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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목사의 역할
1) 목사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2) 평신도들을 구비시킴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 목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연스런 삶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역이다. 
3) 평신도들의 사역의 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1장. 평신도가 되기로 결심한 어느 목사 이야기
- 엡 4:12
- 새언약은 가장 약하고 가장 부적합한 사람들을 봉사의 일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후 3:4-6)
“리더십과 관련된 신약의 용어들은 피라밋 형태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다…. 안수 제도는 오히려 이 수평적인 관계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장벽이 없는 곳에 장벽을 세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제도는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벽을 세우며 서로서로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한다.”(24)
- 어려운 것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만족하는 것이다. 
- 두가지 종류의 평신도 사역 : 흩어져 있는 교회(디아스포라-기능, 경력, 전문직업, 가사)와 모여있는 교회(에클레시아-일반 교회안에 있는 사역)
- 평신도들은 엄청난 시간을 집 안팎에서 일을 하는데 소모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삶의 전부를 바치도록 평신도를 구비시키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단순히 껍데기만 남은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위해 망치질하는 것이며 정확히 톱질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영적 안목을 갖는 비결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어두움 가운데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눅 11:33-35)
- 구비시킴(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은 엡 4:12에만 사용되는 단어로 몸의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게 건강하도록 뼈나 마디 마디마다 또 부분 부분마다 잘 맞추는 것을 뜻하며, 탈구한 수족을 교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2장. 평신도층을 폐지하자
- “교회 전체, 즉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성직자이다.”
- 성도들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다양함 때문에 이상적인 일치가 교회에 존재한다.
첫째 교회지도자들은 우선적으로 성도를 구비시키는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부르심은  설교나 상담의 사역에 비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목사의 존재이유이다. 
둘째,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부족한 일들을 위해서 또는 교회의 부서의 일에 평신도들을 종사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목사의 일을 분담시키는 것도 아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고유한 사역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구비되어야 한다. 

제2부.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구조
-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에서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 즉 사역의 일을 위한 구조

3장. 가장 훌륭한 신학교-지역교회
-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시키려는 세력들 : 세속주의(Secularism), 사제 제도주의(Sacerdotalism), 성례주의(Sacramentalism),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
- 신약에 나타난 모델 : 이동성 신학교(walking seminary), 세상속의 개방학교(open school in the marketplace), 전진-후퇴 모형(advance-retreat pattern)

4장. 구비사역에 합당한 교회 구조
“가죽부대는 포도주와 세상이 만나는 접촉부분이다. 또 포도주의 품질과 세상에서부터 오는 압력에 맞추어 가죽부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인간 문화에 접할 때 가죽부대가 생긴다.”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간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들을 모아 놓은 집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우에 그러한 교제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 성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구조(80)
유기체적인 교회 조직의 성격
1) 적당한 규모
2) 단순성
3) 주인의식
4) 융통성
5) 개기인의 차이점
6) 성령의 인도하심에 항상 열려있는 융통성

* 구조적 변화를 촉진하라
1) 기도하라
2) 가르치라
3) 선포하라
4) 찾으라
5) 초대하라
6) 시범을 보이라
7) 허용하라
8) 기도하라

제3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신학
- 교회의 디아스포라의 역할, 즉 일의 사역을 위해 교회를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면

5장. 일이 먼저인가, 사역이 먼저인가?
- 일과 사역의 관계에 대한 세가지 분류
1) 전문 직업적인 그리스도인(Professional Christian) : 풀타임 사역자, 
2)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문인(Christian professional) : 요셉
3) 자비량 사역자(tentmaker) : 바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우리는 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쉽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구러나 우리는 신자들이 일 가운데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을 구비시켜야 한다. 

-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서 안식을 추구할때 경험하는 불안
1) 우리 자신의 성취감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는 유혹
2) 안전을 위해 의를 타협하려는 유혹
3) 정체성을 일에 연관시키려는 유혹
“의심할 것 없이 주일에 우리가 교회에서 입으로 고백하는 신학과 세상에서 우리가 주중에 행하는 행동신학간의 제일 큰 격차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용납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든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우리의 정체와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얼마나 잘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믿는 신앙이 행동을 통해 무심코 드러나게 된다.”
“석공 세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분필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쪼아가던 삶은 “나는 이 돌을 자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사람은 “나는 돈을 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세번째 석공은 “나는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6장.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선교의 목적은 우리를 종교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있다. 선교명령을 주신 이유는 창조명령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 교회 선교의 다양성은 교회의 모이고 흩어지는 리듬에서 뿐 아니라 다양한 영적 은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비 콕스는 “세속 도시”에서 사회를 겨냥한 교회의 선교를 디아코니아(섬김), 고이노니아(교제), 케리그마(선포 혹은 구두로 하는 의사소통)으로 나누었다. 
- 소금은 두가지 치명적인 독약, 나트륨과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제4부 평신도를 구비시키기 위한 전략
7장. 독불장군식의 사역을 피하기 위한 여섯가지 방법
* 구비사역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1) 아르티오스 : 온전함, 건전함(딤후 3:17)
2) 카타르티스모스 : 준비(엡 4:12), 섬기는 일이나 행동을 위해 준비시키거나 유능하게 함
3) 카타르디시스 : 온전케 되어짐(고후 13:9)
4) 카타르티조 : 질서를 잡다, 회복하다, 준비하다.

