직업들의 시조는 모두 신들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 신과 엔킴두 신은 각각 목축과 농사의 신들이었다.37) 그러나 창세기 4장은 인간의 직업을 인간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인간의 직업을 일반 은총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멕의 둘째 아들 유발은 악기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난나와 엔키 신화에 의하면 악기가 발명되는 것은 이난나 여신의 공로이다. 이난나는 자신이 수호신으로 지배하고 있던 우룩 도시와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증대 시키려고 수메르 문명의 기초가 되는 문화적 규범인 엠이(ME)를 술취한 엔키 신으로부터 훔쳐 우룩으로 돌아 온다. 이 엠이 목록에는 루트와 드럼 그리고 팀파니와 같은 악기가 포함되어 있다.38) 라멕의 셋째 아들 두발 가인은 동철로 각양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자였다고 한다. 아트라하시스에 의하면 어머니 신이 최초로 일곱 쌍의 인간을 만든 후 누군가가 곡괭이와 삽을 만들며, 이를 가지고 큰 수로를 건설하여 사람들과 신들을 먹여 살리게 했다고 한다.39)

37)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283–284.

38) William W. Hallo and K. Lawson Yonger, The Context of Scripture: Canonical Compositions from the Biblical World, vol. 1 (Leiden: Brill, 2003), 522–526.

39)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16–18.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84–185.

 

라멕은 3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고 아주 묘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벨의 이름(הֶבֶל)을 모방하여 모두 발(בל)을 가지고 있다.41) 라멕의 자식들의 이름의 뜻은 더 특이하다.

두발 가인의 이름에는 과감하게 첫 번째 살인자의 이름을 붙인다. 아벨의 향수가 풍기는 이름에 가인을 붙여 가인의 살인을 추억하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상상하게 하며 가인의 후손의 계보가 종결된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도 가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살인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뱀의 후손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41) Gordon Wenham, Genesis 1–15, 112–11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86.

 

 

23-24절) 본문은 라멕이 아내들에게 하는 독백이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를 가한 젊은이를 죽였다라고 소리 높인다. 그러면서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인데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77배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라멕은 지금 무분별한 복수를 통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라멕의 행위는 사람의 목숨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멕은 일부다처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제도를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모세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인의 경우에 최대한의 형벌로 사형에 이를 수 있다는 율법의 정신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라멕은 하나님의 보호는 필요없고 자신의 힘, 강력한 복수가 자신을 보호해준다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람은 히브리어 ‘이쉬’로 남자라는 의미이며, 소년은 히브리어 ‘에레드’로 어린 아기, 소년을 호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라멕이 ‘이쉬’와 ‘에레드’를 죽인 것을 한명으로 볼 수도, 어른 한 명, 아이 한 명으로 볼 수도 아니면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고 볼 수도 있다. 

 

본문은 가인의 후손들, 특히 라멕을 통해서 점점 가인의 후손들이 얼마나 타락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창세기를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때 본문 속에서 도시 건설, 일부다처제, 전쟁의 시작, 문명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라멕이 77배라고 말하는 행위를 전쟁으로 볼 수도 있다. 인간들이 모여들어 도시가 생겨나고 기술이 진보하면서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긴장감이 발생하고 이러한 긴장감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4장의 본문은 회개하지 않는 가인에게서 교만하고 폭력적인 라멕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라멕은 폭력을 찬양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두발가인이라고 칭하고 있다. 두발가인이라는 이름에는 교묘하게 아벨과 가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라멕은 이처럼 과감하게 첫번째 살인자의 이름읇 붙여주면서 가인의 살인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가인의 표가 살인자의 부끄러움의 표였다면 이제 힘과 폭력을 상징하는 명예로운 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있게 가인의 행동을 찬양하며 난공불락의 도시를 쌓아서 그곳에서 살인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가인의 계보, 후손들을 접한다. 그렇다면 가인의 후손은 모두 악하고 이후에 등장하는 셋의 후손은 모두 선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가인의 후손이 악함의 특성을 보여주고 타락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삶가운데도 분명하게 일반은총의 은혜가 드러나고 보여진다. 목축과 음악과 철공 기술을 통해서 문화가 발전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우리의 사회, 문화나 기술은 가치중립을 지킬 수 없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달려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악함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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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n spoke to Abel his brother.4 And when they were in the field,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akilled him. Then the Lord said to Cain, “Where is Abel your brother?” He said, b“I do not know; am I my brother’s keeper?” 10 And the Lord said, “What have you done? The voice of your brother’s blood cis crying to me from the ground. 11 And now d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s opened its mouth to receive your brother’s blood from your hand. 12 When you work the ground, it shall no longer yield to you its strength. You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on the earth.” 13 Cain said to the Lord, “My epunishment is greater than I can bear.5 14 Behold, fyou have driven me today away from the ground, and gfrom your face I shall be hidden.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on the earth, hand whoever finds me will kill me.” 15 Then the Lord said to him, “Not so! If anyone kills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isevenfold.” And the Lord jput a mark on Cain, lest any who found him should attack him.

