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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으로 되는 제자(월터 헨릭슨, 네비게이토)

 

1장.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1.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목표를 받아들이는 사람
  2. 주님을 위하여 어떤 값이라도 기꺼이 치르는 사람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4.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
  5.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6. 독립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7.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8. 쓴 뿌리의 올무에 걸리지 않는 사람
  9. 자기의 삶을 훈련할 줄 아는 사람

 

2장. 주님으로서의 예수님

  1.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2. 우리는 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 1)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라고 하실지 모른다. 
  • 2)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 3)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다. 
  1.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2.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3장. 제자가 치러야할 대가

"으뜸이 되는 비결은 나중이 되는 것입니다. 사는 비결은 죽는 것이요, 자유롭게 되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얻는 비결은 주는 것이고, 지도자가 되는 비결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며, 높임을 받는 비결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48p.

 

그리스도인이 되는데는 아무런 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엡 2:8-9)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51p

 

코르테즈 장군, 1519년 멕시코 정복의 꿈을 안고 11척의 배에 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베라쿠르즈에 상륙한 후에 11척의 배를 불사름, 멕시코 정복만이 살길이다라고 선포. 그리스도의 제자로 우리가 불태버려야할 배나 끊어버려야할 다리는 무엇인가? 

 

4장.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1)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2) 자신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5장. 전도와 제자

제자삼는 일은 전도에서 시작된다. 이는 천국 시민을 증가시키고 지옥에 가는 사람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 : 앗수르와 결혼, 혼혈. 민족의 정통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함

예수님께서 사마라아를 통과하신 이유 : 가장 가까운 길이기에, 복음의 보편성(선택된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종과 언어 국가와 성별을 초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Q.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세상사람으로부터의 분리(이원론)

 

9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필요(물과 휴식)를 이용해서 전도의 기회를 포착하셨다. 지금 주님은 피곤한 상태였고 여자는 사라미아인이었다. 전도하기에 힘든 이유들이 많지만 도리어 이를 기회로 선용하신 주님

 

전도의 원리

  1. 작은 부탁을 통해 기회를 포착할 것(7절. 물을 좀 달라함)
  2. 기회를 이용하여 그 사람에게 접근할 것(10절. 그녀의 필요(생수)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킴)
  3.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할 것
  • 당신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1. 드러난 문제의 근원을 쳐서 자신의 필요를 드러내게 할 것(16절. 네 남편을 불러오라)
  2. 마음을 상하게 하더라도 진리를 분명히 말할 것(22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3. 가능한대로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할 것
  4. 화제가 바뀌는 것을 허용하지 말 것(신학적인 질문(예배 장소)을 던짐으로 도덕적인 문제를 피하려함)
  5.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
  •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반응의 변화 : 유대인(9절), 주(11절), 선지자(19절), 그리스도(29절)

 

직분을 수행하려는 열망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전도의 은사가 없다든지, 그것이 힘들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전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전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구하게 되었도다(요 4:34-35)”

  • 전도가 우리의 은사인지 장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도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제자의 사역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된다. 

 

6장. 제자 후보생의 징모

제자 모집의 원리

  1. 기관으로 징모하지 말고 비전으로 징모할 것
  2. 자원하여 헌신하는 충성된 사람을 선택할 것
  3. 사역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사역을 서서히 키워 갈 것
  • 선택과 집중, 전진과 보존
  1. 일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사람에게 일을 맞출 것
  • 일을 통해 사람을 돕고 훈련시키라.(TOW-Trust, Opportunity, Wait)
  1. 전인적 성장과 계발을 도와줄 것(가르침, 훈련, 인격화)
  2. 사랑과 책망을 적절히 조화시킬 것
  •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5-6)
  1. 그의 종이 되어 섬길 것
  • 우리는 예수의 종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면서 나를 종처럼 대우하면 불편해하고 모욕감을 느낀다.
  1. 자신과 같은 사람을 재생산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을 생산해 내려면 먼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장. 배가를 위한 노력

배가의 원리

  • 원자폭탄의 원리(핵과 중성자의 충돌과 분열)
  • 문화명령(창 1:28), 출생율(출생과 육아의 댓가), 연어는 배가를 위해 죽음을 감수한다. 밀알도 재생산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 배가의 과정에는 반드시 대가가 수반된다. 
기간 부가 배가 기간 부가 배가
1년 365,000명 2명 13년 4,755,000명 8192명
2년 730,000명 4명 14년 5120000명 16,384명
3년 1,095,000명 8명 15년 5485000명 32,768명
4년 1,460,000명 16명 16년 5850000명 65,536명
5년 1,825,000명 32명 17년 6215000명 131,072명
6년 2,190,000명 64명 18년 6580000명 262,144명
7년 2,555,000명 128명 19년 6945000명 524,288명
8년 2,920,000명 256명 20년 7310000명 1,048,576명
9년 3,285,000명 512명 21년 7,675,000명 2,097,512명
10년 3,650,000명 1024명 22년 8,040,000명 4,194,304명
11년 4,025,000명 2048명 23년 8,405,000명 8,388,608명
12년 4,390,000명 4096명 24년 8,770,000명 16,777,216명

1주에 1센트, 2주에 2센트, 3주에 4센트, 52주에는 4,503,599,627,370,496센트(45조 달러)

 

배가의 열쇠-질(quality)

  • 핵반응의 지연을 위해 탄소 막대를 사용 / 배가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막 4:19)
  • 배가의 과정이 느리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이유중 하나는 훈련의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 바울은 드로아에서 온 도시가 복음을 듣게 되는 일보다 디도를 만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고후 2:12-13)
  • 성령께서는 사마리아성에서 빌립의 성공적인 사역이 일어나고 있을때 가사 광야로 빌립을 부르셔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행 8:26-27)
  • “제자삼는 사역은 큰 무리를 모아 놓고 강단에 서서 흥분된 목소리로 어조를 높이는 그런 인기를 누리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지고 훈련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성취되어 나가도록 기꺼이 값을 지불하는, 바로 그런 사람 ‘충성된 사람’을 찾아내어 그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일입니다. 그 한사람에게 힘을 다 쏟아 부어, 그로 하여금 제자가 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온갖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장기간이 소요되는 힘든 작업입니다.”(p.202)
  • 이 제자 삼는 사역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마 28:19-20) 지상명령
  • 두가지 질문 : 첫째 누가 나의 바울인가? 내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 둘째 누가 나의 디모데인가? 내가 도와서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배가의 성서적인 예화

  • 야곱의 12명의 아들, 출애굽(출 1:7)
  • 예수님과 12제자 : 3년을 함께 하심
  • 사도바울 : 행 19장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함

 

 

12장. 생의 목표 설정

목표 : 행동의 궁극적인 도달 방향, 도달해야 할 지점

 

  • 주님의 고백, 다 이루었다.(요 17:4) 제자들이 바로 주님의 사역의 결과였다.
  • 사도 바울의 고백(딤후 4:7-8)  
  • 나의 삶을 투자할 수 있는 두가지의 영원한 것 : 부활(요 5:28-29)과 하나님의 말씀(사 40:8)
  •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재산, 기타 다른 것들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 영적 재생산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시골에서의 힘겨운 삶과 도시에서의 편안한 생활(편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가를 지불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차이는 영적 재생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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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치기(알버트 그린)

 

 

서론

- 교육의 공식적인 통로 : 가정(사랑을 배우는 곳), 교회(죄로부터의 구원을), 학교(주위의 세계를) 그러나 계몽주의 이래로 학교의 영향을 점차 교회나 가정의 영향과 일치되지 않는 경향을 보여왔다. 

- 또한 또래 집단의 압력과 문화의 영향은 어린이들의 마음과 지성을 배양하는 비공식적인 기관이다. 

 

1부 이시대를 이해하기

1장 계몽주의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대상 12:32; 엡 5:15-17)

- 르네상스 : 유럽에서 중세와 현대 사이에 일어난 변천 운동으로, 이태리에서 14세기에 시작하여 17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예술과 문확의 번성ㅇ로 표현되는 고전의 영향으로 인한 인본주의적 부활과 현대 과학의 시작에 의해 특징지어진다.(p.23) 르테상스는 교회와 성경과 관련해서 긍정,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 종교개혁

- 과학혁명 :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 뉴턴과 로크 / 초기 과학자들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 계몽주의 : 과학에서 세계관으로의 전이, 성경적 계시에 대한 믿음을 중립화 해 버리고 무시해 버림으로 이성주의 세계관을 발달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우주와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는데 이는 동양종교나 기독교 신앙보다 더욱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 이러한 계몽주의 의식은 사실들이 중립적이며 진리를 제공한다고 여기게 되면서 신을 변두리로 몰아내어 버렸다./ 이러한 결과로 인간의 세계는 과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공적인 영역과 개인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목적, 가치, 도덕성, 윤리라는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고 이 과정에서 공적인 사고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종교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제한시켜버렸다.(변두리로 쫓겨난 신)

-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주의(동양의 순환론, 업보, 무방향)로부터 하나님의 영향 없이도 이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주의로의 이동은 인간의 권리를 강조하게 되었다.(p.28)

- 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인생에서의 성공, 특별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성공으로 옮겨갔다. 

 

2장 포스트모더니즘

계몽주의의 낙관론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너져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떠한 궁극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모더니즘은 적극적이고 낙관적이며 자기 확신적이었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아상은 수동적이며 회의적이고 불안정하다.”(42) /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 of Suspicion)

 

3장. 대안 의식

- 예언자적 상상력 : 대안의식 : 세계관을 대신하는 작업(세계관이 의식의 수준으로 떠오르고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활동하게 될때 우리는 철학을 갖는다.(51)

- 기독교 학교의 목표 : 학생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반응을 깊게 하는 창조세계의 탐색이다.(58)

 

5장. 기독교 학교에서의 찬양과 감사

하나님께서 창조계를 만드신 이유 :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계속 붙들고 계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할 수 있도록(86)

-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에게 반응하는 통로가 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연구하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드리고 찬양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부. 기독교 철학의 기초

6장. 기독교 철학

세계관이란 일반적으로 의식 수준 아래에 있기에 학교 설립에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어떤 세계관의 기초위에 시작하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원론적인 견해가 들어오게 되었다. 아퀴나스는 실재를 자연과 은총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이후에 종교개혁자들마저도 교회를 이러한 이원론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 이후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은혜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어 갔다. 프란시스 쉐퍼는 자연이 은혜를 삼켜버렸다고 말했다. 이처럼 서구사회는 과학과 자유의 두개의 축을 고수하게 된다. 

- 계몽주의 = 낭만주의 / 20세기 철학자들의 관심분야가 형이상학에서 인식론(존 듀이)과 가치론(실존주의)으로 옮겨졌다. 

- 포스트모더니즘 :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부정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인격자체가 독립적 존재라는 확신을 무너뜨리고 있다.

- 계몽주의는 이성주의를 강조하여 신을 사실이라는 논증 가능한 공공의 영역에서 개인적 가치의 영역으로 밀어내 버렸다.(97)

- 기독교인들이 철학을 회피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 : 1) 교회는 초기부터 철학과 더불어 지내왔다. 2)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위미한다.(잠 8:10-11) 3)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시다. 4) 여러세계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들을 의식의 수면위로 끌어 올려서 그것들을 사고체계(철학)으로 만들어 내게 된다.

-  철학연구의 기본 범주 :

1) 형이상학 : 실재의 본성에 관한 연구(우주론, 신학, 인류학, 존재론)

2) 인식론 : 진리와 지식의 본질에 관한 연구와 이러한 것들이 습득되는 방법

3) 가치론 : 가치의 질문에 대한 연구(윤리학과 심미학)

 

7장 하나님의 말씀

- “우리의 의식은 왜곡된 인식의 영역과 언어와 수사학이라고 하는 우상숭배적인 제도에 의해 장악되어 왔다.”(107)

- 북미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107-8)

- 하나님의 말씀(삼상 3:9; 히 4:12, 1:3)

-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들을 보존하시는 것은 하나의 계속적인 창조와 완전히 동등한 것이며, 또는 매 순간마다 무에서 또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는 것과 완벽하게 동등한 것이다.”(112)

- 실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자연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것 같이 그것은 질료의 원자나 분자가 아니다. 이상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는 진리에 대한 영원한 개념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영적인 것은 신앙에 의해서 이해된다고 주장하는 신스콜라주의의 진리 강령도 아니다. 사물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이며, 그대로 계속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속적으로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를 힘임어 “살고 기동하고”(행 17:28) 있다. (119)

 

8장 창조

창조는 1)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 2) 창조는 단회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개념으로 섭리를 통해서 진행된다.(골 1:17; 히 1:3)

- 창조의 특성 :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 계시적 특성(롬 1:20; 사 6:3; 시 8:1; 시 19; 욥 42:5-6) / 에덴동산(이름 붙임), 구약성경, 예수그리스도 

2) 우리가 찬양과 경배와 헌신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수단, 성례전(모든 피조물이 성례전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롬 12:1-2; 고전 10:31; 골 3:17

- 헤르만 도여베르트의 분류(15가지 양상)(132)

 

- 장님 코끼리 만지기 : 마르크스(경제적 측면), 스키너(생물학적 측면), 프로이트(감각)(134)

-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일 뿐 아니라 우주론의 근거가 된다. 

 

9장 인류학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사실(엡 4:24; 골 3:10)

- 문화명령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 :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해 사용하고 그리고 이것을 향유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140)

 

* 타락 : 인간의 독립선언

- 창 3장; 마 4장; 요일 2:16

* 구속 : 복음(좋은 소식), 범죄한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를 우리 자신들의 대표로 받아들임으로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모두 나약함과 죄성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있고 깨끗하며 구원하는 손길에 자신을 위임해야 함다.(146-7) 신비한 연합(요일 5:4, 요 15장 포도나무비유)

 

10장 지식

인식론 : 지식을 다루는 철학의 분야

- 계몽주의의 아버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사색은 그만두고 단순히 사실만을 추구하라고 말했다. 

* 현대 인식론의 문제 : 계몽주의는 새로운 빛의 시대로 18세기 이전에는 미신을 믿는 암흑속에 있다고 여겼다. 과학적 지식의 한계로 인해 자연과 자유가 분리되었다.(151)

- 우리는 계시의 빛 안에서만 세상을 자유롭게 선택된 창조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란 신앙과 학문이 분리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신앙이 없는 학문은 존재할 수 없다. 토마스 쿤(패러다임 쉬프트)과 마이클 폴라니는 개인적으로 편견적인 요소를 갖지 않는 과학적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히 11:3을 “믿음으로 ….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한다. 

* 지식의 본질 :

1) 참된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유지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응답과 반응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2) 사랑이 담기지 않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3) 지식은 인격적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

 

11장. 가치와 아름다움

 

12장. 우상숭배, 이원론, 영지주의

-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때 우리는 복음의 형식만 취하고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 우상숭배는 실로 피조물이 창조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 우상숭배

1) 우리들의 우상을 없애야 한다. 2) 우상숭배는 다른 사람의 손해를 끼치는 우리 생활의 한 측면만을 언제나 강조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3)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 생활의 모든 면들을 다시 살펴봐야만 한다. 4) 그리스도인들은 첫 세가지 과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갱신을 추구해야 한다. 

 

3부. 기독교 학교의 내용

13장. 창조와 언약

- 우리가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되며, 구원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히 1:3; 골 1:17; 행 17:28)

 

14장 학교 공부의 회복된 의미

- 그리스도인 교사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복원하고, 일반 교사는 중립적인 사실들에 어더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 계몽주의(가치로부터 사실을 분리 / 과학이 바뀔때 진리가 바뀌는 문제가 발생)

- 기독교 학교의 목적은 창조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세계에 접근하여야 한다.

-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한 학생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 학생이 탐구 행위에서 그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다.(218)

- 블룸버그 :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 경제적, 심미적, 법적, 윤리적, 고백적 앎

- 사실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의미를 회복하는 것

 

15장 인간의 경험과 학과 교과목

- 존재하는 실재를 아는 두가지 방법 1) 실험과 관찰에 의한 분석(과학적인 방법) 2) 경험을 통한 방법


양상들 교과목

신탁의 신학 선험적(생활의 의미와 방향을 표현)

윤리의 윤리학, 도덕 옳고 그름(절대적 & 임시적 자유)

공정한 시정학 법률, 판단의 측면(보상과 보복) / 국가

심미적인 예술 창조, 상상, 독창성의 영역(우뇌)

경제적 경제학 부족한 물건을 관리, 돈의 사용

사회적 사회학 사회적 교제

언어적 언어 상징적인 의미

역사적 역사, 문화 인간문화의 형성 능력

논리적(분석적) 이성, 논리 구별할 수 있는 능력

감각적 심리학 시각, 청각, 미각, 촉각

생물의 생물학 생명력

물질적인 화학 물질, 에너지, 원자, 분자

운동학적인 물리학 동작을 위해 공간이 필수적

공간의 지리학

양적인 수학

- 도여베르트의 15가지 양상, 각 양상들은 아래의 양상들, 경험들과 의존적인 관계를 가진다.(아래의 6가지 양상은 법칙을, 위의 9가지 양상은 규범(경험의 인간적인 측면)을 다룬다.) 

 

16장 더 많은 양상들과 학교 교과목들

- 공간적, 운동적, 물리적, 생물학적, 감성적 측면

 

17장 규범적인 교과목들

 

 

4부. 기독교 학교의 방법

18장 성령과 함께 걷기

- 육신의 생각 : 1) 즐거움에 대한 추구, 2) 소유에 대한 추구, 3) 존재나 능력을 추구(육신의 정욕, 안목, 이생의 자랑)

- 행복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라면 겸손은 회개의 결과이다. 그리고 회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계속적인 특성이고, 회개 없이는 우리의 가르침의 노력에 하나님의 축북을 기대할 수 없다.(270)

- 겸손은 성령의 마음인 사랑이라는 또 다른 특성에 도달하게 한다.(271)

- 희망 : 계몽주의의 약속은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그 어느때보다 희망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19장 학습에서 사랑의 위치

- 루이스의 4가지 사랑 : 애정(affection), 우정(friendship), 에로스(eros, sexual love), 자비(charity, love for God)

* 사랑과 학습의 본질적인 관계의 세가지 개념 : 1)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유일하게 참이다. 2) 사랑없이는 참 인간의 지식은 불가능하다.(빌 1:9-11; 엡 3:17-19; 골 2:3) 3) 사랑은 학습에서 형성능력을 갖는다.

- 루이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불필요한 피조물들을 사랑하셔서 존재케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을 사항하고 완전케 하기 위함이다."

- 교사들은 학생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창조된 과목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학생들은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공부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그들은 진정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20장 가르침에서의 환대

- 헨리 나우엔(영적 발돋움) : 외로움으로부터 고독, 적대로부터 환대, 환영(illusion)으로부터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영적 생활의 세 측면이다.(294)

- 교사의 목표 :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발달이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295)

 

21장 자기 지식을 통해 가르칠 자유

- 기독교적으로 가르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으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한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이다. 

 

22장 의미있는 가르침

-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중심이 고요하고 조용한 목소리에 대해 준비되도록 교과과정을 조직하는 것이다. 교과과정은 모든 만물이 창조주를 선포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 창조주에게 반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나타낼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321)

- 평가의 방법 : 공식적인 시험, 포트폴리오, 자기 평가, 프로젝트, 전시

 

23장 기독교 학교에서의 공동체

- 기독교 학교의 목적은 반응적인 제자도가 되는 것 : 학생들의 재틍을 이끌어 내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평안을 구하는 것

- 집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을 내어주는 특성을 전달한다. 경쟁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헌신을 하도록 한다. 사랑은 언제나 주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부인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능을 자기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즐기려고 노력한다. 또한 공동체를 향한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이 받은 사람은 회계할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도와준다.(329)

 

24장

- 인간 경험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창조된 세계에 제한되어 있다. 이 제외는 하나님과 만나는 인간의 능력이다. 기독교적 가르침을 다르게 만드는 이 요소는 성경적인 계시이고 피조물에 대한 공부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섬길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336) 

- 기독교 학교 교육 과정의 세가지 목표 : 1) 창조와 구원을 조화시키거나 화해시키는 것, 2) 창조아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삶에서 보여주는 화목한 생활을 격려하는 것, 3) 학교 공부를 통해 하나님르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양육하는 것(339)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측면 : 1)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이고 본질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깊은 깨달음은 그를 더욱 경외하게 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깊게 하는 것, 3)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준을 깊게 할 것, 4) 하나님을 섬기려는 깊은 열망(343-6)

- 결론 : 기독교 학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육과정을 학생들이 성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장은 창조와 구원이 화해하는 가운데 학생들의 삶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표현되는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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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다시 읽기(최종원, 홍성사)

 

 

프롤로그

‘중세’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 시대, 계몽되지 않은 암흑시대 등이 떠오른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이 중세를 ‘암흑시대’로 규정했고 17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중세 천 년을 이성이 사슬에 메이고, 사상이 노예화되어 지식에 아무런 진보가 없던 시기로 규정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중세의 열매가 르네상스였다는 연속성이 강조된다. 

 

중세를 건설적으로 읽으려면 중세 말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도덕적 타락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중세 교회가 어떻게 고대와 다른 문화 및 언어 토대에서 독자적 사상과 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는지 주목해야 한다. 

중세 교회는 중세 사회속에 뿌리를 내렸다. 중세는 천년의 기간 동안, 우리가 오늘 경험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다 겪었다. 여러 부침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속의 경험을 통해 오늘에 적용하고 배울 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확고한 신학적 잦대로 중세를 재단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 이미 정해진 판단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과거와 마주할 때 곱씹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역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질문할 것이 아니라, 희망은 역사의 성찰을 통해 오늘, 여기서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1장. 중세사와 중세교회 - 중세 유럽의 형성

1. 새로운 문명의 이식

로마 제국은 문명의 생태적 경계선인 포도와 올리브 재배 지역을 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이 그 한계선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문명의 한계를 넘어섰다. 

4세기 말 이후 훈족, 흉노족으로 알려진 이민족이 서유럽에 들어왔다. 450년경 훈족은 이탈리아 반도 로마까지 침입해왔다. 이때 훈족의 지도자와 담판을 벌였던 인물이 바로 교황 레오 1세였다. 이 훈족의 침입은 고대 로마세계를 무너뜨렸고 세계사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고트족은 남부 유럽에 자리 잡았는데,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건축의 결정체를 고딕 양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트’에서 유래하였다. 

이동경로가 가장 긴 민족은 ‘반달족’이었는데 이들은 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키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처럼 문명 파괴나 기물 파괴를 의미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 여기서 나왔다. 

 

2. 사건들이 만든 유럽 개념과 봉건제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지역으로 유럽을 정의했다. 

이후 8세기 이슬람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슬람 세력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유럽이라는 개념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터키는 유럽에 인접해 있지만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기에 유럽 연합 가입이 번번이 거절되고 있다. 

로마 문명, 게르만 전통이 합쳐진 중세 유럽 사회를 지탱한 두개의 기둥이 그리스도교와 봉건제이다.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는 기도하는 사제, 전투하는 기사, 일하는 농노의 세 위계가 봉건제를 지탱하는 상상의 체계라고 했다. 영주가 소유하는 장원을 통한 자급자족 경제는 이 봉건제를 작동시키는 기본 경제 체제이다. 

 

잉글랜드 존왕과 귀족 대표 사이에 대헌장(Magna Carta)이 체결되었다.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는 전투와 경제라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3. 중세 유럽을 형성한 그리스도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중세인들을 하나루 묶어준 최상의 가치는 종교였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의 라틴어 성서 번역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형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면 중세 말 잉글랜드, 체코, 독일에서의 자국어 성서 번역은 근대 국민국가 의식을 만들었다. 

중세가 형성될 때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종교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을 이어주고 작동시키는 기제 역할을 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가 무너졌을 때 그리스도교가 그 체제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유럽에서 교회는 공적 행정조직이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인간의 일생을 교회 교적부로 관리했다. 이 호적 관리 기능을 국가가 넘겨 받은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사회 유동성이 거의 무시된 봉건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 경계를 넘어 활동했던 세력이 수도사였고 사제였다. 

봉건제와 교회 중심의 구조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었다. 교류를 통한 새로운 문명이나 지식을 얻고 교역하는 경제 활동이 매우 제한된 구조였다. 유럽이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각성한 계기는 바로 십자가 원정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큰 의미중 하나는 알프스 이북 유럽이 중세 형성 이래 최초로 유럽 대륙을 벗어나 타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원정의 출발점은 종교적 열정이었지만 그들이 경험한 이슬람은 유럽보다 앞선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명은 충돌하면서 파괴되기도 하지만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낸다. 

 

4. 제도 교회와 세속 권력의 갈등

중세 유럽은 국가 제도와 교회 제도라는 두 가지 필수적인 제도 위에 성립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5대 교구의 하나였던 로마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치면서 다른 교회에 앞서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프랑크족은 현대 프랑스인의 뿌리로 프랑스는 카톨릭의 장녀로 불린다. 교황은 로마에 있었지만 신학의 발전은 프랑스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프랑크 족은 491년 이교도 왕 클로비스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와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다. 이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한 카룰루스 마르텔루스의 아들 피핀은 쿠데타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차지한다. 이에 피핀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교황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랑고바르드 족을 내쫓고 이탈리아땅을 교황에게 기증한다. 이것이 ‘피핀의 기증’이다. 이 기증의 함의는 교황이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토를 보유한 세속 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교황 레오 3세는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마그누스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한다. 이로 교황과 프랑크 왕조와의 협력관계가 본격화 된 것이다. 

이후 교황과 유럽 군주와의 관계에서 또하나의 역사적 이정표는 962년 2월 교황 요한 7세가 로마에 온 독일왕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세운 것이다. 이어 황제는 '오토의 특권’이라는 조약을 교황과 체결한다. 이는 교회의 독자적 교황 선출권을 인정했지만 선출된 교황은 황제에게 서약한 후에만. 취임식을 가지도록 규정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 문제의 주도권은 황제가 가졌다. 공의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고, 결론을 내리도록 압박한 것도 황제였다.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한 것도 11세기 중반 이후이고, 콘트라베라고 불리는 현재의 교황 선출 절차가 자리 잡은 것도 13세기 중반의 일이다. 

