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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와 적성 강의평가 2023년 2학기 (박기모 교수)

-수강인원 35명중 35명 응답 

 

 

 

 

 

 

 

 

 

16.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면서 좋았던 점, 깨달은 점, 감사했던 점 혹은 개선되어야할 점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야간수업때 수업은 사캠으로 듣고 대면으로는 모여서 토론만햇으면좋겟다

 

평소에도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지, 나는 어떤    가장 나답고 행복한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정의할  있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곤 하는데, 수업마다 다른  누구가 아닌  대해서 떠올려 보고, 제가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있어서 좋았습니다. 많은 수업  제가 가장 좋았던 내용은 침팬지 소년의 이야기였는데요. 각각의 사람들이 지닌 차별화된 특별한 가치들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빛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제게  깨달음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혼자 있을 때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친구라는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더라도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제가  많이 다르다는  느낍니다.  번은, 어느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저도 모르게 제가 그토록 바랐지만 잘되지 않았던 이상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요. 그저  사람과 함께 있었을 뿐인데 저도 몰랐던 저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해주는 내용이 그토록 인상 깊게 남았나 봅니다.

아직은  삶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시간도 언젠간 다시 돌아올  없는 추억들로 회상할 날이  것이란  알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하나하나 곱씹어 가며 모든   기억하다 보면 삶의 의미를 만들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별히 종교를 지니지 않았더라도, 종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닌, 그냥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배울  있는 시간이었던  같아  좋았습니다.

좋은 직업을 갖는 , 참된 사회복지사를 위해 살아가는  또한 매우 의미 있고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어릴 적부터 꾸던 꿈은 특정한 직업 아니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저의  다른 목표이자 꿈이었는데요. 아직도 인상 깊게 떠오르는 강의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겪게  인생 속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을 준비해야 한단 내용도  인상 깊었어요. 결혼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저의 가치관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준  같아 유독 좋았던  같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식이 생겼다.

 

기독교적 바탕을 많이 알게 

 

교수님  학기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강의중 노래를 틀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고 소그룹 토론을 통해 서로 교류가 있는 수업을 만들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없음

 

기독교에대해 알게되었다.

 

조별수업도 재미있었고 마냥 성경에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작설과 미세조정도 의미있게 봤습니다! 사랑에대해 성경에 대해 많이   있어 좋았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기준을 맞춰 강의 내용과 수업 방식을 고려 해주신 부분에 있어  섬세했던 강의 같아서 편하게 강의를 들을  있었고 개선  점은 없습니다!

 

타학과 학생들과 토론할  있어서 좋았다

 

기독교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제가 나가야  방향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부분이 저를 가장 성장하게 도와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에게 있어서  수업시간은 지친 일상 속에서 바쁘게 사느라 놓친 것이 있다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졌을 때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의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있었으며, 현실적인 세상의 모습과 타락해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속에서 내가 지켜야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너무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시간에는 수업 내용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해결해야 하고 직면해야 하는 문제  대해 파고들고,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있어서 그런 과정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좋았습니다.  수업시간마다 깨달은 점을 적으며 그날 배운 내용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시선을 느낄  있었으며 하루하루 지날수록 성장해가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있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고 세상에서 접할  있는 다양한 지식과 책과 영상 등의 매체를 통해 학생들에게 건강한 매체를 소개하고, 세상 속에서 거부감없이 접할수 있는 지혜로운 명언과 섬김을 하며 살았던 이들에 대해 알아가며 섬김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 또한 섬기는 삶의 아름다움, 그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으며  모든 과정을 이끄셨음에 대해 깊게 알고 삶으로 느낄  있어서 너무나 뜻깊고 감사한 시간이였습니다.

 

이번 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볼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진  같아서 좋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을 평소에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서 서로의 의견을 들을  있는 자리는 살면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각도 우물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서 서로의 의견도 들어보고  의견이 나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지,  다른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있었습니다. 이번 수업을 하면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다양한 의견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볼  있어서 좋았고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과  마음들을 다양하게 들을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교수님이 굉장히 이해를  수있도록 쉽게 알려주셔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처음 기독교윤리와적성이라는 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채플도 있는데  굳이 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치우쳐진 사상이 아니라 여러 영상자료나 과학에 관한 내용, 평소 많이 들어봤지만 성경에서 나온 말인지도 몰랐던 것들 등을 배우며 재밌기도 했고 지루하지 않은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엇는데 이번 수업을 듣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학생들도 생기게   같아 감사하다,

 

팀별 활동을 하면서 팀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며 사람마다 느끼는  다르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가장 많이 깨달았던  같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목사님께 기도 받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팀원의 이야기를 듣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봉사, 배려, 존중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알아가서 좋았고 조원들하고 여러 이야기를 할수있는시간이라 좋았습니다

 

이번 "기독교 윤리와 적성" 통해서 이제부터 제가 나아가야  인생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는 시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듣고 나서 기독교에 대한  보다는 인생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간이였습니다

 

수업을 들으며 기존에 알던 기독교에 대한 배경과 지식을 강화할  있었다. 그리고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의 폭을 넓힐  있었다.

 

내용이 좋았다

 

나는 예전에 기독교였음에도 기독교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성격에 대해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가 되었다. 그래서  수업이 나에게는 뜻깊었고, 기억에 남을  같다.

 

자신에대한 생각을 하는시간이 많아졌고 깊이있는 답변을 찾게 된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일깨워주는 교수님의 강의가 적절하고 좋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있는 고민들에 대해서 다른사람들과 토의하면서 대화 함으로써 사람마다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있었습니다.

 

교양 필수 과목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어도  들어야 했던 강의 였기에 지루할  같았고  기대가 없는 강의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매주 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심도 없는 기독교에 대한 수업이라 생각하였지만 수업의 내용은 신학적인 내용 뿐만이 아닌 우리의 실생활  밀접한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자세, 인품 등을 한단계 성장   있게 되었던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신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와 수업 시간 동안만이라도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소그룹 토론을 통해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조원들의 생각들까지 들을  있어서 다양한 관점에서의 깨달음을 얻을  있어서 좋았습니다.  수업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해 이해 시키는 강의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잊고 지낸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미덕을 배울  있었던  같습니다.

 

어릴  교회를 다녔을 적엔 성경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으면, 섬기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말이 어린 나에겐 성경이 무섭게 느껴지면서 과학적으로 믿을게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이가 조금  뒤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반감이 세게 들어 성경을 아예 믿지 않고 교회를 싫어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과학적으로 궁금했던 성경의 이야기들과 금지하는 것들, 성경을 통한 긍정적인 효과와 여러 사례들을 보며 성경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화된  같다.  조별 토론 시간에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하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을 깊게 들여다보고 되돌아   있어서 정말 좋았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고민해볼  있었던 시간이 좋았던  같다.

 

기독교에 관해 알려주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본래 무교에 무신론자였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멍청하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창피한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이름 아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중에 하나가 봉사인데, 금전 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려고 한다. 나눌수록 기쁨이 배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가 1퍼센트의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고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평소에  또한 봉사를 했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 다소 이기적인 봉사를 하였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그러한 생각을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는 내가 부끄러워 졌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한 그러한 철학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수업을 수강하는 것에 있어서 어디서  것인지 모르겠는 거리감과 회의감이 들어 저학년 때부터 수강하는 것을 미뤄온 강의였다. 졸업을 위해서는  수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수강 신청을 진행하였다. 시간표를 짜고 기독교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수업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수업을 듣고   개강 전까지 들었던 감정들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종교적인 활동을  강요하는 거지?라는 생각은 성경에 담긴 교훈이나 깨달음을 전파함으로써 좋은 감정과 건강한 생각을   있는 거름을  기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성경에 담긴 이야기들이나 성경 제작 과정을 자세하게 알게 됨으로써 종교적인 활동에 대한 이해가 생겨났다.

추가적으로 봉사나 남을 위한 활동에 대한 영상, 인생의 교훈을 얻을  있는 사례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다는 점을 포함해서 3학년 2학기 겨울에 맞이한 매주 수요일 저녁 강의 시간이 따뜻한 수업 시간이 되고 수업이 기대되는 학기를 보낸  같아 만족스럽다.

 

부족한점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기독교 수업을 통해 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고, 20살까지 다니다가 떠났던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며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되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교회에 대해 다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하여 교회에 나아가 나눔과 섬김으로 이전과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깨닮음을 주는 수업이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데 그들을 이해라  있었던 시간이어서 좋았다. 기독교와 성경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않고 있기에 이해가  되었지만 존중의 의미로 그래?하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친구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있다는 점이 좋다.

 

 

17.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박기모 교수에게 하고 싶은 질문 혹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딱히없습니다.

 

 수업마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많이 배려해 주신다는  느꼈습니다. 부득이하게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을 경우, 동영상 강의 수강 후에 과제를 제출하면 결석이 아닌, 지각으로 처리해 주신 것도 저희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주차마다 워크북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 아닌, 크게 기한을 정해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과제를 제출하지 못한 학생들이 뒤늦게라도 과제를 제출할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도 교수님께서 저희를 위해 하신 섬세한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강의도 강의이지만, 이론 수업이 끝난 , 팀원들과 함께 나눔 가졌던  시간이 너무 인상 깊은데요. 특히,  팀원의 대표가 나서서 전체를 대상으로 나눔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용에 경청하며 반응해 주시던 교수님이 너무나 인상 깊습니다. 매번 수업 때마다 계속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열심히 호응과 반응해 주시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열심히 반응해 주시니 정말 얘기할 맛이 났어요. 사회복지 면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술  하나가 적극적으로 경청하기인데요. 그것이  이리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교수님을 보며    깨달았던  같습니다. 이번 학기 동안  깊은 강의를 선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은 항상 수업에 최선을  하시고 열정적이셨지만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교수님 수업 열심히  주셔서 감사하고 저를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  교수님이 계서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강의 너무  들었고 서울  올라간다면 교수님이 계신 교회도  한번 나가보고 싶습니다.  학기동안 감사했습니다!

 

없음

 

끝가지 열심히 수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재밌는 수업 감사합니다! 야간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알차고 재밌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당일 안으로  거리를 왔다 가셨던  모습에서 저는 대단하다고 느꼈고  열정을 너무  받고 싶었고 항상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복지학과 22학번 조민경입니다. 처음 기독교 수업을 들을 때에 기독교적 관점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전주대가 기독교 학교이지만 비종교인과 비기독교인도 많기에 어떻게 거부감 없이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실까?’ 대한 기대감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같습니다. 매주 수업이 끝나고 조별토론을   저와 조장님 제외하고는 비종교인 분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수업 초창기 때는 비종교인분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고 하였으나 나눔과 섬김의 , 배려를 실천하고 사랑을 전하는 삶에 대해 배우며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의 이미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며 긍정적으로 변화해  조원을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에게 너무나도 감사하였습니다. 함께 조별토론을 하며 내가 아는 하나님을 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였고, 조원들  이전에 교회에 다니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는 조원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라도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식이 긍정적인 인식으로 변화하여 다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마음이 생기길 바란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조별 토론 시작 전에는 이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인 시선에서 조금  나아지고,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을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로 이끄실 줄을 믿는다는 기도를 조원들을 위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동안 늦은 시간  지역까지 오셔서 강의 해주시느라 정말 감사했습니다. 수업 중간중간 영상도 많이 넣어주셔서 지루하지 않게 수업을 들을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업내용 전부 유익하고 다른 과목과 다르게 공부라는 개념보다 사람을 배운다 라는 내용이 너무 좋았습니다.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학기동안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교회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수업 전에는 혐오감과 불쾌감이 있었다면  수업 이후에는 저와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에 이로운 부분이 있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무언가를 싫어하더라도 최소한 싫어하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느꼈습니다.  수업이 저에게는 노력하는 과정이었고  과정 속에서 교회를 싫어하는  아닌 교회 안에서 모순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싫어하고 있었다는  알게 되었습니다.

 

2학기 기독교 윤리와 적성 시간동안 수업으류진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인생에 대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학기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청년, 대학생의 이야기에 관심 기울여주시고 저마다의 의견에 궁금한 점을 표해주셔서 진심으로 소통하는 강의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모습에 기독교의 참된 포옹하는 마음을 배울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기독교에 대해 새로 알게 되었고,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삶을 살면서  수업을 잊을  없을  같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시 한번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의가 의외로 재밌었고 내용이 너무 알찼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수업을 통해 좋은 기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교수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비종교인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거부감없이  들을  있었습니다.

 

한학기 동안 열정을 다해 강의해주시고  길을 달려오시는 교수님을 생각하며 수업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던  같습니다. 모든 학생을 배려해주시는 모습과 솔직하고 담백하게 기독교에 대해 알려주신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에 수업 들을  내가 성경을 믿지 않는데 집중하고  들을  있을까 싶었는데 교수님의 수업 내용이 정말 유익했고 얻어 가는 것이 많은 수업인  같아  수업을 수강하길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수업을  듣는다면 교수님 수업 듣고 싶습니다. 좋은 수업 감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좋은 강의였지만 사이버캠퍼스에 과제를 제출하는 것도 좋았지만 워크북으로 진행했으면  좋았을  같다.

 

수업 재밌었습니다!

 

어찌 보면 무교인 사람들이 다소 꺼려할 종교라는 주제이지만 매끄럽고 종교에 대한 흥미를 가질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단지 학점을 챙겨가는 수업이 아닌 철학과 봉사 정신을 배울  있는 강의었습니다. 다음에도 기독교 수업을 들을  있으면 무조건 들을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 원래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와 교회도 가보고 대화를 많이 하게   같습니다.  강의는 저에게 철학과 봉사 정신을 알려주어 어찌 보면 인생의 길잡이와 같은 강의었습니다. 다시   감사드리고  학기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복음 전파 활동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고, 교수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 전파를 경험하였는데 교수님 덕분에 반감이 들지 않은 활동을 경험한  같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선의 강의와  강의를 위해 아침부터 서울에서 여기까지  주시며 강의를 준비하시고 전달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생겨났습니다. 조별 활동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참여하였지만, 유독 저희 (1) 조용했던  같아서 다음에 조를 구성할 때에는 다양한 성격을 섞어서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좋은 경험과 좋은 말을 많이 듣게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학기 동안 강의를 진행해 주시고 복음을 전파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수업  들었습니다!

 

 학기동안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짦을 시간이였지만 교수님의 수업으로 교회에 기능에 대해 알아가고 기독교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학기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강잉기에 중간 쉬는 시간에 출석 1, 끝나고 1 체크하면 좋을  같아요

 

 

2023년 2학기 기독교윤리와적성 강의평가(박기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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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뉴스를 고통의 포르노로 소비하며 자신이 처한 안전한 자리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평소에 보지 않았던 곳으로 눈길을 돌리길 바라며(p.122)

 

이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독서모임에서 '황계찬 목사'가 정리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 저자 : 김인정(경계를 넘나드는 저널리스트)

  -前 광주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現 프리랜서 기자(미국)

 

▣ 저자가 목격한 고통

·이태원 참사 ·기후 위기의 불공평함 ·서울과 비非서울 ·서울 뉴스와 지역뉴스 사이의 권력 관계
·산업재해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 운동 ·가난한 사람의 기부
·환경미화원 ·젠더 갈등 ·홍콩 시위 ·미국 내 아시아계 증오 범죄
·텐더로인의 마약거리

 

 

 

prologue   구경하는 인간(Homo spectators)

 

 

-세계 3대 구경 : 1.                      2.                     3.                    

-걸프 전쟁

-911 테러

-쌍용자동차 사태

-세월호 참사

-10.29 참사  

 

 

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목격(目擊)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求景)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p.24-25). 

카메라가 한 대씩 탑재된 스마트폰과 이미지 전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를 발판 삼아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사람을 향하여 고통의 중개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중개하는 일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붙는다. 전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할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는 딜레마(P29-30).

 

구경과 대면 역시 현실에선 정확하게 갈라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서 일어난다. 흥미 때문에 모여든 군중의 수가 역설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격자가 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 구경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p.30).

 

오늘날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은 범람하는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사고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p31).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기도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p.34-35).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p.37).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p.49).

 

 

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된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우리는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p.74).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궂은 날씨의 스펙터클이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를 꽤 이상하게 오염시키거나, 비틀어버릴 때가 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여지고, 재난 현장은 대상화되어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한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반지하 침수 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의 사진이 고통을 굽어살피는 지도자의 이미지인 양 홍보자료로 유포된다(p.79-80).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Jeff Goodell)은, 폭염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도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p.89).

 

우리는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지구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끔 잊는다(p.90).

 

침묵이야말로 산업재해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이다. 위급한 상황에도 사고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119 신고를 미루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입을 닫으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산업재해는 주로 인재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지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안전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는, 뻔한 패턴이다. 산업재해는 이미 입력되어 있는 설계 오류다(p.91-92).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p.94).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p.96).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숨진 김 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석탄 이송 컨베이어 밸트에 끼여 숨진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p.100).

 

5.18이 국가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서 인정받고도 북한 특수군이 광주 시민인척하며 저지른 일이라느니, 폭동이라느니 하는 끈질길 거짓말에 수십 년간 시달리는 이유다. 문제는 “5.18은 폭동”이며 “북한 소행”이라는 가짜 뉴스와 역사 왜곡이, 전라도에 대한 오랜 지역 차별과 맞물려 새로운 인터넷 ‘밈’이 된 현상이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오는 즐거운 놀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폭력적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사이트, 이른바 일베에 게재됐던 ‘홍어 택배’ 게시글이었다. 일베에는 이런 글 외에도 신군부의 논리를 조악하게 이식받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짜 뉴스, 희생자와 유공자에 대한 혐오가 넘쳐났다(p.107).

 

혐오가 뉴스가 되는 현상은 인터넷의 관심 끌기 문화와 결합해 주체할 수 없이 증폭했다. 이슈가 되니까 원래 있던 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p.108).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p.120-121).

