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Noah. gNoah was a righteous man, hblameless in his generation. Noah iwalked with God. 10 And Noah had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11 Now the earth was corrupt in God’s sight,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 And God j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kfor all flesh had corrupted their way on the earth.
g ch. 7:1; Ezek. 14:14, 20; 2 Pet. 2:5
h Job 1:1, 8; Luke 1:6
i ch. 5:22, 24; [Heb. 11:7]
j Ps. 14:2, 3; 53:2, 3
k Job 22:15–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9–12.
9-10절) 노아의 족보, 노아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고나서 그의 세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족보(톨레도트)는 이러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흠이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 그에게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트는 그들의 후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홍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본문에서 완전한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타밈’이다. 이 단어는 흠이 없는 것, 곧 명백한 결점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욥 1:1, 개정)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8, 개정)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눅 1:6, 개정)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는 ‘할락’의 히트파엘 분사형으로 ‘히트할락’이다. 할락이 가다, 걷다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의 히트파엘 분사형은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의 표현으로 사용되곤 한다. 앞서 창 3:8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고 겔 28:14에서는 하나님께서 두로왕에게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다’라며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 A special nuance of הָלַךְ occurs with the hitp. stem, which views walking or stepping as tantamount to the exercise of sovereignty. Whether this is expressed in literal or metaphorical terms, the symbolism of dominion remains the same. In its first occurrence with this meaning God is described as “walking in the garden,” a clear allusion to his appearance to Adam and Eve as their Creator and Lord (Gen 3:8). The same imagery is used in Job where God is said to walk (יִתְהַלָּךְ) on the “circle” (or “vault”) of heaven (Job 22:14). Satan also walked about on the earth.
On a human level (though with mythic and even primordial allusions) the king of Tyre is chided by Yahweh for having walked about in the midst of the stones of fire (Ezek 28:14). However the linkage between the king and the “anointed … guardian cherub” (vv. 14, 16) is to be understood, it is evident that he/they were manifesting incredible hubris by seeking to arrogate to themselves the sovereignty that belongs to God. The hitp. stem of the vb. הָלַךְ and the context of the entire pericope put this beyond any doubt.
Historically the use of the hitp. as a code for dominion may be illustrated in the case of Abraham and that of the Israelites sent out by Joshua to reconnoiter the land. Upon his return to Canaan from Egypt, the patriarch was told to rise up and walk about through the land, for Yahweh was about to give him all the territory on which he trod (Gen 13:17). Joshua commanded the tribal leaders to send three men from each tribe to walk about through Canaan, an operation that was tantamount to the assertion of dominion over the land (Josh 18:4, 8). To walk about on the land, then, was to recognize one’s claim upon it.
The prophet Zechariah uses הָלַךְ in the hitp. 4× as a way of describing divine sovereignty. The four horsemen of the first vision are sent out by Yahweh to “walk to and fro through the earth” (Zech 1:10–11), and those of the seventh vision are dispersed on the identical mission (6:7). In each instance the result is the subjugation of the earth to Yahweh’s regency (1:11; 6:8). In the third use of הָלַךְ in this way, Zechariah describes the glorious return of redeemed Israel in eschatological times in these terms: “I will strengthen them in the Lord and in his name they will walk” (10:12). The walking here unmistakably refers to the final victory of God’s people and of their dominion over all their enemies (cf. v. 11).
The collocation of the vb. הָלַךְ in its several stems with other morphemes, especially prepositions, is also theologically significant. For example, Moses threatens a curse upon the people of Israel if they are inclined “to follow (walk after)” (לָלֶכֶת אַחֲרֵי) other gods (Deut 11:28). To “follow” or “walk after” is to suggest commitment of life and purpose (cf. also Judg 2:19; Ruth 3:10; 1 Kgs 11:10; 21:26; 2 Kgs 23:3; Jer 7:9). A similar idea is expressed by the preposition בְּ + הָלַךְ. Israel is commanded to observe the statutes by “following (walking in)” them (לָלֶכֶת בָּהֶם, Lev 18:4; cf. Deut 8:6; 13:5 [6]; 30:16; Judg 2:22), and Solomon is commended for having done so (1 Kgs 3:3). Finally, to walk “with” (עִם) is tantamount to being identified with someone, either a wicked person (Job 34:8) or even God himself. Thus, Micah defines God’s utmost requirement as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Mic 6:8).
See Journey, going, marching, walking, wandering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034–1035.
- 9절은 노아의 톨레도트이다.39) 일반적으로 톨레도트는 거론된 사람 사물의 이야기 보다는 그들의 후손들이나 후속으로 일어난 일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예외적이다. 10–11장에서 노아의 후손들의 기록이 담겨 있지만, 노아의 톨레도트는 노아와 노아의 홍수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노아의 톨레도트는 창세기 5장의 노아의 조상들의 기록 패러다임을 둘로 나누어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즉 창세기 5장의 노아의 조상들의 삶은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되어 있다.
a) A가 X년을 살고, B를 낳다.
b)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살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c) A가 산 전체 햇수는 Z이며, 그 후에 죽었다.