* 구비자로서의 목사에 대한 여섯가지 이미지
1) 의사이다(목회사역) : 헬라의 의사들을 탈골한 뼈를 제자리에 다시 맞추어 넣어 몸의 다른 부분과 바른 관계를 회복시킴으로써 몸을 구비시켰고, 금이 간 곳이나 빠진 부분을 교정함으로써 환자를 구비시켰다. 
2) 그물을 고치는 어부이다.(개인 사역) : 카타르티조는 첫번째 방금전에 하던 일로 인해 생긴 해로운 것과 손상된 것을 없애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3) 석공이다.(구조적인 사역) :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를 카타르티조로 번역했다.(스 4:12),
4) 토기장이이다.(지도하는 사역) : 창조하다. 형성하다.(롬 9:22, 히 10:5, 벧전 5:10, 히13:21)
5) 부모이다.(모범을 보여주는 사역) : 모방하게 하는 과정이다. 
6) 설계자이다.(방향 있는 사역) :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은 성장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후 13:9, 11)

* 다섯가지 불변하는 진리
1) 성령님을 사역을 위한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이 분배하신다. 
2)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들은 창조때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교회는 이 차이점을 존중해야 한다.
3) 교회의 질서에 관해서 서신서들과 관계된 구절들을 읽은 결과 결혼 생활과 회당안에서 남자가 머리 역할 하는 구약의 모형은 교회가 어느 정도는 계승해야 한다. 
4) 교회 지도자들은 부부관계에서 교회에서 모본을 보여야 한다. 
5) 무조건 교회 전통에 따르거나 내용이 텅 빈 상징을 유지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와 관심사들이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 고전 11:10의 권위 (144) 

8장. 자비량 목회 사역을 하라 - 롤랜드 알렌 목사와의 인터뷰

9장. 자비량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영성
* 자비량 사역자의 훈련과정
1) 천천히, 지속적으로, 2) 사회적으로, 3) 모험을 하면서 훈련받았다. 

제5부. 구비자를 구비시키려면
10장. 구비자의 영적 준비
* 영적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세가지 : 깊이(Depth), 분별력(Discernment), 연단(discipline)
- 필요는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경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바쁜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필요때문에 바쁜것은 특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는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 참된 영성을 위한 훈련 : 위를 향한 여행, 안으로 향한 여행, 밖으로 향한 여행

11장.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무엇이 사역자를 만드는가?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그들을 만드신다…. 주님은 금간 곳을 고치시는 의사시요, 그물을 고치시는 어부시요, 벽을 재건하는 석공이시요, 진흙을 빗으시는 토기장이시요, 모범적인 부모요, 강요함이 없이 모든 부서진 조각들을 적절하게 다시 붙이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얼어붙은 자원을 녹이는 일, 즉 그의 백성, 그의 평신도를 해방시키는 것에 우리보다 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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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선지자, 제사장, 왕


교회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삼중직

선지자 :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제사장 : 하나님의 임재를 중개

왕 :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역에 확장


1. 세가지 리더십 역할

모세, 사무엘은 삼중직을 모두 결합한 인물이다. 

이 세직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백성 전체를 대표하고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개자요 중매자인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중개하는 연계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은 성소와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일, 토라를 지키고 가르치는 일, 특히 의식상의 불결함과 관련된 문제를 재판하는 일, 끝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맡았다.(개인적, 영적 필요) 

선지자는 장래를 예언하는 말을 했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었다. (공적, 사회적 필요)

왕은 나라의 질서와 정의와 평화를 도모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자였다. (조직적, 정치적 필요)


그리스도안에서


성직자 안에서

지식은 선지자적 직분으로부터, 양심을 다스리는 통치력은 왕의 직분으로부터, 인내는 희생적인 제사장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온 백성 안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모두 그분에 의해 보냄받은 자들 안에서 이차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2. 선지자적 백성

종말론의 영

요엘, 베드로의 설교


만인 선지자직

첫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고 있으므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다. 

둘째, 모든 사람이 계시를 깨닫는데 필요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있는 선생이 필요없다. 

셋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 

넷째, 성령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써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다. 


보편적인 말씀 사역

교회는 역사상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전파자이다. 

첫째 각각의 신자는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고 나가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에 의해 구비된다. 

둘째, 만인 선지자직의 의미는 각 그리스도인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신자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일차적인 구비요건은 지속적인 성령 충만이다. 


선지자적 교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저 사회의 앰뷸런스가 되어 부상자들을 실어 나를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봉사하도록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제사장적 백성

제사장적 공동체

어거스틴은 낮은 수준의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과 성직자의 제사장직을 구별하였다. 