 

중세 교회의 역사는 소아시아 지역의 헬레니즘 문명의 세례를 받고 생성 발전한 초대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라틴어와 게르만족으로 구성된 낯선 유럽으로 옮겨져 독자적 정체성과 문화를 만들어간 여정을 보여준다. 중세는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려 들기보다 낯선 그대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5. 중세교회는 중세 유럽사의 일부

중세 유럽은 4-5세기 게르만 민족 이동으로 형성되었다. 독자적 문명의 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묶는 구심점으로 그리스도교가 큰 역할을 했다. 지정학적으로 갇힌 상황에 놓인 중세는 11세기 십자군 원정으로 외부 문명과 본격 조우하기 전까지 봉건제라는 자급자족 체제에서 살았다. 이 닫힌 사회 속에서 유동성을 지니고 지적 활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교회와 수도회가 맡았다. 십자군 원정 이후 선진 이슬람 문명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중세는 어두운 시기를 벗고 중세 전성기를 경험한다. 이 시기 대학이라는 제도가 생겨나고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달한다. 라틴 그리스도교 문화가 꽃피운 이 절정의 시기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확장은 흑사병과 교회 분열이라는 예기치 않은 자연적, 인위적 변수를 겪으며 주춤했다. 이 미증유의 혼란은 종교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았다. 인간 이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라는 개념으로 발전했고, 종교개혁과 근대 세계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2장. 무너진 서로마 - 서유럽 선교화 가톨릭화

1. 이교 문화 변혁의 책무

중세 교회는 위로부터 강화되는 제도 교회의 흐름과 더불어 아래로부터 제도 교회와 긴장을 유지하고 생성, 소멸된 수많은 수도회의 흐름과 상호 교차한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도시 종교로 발전했다. 그런데 중세 라틴 유럽은 로마와 카르타고 등 도시의 경계를 넘어 게르만 이민족들의 삶에 침투하면서 생성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가 도시를 넘은 것이다. 게르만 이민족들의 문화와 전통이 그리스도교와 공존을 시도하면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게르만 이민족들은 일부 다처제가 흔했는데 교회는 가정을 교회의 기초 단위로 인식했기 때문에 일부 일처제를 인정하고 이혼을 금지시켰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혼인이 성립되도록 했다. 

가톨릭 교회가 주관하는 칠성사에 결혼이 들어가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혼인의 법제화와 이혼에 대한 제도적 금지 등 가정사에 대한 교회의 절대적 간섭과 성직자의 혼인 금지 등 성에 대한 독특한 인식은 동시대 비잔틴 교회와는 다른 라틴 중세교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중세시대 공식적 이혼은 불가능했지만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청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 성립(토마스 크랜머 이혼의 신학적 근거 제공) 

중세교회의 특징이 혼인의 성사화, 이혼금지, 사제의 결혼 금지 등이라면 정교개혁기에는 이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졌다. 

 

2. 사제 독신과 노예제 폐지

비잔틴 교회에서는 독신이 강조되지 않았지만 라틴 교회에서는 척박한 유럽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효율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독신이 강조되었다. 

또한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기보다는 같은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스람 지역 등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노예를 매매했다. 

 

3. 그리스도교로 재해석된 이교 문화

그리스도교는 기존의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을 때 이교 신전과 이교 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건축물의 경우 공공건물이나 이교 사원에 십자가를 달아서 교화로 바꾸는 타협을 했다. 바실리카 양식이 그 예이다. 

이처럼 중세 그리스도교 선교의 특징은 그리스도교가 토착 이교 신앙과 혼합되며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헬레니즘 세계라는 문명의 토대에서 생성된 그리스도교가 비문명의 이교 문화에 침투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양보와 타협, 수용 등 토착화였다. 각종 이교 신들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성인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제도 교회를 통한 교화 방식의 하나는 끊임없는 종교적 두려움과 그 너머의 신비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성인과 수호성인으로 모자라 성직자라는 차별적인 신분계급이 생겼다. 

 

4.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서유럽 선교

역대 교황들 중 그레고리우스라고 이름 붙인 교황들은 대부분 선교적 열망, 그리스도교를 통한 사회 개혁 열망 등을 추구했다. 

서방 교회에서 독신을 강조한 이유는 수도사들의 종교적 모범을 통해 속인들을 교화하고자 한 것이고 이제는 순교를 통해 종교적 고결함과 신을 향한 결단을 표현할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는 독신의 삶을 통해 신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레고리우스 성가와 성화상은 탁월한 선전 도구였다. 성화상은 문맹자들을 위한 책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초기 중세 서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를 높임으로써 헬라어를 기반으로 하는 비잔틴 제국과 다른 라틴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었다. 

 

5. 울필라스와 패트릭

1) 게르만의 사도 울필라스

울필라스는 외교적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갔다가 그리스도교를 접한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헬라-로마 문화권이 아닌 지역으로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울필라스가 전한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의 것이었다. 이 갈등의 불씨는 동, 서방 교회의 분열로 폭발한다. 5세기 프랑크 왕 클로비스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여성과 결혼하고 세례를 받은 후 가톨릭 그리스도교를 수용한다. 

 

2) 패트릭

그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원래 잉글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후 자신을 잡아서 노예로 삼았던 아일랜드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다. 

로마 교회의 특징이 교황을 정점으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등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서제라면 아일랜드 교회는 수도원장 중심으로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도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헬라어 수도회를 의미하는 모나스테리온(monasterion)에서 파생된 용어인 민스터(minster)는 로만 브리타니아 시절 형성된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켈트 그리스도교를 형성)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색슨 선교 요청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문명화된 로마 수도원장이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야만족에게 다가서는 불안함이 있었음에도 597년 5월 26일 잉글랜드 남부 켄트에 도악한다. 

 

6. 보니파티우스의 독일 선교

잉글랜드 출신의 보니파티우스는 독일의 선교사로 간다. 토르를 섬기는 부족을 전도한다. 그는 754년 개종한 이들에게 세례를 주다가 폭도들의 습격으로 순교한다. 

 

프랑크 왕국, 슬라브족의 동방 정교회 수용이나 앵글로색슨족의 그리스도교회는 통치자가 특정 종교를 수용하면 전 구성원이 개종하는 하향식으로 이루어졌다. 하향식 개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지배 종교인 그리스도교 문화와 대중들의 이교 문화의 혼합을 가져왔다. 

지배자들의 선택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길은 열렸지만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문화와 가치가 대중의 삶과 가치관에 스며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수도사들은 창과 칼로는 침투할 수 없는 민중들의 삶 속에 들어갔다.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의 침투, 이 두가지가 접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화가 이루어졌다. 

 

7. 대중을 견인한 그리스도교

야만의 전통과 관습 속에서 그리스도교 문명은 조악하게 혼합되었지만 그것으로 마친 것은 아니다. 민중들의 종교성을 수용하는 대중성을 잃지 않되, 그 대중을 견인할 힘을 생성해 나간 것이 라틴 교회의 특징적 지형이었다. 

 

 

3장. 교황제, 전통을 창조하다. - 교황제의 형성

1. 점진적으로 발전한 교황 수위설

교황이 세속 통치자들과의 정치적 관계를 활용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만들어 낸 위로부터의 역사와 수도사들이 대중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문화를 토착화해 나간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가톨릭 교회에서 만나 교차한다. 종교개혁은 하나의 가톨릭을 지향하던 교황 중심 공동체의 균열인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수도회 해산을 가져왔다. 

 

초대교회 시기 형성된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는 이론적으로 평등했다. 그러나 유일한 서방 라틴 지역교회라는 지정학적 특수성, 서로마 멸망이후 라틴 세계의 질서를 주도했다는 현실, 동로마 황제의 정치적 개임에 맞설 권위의 필요, 로마 교회가 주도적으로 이민족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여 서유럽을 형성하였다는 요인 등이 겹쳐 로마 주교가 로마교회의 책임자를 넘어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이라는 헤게모니를 형성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두가지 전통 :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전통은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는 반면 가톨릭 교회는 성서의 권위와 더불어 제도 교회가 형성해 온 전통 역시 권위의 한 축으로 인정한다. 

 

교황제의 네 단계 발전 과정

1) 1단계는 교회가 시작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전후 로마 교회 형성기. 초기 로마 주교는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 중 하나 였으며 다른 교회와 수위권이나 지상권을 다투지 않았다. 

2) 2단계는 서로마 멸망 시점부터 11세기까지이다. 제도 교황제의 발전기로 종교적 권위체를 넘어 세속권까지 보유하는 교황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론 들이 등장했다. 

3) 3단계는 11-13세개이며 완성된 군주제로서의 교황제이다. 교황은 유럽 봉건 질서 속에서 상위 군주가 되어 종교 문제는 물론 세속 사안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4) 4단계는 14세기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가톨릭교회에 분열이 일어난다. 대립 교황들이 난립하고 교황청이 분열된다.  

 

2. 로마 주교, 교황이 되다.

313년 그리스도교 공인 당시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우월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서로마 멸망으로 인한 정치, 행정, 행정 부재의 상황에서 로마 교회는 종교적 권위를 기반으로 우월하고 정교한 내부 조직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무너진 제국 정부의 체제를 교황군주제는 자연스럽게 모범으로 채택했다. 

4세기부터 로마 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등이 주장했던 베드로 계승 이론에 관심을 두고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로마 교회는 외적으로만 제국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려 여러 내부 조치를 단행했다. 

 

3. 로마 교회의 수위성

교령집은 교회의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린 권위있는 서신이었다. 교황이 교령집을 반포했다는 것은 교황청이 중앙집권적으로 교회를 통제하겠다는 의지이자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 교황의 위상을 드러낸다. 

 

4. 로마를 구한 대교황 레오 1세

그는 성서의 권위와 신학 교리를 로마법과 접목시켜 교황군주제의 이상을 제시했다. 

* 레오 테제

1) 로마법에 따라 직책 보유자라는 면에서 베드로와 그 직책의 승계자인 교황은 법적으로 차이가 없다. 

2) 직책 보유자로서의 교황은 최초 교황에게 주어졌던 법적 자격을 동일하게 보유한다. 

3) 교황의 판결이나 교령은 교황 개인의 윤리나 도덕 등 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교황직이라는 객관적인 직책에 의거해 수행한 것이므로 유효하다. 

레오테제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주의, 교권주의와 교황무류설로 연결되는 근거가 되었다. 

 

5. 겔라시우스의 양검론

양검론이라는 표현의 성서적 출처는 그리스도가 체포당할 때 베드로가 말고라는 이름의 종의 귀를 칼로 벤 사건이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에게는 두개의 칼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종교적 권위, 또하나는 세속적 권력을 의미한다. 

 

레오 테제가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모든 교회에 대한 감독권을 주장한다면, 겔라시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 교황이 세속 권력과 견주어 실질적 우위에 서는 길을 제시했다. 

 

6. 중앙집권적 교회 형성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의 직접 통제를 받는 유럽 교회의 위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로마 제국 몰락의 시기에 교회를 통해 유럽을 건설할 기틀을 마련했다. 

 

7. 8세기의 위작

교황이 이탈리아와 유럽 지역에 영적, 세속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인용되는 문서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공식 선언했다. 로마 황제가 로마를 떠난 것이다. 4세기의 맥락에서는 천도라기보다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위태한 도시 로마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8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떠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와 인근 서유럽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은 교황의 유럽 지배 정당성을 확인하는 정점에 서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위조된 것이다. 

 

8. 사료 위조, 사실과 허구의 중세적 기준

위조라는 단어 없이 중세 가톨릭을 이해할 수 없다. 중세는 위조의 황금시대라고들 한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은 대부분 성직자였으므로 위조 역시 이들 몫이었다. 당시 성직자들이 죄의식을 갖고 문서를 위조한게 아니다. 이들은 위조라는 인식보다는 각색을 통해 신의 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종교심을 고양한다고 생각했다. 

 

중세에는 사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이 실제 역사성 여부가 아니었다. 역사적 사건은 아닐지라도 종교성 혹은 도덕성을 고양하고 사람들의 일체감을 함양하는 등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목적이 신성하고 정당하다면 허구도 역사로 인정되는 것이 중세의 심성이었다. 화폐 위조는 사형의 처벌을 받기도 했지만 성직자들의 위조는 교회를 보고하고 교회의 이익을 가져오는 행위로 정당하며 신의 보상을 받았다고 보았다. 위조자는 자신의 위조 행위가 신의 재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졌다. 

대표적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르네상스 학자들이 위조문서로 밝혀 냈다는 것은 비로서 위조를 식별해 낼 능력이 생겼다기 보다는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중세의 심성, 즉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용인이 되는 중세에서 이제는 객관적인 사실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세계관이 변화한 것이다. 

 

유럽의 중세 말, 교회는 맹목이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온상이었다. 토인비는 역사를 변혁하는 주체인 창조적 소수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지배적 소수로 군림한다고 지적했다. 

 

 

 

4장. 아래에서 형성되는 힘 - 켈트 수도회와 베네딕투스 수도회

1. 수도회, 중세 카톨릭의 시작과 끝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세속 통치자나 귀족, 고위성직자들로부터 재산을 기부받아 일반인들과 다른 차원의 종교적, 정신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숭고미를 간직했다. 하지만 중세의 종교적 타락은 곧 수도회의 타락이었고 개혁운동은 수도회 개혁이기도 했다. 

 

수도회는 초대 사막 교부들의 삶과 같이 신적 추구, 신과의 합일, 신의 임재를 추구, 신과의 신비적이고도 인격적인 교감 추구가 수도원의 삶이라면 수도사의 삶은 ‘영성'을 추구하는 삶이었으며, 수도원은 각 시대마다 필요한 영성이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운동'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위로는 교황제, 아래로는 수도회가 조화를 이루며 존속했다. 

 

2. 켈트 수도회의 선교와 학문

지중해 세계를 삼분한 비잔틴, 유럽, 이슬람 세력은 각각 헬라어, 라틴어, 아랍어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유럽은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와 그리스-로마적 요소가 게르만 이주자들과 만나 라틴 그리스도교를 형성한 상태였다. 

유럽을 형성한다는 것은 국교를 그리스도교로 정하고 로마 제국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의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로 정체성을 통합하고 그 위에 문명을 만들려면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가치가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내재화되어야 가능하다. 

 

초기 이집트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켈트 수도회는 유럽에서 형성된 베네딕투스 수도회보다 훨씬 엄격한 수도 규칙을 적용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완전하게 실천하기 위해 강력한 고행과 금욕의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에게는 매일 금식과 기도, 노동과 학문 정진이 요구되었다.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실천한 절대 순종과 자기 비움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되었다. 켈트 그리스도교 전통은 서유럽 라틴 그리스도교에서 고행과 참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켈트 수도회는 유럽 선교와 학문 증진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3. 아일랜드 그리스도교의 확장

- 콜룸바누스

- 베네딕트 비스콥

- 존자 베다 : 잉글랜드 교회사

- 요크의 알퀸

 

휘트비 교회회의(664년) : 오스왈드 왕이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한 결정, 이는 켈트 그리스도교가 로마 전통과 합쳐지면서 유럽 교회에 칼트 영성을 통합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4.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사 알퀸

수도원은 도덕 개혁을 이끄는 곳이자 지식과 학문을 선도하는 진보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는 통일된 중앙정부의 수립과 문명 국가 건설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활성화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상호 의존관계로 800년 성탄절,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하였다. 이는 서방교회와 세속 국가의 연합을 알리는 것으로 카롤루스는 알프스 이남의 로마가 아닌 잉글랜드의 요크를 선택함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이루어졌다. 

요크의 성당학교는 서로마 제국이라는 장차 형성될 새로운 제국의 일체성과 정체성을 높이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통합하려했다. 

궁정학교에서 알퀸은 3학(문법, 수사, 논리)와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를 교육의 기본으로 정립했다. 이 과정을 마친 경우에만 상위 학부인 신학, 법학, 의학 공부가 허용되었다. 카롤루스의 이상은 그리스도교 성직자 양성을 넘어 전문 관료 집단을 양성함으로써 국가의 미래를 만드는데 있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이성과 신학을 통합하는 스콜라철학의 선구자이다. 

 

5. 국가 정책의 선전 도구

11세기 만들어진 롤랑의 노래 : 카롤루스의 군대를 이끌던 롤랑이 에스파냐의 잔혹한 이슬람 세력과 싸우다 내부의 배신으로 전사하는데 이에 카롤루스가 이슬람 군대를 무찌르고 롤랑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 

왕국내 수도회 장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양이라는 목적과 세속의 통치 목적이 함께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수시로 수호성인의 중재를 탄원했다. 

 

6. 로마를 새롭게 한 베네딕투스

중세 유럽의 8-11세기는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세기(Benedictive centuries)로 불린다. 성 베네딕투스는 유럽의 수호성인이다. 베네딕투스회는 선교, 교회의 발전 및 학문 장려 등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베네딕투스는 이집트에서 이어진 수도회 정신을 6세기 이탈리아에 맞게 적용해서 운용했다. 이 수도회는 상호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이 회칙에는 수도회가 ‘스콜라’로 표현되어있으며 가혹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회칙을 마련하여 잘못을 교정하고 신적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엄격함만을 도입한다고 적었다. 

 

7. 배움의 터, 특수 부대

수도회는 지식의 보존자 역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학교의 역할을 수행하며 인근 유력한 가문에서 자녀들을 수도회에 보내는 자녀 봉헌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순종과 겸손’을 강조한다. 기도와 노동, 학습을 세가지 중요한 삶의 축으로 한다. 

 

8. 수도원 정신의 회복

수도회는 위로부터 아래로 부과되는 중세 종교성에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문명이 없던 지역인 유럽에서 문명의 원형을 찾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중심으로 형성된 켈트 수도회의 영향은 컸다. 

유럽 그리스도교는 수도사들의 버림과 비움의 수준이 능력의 지표가 되었다. 그들이 버린 만큼 유럽 문명은 채워졌다. 

 

 

 

5장. 두 외부 세력 -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동서 교회 분열

 

1.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교

유럽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세력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교이다. 이 두 세력은 중세 유럽의 지리적 경계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때론 충돌하고, 때론 협력하고 공존하며 중세 유럽 문명을 형성해 왔다.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왔기 때문에 개신교가 가톨릭과 친밀성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동방 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더 가깝다.

 

2. 독자적 비잔틴 문명 형성

동로마 제국은 흔히 비잔틴 제국으로 불린다. 비잔틴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인식했고, 그들의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일컬었다.

동방 교회에는 서방 교회와 다르게 황제가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정착된다. 황제는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대리자요, 로마 제국은 신국의 모형이자 그림자가 된다. 

제국내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포괄적인 지침을 마련한 칼케돈 공의회는 그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잔틴 제국의 너른 울타리 내에서 칼케돈파, 비칼케돈파, 네스토리우스파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에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을 의미한다. 서방교회의 맞은편에는 동방교회가 있다. 이때의 동방교회는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즉 기독론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교회를 의미한다. 

 

3.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정복 전쟁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기 위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방 원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진출하려면 동쪽 국경을 맞댄 페르시아와 평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로마 재정복에 군사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에 큰 돈을 주는 조건으로 페르시아 통치자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정치적 목적이었든 종교적 열망이었든, 그리스도교 제국을 통일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점령한 서방 영토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재정복 전쟁 실패로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각각 상호 이질적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4.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토대가 되어 유럽의 교회법이 발전하였다.

6세기 비잔틴에서 편찬된 법전이 11세기에 전 유럽에서 활용되었으니 둘 사이에 시공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영토 회복에 종교적 목적이 담겼던 것만큼 그의 법률 집대성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 세계를 하나의 법률로 다스리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을 배제하고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로마가 남긴 이교 문명을 넘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교 토대에 제국 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기존의 로마법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적용하여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실제 제국 내 다수어는 헬라어였다. 그리고 7세기 초반부터는 제국의 공식 언어가 헬라어로 바뀐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를 사용한 마지막 황제였다는 사실은, 라틴어 중심의 로마 제국이 헬라어 기반의 비잔틴 제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법 편찬의 기저에 흐르는 정신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로마법 사상의 통합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 편찬으로 비잔틴 제국은 윤리와 사적 삶에 적용되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게 되었다.

 

5. 니카 반란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니카 반란은 동로마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비잔틴 제국이 고대 로마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고 황제교황주의라는 전제군주정으로 가는 길을 결정적으로 열었다. 그 결과 비잔틴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문명이 탄생했다. 이제 황제가 선택할 길은 명확했다. 신으로부터 제국의 통치권을 받았음을 만천하에 선포할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폭도들의 불 지른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은 비잔틴 제국 창건을 상징하는 프로젝트였다. 

527년 12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 축성식에서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6. 비잔틴과 이슬람의 조우

중세 유럽은 지중해를 두고 비잔틴 그리스도교와 만났고,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이슬람과 마주했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관용 정책을 폈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세금을 추가로 내면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세율은 비잔틴 제국이 거두는 것보다 대체로 낮았다. 그 때문에 이슬람은 거센 저항 없이 꾸준히 확장했다. 이집트에서는 콥트 정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에스파냐의 무슬림 지배하에서도 모사라베 그리스도교는 토착 종교로 살아남았다.

 

7. 동서 교회의 갈등

7세기 무렵 비잔틴 세계에서 도시라고 부를 만한 곳은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없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에는 여전히 고전 교육을 받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점차 고대 로마의 흔적이 사라지고 지역성이 강화되었다. 한때 거대했던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으로 축소된 제국의 삶에 적응해 갔다. 급격하게 변하는 비잔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은 교회였다. 교회는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공공 활동을 촉진하는 중심이 되었다. 위축된 공립학교의 기능도 교회가 흡수하였다. 제국의 기능이 위축된 상황에서 비잔틴 교회는 병원과 구호 기관 등 자선 기관들을 발전시켰다. 이는 중세 유럽 형성 초기 무너진 서로마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여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던 역할과 무척 닮았다.

 

서방 지역은 서로마 멸망 이후 교황이 패권을 장악해가고 있었으나, 동방 지역은 여전히 황제가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 동방 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비잔틴 황제와 로마 교황이라는 두 세력과 버거운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8. 성상 파괴 논쟁과 보편적 제국 이념 상실

성화상은 대중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고, 더 나아가 교육하는 목적을 지녔다. 692년 트룰로 공의회는 진리의 그림자요 상징으로서 성화의 역할을 인정했다. 

유럽과 가까운 교회는 성화상에 우호적이었지만 이슬람 인근의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은 성화상을 거부했다. 

730년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교회에 성상 및 화상을 금지하는 성상 파괴령을 내린다. 성화상 금지는 우상숭배적 요소를 경계하는 목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권력과 교회가 겪은 갈등의 표출이기도 했다. 성화상의 주 생산지는 수도원이었다. 성화상이 활발하게 활용될수록 수도원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가 경제력을 확보하면 정치적 입김이 강화되는 건 당연하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금지 조치는 교회와 수도회 폐쇄, 재산 몰수으로 이어졌다.

 

9. 비잔틴 제국 내의 논쟁

성상파괴령은 비잔틴 제국이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더 강력하게 제국주의적으로 통치할 수 있던 시기에 내려졌다. 섭정이 통치하던 시기에 성상파괴령이 철회되었다는 것은 제국의 통제가 약화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다.

726년 성상파괴령 이전까지 교황은 동로마 황제를 군주로 인정했다. 그러나 성상파괴령은 교황이 더 이상 동로마제국에 예속되지 않고 서방의 카롤링거 왕조와 제휴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10. 필리오케 논쟁과 포티우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와 성자'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추후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와 성자'를 포함시켜 동ㆍ서방 교회가 분열되는 논쟁을 야기한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논쟁으로 칼케돈파, 단성론파, 네스토리우스파로 나뉜 것이 주 갈등이었던 반면, 서방 지역은 아리우스파 문제가 중세 초반에 지속되는 문제였다.

아리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동등함을 부정한다. 니케아 신경에서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한다'는 표현은 성부와 성자가 같지 않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서 성자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본성을 지녔음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고 표현했다. 이를 위해 '필리오케'라는 단어를 포함시킨 것이다.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떨치던 에스파냐에서 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589년에 열린 제3차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공식적으로 381년의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를 덧붙인다.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강제 폐위하고 포티우스를 사제로 안수한 뒤 총대주교로 임명한다. 이에 로마 교황 니콜라우스 1세(820~867)는 일련의 과정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포티우스를 파문하고 이그나티우스를 정당한 총대주교로 선포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포티우스는 교황을 이단으로 파문한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이 이유였고 이는 동서 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11. 쌍방의 파문, 동서 교회 분열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포함된 신학 논쟁으로 갈라진 이후 서방 교회는 독자적인 라틴신학 전통을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 갔다. 이때 라틴신학에 들어온 대표적인 교리가 칠성사와 연옥, 면벌부 등이다. 동ㆍ서방일치를 위한 공의회에서 결국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의 연옥 교리와 같은 새로운 신학적 발명을 거부하였다. 

 

12. 유럽 형성의 외적 토대가 되다. 

비잔틴 제국은 동-서방 무역로의 중심지로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연결하는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이다. 비잔틴 제국은 헬라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로마 문명, 이슬람 문명등과 교루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이 두 세력은 유럽 문명과 물리적 충돌을 겪으며 갈등하기도 하지만, 유럽이 문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6장. 세속권력과의 투쟁과 교황권 - 클뤼니 개혁 운동과 서임권 논쟁

 

1. 교권과 속권의 갈등 시작되다. 

중세 초 몰락한 서로마의 행정체계를 교황제가 대체하면서 교황제 및 로마 가톨릭교회가 강화되었다. 동로마와도 점차 멀어지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로마 교황은 견제와 균형 속에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피핀의 기증과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은 그 핵심 사건이었다. 

성직 임명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을 서임권 논쟁이라고 한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 : 그는 단순히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속 지배자들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권리까지 주장했다. 

 

-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의 요청으로 사라센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 그는 독일 국왕 신분이었는데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그는 96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는다. 교황의 대관식이 있어야 ‘신성(Holy)’을 붙일 수 있다. 오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은 지 1년 후 자신을 대관한 요한 12세를 폐위한다. 이후 일련의 교황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임명한 독일인으로 채워지게 되고 교황권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세속 권력이 임명한 성직자는 교회법에 규정된 전통적인 종교적 의무와 관행을 이행하는데 태만했다. 이들은 혼인을 하거나 동거인을 두고 성직 매매를 행했다. 복수겸직 성직자는 자신이 부재한 교회에 고용 사제를 두어 관리를 맡기고 수익을 챙겼다. 

 

2.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

프랑스 중부 클뤼니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1세가 자신의 아들이 죽자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하고 종교생활에 귀의한다. 그는 유럽의 표준 수도회인 베네딕투스 수도회 회칙을 엄격하게 고수하도록 해 수도회를 개혁한다. 클뤼니 수도회는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평화를 위하고자 하는 정신을 설립 헌장에 분명히 하였다. 클뤼니 수도회 운동은 교황권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9세기를 극복하도록 아래로부터 형성된 전환점이었다. 특히 성직 매매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성직자의 혼인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3. 교황의 하향식 개혁

수도회 출신이 교회의 상위 직책을 차지하면서 세속 교회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수도회라는 교회 내부의 힘도 교회 개혁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지만, 교회가 자정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세속 군주의 간섭이 역설적으로 교회를 갱신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1046년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에 갔는데 자신이 적법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교황을 만난다. 이에 하인리히 3세는 이 세명의 대립 교황을 폐하고 자신이 데려온 독일 주교를 교황(클레멘스 2세)으로 임명한다. 

레오 9세는 성직 매매와 사제가 결혼하는 관행을 뿌리뽑으려 노력했다. 