 

이게 일종의 포르노처럼 소비되어 안방의 시청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위무하는 데,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계층 안에 더욱 깊숙하고 안온하게 머무르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서로를 돌아보기 힘든 팍팍한 사회 안에서, 억지로라도 더 약한 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돕는 게 뉴스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뉴스의 주제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적당한 ‘예시’가 되어 인터뷰를 요구받는 것 역시, 약자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 아닌가 싶기도 했다(p.122-123).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곳에서 쉴 권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의 휴식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쉬는 모습을 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취재 끝 무렵에야 깨달은 것이다.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 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p.124).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p.136).

 

 

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p.140).

 

서구 언론이 우크라이나전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건 편견을 노출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다분히 의도적이며, 여러 맥락이 있다. 전쟁터는 폭력과 죽음과 비극이 도처에 널려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전쟁 보도는 인권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이라도 간단히 믿어지기도 하지만 개별의 보도와 언론사들의 관점을 살피면 그 안에서 부글거리는 이해관계의 날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전쟁터에 만연한 참상의 증언을 주워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는 숱한 관점과 의도와 무의식에 스민 계산이 개입되곤 한다(p.144). 

‘우리’와 닮은 것들은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간단히 반대쪽으로 밀어내는 이런 발언은 거의 당연하다 싶게 나빠 보인다. 인권에 대해 말하며 편견과 배타주의를 끄집어 쓰는 당혹스러운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p.145).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Paul Bloom)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페이스북을 만든 메타 최고 경영자 마크 저커버스(Mark Zuckerberg)는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당장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더 큰 관심사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p.148).

 

더구나 개인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를 주축으로 뉴스의 소비가 극도로 개인화되고 에코 체임버(echo chamber)효과(폐쇄된 환경에서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하며 기존의 신념을 증폭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에 갇히게 된 시대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와닿지 않는 뉴스는 점차 존재하지 않는 뉴스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에게 ‘신경 쓰이는’ 뉴스만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p.148).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p.155).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로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쏠리던 시기인데다 팬데믹과도 연관된 이슈라는 데 힘입어 주류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의 인종차별 의제가 전례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p.158).

 

알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고통받는 몸》에서 “때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p.167).

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고통과 상실을 겪어낸 한 사람이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같은 이름의 다른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슬픔과 우울, 기억이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쓰려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적인 애도를 겪어내는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p.212). 

 

그렇다면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하며 뉴스를 전할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울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보고 들어줄 가능성. 대개 자신의 일로 꽉 차 있을 머리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소식을 끼워 넣고 염려해 줄 가능성. 다 보고 난 뒤에도 기억해 줄 가능성.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가능성. 나아가 뒷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가능성. 줄여 말하면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p.236).

 

뉴스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만들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없이 순진한 희망에 기대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줄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이 약간 변할 수도 있다는 천연덕스러운 믿음, 이걸 믿는 일은 정말 가능한가?(p.237)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머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p.237).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p.237-238).

 

한국사회를 취재할 때는 자주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나? 나는 과연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이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누굴까? 이 고통을 이야기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중산층 기자들이 ‘사회적 약지’를 대변한다며 쪽방촌에 들이닥치는 풍경이 얼마나 침략적인지 계속해서 묻게 했다. 이민을 와서 당장 생계를 위해 스파에 취직해야 했던 여성들보다 훨씬 안전한 지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기만 아닐까? 우리는 인종과 언어, 계급을 모두 뛰어넘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p.248-249).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p.253).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도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게끔 한다(p.259).

 

애도는 이때 정치로 흐른다. 공적 애도 안에서 자주 가치를 다투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힘겹게 겨루기를 펼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유하고 고쳐나가려는 시도 안에는 성실한 슬픔이 깔려있다. 이럴 때 사회적 애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며 사적인 영역에만 밀어 넣으려 하는 건, 개인의 애도 과정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사적이라는 건 보이지 않도록 감춘다는 것과도 비슷한 질감의 단어다. ‘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는 국가나 기업이 다루기에 까다로운, 감정을 가진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애도의 사적인 속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위로 이어지는 공적 애도의 진정성을 두고 매번 시비가 붙는 건, 사회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도 보인다. 

공적 애도의 상황에서 이야기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죽은 이를 숫자로 남겨두지 말고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할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259-260).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p.262). 

 

epilogue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릴 뿐이다.”

 

 

■ 질문-1 : 목회자와 기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질문-2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목사로 살고 있는가?

 

■ 질문-3 : 우리 시대의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질문-4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구경꾼인가? 목격자인가? 증인인가?

 

■ 질문-5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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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길을 묻다(최종원, 비아토르)

 

 
 
수도원이 개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함축하는 반면, 수도회는 역동성과 운동성을 포괄한다고 보기에 이 책에서는 ‘수도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부. 탄생
1장. 서론, 오늘 왜 수도회인가?
수도회 탐구 여정의 시작점에서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
마가복음 14:25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수도회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21)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를 염원한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막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수도회 존재의 핵심은 일상과 하나님 나라를 긴장속에 이어주는데 있다. 
 
수도회는 고립을 추구하는가?
수도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은 ‘혼자’라는 뜻의 ‘모노스’와 ‘장소’라는 뜻의 ‘테리온’이 결합된 용어다. 수도사를 나타내는 단어닌 ‘몽크’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풀어 쓰자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다.(22)
 
제국과 천국 사이에 선 나그네
그리스도교는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의 정점에서 탄생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제국에서 또 다른 꿈, 곧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를 꿈꾸는 것은 제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제국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보이는 제국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가치 충돌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핵심 이유였다. (25)
 
제국은 체제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안녕과 번역을 약속한다. 그 체제하에서 문명인과 야만인, 자유민과 노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은 종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화는 민족과 인종,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르쳤다. 나그네와 병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고 나눔늘 실천하는 삶을 그리스도가 가르친 인간관을 수용한 결과다. 그리스도교가 제기하는 인권과 평등의 가치는 노예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던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박애 정신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천이었다.(27)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제국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거주 외국인(resident alien)’으로,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일을 하늘나라의 '식민지 건설’로 표현했다. 바울의 식민지 유비를 빌리자면 거주 외국인들을 시온의 신을 알지 못하는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이 식민지는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문화의 섬이었으며, 거주 이방인들의 낯선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그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28) 제국의 정복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확산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건설은 철저하게 주변과 경계, 아래에서 형성되어 퍼지는 가치다. 
 
그리스도교가 만들어가는 식민지는 제국의 영토 안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더 높은 윤리와 도덕의 가치를 보여줄 책임을 지닌다…. 이 식민지에는 두가지 극단의 위험이 존재한다. 하나는 제국에 동화되어 식민지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 안에서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분리하여 고립되는 위험이다.(29)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하늘나라와 제국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수도회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도회야말로 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양립하는 현장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거센 저항이었다.(31)
 
오늘의 나와 무관한가?
고독 속에서 연대했던 수도사들의 가치와 지향을 우리 삶 속에 연결해야 한다. 
 
 
2장. 수도회의 탄생_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
4세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과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가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의 명과 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제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앙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결단 없이도 자기 편의와 향후의 기회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삶의 변화 없이 이교도의 가치관을 유지하니 교회의 질적 순도가 점점 떨어졌다. 
 
핍박받던 소수가 이제 주류 중의 주류가 되었다. 항상 제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던 가치 및 문화와 같은 방향에 서게 되었다. 점차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가 동일시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는 박해을 받았지만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수용했을 때 세속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고, 눈먼 교회는 제국의 권력을 나누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42)
 
교회의 두 가지 반응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에는 두가지로 반응했다. 첫째 제도 교회는 공인에 따른 변화를 환영하고 급속히 적응했고 둘째 일부는 그리스도교 공인과 그 이후의 교회 정책을 거부했다. 이 지점이 수도회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두가지 형태의 수도회
은둔 수도회 vs 공주 수도회
1) 은둔 수도회, 앵커라이트(anchorite) 혹은 은둔 수사((hermit)로 불린다. 창시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안토니우스이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마 19:21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35세 되던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래된 요새에 가서 20년을 은둔하며 살았다. 
 
2) 공주 수도회는 공동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케노비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코이노스’와 ‘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오스’의 합성어이다. 그들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사 공동체에서 산다. 창시자 파코미우스는 로마의 군인으로 전쟁중에 자신을 돌봐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섬김에 감화를 받고 작은 수도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나그네를 섬기는 돌봄 공동체로 순종을 어떤 가치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유럽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인 베네딕트 수도회에 영향을 준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수도사 개인의 내적 완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애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 수도회가 신적 음성을 듣기 위해 내면에 집중하며 완전을 갈망했다면, 파코미우스로 대표되는 공주 수도회는 타자 돌보기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긴장을 줄 공동체
 
 
3장. 수도사의 일상_기도와 노동, 하나님의 일이 되다
일상과 영성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기도와 노동
수도원에서는 여덟 차례 공동체 기도를 드린다(성무일도). 시 119편 164절과 62절. 
 
수도원의 기도는 읽기와 침묵으로 뒷받침된다. 독서를 통한 기도는 텍스트를 사색하여 몸과 영혼에 아로새기는 방법이며 침묵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67)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의 육체노동은, 수도사가 순종과 고행의 삶을 실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려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68)
 
또 다른 종류의 노동
야외 육체노동은 줄어들었지만 필경사들의 노동은 과중했다. 그 노동으로 생성된 책이라는 물성은 당대와 후속 세대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73)
 
유럽을 만든 회랑 안의 일상
삶이 물질로 환원되고 종교마저 내 유익을 위한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그 너머의 초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균형을 찾아갈 때 삶은 좀 더 내밀해지고 덜 흔들리게 될 것이다. 
 
 
2부. 역사
4장. 유럽을 만들다_아일랜드 수도회, 베테딕토회
무너진 제국과 수도회
초기 수도회주의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고 세속적 번영에 반동하는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났다.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 476년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손에 함락. 
 
아일랜드, 성인과 학자들의 섬
켈트 수도회를 특징 짓는 단어 : 금욕, 학문, 선교
- 고전 교육에 회의적이고 명상과 기도에서 성경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동방의 사막 수도사들과는 달리 켈트 수도사들은 학문과 교육에 열정이 넘쳤다.(84)
 
노섬브리아 궁정교사로 임명받은 앨퀸은 교약 교육의 기초로 3학(문법, 수사, 논리)과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을 정했다. 이시기 카롤링거 서체가 채택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들의 문화적 토대인 게르만의 가치위에 그리스도교를 융화하여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했다.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
켈트 수도회가 문명이 없는 황량한 산과 섬에 문명의 싹을 틔우고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면, 베네딕토 수도회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라 부르는 고전 문명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헤서 출발했다. 
베네딕토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가 50세가 지났을 무렵인 529년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설립했다. 베네딕토회 규칙의 가장 큰 장점은 금욕적인 닫힌 세계와 열린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감이었다.  기도, 노동, 학습을 강조했다. 견습 수도사 생활을 마친후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청빈’, 독신으로 사는 ‘정결’, 수도회의 규칙에 순종하는 ‘순명’을 약속하는 수도 서약을 한다.(95)
 
중심을 흔드는 주변부 공동체
수도회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세속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공동체, 주변부에서 중심을 파고들어 흔드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도회의 존재의미이자 목적이었다. 
 
 
5장. 유럽을 깨우다_클뤼니 개혁운동과 시토 수도회
교회의 암흑기
수도회는 본질적으로 세속과 의 긴장 속에 형성하는 대조 공동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클뤼니 개혁과 뒷모습
중세 성직자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이지만 동시에 세속 군주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가직이기도 했다. 
 
클뤼내 개혁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매매 금지, 세제 혼인 금지, 세속 통치자의 성직자 서임 금지문제에 천착했다. 
 
시토 수도회, 엄격한 수도 생활로의 회귀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가 추구했던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 회복의 핵심이라고 파악하여 베네딕토회 규칙을 문자 그대로 읽어내교, 고립속에서 살아가며, 매우 엄격하게 완전함의 이상을 추구했다. 
클뤼니 수도원이 예배를 수도회의 특징적 중심으로 놓고 전례의 방식과 철학을 발전시켰던 반면,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 규칙이 추구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에 더 치중했다. 
시토 수도회는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세속 후원자들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를 기증받아 공동체를 일구었다. 또한 시토 수도회는 중세 신비주의 영성과 성모 마리아 공경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시대정신을 담아낸 수도회 운동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당대 사회와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가 지닌 고유한 힘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비우는 데서 나온다. 
이 수도회 운동들을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 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6장.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_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스콜라’에는 학교라는 의미와 정예부대라는 의미가 있다. 
서유럽인들의 성지순례는 고해 사제가 부과한 벌을 이행하는 참회의 길, 또 자발적 종교적 헌신을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의 의미가 있었다. 
 
무기를 든 수도사들
‘성전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다. 성전 기사단은 용감한 전사로서 비무장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성전 기사단의 확산과 몰락
성전 기사단은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순례 여정을 만들고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하려는 유럽인을 위해 땅을 매입해주고 송금을 대신하고 필요한 비용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땅을 매입해 개간하고 정착할 수 있는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전 기사단의 문어발식 확장은 비판을 받게 되고 해산을 요구받게 된다. 이는 교황권과 세속권의 갈등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프랑스 국왕의 시도였다.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 구호 기사단
구호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 형제회’이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환자를 구호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위한 무력은 정당한가?
군사 수도회는 기사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투에서 부상한 이들을 치료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군사 수도회의 역할과 지위를 옹호했다. 그는 무장한 수도사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보았다. 
수도회가 국가나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보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종교의 이름으로 제국이 제기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주의, 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 같은 수도사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7장. 세속화에 급진적으로 맞서다_탁발 수도회
사도적 청빈의 거대한 바람
13세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칠성사와 화체설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성직자 중심주의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제도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교회 본연의 길을 잃었다고 판단될 때면 항상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등장하여 제도 교회를 정화시켜왔다. 
 
이들(발도파와 탁발 수도회)은 사도적 청빈 즉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을 추구했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타인의 은총과 신뢰를 얻으며 살았다.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의 발도가 주도한 운동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교 없이 설교하는 이들은 제도 교회와의 갈등을 일으켰고 1184년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형제가된 수도사
탁발 수도회는 수도회의 재산을 만들지 않았고 그 대신 대중들의 자비에 의존하는 탁발을 생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기존 수도회는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폐쇄 공동체에 가까왔다. 탁발 수도회는그 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13세기 프린치스코회와 도미티코회의 등장)
 
프란치스코회와 청빈의 딜레마
프란치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전쟁중 부상으로 투병하며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마 10장의 설교를 들으며 감화를 받아 절대적 빈곤의 실천을 선택했다. 탁발 수도사들이 빈곤의 가치, 무소유의 가치를 강조하면 할수록 수도회에 더 많은 기부와 헌납이 이루어졌다. 이에 수도원 운영을 위한 재정을 가지는 문제로 인해서 온건파 ‘콘벤투알’과 급진파 ‘영성파’로 분열되었다. 
사도적 청빈의 궁극은 물질의 소유뿐 아니라 물질을 엄어서서 이 땅의 권력과 힘까지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포기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도미티코회, 설교와 학문의 전문성
프란치스코회가 청빈이라는 사도적 삶의 실천을 강조한 반면, 도미티코회는 사도적 삶의 또 다른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강조했다. 
도미니코회는 당시 이단인 카타리파와의 논쟁과 설교를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카톨릭 대중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중세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이끈 수도회로 악명을 쌓았으며 이와 별개로 설교법, 웅변술, 교수법으로 중세말 대학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 상태에 대한 급진적 제고
교권의 전성기에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둥장한 탁발 수도회는 견고하게 구조화된 성직주의에 불만을 가진 대중이 추구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고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탁발 수도회는 화폐경제의 활성화와 신흥 도시의 등장이라는 원시 자본주의 속에서 그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 그리스도교가 선택해야할 방향이라며 급진적으로 이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제국 한가운데서 제국의 가치 논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가치로 살며, 이 땅에 천국의 식민지를 확장해가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 
 
 
8장. 닫힌 공간에서 피어난 영성_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공동체
여성, 이브와 마리아 사이
수녀원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서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독립성이 중요한 가치이다. 동시에 수녀원의 탄생은 악의 근원을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는 여성 혐오의 부산물이었다. 
 
여성 혐오와 차별로 기획된 공간
여성에 대한 남성의 깊은 불신은 하와의 불순종 범죄로 이 땅에 악이 들어왔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남성 중심 교회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얕잡아 봤다.
 
명예남성인가? 여성성의 대표인가?
빙엔의 히데가르트와 아시시의 클라라는 각각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현한 인물이자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목소리를 낸 인물로서 대표성을 지닐 만 하다. 
 
억압과 돌파
여성의 목소리에 위기 의식을 느낀 교회는 수녀원에 엄격한 고립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부정적인 힘 때문에 남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고 구원을 위협하기 때문이며 당시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에서 확산되는 여성들의 종교 활동때문이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종교성에 대한 여성의 대안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신비 체험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판단하는 종교재판에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남성 성직자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에게 불안을 느꼈고 이에 그들의 경험을 마법술과 동일시했다. 1487년 도미티코회 수도사인 야콥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라머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악명 높은 마녀사냥 교범이다. 
 
모순과 역설의 공간
중세 여성에 대한 담론은 악의 통로가 된 ‘이브’로서의 여성과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구원의 통로가 된 ‘아베’마리아로 나뉘어 있었다. 수녀원은 이브 곧 하와가 속죄를 통해 아베 마리아의 길을 걷길 기대하는 공간이었다. 
제한이 있고 자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의 힘의 원천이었다. 
 
 
9장. 종교개혁, 수도원을 없애다_수도원 폐쇄와 새로운 물결들
수도원을 나온 수도사들
마르틴 루터가 교황에 반기를 들며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결과, 카톨릭 유럽이 분열되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치 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개신교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이에 수도회주의 부정과 수도회 해산이 일어났다. 
 
개신교 개혁가들은 수도회가 지향하는 정신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수도원해산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여 수도원 재산을 국가가 몰수했다. 개신교 지역의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그리스도교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루터의 수도회주의 비판
수도회와 종교개혁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가치 회복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면, 수도회 경험이 루터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루터는 수도회주의가 지닌 근본적 결점을 현실 도피라고 지적했다. 
 
