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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다시 읽기(최종원, 홍성사)
프롤로그
‘중세’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 시대, 계몽되지 않은 암흑시대 등이 떠오른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이 중세를 ‘암흑시대’로 규정했고 17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중세 천 년을 이성이 사슬에 메이고, 사상이 노예화되어 지식에 아무런 진보가 없던 시기로 규정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중세의 열매가 르네상스였다는 연속성이 강조된다.
중세를 건설적으로 읽으려면 중세 말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도덕적 타락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중세 교회가 어떻게 고대와 다른 문화 및 언어 토대에서 독자적 사상과 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는지 주목해야 한다.
중세 교회는 중세 사회속에 뿌리를 내렸다. 중세는 천년의 기간 동안, 우리가 오늘 경험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다 겪었다. 여러 부침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속의 경험을 통해 오늘에 적용하고 배울 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확고한 신학적 잦대로 중세를 재단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 이미 정해진 판단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과거와 마주할 때 곱씹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역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질문할 것이 아니라, 희망은 역사의 성찰을 통해 오늘, 여기서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1장. 중세사와 중세교회 - 중세 유럽의 형성
1. 새로운 문명의 이식
로마 제국은 문명의 생태적 경계선인 포도와 올리브 재배 지역을 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이 그 한계선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문명의 한계를 넘어섰다.
4세기 말 이후 훈족, 흉노족으로 알려진 이민족이 서유럽에 들어왔다. 450년경 훈족은 이탈리아 반도 로마까지 침입해왔다. 이때 훈족의 지도자와 담판을 벌였던 인물이 바로 교황 레오 1세였다. 이 훈족의 침입은 고대 로마세계를 무너뜨렸고 세계사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고트족은 남부 유럽에 자리 잡았는데,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건축의 결정체를 고딕 양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트’에서 유래하였다.
이동경로가 가장 긴 민족은 ‘반달족’이었는데 이들은 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키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처럼 문명 파괴나 기물 파괴를 의미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 여기서 나왔다.
2. 사건들이 만든 유럽 개념과 봉건제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지역으로 유럽을 정의했다.
이후 8세기 이슬람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슬람 세력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유럽이라는 개념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터키는 유럽에 인접해 있지만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기에 유럽 연합 가입이 번번이 거절되고 있다.
로마 문명, 게르만 전통이 합쳐진 중세 유럽 사회를 지탱한 두개의 기둥이 그리스도교와 봉건제이다.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는 기도하는 사제, 전투하는 기사, 일하는 농노의 세 위계가 봉건제를 지탱하는 상상의 체계라고 했다. 영주가 소유하는 장원을 통한 자급자족 경제는 이 봉건제를 작동시키는 기본 경제 체제이다.
잉글랜드 존왕과 귀족 대표 사이에 대헌장(Magna Carta)이 체결되었다.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는 전투와 경제라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3. 중세 유럽을 형성한 그리스도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중세인들을 하나루 묶어준 최상의 가치는 종교였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의 라틴어 성서 번역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형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면 중세 말 잉글랜드, 체코, 독일에서의 자국어 성서 번역은 근대 국민국가 의식을 만들었다.
중세가 형성될 때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종교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을 이어주고 작동시키는 기제 역할을 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가 무너졌을 때 그리스도교가 그 체제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유럽에서 교회는 공적 행정조직이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인간의 일생을 교회 교적부로 관리했다. 이 호적 관리 기능을 국가가 넘겨 받은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사회 유동성이 거의 무시된 봉건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 경계를 넘어 활동했던 세력이 수도사였고 사제였다.
봉건제와 교회 중심의 구조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었다. 교류를 통한 새로운 문명이나 지식을 얻고 교역하는 경제 활동이 매우 제한된 구조였다. 유럽이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각성한 계기는 바로 십자가 원정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큰 의미중 하나는 알프스 이북 유럽이 중세 형성 이래 최초로 유럽 대륙을 벗어나 타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원정의 출발점은 종교적 열정이었지만 그들이 경험한 이슬람은 유럽보다 앞선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명은 충돌하면서 파괴되기도 하지만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낸다.
4. 제도 교회와 세속 권력의 갈등
중세 유럽은 국가 제도와 교회 제도라는 두 가지 필수적인 제도 위에 성립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5대 교구의 하나였던 로마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치면서 다른 교회에 앞서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프랑크족은 현대 프랑스인의 뿌리로 프랑스는 카톨릭의 장녀로 불린다. 교황은 로마에 있었지만 신학의 발전은 프랑스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프랑크 족은 491년 이교도 왕 클로비스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와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다. 이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한 카룰루스 마르텔루스의 아들 피핀은 쿠데타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차지한다. 이에 피핀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교황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랑고바르드 족을 내쫓고 이탈리아땅을 교황에게 기증한다. 이것이 ‘피핀의 기증’이다. 이 기증의 함의는 교황이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토를 보유한 세속 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교황 레오 3세는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마그누스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한다. 이로 교황과 프랑크 왕조와의 협력관계가 본격화 된 것이다.
이후 교황과 유럽 군주와의 관계에서 또하나의 역사적 이정표는 962년 2월 교황 요한 7세가 로마에 온 독일왕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세운 것이다. 이어 황제는 '오토의 특권’이라는 조약을 교황과 체결한다. 이는 교회의 독자적 교황 선출권을 인정했지만 선출된 교황은 황제에게 서약한 후에만. 취임식을 가지도록 규정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 문제의 주도권은 황제가 가졌다. 공의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고, 결론을 내리도록 압박한 것도 황제였다.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한 것도 11세기 중반 이후이고, 콘트라베라고 불리는 현재의 교황 선출 절차가 자리 잡은 것도 13세기 중반의 일이다.