4 Hebrew; Samaritan, Septuagint, Syriac, Vulgate add Let us go out to the field

a Matt. 23:35; Heb. 12:24; 1 John 3:12; Jude 11

b John 8:44

c Heb. 12:24; [Rev. 6:10]

d Deut. 27:24; [Num. 35:33]

e ch. 19:15

5 Or My guilt is too great to bear

f Job 15:20–24

g 2 Kgs. 24:20; Ps. 51:11; 143:7; Jer. 52:3

h ch. 9:6; Num. 35:19

i Ps. 79:12

j [Ezek. 9:4, 6; Rev. 14:9, 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4:8–15.

 

 

8절) 7절에서 죄가 가인을 삼키려고 문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제 8절에서는 그 죄에 삼켜진 가인이 웅크린 자세에서 일어나 아벨을 죽였다. 고대 역본에서는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라고 청했고 ‘가인이 일어나 그의 동생 아벨을 대항하여 그를 죽였다’라고 표현된다. 

말하자면 죄가 우리를 삼키려고 웅크리고 있고 이제 가인이 죄에 삼켜지고 나서 일어나 아벨을 쳐 죽인 것이다. 

 

9절) 이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지금 죽임을 당한 것을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아담과 여자를 찾으시며 물으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냉담한 가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나의 아우를 지키는 자 입니까?’라고 말이다. 가인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창 2:15절에서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아바드(경작하고 섬김)하고 사말(지키다)하게 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앞서 2절에서 가인은 땅을 아바드(경작)하는 자로 소개 되었는데 9절에서 가인은 땅이 아니라 아벨은 사말(지키는) 자인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다. 가인의 이 대답과 질문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회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도리어 가인은 자신의 대답과 반문을 통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섬기는(아바드)자였으며 또한 동생 아벨을 지키는(사말)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이 역할을 빼앗기게 된다. 

 

지키는 자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샤마르'를 번역한 말로서, 우리는 이미 이전에 2-3장에서 두 번이나 단어를 만났다. 2:15에서는 아담의 고유한 사명을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3:24에서는 그룹들이 해야 할 일을 묘사할  또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 단어는 책임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에덴 동산이라는 신성한 장소를 책임지는 일을 잃었고, 그들이 추방되자 그들이 선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선악괴를 보호해야 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가족에 한 어떤 책임 의식도 거부하였다. 심지어 아벨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그에게 는데도 일체의 책임 의식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가 책임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때, 우리는 늘 비난을 면할 구실을 만들어 왔다. 이 과정에서 상호 책임은 이산산조나시작한다.(NIVAC 창세기, 392)

 

10절) 아벨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한다’라고 대답하셨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해 땅에 묻힌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호소가 하나님의 귀에 들린다라는 것이다. 10절에서 네 아우의 핏소리는 바로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벨의 피’이다. 이는 무고한 희생자가 정의를 위한 외침을 비유하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Genesis 4:10 is the likely background for the NT’s use of the phrase “the blood of Abel” as the paradigm for an innocent victim crying for justice (Matt. 23:35; Luke 11:51; Heb. 12: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8.

 

11-12절)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몇가지 벌을 내리신다. 첫째 가인의 동생 아벨의 피로 적신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벌은 가인이 땅을 경작하여도 땅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않아 그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되여 결과적으로 농사일로 먹고 사는 가인에게 심각한 타격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망자, 부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시 109:9-10)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열매를 풍성히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도 깨뜨려 버렸다. 인간의 죄는 땅의 생식력, 풍요함과 관계가 있다. 

