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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Then the Lord God said, q“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in knowing good and evil. Now, lest he reach out his hand r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23 therefore the Lord God sent him out from the garden of Eden sto work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 He drove out the man, an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he placed the tcherubim and a flaming sword that turned every way to guard the way to the tree of life.

q ver. 5

r ch. 2:9

s ch. 2:5

t Ps. 18:10; 104:4; Heb. 1:7; [Ex. 25:18–22; Ezek. 28:11–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3:22–24.

 

22-24절) 아담과 여자, 뱀에게 심판을 선고하시고 나서 삼위 하나님께서 의논하신다. 이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삼위 하나님)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지 모른다. 이에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된 땅을 갈게 하셨다. 

본문의 이야기는 앞선 2장 5-17절의 내용과 대비가 된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어 공허하고 혼돈한 땅에서 하나님의 에덴으로 데려와 살게 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 밖으로 추방시키신다. 그리고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경작하게 하신다. 또한 2장 16-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제외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하였지만 3장 22-24절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추방시키신다. 또한 창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역할을 부여하셨지만 범죄이후 아담은 에덴에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룹과 화염검으로 하여금 에덴의 입구를 지키도록 하셨다. 

에덴 동산의 동쪽에 에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했고 이 입구를 그룹과 불 칼로 지키게 한 것이다. 이는 성전의 입구가 동쪽임을 상징한다. 그룹은 초자연적인 피조물로서 구약에 90회 이상 언급된다.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본문에서 생명나무를 지키며 법궤 위에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은좌에 장식으로 세워진 것과 에스겔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전차/보좌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화염검은 마법의 칼의 이미지를 가지지만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사막의 뜨거운 열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고학적인 발견들에 그룹은 그리핀(복합 피조물-그리스 신화의 독시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 몸뚱이를 한 괴물)이나 스핑크스(여자의 머리와 가슴,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를 지니고 여행자에게 수수께끼를 낸 괴물) 같은 이미지로 성경의 묘사, 겔 1, 10장과 일치한다. 신 아시리아 시대의 도장을 보면 과일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 새겨져있고 그 나무 양옆에는 그룹처럼 보이는 피조물 둘이 있고 그들의 등위에 서있는 신들이 날개달린 태양원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 동산을 지키는 책임을 감당하던 사람이 도리어 쫓겨나 접근 금지명령을 받은 것이다.  

Biblical descriptions of cherubim (e.g., Ezek. 1; 10) agree with archaeological finds that suggest cherubim are composite creatures (like griffins or sphinxes). Representations of these creatures are often found flanking the throne of a king. Here in Genesis the cherubim guard the way to the tree of life, now forbidden property of God. An interesting Neo-Assyrian seal depicts what appears to be a fruit tree flanked by two such creatures with deities standing on their backs supporting a winged sun disk. Ironically, whereas people were originally charged with “keeping” the garden (Gen. 2:15), now that same verb is used as the cherubim “guard” the way to the tree of life, keeping people out. The warden is off to jail.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30.

 

법궤위의 그룹 천사의 모습

 

 

 

그룹

In the mythical allusion to Eden in Ezek 28:14, God protects humankind in innocence with an angelic cherub, whose task possibly is to block one’s ascent to the summit throne (cf. Isa 14:13). This monitory role is consistent with Gen 3:24, where the flaming cherubim prevent sinners from grasping at immortality.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717.

 

생명나무는 어느 정도 사람의 도덕적인 상태를 확인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한다는 약속이 주어졌다. 

The tree of life, then, probably served in some way to confirm a person in his or her moral condition (cf. Prov. 3:18; 11:30; 13:12; Rev. 2:7; 22:2, 14, 19). According to Gen. 2:15, the man was put in the garden to work it and keep or guard it. Outside the garden the man will have to work the ground, but the task of keeping or guarding the garden is given to the cherubim (3: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7.

 

인간의 범죄,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 왔다. 앞서 남자와 여자, 땅이 저주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마치 동산을, 어떤 건물을 맡아 관리하고 마음껏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주인과의 약속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 권리를 모두 박탈당하고 이제는 안전한 공간에서 추방되어 춥고 어두운 곳으로 쫓겨 나가는 모습이다. 이전에 아담에게 맡겨졌던 역할이 이제는 그룹들과 화염검에게 맡겨졌고, 인간에게 허락되었던 영생을 빼앗기고 이제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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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The Lord God said to the serpent,

“Because you have done this,

cursed are you above all livestock

and above all beasts of the field;

on your belly you shall go,

and fdust you shall eat

all the days of your life.

15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offspring5 and gher offspring;

hhe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16 To the woman he said,

“I will surely multiply your pain in childbearing;

iin pain you shall bring forth children.

jYour desire shall be contrary to6 your husband,

but he shall krule over you.”

17 And to Adam he said,

“Because you have listened to the voice of your wife

and have eaten of the tree

lof which I commanded you,

‘You shall not eat of it,’

mcursed is the ground because of you;

nin pain you shall eat of it all the days of your life;

18  thorns and thistles it shall bring forth for you;

and you shall eat the plants of the field.

19  By the sweat of your face

you shall eat bread,

till you return to the ground,

for out of it you were taken;

ofor you are dust,

and pto dust you shall return.”

20 The man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7 21 And the Lord God made for Adam and for his wife garments of skins and clothed them.

f Isa. 65:25; Mic. 7:17

5 Hebrew seed; so throughout Genesis

g Isa. 7:14; Mic. 5:3; Matt. 1:23, 25; Luke 1:34, 35; Gal. 4:4; 1 Tim. 2:15

h Rom. 16:20; Heb. 2:14; Rev. 20:1–3, 10

i [John 16:21]

j ch. 4:7; Song 7:10

6 Or shall be toward (see 4:7)

k 1 Cor. 11:3; 14:34; Eph. 5:22–24; Col. 3:18; 1 Tim. 2:11, 12; Titus 2:5; 1 Pet. 3:1, 5, 6

l ch. 2:17

m ch. 5:29; [Rom. 8:20–22]

n Eccles. 2:22, 23

o ch. 2:7; Ps. 103:14

p Job 34:15; Ps. 104:29; Eccles. 3:20; 12:7; Rom. 5:12

7 Eve sounds like the Hebrew for life-giver and resembles the word for living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3:14–21.

 

 

 

14-15절) 뱀이 받은 심판, 아담과 여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으시지만 뱀에게는 묻지 않으시고 바로 심판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다. 또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앞서 1절에서 뱀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하다(아룸)라고 언급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뱀이 모든 짐승보가 더욱 저주(라루르)를 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여자를 유혹했기 때문에 뱀은 이제부터 모욕을 받을 것이다. 

 

본문에서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심판의 이유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은 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뱀이 받은 심판은 우선적으로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건데 에덴동산에서 뱀은 다리가 있었고 걸어다녔음을 알 수 있다. 뱀은 다른 짐승들보다 더 간교한 존재였는데 이제 다른 짐승들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

15절은 원시 복음(protoevengelium)이라고 불린다. 본문의 뱀은 사탄을 의미하고 여인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은 바로 사단과 그리스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뱀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받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에 머무르시지 않고 부활하신다. 따라서 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심으로 영원한 승리를 성취하신다.  

- This defeat is implied by the serpent’s being bruised in the head, which is more serious than the offspring of Eve being bruised in the heel. For this reason, v. 15 has been labeled the “Protoevangelium,” the first announcement of the gospel. This interpretation requires that the serpent be viewed as more than a mere snake, something which the narrative itself implies, given the serpent’s ability to speak and the vile things he says. While the present chapter does not explicitly identify the serpent with Satan, such an identification is a legitimate inference and is clearly what the apostle John has in view in Rev. 12:9 and 20:2. The motif of the offspring of the woman is picked up in Gen. 4:25 with the birth of Seth; subsequently, the rest of Genesis traces a single line of Seth’s descendants, observing that it will eventually produce a king through whom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will be blessed (see Introduction: History of Salvation Summary). he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Some interpreters have suggested that by saying “he” and “his,” the intended meaning is that one particular offspring is in view. Within the larger biblical framework, this hope comes to fulfillment in Jesus Christ, who is clearly presented in the NT as overcoming Satan (Heb. 2:14; 1 John 3:8; cf. Matt. 12:29; Mark 1:24; Luke 10:18; John 12:31; 16:11; 1 Cor. 15:24; Col. 2:15), while at the same time being bruis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6.

 

본문은 뱀과 여자의 적개심,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적개심, 그는 너의 머리를, 너는 그이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말한다. 본문을 통해서 아담과 뱀이 아니라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된다라는 말은 그 이전에 뱀과 여자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보다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와는 사탄을 미워하고 서로 원수가 된 것이다. 이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누구일까? 모두 사람들이다. 뱀의 후손은 바로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괴롭힌다.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동시에 여자의 신앙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롬 16:20) 롬 16:20은 사탄의 머리를 발로 짓밟는 것을 예수님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성도들의 영적 싸움으로 확장시킨다. 

 

16절) 여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여인이 임신하여 잉태하는 고통은 대단하다. 이 고통을 감수해야만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린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원래 돕는 배필로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죄로 인하여 깨어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결혼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가장의 역할을 부여하셨다. 아내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보호하고 살펴야 하지만 이를 포기하고 아내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원하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 ‘테슈카’는 욕망, 갈망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곳과 창 4:7; 아 7:10에만 등장한다. 결국 죄로 인해 하와는 아담을 거슬러서 그를 지배하려는 잘못된 욕망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결혼과 관련되어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거슬러서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관계로 전락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이자 공동체인 가정, 부부 생활의 왜곡과 파괴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자기중심성을 추구한 결과이다.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 These words from the Lord indicate that there will be an ongoing struggl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for leadership in the marriage relationship. The leadership role of the husband and the com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husband and wife that were ordained by God before the fall have now been deeply damaged and distorted by sin. This especially takes the form of inordinate desire (on the part of the wife) and domineering rule (on the part of the husband). The Hebrew term here translated “desire” (teshuqah) is rarely found in the OT. But it appears again in 4:7, in a statement that closely parallels 3:16—that is, where the Lord says to Cain, just before Cain’s murder of his brother, that sin’s “desire is for you” (i.e., to master Cain), and that Cain must “rule over it” (which he immediately fails to do, by murdering his brother, as seen in 4:8). Similarly, the ongoing result of Adam and Eve’s original sin of rebellion against God will have disastrous consequences for their relationship: (1) Eve will have the sinful “desire” to oppose Adam and to assert leadership over him, reversing God’s plan for Adam’s leadership in marriage. But (2) Adam will also abandon his God-given, pre-fall role of leading, guarding, and caring for his wife, replacing this with his own sinful, distorted desire to “rule” over Eve. Thus one of the most tragic results of Adam and Eve’s rebellion against God is an ongoing, damaging conflict between husband and wife in marriage, driven by the sinful behavior of both in rebellion against their respective God-given roles and responsibilities in marriage. (See notes on Eph. 5:21–32 for the NT pattern for marriage founded on the redemptive work of Chris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6.

 

출산의 고통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는 이 단어들을 쓰지 않고 헤벨(חֵבֶל)힐(חִיל), 칠(צִיר), 차라(צָרָה)같은 단어를 쓴다. 그러나 창세기 3:16은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히브리어 나무(에츠, עֵץ)의 발음이 담긴 ‘에쳅’(עֶ֖צֶב)과 ‘이 차본’(עִצְבוֹן)을 사용하였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46–147.

 

마찬가지로 홁을 먹을 것이라는 저주에 대해서도 뱀의 일상 음식을 묘사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흙이나 불결한 것을 음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고대 문헌을 보면 이것은 지하세계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들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엔키두는 임종하는 순간에 지하세계에 대한 꿈을 꾸면서, 그곳을 빛이 없는 곳,  “흙이 그들의 음식이며 진흙이 그들의 빵인”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뒤의 이슈타르의 지하세계 하강을 통해 알려진 묘사이기도하다. 이러한 묘사들은 무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지하세 계 의 특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리 있는 것 같다. 시신의 입을 채우지만, 뱀 이 땅 위를 기어 다니게 될 것이므로 뱀의 입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 정보를 놓고 보건대, 뱀에 대한 저주는 온순함(배로 기어다님)과 죽음(흙을 먹음)과 관련된 상태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NIV 적용주석)

 

17-19절)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내려진 심판은 아담 본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땅에게도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 선악과를 먹었은즉 일차적으로 땅이 너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이로 말미암아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될 것이다. 땅은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네가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것이다. 네가 그것(흙)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자와 뱀과는 다르게 아담의 심판에는 유일하게 심판의 이유가 담겨 있다. 그 심판의 이유는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악과 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이 아담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은 언약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했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아내의 말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음으로 범죄했기 때문에,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고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이다. 동산의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이제 빼앗긴 것이다. 이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땀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은 일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일할 때 뒤따르는 수고와 고통과 좌절감(이치본-고통)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땅은 생산력이 현저하게 감소되었고 땀흘림의 수고와 고통을 통해서만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땅이 저주를 받은 이유.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아담의 범죄로 밀미암아 땅이 함께 저주를 받고 있다.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 아담의 몸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 창조 질서에서 이와 같이 계획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피조물은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때를 고대하고 있다.(롬 8:19-22) 그 때가 이르면 자연은 더이상 형벌의 장소가 아닐 것이다. 자연이 영화롭게 될 때 사람들이 그것을 관리하고 그것의 충분한 잠재력을 끌어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죄로 땅, 자연, 피조세계는 타락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완성될때 피조세계는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Further, the man’s body will return to the ground (v. 19), i.e., it will die (which was not true of the original created order; cf. Rom. 5:12). For this reason, the Bible looks forward to a time when nature will be set free from the consequences of human sin; i.e., nature will no longer be the arena of punishment, and it will finally have glorified human beings to manage it and bring out its full potential (Rom. 8:19–2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7.

