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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toration for Judah and Israel
10 Ask rain bfrom the Lord
in the season of cthe spring rain,
from the Lord dwho makes the storm clouds,
and ehe will give them showers of rain,
to everyone the vegetation in the field.
For fthe household gods gutter nonsense,
and the diviners see lies;
hthey tell false dreams
and give empty consolation.
Therefore ithe people wander like sheep;
they are afflicted for lack of a shepherd.
j“My anger is hot against the shepherds,
and kI will punish the leaders;1
for lthe Lord of hosts cares for his flock, the house of Judah,
and will make them like his majestic steed in battle.
From him shall come mthe cornerstone,
from him nthe tent peg,
from him the battle bow, 
from him every ruler—oall of them together.
They shall be like mighty men in battle,
ptrampling the foe in the mud of the streets;
they shall fight because the Lord is with them,
and they shall put to shame qthe riders on horses.
r“I will strengthen the house of Judah,
and sI will save the house of Joseph.
tI will bring them back ubecause I have compassion on them,
and they shall be as though I had not rejected them,
for vI am the Lord their God and I will answer them.
Then Ephraim shall become like a mighty warrior,
and wtheir hearts shall be glad as with wine.
Their children shall see it and be glad;
their hearts shall rejoice in the Lor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10:1–7.

슥 9-14장의 주된 주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9-10장은 종말론적 예언을 다루고 있다. 이전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그의 뜻을 실현하신 것을 말한 것처럼 종말론적 예언들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행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슥 9-14장은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에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다. 
슥 10:1-3상절은 심판과 기소의 요소를
3하-7절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8-12절은 독자들에게 비판과 위로를 준다. 
이스라엘의 적인 열방을 심판하기 위해서 시온의 참된 왕이 올 것이라는 것을 9장이 말한다.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양때인 당신의 백성에게 화평을 가져오리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더욱 확실히 선포된다. 

1절) 봄비가 오는 시기에 비구름을 만드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비를 내리심으로 모든이에게 받의 채소를 주실 것이다. 
농업 중심 경제인 이스라엘 에게 있어서 봄비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방의 바알신이 이렇게 천둥과 번개를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전했다, 
In view of the Lord’s promise to provide the grain and new wine for his people (9:17), they should look to him in faith for “rain.” The Israelite agricultural economy was dependent on rain for its success, especially the spring rain. Since pagan gods such as Baal also claimed to make the storm clouds that controlled the rainfall, a crucial test of Israel’s faithfulness to the Lord was, from whom would they seek the rai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63.

2절) 드라빔(집의 우상)은 허탄한 것을 말하고 복술자는 거짓을 보고 거짓 꿈들을 말하고 헛된 위로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양과같이 방황할 것이며 목자가 없으므로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3) 나의 노가 그 목자들에게 대해서 크게 발할 것이고 그 지도자들을 범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집의 무리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전쟁에 강력한 말과 같이 만드실 것이다. 

4절) 그(여호와)로부터 모퉁이돌이, 텐트의 말뚝이, 전투의 활이, 모든 권세자가 나와서 하나가 될 것이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도자 없는 유다족속에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심으로 그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된다. 
The flock would be transformed from wandering sheep into a majestic warhorse, while the new leadership that the Lord would provide for them is described metaphorically as a cornerstone (the foundation around which a building was constructed; see Isa. 28:16), a tent peg (an image of solid stability; see Isa. 22:20–23), and a battle bow (representing military power; see Zech. 9:10). These images have royal associations, but the renovation of leadership extends down to the lower level of overseer (ruler; cf. 9:8, where these were Israel’s oppressors). These new leaders would be triumphant against all foes because of the Lord’s presence with them.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64.

5절) 그들은 전쟁에 강력한 용사같이 될 것이고 진흙 거리에서 대적을 밟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에 싸울 것이고 말탄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6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고 요셉 족속을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버리지 않은 것 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하나님 이고 그들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애굽으로부터의 탈출로부터 시작된다. 유다와 요셉, 이어 에브라임의 회복은 북왕국 전체에 대한 회복을 보여준다. 
The Lord’s intervention for his people will result in their strengthening and deliverance. Whereas they were onc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rejected by the Lord, he will now have compassion on them, completing the process of restoration begun when he brought Judah back from exile. This restoration will extend beyond Judah to include the house of Joseph, the northern kingdom, which was scattered by the Assyrians in 722 b.c. When these people cry out to him in exile, he will answer them and bring them home, resulting in strength and joy for all of God’s peopl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64.

7절) 에브라임은 용사같이 될 것이고 그들의 마음읒 포도주로 기뻐할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은 이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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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ill Save His People
14  Then the Lord will appear over them,
and ohis arrow will go forth like lightning;
pthe Lord God will sound the trumpet
and will march forth in qthe whirlwinds rof the south.
15  The Lord of hosts swill protect them,
and tthey shall devour, uand tread down the sling stones,
and vthey shall drink and roar as if drunk with wine,
and be full like a bowl,
drenched wlike the corners of the altar.
16  On that day the Lord their God will save them,
as xthe flock of his people;
for ylike the jewels of a crown
they shall shine on his land.
17  zFor how great is his goodness, and how great his beauty!
aGrain shall make the young men flourish,
and new wine the young wome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9:14–17.

No Old Testament passage provides a more compelling background to Zech 9:14–16 than Exod 19:16–19 where the Lord himself came down on the mountain with awesome majesty to deliver the law to Moses. Just as the Sinai event demonstrated the Lord’s unspeakable power and validated his special relationship with his people, so the theophany in Zech 9 reminded the postexilic community that God would do no less for them than he had done for Israel in days past when she suffered under the heavy Egyptian hand.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80.

14-15절)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같이 쏘실 것이고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하시며 남방의 회오리 바람중에 행진하실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며 그들이 원수를 무찌르고 물맷돌을 밟을 것이고 그들은 마실 것이고 포도주에 취해 소리지를 것이다. 그들은 포도주(피)가 가득한 그릇과 같고 흠뻑 젓은 제단 모퉁이와 같다. 
주님의 나타나심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용사이신 주님이 활을 쏘시면 번개같이 나아간다. 또한 그분이 나팔을 불고 행진하면 남방 회오리바람과도 같다. 

신현의 표현으로 번개와 천둥이 사용되는데 본문은 천둥대신에 나팔소리가 등장한다. 
Normally, thunder accompanies lightning in the biblical texts, passages that often describe thunder as the Lord’s voice (Deut 5:22; Ps 29:3–9). Instead, blasts from the “trumpet” (šôpār) replace the sound of thunder in the tumultuous theophany.121 The resounding call of the šôpār signaled the beginning of various rituals, including the beginning of the Sabbath. The šôpār also blew to celebrate momentous events (1 Kgs 1:34; 2 Kgs 9:13), seasonal festivities (Ps 81:3), and particularly to call the nation to war (Judg 3:27; 1 Sam 13:3). In apocalyptic passages like Zech 9, the šôpār called the Lord’s people to worship (see Isa 27:13). However, this is the only passage in the Old Testament where the text employs an anthropomorphism in which the Lord himself blows the šôpār.
121 שׁוֹפָר. HALOT, 1447–48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81.

The Lord of Hosts will arrive not only to subdue Judah’s enemies, but also to shield his people from their foes. The divine title emphasizes the primary theological point of the paragraph: the day will come when the Lord will ultimately vanquish every foe. God’s holy war against those who oppose his kingdom will come to a decisive and final end.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81–282.

본문의 비유는 이를 심판의 날로 보느냐 구원의 축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게 해석된다. 심판의 그림으로 볼때 15절은 그들이 피를 마시고 피가 가득한 동이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 같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축제의 날로 보면 그들은 마실 것이며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소리지를 것이다. 

(슥 9:15,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니, 그 백성이 원수를 섬멸하여 무릿매 돌 던지는 자들을 짓밟을 것이다. ㉠백성은 그들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실 것이며, 그들은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로 흠뻑 젖은 제단 뿔과도 같을 것이다. / ㉠칠십인역을 따름. 히, '백성은 마실 것이며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소리를 지를 것이다’』 
(슥 9:15, 공동) 『이 백성이 만군의 야훼를 방패삼고 던진 그 팔맷돌에 원수들의 살이 찢기리라.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술 마시듯 마시리니, 마치 넘쳐나는 동이 같고, 제단 모서리같이 흥건하리라.』 
 (슥 9:15, 쉬운) 『백성이 술 취한 사람처럼 전쟁터에서 소리지를 것이며 적군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실 것이다. 그들은 피로 가득한 그릇과 같고, 피로 흠뻑 젖은 제단의 모퉁이와도 같다.』  
(슥 9:15, 우리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니 그들이 원수를 쳐부수고 돌을 던지는 사람을 밟아 이길 것이다. 그들이 술을 마신 듯이 적의 피에 취해 즐거이 부른다. 그들은 피로 가득 찬 그릇 같고 피에 젖은 제단 모서리 같을 것이다.』 
 (슥 9:15, 킹흠정) 『만군의 주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리니 그들이 삼키고 돌팔매 기구의 돌로 복종하게 할 것이며 그들이 마시고 큰 소리를 내기를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하며 대접같이 채워지고 제단의 모퉁이같이 될 것이라.』

16-17절) 이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왕관의 보석과 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 그의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할 것이다. 
본문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양과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승리가 왕과 백성의 비유를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왕되심은 왕관을 통해서 상징되고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된 자리는 적군의 짓밟힌 물맷돌과 대조되어 왕관에 박힌 보석, 귀한 돌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존귀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추수때의 풍성함으로 표현된다. 
“Grain” and “new wine” function as symbols of prosperity, standing in contrast to the image of the haggard people in v. 11. Frequently, the Old Testament pairs grain and wine to represent the Lord’s bountiful blessings (Gen 27:28; Num 18:12; Deut 33:28; Isa 36:17). Since “new wine” (tîrôš) refers to the first pressings of the grapes, the term probably does not refer to an intoxicant.134 The prophets often promised an eschatological day when creation would no longer suffer under the pain of sin, yielding harvests humans will not have known since the garden of Eden. Several prophetic passages illustrate the point of agricultural blessing in the end times when Israel finally experiences the restoration (see Isa 4:2; 30:23; Ezek 34:26; Amos 9:13).
134 תִּירוֹשׁ. Some view the question of whether this was fermented wine differently. HALOT, 1727–28.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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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이 성전건축과 관련된 당면한 권면과 예언을 이야기한다면 후반부 9-14장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종말론적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Judgment on Israel’s Enemies
The oracle of the word of the Lord is against the land of Hadrach
and gDamascus is its resting place.
For the Lord has an eye on mankind
and on all the tribes of Israel,1
hand on Hamath also, which borders on it,
iTyre and iSidon, though jthey are very wise.
Tyre has built herself ka rampart
and lheaped up silver like dust,
and fine gold like the mud of the streets.
But behold, the Lord will strip her of her possessions
and strike down mher power on the sea,
and nshe shall be devoured by fire.
oAshkelon shall see it, and be afraid;
Gaza too, and shall writhe in anguish;
Ekron also, because its hopes are confounded.
The king shall perish from Gaza;
Ashkelon shall be uninhabited;
pa mixed people2 shall dwell in Ashdod,
and I will cut off the pride of Philistia.
I will take away qits blood from its mouth,
and rits abominations from between its teeth;
sit too shall be a remnant for our God;
it shall be like ta clan in Judah,
and Ekron shall be like the Jebusites.
Then uI will encamp at my house as a guard,
vso that none shall march to and fro;
wno oppressor shall again march over them,
xfor now I see with my own eye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9:1–8.

