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리몬은 설교자들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분으로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감독이자 듀크대학 신학부 교수였다.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여러 저명한 기독교 저자들의 책에 그의 글이나 설교가 인용된 내용들을 보면서 원저를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죠이북스에서 윌리엄 윌리몬의 책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 책을 받아들었다. 이 책의 부제는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이다. 저자는 미국의 반이민법이 강화되던 시기에 이를 반대하는 이들을 지지하면서 이 책을 썼다. 현대의 정치인들은 계층간의 갈등을 조장하거나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표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자가 된 경험들이 부족하다. 나 자신도 나의 성별이나 인종, 종교, 출신 배경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나의 어떤 행동이나 언행이 타자를 혐오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강조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글로벌화 되어가면서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노동자, 국제 결혼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과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나의 삶 가까이 타자들이 성큼 다가왔고 때로 나도 누군가의 타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주 '젠더 폭력에 맞서는 주변인 접근 전략'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나는 성인 남성으로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의를 통해서 약간의 이해가 넓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던, 아니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의 '타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타자의 자리에 서보지 않았기에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했고 도리어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미국 교회의 상황과 한국 교회의 상황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국 교회가 미국 교회를 시차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교회도 의도적으로 '타자'에 대한 감수성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추천한다.
책 속의 구절들
하나님은 우리가 타자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형제 자매로 보내신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의 됨됨이를 시험하실 뿐 아니라, 제자도의 모험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 사역을 통해, 우리는 자기 힘에 의존할 때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13)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타자'이자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주위의 '타자'를 사랑할 때, 이는 실로 기독교적이고 반문화적이며 거의 기적과도 같은 사랑이 된다.(19)
우리는 환대를 명령받았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런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24)
참된 화복은 힘있는 주류층이 자신들의 긍정적인 자아상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 특권을 조금 나눠 준다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36)
타자와의 대화는 늘 위험이 따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며, 우리가 결코 원치 않던 말들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42)
타자 혐오증을 뜻하는 '제노포비아'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우리 뇌의 변연계는 위험 앞에서 본능적으로 강렬한 반응을 유발하는 일련의 '비상 신호'들을 통해 활성화된다.... 어떤 위협이 닥쳐올 때 우리 몸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경계 내부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강한 확신을 품고 어떤 판단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 놓인다. 이 때 우리는 외부의 위협 앞에서 더방어적이고 덜 사려 깊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깊은 불안감에 빠져 일종의 비상 체제에 돌입하며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51-52)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올바른 일을 행할 때 생겨난다.(70)
건강한 교회는 쉽게 두려움에 빠지는 우리 자신의 성향을 적절히 경계하게끔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릇된 일들을 그릇된 방식으로 두려워하던 데서 벗어나 합당한 일들에 관해 올바른 두려움을 품게 된다.(72)
우리의 참된 문제는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시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데 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한다.(75)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 타자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로운 동시에 죄악 되며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존재로 여기는 것 뿐이다.(81)
우리가 타자에게 다가가서 두 팔을 벌리는 것은 그를 우리의 벗이 될만한 존재로 재정의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그분의 벗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83)
'우리는 당신을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안에 거하기 전까지는 우리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누군가를 포옹할 때 우리는 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렸다가 꼭 끌어안은 뒤에 다시 놓아주게 된다.(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옹) 타자를 포옹하며 환대한 뒤 다시금 그의 인격을 인정하고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포옹은 타자를 자신의 정체성 속으로 흡수하거나 그의 타자 됨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그들 자신의 길로 행하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87)
결혼은 '타자를 영접하기 위한 평생의 훈련', 내 옆에 함께 거하는 '타자'를 평생에 걸쳐 날마다 포용하고 환대할 기회를 억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적과의 동침'이 아니다. 아내는 물론 나의 일부가 아니지만 나보다도 나를 잘 안다. 아내는 내 삶의 영역을 세심하게 넓혀주며 내 안에서 최선의 모습들을 이끌어 낸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인이 한몸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경이로운 일이다.(94)