 

 아담의 벌이 기록된 17–19절에서 히브리어 동사 아칼(אָכַל)이 무려 네 번 사용되었다. 먹는 문제는 다시 땅과 연결이 된다. 창세기 2:5이 땅에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 하나님의 비 내리는 역할과 함께 인간의 노동이 제시하였던 것과는 달리, 창세기 3:17에서 아담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땅과 싸워야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하지 않고 아담 때문에 땅을 저주한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다.49) 하와가 그녀의 존재의 근원인 아담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벌을 통해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파손된 것처럼, 아담과 그의 존재의 근원인 땅 사이의 관계가 철저히 파괴된다. 로마서 8:18–23에서 바울은 땅이 이 저주 상태에서 벗어날 때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와의 형벌이 그녀의 사역의 핵심 대상인 아담과 관련된 출산의 고통인 것처럼 아담의 형벌은 이 땅과 관련된 노동의 고통이다. 노동 자체가 벌이 아니라, 노동에 따른 고통이 벌이다. 즉 아담은 그로 인해 저주 받은 땅이 내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해야 하며, 이를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는 일을 평생 반복해야만 된다. 17절의 ‘종신토록’은 인간의 생명에 한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형벌은 아담을 비롯한 인류의 죽음이다. 흙으로 돌아 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창세기 2:17의 말씀의 결과이기도 하다.50) 창세기 3:19은 둘째 징벌과 관련하여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죽음을 땅과의 관계 속에 정의된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어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 둘째,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 때 부여하였던 두 가지 요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그리고 생령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아담이 흙으로 만든 사실만 교차 대구법의 구조 속에 거듭 강조하고 있다.

A עַ֤ד שֽׁוּבְךָ֙ אֶל־הָ֣אֲדָמָ֔ה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B כִּ֥י מִמֶּ֖נָּה לֻקָּ֖צְתָּ 네가 그 것(땅)에서 취함을 받았기 때문에

B’ כִּֽי־עָפָ֣ר אַ֔תָּה 너는 흙이니

A’ וְאֶל־עָפָ֖ר תָּשֽׁוּב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49) 둠브렐은 땅의 저주를 인간이 땅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과 관련있다고 본다. William Dumbrell, “Genesis 2:1–3: Biblical Theology of Creation Covenant,” ERT 25(2001): 228–229.

50)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즉시 죽지 않은 것을 두고, 창세기 2:17의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창세기 2:17의 말씀을 선악과가 치명적인 독을 가 진 열매 나무로서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줄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2:17을 선악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에 제한을 둔다는 말로 이해하면 아담과 하와가 즉시 죽지 않은 것을 모순으로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49–150.

 

20-21절) 선악과 범죄이후에 이제 아담은 그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산자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20-21절을 통해서 두가지의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첫번째는 아담이 그의 아내에게 하와(이브)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하와는 생명 또는 생명을 주는 자를 의미한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신 것이다. 선악과의 결과로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숨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것이다. 나뭇잎 옷은 불완전하다. 그런데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물을 잡아야만 한다. 이 짐승의 죽음은 후대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짐승의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 제사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옷은 몸을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고대 근동 사회에서 옷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나타내거나 외적인 멋을 위해서 입기도 했다. 옷을 벗어주는 것은 상속과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가죽옷을 볼 때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범죄를 기억했으며 동시에 그러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산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했을 것이다. 결국 가죽옷은 이러한 범죄와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슥 3:4) 본장에서 하나님은 무호과 나무옷을 벗기고 가죽옷으로 갈아입혔지만 슥 3:4에서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이 입힌다.  

God’s words of judgment on the serpent, woman, and man are immediately followed by two observations that possibly convey a sense of hope. First, the man names his wife Eve (v. 20), which means “life-giver” (see ESV footnote). Second, God clothes the couple (v. 21). While this final action recognizes that the human couple is now ashamed of their nakedness in God’s presence, as a gesture it suggests that God still cares for these, his creatures. Because God provides garments to clothe Adam and Eve, thus requiring the death of an animal to cover their nakedness, many see a parallel here related to (1) the system of animal sacrifices to atone for sin later instituted by God through the leadership of Moses in Israel, and (2) the eventual sacrificial death of Christ as an atonement for sin.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7.

 

아담은 앞서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다. 나아가 그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함으로 그의 비겁함을 드러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절망적이고 슬픈일이지만 이 가운데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20절에서 아담은 그의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앞서 원시복음, 15절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여자를 더욱 책망하고 그녀에게 불평과 불만을 쏟아낼만한 상황에 도리어 아내의 이름을 하와, 모든 산자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15은 여자의 후손이 사탄을 무찌르고 인간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줄 것을 예고하였고, 이에 대해 아담은 창세기 3:20에서 그 하와에게 모든 산자의 어미라고 불렀다. 아담이 창세기 3:15을 믿음으로 듣고 받아 들였다는 증거이다.52) 디모데전서 2:15는 이런 의미를 잘 반영해 준다.

σωθήσεται δὲ διὰ τῆς τεκνογονίας ἐὰν μείνωσιν ἐν πίστει καὶ ἁγάπῃ καὶ ἁγιασμῷ μετὰ σωφροσύνης

NRS. Yet she will be saved through childbearing, provided they continue in faith and love and holiness, with modesty.

개역.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고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개역 성경은 헬라어 동사 ‘소데세타이’(σωθήσεται, 구원을 얻으리라)의 주어를 여자들로 잘못 번역하였다. ‘소데세타이’는 3인칭 단수이며 주어는 NRS 영어 성경과 KJV 영어 성경이 번역하는 것처럼 she이다. 디모데전서 2:15의 첫 문장 소데세타이 데 디아 테스 테크노고니아스를 이를 반영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해산을 통해 여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출산하는 모든 여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출산하지 못하는 여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일까? 이 문장에서 ‘그녀’는 누구를 지칭하며 무슨 차원에서 이런 말을 하였을까? 디모데전서 2:13–14을 보면 ‘그녀’는 다름 아닌 하와이다.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렇다면 디모데전서 2:15는 자연스럽게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과 창세기 3:20의 모든 산자의 어미와 관련됨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의 아내들이 자식의 이름을 지으면서 자신의 희망을 담았던 것처럼, 아담은 하와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면서 생명과 희망의 빛이 하와를 통해 비추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창세기 1–3장까지 이어진 이름 짓기의 절정에 달한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아담’이라고 불렀고(창 2:7, 5:2),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던 아담은 그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를 ‘이사’(אשׁה, 아내, 여자)라고 불렀고(창 2:23), 마침내 창세기 3:20에서 아담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그의 아내를 통해 나오게 된다는 의미에서 아내에게 ‘하와’(חוה)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53)

52) Derek Kidner, Genesis, 72. Keil, The First Book of Moses, 106. John Collins, “What Happened to Adam and Eve? A Literary–Theological Approach to Genesis 3,” Presbyterion 27–1 (2001): 31–32.

53) Dmitri M. Slivniak, “The Garden of Double Message: Deconstructing Hierarchical Oppositions in the Garden Story,” JSOT 27–4 (2003): 451–452.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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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y heard the sound of the Lord God walking in the garden in the cool3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bhid themselves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God among the trees of the garden. But the Lord God called to the man and said to him, “Where are you?”4 10 And he said, “I heard the sound of you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c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11 He said, “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 Have you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you not to eat?” 12 The man said, d“The woman whom you gave to be with me, she gave me fruit of the tree, and I ate.” 13 Then the Lord God said to the woman, “What is this that you have done?” The woman said, e“The serpent deceived me, and I ate.”

3 Hebrew wind

b [Ps. 139:1–12; Jer. 23:23, 24]

4 In Hebrew you is singular in verses 9 and 11

c ver. 7; ch. 2:25

d ch. 2:18; Job 31:33

e ver. 4; 2 Cor. 11:3; 1 Tim. 2: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3:8–13.

 

찬송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원래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이 자유롭게 만나 교제하는 자리였다. 매일 저녁 하나님과 함께 산책할 정도록 아름다운 관계였던 것이다.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한 은은이 소리들리니 주 음성 분명 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캐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3. 밤 깊도록 동산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후렴 :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8절) 아담과 하와는 그날,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바로 그날 바람이 불때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본문에서 ‘바람이 불 때’로 번역된 표현은 개역에서는 ‘서늘할 때에’(in the cool of the day)로 표현된다. 히브리어는 ‘루아흐 하이욤’이라는 표현으로 루아흐는 바람, 영을 의미하교 욤이라는 표현은 날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그날 바람’을 ‘그날의 서늘함’을 의미하여 서늘한 초저녁 산들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루아흐’와 ‘콜’(소리)라는 단어가 함께 쓰일때 폭풍의 상황에서 사용되기에 그날 물리적인 산들 바람이 불어올 때 하나님의 임재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실때 폭풍과 같은 소리가 났고 이 소리를 듣고 피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서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서 이렇게 고백했다. 

(왕상 19:11-12, 개정)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께서 에덴에 찾아오셔서 동산을 거니시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거니시는이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표현, ‘미트할렉’을 동사 ‘하락’의 히스파엘 분사형으로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에덴을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동산에 아담과 하와와 함께 산책하시는 것이 반복적인, 일상적인 행위였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가 집에 들어오면 반겨 맞는다. 하지만 뭔가 사고를 치고나면 부모를 피하게 되는 것과 같다. 날마다 하나님을 맞으며 달려나왔던 날들과 다르게 그날은 하나님의 임재 소리를 듣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금지된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앞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벌거벗었음으로 인해 나뭇잎으로 가렸다면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게 된 것이다. 

 

9-11절) 이렇게 에덴을 찾으신 하나님께서 아밤을 부르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으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나?’라고 물으신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눈이 밝아졌다. 이는 부정적인 차원에서 영적, 도덕적인 눈이 밝아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책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탄은 왜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는 무엇을 위해서 이 유혹에 넘어가게 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여자가 유혹에 잘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은 아니다. 고전 11:3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1:3, 개정)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사탄은 왜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유혹했을까? 여자가 유혹에 잘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여자가 선악과 규정을 직접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이 공격하기 더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34) 하와가 선악과 규정을 간접적으로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창세기 2–3장을 비롯한 성경 전체에는 이렇게 생각할만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 서신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이유를 판단할만한 자료를 제공한다. 바울 서신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 대한 미스테리 같은 말을 가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사탄이 여자에게 접근한 이유는 창조질서를 뒤집으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고린도전서 11:3은 언약적 구속사적 질서라는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순서를 기록하고 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은 신분상의 높고 낮음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체이고 동등하다(빌 2:6).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도 동등한 인간이다. 하지만 언약의 질서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의 대표와 구속의 중보자 역할을 하였고, 아담도 마찬가지로 언약의 대표 역할을 하였다(롬 5:12–21). 언약의 질서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은 하와가 아담의 돕는 자였고, 아담이 하와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에서 알 수 있다.35) 아담은 각종 동물들뿐만 아니라 하와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고 있다.

인간과 천사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 8:19–22와 히브리서 1:14 그리고 요한계시록 22:9은 피조세계의 질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롬 8:19–22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를 정리하면 인간과 피조물 그리고 천사의 질서는 다음과 같다.

롬 8:19–22

피조물 → 인간

히 1:14

천 사 → 인간

이를 바탕으로 피조물과 인간 그리고 천사의 질서를 피조물 → 천사 → 인간으로 표시할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이 정한 피조 세계의 원래 창조 질서를 바꾸어 세상 → 인간 → 천사의 순서로 만들려고 했다. 제2 성전 시대의 유대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약 외경 ‘아담과 하와의 삶’ 12–16절에 의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을 섬기라는 천사 미가엘의 말을 거부하며 자신은 아담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아담보다 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담을 섬기고 경배할 수 없다고 거부한다.36) 미가엘이 사탄에게 하나님이 진노할 것이라고 경고하자 하늘 별들 위에 보좌를 만들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말한다. 원래 천사였던 사탄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이 정해준 피조세계의 질서를 저버리고 높아지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사야 14:12–15와 에스겔 28:13–19 그리고 유다서 1:6은 이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겔 28:12–19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사 14:12–14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에스겔 28:12–19와 유다서 1:6은 에덴 동산에 있던 사탄이 교만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났고, 마침내 뭇별 위에 보좌를 높여 지극히 높은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오르려 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말한다. 이 것은 외경 ‘아담과 하와의 삶’ 12–16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탄은 피조물 → 천사 → 인간의 창조 질서를 바꾸기 위해 언약 질서에서 아담 다음이었던 하와를 유혹하여 창조 질서를 파괴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사탄은 이 파괴를 통해 하와가 아담보다 앞서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자로서 자기의 밑에 둠으로 피조 세계의 창조 질서를 세상 → 인간 → 천사의 순서로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 근거는 고린도전서 11:10과 디모데전서 2:13–14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10에서 바울은 여자(아내)의 머리에 쓰는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특이한 말을 하고 있다.