9:1–14:21 The Return of the King. Reference to the surrounding nations in 8:20–23 and 9:1–8 links the book’s main parts (chs. 1–8 and chs. 9–14). In the second half of the book, visions recede as does interest in Joshua and Zerubbabel as the named leaders of the community. These latter chapters comprise two blocks of oracles, both introduced as the “burden of the word of the Lord” (9:1; 12:1; cf. also Mal. 1:1, identical in Hb.). The twin themes of the purity of God’s people and the fidelity of their leaders—often termed “shepherds”—run throughout these oracles. The community and its leaders suffer turmoil: this turn to the Lord faces opposition, tearing at the fabric of society and the natural world. Ultimately, the jubilant “return of the king” (Zech. 9:9) issues in the triumph of God’s purposes and the restoration of God’s people now joined by all nations (14:9, 16; cf. 8:20–23), for salvation belongs to the Lord (12: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61.

본문은 크게 제 지역에 대한 삼판으로 구분된다. 
1) 수리아에 대한 심판(1-2상) - 하드락, 다메섹, 하맛, 하나님의 눈
2) 베니게에 대한 심판(2하-4절) - 두로와 시돈의 지혜, 하나님의 심판
3) 블레셋의 심판과 구원(5-8절) -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자, 하나님의 보호

1절)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 이 본문에서 경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burden, oracle로 인데 히브리어 ‘마스카’로 짐, 부담의 의미인데  신탁을 표현하는 용어이다.(9:1; 12:1; 말 1:1) 
본문 1절의 해석은 이견이 있다. 하반절에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다른데 개역개정은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본다’라고 번역했지만 다른 번역본들(ESV 등)은 여호와의 눈이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에게 향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8절과 연결해서 볼때 더욱 합당해 보인다.
(슥 9:1,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슥 9:1, 새번역) 『주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고, 다마스쿠스에 머문다.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주님을 바라본다.』 
(슥 9:1, 현대어) 『[이스라엘 영토 확장의 예언] 여호와께서 하드락 지역을 통과해 가셨고, 다메섹을 거처로 삼으셨다. 아람 족속의 성읍들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Zch 9:1, NIV) 『The word of the LORD is against the land of Hadrach and will rest upon Damascus--for the eyes of men and all the tribes of Israel are on the LORD—』
(슥 9:1, NASB) 『The burden of the word of the LORD is against the land of Hadrach, with Damascus as its resting place (for the eyes of men, especially of all the tribes of Israel, are toward the LORD),』
(슥 9:1, KJV) 『The burden of the word of the LORD in the land of Hadrach, and Damascus shall be the rest thereof: when the eyes of man, as of all the tribes of Israel, shall be toward the LORD.』

(슥 9:1, 공동) 『야훼께서 계시하신 말씀. 야훼께서 하드락 땅을 거쳐 다마스쿠스에 머물러 계시다. 이 아람의 수도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마찬가지로 야훼의 것이다.』 
(슥 9:1, 현대인) 『여호와께서 하드락 땅과 다마스커스에 형벌의 말씀을 선언하셨다. 이것은 여호와의 눈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Zch 9:1, ESV) 『The burden of the word of the LORD is against the land of Hadrach and Damascus is its resting place. For the LORD has an eye on mankind and on all the tribes of Israel,』 
위에서 보는 것처럼 번역의 두가지로 갈린다. 여기서 눈이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눈이 여호와께로 향했다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눈이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지파를 바라본다라고 볼 때 수리아를 심판하시는 이유가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눈으로 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게서 온세상을 감찰하시며 죄가운데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는 이후의 8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드락은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했고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로 페르시아시대의 주요도시였다. 
Zechariah 9 begins with an oracle against Hadrach, a geographic designation that does not occur elsewhere in the Old Testament. Long unknown historically, the city has been identified in Assyrian texts, including those of Tiglath-Pileser III.24 The reference to Hadrach as the first city to experience the power of the word of the Lord serves at least two purposes. First, Hadrach lies to the north of the other sites listed by Zechariah. Just as the Lord’s judgment on Judah came from the north commencing the exile, so would God’s word overrun the northern nations with a dramatic reversal. Second, Hadrach apparently lay beyond the greatest extent of either the Solomonic or Davidic kingdom.25 Thus, Zechariah predicted that the Lord’s authority would extend beyond the most expansive boundaries ever known during Old Testament times. God’s dominion would also overshadow pagan peoples.
As Zechariah’s gaze turned southward, he viewed Damascus, the capital of Aram (Syria), a center of commerce, and a major city during the Persian era. Damascus also opposed Judah bitterly during most of her history (Amos 1:3). A few commentators question precisely what Zechariah meant when he stated that “the word of the Lord … will rest upon Damascus.” While some claim that the phrase might express encouragement for Damascus,26 no evidence in the text supports this view. More likely the prophet intended that the Syrian city will submit to the Lord totally because of the power of God’s word. The march of God’s word, like a mighty army, will conquer city after city toward its southern goal of Jerusalem. The Lord declares that his kingdom will extend beyond the borders of Judah, having a universal scope encompassing even long-time foes of God and his people.27

24 ANET, 282–83.
25 C. L. Meyers and P. Meyers, Zechariah 9–14 (New York: Doubleday, 1993), 92.
26 Baldwin, Zechariah, 159.
27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9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0–261.

2-4절) 베니게-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여호와의 눈, 말씀이 두로와 시돈에도 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성곽을 건축하며 은과 금을 모아 티끌과 진흙같이 쌓았지만 주님께서 그를 쫓아 내시고 그들이 의지하던 해상력도 파하시고, 불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두로와 시돈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이다. 하나님께 대적하여 높아져 하나님에 대항하는 세상의 지혜로 그들이 세상속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세상 나라가 아무리 강하고 부요하고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영원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두로는 주님의 심판의 결과로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두로와 시돈에도 메시야의 구원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보여준다.(막 3:8)

Zechariah’s statement “Tyre has built herself a stronghold,” functions as a word play. The Hebrew word ṣōr (“Tyre”)47 sounds like the Hebrew root of the term māṣôr (“stronghold”).48 The expression scorns Tyre’s self-sufficient actions. The arrogant and self-reliant attitude exhibited by Tyre throughout her history led other prophets to declare her doom (Isa 23:8–9). The classical prophetic condemnation of Tyre occurs in the book of Ezekiel who saw Tyre as the epitome of hubris and rejection of the Lord (see Ezek 28:2–10).
Ultimately, Alexander the Great fulfilled the Lord’s promise of abasement for Tyre, devastating the city to such an extent that she never regained her former prominence.49

47 צֹר. (ṣōr) See HALOT, 1053.
48
מָצוֹר. See HALOT, 623. See also A. Wolters, “Word Play in Zechariah,” in Puns and Pundits (S. Noegel, ed., Bethesda: CDL Press, 2000), 224.
49 For a discussion of Alexander’s fulfillment of the Lord’s prophecy against Tyre, as well as the view that Zech 9:1–8 was written as a response to the Greek general’s striking victory, see M. Delcor, “Les allusions à Alexandre le Grand dans Zach IX 1–8.” VT 1 (1951): 110–24.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4.

5-6절) 아스글론이 하드락, 다메섹, 두로와 시돈의 심판의 소식을 보고 무서워하고, 가사도 아파하며 했다. 5절에 이 도시들의 나열 구조를 보면 아스글론-가사-에그론-가사-아스글론의 순서이고 이후 6절에 아스돗이 언급된다. 
가장 남단에 위치한 아스글론도 두로와 시돈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들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말씀의 행신앞에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 블레셋 도시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그론은 침략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다메섹이나 두로가 무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또한 두려워했다. 
God would take the Philistines, whose arrogance had become proverbial, and transform them into a people for himself. Before the Lord could incorporate any of the Philistines into the remnant of Judah, however, first he had to judge their sin and cleanse them from the profane things in their midst.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6.

7절) 블레셋 입에서 그 피를, 그 이빨사이에서 가증한 것을 제할텐데 이제 블레셋도 남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같이 될 것이다. 
심판은 재앙임 동시에 희망이 될 수 있다. 블레셋의 교만을 끊는 과정은 죄에 대한 심판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정결케 하는 과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블레셋의 남은자는 다윗시대의 여부스(삼하 5:6-10)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당당한 일원으로 편입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남은자 사상이 이스라엘을 뛰어 넘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이었던 이방인 블레셋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윗시대에 시작된 이 통합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더불어 교회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갈 3:28)
Isaiah condemned similar practices, castigating those who ate unclean meat and sacrificed in a forbidden fashion (Isa 65:4; 66:3, 17).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7.

8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예루살렘 성전 나아가 예루살렘 도시나 유다 백성)을 진으로 둘러 보호하심으로 적군이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임을 약속하신다. 포학한 자가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할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포학한 자의 언급은 보신다(출 3:7)과 아울러 하나님의 보호가 출애굽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고통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보시는 것은 곧 그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However, by metonymy “house” specifies not just the land, but more importantly, the people who occupy the promised land. Of the numerous New Testament passages that portray the people of God as the Lord’s house, none relates more closely to Zech 9:8 than Heb 3:6: “But Christ is faithful as a son over God’s house. And we are his house, if we hold on to our courage and the hope of which we boast.”
The day in which alien armies defiled the promised land with their unclean feet would end because the Lord promises to keep close watch over his possession. This assurance resumes a theme introduced in Zech 2:5 where the Lord says, “I myself will be a wall of fire around it [Jerusalem].” Zechariah 1:16 expresses a similar idea.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7–268.

Verse 8 links the initial paragraph in chap. 9 to other themes throughout chaps. 1–8. First, the Lord’s declaration that he keeps watch over his land recalls 4:10 where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 the earth,” seeing all and controlling all. In both passages, “the Lord’s all-seeing eye purposes to defend and provide for His people.”72 Verse 1 also speaks of the eye, but the eye belongs to men who look to the Lord for protection and guidance. Zechariah 9:9 serves as the cause—because the Lord’s eye is always on his kingdom (“for now I am keeping watch”); v. 1 functions as the effect—that the inhabitants’ eyes will look to their God (“the eyes of men are on the Lord”). The initial section of the second half of the book of Zechariah presents two basic truths: the Lord will reign victoriously, and he will gather the remnant of alienated peoples to himself in his eschatological reign.
Second, both Zech 9:8 and 7:14 include the same Hebrew idiom, mēʿōbēr ûmiššāb, an unusual expression meaning “to march back and forth.”73 The phrase occurs quite infrequently, here connecting chap. 9 to chap. 7. The NIV does not communicate the identical Hebrew idiom in both passages with like English idioms. But the Hebrew text plainly links God’s message of salvation in v. 8 with a similar message in 7:14 that foretells the Lord’s judgment on all who choose not to listen to God’s call to obedience and repentance.