루터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

첫째,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은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서 유래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제사장 사역에 참여하는데, 이것은 선택된 소수에 의해 대표적으로 혹은 대신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신자의 제사장직은 에클레시아적인 성격과 디아스포라적인 성격을 둘다 갖고 있다. 

"우리가 성소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세상 속으로 더 깊이 침투하게 될것이다."


제사장직에 대한 오해


루터와 신자의 제사장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똑같이 제사장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됨으로써 그 제사장직을 공유한다."


루터 이후

볼프강 쇼펠레는 재침례파가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목사 계급과 평신도 간의 차별을 없애게 했고, 각각의 지체가 잠재적인 전파자요 선교사임을 확신하게 했다."

만인 제사장직이 칼빈의 사상에서 혹은 회중의 삶 가운데서 행한 그의 의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침례교도들은 보통 만인 제사장직을 다음과 같은 관행으로 환원시켰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 침례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투표권이 있다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자기 나름의 종교적 신념을 개발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제사장직을 경험하는 것

첫째, 예배와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사역

둘째, 세상에서의 섬김을 통한 제사장 사역

셋째, 일상 생활에서 하는 제사장 사역


4. 왕 같은 백성

이 문구는 첫째, 출 19:6절에서 따온 것인데 제사장직 뿐 아니라 나라(kingdom)의 개념을 전달한다. 둘째, 바실레이온(왕의/왕)은 단순히 '히에라테우마'(제사장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다. 셋째, 신약성경의 좀더 큰 맥락에 의거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서 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하나님 나라는 영역이나 영토가 아니라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오토바실레이아', 곧 그분 속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기꺼이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지금 존재하지만 우리가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는 면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고 대표하고 섬기는 기관이다.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

섭정자란 군주의 대리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스로를 지배하는 왕적인 통치자들인 셈이다.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왕적인 통치자들로 머리되고 왕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동참한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통치에 동참한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소금, 빛, 정탐군의 은유

"그는 또한 정탐군으로 파견될 수도 있다. 사실상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이다. 이 세상의 핵심부에서 몰래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내부로부터 주님의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것, 이 세상에서 하나의 핵심 그룹을 만드는 것, 그 비밀을 발견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화려하게 침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자크 엘룰


왕같은 제사장과 제사장 같은 왕

왕권이 없는 제사장직은 쉽게 새로운 형태의 성직주의, 그저 순전한 종교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사장직이 없는 왕권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선행주의, 영적인 변화가 없는 세계 변혁으로 쉽게 전락한다. 이 둘이 함께 묶일때, 즉 왕같은 제사장만이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언질을 통하여, 그리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을 향해 성육신적 선교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루터는 왕같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호소하며 이렇게 탄원한다. 

첫째, 왕권과 관련해서 각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의해 만물보다 높이 들리워졌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으로 인해 예외 없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아무것도 그를 해롭게 할 수 없다. .....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왕일 뿐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들인데, 이는 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그 이유는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할 목적으로 그리고 서로 신령한 것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큼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세상속의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가지 직분은 리더십 차원에서 교회를 섬기는데 모두 필요하다. 제사장들은 돌보고, 선지자들은 선포하며, 왕들은 지도한다. 



제8장 선교 :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백성

금세기들어 서구는 과거의 선교분야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상실했다. 

선교와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 : 기독교 신앙은 유일한 것인가? 다원주의적인 지구촌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복음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인 껍데기를 수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1. 보내시는 하나님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선교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이해하는 방식, 즉 인간적인 전파 행위로서의 선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선교는 성부가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시는 것으로서 명백히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견지되었다. 

그 후 적어도 1950년까지는 선교가 믿음을 전파하고 이방인을 개종시키며 교회를 개척하고 사회적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보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에 의해 보냄받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선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감소시키는 비극을 초래했다. 

데이비드 보쉬 : 선교는 교회의 삶에서 이 세상적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인데, 그 목적은 자기 피조물을 최종적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통일성과 충만함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

칼 바르트 :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 운동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자체에 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선교

게오르그 비체돔 : 하나님의 선교는 한정적인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인 동시에 보냄받는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냄받은 분일 뿐 아니라 보내는 내용이기도 한데, 이는 신성의 각 위격 안에서 하나님은 전 존재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워드 스나이도 : 선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새롭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흐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공유되던 상호간의 사랑의 힘이 예수님의 선교의 근원이다. 


성육신 : 성부에 의해 보냄받음, 성부를 보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보내는 분인 동시에 보냄 받은 분이고, 계시하는 분인 동시에 계시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몸소 구현하신다. 


마지막 날들 : 성령에 의해 보냄받음, 성령을 보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보냄받은 분이시며, 성령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종말론의 영의 시대인 오늘날, 성령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추진력이다. 


사도들 : 성자에 의해 보냄받음, 성자를 보냄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이 최종적으로 사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독특하게 임명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받아 권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도가 된것이다. 


