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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진정한 사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1. 성경이 설명하는 깨진 세상의 원인, 죄

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깨어짐의 원인을 ‘죄’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곰곰히 생각하다가 자신은 그렇게 큰 죄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보통 죄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이나 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LH 직원이 자신의 정보로 땅을 투기하는 행위,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의 땅의 용지를 변경하거나 개발을 추진하여 땅값을 올리는 행위, 자신의 자녀를 학대하거나 방치, 유기하는 행위

위의 구체적인 심각한 죄들을 짓지 않았기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존재 원칙과 질서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이 유지될 수 있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과 나의 인생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나 자신이 중심을 차지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SIN, I-centeredness, 자기중심성

 

 

이것이 죄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을 그분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 질서를 거부한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이를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 선악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특별함

 1) 아름다운 도덕적 성품 : 겸손, 순수, 정의감, 사랑, 자비, 인내

 2) 언어의 사용 : 말씀하시는 하나님

 3) 사회성 : 삼위일체(페리코레시스), 남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4) 이성 : 사고력(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판단)

 5) 영성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종교성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계실때 이러한 성품들은 제대로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모독 : 무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나의 인생살이에서 하나님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주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평소에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근사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고 식사를 하며 가족들과 멋진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집은 아주 잘 꾸며져 있었고, 그 친구와는 말이 잘 통했습니다. 그런데 뒷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몰라도 된답니다. 식사후 화장실에 가는 길에 우연히 열린 뒷방의 문을 통해서 보니 그 방안에는 그 친구의 늙으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모습으로 더러운 음식을 먹고 계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친구를 계속해서 좋은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홀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불쾌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선해서라기 보다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죄란 우리 인간 세상과 사회를 가능하게 하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삶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지으시고 지금도 보존하고 운영하십니다. 모든 행성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만물이 그 원칙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존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원칙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이 원칙이 무시될 때 이 원칙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이 원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피해를 받고, 이 원칙을 어긴 인간이 결국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주 만물에 작용하는 법칙중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목에 보자기를 묶고 뛰어 내립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의자나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점점 더 이 법칙을 거스립니다. 2층, 3층 옥상에서 뛰어내립니다. 잘못하면 발목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3층에서도 무사하니 63빌딩에서 뛰어내려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아주 작은 물리 법칙을 무시해도 큰 사고가 납니다. 

 

이런 물리법칙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시하지 말고 지키며 살아가야할 삶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법, 특히 사랑하는 법, 돈을 벌고 쓰는 법, 불의를 다루는 방법,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법,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자원을 사용하는 법등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원리들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의 원리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인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방법대로, 세상 방식과 유행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수많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와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의 방법을 다루는 수많은 책들, 지침서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은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의 원리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의 원리를 배우고 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자신이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합니다. 

결국 이러한 원리들을 무시하면 가장 먼저 자신이 손해를 보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나아가 사회적, 문화적, 생태적으로 인류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2. 죄에 대한 심층적인 설명

여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요? 뿌리와 가지만을 바라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음 그림은 가지에 잎사귀와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습니다. 

 

밑둥만 남아있는 나무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나무 그림은 죄를 심층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사람들은 꽃, 열매, 잎사귀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규범, 도덕, 윤리, 법률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결과, 죄의 열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사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나 음욕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질투심이나 탐욕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때 이를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등 종교에서는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합니다. 

마 5:28

마 5:22

성경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을 가질 때 이미 간음했다라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욕할 때 이를 살인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열매를 다 없애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적인 죄는 단지 마음을 의미하는 줄기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위치한 뿌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주와 나의 중심이신데, 내가 주인이 된 상태가 죄의 본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된 상태라면, 마음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난 여전히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열매와 잎사귀를 없애 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이고, 나무 몸체를 댕강 잘라버려도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뿌리가 사과나무이니, 마음을 잘 닦으며 우지하지 않으면 줄기가 나오고, 겉으로 아무리 조심하여도 결국 마음 속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마음과 실제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시작된 가정이 깨져 버립니다. 인류문명이 진보하지만 빈곤은 여전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생산성을 자랑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실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여러분은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무한하다면 지금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보고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바꾸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2리터자리 생수 병 혹은 화장지와 같습니다. 내 인생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소모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니 그냥 한번 살아보겠다라는 마음 자체가 죄의 본질을 반영하는 자세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럭저럭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왔지만 이것으로는 안된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셨다면 하나님께 나아오실 때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 행세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 사회의 문제이고, 세상의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문명과 과학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는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 해결 방법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진실한 인격적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눔 질문

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진 이유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볼 때 당신은 죄인입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또는,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3. 당신은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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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uBlessed is the man who remains steadfast under trial, for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vthe crown of life, wwhich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13 Let no one say when he is tempted, “I am being tempted by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and he himself tempts no one. 14 But each person is tempted when he is lured and enticed by his own desire. 15 Then desire xwhen it has conceived gives birth to sin, and ysin when it is fully grown brings forth death.