“여자(아내)는 천사들을 인하여 (남자의)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고전 11:10).

여기에서 말하는 권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남자(남편)의 권세이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이 말에서 우리는 네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의 권세 아래 있었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악용하여 여자(아내)를 자극하고 유혹한 적이 있다.

이 표시를 통해 천사들이 남자(남편) 아래 있는 문제로 여자(아내)를 두 번 다시 유혹하지 못하게 해라.

그래서 여자(아내)는 머리에 쓸 것을 둠으로 언약의 질서상 남자(남편) 아래 있다는 것을 항상 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고린도전서 11:8이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남자(남편)가 여자(아내)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에게서 났으며” (고전 11:8).

바울의 말은 바로 창세기 2–3장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선악과 사건 때문이라고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그런 흔적이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아담의 대답을 생각해 보라.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이 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말했을까? 아담이 하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불신과 적개심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하나님이 하와에게 벌을 줄 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나 아담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 말에서 ‘사모’는 남편을 애뜻하게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테수카’(תְּשׁוּקָה)는 사자 같은 짐승이 먹이를 삼키려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즉 ‘사모할 것이나’라는 말은 남편을 집어 삼키려는 욕망이다! 그런 아내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자(아내)에게 남편의 지배를 받는 벌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와가 이전에 아담을 자신의 발 아래 두려는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사탄이 유혹할 때 아담이 하와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만 상대하며 유혹하였고, 하와는 아담이 대답할까봐 적극적으로 나서 대답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 아담이 그 곁에 있었다는 것은 사탄이 말할 때마다 2인칭 남성 복수 동사를 사용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탄은 하와에게 말하면서 교활하게도 2인칭 남성 복수를 사용하여 아담과 하와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심판할 때는 누구에게 먼저 책임 추궁을 하는가? 하와일까? 아담이다. 하나님은 언약 질서를 염두에 두고 언약 질서의 순서에 따라 아담과 하와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하나님은 뱀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이유를 묻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벌을 내리고 난 후 아담이 하와에게 다시 이름을 지어 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언약 질서에서 아담이 대표이고 여자(아내)의 머리됨을 다시 보여 주는 것이다.

34)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Eerdmans, 1983), 34–35.

35)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219–222.

36) Life of Adam and Eve 12–16. “Satan then tells them that his fall from heaven resulted from his refusal to worship Adam, the image of God.” Michael went out and called all the angels, saying, ‘Worship the image of the Lord God, as the Lord God has instructed.’ And Michael himself worshiped first, and called me and said, ‘Worship the image of God, Yahweh.’ And I answered, ‘I do not worship Adam.’ And when Michael kept forcing me to worship, I said to him, ‘Why do you compel me? I will not worship one inferior and subsequent to me. I am prior to him in creation; before he was made, I was already made. He ought to worship me.’ … But ‘if you wil not worship, the Lord God will be wrathful with you.’ And I said, ‘If he be wrathful with me, I will se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heaven and will be like the Most High.’ ”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33–138.

 

12절)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아담을 대답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탄은 하와를 앞세워 언약의 규정을 깨뜨리고 창조 질서를 파괴하도록 유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언약 질서의 순서에 따라서 심문을 시작하신다.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여자 때문이고 또 그 여자를 하나님께서 내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아담은 선악과 사건이 사탄/뱀 때문이었고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한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문장은 동사+주어 순서로 배열되는데, 아담은 하와가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주어인 하이사(הָֽאִשָּׁה, 아내/여자)를 동사 앞에 배치하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벌거벗은 것 때문에 하와에게 부끄러움을 느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 했던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이 있다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 책임 전가에는 하나님께 대한 책임 전가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아담은 주어 하이사(הָֽאִשָּׁה)다음에 동사를 가져 오지 않고 곧 바로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하나님이 돕는 자로 준 이 아내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음을 강조하여 밝힘으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게 된 책임이 하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벌거벗은 것 때문에 부끄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입고 나무 사이에 숨어야 했던 아담은 책임이 하나님께도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최고의 선물 하와를 아담은 최악의 걸림돌이라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다.37) 안타깝게도 아담은 ‘뱀에게 유혹 받은’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이라고 말했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가 뱀이 하와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겠지만 아담은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를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38) 결국 아담은 이 사건에서 사탄의 역할을 빼버리고 자신의 책임은 축소하거나 외면하고 반면에 하와의 책임을 부각시키고 하나님의 역할을 끌어 들임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왜곡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아담의 대답에 하나님은 침묵을 지킴으로 그의 변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37) John Sailhamer, Pentateuch as Narrative, 106.

38) Sarna, Genesis, 26. Victor Hamilton, Genesis 1–17, 19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39–140.

 

13절) 이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질문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대답한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 여자는 뱀이 나를 속임으로 그것을 먹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아담의 손가락이 하와와 하나님을 향했었는데, 하와의 손가락은 뱀과 자신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문에 하와는 세 단어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הַנָּחָ֖שׁ הִשִּׁיאַ֖נִי וָאֹכֵֽל

한나하쉬 힛쉬아니 봐오켈

개역 성경은 “뱀이 나를 꾀므로”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나사(נָשָׁא)는 ‘꾀다’는 말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강한 ‘속이다’이다. 하와는 뱀이 자신을 속였고, 자신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나님께 말한다. 뱀은 속인 자이고 자신은 속았다는 것이다. 하와가 속은 것은 무엇일까? 뱀이 하와를 속인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 둘째, 눈이 밝아 엘로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 이 시점에서 하와가 깨달은 것은 둘째 속임수이다. 아담과 하와 중에 죽은 자도 없으며,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이라는 판결을 듣지 못했다. 벌거벗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남편 아담의 비난을 들으며 하와는 선과 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정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담과는 달리 하와는 회개의 단계는 아닐지라도 책임이 사탄과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속았다’는 말 자체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잘못을 깨닫고 있음을 보여 준다.39)

39) Beverly J. Stratton, Out of Eden: Reading, Rhetoric, and Ideology in Genesis 2–3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161–162.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40–141.

 

타락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본성의 변화나 마음의 변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고 그 축복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감소한 것이다. 이른바 ‘실낙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낙원을 풍부한 과일이나 음식, 안전한 공간의 상실로 생각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 상실이다. 타락 이전,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좇았다. 그분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그분의 소리가 들리면 달려나가 그분을 맞았다. 하지만 이제 그분의 낯을 피하게 되었다. 그분의 출현, 임재가 두려워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정적인 결과이다. 주님의 구속은 바로 이 문제를 극복하게 하신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그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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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en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a delight to the eyes, and that the tree was to be desired to make one wise,2 she took of its fruit xand ate, and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yand he ate. zThen the eyes of both were opened, a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loincloths.

2 Or to give insight

x 1 Tim. 2:14

y ver. 12, 17; Hos. 6:7

z ver. 5

a ch. 2: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6–7.

 

 

6절) 뱀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여자가 선악과를 바라보게 되었을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뱀의 유혹이 있기전에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선악과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시작된 갈망은 우리를 삼킨다. 결국 여자는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고 자신과 함께 하던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2장 9절을 보면 동산의 다른 모든 나무들의 열매도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였다. 하지만 뱀은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열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 것이다. 그 나무는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먹음직했다. 그런데 온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반역의 결과였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었다. 뱀이 유혹을 했을때 아담이 함께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뱀은 이러한 유혹에 여인이 더욱 약하다는 것을 같파했고, 또한 여인에게 남성이 약한 것을 알았다. 아내의 요구를 아담은 거절하지 못했다. 분명히 그것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열매를 먹은 것이고 이것은 2장 15절에서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하나님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본문에 지혜롭게라는 단어는 ‘사칼’로 바라보다, 이해하다, 파악하다라는 의미이다 

3. The theological use includes the giving of insight by God (1 Chron 22:12; 28:19; Dan 1:17; 9:22; cf. Prov 19:14), whose good Spirit instructs the people (Neh 9:20); so the faithful are to do, given their experience of God’s grace (Ps 32:8). In Gen 3:6, the way humans acquire wisdom becomes the issue, not acknowledging the one who gives wisdom. The people of God are to consider carefully God’s deeds (Ps 64:9 [10]; 106:7; Isa 41:20) and God’s ways (Neh 8:13; Ps 101:2; 119:99), wherein their lives can prosper (1 Kgs 2:3). God’s presence and action in the lives of the obedient can issue in good success (Josh 1:7–8; 1 Sam 18:14, 30), but a lack of success can befall those who do not attend to the Lord (Jer 10:21), who observes the house of the wicked (Prov 21:12). The move to action can be seen in the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poor (Ps 41:1 [2]). Insight is characteristic of the coming Messiah (Jer 23:5; cf. Jer 3:15); God will make the way of the suffering servant prosper (Isa 52:13). The wise will participate in the resurrection (Dan 12:3).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243.

 

하와는 돕는 배필이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함께 옆에 있어주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인데 옆에 있어서 도와야할 아내가 남편을 타락으로 이끈 것이다. 아담의 이 죄는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모든 죄와 고통, 육적 영적 죽음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먹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 충동은 선악과가 단순히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와의 관심사가 지혜였다는 것은 창세기 3:6과 창세기 2:9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창 2:9 וְט֣וֹב לְמַאֲכָ֑ל 가)נֶחְמָֽד לְמַרְאֶ֖ה 나)וַיַּצְמַ֞ח יְהוָ֤ה אֱלֹהִים֙ מִן־הָ֣אֲדָמָ֔ה כָּל־עֵץ

와야츠마 야웨 엘로힘 민–하아다마 콜–에츠 네흐마드 레말에 베토브 레마아칼 창 3:6 וְנֶחְמָ֤ד הָעֵץ֙ לְהַשְׂכִּ֔יל 다)תַֽאֲוָה־ה֣וּא לָעֵינֵ֗יִם 나)טוֹב֩ הָעֵ֨ץ לְמַאֲכָ֜ל וְכִ֧י 가)כִּ֣י

키 토브 하에츠 레마아칼 베 키 하아와–후 라에이나임 베테흐마드 하에츠 레하스킬

창세기 2:9과 창세기 3:6을 비교해 보면, 선악과는 다른 과일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 먹기에 좋고 나) 보기에(2:9) 또는 눈에(3:6) 탐스러운 과일이었다. 창세기 3:6의 선악과는 창세기 2:9과 다른 독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라는 점이었다. 이 지혜(레하시킬, להַשְׂכִּ֔יל)는 창세기 3:1에서 뱀을 가장 지혜롭다(아룸, עָרוּם)고 밝혔던 것과 관련 있다. 사탄은 부정적인 지혜로 하나님을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하는 자로 말하였다.23) 하와는 사탄의 말을 믿고 선악과가 엘로힘처럼 지혜롭게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열매를 따먹는다. 아담과 하와가 벗었다(아루밈, עֲרוּמִּם)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곧 뱀처럼 간교한(아룸, עָרוּם)자신을 깨달은 것일 수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각한 관계 훼손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이어서 곁에 있던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한다. 학자들 중에는 전치사 임(עִם, 함께)이 장소나 공간적인 개념보다는 관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담이 유혹의 순간 하와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뱀이 하와에게 말할 때 한결같이 2인칭 남성 복수를 사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24)

23) 사무엘하 14:17은 천사들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24) John L. Harris, “An Exposition of Genesis 2:4–11:32,”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43–4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27–128.

 

 

7절) 본절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앞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의 결과가 성적인 수치심의 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이다. 선악과를 따먹기전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일때는 목욕탕에 가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자라게 되면 2차 성징을 경험하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가 이들의 2차성징은 촉발한 것일까? 그래서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부끄러움과 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것일까? 선악과는 결국 아담과 하와가 간직했던 순수성을 상실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이 나무잎으로 만든 옷은 이후의 가족옷과 비교가 된다.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파카하’로 눈이 열려 무언가를 파악하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4. One of the promissory statements made by the serpent to Eve was: “Your eyes will be opened,” to which he append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Gen 3:5). Whether or not the second part is sequential or explicative to the first is difficult to decide. That is, does the second half of the verse offer a second, distinct promise, or does it expand on and explain the first half of the verse?

In one sense what the serpent promised came true, for verse 7 reads,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were opened.” However, the remainder of the verse does not go on to say, “and they became like God.” Rather, it states, “and they realized they were naked.” That is hardly what they were bargaining for in having their eyes opened and becoming like God. How different is this couple who had their eyes opened from another couple who also had their eyes opened as they walked from Jerusalem to Emmaus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Luke 24:31)!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66.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호세아는 말한다. 

(호 6:7, 개정)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언약의 보편적인 구조는 서론-규정-저주의 형식이다. 2장에서는 인간을 창조하고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서 발원한 4개의 강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규정은 이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이며 또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것이었다. 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언약을 받았던 아담은 이를 어김으로 저주의 대상자가 되었다. 

