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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living creatures according to their kinds—livestock and creeping things and beasts of the earth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it was so. 25 And God made the beasts of the earth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the livestock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everything that creeps on the ground according to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 Then God said, o“Let us make man8 in our image, pafter our likeness. And q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over the livestock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r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s“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29 And God said, “Behold, I have given you every plant yielding seed that is on the face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with seed in its fruit. tYou shall have them for food. 30 And uto every beast of the earth and to every bird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everything that has the breath of life, I have given every green plant for food.” And it was so. 31 v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ixth day.

o ch. 3:22; 11:7; Isa. 6:8

8 The Hebrew word for man (adam) is the generic term for mankind and becomes the proper name Adam

p ch. 5:1; 9:6; 1 Cor. 11:7; Eph. 4:24; Col. 3:10; James 3:9

q ch. 9:2; Ps. 8:6–8; James 3:7

r ch. 2:18, 21–23; 5:2; Mal. 2:15; Matt. 19:4; Mark 10:6

s ch. 9:1, 7

t ch. 9:3; Ps. 104:14, 15; 145:15, 16

u Ps. 147:9

v Eccles. 7:29; 1 Tim. 4: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24–31.

 

 

6일간의 창조의 기록중 여섯번째 날의 내용이 가장 길다. 물리적인 창조의 시간은 가장 짧을 수도 있지만 가장 절정에 해당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여섯번째 날 창조의 장소는 바로 셋째날의 마른 땅인 것을 알 수 있다. 

 

24-25절) 여섯째날 전반부에는 땅의 생물을 창조하신다. 이 생물들은 세부류로 나뉘어지는데 이는 과학적인 철저한 구분이라기 보다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수있는 일반적인 분류이다. 

1) 가축(베헤마) : 길들인 동물들, 집에서 기를 수 있는 동물(양, 염소, 소, 낙타, 말 등)

2) 땅에 기는 것(레메스) : 땅에 기어다니는 작은 동물(쥐, 도마뱀, 거미 등)

3) 짐승(하야) : 크고 힘센 동물, 맹수(가젤, 사자, 곰 등)

 

26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땅과 땅에 기는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신다.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호칭하시면서 대화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천사들이 인간 창조의 사역에 참여했다라는 이야기는 없기에 이는 합당하지 않다.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다. 인간은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이미징 관계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타락과 죄로부터의 인간의 구속은 재창조(고후 5:17)을 포함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엡 4:24) 존재가 되는 것이다.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The text does not specify the identity of the “us” mentioned here. Some have suggested that God may be addressing the members of his court, whom the OT elsewhere calls “sons of God” (e.g., Job 1:6) and the NT calls “angels,” but a significant objection is that man is not made in the image of angels, nor is there any indication that angels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of human beings. Many Christians and some Jews have taken “us” to be God speaking to himself, since God alone does the making in Gen. 1:27 (cf. 5:1); this would be the first hint of the Trinity in the Bible (cf. 1:2).

The divine Son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Col. 1:15). Man was created in a way that reflects the imaging relation among the persons of the Trinity. The redemption of man from the fall and sin includes re-creation (2 Cor. 5:17), his being “created after the likeness of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in the image of Christ (Eph. 4: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1.

 

형상의 히브리어 단어 ‘셀렘’은 물질적인 외형을 갖춘 조각상이 아니라 물질적인 형태를 띤 대리자를 의미한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여러 왕이 자신들의 권위를 확립하고 싶어하는 곳마다 자신들의 형상들을 만들어 세워 두는 관행이 있었다. 

아기가 부모를 닮었다는 것은 단지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라가면서 부모의 성격이나 태도, 표현이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방식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신의 속성을 반영할 능력을 소유한 자로 창조된 것이다. 이 형상을 지닌 자는 그 형상이 대표하는 자의 속성들을 반영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 대신에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받았다.

- In conclusion, the following definition takes account of all of the ancient Near Eastern and biblical evidence concerning the role of the image of God: The image is a physical manifestation of divine (or royal) essence that bears the function of that which it represents; this gives the image-bearer the capacity to reflect the attributes21 of the one represented and act on his behalf. Note the similarity of this idea with New Testament statement concerning Christ being “the image [eikon] of the invisible God” (Col. 1:15). He is a physical representative of God rather than a physical representation of what God looks like. As such he bears the essence of God, reflects his attributes, and acts on his behalf. In the context of Genesis 1, people act on God’s behalf by ruling and subduing.

21 Those attributes are not conscience and self-awareness, but love, faithfulness, justice, wisdom, etc.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31.

 

 

27절)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 무엇인가? 고대 근동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는 왕을 상징한다라고 말했다. 고대 근동의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사람들을 통치한다라고 여겼다. 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이 표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이후의 문화 명령으로 연결된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셨는데 인간을 지으실 때는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의논하시고 자기의 형상을 닮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이 닮은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먼저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소통하셨다. ‘페리코레시스’ 상호교통, 상호침투가 중요한 특성이다. 또한 이성과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 도덕 의식,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능력, 다양한 형태의 예수를 창조하고 이를 느끼는 미적 감각,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러한 차별된 능력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속에서 신은 인간을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도록, 자신들이 노예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형상을 허락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이 사실은 당시의 세계관을 흔드는 매우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본문에 사람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아담’이다. 이는 사람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였다가 이후에 아담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때때로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여성과 구별되어 남성을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Traditionally, the image has been seen as the capacities that set man apart from the other animals—ways in which humans resemble God, such as in the characteristics of reason, morality, language, a capacity for relationships governed by love and commitment, and creativity in all forms of art. All these insights can be put together by observing that the resemblances (man is like God in a series of ways) allow mankind to represent God in ruling, and to establish worthy relationships with God, with one another, and with the rest of the creation. This “image” and this dignity apply to both “male and female” human beings. (This view is unique in the context of the ancient Near East. In Mesopotamia, e.g., the gods created humans merely to carry out work for them.) The Hebrew term ’adam, translated as man, is often a generic term that denotes both male and female, while sometimes it refers to man in distinction from woman (2:22, 23, 25; 3:8, 9, 12, 20): it becomes the proper name “Adam” (2:20; 3:17, 21; 4:1; 5:1). At this stage, humanity as a species is set apart from all other creatures and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as ruler of the earth (cf. Ps. 8:5–8). The events recorded in Genesis 3, however, will have an important bearing on the creation status of humanit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1.

 

28절) 본절은 문화명령이라고 알려진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주신 복으로서의 명령은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중요한 동사 세가지를 꼽자면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명령이다. 

1)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복, 명령은 창세기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창 9:1, 개정)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7, 개정)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 17:20, 개정)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 28:3, 개정)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창 35:11, 개정)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48:4, 개정)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앞서 22절에서 바다와 하늘의 생물들을 향해서 충만할 것을 명령한 것과 같다. 종족 번식을 통해서 번성하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라면 인간들을 향해서는 신실한 자녀들을 낳아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지혜롭게 섬기고 예배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가운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로 충만할 것을 원하셨다. 

 

다섯째 날 창조된 피조물들은 축복의 결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은 이에 더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추가되었다. 28절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들을’(אֹתָם/לָהֶם 인간들을) 주어(אֱלהִֹים) 앞에 배치하는 도치법을 통해 인간에게 복 주심을 강조한다. 이는 고대 근동 사람들의 인간관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기원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던 티아매트(Tiamat)의 부하였고 뱀이었던 킹구(Kingu)의 더러운 피와 흙을 섞어 창조되었다. 근본이 더럽고 악한 뱀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은 신들을 부양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67) 그들의 세계관에서 오직 왕만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하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다.68)

67) John H. Walton, Ancient Israelite Literature in its Cultural Context: A Survey of Parallels Between Biblical and Ancient Near Eastern Texts (Grand Rapids: Zondervan, 1990), 19–42.

68) Atrahasis,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Creation, the Flood, Gilgamesh and oth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14–18] – 신들의 노동으 로 인한 고통을 들어주기 위해 인간 창조를 결정하고 Mami와 Enki가 이 일을 수행하기로 한다. Enki가 Geshtu–e라고 불리는 지적인 한 신을 죽여서 그의 살과 피를 진흙과 섞어 인간을 만들 준비를 한다. 죽은 신을 기념하기 위해 ghost를 만든다. The Igigi, the great gods들이 진흙에 침을 뱉는다. Enki와 Mami가 운명의 방으로 들어가서 14조각의 진흙을 끄집어내어 7쌍씩 좌우 에 세우고 그 사이에 흙 벽돌을 세운다. 마침내 7쌍의 남녀 인간이 탄생되고 이들을 각각 둘씩 부 부로 짝지어 이들을 통해 인간이 번식하게 하며, 임신의 기간을 10개월로 정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73–74.

 

2) 정복하라는 히브리어 단어 ‘카바스’는 어떤 백성이나 영토를 정복하여 그 백성이 정복자를 섬기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민 32:22, 29)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땅의 자원을 유익하게 이용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즉 모든 인류가 땅의 자원을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남자와 여자는 그 자원을 탐사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인간이 지혜로운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창3장의 타락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피조물을 선용하지 못하고 악용하게 된다. 