카톨릭 수도회주의가 소멸하면서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는데 이제 교회 내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사처럼 소명받은 삶을 살아야 했다. 
수도원이 추구하던 기도하고 노동하는 일의 가치가 개신교 지역에서는 일상의 소명으로 이어져서 일이 곧 기도가 되었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수도원의 가치를 담벼락 너머 세속의 일상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산은 카톨릭과 결별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세속 군주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과의 결별을 끌어낸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크랜머가 주도했다. 수도원이 보유하던 엄청난 부를 국유화하고 교회의 정치적 복종을 이끌어 내려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대조 공동체가 영원히 상실되었다. 
 
전위를 차지한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카톨릭 수도회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을 포함하여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삼았다. 예수회는 은둔하거나 정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격적인 방식의 선교가 핵심이었다. 
 
제3의 길, 재세례파
메노파, 아미시파, 후터파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재세례파 공동체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와 갈등관계를 보였다. 카톨릭 국가에서 유아세례는 종교적인 행사인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호적 신고였다. 재세례파는 교회를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구원자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기로 할 때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모든 종류의 폭력 거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들이 복음서에서 끄집어 올린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었다. 
 
진화한 수도회주의
개신교가 수도사직을 폐지한 것을 단선적으로 읽기보다는 수도회 정신이 카톨릭의 예수회, 개신교의 만인사제주의, 재세례파 운동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지닌다. 
 
 
10장. 이성이 종교가 된 시대_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로 가는 여정
프랑스 혁명(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클뤼니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 탈종교화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성의 해체를 도모한 사건
수도원 개혁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요구 : 수도원 토지문제, 존립 목적에 부합하는 수도원만 유지, 각 국가내 수도회의 주도권을 교황이 더이상 가질 수 없었다. 
 
혁명과 수도회 폐쇄
프랑스는 1789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했고 교회는 면세 특권과 십일조 마저 상실했다. 
1790년 성직자 공민헌장 :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고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오던 구제사업의 책임을 떠맡았다. 이때부터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등 호적 업무가 교회에서 국가로 이관되었다. 
침묵과 기도, 신비로 대표되며 1500년 이상 이어온 수도회 정신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이성, 혁명의 종교
프랑스 혁명 기간에 수도원에서 400만권 이상의 책이 불탔다. 책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파괴함으로써 과거 문화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의 의지대로 재구성하고 하는 시도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고 전통적 종교성은 이성과 합리의 시대, 인권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로 평가절하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세속화의 길을 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럽 역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수도회에 가해진 도전도 거셌다. 청빈, 순결, 순명이 대표하는 수도회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가치에 압도되었다. 종신 수도 서약은 시대에 뒤처진 인권 유린으로 매도되었다. 혁명이 몰아낸 것은 구체제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2천년 가까이 쌓아 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통도 혁명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길을 잃은 근대, 인간을 잃은 종교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전해진 것은 우월한 유럽의 가치였다. 그들이 실천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애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정한 인종주의였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우생학이 등장한 후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인간의 우월을 가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 그로 인한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확산 앞에서 모든 것은 물질로 환원되었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힘을 주창했다. 그는 놀이의 자발성, 상상력, 순수성, 비일상성이 건전한 창조성을 낳는 힘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놀이를 무가치하게 보는 관점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기보다 기계화된 세계의 부품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는 '일과 생산은 시대의 이상이 되고 나아가 우상이 되었다'라고 했다. 
비생산적인 기도와 침묵의 삶이 주는 가치, 성찰과 기도의 삶을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며 수도원을 파괴한 근대가 제거해 버린 것은, 어쩌면 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찰하는 힘이었다. 
 
 
11장. 잿더미에서 찾는 희망의 조각들_떼제와 라브리 공동체
저항하는 부조리 인간
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할 사건이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이므로 불안이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였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 긍정과 성찰 없는 진보의 폭주 앞에서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교회는 실존하는 고통에 참여할 능동적 의지를 상실한 채 추상적인 본질에 천착했다. 
제도 교회는 현실을 읽어내고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한 채 천상의 진비와 추상의 본질에만 매달렸다.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선교회는 유신론적 가치를 매개로 신존의 고민을 풀어나가려는 시도에 가깝다. 
 
화해와 떼제 공동체
프랑스 개신교인 로제 수사가 떼제에 정착, 1940년 시작된 이 공동체는 유대인 난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전후 기부를 거절하고 자급자족을 실천하며 수도회 밖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매일의 공동체 기도를 통해, 생활에서는 예배와 침묵을 통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스도인 간의 화해, 젊은 세대를 향한 복음 전도, 그리스도교 내에서의 창조성 촉진.
 
프란시스 쉐퍼와 스위스 라브리
라브리는 프랑스어로 피난처이다. 실존의 물음을 풀어가는 일에서 떼제 공동체가 주정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라브리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이다. 
 
라브리의 지향점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다. 라브리의 존재 목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가 인격적이고 무한하며 실재하는 절대자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는데 있다. 
쉐퍼는 그리스도교와 일상의 삶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합리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라브리는 시대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질문이 달라지고 고민이 중층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쉐퍼의 답변은 단순하고 도식화되어 있다. 단순함 속에 의외의 힘이 있지만 단순할수록 자칫하면 전투적이 된다. 세상 문화는 야만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치없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다. 
 
한계와 의미
그리스도교는 힘이 아니라 갈망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본원적 가치를 향한 갈망 말이다.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수도회 영성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맞춘 인물은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이다. 
수도회주의는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가치로 돌아가자는 복고적이거나 반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조각을 찾자는 것이다. 
 
 
3부. 유산
12장. 예것을 익혀 새것을 깨닫다_베내딕토회 규칙의 현재적 의미
왜 오늘 베네딕토회 규칙인가?
베네딕토회 규칙은 독창적인 문서라기 보다는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가지 수도 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유연성, 개방성, 탄력성
 
공동체 만들기
베네딕토는 허물과 결점이 명백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영성이 구현될 수 있다고 이해했다. 베네딕터회는 기도와 노동, 공부, 식사와 휴식, 수면시간등을 균형있게 배치했다. 
 
듣기 위한 침묵
상대적인 침묵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자 말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는 성찰이다. 
침묵의 목적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듣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침묵과 대조를 이룬다.(눅 22:61-62)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남이시기도 하다. 기록된 말씀 못지 않게 비언어적 텍스트, 침묵의 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침묵으로 완성되었다. 
 
청빈의 의미
베네딕토회가 말하는 청빈이란 개인의 재산권 대신 공동의 소유권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청빈의 핵심은 삶의 방향성이다. 순결과 복종 역시도 우리 인간이 가진 말초적인 육신의 욕망과 힘에 대한 재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무모하게 시도하는 장소다. 이성과 합리, 이 땅의 구조를 넘는 불가능에의 요구를 실천하는 장소다.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교회가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때에 체험하는 신비다. 가난이란 물질이 주는 영향력을 포기하는 저항이다. 
 
복종, 부름받은 대가
복종은 결국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참다운 복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란 값없는 은혜를 남용하는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제자되기란 값없는 은혜를 향유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삶이다. 
자본과 소비 중심의 세계에서 단순한 삶, 소박한 삶을 사는 것도 복종의 한 모습이다. 
 
환대, 수도회 정신의 정수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타락한 세속을 멀리하는 공동체와 세속에서 찾아오는 낯선 나그네를 기꺼이 맞아주는 공동체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라는 것은 긴장을 유발한다. 
 
오늘에도 적용가능한가
현대의 소비주의, 욕망의 무한 긍정, 성취 지향의 문화에서 청빈, 순결, 복종, 환대가 가능할까 싶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가난과 차별이 여전하고 타자에 대한 편견이 지속되는 세상,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로 탄식하고 신음하는 지구 앞에 정의와 평화를 책임감있게 공유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짊어지고 풀어갈 과제다. 
 
 
13장. 전위에 선 저항자들_디트리히 본회퍼와 토마스 머튼
구도자의 길
간디의 평화주의, 흑인 인권문제, 유대인 문제와 같은 인종주의,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등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수도회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독일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8살때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형 둘이 전장에 나갔다가 둘째 형 발터는 사망하고 다른 형은 부상을 안은 채 돌아왔다. 본회퍼는 21살때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가 되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교류하며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유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25세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6년 나치정부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 피레네산맥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부모님 밑에서 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했다. 5살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15살때 아버지마저 악성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18살때 영적 강성을 경험했지만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후 성적으로 방탕하게 지내다가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카톨릭 친구들과 교류하며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핑겐발데, 제국의 한복판에서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 정책에 저항하며 고백교회를 시작해 제국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고백하고 나치의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핑겐발데 신학교에서 ‘신수도회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제자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회복은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것과 공통점이 없으며,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사랍들을 모을 때가 왔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제국교회에 물들지 않은 예배와 성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공동체의 목표는 공동체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배운대로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무력과 공포로 통치하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동시대인들과 후대에 제시해 주었다. 이땅을 뒤덮고 있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했고 제국 내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처럼 핑겐발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를 위해 연대하도록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겟세마네, 제국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1939년 토마스 머튼은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후 수도사의 길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프란체스코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전 친자 관련 소송문제로 거절당했다. 1941년 그는 가장 엄격한 시토회의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향했다. 머튼은 수도회의 생활을 통해 평화, 침묵, 고독 등의 가치를 문장속에 녹여냈다. 1948년 ‘칠층산’은 큰관심을 얻었다. 그는 점점 더 심오한 관상의 삶으로 들어갈수록 세속에서 멀어지고 천상으로 이끌려 가기보다, 자신이 세상과 떨어질 수 없으며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58년 루이빌의 교차로에서 갑자가 자신이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압도되었다. 그에게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몸부림에 동참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욱 현실 세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갔다. 동서 냉전, 베트남전, 미국 내 흑인 인권이나 원주민 문제등 첨예한 대립과 불공정의 문제들을 직시하며 그 속에서 정의를 회복할 길과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경계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진정한 복종과 영적 갈망은 홀로 떨어져 자신의 내면 완성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분열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그 세계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쓰기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지고 선명해졌다. 반전, 인권, 자본주의의 한계 등에 대해 글을 썼다. 
 
변방과 중심, 다시 만나다
핑겐발데 신학교가 폐쇄되고 나치의 감시가 심해져 미국의 친구들이 본회퍼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9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후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참여했고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주전인 1945년 4월 9일 사형당했다. 
 
토머스는 루이빌 경험이후 교회, 국가 권력과 갈등을 겪었다. 1960년대 그가 쓴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에 묶여 출판될 수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복종은 교회나 권위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복종이 침묵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눈감는 행동이 침묵이었다. 그는 영성가의 자리를 넘어 시대의 예언자의 자리에 섰다. 1966년 그는 전쟁, 인종차별, 가난 등의 사회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을 출판했다. 1968년 ‘마르크스주의와 수도훤의 관점’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구조의 혁명을 주장한 반면 수도주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고 주장했다. 
 
전위에 선 저항자들
본회퍼는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함께 신음하는 그리스도를 위해 폭력의 방법을 선택했다. 머튼은 자본주의 제국의 긴장 없는 동행을 비판적으로 읽어가기 위해 마르크스가 사회와 역사, 종교를 읽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본회퍼와 머튼의 삶은 깊은 영성 추구와 급진적인 제자됨의 실천이 결국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수도사의 삶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만드는 삶, 더 이상 이 땅과 분리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14장. 오늘, 수도회를 다시 묻다_신수도회주의 운동
새로운 수도회 요청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어떻게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라는 가치를 개신교에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수도회는 대항문화의 성격을 가졌지만 제도 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도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촉매였다. 그 제도 교회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반드시 필요했다. 
핑겐발데에서 시작된 신수도회주의는 독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국가 주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제국의 주변부를 향했다. 
 
파편화된 사회와 공동체의 도덕
1998년 조너선 윌슨은 ‘파편화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라는 책을 통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책 ‘덕의 상실’을 분석하면서 신수도회주의를 정의하는데 디딤돌을 놓았다. 윌슨은 현대 교회가 문화의 파편화와 계몽주의 프로젝트 실패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보았다. 
매킨타이어는 현대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편화된 사회라고 도발한다. 전통이 사라진 곳엔 야만이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가져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기대어왔던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근대가 약속한 진보 대신 암흑이 깊게 드리웠다. 매킨타이어는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토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의 야만이 쓸고 지나간 부조리한 자리에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공동체를 기대했다. 
제국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를 강제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 가치에 저항하기른 쉽지 않다. 그 야만의 제국은 외부의 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의 삶에 익숙하게 뿌리내렸다. 유럽인들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와 근대화의 이름으로 식민 침탈을 정당화했다. 오랫동안 제국이 약속하는 풍요와 제국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인 폭력을 방관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유럽 문명이 마주한 전대미문의 암흑기에 시민성을 갖추고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 곧 덕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 지역 공동체는 제국이 지배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이에 윌슨은 또다른 베네딕토를 기다리는 일을 새로운 수도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읽었다. 
 
교회와 세속 문화 사이의 긴장이 상실되어,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닮아 갔다. 국가와 교회 모두가 확장을 위한 효율과 통제를 추구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배와 통제의 방식은 전체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비단 나치즘이나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이 아니다. 효율과 효과를 극상의 가치로 놓고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한 근대성의 부정적 특성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곳이 되었고, 성장을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실천의 장이 되었다. 또한 교회는 국가주의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혹은 내밀하게 지지하는 정신적 지지 세력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나치게 친밀하게 얽히면, 제국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고등 종교의 자리는 줄어든다. 
 
공인과 제도화를 경험한 이래 교회는 역사 속에서 늘 세속 문화에 개입해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에 제국의 중심부, 심장을 향한 추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패배적, 도피적, 심지어 급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현실에서 선택해야 할 길은, 교회의 엣 영향력 회복이 아니라 제국과 교회가 긴장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리이다. 그 자의식이 신수도회주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신수도회주의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각하고 자발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의 자취를 따라, 21세기 제국 문화 속에서 같은 자각을 가진 이들이 건설해 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새로운 수도회의 열두가지 표지
셰인 클리어본의 ‘심플웨이’와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가 시작한 ‘룻바하우스’, 심플웨이와 룻바하우스 모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인종과 계급 분열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공동체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버려진 곳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중산층의 혜택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1) 제국의 버려진 곳으로 이동한다.
2) 공동체 구성원 및 가난한 이들과 경제 자원을 공유한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겸손히 복종한다. 
4)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산다. 
5)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6)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동생활을 발전시킨다. 
7) 마태복음 18장을 따라 지역사회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든다. 
8) 교회와 공동체 내의 인종적 분열을 애통해하고, 정의로운 화해를 적극 추구한다. 
9)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돌보고 지역 경제를 지원한다. 
10) 부부와 자녀들 및 독신자들을 지원한다. 
11) 오랜 수련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삶과 공동체 규칙을 익힌다. 
12) 관상 생활을 훈련하는데 헌신한다. 
 
이 12가지 표지의 특징적 범주
첫째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향한다. 제국의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향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연계를 강조한다.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파라처치가 아닌 프로처치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셋째 공동체 규율과 개인의 덕성을 훈련한다. 
 
이 운동은 수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가치에 젖어 있는 제도 교회이 현실을 오랜 과거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한다. 개신교의 열광적이고 분주한 이미지 또는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 전부라고 상정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다른 모습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끈다. 
 
대안이냐는 질문에 대해
제국이 정해 놓은 틀과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파격한 형태의 저항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도사가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수도사의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표면적으로는 수도사 제도를 없앤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성, 타자를 향한 배제 대신 환대, 폭력과 갈등 속에서의 평화 추구, 지구 공동체의 환경에 대한 책임은 물질 만능과 무한 경쟁의 사회속에 개개인 모두가 성찰하며 살펴야할 주제들이다. 
 
 
나가는 말
수도원은 제국의 가치와 삶에 대한 저항이다. 제국의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너머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다르게 살기, 거슬러 살기는 오늘날 가장 어렵고 거대한 저항이다. 소비가 미덕이고 자본이 가장 강력한 종교가된 시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그 구조에 저항하는 건 웬만한 작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도사가 보여주는 삶의 키워드는 주변성을 유지하며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는 것이다. 제국의 중심부를 향하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주변으로 가는 삶 말이다. 
주변에서 생성되어 마침내 중심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불어난 것, 그것이 수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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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선교(손창남, 죠이북스)

 

 

1. 풀뿌리 선교란 무엇인가

1. 난타차이 목사 이야기 

홍성철 목사 뉴질랜드 유학, 태국인 우본완 교수()에게 복음 전파, 약혼자 난타차이도 예수님을 믿게 , 이후 난타차이는 목사가 되어 태국의 유력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성장

- 볶음밥(gospel rice)

 

2. BL 이야기

이상훈 교수(한국학 중앙 연구소) M국의 BL에게 제자훈련, 이후 남편에게도 복음 증거

 

3. 풀뿌리 선교의 다섯가지 특징

1)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갖지 않음

2)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함

3)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만남

4) 사역적 전문성을 갖춤

5) 자신의 삶에서 진정정을 보임

-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자인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4. 풀뿌리 선교인가

-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용어에서 영감을 받음

-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은 로마 제국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있었으며 여러 민족에게 다가가고, 자기 옆으로 다가온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있었다

 

핵심 : 일반 성도가 해외로 가는 일이 많아진 지금, 선교사라는 정체성 없이 세계에 흩어져 선교를 감당하는 풀뿌리 선교가 더욱 중요해졌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풀뿌리 선교

1. 흩어진 사람들

11:19-20, 선교란 타문화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4:25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11:20에서는 예수(큐리오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유대인 디아스포라 바나바와 사울

사도행전 초반에 교회에서 주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실행할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바나바를 보낸다

바나바와 사울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고,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3. 풀뿌리 선교 모델과 - 선교 모델

랄프 윈터 

- 소달리티(Sodality) : 다른 곳으로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구조(선교단체)

- 모달리티(Modality) : 목양하는 사역 구조(지역교회)

 

4. 모델의 비교

 

5. 계속되는 풀뿌리 선교

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사역

- 이들은 아볼로를 훈련시킬 정도의 전문성이 있었다

2. 빌립의 사역

- 빌립은 이후 가이사랴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의 딸들도 귀한 사역을 감당했다.( 21:9)

3. 에베소의 흔적들 

- 16:6 여기서 아시아는 튀르키예 서쪽을 의미,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의 2년간의 사역으로 여러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1:7-8)

 

핵심 : 성경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선교 외에도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모델이 분명히 존재한다

 

 

3. 고대의 풀뿌리 선교

1. 선교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의 선교

가톨릭 사제들을미시오라고 불렀는데 이는보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미토에서 나온 표현으로 이후에 영어의미션’, ‘미셔너리 어원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비록 타문화 사역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17세기 이후에 나타난 선교사들처럼 전혀 모르는 언어를 배운다든지 성경을 번역한다든지 필요가 없었다

 

- 민족 이동, ‘하나님 나라가 반격을 가하다-역사에 나타난 시대’(랄프 윈터)

- 비자발적으로 가기, 게르만족의 이동

 

2. 아시아 지역의 선교

로마 제국 동쪽으로의 복음 전파, 로마 도로, 실크로드

아리우스파 이단 논쟁, 이후 이들을 동쪽으로 가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만들어 당나라에 경교를 전파했다

 

3. 대항해 시대의 선교

보보이론(Blinked out, Blinked on), 전기가 잠시 나갔다가 얼마후 다시 들어오는 현상

- 중세시대의 선교 , 장원 경제체제에서 상인들의 역할 축소, 이슬람의 강력한

 

- 십자군전쟁, 기독교는 이슬람과 더욱 멀어졌지만 유럽과 사라센 제국 사이의 교역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고,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

 

- 선교의 황금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 사제들(주로 수도사들) 파송했다.  