 

창세기 3:7은 창세기 3:5의 표현을 사용하여 뱀의 말처럼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렸다고 또는 밝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창세기 3:5에서 뱀이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했었는데 반해 창세기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벗었음을 알게 된다. 벗었음(아롬, עָרוֹם)의 자음과 소리는 사탄의 간교함(아룸, עָרוּם)의 자음과 소리와 비슷하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벗었음과 사탄의 간교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창세기 3:6에서 하와는 선악과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줄 알았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벗었음을 깨닫는 사탄의 간교함을 얻게 되었다.

벗었음을 깨달음(간교함) → 관계성 왜곡

벗었음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관계성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을 깨닫고 난 후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실제로 일어난 결과는 창조 때에 하나님이 세운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의 왜곡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엘로힘처럼 된다는 것을 알고 사람에게 따먹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뱀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진실을 감추고 그 능력과 역할을 제한하려 하는 분으로 묘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리를 왜곡했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도 사탄처럼 그 관계성을 왜곡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창세기 2:25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벌거벗은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순박함도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하나됨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들은 벗은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벗은 몸을 가려 그 수치심을 없애려 할 정도로 관계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26) 그들의 벗음은 서로가 상대방에게 지적해 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뱀이 진실을 왜곡했던 것처럼 스스로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되어 부부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을 왜곡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됨을 상실했고, 벗었음에 대한 자기 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했다. 결국 아담은 선악과 따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시킴으로 둘 사이의 나누어짐과 왜곡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26) John H. Hewett, “Genesis 2:4b–3:31; 4:2–16; 9:20–27; 19:30–38,” Review and Expositor 86 (1989): 237–2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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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uthe serpent was more crafty than any other beast of the field that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Did God actually say, ‘You1 shall not eat of any tree in the garden’?” And the woman said 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s in the garden, but God said, v‘You shall not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that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neither shall you touch it, lest you die.’ ” wBut the serpent said to the woman, “You will not surely die. For God knows that when you eat of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u Matt. 10:16; 2 Cor. 11:3; Rev. 12:9; 20:2

1 In Hebrew you is plural in verses 1–5

v ch. 2:17

w ver. 13; John 8:44; [2 Cor. 1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1–5.

 

 

1절)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다. 이 뱀이 여자에게 질문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성경은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된 세상가운데 악한 존재인 뱀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뱀의 질문은 매우 교활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선 2장 16-17절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지금 뱀은 이 명령을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것을 누릴 자유와 권한을 주시되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차별성을 알게 하시기위해서 오직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고, 그리고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뱀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것 아닌가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시키고 있다. 본문에서 뱀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고유한, 개인적인 이름인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 뱀은 신비로운 지혜를 소유한 존재로, 그리고 마력과 악의를 가진 피조물로 간주되었다. 당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들중에 코브라나 뱀의 형태를 한 신들이 존재했다. 

이 뱀의 특성은 간교함(아룸)이었다. 이는 약삭빠른, 교묘한 이라는 중립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고 본문속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뱀의 간교함은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음(아루맘 2:25)과 대조를 이룬다.(언어 유희)

 

창세기 3장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에는 뱀이 있다. 창세기 1–2장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던 뱀이 갑자기 등장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뱀이란 표현 ‘나하시’(הַנָּחָשׁ֙)에 정관사 ‘하’(הַ)를 붙여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 뱀이란 점을 드러내고 있다.2) 텍스트 자체는 이 뱀이 어떤 뱀인지 밝히지 않지만,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롬’(עָרוֹם)과 동음이의어인 뱀의 성격으로 제시된 “간교한” 이란 말의 히브리어 ‘아룸’(עָרוּם)을 통해 뱀과 창세기 2장을 연결시키고 있다.3) 그렇다면 이 뱀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뱀은 경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악의세력을 대표하였다. 에뉴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의 원수였던 티아매트는 바다의 신이지만 그 형상은 뱀이었다.4) 바알 서사시에서 바다의 신 얌은 바알의 원수이며 그 형상도 역시 뱀 또는 용이다.5) 고대 이집트에서도 뱀은 악의 화신이었다. 비록 바로의 머리에 독사의 형상을 장식하여 태양신의 레의 불타는 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지만, 뱀은 주로 악의 신 아포피스를 상징하였다. 창조와 용의 추방에서 아포피스는 하늘 신 눈의 물 또는 천상의 나일 강물에 사는 거대한 뱀이다. 아포피스는 태양신 레가 매일 갈대배를 타고 항해할 때 방해하려고 시도한다. 항해 방해를 성공하면 폭풍이 일어나고 태양신의 갈대배를 삼키면 일식이 일어났다. 바로와 인간에게 악을 행하는 뱀 아포피스를 바로는 마술 주문으로 퇴치시켰다.6)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뱀은 길가메쉬가 고생 끝에 간신히 손에 넣으려고 하는 생명 나무를 순식간에 나타나 물고 가버린다. 그 자리에 뱀은 허물을 벗어 남겨 회춘하였음을 나타내 보인다.7)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은 어떨까? 뱀 또는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바다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다(시 104:26). 이 뱀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이고(욥 41:1), 리워야단을 자극하는 것은 저주를 자처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욥 3:8). 이사야에서 리워야단은 악의 세력으로서 하나님이 멸망시킬 대상이다(사 27:1, 시 74:13–14). 신약 성경은 리워야단으로 생각되는 뱀을 사탄이라고 한다.

롬 16: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계 12:9“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20: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성경 구절들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두고 하는 말이며, 이 뱀을 사탄으로 전제하고 있다.8) 그렇다면 창세기 3장에는 이 뱀을 사탄으로 여길만한 근거가 있는가? 평범한 뱀으로만 볼 수 없는 특징을 창세기 3장의 뱀이 가지고 있다.

2)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 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3)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232. T. Stordalen, Echoes of Eden: Genesis 2–3 and Symbolism of the Eden Garden in Biblical Hebrew Literature (Leuven, Belgium: Peeters, 2000), 199–200.

4) ANET, 60–72.

5) ANET, 129–134.

6) ANET, 6–7.

7) ANET, 96.

8) Wisdom 2:23–24 “23for God created us for incorruption, and made us in the image of his own eternity, 24but through the devil’s envy death entered the world, and those who belong to his company experience it.”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16–118.

 

뱀의 특징을 나타내는 아룸(עָרוּם)은 지혜와 관련된 말이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지만(잠 1:4; 12:23; 13:16; 14:8), 그 외에서는 부정적인 지혜 또는 간교함을 나타낸다(욥 5:12, 15:5, 출 21:14). 창세기 3:1의 아룸(עָרוּם)은 창세기 3장의 배경에서 볼 때 부정적인 지혜로 사용되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19–120.

 

2-3절) 이 뱀의 질문에 대해서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뱀의 질문이 뭔가는 다른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채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만을 금하셨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지지 않으셨다. 또한 죽을까 하노라가 아니라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자는 죽을지도 몰라라고 한발짝 물러선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변경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여자는 이것이 인간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4-5절) 이 여자의 대답에 대해서 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에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기에 이를 금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죽을찌도 몰라라고 약화시키고 이제 더 한걸음 나아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여자를 유혹하고 있다. 

뱀은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아질 것을 미끼로 그를 유혹하고 있다.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할 인간은 모든 동물(뱀을 포함하여)을 다스려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 것이고 이 반역의 행위가 바로 죄의 본질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관리하고 보호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하나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뱀의 말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한글 성경 5절에서 첫번째 하나님은 복수 엘로힘으로 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이며, 두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 말은 뱀의 미혹으로 하와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여겼지만 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과 같이 되어서 간교한 지혜를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엘로힘은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두 번째 엘로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킹 제임스 역과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인 타낙(Tanak)도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KJV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TNK “but God knows that as soon as you eat of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divine beings who know good and bad.”

사탄은 엘로힘 뒤에 나오는 동사의 단수형과 복수형의 차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선과 악을 아는 일에 마치 첫 번째 엘로힘처럼 되는 것으로 속였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창세기 2–3장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이름 야웨 엘로힘(אלהים יהוה)을 사용하다가, 창세기 3:1–5에서 뱀과 하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뱀이 하나님의 이름 야웨(יהוה)를 사용하지 않고 엘로힘(אלהים)만 사용하고 하와도 엘로힘을 사용하여 응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22) 비평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E자료가 J자료에 삽입된 증거일까? 뱀이 하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엘로힘이라는 모호한 호칭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하와가 뱀에게 속았다고 한 것은 장엄복수의 야웨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는데, 복수 엘로힘(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 중에 하나인 뱀 즉 사탄처럼 간교한 지혜를 가지고 선과 악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일게다.

22) T. Stordalen, Echoes of Eden: Genesis 2–3 and Symbolism of the Eden Garden in Biblical Hebrew Literature, 200–20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26–127.

 

 

말하는 뱀 이야기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탄의 존재, 말하는 뱀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동물은 말하지 못하는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이 내용을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 신화로 치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들에게 ‘아기 돼지 삼형제’이야기를 읽어주고 있다. 첫째 아기 돼지 요한 건축 료를 얻기 위해 쓰고  목을 었다. 그래서 아기 돼지 이 가득 실려 수레를 가진 게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했어요. 저, 한데요.. 지으려 하는 주시면 까요?" 거기까지 읽고 나 교사 학생들에게 물었

그럼 과연 사람이 뭐라 대답했을까요? 사람?’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아이구머니나 돼지가 말을 하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How do we respond to the talking serpent of Genesis 3? There is an exercise that I conduct with my sixth-grade Sunday school class on doctrine when I am trying to explain to them what we mean when we say the Bible is true. I read several stories to them from various sources (Aesop’s fables, odd newspaper stories about animals behaving in strange ways, etc.), asking after each one whether they would consider the story true or not. Then we talk about their reasons for their conclusions as well as discussing what they think the author wanted us to believe. Invariably one of the conclusions they draw is that the examples from Aesop cannot be true because they feature animals talking, and we all know animals cannot talk. I then read the narrative of Genesis 3 to my sixth graders and ask them whether it is a true story. Their confusion and uncertainty creates a wonderfully teachable moment.

How do I work through this with the kids? One of the stories I read them concerns a dog who regularly gets into the refrigerator while his master is gone, takes out the catsup, squeezes the contents out all over the floor, licks it up, and drops the empty bottle in the trash can. The owner thinks he is losing his mind when he can never find the catsup that he is sure he just bought. The mystery is finally solved when one day the dog misses the trash can with the empty bottle and the evidence leads to discovery. When the sixth graders respond to this story, they initially indicate that it is not true because animals do not act this way. Their answers change immediately when I tell them the source: The story came from a news item in the local paper. It wasn’t on the comics page but was reported as news. This information changes their answer immediately, and they accept the story as unusual but factual. Even sixth graders have learned to be students of genre, and, as we all do, they judge the story by its source.

This is exactly the point as we come to the narrative about the serpent and the Fall. The larger methodological issues have already been discussed in the introduction under the heading, “Genesis and History.” Regarding this passage in particular, unless one is willing to consider the whole of Genesis 1–11 as myth (which I am not), the face value of the text suggests that the author wants us to believe that this event really happened. Moreover, the reality of the Fall is an essential foundation to Pauline theology, and the New Testament consistently shows it considers the events of Genesis 3 to be true, as historical realities. Thus, as students of genre and considering the source, we must discount the unnatural behavior attributed to the serpent and accept the story at face value.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12.

 

 

트루먼 쇼 이야기

주인공 트루먼은 30년동안 자신의 삶이 24시간 내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5000 카메라가 그 거대한 스튜디오안에, 출연배우들의 추 속에,  거리의 로등속에, 그가 일하 두 설치되어 었다. 날씨 심지어 일출과 몰까지도 모두 조작되 있었다. 청난 스케일 일 연속극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 매력은 그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쇼가 행되는 상한 일들이 꾸 발생하게 되면서 트루먼 적인 지고 다는 사실을 점점 의식하게 된다. 그리 마침내 들을 속이 으로 만들어진 바다를 가로질러 가기에 른다 막기 위해 으로 어진 풍을 헤치 지평선에 부딪치면서  가장자리에 착하는 성공한다. 마지막 극적인 장면에서 의 감자 트루먼을 만들어낸 창조자인 크리스토프가 트루먼과 마지대화 시도하면서 트루먼 위해 속에 라고 득한다. 의 반부에서 크리스토프는 터뷰를 는 데 이런 을 했다. 난 트루먼에게 적인 을 살 회를 주었습니.  세상, 여러 곳입니다. 해븐(트루먼이 름) 정상적인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트루먼을 한 크리스토프의 자비로운 의도은 무나 분다. 그러나 트루먼은 을 얻기 위해 돔으로된 거한 스튜디 있는 불확실한 받아들이기 결심한다.  관객들,  화를 대다수의 관객은 틀림없이 트루먼의 적인 선택에 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청난대가 치렀지만 동시에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다. 