16 Do not be deceived, my beloved brothers. 17 z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coming down from athe Father of lights, bwith whom there is no variation or shadow due to change.4 18 cOf his own will he dbrought us forth by the word of truth, ethat we should be a kind of ffirstfruits of his creatures.

u ch. 5:11; Matt. 10:22; 1 Pet. 3:14; [Dan. 12:12]

v Rev. 2:10; 3:11; [1 Cor. 9:25; 2 Tim. 4:8; 1 Pet. 5:4]

w ch. 2:5

x Job 15:35; Ps. 7:14; Isa. 59:4

y Rom. 5:12; 6:23

z Ps. 85:12; John 3:27; 1 Cor. 4:7

a 1 John 1:5

b Mal. 3:6

4 Some manuscripts variation due to a shadow of turning

c John 1:13

d [Gal. 4:19; 1 Pet. 1:3, 23]

e [Eph. 1:12]

f Jer. 2:3; Rev. 14:4; [Rom. 8:19–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12–18.

 

12절) 본문의 생명의 면류관은 앞선 2절의 응답이다. 이는 보석이 장식된 황제의 왕관이 아니라 경기의 승자나 전쟁에 승리한 황제에게 주어지는 월계수 관을 가리킨다.(고전 9:25) 이처럼 시험을 이겨내는 신실한 자에게 약속된 상은 다름아닌 모든 풍성한 복이 동반된 영원한 생명이다.(계 2:10)

 

13절) 앞선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 1:2, 개정)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가지 시험을 우리는 당한다. 이는 시련을 포험한 여러가지이다. 믿음의 시련은 ‘도키미온’이라는 단어로 불순물을 포함한 금이 순금이 되기위해서 거쳐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러 시험은 테스트나 유혹, 시련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신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창 22장), 이스라엘(출 16:4), 히스기야(대하 32:31)를 시험하셨다. 이는 그들을 검증하심으로 그들의 성품이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test) 하시지만 유혹(tempt)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꾀어서 그들로 죄를 저지르도록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이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 13절의 하반부에는 왜 유혹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되는데, 그 분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he cannot be tempted with evil).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택하고 있는 이 번역은 드물게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 아페이라스토스(apeirastos)를 수동의 의미를 지닌 동사적 형용사로 이해하여 ‘유혹받으실 수 없는’(unable to be tempted)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두 개의 가능성도 언급될 수 있다. 호르트는 그 단어를 좀 더 자주 사용되는 유사어 아페이라토스(apeiratos)와 연관시켜 ‘전혀 경험이 없는’(inexperienced)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NEB에 반영되어, ‘하나님은 악과 접촉이 없으시다(untouched)’로 표현된다. 반면에 데이비스(Davids)는 이 단어를 ‘시험받아서는 안 된다(ought not to be tested)’로 번역한다. 그에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06.

 

14-15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짓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심에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를 통해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죄를 낳았고 이것이 자라나 사망을 가져오게 된것이다. 

본문에서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모습은 낚시꾼이 낚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루어 낚시’가 있다. 이는 지렁이나 떡밥과 같은 미끼가 아닌 인조 미끼를 사용하는 낚시를 말한다. 보통 릴 낚시로 루어(미끼)를 멀리 던진후 릴을 감으면서 헤엄치듯 움직여 고기를 유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욕심에 미혹된 인간은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된 성공, 자기만족, 기쁨에 끌려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결국 길을 잃고 멀리 떨어져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벧전 5:8-9, 개정)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욕심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본문은 3대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한다. 욕심이 자라나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죄이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여 새롭게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인 것이다. 결국 욕심(에피티미아)-죄(하말티아)-사망(타나토스)의 사이클이 이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이클을 끊어 내야 한다. 