이 중에 a)에 해당하는 노아의 기록은 창세기 5:31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세기 6:10에서 이를 변형시켜 다시 표현한다. 그리고 b)와 c)에 해당하는 부분은 노아 톨레도트의 마지막 부분인 창세기 9:28–29에 기록되어 있다.40)
창 6: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 9: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차이점이 있다면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6:9–10은 창세기 5장을 연상시키는 두 가지 표현을 가지고 있다: 첫째,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언급하고 있으며, 둘째,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는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톨레도트와 창세기 6:1–9:29의 노아의 톨레도트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즉 창세기 6:1–9:27을 창세기 5장에 있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명의 패러다임 중에서 노아의 패러다임 속에 두어 둘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노아 홍수를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계보와 연속선 상에서 또는 창세기 3:15에서 시작된 구속사적 역사관을 가지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41)
노아의 톨레도트는 창세기 전반부에서 천지 창조와 함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부분이다. 노아 톨레도트는 노아의 경건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9절). 노아의 경건은 세 가지로 묘사되었다. 노아는 의인이었으며, 당세의 완전한 자였으며, 그리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의 경건을 묘사하는 첫째 표현인 히브리어 형용사 ‘체덱’(צַדִּיק, 의로운)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노아의 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42)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후서 2: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베드로후서 2:5은 노아를 의를 전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노아의 의는 그 악한 시대의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은 삶에 대해 경고하고 의롭게 살도록 권면하는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노아의 경건에 대한 둘째 표현은 당세의 완전한 자이다. ‘완전한’의 히브리어 ‘타밈’(תָּמִים)은 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흠 없고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밖에도 사물의 완전한 상태나 사람의 정신 건강 그리고 도덕적 종교적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창세기 6:9에서 ‘타밈’은 9절에서 ‘의인’과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들과 함께 사용된 점을 감안하면 노아의 삶이 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 완전하였음을 나타낸다.43) 노아의 완전함은 노아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로만 제시되지 않고, ‘당세의’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 노아만 종교적 도덕적으로 완전하였음을 보여준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외면적인 행동에서 육체에 속한 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내면적으로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전인격적으로 흠집 투성이였지만 노아는 흠 없고 완전하였다.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대비되었던 것처럼, 창세기 6:9에서는 노아와 당대의 사람들이 대비되고 있다.
노아의 경건에 대한 셋째 묘사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녹에 대한 표현과 동일하다.44) 에녹의 경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음을 두 차례에 걸쳐 반복하여 표현함으로 강조되었다. 노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도치법을 통해 목적어 ‘에트 하엘로힘’(תֶא־הָאֱלהִֹים, 하나님과)을 문장의 앞에 배치시키고 있다.
창 5:24וַיִּתְהַלֵּ֥ךְ הֲנ֖וֹךְ אֶת־הָֽאֱלֹהִ֑ים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창 6:9אֶת־הָֽאֱלֹהִ֖ים הִֽתְהַלֶּךְ־נֹֽחַ 하나님과 노아는 동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경건에 대한 표현은 노아의 이름을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다.45)
노아 이쉬 차딕 타밈 하야 베도로타브 에트–하엘로힘 히트하렉–노아
즉 노아의 이름을 문장 시작과 끝부분에 각각 배치하여 노아에게 포커스를 맞춤으로 그의 경건함을 강조하고 있다. 노아의 경건한 삶은 당대의 문화와 가치관과 큰 차이가 있다. 모두가 아름다운 여인 몇 명을 아내로 데리고 사는 것을 자랑하고 있을 때, 노아는 한 여자만 아내로 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는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고 한다. 도덕적인 죄악으로 땅이 더럽혀 졌고,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 풍습 속에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살아 냈다. 하지만 노아조차도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구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아도 여호와의 은혜가 필요했다.
39) Kevin Hall은 노아의 톨레도트가 창세기 1–11장에 있는 다섯 개의 톨레도트 중에 셋째라는 점 에 근거하여 다섯 톨레도트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한다. Kevin Hall, “The Theology of Genesis 1–11,”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57–58.
40) Gordon Wenham, Genesis 1–15, 203–204.
41)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50–351.
42) Derek Kidner, Genesis, 87.
43) Terence E. Fretheim, The Book of Genesis, 390.
44) Jack M. Sasson, “Word–Play in Gen 6:8–9,”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7–2 (1975): 36–37.
45) Victor P. Hamilton, Genesis: Chapters 1–17, 277. 해밀턴은 노아의 경건에 관한 문장이 10 개의 단어로 구성된 것을 두고 노아가 아담에서부터 열 번째 세대로 제시된 것을 염두에 둔 일종 의 언어유희라고 여긴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36–239.
