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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무신론과 유신론, 소통하시는 하나님

생활양식, 경험과 체험, 탐구와 추구라는 문들 중 하나의 문으로 들어와서 진리, 풍성한 삶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우리들. 우리 앞에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볼 차례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여부와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념, 세계관의 문제이다. 

 

1. 신에 대한 두가지 입장, 무신론과 유신론

1) 무신론, 신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 이들은 물질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 물질 + 시간 + 우연 =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궁극적 진리나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 유신론, 신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입장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신이 의도적으로 질서 있게 창조하였고 인간도 그중 하나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유신론은 종교적 입장이고 무신론은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때문이다. 과학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꼭 필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과학으로 모든 질문에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신이 있는 것을 증명하면 믿겠다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이 없다는 것또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 혹은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신념 체계 또는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신념 체계, 세계관,  전제점은 우리가 철저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이나 중요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전제점, 세계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라고 했다. 과학이 눈에 보이고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한다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 특히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 진화론 옹호자인 리차드 도킨스와 같은 학자는 종교와 과학을 대립시킨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만 그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 

이처럼 무신론과 유신론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 개인이 선택해야하는 문제이다. 

우리들도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우주가 물질과 시간과 우연에 의해서 수십억년에 걸쳐서 형성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죽어서 물질로 돌아가는 존재인가? 죽임 이후의 삶은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이 세상은 초월적인 어떤 신에 의해서 특별한 목적과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 이것은 전제의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하는 질문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그냥 믿어라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질문이나 고민없이 믿을 때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이 전제, 세계관과 관련된 부분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유신론적 입장들을 가르는 중요한 축, 소통

이제 우리는 한 발 나아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우리는 이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통, 다른 말로 계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조금 단순화 시켜서 본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소통하는 신과 소통하지 않는 신이 있습니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의 일반적인 사상, 동양 철학의 입장은 신이라는 존재를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고 이 궁극적 진리가 인간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이것을 알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 대부분의 종교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다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인생에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가? 선과 악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그 답을 스스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고등 종교가 만들어집니다. 모든 문화의 중심에는 이런 고등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나 도가의 기본 개념이기도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에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구도의 과정을 거칩니다. 고행을 하기도 하고 장좌불와라고 해서 눕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성철 스님 같은 분은 8년 동안 한 번도 눕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진리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먼저 소통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통, 자기 계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성경책도 읽고 여러 경건 서적도 읽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진리 또는 하나님을 깨닫기 위해서 집도 떠나고 결혼도 하지 말고 철저한 금욕 수행, 장좌불와를 해야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노력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저의 지적 능력과 의지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셔서 우리와, 저와 소통해주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3. 이스라엘, 예수, 성경이라는 미디어

기독교에서 소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해야할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1) 그것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 이야기했는데 누구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대상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으로 보면 중동지역에 위치하여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강소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셨을때는 세상에서 형편없는 가정,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불러내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야곱에 이르러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이주했다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될, 종족 살상(제노사이드)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던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가장 핍박을 받고, 고통스러운 상황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권력과 재력, 지혜와 도덕으로 무장한 민족이 아니라 당시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민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지금 이 땅 모든 사람에게 이 하나님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신 내용을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기록하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비천한 민족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성경에, 구약의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특별한 지식을 받았음에도, 선민으로 율법과 할례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을 위한 분으로 사유화했고 결국 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열방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성경의 앞부분인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했고 배신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인간 눈높이에 맞춰, 인간이 하나님을 깨달아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몸으로 보여주신 놀라운 소통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놀랍게도 당시 식민지 국가의 아주 가난한 동네의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비천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목수의 아들로, 평범 이하의 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정황속에서 함께 공감하던 이들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어떤 신적 경험이나 꿈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텍스트화되어서 신약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해서 그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고급 정보를 담아 인간에게 주신 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4. 성경과 함께 하는 영적 순례길

말씀드린대로 구약과 신약의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소통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이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의 여정은 바로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그들의 설명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라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또는 신)은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 나누어봅시다.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와 소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2)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하여 ‘성경’이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3) 다음 성경 본문 가운데 세 부분을 골라 읽고, 거기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본문들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음 만남에서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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