 

13-15절) 가인은 자신이 받게 될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다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없는 곳으로 쫓겨나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을 또한 자신을 만나는 이들이 자신을 살해할 것을 두려워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신다. 가인을 죽인자는 벌을 7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보복 금지 규정이 가인 개인에게 준 것인지, 공동체에게 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가인 개인에게 한 것이지만 가인 외의 사람들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다. 본문의 히브리어 표현은 가인의 몸에 표를 새긴 것이 아니라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표를 세웠다는 의미이다. 가인의 시대에 문자가 없었기에 이 표가 어떤 형식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것임에 틀림없다. 구약 성경에서 특히 생명과 죽음,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공적인 법 집행을 제외하고 살인은 용납되지 않았다. 

왜 7배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7이라는 숫자는 신적인 완전수이며 보복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확실함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마 18:21-22, 일곱번씩 일흔번)

 

가인의 표가 무엇일까? 겔 9:4에는 이마의 표를 말한다. 가인의 표는 저주와 심판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죽임을 면케하는 안전의 표이기도 했다. 

This “mark of Cain,” as it is popularly known, has proven to be a seedbed for confusion (v. 15b). “Mark” is the common word for “sign” (ʾōt); the exact nature of the sign or its place on the body (“on Cain”) is unknown. One Jewish tradition pointed to Cain himself as the “sign” who served to admonish others to repentance (Gen. Rab. 22.12). In effect this has become true for later generations, if not his own, for Cain the man has become a token of sin’s fruit and divine retribution (1 John 3:12; Jude 11). Although “sign” is used figuratively in several passages (e.g., Exod 13:9; Deut 6:8; 11:18), the only parallel is Ezek 9:4, where certain men receive a mark on the forehead. But even there it is in an extended vision in which it only has symbolic force. What is important here is its purpose: “so that no one who found him would kill him” (v. 15). “Mark” in our passage is not a sign of the “curse”; in fact, it assures Cain’s safety rather than acts as a reproach. The mark in Ezekiel’s vision had the same effect; it distinguished those who bore the brand and gave them protection.

Gen. Rab. Genesis Rabbah, ed. J. Neusner

 K. A. Mathews, Genesis 1-11:26, vol. 1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278.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또 다른 벌이 있다. 14절 전반부에 있는 벌이며, 이 벌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벌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2절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가인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는 벌의 내용은 12절의 벌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히브리어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כִּ֤י תַֽעֲבֹד֙ אֶת־הָ֣אֲדָמָ֔ה לֹֽא־תֹסֵ֥ף תֵּת־כֹּחָ֖הּ לָ֑ךְ נָע֥ וָנָד֭ תִּ֖הְיֶהֽ בָאָֽרֶץ12 

키 타아보드 에트–하아다마 로–토셉 테트–코하 락 나아 와나드 티웨 바아레츠

הֵן֩ גֵּרַ֨שְׁתָּ אֹתִ֜י הַיּ֗וֹם מֵעַל֙ פְּנֵ֣י הָֽאֲדָמָ֔ה וּמִפָּנֶי֭ךָ אֶסָּתֵ֑ר וְהָיִ֜יתִי נָ֤ע ונָדָ֙ בָּאָ֔רֶץ14 

헨 게라스타 오티 하욤 메알 페네 하아다마 우미파네이카 에사텔 베하이티 나아 와나드 바아레츠

14절의 가인의 말은 그가 유리 방황한다는 말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주며, 16절의 표현과 더불어 가인의 유랑자 생활의 의미를 정의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절 – 내가 당신의 얼굴을 피해 숨을 것이며

16절 –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가인이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고 두 번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전적인 추방이다. 가인은 단지 쫓겨날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숨었든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피해 숨어 다니게 된다.