하나님은 트루먼쇼의 크리스토프 감독처럼 자비로운 조종자에 불과할 까? 그 차이점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아담 하와의 선택에 소멸될 없었다. 트루먼은 그 무대 났을 크리스토프 권에서 완전히 벗어 있었다. 나 담과 하와 그리고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배권에서 어날 선택권을가질 없다.  대상상들 바뀌 변할 있지만, 존관계 결단코 사라지지 것이다. 하나님 없이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조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주권은 어떤 위험에서 보호되어야 전혀 시기 다. 크리스토프 조종은 자신이 소유한 지배력의 한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따라서 트루먼이 자신의 황을 인식하게 될 경우 연기처럼 사라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었다.

3. 하나님의 행동들은 이기적인 충동 것이 아니다. 분은 그럴 전혀 없으시다. 반면에 크리스토프는 자비롭기는 하지만 루먼을 수한 심에 따라 동하 았다.  심리적으로 직업적으로 것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나님은 것이 하나 분이다. 제로 우리 하나님이 이기적이실 다고 말할 있다. 냐하 이기 심이란 자기 자신을 각해서 자신의 요를 채우려는 욕망에서 롯되기 다. 하은 더는 부각되실수 는 경지에 이미 올라 신 .

4. 아담과 하와에 대 하나님의 계획 은 자율성과 유를 포함하고

다.  때에 방식으로 시행될 자율성과 유를. 하지 크리스토프는 그 같은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어떤 지식 위험 가지였다. 현재 상태유지하는 만을 지향했다

 

5. 크리스토프스토프의 어떤 선택 조종하고 어떤 선택들 막았다.. 자신이 선택권 가지 있다는 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반에 걸쳐서, 특 영화 마지 분에서, 크리스토프 트루먼이 진실 못하도록 망가지 하도록 총력 기울였다. 마침 그가 트루먼에게 선택권 주게 름 아닌 자신에게 막을  힘이 없어졌을 그때였. 반면에 하나님 종과 불순종 간의 선택 권을 분명히 제해 

6. ‘트루먼쇼’에서 아담과 하와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싶다면, 남녀 배우들의 상황 보는 것이 듯싶다.  그들은 스토프 제를 고는 있었지만 개는 신의 선택 해서 그런 통제를 받게 되었다. 들은 크리스토프 세계에서 살기 자신들의 자유 포기하였. 외는 조적으로 배우 아는 트루먼이 방되기를 간절히 기에 세계에 침투하여 그에게 깨달음을 주려 시도했다. 독의 명령에 순종하기 선택하였고,  세계의 택을상실 배역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뱀에 하기에 가장 인물이다. 하지만 서는 웅들 부각되 . 마지막은 자유의 몸이 트루먼 아서 진짜 세계에 디딘 환영하러 가기 위해 실비아가 자신의 파트를 차고 는 장면으로 끝이 .

It is a hallmark of our society that personal freedom and the right to liberty are values above all others. Even eternal life is dispensable. Is God really nothing more than a benevolent manipulator like Director Christoph in The Truman Show? It will be instructive for our view of God to observe some important differences.

1. God’s control was not diminished by Adam and Eve’s choice. When Truman left the set, he walked totally out of reach of Christoph. Neither Adam and Eve, nor any of us, has the choice to remove ourselves entirely from God’s control. Dependencies may shift and transform, but dependency will never go away. Without God we do not exist.

2. God does not manipulate, because his sovereignty never needs to be protected from jeopardy. Christoph’s manipulation was designed to maintain the margin of control that he had and that was constantly in danger of evaporating if Truman became aware of his situation.

3. God’s actions are not selfishly driven. He has no needs. Christoph, though benevolent, did not act out of pure altruism for Truman’s sake. He had much to gain both psychologically and professionally. God has nothing to gain. In fact, we can say that God cannot be selfish, because selfishness results from a desire to elevate oneself and meet one’s own needs. God cannot be elevated any more than he already is.

4. God’s plan for Adam and Eve included more autonomy and wisdom—in the right way at the right time. Christoph could take no such risks. Any knowledge was dangerous. He intended only to maintain the status quo.

5. Christoph controlled choices and prevented choices. In fact, Truman never knew he had a choice. All through the film but especially in the end, Christoph plays an active role in trying to prevent Truman from learning the truth and escaping. It was only when he was powerless to stop Truman that he offers him a choice. In contrast, God made the choice between obedience and disobedience clear.

6. If one is looking for a comparison to Adam and Eve in The Truman Show, it would be better to consider the situations of the actors and actresses. Though they were controlled by Christoph, that was mostly through their own choice. They gave up their freedom in order to live in his created world. In contrast, one of the actresses, Sylvia, who longed for Truman’s release, attempted to invade that world and give Truman understanding. She chose to disobey the director and was cast out, losing the benefits of the artificial world of Sea Haven. She is the figure most comparable to the serpent, but in the movie she is one of the heroes. The film ends with her running out of her apartment to go find the liberated Truman and welcome him to the real world.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19–220.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순종하면 영생을 얻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마음대로 수정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그대로의 순종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명령을 상황화한다. 물론 성경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나의 상황에 맞게 하향평준화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의 열매에 대해서 만지지 말라거나,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게 왜곡시킨다.  이니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 존귀하고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난 존재이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린것이다. 문제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7절을 보면 그들의 문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뱀은 유혹을 통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지만 결과는 눈이 밝아져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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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en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nI will make him a helper fit for5 him.” 19 oNow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had formed6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bird of the heavens and pbrought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And what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creature, that was its name.

n 1 Cor. 11:9; 1 Tim. 2:13

5 Or corresponding to; also verse 20

o ch. 1:20, 24

6 Or And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formed

p Ps. 8: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2:18–19.

 

18절) 하나님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앞서 1:31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본문에는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그는 아담을 의미하는데 논리적으로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하와가 나중에 창조된 것으로 보인다. 남자가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에쩨르)을 지을 것을 계획하셨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Not good is a jarring contrast to 1:31; clearly, the situation here has not yet arrived to “very good.” I will make him can also be translated “I will make for him,” which explains Paul’s statement in 1 Cor. 11:9. In order to find the man a helper fit for him, God brings to him all the livestock, birds, and beasts of the field. None of these, however, proves to be “fit for” the man. “Helper” (Hb. ‘ezer) is one who supplies strength in the area that is lacking in “the helped.” The term does not imply that the helper is either stronger or weaker than the one helped. “Fit for him” or “matching him” (cf. ESV footnote) is not the same as “like him”: a wife is not her husband’s clone but complements him.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4.

 

helper’(개역개정에는 “돕는필”이라고 되어 있으나, 표준새번역은 돕는사람”으로 번역- 주)라는 단어 누군가 돕기 위해 오는 사람, 또는 누군가에게 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단어 속에는 관련된 람들의 관계성이나 인척 관계를 암시하는 어떤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 제로 구절에서 발견된 그 단어의 사형은 다른 곳에서 거의 부분 하나님을 가리되,히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으로 분을 언급할 때 사용되고 있 단어의 동사형까지 확대하면, 하나님의 원한 우월성을 그 주제 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 간의 람들이 람들을 돕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후자에 해당하는 범주를 살펴보면,  사람 자기 을 돕나((사 41:6), 정치적인 동맹이 합을 통해 돕거나( 10:15)군사적인 원을 통해 돕는다( 10:4; 8:5) 뜻으 쓰이 음을 발견 된다. 어떤 우도 는 사람의 상태 노예 으로 제시하고 있지 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맞을 같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helper' 를 ‘leader’(지도자)의 반대/보충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NIVAC 250p)

The word “helper” is common enough as a description of someone who comes to the aid of or provides a service for someone. It carries no implications regarding the relationship or relative status of the individuals involved. In fact, the noun form of the word found in this verse as used elsewhere refers almost exclusively to God as the One who helps his people. If we expand our investigation to verbal forms, we find a continuing predominance of God as the subject, though there are a handful of occurrences where people help people. In this latter category we find people helping their neighbors or relatives (Isa. 41:6), people helping in a political alliance or coalition (Ezra 10:15), and military reinforcements (Josh. 10:4; 2 Sam. 8:5). Nothing suggests a subservient status of the one helping; in fact, the opposite is more likely. Certainly “helper” cannot be understood as the opposite/complement of “leader.”38

The second word, kenegdo (niv “suitable”), is much more problematic. It is a combination of two prepositions with the appendage of the third masculine singular pronominal suffix. In preposition combinations, as in most compound words, the whole does not equal the sum of the parts.39 Confidence in assigning meaning can only be achieved when we have sufficient examples of the compound being used in context. Unfortunately, this compound occurs nowhere else. The first preposition, ke, is generally used to describe comparison and correspondence. Waltke and O’Connor describe three basic facets to its use: approximation, agreement in kind, and correspondence in identity.40 It is therefore usually translated “like” or “as.”

The second element (neged) is predominantly used as a preposition, though HALOT considers it a substantive here.41 Its range of meaning is most similar to what we would find in the English word “opposite,” which can be spatial (e.g., opposite bank) or conceptual, thereby being used in contexts that suggest “complementary” or contexts that suggest “in opposition to” someone. Obviously, this profile leaves so much room that it is useless for giving us direction. As a result of the lack of synchronic information and the ambiguity of the diachronic information, most interpreters find in this phrase whatever they come to it looking for.42

The best procedure from a methodological standpoint in this kind of situation is to find something sufficiently vague to cover the territory. As a result, since helping generally has to do with mutual undertaking of a task and the prepositions lead us to understand some level of association, I would choose a translation such as “partner” or “counterpart.” The former better reflects the “helper” part of the combination, while the latter better reflects the compound word. If we could make up words, “counterpartner” would be a great one.

38 As implied by R. Ortlund’s treatment in “Male-Female Equality and Male Headship: Genesis 1–3,” in Recovering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 ed. J. Piper and W. Grudem (Wheaton: Crossway, 1991), 102.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39 In English we do this more with adverbs than with prepositions, such as “nevertheless” and “furthermore.” We use paired prepositions more than compound prepositions, e.g., “over against,” though we do use compounds such as “into.”

40 IBHS §11.2.9a–b.

HALOT Koehler, L., W. Baumgartner, and J. J. Stamm.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Translated and edited under the supervision of M. E. J. Richardson. 4 vols. Leiden: Brill, 1994–1999.

41 Also in Prov. 8:6, though there it only comes into the text through emendation. A substantive is any word that can serve as subject of a verb.

42 A. Spencer’s attempt to connect the preposition (neged) to a putative noun form (nagid = “leader”) is an example of the abuse of lexical semantics that occurs when diachronic approaches are not distinguished from synchronic (Beyond the Curse: Women Called to Ministry [Nashville: Thomas Nelson, 1985], 24–26). It is interesting that Ortlund attempts to use “helper” to prove that man is the leader, and Spencer uses kenegdo to try to prove that woman is the leader.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6–177.

 

19절)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이끌고 가셨고 이에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자 곧 그 이름이 되었다. 

본절은 앞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의 성취이다. 앞선 1장의 창조의 사건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2장은 동물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그들을 지으셨다라고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해서 각 동물들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 부른 호칭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아담은 이 과정속에서 모든 동물이 암수로 나아오고 그들의 특성에 맞추어 이름을 불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을 불러주는 과정속에서 동물들중에 자신의 배필을 찾을 수 없었고 자신의 홀로 있음으로 인해 외로웠을 것이다. 돕는 배필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가지고 있지 않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이다. 이 용어는 돕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보다 더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게 적합하다는 것은 그 대상과 똑같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리어 서로 다르기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2:19은 창세기 2:5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이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 2:5은 인간 존재와 그의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땅의 황무함의 원인을 말하면서,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노동을 부각시키고 있다. 창세기 2:5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땅과 그 위에 사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자가 인간임을 밝힌 창세기 1:26–28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창세기 1:26–28에서는 바다와 하늘과 땅의 물고기, 새, 짐승이지만, 창세기 2:5에서는 식물이다. 창세기 1:26–28과 창세기 2:5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서 마침내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의 영역이 완결된다. 식물의 생육, 번성, 땅의 충만케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창구가 인간이다. 창세기 2:19은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의 절정을 보여준다. 창세기 2:19에서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온다. 그리고 아담은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여기에 아주 독특한 현상을 엿볼 수 있다. 6일간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1–3일에 만든 피조물들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지만 4–6일에 만든 피조물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대신에 창세기 2:19 이하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는 역할을 하나님의 허락하에 아담이 대신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창세기 2:19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각각의 동물들에게 네페쉬 하야(נֶפֶשׁ הַיָה)를 부르고 있다. 창세기 2:7과 창세기 2:19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한다(וַֽיְהִ֥י הָֽאָדָ֖ם לְנֶפֶ֥שׁ הַיָּֽה). 반면에 창세기 2:19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각종 짐승들을 만들지만 생기를 불어 넣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 2:19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짐승들에게 생령을 부르는 역할을 하고 있다(וְכֹל֩ אֲ֙שֶׁר יִקְרָא־ל֧וֹ הָֽאָדָ֛ם נֶפֶשׁ חַיָּ֖ה ה֥וּא שְׁמִוֹ).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06.