이후 교황의 선출을 황제가 지명하는 방식을 벗어나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오늘날 이를 ‘콘트라베’라고 한다. 

 

4. 힐데브란트 개혁과 서임권 논쟁

그레고리우스 7세라 이름 붙인 힐데브란트는 교권과 속권 사이에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핵심은 본래 가졌던 종교 본연의 의무와 가치를 교회법에 따라 구현하는 데 있었다. 과도하게 세속과 결탁한 모습을 벗고 수도원적 계율과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1075년 선포된 교황 교서에는 교황만이 제국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고(10조), 교황을 황제를 퇴위시킬 권한(12조)도 가지고 있으며, 성직임명권에 대한 권한(14조)도 있다고 선포한다. 레오 9세와 그 후계자들이 교황권을 교회 개혁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데 비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속 지배자들에 대응하여 교황권 자체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개혁운동을 활용했다. 

넓은 의미에서 서임권 논쟁은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세속 군주가 주교에게 지팡이와 반지를 주는 관행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였다. 

 

5. 서임권 논쟁의 전개

독일왕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밀라노 주교 선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로 충돌한다.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교황 선임이 무호라고 선포하고 교황이 정당한 이유 없이 독일 교회와 주교들을 공격했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1076년 2월 22일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포한다. 이에 독일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등을 돌렸고 하인리히 4세는 용서를 빌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에 교황을 찾아간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 하는데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왕의 의복 대신 회개를 상징하는 백의를 입고 맨발로 참회할 것을 명했다. 왕은 맨바닥에 엎드려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며 교황의 사면을 간청했다. 

 

6. 서임권 논쟁의 타협

이후 하인리히는 절치부심하여 그레고리우스를 뒤쫓고 결국 살레르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생을 마감한다. 누가 승자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관심은 속인 지배자가 세속 권한을 주교에게 부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직을 부여하는 상징인 지팡이와 반지는 수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세속 군주는 왕이 주교들에게 세속 권한을 부여했으므로 왕이 상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원했다. 

 

파스칼리스 2세가 고안한 해결책은 주교와 수도원장이 세속 군주로부터의 토지와 권력을 수여받는 관행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성직매매나 성직자의 혼인등은 끊을 수 있었지만, 땅을 소유하는 욕망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던 독일 주교들의 집단 저항으로 파스칼리스 2세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에서 황제는 주교권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 서임 관행을 포기했다. 그 대신 세속 군주가 주교에게 영토를 하사하고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대가로 주교로부터 봉신의 충성서약을 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7.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

국왕 헨리 1세는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려 할 때 안셀무스는 왕으로부터 이를 거부했다. 이에 타협안으로 주교는 국왕이 추천하여 교황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국왕은 반지와 지팡이를 주교에게 서임하지 않는다. 주교는 왕의 봉신으로서 왕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봉토를 받는다. 

 

8. 교황권 강화의 길을 열다. 

하인리히 4세 파문등 그레고리우스 7세가 취한 행동은 세속 정치 영역에서 전통적으로 우위에 있던 황제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했다. 

종교 개혁은 정치적으로는 국왕권과 교황권 대립의 결과이다. 국왕권의 승리로 교황군주제가 붕괴되고, 각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그 안에 국가교회가 생긴다. 종교개혁은 민족의식 형성과 국민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생긴 것이다. 

또한 서임권 논쟁은 속인 통치자의 종교 지배 관행에 교황권이 제동을 건 사건이다. 교황이 서임권 논쟁을 제기할 수 있었던 힘은 제도 교회가 수도회 운동을 통해 자정 노력으로 권위를 회복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 

 

 

7장. 문명의 공존과 충돌 - 콘비벤시아와 십자군

1. 일관된 해석이 없는 십자군

십자군은 중세교회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이다. 1095년 첫 십자군 원정을 시작으로 1300년 경까지 약 2백 년간 이어진 십자군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있다. 유럽지역에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가 금기어다. 

서임권 논쟁의 결과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결과 중 하나가 십자군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내적인 응집과 팽창을 통해서 닫힌 세계를 열고 나가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힘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처음에는 신앙적 열망으로 시작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서진한 이슬람 세계에 유럽이 고립된 상황에서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그리스도교가 공세를 취하고 반격을 가하는 사건이다. 

십자군 원정을 의도하고 계획했던 이들은 접경 지역에서 이슬람과 접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슬람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프랑스와 로마 교황등으로 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객관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2. 이베리아 반도의 공존 실험

콘비벤시아(Convivencia)는 공존이라는 의미로 중세 에스파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가 평화로운 공존을 만들어 냈다. 무슬림 사회 속에 살던 그리스도인을 ‘모사라베’라고 했는데 그들은 개종을 강요받는 대신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보호받는 계약을 무슬림 통치자와 체결하였다. 

 

3.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

1085년 이슬람 통치지역인 톨레도가 정복되면서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 무슬림들을 ‘남는 것을 허락받은 자’라는 의미인 ‘무데하르’라 부른다.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보호받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왕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중세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도인, 무슬림, 유대인들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상호작용은 예술, 건축, 경제, 문학과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결과물을 생성했다. 특히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이중 언어 지역이었으며 각 종교의 경전과 문학작품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콘비벤시아, 공존 정책을 통해서 아랍과 비잔틴, 서고트족 양식이 혼합된 건축, 활발한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번역 활동을 통한 문화적 교류, 학자들을 후원하기 위한 궁전, 도서관 등으로 지적 세계의 확장을 가져왔다. 

 

4. 7백 년 이상의 각축

교황청과 이탈리아 북부 유럽 국가들의 개입, 관용 정신을 훼손한 이슬람 강경파들의 득세, 그리스도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 사이의 전쟁 증가등이 공존을 훼손했다. 

711년 남부 에스파냐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의 등장부터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완전히 축출한 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놓고 7백 년 이상 벌어진 일련의 각축을 유럽에서는 ‘레콩키스타’라고 한다. 

이처럼 공존에서 대결로, 콘비벤시아에서 레콩키스타로 전환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십자군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적대감이 증폭되어 공존의 가능성이 상실되었다. 11세기 전까지 유럽은 유럽외 지역을 침공한 사례가 없다. 유럽은 늘 수세적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나 십자군 원정은 유럽이 집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군사 원정에 나선 최초의 사례이다. 이 두 전쟁은 교황을 중심으로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안정되고 그 자신감이 외부 세계에 대한 무력 원정으로 표현된 것이다. 

 

5. 무관용의 지배

서로 다름을 용인하던 공존에서 종교적 색채가 강화되면서 공존 전통은 무너졌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이슬람 교도들이 서로 접촉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정복지 내 이교도 재산은 몰수하도록 결정했다. 

 

6. 십자군이라는 관념의 등장

일반 신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유산 계층이 출현하면서 신앙적 관심이 고조되어 예루살렘 순례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십자군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이교도의 수중에 떨어져 더 이상 가볼 수 없게 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려는 종교적 목적이 강했다. 

 

7. 비잔틴의 원조 요청에 응답하다. 

십자군은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의 군사원조 요청에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응답한 것이다. 사절단은 알렉시오스 황제를 위해 군대를 파병하면 셀주크 튀르크가 막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길이 다시 열릴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는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감수성을 깊이 자극했다. 알렉시오스는 공격받는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줄 기사를 원했는데 우르바누스 2세가 행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동상이몽)

 

8. 교황의 약속과 민중의 호응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배할 수 있다는 기대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는 십자군 참전으로 교회에서 부과하는 종교적 참회와 고행을 면제할 수 있음을 선포했다. 또한 십자군 참전 서약은 개인이 사회에서 지고 있던 채무를 벗겨주었다. 

지속적인 십자군 원정은 종교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이유도 있다. 중세 유럽에 장자 상속제가 완성되어 장자가 아닌 자들은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질서속에 기득권을 차지하기 원했다. 또한 유럽에서 영지를 확보하지 못한 기사들은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고 번성하고자 했다. 또한 교황이나 가톨릭교회는 유럽 사회 안정에 따른 내부 불만을 해소하는 통로로 십자군을 활용했다. 

 

9. 십자군 운동의 전개 - 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첫 십자군 원정의 의도치 않은 결과 중 하나가 유대인 박해와 혐오이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원정의 이유를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상권이나 부를 소유한 유럽의 유산자였다. 평소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플에 와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총 6만명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동안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이 일어났다. 십자군들은 용병으로 셀주크 튀르크와 싸우기보다 예루살렘을 독자적으로 탈환하고자 했다. 

 

10. 십자군 운동의 전개 - 콘스탄티노플에서 예루살렘까지

십자군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필요했고 먹고 살 수 있는 만나가 필요했다. 그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스스로를 순례자로 생각했으며, 십자가 깃발을 들고 ‘신의 군대’라 불렀다. 

1097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솔로몬 신전에서만 만 명이 살육당하고 발목까지 찰 정도로 피가 바닥에 고여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르바누스 2세의 선동과 은자 피에르 같은 대중 설교가들에 의해서 자극된 조직화되지 않은 농민 및 대중이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참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정이 무질서하고 조직화되지 못했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통제 못할 광포함과 잔인함이 극한으로 표현되는 상황이 열렸기 때문이다. 

 

11. 소년십자군의 비극

3차 십자군의 맞수는 강력한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이었다. 

1212년 프랑스의 어느 양치기 소년이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십자군의 실패 이유는 탐욕에 물든 성인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며, 순수한 소년들이 가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년들이 탄 배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향하고 그 소년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5차 원정이후로는 십자군의 주도권이 세속 군주에게 넘어갔다. 즉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대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세속 군주들이 자신의 세력 강화와 교역로 확보를 목표로 벌이는 전쟁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이 남긴 것은 라틴 교회와 비잔틴 교회의 갈등과 반목이었다. 십자군을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도 추락했다. 

 

12. 십자군이 남긴 변화

십자군은 성지 약탈을 막고 순례길을 확보하려는 방어적 성전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순수한 종교적 이념과 열정은 한순간에 광기로 변했다. 

십자군이 중세 유럽 세계에 가져온 결과 : 종교라는 하나의 상수로 묶을 수 없는 민족의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단일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정체성의 표현이 십자군이었지만 실제 유럽은 단일하지 않음을 각인하게 된 계기 역시 십자군이었다. 십자군 운동으로 지방 귀족이나 제후 중심 체제는 약화되고 중앙집권적 국왕권이 강화된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권 확대라는 자신감의 결정적 표현이었는데, 십자군이 진행되면서 빚어진 종교적 일탈, 파괴, 약탈, 대학살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이미지는 악화되었고 교황은 대응에 실패했다. 전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면벌부를 무분별하게 발부하고, 이는 중세 타락의 기제가 된다. 유럽 대륙안에서 공존하던 유대인들이 타자로 인식되면서 그들을 탄압하는 사건이 십자군 원정 초반부터 줄곧 이어진다.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은 8차로 끝났으나, 중세 말로 가면서 이교도 무슬림이 아닌 유럽 내의 이단 등 다름을 억압하기 위하여 십자군은 또 조직되었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제도적 차별의 시작이 십자군 원정이 유럽 사회 내에 남긴 부산물이다. 

십자군이 끼친 또 하나의 항구적인 효과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통해 이루어진 활발한 무역활동과 교역 중심의 서유럽 도시 발달이다.

12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의 문화적 폭발을 경험한다. 중세 수도원 전통속에서 이슬람과 비잔틴의 앞선 과학적 발견과 문명이 들어오면서 대학이라는 지적혁명도 탄생한다. 이 대학 안에서 가르치는 신학을 스콜라학이라고 부른다. 

 

13.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이 두 종교의 만남은 공존과 대립, 콘비벤시아와 십자군이라는 이질적 형태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대한 다양한 해석

1) ~16세기 : 유럽에 실질적 위협 세력인 이슬람에 맞서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지키기 위한 정당한 전쟁

2)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 십자군은 중세의 어두움과 야만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 불관용의 상징이었다. 

3) 19세기 이후 :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십자군에서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유럽 제국주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은 십자군과 유사한 성격을 보인다. 모든 제국주의적 수탈과 억압이 서구화와 문명화를 위해 정당화된다. 십자군이 모든 잔인무도한 행위를 신적 재가를 받은 것으로 정당화하듯이, 제국 침탈 과정의 무력이나 수탈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십자군은 한 시대의 종교가 성찰에 실패했을 때 도달하는 광기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므로 자기 객관화를 통한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종교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또는 세계화의 이름으로 십자군은 역사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성찰하며 타자를 대할 때 인류는 문명의 충돌과 십자군이 아니라 관용과 공존, 콘비벤시아를 선택할 수 있다. 

 

 

8장.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다 - 12세기 르네상스와 대학의 탄생

1. 르네상스 개념과 재평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고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리스-로마 문명을 회복하는 14~15세기 유럽의 문예부흥 운동을 일컫는다. 고전 텍스트들의 재발견을 통해 유럽 문화의 새로운 부흥기가 왔다는 것은 르네상스의 기본 개념이다. 

르네상스의 개념은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를 통해 보편화되었다. 그의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중세와는 전혀 다른, 중세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출발로 르네상스를 상정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부흥운동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2. 12세기 르네상스의 내부 조건 - 도시 발전

중세와 근대 세계의 연속을 강조하는 중세주의자들은 중세가 뿌리고 가꾼 결실로서 근대를 바라보고자 한다. 고전의 재발견과 대학이라는 제도를 형성한 지적 혁명을 12세기 르네상스라 부른다. 후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예술과 문화 중심이라면, 12세기 르네상스는 교육과 지식의 진보가 중심이다. 

12세기 르네상스 주창자들은 중세를 암흑과 무지의 시대로, 근대를 빛과 진보의 시대로 놓는 이분법을 거부한다. 중세는 생각보다 덜 어두웠고, 르네상스는 덜 밝았다는 주장이다. 

도시의 생성과 상공업 발달은 중세 봉건제에서 활발하지 않던 새로운 계층, 도시 수공업자의 성장을 촉진했다.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이 보존하고 발전시켰던 고전 문물이 유럽으로 활발하게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사회안으로 상품과 같은 유형의 재화, 무형의 지식등이 유입되었고 그것이 교환되는 곳에 도시가 생겨났으며 도시로 인구 집중이 이루어졌다. 

도시, 무역, 새로운 계급 출현등은 중세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스콜라학이라고 부르는 신학을 발전했고 카톨릭 교회는 칠성사를 완성시켰다. 이 지적 혁명은 대학이라는 교육 기관 형성으로 완결되었다. 

 

3. 외부 조건 - 이슬람 고전 번역

십자군 전쟁 전후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과학 기술이 유럽세계에 들어왔다. 

이슬람의 힘은 다양한 원천의 문명들을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묶었다는데 있다. 

830년경 압바스 왕조 알 마문이 수도 바그다드에 ‘지혜의 전당’을 설립했다. 여기에서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이 번역되었다. 

코르도바의 도서관에는 40만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 이곳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수학 서적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 사업이 유럽세계에 12세기 르네상스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번역이란 언어의 기술적 변환에 그치지 않는다. 번역 자료는 라틴 세계의 정서와 결합, 각색되어 마침내 독자적 형식을 만들었다.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유럽 전통에 들어오면서 유럽에 지적 격변이 일어난다. 

아랍 사상가딜이 고전을 재해석해서 그들의 신학체계 속에서 종합한 것은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더 잘 설명하려는 유의미한 선례와 단서가 되었다. 

 

4. 수도원과 성당 부속학교, 대학을 열다

12세기 이전까지 유럽 그리스도교의 학문 세계는 수도원 학교와 성당 부속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지식은 질문 대상이나 탐구 대상이기보다는 순종의 대상이었다. 재속학교에서는 성직자나 수도사 등 종교인이 아닌 일반 관료 양성을 위한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1세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지식 자체가 담고 있는 회의와 불확실성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힜다. 그는 해소될 수 없는 모호함에 대해서는 이내 ‘나는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믿는다’라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합리적 논증을 사용하여 신학적 주제를 풀어갔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스콜라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믿음을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상수로 놓았다는 점에서 마지막 수도원주의자로도 흔히 평가된다. 

그간 교회 내에서의 지식은 값없이 주어진 신의 선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제 지식이 다듬고 포장해 시장에 내놓으면 팔릴 상품이 되었다.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에 근거한 지적 탐구가 무상 교육 공간인 수도원의 담벼락을 넘어, 지식 상품의 값을 매겨 경쟁하는 시장인 대학으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다.

 

5. 스콜라 논쟁의 시작

12-13세기 스콜라학은 유럽 세계의 지적 혁명이었다.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하고 설령 질문했다 하더라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을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논리를 통해 접근한 것이다. 

-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 성찬식에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축성할 때 빵과 포도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간 신비로 수용해왔던 성찬시 그리스도의 임재를 이성과 논리적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화체설의 정립,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

 

6. 최초의 대학인 아벨라드두스

마지막 수도원주의자인 안셀무스가 참된 지식을 얻는 믿음을 강조한 것과 반대로, 아벨라르두스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회의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제시한다. 

-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 분노한 숙부 퓔레르는 아벨라르두스를 거세 시킨다. 

 

7. 시장에서 태어난 대학

대학은 중세가 만들어낸 여러 제도 중 자율성, 독자성,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오늘까지도 연결된다. 라틴어 ‘우니베르시타스’는 영어 ‘유니버시티’로 옮겨졌고 교약학부와 상위학부는 각각 학부와 대학원 체제로 그 골격을 유지한다. 

대학교육은 기본적으로 강독이었다. 수업은 여러 권위있는 주장들을 살펴보고 주장들 사이의 충돌, 주장의 모순점들을 파악, 비교하는 것이었다. 

유형의 재화를 생산해 사고파는 여느 길드 조직과 달리 대학은 무형의 재화 지식 서비스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였다. 

대학에서 쓰는 마스터 역시 길드의 장인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명확한 것은 대학이 세속을 넘어선 고고한 상아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학은 시장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국제성이 가능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가서 공부하려면 화폐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의 성립과 상업화, 도시화의 영향을 떼어 놓을 수 없다. 도시 혁명이라고 불리는 장기 12세기의 도시 발전, 인구 증가, 시장과 화폐 경제 성장등은 수도원 학교와 성당 부속 학교를 대체하는 고등교육 기관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8. 3학 4과와 교양 교육 수준 향상

자유학예는 3학(언어와 관련된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4과(산수, 기학학, 천문학, 음악)이다. 

 

9.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볼로냐 대학은 학생 중심, 파리 대학은 교사 중심의 대학으로 발전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으로 발전한 철학, 과학 등과 달리 이탈리아의 법학 발전은 로마법 부흥으로 이루어졌다. 

볼로냐 대학이 발전한 이유 : 11세기 말 이르네리우스는 ‘로마법 대전’을 해석 적용함으로 법률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교황청이 사법체계를 정비하여 교황권을 높이기 위해 시도했다. 

교황청은 파리 대학을 교회 조직의 일부로 수용하여 대학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 

대학이 교권과 속권 모두의 지원을 받아 제도적 자율성을 확보했다. 이는 중세 대학이 교황권과 세속권에 필요한 전문 훈련을 받은 지식인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태동과 성장은 중세 도시의 성장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세속권과 교황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과도 맞물린 것이다. 권력의 우위성을 법적, 제도적으로 확보하려는 치열한 세력 다툼에서 대학은 양대 세력 모두 놓치기 여려운 권력이었다. 

 

10. 국민단과 자율권

국민단은 출신 국가별로 구성된 이익집단으로 대학이 속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받으며 자율 활동을 추구했다. 

‘중세 대학은 세속성을 향해 가려는 움직임 가운데 태어나 제도적으로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에 속하는 기관’이라고 프랑스 중세사가 자크 르 코프는 말했다. 

 

11. 지적 혁명과 12세기 르네상스

베르나르두스는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보다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더 예민하거나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공중에 들어 올려서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과거부터 축적된 힘 때문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은 진보에 대한 인식이고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슬람 문명의 기여를 빼고 12세기 유럽의 발전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슬람 세력이 보존하던 고전 사상과 그들이 발전시킨 주석서, 과학, 의학서 등은 유럽의 지성을 깨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적을 통한 지적 교류는 중세 유럽 문명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아랍 문명이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건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조합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그리스도교의 문명사회는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다. 

 

 

 

9장. 가장 큰 빛, 가장 짙은 그림자 - 인노켄티우스 3세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 위기를 반등시킨 공의회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외 20세기 중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카톨릭 공의회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화체설과 고해성사등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가 중요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틀이 이때 놓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전형을 보여준다. 

 

2. 인노켄티우스 3세 시대

그는 교황의 절대군주권을 추구한, 현실적이고도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교회의 도덕성과 내부 조직을 개혁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와 번영을 위해 교황을 최고 지배자요 재판관으로 하는 교황 지배체제를 주장했고 성공적으로 그것을 구현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갑자기 말라리아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는 어린 외아들 프리드리히의 후견인 역할을 부탁한다. 이후 1215년 프리드리히는 20세에 제국 황제로 등극한다. 

 

3. 프랑스 왕의 이혼 문제 간섭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첫 부인 이사벨라의 사망이후 덴마크 공주 잉게보르와 재혼하여 하룻밤을 보낸후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는데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 혼인 무효 결정이 잘못되었다며 1199년 프랑스에 성무정지를 선포한다. 파문이 가톨릭교회 공동체에서 개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가장 큰 징계라면 성무정지는 성직자 개인 혹은 특정 지역에 속한 성직자회에 교회 사무수행 즉 세례, 성찬, 미사, 서품식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성무정지를 명령함으로써 프랑스 전역 교회가 멈춰섰다.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압력을 버텨 냈지만 재혼한 아내가 죽자 교황에게 굴복하고 타협했다. 

 

4. 잉글랜드 왕을 파문시킨 교황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후버트 윌터 사망후 후임자 임명을 놓고 왕과 교황간에 대립이 생긴다. 존 왕은 존 드 그레이를 대주교로 지명하고자 했으나 교황은 스티브 랭턴을 대주교로 추천하여 서임했다. 존 왕이 반발하자 교황은 1208년 잉글랜드에 성무정지를 내린다. 존 왕이 굴복하지 않자 교황은 1209년 그를 파문한다. 이후 주위 심복들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하자 존 왕은 잉글랜드를 교황에게 봉헌하고 스스로 봉신임을 선언한다. 

성무정지와 파문이라는 종교적 징계가 상징적인 조치가 아니라 실제로 세속 군주를 무릎꿇린 이유는 대중들의 삶에 가톨릭 신앙이 깊이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 중세 유럽 최대 규모의 공의회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는 408명의 주교, 8백여명의 대수도원장과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과 제후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대표단을 보냈다. 이 회의의 두가지 큰 목적은 1) 성지 회복을 위해 십자군을 재소집하는 것과 2) 교회의 갱신과 개혁이었다. 

첫번째 목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교회 개혁을 위해 교황은 70개 조항을 공의회에 제시했다. 

교리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화체설을 가톨릭교회의 공식 성찬교리로 확정한 것이었다.(1조)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최소 1년에 한 차례 이상 고해성사를 의무화한 것이 핵심적인 변화였다.(2조) 

성직자가 성찬에서 축성하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 변한다는 교리는 성직자의 역할과 능력이 초월적임을 말해준다. 또 매해 속인이 의무적으로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은 교회가 대중들의 삶과 신앙을 밀접하게 돌보고 관리하는 주체로 확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성직주의의 완성이다. 

 

6. 사제 독신 제도 확인

규범 14조는 성적 순결을 지키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사제들의 독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5조는 사제의 음주와 사냥 등의 규정이다. 사제의 수준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궁극적 목적은 교회가 대중들을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체제 완성에 있었다. 

19조는 교회 건물도 일반 세속 건물과 차별을 둔다. 성직자 개혁을 통한 교회 개혁 시도는 결국 성직자와 비성직자 사이에 서로 건널 수 없는 ‘성직주의’라는 강을 내었다. 

 

7.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다. 

사목 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적절한 설교 제공이었다. 미사는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속인들이 정통 종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속어 소통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10조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하여 올바로 알려주는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중들의 종교적 유익을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할 것을 권하고 있다. 속어 설교는 라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넘어서 언어별, 국가별로 독특한 종교 정체성이 활성화되는 자연스러운 기회가 되었다. 

50조에서는 4대까지 연결된 친족까지만 결혼이 금지되고 그 이상을 넘어서는 친족 관계 혼인을 인정했다. 

21조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구 사제에게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연례 고해성사를 의무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및 종교적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개선해야했다. 더 나아가 고해성사가 영혼의 구원에 필수 요소로 강조됨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종교적 삶에 집착하게 되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했을 뿐 아니라 사면과 죄책 수행을 선포함으로써 그 지역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할 궁극적 권위자가 되었다. 

 

8. 칠성사 제정의 의미

- 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신품, 병자 성사가 있다. 

칠성사는 한 개인이 가톨릭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확증이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각 단계에서의 종교적 진행은 성사 수행과 같이 간다. 여기서 핵심은 구원을 향한 개인의 여정에서 그 매개가 교회요 사제라는 점이다. 개인의 구원의 길을 교회가 성사라는 의식을 통해 마련하고 보증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상징적이었던 교회 권력이 이제 대중의 모든 삶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주었다. 도덕성과 종교성을 고양하여 올바른 그리스도교를 만들어간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개인의 삶에 대한 억압과 규제이다. 

 

9. 종교재판소 도입

한 시대에 특정한 교리나 삶의 모습이 강조되면 불가피하게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차별받고 타자화되는 결과로 연결된다. 탄압을 당연히 여기거나 정당화하는 기제가 생긴다. 

라테란 공의회의 종교재판소는 사적 제재 대체였지만 변질된 면이 있다. 예를 들면 합법적 절차로 고문이 이용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으로 성직자의 권위가 교회를 통해 개개인을 더욱 강력하게 지배했다. 이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보면 엄청난 성공이지만 성직주의라는 부작용과 대중의 무분별한 종교 행태를 부추겼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 타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0.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단 세력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교회 지배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단과 유대인 및 여러 사회적 소수 계층에 대한 타자화를 제도화했다는 점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교황 중심의 지배 체제가 완성된 시기는 성취일까 타락일까? 성취의 이면은 사제와 비사제의 간극이 깊어진 성직주의였다. 

 

 

 

10장. 종교적 공포와 대중의 욕망이 만나다 - 연옥과 면벌부

1. 대중들이 발전시키는 문화

교회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교황, 사제, 수도사 혹은 신학자 / 대중

중세에 대중이 집단으로 등장한 첫 사례는 십자군, 이후 역사에서 주목받은 사건은 이단의 탄생이다. 

중세 말 미신적 성물 숭배 및 성인 숭배, 면벌부는 대중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2. 성체와 성모 숭배

13세기 초 화체설이 가톨릭의 공식 성찬 교리로 확정되면서 미사는 공식적으로 사제의 축성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성물이나 면벌부 증서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었다. 가톨릭의 공식 성찬 교리로 화체설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미사에서 대중이 관객으로 참여하여 기적의 드라마를 보는 종교로 변하였다는 의미이다. 