 

 

James knows the origin of temptation. It is not God, nor is it Satan and Satan alone. It is instead a personal desire born of self-interest that renders us susceptible to the evil inclination and therefore, at times, to the wiles of the evil one. We may wrongly seek to blame others, Satan, or even God, but ultimately we are morally responsible. The key term here is epithymia, which means “desire.” In the New Testament epithymia generally carries a negative meaning, such as “lust,” “selfish ambition,” or “evil desire.”14

Unlike the case in 1:2–8, here peirasmos (“temptation, trial”) is clearly restricted in origin to the internal, to its source lodged within us. This source is the “evil desire,” and James must be thinking again of the yeṣer ha-ra.15 According to him, we are “dragged away” and “enticed” by evil desire. The expressions have their home in the realms of hunting and fishing. The fact that they appear in an odd order (“dragged off” is placed before “enticed”) is best explained by the predilection of the Old Testament to mesh images of snares and nets. So in Ecclesiastes 9:12 we read, “As fish are caught in a cruel net, or birds taken in a snare, so men are trapped by evil times that fall unexpectedly upon them.”

In other words, this verse contains two similar images, not a succession of action within one image. The first pictures the violent action of capture that follows setting a lure, and second the attractive bait that draws an unsuspecting victim. The extraordinary vividness of these images shows how dangerous James believes the evil impulse to be. Evil desire within us acts as both the attractive bait and as the lure. The evil desire is our own, and a bent to be attracted to it is equally our own responsibility. This deep character inclination explains the actions of the double-minded person in 1:6–8 and the wealthy person in 1:10.

14 In Matt. 5:28 Jesus speaks of “lust”; Paul in 2 Tim. 3:6 speaks of those who are swayed by “evil desires”; and Peter in 2 Peter 1:4 speaks of escaping the corruption caused by “evil desires.”

15 See pp. 18, 23–24, 56–58, abov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variety of rabbinic views concerning the yeṣerim (sometimes it is undifferentiated, sometimes clearly evil, and sometimes clearly pure) parallels the intended ambiguity of James’s use of peirasmos.

 David P. Nystrom, Jame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73–74.

 

16-18절) 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다시 설명한다. 앞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시험을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면 이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시련을 당할때 그들을 죄짓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사와 선물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건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그 누구와 달리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복음의 말씀 고후 6:7, 엡 1:13, 골 1:5, 딤후 2:15)을 통해서 우리를 낳으셨다.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 출생한 우리들이 다시금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영적인 생명의 탄생을 말한다면 앞선 15절에서는 죄와 사망의 탄생을 말하고 있댜. 

  • 새 탄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 즉 그 분이 창조한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변함이 없으신 그 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이 영적 탄생을 이루신 수단이 바로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다. 그리고 이 영적 탄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계획의 첫 불입금(첫 열매)이 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좋은 선물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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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then? Are we Jews1 any better off?2 No,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all, both kJews and lGreeks, are munder sin, 10 as it is written:
n“None is righteous, no, not one;
11  no one understands;
no one seeks for God.
12  All have turned aside; together they have become worthless;
no one does good,
not even on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Ro 3:9–12.



9절) 1절과 연결되어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유대인) 어떤 유익, 우위가 있느냐? 유대인들은 2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을 그들의 자랑으로 여겼는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 모두 다 죄아래 있다라고 이미 선언되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면에서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구원과 심판에 대해서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전체에서는 바울은 죄를 의인화된 단수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들이 한가지로부터 나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상태는 원래 죄의 노예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깨뜨리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이해는 문화권 마다 다르다. 죄 자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다루기도 하고 죄를 짓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문제로 삼기도 한다. 사탄으로 대변되는 죄의 권세로 볼것인지 죄를 짓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로 볼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죄 아래에 있다. Gal. 3:22; (ver. 19, 23; ch. 11:32; Prov. 20:9)
- Do we have any advantage? “We” probably refers to Jews. Even though Jews have a certain “advantage” in possessing “the very words of God” (v. 2), they do not have any ultimate advantage over Gentiles when it comes to salvation and damnation. under the power of sin. Throughout Romans, Paul refers to sin in the singular to make the point that the many sins people commit stem from a single, basic fact: they are helpless slaves to sin’s power. This fundamental human predicament is matched by God’s work in Christ to break through sin and liberate humans, who are enslaved to it (3:24; 6:1–23).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6.
앞서 본문을 통해서 볼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익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과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다른 이들과는 구별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자랑했는데 이것을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러니까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볼때 결코 나음이 없다는 것이다.
- In verse 1 of this chapter Paul raised the question whether the Jews had any advantage over the Gentiles. His answer was Much, indeed, in every way! Paul now returns to that question and approaches it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He points out that even though God did trust his message to the Jews (v. 2), the Jews and Gentiles alike are all under the power of sin. Viewed from this perspective, the Jews are not in any better condition that the Gentiles.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58.