 

 

창세기 2장은 1장 창조 사역의 상세한 설명이다. 1장이 이미 진술되었지만 2장에서는 아직 여인, 하와가 등장하지 않은 상태이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암수 함께 있었지만 아직 아담은 홀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쩌면 1:31절의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한 상태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이다. 이를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의 첫 단계가 바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문화명령,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역할의 수행임과 동시에 돕는 배필을 지으시기 위한 단계이기도 했다. 모든 동물들에게는 배필이 있었지만 아담에게는 없었다. 이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이러한 상태를 인식하도록 하신 것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시고 이제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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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e Lord God took the man k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keep it. 16 And the Lord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You may surely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lyou shall not eat, for in the day that you eat4 of it you mshall surely die.”

k ver. 8

l ch. 3:1–3, 11, 17

4 Or when you eat

m Rom. 6:23; James 1: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15–17.

 

 

15절) 앞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으셨다. 거대한 왕의 정원인 에덴은 하나님의 성소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본문에 경작하다라는 단어는 ‘아바드’(5; 3:23; 4:2, 12; 잠 12:11; 28:19)는 돌보다,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지키다라는 단어는 ‘샤마르’로 보호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주어진 명령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일(노동, work)은 타락 이후의 죄의 결과로 주어진 노역(drudgery)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에덴에서 했던 일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나중에 이 두 히브리어 단어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일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민 3:7-8; 18:7) 인간의 역할은 정원지기 일뿐만 아니라 수호자이다. 제사장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의 일부로서 동산의 신성함을 유지해야 한다. 

The overall picture of Eden presented in the preceding verses suggests that the park-like garden is part of a divine sanctuary. The man is put in the garden to work it and keep it. The term “work” (Hb. ‘abad; cf. v. 5; 3:23; 4:2, 12; Prov. 12:11; 28:19) denotes preparing and tending, and “keep” (Hb. shamar) adds to that idea. Since this command comes before Adam sinned, work did not come as a result of sin, nor is it something to be avoided. Productive work is part of God’s good purpose for man in creation. Later, the same two verbs are used together of the work undertaken by the priests and Levites in the tabernacle (“minister” or “serve” [Hb. ‘abad] and “guard” [Hb. shamar]; e.g., Num. 3:7–8; 18:7). The man’s role is to be not only a gardener but also a guardian. As a priest, he is to maintain the sanctity of the garden as part of a temple complex.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3.

오경에서 동사 ‘아바드’(עָבַד)는 성막에서 ‘섬긴다’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고 ‘사말’(שָׁמַר)은 성막을 ‘지킨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창세기 2:15의 ‘아바드’(לְעָבְדָ֖הּ)와 ‘사말’(לְשָׁמְרָ֖הּ)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여 아담의 사역은 에덴 동산에서 섬기고 에덴 동산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창세기 2:15의 아담의 역할 중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사역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있다.34)

34) William Dumbrell, “Genesis 2:1–3: Biblical Theology of Creation Covenant,” ERT 25(2001): 225–226. 4QFlorilegium에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에덴 동산을 ‘מקדשׁ אדם’(미크다 쉬아담 temple of Adam)이라고 부른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98.

 

‘아바드’라는 단어는 장소가 목적어일때 농사일을 가리키고, 인격적인 대상(하나님, 바알, 애굽)들이 목적이일 때는 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물론 예외가 있다.) 동사 ‘샤마르’는 종교적인 명령들과 의무를 준수할 책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공간을 수호할 책임과 관련되서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스러운 공간, 성소를 꾸미고 보호하는 것은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지속적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16-17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리신다. 그것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먹게 되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 선악과는 무엇일까? 1) 성적인 자각, 2) 도덕적인 분별력, 3) 도덕적인 책임, 4) 도덕적인 경험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불순종을 통해서 선과 악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해 인간은 지혜를 얻는다. 반면에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죄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는 표현은 ‘네가 먹게 된다면’의 의미이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는 다면 반드시 죽을 것을 말씀하신다. 본문에서의 죽음은 신체적인 죽음인가, 영적인 죽음인가? 아니면 둘 다를 의미하는가? 이후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죽음은 둘 다를 의미한다. 물론 먹자 마자 바로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심판을 받았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가고 나서 즉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네가’는 단수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기초를 제공해준다.(고전 15:22; 롬 5:12-19) 하지만 이후 창 3:1-5에서 ‘너희’는 복수이다. 이 단락에서 여자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다. 

 

타락 이전에 아담은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켰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 밖의 땅을 경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천사들을 통해서 지키게 하셨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이 표현은 엄청난 확신이 있을 때 사용된다. 렘 26장에서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성전이 장차 파괴될 결과에 대해서 신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에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회개는 커녕 예레미야를 향한 강한 적개심에 불타서 그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26:8)라고 선언한다. 이후 11절에서 8절의 선언이후 예레미야의 죽음이 합당하다라고 말한다. 창 2장 17절을 풀어서 쓰면 “네가 그것을 먹을 때에 너는 사형 선교를 받게 될 것이며, 따라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More important, the verbal combination that describes the penalty (“you will surely die”) needs clarification. The profile of this combination of verb forms (infinitive absolute coupled with finite verb of the same root) using the root “to die” can be established with a good deal of confidence. In Jeremiah 26, the prophet delivers a scathing message to the people of Judah to the effect that the temple will be destroyed (26:4–6). The response of the people and priests is not repentance but antagonism toward Jeremiah as they seize him and pass sentence: “You must die!” (26:8). The explanation is given a few verses later, “This man should be sentenced to death because he has prophesied against this city” (26:11).

Jeremiah 26:8 uses the same phrase as we have in Genesis 2:17, but it is Jeremiah 26:11 that shows us exactly what the people mean by using that phrase in verse 8. When they say, “You will surely die,” they are talking about the eventual outcome of the behavior. The sentence will be passed, the doom will be fixed. This phrase is also used in the historical literature to pass sentence on offenders of various kinds (Gen. 20:7; Num. 26:65; 1 Sam. 14:39, 44; 1 Kings 2:37, 42). The resulting paraphrase of Genesis 2:17 then is: “When you eat of it, you will be sentenced to death and therefore doomed to die.” Consequently, death will be a certainty.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4–175.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그 사람에게 맡기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당시의 일은 고역이 아니었다. 에덴의 모든 피조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이를 가꾸고 보호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에덴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유일하게 선악과를 제외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임을 선언하셨다. 이 죽음에 대한 선언은 ‘죽을지도 몰라’라는 가정이 아니라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사탄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심을 품게하고 약화시킴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게 만든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신들이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이 동산을 맡은 자임을 상기시켜주는 도구였다. 그런데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고하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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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 Lord God planted a fgarden in Eden, in the east,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And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made to spring up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gThe tree of life was in the midst of the garden, h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 A river flowed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there it divided and became four rivers. 11 The name of the first is the Pis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i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bdellium and onyx stone are there. 13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the Gi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Cush. 14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the jTigris, which flows east of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the Euphrates.

f ver. 15; ch. 13:10; Isa. 51:3; Ezek. 28:13; 31:8; Joel 2:3

g ch. 3:22; Rev. 2:7; 22:2, 14

h ver. 17

i ch. 10:7, 29; 25:18; 1 Sam. 15:7

j Dan. 10: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8–14.

 

에덴의 의미는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이다. 

OT 1. גַּן עֵדֶן, garden of Eden, specifies the garden in Gen 2–3. In 2:8 the garden is located in Eden (בְּעֵדֶן also in Ezek 28:13, where it is further specified as the garden of God (גַּן; #1703), but in Gen 2:10 the river of the garden flows from Eden (מֵעֵדֶן). The difference in the use of the prepositions (בְּ = in and מִן = from) may indicate that Eden refers to the general location or region in which the garden was situated. There has been much speculation on the location of the garden of Eden (ISBE 2:16–17), but the meaning (quality) is of greater importance. Eden may be related to the Hebrew vb. עָדַן and nom. עֵדֶן (luxuriate, delight), as in the LXX. Humankind was placed by God in the garden of Eden to take care of it (Gen 2:15). After the episode described in Gen 3, the man is banished and has to work the soil (3:23). Paradise is lost (Milton), guarded by the cherubim on the east side of Eden (v. 24). The term is also used metaphorically in Ezek 36:35 and Joel 2:3. Ezekiel promises that the wasted land will be like the garden of Eden. Joel has it in the reverse meaning when describing the Day of the Lord.

2. Ezek 31:9 (cf. “in the garden of God,” גַּן), 16, 18 all have “the trees of Eden” (עֲצֵי־עֵדֶן) in the chapter comparing Egypt to a garden (גַּן).

3. Eden is mostly used in relation to the garden, but Eden alone is used in Gen 2:8, 10 (גַּן). Cain sojourned in a land east of Eden (4:16).

4. Eden is identified with the garden of God (Ezek 28:13) or stands in parallelism to the garden of Yahweh (Isa 51:3), the last describing the future restoration of Zion when the deserts will be like Eden.

I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 W. Bromiley, 4 vols., Grand Rapids, 1979–19882

LXX Septuagint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555.

 

창세기 2:8–17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세기 2:8–9, 2:10–17. 이 두 부분에는 세 가지 주제가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에덴 동산(8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8절)

        c. 과일 나무:생명 나무와 선악과(9절)

a’ 에덴 동산의 위치(10–14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15절)

        c’ 과일 나무:선악과(16–17절)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8.

 

8-9절) 하나님께서 동쪽에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본문의 에덴은 앞서 본것처럼 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곳의 지명일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 본문에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간’은 왕실 정원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해서 70인 역에서는 헬라어 ‘파라데이소스’로 번역하였다. 말하자면 에덴 낙원인 셈이다. 수메르어 ‘에딘’은 대초원 지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아람어에서는 ‘풍부하게 하다, 부요하게 하다’라는 의미와 연관된다고도 주장된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다. 특히 이후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물공급이 풍부한 곳으로 그 정원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자라났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을 맡기셨는데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셨다. 실낙원을 한 셈이다. 이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다. 우리의 범죄로 이 천국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우리가 소망해야할 원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요 5:24) 그리고 제한되었던 생명나무로의 접근이 허락될 것이다.(계 22:2)

 

고대 이집트에도 파라다이스에 대한 전통이 있었다. 태양신 레가 떠오르는 곳에 이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사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는 태양신 레가 항해하는 강이 있고, 무화과 나무와 2m까지 자라는 보리가 있다. 그리고 키가 4.5m나 되는 영혼이 그 보리를 수확한다.13)

고대 수메르 지역에도 파라다이스 전통이 있었다.14) 물의 신 엔키(Enki)와 땅의 신 닌훌삭(Ninhursag) 신화에 따르면, 딜문(Dilmun)은 순결하고 깨끗하고 밝은 땅이며, 그곳에는 질병도 죽음도 없다. 딜문에는 달콤한 물이 흘렀고 각종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였다. 엔키와 닌훌삭 신화는 딜문에 8가지 식물이 자라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엔키가 닌훌삭을 잉태하게 하여 딸(Ninmu)을 낳고, 그 딸과 동침하여 손녀(Ninkurra)를 낳고, 그 손녀와 동침하여 증손녀(Uttu)를 낳는다. 엔키가 증손녀인 우투와 동침하려 할 때 닌훌삭이 우투에게 조언하기를 엔키에게 오이와 사과와 포도를 요구하고 이를 주면 동침하고 주지 않으면 동침하지 말라고 한다. 엔키는 우투의 요청을 받아 들여 이것들을 구해 준다. 마침내 둘이 동침할 때 배출된 정액을 취하여 닌훌삭은 8개의 식물을 만들어낸다. 엔키는 이 8개의 식물을 뽑아 먹다가 아내 닌훌삭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15) 이처럼 이 신화의 기본적인 배경은 땅의 신과 물의 신의 갈등이다.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 전통은 에덴 동산과 유사점도 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와 수메르 신화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는 신들의 거주지이거나 사후 영혼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이며, 실제 거주자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13) ANET, 33. 에덴 동산을 파라다이스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70인역이다. 파라다이스는 페르시 아에서 기원한 용어로서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헬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 정원을 나타내는 표 현으로 사용되었다. J. N. Bremmer, “Paradise in the Septuagint,” Paradise Interpreted: Representations of Biblical Paradise in Judaism and Christinity, ed. Gerard P. Luttikhuizen (Leiden: Brill, 1999), 1–20.

14) 고대 가나안의 바알 서사시에는 가나안 만신전의 수장인 엘 신의 거주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 사하고 있다(ANET 152).

“Towards El of the Source of the Floods, In the midst of the headwaters of the Two Oceans.”

엘 신의 거주지가두강 또는두 바다의 근원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15) ANET 37–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9–90.

 

8절 본문의 에덴 앞에는 전치사 ‘베’가 쓰였는데 이 전치사는 이 본문을 두가지로 해석 가능하게 하다. 첫째로는 에덴과 동산을 동일시 할 수 있고 둘째로는 에덴은 광범위한 지역이고 동산을 그 지역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개역 개정의 해석은 후자를 지지한다. 또한 그 에덴 동산의 위치를 ‘동방의’(in the east)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방은 어디를 기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동방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지역을 기점으로 그 동쪽으로 이해되어 왔다. 아래의 지도를 보라. 