마리아에게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과도하게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가톨릭교회가 담지 못한 종교적 헌신과 정서적 측면을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 상크타 마리아(Sancta Maria), 영어 세인트 메리(Saint Mary), 이탈리아어 마돈나(Madonna), 에스파냐어 산타 마리아(Santa Maria), 프랑스어 노트르담(Notre Dame)등 다양하게 불리는 마리아는 가톨릭 신앙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3. 연옥의 출현

연옥(Purgatory)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연옥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을 구제하는 증서인 면벌부는 필요가 없어진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과, 천국과 지옥이라는 분리된 내세의 장벽으로 모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합리적 추론이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이다.

교회는 선한자들을 위한 천국과 사악한 자들을 위한 지옥 외에 제3의 거처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곳은 낙원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내면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 단테의 신곡, 연옥편 / 지옥은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반면 연옥은 언젠가는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본질적 희망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연옥은 정화하는 장소이기보다 희망의 장소였다. 

 

4. 면벌부, 종교적 심성을 지배하다. 

면벌부는 종교개혁의 단초가 된 타락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면벌부가 중세인들의 구원을 향한 긴 여정에 깊숙이 함께한 도우미이자 종교적 심성의 중요한 지배기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원이란 개인의 노력과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었다. 사후 구원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 것이 가톨릭교회였다. 중세교회는 대중을 위한 영적 제도와 교육을 행하는 제도 기관인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혼 구원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보다 안전한 구원의 길을 담보하는 종교적 이정표를 제시해야 했다. 

면벌부는 십자군 원정 전후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대중적으로 유포되던 것을 이후 스콜라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5. 십자군 원정에 등장한 면벌부

중세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한 사람이 고해성사를 할 경우 그가 범한 죄는 신의 은총과 사제의 권능으로 사해진다. 그러나 죄가 만든 후유증은 남게 되는데 이것을 참회자가 해결해야 할 잠벌(temporal punishment)이라 한다. 잠벌은 고해사제가 부과한 참회고행(보속)을 수행해야 사라진다. 고해사제가 죄의 경중에 따라 명하는 금식, 기도문 암송, 성지 순례, 지정된 교회 순례, 자선행위등을 통해 잠벌이 처리되고 경감된다. 일생동안 다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잠벌은 그 분량만큼 연옥에서 정화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면벌은 고해사제가 부과한 참회고행을 행하지 않고도 교황이나 주교의 권한으로 잠벌을 경감시키는 것으로 면벌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발급한 증서이다. 첫 면벌부 수혜자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었다.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는 대가가 현세의 축복이나 보상이 아닌, 내세에 받을 처벌의 완화라는 점은 중세인들의 삶을 지배하던 생사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면벌부는 모든 보속을 면제하는 완전 면벌부와 부분적으로 면제하는 한정 면벌부로 나뉘어진다. 이처럼 처음에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군인들에게 수여되었지만 이후에는 교회 보호를 위한 노력들(성지 방어, 이단 방어)과 믿음을 수호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노력들로도 확대된다. 아퀴나스는 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한 모든 행위에까지 면벌부를 확대했다.(성당 건축 기부금, 공공 건물 도로및 교량 보수 이후에는 라틴 그리스도교에 유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행위)

 

6. 면벌부를 공론화한 아벨라르두스

아벨라르두스는 면벌부를 발급하는 주교들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으며,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7. 정당화되는 면벌부 개념

연옥이라는 명사를 처음 고안한 성가대장 피에르는 ‘그러므로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베풀어지는 면벌부는 교회의 권위, 성도의 교통, 참회의 노력과 헌신이라는 세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수여될 수 있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개념을 통해 교회가 그 자녀들에게 베푸는 면벌부의 유효성을 논증한다. 그는 이 신비체는 인간의 육체와 닮았다고 본다. 육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지체가 상처를 업었거나 상해에 노출되면 다른 지체가 상처를 싸매고 상해를 막아선다. 이처럼 한 지체가 다른 지체의 부담을 함께 견뎌야 하고 또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유비들이 공식적으로 채택, 체계화된 것이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 학자들이 정리한 공로의 보고(treasury of merits) 개념이다. 교회법학자 호시티엔시스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이 피 흘림을 통해 얻은 잉여의 공로가 교회의 보물창고에 보존되어 있고, 보물창고 열쇠를 교회가 소유하고 있어 필요할 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공로의 보고’ 원리를 기술했다.(마 16:18, 요 20:23) 

 

8. 망자를 위한 면벌부와 신학적 논쟁

초기의 면벌부는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부과된 형벌을 면제하는 데만 효력이 있었다. 망자들의 영혼을 위해 가족이나 친척이 면벌부를 구입해도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진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이다. 신학적으로 불명확했음에도 망자들에게까지 효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 대중의 요구와 시장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요구에 대한 불가피한 추인의 성격이 짙다. 

 

9. 면벌부의 사회적 기능

중세인들에게 죽음과 심판의 문제는 실제적인 고민거리였다.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튀르트의 거친 위협과 내부적으로는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흑사병의 위협에 대중들은 노출되어 있었다. 하여 대중은 어떤 시기보다 성물 수집과 숭배 등 미신적인 신앙행위에 몰두하였다. 

대중의 두려움과 교회의 이해관계가 낳은 산물이 면벌부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안전한 자선 행위가 바로 면벌부 구입이었다. 면벌부는 연옥에서의 고통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경감시키려고 현세에서 투자할 수 있는 가장 배당률 높은 펀드와 같았다. 

교회는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성사와 전통이라는 권위있는 안내자들을 곳곳에 비치하여 도움을 주고자 했다. 면벌부도 중세의 이런 종교적 심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로서 생겨나고 확장된 것이다. 면벌부는 중세인들의 깊은 종교적 불안을 매개로 자라난 중세 종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면벌부는 오늘날로 말하면 자선 사업과 교육 사업의 국채 발행 기능을 포괄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면벌부 판매 대금은 종교 시설이나 구빈 시설 건축뿐 아니라 학교 설립에까지 사용되었다. 

연옥 신앙, 미신적 성물이나 성인 숭배 등이 대중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면벌부는 가톨릭교회 타락의 상징으로 지금껏 인식된 것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자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비판했던 가톨릭 교회의 과도한 미신적 신앙의 원인은 13세기부터 찾을 수 있다. 면벌부는 중세인들의 두려움과 종교적 욕망을 매개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 두려움과 욕망을 제도 교회의 권위, 성인과의 교통, 그리스도인의 참회와 헌신이라는 기제를 통해 정당화했다. 그 결과 중세인들은 제도 종교가 약속하는 손쉬운 구원의 방식을 좇아 분별없는 종교적 욕망을 표현했다. 

 

 

 

11장. 교권 강화의 반작용 - 대중 이단과 탁발수도회

1. 제도권 밖 종교운동

중세 유럽사에서 12-13세기는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정점을 향한 시기이다. 교회 혹은 성직자 개혁 요구에 대해 교황청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직주의 강화를 통한 하향식 개혁으로 대응했다. 

제도 교회가 수용하지 못한 이 운동들은 교회에 수용되었을 때에는 교황이 인정하는 수도회가 되어 가톨릭 역사 안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수용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단으로 분리되어 탄압대상이 되었다. 

 

카타리파는 성스러운 것, 속된 것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펼치고 독자적 교회 체계를 만들어간 대표적인 이단운동이었다. 반면 발도파는 성서안에서 그려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운동이었다. 

 

2. 정통 확립과 대중 이단

로버트 그로스테스트가 말하는 이단의 정의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인간의 이해에서 기초해서 생각하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철회하지 않고 완고하게 고집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이단의 역사이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볼 양면성이 존재한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과 고해성사 등을 교리로 확정하면서 성직자의 권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13세기 등장한 이단운동은 제도 종교의 영향력 과잉 반성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청빈의 삶 추구는 동시대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새로운 신앙의 길로 제시되었다.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들이 주로 교리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중세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윤리적, 실천적인 반발이 결국 교리적인 차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3. 종교적 완전성을 지향한 카타리파

카타리는 ‘순결’, ‘청결’을 의미하는 단어로 12세기 중엽 시작되어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발전하면서 서유럽 여러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프랑스 알비 지역에서 큰 세력을 얻어 ‘알비파’라고도 불렸다. 

카타리파 신도들은 세상의 어둠속에서 청빈과 정절을 통해 빛을 비추는 삶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했고 육식을 거부했으며 결혼을 포함한 육체적 관계를 부정했다. 이들은 선한 신과 악한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이원론, 단순하고 엄격하고 순결한 삶에 대한 지고한 동경을 주장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대립하는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세를 확장했다. 이에 1209년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모집했다. 이슬람에 대항한 무장 운동이었던 십자군이 유럽 내 유럽인을 처단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이다. 

예루살렘 십자군이 회차를 거듭할 수록 순수한 종교적 목적을 넘어서 참가자들의 영토 획득과 사회적 신분 상승이라는 잘못된 목적으로 얼룩졌듯 20년간 지속된 알비파 십자군도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게 되었다.

 

4. 사도적 삶을 추구한 발도파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 지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과 이탈리아 각지로 흩어진 운동이다. 리옹의 부유한 상인 발도는 성인 알렉시우스의 전기를 통해 감화를 받고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1173년 발도는 자신이 지금껏 지켜 온 가정과 사업과 부를 버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을 택했다. 발도의 금욕적 삶과 검소함과 단순함을 권면하는 설교를 통해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교황은 발도파가 추구하는 종교와 삶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주교의 허락없이 설교하는 것은 가톨릭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보아 설교를 금지한다. 가톨릭 교회는 발도파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발도파를 정통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가톨릭 빈자들(Poor Cathoiics)라는 이름을 내리고 후에 후밀리아티(Humiliati)로 불리기도 했다. 

발도파의 신학의 핵심은 성서의 가르침을 교황이나 교회의 결정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국어로 된 성서를 읽고 그 가르침을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성서중심주의의 뿌리를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독자적 흐름을 유지하던 발도파는 신생 프로테스탄트와 연합한다.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고 주변부에 머물던 발도파가 자신들의 종교적 교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장 칼뱅의 개혁교회로 이동한 것이다. 

청빈의 삶과 금욕을 추구하고 성서 연구와 대중 설교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것은 탁발수도회와 비슷하다. 미사 중심의 가톨릭 예전에서 성서가 제시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도적 청빈을 주장한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발도파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탄압을 받은 반면 똑같은 역할을 한 탁발수도회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5. 탁발수도회와 사도적 청빈

수도사를 나타내는 몽크(monk)가 단독을 의미하는 모노(mono)에서 유래되었듯 수도사들은 홀로 고행하며 더 노 은 수준의 종교적 삶을 실천했다. 

13세기 교황권의 전성기 이후 성직주의가 강화되고, 현세와 내세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교회의 권위는 연옥의 탄생, 면벌부 매매, 성물숭배 등 새로운 종교 현상을 낳았다. 이 모든 것이 성직주의가 그 기반이다. 이에 반발해 대중 이단운동들이 등장하고 가톨릭교회는 십자군과 종교재판을 통해 이들을 치리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가 등장한다. 탁발수도회는 몽크가 아니라 프라이어(friar) 형제로 불렸다. 이들은 기부나 후원을 통해 재산을 유지하던 관행을 거부하고 오직 탁발, 즉 구걸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탁발수도회는 구원이나 더 높은 종교적 가치 추구가 반드시 세속을 벗어나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주어진 의무를 최선을 다해 감당함으로써 신의 뜻을 충족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두개의 위대한 탁발수도회가 시작되었는데 가난과 청빈을 모토로 한 작은 형제회로 불리는 프란체스코회와 설교자 수도회라고 불리는 도미니크회이다. 

 

6. 무소유와 청빈을 추구한 프란체스코회

프란체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중부 아시스의 한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지내다가 1208년 마 10장의 내용을 읽으며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프란체스코가 사도적 청빈이라는 극단적 가치를 들고 나온 이유는 당시 점증하는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중세 도시에서는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 탁발수도회 운동은 주로 부유한 중산층과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엘리트 운동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청빈의 이상을 구현할 수록 그들의 종교적 진로는 밝아졌다. 탁발수도회 출신으로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수립된 그 세기에 탁발수도회 출신의 교황이 나오기 시작했다, .

점점 세가 확장되면서 조직화가 필요해졌다. 조직화되지 않으면 발도파와 같이 대중 이단운동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기에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무소유를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내용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는 이 운동을 구두로 승인했다. 

 

7. 프란테스코회가 부딪힌 두 문제

교황이 인준한 프란체스코 회칙에는 수도회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돈을 사용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했다. 하지만 수도회가 조직화되고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무소유 원칙은 지켜지기 힘들었다. 

두번째 문제는 교육이었다. 프란체스코도 학문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수도회 내에서도 학문탐구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이후 도미니크회와 경쟁하면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보나벤투라,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이 중세 프란체스코회를 대표하던 학자들이다. 

 

8. 설교를 통해 개혁 추구한 도미티크회

프란체스코회가 청빈을 강조했다면 도미니크회는 설교와 가르침을 강조했다. 

도미니크회는 카타리파 등을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대중 사목활동을 하려 설립된 수도회였다. 발도파와 프란체스코회가 연결되듯 카타리파와 도미니크회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미니크회는 대도시 대학에 학교를 설립하는데 적극적이었다.(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탁발수도사들은 세속 학문인 교양학부 과정을 거부했고 교황은 이 교양학부 과정을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중세 말 대학의 신학자들이 현실 세계와 담을 쌓고 탁상공론과 언어유희에 가까운 신학 논쟁에 몰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9. 진정한 사도 계승의 요구

대중 이단 운동은 가톨릭 교회가 가진 무소불위의 힘과 강화된 성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했다. 

교황은 제도권을 벗어난 종교 운동을 제거하기 위해 십자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중세의 모든 개혁 운동이 수도회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13세기 탁발수도회는 강화된 교권주의, 성직주의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에게 실천적으로 다가갔고, 자발적 청빈과 설교를 통해 대중들이 추구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종교의 길을 제시했다. 

탁발수도회는 도시를 중심으로 생성되어 또 다른 도시 제도인 대학과 만나 도시의 종교를 만들었다. 탁발수도회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서 시작한 종교 운동이 엘리트 학문 세계에 정착하여 전혀 다른 성격의 결과물을 생성했다. 

교황권의 전성기와 맞물려 등장한 대중 이단 운동이나 탁발수도회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 요구였다. 그 중심을 관통하는 사도적 삶, 사도적 청빈의 실천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교회에 대중이 요구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웅변해준다. 

 

 

12장. 가톨릭교회, 분열되다 - 아비뇽 유수와 교회 대분열

1. 흑사병과 국민국가 관념 출현

14세기 중엽 유럽 대륙을 강타한 무시무시한 재해인 흑사병은 유럽의 사회및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유럽인들의 세계관과 인간관, 종교관에 근본적 변화가 왔다. 흑사병은 중세의 세계관을 넘어 르네상스와 근대를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 

12세기 르네상스로 교역로가 확대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봉건제에 점차 균열이 일어났고 그 균열을 끝낸 것이 흑사병이었다. 봉건제 사회는 노동집약 형태의 농업사회이다. 노동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봉건제를 지탱하던 농노 계층이 해체되고 도시 이주 인구가 늘게 된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면서 사회 갈등은 커졌다. 

이 14세기의 변화중 하나가 국민국가라는 관념의 등장이다. 이 민족감정을 강화시킨 사건이 14세기 중반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 전쟁이다. 

 

2. 오래가지 못한 교황 지배의 시대

인노켄티우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유럽이 교황 지배의 시대로 들어왔음을 알렸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13세기 중엽 가장 유명한 가톨릭교도는 프랑스왕 루이 9세이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4세가 사망한 후 신임교황이 선출되지 않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은둔 수도사가 천사 교황이라 불리는 켈레스티누스 5세가 된다. 그에게는 외교력이 부족했고 이후 보니파키우스 8세가 세워진다. 그는 교황권 강화를 위해서 1300년 희년을 선포하고 로마 성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는 방문객에게 완전사면권을 약속한다. 

 

3. <우남 상크탐>과 필리프 4세

루이 9세의 손자였던 필리프 4세와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성직자 과세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이전 인노켄티우스 3세와 잉글랜드 존 왕의 과세문제로의 충돌때는 교황으 승리했다면 이번에는 교황이 국왕에게 머리를 숙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중세 교황 교서, <우남 상크탐>을 반포한다. 이 교서의 첫 두 단어가 '우남 상크탐'으로 이는 '하나의 거룩한’이라는 의미이다. 우남 상크탐 3조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베드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으로 이어진 한 머리를 둔 한 몸이라고 교회를 규정했다. 우남 상크탐은 교황권의 신적 기원을 주장했던 교황 겔라시우스의 양검론을 인용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했다. 우남 상크탐의 마지막 문장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임을 선언하고, 진술하고, 규정하고, 공표’했다. 보니파키우스는 전성기의 향수를 잊지 못한 중세의 마지막 교황이었다. 

 

4.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 70년

보니파키우스 8세 사후 교황청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탈리아 출신 교황 베테딕투스 11세를 선임하지만 8개월만에 사망한다. 그후 프랑스 추기경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한다. 그는 로마 귀족 가문 사이의 세력 다툼에 불안을 느껴 1309년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머무른다.  이를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고 불렀다. 강제로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달리 교황은 프랑스 왕의 압박으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이라는 세속 군주의 영향력하에 교황이 종속된 시기를 보낸것은 사실이다. 이 아비뇽 유수기간동안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대거 선출되었다. 

70년의 아비뇽 체류 이후 교황은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귀환한 이듬해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는데 이때 이탈리아인이었던 우르바누스 6세가 선출된다. 

 

5. 로마 교황이냐 아비뇽 교황이냐

우루바누스 6세가 프랑스 추기경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추기경들은 콘클라베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새로 콘클라베를 진행하여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에 대립교황 체제가 장기화되었고 대립교황은 서로를 파문했다. 이로써 두 명의 정당한 교황이 각각 로마와 아비농에서 추기경단과 행정 기구를 갖추어 완벽한 두 교황청이 생겼다. 이 사태는 40년간 지속되었다. 대중에게 이 사건은 제도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다양한 교회 밖 종교성이 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비뇽 교황청 시기를 살며, 말년에 교회 대분열을 목도한 옥스퍼드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에게 대분열은 교황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생기는 필연적 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교회 타락의 정점으로 더 나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다. 

이 분열때문에 교황은 유럽 정치 지형도에서 주도권을 크게 상실했다. 이 종교 공백을 각 국민국가가 차지하고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6. 파리 대학의 권고

교황청은 더 이상 유럽 가톨릭 전체를 공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으며 이 분열의 문제는 두 교황과 양측 추기경들 손에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파리대학 신학자들이 공의뢰 개최를 주장했다. 공의회는 교황의 요구로 열리게 되는데 이 경우 이것이 불가능했다. 파리 대학 교수들은 공공선 추구가 교회의 최종 가치여야 하며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공공선 추구를 위해 그에 위배된 결정을 취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7. 실패한 피사 공의회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앞서 파리대학 신학자들의 요구가 있은지 30년만의 일이었다. 공의회는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를 교회 분열 책임을 물어 파문하고 교황직에서 축출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밀라노 추기경 피에트로 필라르기를 새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선출했다. 

하지만 프랑스, 잉글랜드, 포르투갈, 보헤미아 등 다수의 국가가 통합 교황알렉산드르를 지지했다. 하지만 나폴리, 독일, 폴란드는 그레고리우스를, 에스파냐와 스코틀랜드는 베네딕투스를 끝까지 지지했다. 두 명의 교황을 폐외시키고 한 명의 교황을 선출하려던 공의회는 한 몸에 세 개의 머리가 있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괴물을 낳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피사 공의회가 남긴 유산은 곧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교회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 아닌 교회 공동체가 보유한다는 주장은 곧 국민국가에 종속될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다. 

 

8. 국민국가 출현을 읽지 못한 가톨릭교회

그간 종교개혁은 16세기 가톨릭의 타락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췄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정당성 확보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로 인한 유럽 분열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각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오래된 분열의 마침표일 뿐이다. 

국민국가의 출현과 성장으로 하나의 가톨릭교회는 각 국가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국가교회로 분화되었다. 피사 공의회의 소집과 실패는 교황청의 문제에 세속 군주들 사이의 합의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13장. 주도하는 세속 권력 -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주의

 

1. 세속 권력이 주도한 공의회

피사 공의회는 대립교황들이 물러나기를 거부함으로써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첫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를 포함하여 동방 교회 지역에서 열렸던 초대교회의 공의회는 모두 황제가 소집하였다. 반면 중세의 공의회는 모두 교황이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집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는 교회 분열 해결, 교회 개혁, 이단 문제 해결등 세가지 목표를 가지고 열렸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주도권을 쥔 교황권주의(papalism)였다. 그런데 공의회주의자들은 전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conciliarism)를 주장했다. 대립 교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 소집을 주장한 공의회주의자들은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라고 주장하였다. 

 

2. 헥 상크타 반포

공의회는 1415년 헥 상크트(haec sancta)를 반포한다. 그 핵심은 적법하게 소집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적 권위는 교황 개인이 아니라 각 국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국민단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주어졌다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3. 후스의 화형과 위클리프 탄핵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문제를 다루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사상이 공의회에 안건으로 제가된 것은 위클리프의 영향력을 가늠해준다. 또한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야의 개혁가 얀 후스도 이 공의회에서 화형당한다. 

후스와 보헤미아 개혁 운동은 루터가 추구했던 이상을 한 세기 전에 부분적으로 성취했다. 후스의 사상적 근원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이다. 

 

후스는 화체설을 인정했고 교회란 선택받은 자의 모임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교황이나 주교가 선택받은 자인지 불확실하기에 그는 가톨릭 위계구조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후스파 개혁운동의 핵심중 하나는 성례전이 아니라 설교 중심 교회였다. 후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제도교회에 메이지 않은 그는 교회 개혁의 메시지를 대중 설교를 통해 전달하였다. 설교를 통해 대중뿐 아니라 귀족들, 프라하 시민들, 또 보헤미아 왕실까지 후스의 개혁사상을 지지하게 되었다.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고 일깨우는 설교를 통해 객체로 머물던 대중이 능동적 주체로 바뀌었다. 

후스는 피사 교황에게 반발하여 종교적 갈등으로 벌이는 전쟁은 정당성이 없으며, 면벌부 발행은 교황권 남용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후스는 면벌부 판매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고, 세속의 검을 휘두를 권위가 교황에게 없다고 주장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후스에게 안전통행권을 보장하여 공의회에 참석하게 한다. 교황은 후스에게 자유롭게 행동할 권한은 주지만 미사는 금지한다. 후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숙소에서 미사를 집전하다가 체포되어 감금당한다. 이후 그는 약 서른 가지 교리에서 이단판정을 받는다. 

교회 구성원은 전적으로 예정된 사람의 모임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뿐이고 전투적 교회가 교황이라는 가시적 우두머리를 가질 필요가 없다며 교황제를 부인했다. 또한 동기가 순수하다고 양심에서 증거한다면 교황이 금지하더라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자 법규는 성서라는 성서중심주의도 펼친다. 결국 후스는 파문되고 콘스탄츠 대성당 기둥에 묶여 화형당한다. 교회일치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소집된 이 역사적 공의회에서 개혁자가 죽임을 당했다. 또한 공의회는 사후 30년이 지난 잉글랜드 신학자 존 위클리프를 파문하고 그의 뼈를 파내어 불사르라는 판결을 내린다. 

 

4. 교황권을 넘어선 공의회주의

이 당시 공의회주의는 교황권주의를 앞섰다. 공의회를 구성하는 국민단이 교황권을 통제함으로써 세속 군주들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됨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 정치와 제도. 측면에서 본다면 교황 중심 교회에서 국민국가가 주도하는 교회로 권력이 분산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5. 공의회주의 패배와 분열된 유럽

공의회주의는 그리 오래 우위에 서지 못했다. 교황이 주도권을 회복했다. 교황은 동-서방 교회 통합을 의제로 들고 나왔다. 

동-서방 교회 통합 의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서방 교회에만 도입된 연옥 교리였다. 비잔틴 황제 미하일 5세는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속에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여 연옥교리를 수용한다.  하지만 동방교회 성직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은 사라진다. 동서 교회가 합쳐질 기회가 소멸된 것이다. 

공의회주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한형태를 예시하고 있다. 공의회는 성직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세계 내의 다양한 계급과 이해관계자들을 대표하여 보편 교회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공의회주의의 실패가 낳은 필연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공의회주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유럽 카톨릭의 실패를 낳았다. 

 

 

14장. 한 세기 앞선 미완의 종교개혁 -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1.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롤라드 운동은 옥스퍼드 대학 신학자 위클리프(1330~1384)의 영향을 받아 1380년 시작된 교회 개혁운동으로 대학에서 시작하여 대중에게 확산된, 아카데미와 대중이 결합한 유일한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롤라드는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의 네델란드어 ‘롤레어(lollaer)’에서 나왔다고 본다. 

 

2. 세속 지배론

위클리프는 그의 ‘세속 지배론’에서 ‘치명적인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어떠한 것도 소유할 수 없으며, 신의 은총을 덧입은 사람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배권은 은총을 덧입은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고 이는 구원이 예정된 선택된 자들을 말한다고 했다. 

위클리프는 중대한 죄를 범한 성직자는 지배권을 상실하므로 세속 권위가 몰수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왕을 신의 대리자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았다. 

 

3. 제도 교회론에 대한 반대

위클리프에 의하면 참된 교회란 믿는 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구원이 예정된 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교황이 인간 영혼 구원의 궁극적 운명을 알 수 없기에 제도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할 근거가 사라진다. 그는 또한 복음과 그 복음을 설교하는 의무를 강조했다. 사제의 역할은 성사 집전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4. 화체설 부정

위클리프가 궁극적으로 교회와 단절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한 원인은 성찬론이다. 그는 화체설 교리에서 축성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의 상태에 모순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성찬식에서 사제의 축성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징표 혹은 상징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사제의 축성이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시켰지만 이제는 그 효력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5. 위클리프와 롤라드 학자들의 탄핵

1382년 런던의 도미니크회 종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논제들중 10개(성찬관련)를 이단적으로, 14개를 오류(지배권 관련)로 판결했다. 

이로 인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서 추방당하여 루터워스로 유배되고 2년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6. 위클리프 이후 롤라드주의 확산과 탄핵

1407년 캔터베리 대주교 애런들은 13개 조로 구성된 규약을 제정하여 잉글랜드의 롤라드파 탄압을 주도한다. 이는 무면허 설교 금지, 잘못된 성찬 교리, 위클리프의 저작 금서 지정, 성서 영어 번역 금지등의 내용이다. 