미시오들은 시간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보다 선교지에 오래 머물렀다.그들은 대부분 한곳에 정착해서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했다

 

4. 선교의 황금기가 가져다준 영향

윌리엄 캐리의 논문, ‘이방인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관한 질문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선교 기지를 통한 사역으로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도록 했고 현지 문화를 말살하는데 앞장섰다.(잉카 문화)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풀뿌리 선교가 이루어졌다면 이제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만 선교 사역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선교의 이원론)

 

5. 모라비아 교도들의 선교

진젠도르프 백작이 만든 헤른후트 공동체,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직접 선교비를 조달했으며 선교지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았다

 

핵심대항해 시대가 되면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가 활발히 일어났지만 이전에는 선교사라는 직함없이 흩어져 성도들에 의한 풀뿌리 선교가 계속 되었다. 그런 풀뿌리 선교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행한 해외 선교에 나타난다

 

 

4. -현대에 등장하는 풀뿌리 선교의 열매

1. 구마모토 밴드와 삿포로 밴드

- 일본의 근대화, 난학의 발전, 난학은 네델란드를 의미하는 화란에서 학문이라는 의미로 의학과 과학, 그리고 기술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 구마모토 밴드, 구마모토 양학교에 제인스 대위가 와서 근대 무술과 영어, 서양문화를 가르쳤고 평신도로 성경 공부와 기도모임을 진행했다

 

- 삿포로 밴드, 일본은 홋카이도 농업 국립학교에 클라크 박사를 초청한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있는 조건으로 초청에 응한다. 클라크 박사는 짧은 1년의 시간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후 농업학교 2 입학생으로 우찌무라 간조가 들어와 영향을 받았다

 

- 요코하마 밴드

 

2. 식민지에 영향을 그리스도인들

- 인도네시아의 안팅, 현지인 전도에 힘씀

 

- 조선에 영향을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다우치 치즈코 그녀는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고 윤치호와 결혼하여 조선의 고아들을 돌봤다

 

3. 직업을 위해 흩어진 사람들

-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 따갈로그오와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영어교사느 해외에서 가정부로 일함

 

- 홍콩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

 

핵심 : 본격적인 제도권 선교가 진행되었던 지난 200년의 선교 역사 속에서도 일본에 제인스 대위, 클라크 박사 등과 해외 취업을 통해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사역의 열매가 많았다

 

 

5. 바이끄 이야기에 등장하는 풀뿌리 선교

  1. 바이끄의 여정
  2. 양동철 형제
  3. 어머니, 아버지라 불린 그리스도인
  4. 장대순 집사님
  5. 구원이라는 고리의 부분만

풀뿌리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고리 가운데 부분을 감당하며 자기에게 주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핵심 : 신실한 무슬림이었던 바이끄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그녀를 돕는 주변의 손길이 많이 있었다. 풀뿌리 선교란 구원이라는 고리 중에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6. 직업 선교와 풀뿌리 선교

  1. 직업 선교의 다섯 가지 유형

 

  1. 4유형 선교인의 세부 유형

 

  1. 5유형 선교인의 세부 유형

 

  1. 인도네시아에서의 가슴 아픈 경험
  • 2유형 선교사들이 3유형 선교사 혹은 4유형 선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발생해 서로에게 상처를

 

  1. - 선교와 풀뿌리 선교의 화합

 

핵심 : 직업 선교의 다섯 가지 유형 4, 5유형이 풀뿌리 선교 모델에 해당한다. 선교인이란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서 전문 직업인으로서 타문화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다.

 

 

7. 풀뿌리 선교의 사역적 전문성

  1. 사역적 전문성의 필요

Language Acquisition Made Practical(LAMP)에서 제안한 언어 평가 단계

0단계 : 여행객 언어 수준

1단계 : 생존 언어 수준

2단계 : 일반적인 직장 생활이 가능한 수준

3단계 :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전달할 있는 수준

4단계 : 현지인 전문가가 구사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수준

5단계 :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

 

  1. 사역적 전문성의 다섯 단계

0단계 : 사역적 전문성이 거의 없는 단계

1단계 : 개인 전도가 가능한 단계

2단계 : 양육이 가능한 단계

3단계 :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인도할 있는 단계

4단계 : 신자들의 공동체를 인도할 있는 단계

 

  1. 타문화 사역에 대한 이해

행동양식 : 사람들이 행동하는 모든

가치관 : 한국(나이), 인도네시아(체면)

믿음 : 이슬람(접대)

세계관 : 문화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 세계관에서 믿음이 나오고 믿음에서 가치관이 나오며, 가치관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된다.

 

  1. 최악의 풀뿌리 선교의 사례
  • 교수 이야기, 파키스탄의 무슬림 학생에게 교회 게스트 하우스를 내어주면서 새벽기도에 참석하라고
  • 돼지고기를 먹어야 참된 기독교 신앙?, 회심한 무슬림 친구에게 회심의 증거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함

 

  1. 다윗의 물맷돌처럼
  • 다윗은 물맷돌을 던지는데 달인이었다.
  • 다윗왕이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기술자를 소개하며 사람들을 '유능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핵심 : 풀뿌리 선교를 한다는 것이 사역적 전문성이 낮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역에 따라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8. 풀뿌리 선교의 시대적 요청

  1. 시의적절한 풀뿌리 선교
  • 2 세계 대전 이후 선교적 상황의 변화

 

  1. 기독교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
  • 1914 1 세계대전, 1936 2 세계대전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 2 세계 대전 이후 피식민지들의 독립, 이로 인한 민족 종교들의 부활, 선교사들이 비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

 

  1. 세계적인 도시화
  • 도시에 산다는 말은 단순히 삶의 장소가 지리적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 이로 인한 선교지 생활비의 증가(임차료, 생활비, 교육비, 활동비 )
  • 많은 외국인들의 거주로 선교사들이 더이상 외국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웃들과 접촉하기 위해 창의적인 방법들을 동원

 

  1. 세계 기독교 중심의 남진
  • '글로벌 사우스', 이는 문자적 지리적 중심의 이동이 아니라 기독교 인구 분포의 변화를 말한다. 이제 3세계는 더이상 선교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 세계적인 이주
  • 세계적인 인구의 이동
  • 우리나라 사람가운데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은 800만명 정도로 남한 인구의 15% 해당한다.
  • 현재 한국에 들어와있는 외국인 수는 200여만명으로 직업 170, 결혼해서 이주한 사람 20, 유학생 18만명
  • 한국에 있는 외국인 비율은 이미 인구의 5% 넘었기에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있다.
  • 종족 무지(tribe blindness) : 타문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미국 남부의 한인교회 멕시코 선교를 준비하여 열심히 봉사하지만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멕시코 직원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못함

 

  1. 풀뿌리 선교가 해답

1)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 속에서의 풀뿌리 선교

  • 선교사라는 정체성이 없는 일반 성도가 자신의 직업을 통해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풀뿌리 선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세계가 활짝 열려있다.

2) 세계적인 도시화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비용의 증가 문제에 대해서 풀뿌리 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비량 선교를 하기에 문제를 극복할 있다.

3) 기독교 중심의 남진 상황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파송국과 선교지의 경제력 차이가 늘어날 수록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4) 세계적인 이주 상황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로마제국 말기 게르만 민족의 이동 시기에 기독교는 게르만족 사이에 이미 널리 분포
  • 이제 선교지와 피선교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모든 성도가 타문화로 가거나 타문화로부터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핵심기독교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과 도시화, 세계 기독교 중심의 남진, 세계적 이주 등과 같은 선교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해결책은 풀뿌리 선교다.

 

 

9. 풀뿌리 선교의 확산을 위한 전제

  1. 성도들의 이해
  • 풀뿌리 선교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선교적으로 사는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
  • 매우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들, 우리가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예수를 전염시킬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상, 변화 vs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자의 증상, 변화)
  •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상징 빼앗기-symbol theft)
  •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대한 이해와 헌신,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위험을 무릎쓰고 오지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 섬김을 위한 유능함과 기쁜 마음
  •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선교지에 간다고 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만약 자기의 본국에서 선교사가 아니라면 배를 타고 간다고 해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허드슨 테일러)

 

  1. 지역 교회들의 이해
  • 선교적 상황 변화에 대한 이해
  • 풀뿌리 선교에 대한 이해, 지역교회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선교적 체질을 강화시켜야 한다.

 

  1. 제도권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들의 이해
  • 풀뿌리 선교를 주장하는 것이 제도권 선교를 무시하거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비싼 자동차를 만들어 주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어렵게 부품을 조달하기보다 현지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운송수단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핵심 : 선교는 열정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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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간사소식 126(2023-6-22) 

 

예년보다 이른 더위에 모두 건강 잘 챙기고 계신가요?

이번 학기를 잘 마치고 더운 여름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달간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소식을 함께 나눕니다. 

 

1. 더기쁨교회 설립예배(2월 26일)

지난 2월 26일 더기쁨교회 설립예배는 은혜가운데 잘 드렸습니다. 장소가 협소해서 많은 분들을 초청하지 못했는데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풍성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2. 전주대 강의

매주 수요일 ‘기독교윤리와 적성’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시간 강의를 위해서 왕복 8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니까 효율적인 시간 관리는 아니지만 제게는 학생들을 만나서 마음껏 기독교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친구들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 신자들은 그 믿음이 깊어지고, 불신자중에 주님을 만나는 학생들이 생기기를 기도해왔습니다. 특별히 이번 학기에는 강의를 통해서 복음과 교회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부디 이들이 구도자의 단계에서 진정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강의를 마치면서 개인적인 강의 평가내용중에 한 친구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수업하시는 내용은 종교를 세게 강요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무교인 저에게도 듣기 편한 수업이었습니다. 또한 강요는 하지 않지만 핵심은 적절하게 설명해주셔서 오히려 관심을 갖게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가장 좋았던 점은 질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무척 감동하였습니다. 사실 수업을 듣기 전 여론 등만 보고 판단하여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저는 결국 종교는 과학적인 논증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생각을 꼬아 남들이 하지 않을 생각까지 해보며 교수님께 때로는 황당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제 질문을 단 한 번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으시고 진지하게 들어주시며 같이 고민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 무척 감명받아 수업을 더 열심히 듣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대답하기 힘든 주제로 질문을 했다가는 그 후에 쏟아지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교수님께서는 오히려 창의적인 발상이라며 칭찬해주셔서 어떻게 하면 종교의 허점을 찾아 파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수업에 더 집중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추천받은 것이 너무 흥미로워서 시험이 끝난 이후에 꼭 방문하여 기독교의 기분을 흠뻑 느껴볼 계획입니다. 한 학기 동안 흥미로운 수업을 해주셔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학기 강의 평가 설문 내용 링크를 첨부합니다.(https://peterjoy.tistory.com/1131)

다음 학기부터는 교재의 내용을 재단장해서 새롭게 진행하게 되는데 이 강의가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죠이 간사세미나, DOP, 65주년 창립행사(질담보 골든벨) etc

지원사역부에서의 여러 모임들을 진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매월 첫째주 월요일 간사들이 함께 드리는 월간예배, PCJF 모임, 그외의 특별 행사들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특히 현장에서 시스템을 체크하는 역할을 합니다. 루틴한 사역들인데 함께 사역하는 간사들이 예배와 순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백조가 물 위에서 우아하게 떠있기 위해서 물 아래서 보이지 않게 부단하게 움직임이 필요하듯이 물 아래서의 역할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4. 그외의 모임들

설립예배를 드리고 나서 총회(대신)에서 진행하는 축구팀에 호출되어서 한교연 축구시합에도 참석하고 노회 대표로 족구팀에 부름을 받아서 족구 시합에도 함께 했습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학복협의 풋살 모임(매주 목요일)도 참석해볼려고 노력하고 있고 동네 조기 축구팀(양천 FC) 소속으로 매주 토요일 오전에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총회 축구팀에 선발로 나갔다가 햄스트링이 약간 파열되어서 몇주간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ㅠㅠ) 

시찰에서는 서기 역할을 맡게 되어서 목사님들을 모시고 여러 모임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6월 11-15일에는 태국으로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올해 선교한국 2023 대회가 포항 한동대, 기쁨의 교회에서 진행됩니다. 저는 프로그램위원회로 대회 준비를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말씀을 통해서 선교의 부름에 헌신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달에 한번 목회자 연구모임(복음주의 연구소-이강일 목사)에 참여해서 다양한 주제들의 논의를 듣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Chat-GPT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 이것을 연구해서 몇몇 분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다양한 기술의 발전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데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가능한 이런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나누는 것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5. 교회와 가정

설립예배 이후 매주 20-25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더기쁨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시면 어린 아이들의 뜨거운 찬양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매주 아이들의 찬양에 은혜를 받으며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부활주일에는 유아세례와 성찬을 진행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서툴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져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현재 장소(양천구 커피집이공)에서 2019년 9월부터 예배를 드렸습니다. 4년이 흘렀네요. 이번 9월에 카페를 정리할려고 해서 예배 장소를 물색중입니다. 지금 저희는 매주 주일만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어서 이런 형태로 장소를 임대하거나 church in church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좋은 장소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첫째 한결이는 중3, 둘째 한솔이는 중1입니다. 한결이의 키는 이제 저를 넘어섰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부정했었는데 어느덧 부정이 불가능한 상황이더라구요. 가정에서는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점점 아이들의 자는 시간이 늦어져서 모이는 시간이 늦어지는데 그래도 함께 읽는 말씀이 아이들의 심령속에 뿌리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6월 초 이사를 했습니다. 조합원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들어왔는데 아직 전에 살던 전세집이 나가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세가 잘 빠지고, 조합과 시공사간의 갈등으로 재정적인 부담이 큰데 원만하게 해결되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6월 30일~7월 1일 전주더온누리교회 청년부 수련회를 인도합니다. 두 번의 저녁설교와 오전 강의(기독교 세계관과 일상)를 진행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부탁드립니다. 

2. 지원사역부 안에서 감당하는 루틴한 사역들을 잘 감당하도록

3. 2023년 9월 이후 예배 장소를 잘 물색하도록

4. 전세가 잘 빠지고 조합의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5. 양가 부모님들의 건강과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2023년 6월 22일 

박기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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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적 구조
 대상 -- 처음 4개는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 나중 4개는 집에서     제자에게 

 

 주제 -- 사람에 대한 비유 1과 8.  
       - 심판에 대한 비유 2와 7.  
       - 쌍동이 비유-3,4와 5,6.   
 질문 --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 제자들의 질문
         일곱번째와 여덟번째 사이에 예수의 질문
 
1. 씨뿌리는 자 비유 / 사람에 대한 비유
-열매맺는 것의 가치는 효과없는 것을 뛰어 넘는다. 원래적인 이 비유의 의도는 천국을 위해 수고하는 것에 비하여 보잘것 없는 결과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 천국의 본질을 변증한다. 복음에 소외된 곳은 없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거나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적다. 마치 헛수고처럼 보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결국 30, 60,100배의 결실을 얻는다.
- 제자들의 질문 / 왜 비유로 가르치는가
비유를 사용하는 큰 이유는 어려운 진리나 추상적인 것을 가장 흔히 접하는 환경을 이용하여 형상화하여 쉽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계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며 저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대적자들이 메시야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된다. 빋는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구분이 일어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주심. 강조점이 씨뿌리를 자에서 말씀을 듣는 자로 옮겨진다. 말씀을 듣는 자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다.
* 제자들의 질문
비유에 대하여,
해석에 대하여
 
2. 가라지 비유 / 심판에 대한 비유
이미와 아직 사이(already not yet)의 천국.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밭에 곡식이 자라고 있는 것이 시작이지만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지금의 천국도 마찬가지다. 곡식이 자라며 무르익어 추수때가 가까이 오고 결국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어 심판의 날의 천국이 완성되는 때가 온다.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간다. 곡식이 자라는 것처럼 가라지도 자라서 분명히 그 특성을 더욱 잘 드러낸다. 처음엔 구분이 안 되던 것이 추수때가 가까이 올 수록 눈에 보이게 구분이 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을 소유한 우리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갈등이 있다. 그런데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알게 해 주는 이 비유는 새로운 힘과 지혜를 준다.
 