72 Baldwin, Zechariah, 162.
73
מֵעֹבֵר וּמִשָּׁב.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68.

스가랴는 이방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이후 9절의 메시야의 재림을 예비한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에 대한 스가랴의 그림은 이후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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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And the word of the Lord of hosts came to me, saying, 19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e fast of the vfourth month and the fast of the wfifth and the fast of the xseventh and the fast of the ytenth shall be to the house of Judah zseasons of joy and gladness and cheerful feasts. Therefore love atruth and peace.
20 “Thus says the Lord of hosts: Peoples shall yet come, even the inhabitants of many cities. 21 The inhabitants of one city shall go to another, saying, b‘Let us go at once cto entreat the favor of the Lord and to seek the Lord of hosts; I myself am going.’ 22 bMany peoples and strong nations shall come to seek the Lord of hosts in Jerusalem and cto entreat the favor of the Lord. 23 Thus says the Lord of hosts: In those days dten men efrom the nations of every tongue shall take hold of the robe of a Jew, saying, ‘Let us go with you, for fwe have heard that God is with you.’ ”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8:18–23.

18절) 7장에서 벧엘 사람 사레셀과 레겜멜렉이 질문한 사람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다.(7:2-3) 그러나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이 아니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그 대답의 말씀이 임하였다. 

19절) 넷째달, 다섯째달, 일곱째 달,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해야 한다.(16절) 각각의 금식의 날을 이스라엘의 역사상 비극적인, 슬픔의 순간들이다. 그런데 이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7장에서는 5월과 7월의 금식만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4월과 10월의 금식을 추가했다. 이 모두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계있는 것으로 이제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Formerly, the people fasted in the fourth month, when the walls of Jerusalem were breached (2 Kings 25:3–4; Jer. 39:2; 52:6–7); in the fifth, when the city fell (Jer. 52:12–15); in the seventh, when Gedaliah was assassinated (2 Kings 25:25; Jer. 41:1–3); and in the tenth, when the siege of the city first began (2 Kings 25:1; Ezek. 24:1–2). Yet in the days ahead, these fast days would be turned to feast days, seasons of joy and gladness, celebrating the salvation and transformation that the Lord had accomplished for them. In view of this, the people are called to love truth and peace: “love” implies commitment and devotion rather than being simply an emotional respons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61.
기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손’인데 이는 잔치에서 즐겁게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고(사 22:13) 기쁨의 잔치에도 쓰였다.(에 8:16-17) 즐거움, ‘심카’도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눌때 쓰인 단어이다.(삼상 18:6; 왕상 1:40; 사 9:3)
본문은 슬픔의 금식의 날이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는 이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진리와 화평을 이루고 추구해야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8장 전체에서 진리와 화평을 말한다.(3,  8, 16-17) 모든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실과 화평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진리, 진실이 없으면 참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고 나아가 사회적 관계, 특히 공평을 실현해야할 법제가 위협받게 되고 사회 제도가 위협받고 약자들이 아픔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리와 화평을 추구하고 사랑해야 한다. 
After a repeated, emphatic assertion that his sermon was of divine origin, Zechariah quoted God as saying that all of the former fasts would become times for rejoicing in Israel’s relationship with the Lord (see Jer 31:10–14). Zion’s great joy will cause episodes of judgment and deprivation to recede into a faded memory. Up to this point in Zechariah’s revelation, the prophet had declared that the Lord will “restore the nation” (1:16–17; 2:10; 3:9; 4:9; 8:3–8, 11–13), appoint his messianic leaders (3:5, 7–8; 4:7–8, 14; 6:12–13), and rule as sovereign over the nation of Judah as well as govern all the other nations of the world (1:10–11; 2:5, 10–11; 6:7–8; 8:8).151
151 Merrill, Zechariah, 23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5.

Zechariah strongly conveyed the rejoicing that the future will bring by using three synonyms for joyfulness. The term “joyful” (śāśôn) means “exultation or rejoicing,” especially in light of the Lord’s favor (see Ps 51:8).156 Likewise, the Hebrew term for “glad occasions” (śimḥāh) signifies “mirth.”157 This latter expression, when describing gladness in a social setting, may refer to the fellowship that family and friends share around a meal (see Gen 31:27). If this is the case, it presents a particularly pregnant connotation in light of Zechariah’s transformation from fast to feast. Last, the Hebrew phrase for “happy festivals” (mōʿădîm) does not occur elsewhere in the Old Testament, but the expression speaks of good or pleasant assemblies. Whereas past memories of Jerusalem brought lament and pain, future memories of Zion will focus on the feasting within the city: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festivals” (Isa 33:20).
Verse 19 concludes with the imperative, “love truth and peace.” Although the injunction to love occurs in many truly significant theological texts, the command does not appear frequently in the Old Testament. In Lev 19:18, 34 (see also Matt 22:39; Mark 12:31; Luke 10:27; Rom 13:9; Gal 5:14; Jas 2:8) God commands his faithful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Further, Deut 6:5, the Shema, requires believers to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Neither admonition refers to an “emotional” response that God expected Israel to direct either to one another or to himself. Rather, the faithfulness or obedience to the covenant God had made with his people represents the essential idea of “love.” Furthermore, the biblical use harmonizes nicely with the ancient Near Eastern covenants that use similar vocabulary to require obedience to the covenant.158 Thus, v. 19 concludes with the command for every Judahite to show covenantal faithfulness both to God and man.

156 שָׂשׂוֹן. HALOT, 1363.
157
שִׂמְחָה. HALOT, 1336–37.
158 W. L. Moran, “The Ancient Near Eastern Background of the Love of God in Deuteronomy,” CBQ 25 (1963): 77–87. Also, D. J. McCarthy, Treaty and Covenant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63).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6–247.

20-22절) 앞서 금식이 기쁨의 절기가 된 것을 보고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다.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 거민에게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자하라고 할 것이고 그것을 보고 다른 성읍의 사람들도 나도 여호와께 가겠다라고 할 것이다. 나아가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할 것이다. 
본문은 앞서 2:11절에 선포된 내용이다. 
본문은 이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성읍, 민족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앞에 나아올 것을 말한다. 과거 어느 성읍 백성이 다른 성읍 백성을 찾아간다는 것은 전쟁하러 나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성읍들이 공경당하고 훼파되던 것을 경험했던 이들이 다른 성읍에도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러 간다는 것이다. 또한 22절의 나라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고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방인들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미 선포되었다. 
The Abrahamic covenant assured Israel that she will become the channel of blessing between the Lord and the nations of the world. Further, Gen 1–11 develops the theme of “why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need the blessing” the Lord offer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7.

본문에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는 표현은 앞서 반복된다.
- The phrase “to entreat the Lord” (lĕbaqqēš ʾet—YHWH; vv. 21 and 22) occurs also in 7:2.165 When used in secular contexts, the expression describes appeasement, seeking mercy or favor. In the spiritual domain, the phrase portrays the preparation of the worshipper’s heart for prayer to the Lord. Typically, sacrifice also plays an important role in passages where people “entreat the Lord.”166
165 לְבַקֵּשׁ אֶת־יהוה. HALOT, 152.
166 TDOT, 4:409. Merrill illustrates the religious use of the term with Moses’ mediatorial actions in Exod 32:11–13 when he “sought the favor of the Lord” in asking God to spare the idolatrous people (Zechariah, 233–34).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9.

 
23절) 옷자락을 잡는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복종하고 간구하는 표현으로 고대 근동에서 많이 사용되던 표현이다. 사울이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 간청하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삼상 15:27)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자락을 잡는 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이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이 은혜의 통로임을 듣고 깨달은 이들이 이제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방언이 다른 이방의 백성 열명이 유다의 옷자락을 잡는다는 것은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를 흩으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를 하나되게 하실 것을 말해준다. 
Moreover, Zech 8:23 declares that ten foreigners speaking the different languages of the world will stand with every Judahite. Accordingly, Zechariah’s prophecy represented a reversal of the divine decree in the tower of Babel passage (Gen 11:1–9).163 The apostle Paul continued this theme in Gal 3:8: “The Scripture foresaw that God would justify the Gentiles by faith, and announced the gospel in advance to Abraham: ‘All nations will be blessed through you.’ ”
163 Smith, Micah-Malachi, 24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8.

본문의 그날은 앞서 2:11절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 주님의 완전한 통치가 완성되는 날을 말한다. 

본문의 열 명을 문자적 의미라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모든 인류를 통칭한다. 
Zechariah prophesied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see ten Gentiles in Zion worshipping the Lord for every Judahite. The number ten is not literal, but rather symbolizes the totality of humanity. The symbolic use of the number ten occurs in other Old Testament passages (see Gen 31:7; Lev 26:26).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49.

The theme of seeking the Lord that stands so prominently in vv. 20–22 transforms into “grasping” him in v. 23, a topic mentioned twice in a single verse. Thus, Rom 14:11 (see also Phil 2:11) portends, “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confess to God.’ ”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50.

스가랴의 전반부는 이렇게 8장으로 마쳐진다. 8가지의 환상을 말한뒤에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실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의 미래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7-8장은 하나의 큰 설교로 처음 벧엘에서 몇 사람이 금식에 대하여 제사장과 서기관에게 질문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유다가 멸망한 이후 과거의 멸망을 기억하며 슬퍼하며 금식하는 백성이다. 그러면서도 금식의 참된 의미를 잊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7장에서 그들이 환난당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8장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질투하시는 사랑 때문에 그 백성을 구하시갰다는 미래의 약속을 두번에 걸쳐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하지말고 진실하게 살것을 명령한다. 미래의 예루살렘의 회복과 수많은 이방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올 것에 대한 소망을 통해서 현실을 살아갈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 As chap. 8 concludes, the prophet completes the first part of the book, leaving Judah with ample reason to have confidence in the future. The Lord’s own assurances, indeed his very presence dwelling among the people in Zion, give all the faithful great optimism for their destiny. Psalm 126 captures the nation’s changing fortunes well: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es to Zion,
we were like men who dreamed.
Our mouths were filled with laughter,
our tongues with songs of joy.
Then it was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and we are filled with joy.
Restore our fortunes, O Lord,
like streams in the Negev.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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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ing Peace and Prosperity of Zion
And the word of the Lord of hosts came, saying, “Thus says the Lord of hosts: sI am jealous for Zion with great jealousy, and I am jealous for her with great wrath. Thus says the Lord: tI have returned to Zion and uwill dwell in the midst of Jerusalem, vand Jerusalem shall be called the faithful city, wand the mountain of the Lord of hosts, the holy mountain. Thus says the Lord of hosts: xOld men and old women shall again sit in the streets of Jerusalem, each with staff in hand because of great age. And the streets of the city shall be full of boys and girls playing in its streets. Thus says the Lord of hosts: yIf it is marvelous in the sight of the remnant of this people in those days, zshould it also be marvelous in my sight, declares the Lord of hosts? Thus says the Lord of hosts: Behold, aI will save my people bfrom the east country and from the west country, and I will bring them to dwell in the midst of Jerusalem. cAnd they sha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din faithfulness and in righteousness.”
Thus says the Lord of hosts: e“Let your hands be strong, you who in these days have been hearing these words from the mouth of fthe prophets who were present on gthe day that the foundation of the house of the Lord of hosts was laid, that the temple might be built. 10 For before those days hthere was no wage for man or any wage for beast, neither was there any safety from the foe for him who went out or came in, for I set every man against his neighbor. 11 But now I will not deal with the remnant of this people as in the former days, declares the Lord of hosts. 12 iFor there shall be a sowing of peace. The vine shall give its fruit, and the ground shall give its produce, jand the heavens shall give their dew. kAnd I will cause the remnant of this people to possess all these things. 13 And as lyou have been a byword of cursing among the nations, O house of Judah and house of Israel, mso will I save you, and nyou shall be a blessing. oFear not, but elet your hands be strong.”
14 For thus says the Lord of hosts: p“As I purposed to bring disaster to you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wrath, and I did not relent, says the Lord of hosts, 15 so again have I purposed in these days to bring good to Jerusalem and to the house of Judah; ofear not. 16 These are the things that you shall do: qSpeak the truth to one another; rrender in your gates judgments sthat are true and make for peace; 17 tdo not devise evil in your hearts against one another, and ulove no false oath, for all these things I hate, declares the Lor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8:1–17.