OT The vb. כָּבַשׁ is often used to express the misuse of power or the excessive use thereof and is, therefore, translated with violate, subdue, and make subservient. This lexeme is employed to describe David’s actions of subduing the nations (2 Sam 8:11). The subj. of the vb. is not necessarily a ruling official, and the objects may also vary (2 Chron 28:10 = “slaves”; Jer 34:16). It can also refer to the subduing of a woman (Esth 7:8). In a figurative sense it is used for the subduing of sins (Mic 7:19).

In Gen 1:28 it occurs alongside רָדָה (#8097) to express God’s blessing on humanity and his command to subdue the earth.

subj. subject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596.

 

3) 다스리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돌보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청지기로서 그러한 역할을 맡겨주신 것이다. 이 다스림 또한 앞서 정복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군림하기 보다는 각 피조물이 자신의 자리에서 잘 지내도록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라다’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 26, 28절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일반적으로 다스리다, 통치하다, 짓밟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OT The vb. רָדָה stresses the act of dominance by force and overlaps accordingly with the comparable nuance of meaning of מָשַׁל. In 1 Kgs 4:24 [5:4] it occurs with מָשַׁל and emphasizes the Israelite king’s dominance over other kingdoms and enemies of the state (cf. Ps 72:8; 110:2). The negative connotation of the vb. is evident from those instances where the Israelite community is warned against the subduing of countrymen (Lev 25:43, 46, 53; Ezek 34:4). Its negative meaning also correlates with that of סָלַט (#8948).

In Gen 1:26, 28 the vb. occurs with a positive meaning when it is stated that humanity, created in God’s own image, should subdue (כָּבַשׁ, #3899) the earth and rule over (רָדָה) all animals. Humankind is given the responsibility for God’s creation,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his command to them is part of his blessing (1:28).

P-B In Rabb. Heb. and the Targumim רדה (Aram. רדא or רדי) is commonly associated with the meanings to stamp, tread, chastise, or rule (e.g., Tg. Lev 26:17). In the Qumran texts it maintains the meaning to rule or govern (1QS 9:23).

Rabb. Rabbinic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056.

 

29-30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채소와 열매를 먹을 거리로 주셨다. 뿐만 아니라 짐승과 새들에게도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셨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 육식은 없었을까? 동물이나 식물의 죽음이 에덴에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31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앞서 6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와 달리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문화명령을 부여하신 이후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라고 말씀하셨다. 개역 개정에는 ‘힌네’(behold), ‘보라’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피조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상상하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여러면에서 좋지 않아 보인다. 창세기는 맨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벼여주고 있다. 이는 지금의 좋지 않은 세상의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의 구조가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세계의 방향이 왜곡되었다. 이는 세상이 좋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맨 처음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세상에 죄가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는 여전히 선한 요소가 남아 있다.(딤전 4:4) 

죄는 본연의 선한 창조안에 이후에 침투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내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때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 

Having previously affirmed on six occasions that particular aspects of creation are “good” (vv. 4, 10, 12, 18, 21, 25), God now states, after the creation of the man and the woman, that everything he has made is very good; the additional behold invites the reader to imagine seeing creation from God’s vantage point. While many things do not appear to be good about the present-day world, this was not so at the beginning. Genesis goes on to explain why things have changed, indicating that no blame should be attributed to God. Everything he created was very good: it answers to God’s purposes and expresses his own overflowing goodness. Despite the invasion of sin (ch. 3), the material creation retains its goodness (cf. 1 Tim. 4:4).

Sin is a later intrusion into an originally good creation. It is not inherent in the world, and so it can be completely removed when God achieves his purposes in the consummation (Rev. 22: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2.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문제

1) 다신교 전통. 몇몇 학자들은 이 표현을 구약에 남아 있는 다신교 전통의 잔재라고 말한다.57) 2) 삼위일체 전통. 전통적인 교의학자들은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생각한다.58) 3) 천상 회의.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천상 회의 즉 천사들의 모임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59)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까? 1)의 주장은 다른 구약 성경의 내용을 고려할 때 전혀 가능성이 없다. 3)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 첫째 이유는 이 주장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한 창조라는 창세기 1장의 주요 신학과 배치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인간 창조에 하나님 외에 천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의 역할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낮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지만, 반면에 천사들은 다스리는 자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인간을 섬기는 존재들이다(히 1:14; 계 22:8–9). 창세기 1:27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을 하나님의 형상에 국한됨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있다. 창세기 1:26과는 달리 창세기 1:27에서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다.

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와이브라 엘로힘 에트–하아담 베찰모

창세기 1:27에서 창조의 주체는 ‘엘로힘’이다. 그리고 동사 ‘바라’ברא가 3인칭 남성 단수형이다. 주어 ‘엘로힘’(אֱלהִֹים)이 복수형이지만 장엄복수로서 단수 취급되므로 동사 ‘바라’ברא가 단수형으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상”בְּצַלְמוֹ에서 하나님은 3인칭 단수 ‘그의’로 표시되어 있다.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를 1인칭으로 말할 때는 복수이지만, 창세기 1:27에서 동일한 인간 창조를 3인칭으로 표현할 때는 단수이다. 즉 창세기 1:26의 복수로 등장한 하나님과 창세기 1:27의 단수로 등장한 하나님은 동일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포함될 여지가 없고,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경우 하나님이 ‘우리’라고 말하는 당사자는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일 것이다.60)

57) Hermann Gunkel, Genesis, 112–113. “God turns here to other אלהים –beings and includes himself with them in the ‘we’. … The concept originates in polytheism, but is no longer polytheistic perse since it regards the one God (Yahweh) as the Lord, the sole determiner, but the other אלהים as greately inferior, indeed his servants.

58) L. Berkhof, Christian Doctrine (Grand Rapids: Eerdmans, 1976), 76.

59) John Skinner, Genesis, 30–31. Lyle Eslinger는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복수 표현은 창세기 2:22과 창세기 11:7의 복수 표현과 함께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경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수 사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Lyle Eslinger, “The Enigmatic Plurals Like One of Us (Genesis 1:26, 3:22 and 11:7) in Hyperchronic Perspective,” Vetus Testamentum 54–2 (2006): 171–184.

60) Cassuto, Genesis, 54. 카슈토는 ‘우리’ 를 ‘Let us go!’ 처럼 일종의 권유형으로 생각한다.

E.A. Speiser, Genesis, Anchor Bible (Garden City: Doubleday, 1982), 7.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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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swarm with swarms of living creatures, and let birds7 fly above the earth across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 So mGod created the great sea creatures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with which the waters swarm,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bird according to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n“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birds multiply on the earth.” 23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fifth day.

7 Or flying things; see Leviticus 11:19–20

m Ps. 104:25, 26

n ch. 8:17; 9: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20–23.

 

 

앞서 둘째날 하늘의 궁창과 물을 창조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바다와 하늘이 다양한 피조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 피조물들을 복주셔서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할 것을 명하신다. 

 

21절) 본문의 큰 바다 짐승들은 ‘하탄니님 하가돌림’이라는 표현인데 큰 뱀, 용, 악어, 고래, 상어등을 의미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공용과 같이 이미 사라진 피조물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가나안 신화에서 이 용어는 풍요의 신 바을을 대적하는 커다란 용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짐승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을 창조하셨다고 묘사한다. 가나안의 신화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어떤 종류의 싸움을 하지 않으시면서 다스리신다. 

The term for great sea creatures (Hb. tannin) in various contexts can denote large serpents, dragons, or crocodiles, as well as whales or sharks (the probable sense here). Some have suggested that this could also refer to other extinct creatures such as dinosaurs. Canaanite literature portrays a great dragon as the enemy of the main fertility god Baal. Genesis depicts God as creating large sea creatures, but they are not in rebellion against him. He is sovereign and is not in any kind of battle to create the univers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1.

 

다섯째 날 창조는 1–3일의 창조처럼 기본적인 표현들이 반복되며 상대적으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섯째 날 창조에는 1–4일의 창조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다섯째 날에 만든 피조물들을 축복한다. 이것은 이전의 창조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다. 축복의 내용도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든 후에 축복한 내용과 일부 동일하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강과 바다의 물을 채우고 새들은 땅 위에 번성하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적 축복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전 창조에서는 창조된 피조물의 구체적인 종류를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넷째 날의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의 창조에서 이들을 태양과 달이라고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섯째 날 물고기 창조에서 큰 바다 짐승들의 이름 탄닌תַּנִּין이 언급되고 있다. 탄닌은 모세 오경에서 주로 뱀으로 해석되었다. 모세가 이집트 왕 앞에서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을 때 뱀은 탄닌이란 히브리어로 묘사되어 있다(출 7:9). 탄닌은 또한 시가서와 선지서에서 바다에 사는 거대한 뱀 또는 용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라합(사 51:9) 또는 리워야단(사 27:1)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용은 악의 화신으로서 신들의 원수로 여겨진다. 에뉴마 엘리쉬에서 바다의 신 티아매트도 악한 용으로 불리며, 바알 신화에서 바다의 신 얌은 바알에게 대적하는 악한 용으로 불린다.54)

Crushed I not El’s Beloved Yamm? Destroyed I not El’s flood Rabbim? Did I not, pray, muzzle the Dragon? I did crush the crooked serpent, Shalyat the seven–headed.