창 3:8וַיִּתְחַבֵּ֨א הָֽאָדָ֜ם וְאִשְׁתּ֗וֹ מִפְּנֵי֙ יְהוָ֣ה אֱלֹהִ֔ים 와이트하베 하아담 베이쉬토 미페네 야웨 엘로힘

창 4:14וּמִפָּנֶי֖ךָ אֶסָּתֵ֑ר 우미파네이카 에사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창세기 3:15와 같은 종말론적 소망을 주었지만, 가인에게는 그런 소망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성소인 에덴에서 추방이었지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아니었다.31) 하지만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났다는 것은 창세기 4:25–26에 있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셋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나 방황하며 살게 됨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말과 더불어 레위기 26장의 언약의 저주의 내용들과 유사하다. 레위기 26장은 안식일과 성소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언약의 축복을 받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언약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 언약의 저주는 세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번영, 둘째, 보호, 셋째, 하나님의 임재이다.

20절 너희 수고가 헛될찌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33절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가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가인이 받은 벌은 언약의 저주와 또 다른 점이 있다. 언약의 저주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쫓겨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오는 약속을 받지만, 가인의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된다.

31) 창세기 4:1과 4:25에서 하와가 가인과 셋을 낳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79–180.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추방과 심판이었고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는 가인, 결국 3장의 타락 사건이 인간을 어떤 자리에 떨어뜨렸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3장 13절에서 범죄의 이유를 묻는 진술,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심판의 선언을 시작하신 것처럼 4장 10절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땅으로부터의 저주는 결국 효력을 가인에게 주지 않음으로 음식을 제공받지 못하여 그 음식을 얻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유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와 가인의 저주를 비교해보자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의 존전에서 멀어졌다면 가인은 하나님의 존전과 그분의 보호에서 추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를 성막에 비유한다면 아담과 하와는 성소의 출입을 금지당한 셈이고 가인은 성막의 진영 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에덴 동산에는 풍부한 식량이 있었다. 반면에 동산 밖에는 경작이 가능한 땅이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농사 지을 희망이 전혀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그 결과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해야 했다. 

 

여기서 몇가지 질문은 가인이 쫓겨난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인지? 누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만나 결혼하게 되는 여자는 누구인지라는 질문과 여호와께서 붙여주신 표는 과연 어떤 형태의 표식인지이다. 

바울 신학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 급속도로 가족을 확대해 나가게 되어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후손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인이 받은 표는 어쩌면 3장 21절에서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3장에서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이야기를 보여주었다면, 4장에서는 죄가 그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죄는 그 가족안에 다툼과 불화, 나아가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커라이어스는 ‘악은 유혈이 낭자한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은 그 마음을 적시고 부패시킨다. 

‘폭력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 못지 않게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해를 끼친다. 당신이 도끼로 나무를 찍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 나무는 강철에 비하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강철은 도끼질을 할 때마다 점점 무디어지고, 나무의 수액은 그것을 녹슬게 하며 움푹 파이게 할 것이다. 강철 도끼가 무력한 나무에 폭력을 가하지만, 또 그 나무에 의해 해를 입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영혼이 해를 입지만 말이다.’

As Zacharias observes, “Evil is not just where blood has been spilled. Evil is in the self-absorbed human heart.”16 And the violence a person commits soaks into the heart and corrupts.

Violence harms the one who does it as much as the one who receives it. You could cut down a tree with your axe.… Wood is soft compared to steel, but the sharp steel is dulled as it chops, and the sap of the tree will rust and pit it. The mighty axe does violence to the helpless tree, and is harmed by it. So it is with men, though the harm is in the spirit.17

16 Zacharias, Deliver Us From Evil, 175.

17 R. Jordan, The Eye of the World (New York: Tom Doherty, 1990), 312.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69.

 

우리는 모두 하나님 의 용서를 경험했지만, 우리 가운데 현행범으로 붙잡혀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극적인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그와 같은 강력한 은혜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극적 인 상황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장 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다. 그 결과 그는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마침내 출소했을 때 ,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은 친절한 비앵브뉘 몬시뇰(묜시뇰은 나의 주님’이라는 뜻으로 과거 왕이나 귀족에게 ‘전하’,각하'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주교들과 교황청에 고위 성직자들에게 이 칭호가 사용된- 역자 주) 주교가 그를 맞아 주었을 때,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한밤중에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는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다음 날 그는 그 소중한 물건들을 돌려주러 그 집으로 연행 되어 간다. 그런데 그는 몬시놀 주교의 반응에 깜짝 놀란다.