본문은 구원과 공의를 선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이들에게 선포되었다. 특별히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the Lord of hosts)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본문은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8:1-8; 14-15절의 내용이 현재와 미래의 구원의 내용을 다룬다면
8:9-13; 8:16-17절은 지금 사람들의 미래의 순종의 삶이 어떠한지를 다룬다. 

8:1-17절에서 앞서 말한대로 만군의 여호와(the Lord of hosts)라는 표현이 12번 등장한다.(8:1,2,3,4,6(2), 7, 9(2), 11, 14(2))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며 절대적인 주권자임을 또한 전쟁의 주관자요 전능의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본문은 베벨론에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말씀을 선포한다.(7-8, 9, 13, 15 / 특히 두려워하지 말라 : 9, 13, 15절) 

2절)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고 그를 위해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한다. 
1:14절과 유사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강렬히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질투를 나태내는 히브리어 ‘카나’는 격렬한 감정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사랑하는 백성이 언약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날때 하나님의 이 강렬한 사랑은 질투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역사로 나타난다.(시 29:20-28; 수 24:19; 겔 5:13; 16:38, 42; 23:25) 하나님은 열정의 하나님이시며 열정으로 충성하기를 원하신다.(신 4:23-24; 6:4-5; 11:13-21; 26:16-19; 30:2; 계 3:15-16) 

3절) 내가 시온에 돌아와서 예루살렘 가운데 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으로,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 거룩한 산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나 장소등이 새로운 이름을 얻는 것은 그것들의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삼상 9:9)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진리의 성읍으로 성산으로 새롭게 지칭하는데 이는 앞서 예루살렘이 그렇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진리는 히브리어 ‘에메트’로 견고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성산에서의 성은 ‘코데쉬’로 거룩을 의미하는데 원래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다쉬’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구별된 거룩한 도성이 될 것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 성산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돌아오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임재가 거룩, 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선포이다.(겔 48:35; 사62:2-4)

4-5절)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녀들이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앉을 것이고 그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뛰어놀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소년과 노인들이 함께 기쁘게 거하는 복된 세상이 될 것임을 약속해주는 것이다. 장수와 아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잠 3:2; 9:10-11; 시 127:3; 128:3-4)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모습으로 이처럼 길거리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과 이들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또한 지팡이를 들고 그들을 바른 길로 지도하는 노인의 모습을 아름다운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기뻐하며 하나될 수 있는 세상이다. 

6절) 이일(예루살렘의 회복)이 그날에 남은 백성들의 눈에는 기이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기이하지 않을 것이다. 
기이하다라는 히브리어 ‘이팔레’는 너무 어렵다라는 의미인데 창 18:13-14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사라가 비웃는데 이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너무 어렵고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의 기도중에 나온다.(렘 32:17; 26-44)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다(사 55:8-9)라고 말한다. 

7-8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해뜨는 땅과 해지는 땅으로부터 구원해 내셔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사실 것이다. 이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실과 공의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9절) 만군의 여호와의 집,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쎃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말을 이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 지어다. 
손을 견고히 할 지어다는 하나님의 전쟁에 사용된 표현이다.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 나가기를 망설일때 주께서 밤에 그들의 진영에 내려가게 하셨고 이때 그들의 대화를 들음으로 기드온의 손이 견고해졌다.(삿 7:9-11)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요나단은 다윗의 손을 강하게 하였다.(삼상 23:15-17)

10절) 이날 전에는 사람이나 짐승도 삯을 받지 못했고 원수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출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웃끼리 서로 대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1-12절) 이제 하나님께서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텐데 곧 평강의 씨앗을 얻게 될 것이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고 하늘을 이슬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제 이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이 모든 풍성함을 누리게 할 것이다. 

13절) 너희 유댜와 이스라엘 족속은 이방인 가운데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복이 되게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견고히 하라. 
전에는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사람의 표본이었으나 이제 복받는 사람의 표본이 되게 하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14-15절) 이전에 조상들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을때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으니 두려워 말라. 
-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다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이 확실하였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다는 말은 ‘레헤이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수 24:20; 사 1:17; 암 5:6, 14; 습 1:12; 겔 36:11) 

16-17절) 이스라엘이 행할 일은 이러하다.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계획, 도모하지 말고 거짓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정신이며(출 20:1-17; 23:1-13; 레 19장; 신 10:18; 14:29)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마 5:13-16; 25:40-46; 막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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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Zechariah, saying, “Thus says the Lord of hosts, cRender true judgments, show kindness and mercy to one another, 10 ddo not oppress the widow, the fatherless, the sojourner, eor the poor, and flet none of you devise evil against another in your heart.” 11 But gthey refused to pay attention hand turned a stubborn shoulder and stopped their ears that they might not hear.1 12 iThey made their hearts diamond-hard jlest they should hear the law and the words that the Lord of hosts had sent jby his Spirit through kthe former prophets. lTherefore great anger came from the Lord of hosts. 13 m“As I2 called, and they would not hear, mso they called, and I would not hear,” says the Lord of hosts, 14 n“and I scattered them with a whirlwind among all othe nations that they had not known. pThus the land they left was desolate, qso that no one went to and fro, rand the pleasant land was made desolat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7:8–14.
8-10절은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가랴의 예언의 핵심을 요약하는 것으로 사회 윤리의 실천 명령이다. 11-12상절은 이 명령에 대한 백성들의 부정적인 반응이고 12하-14절은 이러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8-10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여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 과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압제하지 말고 서로 해하려고 악한 꾀를 도모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금식을 행하는 것보다 공의가 드러나는 삶을 사는데 더 있었다. 
진정한 회개(금식)의 표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 바로 그 삶이 진실한 재판으로 서로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특별히 이에 대해서 신경써야할 이웃이 바로 과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자들이다. 
The test of true repentance is a life of obedience to God, specifically, true judgments that show kindness and mercy (v. 9) to the widow and fatherless, the sojourner and the poor (v. 10). These naturally disadvantaged groups in society were easy targets for the strong to oppress. This concern for the weaker members of society was what the Lord had required of his people in the former days, before Jerusalem’s fall.
-
The central importance of righteousness, rather than sacrifice, appears in 1 Sam. 15:22–23, Amos 5:21–27; Mic. 6:7–8, and Matt. 9:13, and underlines the superiority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over all animal sacrifices (Heb. 10:1–1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9.

9절에서 두가지를 명령한다. 첫번째는 진실한 재판을 행할 것을, 두번째는 인애(헤세드)와 긍휼(라하밈)을 베풀 것을 명한다. 헤세드는 구약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레헴’, 자궁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에서 나온 자녀에 대해서 가지는 간절한 마음, 사랑을 의미한다. 
Without doubt, the first Hebrew term (ḥesed), which the NIV translates “show mercy,” stands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theological words meaning “grace” in the Old Testament.62 Notoriously difficult to translate, no English translation can capture the breadth of the word’s connotations and denotations. The word communicates the idea of “loyalty” or “faithfulness” to fulfill an obligation to someone with whom one has a relationship. These relationships include marriage (Gen 20:13), friends (1 Sam 20:15), and associates (2 Sam 10:2).63 Hence, the Bible ascribes “loyalty” to a person, never to a concept. Theologically, the word ḥesed conveys the very “essence of the covenant relationship.”64 The Hebrew Bible uses the term ḥesed frequently to characterize the ideal both in human relationships as well 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ious and the Lord.
God emphasized the covenant he made with his people by first demonstrating his ḥesed to his people (Ruth 2:20; 2 Sam 7:15). While many modern translations render the word “mercy,” the result of God’s faithfulness yields much more than mercy toward his loved ones. Forgiveness (Exod 34:6–7), blessing (Ps 107:8), protection (Ps 44:26), and general kindness (Gen 24:12) represent an abbreviated list of the favors God’s faithfulness bestows on Judah.

62 TDOT, 2:44–64.
63 Baldwin, Zechariah, 146.
64 N. Glueck, Ḥesed in the Bible, trans. A. Gottschalk (New York: KTAV, 1975), 55. See also the helpful study by C. F. Whitley, “The Semantic Range of Ḥesed,” Bib 62 (1981): 519–26.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2.

본문에서 말하는 진실한 재판은 매우 중요하다. 진실한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멧’인데 신실함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재판은 ‘미쉬팟’으로 공의, 정의, 재판으로 표현되는데 이 두 단어가 구약의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표현이다. 
Eichrodt states that the Old Testament never views “justice” (mišpāṭ) as an abstract or impersonal notion. Instead, justice denotes the rights and duties each party possesses. These privileges arise from the shared covenant the Lord made with his people. Accordingly, everyone has his own special mišpāṭ.54 The task of righteousness requires all to render consistently this justice and the ethical claims that mišpāṭ demands. Thus, the Lord intended for his righteousness to extend to all in order to safeguard the wellbeing of those united into one community under divine law.55
The first positive command, “administer true justice” (mišpaṭ ʾemet šĕpōṭû),56 evokes a typical prophetic message concerning the Lord’s profound concern with justice for all of his people.57 This theme receives its first exposition in Exod 18:19–23 where God ordered Moses to render true decisions, and in so doing, to “show them the way to live.” On a deeper level, the Lord himself models what godly ethics are among his people. No passage states this more plainly than Lev 19:2,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Thus, the people bear the responsibility to live justly as their God epitomizes justice. Amos 5:24 teaches,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Likewise, Jer 22:3 states, “This is what the Lord says: Do what is just and right.” Jer 7:5–7 also illustrates Zechariah’s point well

54 מִשְׁפָּט. HALOT, 651–52.
55 W.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rans. J. A. Baker (Philadelphia: Westminster, 1961), 1:241.
56
שְׁפֹטוּאֶמֶתמִשְׁפַּט.
57 TDOT, 1:310–15.

The word ʾemet can express the ideas of “reliability,” “permanence,” “truth,” and “faithfulness”; the notion of faithfulness best captures the sense in this passage.60 God’s faithfulness reflects his consistent nature on which humanity may confidently rely (Ps 146:6). Furthermore, the inclusion of the word “faithfulness” evokes all that the covenant with the Lord represents, enjoining Judah to treat her neighbor as she has been treated by God (cf. Col 3:13). Faithfulness sometimes appears to function as a technical term characterizing the legal obligations each party has to the covenant.
On the human level, the Lord demands that Judah must always show faithfulness to her neighbor because doing so reflects the nature of God himself (Zech 8:16). Furthermore, the Lord requires faithfulness or consistency in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Ezek 18:8), in giving witness (Prov 14:25), and in the king’s reign (Prov 29:14). Proverbs 23:23 encourages the faithful to pursue faithfulness as one would the most prized of possessions. A failure to practice faithfulness represents one of the Lord’s most frequent complaints against his people. Jeremiah decried the people saying, “Friend deceives friend, and no one speaks the truth” (4:5). Hosea continued, “There is no faithfulness, no love, no acknowledgement of God in the land” (4:1).