중세 교회의 역사는 소아시아 지역의 헬레니즘 문명의 세례를 받고 생성 발전한 초대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라틴어와 게르만족으로 구성된 낯선 유럽으로 옮겨져 독자적 정체성과 문화를 만들어간 여정을 보여준다. 중세는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려 들기보다 낯선 그대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5. 중세교회는 중세 유럽사의 일부
중세 유럽은 4-5세기 게르만 민족 이동으로 형성되었다. 독자적 문명의 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묶는 구심점으로 그리스도교가 큰 역할을 했다. 지정학적으로 갇힌 상황에 놓인 중세는 11세기 십자군 원정으로 외부 문명과 본격 조우하기 전까지 봉건제라는 자급자족 체제에서 살았다. 이 닫힌 사회 속에서 유동성을 지니고 지적 활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교회와 수도회가 맡았다. 십자군 원정 이후 선진 이슬람 문명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중세는 어두운 시기를 벗고 중세 전성기를 경험한다. 이 시기 대학이라는 제도가 생겨나고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달한다. 라틴 그리스도교 문화가 꽃피운 이 절정의 시기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확장은 흑사병과 교회 분열이라는 예기치 않은 자연적, 인위적 변수를 겪으며 주춤했다. 이 미증유의 혼란은 종교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았다. 인간 이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라는 개념으로 발전했고, 종교개혁과 근대 세계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2장. 무너진 서로마 - 서유럽 선교화 가톨릭화
1. 이교 문화 변혁의 책무
중세 교회는 위로부터 강화되는 제도 교회의 흐름과 더불어 아래로부터 제도 교회와 긴장을 유지하고 생성, 소멸된 수많은 수도회의 흐름과 상호 교차한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도시 종교로 발전했다. 그런데 중세 라틴 유럽은 로마와 카르타고 등 도시의 경계를 넘어 게르만 이민족들의 삶에 침투하면서 생성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가 도시를 넘은 것이다. 게르만 이민족들의 문화와 전통이 그리스도교와 공존을 시도하면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게르만 이민족들은 일부 다처제가 흔했는데 교회는 가정을 교회의 기초 단위로 인식했기 때문에 일부 일처제를 인정하고 이혼을 금지시켰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혼인이 성립되도록 했다.
가톨릭 교회가 주관하는 칠성사에 결혼이 들어가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혼인의 법제화와 이혼에 대한 제도적 금지 등 가정사에 대한 교회의 절대적 간섭과 성직자의 혼인 금지 등 성에 대한 독특한 인식은 동시대 비잔틴 교회와는 다른 라틴 중세교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중세시대 공식적 이혼은 불가능했지만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청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 성립(토마스 크랜머 이혼의 신학적 근거 제공)
중세교회의 특징이 혼인의 성사화, 이혼금지, 사제의 결혼 금지 등이라면 정교개혁기에는 이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졌다.
2. 사제 독신과 노예제 폐지
비잔틴 교회에서는 독신이 강조되지 않았지만 라틴 교회에서는 척박한 유럽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효율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독신이 강조되었다.
또한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기보다는 같은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스람 지역 등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노예를 매매했다.
3. 그리스도교로 재해석된 이교 문화
그리스도교는 기존의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을 때 이교 신전과 이교 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건축물의 경우 공공건물이나 이교 사원에 십자가를 달아서 교화로 바꾸는 타협을 했다. 바실리카 양식이 그 예이다.
이처럼 중세 그리스도교 선교의 특징은 그리스도교가 토착 이교 신앙과 혼합되며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헬레니즘 세계라는 문명의 토대에서 생성된 그리스도교가 비문명의 이교 문화에 침투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양보와 타협, 수용 등 토착화였다. 각종 이교 신들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성인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제도 교회를 통한 교화 방식의 하나는 끊임없는 종교적 두려움과 그 너머의 신비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성인과 수호성인으로 모자라 성직자라는 차별적인 신분계급이 생겼다.
4.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서유럽 선교
역대 교황들 중 그레고리우스라고 이름 붙인 교황들은 대부분 선교적 열망, 그리스도교를 통한 사회 개혁 열망 등을 추구했다.
서방 교회에서 독신을 강조한 이유는 수도사들의 종교적 모범을 통해 속인들을 교화하고자 한 것이고 이제는 순교를 통해 종교적 고결함과 신을 향한 결단을 표현할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는 독신의 삶을 통해 신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레고리우스 성가와 성화상은 탁월한 선전 도구였다. 성화상은 문맹자들을 위한 책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초기 중세 서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를 높임으로써 헬라어를 기반으로 하는 비잔틴 제국과 다른 라틴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었다.
5. 울필라스와 패트릭
1) 게르만의 사도 울필라스
울필라스는 외교적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갔다가 그리스도교를 접한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헬라-로마 문화권이 아닌 지역으로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울필라스가 전한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의 것이었다. 이 갈등의 불씨는 동, 서방 교회의 분열로 폭발한다. 5세기 프랑크 왕 클로비스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여성과 결혼하고 세례를 받은 후 가톨릭 그리스도교를 수용한다.
2) 패트릭
그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원래 잉글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후 자신을 잡아서 노예로 삼았던 아일랜드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다.
로마 교회의 특징이 교황을 정점으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등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서제라면 아일랜드 교회는 수도원장 중심으로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도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헬라어 수도회를 의미하는 모나스테리온(monasterion)에서 파생된 용어인 민스터(minster)는 로만 브리타니아 시절 형성된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켈트 그리스도교를 형성)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색슨 선교 요청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문명화된 로마 수도원장이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야만족에게 다가서는 불안함이 있었음에도 597년 5월 26일 잉글랜드 남부 켄트에 도악한다.
6. 보니파티우스의 독일 선교
잉글랜드 출신의 보니파티우스는 독일의 선교사로 간다. 토르를 섬기는 부족을 전도한다. 그는 754년 개종한 이들에게 세례를 주다가 폭도들의 습격으로 순교한다.
프랑크 왕국, 슬라브족의 동방 정교회 수용이나 앵글로색슨족의 그리스도교회는 통치자가 특정 종교를 수용하면 전 구성원이 개종하는 하향식으로 이루어졌다. 하향식 개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지배 종교인 그리스도교 문화와 대중들의 이교 문화의 혼합을 가져왔다.
지배자들의 선택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길은 열렸지만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문화와 가치가 대중의 삶과 가치관에 스며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수도사들은 창과 칼로는 침투할 수 없는 민중들의 삶 속에 들어갔다.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의 침투, 이 두가지가 접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화가 이루어졌다.
7. 대중을 견인한 그리스도교
야만의 전통과 관습 속에서 그리스도교 문명은 조악하게 혼합되었지만 그것으로 마친 것은 아니다. 민중들의 종교성을 수용하는 대중성을 잃지 않되, 그 대중을 견인할 힘을 생성해 나간 것이 라틴 교회의 특징적 지형이었다.