하지만 창세기 1:20은 탄닌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하나로 여기며, 신적인 존재가 아닌 바다에 사는 생명체들 중에 하나이다. 놀랍게도 탄닌도 다른 물고기들처럼 생육하고 번성해야할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다.

54) ANET, 137.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66–67.

 

 

다섯째날의 창조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물고기들과 새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리시는 복은 이후 인간에게 주시는 복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28절과 비교해본다면 인간들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물고기와 새와 모든 생물을 다스릴 것을 추가로 명령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어느 정도 인간과 동물들에게는 식물이나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식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모든 생물들의 DNA에 내재화된 본성, 욕구에 해당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동시에 서로 다른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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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separate the day from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isigns and for jseasons,6 and for days and years, 15 and let them be light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 And God kmade the two great lights—the greater light to rule the day and the lesser light to rule the night—and the stars. 17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on the earth, 18 to lrule over the day and over the night, and to separate the light from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fourth day.

i Jer. 10:2; Ezek. 32:7, 8; Joel 2:30, 31; 3:15; Matt. 24:29; Luke 21:25

j Ps. 104:19

6 Or appointed times

k Deut. 4:19; Ps. 136:7–9

l Jer. 31:3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14–19.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는 사람의 창조를 제외하고 가장 길게 서술되어 있다. 

 

앞선 1-3일간의 창조에서는 창조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데 넷째날의 창조에서는 그 창조의 목적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14-16절에서 말하는 넷째날 창조의 목적은 

첫째 낮과 밤을 나누는 것

둘째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는 것(시간의 흐름을 관리)

셋째 땅을 비추는 것(세상을 밝히는 일)

넷째 두 광명으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넷째날 창조는 천체의 생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천체들의 목적과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4절) 본문에서 하늘의 궁창의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하라’라고 명령하신다. 하늘의 광명이 징조(sign)이 되라는 의미이다. 

 14절에서 말하는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

베하우 레오토트 우레모아딤 우레야밈 베사님

동사 ‘하야’הָיָה는 간접 명령이며 이어지는 명사에 전치사 ‘레’לְ를 붙여 ‘되다’의 의미를 가진다. 하늘의 광명이 징조가 되라는 말이다. 이 징조가 무엇일까?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첨성술이 발달하였는데, 징조는 천체의 변화를 통해 인간의 대소사를 예측하는 것을 말할까? 에뉴마 엘리쉬에서는 천체의 창조에 그런 의도가 담겨 있었다. 마르둑은 티아매트의 시체를 가지고 태양과 달과 별들의 별자리를 만들어 일년 12달을 표시하게 한다. 그리고 마르둑은 월력의 주기에 따라 일주일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 태양과 달 그리고 별자리는 각각 신들의 보금자리가 되며, 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 운명을 파악하는 점성술의 기초를 놓게 된다.49)

The norms had been fixed and all their portents, All the gods apportioned the stations of heaven and earth. The fifty great gods took their seats. The seven gods of destiny set up the three hundred in [heaven].

창세기 1:14의 징조도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창세기 1:14의 징조는 뒤따라 나오는 사시와 일자와 연한의 사인이라는 말이다.50) 히브리어 표현을 다시 보자.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

베하우 레오토트 우레모아딤 우레야밈 베사님

접속사 ‘베’וְ + 동사 ‘하야’הָיָה의 완료형 3인칭 복수형 ‘하우’הָיוּ 는 와우 계속법이며 앞의 문장에 있는 ‘여히’יְהִי 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베하우’וְהָיוּ 는 ‘여히’יהִי:와 마찬가지로 간접명령문(jussive)이며, 그 의미는 뒤따르는 전치사 ‘레’לְ와 결합하여 ‘let them become sign of’이다. 이 표현에는 전치사 ‘레’לְ가 세 번 반복된다. 첫 번째 전치사는 동사 하야와 함께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둘째와 셋째 전치사는 of의 의미를 가지며 징조를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51) 그리고 ‘우레모아딤 우레야밈 베사님’(וּלְיָמִ֖ים וְשָׁנִֽים וּלְמ֣וֹעֲדִ֔ים)에서 앞의 두 접속사 ‘베’וְ는 both A and B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샤님 앞의 접속사 ‘베’וְ는 and의 의미를 가진다.52) 이를 토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both of the feasts and of the days and years가 된다.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사시의’ 그리고 ‘일자와 연한의’ 사인이 되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구약과 창세기 1:1–2:3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선 사시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사시라는 말은 사계절을 뜻하며 주로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 지방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주로 우기와 건기로 구분하며, 특히 히브리어에서 ‘모에드’מוֹעֵד는 정해진 장소나 시간 또는 만남을 뜻하며, 정해진 시간의 경우 거의 항상 구약의 절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창세기 1:14에서도 모에드는 시간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온대지방의 사계절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구약의 절기를 의미한다.53) 일자는 창세기 1:1–2:3의 배경에서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7일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하고 제7일에 쉬었으며, 매일을 나타낼 때에 항상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붙여 창조 기간 7일을 일반적인 하루의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다. 1–3일에는 아직 지구의 자전이 형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은 천지 창조의 하루를 일정한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 1:14의 일자 또는 날들의 사인은 1–7일의 사인으로 보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창세기 2:1–3에 제정된 안식일에 대한 사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다. 그리고 연한도 안식년과 희년을 계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 절기를 나타내는 사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시편 104:19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עָשָׂ֣ה יָ֭רֵחַ לְמוֹעַדִי֑ם שֶׁ֝֗מֶשׁ יָדַ֥ע מְבוֹאֽוֹ

아사 야레아흐 레모아딤 세메쉬 야다 메보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도 이렇게 생각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주빌리는 2: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And the Lord set the sun as a great sign upon the earth for days, Sabbaths, months, feast days, years, Sabbaths of years, jubilees, and for all of the appointed times of the years.

그리고 주께서 날들과 안식일들 월삭들 절기들 연수들 안식년들 희년들 그리고 연중 모든 정해진 날들을 위해 태양을 큰 징조로 땅 위에 두셨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넷째 날 창조의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는 안식일과 절기들과 안식년을 알려주는 사인의 역할이다.

49) ANET, 69.

50) Sarna, Genesis, 9. John H. Walton, Genesis, NIVAP (Grand Rapids: Zondervan, 2001), 122–123.

51) Wenham, Genesis, 22–23.

52) John Skinner, Genesis (Edinburgh: T. & T. Clark, 1976), 25–26.

53) Walton, Genesis, 122–12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62–65.

 

하나님께서는 이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서 절기를 나타내는 사인으로 삼으셨다. 

(시 104:19, 개정)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본문에 계절이라고 표현된 ‘모아딤’은 계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보겔스와 같은 학자는 구체적으로 교회력과 관련된 절기들과 종교적인 축제일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계적인 기능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 종교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본문의 광명체로 번역된 ‘므오로트’는 19번 사용되었는데 창세기 1장을 제외하고 모세오경에서 10번 사용될 때 장막을 밝히는 등대의 빛을 가리킨다.(출 25:6; 27:20; 35:8,14(2회), 28; 39:37; 레 24:2; 민 4:9, 16) 저자는 지금 우주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6절) 하나님께서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또 별을 만드셨다. 본문에서 의도적으로 해와 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고대의 이교 문화 속에서 해와 달은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기에 이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의도적으로 피조 세계가 많은 신들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다는 이교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 이집트 문화 속에서 해와 달은 ‘라’ 신과 ‘토트’ 신으로 인격화 되었다. 본문은 해와 달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와 달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들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의도적으로 별들의 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당시 근동의 신화들에서 별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점성술을 통해서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에 비추어 볼 때 의도적인 침묵을 통해서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 16절에 사용된 만들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사’라는 동사로 하나님이 ‘~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이 광명체들이 이 사건 이전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따라서 해와 달이 시간의 흐름을 정의하고 배열하도록 규정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By referring to them as the greater light and lesser light (v. 16), the text avoids using terms that were also proper names for pagan deities linked to the sun and the moon. Chapter 1 deliberately undermines pagan ideas regarding nature’s being controlled by different deities. (To the ancient pagans of the Near East, the gods were personified in various elements of nature. Thus, in Egyptian texts, the gods Ra and Thoth are personified in the sun and the moon, respectively.) The term made (Hb. ‘asah, v. 16), as the ESV footnote shows, need only mean that God “fashioned” or “worked on” them; it does not of itself imply that they did not exist in any form before this. Rather, the focus here is on the way in which God has ordained the sun and moon to order and define the passing of time according to his purpos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0.

