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My brothers,1 wshow no partiality as you hold the faith in our Lord Jesus Christ, xthe Lord of glory. For if a man wearing a gold ring and fine clothing comes into your assembly, and a poor man in shabby clothing also comes in, and if you pay attention to the one who wears the fine clothing and say, “You sit here in a good place,” ywhile you say to the poor man, “You stand over there,” or, “Sit down at my feet,” have you not then made distinctions among yourselves and become zjudges with evil thoughts? Listen, my beloved brothers, ahas not God chosen those who are poor in the world to be brich in faith and heirs of cthe kingdom, dwhich he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But you ehave dishonored the poor man. Are not the rich the ones who oppress you, and the ones who fdrag you ginto court? Are they not the ones who blaspheme the honorable hname by which you were called?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5, 14

w ver. 9; Lev. 19:15; Deut. 1:17; 16:19; Prov. 24:23; Rom. 2:11; Eph. 6:9

x 1 Cor. 2:8; [Acts 7:2]

y [Prov. 18:23]

z John 7:24

a 1 Cor. 1:27, 28; [Job 34:19]

b 2 Cor. 8:9; Rev. 2:9; See Luke 12:21

c Matt. 5:3; Luke 6:20; 12:32

d See ch. 1:12

e [1 Cor. 11:22]

f Acts 16:19

g Acts 8:3; 17:6; 18:12; [ch. 5:6]

h [Isa. 63:19; 65:1; Amos 9:12; Acts 15: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2:1–7.

 

야고보는 2:1-13절에서 차별을 금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가 이 주제에 대해 이처럼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이 일이 실제로 독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부자에게 당하고 있는 억압(6–7)의 결과가 일종의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반면, 보다 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모욕하고 경멸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이 들었던 왕의 법을 ‘행하지’ 못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0.

 

1절)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레 19:15, 골 3:11)

야고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함께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별이란 외모(얼굴)을 따라서 받아들이거나 판단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힘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차별, 배제, 혐오”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되는 태도임에도 도리어 기독교 신앙이 근본주의를 강조하면서 나와 다름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편을 갈라서 매도하고 싸우려는 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는 “용서, 화합,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  차별(partiality)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받아들이다’(receiving the face)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차별을 의미하는 구약 히브리어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된다. ‘얼굴을 받아들이다’라는 말은 신체적 외모나 사회적 지위 또는 인종 등과 같이 외적인 조건들을 토대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0–131.

 

2-4절) 본문의 내용은 교회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차별의 행위를 그리고 있다. 주일 예배에 온몸을 명품 옷과 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외제 차를 타고 온 사람과 더러운 옷을 입고 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때 명품 옷을 입은 자를 보고는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반대로 가난한 이를 향해서는 거기 서 있던지 저 구석에 가서 앉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서로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 최대한 그러한 판단을 자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최대한 모든 이에게 동일한 대우와 도움을 줄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들의 관심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벗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마 7:1-5, 롬 14:4, 고전 5:12)

본문에서 좋은 자리를 상석, 앞자리, 주인이 앉은 옆자리를 의미하고 발등상 아래는 노예들이 주인을 섬기기 위한 자리를 의미한다. 

Assembly probably refers to a Christian house church. Here two types of people arrive: one with a gold ring and fine clothing, and another with shabby clothing. The wealthy person is told to sit here in a good place, a place of honor, perhaps in the front, while the poor person is shown contempt and told either to stand (probably in the back) or sit down at my feet like a servant. Those who make such distinctions show themselves to be judges with evil thoughts. Christians are not to “judge” each other (Matt. 7:1–5; Rom. 14:4; 1 Cor. 5:12), and to do so can only mean one’s mind is consumed with evil “thoughts” (Gk. dialogismos, which can mean “opinions,” “reasoning,” or “conclus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2세기 초 금관을 한 젊은이의 초상화

 

5절) 이렇게 아무나 판단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특별한 은혜를 입는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기에 도리어 영원한 부요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 5:3, 개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God is especially concerned for the poor (Exod 23:11; 1 Sam 2:8; Ps 12:5; Luke 6:20; 1 Cor 1:26–28). inherit the kingdom. The kingdom of God was inaugurated when Jesus first came to earth (Matt 12:28), and believers, who enter it now by faith, anticipate being part of its final glorious manifestation (2 Pet 1:11).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28.

 

  • 예수도 야고보도 가난한 자가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약속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1:9–11의 본문 주석 부분과 본서 서론 부분의 야고보의 신학 단락 참조), ‘가난한 자’는 거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사람과 영적으로 경건한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그 자체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부자들을 모두 배제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가 제자도의 걸림돌로서 부를 경고한 것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막 10:23; 눅 12:34), 또한 그 분도 야고보도 부자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배제시킨 것은 아니다.

  • 야고보는 오직 가난한 사람만 선택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요지는 독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었고, 이 사실이 곧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차별 행위를 정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6–137.

 

6-7절)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도리어 가난한 나를 업신여기고 멸시했다. 그들이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부자를 선대한 이유는 부자는 우리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우리가 부르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비방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억압, 착취는 당시 1세기에 상인이나 지주들이 땅이나 소유물을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시대적인 상황, 극단적인 사회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것이었다.(5:1-6) 야고보는 이렇게 부자들이 구약(암 4:1, 합 1:4, 말 3:5)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들을 법정으로 끌고와 사법제도를 동원해서 그들의 것을 빼앗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을 왜 도리어 존대하는 지에 대해서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oppress you. This oppression, or exploitation, reflects a situation of radical social polarization in the first century, with merchants and landowners taking land and possessions from the poor (cf. 5:1–6). James challenges his Christian readers as to why they would honor the rich in the assembly when it is the rich unbelievers of the world who blaspheme the name of Christ. drag you into court. As frequently recorded in the OT (e.g., Amos 4:1; Hab. 1:4; Mal. 3:5), the wealthy often used the court system to steal from the poor. This situation was the primary reason for the revolts in Galilee that led to the war of a.d. 66–7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 ‘억압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뒤나스튜오(katadynasteuō)는 70인역에서 부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암 4:1 참조), 또는 고아와 과부(겔 22:7)의 착취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참된 경건’(약 1:26–27)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이 부자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고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7.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단지 1세기의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상황속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더 커지고 있고, 부의 불평등과 소득격차는 커진다. 실제 노동의 강도나 역할예 비례해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진 자들은 시스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서 부를 착취하고 불로소득을 가져간다. 약자의 소리는 법정에서 들리지 않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은 여전하다. 대기업의 자제들이나 정치권의 자제들은 마약을 투여하고 음주운전을 해도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한다.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서 하청업체의 젊은이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피와 눈물의 열매를 소수의 자본가들이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