3장. 교황제, 전통을 창조하다. - 교황제의 형성
1. 점진적으로 발전한 교황 수위설
교황이 세속 통치자들과의 정치적 관계를 활용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만들어 낸 위로부터의 역사와 수도사들이 대중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문화를 토착화해 나간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가톨릭 교회에서 만나 교차한다. 종교개혁은 하나의 가톨릭을 지향하던 교황 중심 공동체의 균열인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수도회 해산을 가져왔다.
초대교회 시기 형성된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는 이론적으로 평등했다. 그러나 유일한 서방 라틴 지역교회라는 지정학적 특수성, 서로마 멸망이후 라틴 세계의 질서를 주도했다는 현실, 동로마 황제의 정치적 개임에 맞설 권위의 필요, 로마 교회가 주도적으로 이민족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여 서유럽을 형성하였다는 요인 등이 겹쳐 로마 주교가 로마교회의 책임자를 넘어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이라는 헤게모니를 형성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두가지 전통 :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전통은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는 반면 가톨릭 교회는 성서의 권위와 더불어 제도 교회가 형성해 온 전통 역시 권위의 한 축으로 인정한다.
교황제의 네 단계 발전 과정
1) 1단계는 교회가 시작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전후 로마 교회 형성기. 초기 로마 주교는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 중 하나 였으며 다른 교회와 수위권이나 지상권을 다투지 않았다.
2) 2단계는 서로마 멸망 시점부터 11세기까지이다. 제도 교황제의 발전기로 종교적 권위체를 넘어 세속권까지 보유하는 교황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론 들이 등장했다.
3) 3단계는 11-13세개이며 완성된 군주제로서의 교황제이다. 교황은 유럽 봉건 질서 속에서 상위 군주가 되어 종교 문제는 물론 세속 사안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4) 4단계는 14세기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가톨릭교회에 분열이 일어난다. 대립 교황들이 난립하고 교황청이 분열된다.
2. 로마 주교, 교황이 되다.
313년 그리스도교 공인 당시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우월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서로마 멸망으로 인한 정치, 행정, 행정 부재의 상황에서 로마 교회는 종교적 권위를 기반으로 우월하고 정교한 내부 조직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무너진 제국 정부의 체제를 교황군주제는 자연스럽게 모범으로 채택했다.
4세기부터 로마 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등이 주장했던 베드로 계승 이론에 관심을 두고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로마 교회는 외적으로만 제국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려 여러 내부 조치를 단행했다.
3. 로마 교회의 수위성
교령집은 교회의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린 권위있는 서신이었다. 교황이 교령집을 반포했다는 것은 교황청이 중앙집권적으로 교회를 통제하겠다는 의지이자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 교황의 위상을 드러낸다.
4. 로마를 구한 대교황 레오 1세
그는 성서의 권위와 신학 교리를 로마법과 접목시켜 교황군주제의 이상을 제시했다.
* 레오 테제
1) 로마법에 따라 직책 보유자라는 면에서 베드로와 그 직책의 승계자인 교황은 법적으로 차이가 없다.
2) 직책 보유자로서의 교황은 최초 교황에게 주어졌던 법적 자격을 동일하게 보유한다.
3) 교황의 판결이나 교령은 교황 개인의 윤리나 도덕 등 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교황직이라는 객관적인 직책에 의거해 수행한 것이므로 유효하다.
레오테제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주의, 교권주의와 교황무류설로 연결되는 근거가 되었다.
5. 겔라시우스의 양검론
양검론이라는 표현의 성서적 출처는 그리스도가 체포당할 때 베드로가 말고라는 이름의 종의 귀를 칼로 벤 사건이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에게는 두개의 칼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종교적 권위, 또하나는 세속적 권력을 의미한다.
레오 테제가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모든 교회에 대한 감독권을 주장한다면, 겔라시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 교황이 세속 권력과 견주어 실질적 우위에 서는 길을 제시했다.
6. 중앙집권적 교회 형성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의 직접 통제를 받는 유럽 교회의 위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로마 제국 몰락의 시기에 교회를 통해 유럽을 건설할 기틀을 마련했다.
7. 8세기의 위작
교황이 이탈리아와 유럽 지역에 영적, 세속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인용되는 문서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공식 선언했다. 로마 황제가 로마를 떠난 것이다. 4세기의 맥락에서는 천도라기보다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위태한 도시 로마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8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떠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와 인근 서유럽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은 교황의 유럽 지배 정당성을 확인하는 정점에 서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위조된 것이다.
8. 사료 위조, 사실과 허구의 중세적 기준
위조라는 단어 없이 중세 가톨릭을 이해할 수 없다. 중세는 위조의 황금시대라고들 한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은 대부분 성직자였으므로 위조 역시 이들 몫이었다. 당시 성직자들이 죄의식을 갖고 문서를 위조한게 아니다. 이들은 위조라는 인식보다는 각색을 통해 신의 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종교심을 고양한다고 생각했다.
중세에는 사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이 실제 역사성 여부가 아니었다. 역사적 사건은 아닐지라도 종교성 혹은 도덕성을 고양하고 사람들의 일체감을 함양하는 등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다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목적이 신성하고 정당하다면 허구도 역사로 인정되는 것이 중세의 심성이었다. 화폐 위조는 사형의 처벌을 받기도 했지만 성직자들의 위조는 교회를 보고하고 교회의 이익을 가져오는 행위로 정당하며 신의 보상을 받았다고 보았다. 위조자는 자신의 위조 행위가 신의 재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졌다.
대표적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을 르네상스 학자들이 위조문서로 밝혀 냈다는 것은 비로서 위조를 식별해 낼 능력이 생겼다기 보다는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중세의 심성, 즉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용인이 되는 중세에서 이제는 객관적인 사실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세계관이 변화한 것이다.
유럽의 중세 말, 교회는 맹목이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온상이었다. 토인비는 역사를 변혁하는 주체인 창조적 소수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지배적 소수로 군림한다고 지적했다.