3. 겨자씨 비유 / 쌍둥이 비유
천국은 확장된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듯이 작고 보잘적 없는 무리로 인해 전세계에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적은 무리로 인해 지금의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현 56억 4천의 인구에서 1/10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고, 2/10은 명명상의 그리스도인이다. 3/10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의 비그리스도인이라고 할때 복음의 확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며 이루어질 것이다.
캠퍼스 복음화, 세계 복음화, 성경적 원리로 변혁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생각해 볼 때, 또한 작고 미미한 것으로 부터 출발한 천국의 확장되는 능력과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하게 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속되는 뜻으로 인해 이성과 계산을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천국은 확산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처럼 함께 있지만 그러나 자라고 있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
 
4. 누룩 비유 / 쌍둥이 비유
가라지 비유와 쌍둥이 비유로 적은 분량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를 완전히 부풀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산을 말한다. 단 누룩이 커지는 것보다 누룩이 밀가루를 완전히 부풀리는 누룩이 밀가루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천국의 누룩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느 의미가 첨가되어 있다.
가루 서말 : 40l  
 
==36절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앞의 4가지 천국비유가 무리들에게 객관적인 제시라면 집안에서 말씀하신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주관적인 각자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5. 밭에 감추인 보화 / 쌍둥이 비유
천국의 가치에 대한 비유. 밭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사람의 비유로 천국의 가치를 나타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6. 좋은 진주 / 쌍둥이 비유
이것도 천국의 가치를 말하는 비유이다.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
천국은 참으로 모든 것보다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 가치를 안다면 많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자 컴플렉스, 헌신 컴플렉스는 없어질 것이다. 천국의 가치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되게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관적인 결단이 촉구된다.
 
7. 그물 비유 / 심판에 대한 비유
-가라지 비유와 대칭구조를 갖고 있다. 가라지 비유의 해석에서 사용된 ‘세상끝’, ‘천사들’, ‘풀무불’, ‘의인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등의 단어와 문장이 똑같이 사용.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천국의 백성은 아닌 것이다. 결국 가라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땅이 도래하고 진행되는 천국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그물안에서 동일한 바다와 자연의 조건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그물 안에서 들려 올라갈 때의 심판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보여 준다. 지금 우리도 태양과 비를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하게 받고 있다.
심판은 말 그대로 심판이자 구원이다. 심판날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
*예수님의 질문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러하오이다.
 
8.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깨달음을 바탕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임무를 말씀.
-서기관은 율법을 맡은 자로 백성에게 그것을 가르칠 임무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 서기관들은 율법주의자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율법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통하게 하는 천국에 대해 깨닫고 훈련받은 서기관인 것이다.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다. 예수는 이미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것, 그러나 본래의 뜻에서 떠나버린 것을 다시 새롭게 하셨다. 그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 그리고 새로워진 것이다.
요일 2:7-8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계명이니 이 옛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결단이 요구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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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와 적성 강의평가 2023년 1학기 (박기모 교수)

-수강인원 29명중 28명 응답 

 

 

 

 

 

 

16.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면서 좋았던 점, 깨달은 점, 감사했던 점 혹은 개선되어야할 점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들으며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간 같습니다. 수업 내용을 통해 조원과 토론하며 다양한 의견, 생각 등을 알아가며 자신의 생각도 키울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되어 좋았어요

 

수업을 조금 빨리 끝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으로 인해 이번에 자신을 돌아보고,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성인이니 이러한 시간을 가질 일이 따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어려울 텐데 좋은 기회를 잡은 같다고 생각되며 무언가를 믿는다는 어려운 점이 아님을 알았다. 성경이 66권이라니 읽기는 힘들 같지만 간단하게 정도는 읽어볼 마음이 들었고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곳에 종교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음을 배웠고 수업을 시작할 당시 적었던 과제에 수업에 기대하는 내용으로이번 기회에 저에 대해 생각해볼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적었는데 말이 수행되었으며 자신뿐만 아닌 사회에 관해서도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해당 강의의 워크북을 돌아보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학기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해본 같으며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직 채워나가야 부분이 많은 듯해 아쉬움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자신에 대해 알아볼 몰랐으며 많은 영상 자료를 보게 몰랐는데 이게 그만큼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수업이다보니 힘들긴 했어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뿌듯하다. 보람찬 학기를 보낸 같고 방학 동안에는 수업을 들으며 중간중간 떠올랐던 나에 대한 부족함을 가꾸고 싶다.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조별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친해질 있어서 좋았습니다.

 

맨날 칙칙한 4학년들과 수업을 들었었는데 간만에 젊은 2학년 친구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들을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덩달아 어려진 기분이 들더군요. 소모임 토론에서 짧게나마 서로의 의견을 공유할 다양한 생각들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아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수업이라고 해서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들,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인품에 대해 성장시킬 있는 내용들로 수업을 받을 있어서 단계 발전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업시간동안 만이라도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앞으로에 대해 생각할 있는 시간을 가질 있었던 점도 좋았습니다. 인생은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되어 새로웠고 뜻깊은 시간이였다

 

사실 처음 기독교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좋지 않았다.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인식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터라 수업을 듣는 내내 불쾌할 같았고, 게다가 시간도 저녁 늦은 시간이다보니 더욱 피곤할 같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수업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 체력을 소모하며 학교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후 기독교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일단 내려놓고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번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있나 싶었다. 조금 과장하면 여태까지 나는 기독교를 사랑과 선함을 강조하고 강요하며 조금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면 공동체에서 배제시키려고 하는 위선적인 단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배운 기독교는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1:1관계를 중요시 하였고, 죄때문에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예언대로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구원을 이루셨던 일을 믿는 것이 천국에 가는 열쇠이며 과정에서 인간의 성품과 , 행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여태 봐왔던 교회의 모습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나니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착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천국에 있는 자격을 얻은 것에 감사하여 선하게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마음속에 남아있던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다가 믿을만한 대상을 찾기 위해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과 죽음 이후 나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살면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면 성경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그런 교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다

 

기독교인이 아닌 학생들도 이끌어주셔서 너무 재밌는 수업이어서 좋았다

 

항상 열의를 다해 수업해 주시고 학생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런 종교이니 관심있는 사람은 성경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저는 수업이 끝나고 성경을 읽어보려 합니다. 한학기동안 쉬지않고 열정적으로 수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종교를 재밌고 쉽게 다가간 같아 좋았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은 친구들의 기덕교에 대한 생각을 알아갈수 있어서 좋았고 가죽옷에 대한 의미도 알게되어서 좋았던 같습니다. 수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라을 느낄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편히 들을수 있는 강의라고 생각해서 좋았고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사례와 영화 등을 보며 생각을 하고 조원들과 나눌 있어서 좋았다. 어려운 내용도 쉽고 재미있게 수업해주셔서 힘들지 않았고 편하게 들었던 같다.

 

좋은점은 발표도 많이해서 긴장도가 낮아진거 좋았어요

깨달은 점은 성경은 역사상 많이 팔린책이다.

감사했던점: 못미덕스런 저를 조장으로 뽑아 자신감에 한발자국 다가가게 되었어요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어떤 사상으로 모인 집단인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있었다. 또한 종교가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강력하다는 것도 체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종교라는 비과학적이고 증명되지 않는 것이 당당하게 자리잡으며 힘을 행사할 있는 이유도 이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배운 것이 없어 여론을 보고 기독교를 무심코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과거의 행동을 반성할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수업이었다. 수업을 듣기 전에 나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심리가 주를 이루며 하루하루를 버텨가듯 살아가고 있었는데 수업에서 배운 대로 신이 내게 맞는 길을 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부담이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같아 쾌적하다. 지금은 종교를 가진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신에게 신념을 빌미로 거래하는 행위가 같아 가지지 않겠지만, 앞으로 중요한 일들이 해결되고 나서는 종교에 마음을 담을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온전히 수업 덕분이다. 기독교를 앞으로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일은 사라진 같아서 유의미하고 만족스러운 수업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새롭게 고쳐 잡게 해준 유익한 수업으로, 살아가는지,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점이 수업 중에 너무 좋았다.

 

선악과 이야기부터 성경이 다른 역사 기록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교회에 관한 궁금증을 Q&A 통해서 해결할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다. 궁금 하지만 막상은 물어보기 곤란한 질문들을 다들 막힘없이 해준 덕분에 교회에 관한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던거 같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때마다 강의를 듣고 느낀점이나 수업했던 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가지고 조원들과 토론을 하면서 조원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있어서 좋았다. 삶을 관통하는 질문,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의 나의 생각도 정리할 있어서 내가 어떤 가치관과 사고를 가지고 있고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등을 파악할 있어서 좋았다.

 

살면서 종교와는 척을 지고 살꺼라 생각했던 내가 종교에 대하여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교에 관한 이야기 외에 종교에 관한 이야기와 관련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례와 사건들을 듣고, 보고, 느끼며 그저 살아온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있었다. 특히 수업시간에 기억이 남는 내용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각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잘먹고 잘살수 있는 삶을 선택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인 혼자 잘살기보다는 남들을 도우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희생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남들을 돕고,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이는 혼자 살거라 생각하고, 나만 생각했던 나의 삶에서는 충격이었고, 반성이었다. 나도 누군가를 도왔던 기억이 있었는데, 어느순간 잊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여태것 내가 도울 있던 사람들과 내가 도움을 주기는 커녕 피해와 부담을 사람도 삶속에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살아오는 나라, 세상도 누군가들의 희생과 도움과 사랑이 이루어낸 결과라는 사실도 까먹은 살아왔던것 같다. 이런 여러 기억들, 사실들을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에서 다시금 깨닫게 되어서 상당히 감사한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수업은 단순한 종교 수업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에 대한 유대가 부족한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수업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통일교를 이단종교로 본다는 깨달은 점과 언제나 학우분들과 소통을 노력하시는 교수님께 감사했으며 개선해야할 점은 없습니다.

 

단순한 기독교 채플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독교 안의 윤리에 대해 알아보며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종교인으로써 설명까지 해지며 자신의 윤리관,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고 나아질 있던 유용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평소 궁금했던 기독교에 대한 질문들을 자유롭게 있었던 강의가 가장 좋았습니다. 평소 가지던 궁금증도 해결되고 기독교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있었습니다.

.

수업을 열심히 이끌어주려고 하셨던 교수님의 열정에 감사하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는데 수업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성경을 괜히 많이 읽는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이번 수업으로 인해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조금이나마 있게 된것 같다.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지켜보고 있고 또한 죄를 벌하시며 반대로 축복도 주시니 정말 현명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 시간과 관심이 없어 성경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간이 되면 성경을 읽어볼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나 느낌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의 공부를 통해서 저는 다시 자신을 알아봤다. 나는 누구인지 진정한 자아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특히 자신이 모르는 부분 눈먼 자아, 없는 자아를 알아보려고 한다.

 

 

17. "기독교 윤리와 적성" 수업을 통해 박기모 교수에게 하고 싶은 질문 혹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없습니다.

 

1주일에 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통학을 하시는 교수님 이번 학기 고생하셨습니다.

 

전주대에서 오랫동안 강의해주세요

 

없음

 

감사했습니다

 

무교인 저는 종교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기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후감 과제 도서인묻다믿다하다 읽게 후에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궁금한 점이 생기면 스스로 인터넷에 검색해보기도 하고 주변 기독교인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궁금증을 풀어나갔습니다. 강의를 수강하기 전에는 무언가 종교에 궁금한 점이 생겨도 따로 검색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God 하나님을 의미하며 Jesus 예수님을 의미함을 압니다. 워크북에는 자세히 적지 못했으나 강의를 통해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입생이라 교양은 기독교와 채플을 제외하고 듣지 않기에 이러한 강의는 이제 더는 듣지 못할 같아 아쉽습니다. 부족하던 생각을 조금 보완한 같고 워크북을 처음에는 이걸 언제 적을지 걱정했는데 적은 보니 소소하게 기쁘기도 하고 덕분에 저의 앞으로에 대해 고민해볼 있었던 같아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깁니다.

 

출석체크 인정해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마음이 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눈높이에 맞춰서 재밌게 설명해주셔서 좋았습니다. 어릴적 교회에서 안좋은 일을 겪은 까닭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저에게는 안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강의를 통해 듣게 성경 구절에 들어있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들, 뭔가 깨우침을 주는 귀에 박히는 구절들 덕분에 성경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다양한 교회의 순기능과 교수님의 솔직한 기독교에 대한 의견들, 질문에 대한 답변들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말들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을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면접에 합격하여 8월부터 출근을 하게 되어 아마 이번 학기를 끝으로 수업은 이상 듣지 않을 같기에 이번 학기 교양이 마지막 교양과목이 같습니다. 마지막 교양을 교수님과 함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학기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워크북 작성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나름 알찬 시간이였던것 같습니다.

 

학기동안 멀리서 달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오해를 풀게 좋은 수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성경 그대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넚다

 

수업마다 열정이 느껴지셔서 에너지를 받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재미있고 종교를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님 한학기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학기 동안 기독교 윤리와 적성을 강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의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쌓고 생각해보게 되었으며, 제가 발전할 있었던 같습니다. 수업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교수님 열정적으로 수업도 해주시고

수업안나오면 대체 과제해서 출석체크 해주신게 좋았어요 그리고 감사해요 고생많으셨어요 1학기간

 

교수님께서 수업하시는 내용은 종교를 세게 강요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무교인 저에게도 듣기 편한 수업이었습니다. 또한 강요는 하지 않지만 핵심은 적절하게 설명해주셔서 오히려 관심을 갖게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가장 좋았던 점은 질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분에 무척 감동하였습니다. 사실 수업을 듣기 여론 등만 보고 판단하여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저는 결국 종교는 과학적인 논증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생각을 꼬아 남들이 하지 않을 생각까지 해보며 교수님께 때로는 황당할 있는 질문들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질문을 번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으시고 진지하게 들어주시며 같이 고민해주셨습니다. 저는 모습에 무척 감명받아 수업을 열심히 듣게 되었던 같습니다. 보통 대답하기 힘든 주제로 질문을 했다가는 후에 쏟아지는 비판을 피할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교수님께서는 오히려 창의적인 발상이라며 칭찬해주셔서 어떻게 하면 종교의 허점을 찾아 파훼할 있을까라는 생각에 수업에 집중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추천받은 것이 너무 흥미로워서 시험이 끝난 이후에 방문하여 기독교의 기분을 흠뻑 느껴볼 계획입니다. 학기 동안 흥미로운 수업을 해주셔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의도 이해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정보들이 기억될 있었고 기독교 수업을 열심히 들을 있었던거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해 아는점이 많지 않았었는데 박기모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들을 쌓을 있었습니다. 학기동안 꼼꼼하고 차분하게 수업을 이끌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런 수업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교인들, 무교인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모두 어우러지고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있는 수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업 끝마다 다른이들과 이야기를 하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법을 배우고, 다른이들의 삶과 삶에대한 생각을 있었고, 나에 대한 생각, 나의 사상등을 생각할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수업이 아닌 나와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엿보며 진행하는 방식의 수업은 정말 삶에있어서 도움이 될거라고 확신합니다.

기독교 윤리와 적성수업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평생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살아갔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종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시선은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을 같습니다.

종교를 넘어 인류애가 가득한 수업을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수업을 이끌어주시면 감사할거 같습니다. 한학기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통일교 신자였습니다. 허나 통일교가 이단을 예상을 하였으나 처럼 기독교 신자분들께 질문하기엔 그래서 참고있었는데 아베 총리 암살사건과 이번 강의로 기회를 잡아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소꿉친구와 친한 동생이 통일교여서 자연스럽게 전도하는게 불쾌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솔직한 답변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기독교 교수를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집이 멀리심에도 불구하고 전주대로 결정하게 이유도 궁금합니다. 대면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이 집중 못하는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꿋꿋히 수업에 열정을 보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이번 기독교 수업이 인생에서 처음이지만 많이 부족했던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많이 늦고 또한 많이 졸았으며 많이 부족했던것 같습니다. 저는 저와의 약속도 못지켜 자신에게도 실망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번주 일요일에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에 마주하여 회계를 하고자 교회에 갔습니다. 제가 기독교 수업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잘못한 일에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하나님께 진심어린 이야기와 반성에 대한 내용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들으셨을지는 모르지만 추후에 제가 죄를 지었기에 벌을 내리실지 아니면 회계를 하고 반성하여 다시 시작하라는 마음으로 축복을 내려주실지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서울에서 저희를 위해 매주 내려오십니다. 힘든 와중에 저희를 생각하시는 일에 제가 보답을 하지 못한것에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열심히 듣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학기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기모 교수님께:

이번 학기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많이 부족한 저를 많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배운대로 진정한 자아를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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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hen I send Artemas or uTychicus to you, do your best to come to me vat Nicopolis, for I have decided to spend the winter there. 13 Do your best to speed Zenas the lawyer and wApollos on their way; see that they lack nothing. 14 And let our people learn xto devote themselves to good works, so as to help cases of urgent need, and not ybe unfruitful.
15 All who are with me send greetings to you. Greet those who love us in the faith.
zGrace be with you all.
u See 2 Tim. 4:12
v [2 Tim. 4:10]
w See Acts 18:24
x ver. 8
y 2 Pet. 1:8; [Phil. 1:11; 4:17; Col. 1:10]
z See Col. 4: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딛 3:12–15.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3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딛 3:12–15.
 
12-15절은 바울서신의 전형적인 마지막 인사말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러 관련된 사역자들의 재배치에 대한 언급과 마지막 안부인사로 디도서를 마무리한다. 
 