60 HALOT, 68–6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0–222.

10절에서는 부정적인 두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첫번째는 압제하지 말것과 두번째는 도모하지 말것을 명령한다. 
사회가 건전하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회안의 연약한 사람들,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는 것이다. 
- The Mosaic law governs the way these constituencies should be treated (Exod 22:22; 23:6–9; Lev 19:15–18; Deut 10:18–19; 24:14). The theme of protecting the vulnerable in society occurs often in the prophets as well (see Isa 1:17; Jer 7:6; Amos 2:6–7; 4:1; 5:11–12; 8:4).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3.

11-12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여 아래와 같이 세가지로 반응한다. 첫번째는 등을 돌리며, 두번째는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세번째는 마음을 금강석과 같이 굳게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이전 선지자드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다.  
- Zechariah employed three metaphors to illustrate the nation’s iniquitous response to their God. The first figure of speech, “they turned their backs” (wayyittĕnû kātēp sōrāret), appears also in Neh 9:29.74 Literally, “they presented a stubborn shoulder.” Nehemiah pairs this phrase with “they stiffened their necks” (ʿorpām hiqšû), recalling Deut 9:6 where Moses rebuked Israel for being “a stiff-necked people” (ʿam—qĕšēh—ʿōrep; see also Ezek 3:8–9).75 For an agrarian society, few images more effectively communicate uselessness than the picture of an obdurate ox refusing to submit to the yoke. Likewise, God deemed sinful Israel profitless to himself and to her neighbors when she resisted the purpose for which the Lord had created her.
The second figure, “stopped up their ears” (wĕʾoznêhem hikbîdû miššĕmōaʿ), graphically describes Judah’s recalcitrance.76 Isa 6:10 expresses a similar idiom, although in Isaiah the dulled ears result from divine judgmen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calloused; make their ears dull and close their eyes.”77 Although some day his law will be written on the hearts of his people (Jer 31:33), Zechariah’s audience would not even let God’s word get past their ears.
The final figure of speech Zechariah employed pictures tempered hearts whose hardness approaches that of flint (wĕlibbām śāmû šāmîr).78 Ezek 3:9 describes a similar state of spiritual intransigence using a similar metaphor: “I will make your forehead like the hardest stone, harder than flint.” Since the Old Testament routinely focuses on the group, not the individual, the word “heart” (lēb) often focuses on the collective heart of the group (see Gen 42:28). The Old Testament contains three opposing idioms that clearly contrast with the hard heart or the heart of flint.79 First, Pss 34:19; 51:19 speak of the “broken of heart” (lēb nišbār).80 Second, numerous passages (see Deut 10:16; 30:6) describe the obedient heart as the “circumcised heart” (ʿorlat lēb).81 Third, Ezek 36:26 declares, “I will give you a new heart [lēb ḥādāš]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lēb hāʾeben]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lēb bāśār].”82

74 ויִּתְּנוּ כָתֵפ סֹרָרֶת.
75
עַם־קְשֵׁה־עֹרֶפ.
76
וְאָזְנֵיהֶם הִכְבִּידוּ מִשְּׁמוֹעַ.
77 See the discussion of intertextuality in the Introduction; see also Sweeney, Twelve Prophets, 644.
78
וְלבָּם שָׂמוּ שָׁמִיר. HALOT, 1562–63.
79 TWOT, 2:640–41. TDOT, 7:399–437, especially 421–30.
80
לֵב נִשְׁבָּר. HALOT, 513–15, 1403–4.
81
ע̇רְלַת לֵב. HALOT, 886.
82
לֵב חָרָשׁ/לֵכ הָאֶבֶן/לֵב בָּשָׂר. HALOT, 294, 7–8, 164, respectively.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5.

 
12-14절) 내가 불러도 그들이 응답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 나라로 흩어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고 아름다운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첫번째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포로로 끌려가게 하실 것이다. 세번째 아름다운 땅이 폐허가 될 것이다로 드러난다. 
Zechariah has yet to respond to the initial query about fasting, a reply that will come at the end of chap. 8. Instead of dealing with a superficial question, the prophet turned to the heart of the nation’s spiritual condition. Clearly, Judah found it easier to mourn her losses stemming from the exile and the ensuing deprivations than to repent and express sorrow over their sinful hearts before the Lord.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6–227.

In the end, Zech 7 addresses true worship and the natural consequences that result when God’s people worship the Lord. Chapter 7 also portrays the painful effects for Judah when spurning God’s word. Sounding much like Hosea or Amos, Zechariah linked true worship with justice and mercy that every genuine believer in the Lord should faithfully extend to others, particularly the downtrodden (7:8–1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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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all for Justice and Mercy
oIn the fourth year of King Dariu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Zechariah on the fourth day of the ninth month, which is pChislev. Now the people of Bethel had sent Sharezer and Regem-melech and their men qto entreat the favor of the Lord, rsaying to the priests of the house of the Lord of hosts and sthe prophets, “Should I weep and tabstain in uthe fifth month, as I have done for so many years?”
Then the word of the Lord of hosts came to me: “Say to all the people of the land and the priests, ‘When you fasted and mourned in uthe fifth month and in vthe seventh, for these wseventy years, xwas it xfor me that you fasted? yAnd when you eat and when you drink, do you not eat for yourselves and drink for yourselves? zWere not these the words that the Lord proclaimed aby the former prophets, when Jerusalem was inhabited and prosperous, bwith her cities around her, and the bSouth and the blowland were inhabited?’ ”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7:1–7.

스가랴 7-8장은 주전 8-7세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등에 의해서 선포된 사회 윤리적 예언 명령을 요약하며, 금식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제사의 바른 자세를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세상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고 있다. 금식은 의학적으로나 제의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명령이요, 이스라엘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금식이 금식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자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금식이라는 한정된 행위의 문제를 넘어서 신앙의 본질과 관계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다음과 같은 교차대구법안에 담겨 있다. (How 223-4)
A 금식의 선포(7:1-7)
B 공의의 선포(7:8-14)
B’ 구원과 공의의 선포(8:1-17)
A’ 금식에 관한 대답(8:18-23)

1절) 다리오왕 4년(기원전 518년) 아홉째달, 기슬래월 4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다. 이는 앞선 예언이후 2년이 경과한 시기이다. 

2절) 그때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였다. 
본문의 주어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사람은 1절과 연결해서 다리오왕이 보냈다라고도 보고, 두번째는 벧엘 사레셀이 당시의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기도 하고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는 벧엘에 사는 사람들이 사절단으로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Of the three approaches, the first suggestion warrants summary dismissal in the face of overwhelming evidence to the contrary. The second view, which takes Bethel Sharezer as the name of an individual, presents certain strengths. The attestation of the cognate word for Bethel Sharezer in Akkadian (a language related to Biblical Hebrew), used as a personal name, supports the personal name interpretation. Nevertheless, the third view, the Bethel view adopted by the NIV, offers the most credible understanding. The existence of Bethel Sharezer in a foreign language, albeit a cognate one, results in a rather weak argument for a similar usage in Zech 7. The simpler and more likely view sees Bethel as the common Old Testament toponym functioning as metonymy for the inhabitants of the city. Similar modern usages illustrate the point. For example, one may hear that “Wall Street remains skeptical,” where “Wall Street” is metonymy for the financiers who work in the Wall Street business district.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14.
다섯째 달 애곡하면서 금식하는 이유는 과거 70년전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에게 훼파되었기 때문이다. 

3절) 사절단은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지난 70년간 해온대로 다섯째달에 울며 근신해야하는지를 묻는다.(금식해야 하는지)
In conclusion, a group of the Lord’s worshippers from Babylon sought an authoritative statement from the religious leadership in Jerusalem regarding the propriety of holding the fast that commemorated the fall of Jerusalem. The question focused on whether the Lord’s covenantal people should continue a fast of mourning or whether their perspective should look forward to the promised restoration.39 The community of the faithful required Jerusalem’s blessing before any change in religious practices could take place.40
“To entreat the Lord” (lĕḥallôt ʾet—pĕnê YHWH) means to approach God through prayer or sacrifices seeking rescue from difficult circumstances. The phrase always signifies imploring help from the Lord in times of great need (1 Kgs 13:6). The expression sometimes involves confession of sin (Dan 9:13). One meaning focuses on mollifying the Lord’s wrath by offering sacrifice (1 Sam 13:12). The fact that the pilgrims sought an answer to their religious question in Jerusalem indicates that the worship of the Lord and the religious hierarchy serving the temple were both well established by Zechariah’s time and were clearly understood to emanate from Jerusalem. The idiom “to entreat the Lord” occurs throughout the Old Testament where various “official representatives” of the Lord and his people entreat God’s favor, including Moses (Exod 32:11), the man of God (1 Kgs 13:6), priests (Mal 1:9), kings (1 Sam 13:12; 2 Kgs 13:4; Jer 26:19; 2 Chr 33:12), and the “we” of the community of faith (Dan 9:13). In Ps 119:58 an individual worshipper entreats the Lord.41

39 Y. Hoffman, “The Fasts in the Book of Zechariah and the Fashioning of National Remembrance,” in Judah and the Judeans in the Neo-Babylonian Period, O. Lipschits and J. Blenkinsopp, ed. (Winona Lake, IN: Eisenbrauns, 2003), 169–218.
40 A. Cohen, The Twelve Prophets (New York: Soncino, 1948), 294.
41 TDOT, 4:408.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15.

그들은 지금 금식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인 ‘쫌’을 사용하지 않고 ‘바카’(울다)와 ‘나자르’(근신하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금식은 애곡하고 근신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했다.(삼하 12:16; 레 16)

4-5절) 온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너희가 70년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지만 그 금식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라고 반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반문하시면서 백성들의 금식의 진실성을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금식에 관한 구체적 질문의 대상을 온땅의 백성과 제사장으로 넓히신다. 또한 질문에서는 다섯째 달만을 물었지만 일곱째 달의 금식도 추가하신다.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의 금식, 다섯째 달의 금식은 주전 587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불탄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왕하 25:8-9)이고 일곱째달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임명된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된 사건을 상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왕하 25:25; 렘 41:1-2) 또한 속죄일의 금식을 가르킬 수도 있다. 
* 포로기간 70년에 대한 두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To summarize those conclusions, one may view the period of 70 years in two distinct, yet compatible, ways. One approach considers the first deportation to Babylon in 605 BC as the terminus a quo for the exile, concluding seven decades later in 536/35 BC when the first contingent returned. The second understanding begins the exile at 586 BC and culminates with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516 BC. We conclude that Zechariah retains both interpretations, used interchangeably here in chap. 7, as did Jeremiah and other prophets. In other words, the biblical text seems to introduce a deliberate ambiguity in the reckoning of the 70 years. Following the biblical lead, the interpreter should accept both modes of reckoning.46
46 Baldwin, Zechariah, 97; Orr, “The Seventy Years of Babylon,” VT 6 (1956): 306.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16.