계속되는 사도직 : 삼위 하나님이 교회를 보내심

교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도적이다. 첫째, 교회는 이제 성경에 담긴 사도들의 증거와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혹으로 계속 보내시는 도구이자 결과물이다. 

교회는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보냄받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곧 사랑을 보내는 원천이시기 때문에,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로 인해 교회가 태어난 것이지 교회 때문에 선교가 생긴것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선교는 대위임령에 대한 의무감이나 단순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교로서 우리가 그 안에 편입된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열방을 복 주시려고 하시는 일이다. 선교 사역 자체는 세상의 필요에 의해 촉발돤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는 보내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3. 선교의 내용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사람들은 흩어져서 땅의 풍부한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와 반대로 동질 사회로 이루어진 단일한 도시를 세웠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족장들은 하나님과의 교통가운데 그분에게 속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공동체를 건설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아울러 그들은 땅에서의 공동창조성과 청지기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적 소명을 성취하는 것

인간적 소명 

약속 

기독교적 소명 

상호 교통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 속함 

공동체 건설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공동 창조성 

땅 

하나님의 일을 함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새언약하에서 예수님은 선교사로 오시는데,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또 한 분의 하나님으로 오신다. 

바울의 선교적 비전은 교회를 성령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었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국경을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함께 하나님의 새 사람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신약 성경의 최종적인 비전은 창세기의 첫 두장에 나오는 선교사명,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선교적 약속, 에스겔 40-48장의 선지자적 비전등이 결국 성취되는 장면이다. 

선교는 이중적인 초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미시적으로는 이생과 이 세계에 오는 실질적인 구원을 주시하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천국가는 것 이상의 것)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포괄성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구현된 복된 소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에게 회심을 종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 전체와 삶의 구조를 대상으로 의와 정의를 이룩하며, 가난한 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억압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사람들의 사고 및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한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 세계 전체, 자원 보존, 환경 친화적인 개발, 지구의 회복등과 관련된다. 

끝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권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구조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이 포함된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인간 및 창조 세계와 관련되며, 현세적이면서도 영원한 성격을 갖고 있다. 선교는 재활과 예방의 특징을 둘다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나라의 대변자(선지자들)요, 그나라의 종(왕들)이며, 공동체적으로 그 나라의 현존을 구현하는 실체(제사장들)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안에서 하는 사역은 선포(케리그마)와 봉사(디아코니아)와 교제(코이노니아)를 포함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안식적 '살롬'이다. 이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와 인류사이의 삼중적인 조화로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 보냄받은 백성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

전통적인 그림 : 하나님 -> 교회 -> 세상

호켄다이크 : 하나님 -> 세상 -> 교회

보쉬 : 하나님, 교회, 세상을 삼각 구도로 보았다. 

크리스 라이트 : 하나님, 백성, 땅의 삼각 구도


보냄받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선교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파악

교회의 선교는 교회를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를 확장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창조, 구원, 성화, 완성 등에 의해 이루고 계시는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구현하며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성취하는 일차적인 기관이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처에 침임하는 것을 인식하고 환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등대요 하나님 나라의 출현으로서 또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현시로서 섬기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선교

교단 공동체와 교회 병행단체라는 선교기관은 설교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접근이 아니다. 그것들을 교회의 삼위일체적 표출 중 어느 한 형태를 띤 교회다. 삼위일체적 통일성은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도직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언약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선교사인 것이다. 


5. 선교를 위해 구비시킴

선교와 관련하여 교회를 구비시키는 출발점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구비자라는 진리다. 그분이야말로 비전과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며, 동기를 유발시키고 앞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선교의 동기

카아퍼는 모든 선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선교사역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함께 세상속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때때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와 비슷한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흔히들 선교는 예배라고 말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영광이 선교의 최우선 동기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예배행위,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교가 예배인 까닭은 정확히 말해서 선교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서 하는 일이요 삶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예배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을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자기의 수고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선교 구비자는 하나님이시다. 


구비의 원리들

첫째, 주권적인 하나님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특정한 일터와 동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각각 위치시킨다는 점을 교회내에서 인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모여 있을때는 피가 정화되고 산소를 공급받는다.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질병과 싸우고 에너지를 공급한다. 

둘째, 가라의 구조를 오라의 구조와 병행해서 잘 개발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목회 사역을 할 사람들에게 안수를 줄 때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사회내의 선교를 담당할 사람들을 안수하고 파송해야 한다. 

넷째, 고든 프리스는 교회가 일터에서의 선교를 위해 교인을 구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하는데, 즉 교인들로 하여금 일터야말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차적인 장소요 따라서 자연스런 전도 장소로 보게하는 것이다. 



제9장 저항 : 권세를 상대로 한 씨름

이처럼 복잡다단한 사항은 그저 인간 개인의 부정과 죄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광범위한 어떤 것으로 말미암는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삶의 보이는 전면에는 그 각각에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후면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 권세에 대한 묘사 : 현대의 혼동

이중적인 언급

바울이 롬 13:1에서 권세들을 언급할 때 정치 지도자들과 영적인 존재들 둘다를 지칭했다. 