12절)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와 두기고를 그레데로 보낼테니 그 때에 바울이 있는 니고볼리로 속히 올 것을 명한다. 
‘아데마’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바울의 동역자중 한 사람이다. 이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으로 예수께서 파송한 70인 전도자(눅 10:1) 중의 하나로 루스드라 감독이었을 것이라는 썰이 있다. 
‘두기고’는 아시아 출신(행 20:4)로 바울의 친밀한 동역자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바울이 일차 로마 옥중 생활을 하고 있을때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가지고 오네시모를 동반하여 소아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엡 6:21; 골 4:7.9) 바울은 디도와 니고볼리에서 합류할 경우에 아데마나 두기고를 디도를 대신하여 그레데에 파송하여 디도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게할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디모데후서를 통해 볼 때 실제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져 디모데를 대신하게 된다.(딤후 4:12) 
‘니고볼리’는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그의 정적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도시로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그리스 북쪽 해안 에피루스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서풍이 약해 겨울을 보내기에 좋은 휴양지이다. 이곳은 달마디아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바울의 명령에 따라 디도는 니고볼리에 도착했고 후에 달마디아로 돌아가서 거기서 얼마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딤후 4:10)
‘겨울을 지내기로’로 번역된 ‘파라케이마사이’의 원형 ‘파라케이마조’는 ‘~대항하여, 거슬러’란 의미의 전치사 ‘파라’와 ‘겨울, 풍랑’을 의미하는 명사 ‘케이몬’의 동사형인 ‘나쁜 날씨를 만나다’란 의미의 동사 ‘케이마조’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나쁜 날씨에 대항하다’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겨울을 지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작정하였노라’로 번역된 ‘케크리카’는 원형 ‘크리노’의 완료 직설법 표현으로 그 결심이 이미 확고하게 서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딤후 4:12) 바울이 노년에 노쇠한 몸으로 겨울을 보낼 처소를 찾고 있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Nicopolis (Νικόπολις, Nikopolis). One of several Graeco-Roman cities by this name, likely the one known today as Smyrtoula, located in Epirus. Nicopolis, which means “city of victory,” was the largest city on the northwest coast of the Ambracian gulf, off the Adriatic Sea.
Nicopolis in the New Testament
Nicopolis (Νικόπολις, Nikopolis) is mentioned in Titus 3:12. Paul tells Titus that as soon as Artemas or Tychicus arrives, Titus is to meet him at Nicopolis, where Paul plans to spend the winter. Thus, Paul has not yet arrived at Nicopolis (he uses ἐκεῖ, ekei; [“there”] instead of ὧδε, hōde; [“here”]). This may indicate that Paul is writing the letter to Titus sometime during the summer, which would give Titus enough time to make the journey from Crete to Nicopolis by winter. Nicopolis was a strategically ideal location for Paul to expand his gospel message westward.
Historical Overview
Nicopolis is east of southern Italy, 200 miles northwest of Athens, and 200 miles east of Brindisi, Italy. The Via Appia runs straight from it to Rome. The city was founded by Octavian, later known as Augustus, in 31 bc, to celebrate his victory against Antony at Actium (Josephus, Antiquities 5.111.15). Under Augustus’ decree, many people—legionnaires, the Ambraciots and Anactorians, colonists of Corinth (Paus., Description of Greece 5.23.3), other freedmen, and people from the surrounding areas—came to live in the city.
From its foundation, Nicopolis grew in size and prominence.
The city held the Actian games—founded by Augustus—which rivaled the Olympics.
The city became the capital of Epirus in ad 67.
The city became the home of Epictetus in ad 89, during his exile.
Herod the Great became the chief financial promoter of the city’s major building projects (Josephus, Antiquities 16.5.3).
The city housed public baths, a theater, stadium, and gymnasium.
The city became the area’s most important trading and commercial fishing center.
The city became home to five basilicas during the Christian era.
Origen sojourned in Nicopolis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6.16).
Three miles of fortified walls protected Nicopolis. The city hosted two primary roads and was home to approximately 300,000 people at the height of its power. Several miles from the city, an aqueduct built under Hadrian brought fresh drinking water to inhabitants. The city was also known for its warm and humid climate, and its mosquitoes.
The city was destroyed by the Goths in the fifth century, but later restored by Justinian. Nicopolis has been called “the best site to appreciate the Roman conqueror’s transforming hand on ancient Greece’s landscape” (Mee and Spawforth, Greece, 389).
 Michael E. Peach, “Nicopolis”, ed. John D. Barry기타, The Lexham Bible Dictionary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6).
 
 
3:12 do your best to come to me. Although Paul had left Titus in Crete in order to get the churches there properly established, he was not expected to stay there indefinitely. Artemas is not mentioned elsewhere in the NT. Tychicus is mentioned as an Asian who accompanied Paul on his third journey (Acts 20:4). In Eph. 6:21 and Col. 4:7 he is referred to as a “beloved brother and faithful minister” (see also 2 Tim. 4:12). Nicopolis was a port city in Epirus, on the west coast of the Greek peninsula and about 200 miles (322 km) northwest of Athe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1.
 
3:12 In this verse Paul lays plans for Titus to leave Crete and join him at Nicopolis for the winter. Ὅταν with the aorist subjunctive (here πέμψω) is used “when the action of the subordinate clause precedes that of the main clause” (BAGD s.v. 1b). Thus “whenever” either Artemas or Tychicus arrives to take Titus’s place, Titus should then leave to join Paul (με).
Apparently Paul had not decided which of the two men to send, nor exactly when he would send one of them. There is no other reference to Ἀρτεμᾶς** in the NT. Acts 20:4 indicates that Τύχικος** was from Asia, a coastal province of Asia Minor, and that he and Trophimus were the representatives from the church there who accompanied Paul with the gift for the poor Christians in Jerusalem. Paul relates in Eph. 6:21 and Col. 4:7 that Tychicus is a beloved brother and faithful minister who will tell those churches about how Paul is doing; apparently Tychicus was the one delivering those letters. Since from 2 Tim. 4:10, 12 we learn that Paul sent Tychicus to Ephesus and that Titus went to Dalmatia, which is just up the coast from Nicopolis (see below on the identification and location of Nicopolis), we may reasonably assume that the plan outlined here did materialize and that Artemas was apparently the one sent to Crete. The plan was for Titus, when replaced by one of the two men, to “make every effort” or to “make haste” to come (both meanings for the aorist imperative σπούδασον are possible and both appear elsewhere in the PE* [4x: 2 Tim. 2:15; 4:9, 21], although the former is more dominant in Paul as a whole [7x: also Gal. 2:10; Eph. 4:3; 1 Thes. 2:17]; see BAGD).
Paul wants Titus to join him at Νικόπολις** (a NT hapax; see J. M. Houston, ZPEB IV, 436; G. L. Borchert, ISBE III, 534f.). Although several places were known by that name (see Zahn, Introduction II, §35, n. 3), the capital of Epirus best fits the time framework of the letter and the reference in 2 Tim. 4:10 to Titus being in Dalmatia, which was just up the coast from Epirus. Nicopolis was on the west coast of Greece about two hundred miles northwest of Athens on the the gulf of Ambracia (now known as Arta) near the Adriatic Sea (cf. Strabo 7.7.5). It was founded and named by Augustus in 31 b.c. and established as a Roman colony (cf. Dio Cassius 51.1; Strabo loc. cit.).
Titus is to come “because” (γάρ) Paul “has decided” (κέκρικα, from κρίνω) “to winter there,” the perfect tense expressing a settled decision. The infinitive παραχειμάσαι** with ἐκεῖ, “to spend the winter” “there,” indicates the decision that Paul has reached. He is not yet at Nicopolis, since he refers to Nicopolis as “there” (ἐκεῖ, “in that place,” BAGD; cf. Rom. 15:24), not “here.” Thus the subscriptions (see NA26) that say that the letter was written from Nicopolis are not accurate.
Travel on the sea was difficult or impossible during the winter (cf. 2 Tim. 4:21), and Paul’s experiences (Acts 27:12; 28:11) made him keenly aware of the need to make plans for the season. Use of παραχειμάζω by Paul or in connection with Paul (the Acts passages just mentioned; 1 Cor. 16:6) shows that he sought to spend his winters with Christians in strategic locations for gospel ministry. His choice of Nicopolis put him and Titus one step further west of the area where most of his labors had been concentrated and was most likely taken with a view to fulfilling his desire to go where the gospel had not been preached and, ultimately, to Spain (cf. Rom. 15:20–24).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ZPEB M. Tenney, et al., eds., 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I–V. Grand Rapids, 1975–76.
ISBE G. W. Bromiley, et al., ed.,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I–IV. Grand Rapids, 1979–88.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NA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26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6–357.
 
13절) ‘율법교사’로 번역된 ‘노미콘’의 원형 ‘노미코스’는 ‘율법에 박식한 자로 율법의 해석자나 교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laywer’로 표현되는데 율법 전문가 혹은 로마법 전문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세나’는 ‘세노도로스’의 약칭으로 ‘제우스의 은사’라는 의미의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법의 전문가, 변호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그는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 변호사로 순회 전도자 활동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볼로’는 ‘아폴로니오스’의 약칭으로 ‘성경과 말씀에 능했던 자’로 통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명하고도 탁월한 유대인으로 에베소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복음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고린도에서 교사로 활동했었다.(행 18:24; 19:2; 고전 1:12; 16:12) 
바울은 이들을 니고볼리로 급히 먼저 보내라고 명령한다. 한글 번역에서는 매우 긴급하게 보낼 것을 서두르라는 뉘앙스를 보인다. 하지만 ‘급히’로 번역된 ‘스푸다이오스’는 ‘서둘러’라는 의미도 있지만 ‘근면하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먼저 보내어’로 번역된 ‘프로펨프손’의 원형 ‘프로펨포’는 ‘전에, 앞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로’와 ‘보내다’란 의미의 동사 ‘템포’의 합성어로 ‘앞서 보내다’라는 의미이지만 많은 경우 여행이나 공무 수행에 필요한 사람이나 옷가지, 여비를 공급하여 보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전송하다’로 번역되는 표현이다.(행 20:38; 21:5; 요삼 1:6)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를 급히 보낼 것을 명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챙겨서 파송할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후에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라는 표현이 등장하기에 선교 여행을 위해서 필요한 물품을 잘 챙겨서 보낼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3:13 Paul knows that two men will be going through Crete and commends them and their needs to Titus and the Christians there. They are probably coming from Paul and carrying the letter with them.
Ζηνᾶς** is not mentioned elsewhere in the NT. Here he is designated by his profession as τὸν νομικόν, “the lawyer,” just as Paul mentions the professions of others on occasion (Rom. 16:23; Col. 4:14). The term is most likely used here of an expert in Roman law rather than Jewish law (so Spicq and Ridderbos; Lock regards it as indicating here an expert in Jewish law as in Matthew and Luke; cf. BAGD s.v. 2; Mason, Greek Terms, s.v.; on the training and duties of νομικοί in the Greco-Roman world see Taubenschlag, “Legal Profession”).
It is quite likely that Ἀπολλῶς** is the Apollos referred to elsewhere by Paul and in Acts (Acts 18:24; 19:1; 1 Cor. 1:12; 3:4, 5, 6, 22; 4:6; 16:12). Acts 18:24ff. identifies him as a Jewish Christian from Alexandria who “was mighty in the scriptures” and “fervent in spirit” and speaks of his desire to go to other places to minister (v. 27). Therefore, it is not surprising to find Apollos going through Crete to his next field of labor. Since Zenas and Apollos are mentioned in the same breath and are both to be helped on their way and since we know that Apollos was a Christian worker, it may be assumed that Zenas his associate was also.
Paul commands that these men be σπουδαίως πρόπεμψον. πρόπεμψον is aorist imperative of προπέμπω,** which is used twice in the NT in the sense of “accompany” or “escort” (Acts 20:38; 21:5). It is used here, however, as is borne out by the following ἵνα clause, with the meaning “help on one’s journey” by various means, including money, as it is predominantly elsewhere (cf. Acts 15:3; Rom. 15:24; 1 Cor. 16:6, 11; 2 Cor. 1:16; 3 Jn. 6). The journey thus spoken of in the NT is always related to Christian ministry, and those to be aided are those involved in such ministry (cf. especially 3 Jn. 7–8; all the other passages relate to Paul and his fellow workers and have the same implicit perspective).
The adverb σπουδαίως,** as was the case for the related verb σπουδάζω in v. 12, can mean either “with haste,” in the sense of special urgency (Phil. 2:28), or “diligently, earnestly,” in the sense of “do your best” (RSV) or “do everything you can” (NIV). As with the verb the slight preponderance of usage falls in the second category (Lk. 7:4; 2 Tim. 1:17), and that is the preferred meaning here (BAGD s.v. 2).
The ἵνα clause gives the purpose for such help being given to Zenas and Apollos. Paul wants these two men to “lack” or “fall short of” (λείπω,** Lk. 18:22; Tit. 1:5; Jas. 1:4, 5; 2:15; here in the intransitive sense; see BAGD s.v. 2) “nothing.” The verb is used here with regard to the necessities of life, as in Jas. 2:15 (and as is indicated by εἰς τὰς ἀναγκαίας χρείας in Tit. 3:14); “nothing” (μηδέν) recalls the reference to appropriate Christian generosity in 3 Jn. 6, which speaks of sending such workers on their way “in a manner worthy of God” (!) since they have accepted “nothing” (μηδέν) from Genti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7–358.
 
14절) ‘우리 사람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헤메테로이’는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란 의미로 그레데에 있는 성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들이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레데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전하는 사역자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복음의 일꾼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열매 맺는 좋은일 이라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라는 표현 ‘아낭카이아스 크레이아스’는 필수 불가결한 필요, 즉 생필품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의 현장에 파송하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명하시며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0:7-15) 
본절에서 좋은 일이란 영적 유익에 도움이 되는 구제나 남을 돕는 것을 말한다.(살전 4:9-12)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도할 것을 디도에게 명하고 있다. 
 
 
3:14 Paul again, prompted by the particular need he has just spoken of, calls on Titus to remind the Christians on Crete of the necessity of doing good deeds. The definite article οἱ with the first person plural possessive pronoun ἡμέτεροι implies that the pronoun qualifies an understood noun, so that the reference is to “our people,” i.e., those who “belong” to Paul and Titus as fellow Christians (BAGD; cf. Rom. 15:4), those of whom Paul has used the first person plural pronoun ἡμεῖς in this letter (1:3, 4; 2:8, 10, 13, 14; 3:3, 4, 5, 6) and elsewhere in the PE. Perhaps Paul uses this construction to distinguish those who follow him and Titus from the false teachers and their followers as well as from non-Christian neighbors.
Paul wants the Christians to keep on “learning” (μανθανέτωσαν, present active imperative; see 1 Tim. 5:14) through the activity of doing (cf. the similar sense in Heb. 5:8). The infinitive following indicates the activity (for other examples see BAGD s.v. 4). What they are to learn is “to engage in good deeds,” καλῶν ἔργων προΐστασθαι, which is repeated from v. 8 (see the comments there). This is an obvious attempt to drive the general lesson home with this concrete case. Thus they are to learn “also” (καί) with reference to this pressing need as well as in the more normal routines of life.
They are to learn this εἰς τὰς ἀναγκαίας χρείας. εἰς here either means “because of” (Dana-Mantey, Grammar, 103f.) or more likely has a purposive sense (MHT III, 266; NIV: “in order that”; RSV: “so as to”). τὰς ἀναγκαίας χρείας are literally “necessary needs,” i.e., what is “pressing, urgent, and real” (χρείας; see especially Acts 2:45; 4:35; Eph. 4:28; Phil. 4:16; 1 Jn. 3:17).
Such concrete and evident cases of need on the part of fellow believers and Christian workers are opportunities in which the Cretan Christians must not fail to be doing good deeds. If they fail in such clear situations, they will indeed be in danger of being “unfruitful” (ἄκαρποι; cf. the unfruitful branches of John 15, especially vv. 2 and 6). Even though this statement is cast in the negative, it is given not so much as a warning as an encouragement (like 2 Pet. 1: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E Pastoral Epistle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MHT J. H. Moulton, W. F. Howard, and N. Turner,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I–IV. Edinburgh, 1908–76.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8–359.
 
15절) 먼저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자가 모두 디도에게 문안한다라고 말한다.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바울과 함께 복음 전도 사역에 함께 힘쓰던 바울의 동역자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바울은 디도에게도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문안할 것을 명한다. 여기서 그 대상은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믿음의 가족들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고 문안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필룬타스’의 원형 ‘필레오’는 ‘애정을 가지다, 소중히 여기다’라는 의미인데 특히 동료나 친구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믿음안에 거하는 자들, 특히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문안하라고 디도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전형적인 축도 표현이다. 
‘너희 무리’라는 복수형의 표현이 사용된 것은 디도서가 일차적으로는 디도 개인에게 쓴 편지이지만 이 내용이 그레데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임을 보여준다.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에는 ‘아멘, 그레데 교회의 첫째 감독으로 임명된 디도에게 마게도냐의 니고볼리에서 기록되었다’라는 표현이 삽입되어 있다. 이는 후대 사람들이 본서의 일차 수신자인 디도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삽입한 문구로 보여진다. 
 
