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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선교 : 말씀, 행위, 새로운 존재


선교의 두가지 역할 : 선포(proclaiming)와 추진(propelling)

'개인'을 구원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의 문제들을 추정해 나가는 방식과 성경을 인간과 우주 역사의 유일한 해석이라고 보는 것을 시작점으로 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개인의 삼의 의미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방식이 있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가운데서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이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선교의 추진적 역할은, 사건들을 그것의 진정한 종말을 향하여 가도록 압박한다.

- 중국이나 인도의 청년들이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선 이유, 일잔 한번 과거의 존재론적 틀이 깨지고 나면 결코 다시 복구될수 없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가차없이 추진해 가고 있다. 


선교에서 행함과 복음선포의 연계성 문제

현재 복음전도, 곧 교회의 선언적 기능의 우위를 강조하는 사람들과 불의, 편견, 억압에 대항하는 행동, 곧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에 최우선을 두려는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싸움이 존재한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치유행위에 대한 설명을 통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단순 명료한 말씀으로 진술되어야 했다. 

치유만을 강조하고 복음전파가 없는 경우 vs 치유가 없는 복음전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가지는 선교적 의미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천국의 비밀을 실어 전하도록 선택된 공동체를 준비하셨는데 바로 이 공동체, 교회가 그분이 남긴 유산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곧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대변하도록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에수님과 함께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고, 자신의 삶 속에 대항에 대한 대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에수님의 오심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것은 첫째, 하나님 나라가 더이상 형식적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 새롭다는 것은 우리의 교회속에 있는 성령의 은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잘못된 이해

선교는 우리 자신이 하는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이다.


선교는 성령안에서 천국의 임재를 미리 맛보는 데서 시작한다. 

1. 말씀과 행위, 복음전파와 활동 이 두가지를 서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말씀이 행위를 설명하고, 행위는 말씀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복음전도의 주된 임무에서 이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분명히 간주되는 특정한 계획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할 수는 없다. 

4. 이런 근본적인 진리가 잘못 이해되어서 만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사는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삶 가운데서 책임감을 가지고 환여하는 것을 맏는다면 그것은 재난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5. 정의와 평화라는 거대한 문제와 연관된 교회의 주요 역할은 격식을 차린 선언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6. 교회 존재의 중심적인 실재, 즉 복음의 중심적인 진리들, 다시 말해서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고, 이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항상 있다. 


12장. 상황화 :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

복음 전달과 상황의 문제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예수님의 모습


타문화 선교와 상황화(contextualization) 논쟁

기독교의 메시지를 기독교의 영향권 밖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로 옮기려 할 때, 바로 상황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식민주의 시대가 남긴 감정상의 앙금


복음은 문화라는 옷을 입고 전해진다. 

장소와 문화에 상관없이 기독교적인 복종이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

선교사의 역할(앨렌) : 거기에는 반드시 성경과 성례전 그리고 사도적 사명이 구비된 회중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선교사는 자신의 일을 다 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새로 생긴 교회는 성장해 나가면서 복음을 자신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배워 나가야 한다."


복음은 공동체 가운데서 올바른 상황화의 길을 간다. 

말씀을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세례와 성례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억압받는 상황과 여러 가지 상황 신학

-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인도 댈리트 신학 : 이들은 성경을 탄합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핵심은 투쟁이 된다. 


올바른 상황화는 먼저 하나님을 주목한다.

올바른 상황화는, 복음이 정당한 우월성을 가지며 모든 문화에 침투할 수 있고 각각의 문화 안에서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복음은 진정으로 지역적인 동시에 에큐메니컬해야 한다. 


인간을 상황의 중심에 두는 접근법의 문제점

첫째, 나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복음은 자체가 독립적인 힘을 지니며, 복음 전도자의 손에 놀아나는 도구는 결코 아니다. 