그런데 권세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인간 외적 언급을 배척하는 입장이 주로 서구 신학자들에게서 나왔는데 이들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우리가 마귀를 잃고 구조들을 얻는 것은 정사와 권세가 위장된 구조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무척 복잡다단함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두면서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침노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권세 위에 군림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우월성에 집중한다. 


성경의 용어들

성경에서 정사, 권세, 덕, 권능, 보좌,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구조를 갖춘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이세상에서 삶에 영향을 주는 가시적, 비가시적 실재의 차원인 권세들을 묘사하는 성경의 용어

- 하나님의 회, 천사들, 마귀/사단, 귀신들, 세상, 정사와 권세, 맘몬, 육신, 율법, 죽음


2. 권세에 대한 경험 : 다차원적 저항

타락한 사회 구조들

종교와 삶, 성적 이미지, 거대 기업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맘몬, 사회내 모든 권력의 외적 표출의 내적 측면

오브라이언 : 새로운 이론의 옹호자들은 구조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구조 자체를 마귀화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두가지 극단을 모두 피해야 한다. 


인격적인 영적 존재들

그들은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고 목적 지향적인 활동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기로 작정한 존재들이다. 

서구 사회는 대개 삶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배척해 버렸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사회적 분석에 의존하여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지적 : 뉴턴의 작업은 자연가운데 비합리적인 원칙이 존재할 여지가 없게 만들었고, 다윈의 그림은 마귀와 주님의 나라간의 우주적 전쟁을 묘사하는 성경의 그림을 완전히 능가하는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경쟁을 묘사했으며, 프로이트는 흑암의 권세들을 그들 최후의 보루인 영혼으로부터 쫓아냈는데 그들을 결국 심리적인 콤플렉스와 신경증 그리고 그와 비슷한 유의 질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발터 윙크 : 우리 현대인은 아무리 의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해도 전통적으로 정사와 권세라는 범주 아래 집어넣었던 이 같은 신화적인 실체가 진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성경은 복잡다단한 조직 계통적인 악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조직 계통적인 악

붉은 용-두마리 짐승-음녀-바벨론

초자연적이고 인간 외적인 세력과 인격적인 존재가 인간의 제도와 구조, 문화적 및 사회적 삶의 패턴에 영향을 주고 그것들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악마적인 것과 사회 구조를 쓸모없는 것인양 내다 버려서는 안되고 그것들의 변혁에 참여할 필요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3. 권세에 대한 이해 : 성경신학

선한 권세들

이 권세들은 타락의 결과도 아니고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간의 육신성을 억제하려는 필수 불가결한 조치도 아니며, 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일부다.

일상적인 네가지 틀 : 결혼, 가족, 나라, 법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권세들 - 인간적 차원과 인간 외적 차원


권세에 압도된 권세

예수님은 그들을 멸하시고, 벗기시고, 개선 행진을 뒤따르게 하거나 포로로 삼으셨으며, 무릎 꿇게 하시고, 그들을 평정하고 화목케 하셨다. 

오스카 쿨만은 권세들을 죽기전에 발버둥치는 쇠사슬에 묶인 짐승에 비유했다. 


4. 권세와의 싸움 : 선교와 사역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순응적인 자세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육신에 대해서는 금욕함으로써 그리고 열망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마귀에 대해서는 대척하고 피함으로써 대처해야 한다. 


복음 전파

권세들의 거짓 주장을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로 무장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공적인 제자도

권세에 대처하는 여러가지 방법


 

축사, 중보 

무력함으로 감수 

창조적 참여 

정당한 혁명 

소명 

영적 해방 

타락된 상태임을 증거 

섭정 

사회적 변동 

수단 

기도 

무력함 

일/정치 

시민 불복종 

형이상학 

악마적 

식민지화된 구조 

타락하고 식민지화된 구조 

없음 

교단 

은사주의

재침례파 

주류파 

해방 신학 

주요 저자 

왓슨, 윔버, 슬리에르 

요더 

마우, 베르코프, 엘룰 

보니노, 구티에레즈 

사회 정의와 공적인 제자도는 선행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포사이드가 말했듯이,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복음은 "영원 및 그 사회적 책임에 준거점을 두고 있다." 다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 준거점을 견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때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분들고 있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심정을 품게 된다. 

둘째, 우리의 기도는 제아무리 청산유수와 같다하더라도 성령의 간구에 비하면 한갓 신음소리와 우물거림에 불과하므로 성령의 중보에 의존하게 된다. 

셋째, 일종의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넷째,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된다. 