ἀσπάζομαι (aspazomai), 동사. 문안하다, 평안을 빌다, 안부를 묻다.
동사 용법
1. 인사하다 — 누군가 만날 때 인사를 표현하다.
롬 16:3 Ἀσπάσασθε Πρίσκαν καὶ Ἀκύλαν τοὺς συνεργούς μου
빌 4:21 Ἀσπάσασθε πάντα ἅγιον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골 4:10 Ἀσπάζεται ὑμᾶς Ἀρίσταρχος ὁ συναιχμάλωτός μου, καὶ
딛 3:15 Ἀσπάζονταί σε οἱ μετʼ ἐμοῦ πάντες.
요삼 15 ἀσπάζονταί σε οἱ φίλοι.
2. 작별 인사를 하다 — 작별할 때 인사하거나 호의를 표하다.
행 20:1 καὶ παρακαλέσας, ἀσπασάμενος ἐξῆλθεν
칠십인역 참조 구절
출 18:7; 에 D:12; 토비 5:10; 1마카 7:29; 3마카 1:8
동사. 동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편집자,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3:15 ἀσπάζομαι is the verb used for greetings in the conclusions of Greek letters (BAGD s.v. 1a; Exler, Form, 69–77, 111–13), including most of Paul’s letters (Romans, 1 and 2 Corinthians, Philippians, Colossians, 1 Thessalonians, 2 Timothy, and Philemon) and Hebrews, 1 Peter, and 2 and 3 John. Those whose greetings Paul conveys, οἱ μετʼ ἐμοῦ πάντες, may be either his fellow workers or all the Christians where he is. The exact phrase is not used elsewhere by Paul or in the NT, but πάντες in similar phrases refers both to all Christians (Phil. 4:22; 2 Cor. 13:12) and to Paul’s “brothers,” i.e., his fellow workers (1 Cor. 16:20; cf. the distinction between ἀδελφοί and ἅγιοι in Phil. 4:21–22). The one other occurrence in such phrases of “with me” (with σύν; μετʼ is used here) is used in regard to the “brothers” (Phil. 4:21), so here, too, Paul may be referring to his fellow workers (so also Gal. 1:2 [σύν]; 2 Tim. 4:11 [μετʼ]). Paul’s closing greetings are directed to singular σε only, as we would expect, in letters directed to individuals (here; 2 Tim. 4:21; Phm. 23; 1 Timothy has no such greetings). The “you” is, of course, the addressee of the letter, Titus.
Titus is directed to “greet those who love us in the faith.” The recipients of this greeting are those who remain in the bonds of brotherly love in that “faith” (cf. Tit. 1:4; 1 Tim. 1:2) and are distinguished by this designation from others who are disloyal to Paul and his gospel. Paul uses the same verb, φιλέω, “love,”** in an even more forthrightly negative statement in the conclusion of 1 Cor. 16:22: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 let him be accursed.” He implies here that Titus is to make an appraisal of others with regard to their relationship to Paul himself, since only Titus knows the situation where he is and how individuals there stand with regard to Paul. That the apostle himself often made such appraisals of Christians, loving them because they were brothers in the faith and because their reciprocal love showed this reality, is seen in his repeated use of ἀγαπητός, especially in the plural and in the phrase ἀδελφοὶ ἀγαπητοί (1 Cor. 10:14; 15:58; 2 Cor. 7:1; 12:19; Phil. 2:12; 4:1; 1 Thes. 2:8; cf. 1 Tim. 6:2; Jn. 13:34–35; 15:12, 17; Eph. 6:24).
Paul’s concluding benediction is “Grace be with you all.” The letter thus ends, as it began (1:4), with God’s grace (χάρις), since Paul is persuaded that grace alone brings salvation (2:11) and produces godly lives (2:12). χάρις is, indeed, used in the first and last chapter of every letter of Paul’s, as also in 1 and 2 Peter and Revelation and at the beginning of 2 John and the end of Hebrews. The word expresses God’s unmerited favor in Christ in its soteriological significance for the believer, saving, sanctifying, and empowering him or her (cf. the full discussion at 1 Tim. 1:2 and the very informative usages in Tit. 2:11; 3:7, where the significance of χάρις in the believer’s life is explicated). Here Paul asks that this “grace” continue its work in the life of all in the church on Crete (for a discussion of what verb should be understood and what significance should be given to the benediction see the full discussion at 1 Tim. 6:21).
Here at the conclusion of a letter addressed to an individual, Paul concludes with plural πάντων ὑμῶν, “all of you,” addressing all the Christians on Crete, to whom he has been speaking throughout the letter in the instructions he has given them through Titus. Plural ὑμῶν is used in this way in the concluding benedictions of each of the PE and in Philemon (see the comments on 1 Tim. 6:21). But here only in the PE does Paul add πάντων, “all,” for clarity and emphasis (cf. πάντων in 1 Cor. 16:24; 2 Cor. 13:13; Eph. 6:24; 2 Thes. 3:18; Heb. 13:25; Rev. 22:21). The concluding ἀμήν “is absent from a variety of early and diverse witnesses” (TCGNT; see NA26) and was probably added by a copyist early in the history of transmis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NA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26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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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oavoid foolish pcontroversies, qgenealogies, dissensions, and quarrels about the law, for rthey are unprofitable and worthless. 10 As for a person who stirs up division, safter warning him once and then twice, thave nothing more to do with him, 11 knowing that such a person is warped and sinful; he is self-condemned.
o 2 Tim. 2:16
p See 1 Tim. 6:4
q 1 Tim. 1:4
r 2 Tim. 2:14
s See Matt. 18:15
t See 2 John 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딛 3:9–11.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딛 3:9–11.
 
앞서 1-8절에서 성도들의 일반 사회 생활을 위한 지도 지침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9-11절에서 거짓 교사들과 이단에 속한 이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9절) 앞서 딤전에서도 여러번 신화와 끝없는 족보, 변론과 언쟁을 경계할 것을 이야기한 바 있는데 본절은 좀더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제시한다. 
디모데전서 1:4
4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4:7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 6:4
4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스’의 원형 ‘모로스’는 ‘배움이나 학식이 없는, 신중하지 못한, 지혜가 없는, 쓸데없는, 무용한, 불경건한, 불신앙적인’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3절에서 사용된 ‘아토에토스’가 지혜나 진리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어리석음으리면 본절의 ‘모로스’는 쓸데없고 무익한 일에 집착하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론’으로 번역된 ‘제테세이스’의 원형 ‘제테시스’는 ‘집요하게 추구하다, 찾다’라는 의미의 동사 ‘제테오’에서 유래하여 ‘구함, 조사, 토론, 논쟁’이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변론이란 사실이나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소모적인 말싸움을 벌이는 것을 말하는데 바울은 이를 가리켜 어리석은 것이며 해롭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족보 이야기’로 번역된 ‘게네알로기아스’의 원형 ‘게네알로기아’는 ‘세대, 가문’이른 뜻의 명사 ‘게네아’와 ‘말씀, 이야기’, 글’을 의미하는 명사 ‘로고스’의 합성어로 ‘가계의 기록, 조상이나 가족력에 대한 연구나 조사’를 의미한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선민이라는 의식에 가득차서 구약의 여러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여러 가문들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또한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일종의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어서 자신들의 신앙 전통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정당화 하려하였다.(딤후 1:8-11) 
‘분쟁’으로 번역된 ‘에리스’는 ‘심각한 갈등, 신랄하고 종종 격렬한 불일치’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신약에 9번 서용되는데 모두 바울 서신에 등장한다.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본절은 ‘가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의 번역이 생략되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익한 것’으로 번역된 ‘아노펠레이스’는 히 7:18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어 옛 계명이 무익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 쓰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미 폐지되어 버린 여러 의식법들에 집착하고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사람을 미혹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익한 것이다. 
‘헛된 것’으로 번역된 ‘마타이오이’는 벧전 1:18에서는 단수로 ‘망령된’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으며 약 1:26에서는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한 행실로 스스로를 속이면 그 경건은 헛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앞선 거짓 교사들의 행위가 전혀 실속이 없는 헛된 것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망령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9 δέ, “but,” contrasts this statement and its contents with what immediately precedes. The action enjoined is περιΐστασο** (present middle imperative of περιΐστημι), a verb that has within its basic meaning the concept of “around” and which in the middle means “go around so as to avoid,” and more succinctly “avoid, shun” (also in 2 Tim. 2:16; in 2 Tim. 2:23 Paul uses a similar verb, παραιτέομαι, which occurs in Tit. 3:10, with the noun ζητήσεις, which occurs here). What Paul urges Titus to constantly do he also thereby urges on all the Christians on Crete. He delineates four errors that must be avoided.
The first is μωρὰς ζητήσεις. Plural ζητήσεις (see 1 Tim. 6:4) is used once each in the three PE of an aspect of the false teaching: “controversial questions” or “controversies” (ἐκζητήσεις is used similarly in 1 Tim. 1:4). In two of these three instances the ζητήσεις are designated as μωράς, “foolish” or “stupid” (here and in 2 Tim. 2:23; since ζητήσεις is thus qualified by μωράς elsewhere and γενεαλογίας is not in its other PE [and NT] occurrence, it is appropriate to attach μωράς to ζητήσεις and not to γενεαλογίας). Elsewhere Paul tells Timothy to correct those involved with such controversies so that “God may grant them repentance leading to knowledge of the truth” (2 Tim. 2:23–26); thus “occupation with such questions is taken to be sinful and culpable” (G. Bertram, TDNT IV, 845; cf. also what Paul says about μωρολογία in Eph. 5:4–7).
The second error is γενεαλογίας** (see 1 Tim. 1:4), “genealogies,” i.e., speculation about the origins and descendants of persons, which are erroneously thought to have religious significance.
The third error is ἔρεις. (Singular ἔριν was preferred in NA25; see NA26 and TCGNT for preference of the plural.) ἔρεις (see 1 Tim. 6:4) occurs regularly in the Pauline vice lists (and is in vice lists in most of its NT occurrences) and means “strife” and in the plural “quarrels” or “dissensions.”
The fourth error is μάχας νομικάς, “battles about things pertaining to the law.” μάχας** is always plural in the NT (2 Cor. 7:5; here; 2 Tim. 2:23; Jas. 4:1) and is used “only of battles fought without actual weapons” (BAGD). νομικάς (NT 10x, PE* 2x, here and v. 13)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pertaining to the law” (BAGD; cf. νομοδιδάσκαλος in 1 Tim. 1:7). The law in view here is undoubtedly the OT law, with which the false teachers were especially concerned (1 Tim. 1:7ff.).
Each of these four errors is also mentioned in 1 Timothy, and two are mentioned in 2 Timothy. As has been noted, it appears that the same problem, or at least a group of similar problems, is being confronted in all three letters (see the Introduction and the comments on 1 Tim. 1:3ff.). The substantive elements here are “genealogies” and a misuse of the law. The atmosphere is one of strife and contention.
Paul concludes this exhortation by giving the reasons that such errors should be avoided: They are ἀνωφελεῖς** (also in Heb. 7:18), “unprofitable”—the opposite of the description of the teaching and good deeds set forth in vv. 1–8 (ὠφέλιμα, v. 8)—and μάταιοι, “idle” or “empty” in the sense of “useless” or “fruitless” (see 1 Tim. 1:6: ματαιολογία; Tit. 1:10: ματαιολόγος; cf. O. Bauernfeind, TDNT IV, 519–24).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NA E. Nestle and K.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5th ed., Stuttgart, 1963.
25 E. Nestle and K.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5th ed., Stuttgart, 1963.
NA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26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3–354.
 
10절) 10절과 11절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경계하고 사귀는 것을 금지하라는 명령이다. 
‘이단에 속한’으로 번역된 ‘하이레티콘’의 원형 ‘하이레티코스’는 이곳에만 사용된 단어로 ‘종파의, 분파적인’이라는 의미인데 후에 ‘거짓 교리를 지지하는 자, 이단’아라는 전문적인 의미가 되었다. ‘이단’, 즉 ‘하이레시스’는 교회가 고수하는 진리를 저버리고 자기 자신이 고안한 거짓된 진리를 택하고 이를 따르는 무리들이다. 주후 1세기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거나(딤후 2:11-12)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고(벧후 2:1) 사단의 회에 속한 자들이 있었다.(계 2:9)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이단에 속한 자들은 앞서 1:10-16에서 언급된 당시 그레데에서 활동하던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바울의 대처방안은 주님의 방식과 유사하다.(마 18장) 처음 한두 번은 훈계하라고 말한다. ‘훈계한’으로 번역된 ‘누데시안’의 원형 ‘누데시아’는 ‘훈계, 권고’라는 의미가 있다. 이 표현은 ‘마음, 영, 정신’을 의미하는 ‘누스’와 ‘두다, 놓다’를 의미하는 ‘티테미’의 합성어로 ‘마음에 두다’라는 의미로 훈계, 교훈을 의미한다. 바로 이단자들을 향해서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바른 진리로 가르치고 권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이들의 마음에 진리를 두는 것이 바로 훈계이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3절과 같이 어리석고 불순종할 수 밖에 없었던 자들임을 기억한다면 이들에 대하여 훈계하여 돌이킬 것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몇번의 권면에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바울은 단호히 ‘멀리하라’고 말한다. ‘멀리하라’로 번역된 ‘파라이투’는 ‘거절하다, 사절하다, 회피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파라이테오마이’의 명령형히다.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으로 멀리해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한, 진리를 따르지 않는한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3:10 Paul gives instruction in this verse and the next on how to deal with a αἱρετικὸς ἄνθρωπος. The adjective αἱρετικός** (a NT hapax) is used here of one who has chosen to follow the false teachings and practices described in v. 9 over against the apostle, Titus, and others in the Christian community who embrace the true teaching and its good deeds. Thus it may properly be rendered “heretical,” as long as we do not read later ideas back into the text (cf. BAGD, Lock, and the use of αἵρεσις in 2 Pet. 2:1). Since this choice with regard to teaching and practice sets the one so choosing against apostolic teaching, it also makes such a person “factious” and one who is “causing divisions,” which are also meanings of αἱρετικός. Paul uses this adjective in a pleonastic construction, perhaps for emphasis, including the noun ἄνθρωπον, the word used generally in Greek and in the NT for “human being,” rather than using a simple substantive adjective.
It is only “after” (μετά with the acc., BAGD s.v. B.II.3) two admonitions have been given to such a person that the action then commanded may take place. μίαν καὶ δευτέραν combines a cardinal (for an ordinal) and an ordinal number, as was done elsewhere in Greek writings (cf. BAGD s.v. εἷς 4). νουθεσία** (also in 1 Cor. 10:11; Eph. 6:4), “admonition,” includes both “instruction” and “warning” but with emphasis on the latter. (The verb νουθετέω, like the noun, is used in the NT only in Paul’s letters [and in the account of Paul’s labors in Acts 20:31]—with διδάσκω in Col. 1:28; 3:16 in the sense “admonish,” i.e., speak so as to affect the will and disposition; cf. J. Behm, TDNT IV, 1019–22.) The two admonitions are obviously intended to turn such a person from his or her error, as in 2 Thes. 3:15; 2 Tim. 2:25–26, and are “a pastoral attempt to reclaim” (Behm, 1022). This procedure reminds us of Mt. 18:15–20, where one who sins is first dealt with privately and then semi-privately before the final step is taken. παραιτέομαι (PE* 4x: 1 Tim. 4:7; 5:11; 2 Tim. 2:23; here imperative παραιτοῦ)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reject” or “dismiss,” i.e., remove from the fellowship of the Christian community (cf. 1 Cor. 5:11–13; 2 Thes. 3:14; Mt. 18:17–18).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4–355.
 
11절) 본절은 멀리해야하는 이단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부패하여’로 번역된 ‘엑세스트리타이’의 원형 ‘윽스트레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크’와 ‘돌이키다, 향하다, 변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트레포’의 합성어로 ‘나쁜 쪽으로 변하다, 악화되다, 나쁜 길에 빠지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어서 이미 그런 상태에 빠졌고 그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정죄한’으로 번역된 ‘아우토카타크리토스’는 ‘자기 자신의’란 의미의 ‘아우토스’와 ‘정죄하다, 고소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타크리노’의 합성어로 ‘스스로 정죄한, 스스로 유죄판결을 받은’이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죄를 짓고 진리에서 떠난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 도리어 이를 즐기는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이미 진리에서 떠나 돌이키기 어려운 자들로 바울은 이들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3:11 Paul refers to the kind of person whom Titus and the church must admonish and dismiss with the definite article with the correlative adjective τοιοῦτος used as a substantive: “such a person,” “one like that,” probably meaning anyone who bears the qualities indicated (so 2 Cor. 10:11a; Gal. 6:1), though other occurrences of the term refer to definite individuals (see BAGD s.v. 3a α). One can take the radical action of dismissing such a person from the Christian community because the refusal of a “heretical person” to respond to two admonitions gives the grounds for such action and indicates the necessity for it. As in Mt. 18:17, the basis for taking the last difficult step is such a person’s self-indictment (“being self-condemned,” αὐτοκατάκριτος).
The dismissal is grounded in knowledge (εἰδώς, causal participle from οἶδα) of the “heretical” person’s views and actions that has been gathered from contacts that the two admonitions have afforded (cf. Mt. 18:16: “so that every fact may be confirmed”). What is known is “that” (ὅτι) the person ἐξέστραπται** (perfect middle or passive of ἐκστρέφω, a NT hapax), which means either that he “has turned himself aside/perverted himself” (middle) or that he “is turned aside/is perverted” (passive). In either case the person has moved away from the apostolic message by choice (cf. the LXX of Dt. 32:20 and the use of simple στρέφω to mean “turn to something evil, be perverted” in Didache 11:2). The perfect tense is most likely used to indicate a settled position.
Titus and others will also know that such a person “is sinning,” ἁμαρτάνει, the present tense most likely indicating the person’s persistence in false views and activities in the face of the pastoral admonitions (cf. Mt. 18:17: “if he refuses to listen to them”). This combination of a settled persistence in chosen erroneous views and continued refusal to repent of sin enables one to know that such a person is (ὤν, “being”) “self-condemned” (αὐτοκατάκριτος,** a NT hapax): The “heretical” person has shown himself to be clearly guilty and therefore has himself provided the basis for his dismissal (παραιτοῦ, v. 10).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XX Septuagint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55.
 
본절에서 이단에 속한 이들을 멀리하라는 것은 섣부른 포기가 아니다. 고의로 진리를 대적하고 스스로 정죄한 자들에게 미련과 집착을 보이는 것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과의 끝없는 변론과 논쟁은 복음 전파의 동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싸우면서 닮는’ 현상을 나타나게 한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석가에게 와서 세상의 수많 은 사람둘을 어떻게 대하는 것어 옳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석가는 부드럽게 대할 자는 부드럽게 대하고 엄하게 대할 자는 엄하게 대하며 이도 저도 아닌 자는 부드럽고도 엄하게 대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 모든 방법을 써도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석가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 다. ‘죽여버려라!’ 물론 살생을 엄격히 금했던 석가가 여기서 문자 그대로의 살인을 하라고 말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서의 죽이라는 말은 그러한 자를 더 이상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차피 죽옴과 같은 어둠 속에 있던 자이기에 그를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를 어둠 속에 버려두어 죽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종종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사 5:1 ;마 7:16-18; 롬 11:17-24). 따라서 사람들에게 복옴을 증거하고 진리로 양육하는 것은 일종외 농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과수원지기의 가지치기에 대한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곧 다른 가지의 열매를 위해 필요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복옴을 증거하고 목희와 선교 사역을 할 때 스스로 진리를 거스르는 자와 무익한 논쟁을 거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과 에너지를 신실한 자들에게, 충성된 사람들에게 쏟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익한 가지는 잘라 내고 생명 있는 가지는 더 복돋움으로써 진리와 복옴의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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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ying is mtrustworthy, and I want you to insist on these things, so that those who have believed in God may be careful nto devote themselves to good works. These things are excellent and profitable for people. But oavoid foolish pcontroversies, qgenealogies, dissensions, and quarrels about the law, for rthey are unprofitable and worthless. 10 As for a person who stirs up division, safter warning him once and then twice, thave nothing more to do with him, 11 knowing that such a person is warped and sinful; he is self-condemned.
m See 1 Tim. 1:15
n ver. 14; ch. 2:14
o 2 Tim. 2:16
p See 1 Tim. 6:4
q 1 Tim. 1:4
r 2 Tim. 2:14
s See Matt. 18:15
t See 2 John 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딛 3:8–11.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딛 3:8–11.
 