10-12절) 본문은 시 14:1-3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의인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차용하고 있다.
- Paul focuses on the sinfulness of every human being, citing Ps. 14:1–3 and perhaps echoing Eccles. 7:20. When Paul says none is righteous, no one seeks for God, and no one does good, he means that no human being on his own seeks for God or does any good that merits salvation. Paul does not deny that human beings perform some actions that conform externally to goodness, but these actions, prior to salvation, are still stained by evil, since they are not done for God’s glory (Rom. 1:21) and do not come from faith (14:2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162.

11절에서 깨닫다라는 의미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그저 중립적인 일반계시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구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그들가운데 없다는 것을 말해주다. 이는 이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는 진술과 맞닿아 았다. 그러니까 본문은 '진정으로 무엇이 옳은지를 깨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는 의미이다.
- These verses come from Psalm 14:1–3 (parallel 53:1–3). In the Psalm the first and sixth lines read the same, but Paul has made a significant change by introducing into the quote the word righteous. This word appears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Septuagint, but it is a basic element in Paul’s theology. For Paul this phrase would mean there is not a man who is in a right relation with God. It is significant that in verse 20 Paul summarizes his total argument from the scriptures by the quotation from Psalm 143:2: because no man is put right in God’s sight by doing what the Law requires. To translate as the JB does (“there is not a good man left, no, not one”) is to translate the Psalm rather that what Paul intends.
In view of the particular manner in which Paul uses righteous in this context, it may be necessary in some languages to use the phrase “right before God,” “righteous in God’s eyes,” or “seen as righteous by God.” This is certainly more than merely “doing right.”
In a number of languages one cannot use an expression such as who understands without indicating something of the nature of what is or is not understood. The most neutral and contextually appropriate goal of such understanding is probably “what is right.” Therefore one may translate: “There is not one person who really understand what is right.”
The last clause of verse 11 must not be rendered in such a way as to imply that a person goes out looking for God in the same way that one would look for a lost coin. To avoid a wrong connotation one may have, in some languages, “seeks to be related to God,” “seeks to be with God,” or “wants to have God with him.”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60.

이방인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했고 삶의 양식에서는 우상을 섬기고 부패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다.(롬 1:18-32)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지만 이를 행하는데는 실패했다. 우위에 있어지만 그 자리를 선점하는데는 실패한 것이다.(2:1-3) 이것에 대해서 9절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낳으냐라는 이 표현은 영어로 "Are we Jews any better off?"로 표현되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프로에코'라는 한 단어이다. 이 동사를 원형으로 보느냐 수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의미는 반대가 된다. '우리는 나으냐"로 볼수도 있고 '우리가 못하냐"로도 번역된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대답은 같다. 결코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유대인은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죄의 저주 아래 놓여있는 상태에서는 말이다. 본문 전체는 마치 법정에서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9절은 고소, 10-17절은 긍거들, 19절은 법정의 모습, 20절은 판결이다.)

다원주의자들은 각자의 노력, 종교적인 노력들을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라고 가르친다. 또한 인간의 노력으로 다양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길이 아닌 다른 방법, 길은 다 치우치게 되는 것이고 무익하게 되는 것이다.
 
- It was now time for Paul to draw his argument to its logical conclusion. He asked, “What shall we conclude then?”165 The pagan, rejecting the revelation of God in nature and pursuing a lifestyle that was both idolatrous and degrading, was deserving of the wrath of God (Rom 1:18–32). The Jews, who had the law but failed to put it into practice, received no benefit from their privileged position (Rom 2:1–3). What does all this imply? It is not certain whether the Greek verb in the second question should be translated as a passive or as a middle in an active sense. The NIV takes the second option (“Are we166 any better?”). This asks whether, in view of the dismal picture just painted, the Jew was in any way better off than the Gentile. The answer is, “Only in a limited sense.” However, if the verb is taken as a passive, then the sense would be, “Are we Jews at a disadvantage?” (Weymouth), and the answer would be, “Not at all!”167 The Jew was neither better off nor at a disadvantage since it has already been established that both Jew and Gentile are under the condemnation of sin (cf. 1 Kgs 8:46; Gal 3:22).168 This entire section reflects a courtroom scene (the accusation in v. 9, the evidence in vv. 10–17, the courtroom setting in v. 19, and the verdict in v. 20).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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