 

7. 위클리프주의는 왜 확산, 쇠퇴하였나

그의 사상은 민족주의 의식의 형성, 속권과 교권을 둘러싼 중세 말 유럽의 세력 지형 변화, 대학의 특수성으로 인해 확산되었다. 

교회의 본질과 성서의 권위와 더불어 지배론 사상은 국가의 교회 지배에 대한 신학적인 논거를 제공하였다. 

위클리프가 속한 대학이라는 제도적 측면, 대학인의 사상 자유 추구라는 내재적 측면에서도 위클리프 사상의 발아와 확산, 쇠퇴를 파악할 수 있다. 1254년 인노켄티우스 4세의 특전은 대학이 주교들이나 왕으로부터 그들의 자유와 면책권을 보호받는 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로 인해 교수가 어떤 주장을 하여 탄핵을 당할 경우 주장을 철회하면 대부분 직분을 회복했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시작한 위클리프 사상이 대중에게 전이되면서 기성의 잉글랜드 사회 질서에 적대적 세력이 형성되게 된다. 결국 국가에 위협적인 이단 세력을 배태한 옥스퍼드 대학은 심각한 사상적 제약을 받게 된다. 대학의 사상이 누린 관용이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8. 후기 위클리프주의와 지식인 롤라드 소멸

대학내 위클리프 사상은 교회 개혁 목소리로 출발했지만 농민 반란 같은 형태로 대중에게 수용되어 사회 불안 세력과 동일시되면서 지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학 롤라드주의자들까지 억압받게 되었다. 대학 탄압으로 지식인 롤라드층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지속적 교회 개혁을 주장하고 이끌 동력이 상실되었다. 

 

9. 대중 롤라드 운동과 성화상 반대

1414년 이후 점차로 롤라드파는 위클리프주의에서 급진적으로 나아가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민중 몰라드의 사상 쟁점은 성화상 반대와 반성직주의 흐름, 문해 이단이라는 세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성화상을 통해 문맹자가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장려하였다. 위클리프는 성화상이 사람의 마음을 창조자에게 고정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허용해도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15세기 초반 이후 롤라드파는 성화상에 대해 불관용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십계명을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성상 숭배는 우상숭배와 거의 같은 행위로 정의하였다. 

 

10. 대중 롤라드 운동과 반성직주의

기존의 교회 계서가 성서에 입각한 바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교회의 본질이 타락했으며, 성직자들은 세상의 재물에 목마르며 부당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자들로 비판받았다. 어떤 롤라드들은 몽매한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부를 취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성화상이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호도하고, 두려움을 자극해 순례 헌금을 착취한다고 비판했다. 

롤라드의 성서에 대한 믿음은 반성직주의의 이론적 기초이다. 롤라드는 성서에 기초하지 않은 교회의 성사제도보다 설교 의무가 사제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11. 대중 롤라드 운동과 문해 이단

롤라드파가 신학적 자의식을 가지고 성화상을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속어 성서 읽기의 직접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속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성화상 역할은 재규정된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신들의 경건을 위해 글을 읽을 줄 아는 속인들이 확대되고, 이는 전통적 문해 성직자의 독점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여 롤라드를 문해 이단(literate heresy)이라고 부른다. 

 

12. 미완의 개혁

롤라드 운동은 대학내 지성운동과 대학 바깥 대중 운동이 결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클리프 사후에도 교회 개혁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상적 일관성과 일치성을 가진 롤라드주의가 대학내에서 지속되었다. 하지만 지식인 롤라드들과 대중 롤라드파가 모두 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운동은 급격히 위축된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 사후 파문과 얀 휴스의 화형으로 지식인 롤라드는 종말을 맞이한다. 

 

중세 내내 강조되던 성화상 반대도 롤라드파의 성서해석 결과이고 반성직주의 발전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속어 성서 읽기 및 해석에 대한 자의식 형성이 지식인 위클리프파와 후기 민중 롤라드파의 정체성 구분에서 핵심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확고한 신학적 기반, 성서의 재인식, 세속 지배자의 후원, 서유럽 정세의 변화등 양자가 지녔던 상황적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 달리 위클리프 개혁은 조산한 개혁, 미완의 개혁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교회 개혁은 대중의 열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중을 동력화할 사상적 구심점이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이건 국가이건 개혁을 지지하는 후원 세력의 지지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개혁의 꿈과 이상은 오롯하게 현실에 뿌리 내릴 때에만 실행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1. 왜 콘스탄츠 공의회와 위클리프가 종착역인가? 

첫째는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 공의회에서 일어난 후스의 화형과 위클리프의 사후 탄핵은 교회사의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교황이 중심이던 종교지형이 균열된 것이다. 대립 교황이 수습되면서 세속 군주들의 세력이 강해졌고 이탈리아 출신 교황들이 세워지면서 르네상스를 후원하였다. 

둘째 교회 대분열로 정치적 위상이 커지게 된 대학과 스콜라학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권력화는 학문의 경직화를 가져왔다. 인문주의는 중세 스콜라주의와 대척점에 서서 발전한 학문운동이다. 지식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권력화되면 상아탑 속 엘리트와 대중은 분리된다. 종교개혁을 스콜라학과 인문주의의 분리, 상아탑과 대중의 분리로 읽을 수 있는 이유이다. 

셋째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데보티노 모데르나 운동은 중세 내 운동이었지만 종교개혁과 연결시켜 다루어야 중세와 종교개혁의 연속성 이해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세와의 연결 속에서 읽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신화화된다. 

 

2. 중세교회 여정의 끝에 서서

중세교회의 성취와 실패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교는 그 지역의 기층문화와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형성해 낸 토착화의 결과물이다. 

교회와 신학은 사회속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종교의 가치는 선언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감하고 수용할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교회는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주의 감성을 꾸준히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경계와 배척보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세 그리스도교를 낯설다고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노력하는 것도 유용한 한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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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벨 훅스, 문학동네)

 

Feminism is for everybody

 

 

저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페미니즘에 한걸음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저자 본인이 유색인종으로 백인 여성이 주도하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모두가 이 성차별주의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촉구한다.

 

 

서론. 페미니즘에 한 발 더 가까이

 

페미니즘하면 약간 화난 여성들을 떠올리게 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여자든 남자든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받아들이게끔 사회화 되어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잘 알게 되면 더이상 페미니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말이다. 투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오라.”(22)

 

1장. 페미니즘 정치_우리가 서 있는 곳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차별주의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페미니즘이 반남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페미니즘 활동가들 사이에 반남성 정서가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초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대부분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기 전 남성들과 함께 계급주의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싸운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성들은 세상을 향해서는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면서 정작 동료 여성들은 무시했고, 이런 환경에서 여성은 남성중심주의의 본성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 혁명적 페미니스트(revolutionary feminist)

- 개혁주의 페미니스트(reformist feminist)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부터 양극화되었다. 개혁파들은 젠더 평등을 더 중시했다. 혁명파들은 기존체계를 조금 손보는 것으로 여성이 좀더 권리를 차지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예 그 체계를 뜯어고치고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일터에서의 젠더 평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개혁적 페미니즘은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를 총체적으로 재편해 나라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주의에 맞서게 해야 한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급진적인 토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학식이 뛰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대개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특권층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2장. 의식화_꾸준한 회심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혁명적 페미니즘의 의식화 교육에서는 지배체계로서의 가부장자에 대해 꼭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가 어떻게 일상화되었으며 어떻게 유지되고 영구화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착취당하고 더 나쁜 경우 학대받는지에 대한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학 강의가 의식화 모임을 대체하자 대중적 기반을 다질 가능성을 잃게 되었다. 의식화 모임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의 옹호자가 되려면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고 그에 근거해 페미니즘 정치를 수용할지 말지 선택해야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졌다. 

의식화 운동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직장에서의 평등과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 방향을 전환했다. 여성을 보상받아야 할 젠더 평등의 피해자로 해석하는데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다보니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우선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잃고 말았다.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배반하곤 했다. 

 

우리의 문화적 인식체계에 페미니즘은 곧 반남성운동이라는 억측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남성의 특권을 벗어던지고 페미니즘 정치를 기꺼이 포용한 남성은 투쟁의 소중한 동료이지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반면 여성이라 해도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에 젖은 채 페미니즘 운동에 잠입한 여성은 운동에 해를 입히는 위험한 존재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화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진정한 성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없이 단지 반남성운동으로 페미니즘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차별주의에 동의한다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3장. 자매애는 여전히 강력하다. 

자매애는 강력하다(sister is powerful).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들의 유대는 인정과 지지를 받는다. 사람들은 남성들이 집단을 만들면 단결하고 서로 지지하고 협력하고 개인적인 성취와 인정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아주 당연시해버린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의 유대는 불가능했다. 그런 행동 자체가 반역행위였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의 유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게 도이상 자신과 자신의 몸을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과 효과적인 피임, 임신선택권, 강간과 성희롱의 근절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 했다. 여성이 겪는 고용차별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로비활동을 벌여 공공정책을 개선해야 했다. 여성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끄집어내 이를 뜯어 고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 강력한 자매애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계급 특권을 지닌 백인 여성들이 소외 계층 여성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 여성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지녔던 페미니즘 운동은 점점 계층화되었다. 운동의 구호로 외쳤던 자매애는 여성들에게 점점 중요치 않아졌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데다 성차별주의를 더이상 문제시하지 않는 그릇된 인식 또한 널리 퍼져 있기에 비판의식을 키우는 페미니즘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어린 여성들이 자라면서 저절로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된다. 

 

 

4장. 비판 의식을 키우기 위한 페미니즘 교육

페미니즘 이론은 처음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가 어떻게 작용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 변화를 이끌어낼지 여남 모두에게 설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대학에 여성학 강의가 신설되면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제도적 정당성도 갖춰졌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이 거둑 학문적 성과에 대한 존중, 과거에 쓰인 그리고 현재 쓰이는 여성 저작물에 대한 인정, 그리고 커리큘럼과 교육학에 자리한 젠더에 따른 편견을 철폐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켰다. 

(여성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거나 좋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처음에는 의도적인 무게두기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 분야에서 편견이 배제된 커리큘럼이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미래의 페미니즘 운동은 페미니즘 교육을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제공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지 않으면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주류 언론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정보로 인해 늘 힘을 잃고 말 것이다. 

 

 

5장. 우리의 몸, 우리 자신_임신 선택권

페미니즘 운동이 민권운동과 성해방운동에 뒤이어 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문제들을 중요시하는 게 타당해 보였다.

페미니즘 운동을 촉진한 첫번째 이슈는 바로 섹슈얼리티 문제였다. 다시 말해 여성이 언제 그리고 누구와 섹스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문제였다. 

성혁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자유연애라는 이슈로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에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을 할 수 없다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과 남성에게 진정한 의미의 성해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다. 

 

임신중단권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계급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계속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불을 다시 지피려면 임신선택권을 페미니즘 의제 한가운데에 놓아야 한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없다면 삶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6장.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모의 아름다움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사고, 즉 우리의 가치가 외모에만 달려있으며 어쨌거나 보기 좋아야 하고 특히 남성이 보기에 그래야한다고 믿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브래지어와 거들, 코르셋, 가터벨트, 치마, 불편한 하이힐을 벗어던지라. 

페미니즘의 개입으로 의복과 인체 혁명이 촉봐되면서 여성은 우리 몸이란 본디 타고난 그대로 사랑하고 추앙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어 여성들도 나이듦을 좀더 긍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현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미를 정의하는 고루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다시 받아들였다. 성차별주의적으로 정의된 미의 기준을 다시 미화하려는 움직임은 분명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적 패션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이익과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현대 패션잡지는 거식증의 위험을 다루는 기사를 실으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욕망의 대상으로 비쩍 마른 젊은 여성들의 의미지를 퍼붓는다. 이 혼란스러운 메시지는 누구보다도 페미니즘 정치를 받아들인 적 없는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지 모든 여성들이 전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위험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도, 그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묵살해서도 안되고 가부장제적인, 성차별주의적인 미의 기준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7장. 페미니즘 계급투쟁

새롭게 형성된 여성해방운동 내에서도 대체로 백인이 주류인 그룹에서 여성들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기준은 다름아닌 계급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존 계급구조를 유지하되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해방운동 개혁파와 기본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낡은 패러다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상호성과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모델을 세우자는 좀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세력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이 진보하면서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로 구성된 특권 그룹이 백인 남성과 동등한 계급 권력을 손에 넣게 되자, 계급투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중요성을 잃고 말았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가정에 속박되고 예속된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불만을 '이름없는 문제’라고 했지만 이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기존 구조를 유지하며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같은 계급 내의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원했다. 같은 계급의 남성과 사회적 평등을 이루려는 페미니즘의 노력은 비백인에게도 경제력과 특권을 손에 넣을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면 백인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의 두려움과 교묘히 겹쳤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백인 권력을 지지함으로써, 주류인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가 권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방조했으며 동시에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를 약화시켰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종속상태를 유지해야만했다. 결국 계급 권력이 페미니즘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런 결탁이 페미니즘 운동의 약화에 한몫했다. 여성들이 남성과 다를 바 없이 활동하게 되고 더 높은 계급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자 페미니즘 정치는 약화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페미니스트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계급 문제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연대를 위한 토대를 쌓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적 성장을 위한 기회를 얻을 미래를 더 생생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8장. 글로벌 페미니즘

계급권력을 쥔 백인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은 지도자이며 나머지는 추종자일 뿐이라고했다.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서구문화에 영향을 받아 신식민주의 사고를 띠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페미니스트들이 전 세계 여성의 평등을 위해 싸우고자 한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계급권력을 가진 개별 페미니스트들이 제국주의적 환상을 전세계 여성들에게 투사해 문제가 발행했다. 

 

수많은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인종과 젠더, 계급, 국적을 포괄하는 관점을 채택했음에도 백인 ‘파워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평등이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식의 페미니즘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탈식민지화된 페미니즘은 다른 무엇보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섭식장애나 목숨을 담보로하는 성형수술을 여성 할례와 연결지으면,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관행에 자리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misogyny)가 바로 여기 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파악(미러링)할 수 있다. 

 

글로벌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 그리고 억압을 종식하기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손 내밀어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9장. 일터의 여자들

여성 해방의 열쇠로 일을 강조한 결과 많은 이들이 여성들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저임금 노동이 남성중심주의로부터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을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일이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경제적 자립이 꼭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경제적 자립을 일과 연관짓기보다는 해방의 수단으로 본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일이 여성해방을 가져다줄지 생각해봐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게끔 이끈 건 사실 소비 자본주의다. 경기 침체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때 전업주부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여자가 직장을 구하지 않고서는 이제 백인 중산층 가정이 누리를 계급적 지위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좀더 완벽한 경제적 자립의 길은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와는 다른,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실직의 원인, 그리고 가부장제하에서 가장의 위치가 보장해주는 확고한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 원흉으로 일하는 여성을 지목한다. 미래를 위한 중요한 페미니즘 의제는 남성들에게 여성과 일의 관계에 관한 실제 상황을 보여주고 그들이 일터에서 여성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들이 전반적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면 경제적 자급자족은 불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대중매체는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일자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슈에서 여성과 남성을 대립하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여성들과 엘리트 여성들간에도 갈등이 일어나게 한다. 문제는 경제적 자립 수단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10장. 인종과 젠더

백인 여성들은 흑인 인권 운동의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억압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종과 젠더를 나란히 놓고 고려한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림에서 아예 인종을 제거하여 차이를 지우고 부인했다. 젠더를 앞세운다는 말은 백인 여성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있다는 뜻이자 여자라면 누구든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성이 일종의 카스트 같은 성별 계급에 속해 있다는 개념을 제시하며 여성에 대한 억압을 깨는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오히려 모든 여성의 공통된 경험 이면에 자리한 여성들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를 꺼렸다. 백인 여성들이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하여 페미니즘 운동이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맞서지 않는다면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 사이에 진정한 자매애가 피어날 수 없다. 

 

인종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자 여자들은 모든 층위에 존재하는 차이라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가 결합된 해로운 장벽들이 여자들을 갈라놓는다. 

 

실제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우리 사회안에 중요한 이슈이다. 저자는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들간의 관계를 말하지만 우리 사회안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백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유색인종(동남아,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이 성차별과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런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먼저 깨달아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11장. 폭력 종식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가정 폭력을 끝장내기 위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은 물론 가정 폭력에 대해 보다 폭넓은 문화적 인식을 쌓아가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제 폭력은 좀더 힘있는 개인이 다양한 강제력으로 다른 구성원을 통제해도 무방하다는 믿음을 토대로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동성간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남성중심주의를 뒷받침하고 그로 인한 폭력을 지지한다. 노동자 계급이면서 실직자인 많은 남성은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하에서는 자신의 일에서 권력을 맛보지 못하므로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위와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가정에서 대리만족하라고 부추겨진다. 

 

전쟁이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 십대에 대한 폭력,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 등 어떠한 방식의 폭력이든 사회 통제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여남을 불문하고 반대해야만 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종식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12장. 페미니즘 남성성

페미니즘 사상이 발전하면서 각성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남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진짜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문제가 단지 남성들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성차별주의가 유지되고 영구화되는 데 여성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보수적인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남성혐오자로 묘사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 반남성 분파나 그런 정서가 보인다 싶으면 페미니즘에 흠집을 내기위해 대중매체는 그 사실을 집중조명했다. 페미니스트를 남성혐오자로 몰아세우는 이면에는 페미니스트가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페미니즘 정치는 남성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그 외연알 넓혀 가부장제가 남성들에게 성차별주의적 남성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남성들 역시 모종의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인식을 포괄했다. 

 

페미니즘내의 반남성 분파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런 남자들때문에 모든 남자는 억압자라거나 모든 남성은 여성을 혐오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재현하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했다. 남성에 대한 적대는 일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 특권과 계급 권력을 향한 욕망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수단이었다. 

 

일자리가 없고, 일한 만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여자들이 더 많은 계급 권력을 쥐는 상황에서 돈 없고 힘없는 남자들은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소년과 남성을 보듬어안으면서, 소녀와 여성이 꿈꾸는 모든 권리를 소년과 남성도 누려야한다고 요구하는 페미니즘 남성성을 수용하는 페미니즘이라면 미국 남성들을 새로 내어나게 할 수 있다. 특별하게도 페미니즘적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삶을 돌보고 긍정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국사회안에서 20대 남자현상은 계급화의 문제를 젠더화를 치환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든다. 실제 문제는 여성이 많은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자체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방향을 젠더의 문제로 돌려 남성들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표출시키려 하고 있다. 

 

 

13장. 페미니스트 부모되기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사회운동 가운데 우리의 문화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문화가 아니며 부모가 자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종하는 소유물로 본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운동이다.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위계 질서 안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용인되듯 아이에 대한 어른의 지배도 용인된다. 

 

아동에 대한 남성의 성적 학대나 폭력 뿐만 아니라 아동에 대한 여성의 성적 학대, 폭력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이나 정신적 학대도 심각하다. 

 

그 어떤 가족형태보다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된 가부장제 가족을 높게 치는 문화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네 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에 부합하지 않을 때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아이들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지배자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라면 사랑은 꽃피울 수 없다. 부모가 혼자든 아니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가장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랑이 넘치는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를 자존감을 가진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가족 친화적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인이 가부장제적으로 아이를 지배하지 않아야 비로소 아이가 안전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가정을 꾸릴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환경속에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가정의 가부장제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가족안에 절대 권위자가 아내를, 아이들을 억압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권위를 잘못 사용하기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 권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위임받은 권위를 가정안에서 부모가 행사해야 한다. 건강하게 권위를 행사함으로 자녀를 양육할 필요가 있다. 

 

 

14장. 결혼과 동반자 관계를 해방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숫처녀가 아니거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성은 비난하면서도 남자는 성적 욕망을 품거나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겨도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잣대와 충돌했다. 

 

페미니스트들을 성노예제를 끝장내자는 주장을 지지했고, 부부간 성폭행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성이 성적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와 성적 만족을 추구할 권리를 옹호했다. 

 

페미니즘의 의제로 이성애 문제가 떠올랐을 때 수없이 논의된 주제가 바로 전희 없는 섹스였다. … 페미니즘 운동이 성적 쾌락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통념을 비판함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듯이 이 또한 여성과 남성이 좀더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성적 유대관계에 일어난 본질적 변화는 남자도 집안일과 육아를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 변화 같은 가정내에서의 다른 변화로 이어졌다. 

 

평등과 존중이라는 원칙, 그리고 동반자 관계를 실현하고 오래 지속하려면 상호 만족과 성장이 필수라는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동료애적 관계의 가치를 알리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자유로운 섹스, 출산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결혼을 꿈꾼다. 그래서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도 등장한다. 결혼과 섹스, 출산과 자녀양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성경의 가치와 상이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보완이 가능할까? 성역할의 차이?

 

 

15장. 페미니즘 성정치_상호자유의 윤리학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주입받는다. 즉 성욕과 성적 쾌락은 늘 그리고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며 여성으로서의 덕목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이나 성적 욕구나 갈망을 드러내는 거라고 배운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여성을 성녀 또는 창녀로만 구분했으며 여성이 건강한 성적 자아를 구축할 만한 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믿을만한 피임기구가 등장하기전 여성은 섹스할 때마다 임신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남성은 섹스를 원하고 여성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려면 믿을만하고 안전한 피임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편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한편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이 원할 때 원하는 상대와 섹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 투쟁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반성차별주의적 방식으로 우리 몸을 존중하는 법이나 해방된 섹스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비판적 페미니즘 의식화 교육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권력 문제와 단단히 이어져 있다. 

 

해방된 성생활 그리고 성적 쾌락과 충만함을 서로의 선택과 합의가 보장되는 환경에서 가장 잘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가부장제가 뿌리깊게 남아 있는 사회에서 성적 감정과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줄 페미니즘 이론이 다시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담론은,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다시 한번 시작되게끔 반드시 수면위로 올라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결혼관계안에서의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성경은 결혼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섹스를 터부시 하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에게 자유롭게 성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16장. 완전한 행복_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

여성해방운동의 최선봉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레즈비언과 양성애자 여성들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의 고정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미 좌파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페미니즘 운동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이 젠더와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미 심리적으로는 여성해방의 기치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덕 관습을 거스르는 성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레즈비언들에게 여성이 자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남성에게 기댈 필요가 없음을 배웠다. 

 

여성으로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몸을 나누고 함께 살지 선택할 자유는 동성애자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급진주의 레즈비언들 덕분에 크게 향상됐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예나 지금이나 레즈비언들은 모든 유색인종 여성들이 성적 취향이나 정체성에 상관없이 인종차별주의에 맞서고 저항해야 했던 것처럼 동성애 혐오에 맞서고 대항해야 했다. 동성애혐오를 영속화하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여성들은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를 고수하면서 자매애를 원하는 여성들만큼 착각에 빠져 있으며 위선적이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싸움은 언제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축을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애자 여성들이 레즈비언을 계속 경멸하며 부차적인 존재로 보는 한, 여성들이 자매애를 키워나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구적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레즈비언 활동가들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이번 장은 저자가 레즈비언들과의 관계에서 배운 교훈과 페미니즘 운동에서 레즈비어니즘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한다. 여성해방운동과 성해방운동중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선봉에 레즈비언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들은 자신이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처럼 레즈비언이나 게이, 양성애자들이 자연스럽게 커밍아웃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우리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힘든 사회이다.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_페미니즘의 심장

페미니즘 운동 초기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여성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를 가부장제적인 연인과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연인은 우리의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정복하고 종속하려 하기에 유혹적인 덫과 다름 없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은 여성들의 완전한 자아실현을 가로 막기 위해 사랑이 놓은 또다른 덫에 불과하다고 했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사랑은 소유의 개념 그리고 한쪽은 사랑을 주기만 하고 다른 쪽은 받기만 해도 된다는 지배와 복종의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중심주의적 결합은 돌봄의 정서를 가진 젠더인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주어야 하고 권력과 공격성을 지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준다는 기본전제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이성애자 가정에서 수많은 경우에 남성은 돌봄에 보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가족을 통제하고 강압하는 폭군이 됐다. 페미니즘 운동 초창기에 이성애자 여성들은 더이상 고통받지 않으려고 사랑의 유대를 끊기 위해서 운동에 뛰어들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현명함과 사랑이 넘치는 정치다. 페미니즘 정치의 정신은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헌신이다. 사랑은 결코 지배와 강압에 기반한 관계에 뿌리내릴 수 없다. 가부장제적 사랑의 개념을 매섭게 비판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페미니즘적 비전 :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율,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상호동반자 관계야말로 사랑의 토대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부장제적 잘못된 구조, 지배와 강압을 해결하고 사랑을 이루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와는 다르다. 

에베소서 5:22–25 (NKRV)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이 위계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18장. 페미니즘적 영성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저항운동이다. 서구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들은 남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과 함께할 수 있는, 남성의 지배 없이도 신에 봉사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수도원 생활방식에 의존했다. 노리치의 줄리엔은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로,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이 태어나고 그 없이는 결코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성차별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용인하는 기독교 교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익혀나가는 젠더 역할에 다방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창조중심적 기독교 영성의 각성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운동과 연결됐다.

 

해방신학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집단을 해방하는 것이 신의 의지에 대한 헌신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신앙행위라고 본다.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근본주의 가부장제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의 확산을 막는 장벽이다. 사실 페미니즘 사상가, 특히 여성의 임신선택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라고 부추기고 범행을 묵인한 우익 종교 근본주의자들보다 페미니스트들을 악마화하는 집단도 없다. 처음에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하자 수많은 여성이 운동에서 멀어졌다. 이후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창조중심적인 새로운 비판과 해석을 내놓자 여성들은 페미니즘 정치와 화해하면서도 기독교적 실천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에는 영적 세계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시민권과 세속적인 성과에 더 집중했다. 주류 대중매체는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한다는 사실을 조명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반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종교 사상이 변화하도록 이끌어 더 많은 여성들이 신성과의 연결을 찾아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발흥이 진보적 영성을 위협한다. 근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끔 부추길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고히 한다. 이에 임신선택권에 대한 탄압이 뒤따른다. 이와 동시에 종교적 근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성에 수많은 형태의 성적 강제를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억압적인 통념을 불어넣는다. 반드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조직화된 종교를 주시하고 비판과 저항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이라고 본다. 텔레반의 등장으로 샤리아 법을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으로 여성의 인권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종교적 영성의 추구는 인권의 후퇴를 가져온다. 성경의 내용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여서 새롭게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는 남자와 여자가, 종과 주인이, 부모와 자식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지금 21세기에는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19장. 페미니즘의 미래

진정으로 선구적이려면 우리의 상상은 구체적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현실을 넘어설 미래를 그릴줄도 알아야 한다. 