6절) 그들은 먹고 마실때에 그 자신들을 위하여 먹고 마셨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적인 형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의 순수성을 찾는 것이었다. 
At the point of God’s desires regarding his people’s fasting, Zechariah relied heavily on Isaiah’s earlier prophecies. The prophet Isaiah explicitly stated that fasting without righteousness and justice brings no pleasure to the Lord (Isa 1:10–17; 58:1–7).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17.

금식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신앙의 성장과 영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다른 행동과 마차가지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외식적으로 행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근본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윤리적 삶의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사 58:1-9; 욜 2:12-13; 렘 14:12; 눅 18:9-14; 마 25:44-46; 요일 4:19-21)

7절) 

Verse 7 serves as a literary bridge connecting the previous section to the next, and like any effective transition, shares strong affinities with both paragraphs it links. In vv. 1–6 Zechariah declared that the people stood guilty of legalism, failing to worship the Lord with a sincere heart. This same fault marked all of preexilic Judah’s sins. Zechariah looked at the despoiled countryside as vindication of the message of the “earlier prophets.” The “earlier prophets” wedded sin and judgment, and history had proven them to be true prophets.
Likewise, Zechariah tied postexilic Judah’s rebellion against God with the possibility of further judgment should she fail to repent before the Lord. The prophet built on the painful memories of former judgments to admonish the nation that God’s wrath would surely fall again if the people chose to ignore God’s word. Certainly, chap. 7 does not present Zechariah’s first warning to his contemporaries to repent. Chapter 3 also taught that the people shared Joshua’s uncleanness. However, the strongest exhortation in the book occurs in 1:2–3 when Zechariah proclaimed, “The Lord was very angry with your forefathers. Therefore tell the people: ‘Return to me,’ declares the Lord Almighty, ‘and I will return to you.’ ”
Thus, v. 7 concludes vv. 1–6 and also introduces the remainder of the chapter that pointedly instructs the nation to repent. Jeremiah 22:21 declares, “I warned you when you felt secure, but you said, ‘I will not listen.’ ” Zechariah inverted Jeremiah’s message. Now that the people experienced overwhelming insecurity, he pled with his flock to heed God’s word and turn again to their Lord with a whole heart.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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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wn and the Temple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10 “Take from the exiles xHeldai, Tobijah, and yJedaiah, who have arrived from Babylon, and go the same day to the house of Josiah, the son of zZephaniah. 11 Take from them silver and gold, and make a crown, aand set it on the head of bJoshua, the son of Jehozadak, the high priest. 12 And say to him, ‘Thus says the Lord of hosts, “Behold, the man whose name is cthe Branch: for he shall branch out from his place, and dhe shall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13 dIt is he who shall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eand shall bear royal honor, and shall sit and rule on his throne. And there* shall be a fpriest on his throne, gand the counsel of peace shall be between them both.” ’ 14 And the crown shall be in the temple of the Lord as ha reminder to iHelem,2 jTobijah, jJedaiah, and Hen jthe son of Zephaniah.
15 k“And those who are far off shall come and lhelp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mAnd you shall know that the Lord of hosts has sent me to you. nAnd this shall come to pass, if you will diligently obey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6:9–15.

본문과 앞선 8가지 환상의 관계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앞서 병거가 북쪽(바벨론)으로 가서 사로잡힌자중에 3명(헬대, 도비야, 여다야)이 돌아왔기에 하나님의 영의 성공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환상과 7장 이후의 신탁이 스가랴가 본 밤의 환상과 거의 2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다고 보기에 본 장이 앞선 환상과 후반부의 신탁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 However, the themes in the eighth vision differ significantly enough from 6:9–15 that it becomes difficult to posit a direct connection between the two halves of chap. 6. Therefore, 6:9–15 was probably written at a later time in Zechariah’s ministry. Yet, moving beyond chap. 6, the oracles beginning in 7:1 date almost two years after Zechariah’s night visions. Thus, one can hardly assign 6:9–15 to these latter oracles. So, the oracle focusing on Joshua’s crown cannot be tied too closely to either the preceding or following sections of the book of Zechariah. Instead, the section on Joshua’s crown serves as a structural hinge for Zechariah, linking two major sections of the book.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6.

9-10절) 본문은 친숙한 패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로 시작된다.(4:8; 7:4; 8:1, 18) 또한 다른 내용과 다르게 환상을 해석하는 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절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 여다야가 누구 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경에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일인인지 아니면 조상의 이름을 다시 후대가 사용하는 풍습에 따른 이름인지 확실하지 않다.  
Zechariah likely mentioned these exiles in v. 10 because of their importance. If the nouns do serve as proper names, the identity of Heldai, Tobijah, and Jedaiah remains a mystery. Even though the same names appear elsewhere in the Hebrew Bible, most of the other occurrences cannot refer to the figures in v. 10.
The only other Heldai in the Old Testament is in a list of David’s warriors (1 Chr 27:15).
Tobijah represents a relatively common yet important name in the era. Ezra 2:60 mentions a Tobijah, but Ezra also indicates that since Tobijah could not trace his genealogy, he could not serve as a priest (2:59, 62). The Tobijahs in Ezra 2 and Zech 6 are probably different individuals.5 Another Tobijah appears in Neh 2:10, 19.6
Significantly, an influential family descended from one named Tobijah who lived during the Hasmonean period.7 A rock hewn cave in the Transjordan region preserved Aramaic inscriptions bearing the name Tobijah. Mazar dates these inscriptions to the era of Zechariah the prophet and identifies this Tobijah as the one in Zech 6:10.8 However, Frank Cross challenges Mazar’s dating of the Aramaic inscription and its identification with Tobijah in v. 10.9
Likewise, the name Jedaiah occurs elsewhere in the Old Testament (Ezra 2:36; Neh 7:39; 11:10; 12:6–7, 19, 21; 1 Chr 9:10). While the Jedaiah in v. 10 may not be the same individual as mentioned in other passages, the practice of naming individuals after one of their male ancestors suggests that the figure mentioned in v. 10 may be related to the other Jedaiahs. Mazar concludes that the absence of lineage with the names of Tobijah and Jedaiah indicates that they belonged to such well known families that listing lineages was superfluous.10 Since Mazar’s understanding lacks evidence, it is basically an argument from silence.
Zechariah’s selection of truly renowned individuals to contribute to the restoration effort and to witness the solemn ceremony underscores the political and religious importance of the prophet’s action.11 The involvement of such conspicuous people must have exerted great influence over the community and left a lasting impression.

5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341; see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3r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81), 382–85.
6 One of the Lachish letters also mentions a Tobijah (letter 3, line 19), but nothing more is known of his identity.
7 B. Porten, Archives from Elephantin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117.
8 B. Mazar, “The ‘Tobiads’,” IEJ 7 (1957): 137–41.
9 F. M. Cross, Jr., “The Development of the Jewish Scripts,”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ed. G. E. Wright, reprint ed.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79), 195, n. 75.
10 Mazar, “Tobiads,” 229.
11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34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6–197.

도비야, 여다야, 요시아 이 세사람의 이름의 공통점은 그들의 이름중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야”라는 접미어가 사용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너무 성급하게 이를 일반화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포로기 이후에 백성들 사이에 이러한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표현으로 자신들의 이름에 이러한 고백을 담았다라고 볼 수 있다. 
Three out of four of the personal names listed in v. 10—Tobijah, Jedaiah, and Josiah—contain the theophoric element Yah in their name, an abbreviation for Yahweh. This theophoric component in these proper names suggests a measure of genuine faith in the Lord among the general populace of those returning from Babylon. One must use caution not to attribute too much significance to these theophoric elements when seeking to discern more information about a specific individual, however. While the divine elements indicated faith in the Lord among the community at large, the names do not prove that the individual men themselves evidenced exemplary measures of faith.13 The fact that these individuals returned to the land of promise offers the best indication of their faith in the Lord and their confidence in the covenant that their God had made with their forefathers and with them.
13 Contra M. F. Unger, Commentary on Zechariah (Grand Rapids: Zondervan, 1962), 110–1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8.

모세가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금과 은을 성막 건설을 위하여 받은 것처럼, 스가랴도 이처럼 모세의 역할을 감당해 새로운 성전 건설을 위하여 금과 은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Tollington notes parallels between the return from the Babylonian exile and Israel’s departure from Egypt during the exodus.23 Moses accepted offerings of silver and gold that the Israelites received as plunder from their Egyptian captors for us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Exod 25:1–3; 30:11–16; Num 7). Likewise, Zechariah accepted offering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new temple. In this way, God identifies Zechariah with none other than Moses. Zechariah’s dual roles parallel the multiple roles or offices held by Samuel (1 Sam 9:1–10:16), Zadok (1 Kgs 1:38–40), and Jehoiada (2 Kgs 11:12).24
23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23.
24 Sweeney, Twelve Prophets, 63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9.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야했다. 스바냐는 옛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한 부제사장이었고(왕하 25:18) 동시에 성전 감독 책임을 맡은 제사장이었다.(렘 29:25, 29; 21:1; 37:3) 그렇다면 요시아는 유명한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스바냐는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자였고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었다. 스가랴는 지금 이 두부류의 통합을 주도하며 성전재건을 힘쓰고 있는 것이다. 

11절) 앞서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들에게 은과 금을 받아서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다. 본문의 면류관이 복수로 사용된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두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여호수아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14절에 여호와의 전안에 두었다는 의견도 있고, 구약에 이렇게 복수로 사용된 명사에 단수 동사가 사용된 경우도 있기도 하다. 또한 장엄의 복수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Mitchell, following a long line of critical reinterpretations of Zech 6, concludes that the text originally read “Zerubbabel” where “Joshua” now stands in v. 11.35 This critical reconstruction argues that after Zerubbabel died, his influence waned to such an extent that a zealous scribe replaced his name with “Joshua” in order to enhance the latter’s social standing. Mitchell’s view runs counter to the historical assessment of Zerubbabel’s prominence, not to mention the highly conservative scribal attitudes toward revising the sacred text.
The crowning of Joshua in v. 11 does not represent his investiture as a high priest since he had already been serving in that office.36 Placing a crown upon Joshua conferred honor on him for the pivotal role he played in the inauguration of worship during the restoration.37 While Zech 4:6–10 stresses the heightened role Zerubbabel had in the postexilic community, the crowning of Joshua also emphasized the momentous role the high priest had played in fulfilling the Lord’s promises to his people. Beyond the honor accorded to Joshua, the crowning served as a sign of God’s resolve to fulfill his promise to send a future leader to his people. Hence, Joshua’s crowning prefigured the elevated status of the coming “Branch” who would usher in the Lord’s eschatological kingdom.38

35 Mitchell, Zechariah, 185–86.
36 Floyd, Minor Prophets, 407.
37 Petitjean mentions the possibility that the crowning of Joshua might signal a political break between Joshua and Zerubbabel (Proto-Zacharie, 282–86). The further implication, that the crowning ceremony represents an attempt to mend a rift between the prophetic office represented by Zechariah and the priestly one Joshua fills, proves baseless (see Cohen, Twelve Prophets, 293).
38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68; see W. H. Rose, Zemah and Zerubbabel: Messianic Expectations in the Early Postexilic Period, JSOTSup 30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15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0–201.
또한 원래 성전건축의 임무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것인데(슥 4:8-10) 면류관은 여호수아에게 씌어주고 있다. 