4장. 아래에서 형성되는 힘 - 켈트 수도회와 베네딕투스 수도회
1. 수도회, 중세 카톨릭의 시작과 끝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세속 통치자나 귀족, 고위성직자들로부터 재산을 기부받아 일반인들과 다른 차원의 종교적, 정신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숭고미를 간직했다. 하지만 중세의 종교적 타락은 곧 수도회의 타락이었고 개혁운동은 수도회 개혁이기도 했다.
수도회는 초대 사막 교부들의 삶과 같이 신적 추구, 신과의 합일, 신의 임재를 추구, 신과의 신비적이고도 인격적인 교감 추구가 수도원의 삶이라면 수도사의 삶은 ‘영성'을 추구하는 삶이었으며, 수도원은 각 시대마다 필요한 영성이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운동'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위로는 교황제, 아래로는 수도회가 조화를 이루며 존속했다.
2. 켈트 수도회의 선교와 학문
지중해 세계를 삼분한 비잔틴, 유럽, 이슬람 세력은 각각 헬라어, 라틴어, 아랍어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유럽은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와 그리스-로마적 요소가 게르만 이주자들과 만나 라틴 그리스도교를 형성한 상태였다.
유럽을 형성한다는 것은 국교를 그리스도교로 정하고 로마 제국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의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로 정체성을 통합하고 그 위에 문명을 만들려면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가치가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내재화되어야 가능하다.
초기 이집트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켈트 수도회는 유럽에서 형성된 베네딕투스 수도회보다 훨씬 엄격한 수도 규칙을 적용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완전하게 실천하기 위해 강력한 고행과 금욕의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에게는 매일 금식과 기도, 노동과 학문 정진이 요구되었다.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실천한 절대 순종과 자기 비움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되었다. 켈트 그리스도교 전통은 서유럽 라틴 그리스도교에서 고행과 참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켈트 수도회는 유럽 선교와 학문 증진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3. 아일랜드 그리스도교의 확장
- 콜룸바누스
- 베네딕트 비스콥
- 존자 베다 : 잉글랜드 교회사
- 요크의 알퀸
휘트비 교회회의(664년) : 오스왈드 왕이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한 결정, 이는 켈트 그리스도교가 로마 전통과 합쳐지면서 유럽 교회에 칼트 영성을 통합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4.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사 알퀸
수도원은 도덕 개혁을 이끄는 곳이자 지식과 학문을 선도하는 진보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는 통일된 중앙정부의 수립과 문명 국가 건설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활성화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상호 의존관계로 800년 성탄절,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하였다. 이는 서방교회와 세속 국가의 연합을 알리는 것으로 카롤루스는 알프스 이남의 로마가 아닌 잉글랜드의 요크를 선택함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이루어졌다.
요크의 성당학교는 서로마 제국이라는 장차 형성될 새로운 제국의 일체성과 정체성을 높이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통합하려했다.
궁정학교에서 알퀸은 3학(문법, 수사, 논리)와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를 교육의 기본으로 정립했다. 이 과정을 마친 경우에만 상위 학부인 신학, 법학, 의학 공부가 허용되었다. 카롤루스의 이상은 그리스도교 성직자 양성을 넘어 전문 관료 집단을 양성함으로써 국가의 미래를 만드는데 있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이성과 신학을 통합하는 스콜라철학의 선구자이다.
5. 국가 정책의 선전 도구
11세기 만들어진 롤랑의 노래 : 카롤루스의 군대를 이끌던 롤랑이 에스파냐의 잔혹한 이슬람 세력과 싸우다 내부의 배신으로 전사하는데 이에 카롤루스가 이슬람 군대를 무찌르고 롤랑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
왕국내 수도회 장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양이라는 목적과 세속의 통치 목적이 함께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수시로 수호성인의 중재를 탄원했다.
6. 로마를 새롭게 한 베네딕투스
중세 유럽의 8-11세기는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세기(Benedictive centuries)로 불린다. 성 베네딕투스는 유럽의 수호성인이다. 베네딕투스회는 선교, 교회의 발전 및 학문 장려 등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베네딕투스는 이집트에서 이어진 수도회 정신을 6세기 이탈리아에 맞게 적용해서 운용했다. 이 수도회는 상호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이 회칙에는 수도회가 ‘스콜라’로 표현되어있으며 가혹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회칙을 마련하여 잘못을 교정하고 신적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아주 약간의 엄격함만을 도입한다고 적었다.
7. 배움의 터, 특수 부대
수도회는 지식의 보존자 역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학교의 역할을 수행하며 인근 유력한 가문에서 자녀들을 수도회에 보내는 자녀 봉헌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순종과 겸손’을 강조한다. 기도와 노동, 학습을 세가지 중요한 삶의 축으로 한다.
8. 수도원 정신의 회복
수도회는 위로부터 아래로 부과되는 중세 종교성에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문명이 없던 지역인 유럽에서 문명의 원형을 찾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중심으로 형성된 켈트 수도회의 영향은 컸다.
유럽 그리스도교는 수도사들의 버림과 비움의 수준이 능력의 지표가 되었다. 그들이 버린 만큼 유럽 문명은 채워졌다.
5장. 두 외부 세력 -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동서 교회 분열
1.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교
유럽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세력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교이다. 이 두 세력은 중세 유럽의 지리적 경계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때론 충돌하고, 때론 협력하고 공존하며 중세 유럽 문명을 형성해 왔다.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왔기 때문에 개신교가 가톨릭과 친밀성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동방 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더 가깝다.
2. 독자적 비잔틴 문명 형성
동로마 제국은 흔히 비잔틴 제국으로 불린다. 비잔틴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인식했고, 그들의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일컬었다.
동방 교회에는 서방 교회와 다르게 황제가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정착된다. 황제는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대리자요, 로마 제국은 신국의 모형이자 그림자가 된다.
제국내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포괄적인 지침을 마련한 칼케돈 공의회는 그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잔틴 제국의 너른 울타리 내에서 칼케돈파, 비칼케돈파, 네스토리우스파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에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을 의미한다. 서방교회의 맞은편에는 동방교회가 있다. 이때의 동방교회는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즉 기독론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교회를 의미한다.
3.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정복 전쟁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기 위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방 원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진출하려면 동쪽 국경을 맞댄 페르시아와 평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로마 재정복에 군사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에 큰 돈을 주는 조건으로 페르시아 통치자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정치적 목적이었든 종교적 열망이었든, 그리스도교 제국을 통일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점령한 서방 영토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재정복 전쟁 실패로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각각 상호 이질적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4.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토대가 되어 유럽의 교회법이 발전하였다.