 

1960년대 초 여성해방운동이 갓 시작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운동을 이끌며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시스템의 힘을 약화하고 이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기존 체제하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한 개혁주의적 싸움도 지속했다. 그들은 지배의 문화에 찌든 이 세상을 공동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바탕이 된 참여적 경제의 세상으로, 인종과 젠더에 따른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상호성과 상호의존에 대한 인정이 지배적인 정서를 이루는 세상으로, 지구의 생명을 지키며 모든 사람이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전 지구적인 생태주의 비전이 실현된 세상으로 바꾸는 꿈을 꾸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의 운명을 바꾸고 그들이 각자 개인적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내는 것을 근본적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려면 운동은 젠더 평등 의제를 뛰어넘어, 모든 여성들 특히 빈곤틍 여성들을 껴안을 수 있는 문맹퇴치운동 같은 기본적인 활동부터 시작해야 했다…. 요즘 학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페미니즘 이론은 대부분 자기들만 아는 은어 같은 어려운 학술용어로 쓰여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싶다면 페미니즘을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자배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투쟁이므로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선구적인 급진적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내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젠더와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각자의 삶을 용감하게 되돌아보라고 격려한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을 준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 상호성이 일상인 세계에서는 때때로 모두가 평등하지 않더라도 그 불평등의 결과가 반드시 복종과 식민지화, 비인간화는 아닐 것이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왠지 성이 난 여성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 의미를 규정한다. 이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복음을 치환하여 읽어도 별 무리가 없이 읽혀진다. 복음은 모든 차별과 착취, 억압을 종식시킨다. 높아진 것을 낮추고, 굽은 것을 곧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기에 페미니스트들은 기독교를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그것을 시대적 상황속에서 읽고 해석한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성경해석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경의 가르침이 페미니즘과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충실성(Factfulness)라는 책이 있다. 사실에 기반해서 주어진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잘못된 해석을 한다. 공포본능, 크기본능, 간격본능등이 우리안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충실성(truthfulness)에 따라 우리 주변의 상황과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진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진리가 진리되어도록 진리충실성을 따라야 한다.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가치가 성경의 진리와 부딪히지 않는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함께 대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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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생각의 힘)

-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4차 산업혁명등 사회 시스템의 변화에 따라서 노동시장은 더욱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데 처음 취업시장에 들어올 때 내부자(번듯한 일자리, 대기업 혹은 공기업)가 될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처음 외부자(중소기업 혹은 비정규직)로 밀릴 경우 이후 내부자로 승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80년대 마지막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해 93년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당시 학과의 게시판에는 유력 대기업의 구인 광고가 가득했었고 괜찮은 기업의 지원서를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IMF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급변했다. 지금의 20대들이 최고의 스펙을 가진 세대들이지만 취업전쟁을 겪고 있다. 

저자는 과거 60년대생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방법은 차별화된 사교육, 자신들만의 네트워킹을 이용한 경험의 전수, 부동산 증여등을 통해서 같은 세대안에 계층이 나뉘어지고 공고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이러한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부를 통해서 상위 10%는 해외 유학, 어학 연수, 인턴 생활을 하며 자신의 스펙을 점점 높여 가는데 반해서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습 중산층 사회의 강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의 차이이고 노력하지 않았다라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이 세습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내려놓음과 동시에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것을 양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지금의 불평등과 세대 간의 격차, 세대안의 격차가 왜 발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가 사역하는 죠이 공동체 안의 학생들이 어떤 자리에 서있는가 제대로 파악해야 그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지음, 생각의힘)                                                   정희원 간사(사역연구소) 정리

 

1장 문제는 노동시장

-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기업당 재직 연수가 짧다. 일자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한국 기업 특유의 연공서열제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너네 아빠 직영 아니야? 그럼 너네 집 못 사는 거야?’ 공공연한 작업장 내 차별도, 직영은 다 쉬는 휴일 근무와 야간 근무를 떠맡아야 하는 괴로움도, 불황기 가장 먼저 해고당하는 고용 불안정도 2차 노동시장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다.

오늘날 20대들은 첫 일자리로 사실상 ‘신분’이 결정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내부자로 남는다. 그러나 그 반대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직이나 전직을 해도 내부자는 또 다른 내부자의 일자리에 가고, 외부자는 계속해서 외부자의 일자리를 떠돈다.

‘성 안 사람’(부르주아지)

일자리의 양이 적은 것이 아니라 번듯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이 적은 것이 숨겨진 진짜 문제

첫 번째 관문은 명문대 진학(이중 선별 과정의 1단계)

대기업 정규직 취업 기회가 명문대생들에게 주로 열려 있고, 학벌에 따른 임금격차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시장 지위를 거쳐서 발생한다.

10퍼센트만이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다.

 

월 급여 200만 원대 취업자는 남성이 6.4만 명이고, 여성은 4.9만 명이다. 월 급여가 200만원이 못 되는 저임금 일자리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75퍼센트 더 많은데, 월 급여 200만 원대 일자리에서는 거꾸로 남성이 30퍼센트 더 많다. 월 급여 300만 원 이상 ‘번듯한 일자리’를 얻은 남성과 여성 숫자를 보면 남성이 훨씬 더 많다.월 급여 400만 원 이상으로 가면 남성 2.4만 명, 여성 9,000명으로 남성 우위가 더 심화된다.

 

‘번듯한 일자리’에 속하는 월 급여 300만 원 이상 일자리 숫자를 전공별로 따져보면 공학계열 2만 9천명, 자연계열 6천명, 의약계열 1만 3천명 등 이른바 ‘이과’가 4만 8천명으로 전체 ‘번듯한 일자리’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한다.

여성의 경우 인문, 사회계열 등 이른바 ‘문과’ 전공자 비중이 남성보다 높다.

1차 노동 시장 진입 인원의 69.7퍼센트는 이들 명문대 또는 상위권 대학, 학과 입학생이 차지한다. 나머지 30.3 퍼센트를 놓고 ‘비명문대’ 출신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어느 때보다 극심한 경쟁을 경험하는 세대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자 급증의 이면에는 전문계 또는 특성화고의 몰락이 있다. 과거 실업계 고교라 불리던 이들 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을 선택하는 인원이 2000년대 초중반 들어 급감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질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반계 진학을 선택한 결과다. ‘고졸 백수 집단의 폭증’

저출산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세대는 2000년대 생이지, 1990년대 생이 아니다. 1990년대 생은 오히려 직전 연령대보다 숫자가 많고, 따라서 더 치열한 상급학교 진학 및 취업 경쟁을 벌여야 한다.

오늘날 20대가 느끼는 ‘취업난’은 이전 세대가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 겪었던 수준인 셈

 

2장 좁아진 중산층 진입의 문

서울의 중간 정도 사립대나 지방 거점 국립대를 나와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일하는 시대는 이제 R&D 분야를 제외하면 과거의 일이 되겠다....

‘번듯한 일자리’에 속한 대기업 일자리 중 일반적인 사무직군 일자리가 가파르게 감소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나온 흙수저 남성’이 가차 없이 밀려나는 대신 ‘서울 명문대를 나오고 외국어에 능통한 중상위층 여성’은 이전보다 주목받기 시작했다.

‘번듯한 일자리’ 중 일부가 사라지고 이전에는 아래쪽 소득 분위에 속해 있던 일자리가 그 자리를 메움으로써 해당 분위의 평균을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방 4년제 대학과 대학원, 2-3년제 대학 출신 취업자의 임금 수준이 그리 악화되지 않은 것은 ① 이공계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자에 대한 수요 ② 서울 4년제 대졸자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는 2차 노동시장의 일자리 수나 여건은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

결국 2010년 이후 나타나는 대졸자 취업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번듯한 일자리’ 또는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서울 4년제 대졸자의 취업시장 여건이 크게 악화된 것

노동시장의 ‘내부자’가 될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첫 일자리에서 ‘외부자’로 밀릴 경우 내부자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

 

내부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2010년 이후 가장 많이 줄어드는 직종은 ‘경영, 회계, 사무 관련’ 직업 / ‘금융, 보험 관련’ 직업도 반 토막 / 이들 직종에는 1차 노동시장에 속한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번듯한 일자리’라는 범주에 한정한다면 감소폭이 커지게 된다.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난 ‘직업’은 음식 서비스 종사자

고령화로 인한 보건, 의료 서비스 수요 증가 / 대졸 화이트 칼라 일자리가 줄고 그 자리를 음시 서비스와 고령자 대상 보건, 의료 서비스가 채우는 양상

여성의 약진

2010년대 대졸자 취업시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번듯한 일자리’에서 남성의 몫이 가파르게 감소하고, 여성의 몫은 거꾸로 큰 폭으로 뛰었다.

소득 6-8분위에서의 남성 취업자 감소가 취업자 전체 중 남성 취업자의 감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남

최상위 10퍼센트(소득 10분위)와 월 급여가 200만원 이하인 최하위 30퍼센트(1-3분위)에서의 남성 취업자 비중은 늘고 있다.

1차 노동시장의 주변부 및 ‘탈숙련화’된 대기업 일자리에서 남성의 몫이 급속히 줄어들게 되자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 입학한 남성 입장에서는 준거 집단인 3-4년 전 선배들에 비해 여성이 강력한 경쟁자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실제로 여성들에게 유리한 법안이 생겼다기 보다는,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 결과)

이는 이들 집단에서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젠더 갈등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초를 이룬다.(20대 남성 마이너리티)

 

서울 4년제 대졸 취업자 중 월 250-310만 원을 받는 집단에서 여성 몫이 가파르게 증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서울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여성 비율이 늘어났다는 것

문제는 여성 몫 증가와 남성 몫 감소가 2010년 이후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 괜찮은 일자리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성 취업자 및 구직자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첨예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중숙련 일자리가 사라진다.

대기업 사무직 일자리의 축소 : ‘루틴화(routinization) 가설’ 또는 ‘업무편향기술발전 가설’

루틴화는 업무 내에서 반복 수행 비율이 높고 그 때문에 컴퓨터 등 IT 기술을 이용한 자동화가 용이한 업무에 대해 기업들이 사무자동화(OA)에 투자해 고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업무편향기술발전은 기계로 쉽게 대체가 가능한 업무를 중심을 기술 변화와 그로 인한 직업 특성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

하지만, 고위 관리자, 연구직,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에 해당하는 전문직 일자리는 IT  기술로 대체되지 않기 때문에 고용규모가 줄지 않고 / 단순한 일을 하는 저숙련 일자리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기계보다 사람이 더 싼 이유ㅠ 대체 가능한 인력이 늘 있으므로)

 

임금격차 축소는 고소득자 임금 증가가 둔화되었기 때문 / 고소득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임금과 연관된 개인 특성의 영향력이 줄어든 결과가 나온 것

결국 지금의 20대는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이전 세대보다 더 치열하게 벌여야 하는 처지. 그 경쟁 과정에서 성별, 계층별, 학력별, 거주 지역별로 누가 더 ‘기회’를 많이 잃는지 그리고 누가 ‘선방’하는지에서 그들의 운명이 갈린다.

90년대 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지방 국립대를 졸업해서 지방에 위치한 대기업에 취직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거나 또는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전자 산업 대기업 생산직으로 서울의 대졸 화이트 칼라 부럽지 않은 고소득을 얻는 삶의 기회는 오늘날 20대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3장 가려진 20대 : 지방과 고졸

공부 잘하면 치인트, 못하면 복학왕

‘지방대생과 고졸자’라는 주변부

지방대 출신과 고졸 이하는 오늘날 청년 담론에서 거론되지 않는 존재들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따라서 노동시장에서 갖는 열등한 지위는 당연하다는 것. 그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건 ‘품성’이 나쁘고 ‘노력’이 부족한 결과다ㅠ

지방대 내부의 사람들은 지방대생이 20대 청년들의 치열한 공부 경쟁에서 이탈하는 이유를 두고 그들이 ‘예정된 패배’를 맞이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공무원 시험도 도전은 해보지만 집중력 있게 돌파하기는 어렵다. 토익을 치르라고 권해도 해봤자 안 된다는 생각에 고득점을 올릴 만큼 집중하지 못한다. 결국 지인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구할 수 있는 열악한 일자리를 찾게 된다. 겸연쩍음의 습속)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 소재 대학의 격차는 학생의 계층 격차에 기인한 것

고졸자의 문제는 중간 아래 계층의 문제

지방의 현실, 질 좋은 일자리가 없다

전문대졸과 고졸 취업자의 경우에 지방 직장이 더 급여가 높다.

지방 고용률이 낮은 이유는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한 탓

제조업 비중이 낮을수록, 서비스업 비중이 높을수록, 상용직 비중이 낮을수록 체감실업률이 높다는 결과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가 있고, 제조업이 활성화되어 있으면, 실업률이나 고용률 등 양적 지표도 개선된다는 이야기

그러나, ‘질 좋은 일자리’가 지방에 있어도 가장 좋은 몫은 서울 명문대 졸업생의 차지 / 노동 시장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와 지방대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유지된다는 의미

지방대학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울타리 바깥’으로 밀렸다는 징표인 셈

취업시장의 ‘시골’이 된 지방

 

탈산업화 또는 산업 고도화가 가장 큰 타격을 가한 곳은 지방 일자리 ① 지방은 제조업 의존도가 높다 ② 서울에 본사를 둔 서비스업이나 제조업 관리직 일자리의 지방 출신에 대한 수요가 감소 ③ 사무자동화가 진전되고 판매, 영업에서 인터넷의 비중이 커지면서 일자리 수요가 빠르게 줄어든다.(기업이 지방에서 서울로 R&D 센터를 옮기는 이유는 엔지니어들이 제품 개발이나 양산 과정에서 공장과 협업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 인력확보를 위해서는 고급 연구 인력을 배출하고 그들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 터를 잡아야 한다.)

구직 청년에겐 서울 사는 것도 ‘스펙’ / 요즘 취업에 필요한 기업체 인턴, 공모전 준비, 취업 스터디 기회 등이 전부 서울에 몰려 있기 때문

탈산업화 쓰나미는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저임금,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서비스업에서만 고용이 증가

실제로 공공부문 일자리는 20대가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 보다는 보육 교사, 간병인 등 40-50대 여성이 주로 지망하는 서비스업종의 일자리가 대다수를 차지

고졸은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

미래가 없는 고졸 취업자

경력을 쌓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기겠다는 꿈은 애초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영세업체의 경력은 아무 곳에서도 인정해 주지 않아 회사를 수십 번 옮겨도 경력직이 아니라 신입 대우를 받을 뿐

대학을 포기하고 남들보다 먼저 경험을 쌓겠다는 생각으로 특성화고를 졸업했지만 보람보다는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는 후회가 더 크다.

고졸 제조업 취업자 가운데 대다수는 전형적인 ‘2차 노동시장’ 종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여성 4명 가운데 1명은 결국 미취업 상태가 됨(정규직 후 경력단절형)

근로빈곤 상태에 놓은 청년들

한 번 열악한 일자리에 발을 들여놓으면 좋은 일자리로 이행하기 어려운 ‘회전문 함정’이 존재한다.

 

4장 세습 중산층의 등장

20대 노동시장의 특징 : 고소득과 안정된 지위를 보장하는 ‘번듯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그리고 ‘10퍼센트의 울타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학력이라는 출입증이 필요하다. 서울의 명문대, 의치대, 소수의 지방 소재 공대에 입학하지 않으면 월 급여 300만 원 이상의 일자리를 갖기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짐

‘좋은 대학’이라는 지위를 얻느냐 마느냐는 부모의 경제력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또는 직업)와 학력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20대에게 ‘아버지 뭐 하시노?’만 물어봐도 서울 4년제 대학에 다니는지 아닌지 대강 짐작이 가능한 상황

서울 4년제 대학에서 여성의 비율 증가는 대졸-사무직 부모의 딸들에게만 열린 기회

계층의 장벽은 소득 상위 20퍼센트와 나머지 80퍼센트 사이에 둘러쳐 있다.

 

다시 작동하는 ‘명문고’ 시스템 : 소수의 고등학교가 명문대 입학을 독식 / 서울대 합격자가 소수 고등학교에 몰려 있는 현상이 심화됨(일부 지방과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가 비록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중식 지원 학생 비율이 높아질수록 SKY 진학률이 급격하게 내려감

 

중산층 자녀의 인생을 ‘설계’ 합니다.

대치동 학원 : 다품종 소량 생산 / 관리 / 학생의 생활 전반을 관리하고 생활 자체가 입시에 최적화 되도록 돕는 코치

 

IMF 사태 이후 고용 불안정이 심해지면서 대치동 전문직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받는 길은 의사 같은 전문직 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됨 / 믿을 건 자신 분. / 조직이 더는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아픈 방식으로 깨닫게 됨 /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대학 진학열’과 ‘전문직 선호’라는 현상으로 나타남

중학교 때부터 드러나는 격차

고학력-고소득 집단과 저학력-저소득 집단의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과목은 수학(주병기 교수의 ‘개천용지수’ 낮음)

자녀가 중학생일 때부터 학업 성취에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

노오오오력도 계층 따라 간다

자녀의 노력 수준과 아버지의 학력이 밀접하게 연과되어 있음

아버지 학력이 높을수록, 그리고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의 자기 학습 시간이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

환경이 좋을수록 자녀가 일정 시간 이상 혼자 공부할 확률이 더 높다. 좋은 환경의 학생들이 사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공부한 시간도 더 많다.

결국 성실성, 성취동기, 자존감 등 ‘품성’이라고 이야기되는 비인지적 능력 격차가 부모의 계층에 따라 발생함을 보여주는 것 /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그렇다면 집 안이 좋지 못한 죠이어들에게 교양 있고 학식 있는 부모가 되어 주고, 비인지적 능력-필요하다면 인지적 능력까지도 키워주는 사역자가 있었으면)

 

56년생 최순실의 자녀 VS 65년생 조국의 자녀

90년대생의 부모인 60년대생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대졸 화이트 칼라 또는 대졸 중산층이 만들어진 세대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의 경계가 명확해졌다.

소득-학력-네트워크가 밀접하게 맞물리기 시작한 것

최순실이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으로 서울 강남에 빌딩을 가진 ‘못 배운 졸부’라면 / 조국은 부산의 향토 건설업체 집안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 학력과 서울대 교수, 80년대 운동권 인맥 등 인적자본과 사회자본을 두루 가진 ‘교양 있고 깨우친 중상위층’이다.

결국, 한국에서 90년대생들은 전문직이나 대기업 일자리를 가진 부모가 확보한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

 

5장 ‘정상가족’이라는 특권

결혼과 부동산에 나타난 계층 격차

20-30대 초반의 양대 과제 : 취업과 가족의 형성

과거와 같은 생애주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번듯한 일자리’와 ‘부모의 지원’이 필수적

오늘날의 20대들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 결혼하고, 1-2명의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주택 소유주가 되는 ‘정상가족’을 구성할 수 있을지 여부가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출신 계층’에 달렸다.

정상가족 형성 과정에서 부모의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점은 ‘독립적 20대’라는 개념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

오늘날의 20대는 ‘가족을 만들 수도, 가족을 떠날 수도 없는’ 개인이다.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현재의 가족과 미래의 가족 모두를 의식해야 한다.

그 결과 4인 단위 핵가족을 꾸리는 것 자체가 ‘울타리’ 안에 있는 중산층의 특권적 행위가 되고 있다.

 

남성 5명 중 한 명은 ‘노총각’으로 40대를 맞이한다.

미혼을 강제 다하는 하층 남성

‘번듯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소득이 낮은 남성의 경우 결혼으로 ‘이행’하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경제력이 모든 것을 좌우) / 미혼은 일종의 낙인처럼 작용(직종과 소득, 소득과 결혼율이 각각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기 때문(유일한 예외는 월 600만 원이 넘는 소득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있는 의료, 진료 전문가(의사) 집단이 있다.)

 

정규직 여부, 대기업 근무 여부, 학력, 사회적 계층 지위 등은 현재 소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둘 수 있을지 가늠하는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한다.

소득에 강한 영향을 주는 대기업 근무 여부와 학력은 결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대기업 근무 여부, 최종 학력 등이 결혼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미 소득에 흡수되었다고 보인다.)

대기업에 근무하거나 대졸이라고 할지라도 소득이 낮으면 결혼이 어렵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된다ㅠ)(소득에는 자산도 포함되는데 자산은 과거에 벌어들인 소득이 쌓인 것으로 미래에 소비로 돌릴 수 있는 재원 :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 - 이 집을 남성이 소유하면 결혼 이행 확률이 급격히 올라간다.)

결혼하기 전 주택을 소유했다면 대부분 부모의 조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상식’(부모의 재산 수준도 남성의 결혼에 영향을 미친다.)

(모기업 취업 면접 질문 중 “3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본 경험이 있습니까?”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이 자녀가 대학에 가는 3대 중요 요소ㅠ)

 

반면, 여성에게 더 중요한 것은 ‘경제력’ 보다도 사회적 계층 지위와 대기업 근무 여부

여성, “완벽한 결혼” vs “비혼도 괜찮아”

고학력 여성은 완벽한 결혼을 위해 혼인을 지연하고, 저학력 여성은 결혼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이 조사에서 학력과 계층은 대체적으로 일치) / 중산층이나 중상위층 출신 여성들은 자신들의 계층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중간 이하 계층 출신들은 ‘결혼을 해도 경제적으로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 부모의 경제적 자원은 곧 부모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도 연결 –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즉 계층적 하강혼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 / 결혼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

고학력 남성과 결혼하는 데 부모 자산이 활용됨으로써, 가족 단위에서 지위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부모의 자산은 남성 자녀의 결혼 이행을 촉진하며,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비견하는 만큼 영향력을 갖는다.

 

부동산 = 세대 + 계층

부동산의 가치는 토지와 토지 위에 세운 주택, 상가 등의 미래가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토지는 인위적으로 늘릴 수가 없다. 미래의 사용가치가 현재의 매매 가격에 포함된다. 해당 지역의 사용가치가 성장률만큼 내려가지 않는다면 집값은 오르게 된다.(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데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현상)

서울에 이미 주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고스란히 가격 상승의 수혜를 받고, 노동시장에 진입해 돈을 벌어 주택을 사야 하는 이들은 예전보다 더 높은 값을 기존 주택 보유자에게 지불해야 한다.(세대 간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

상속 자산의 비중이 커지고 자산 형성에서 근로소득의 기여도가 줄어들면서 중산층 지위는 세습에 가까운 것이 되고 이 자산 격차를 메우기는 어렵다.

중산층 거주 지역이 배타적인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건 자연스런 결과(마치 바벨의 탑처럼)

세습 신분이 된 ‘서울 거주-2주택 보유 중산층’(서울 2주택 보유자라면 상위 소득 10퍼센트)

세대 간 불평들이 그만큼 강화되었고 부모가 자산을 보유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사실 상 계층 간 불평등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이 비싸면 나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성 밖’ 거주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

전국 아파트 값은 2001년까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 강남의 가격만 가파르게 상승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2년까지 정체, 2013년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 / 2002-2007년에 만들어진 서울 강남 3구를 정점으로 한 아파트 가격의 지역 간 위계 구조가 2019년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이 2000년대 중반에 가파르게 늘어났기 때문 / 한국 기업의 고도화와 중국 경제의 수출 지향형 성장에 따른 중간재 수요 급증 등이 요인이었다. 그 결과 수출 대기업에 다니는 화이트 칼라의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한다.

수익률 변동성 측면에서도 부동산이 주식보다 더 안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자산이 상속되면서 부모가 주택을 소유했을 경우, 자녀가 주택을 소유하는 비율을 대폭 끌어올린다.(이는 후발 세대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6장 세습 중산층의 기원

60년대 생은 무엇이 다른가?

교육이라는 불평등 제조기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격차를 능력의 격차로 바꾸어 놓았다.

60년대 생이 40-50년대 생과 차이가 나는 건 노동시장에서의 경험이 달랐기 때문

① 1982년의 대학졸업정원제 도입을 기점으로 대졸자가 급증 

② 수출 대기업에서 이들 대졸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IMF 외환 위기에서 생존한 수출 대기업이 2000년대 들어 급성장) 

③ 2000년대 산업 고도화 국면에서 IT, 금융 등 새롭게 성장한 산업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할 기회를 대졸 학력에 대기업에서 10년 정도 일해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던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이 가질 수 있었다. 

④ 이렇게 늘어난 소득은 그대로 자산 시장(특히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 가면서 서울 요지에 주택 1-2채를 가진 ‘중산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50년대 생 : ‘학벌’이 밀리더라도 어느 정도 경제력 축적의 가능성이 있었음

60년대 생 :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이라는 전제 조건을 갖춘 사람이 명문대-고소득 화이트 칼라 대군을 형성함

계층 간 격차는 ‘경제력’ 뿐만 아니라 ‘경제력-사회적 네트워크-문화 자본’등 복합적인 격차로 나타남

 

대기업의 성장과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을 바탕으로 조직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 기술관료) 인력의 등장

대졸자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에 계층화가 되었다.

1970년대 초중반만 해도 대졸자의 상당수는 갈 곳이 없었다 / 1981년부터 대졸자 취업시장이 늘어났다.

1970년대 후반 학번에서 1980년대 초중반 학번이 소득 상위 20퍼센트가 될 수 있는 직종에 집중적으로 채용되고, 자리를 채웠다는 의미

‘승리의 역사’가 함께 하는 60년대생의 근로 생애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은 한국의 주요 대기업의 성장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중화학 공업화와 그에 따른 본격적인 대기업의 성장 및 고도화 과정에서 기회를 잡았고, 개별 대기업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한 것

1998년 외환 위기는 80년대 학번-60년대 생들에게 오히려 기회. 1998년 당시 82학번-63년생은 만 36세로 고참 대리 내지는 신참 과장 정도의 직급. 노동시장 최상층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 관리직에서 1955-1960년생이 대거 밀려난 자리를 대신 차지함

 

성장의 또 다른 과실 : 금융, IT와 대공장 생산직

2000년대 성장한 사모펀드 : 사모펀드는 부실기업이나 사연이 있어 매물로 나온 기업을 인수하여 구조조정한 후 비싼 값에 되팔아 수익을 남기는 업종으로 금융산업의 최첨단 영역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1997-1999년 금융과 IT분야 창업에 나섰을 때, 울산과 경남 일대의 대공장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IMF 외환 위기의 파고를 맞았다. 1999년부터 현대차 노조는 조합원들의 고용안정 보장과 임금 상승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는데, 비정규직 비율은 3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록 올라갔지만 정규직 노조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도 업황에 따라 고용 인원이 변하는(다시 말해 사실상의 해고가 자유로운) 비정규직 노동자의 존재가 자신들의 안정적 지위를 위한 ‘해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노조도 힘을 잃게 되는데) 자동차 노조의 힘은 2만 개에 달하는 부품을 실수 없이 조립하는 ‘숙련성’에 있는데, 모듈화(완성차 생산 과정을 탈숙련화 시키는 장치)는 이런 숙련된 인원을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동차 공장에서 기능공의 힘은 약해지고, 대신 모듈을 관리하고 조율하는 현장 엔지니어의 힘은 커진다.

‘귀족노조’라고 비난받기까지 하는 완성차 조립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2000년 이후 뚝 끊긴 건 노조 때문이라 할 수 없다. 모듈화는 품질 개선과 생산 효율 개선을 위해 현대차 경영진이 내린 결정이었다.