11-12절) 그 당시 온 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패하여 포악함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께서 그 땅이 부패함을 보셨다. 이는 땅위의 모든 육체의 행위가 부패했기 때문이다.
11-12절은 6:3과 6:5-7의 주제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6:3의 인간의 죄악은 엘로힘의 아들들 같았고 여러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성적인 타락이다. 반면 11-12절의 범죄는 폭력(하마스)이다. ‘하마스’는 사람을 거칠게 다루거나 무기등을 이용하여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여러명의 아내를 취하고 사소한 이유로 타인을 살인하는 가인의 후손 라멕을 연상시킨다.
- 창세기 6:11–12은 13절과 함께 ‘땅’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 구절에서 ‘땅’은 무려 6번이나 등장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땅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창세기 6:11은 땅이 하나님 앞에서 더럽혀져 있다고 한다.47) 구약 성경에서 ‘더럽히다’는 동사는 주로 ‘타메’(טָמֵא)를 사용한다. 이 경우 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 사물의 더럽힘을 의미한다. 창세기 6:9 의 동사 ‘사하트’(שּׁחת)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더럽힘의 의미가 있지만, 물리적인 폭력과 파괴로 더럽혀진다는 의미도 있다. 창세기 6:9의 땅이 더럽혀진 이유는 6:9 후반부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땅이 하마스 또는 폭력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땅이 더럽혀졌다고 판단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 준다. 12절은 11절의 하마스가 누구에 의한 하마스인지 밝히며, 인간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히브리어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וַתִּשָּׁחֵ֥ת הָאָ֖רֶץ לִפְנֵ֣י הָֽאֱלֹהִ֑ים וַתִּמָּלֵ֥א הָאָ֖רֶץ חָמָֽס׃11
와티사헤트 하아레츠 리프네 하엘로힘 와팀마레 하아레츠 하마스
וַיַּרְא אֱלֹהִ֛ים אֶת־הָאָ֖רֶץ וְהִנֵּ֣ה נִשְׁהָ֑תָה כִּֽי־הִשְׁחִ֧ית כָּל־בָּשָׂ֛ר אֶת־דַּרְכּ֖וֹ עַל־הָאָֽרֶץ׃12
와얄 엘로힘 에트–하아레츠 베힌네 니스하타 키–히스히트 콜–바살 에트–달코 알–하아레츠
첫째, 12절 둘째 문장은 11절의 첫째 동사 ‘사하트’(שּׁחת)를 반복하며 땅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감탄사 ‘힌네’(הִנֵּ֣ה, 보라!)를 문장의 서두에 두었다. 둘째, 땅이 손상된 이유는 전적으로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다. 12절 후반부에는 11절의 ‘하마스’(חָמָֽס)를 사용하는 대신에 11절의 ‘사하트’(שּׁחת)를 다시 사용하여 땅의 손상이 인간의 행위 때문임을 밝힌다. 즉 12절 후반부는 모든 육체가 땅 위에서 자신의 삶의 길을 또는 인생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노아의 삶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노아 이쉬 차딕 타밈 하야 베도로타브 에트–하엘로힘 히트할렉–노아 창
키–히스히트 콜–바살 에트–달코 알–하아레츠
창세기 6:9과 6:12은 각각 ‘걸어 다니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하락’(הָלַךְ)과 길의 의미를 가진 명사 ‘데렉’(דֶּרֶךְ)을 사용하여 노아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48)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길을 걸었지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들의 삶의 길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성적인 범죄와 폭력으로 자신들의 삶을 파멸로 몰아 갔던 것이다. 레위기 18:24–30에 의하면 인간의 죄(성적인 범죄나 폭력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를 포함한 모든 죄악)는 그 사람만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더럽히며, 더럽혀진 땅은 사람을 토해내어 멸망시킨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47) Anne Gardner, “Ecojustice: A Study of Genesis 6:11–13,” The Earth Story in Genesis, 117–129.
48) John H.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12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40–242.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동물과 식물)들에게도 자신의 지배권을 공격적으로 난폭하게 사용하였다. 이들의 포악함은 네피림들의 특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용사였고 자신들의 힘으로 피조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다. 결국 땅이 부패했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고대 근동의 길가메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도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의 시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홍수를 일으켰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는 사람들의 악함과 부패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을 멸하려고 홍수를 사용하신 것으로 말한다.
노아는 당대의 부패하고 포악한 이들의 삶과 대비되어서 더욱 돋보인다.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은 선명하다. 대낮에 촛불 하나는 아무런 영향력을 드러낼 수 없다. 하지만 칠흑같은 밤, 촛불 하나는 우리 주위를 환히 비추인다.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떠한가? 한낮과 같이 살만한 시간들도 있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시간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촛불 하나를 잘 준비하여 켜고 있느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두움가운데 당신의 빛을 비추일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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