순교


5. 권세에 대한 최종적 평정 : 종말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때 권세들을 최종적으로 화평케 하실 것을 비전으로 바라보지 않고는, 현재에 권세들과 신실하게 씨름할 수 없다. 위르겐 몰트만은 종말론이야말로 신학 분야 가운데 가장 목회적인 영역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삶의 정오에 사는 것도 아니고 황혼녘에 사는 것도 아니며, "새 날이 동터오는 지점, 곧 밤과 낮, 지나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이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살고 있음을 종말론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성을 공유하는 인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세속적인 일에 거리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저 도시의 빌딩의 일부를 구성할 만큼 훌륭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내밀한 기도로부터 가장 공적인 정치 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죄로 얼룩진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죽음과심판의 골짜기로 내려가야 마땅함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아버지께 바칠 때 그것이 그분과 함께 보존되어 그리고 불로 깨끗하게 되어 결국에는 거룩한 도시(성)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기. 신학적으로 사는 인생

이 책에서 우리는 교회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이라는 것과 어떻게 교회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소환을 받아 구비되는지 살펴 보았다.(목사의 이력서는 보통 그 아내의 얼굴에 쓰여 있다)


1. 정통 교리(Orthodoxy)

일상적인 삶의 구속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 하여금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으며, 따라서 그들도 사랑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돌보아야 할 청지기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교리를 사물에 대한 태도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급진적인 기독교적 물질관을 정립하게 한다. 속죄의 교리는 자비를 베풀며 살도록 우리를 구비시킨다. 교회론은 모래알과 같은 신자 개개인이 그저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경험을 하면서 살도록 촉구한다. 종말론은 시간이 관리할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비실천 신학의 위험

정통교리는 단지 하나님에 관해 옳게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해 말한 반면 욥은 하나님께 말했다. 단지 지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정통 교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리 충만한 삶

정통 교리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학과 일상 생활의 연계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교리들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교리들은 일상의 삶을 축복한다. 


2. 정통 행위(Orthopraxy)

온전한 의미의 신학적 삶

정통 행위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조화를 이루는 행습, 즉 세상에 가치와 선을 가져다 주는 실천이다. 

모든 이론에는 암시적으로 행동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행동도 암시적으로 이론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적 행습의 핵심

남편이 아내가 자기를 잘 받아주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아내의 마음을 사기 위해 굳이 거창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의거해서 사는 사람은 "상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했거나 의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자 여러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기독교적 행동(정통 행위)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던 계략이나 계산된 생각 혹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것을 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 저것을 해주신다는 식의 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정통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삶은 본질상 자발적인 것이다. 


3. 정통 심성(Orthopathy)

선지자는 하나님의 파토스, 즉 하나님이 마음에 품고 계신 것을 체현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마음의 수양이야말로 포스트모던 문화가 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한 성경적 반응은 이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까지 미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학은 머리와 가슴을 하나로 묶는 바 하나님을 아는 실천적 지식이므로 지혜의 특성을 갖고 있다. 


마음을 교육하라

첫번째 학교는 물론 가정이다. 

크리소스톰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 부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동시에 에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이웃


하나님을 향한 열정

사실 욥은 치유를 간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바랬던 것은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그래서 욥의 발언은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서, 거룩한 인내심을 품고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탐구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정통 교리를 믿고 정통 행위를 하는 신학자들)는 과격하고 열정적인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는 것,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정통 심성이다. 

정통 교리, 정통 행위, 정통 심성. 이 셋은 모두 신학과 일상 생활의 결혼, 즉 찬미(정통 교리)와 행습(정통 행위)과 열정(정통 심성) 가운데 신학과 삶이 연계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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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소명 이후 시대에서의 소명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에 그토록 중심적인, 기독교의 소명교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누군가에게 부름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 개인적 소명

고전 7:17절에 대한 이해 - 루터는 클레시스를 정박지라고 번역하고, 칼빈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세상적인 소명이란 개념을 발전시켰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의 정황을 떠나고 있었으며, 마치 그런 변화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대해 바울의 논점은, 비록 그러한 삶의 정황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채택되고 그 부르심에 의해 변화되긴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오고 그 부르심은 직업, 결혼 여부, 사회적 지위 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행히 종교개혁가들은 부르심을 삶의 위치로 축소시킨 나머지, 영적인 이동성을 억제하고 사람들을 타문화권 선교 사역으로 보내는 것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황이 부르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부르심에 의해 신성해지긴 하지만, 부르심은 우리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이다. 


고압적인 종교개혁가들

종교개혁가들이 소명의 신학을 발전시킨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두번째는 재침례파를 대항해 싸웠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평범한 일상사에서 찾아야 한다. 


특별 소명의 세속화

청교도들은 일반소명(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효력을 발휘한 소명)과 특별 소명(우리가 하나님의 소환에 직접 응답하여 섬김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는 소명)을 구분했다. 

루터는 고전 7:17절의 해석을 통해 소명을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확장시켰으며 특히 삶의 정황의 견지에서 소명을 부각시켜 신분과 직분과 책무를 융합시켰다. 


각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유효 소명이 있다.

둘째, 섭리적인 소명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이 초자연 적인 부르심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특정한 일에 종사하게 되는 모습이 나온다. 