6세기 비잔틴에서 편찬된 법전이 11세기에 전 유럽에서 활용되었으니 둘 사이에 시공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영토 회복에 종교적 목적이 담겼던 것만큼 그의 법률 집대성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 세계를 하나의 법률로 다스리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을 배제하고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로마가 남긴 이교 문명을 넘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교 토대에 제국 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기존의 로마법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적용하여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실제 제국 내 다수어는 헬라어였다. 그리고 7세기 초반부터는 제국의 공식 언어가 헬라어로 바뀐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를 사용한 마지막 황제였다는 사실은, 라틴어 중심의 로마 제국이 헬라어 기반의 비잔틴 제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법 편찬의 기저에 흐르는 정신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로마법 사상의 통합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 편찬으로 비잔틴 제국은 윤리와 사적 삶에 적용되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게 되었다.
5. 니카 반란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니카 반란은 동로마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비잔틴 제국이 고대 로마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고 황제교황주의라는 전제군주정으로 가는 길을 결정적으로 열었다. 그 결과 비잔틴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문명이 탄생했다. 이제 황제가 선택할 길은 명확했다. 신으로부터 제국의 통치권을 받았음을 만천하에 선포할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폭도들의 불 지른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은 비잔틴 제국 창건을 상징하는 프로젝트였다.
527년 12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 축성식에서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6. 비잔틴과 이슬람의 조우
중세 유럽은 지중해를 두고 비잔틴 그리스도교와 만났고,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이슬람과 마주했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관용 정책을 폈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세금을 추가로 내면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세율은 비잔틴 제국이 거두는 것보다 대체로 낮았다. 그 때문에 이슬람은 거센 저항 없이 꾸준히 확장했다. 이집트에서는 콥트 정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에스파냐의 무슬림 지배하에서도 모사라베 그리스도교는 토착 종교로 살아남았다.
7. 동서 교회의 갈등
7세기 무렵 비잔틴 세계에서 도시라고 부를 만한 곳은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없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에는 여전히 고전 교육을 받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점차 고대 로마의 흔적이 사라지고 지역성이 강화되었다. 한때 거대했던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으로 축소된 제국의 삶에 적응해 갔다. 급격하게 변하는 비잔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은 교회였다. 교회는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공공 활동을 촉진하는 중심이 되었다. 위축된 공립학교의 기능도 교회가 흡수하였다. 제국의 기능이 위축된 상황에서 비잔틴 교회는 병원과 구호 기관 등 자선 기관들을 발전시켰다. 이는 중세 유럽 형성 초기 무너진 서로마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여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던 역할과 무척 닮았다.
서방 지역은 서로마 멸망 이후 교황이 패권을 장악해가고 있었으나, 동방 지역은 여전히 황제가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 동방 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비잔틴 황제와 로마 교황이라는 두 세력과 버거운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8. 성상 파괴 논쟁과 보편적 제국 이념 상실
성화상은 대중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고, 더 나아가 교육하는 목적을 지녔다. 692년 트룰로 공의회는 진리의 그림자요 상징으로서 성화의 역할을 인정했다.
유럽과 가까운 교회는 성화상에 우호적이었지만 이슬람 인근의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은 성화상을 거부했다.
730년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교회에 성상 및 화상을 금지하는 성상 파괴령을 내린다. 성화상 금지는 우상숭배적 요소를 경계하는 목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권력과 교회가 겪은 갈등의 표출이기도 했다. 성화상의 주 생산지는 수도원이었다. 성화상이 활발하게 활용될수록 수도원은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가 경제력을 확보하면 정치적 입김이 강화되는 건 당연하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금지 조치는 교회와 수도회 폐쇄, 재산 몰수으로 이어졌다.
9. 비잔틴 제국 내의 논쟁
성상파괴령은 비잔틴 제국이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더 강력하게 제국주의적으로 통치할 수 있던 시기에 내려졌다. 섭정이 통치하던 시기에 성상파괴령이 철회되었다는 것은 제국의 통제가 약화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다.
726년 성상파괴령 이전까지 교황은 동로마 황제를 군주로 인정했다. 그러나 성상파괴령은 교황이 더 이상 동로마제국에 예속되지 않고 서방의 카롤링거 왕조와 제휴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10. 필리오케 논쟁과 포티우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와 성자'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추후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와 성자'를 포함시켜 동ㆍ서방 교회가 분열되는 논쟁을 야기한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논쟁으로 칼케돈파, 단성론파, 네스토리우스파로 나뉜 것이 주 갈등이었던 반면, 서방 지역은 아리우스파 문제가 중세 초반에 지속되는 문제였다.
아리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동등함을 부정한다. 니케아 신경에서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한다'는 표현은 성부와 성자가 같지 않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서 성자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본성을 지녔음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고 표현했다. 이를 위해 '필리오케'라는 단어를 포함시킨 것이다.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떨치던 에스파냐에서 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589년에 열린 제3차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공식적으로 381년의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를 덧붙인다.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강제 폐위하고 포티우스를 사제로 안수한 뒤 총대주교로 임명한다. 이에 로마 교황 니콜라우스 1세(820~867)는 일련의 과정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포티우스를 파문하고 이그나티우스를 정당한 총대주교로 선포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포티우스는 교황을 이단으로 파문한다.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이 이유였고 이는 동서 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11. 쌍방의 파문, 동서 교회 분열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포함된 신학 논쟁으로 갈라진 이후 서방 교회는 독자적인 라틴신학 전통을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 갔다. 이때 라틴신학에 들어온 대표적인 교리가 칠성사와 연옥, 면벌부 등이다. 동ㆍ서방일치를 위한 공의회에서 결국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의 연옥 교리와 같은 새로운 신학적 발명을 거부하였다.
12. 유럽 형성의 외적 토대가 되다.
비잔틴 제국은 동-서방 무역로의 중심지로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연결하는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이다. 비잔틴 제국은 헬라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로마 문명, 이슬람 문명등과 교루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이 두 세력은 유럽 문명과 물리적 충돌을 겪으며 갈등하기도 하지만, 유럽이 문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6장. 세속권력과의 투쟁과 교황권 - 클뤼니 개혁 운동과 서임권 논쟁
1. 교권과 속권의 갈등 시작되다.