 

‘아사’라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HALOT는 16가지 의미를 수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창조하다, 준비하다, ~을 하도록 대비하다등을 의미한다. 이 다양한 용법들 중 우주적인 문맥에서 ‘아사’는 ‘제작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좀 더 기능적인 의미를 취한다. 우리는 창조의 기사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셨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데 세일해머는 하나님께서 매일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한다. 

 

It is significant that though there are numerous ambiguous usages, no passage using ʿśh in a cosmological context demands the meaning “manufacture” rather than something more functional. On the basis of these passages, there is good reason to conclude that the author of Genesis is using the term functionally. It is indefensible to claim that the use of ʿśh demands that the heavenly bodies are manufactured on day four. Usage in cosmological texts favors taking ʿśh in verse 16 as a summary of the setting up of functions for the heavenly bodies as reported in verses 14–15. In relation to Exodus 20:11, we can say that in six days God did all his business, without necessarily defining that business as manufacture of matter.

As a result of our modern tendency to focus on things and to view creation as the making of things, it is not a surprise that when we ask, “What did God do on the fourth day?” we look around for him to make something. Sailhamer accurately picks up the text’s interests when he notices the consistent emphasis on God speaking.

What the writer wants most to show in this narrative is not that on each day God “made” something, but that on each day God “said” something. The predominant view of God in this chapter is that He is a God who speaks. His word is powerful. As the psalmist who had read this chapter said, “By the word of the Lord the heavens were made” (Psalm 33:6). Thus, often when God speaks, he creates. But that is not always the case in this chapter.8

8 Sailhamer, Genesis Unbound, 132–33.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25.

 

"그 저자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매일 하나님께서 뭔가를 반드셨다’ 는 사실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께서 뭔가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1장에 오는 하님의 대표적 인 모습은 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의 말씀은 권능이 있다 이 장을 읽은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시 33:6)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 이 말씀하실 때연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장에서 항상 그렇지 만은 않다(세일해머)

 

이 넷째날의 특징중의 하나는 성취 뒤에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첨가되지 않은 유일한 날이라는 것이다. 1-3일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된 대상들의 이름을 짓고 있으며(5, 8, 10절), 5, 6일에는 그 피조물들을 축복한다.(22, 28절)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생략은 세련된 문체적 변형이거나 ‘해’와 ‘달’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것들이 신이라고 암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우리는 창조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만 본문은 무엇을 어떻게 창조했는지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본문의 만드시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의 의미가 제작하고 만들어내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것의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볼때 이미 만들어진 천체들로 하여금 어떻게 작동하고 기능할지를 정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고대 문화속에서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고, 첨성술의 발달로 별의 움직임으로 점을 치기도 했고, 음력의 활용을 통해서 농경에 활용하던 때이기에 이것의 설명을 하면서 해와 달과 별이 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으셨고 이것을 작동하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광명체(마오르)라는 표현이 하늘의 빛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전을 비추는 등불이라는 의미를 지녔기에 우주가 하나님의 전이고 이 우주를 비추이는 등불로 광명체를 지으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빛, 등불‘(마오르)은 창세기 1장을 제외한 오경에서는 성막의 성소 등불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오직 다른 두 구절(겔 32:8: 시 74: 16)만이 하늘의 빛들에 대해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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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said, g“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s be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4 and the waters that were gathered together he called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 And God said, h“Let the earth sprout vegetation, plants5 yielding seed, and fruit trees bearing fruit in which is their seed, each according to its kind, on the earth.” And it was so. 12 The earth brought forth vegetation, plants yielding seed according to their own kinds, and trees bearing fruit in which is their seed, each according to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third day.

g Job 38:8–11; Ps. 33:7; 136:6; Jer. 5:22; 2 Pet. 3:5

4 Or Land; also verses 11, 12, 22, 24, 25, 26, 28, 30; 2:1

h Ps. 104:14

5 Or small plants; also verses 12, 2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9–13.

 

 

셋째날은 땅과 바다를 만드신다. 이 땅과 바다를 만드시는 행위는 지구상의 물을 한 한 곳으로 모으심으로 모인 곳은 바다가 되고, 드러난 곳은 땅이 된 것이다. 셋째날 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창조하신 것에 이름을 붙이신다. 첫 3일에 걸쳐 창조된 것들은 이후 지음을 받을 피조물들이 채워질 곳들이다. 

셋째날의 식물의 창조는 이후 동물과 사람들의 먹을 거리로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좀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이후 넷째날에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기에 식물 성장을 위한 광합성이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셋째날에는 태양이외의 다른 광원이 존재했거나 이 창조의 순서나 내용을 너무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6일간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8가지의 창조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역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첫째날 : 한가지 사역 : 빛을 창조

넷째날 : 한가지 사역 : 해와 달과 별

둘째날 : 한가지 사역 : 궁창을 창조

다섯째날 : 한가지 사역 : 새와 물고기

셋째날 : 두가지 사역 : 땅과 식물을 창조

(10절과 12절에 두번의 평가, 좋았더라)

여섯째날 : 두가지 사역 : 육지의 동물들과 사람을 창조(25, 31절에서 두번의 평가)

 

지금까지의 창조 야기에서는 하님께서 만들고 싶으신 것 직접 자신의 말씀으로 드셨. 그러나 이번은 예외다. 하 께서  는 채소와 각기 종류 씨 가진 열 맺는 고 명령하는 것이다. 마치 땅 자체가 스스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하신다. 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게 자체적인 생산력 느 정도의 창조력을 주셨음을 암"(Waltke). 하나 명령을 받은 땅 채소 과, 각기 열 맺는 무들 생산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땅/자연 신격화켜서는 안 된다. 자연의 능력은 하나님 의 말씀서 비롯 었기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83)

 

11절) 본문에서 식물을 풀(데셰)과 씨 맺는 채소(에세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츠) 세가지로 구별된다. 본문에서 종류라고 표현된 히브리어는 ‘민’이라는 단어로 유형, 종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종’(민)이라는 표현을 생물학의 분류체계로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보다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속에서 그 질서대로 지으신 만물은 각각에 맞는 생존의 방식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창세기를 너무나 과학적으로 읽으려고 할때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창세기 1-2장의 창조의 기록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세상을 지으셨음을 선언하는 것이지 이를 과학적 가설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제한하는 해석이 될 수 있다. 도리어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선포를 통해서 인간이나 피조물이 무목적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셋째날의 창조는 땅과 식물들의 창조를 통해서 기능적으로 농경체계가 가능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빛과 궁창, 땅과 식물의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기후(날씨), 농경이 가능하도록 하신 이야기이다. 이러한 기능은 성경만이 아니라 다양한 창조 설화에도 등장한다. ‘에누마 엘리시’의 5번째 토판에서도 그와 유사한 과정이 포함된다. 마르둑이 구름, 바람, 안개를 동반한 강우를 만들고 이로 인해 땅위에 물의 원천들이 설정되고 토사가 싸이는 내용이 나온다. 농경을 위한 필수 조건인 인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관계 시설 관리의 중요성이 이러한 신화에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프타 신화에서 식물의 창조는 범신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프타는 각종 신들을 만들고 이 신들의 몸체인 모든 종류의 나무와 돌 등을 만든다. 그리고 프타는 이 신들을 몸체인 식물과 물체들에 글어가게 한다. 하지만 창세기에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사한 설화들이 등장하지만 동시에 성경의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날 창조의 특징으로 하나님께서는 10절과 12절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두번에 걸쳐서 하신다. 본문에서 좋았다(토브)라는 의미는 잠재적으로 솜씨의 질을 언급할 때 뿐만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영역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표현인 ‘좋았다'라는 말의 뜻은 '좋지 못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때 좀더 명확해진다. 창 2:18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좋지 않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좋다라는 의미는 바로 어떤 사물이 목적에 맞게 작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더운 여름 냉장고나 에어컨을 틀었을때 음식이 잘 보존되고, 얼음이 잘 얼고, 시원한 냉기를 잘 만들어낼 때 우리는 좋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것이 고장나서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할 때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물이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되었을까? 과학적으로 설명해보자면 지구 내부의 외핵과 내핵의 움직임으로 맨틀이 이동하면서 지층이 융기되거나 침강되는 현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지층이 올라온 곳은 땅이 되었고 가라앉은 곳으로는 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었다. 지질학적으로 수억년이 걸리는 이 현상을 보시고 하나님은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후에 그 땅에 종류대로 풀과 초목과 나무를 내셨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땅에게 명령하시고 땅은 이것에 화답하여 식물을 내게 되는데 이것을 보고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이 모든 창조 행위가 하나님의 질서와 목적에 맞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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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said, d“Let there be an expanse1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separate the waters from the waters.” And God made2 the expanse and eseparated the waters that were under the expanse from the waters that were f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3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econd day.

d Job 37:18; Ps. 136:5; Jer. 10:12; 51:15

1 Or a canopy; also verses 7, 8, 14, 15, 17, 20

2 Or fashioned; also verse 16

e Prov. 8:27–29

f Ps. 148:4

3 Or Sky; also verses 9, 14, 15, 17, 20, 26, 28, 30; 2: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6–8.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일정한 순서, 패턴이 등장한다. 