타자를 대면하며 포용하라는 결단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신이다. 사랑은 실제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며 이는 그저 올바른 태도를 품거나 유익한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듯이 '막연한 꿈속의 사랑'보다는 행동하는 사랑이 훨씬 중요하다.(105)
우리로 타자를 행해 나아가게 이끄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쓰시는 주된 방편중 하나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던 이기적인 소비자의 태도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너그럽게 베푸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때 우리는 별 요구사항이 없는 신들을 만들어내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섬기게 만들려는 인간적인 성향(우상숭배)에서 해방된다.(111)
우리는 그를 '타자'로 여길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타자'는 미국의 원수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원수가 아니시다. 설령 그 '타자'가 우리와 하나님을 미워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114)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로 타자를 향한 환대에 동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교회의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교회의 경계를 느슨하게 유지하는 일은 우리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역사적인 소명을 제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사도행전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을 기독교 선교의 핵심으로 여긴다.(123)
미로슬라브 볼프는 '의심의 해석학'에서 '환대의 해석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1)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그에게서 무언가 장점이 될만한 일들을 찾아보려 한다. 2) 열린 태도로 타인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평가한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함을 알기 때문이다.(134)
요즈음 청년들은 우리 교회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낡고 진부한 사고방식에 빠져있으며 인종차별적일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폭력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이 지난밤에 행한 일을 차갑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곳이라고 여기지요. 교회에 나오라고 원면할 때 이는 그들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우리에게 내어놓으라는 뜻이 됩니다. 이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환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타자'가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타자'에 대한 적개심이 애국심으로 칭송받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낯선 이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 되었다.(136)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줄 지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타자'. 우리가 몹시 두려워하며 꺼리지만 그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 내줄 그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154)
이 낯선 세상에서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버린(혹은 '타자'에 대한 김은 두려움에 갇힌) 우리에게도 여전히 참된 소망이 남아 있다. 그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와 과감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만큼 강하다는 데서 온다.
요한1서 4:18–21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한솔 교회에서 10여년간 자신의 가족만을 청중으로 인내하며 꾸준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목사님의 이야기는 같은 목회자로서 많은 생각과 감정을 교차하게 한다.
나도 현재 선교단체 간사로, 더기쁨교회 담임목사로, 전주대학교 강사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매순간 내 안에서 꿈틀대는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을 추스리기는 쉽지 않음을 알기에 저자의 삶의 고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영혼이 주께로 나아오는 것이 천하가 나아오는 것으로 여기며 주어진 자리에 순종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세워나가는 그 일을 나도 인내하며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저자는 응급실 의사로 본의 아니게 주일 응급실 고정 근무를 맡게 되면서 토요일을 본인의 안식일로 갖는다. 그때 처음 성경을 접하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이후 성경을 연구하면서 안식이 가지는 성경적인 의미를 탐구했고, 자신의 의사로서의 경험과 성경의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안식의 평화”이다. 본 책은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의 중간 중간 안식과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가만히” 멈춰서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해준다. 나 개인의,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안식의 날을 정해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안식일과 같은 기반 위에 있다."
"안식일은 행위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을 수있는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날이다."
"안식기, 피정, 순례는 연중무휴 세계와 부조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우리는 삶의 방정식 속에 그분을 포함시킨다. 그분에게 해결의 일부를 맡기는 것이다."
"안식의 쉼이란 노동을 중단하는 것 뿐 아니라 성취와 이익에 대한 욕구, 효율성의 현대적 기준에 따르는 근심과 불안, 자신이 하나님인 양 삶을 통제하려는 노력, 강한 소유욕과 문화화,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삶에서 흘러나오는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중단하는 것이다.(마르바 던)"
"안식일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활동과 충분히 거리를 두는 정돈된 시간과 공간이다.(유진 피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