 

“아! 여기 왔군!’ 그는 소리치면서 장발장을 보았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그래, 이게 어찌 된 건가? 나는 자네에게 촛대도 주었네. 나머지 것들처럼 은으로 만들어졌지. 분명 200프랑은 될 걸세, 왜 포크랑 수저도 함께 가져가지 않았나?

'내 친구여’ 주교는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여기 자네 촛대들이 있으니 가져가게 그는 벽난로의 선반으로 걸어가서, 은촛대 둘을 가져다가 장발장에게 주었다. 장발장은 사지를 떨고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두 촛대를 받아들었고, 어찌나 당황했던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교는 그를 가까이 묻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게, 절대 자네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이 돈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셈 일세."

장 발장은 이무것도 약속한 기억이 없었기에 말없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에게 말하면서 그 말을 강조했다. 그는 진지한 척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장 발장, 내 형제 여! 자네는 이제 악에 속하지 않고 선에 속해 있네. 내가 자네에게서 산 것은 자네의 영흔일세. 나쁜 생각과 파멸의 영에게서 그것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네 ”

 

이 사건은 정말로 장발장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고, 소설의 나머지 부분 그가 살면서 은혜를 되돌려 갚은 사건들의 흔적을 따라간다. 우리는 은혜와 자비를 다룬 이 이야기를 읽고, 은혜 받은 자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보면서 당황할뿐만 아니라 두려움마저 느끼 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 의 은혜와 긍홀에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 우리는 가인이 하나님께 그러한 감사로 반응했는지 결코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첫 반응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이 어떻게 반웅했느냐와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힘에 감동받는다면 어떻게 반웅하느냐 하는 것 이다.

We have all experienced forgiveness from God, but for many of us, the experience may have lacked the poignancy of being caught red-handed, standing face-to-face with God. If that is so, perhaps we can only come to appreciate such bold grace secondarily. Such poignancy is powerfully captured in Victor Hugo’s Les Miserables. Jean Valjean, the subject of the novel, steals a loaf of bread. As a result he spends nineteen years in prison and, when finally released, finds it difficult to escape his past. On one occasion, taken in by the kindly Monseigneur Bienvenue, he finds himself unable to resist temptation and, in the middle of the night, steals away with a cache of silverware. He does not get far before being throttled by the police. The next day he is hauled back to the house to return the valuables. He is startled at the Monseigneur Bishop’s response.19

“Ah! here you are!” he exclaimed, looking at Jean Valjean. “I am glad to see you. Well, but how is this? I gave you the candlesticks too, which are of silver like the rest, and for which you can certainly get two hundred francs. Why did you not carry them away with your forks and spoons?”

“My friend,” resumed the Bishop, “before you go, here are your candlesticks. Take them.” He stepped to the chimney-piece, took the two silver candlesticks, and brought them to Jean Valjean. Jean Valjean was trembling in every limb. He took the two candlesticks mechanically, with a bewildered air [and] was like a man on the point of fainting.

The Bishop drew near to him, and said in a low voice: “Do not forget, never forget, that you have promised to use this money in becoming an honest man.”

Jean Valjean, who had no recollection of ever having promised anything, remained speechless. The Bishop had emphasized the words when he uttered them. He resumed with solemnity: “Jean Valjean, my brother, you no longer belong to evil, but to good. It is your soul that I buy from you; I withdraw it from black thoughts and the spirit of perdition, and I give it to God.”

This indeed becomes the turning point in Valjean’s life, and the remainder of the novel traces the reverberations of grace in his life. When we read this account of mercy and compassion and see its impact in the recipient’s life, we are appropriately bewildered and awestruck. How much more should we be in awe of God’s mercy and compassion. We can never know whether Cain responded with such gratitude to God, though his initial response might suggest not. But it is irrelevant how Cain responded. What is important is how we respond once we are impressed with the power of God’s mercy and grace.

19 From chapter 1.2.6 in a slightly abridged form.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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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ore Cain, saying, “I have gotten1 a man with the help of the Lord.” And again, she bore his brother Abel. Now Abel was a keeper of sheep, and Cain a worker of the ground. In the course of time Cain brought to the Lord an offering of uthe fruit of the ground, and Abel also brought of vthe firstborn of his flock and of their fat portions. And the Lord whad regard for Abel and his offering, but xfor Cain and his offering he had no regard. So Cain was very angry, and his face fell. The Lord said to Cain, “Why are you angry, and why has your face fallen? yIf you do well, will you not be accepted?2 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zIts desire is contrary to3 you, but you must rule over it.”