중세 초 몰락한 서로마의 행정체계를 교황제가 대체하면서 교황제 및 로마 가톨릭교회가 강화되었다. 동로마와도 점차 멀어지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로마 교황은 견제와 균형 속에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피핀의 기증과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은 그 핵심 사건이었다.
성직 임명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을 서임권 논쟁이라고 한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 : 그는 단순히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속 지배자들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권리까지 주장했다.
-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의 요청으로 사라센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 그는 독일 국왕 신분이었는데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그는 96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는다. 교황의 대관식이 있어야 ‘신성(Holy)’을 붙일 수 있다. 오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은 지 1년 후 자신을 대관한 요한 12세를 폐위한다. 이후 일련의 교황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임명한 독일인으로 채워지게 되고 교황권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세속 권력이 임명한 성직자는 교회법에 규정된 전통적인 종교적 의무와 관행을 이행하는데 태만했다. 이들은 혼인을 하거나 동거인을 두고 성직 매매를 행했다. 복수겸직 성직자는 자신이 부재한 교회에 고용 사제를 두어 관리를 맡기고 수익을 챙겼다.
2.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
프랑스 중부 클뤼니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1세가 자신의 아들이 죽자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하고 종교생활에 귀의한다. 그는 유럽의 표준 수도회인 베네딕투스 수도회 회칙을 엄격하게 고수하도록 해 수도회를 개혁한다. 클뤼니 수도회는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평화를 위하고자 하는 정신을 설립 헌장에 분명히 하였다. 클뤼니 수도회 운동은 교황권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9세기를 극복하도록 아래로부터 형성된 전환점이었다. 특히 성직 매매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성직자의 혼인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3. 교황의 하향식 개혁
수도회 출신이 교회의 상위 직책을 차지하면서 세속 교회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수도회라는 교회 내부의 힘도 교회 개혁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지만, 교회가 자정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세속 군주의 간섭이 역설적으로 교회를 갱신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1046년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에 갔는데 자신이 적법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교황을 만난다. 이에 하인리히 3세는 이 세명의 대립 교황을 폐하고 자신이 데려온 독일 주교를 교황(클레멘스 2세)으로 임명한다.
레오 9세는 성직 매매와 사제가 결혼하는 관행을 뿌리뽑으려 노력했다.
이후 교황의 선출을 황제가 지명하는 방식을 벗어나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오늘날 이를 ‘콘트라베’라고 한다.
4. 힐데브란트 개혁과 서임권 논쟁
그레고리우스 7세라 이름 붙인 힐데브란트는 교권과 속권 사이에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핵심은 본래 가졌던 종교 본연의 의무와 가치를 교회법에 따라 구현하는 데 있었다. 과도하게 세속과 결탁한 모습을 벗고 수도원적 계율과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1075년 선포된 교황 교서에는 교황만이 제국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고(10조), 교황을 황제를 퇴위시킬 권한(12조)도 가지고 있으며, 성직임명권에 대한 권한(14조)도 있다고 선포한다. 레오 9세와 그 후계자들이 교황권을 교회 개혁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데 비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속 지배자들에 대응하여 교황권 자체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개혁운동을 활용했다.
넓은 의미에서 서임권 논쟁은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세속 군주가 주교에게 지팡이와 반지를 주는 관행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였다.
5. 서임권 논쟁의 전개
독일왕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밀라노 주교 선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로 충돌한다.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교황 선임이 무호라고 선포하고 교황이 정당한 이유 없이 독일 교회와 주교들을 공격했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1076년 2월 22일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포한다. 이에 독일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등을 돌렸고 하인리히 4세는 용서를 빌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에 교황을 찾아간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 하는데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왕의 의복 대신 회개를 상징하는 백의를 입고 맨발로 참회할 것을 명했다. 왕은 맨바닥에 엎드려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며 교황의 사면을 간청했다.
6. 서임권 논쟁의 타협
이후 하인리히는 절치부심하여 그레고리우스를 뒤쫓고 결국 살레르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생을 마감한다. 누가 승자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관심은 속인 지배자가 세속 권한을 주교에게 부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직을 부여하는 상징인 지팡이와 반지는 수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세속 군주는 왕이 주교들에게 세속 권한을 부여했으므로 왕이 상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원했다.
파스칼리스 2세가 고안한 해결책은 주교와 수도원장이 세속 군주로부터의 토지와 권력을 수여받는 관행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성직매매나 성직자의 혼인등은 끊을 수 있었지만, 땅을 소유하는 욕망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던 독일 주교들의 집단 저항으로 파스칼리스 2세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에서 황제는 주교권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 서임 관행을 포기했다. 그 대신 세속 군주가 주교에게 영토를 하사하고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대가로 주교로부터 봉신의 충성서약을 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7.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
국왕 헨리 1세는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려 할 때 안셀무스는 왕으로부터 이를 거부했다. 이에 타협안으로 주교는 국왕이 추천하여 교황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국왕은 반지와 지팡이를 주교에게 서임하지 않는다. 주교는 왕의 봉신으로서 왕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봉토를 받는다.
8. 교황권 강화의 길을 열다.
하인리히 4세 파문등 그레고리우스 7세가 취한 행동은 세속 정치 영역에서 전통적으로 우위에 있던 황제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했다.
종교 개혁은 정치적으로는 국왕권과 교황권 대립의 결과이다. 국왕권의 승리로 교황군주제가 붕괴되고, 각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그 안에 국가교회가 생긴다. 종교개혁은 민족의식 형성과 국민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생긴 것이다.
또한 서임권 논쟁은 속인 통치자의 종교 지배 관행에 교황권이 제동을 건 사건이다. 교황이 서임권 논쟁을 제기할 수 있었던 힘은 제도 교회가 수도회 운동을 통해 자정 노력으로 권위를 회복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
7장. 문명의 공존과 충돌 - 콘비벤시아와 십자군
1. 일관된 해석이 없는 십자군
십자군은 중세교회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이다. 1095년 첫 십자군 원정을 시작으로 1300년 경까지 약 2백 년간 이어진 십자군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있다. 유럽지역에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가 금기어다.