셋째, 은사적 소명이 있다. 성부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개발하라는 문화 명령을 주신다. 성자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며 대위임령으로 소환하신다. 성령을 어떤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키신다.(클라우스 보크무엘)

넷째, 마음속의 소명이 있다. 

그레그 옥덴 소명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차원 1) 우리는 내적으로 어떤 당위성을 경험한다. 2)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이다. 3) 그것은 굉장한 만족과 기쁨을 선사한다. 


2. 기독교적 소명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 유효 소명.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카라는 불러낸다라는 의미라 어떤 주권적인 존재가 이름을 불러 소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약 성경에서 부르심의 언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도록 소환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사용된다. 그것을 구원으로의 부르심,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섬김으로의 부르심등이다. 부르심의 언어가 개개인에게 사용될 때에는 그 구원 목적과 연관되지 지도자의 자격을 확인하고 신임장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르심

칼레오(부르다, 앞으로 소환하다)와 클레시스(부르심, 소명)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가리킬 때, 즉 회개하도록, 예수님을 향해 방향을 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초청하시는 것을 말할때 부르심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자시요, 그리스도인은 부름받은 자들이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부르심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2)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사는 것-거룩한 공동체적 삶, 3)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와 우리 삶의 정황의 중개, 4)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체험


소속, 존재, 행위

삼중적 부르심. 

첫째 하나님께 속하라(소속)

둘째,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존재)

셋째, 하나님의 일을 하라(행위)


기독교적 소명과 인간적 소명


3. 인간적 소명

두개의 명령인가, 하나의 명령인가?

창조명령(창조세계)과 대위임령(구원)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인데, 그러한 분리로 인해 삶이 균형을 읽고 파편화되어 버린다. 이보다 더 나은 길은 창조, 구속, 최종적인 완성을 모두 포괄하는 언약의 견지에서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약명령

언약 아래 산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를 창조 명령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언약이다. 인간적 소명은 페리코레시스적인 것,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와 교통하기를 원하시고, 그 교통으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신다. 


공동체 건설

사회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부적으로 사회적이며 성적인 존재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이며 생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의무와 운명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웃됨을 표현하는 것, 공동 인간성을 경축하는 것인 바,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언약의 사회적 측면을 깨뜨려 버렸다. 


공동창조성

창조 명령이라 불린다. 우리가 창조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묘사하는 또 다른 용어는 섭정자(regents)인데 이는 천상의 왕을 대표하는 지상의 지배자란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차갑고 소원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계에 관여하는 관계 중심적인 청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상호 교통이요 공동체이자 공동 창조성, 즉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적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땅을 인간답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라는 부르심은 상호 교통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은 공동체 건설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부르심은 공동 창조성을 회복시킨다.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의 소명의식은 어떤 면에서 풍성해지는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상호 교통을 경험한다. 

둘째 공동체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된다. 

셋째, 공동 창조성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끈다. 



제5장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존 스토트는 일이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에너지(신체적, 정신적 혹은 둘 다)를 소모하는 행위로서 일꾼에게는 성취감을,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일은 금전적 보상이 있든 없든, 정신적, 정서적 혹은 신체적 에너지, 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소요되는 목적 지향적 활동


1. 일에서의 변화

일의 성격의 변화 : 제품 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일반직에서 전문직으로, 반복적인 일에서 중재적인 일로, 종신직에서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일로

생존 문화에서 정체성 문화로


일터에서의 변화

일터는 세계화 되었다. 

장소의 근본적인 변화(재택근무, 모바일 환경), 도시화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

구조적 실업 문제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이슈들

일중에 하나님 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직업들을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2. 일의 어제와 오늘

고대 세계

일은 저주요 순전한 악이었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운이었다. 일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고 관조적인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

헬라인들의 견해는 기독교화된 형태로 중세교회로 유입되었다. 영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은 상하 계층적인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현대 세계와 포스트모던 세계

산업화되기 이전의 삶은 일과 가정과 교회 간에 통합이 이루어진 삶이었으나 산업혁명은 분열을 초래했다. 산업혁명을 일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돈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일은 분업화되고, 단순화되고, 틀에 박히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손수 하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묵상함으로써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프로이트는 일을 비극적인 필연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일

일꾼이신 하나님

성경은 일하시는 하나님, 즉 말씀하시고, 모양을 꾸미시고, 고안하시고, 만드시고, 조각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축복이자 저주인 인간의 일

일없는 낙원을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및 계획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셈이다. 일은 좋은 것인데 창조세계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봄으로써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 일에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온다. 