12절)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싹(the Branch)가 누구이냐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가 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스룹바벨을 이야기하고(슥 4:8-10) 나아가 앞선 여호수아라고 보기도 한다(슥 4:14). 또한 장래에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야를 상징한다고도 본다.(사 11:1) / 그런데 본문의 흐름상 스룹바벨이 아닌 여호수아가 순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스룹바벨은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학 2:20-23) 성전이 왕선되기전 역사의 무대에서 갑자기 물러간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할 자로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싹이 날것을 예고하신다. 스룹바벨의 이름의 의미가 ‘바벨론의 순’인것과는 달리 ‘자기 속에서 돋아나는 순’이 언급되는데 이 ‘유다의 싹’은 이후에 나타날 것이기에 그의 대리자로 상징적으로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라는 것이다. 
Verse 12 prophesies that the “Branch” will come and rebuild the temple (cf. 3:8).40 From at least the time of the Jewish Targums, Zechariah’s “Branch” has been interpreted as a messianic appellation, even though the passage initially addresses Zerubbabel. Since 4:9–10 explicitly states that Zerubbabel will begin and complete the temple of the restoration era, the prophet appears to envision a much broader application than Zerubbabel’s labors alone could fulfill.
The temple serves as a place where the Lord meets his people to atone for their sins. Providing the possible background to v. 12, Isaiah associates the ministry of the Lord’s “Branch” with the fruitfulness of the land, survivors of a calamity (probably the exile), and cleansing from sin: “In that day the Branch of the Lord will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land will be the pride and glory of the survivors in Israel.… The Lord wi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women of Zion; he will cleanse the bloodstains from Jerusalem” (Isa 4:2, 4).
Jeremiah 23:5–6 also echoes the Isaianic theme of the Lord’s Branch: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raise up to David a righteous Branch,
a King who will reign wisely
and do what is just and right in the land.
In his days Judah will be saved
and Israel will live in safety.
This is the name by which he will be called:
The Lord Our Righteousness” (cf. 33:15–16).
The various passages from Isaiah and Jeremiah merge both royal and priestly offices into the messianism of the Branch.41 In Zech 3 the Branch’s priestly service receives emphasis. Nonetheless, while giving significant prominence to priestly matters (6:11, 13–15), chap. 6 also underscores the royal responsibilities. Baldwin summarizes the point of the passage: “His [Zechariah’s] hearers had been prepared for the Branch to fulfill priestly and kingly functions and therefore would realize that both Joshua and Zerubbabel contributed to the work of the coming Branch, while neither alone adequately represented him.”42
Consequently, no contemporary of Zechariah could fully satisfy the sweeping prophecies about the Branch’s ministry. On the one hand, the phrase in context does speak of the ministry of Zerubbabel and Joshua. Consequently, it is wrong for Unger to view this text as though it were exclusively messianic, with no application in Zechariah’s time.43 However, in light of the broader messianic application of the Branch concept, it would seem reasonable to claim that the imagery ultimately points to the person of Christ. A typological understanding fits both the immediate and broader canonical contexts well.

40 The NIV rendering, “Here is the man,” should read more literally, “Behold the man” (הִנֵּה־אִישׁ), and Pilate’s similar statement in John 19:5 is an allusion, albeit unwitting.
41 See Rose, Zemah and Zerubbabel; and Rose, “Messianic Expectations in the Early Post-Exilic Period,” TynBul 49 (1998): 373–76.
42 Baldwin, Zechariah, 135. See also Joyce G. Baldwin, “S\emah\ as a Technical Term in the Prophets,” VT 14 (1964): 93–97.
43 Unger, Zechariah, 11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1–202.

13절)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또한 제사장이 그 옆에 서서 함께 평화롭게 의논하며 일할 것이다. 본문은 왕과 제사장이 함께 평화롭게 통치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앞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함께 기름부음 받은 자(4:14)로 왕권과 제사장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야로 연결시키는것이 합당하다. 
- Moreover, v. 13 begins with the emphatic pronoun “he,” indicating that the Branch, not Joshua or Zerubbabel, will ultimately rebuild the temple. The preceding visions lay great emphasis on the role Zerubbabel played in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Verse 13 dramatically begins by pointing to another figure whose significance would surpass even that of Zerubbabel.
Some suggest that this verse, as well as chap. 3, introduces a diarchy into the political situation in ancient Judah.53 Verse 13 appears to address Joshua the high priest, but it also includes royal motifs not associated with the priesthood. To lessen this tension, several commentators suggest that v. 13 speaks to Joshua and Zerubbabel together. This interpretation yields the following:
And he (Zerubbabel) shall build the temple,
and he (Joshua) shall put on splendor,
and he (Zerubbabel) shall sit and rule upon his throne;
and he (Joshua) shall be priest upon his throne;
and a counsel of peace shall be between them.54
This innovative approach attempts to solve a pressing problem in the passage: How can a priest and king both sit on the throne? One must take liberties with the text to defend the notion of a diarchy, a concept that neither biblical nor historical sources support. Further, v. 13 does not give any basis for concluding that both Joshua and Zerubbabel are present, with Zechariah addressing each sequentially in v. 13. While the Old Testament does not merge the offices of priest and king, with the exception of Melchizedek (Gen 14:18–20; Ps 110:4), the coalescence of both becomes a prominent theme in the New Testament, fulfilled in the Messiah, Jesus Christ (Heb 4:14–16; 7; 8:1; cf. Rev 20:4–6).

53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75; Conrad, Zechariah, 126. Tollington adds that the diarchic ruler served a short-term objective, enabling the people to cohere as a community and to ready themselves for a new age when the Branch would take the reins of the Lord’s kingdom. Rose offers compelling arguments against the diarchy view (Zemah and Zerubbabel, 169–70). Rose’s more important arguments include the absence of evidence supporting an equal position of authority for the royal figure and priest, the lack of mention of either Zerubbabel or Joshua in Ezra 6, and the lack of reference to the high priest in the covenant renewal ceremony in Neh 10.
54 P. R. Ackroyd, Zechariah (London: Nelson, 1962), 64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3–204.
 
14절) 면류관은 왕권을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 이 면류관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14절에 등장하는 이름 헬렘, 도비야,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은 10절에 등장하는 이름과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헬렘을 헬대로, 헨을 요시아로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절) 결국 먼데 있는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고 스가랴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임을 알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때 이와같은 회복이 이루어 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먼데 있는 사람들은 바벨론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들도 포함된다. 결국 신명기, 구약에서 말하는 언약의 순종을 통해서 회복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 
The ending of v. 15, “if you diligently obey the Lord your God,” appears to quote Deut 28:1, the influential Deuteronomic chapter outlining the blessings and curses awaiting Israelites who choose either to obey or to disobey the Lord. Using emphatic language, Zechariah evokes the memory of everything Deut 28 represents. The passage also echoes the eschatological theme of Hag 2:7 (see also Mic 4:1–2). Further, the prophet’s words recall the new covenant in Jer 31:33–34 where the people of God obey their Lord from their hearts.
Thus ends Zechariah’s initial prophecies, which began in 1:7, concerning the restoration of worship in the rebuilt temple. Sweeney observes that Zech 6:1–15 “concludes the prophet’s vision reports in 1:7–6:15 by pointing to the crowning of the Branch and the building of the Temple as signs of the ultimate restoration of Zion.”63 For millennia, biblical writers and theologians alike have understood the central role Zion will enjoy as the seat of God’s eschatological reign.

63 Sweeney, Twelve Prophets, 623. See M. J. Boda, “Oil, Crowns and Thrones: Prophet, Priest and King in Zechariah 1:7–6:15,” Journal of Hebrew Scriptures 3 (2001), journal on-line (accessed 29 November 2005; available from http://purl.org/jhs; Internet). Boda discusses the purpose of Zech 1–6, with special attention to the question of Zechariah’s agenda in correcting leadership problems in his day and looking forward to the coming Messiah. Boda views Zech 1–6 as an indictment of the priestly tradition, assuring the readers that the Branch will correct priestly excesse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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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ision of Four Chariots
Again I lifted my eyes and saw, and behold, four chariots came out from between two mountains. And the mountains were mountains of mbronze. The first chariot had nred horses, the second oblack horses, the third pwhite horses, and the fourth chariot dappled horses—all of them strong.1 Then I answered and said to qthe angel who talked with me, “What are these, my lord?” And the angel answered and said to me, r“These are going out to the four winds of heaven, after spresenting themselves before tthe Lord of all the earth. The chariot with the black horses goes toward uthe north country, the white ones go after them, and the dappled ones go toward vthe south country.” When the strong horses came out, they were impatient to go and wpatrol the earth. And he said, “Go, wpatrol the earth.” wSo they patrolled the earth. Then he cried to me, “Behold, those who go toward uthe north country have set my Spirit at rest in uthe north country.”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6:1–8.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은 붉은 말, 검정 말, 흰 말,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이끄는 네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첫번째 환상과 유사하다. 마지막 환상은 첫번째 환상을 상기시키며 전체 환상을 마무리하고 있기에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절) 스가랴가 눈을 들어 두 구리산 사이의 네 병거를 바라본다. 
첫번째 환상이 한 밤중에, 마지막 환상이 새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구리산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구리산인지, 구리빛깔이 나는 산인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새벽녁의 산의 색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어둠이 지나고 이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Many scholars believe that the first vision occurs at dusk and the eighth vision appears to Zechariah at dawn on the same evening. Some even explain the “mountains of bronze” as the color of the mountains when the dawning rays of the sun strike them.439 The suggestion that vision one commenced at dusk and vision eight began at dawn may seem attractive at first glimpse. However, the text does not confirm it.440 While acknowledging these similarities between visions one and eight, numerous important differences occur between the two visions. Among these many differences, the mountain motif represent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distinctives, a point that will receive attention later.441
439 Boda, Zechariah, 319.
440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D. M. G. Stalk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5), 2:287.
441 R. L. Smith, Micah-Malachi, 213. Mitchell comments that emending the word “myrtles” (
הַחֲדַסִּים) in 1:8, 11 to “mountains” (הֶהָרִים) further enhances the symmetry between the visions (Zechariah, 178). No evidence exists to justify such an emendation. The Masoretic Text reads well in its received form.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3.

당시 병거는 이시대의 탱크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대상이다. 
Chariots were the ancient equivalent of tanks, the key symbol of military power. These chariots were pulled by strong horses (v. 3), and there were four of them, the number of completeness. The heavenly army is finally on the mov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8.