서임권 논쟁의 결과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결과 중 하나가 십자군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내적인 응집과 팽창을 통해서 닫힌 세계를 열고 나가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힘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처음에는 신앙적 열망으로 시작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서진한 이슬람 세계에 유럽이 고립된 상황에서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그리스도교가 공세를 취하고 반격을 가하는 사건이다.
십자군 원정을 의도하고 계획했던 이들은 접경 지역에서 이슬람과 접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슬람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프랑스와 로마 교황등으로 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객관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2. 이베리아 반도의 공존 실험
콘비벤시아(Convivencia)는 공존이라는 의미로 중세 에스파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가 평화로운 공존을 만들어 냈다. 무슬림 사회 속에 살던 그리스도인을 ‘모사라베’라고 했는데 그들은 개종을 강요받는 대신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보호받는 계약을 무슬림 통치자와 체결하였다.
3.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
1085년 이슬람 통치지역인 톨레도가 정복되면서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 무슬림들을 ‘남는 것을 허락받은 자’라는 의미인 ‘무데하르’라 부른다.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보호받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왕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중세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도인, 무슬림, 유대인들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상호작용은 예술, 건축, 경제, 문학과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결과물을 생성했다. 특히 라틴어, 아랍어,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이중 언어 지역이었으며 각 종교의 경전과 문학작품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콘비벤시아, 공존 정책을 통해서 아랍과 비잔틴, 서고트족 양식이 혼합된 건축, 활발한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번역 활동을 통한 문화적 교류, 학자들을 후원하기 위한 궁전, 도서관 등으로 지적 세계의 확장을 가져왔다.
4. 7백 년 이상의 각축
교황청과 이탈리아 북부 유럽 국가들의 개입, 관용 정신을 훼손한 이슬람 강경파들의 득세, 그리스도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 사이의 전쟁 증가등이 공존을 훼손했다.
711년 남부 에스파냐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의 등장부터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완전히 축출한 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놓고 7백 년 이상 벌어진 일련의 각축을 유럽에서는 ‘레콩키스타’라고 한다.
이처럼 공존에서 대결로, 콘비벤시아에서 레콩키스타로 전환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십자군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적대감이 증폭되어 공존의 가능성이 상실되었다. 11세기 전까지 유럽은 유럽외 지역을 침공한 사례가 없다. 유럽은 늘 수세적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나 십자군 원정은 유럽이 집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군사 원정에 나선 최초의 사례이다. 이 두 전쟁은 교황을 중심으로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안정되고 그 자신감이 외부 세계에 대한 무력 원정으로 표현된 것이다.
5. 무관용의 지배
서로 다름을 용인하던 공존에서 종교적 색채가 강화되면서 공존 전통은 무너졌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이슬람 교도들이 서로 접촉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정복지 내 이교도 재산은 몰수하도록 결정했다.
6. 십자군이라는 관념의 등장
일반 신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유산 계층이 출현하면서 신앙적 관심이 고조되어 예루살렘 순례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십자군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이교도의 수중에 떨어져 더 이상 가볼 수 없게 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려는 종교적 목적이 강했다.
7. 비잔틴의 원조 요청에 응답하다.
십자군은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의 군사원조 요청에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응답한 것이다. 사절단은 알렉시오스 황제를 위해 군대를 파병하면 셀주크 튀르크가 막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길이 다시 열릴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는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감수성을 깊이 자극했다. 알렉시오스는 공격받는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줄 기사를 원했는데 우르바누스 2세가 행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동상이몽)
8. 교황의 약속과 민중의 호응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배할 수 있다는 기대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는 십자군 참전으로 교회에서 부과하는 종교적 참회와 고행을 면제할 수 있음을 선포했다. 또한 십자군 참전 서약은 개인이 사회에서 지고 있던 채무를 벗겨주었다.
지속적인 십자군 원정은 종교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이유도 있다. 중세 유럽에 장자 상속제가 완성되어 장자가 아닌 자들은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질서속에 기득권을 차지하기 원했다. 또한 유럽에서 영지를 확보하지 못한 기사들은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고 번성하고자 했다. 또한 교황이나 가톨릭교회는 유럽 사회 안정에 따른 내부 불만을 해소하는 통로로 십자군을 활용했다.
9. 십자군 운동의 전개 - 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첫 십자군 원정의 의도치 않은 결과 중 하나가 유대인 박해와 혐오이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원정의 이유를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상권이나 부를 소유한 유럽의 유산자였다. 평소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플에 와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총 6만명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동안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이 일어났다. 십자군들은 용병으로 셀주크 튀르크와 싸우기보다 예루살렘을 독자적으로 탈환하고자 했다.
10. 십자군 운동의 전개 - 콘스탄티노플에서 예루살렘까지
십자군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필요했고 먹고 살 수 있는 만나가 필요했다. 그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스스로를 순례자로 생각했으며, 십자가 깃발을 들고 ‘신의 군대’라 불렀다.
1097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솔로몬 신전에서만 만 명이 살육당하고 발목까지 찰 정도로 피가 바닥에 고여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르바누스 2세의 선동과 은자 피에르 같은 대중 설교가들에 의해서 자극된 조직화되지 않은 농민 및 대중이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참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정이 무질서하고 조직화되지 못했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통제 못할 광포함과 잔인함이 극한으로 표현되는 상황이 열렸기 때문이다.
11. 소년십자군의 비극
3차 십자군의 맞수는 강력한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이었다.
1212년 프랑스의 어느 양치기 소년이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십자군의 실패 이유는 탐욕에 물든 성인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며, 순수한 소년들이 가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년들이 탄 배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향하고 그 소년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5차 원정이후로는 십자군의 주도권이 세속 군주에게 넘어갔다. 즉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대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세속 군주들이 자신의 세력 강화와 교역로 확보를 목표로 벌이는 전쟁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이 남긴 것은 라틴 교회와 비잔틴 교회의 갈등과 반목이었다. 십자군을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도 추락했다.
12. 십자군이 남긴 변화
십자군은 성지 약탈을 막고 순례길을 확보하려는 방어적 성전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순수한 종교적 이념과 열정은 한순간에 광기로 변했다.
