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일상
죠이선교회 박기모 목사
들어가며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1989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당시에는 하늘같이 여겨지는 선배들로부터 균형잡힌 신앙을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비전’(리차드 미들턴)이라는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후 캠퍼스 사역을 하다가 2013년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에서 3년간 공부했다. 이때 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가 매우 방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성경, 과학 등등의 다양한 주제를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배웠다.
본 강의는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또한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을 성경이라는 안목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으로 한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worldview)은 말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식자나 무식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다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을 배우지 않아도,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알지 못해도, 모두는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일반적인 정의와 다양한 세계관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세계관은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어로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로 정의된다. 모든 이들은 이러한 인식의 틀을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기에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에 비해서는 논리적이지 못하며, 신념에 비해서는 의지적이지 못하고, 신앙에 비해서는 초월적인 면이 부족하지만 철학, 상식, 신념, 신앙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공기와 같은데 이는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평상시에는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활용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가 제시하는 8가지 질문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와 리차드 미들턴(J. Richard Middleton)이 제시하는 4가지 질문을 사용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자신의 책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The universe next door)’을 개정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의 정의를 수정하고 세계관 질문을 확장시키고 있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8) 이 세계관과 일치하는 개인적이고 삶의 방향을 정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언 왈쉬는 그들의 책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을 통해서 4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우리는 누구인가?
3) 무엇이 문제인가?
4)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처럼 위의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창조주(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기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유신론, 진화론, 유물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인식의 틀)을 통해서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문화)에 의해서 나의 세계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을 안경으로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사용하는 안경이 빨간색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이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보이고 유신론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신의 흔적으로 가득 차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 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하기에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윤회나 인과업보에 대한 관념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당성 구조안에 이러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에 대해서 안점식은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外現化)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內面化)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은 세계관 형성 또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들음이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세계관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분의 제자로 만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이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이렇게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서 세계관(worldview), 가치체계(value system),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이 모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복음을 전함으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작업은 문화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문화와 삶 속에 체화되어 있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위치하는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하고 이는 반드시 세계관끼리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20세기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이를 추구하면서 이러한 본질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모만 커지고 외형만을 바꾸는데 그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관 자체가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바로 혼합주의다. 그렇다고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의 변화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바로 전하면 듣는 이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먼저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창조, 타락, 구속, 삼위일체, 구원, 영생, 천국, 부활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즉 그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불신자들과 비교해서 매력적이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가운데 우리들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이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구별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불신자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될 것이고 이 “소망에 관한 이유”(벧전 3:15)를 묻는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2.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Factfulness)
모두들 컴퓨터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윈도우 시스템이다. 1985년 Windows 1이 발매되었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지금은 Windows 10을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점점 좋아지고 소프트웨어가 복잡해지면서 더 다양한 기능들이 요구되기에 적기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 우리들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를 직접 테스트해보자.(테스트 결과가 마음에 드는가??)
우리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는데는 여러 가지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데이터가 현실에 적실하냐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배운 지식의 내용이 1900년대 것이라거나 1990년대의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들은 지식을 업데이트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앞선 세계관에 대한 정의의 연장선상에서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이란 바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인도에서 40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한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이 인도보다 더 선교가 필요한 나라가 되어버린 상황에 통탄했다. 뉴비긴의 눈에 비친 영국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은 사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교회는 다니고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성경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지는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은 바라볼(look at) 책이 아니라 통해서 볼(look through) 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단순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성경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할 때 어떤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인가?
기독교 세계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창조-타락-구속”과 “구조와 방향”이다.
1) 창조(Creation)
창조가 중요한 이유는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바르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처음을 열면서 시작되는 창조의 선언은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조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면서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바로 여기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창조이기에 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1) 말씀에 의한 창조, 2)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3) 목적이 있는 창조, 4)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시는 창조, 5) 보시기에 좋은 완전한 창조의 특징을 갖는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처럼 바른 창조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앞서 제시한 세계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첫걸음이 된다.
2) 타락(Fall)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범죄, 불순종 행위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에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죄는 결혼이라는 창조 제도를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혼이나 혼외정사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깨뜨려서 가정의 파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규례로서의 국가는 오늘날 전체주의, 민족주의, 독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땅의 소망인 하나님의 교회는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는 일반 기업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임으로 도리어 세상의 근심이 되어버렸고,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렸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인간의 타락,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조된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이라면,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창조와 타락의 관계에서 볼 때 구조는 잘못된 방향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다. 이러한 타락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기대하게 한다.