1 Cain sounds like the Hebrew for gotten

u Lev. 2:12; Num. 18:12

v Ex. 13:12; Num. 18:17; Prov. 3:9

w Heb. 11:4

x [Prov. 21:27]

y Eccles. 8:12, 13; Isa. 3:10, 11; Rom. 2:6–11

2 Hebrew will there not be a lifting up [of your face]?

z ch. 3:16

3 Or is towar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4:1–7.

 

 

1절) 한글 성경은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은 'Now Adam knew Eve his wife,’라고 표현한다. 본문에서 동침하매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단어가 ‘야다’이다. 이는 성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와 알다, 깨닫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יָדַע (yādaʿ I), q. observe, realize, find out, recognize, perceive, care about, be(come) acquainted with, have sexual relations with, choose, (come to) understand, know, have insight; ni. reveal self, be noticed, be(come) known, know self, gain insight; pi. cause to know; pu. someone (thing) known; hi. inform, announce, teach, give signal; ho. set forth, be brought to awareness; hitp. make self known (#3359); nom. דֵּעַ (dēaʿ), wisdom (#1976); דֵּעָה (dēʿâ), knowledge (#1978); דַּעַת (daʿat I), knowledge, ability, knowledge of, insight (#1981); מַדָּע (maddāʿ), knowledge (#4529); מֹדָע (mōdāʿ), kinsman (#4530); מֹדַעַת (mōdaʿat), kinsman (hapleg. in Ruth 3:2; #4531); יִדְּעֹנִי (yiddeʿōnî), soothsayer (#3362).

q. qal

ni. niphal

pi. piel

pu. pual

hi. hiphil

ho. hophal

hitp. hitpael

hapleg. hapax legomeno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409.

이 히브리어 단어는 서로 가까운 관계속에서 육체적인 관계의 친밀함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여러가지가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깊은 앎이 바로 남녀가 하나되는 관계속에서의 앎이고 지금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가인을 낳은 것이다. 

가인이 태어날 때 아담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았다라는 의미인데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후손을 무찌를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여자의 후손의 집합적인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희석시켜서는 안된다.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에게 메시아 대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창세기 3:20이다. 아담이 아내를 하와라고 부르며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의미를 붙인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런 구원론적 후손 개념은 창세기 4장에도 나타난다. 창세기 4:1의 한글 번역은 평범한 문장과 내용을 담고 있지만, 히브리어 표현은 주석가들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 준다.

וְהָ֣אָדָ֔ם יָדָ֥ע אֶת־חַוָּ֣ה אִשְׁ֑תּוֹ וַתַּ֙הַר֙ וַתֵּ֣לֶד אֶת־קַ֔יִן וַתֹּ֙֔אמֶר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베하아담 야다 에트-하와 이쉬토 와타할 와테레드 에트-카인 와토멜 카니티 이쉬 에트-야웨

창세기 4:1은 ‘베하아담’(וְהָ֣אָדָ֔ם)을 동사 ‘야다’(יָדַע)앞에 두어 주어 아담을 강조하고 있다. 아담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였는데, 동사 ‘야다’(יָדַע)는 일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종종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2) 창세기 4:1은 아담의 아내의 이름 하와를 사용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창세기 3:20과 더불어 오직 창세기 4:1에서만 하와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이 이름은 당연히 아담의 아내가 모든 산 자의 어미됨을 상기시킨다. 창세기 4:1은 첫 문장에서만 아담을 주어로 사용하고 다음 문장부터 창세기 4:2의 첫째 문장까지 하와를 주어로 내세운다. 그리고 아담의 목소리는 창세기 4장에서 다시 들리지 않지만 하와의 목소리는 두 번이나 더 들린다.3) 창세기 4:1 마지막 문장이 하와의 목소리이고 창세기 4장 마지막 부분인 창세기 4:25에서 셋을 낳았을 때 하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그만큼 최초의 출산과 관련하여 하와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와는 아들을 낳고 가인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이유가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하와가 이런 말을 하였다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완벽하게 회복하였음을 보여 준다.4) 아들 둘을 낳으면서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대가인 출산의 고통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와는 가인을 낳고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창세기 4:25에서 셋을 낳고 이름을 붙여 주면서 또 다시 하나님을 언급하며 셋은 하나님이 주었다고 고백한다. 둘째는 하와의 말은 메시아 신앙을 담고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와의 말의 히브리어 표현을 다시 보자.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카니티 이쉬 에트–야웨