 

사건

#1

선언(서론) : ‘하나님이 이르시되’(3, 6, 9, 11, 14,20, 24)

#2

명령 : ‘~이 되라/있으라’(3, 6, 9, 11, 14, 20, 24)

#3

완성 : ‘~이 되니라/있으니라’(3, 7, 9, 11, 14, 20, 24, 30)

#4

평가 : ‘보시기에 좋았더라’(4, 10, 12, 18, 21, 25, 31)

#5

시간 흐름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째날이니라’(5, 8, 13, 19, 23, 31)

하나님의 명령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창조 능력이 된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된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마치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를 지배하고 위협했던 모든 어두움과 혼돈과 공허가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74-5

 

 

6-7절) 궁창이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라키아’는 expanse, space, atmosphere, vault등으로 번역되었다. 한글로도 대기, 창공등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의 원래 의미는 철로 쳐서 만든 판, 단단한 기초, 하늘의 견고한 둥근 천장이다. 이것의 동사형은 쇠를 망치로 두들겨 늘리며 펴는 행위를 말한다. 이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망치로 두들겨 펼쳐 나가신 것으로 묘사한다. 

이 궁창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그들은 ‘라키아’를 견고한 돔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창공이 바위같이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궁창을 대기, 창공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며 성경을 다시 쓰는 것과 같다. 

 

‘라키아’라는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서 17번 등장한다. 그중 9번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된다.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5번이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마차 보좌의 단단한 연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나머지 3번의 인용에서는 기능에 대한 언급은 없다. 

The word raqiaʿ occurs only seventeen times in the Hebrew Bible, nine of which are in Genesis 1. But five are in Ezekiel 1 and 10, a description of the solid platform of the chariot throne; these Ezekiel references are clear and compelling. In the remaining three occurrences there is no reference to function (Ps. 19:1 and 150:1, where the raqiaʿ is parallel to “heavens” and “sanctuary” respectively, and Dan. 12:3, where it is parallel to the place of the stars). In Genesis 1 the raqiaʿ is named šamayim (niv: “sky”) and separates the waters above from the waters below. This combination suggests that the floodgates that are opened in the šamayim that allow the rain to come at the time of the Flood (7:11; 8:2) are related to the raqiaʿ.4 This connection is confirmed in Psalm 148:4, where the waters are described as being above the šamayim, just as Genesis 1 describes them as above the raqiaʿ.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4 L. I. J. Stadelmann, The Hebrew Conception of the World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70), 46–47.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11.

 

이스라엘의 문헌에서 구름들은 땅의 끝에서 발생한다.(시 135:7) 고대 세계의 사고 속에서 땅 끝은 바로 수평선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하늘의 문들이 있다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뜨고 질 때 수평선을 넘어가는 모습이 바로 하늘의 문을 통과한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신다는 점이다. 모든 본문이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선포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다른 어떤 제3의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는 비슷한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와 비교해 볼때 명백한 차이점이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창조 이야기에서 프타라는 창조의 신은 주요 신들을 창조할 때 이들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함으로 창조했다라고 한다. 반면에 태양신 ‘라’는 자위 행위를 통해서 정액을 입에 넣은 후 이를 뱉어냄으로 창조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프타가 말로 신들을 창조했다는 표현이 성경의 표현과 비슷해보이지만 이는 입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개념이 강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믿음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들로부터 앞수와 티아마트, 몸무로부터 창조가 이루어졌다라고 믿는다. 마르둑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티아맛의 시체를 반으로 쪼개서 상체는 하늘, 하체로는 땅을 만들었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완벽히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씀으로 이루어내신다. 어떤 매개체도 필요치 않았다. 또한 본문에서 물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일 뿐이다. 창조의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물은 단지 재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앞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 것처럼 물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뉜다. 그리고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하늘이라고 번역된 ‘샤마임’을 오직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하늘’은 사람들이 자신들 위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즉 광명체들(14-17절)이 있는 하늘과 새들(20절)이 날아다니는 공중을 모두 포함한다. 

 

유일하게 둘째날의 창조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7’을 맞추기 위해서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좋았더라는 표현은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에 7번 등장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비가 적셔야 하는 땅은 3일째 되는 날에 창조되는데 궁창위의 물과 땅의 물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둘째날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생략된 것으로 본다. 이후 셋째날에는 두번에 걸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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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said, c“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And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And God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first day.

c 2 Cor. 4: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3–5.

 

 

 

3절) 빛의 창조

본문의 빛은 ‘욜’이라는 단어이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이 빛을 낮(욤)이라 칭하셨다. 이 단어는 이후에 날이라는 단어와 같다. 여기서 빛을 낮이라고 부르신 것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을 창조하셨다라고도 볼 수 있다. 왕관이 왕을 상징하고, 요람이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것처럼 빛이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빛의 기간,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의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첫번째 행하신 것이 바로 시간을 창조하심으로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시간의 진행이 있게 하신 것이다. 

Day one concerns something much more significant, something much more elemental to the functioning of the cosmos and to our experience of the cosmos. On day one, God created time.44 This is the first of the functions God will use to bring order to the chaos of the cosmos: the orderly and regular sequence of time.

44 W. Vogels, “The Cultic and Civil Calendars of the Fourth Day of Creation (Gen 1,14b)” SJOT 11 (1997): 178–79, comes to similar conclusions, though he draws different conclusions from it.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79.

 

 

4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좋음은 미적인 또한 도덕적인, 영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시 34:8; 100:5; 렘 33:11; 나 1:7; 벧전 2:3)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구별되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는데 이는 창조의 첫 세날 동안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나눔은 구별과 정화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을 나뉘게 하셨고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다. 이 나눔의 역사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고 그 창조물 자신의 정체성을 주는 것이다. 

 

5절)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바로 그 본성, 정체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창조주 자신이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그것의 목적에 따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결국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왕따, 그림자) 

본문의 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욤은 24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큰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 2:4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날은 창조의 7일을 하루로 보고 있다. 1장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1:5,8,13,19,23,31)은 욤을 하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24시간으로 볼 것이냐하는 것에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1)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것은 넷째날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날의 개념은 넷째날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창조의 1-3일의 날을 24시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2장의 창조기사는 1장과 달리 더이상 날짜 별로 창조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3) 창 2:19이하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는데 하루에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 동물의 이름을 지은후 하나님은 아듬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나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이를 여섯째날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현실적인 하루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창조 기간이 7일인 것으로 창세기 1장은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6/7의 패턴을 통해 피조 세계의 창조와 구조의 완전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를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제의적인 차원에서 7일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6/7패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세기 1:1은 7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은 14개의 단어(7×2)로 구성되어 있다.31) 창조의 시작을 7단어로 묘사했는데, 창조의 절정은 제7일에 이루어지며, 제7일은 35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7×5=35).

31) 계시록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새창조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7은 창세기를 모델로 삼은 것으 로 보인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

 

여기에 사용된 욤이라는 단어는 의미론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낮 시간, 2) 24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 3) 특별한 날들(그의 죽음의 날), 4) 여러 날 혹은 일 년, 5) 욤에 정관사가 붙어서 오늘을 의미, 6) 그 앞에 전치사가 붙거나 지시대명사가 덧붙여져서 ‘그날에’혹은 ‘~할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In the semantic range of yom we must include (1) the daylight hours, (2) a twenty-four-hour day, (3) special days (e.g., day of his death), and (4) a plural use that can refer to a few days or even a year.47 Furthermore, (5) the definite article can be added to yom to make it mean “today,” or (6) a preposition can be tacked on the front and a demonstrative pronoun associated with it to say “in that day” or simply “when.” The important point to be made here is that these categories cannot be merged carelessly. It is not unusual for an interpreter to claim something like, “The word day can mean an extended, indefinite period of time,” and then follow up with a series of supporting references. The problem is that invariably most if not all of those references will be examples of category 6. Unfortunately, one cannot pull the word yom out of that setting and still retain the meaning it has in that setting.