둘째, 어떤 시대 상황에 대답을 주는것만이 목적이라면 복음은 어떤 프로그램의 들러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이 진정으로 실감나게 살아 역사할 때 이런 일을 목격하는 당사자는 일을 성취하는 주권이 이제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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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의 실마리이신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히브리인의 역사이해의 독특한 점은 역사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헬라인의 사고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왼전성의 핵심은 불변성이고 완전성은 인간 역사의 변화들로부터는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5)에서 '가까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보다는 공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 곧 그분의 왕권이 인간 예수 안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눅 17:21, 마 12:28)

2) 그러나 이런 임재는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다. 

3) 이런 결과로 감추어진 임재는 위기와 투쟁을 유발시킨다. 

4)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의 열쇠는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분명히 드러난 것의 차이이다. 

5)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밖으로 분명 드러나는 영광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사이의 간격의 의미는 모든 나라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선한 파수꾼으로서의 경계와 준비태세를 요구하는 긴박감과 아버지 외에는 예수님조차도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리워진 것이 곧 벗겨질 것이라는 말씀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놓치는 것이다. 

7) 초대교회, 이 시기의 특징은 그분의 고난과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처형이었다. 부활도 십자가 사건만큼이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으므로 천국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8) 이렇게 천국이 감추어진 것은 열방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9) 교회는 임박한 역사의 종말을 추구하려는 유혹과 심판을 부정하고 편안히 머무르려는 게으음의 유혹이다. 그리기에 우리에게는 인내와 희망이 동시에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의미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등성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산과 계곡, 호수와 숲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본 주님의 날은 단 하루처럼 보였지만 그날은 새로운 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천국의 권세와 구시대의 권세가 나란히 역사하는 때이다. 이것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신앙을 갖도록 초청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1) 그리스도는 단 한번에 모든 정사와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2)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이제는 그의 모든 대적이 순복할 때까지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하신다. 

3) 그리스도는 재림할 것이고 그의 통치와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현대의 여러가지 역사 이해

18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사회는 진보가 역사의 의미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진보의 신념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부유한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후에 받을 영혼의 개인적 축복만을 바라보는 사유화된 종말론(privatized eschatology)으로 빠져 들었고 이는 공적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감소시켰다. 

죽음은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 각 사람을 역사로부터 떼내어 버린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사상 의미있는 행동이란 오직 어떤 미래의 목표점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계획도 인간의 삶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적일 수 있다. 동시에 죽음의 이면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을 꿈꾸지 않으면서 지금 가능한 상대적인 선을 결연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공적인 삶 가운데서의 우리의 행위들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면 천국을 위한 행동화된 기도들(acted prayers for the kingdom)이다. 

역사의 목표점으로 약속 받은 것, 역사 속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만들어 내는 사적인 세계과 공적인 세계의 이분법을 치유하는 것이다. 


10. 선교의 논리

선교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다. 


선교는 기쁨의 폭발이다.


복음 선포는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성육신 하신 주님도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역사를 오만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어떠한 주장도 단념해야 한다. 주님이 가신 길, 곧 고난받는 증인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교회는 오만하게 역사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 계속되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궁극적 목표점을 대면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말해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교회는 역사의 여정을 통해 배워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적인 모델에 의해서 이해해야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의 대행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명의 장소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야기 곧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비어 예수님의 사역과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되풀이하고 재현함으로써 가시적으로 모습을 명확히 나타낸다. 


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점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 성장, 선교의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숫자와 어떤 목표의 달성(??)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제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롬 15:23)라고 말했다. 이는 이 지방의 모든 사람을 개종시킨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복음을 전파했고 후에 복음을 믿으면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남겼다. 그들의 중요성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그분의 선교 사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교회와 선교의 일

예수님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위기를 촉발했던 것 같이, 교회의 도래가 세상에 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열방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이 완전히 끝날때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수 없다. 


선교 논리의 중심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 즉 개개의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 해석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측량 못할 지혜와 은총의 깊이가 계시될 종말론적 사건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지평선은 우리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있지 않고 그분이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사건 속에 있는 것이다. 


선교의 일은 신앙의 시험대이다.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선교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하게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리고 선교의 중심부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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