이 문장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내가 여호와와 함께 사람을 낳았다. 둘째, 내가 사람 즉 여호와를 낳았다. 어느 뜻으로 해석하던지 아주 충격적인 표현이다. 첫째 표현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하와에게 임신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다. 신성모독을 피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임신하게 한 것 정도일 수 있지만, 이 표현 자체는 그 이상으로 하와가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5) 둘째 해석은 하와가 가인을 낳고 그를 여호와로 간주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앞 문장과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וַתַּ֙הַר֙ וַתֵּ֣לֶד אֶת־קַ֔יִן 와타할 와테레드 에트–카인

וַתֹּ֕אמֶר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와토멜 카니티 이쉬 에트–야웨

동사 ‘카나’(קָנָה)는 ‘얻다,’ ‘창조하다,’ ‘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6) 이 중에서 카나는 창조하다 또는 생겨나게 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글 성경의 번역처럼 ‘이쉬’(אִישׁ)와 함께 득남하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카나는 앞 문장의 ‘와테레드’(וַתֵּלֶד)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쉬’를 뺀 ‘카니티 에트–야웨’와 ‘와테레드 에트 가인’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할 목적으로 사용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카니티 이쉬 에트–야웨’는 무슨 의미일까?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즉 여호와를 낳았다.”

즉 하와는 가인을 낳고 이를 여호와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7)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이 표현을 도대체 무슨 의도로 하와는 사용하였을까? 이 표현은 창세기 3:15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들은 창세기 3:15의 사탄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문제이다. 4:1에 3:15의 후손(제라, זֶרַע)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4:25에서 하와가 셋을 아벨을 대신한 다른 후손(זֶרַע אַחֵר)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가인과 아벨은 후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하와가 ‘여호와를 낳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사탄과 그의 후손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여자의 후손’을 메시아적인 인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8) 그래서 모든 산자들의 어미인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그를 메시아적인 인물로 기대하며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의 이 같은 기대가 곧 무너졌다는 것이 둘째 아들을 낳을 때 드러난다.9) 하와는 둘째의 이름을 아벨이라 지었는데, 그 뜻은 ‘덧 없음’ 또는 ‘무’이다. 왜 아벨에게 이 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아벨의 이름을 아벨이 죽고 난 후 그의 생명의 짧음과 죽음을 슬퍼하며 지어 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를 예언하며 지었을 수도 있다.10)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면, 가인에 대한 기대, 사람에 대한 기대가 덧 없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왜 가인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졌을까? 가인의 행동 때문이 아닐까?

2) 창세기 4:17, 25에서도 ‘야다’(ידע)는 성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창세기 4:25의 첫 문장의 주어는 아담이다.

4) Kenneth Mathews, Genesis 1–11:26, 265. Derek Kidner, Genesis, 74. 세일하머는 하와의 행동을 사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손을 얻으려한 행동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John Sailhamer, Pentateuch as Narrative, 112.

5) T. A. Perry, “Cain’s Sin in Gen 4:1–7: Oracular Ambiguity and How to Avoid it,” Prooftexts 25 (2005): 259.

6) 가인!(קַיִן)의 이름은 ‘카나’(קנה)에서 나왔다.

7) John Walton, Genesis, 261–262.

8) Victor Hamilton, Genesis 1–17, 221.

9) Walter C. Kaiser, Toward a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7. 비록 칼빈 자신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지만, 칼빈 시대에도 이 같은 해석이 있었다. Calvin, Genesis, 190.

10) Keil, Genesis, 109. Gordon Wenham, Genesis, 102.11 Josephus, Aniquities 1.2.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61–164.