3) 구속(Redemption)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은 원래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로 화해(reconciliation), 새롭게 함(renewal), 구원(salvation), 재창조(re-creation), 거듭남(regeneration, born again) 등이 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 위의 영어 단어에서 접속사로 사용되는 “re”를 볼 때 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계시록의 구속, 완성의 이야기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또한 선한 창조의 원래의 모습(original design)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 왜곡된 우리의 모습을 어떤 모습, 어떤 방향으로 수정해야할 지를 바로 선한 창조가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간 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고 타락은 모든 피조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시켰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 1:28, 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의 본문을 우리는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땅과 모든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령하셨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이름을 명명하고 땅의 소산을 누리면서 문화 명령에 순종했다. 하지만 선악과를 통한 타락의 영향으로 인간과 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 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영역인데 이것이 타락으로 인해서 왜곡되었고, 우리의 역할은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문화의 흐름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화, 청년 문화에 영향을 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알아보자.
4.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사람들은 근대(modern)의 출현을 서구의 정신사에서 ‘제2의 계몽’이라고 한다. '제1의 계몽'이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에게서 구현된 신화(Mythos)에서 철학(Logos)에로의 변화였다면, '제2의 계몽'은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와 타율에서 비롯된 숙면으로부터 이성이 깨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종교개혁을 지나 16-17세기의 신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를 거쳐, 17-18세기의 신고전주의, 19세기 낭만주의,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이성은 수많은 일을 수행했다.
근대는 이성을 절대시했고 이성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근대의 이상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핵폭탄 한방으로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끝을 알리면서 철학사조에서는 실존주의와 해체주의가 등장했고 이후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after)라는 의미와 모더니즘 너머(beyond)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성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전광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리요타르(Lyotard)와 데리다(Derrida)등이 주장한 해체주의(deconstruction)이다. 여기서 해체란 파괴의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 형이상학과 같은 텍스트를 철저히 비판하고 상대화함으로써 텍스트 안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구조들과 상호작용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와 탈중심을 지향한다.
둘째, 모더니즘의 상징인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에 반대하여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내지 탈합리주의(Irrationalism)적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욕망, 충동, 감성을 중요시 여긴다.
셋째, 일의성(一義性)보다는 다의성(多義性), 동질성보다는 이질성, 단수성보다는 복수성에 가치를 둔다. 이를 통해 "경계를 넘어선 시야, 가능한 변경,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가능하게 되었다.
넷째, 탈인간중심주의 내지 주체의 상실을 나타낸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자연의 힘과 우주의 질서 속에 함몰되어 간다.
다섯째,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표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정치 활동을 비롯한 모든 담론을 욕망을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체주의, 구조주의, 보편주의 대신에 해체주의와 탈중심주의를, 로고스와 논리적 절대주의 대신에 파토스와 탈합리주의를, 의미의 일의성과 절대주의 대신에 개별성과 다양성, 상대성을, 인간중심주의 대신에 탈인간중심주의를, 그리고 정치적, 역사적 관심 대신에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근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싸우고 극복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싸움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함과 동시에 내가 싸우고 있는 전투의 현장의 특성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절대유일의 진리를 부인하며, 또 초월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보편적인 가치와 전통, 역사와 인생의 의미마저도 부인한다. 또 이 시대의 인간은 상대주의와 다의성을 이야기하고, 개방성을 말하며, 지성 못지않게 감성적, 욕망적, 의지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종교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위기와 기회가 상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기에 기독교를 뿌리째 흔드는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계몽주의 이후 근대를 지나면서 지나치게 합리주의, 과학만능주의, 이성주의를 강조하여 편협해진 기독교의 복음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포스트모던의 특성이 이 시대 문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에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일상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5. 우리의 일상
1) 일상이란 무엇인가?