블루칼라에서 ‘번듯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길이 끊기게 되었다.

 

학력-직업-경제적 지위의 결합

2000년대 중반 ‘좋은 일자리’를 갖는 데에는 학력과 직종의 영향력이 결정적

토지는 40-50년대 생이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고,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은 실탄(현금)은 충분히 많은데, 그 실탄을 사용할 곳이 없어 켜켜이 저축으로 쌓아놓고 있다.

80년대 학번도 불평등을 경험했다. 그래도 행운이 따르면 메울 수 있는 불평등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들은 불평등을 경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층 지위를 자녀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7장 계급의식의 형성

조국 사태와 공정성 얘기를 보면서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영화 같았다.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냉소와 자신처럼 ‘평범한’ 이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데 대한 분노

‘절차적 정의에 매달리고 보수화된 20대’라는 분석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 20대 의식 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G세대와 N포 세대의 공존

G세대 : 조선일보가 정의한 ‘어떤 분야에서든 앞서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한국 사회에 대한 신뢰와 낙관’ 그리고 ‘학연,지연이 아닌 인터넷 기반의 창조적 관계’를 맺는 희망으로 가득 찬 세대 / 50대-서울대 또는 연고대 졸업-강남 일대 아파트 거주 중산층의 자녀 / 생활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20대 중상위층에게는 꿈과 희망이 넘친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관철되느냐다. 경쟁과 자율을 신봉하는 부유한 20대 / 경쟁에 자신이 넘치고, 조국 논란에서는 명문대생들의 자존감이 훼손되어 분노한다.

 

N포 세대 : 경향신문이 정의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 / ‘기성 세대의 잘못으로 피해 대중이 된 요즘 것들’ / 부유한 부모를 둔 능력 있는 20대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90퍼센트) 20대에 해당되는 신조어

 

20대 남녀의 정치적 양극화? 그건 ‘세습 중산층’ 내부 이야기

20대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양극화는 부모가 대졸-사무직 또는 대졸-전문직인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동일 계층 내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분명해진다. 20대 남성이 보수화되었고, 20대 여성이 진보화 되었다는 담론은 상당 부분 중상위층의 자녀들에게 국한된 것(먹고 살만한 이들이 사유하는 꿈)

20대 남성은 30대 남성과 상당히 유사하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고졸 이하-블루칼라 계층의 자녀들이 30대보다 좀 더 보수적인 정도의 차이) / 과거에는 20대가 30대보다 진보적이었다면, 지금은 20대 남성의 보수화 정도가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20대 여성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급격히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 자신이 노동시장 등에서 받은 몫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불공정,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계급 문제

30대는 남성과 여성의 인식이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약간은 기회 공정성에 대한 보수성이 강해지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20대 남성의 경우 ‘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배경 점수가 낮을수록 급격히 늘어난다.

20대는 30대와 뚜렷이 다르게 사회경제적 배경 점수가 높을수록 비정규직이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문제라고 생각(능력주의)

‘부유하지 않은 20대 남성’의 경우 한국 사회가 기회가 보장된 사회라는 믿음은 30대보다 강하지만, 자신의 경제사회적 처지에 대한 불만도 더 강하다.

‘부유하지 않은 20대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 문제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세습중산층의 아들들은 ‘교육의 기회’에 대한 공정성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중산층 여성의 경우 자신들의 ‘노력’을 사회가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고, 그럼에도 타인의 ‘지위’에 대해서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노동시장에서 중상위층에 편입되는 비중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성별 차이에 따른 불평등 문제에 민감해졌음을 시사)

20대 남성 가운데 이전보다 기회의 공정성이나 능력 위주 사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이 있다면 중산층 출신의 남성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공정성’에 대한 이슈는 20대 세습 중산층 자녀의 이슈 / ‘번듯한 일자리’에 진입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된 집단인 이들의 ‘보수성’은 강한 경제적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정성’을 집착적으로 강조하면서, 자신이 그 ‘기회의 공정성’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20대 남성의 경우 최근의 ‘20대 보수화’ 담론이 포괄하지 못하는 계층으로,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감지할 수 있다.

지금의 ‘공정성’ 문제는 20대 세습 중산층 자녀들에게 민감한 문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세계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에게만 그 문이 열려 있는 세계

 

8장 ‘20대 남성 보수화’라는 신화

정치적으로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20대 여성과 달리 20대 남성은 집나간 탕아마냥 행동한다. / 20대 여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라는 인식의 확산 / 법 집행이 남성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함 / 한국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유리하다. / 결혼시장과 같은 사회문화적 권력 관계에서도 남자가 약자

 

 

중상위층 20대 : 동일 계층 여성과 명문대 진학과 번듯한 일자리 취업을 놓고 예전보다 격렬한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분노

비정규직의 사회경제적 약자 20대 : 연애와 결혼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약자’라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분노

중상위층 여성 : 명문대를 나오고 남성 못지 않은 능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남성 우위인 사회에 분노

유권자 집단을 각기 다른 연령, 성별, 지역, 사회 계층 집단으로 나누어 살피듯 20대라는 연령 집단도 각기 다른 소집단으로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죠이의 현재 사역을 다시 한 번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지 지역에 따른 캠터스 구별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가진 대학들을 묶어서 전략적 카테고라이즈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서울 지역의 여대끼리, 전문대학들끼리, (조금 예민하지만) SKY끼리, 지방대학끼리.. 각자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

 

여성에 대한 적대감 ; 여성의 행동이 기만적이며 편의에 따라 외모를 이용한다는 불신, 사회에서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진다는 피해의식, 여성에 대한 주변 지인의 부정적인 감정(20대 남자 마이너리티에서 보이는 20대 남성의 ‘정체성’) 등 정서적인 반응이 도드라짐

중상위층 이상의 20대 남성은 어떤 연령-계층 집단보다 삶의 만족도가 높다.

그 외 계층의 20대 남성은 남성이라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사회적 안정과 인정과 권력이 자본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획득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나 시장의 구조적 위기로 좌절되는 상황들로부터 위협받기 쉬워졌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SNS는 인스타그램(아무래도 보여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선호하겠죠....)과 네이버 밴드

소득이 낮아질수록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SNS는 트위터, 카카오 스토리

> 단일한 창구를 조사하는 것만으로 일반적인 20대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

‘보수’ : 60대 중반 이상의 건물주(비싼 월세는 화가 나긴 하지만 돈을 벌어서 지불하면 되는 것)

‘진보’ : 50대 초중반의 대기업 부장 또는 임원(교육과 노동시장에서의 불공정한 경쟁은 교육과 일자리라는 근본적인 ‘기회’ 및 그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 문제에 계층 문제가 중첩될 경우, 상위 10퍼센트가 거주하는 ‘서울’과 나머지 90퍼센트가 모여 있는 ‘지방’은 대립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에필로그

한국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서 성장률이 낮아지면, 세습 중산층과 나머지 사람들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부모들은 자녀의 인적자본 투자의 수익성이 높아지는 만큼 더 대규모 투자에 나서게 된다.

90년대 생, 2000년대 생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고도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 결혼을 꿈꾸기 어려운 게 현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적한, 근로소득만으로 살 수 없는 비싼 주택을 소유한 ‘세습 중산층’이 한국에도 나타났다.

자녀에게 얼마나 비싼 사교육을 시킬 수 있는지, 해외 유학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중산층 내부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것

진짜 문제는 명문대를 나오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적 인정과 명망까지 가진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이 90년대 생인 자신의 자녀들이 적합한 ‘능력’을 갖추도록 독려하고, 교육제도를 잘 이용해 새로운 경제 여건과 시대 상황에 걸맞는 ‘인재’로 키워내는 데 성공하는 그 자체

사회가 20대를 배려해 번듯한 일자리를 늘린다고 해도 그 기회는 대부분 세습 중산층의 자녀들이 차지하게 될 것

 

지금 가장 절실한 것

① 기회의 평등 : 근본적인 수준의 교육 기회와 능력 배양의 기회에서 하위 90퍼센트도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 영유아기에서부터 공공 보육이나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돈 있는 사람들이 몇 백만원씩 들여서 보내는 영어유치원 등을 없애고)

② 사회에서 보장하는 최소 수준에 대한 합의와 그에 따른 적극적인 세원 확보 : 노동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조하는 것 / 그들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도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마치 희년제도처럼, 기본소득?) /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상위 10퍼센트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지금의 불평등은 상위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대립이 아닌 10퍼센트와 90퍼센트의 격차임을 인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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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

 

저자는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학입학에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은 능력에 따라 열매를 취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깨기 위한 파격적인 제안이다. 저자는 일류 대학(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를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지원자들을 몇배수 뽑아서 이들 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거치지 말고 제비뽑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운에 맡기는 방식이 능력주의의 폭정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에 오만하지 않게 되고, 탈락한 사람들도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이런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2016년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의 출현을 보면서 능력주의 신화가 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 포퓰리즘의 근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

 

많은 사람들은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그 능력을 만들어내었는지 생각하면, 능력이 성공을 보장하는 사회는 어쩌면 더이상 정의롭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조영태, 서울대 교수)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

능력주의(실력주의, meritocracy)에서 국가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들고, 개인은 열심히 노력하여 자부심을 갖고 그 대가를 향유하게 하는 사회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함녀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2019년 3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 상담가에 의한 입시 부정,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포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에 자신들의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서 입시부정을 저지름. 

 

1. 입시의 윤리

- 뒷문 뚫기(기부금)와 옆문 뚫기(뇌물) / 뒷문은 합법적이며 옆문은 불법이다. 

- 그렇다고 정문이 누구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공정한 것인가? 뒷문, 옆문, 정문 모두 소득에 비례해 열려 있다. 

- 입시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누가 어디에 첫발을 들여놓았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졸인가 고졸인가, 명문대와 비명문대)

 

2. 능력 지표 따내기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명문대라는 간판, ‘능력의 지표’를 주기를 원했다. 

 

 

CHAPTER 1. 승자와 패자

1.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첫번째 진단.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

두번째 진단.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

 

2.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세계화 프로젝트는 공공선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였고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내리게 했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3.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평등하게 배분했다.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하면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

지난 수십년간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노력과 재능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4. 능력주의 윤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바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5. 굴욕의 정치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6.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7. 포퓰리즘의 준동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린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는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직원 채용에 있어서 효율성과 공정성

1. 왜 능력이 중요한가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나름이라고 생각한다. 

-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2. 우주적 능력주의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며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이처럼 성서 신학은 인간의 능력을 한껏 강조한다.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다(욥기). 반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3. 구원과 자기 구제 

구원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행함으로 얻는 것인가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선행으로 얻는다면 이는 권선징악의 틀에는 맞지만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긴다.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본다면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5세기 펠라기우스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와 개인 책임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로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대했다. 하지만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은 능력주의를 불러들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칼빈은 구원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이며 예정되어있다고 보았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내가 선택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칼빈주의는 근명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고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빈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이상 제어할 수 없었다. 칼빈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은총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4.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앞서 구원의 문제를 성공의 문제로 생각해보자. 성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한 것인가 통제 밖의 요인들이 작용한 것인가? 

일과 노력은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열띤 구원의 증표 탐색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중대성을 갖게 되었다. 자수성가론과 능력주의의 승리는 오늘날 세속 위주 경향의 결과라고 여기기 쉽다. 

능력주의의 승리주의적 측면은 신없는 섭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섭리론은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한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전 9:11-12)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섭리론적인 관념은 오만한 목소리(금융위기 이후의  보너스)와 징벌의 목소리(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9년 아이티 지진, 9.11 테러, 2011년 일본 대지진을 신의 징벌로 풀이)로 나타난다.

 

5.  부와 건강

최근 수십년간 미국 기독교가 전한 ‘번영의 복음’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한국의 기복신앙) 

번영의 복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윤리를 지지한다.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개념은 일이 잘 되어갈대는 기꺼워할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꺽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대통령들은(아이젠하워, 트럼프)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섭리론)’라고 주장했다. 

 

6.  자유주의적 섭리론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허리케인이 죄의 대가’라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7.  역사의 옳은 편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라는 표현을 여러번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두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일에 대한 예측은 고약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 없다. 

 

8.  도덕 세계의 궤적

‘도덕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마틴 루터 킹)

능력과 은총 사이의 균형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청고도들에서부터 번영 복음 전도자들까지, 성취의 윤리학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유혹이었고 언제나 보다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우리는 성공을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로 본다. 이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주지만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1990년이후 갈수록 학생들의 능력주의적 신념(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이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명문대 경쟁율이 높아지면서 점점 능력주의적 신념이 강해졌다.(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반대), 치열한 입시 경쟁은 이런 신념을 강화한다.

 

2. 시장과 능력

* 시장에 대한 논증

1) 효용성 담론 : 시장이 GDP를 늘리고 일반적 복지를 극대화할 동기를 부여한다고 주장

2) 자유담론 : 시장이 교환하는 재화의 가치를 두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

3) 능력주의 담론 :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준다고 여겨졌다. 

 

공정성과 생산성에 이어서 사람들이 오직 노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룰것이다. 

 

이런 능력주의로의 전환의 문제점 첫째 책임을 강조함으로 복지에 대한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긴다. 둘째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 약속한다. 

 

3. 자기 책임의 담론 

1980년대 복지국가 관련 논쟁은 연대보다는 불우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우함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하느냐에 관심, 

클린턴은 복지가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어려운 형편인 사람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레이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영국의 대처 수상, 독일의 슈뢰더 수상 - 기회와 책임이 함께 가는 방향,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 

 

4.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어야 한다.’

-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주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5.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자격이 있다(You deserve)’(레이건->클린턴 2배->오바마 3배)

 

6. 포퓰리즘의 반격 

트럼프의 위대함의 비전은 능력주의적 기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표결)

 

* 능력주의의 폭정

1)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꺽는다. 

2) 대학 학위가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위한 기본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3) 사회적 정서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7.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불평등의 심화(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50퍼센트보다 많이 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빈말로 들리고 불만을 낳는다. 첫째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살마도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만, 둘째 능력주의적 약속은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 절망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질문에 대한 순위(미국-독일-프랑스)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미국보다 중국이 세대간 이동성의 정도가 높다. 중궁이 성공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8. 보는 것과 믿는 것

미국보다 더 평등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유럽인은 사회적 상승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미국인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왜 그럴까? 두 경우 모두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했다.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 학력에 대한 공격

 

1. 무기가 된 대학 간판 

대학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빌 클린턴 :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오바마 : 더 많은 교육이 해답

이러한 주장은 포퓰리즘의 반격(브렉시트,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학력을 강조하는 주장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미국 성인의 2/3)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다라고 말해줌으로써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3. 최고의 인재들 

오바마는 엘리트(아이비 리그 출신, 대학원 학위자들)을 내각에 중용했다. 이렇게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부를 이끈다는 것은 비교적 좋아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라고 부른 것들을 소위 엘리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뛰어난 학력, 전문성에도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베트남 전쟁의 늪,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

- 워싱턴은 월스트리트를 구하고 메인스트리트(미국인의 일상생활)을 저버렸다. 

 

4.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5.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6.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학력주의는 미국과 영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바꿔놓았다. 정부에 비대졸자가 거의 없는 상황은 능력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최근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팔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7. 학력 간 균열

2016년 미국의 대선에서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였다. 

20세기 좌파 정당이 저학력자들, 우파 정당들이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면 이제 능력주의 시대에 이런 패턴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역전되었다(토마 피케티). 

한때 노동자들을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피케틴ㄴ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거침없는 학력주의는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 정당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하며, 대학 학위가 있고 없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도록 하고 있다. 

 

8. 기술관료적 담론

오바마는 기술관료 정치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를 연관시켰다. 

기술 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결정권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설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9.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러운 상승(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폭스 뉴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

 

10. 기후변화 논란

기후 변화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지구온난화는 자연적인 환경 변화 때문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대부분의 공화당원은 그렇다라고,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두 당의 고학력자들 간 의견차는 53퍼센트 였는데 저학력자들끼리는 단지 19%의 차이를 보였다. 

기후 변화를 놓고 정당간 나뉜 입장은 사실과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관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과학을 알게 되면 기후변화에 대한 옥신각신이 사라질거라는 가정은 오류다. 우리가 사실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정책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술관료적 신념은 정치적 설득의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CHAPTER 5. 성공의 윤리

 

1.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귀족 사회 vs 능력주의 사회

내가 부자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부와 특권을 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그러면 귀족제 사회가 정답일 것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 인식할 것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2.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

 

3.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학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들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능력주의 ->세습귀족제, 한국적으로는 세습중산층사회)

 

4.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유리함(풍부한 관심, 자원, 인맥)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인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려 한다. 

 

5.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재능의 도덕적 지위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다. 또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르브론 제임스-농구 재능, 그 재능이 인정받는 사회)

하지만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진다. 

 

6.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성공 = 재능 + 노력

수고와 노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금메달, 노벨상)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을 갖는다. 

 

7.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1) 자유시장 자유주의(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마거릿 대처)

하이에크는 능력과 가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능력은 각자가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다. 그러나 가치는 단지 소비자가 이런 저런 상품에 얼마칸큼의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에 대한 척도일 뿐이다. 

 

2) 복지국가 자유주의(존 롤스)

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주는 체제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정의론, 롤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성공한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빚이 있다.

 

8.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소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된다’고 본다. 

 

9. 시장과 능력

맨큐는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는 사람은 그 큰 기여에 비례하는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자격이 있다”라고 했다. 

 

10.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11.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자격(desert)은 주체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지만, 권리인정(entitlement)은 일정한 경쟁 규칙을 준수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어떻게 규칙을 정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단 알 수 없다. 

롤스는 반능력주의론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롤스는 부자들이 이 부는 내가 쌓은 것이다. 도덕적 자격에 따라 내것이다라며 재분배 목적의 징세에 항의하는 일을 차단하고 싶었다. 

 

12. 성공에 대한 태도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눌 마음이 들 것이다. 

 

13. 운수와 선택

'행운 평등주의는 행운의 주인공이 행운의 결과로 얻은 것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불운한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공적 부조의 대상자들에게 굴욕을 안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가 스스로의 탓이 아님을 입증해야만 한다. 공적 부조의 자격 요건을 갖추려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의 희생자란 걸 제시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선별급식, 기본소득, 재난지원금 지급)

행운 평등주의는 노력과 선택에 따른 불평등을 옹호한다. 

 

14. 재능 계산하기

천부적 재능은 비록 도덕적 자격이 되지 못한다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찬양을 불러들인다. 

 

15. 능력주의의 등장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 버렸다.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1. 능력주의 쿠데타 

하버드의 장학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SAT는 이후 미국 전국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다. 

19세기 터너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이동성의 도구는 바로 교육이었다. 

공립학교의 역할 : 민주사회 구성원으로 육성 기능 &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

 

2.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능력주의는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 하고,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코넌트는 더 유동적인 사회를 원하지 보다 평평한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다.

 

3.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고등교육은 모든 사회경제적 배경의 유능한 학생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학비를 댈 능력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 부가 아니라 능력이 입학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사교육 시장의 호황) 

 

5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 

세습 특권귀족제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주는 방법이 아닌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입지를 마련해 준다. 

기회의 제공자’, ‘사회적 상승 엔진’의 역할을 담당하는 고등 교육은 확대된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제동 기능도 하지 못했다. 

 

6.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 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7.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동문 자녀, 거액 기부금을 낸 자녀에게 우대 조치를 한다. 

 

8.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가드너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특권층은 그들이 배경이락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뭔가가 아니라 능력으로 명문대에 입학했음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경쟁률 높은 인기 대학들은 떠오르는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9.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부모의 역할 강화(미국이나 한국, 극성 부모)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징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으로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10.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특별한 기술이 있든 없든 캄핑(comping)이라 불리는 경쟁 시험을 치르는 학생조직이 일반적이다. 입단율이 낮은 것을 자랑한다. 

 

11 오만과 굴욕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말은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12. 유능력자 제비뽑기 

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들만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이들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합격자를 뽑는 것이다. 

이렇게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하도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찾아줄 것이다. 결국 어찌되었든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며, 탈락한 사람이나 자신이나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천부적 재능, 그리고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네가지 예상되는 반론

1) 학업능력의 저하 : 적절히 1차 관문을 세우느냐. 

2) 다양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추첨은 다양성 확보를 위해 조정 가능하다.

3) 동문 자녀 우대 입학과 기부금 입학은? : 우대 혜택을 없애야 하지만 추첨의 비율을 높여줄수도 있다.

4) 입시가 경쟁이 아니라 추첨이 되면 그 가치는 보다 떨어질테고, 그러면 지금의 명문대가 누리는 명예는 추락하지 않겠는가? :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10대들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온갖 스펙 쌓기 경쟁은 사라질 것이다. 

 

13.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 정부가 노동자 훈련과 재훈련을 위해 쓰는 돈의 액서는 고등교육 관련 지출액수와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적다. 직업 훈련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미국이 고용과 훈련을 모른체 하는 이유중 하나는 고등교육 지원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일 수 있다. 

 

14. 명망의 위계질서 

대부분의 대학들은 근본적인 도덕 및 시민적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 추론과 숙고를 할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기술관료적 스킬과 기술관료적 세계관에 대해 주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인문학의 쇠퇴)

상아탑 밖에서의 시민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 교욱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 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 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15.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ㅇ벗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CHAPTER 7. 일의 존엄성

 

1. 일의 존엄성 하락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2. 절망 끝의 죽음 

미국 노동계급의 마음의 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다.

중년 백인 남성 사이에서 심장마비보다 약물, 알콜, 자살로 숨지는 경우가 많게 나타났다.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배나 많았다. “절망 끝의 죽음이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낸다.

 

3. 분노의 원인 

201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다. 

경제적 진보는 그들의 살림을 더 어렵게 했으며 소수 엘리트에게만 햬택을 주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 머신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작동이 멈춰버렸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4.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경제 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보다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GDP 증대를 통해 이득을 본 이들이 세금을 통해서 이를 실직 노동자들에게 돌리는일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대신 신자우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거의 모든 수익은 최상층에게 돌아갔고 대다수 노동계급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5.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 한다.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다.(헤겔, 뒤르켐)'

 

6. 기여적 정의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임금 정체, 아웃 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완전히 깨졌다. 

 

7.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8. ‘열린 어젠다’의 오만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하고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 보전을 해주는 것을 제안했다. 

카스의 제안은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시장 조성'으로 옮기는 것이다. 

 

9.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오늘날 금융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에 이래 세 배로 늘었다. 하지만 금융활동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지 않다. 금융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을 끌어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을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해치기만 했다. 

 

10.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 투자가인 자신이 그의 비서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투자가는 ‘일자리를 만드는 자’이며 따라서 낮은 세율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폴 라이언). 라이언은 만드는 자(maker)와 가져가는 자(taker)를 구분했다. 그는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소위 가져가는 자가 만드는 자를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 

CNN의 라나 포루하는 오늘날 가장 큰 ‘가져가는 자’는 거액의 불로소득을 노린 투기를 일삼으며 실물경제에는 기여가 전혀 없는 금융업게 종사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이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이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1.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 일반 열람실에 구비되어 있는 책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

 

2. 민주주의와 겸손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된다.’라는 약속말이다. 

소비주의적인 공동선이 우리의 목표라면 시민의 도덕적 연대는 필요없다. 하지만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공평한 기회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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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1980년대생들은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더 심각한 구조조정을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이제 1990년대생들이 사회로 나아오고 있다. 과거 시스템에 순응하던 이들과 달리 90년대생들은 간단함, 재미, 정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고 있다. 인사 담당자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이 이들과 함께 일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들은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하는지 의문을 제시하며 워라밸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근무 환경도 바뀌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정착되고 있으며 근무 형태도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기존의 소비자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스마트 컨슈머로 호갱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하고 살아내기 위해서 90년대생을 탐구해보자. 

 

1부. 90년대생의 출현

 

1. 그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한국은 1960년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룩해 왔다. 이 당시 세대들은 대기업에 입사해 평사원으로 들어가 조직 내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갔다. 이 순환 과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멈춰버렸다. 

70년대생들이 IMF 외환위기 시절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의 직격탄을 맞은 모습을 본 80년대생들이 선택한 길은 ‘자기 계발’이었다. 하지만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중간 관리자 이상만이 아니라 전 직급에 걸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90년대생들은 상시 구조조정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향후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연공서열과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 혹은 공무원 취업에 올인한다. 

신카스트제도의 출현 : 취업률을 기준으로 신분 등급을 매긴다. 문과생은 천민인 반면 이공계는 귀족 등급이다. 그중에서도 전-화-기(전기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전공자는 왕족 등급으로 불린다. 

 

2. 90년대생들은 어떤 세대인가?

세대는 시간, 집단, 사회구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다. 

세대는 비슷한 생애 과정을 경험한다.(8살 초등 입학, 14살 중등 입학) 또한 동일한 경험을 한다.(1987년 민주항생, 1997 IMF,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 중요한 것은 젊은 시절의 경험이 각인되면 시간이 지나서도 그것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1970년대생,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세대인 1980년대생과 지금의 1990년대생을 비교해볼 수 있다. 

X 세대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에 민감하며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세대 중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연령층을 의미했다. 

밀레니얼 세대 : 1980년대생과 90년대생은 IT 기기의 사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지게 된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80-90년대 출생율 감소가 큰 특징이다. 

중국의 경우 바링허우(80년대생), 쥬링허우(90년대생)로 불리운다. 

90년대생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인가 ‘기성세대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는 세대’인가?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은 아마도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문자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니 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도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두명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라는 표현이 쉬지 않고 나온다. “폴리스의 미래가 걱정된다”라는 말도 나온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은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라는 말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비자]의 <오두>에서는 “지금 덜떨어진 젊은 녀석이 있어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욕해도 움직이지 않고,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행실’, ‘스승의 지혜’라는 세가지 도움이 더해져도 끈내 미동동 하지 않아, 그 정강이에 난 한 가닥 털조차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며 당시 젊은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했다. (66)

 

3. 90년대생의 첫 번째 특징 : 간단하거나

- 90년대생 은어의 특징과 유형 : 1) 줄임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2) 신규 은어의 생성 및 쇠퇴가 빠르다. 3) 더 다양하고 창의 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 줄임말이 생성되고 확장되는 방식 : 1) 축약형(케바케, 사바사, 낄끼빠빠, 할많하않), 2) 초성형(ㄱㄱ, ㅊㅋ), 3) 합성형(밥블레스유, 나일리지), 4) 오타형(고나리, 오나전)

단체 카톡방에서 두 문장 이상의 말을 입력하려다 보면 어느새 빠른 대화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빠른 문자 입력을 대신한 새로운 도구들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이모티콘과 짤방(짤림방지)이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긴 텍스트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세대에게는 문자를 빨리 쓰는 능력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보유한 이모티콘이나 짤을 보내는 것이 더 인정받는다.