 

2-5절) 하와는 이후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이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은 목자였고 가인은 농부였다. 서로 다른 직업이었기에 서로 다른 것, 자신의 수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 이 당시는 아직 제사 규정이 주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단순하게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신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드려진 제물이 무엇인가, 가축인가 아니면 곡식인가 때문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아벨은 양의 첫 새끼, 곧 더 값비싸고 소중한 것을 제물로 드렸다. 이것은 더 큰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후의 레위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제물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가인이 드린 제물(신 26:2)이나 아벨이 드린 제물(신 15:19-23)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신 26:2, 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신 15:19-23, 개정)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출 34:19-20, 개정)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레 3:16, 개정)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지금까지의 본문을 통해서 가인의 성품이나 믿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이후 이어지는 절들의 내용을 보면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가인과 아벨을 이렇게 평가한다. 

(요일 3:12, 개정)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히 11:4, 개정)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Although Cain and Abel have contrasting occupations and present different types of offerings to God, the present episode is not designed to elevate herdsmen over farmers, or animal offerings over plant offerings. One way to explain why God had regard for Abel and his offering, but not for Cain, is to posit that Abel’s offering, being of the firstborn of his flock, is a more costly offering, expressing greater devotion. Another way to explain the difference is first to observe that both offerings are recognizable parts of the later Levitical system: for Cain’s offering of the fruit of the ground (v. 3), cf. Deut. 26:2 (an offering expressing consecration), and for Abel’s offering of the firstborn of his flock, cf. Deut. 15:19–23 (a kind of peace offering, a meal in God’s presence). But at no point does the Bible suggest that offerings work automatically, as if the worshiper’s faith and contrition did not matter; and Cain’s fundamentally bad heart can be seen in his resentment toward his brother and in his uncooperative answers to God in the rest of the passage. Several NT texts derive legitimate inferences from this narrative, namely, that Cain demonstrated an evil heart by his evil deeds, while Abel demonstrated a pious heart by his righteous deeds (1 John 3:12); and that Abel offered his sacrifice by faith and was commended as righteous for that reason (Heb. 11: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7.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제물 자체만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4절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벨의 삶, 그의 의도, 믿음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 했다는 것이다. 아벨의 경우처럼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가 제물 자체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당사자와 관련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6-7절)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심으로 인하여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식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질문하시며 그의 잘못을 뉘우칠 것을 바라셨다. 가인은 지금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고 왜 나만 미워하시냐며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붉히며 하나님앞에서 분해하는 이 모습을 보시면서 맹수가 우리를 잡기 위해서 문앞에 조아리고 있는 것처럼 죄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모습을 상기시키시며 죄에 빠지지 말것을, 그 죄가 우리를 삼키려고 하나 그 죄를 다스릴 것을 촉구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이라고 했는데, 가인이 누구에게 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아담과 하와가 포함되겠지만, 가인의 다음 반응으로 보아 아벨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그를 삼키려 할 것이다고 경고한다. ‘로베츠’(רֹבֵץ)는 ‘라바츠’(רָבַץ)의 분사형이며 죄가 가인을 삼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노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한다. 이 말은 창세기 3:16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표현과 매우 흡사하다:

창 3:16וְאֶל־אִישֵׁךְ֙ תְּשׁ֣וּקָתֵ֔ךְ וְה֖וּא יִמְשָׁל־בָּֽךְ베엘–이섹 테수카텍 베후 임살–박

창 4:7וְאֵלֶ֨יךָ֙ תְּשׁ֣וּקָת֔וֹ וְאַתָּ֖ה תִּמְשָׁל־בּֽוֹ베에레이카 테수카토 베앝타 팀살–보

하나님은 창세기 3:16에서 하와에게 했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상이 아담과 하와에서 가인과 죄로 바뀌었다. 테수카(תְּשׁוּקָה)는 사자가 먹이를 삼키려하는 그런 욕망을 표현한다. 즉 죄의 욕망이 문 앞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가인을 삼키려고 하지만, 가인은 죄를 다스리고 통제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죄가 가인을 삼키게 되고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과는 달리 경고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들판에서 죽인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하와로부터 그렇게 기대 받았던 가인에 의해 저질러진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죽음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았다는 것은 아벨이 집합적 포괄적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아벨의 죽음은 뱀의 후손에 의한 여자의 후손의 첫 번째 희생이 된다. 그리고 기대했던 장자 가인은 에덴의 동편에서 또 다시 추방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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