8절) ‘이 말’로 번역된 ‘호 로고스’는 ‘그 말’이라는 의미이다. 3-7절에서 바울이 말한 여러가지 권고의 내용인데 여기서 단수형을 사용한 것은 이 모든 말이 구원의 본질과 그 은혜의 내용에 대한 요약으로 성도들이 선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할 근거라는 점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쁘도다’로 번역된 ‘피스토스’는 ‘믿을만한, 신실한, 서약한 것을 지키는, 신뢰하는, 신용하는’이란 의미로 인격체나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말이다. 
 
‘네가 굳세게 말하라’, ‘굳세게 말하라’로 번역된 ‘디아베바이우스다이’의 원형 ‘디아베바이오오마이’는 ‘~을 통하여,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디아’와 ‘견고케 하다, 확실히 증거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베바이오오’의 합성어로 ‘강력히 확언하다,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본절과 딤전 1:7에만 등장한다. 현재 부정사로 사용되어 바울이 디도에게 디도 자신 먼저 구원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하여 담대하고 확신있게 증언하라고 명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디도에게 이 구원의 교리에 해당하는 3:3-7의 말씀을 굳세게 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때 당시 그레데 섬의 교인들은 아직 구원의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더욱 굳게세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디도가 복음의 진리를 확신있게, 굳세게 전해야하는 이유로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심하여’로 번역된 ‘프론티조신’의 원형 ‘프론티조’는 ‘생각’이란 의미의 명사 ‘프론티스’에서 유래된 동사로 ‘깊이 생각하다, 걱정하다’라는 의미이다. 성도들에게 굳게세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전하는 그 진리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깨달을 때에 성도들은 매사에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깊이 있는 말씀에 대한 성찰과 묵상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가운데 선한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이 그 은혜로 인하여 죄악가운데 구원받았다라는 확신이 있는 자라면 자연스럽게 선한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은 구원을 위한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라 구원받은자로서의 마땅한 삶의 결과이다. 
‘힘쓰게’로 번역된 ‘프로이스타스다이’의 원형 ‘프로이스테미’는 ‘~앞에’란 의미의 전치사 ‘프로’와 ‘놓다, 두다’라는 의미의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앞에 놓다’라는 의미인데 성경에서는 ‘감독하다, 도움을 주다, 보살피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의 본성은 악을 행하는데에 빠르다. 그것을 거스르그 위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으로 번역된 ‘타우나’는 지시 대명사 복수형으로 ‘선한 일(칼론 에르곤)’이라는 복수형을 받는다. 선을 행하는 것은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선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본인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3:8a: The extent and nature of the “faithful saying.” Vv. 4–7 have spelled out the marvel of what God has done and has yet in store for his redeemed people—all on the basis of God’s attitude of kindness and love toward them, which he was willing, at great cost and in the face of great hostility and opposition, to express to them. The unstated, but clearly evident, implication is that he calls on them, his “heirs,” to express the same attitude toward sinners that he, God, has expressed to them and thus be true heirs who reflect their Father’s character. V. 8 goes on to make this implication explicit.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is another of the five identical citation-emphasis formulas (1 Tim. 1:15; 3:1; 4:9; 2 Tim. 2:11). For a discussion of the meaning of the formula see the comments on 1 Tim. 1:15 and Knight, Faithful Sayings, 4–22. In brief, λόγος indicates that some “saying” is being cited, and πιστός indicates that Paul is commending the saying as “trustworthy” (for what follows cf. Faithful Sayings, 81–86).
The negative evidence regarding the identification of the “saying” is that nothing that follows the formula appears to be appropriate as a saying. The positive evidence is that several statements in the preceding verses could well be referred to as a “faithful saying,” and the virtually unanimous opinion of commentators is that the formula refers to what precedes it. But to how much of the preceding verses? Dibelius-Conzelmann stand virtually alone in positing that the saying consists of vv. 3–7 (in their comments on 1 Tim. 1:15). The vast majority of exegetes identify it as vv. 4–7 (Alford, Barrett, Bernard, Bouma, Brox, Ellicott, Fausset, Hendriksen, Huther, Jeremias, Kent, Robertson, Simpson, Vine, Wohlenberg, and Wuest). A few identify it as vv. 5–7 or some part thereof (Easton, Lock, and Spicq). Kelly narrows his choice to vv. 5b–6, but then adds wisely that identification of the saying is difficult precisely because “Paul has clearly interwoven thought of his own with whatever traditional or liturgical material he has borrowed” (Gealy, who is apparently undecided, concludes his discussion with a similar note of caution).
It is true, as Dibelius-Conzelmann argue, that the first person plural gives a certain unity and continuity to vv. 3–7. But the use in v. 3 may be influenced by the following verses and adapted to them. Gealy notes that “vs. 3 is less rhythmical in form and liturgical in phrasing than vss. 4–7. Its list of vices would then … serve as the dark shadow against which the light of the Christian gospel shines the more brilliantly.” The obvious relationship of v. 3 to v. 2, signalled by the introductory words “for we were once also” and, in content, evidenced by its nouns, speaks against it being part of a saying continuing with vv. 4–7. Furthermore, it stands as a separate sentence not necessarily or inherently related to vv. 4ff., while all the other “faithful sayings” consist of a single sentence.
Kelly argues that v. 4 should “probably” be excluded from the saying “since both was manifested and God our Saviour are in the idiom of the Pastorals.” Furthermore, “since both 5a and 7 have a strongly Pauline tang, the extract may well be limited to 5b–6, i.e. the specifically baptismal section.” The appeal to the “idiom of the Pastorals” and “a strongly Pauline tang” is, in fact, one of the best gauges of what is and is not part of an citation, provided it clearly distinguishes one part from another. But this cannot be so definitely done here. Vv. 5b–6 also contain Pauline and PE language: ἔλεος is found nine other times in Paul, four of them in the PE (excluding this verse); σῴζω appears twenty-eight times elsewhere in Paul, of which six are in the PE (excluding this verse). The close combination of ἔλεος and σῴζω is, it is true, lacking elsewhere in Paul, including the PE, but this is also true of ἔργων τῶν ἐν δικαιοσύνη (v. 5a) and ἡ χρηστότης καὶ φιλανθρωπία (v. 4), both of which are excluded from the saying by Kelly. Admittedly παλιγγενεσία (v. 5b) does not occur anywhere else in Paul and only once otherwise in the NT (Mt. 19:28). But the same is also true of φιλανθρωπία in v. 4, which Kelly excludes, being found elsewhere only in Acts 28:2 and then with humans, not God, as the subject in view. Consideration of Kelly’s view thus shows not only that his criteria cannot with certainty limit the saying to vv. 5b–6, but also that the criteria, as valid as they are, simply do not serve to identify the saying.
Furthermore, Kelly’s elimination of v. 7 would have the formula “faithful is the saying” jump over that intervening verse to the saying rather than refer to what immediately precedes it. This is contrary both to the normal expectation and to Paul’s actual practice with the other “faithful sayings,” in which the formula refers to the immediately preceding or following words.
Kelly’s (and, e.g., Easton’s) exclusion of the first part of v. 5 (beginning the saying probably with διὰ λουτροῦ) i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saying is connected with a baptismal setting and therefore should begin with or be restricted to what relates to baptism. Kelly admits that “he saved us” and even the rest of v. 5 and perhaps even v. 4 are needed to complete the words and thought pattern that, it is claimed, begins with διὰ λουτροῦ. Since, as it is admitted, some words preceded διὰ λουτροῦ in the saying, why may they not be what we have in v. 5a and perhaps also v. 4? Easton’s assertion that the theological statement of v. 5a “would be out of place in the hymn that follows” is not convincing. Both Kelly and Easton seem to include ἔσωσεν with v. 5a, but then treat it as necessarily introducing and as virtually part of v. 5b, which shows the difficulty of dividing the verse. Admittedly, this may show Paul’s skillful blending of his argument with the saying, as Kelly in principle allows for. But it may more convincingly show that the two parts of the verse constitute one coherent thought, with ἔσωσεν as the verbal focal point that binds them together and is necessary to both parts.
Swete is “disposed to think” that the saying begins with v. 5 and regards v. 4 as “the writer’s note of transition from ἦμεν γάρ ποτε κτλ. to the quotation” (“Faithful Sayings,” 5). This is plausible, but since vv. 4–7 constitute a unit in both form and content and may as a whole be aptly designated a saying, there must be conclusive reasons for excluding v. 4. As it is, v. 4 signals the contrast in the saying to v. 3 that provides the reason for the admonition in vv. 1–2 by showing what God has done to and for those who were once also sinful (v. 3) in his great salvation (vv. 4–7). The bridge for the saying is thus the δέ added in v. 4 to set forth immediately the contrast and carry the reader from v. 3 to the saying. But even while we identify vv. 4–7 as the saying on the basis of these considerations, we must do so with the awareness that there is no evidence that will allow us to identify the saying with absolute certainty. (An early understanding of the saying as embracing vv. 4–7 is seen in the uncial Codex Sinaiticus, which separates v. 4 from v. 3 and joins vv. 4–7 [as noted by Ellicott and Simpson].)
The vocabulary of the saying is almost entirely what may well be called Pauline (for specifics see Knight, Faithful Sayings, 108). Of course, many of the words are not exclusively Pauline. Furthermore, some of the words are used in un-Pauline ways: Paul does not characterize human “works” (v. 5) with the term “righteousness” (neither does any other NT writer). ἀνακαινώσις (v. 5) in its only other Pauline (and NT) occurrence has a somewhat different emphasis. And φιλανθρωπία and παλιγγενεσία (vv. 4, 5) do not occur elsewhere in Paul’s letters. These non-Pauline qualities are in accord with Paul’s formulaic identification of these verses as a saying. On the other hand, he uses the sixteen or so words of the saying found elsewhere in his letters more often than any other single NT writer, and the first word, χρηστότης, is found only in his letters (10x). These considerations are insufficient to point to influence by any NT writer, except to say that the saying might have arisen in an area influenced by Paul.
A considerable number of commentators have associated “washing” (v. 5) with baptism. This hypothesis is strengthened by the concomitant focus on the Holy Spirit. In Acts and elsewhere in the NT baptism and the gift of the Spirit are related. Furthermore, the saying lays particular stress on initial inner change (“the washing of regeneration and the renewal of the Holy Spirit”), which is appropriate in connection with the initial rite of Christianity, which signifies such an inner change. And the saying is a terse creedalliturgical statement that would be appropriate at Christian baptism. This is exemplified in its trinitarian structure (God, the Holy Spirit, Jesus Christ), which would be fitting in connection with baptism (cf. Mt. 28:19). The corporate or public use of the saying is seen in its use of plural pronouns. Some have suggested that it is a “hymn” or expression of praise. Against this is the fact that God is referred to in the third person rather than the first person. Perhaps the saying was an affirmation spoken by those receiving baptism or by such people and the congregation together.
But v. 5 refers to “washing,” λουτρόν, and not “baptism,” βάπτισμα, a term that was, of course, well known among Christians. But the Christian community apparently chose to use a term that would point more directly to human inner spiritual need and the inner spiritual reality brought about by God. The accomplishment of that inner reality is spoken of in the past tense in the aorist verbs ἔσωσεν and ἐξέχεεν (vv. 5, 6). Christians confessed, therefore, that God had already saved them through the radical inner washing of regeneration, and they did so at the time that they received that which signified that washing, i.e., baptism. They did not speak of baptism as saving them or as being the means of salvation but rather of a past action wrought by regeneration, which baptism symbolized and represented. In this setting they thus utilized (as in Rom. 6:1ff.; Col. 2:11f.; 1 Pet. 3:18ff., especially vv. 20–21) the forceful and picturesque language which speaks of the reality of the Holy Spirit’s work under a designation that might also have been used of baptism.
3:8b–c Paul adds (καί) to the formula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his specific direction to Titus (σε) concerning the utilization and significance of what precedes. The demonstrative pronoun (here τούτων), as in 2:15 and elsewhere in the PE (e.g., 1 Tim. 4:11; 6:2), refers to the entire preceding section, i.e., 3:1–7, and not just to the “saying” (the λόγος) in vv. 4–7. This is borne out by the reference here to “good deeds,” which is the point of vv. 1–2 and the reason for citing the saying in the first place. So Titus is to speak about “good deeds,” such as vv. 1–2 have prescribed and which are to be done even for sinners (v. 3), and about God’s own attitude and actions toward us—as such sinners—in saving us and enabling us to do such deeds (vv. 4–7).
With the verb βούλομαι (Pl. 9x), which he uses elsewhere in giving apostolic instructions (e.g., 1 Tim. 2:8; 5:14), Paul expresses his desire that Titus do what is expressed in the infinitive that follows: “speak confidently,” even “insist” (διαβεβαιοῦσθαι,** 1 Tim. 1:7) on “these things.” ἵνα introduces the following subfinal clause or clause of conceived or intended result (Robertson, Grammar, 991; Burton, Syntax, 83; Deer, however, suggests that this use of ἵνα is imperatival as in vv. 13–14 and thirty-five other places in the NT [“Still More”]). The result that Paul intends from Titus’s insisting on “these things” is what he expects of “those who have believed (trusted in) God,” i.e., those who have come to know God’s love and kindness, his Spirit’s renewing work, and his great salvation. Paul thus introduces his usual insistence on faith with the perfect participle πεπιστευκότες, with the definite article οἱ signifying its use here as a substantive. πιστεύω with dative (τῷ) θεῷ occurs 5x in the NT (Acts 16:34; 27:25; Rom. 4:3; Gal. 3:6; here). Paul uses it twice of Abraham’s trust in God as the great example of the believer (Rom. 4:3; Gal. 3:6), and in Acts 16:34 it is used of a new convert, the latter most analogous to the usage here.
Paul intends that believers “be careful” (φροντίζω,** a NT hapax but 15x in the LXX; cf. the related φρόνιμος, 5x in Pl.), i.e., that they be intent καλῶν ἔργων προΐστασθαι. Two understandings have been proposed for this infinitive clause both here and in v. 14: “to engage in (apply/devote themselves to) good deeds” (e.g., NASB, RSV, NIV, NEB margin) and “to engage in (enter) honorable occupations” (NEB, RSV margin). προΐστασθαι (NT 8x, all in Pl.) “literally means ‘to stand in front of’ and was the word used for a shopkeeper standing in front of his shop crying his wares” (Barclay; for documentation see Field, Notes; Lock). But this is neither the only meaning of the word in Koine nor even one of the two meanings found elsewhere in Pauline usage.
Furthermore, Field questions whether any instance can be found of καλὰ ἔργα with the meaning “honorable occupations.” In this letter the phrase is used consistently of “good deeds” (cf. 2:7, 14; 3:1). Here Paul is repeating and reinforcing the appeal in v. 1 (as well as that of 2:14). Therefore, the context is decisively in favor of “busy oneself with” or “engage in” “good deeds” (see BAGD s.v. προΐστημι 2; cf. MM s.v. προΐστημι, using the Goodspeed translation: “make it their business to do good”; cf. Lock). On καλῶν ἔργων see the comments on 2:14.
That to which ταῦτα in the next clause refers is disputed. Opinion is essentially divided between it picking up on τούτων and referring again to what Titus is to “insist on” (Alford, Bernard, Ellicott, Hendriksen, Spicq, N. J. D. White, and Wohlenberg) and it referring to καλῶν ἔργων (e.g., Bratcher, Fee). Huther says that it refers back to διαβεβαιοῦσθαι, but this seems too limited. Some argue that for Paul to attach the adjective καλά to the καλῶν ἔργων would be a tautology (Alford, Ellicott, Huther, Wohlenberg). Many commentators say that what follows in v. 9 and is contrasted to this final clause in v. 8 by δέ determines what “things” Paul has in mind here (Ellicott, Fee, White, and Wohlenberg). But here, too, the divided opinion remains, since v. 9 refers both to teachings (e.g., “genealogies”) and to deeds (e.g., “strife”), so that some think that the matters of v. 9 are naturally contrasted with the “teaching” (Ellicott, White, and Wohlenberg) and others that they are naturally contrasted with the “good deeds” (e.g., Fee). Ridderbos holds that ταῦτα refers to the entirety of what precedes, i.e., vv. 1–7, and thus both to teaching and to the “good deeds” with which the section begins and which the teaching seeks to engender. This more comprehensive view is warranted by the broadness of what is excluded in v. 9.
With such a comprehensive view, it may well be that the two predicate adjectives, “good and profitable,” refer respectively to the two parts of the entire preceding section. Thus καλά is not tautologically attributed to the “good deeds” but is an affirmation of the “praiseworthy” (BAGD s.v. 2b) character of the teachings about God’s salvation (vv. 4–7). ὠφέλιμα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would then refer especially to the benefit that “good deeds” have for “people,” i.e., non-Christians, ἀνθρώποις here picking up the previous use of the word in v. 2, where non-Christians are primarily in view and where Christians are being urged to practice the consummate good deed of “showing every consideration for all people” (πρὸς πάντας ἀνθρώπους). Obviously such teaching with such an outcome of good deeds is “profitable,” i.e., “useful and beneficial” (ὠφέλιμα,** also in 1 Tim. 4:8 [see the comments there]; 2 Tim. 3:16) for “people.”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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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X Septuagint
Pl.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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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 Paul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London, 1930.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4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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