비선형적 읽기 시대에 긴 글을 내려가면서 읽어주는 참을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이렇게 스크롤 압박을 이유로 세 줄 요약을 요구한다.

신기술의 변화는 35세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데 반해 35세 이상에겐 당황하고 난처하게 만든다. 2010년 이후 급격한 모바일의 변화는 7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재앙과 같았고 8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90년대생들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셔츠를 직접 만들어 입거나 짐승을 직접 도살하는 것만큼이나 구식이고 심지어는 멍청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86)

80년대생들이 웹 네이티브라면 90년대생들은 앱 네이티브이다. 이들에게 조용하고 집중적인 기존의 선형적 사고는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온라인상으로 제공되는 축약된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필요할 때 바로 찾는 비선형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바일의 배터리가 없거나 잔여 데이터가 떨어지면 단절의 두려움을 느낀다.

 

4. 90년대생의 두 번째 특징 : 재미있거나

80년대생 이전의 세대들이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면 90년대생들은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들은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질서라는 것을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썹맨 : TMI(Too Much information), JMT(존맛탱), 엄카(엄마카드), 흑우(호구), 핵인싸(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 새로운 세대에 맞춰서 재미의 포인트가 변화된 것이다. 이전의 시청자들에게는 외면되었을 내용이 지금 젊은 시청자들에게 병맛스러운 감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컨텐츠가 TV채널 뿐만 아니라 유투브를 통해 확장되었다. 또한 시청자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빠르게,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90년대생의 새로운 능력 : 드립력(그 상황에 어울리는 짧은 말이나 글로써 촌철살인의 웃음을 주는 것)

브리태니커-위키피디아-나무위키(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나 말장난, 농담을 사용)

재미를 통한 자아실현이 기본이 된 90년대생들 : 먹방, 맛집 투어

 

5. 90년대생의 세 번째 특징 : 정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이유

그들은 이제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완전무결한 정직을 요구한다. 당연히 혈연, 지연, 학연은 일종의 적폐다. 공개 채용의 비리를 접하면서 90년대 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그래서 공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그나마 자신이 정직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을 믿지 못하고 이 제도가 있는 자에게만 유리하다고 여긴다. 이들은 신뢰의 시스템화를 요구한다. 진학과 취업을 넘어서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선수 선발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신뢰 시스템 요구, 부동산의 호가가 아니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한 플랫폼의 출현, 화장품의 전체 정보를 제공하는 앱의 등장

솔직함 :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잡아라. 소비자가 기업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나는 접점, 즉 영업과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을 말한다. 본인이 말한 작은 것에 책임을 지는 태도, 더 이상 기업의 광고가 통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결국 투명한 정보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제는 구직자가 면접관을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압박면접도 점차 사라지고 구조화 면접이 대세가 되고 있다.

화이트 불편러와 프로 불편러의 등장

불편러란 단어는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개인의 권리의식과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과거에는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중이 자유롭게 의견을 풀어놓을수 있는 인터넷의 발달로 토론과 비판활동이 활발해졌다.

사회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바른 소리를 내는 불편러들의 증가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예민함은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다만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강화한다거나 타인에게 자신의 선호를 강요하거나 부당하게 참견한다면 꼰대질과 다를게 없어진다. 이는 프로 불편러가 아닌 블랙 불편러이다.

 

2부. 90년대생이 직원이 되었을 때

1. 90년대생, 그들이 몰려온다.

실제로 현재 기업들은 90년대생의 출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마윈,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은 중국과 인터넷 비즈니스의 미래, 그리고 청년 세대에 대한 신뢰였다.

 

정부가 청년일자리정책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에 대기업의 연봉과의 차이를 보상해주는 정책을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연봉이 적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기업문화가 꼰대 수준이기 때문이다.(145)

90년대생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꼰대질 속에서 살아왔다. 문제는 그동안은 꼰대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꼰대의 유형으로는 1)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유형(23%), 2) 상명하복(까라면 까) 유형(20%), 3) 전지전능형(내가 해봐서 안다) 유형(16%), 4) 무배려-무매너(네가 이해해라) 유형(13%), 5) 분노조절장애(너 미쳤어?) 유형(10%), 6) 반말(다짜고짜 야!) 유형(9%) (148)

꼰대질이 심해지면 갑질과 모욕과 같은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 또라이를 피해 조직을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 여럿이 있음

3) 팀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 임

 

2. 90년대생 인재들의 특징

현재 20대인 90년대생들에 흔히 붙어 다니는 꼬리표는 다음과 같다. ‘충성심이 없고’, ‘자기 실수는 인정 안하고 변명만 늘어놓고’, ‘끈기가 없어서 쉽게 포기하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없고’, ‘고집이 세고’, ‘힘든 일은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꼬리표는 보통 기존 세대들의 시각에 따른 것이다.

로열티 ;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중진들이 볼때 90년대생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보인다. 미국의 경우 1965년이후 출생한 X세대는 1990년대부터 회사에 진출하면서 이전의 베이비붐 세대와 갈등을 보였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돈 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Young) 도시의(Urban) 전문직(Professional), 즉 여피족Yuppies과는 다르게 젊고(Young) 개인주의적이며(individualistic) 자유분방하고(Free-minded)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수고 적은(Few), 즉 이피족Yiffie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려 하지 않아 회사에 대한 충성을 높게 사는 기존 세대나 관리자들이 이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90년대생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70년대생들과 상시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가져왔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쑥대밭이 되었던 80년대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안정된 생활은 특정 세대의 기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정작 90년대생들은 안정적인 삶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이후로 열심히 일해온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팽겨쳐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90년대생들에게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야근 문화에 익숙한 70년대생 이전 세대에게 정시 퇴근 캠페인은 회사가 주는 하나의 혜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80년대, 90년대생들에게는 정시 퇴근이란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이다.

 

보여주기식 업무에 대한 염증

성과 창출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보여주기는 부지런한 비효율의 대표주자다.

 

형식에 빠져 낭비되는 시간들

90년대생들은 또한 실행보다 계획이 중시되고 알맹이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조직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격언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의사결정은 없다’라는 격언을 압도한다.

 

3.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고용

2018년 ‘주 52시간 근무 시대’의 개막

주 52시간 근로제의 시행은 누군가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저녁을 굶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다.

90년대생들은 기존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기업의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낮다. 반대로 기업에서 개인의 미래와 가치 상승에 대한 관심은 높다. 여기서 기존의 경직된 인사제도에서 벗어나 회사와 개인의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영할 필요가 생긴다.

 

4. 새로운 세대의 직원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강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대

예전 빠따로 다스리던 시절은 갔다. 무엇보다 90년대생들은 자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들에게는 권위와 통제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강압적인 요구에 그들의 권리를 잃으려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견이 아닌 참여를 원하는 세대

버티라 하지 말고 버텨야 하는 기한을 알려야

90년대생들이 일하는 조직의 관리자들은 이제 이들이 입사 후 얼마 동안 도제식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부분과 그에 따른 모습을 현실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표준 답안을 제시하기 보다 더 나은 방안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90년대생들에게도 회사란 노동을 하러 오는 곳이다. 다만 그들은 어디에서라도 유희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유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회사는 일터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 

‘전 업무 프로젝트화 동기부여 관리법’ : 직장에 오락시설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그 회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업무 몰입이나 흥미 증진에 있어서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90년대생들에게 일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직에 관대한 기업일수록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기 쉽다. 외부 인재들은 이직에 관대한 회사에 입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3부. 90년대생이 소비자가 되었을 때

1. 90년대생, 소비업계를 뒤흔들다

호갱의 탄생 그리고 반격

호갱은 기업의 차별적인 가격 부과 행위나 억지스러운 상술에 당한 고객을 말한다. 기업은 ‘어디에서 가장 좋은 조건의 거래를 할 수 있는지’를 고객에게 숨겼다.

정보의 비대칭과 그동안의 소비 프레임 속에 갇혔던 소비자들은 기업이라는 거인에 대항하지 못하고 벽만 쌓아 올렸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과 모바일을 무기삼아 기업에 반격을 시작했다.

스마트 컨슈머와 스튜피드 컨슈머

간결하게, 더 간결하게

90년대생들은 고객만족이나 고객감동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번거로움의 제거다.

1-2인 가구 비중의 증가로 가정 간편식 시장이 급증하였고, 요식산업이나 조미료시장의 변화가 일고 있다.

90년대생들의 경우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생겼을 때 모바일로 검색을 하고 게시판에 문의사항을 남기거나 챗봇을 통해 즉시 상담을 한다. 비대면상담을 선호하는 것이다.

연결이 권리가 된 세대의 모습

90년대생들에게 연결은 이제 하나의 권리처럼 여겨진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므로 빼앗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방전포비아, 배터리 거지)

십대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두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놔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다.

 

2. 90년대생들이 바꿔버린 소비 지형도

호갱기업

1) 직원과 협력업체에 대한 갑질 등 불공정 행위를 하는 기업, 2) 국내의 낮은 경쟁 상황을 이용하여 차별적인 가격정책을 취하는 기업, 3) 기업의 수익성 향상을 위해 제품의 품질을 고의로 악화시키는 기업, 4) 복잡한 프로세스를 개선하지 않아 소비자의 불편을 야기하는 기업

 

대리점 밀어내기로 갑질의 대표기업이 된 남양유업

용산 전자상가를 무너뜨리다.

프리미엄 전략을 역풍을 맞은 다이슨

한국 시장에 대한 역차별로 비판받는 현대자동차

맥도날드가 점차 사라지는 진짜 이유

질소 과자에 경종을 울리다

맥주 시장과 주점 프랜차이즈의 변화를 이끌다

스몰 비어의 등장과 기존 프랜차이즈의 몰락

해외 직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위기를 맞을 산업들

호갱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 Slow-Death 시키기

 

새로운 소비자들이 용산 전자상가를 특별히 보이콧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호갱이되고 싶지 않았던 새로운 세대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말없이 떠났던 것이다.

 

3. 90년대생의 마음 사로잡기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이다. 이러한 융합기술의 발전 방향은 번거로움의 최소화이다.

아마존고라는 무인 매장과 알리바바의 미래형 매장인 허머.

기술의 발전 방향이 소비자의 편리보다 점포 관리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새로운 세대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20대가 유투브를 보는 또 다른 이유

네이버 캐스트와 같은 타 동영상 서비스에 비해서 짧은 광고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유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의 경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저의 돈이 아닌 광고주의 돈이다. 광고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저의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유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90년대생들을 답한다. 우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라고 말이다.

정직한 제품과 서비스만이 살아남는다.

창렬푸드의 몰락과 혜자푸드의 성공

배달앱의 사용이유로 간편성과 아울러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형 뽑기방의 몰락(호구가 되기 싫은 90년대생들)

이처럼 90년대생들은 직원으로 일하든 소비자로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는다.

 

4. 90년대생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방법

샤오미는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자가 제공하는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른 운영체제 업그레이드를 지원해 제품 안정성을 높여 소비자의 충성도를 이끌어내고 있다.

70년대생들이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불만을 전화나 엽서를 통해서 알렸다면, 80년대생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내용을 올려 답변을 제공받았다. 이제 90년대생 고객들은 본인의 불만을 기업의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상담하거나 온라인 채널에 등록하지 않고 본인의 SNS에 잡담식으로 올리거나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올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를 관찰할 수 있는 두가지 방식

첫 번째 방법으로는 기업의 담당자 혹은 조사자가 별도의 체계적인 조사 설계 과정 없이 담당 세대가 하는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 대한 내부자적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세대의 말과 행동의 전반적인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법으로는 해당 세대를 직접 기업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교회안에 정직에 대한 부분의 반영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교회의 문제, 불합리한 부분이 보이게 될때 어떻게 할것인가??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배신으로 여겨진다. 

지나치게 엘리트화된교회로 이동하던지 이원론에 빠져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지역교회 청년들에 대한 영적인 수준, 평가. 

이것이 90년대생만의 이야기인가? 교회가 이들의 특징을 채워주지 못하는 상황. 

성윤리 감수성, 생태 감수성.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 

어떤 일에 가슴뛰게 할 것인가? 참여. 의사결정에 모두 함께 참여하도록. 

세대 통합의 방법 : 예배. 

- 정직, 직구. 목사라는 권위로 사역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제대로된 컨텐츠가 있어야 한다. 핵심을 준비하는 교회. 

- 뭔가가 없기땨문에 행사로 사람들을 돌리는 것이다. 제대로된 말씀과 기도가 아니라 형식으로서의. 구원의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속에서 찾아내는 새로움.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 다양한 세대가 존재하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복음이다. 센터처치. 

 

느림의 영성, 초월적 영성

빠른 이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급 노화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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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계속되는 우리의 여행

* 지금까지 우리의 여정

1. 세가지 문과 세가지 장애물

 

장애물들

1) 기독교인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장애물

2) 지적 장애물

3) 실존적 장애물(고난)

 

2. 무신론과 유신론, 소통하시는 하나님

1) 신에 대한 두가지 입장, 무신론과 유신론

2) 소통하시는 하나님, 성경이라는 미디어

 

3. 진정한 행복의 두가지 조건

1) 행복을 얻기 위한 네가지 추구 : 쾌락, 명예, 권력, 재산

2) 두가지 행복의 조건 : 무조건적인 사랑, 삶의 의미

 

4.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오늘날 우리의 세상

1) 하나님, 자신, 이웃, 세상과의 관계

 

2) 오늘날 깨진 우리의 세상

 

 

5.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

1) 무엇이 문제인가? 죄, 자기 중심성

2) 죄의 영향력, 열매와 가지와 뿌리

 

6. 하나님의 해결책과 나의 응답

1) 하나님의 해결책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심,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

2) 나의 응답 : 인격적 반응,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라. 

죄인됨을 인정 -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임  -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감

3)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 : 기뻐함, 재헌신, 영접, 탐구, 거절

 

이제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들이 선택한 반응과 관련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풍성한 삶의 여정에 들어서시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차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적 인식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겠다는 지동설적 인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는 코페르티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복음에 선뜻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리되지 않은 걸림돌들 때문입니다. 

1) 지적 장애물

2) 기독교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과 세속적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어왔다. 

3)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문제(실존적 문제) :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는가? 이것이 나의 잘못이든, 이웃의 잘못이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결국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우리가 얼마나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고통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귀한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걸림돌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에 대한 내용에 대강 동의하고, 이미 그것을 믿고 있지만 삶을 변화되지 않아서, 기뻐하기도 그렇고, 재헌신하기도 그렇고, 다시 영접하기도 뭐해서 탐구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적이 있는데도 탐구를 택하는 이유는 대부분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우리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가기보다 단순히 기독교 문화에 적응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의 여행이며 모험으로 가득찬 역동적인 여행으로 결단하고 그 순례의 길을 걸어가며 성장해야 합니다. 

 

* 영적 여행의 네 가지 필수 요소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확인해야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행이 아름답게 진행되려면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좋은 여행에는 지도자와 인도자, 그 인도자에 대한 신뢰와 함께 동반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 지도 - 성경

우리는 암중모색하며 길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고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책이며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먼저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신약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따랐던 첫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구약은 인간 역사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신약이 채 50, 100년도 되지 않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면 구약은 수천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택하심으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2) 인도자 - 성령

성경이 우리에게 객관적 진리를 제공한다면 이제 성령님을 우리가 예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삶에서, 때로 우리 양심을 통해서, 또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꾸짖으십니다. 우리의 성품을 바꾸시고, 꿈과 비전을 갖게 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객관적 진리를 얻었다면, 우리 내면에서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주관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3) 신뢰 - 믿음

우리에게 선명한 지도와 든든한 인도자가 있다 해도 우리가 이 지도와 인도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여행은 매우 불안해질 것입니다. 지도와 인도자를 신뢰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믿음을 일종의 신심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마음가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고 간절히 믿는 행위나 자세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할 때 그것은 그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꼭 믿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도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미 하신 일, 그리고 앞으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믿는 것이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완전한 죄 사함과 자녀 삼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지금도 나의 인생가운데 오셔서 나를 이끌어 가시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고 계신 일, 하실 일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여행을 계획하고 토론하지만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셨고, 하시고 하실 일들. 그로 말미암은 축복이 나와 나의 공동체에 흘러 들어오게 하는 통로와도 같습니다. 

 

4) 동반자 - 공동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는 동반자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단독적인 이 결단을 통해 하나님앞에 섰을 때 이미 이 구원의 부르심가운데 나아온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 여정의 동반자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일요일에 예배하는 집단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러한 동반자를 통해서 지도를 읽는 법을 배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것을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란 지도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인도자-성령을 의지하는 법을 알려주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을 지도에서 보여준 방법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본을 보여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이들이 그것들을 잘 누리게 해주는 공동체입니다. 

오래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합니다. 공동체가 없는 순례자, 여행자는 홀로 가다가 길을 잃거나 지쳐서 넘어지게 됩니다. 

 

5) 신앙의 단계

이렇게 영적 여정을 시작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륵 거쳐 장성하여 부모가 되고 그래서 또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성장합니다. 

영적 여행은 영적 아이로 시작합니다. 복음의 기본 뼈대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면 영적 생명이 막 시작된 영적 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적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지도를 읽고 인도자의 뜻을 분별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성장하여 영적 청년이 됩니다. 

청년이 되면 이제부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하고 자신의 사명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영적 청년은 영적 동생이랄 수 있는 영적 아이를 돌볼 줄 알고, 영적 부모인 자신의 리더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영적 부모는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그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입니다. 또 영적 청년들이 지금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본을 보이며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 공동체를 세워나가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우리의 여행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이 영적인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이 만약에 탐구를 택했다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아갈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2. 당신은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 네 가지를 어떻게 실제적인 삶에서 누리겠습니까?

3. 당신은 지금 영적 아이, 청년, 부모 중 어디에 이르러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꿈꾸는 영적 여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로 이 꿈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을까요?

4. 예수님의 중심 가르침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중요한 사상의 근간을 풀어놓은 책이 ‘청년아 때가 찼다’입니다. 마가복음을 공부하며 함께 읽어 나가면, 예수님의 가르침 위에 인생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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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하나님의 해결책과 나의 응답

 

우리는 지난 시간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죄로 가득찬 세상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인 어려움,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의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로부터 인류와 사회 공동체의 문제 속에서 살아가며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깨어진 이 세상속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겟습니다. 

 

1. 하나님의 해결책

앞서 말한대로 우리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존재의 중심이신데 그 분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주인되려고 하는 자기 중심성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개인과 사회와 인류전체가 심각한 문제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성육신 하심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을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하신 일 첫번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심.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신이시므로 인간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소통하셨습니다. 바로 성경의 복음서는 그 예수님의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거니시고, 우리의 생사고락을 경험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남녀노소, 온갖 병자들, 평범한 농부와 어부들, 사회의 저명인사와 부자와 거지, 창녀와 매국노,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셔서 모든 이들은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깊은 연민과 사랑으로, 해학과 눈물로, 촌철살인의 깨우침과 무서운 경책으로 이들을 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대화와 가르침, 이적을 행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하신 일 두번째,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

자신의 인격과 삶, 사역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깨진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님이 예고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놀랍게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의 기록중에 30-40%가 그분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고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반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은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중요한 미션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배반학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서 주인 행세하는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 자신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을까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실컷 나 중심으로 살다가 갑자기 ‘아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다시 내 주인이 되어주세요’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아 그것 없던 걸로 해주세요’라고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품중에 정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어놓고 용서를 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신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2. 인격적 반응과 그에 따르는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인간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적인 선택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야기를 복음, 기쁜 소식(gospel, good news), 좋은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성경을 통해서, 교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 유효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나의 이야기로 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바쳐서 너희를 사랑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대는 단지 우리를 사랑해서 초대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한 정의로운 대가를 자신이 지불하셨으니, 이제는 우리에게서 정의로운 분노를 거두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너희 잘못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내가 다 책임졌으니, 너희는 이제 자유롭게 나에게 반응해라. 내 사랑을 받아들여 나의 선한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첫번째, 무조건적인 사랑

거대한 우주 속의 우리, 빅뱅 이론,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 인간을 택하신 하나님

 

태양 앞에서 모든 빛이 상대화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사랑하시고 가치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의 배경, 학력, 외모, 능력, 연봉, 직장, 건강 그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내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내면에 들어와서 그것을 누릴 수록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두번째, 궁극적인 삶의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우리 안에는 새로운 의욕과 동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아픈 세상에서, 이 깨진 세상에서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다 죽을까? 무엇을 해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온 세상 구원 계획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3.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속에 함께 동참하는 여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이 여정에 끌어들이지 않으십니다. 

1)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 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 죄, 자기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

 

2) 죄인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모든 죄책을 대신 져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책임을 지시고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3) 이제 하나님께 돌아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4.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반응

1) 기뻐합니다.(rejoice)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기에,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2) 재헌신합니다.(recommit)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정말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인으로 여기고 따라가면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떤 시점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되어 세상의 성공을 좇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금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재헌신하는 것입니다. 

 

3) 영접합니다.(receive) 

영접이란 지금가지 나눈 모든 이야기를 내면에 온전히 심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래 계획, 그리고 깨진 세상과 그 원인인 죄, 하나님이 주신 해결 방법에 진실로 동의해서 마음의 주인 자리에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거듭났다’, ‘중생했다’라고 표현삽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정말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왜 죄인인지 깨달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을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삶의 살겠다고 무릎 꿇은 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4) 좀더 탐구합니다.(research)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깨진 세상, 하나님의 해결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하나님께 인생을 드리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아직도 고민이 좀더 필요한 것 같다고,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질문과 탐구는 귀한 일입니다. 억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탐구하고나서 믿겠다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믿지 않겠다는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평생 동안 읽고 공부해야 할 책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성경의 방대한 이야기를 축약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앞에서 결단하기 위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이미 들었습니다. 정말 결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탐구를 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초청에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5) 거절입니다.(reject)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격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로 줄 수 없습니다. 받는 쪽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해야 사랑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그 거절의 책임은 당연히 내가 져야 합니다. 

 

5. 기독교의 기본진리

1)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만드셨고 나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2)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몰아 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옳은 대로 살아가 심각한 문제에 빠졌고,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이 중심이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3) 이 죄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이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4)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데,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게 돌아선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인데 이 이후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적적인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 5R중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동참하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여 이 깨지고 상처받은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깊은 다스림과 보살핌 가운데 성장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삶의 주인은 누구였으며, 어떠한 삶의 여정을 걸어왔습니까?

 

2. 당신은 다섯가지 반응(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중 어떤 반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반응에 따르는 인격적 결단을 내리고, 인도자와 함께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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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진정한 사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1. 성경이 설명하는 깨진 세상의 원인, 죄

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깨어짐의 원인을 ‘죄’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곰곰히 생각하다가 자신은 그렇게 큰 죄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보통 죄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이나 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LH 직원이 자신의 정보로 땅을 투기하는 행위,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의 땅의 용지를 변경하거나 개발을 추진하여 땅값을 올리는 행위, 자신의 자녀를 학대하거나 방치, 유기하는 행위

위의 구체적인 심각한 죄들을 짓지 않았기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존재 원칙과 질서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이 유지될 수 있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과 나의 인생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나 자신이 중심을 차지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SIN, I-centeredness, 자기중심성

 

 

이것이 죄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을 그분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 질서를 거부한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이를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 선악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특별함

 1) 아름다운 도덕적 성품 : 겸손, 순수, 정의감, 사랑, 자비, 인내

 2) 언어의 사용 : 말씀하시는 하나님

 3) 사회성 : 삼위일체(페리코레시스), 남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4) 이성 : 사고력(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판단)

 5) 영성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종교성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계실때 이러한 성품들은 제대로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모독 : 무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나의 인생살이에서 하나님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주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평소에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근사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고 식사를 하며 가족들과 멋진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집은 아주 잘 꾸며져 있었고, 그 친구와는 말이 잘 통했습니다. 그런데 뒷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몰라도 된답니다. 식사후 화장실에 가는 길에 우연히 열린 뒷방의 문을 통해서 보니 그 방안에는 그 친구의 늙으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모습으로 더러운 음식을 먹고 계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친구를 계속해서 좋은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홀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불쾌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선해서라기 보다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죄란 우리 인간 세상과 사회를 가능하게 하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삶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지으시고 지금도 보존하고 운영하십니다. 모든 행성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만물이 그 원칙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존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원칙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이 원칙이 무시될 때 이 원칙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이 원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피해를 받고, 이 원칙을 어긴 인간이 결국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주 만물에 작용하는 법칙중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목에 보자기를 묶고 뛰어 내립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의자나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점점 더 이 법칙을 거스립니다. 2층, 3층 옥상에서 뛰어내립니다. 잘못하면 발목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3층에서도 무사하니 63빌딩에서 뛰어내려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아주 작은 물리 법칙을 무시해도 큰 사고가 납니다. 

 

이런 물리법칙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시하지 말고 지키며 살아가야할 삶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법, 특히 사랑하는 법, 돈을 벌고 쓰는 법, 불의를 다루는 방법,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법,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자원을 사용하는 법등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원리들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의 원리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인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방법대로, 세상 방식과 유행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수많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와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의 방법을 다루는 수많은 책들, 지침서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은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의 원리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의 원리를 배우고 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자신이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합니다. 

결국 이러한 원리들을 무시하면 가장 먼저 자신이 손해를 보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나아가 사회적, 문화적, 생태적으로 인류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2. 죄에 대한 심층적인 설명

여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요? 뿌리와 가지만을 바라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음 그림은 가지에 잎사귀와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습니다. 

 

밑둥만 남아있는 나무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나무 그림은 죄를 심층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사람들은 꽃, 열매, 잎사귀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규범, 도덕, 윤리, 법률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결과, 죄의 열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사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나 음욕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질투심이나 탐욕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때 이를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등 종교에서는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합니다. 

마 5:28

마 5:22

성경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을 가질 때 이미 간음했다라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욕할 때 이를 살인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열매를 다 없애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적인 죄는 단지 마음을 의미하는 줄기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위치한 뿌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주와 나의 중심이신데, 내가 주인이 된 상태가 죄의 본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된 상태라면, 마음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난 여전히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열매와 잎사귀를 없애 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이고, 나무 몸체를 댕강 잘라버려도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뿌리가 사과나무이니, 마음을 잘 닦으며 우지하지 않으면 줄기가 나오고, 겉으로 아무리 조심하여도 결국 마음 속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마음과 실제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시작된 가정이 깨져 버립니다. 인류문명이 진보하지만 빈곤은 여전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생산성을 자랑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실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여러분은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무한하다면 지금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보고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바꾸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2리터자리 생수 병 혹은 화장지와 같습니다. 내 인생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소모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니 그냥 한번 살아보겠다라는 마음 자체가 죄의 본질을 반영하는 자세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럭저럭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왔지만 이것으로는 안된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셨다면 하나님께 나아오실 때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 행세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 사회의 문제이고, 세상의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문명과 과학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는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 해결 방법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진실한 인격적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눔 질문

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진 이유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볼 때 당신은 죄인입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또는,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3. 당신은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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