47 Adapted from HALOT, 2:399–400.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81.

 

예를 들어 외출을 준비하는 중에 아내가 ‘1분만 기달려’라고 했을 때 그때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60초 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업시간을 50분으로 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정확하게 종을 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이라는 표현이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문맥속에서 확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첫째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은 무엇일까? 천체(해와 달과  별)은 넷째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첫째날의 빛은 천체들의 빛과는 무관한 빛으로 보기도 한다.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편 104:2은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고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5에서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1:4에서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것은 이 빛을 하나님의 임재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또 다른 가능성은 창세기 1:1에서 이미 만들어진 천체가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지구를 향하여 빛을 비취게 하는 것이다. 5절에서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는 것은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빛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또는 빛이 존재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구분이다. 뿐만 아니라 낮과 밤이라고 부른 것은 밝은 상태의 기간과 어두운 상태의 기간을 가리킨다. 결국 첫째 날 창조는 빛의 생성과 더불어 시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날의 빛과 시간의 탄생은 넷째 날에 창조 활동의 기반이 되며, 이를 통해 낮과 밤은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54.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 표현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루의 첫 시작은 아침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유대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녁이 하루의 첫 시작에 해당한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전통적인 유대의 사고방식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창세기 1장의 이러한 묘사 때문에 그와 같은 유대식 사고방식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첫째날의 빛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시간의 창조라고 볼 때 이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고대 근동의 문화속에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문의 하루, 첫째 날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러 발견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욤이 24시간일 수 없다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을 과학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찬양의 시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선포로 읽어내는 이들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해하고 변호하기를 원하는 개념들을 읽어내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구약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본문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당시의 저자나 유대인들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 했다. 예를 들어 21세기의 사람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세계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용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묘사할 때 가장 정확하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대세계에서는 오늘날 과학의 역할을 신화가 담당하고 있었다. 신화적인 접근은 자연 세계의 기능들을 어떤 목적에 따른 결과로 파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천둥번개는 대기의 압력과 대류현상으로 설명되지만 고대에는 신들의 분노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구약의 기록은 고대 문화들 속에서 신화가 감당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감당했다. 즉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한 문학적인 메카니즘을 제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전역에 존재한 거대한 문화적 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현대 우리의 세계관 속에서 기능은 구조의 결과라면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기능은 목적의 결과이다. 

 

어린 아이의 질문 “나는 어디에서 왔어?

생명 탄생의 신비와 성에 대한 지식 전달을 위해서 고뇌하며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는 부모, 아이는 뒤돌아서며 “엄마, 한결이가 그러는데 자기는 서울에서 왔대.” 

 

 

우리는 우주의 물질적인 구조와의 관계속에서 주로 우주를 생각한다 헬라 철학은 우주의 물질적 인 구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계몽주의는 우주의 물질적 인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윈 이후의 시대는 물질적 인 구조가 우주에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 왔다. 래비 재커라이어스는 비슷한 것을 목격하였다. 먼저 이 세계에서 초월성이 제거되었다. 이어서 성경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마지막으로 인류를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고대인들이 창조를 묘사하거나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했을 때, 물질적인 구조나 우주의 형성사같은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기능적인 우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들은 창조를 사물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현실 연속체를 확립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우주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실상은 우주의 모양이나 구조 혹은 그것의 형성사 등에 대한 묘사를 들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은 우주적인 실상을 전달하고 있다. 즉 시간을 통해서 모든사람이 우주를어떻게 경험해 는가 하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종종 사람들이 우주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도록 우주를 설정하셨고 그것이 것을 그 본문은 확증하고 있다.

 

열린 우주(open universe)-영들의 지배(과학적 연구 불가능), 닫힌 우주(closed universe)-순수한 인과관계로 설명-이신론, 통제된 우주(controlled universe)-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주관자로 본다. 그분은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D.A. carson)

An open universe is espoused by animism. The spirits control most things, and the appropriate thing for human beings to do is to appease the spirits so that they may do the things we want. Science is not possible because nothing is regular: the whims of the spirits are unpredictable, and even the sacrifices do not always work. In a closed universe, everything is explained by cause and effect at a purely material level. Science is possible; God is excluded. A modification of this model is espoused by deism. God set the whole thing up and established the principles of operation, but since then he has been rather removed from the scene, while he lets nature take its course. Science is possible, but there is little need to appeal to God, except for the initial act of creation.

The controlled universe reflected in the Bible, however, has God as both its creator and its sustainer/ruler. He creates in an ordered way, and sustains and rules it in an ordered way, so that science is possible; but he is not bound by what he has created, so he is at perfect liberty to do things another way, with the result that miracles are possible.90

90 D. A. Carson, The Gagging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96), 20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00–101.

 

하나님을 과학이 메울 수 없는 간격들만을 채우는 신 일명 간격의 신(God of the gaps)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무관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도, 자연계의 질서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첫째날의 창조가 바로 빛이고, 이 빛의 창조가 무질서한 세계 가운데 시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던지게 된다. 조지오웰의 1984년’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고통에 지배를 받고 있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쾌락에 지배를 받고 있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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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서론  (0)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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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b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

a Job 38:4–7; Ps. 33:6; 136:5; Isa. 42:5; 45:18; John 1:1–3; Acts 14:15; 17:24; Col. 1:16, 17; Heb. 1:10; 11:3; Rev. 4:11

b Jer. 4: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1–2.

 

 

일부의 학자들은 1절과 2절 사이의 간격이론을 제시한다. 

 

1–6일 동안 이어진 매일의 창조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와요멜 엘로힘 וַיֹּאמֶר אֱלֹהִים)로 시작하여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날이니라” 라는 말 로 항상 끝난다. 이런 패러다임을 염두해 두고 창세기 1장을 보면 첫째 날은 창세기 1:3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 1:2을 보면 첫째 날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지구와 물이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 들이 창세기 1:1을 1–6일 창조에 대한 요약적 선포로 생각했다.6)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말은 1–6일 동안 하나님이 하신 창조 활동 전 체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절에 있는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로 있는 땅과 깊음과 수면이라는 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 때문에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생겨났다. 간격 이론(gap theory)과 하나님과 물질의 공존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간격이론의 제창자는 펨버(G. H. Pember)이다. 그는 그의 책 Earth’ Earliest Ages(1876)에서 소위 ‘간격 이론’(gap theory)을 제창하였다. 그의 주장은 스코필드 레퍼런스 바이블(Scofield Reference Bible 1909)에 의해 복 원(restitution)이론으로 발전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 간격 이론에 의하면, 창세기 1:1과 1:3–31의 창조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큰 간격이 있으며,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은 첫 번째 천지 창조를 완성하였다. 이 때 창 조된 천사들 중 하나였던 사탄이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 망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사탄을 심판하셨다(사 34:11). 하나님의 심판은 지구에도 영향을 미쳤고, 창세기 1:2은 그로 인한 지 구의 혼돈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간격 이론에 의하면, 창세기 1:3–31은 하나 님이 파괴된 지구를 복원하는 과정이며 재창조이다.

창세기 1:2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물질이 존 재하였다는 하나님과 물질의 선–공존설(pre–exitence)이다. 카슈토는 창세 기 1:1을 창세기 1:3–31의 창조에 대한 선포라고 하면서도, 창세기 1:2의 땅 은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할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혼돈 상태의 물질이며 창조 과정을 통해 지구가 된다고 한다.8) 헤르만 군켈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군켈은 창세기 1:1을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군켈은 창세기 1:1과 창세기 1:2에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군켈에 의하면, 그 이유는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 하지만, 창세기 1:2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원시 상태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켈은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오경의 P자료를 만들었던 그룹들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는 말을 첨가하였다 고 한다.9) 이런 본질적인 모순을 지닌 2절의 표현이 생긴 이유는 포로기 시대 에 P자료를 첨가하여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의 편집을 완성한 제사장 그룹이 무로부터 창조(creation ex nihilo)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군켈은 주장한다.10)

6) Hermann Gunkel, Genesis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97), 103.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103–108. Erence E. Fretheim, The Book of Genesis, NIB vol. 1 (Nashville: Abingdon, 1994), 342.

7)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39.

8)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Jerusalem: The Magnes Press, 1961), 19–23.

9) P는 문서설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문서설은 모세 오경에 4개의 주요 자료인 J, E, D, P가 있다 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에 의하면, P는 제사장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던 자료로서 유다 왕 국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만들어져 창세기에 삽입되었다.

10) Hermann Gunkel, Genesis, 103–10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9–4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라는 표현은 형체가 없고 비어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렘 4:23에 등장한다. 

(렘 4:23, 개정)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그 땅이 멸망당하여 혼돈하고 공허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아직 땅에 피조물이 없고 질서가 부여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땅이 혼돈하고” 라는 말은 창조된 땅은 아직 생명체가살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며, “공허하다” 는 말은 땅위에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19) 창세기 1:2의 ‘토후’ת̇הוּ(혼돈)와 ‘보후’בֹהוּ(공허)와 의미상 가장 유사한 예문을 예레미야 4:23–26에서 볼수 있다.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24 내 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 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예레미야4:23에서 그 땅이 멸망당하여 혼돈하고 공허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23절 후반부와 24절 그리고 26절에서 땅의 혼돈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한다. 땅 의 혼돈한 상태란 하늘에 빛이 없고 높고 낮은 산들이 진동하며 황무지가 된 것이다. 25절은 땅의 공허함을 설명한다. 공허는 사람이 없고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에서 말하고 있는 지구의 혼 돈과 공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차이가 있다면 예레미야 4:23–26의 땅의 혼돈과 공허는 사막과 같은 상태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창세기 1:2의 혼돈과 공허는 땅 위에 물과 어둠만 가득한 상태이 다.