모든 종류의 일

성경에서는 육체 노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육체노동보다 격상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과 함께 하지 않는 일


일꾼이신 예수님

신약에서는 일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이유는 첫째, 신약을 구약성경을 전제로하기 때문이고 둘째, 사도들의 우선과제는 복음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일

신자의 일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인과 종(퀴리오스와 둘로스)


종말론적 관점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상급이 유업으로 주어질 뿐더러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형태를 만드시고 제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신다. 사랑하는 분이신 하나님은 관계적인 일을 하시고, 존엄성과 건강의 의미를 부여하신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구속의 일, 고치는 일, 하나로 묶는 일, 구하는 일을 하신다.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성부의 일 : 청지기직

성자의 일 : 하나님 나라의 사역

성령의 일 : 은사와 능력 부여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제조하는 일, 유지하는 일, 사랑하는 일, 회복시키는 일, 복음사역, 인도하는 일

하나님의 일은 누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아직 신자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 행해지는가? 교회와 세상에서 후자에는 물리적인 창조세계, 가정, 사회, 공동체, 정치, 문화, 교육, 재정 분야, 우리가 제작하고 고치는 모든 세계들이 포함된다. 

왜 우리는 일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인 완성점에 도달하게 하시는 동안, 우리를 동역자로 초청하여 그분과 교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5. 일은 좋은 것이다. 

일의 외향적인 가치 : 생산하는 것으로 인해 일은 선하다. 

일의 내재적인 가치 : 일은 그 자체로 선하다. 


세계를 위해 좋은 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복음적인 일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평안과 의미와 용서와 소망을 선사해준다. 


우리를 위해 좋은 일

일은 깊은 치료의 매개체이다. 일은 우리에게 좋고, 세계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좋고, 심지어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다. 



제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1. 오늘날의 사역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역을 정의할때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설교, 성례집전,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것 등.


현대의 판단 기준

사역이란 아코디언과 같아서 우리가 그 속에 어떤 공기를 불어 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해진다. 

1) 장소, 2) 기능, 3) 필요, 4) 호칭, 5) 지명

사역은 "교회를 대신해서 공공연하게 행해진 행위이자 섬기는 은사의 결과로서, 교회내에서 성례의 형태로서 선포되고 명시화되고 경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으로 구체화하는 행위이다."-마이클 롤러


2. 성경에 나타난 사역

사역은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섬김이다. 사역자는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아바드

구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 일하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와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있는 용어이다.(야곱이 라반에게 한 봉사) 


사랏

두가지 범주로 첫째는 통치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드려지는 개인적인 봉사이고 둘째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이다.(요셉이 애굽에서 중요한 죄수들에게 한 봉사) 


주님의 종

에베드가 주님의라는 말로 수식이 될때 사역자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사역을 사람들과 하나님의 세상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나 교회의 종이 되는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필요가 섬김으로의 부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봉사

사역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봉사를 뜻하는 말로, 본래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라는 뜻이지만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 준비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땅에 종을 두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만족시키지 못하자 하나님이 스스로의 종이 되신 셈이다. 


교회는 곧 사역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된 자는 종이다. 

초대교회 당시 선택된 공식적인 사역자들과 평범한 신자들의 사역을 서로 구별시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3. 삼위일체적 사역 신학

하나님 안에 사역이 있으며, 하나님은 곧 사역이시다. 

세상이 있기전에 사역이 있었는데, 그 사역은 하나님의 존재안에 있었다.(페리코레시스)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사역은 단지 하나님을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

사역이란 그리스도적이다. 즉 성령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라오스가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고 이땅에서 하나님의 봉사를 감당하는 것이다. 


사역의 특징은 사랑이다.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것은 이세상이 있기도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사랑안에서 사역하던 하나님의 공동적인 삶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사역은 위임된 활동이 아니라 파생적이고 참여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인 활동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이며 "그분안에 있는 우리의 종 된 존재를 구체화시키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우리 가운데 순전한 사랑과 연민으로서 실현시키는 것이다."


사역은 성육신을 통하여 창조 세계를 축복한다. 

교회는 세상에 실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역안에서 세상과 관계하는 것이다. 선교의 본질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동감하는 데서 발견된다. 


사역은 종말론적이다. 


4. 사역하는 지도자들

기능인가 직분인가?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거룩함과 사랑이 지상에 나타나는 이미지인 공동체 안에서 그 형상이 드러난다. 이는 구성원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각자의 기능을 함으로써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지도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정해진 역할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직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위해, 예수님의 머리 되심안에서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봉사를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조력자 들이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한 선

신약 성경 기자들은 선택된 한 명의 공식적인 사역과 일반 신자의 사역을 구별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했다.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은 특별한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한 사람이 사역의 일을 맡게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소환되거나 초청받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내적인 확신이나 체험"(리처드 니버의 사역으로의 소명)

위 내용에 저자는 반대한다. 

바울의 부르심에서 회심과 사명 위탁 : 회심으로의 부르심은 역사를 통틀어 다른 모든 신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 위탁으로서의 브르심은 반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리더십으로 부름받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인 소명을 다루면서 논의한 바 유효한, 섭리적인, 카리스마적인, 마음속의 부르심에 덧붙여서 교회지도자의 경우에는 교회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교회적인 부르심이란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 교회 리더십에 적합한지 여부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은사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성품의 측면이다. 


안수

안수라는 관행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이에 대해 루터는 "안수는 교회의 교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수 없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수의 개념 :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또한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것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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