칼 라너(Karl Rahner)는 일상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평범한 매일의 생활이라고 이해하면서 짧은 책 「일상」에서 일상에서의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라너는 일상은 주일과 대비되는 주중의 시간, 즉 매일 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시간들로 그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드러낸다. 라너는 일하는 것, 가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라너는 이 일곱 가지 일상생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일상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일상을 살고자 한다. 그에게 일상은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며 그의 거룩성과 은혜를 경험하는 바로 그 장소이다. 때로는 고단한 일상사는 우리를 낙담하거나 절망에 이르게 할 때도 있으나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힘으로 영원한 삶이라는 진정한 축제에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종교성이 강해질수록 종교, 교회생활에 매몰된 신앙을 요구받지만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삶은 결코 성전에 제한되거나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호 6:6; 사 58:6-7)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일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적 소명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일상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홍정환의 「호당 선생, 일상을 말하다」에서는 다양한 일상의 주제들을 다룬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설거지, 잠, 똥, 휴대전화, 신용카드, 연애, 드라마, 성, 운전, 죽음, 식사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들은 성속 이원론의 영향으로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자동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한다.
"예언자 스가랴는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슥 14:20)고 말했단다.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를 타듯 옛 사람들이 말을 탔다고 생각해 보거라. 말방울이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 차가 지나가니 조심하라는 자동차 경적 역할이었겠지. 본디 제사장의 의복에만 새겨지는 문구인 '여호와께 성결'이 말방울에 기록된다는 것은 가장 거룩하기 힘든 운전석이 거룩한 성소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단다."(운전, pp.202-3)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꿈꾸지만, 영웅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축적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일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중의 하나는 일, 직업일 것이다.
2)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오래전부터 일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학자마다 조금씩 달랐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일을 ‘정신과 관련한 고상하고 가치 있는 활동을 방해하는 저주’라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이 신성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자본론》을 쓴 카를 마르크스는 일을 ‘자아실현을 위한 행동’으로 정의했다.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혹은 즐거움과 자아성취의 밑거름이라는 생각까지 인식의 폭이 매우 넓다.
일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자.
벽돌공 세 사람이 돌을 쌓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첫 번째 벽돌공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몰라요?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벽돌을 기계적으로 쌓아 올리며 첫 번째 벽돌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던 행인은 두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돈을 벌고 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서둘러 벽돌을 쌓고 있었다. 행인은 더 묻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다 세 번째 벽돌공을 만났다. 세 번째 벽돌공은 콧노래를 부르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신나세요?"
"당연히 신나죠. 내가 새로 만든 성당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세 번째 벽돌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인은 완성될 건물을 상상해보았다.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성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을 떠나는 행인은 생각했다.
첫 번째 벽돌공은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벽돌공은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번 돈만큼 행복할 것이다.
세 번째 벽돌공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생각하며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힌트를 주자면 세 번째 벽돌공이 쌓은 담이 가장 튼튼했고 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하게 되고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만족감, 즐거움이 다른 것이다. 일에 대한 관점이 일의 시작이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따라 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게 된다. 직업에 관계없이 자신의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일상 생활이 활기차고 행복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위대한 청소부
"만일 어떤 사람이 거리의 청소부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베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창작하듯 거리를 쓸어야 한다.
그는 하늘의 천군천사와 땅의 백성들이
여기 '자신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위대한 청소부가 살았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깨끗하게 거리를 쓸어야 한다!"
3) 성경이 말하는 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처음 맡기신 일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일은 아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형상의 발현으로서, 그의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는 일(work)이었다. 우리는 일을 노동과 연결시키면서 하기 싫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타락 이전의 일은 기쁘고 즐거운 행위였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의 은사와 재능의 발현으로서의 즐거운 일은 땀 흘리고 수고해야만 하는 노역(drudgery)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것을 믿으며 이를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양한 삶의 자리로 부르셨다. 우리는 일상의 영성을 회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회복해야할 것은 바로 이 타락한 일을 구속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부패함 가운데 빠져버린 우리의 모든 일상을 구속하는 일이며 바른 성경적인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나가면서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 일이나 연애, 오락이나 정치와 문화등의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내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시해주는 방향이 우리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들이 처하는 각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올바른 신앙의 결단을 위해서는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을 분별해내고,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개별화, 분자화되어지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도리어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역은 권위적 인물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개인 스스로가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역 대상인 청년들의 현실적인 필요(Felt need)와 진정한 필요(Real need)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하고 영적인 필요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전도의 문을 닫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안전감을 느끼며 자신의 일상을 깊이 나눌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앞서 호당 선생의 말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오덕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먹고, 싸고, 자는 것과 같은 평범한 삶, 곧 일상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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