 

9절 본문에는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위치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성을 항구적으로 보장해주는 나무로 볼 것인지 생명을 연장해 주는 나무로 보아야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의 본문을 보면 도리어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말라는 금지명령은 없었다. 말하자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한번 먹었는데 그것이 영생의 효력이 있었다면 이후의 죽음의 사건은 설명이 안된다. 후자로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에덴동산을 쫓겨나서 먹지 못했기에 이제 죽음이 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언에서 이 나무를 네 차례 언급하는데 주된 관심사는 바로 생명의 연장이다.(잠 3:16-18, 13:2, 15: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의 나무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젊음의 나무로 보았다고 볼 수 있다. 

We should view the tree of life as having fruit that extends life rather than instantly grants immortality. The tree was not forbidden to Adam and Eve, and there is no reason to argue (either here or in 3:22) that they did not eat from it. But when they were cast from the garden, they were forbidden access to the tree.

We must understand the statement in 3:22 that they might “live forever” in light of two caveats. (1) If the fruit effectively extended life, then regular access to the tree could extend life indefinitely, thus eventuating in virtual immortality. That is different from thinking that one bite of the fruit would bring instant immortality. (2) Careful study of the term that the niv translates “forever” has demonstrated that it is not an abstract term, suggesting infinity or eternity per se, but characterizes something as being open-ended, with no anticipated ending built in.28 It is better translated “perpetual life,” suggesting that the fruit constantly counteracts any aging.

Extension of life is the issue in the four references to this tree in Proverbs. In 3:16–18, the tree is parallel to “long life” as one of the benefits wisdom has to offer. In 13:12 and 15:4, it stands in contrast to behavior that would demoralize and thereby take its toll on a person.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e Israelites viewed the tree of life as a tree of youth rather than as a tree of immortality.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8 A. Tomasino, “עוֹלָם NIDOTTE, 3:345–5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

 

본문의 선악과는 메리즘적인 표현이다. 메리즘은 두개의 서로 상반된 개념을 하나로 연결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표현법으로 선악, 천지, 유대인과 헬라인을 예로 들 수 있다. 본문의 선악은 선악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지식 전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용법은 함께 사용되는 동사들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1) ‘말하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때 ‘선악’은 말하는 사람이 심판을 내리거나 결정해야 한다. 

2) ‘듣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 그 단어는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3) ‘안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거나 그 동사의 동의어가 선과 악 앞에 전치사들을 동반하여 사용될 경우에 그 단어는 인간의 분별력을 가리킨다. 

4)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두 본문 외에 전치사 없이 ‘안다’라는 동사와 결합되어 사용된 유일한 본문이 신 1:39이다. 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에 이르지 못한 존재들이다. 

일반적으로 ‘안다’라는 동사가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그 동사가 ‘선악’이라는 메리즘 용법에서는 그런 의미를 띄지 않는다. 

본문에서 선악을 아는 것은 ‘분별하는, 구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특징이지(3:22) 아이들이나(신 1:39, 사 7:15-16), 노인들이나(삼하 19:35),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왕상 3:9)의 특징은 아니다. 

Understanding the second tree depends heavily on our ability t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phrase “knowledge of good and evil.” Note first that “good and evil” is consistently used as a merism and therefore indicates a whole range of knowledge, not knowledge of two isolated things (“good” and “evil”). Yet as a merism, it should not be thought of as referring to all knowledge. Instead, it applies to the range within a specific category of knowledge (“good and evil”). Like words, rhetorical devices such as merism can be understood only as we explore their usage. In the Old Testament we will find the usage falling into categories differentiated by the associated verbs.

1.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speak” (e.g., Gen. 24:50; 31:24, 29), “good and evil” suggest that the speaker pass judgment or issue a decision (or not, when negated).

2.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hear” (e.g., 2 Sam. 14:17), it means to listen with discernment to the details of a case so as to judge the legitimacy of a claim.

3.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know” or its synonyms coupled with prepositions before good and evil (2 Sam. 19:35; 1 Kings 3:9; Isa. 7:15–16), it refers to a human capability to be discriminating. This capability is lacking in children and in the elderly Barzillai. The statements do not suggest that the subjects do not know anything or that they are morally destitute, only that their ability to discern what is in their best interests is lacking.

4. Besides the two passages in Genesis 2–3, the only other passage that uses the merism without prepositions and collocated with the verb “to know” is Deuteronomy 1:39. Here, as in category 3, the reference is to children before they have reached the age where they can make decisions for themselves or live independently.

Those interpreters who point to the use of the verb “to know” as referring to sexual intercourse will find no help here, because the verb does not mean that when connected to the merism “good and evil”; such a meaning is, additionally, inappropriate to the context of 3:22. Those who contend, on the basis of 3:22, that the phrase should be understood as omniscience or universal knowledge will have trouble finding that meaning in the passages listed above. Those who think that moral judgment is involved likewise have difficulty with the occurrences cited above, in that none of them can easily be attached clearly or exclusively to the realm of morality. The context also works against this in that it is difficult to hold people responsible for moral choices if they have been given no moral judgment. The common denominator of these references is “discerning or discriminating wisdom.”

Knowing good and evil is characteristic of God (3:22) but not of children (Deut. 1:39; Isa. 7:15–16), the elderly (2 Sam. 19:35), or the inexperienced (1 Kings 3:9). It is something that people are inclined to desire and can use to gain wisdom (see Gen. 3:6). Even though Adam and Eve lacked this knowledge, they could still be held responsible for obedience; and when people gain the knowledge by eating the fruit, they can legitimately be described as being like God. The only potential problem comes when we wonder why God would have forbidden Adam and Eve to eat of a fruit that bestowed such positive qualities. We will probe this question in chapter 3.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172.

 

10-14절) 본문은 에덴을 기점으로 흘러나온 네 근원의 강의 이름을 소개한다. 

첫째 강은 비손 강인데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흘렀는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었다. 둘째 강은 기혼강인데 구스 온 땅을 흘렀고, 셋째 강은 힛데겔(티그리스) 강으로 앗수르 동쪽을 흘렀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 강이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 강의 경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주변을 흐르는 강으로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처음 두 강, 비손과 기혼 강의 위치는 열려져있지 않다. 금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많은 천연 자원(보석)이 풍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귀금속은 이후에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창세기 2:14에 있는 셋째와 넷째 강은 일반적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다. 두 강은 현재 이라크와 이란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첫째 강 비손과 둘째 강 기혼의 위치는 미스테리에 속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들을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강들에서 찾거나, 메소포타미아 밖에 있는 나일강이나 인더스 강과 동일시 하거나, 또는 페르시아 만이나 홍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과거에 말라버린 사우디 아라비아의 강들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19)

위치와 관련하여 아담과 가인의 이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할 때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났다(창 3:23–24). 그리고 가인도 역시 아벨을 죽인 후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주하였다(창 4:16).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 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은 최소한 아담과 가인이 정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에덴을 동편이라고 칭하는 화자가 위치한 곳은 어디일까? 가나안, 지중해, 아니면 이집트?

창세기 2:11–14에 언급된 네 강들의 기록 순서를 보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잘 알려진 셋째 강과 넷째 강이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고, 대신에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비손과 기혼 강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강들인데 먼저 언급된 비손과 기혼 강은 이 두 강과 비교할 때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손강이 있는 하윌라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기혼 강이 있는 구스는 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에티오피아를 지칭한다(창 10:6–7, 대상 1:9).20) 그렇다면 에덴은 이들 네 강의 중간 부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경계선은 유프라테스와 나일 강이다(창 15:18). 쥬빌리에서 에덴 동산은 가나안 땅이다.21) 이에 더해 창세기의 저자는 유브라데와 힛데겔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가는 반면에 비손 강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곳에서 생산되는 금은 정금이고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생산되고 있다고 밝힌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이들 강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돕기 위해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 지역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에덴 동산은 동방에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저자는 에덴 동산으로 알려진 곳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아 홍수를 통해 지구 전체가 대격변을 겪었음을 감안한다면, 에덴 동산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19) John Walton, Genesis, 169. 왈턴(Walton)은 기원전 3500–2000 B.C. 에 말라버린 한 강을 비 손 강으로 여긴다. 이 강은 쿠웨이트의 페르시아만에서 메디나로 이어지는 히자즈(Hijaz)산맥을 흐른 강으로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인접해 있다.

20) John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98–99. U. Cassuto, Genesis, 115–121.

21) G. E. Aalders, Genesis, EBCOT (Grand Rapids: Zondervan, 1981), 86–9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90–92.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체와 지구, 동물과 식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고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이 내용이 에덴의 위치를 결정짓는 현대의 지리학 교과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살만에셀 3세(주전 9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가 ‘티그리스 강의 근원’에 있는 그 샘이 솟아나는 벼랑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고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실재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교제하는 장소였다. 구약의 성소가 바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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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When no zbush of the field1 was yet in the land2 and no small plant of the field had yet sprung up—for the Lord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on the land, and there was no man ato work the ground, and a mist3 was going up from the land and was watering the whole face of the ground— then the Lord God formed the man of bdust from the ground and cbreathed into his d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ethe man became a living creature.

y ch. 1:1

z [ch. 1:11, 12]

1 Or open country

2 Or earth; also verse 6

a ch. 3:23

3 Or spring

b ch. 3:19, 23; 18:27; Ps. 103:14; Eccles. 12:7; 1 Cor. 15:47

c ch. 7:22; Job 33:4; Isa. 2:22

d Job 27:3

e Cited 1 Cor. 15:4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4–7.

 

 

- 얀 브뤼헐, 인간을 만드시는 하나님

 

앞선 1:1-2:3의 기록이 7일간의 기록의 요약이라면 2:4-25에 등장하는 내용은 여섯째날 인간 창조에 대한 내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마치 앞선 1장에서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서 전체를 조망했다면 이제 2장에서는 줌인을 해서 한 사건, 인간 창조와 에덴 동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묘사하면서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초월적인 존재로서 묘사했다면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곳에 내재하시며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서로 반하기 보다는 균형을 맞추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또한 1장은 인간의 왕적인 특성을 강조했다면 2장은 인간의 제사장 신분에 초점을 맞춘다. 

The Man and Woman in the Sanctuary of Eden. The panoramic view of creation in ch. 1 is immediately followed by a complementary account of the sixth day that zooms in on the creation of the human couple, who are placed in the garden of Eden. In style and content this section differs significantly from the previous one; it does not contradict anything in ch. 1, but as a literary flashback it supplies more detail about what was recorded in 1:27. The picture of a sovereign, transcendent deity is complemented by that of a God who is both immanent and personal. The two portrayals of God balance each other, together providing a truer and richer description of his nature than either does on its own. In a similar way, whereas ch. 1 emphasizes the regal character of human beings, ch. 2 highlights their priestly statu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2.

 

4절) 하늘과 땅의 내력, 본문에 내력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generation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톨레도트’이다.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족보, 계보(톨레도트)는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에서 이 표현은 11번 등장한다.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2:4; 5:1 with slight variant;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이단어는 언급되는 대상이나 이름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자손에게 초점을 맞춘다. 70인역에서 창세기의 헬라어 표현으로 genesis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톨레도트’인 generations에서 나왔다. 

이 구절들은 마치 돋보기의 역할을 한다. 전체의 그림속에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의 족보들

본문의 ‘톨레돗’은 영어 표현으로는 모두 generations라고 번역되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내력, 계보, 족보라고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서 엘로힘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가 소개된다. 여호와는 영어성경에서 주(LORD)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표현이 나오면 이를 감히 발음하지 못해서 ‘아도나이’로 바꾸어서 읽었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단어의 사용은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성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6절) 본절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본문의 땅(land, 에레츠)는 땅 전체(earth)를 가리킨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의 땅은 아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상태였다.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마른 땅이었고 땅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히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직 땅위에 내리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6일 창조의 완성은 인간의 창조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땅을 갈고 경작함으로 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1) 땅에 식물이 없음

2) 하나님의 비와 사람의 노동의 부재

3) 땅에서 수증기가 나와 표면을 적심

하나님의 은혜의 부재와 땅을 경작할 인간의 부재가 식물의 부재의 원인이다. 

 

창 1:2과 2:5-6의 주제상의 공통점

 

본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 땅은 ‘에레츠’, ‘싸데'이고 경작할 사람이 없는 땅은 ‘아다마’이다. 경작을 위해서는 땅을 갈고 물을 공급해주어야 했다. 물을 공급해주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을 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의 부재는 무생산으로 연골된다. 

 

본문에서 안개로 번역된 ’에드’는 NIV에서 시내들(streams)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은 욥 36:27에 단 한번 등장한다. 수메르어 ‘이드’는 지하에 있는 신선한 물을 가리키고, 아카드어 ‘에두’는 물이 모여있는 곳에서 일어난 물결이나 큰 파도를 가리킨다. 츠무라라는 학자는 본문에서 ‘에드’를 주요 하천 시스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보고 있다. 이는 비와는 다른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물이 땅을 비옥하게 하는 대표적인 두 방식(하천의 범람과 비)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Two connections have been suggested: one to the Sumerian id, which refers to subterranean fresh waters (followed, e.g., by Westermann and Wenham); the second to Akkadian edu, which refers to waves or the swell of a body of water (followed, e.g., by Speiser and Hamilton).