19)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A Linguistic Investigation, JSOTSupp 83 (Sheffield: JSOT Press, 1989), 17–43. Tsumura는 ‘토후’ 와 ‘보후’ 는 혼돈과 관련이 없고 지구가 텅빈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Norman Habel, “Geophany: The Earth Story in Genesis 1,” The Earth Story in Genesis, eds. Norman C. Habel & Shirley Wurst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38–4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46–47.

 

‘토후’라는 말은 마땅히 거기에 존재해야할 추상적인 그 무엇, 예를 들면 가치, 목적, 진리, 이익과 고결등등이 결여된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라’가 본래 치료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은 아직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해준다. 

학자들은 깊음(테홈)이라는 단어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설화에 해당하는 ‘에무나 엘리쉬’에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 신화에 의하면 바벨론의 마르둑은 혼돈의 여신 티아맛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했다. 이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도 ‘깊음’이라고 표현된 혼돈의 여신 티아맛을 이겨야만 했다고 믿는다. 여기서 테홈과 티아맛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깊음 사이에 갈등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깊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따르기 때문이다.

(창 7:11, 개정)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 8:2, 개정)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시 33:7, 개정)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시 104:6, 개정)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는 말을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 에뉴마 엘리쉬를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 다.20) 이들은 깊음의 히브리어 표현 ‘테홈’תְה֑וֹם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다의 신인 티아매트(Tiamat)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21) 티아매트는 어머니 신이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자식 신들을 죽이려다 폭풍의 신인 마르둑(Marduk)에 의해 살해 당한다. 그 때 마르둑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티아매트 위에 강력한 바람을 내 뿜으며 공격한다.22) 티아매트가 마르둑을 삼키려고 입을 쩍 벌리자 마르둑은 티아매트의 입속으로 번개를 쏘아 죽여 버린다. 주석가들 중에는 바다의 신 티아매트 위에 강풍으로 공격하는 마르둑의 이미지와 깊음 위 에 있는 하나님의 바람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 화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23)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티 아매트와 창세기 1:2의 ‘테홈’תְה֑וֹם사이에 극복할수없는 차이점이 있다.

창세기 1:2의 테홈은 티아매트와 달리 결코 인격적인 존재나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도 테홈은 시적인 표현에서 의인화되기 는 하지만, 결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에뉴마 엘리쉬에서 티아매트는 악의 신으로서 신들의 적과 원수로 그려지고 있고, 신들과 전쟁을 치루고 있다. 하 지만, 창세기 1장의 배경에서 테홈은 결코 악의 신도 아니며 신들과 전쟁을 치 루지도 않는다. 테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 조된 지구를 덮고 있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24) 창세기 1:2과 메소포타미아 신 화 사이에 어원적 문화적 유사점이 있을지라도 위에서 지적한 근본적인 차이 점들 때문에 창세기 1:2의 표현이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25)

2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Grand Rapids: Eerdmans, 1990), 111.

21)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158–159. Tsumura는 테홈תְהוֹם과 티아매트의 어원론적 유사성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George L. Klein, “Reading Genesis 1,”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29–30.

22) ANET, 60–72.

23) Hermann Gunkel, The Legends of Genesis: The Biblical Saga and History (New York: Schocken, 1974), 146–149. G. von Rad, Genesis, 49.

24) David Toshio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45–65.

25) W. G. Lambert, “A New Look at the Babylonian Background of Genesis,”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16 (1965): 29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47–48.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은 이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본문의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는 바람(출 14:21), 호흡(창 6:13), 영(삼상 10:10)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 운행하다라는 동사 ‘라합’은 창 1:2과 신 32:11에 등장한다. 신 32:11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하여 간 일을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는 방식에 비유한다. 즉 독수리가 날기를 배우는 새끼 독수리 위에서 ‘공중을 맴도는’ 광경을 묘사하며 이 동사, 라합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지구에 강림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기다리고 있는 지구가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때에 등장하는 루아흐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해했다. 

 

 

There is no reason to postulate that a long time elapsed between Gen. 1:1 and 1:2, during which time the earth became desolate and empty. Critical scholars argue that the word “deep” (Hb. tehom) is a remnant of Mesopotamian mythology from the creation account called Enuma Elish. Marduk, in fashioning the universe, had also to vanquish Tiamat, a goddess of chaos. These scholars believe that the Hebrew God had to conquer the chaos deity Tiamat in the form of the “deep” (notice the similarity of   p 50  the two words tehom and “Tiamat”). There are many linguistic reasons, however, for doubting a direct identification between the two. In any event, there is no conflict in Genesis or in the rest of the Bible between God and the deep, since the deep readily does God’s bidding (cf. 7:11; 8:2; Ps. 33:7; 104: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49–50.

 

창세기 1:2은 1:1에서 창조된 지구의 상황을 부연 설명하는 상황절이다. 그 상황은 네가지로 설명한다. 

1) 땅이 혼돈하고(토후)

2) 공허하며(보후)

3)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테홈)

4)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루아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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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 Job 38:4–7; Ps. 33:6; 136:5; Isa. 42:5; 45:18; John 1:1–3; Acts 14:15; 17:24; Col. 1:16, 17; Heb. 1:10; 11:3; Rev. 4: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1.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7일간에 걸쳐 진행된다. 앞의 6일동안 하나님을 일하시고 일곱째날은 안식하셨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이를 논증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계획과 완벽한 솜씨로 이 모든 것을 지으셨음을 선언한다. 

1:1-2:3로 이어지는 구조는 간략하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1-2 창조의 배경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선언

1:3-31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하신 일을 묘사한다. 

2:1-3 마지막으로 일곱째날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에 대해 말한다.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은 동일한 형식에 의해서 표현된다. 각각의 날은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라는 표현으로 마무리 된다. 

이후 창조의 기록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사실과 그것들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6일간의 창조 기사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었는데 식물의 창조는 셋째날이다. 식물의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광합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창조는 독특한 구조, 질서를 보여준다. 

 

 

 

 

 

첫째날

넷째날

해, 달, 별

둘째날

궁창(하늘)

다섯째날

새와 물고기

셋째날

땅과 바다, 식물

여섯째날

짐승과 사람

결국 창조의 기사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매우 복잡한 피조세계에 하나님께서 질서를 부여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는 모든 성경 역사의 기초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시편 8; 104; 148편

 

(요 1:1-3, 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전 8:6, 개정)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골 1:15-17, 개정)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3, 개정)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요일 1:5-7, 개정)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절) 태초에(in the beginning, 베레쉬트)는 천지 창조의 시점을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성경의 이 첫 선언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주권과 능력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한다. 

1절의 해석은 2절과의 관계속에서 이를 종속절로 볼 것이냐 독립절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 

1.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a formless void.… (nrsv)

2. When God began to create heaven and earth—the earth being unformed and void … God said.… (njps)

3.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Now] The earth was.… (niv, kjv, nasb, nlt)

The nrsv rendering treats verse 1 as a dependent clause that finds its main clause in verse 2. The njps considers the clause of verse 1 as dependent on a main clause in verse 3, with verse 2 being parenthetical. The third option, the traditional rendering, understands verse 1 as an independent clause, which either refers to creative activity that preceded the seven-day sequence7 or provides a literary introduction to the events of the seven days.8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jps New Jewish Publication Society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kjv King James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lt New Living Translat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jps New Jewish Publication Society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7 This would result in this sense: First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resulting in a formless and void situation; this was then rectified by creating light, etc., over a seven-day period.

8 This would result in a summary/title for the chapter: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Now let me explain how he went about it. The earth was formless, etc., then God created light.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9.

 

2절과의 연결로 해석할 때 우리는 1절을 NRS영어 성경처럼 번역할 수 있다.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시초에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문화와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이자 문화의 한계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성경이 씌여진 히브리적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베레쉬트’라는 표현이 어떤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초기의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Certainly Hebrew can use reʾšit to refer to the beginning of something. But there is more to it than that. J. Sailhamer has pointed out the unique function of the term as referring to an initial period or duration rather than to a specific point in time.1 His case is supported most convincingly by passages such as Job 8:7, which speaks of the early part of Job’s life, and Jeremiah 28:1, which refers to the beginning period of Zedekiah’s reign. Often in keeping records of a king’s reign, his first year did not begin with his accession to the throne, but with the first new year’s day of his reign. Historians refer to the partial preliminary year as the accession year. In Hebrew it was referred to as the reʾšit of his reign. This was an initial period of time, not a point in time. This linguistic discussion therefore offers an alternative way of understanding the “beginning,” but how can we know that this was on the mind of the author? None of these other verses are exact syntactical equivalents of Genesis 1:1.2

1 J. Sailhamer, Genesis Unbound (Sisters, Ore.: Multnomah, 1996), 38. Detailed discussion may be found in Sailhamer’s “Genesis,” a contribution to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ed. F. E. Gaebelein (Grand Rapids: Zondervan, 1990), 2:20–23, and a summary by B. Arnold in the article on reʾšit in NIDOTTE, 3:1025–26.