2-3절) 첫째 병거는 붉은 말, 둘째 병거는 검은 말, 셋째 병거는 흰 말,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이 이끌었다. 마지막에 건장한 말이 개역개정에서는 네번째 어룽진 말만을 꾸미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병거를 끄는 말이 건장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슥 6:2-3, 새번역)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끌고 있고,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얼룩말들이 끌고 있었다. 말들은 모두 건장하였다.』

4-8절) 스가랴는 천사에게 이것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천사는 온세상의 주앞에 서있던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대답한다. 
- (슥 6:5, 새번역) 『그 천사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의 네 ㉠영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뵙고서, 지금 떠나는 길이다. / ㉠또는 '바람’』
여기서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자연적 현상으로의 바람, 사람의 숨/호흡, 하나님의 영의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네 바람(영)은 하나님의 메신저로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온세상을 향해 가도록 명받았다. 이에 검정 말과 흰 말은 북쪽으로, 어룽진 말은 남쪽으로 향했다. 붉은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동쪽은 아라비아 광야, 서쪽은 지중해 바다가 있는 지역으로 유다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북, 남쪽이 주요 지역이었다. 북쪽은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 남쪽은 이집트가 있었다. 
Judah’s main enemies always came from the north (Babylon, Assyria, Persia) or the south (Egypt), since to the west is the Mediterranean Sea and to the east is the deser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8.

7절의 건장한 말들이 땅에 두루 다니더라는 말은 이 병거들이 역할을 보여준다. 이들의 임무는 첫번째 환상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 (슥 1:10, 개정)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이어 8절은 북쪽으로 나아간 말들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표현한다. 앞서 말한대로 주요 대적들이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 (슥 6:8, 새번역) 『천사가 나를 보고, 소리를 치면서 말하였다. "북쪽 땅으로 나간 말들이 북쪽 땅에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내 마음을 히브리어 ‘루히’이다. 이 단어는 내 영,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시원케하다는 ‘헤니후’로 쉬게하다, 머물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북쪽으로 나아간 병거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여 바벨론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에 노를 발하기 보다는 이 지역에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향시키거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결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감동하기 위해서이다.(슥 2:6-13; 8:7-8,20)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향력(겔 37:1-14)을 뜻한다.(how주석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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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ision of a Woman in a Basket
hThen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came forward and said to me, i“Lift your eyes and see what this is that is going out.” And I said, “What is it?” He said, “This is jthe basket3 that is going out.” And he said, “This is their iniquity4 in all the land.” And behold, the leaden cover was lifted, and there was a woman sitting in the basket! And he said, “This is Wickedness.” And he thrust her back into the basket, and thrust down jthe leaden weight on its opening.
Then I lifted my eyes and saw, and behold, two women coming forward! kThe wind was in their wings. They had wings like the wings of a stork, and they lifted up the basket between earth and heaven. 10 Then I said to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Where are they taking the basket?” 11 He said to me, “To the lland of Shinar, to build a house for it. And when this is prepared, they will set the basket down there on its bas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5:5–11.

일곱번째 비전은 죄악이 제하여지는 것을 상징한다. 
Vision Seven: The Flying Ephah—Wickedness Removed. This vision symbolically describes iniquity’s being removed from the land and taken off to Shina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7.

5-6절) 천사가 나아와 눈을 들어 네게 나아오는 것을 보라고 말한다. 스가랴는 이것이 무엇인지 묻고 천사는 네게 나아오는 것이 곡식을 측량하는 에바(뒤주)라고 말하며 이것이 온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6절 본문에서 말하는 죄악이라는 단어는 마소라 사본에서는 그들의 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The interpreting angel expands his explanation, adding the Hebrew phrase zōʾt ʿênām bĕkol—hāʾāreṣ (NIV “This is the iniquity of the people”).396 However, the Masoretic Text actually reads the Hebrew word ʿênām, which means “their eye,” a problematic word indeed for the sense of the context.397 Little wonder that the versions struggled with the meaning of the word, resulting in variant readings. This difficulty has engendered a variety of suggested solutions.
396 בְּכָל־הָאָרֶנעֵינָמזֹאת.
397
עֵינָם. HALOT, 817–2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5.
(슥 5:5-6, 새번역)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앞으로 나와서, 나에게 고개를 들고서, 가까이 오는 물체를 주의해 보라고 말하였다. [6]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으니, 그는, 가까이 오는 그것이 곡식을 넣는 ㉠뒤주라고 일러주면서,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 ㉠히, '에바’』
에바는 건조한 곡식을 측량하는 부피의 단위로 4.5-10갤런, 15-40리터에 해당되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에바는 하나님 백성의 죄의 분량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모스서에 나오는 것처럼 에바를 사용하여 저울을 속이고 되와 같은 도량형을 속임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암 8:5)
암 8:5, 개정)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암 8:5, 새번역)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 ㉢또는 '새 달' 축제 ㉣히, '에바' ㉤히, '세겔'』

결국 천사가 보여주는 것은 뒤주에 가득 담긴 악이었다. 

7-8절) 이 뒤주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는데 납뚜겅으로 닫혀 있었다. 덮개가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보인다. 천사는 이 여인이 악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여인을 악으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어로 악(라아)이 여성형이기 때문에 악을 의인화 했다는 견해와 악이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행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인으로 묘사했다는 견해, 그리고 구약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악한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견해가 있다. 본문에서 악이라고 할때 정관사가 사용되는데 특정한 악으로, 하와가 유혹을 받아 범한 그 악과 동일한 악이다. 즉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다른 사람을 속임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을 범한 것이다. 본문의 에바의 덮개가 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용기안에 아주 안전하게 보관된다는 의미이다. 
The angel elected not to identify the one who lifted the lid on the basket. Neither did Zechariah clarify the significance that the lid was made of lead.406 The only observation one can make with reasonable confidence is that such a heavy lid indicates that the contents of the basket must remain securely within the basket.407 Sin and its resulting uncleanness must be separated from God’s people.
406 Early Christian interpreters such as Gregory of Nyssa, Ambrose, and Origen identified the leaden lid with sin. See Gregory of Nyssa, De Virginitate, 18.395 (Gregorii Nysseni Opera 8/1:322); Ambrose, Epistolarum, 2.758.D (PL 16:921); and Origen, Homélies sur l’Exode, 6.4 (SC 321:180).
407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29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6–177.
The angel explained that this woman symbolizes wickedness (hārišʿāh).408 The scene is reminiscent of Rev 17:3–5, which pictures an evil woman with “Babylon the Great” written on her forehead. Students of chap. 5 have long asked why the passage personifies wickedness with a woman. The question becomes more acute today in light of heightened gender-related issues. The silence of chap. 5 has not diminished the number of solutions offered.
Jeremias suggests that Zechariah’s choice of a woman to epitomize wickedness relates to the role of the Babylonian goddess Inanna, the “Queen of Heaven.”409 This view sees the symbolism of the woman in the seventh vision as a polemic against Mesopotamian idolatry, interpreting the woman as the Babylonian deity whom God will forcibly remove from Judah and return to Shinar. Alternatively, Mason attempts to relate the woman with the unclean menstruating woman in Ezek 36:17, although Zech 5 fails to provide any literary or linguistic support for this conclusion.410 Another inadequate notion maintains that ever since the fall of man and woman (Gen 3) the woman bore responsibility for the introduction of evil.411 This view, however, does not do justice to the high view in which the Old Testament holds women412 or of the responsibility all bear for sinning against the Lord.413

408 הָרִשְׁעָה. HALOT, 1295–96.
409 Sweeney, Twelve Prophets, 620–23; ABD, 5:586–88.
410 R. Mason,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58.
411 Petersen, Zechariah 1–8, 257–58.
412 Love contends that the subjugation of the woman by imprisoning her and forcibly returning her to the basket amounts to little more than misogyny and violence against women (The Evasive Text, 209–10). However, Love’s reader-response hermeneutic misrepresents both the significance of the seventh vision and the Old Testament’s view of women.
413 Nor does it accord with Paul’s theology of Adam’s sin in Rom 5:14 and 1 Cor 15:2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7.

뒤주가 열리자 마자 뒤주 안의 여인이 탈출을 시도하고 천사는 그 여인을 뒤주안으로 몰아넣었다.
As soon as the lid of the basket rose, the woman hiding within attempted to escape. Dramatically, the angel forced the woman back into the basket giving her no additional opportunity to escape and spread her evil about the land.420 The verb wayyašlēk (NIV “he pushed”) suggests that the woman struggled with the angel, even though he prevailed.421 The woman appears so threatening in this vision that she must remain in strict confinement under the powerful guard of the Lord’s angels.
420 Barker, “Zechariah,” 634.
421
וַיַּשְׁלֵךְ. HALOT, 1527–29. The verb often has forceful or violent connotation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9.

9-11절)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뒤주를 천지사이에 들고 있다가 이를 시날땅(바벨론)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처소(성전)을 지어 이동시킨다. 이 두여인에 대해서 헬라와 로마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에바를 옮긴 땅이 바벨론의 옛 이름인 시날땅, 앗수르인은 이 땅을 수메르라고 불렀다. 이 당은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의 왕국, 바벨탑을 쌓았던 곳이기도하다.(창 10:10-11) 또한 이스라엘이 유배갔던 곳이며 반역의 땅의 대명사였다.(계 17:3-5) 귀신과 영들이 거하는 처소이기도 했다.(계 18:2) 결국 에바가 이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악이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에서 제거하여 이스라엘을 정결케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 스가랴는 이스라엘에서 악이 제거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 The wind in their wings (9) could equally be translated ‘the spirit …’ (cf. 6:5). This would indicate that the cleansing was the work of God’s Spirit. The Hebrew for stork is from the same root as ‘stead-fast love’, and this may be why these particular birds feature here: the cleansing is a sign of grace.
 G. Michael Butterworth, “Zechariah,” in New Bible Commentary: 21st Century Edition, ed. D. A. Carson et al., 4th ed.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872.
The two flying women took the basket to Babylon, although the Hebrew text designates the country as “Shinar,” an ancient name for Babylon (Gen 10:10). Zechariah’s use of the name Shinar evokes the memory of the tower of Babel episode that was also set in the plain of Shinar (Gen 11:1–9). The tower of Babel story epitomizes the hubris of mankind and its desire to worship itself, not the Creator of heaven and earth. Further, those who recently returned to Jerusalem had seen great evil in Babylon. Now, the former exiles saw some of the evil that they brought back with them to Judah purged from their land and returned to Babylon. The ignoble Babylon would be an appropriate place to send the basket full of wickedness because of its association with evil and its indelible identification as the place where God sent his sinful people into exile.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0.

The transport of the woman in the basket to Babylon, symbolically removing Israel’s sin from the land, bears striking parallels to the Azazel rite in Lev 16. Better known as the “scapegoat,” the Azazel also bore the nation’s impurities, figuratively taking them outside the camp.
From Genesis through Revelation, Babylon represented the epitome of a high-handed, rebellious people (Gen 11:1–9). The Old Testament often prophesied against Babylon. For instance, Isaiah’s oracle against her represents one of the more prominent curses against ancient Shinar (see Isa 13:1–14:23). Babylon opposed God consistently, just as she regularly opposed the Lord’s people with equal fervor. This opposition comes to its biblical and eschatological culmination in the book of Revelation, where John pronounces this curse against her: “Fallen! Fallen is Babylon the Great, which made all the nations drink the maddening wine of her adulteries” (Rev 14:8). Revelation 17:5 continues the thought: “mystery—babylon the great—the mother of prostitutes—and of the abominations of the earth.” Finally, John foretells Babylon’s ultimate doom: “Woe! Woe, O great city, O Babylon, city of power! In one hour your doom has come!” (18:1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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