Tsumura makes a case that ʾed refers (among other things) to the regular inundation of the major river systems.4 As such it stands in contrast to rain, so that both represent the two major ways that water fertilized the land in the ancient Near East. The inundations would be mentioned in relation to people working the ground because the annual inundations were only made useful by the digging of irrigation canals to channel the water profitably. It is also true that the inundation rises (to match the verb in v. 6). In Akkadian usage edu was believed to arise from the apsu, the subterranean waters.5

4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110–16.

5 Ibid., 111–12.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64–165.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고 이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앞서 1:26-28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2:7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흙으로 사람을 직접 만들어 그 코에 입맞춤을 하듯이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본문에서 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다마’이다.(2장에서는 땅(에레츠)와 지면, 땅(아다마)가 모두 사용된다.) 이 땅(아다마)라는 단어에서 사람(아담)이 나왔다. 아담은 먼저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면서 첫 인간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지으셨다라는 표현은 ‘야차르’라는 동사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특별한 형태의 토기를 빚어내는 것을 가리민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을 지으실 때 직접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사람이 당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생명의 숨(신체적, 정신적, 영적)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본문에서 생령은 생물(living creature, 네페쉬 하야)로 앞서 창 1:20, 24절에서 바다와 땅의 생물을 지칭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비슷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기를 인간에게 불어 넣어주심으로 자신안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다. 이러한 육체의 생명을 주신 것은 영적인 생명의 수여를 기대하게 한다. 생명이 아들안에 있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God has life in himself and imparts life to his creatures. The impartation of physical life anticipates the impartation of spiritual life (John 1:4; see 1 Cor. 15:45). Life is in the Son (John 5:21, 26; 1 John 5:12) and comes to us through the Spirit (John 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3.

 

생기의 ‘기’는 히브리어로 ‘네사마’(נְשָׁמָה)이며 ‘바람,’ ‘호흡,’ ‘영’이란 뜻을 가지고 창세기 1:2의 루아흐(רוּחַ)와 동의어적인 표현이다(욥 27:3, 사 42:5). 창세기 1:2에서 지구를 덮고 있던 그 영을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얼굴을 흙으로 빗어진 인간의 얼굴에 맞대고 자신의 입에서 그의 코에 인공 호흡하듯이 불어 넣고 있다.12) 그 결과 사람은 생령이 되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12)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197. Lyn Bechtel은 창세기 2:4–3:24을 아담의 탄 생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Lyn M. Bechtel, “Genesis 2.4B–3:24: A Myth about Human Maturation,” JSOT 67 (1995): 3–26.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7–88.

 

본절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땅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설명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창조의 화룡점정이 바로 인간의 창조였다. 인간이 없는 땅은 아직 생산을 위한 비, 하나님의 은혜가 부재한 상태였고 인간의 창조로 생산하지 못하던 땅이 생산이 가능한 땅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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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wall the host of them. And x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that he had don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that he had done. So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made it holy, because on it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that he had done in creation.

w Deut. 4:19; Ps. 33:6

x Ex. 20:8–11; 31:17; Deut. 5:12–14; Heb. 4: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1–3.

 

일곱째날 하나님께서는 마치시고, 안식하시고,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본 2장 1절은 1장 1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창 1:1, 개정)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2:1, 개정)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https://m.blog.naver.com/nuctom/221386971689

 

1절) 본절은 앞선 1장에 등장하는 6일간의 창조가 다 이루어졌음을 선언한다. 

일곱째날의 내용은 앞서 6일간의 창조의 패턴과는 차이를 보인다. 

1-6일의 창조 기록의 첫 표현은 항상 “하나님이 이르시되”이고 마지막 표현은 “저녁이 되면 아침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인데 반하여 제7일의 시작 표현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이며 마지막 표현은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니라”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일곱째날의 이 기록을 2장으로 분류하기 보다 1장의 마지막에 기록하는 것이 더 좋아보인다. 이는 히브리 문학의 전형적인 inclusio, 봉투 구조에 해당한다. 창 1:1에서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고 2:1에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치고 쉬며 안식일을 재정한다. 이렇게 창조는 완전한 원을 형성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 편에서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가 안식일에 쉼과 예배를 통해 그에게로 돌아간다. 이 안식일에 인간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즉 인간 자신을 위한 창조 활동을 멈춤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더욱 빛나게 한다.71) 그 인간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넷째 날의 발광체들이 하게 된다. 넷째 날 발광체와 여섯째 날 인간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4일 – 안식일 징조

               7일 – 안식일

    6일 – 안식일 지킴이

동사 ‘이루니라’(כָלָה 카라)는 창조와 관련된 모든 과정과 행위가 끝났다는 말이다. 2:1은 하늘과 땅의 창조가 이루어진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음을 말한다. 명사 ‘챠바’(צָבָא)는 주로 군대, 전쟁, 그리고 천사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해와 달과 별들 같은 천체를 주로 지칭하는 말이다. 2:1에서 ‘챠바’는 창조 과정을 통해 잘 정리된 하늘과 땅의 군상들을 의미한다.

71) Jeph Holloway, “From the Beginning: The Moral Vision of Genesis 1–11,”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90–9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76–77.

 

2-3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창조 사역이 다 이루어짐에 따라 이제 일곱째날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 일곱째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으로 인해서 지치셨기 때문에 쉼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2절에서 그가 하시던이라는 표현에서는 ‘아사’가, 3절에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이라는 표현에서는 ‘바라’가 히브리어 동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인 에뉴마 엘리쉬에 의하면 젊고 어린 신들은 나이 많은 신들을 섬기는 노예였다. 마르둑이 신들의 원수였던 악의 신인 티아매트를 죽여 하늘과 땅을 만들었을 때 젊은 신들은 마르둑에게 그들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마르둑의 명령에 따라 신들은 티아매트의 부하 킹구를 죽여 그 피로 인간을 만들고 자신들의 노동을 떠맡긴다. 인간들은 신들의 안식을 위해 수고하는 노예로 탄생된 것이다. 이어서 신들은 티아매트와 벌인 전쟁과 창조 때문에 피곤해진 마르둑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그리고 마르둑과 자신들의 안식을 위해 벽돌로 신전을 높이 쌓아 만든다. 그리고 그 신전의 이름을 바빌론이라고 붙이고, 그 신전에서 쉬며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신다.72)

제7일에 하나님이 쉬었다는 것은 에뉴마 엘리쉬의 신들의 안식과 같은 차원일까? 창조라는 엄청난 일을 하느라 피곤해진 몸을 쉼을 통해 재충전하는 것일까? 창세기 2:1–3에서는 이런 사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창세기 2:3에 의하면 하나님은 제7일에 쉬고 거룩하게 구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7일을 축복하였다(와에바렉 엘로힘 에트–욤 하스비이וַיְבָ֤דֶךְ אֱלֹהִים֙ אֶת־י֣וֹם הַשְּׁבִיעִ֔י). 거룩하게 한 것은 제7일을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특정한 날로 구별한 것을 말한다. 그럼 하나님이 제7일을 복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 공간 속에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창조하고 그 다스리는 것들을 만든 것처럼, 시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시간을 질서정연하게 만들고 제7일을 1–6일보다 우월한 날로 만든 것을 의미할까?73) 그래서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을 더 높인 것처럼 영적인 의미에서 제7일을 높인 것을 의미할까?74) 안식일을 축복하였다는 말의 의미는 본문의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6일간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모두 세 번 사용되었다(창 1:22, 28, 2:3). 창세기 1:22와 1:28에서 축복은 공통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 지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축복에서는 이에 더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은 항상 사람이나 사람의 소유 그리고 생명체에 한정되며, 축복의 내용은 창세기 1:22과 1:28처럼 번영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관련 있다.75)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7일을 축복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할까? 제7일에 대한 축복은 모세 오경의 안식일 규정들 전체의 배경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레위기 26장은 안식일을 비롯한 하나님의 언약의 규정들을 지킨 자에게 언약의 복을 주고 어긴 자에게는 언약의 저주를 내린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저주를 받는 그 자가 자기 기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간 사이에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된다.76) 신명기 15:9–10에서 제7년 안식년 또는 면제년 규정에서도 같은 신학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식년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종을 해방시켜 주면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준다고 한다(신 15:9–10, 18). 그러므로 안식일을 복준다는 것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그 사람을 축복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2) ANET 68. “Blood I (Marduk) will mass and cause bones to be. I will establish a savage, ‘man’shall be his name. Verily, savage–man I will creat. He shall be charged with the service of the gods that they might be at ease!… Ea answered him (Marduk), speaking a word to him, giving him another plan for the relief of the gods. … Out of his blood (Kingu) they fashioned mankind. He imposed the service and let free the gods.”

73) Nahum M. Sarna, Genesis, 15.

74) U. Cassuto, Genesis, 65.

75) Claus Westmann, Genesis 1–11 (Minneapolis: Augsburg, 1984), 172–173.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aco: Word Books, 1987), 36. Terence E. Fretheim, Genesis, NIB (Nashville: Abingdon, 1994), 347. NICOTTE, 1:757–767.

76) Howard N. Wallace는 창세기 2:1–3의 안식에는 땅의 안식도 포함되어 있으며, 안식일 지킴에 땅의 안식을 포함시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기독교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Howard N. Wallace, “Rest for the Earth? Another Look at Genesis 2:1–3,” The Earth Story in Genesis, eds. Norman C. Habel & Shirley Wurst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49–5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78–80.

 

하나님은 일곱째날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본인이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그 안식으로 초청하신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에 손을 놓고 계신 것이 아니다. 어떠면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을 하고 계시는데 바로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 안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거룩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설화속에서 인간들은 신들의 안식을 위해 수고하는 존재, 노예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신들의 안식을 위해서 신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의 안식일에서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들도 그 안식에 동참하도록 촉구하고 계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을 지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가장 풍요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성취하신 쉼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후에 영화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속에서 완전한 안식의 그림자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후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명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시작된 안식은 마지막때에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도래로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주할 장소를 주시고자 우주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전으로 사용하시려고 우주를 만드셨다. 

그분이 창조하시는 환경은 그분이 창조한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안식을 마련하고 계시는데 , 그 안식은 완성된 우주에 의해서 제공되는 휴식이다. 그분이 안식하는 장소에 거하신다는 것은 곧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즉 우주의 주권적인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성전은 단지 이 개념에 상징적인 실체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시편 104:24에서는 이것을 우주의 요소들이 여호와의 통치를 위한 관리자들로서 섬기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The environment he creates is not intended to provide rest for the people he has created (though that becomes a significant piece of theology as time goes on).8 Rather, he is making a rest for himself, a rest provided for by the completed cosmos. Inhabiting his resting place is the equivalent to being enthroned—it is connected to taking up his role as sovereign ruler of the cosmos. The temple simply provides a symbolic reality for this concept. Psalm 104:2–4 captures this as the elements of the cosmos serve as functionaries for Yahweh’s rule.

8 The land is given to Israel for their rest in the theology of the historical narratives; see the discussion in Laansma, I Will Give You Rest, 18–38.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48.

 

창조에 대한 기록과 광야에서의 성막 건축에 대한 설명 사이에 일련의 중요한 동사가 사용된다.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모세기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축복하였더라’. 이처럼 성막 건축이 세계 창조의 이미지로 제시되었으며 창조 때 시작된 과정의 연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Indeed, as Martin Buber long ago noted, a series of key verbal parallels exists between the account of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the description of the building of the tabernacle in the desert (compare Genesis 1:31; 2:1; 2:2; 2:3 with Exodus 39:43; 39:32: 40:33; and 39:43, respectively). Thus, “Moses saw all the work” which the people “did” in constructing the tabernacle; “and Moses completed the work” and “blessed” the people for all their labors.

… Manifestly, then, the building of the tabernacle has been presented in the image of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signified as an extension of a process begun at the creation.10

10 M. Fishbane, Text and Texture (New York: Schocken, 1979), 12, The function of Genesis 1 and Exodus 40 as an inclusio around Genesis and Exodus show the text’s self-awareness of the connection between cosmos and sanctuary. I am grateful to my colleague Andrew Schmutzer for bringing Fishbane’s comments to my attention.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49.

 

아래의 성경 구절은 “인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눅 6: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우리들은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 주인이신 분이 안식을 제정하셨고 친히 안식하셨으며 우리에게 안식을 명하신 것이다. 

(레 19:30, 개정)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내 것이라고, 그러므로 나의 성소를 귀히 여기라고 명하신다. 이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안식일과 성소가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주를 주관하고 계심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전은 일종의 소우주적인 모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만드시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활동에서 손을 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신론의 하나님) 도리어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주를 운행하고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과 시간과의 관계는 성전과 공간의 관계와 같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나의 삶의,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믿음의 고백이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한주간 가운데, 6일동안 자기들의 존재를 이끌어왔던 자기중심적 필요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리셋 버튼(reset button)을 누르는 것과 같다. 컴퓨터의 작동에 문제가 생길때 우리가 흔히 하는 행동이 바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는 것이다. 안식일은 바로 그와 같다. 

(사 58:13-14, 개정)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안식일은 이처럼 자기 쵀락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할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 감사, 존경을 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라.(현충일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얼마나 그들을 기념하며 존경하는지,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어떤 이들은 행진을 하고, 어떤 이들은 국립묘지를 방문해 분향을 하거나 꽃다발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하루를 쉬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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