2 Distinguishing syntactical features in Gen. 1:1 include the use of the preposition without the definite article; the sequence of a verbal form following reʾšit rather than a nominal form; and the masoretic use of a disjunctive accent to separate this first word from what follows. For discussion of these technical points, see the commentaries, especially G. J. Wenham, Genesis 1–15 (WBC; Dallas: Word, 1987), and V.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8.

 

우리는 6일간의 창조의 기사의 내용이 1장 1절의 선포에 대한 부연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존재한다라고 보기도 한다. 이 간격이론은 1절의 창조가 사탄의 반역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고 이후에 2절의 타락한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재창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1절이 창조에 대한 선언이며 이후에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부연 설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에서 각 단원들을 제시할 때 요약적인 진술(톨레도트)을 소재하는 문학적인 양식을 선호한다는 것과 2:1에서 6일 동안의 창조기사가 “천지”가 다 이루어졌다는 말로 끝맺는 것을 통해서 지지를 받는다. 

  A further case can be made that the syntax of verse 2 favors the treatment of verse 1 as an independent clause. Turning to the traditional translation, we still must ask whether anything happens in verse 1. Does it refer to some creative activity that preceded the seven days (in which something that can be designated heaven and earth were created), or does it introduce and summarize the activity of the seven days (during which heaven and earth were created)? There are two evidences that I believe offer support for the second option. (1) The book of Genesis typically operates literarily by introducing sections with a summary statement. Thus, for example, beginning in 2:4 and ten additional times throughout the book, a toledot statement introduces a section (see introduction). (2) Even more persuasive is that the account of the six days closes with the comment that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completed (2:1).13

Thus, Genesis uses literary introductions, and the six days accomplished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t can therefore be concluded that the text is not suggesting that anything was actually created in 1:1; rather, the verse is a literary introduction, a summary of what follows. The “initial period” indicated by the word bereʾšit is not described in verse 1 but in chapter 1.

13 This inclusio was first pointed out to me by one of my students, Marco Castillo.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70.

 

다음으로 히브리어 원문은 창조했다라는 의미를 가진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구약 성경에 48번 등장하는데 오로지 하나님만을 주어로 취하며 특징적인 신적 활동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며 다양한 목적어를 취한다. 그 가운데 사람, 예루살렘, 바람, 불, 구름, 멸망, 재해 흑암과 같은 형상들, 의, 순결, 찬양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도 포함된다. 성경의 창조는 분명히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를 말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바라’라는 동사의 관심은 물질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할과 기능을 부여하심으로 우주를 작동하게 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옷을 만들었다’라고 말할 때 어떤 직물을 만들어 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design)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에서도 신들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의 관심은 물질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하는데 있었다.(에누마 엘리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는 ‘엘로힘’으로 장엄의 복수 표현이다. 창조하다라는 동사가 단수형인데 주어는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존재로 능력의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첫 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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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말그대로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다. 모세 오경의 첫번째 책으로 성경의 문학 양식에 대한 구분으로 볼때 율법서(토라)의 첫번째 책이다. 성경의 처음 다섯권의 책이 성경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이 다섯권중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가 모세오경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1-11장은 아브라함 이전의 원역사이고 12-50장의 기록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 역사이다. 원역사에 해당하는 1-11장의 내용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다. 창조-타락-구속의 성경 전체의 이야기의 큰 틀을 제공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족보, 계보(톨레돗)는 매우 중요하다.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2:4; 5:1 with slight variant;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이 구절들은 마치 돋보기의 역할을 한다. 전체의 그림속에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의 족보들

 

 

본문의 ‘톨레돗’은 영어 표현으로는 모두 generations라고 번역되는데 한그 ㄹ성경에서는 내력, 계보, 족보라고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아담의 계보

 

족보의 메인 라인은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진다. 이외의 부차적인 족보들은 전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창세기의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창조, 타락,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기에 좋도록 창조하셨지만 선악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결국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이어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도 인간의 죄에 의해서 나빠지게 된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구원의 소망을 주신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핵심 주제들(Key Themes)

1. The Lord God, being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having created the earth to be his dwelling place, commissions human beings as his priestly vice-regents or representatives so that they might fill the earth and caringly govern the other creatures (1:1–2:25).

2. Abandoning their priestly and royal duties, the human couple rebel against God and betray him by acting on the serpent’s suggestions; their willful disobedience radically affects human nature and the harmonious order of creation (3:1–24; 6:5–6).

3. God graciously announces that the woman’s offspring will redeem humanity from the serpent’s tyranny. Genesis then traces a unique family line, highlighting how its members enjoy a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 and are a source of blessing to a world that lies under the curse of God (3:15; 4:25; 5:2; 6:8–9; 11:10–26; 12:1–3; 17:4–6; 22:16–18; 26:3–4, 24; 27:27–29; 28:14; 30:27–30; 39:5; 49:22–26).

4. As a result of the man’s disobedience, his unique relationship with the ground degenerates, resulting in hard toil and even famine. While Genesis graphically illustrates the effects of this broken relationship, it also portrays the special family line as bringing relief from such hardship (3:17–19; 5:29; 9:20; 26:12–33; 41:1–57; 47:13–26; 50:19–21).

5. While the woman’s punishment centers on pain in bearing children (3:16), women play an essential role in continuing the unique family line; with God’s help even barrenness is overcome (11:30; 21:1–7; 25:21; 29:31–30:24; 38:1–30).

6. The corruption of human nature causes families to be torn apart as brotherly affection is replaced by resentment and hatred (4:1–16; 13:5–8; 25:22–23, 29–34; 27:41–45; 37:2–35). Although Genesis highlights the reality of family strife, the members of the family line have the potential to be agents of reconciliation (13:8–11; 33:1–11; 45:1–28; 50:15–21).

  p 42  7. Whereas exile from Eden and dispersion throughout the earth are used by God to punish the wicked (3:22–24; 4:12–16; 11:9), the promise of land is a sign of divine favor (12:1–2, 7; 13:14–17; 15:7–21; 26:2–3; 28:13–14; 50:24).

8. Although God is prepared to destroy almost the whole of humanity because of its corruption (6:7, 11–12; 18:17–33), he still desires that the earth should be populated by persons who are righteous (1:28; 8:17; 9:1, 7; 15:1–5; 17:2; 22:17; 26:4; 28:3; 35:11; 48: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41–42.

 

성경의 모든 기록들, 특히 창세기를 읽을 때 각각의 사건들을 독립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전체의 그림속에서 그 사건의 위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전체 그림의 중심에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창세기 전체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족보가 있다. 이 족보는 원시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창 3:15절로부터 시작해서, 그 계보에 등장하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성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아담-셋-의인 노아-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족장들의 이야기들 만으로는 전체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없다. 

창세기의 족보의 라인은 항상 장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에서는 장자권을 동생에게 판다. 르우벤의 실수로 장자권은 요셉에게로 넘어갔다. 우리는 요셉의 꿈을 통해서 왕의 계보가 그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야곱은 그가 죽기 전에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한다.(창 48:13-19) 하지만 요셉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왕권은 그의 형인 유다로 이어지게 된다.(창 49:8-12) 결국 왕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지만 기계적으로 장자들에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에서 나오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왕을 세우실 때 에브라임지파는 거부당한다.(시 78:67-72)

 

 

창세기의 역사성 

창세기는 역사적 기록인가? 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창세기는 당시 고대 근동의 역사,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의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애굽을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지를 알려주고자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이야기체, 산문으로 기록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창조의 기록, 창 1:1-2:3의 기록은 왕의 즉위식을 기록하는 것과 같은 찬양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시 136:4-7)

 

창세기의 기록 목적, 특히 천지 창조의 이야기가 목적하는 바는 과학적인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내 광야의 유목민 공동체가 출애굽하여 애굽의 우상들이 자신들의 신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조상으로 소개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도덕적인 판단을 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동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창세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현대 과학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창조와 진화의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창세기는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제공해준다. 

 

성경은, 창세기는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대답해주지 않는다. 창세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며 창세기의 세계관이 과학 연구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을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세기가 역사와 현대 과학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 무엇을(Who, What)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언제, 어떻게(When, How)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모세의 저작 목적에 따라서 창세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는 창세기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세기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영광스러운 정점에 이른다 곧 창세기는 나중에 보다 영광스럽게 마무리될 이야기의 첫째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다음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최초의 인류가 지은 죄는 모든 것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들을 없애 버리려고 시도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몽을 지니고 사는 인간이 모든 인류와 유대 관계에 놓여 있는 것, 인간이 피조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세계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해야 하는 것 등은 모두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다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윤리적인 가르침도 도덕적인 순결을 요구한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규정들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베푸신다. 신앙인은 공동체와 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원래 의도하시는 것을 인정한다 나아가 창세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 세계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준다. 곧 대표의 원리다. 아담은 인류와 세상을 대표한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아담이 대표하는 인류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 대표의 원리는 기독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구속 사역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사람들과 나머지 피조 세계 대표하는 것이다.

 

창세기 시대의 근동(B.C. 20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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