십자군이 중세 유럽 세계에 가져온 결과 : 종교라는 하나의 상수로 묶을 수 없는 민족의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단일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정체성의 표현이 십자군이었지만 실제 유럽은 단일하지 않음을 각인하게 된 계기 역시 십자군이었다. 십자군 운동으로 지방 귀족이나 제후 중심 체제는 약화되고 중앙집권적 국왕권이 강화된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권 확대라는 자신감의 결정적 표현이었는데, 십자군이 진행되면서 빚어진 종교적 일탈, 파괴, 약탈, 대학살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이미지는 악화되었고 교황은 대응에 실패했다. 전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면벌부를 무분별하게 발부하고, 이는 중세 타락의 기제가 된다. 유럽 대륙안에서 공존하던 유대인들이 타자로 인식되면서 그들을 탄압하는 사건이 십자군 원정 초반부터 줄곧 이어진다.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은 8차로 끝났으나, 중세 말로 가면서 이교도 무슬림이 아닌 유럽 내의 이단 등 다름을 억압하기 위하여 십자군은 또 조직되었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제도적 차별의 시작이 십자군 원정이 유럽 사회 내에 남긴 부산물이다.
십자군이 끼친 또 하나의 항구적인 효과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통해 이루어진 활발한 무역활동과 교역 중심의 서유럽 도시 발달이다.
12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의 문화적 폭발을 경험한다. 중세 수도원 전통속에서 이슬람과 비잔틴의 앞선 과학적 발견과 문명이 들어오면서 대학이라는 지적혁명도 탄생한다. 이 대학 안에서 가르치는 신학을 스콜라학이라고 부른다.
13.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이 두 종교의 만남은 공존과 대립, 콘비벤시아와 십자군이라는 이질적 형태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대한 다양한 해석
1) ~16세기 : 유럽에 실질적 위협 세력인 이슬람에 맞서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지키기 위한 정당한 전쟁
2)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 십자군은 중세의 어두움과 야만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 불관용의 상징이었다.
3) 19세기 이후 :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십자군에서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유럽 제국주의 확산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은 십자군과 유사한 성격을 보인다. 모든 제국주의적 수탈과 억압이 서구화와 문명화를 위해 정당화된다. 십자군이 모든 잔인무도한 행위를 신적 재가를 받은 것으로 정당화하듯이, 제국 침탈 과정의 무력이나 수탈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십자군은 한 시대의 종교가 성찰에 실패했을 때 도달하는 광기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므로 자기 객관화를 통한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종교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또는 세계화의 이름으로 십자군은 역사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성찰하며 타자를 대할 때 인류는 문명의 충돌과 십자군이 아니라 관용과 공존, 콘비벤시아를 선택할 수 있다.
8장.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다 - 12세기 르네상스와 대학의 탄생
1. 르네상스 개념과 재평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고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리스-로마 문명을 회복하는 14~15세기 유럽의 문예부흥 운동을 일컫는다. 고전 텍스트들의 재발견을 통해 유럽 문화의 새로운 부흥기가 왔다는 것은 르네상스의 기본 개념이다.
르네상스의 개념은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를 통해 보편화되었다. 그의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중세와는 전혀 다른, 중세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출발로 르네상스를 상정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부흥운동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2. 12세기 르네상스의 내부 조건 - 도시 발전
중세와 근대 세계의 연속을 강조하는 중세주의자들은 중세가 뿌리고 가꾼 결실로서 근대를 바라보고자 한다. 고전의 재발견과 대학이라는 제도를 형성한 지적 혁명을 12세기 르네상스라 부른다. 후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예술과 문화 중심이라면, 12세기 르네상스는 교육과 지식의 진보가 중심이다.
12세기 르네상스 주창자들은 중세를 암흑과 무지의 시대로, 근대를 빛과 진보의 시대로 놓는 이분법을 거부한다. 중세는 생각보다 덜 어두웠고, 르네상스는 덜 밝았다는 주장이다.
도시의 생성과 상공업 발달은 중세 봉건제에서 활발하지 않던 새로운 계층, 도시 수공업자의 성장을 촉진했다.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이 보존하고 발전시켰던 고전 문물이 유럽으로 활발하게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사회안으로 상품과 같은 유형의 재화, 무형의 지식등이 유입되었고 그것이 교환되는 곳에 도시가 생겨났으며 도시로 인구 집중이 이루어졌다.
도시, 무역, 새로운 계급 출현등은 중세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스콜라학이라고 부르는 신학을 발전했고 카톨릭 교회는 칠성사를 완성시켰다. 이 지적 혁명은 대학이라는 교육 기관 형성으로 완결되었다.
3. 외부 조건 - 이슬람 고전 번역
십자군 전쟁 전후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과학 기술이 유럽세계에 들어왔다.
이슬람의 힘은 다양한 원천의 문명들을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묶었다는데 있다.
830년경 압바스 왕조 알 마문이 수도 바그다드에 ‘지혜의 전당’을 설립했다. 여기에서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이 번역되었다.
코르도바의 도서관에는 40만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 이곳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수학 서적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 사업이 유럽세계에 12세기 르네상스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번역이란 언어의 기술적 변환에 그치지 않는다. 번역 자료는 라틴 세계의 정서와 결합, 각색되어 마침내 독자적 형식을 만들었다.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유럽 전통에 들어오면서 유럽에 지적 격변이 일어난다.
아랍 사상가딜이 고전을 재해석해서 그들의 신학체계 속에서 종합한 것은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더 잘 설명하려는 유의미한 선례와 단서가 되었다.
4. 수도원과 성당 부속학교, 대학을 열다
12세기 이전까지 유럽 그리스도교의 학문 세계는 수도원 학교와 성당 부속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지식은 질문 대상이나 탐구 대상이기보다는 순종의 대상이었다. 재속학교에서는 성직자나 수도사 등 종교인이 아닌 일반 관료 양성을 위한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1세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지식 자체가 담고 있는 회의와 불확실성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힜다. 그는 해소될 수 없는 모호함에 대해서는 이내 ‘나는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믿는다’라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합리적 논증을 사용하여 신학적 주제를 풀어갔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스콜라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믿음을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상수로 놓았다는 점에서 마지막 수도원주의자로도 흔히 평가된다.
그간 교회 내에서의 지식은 값없이 주어진 신의 선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제 지식이 다듬고 포장해 시장에 내놓으면 팔릴 상품이 되었다.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에 근거한 지적 탐구가 무상 교육 공간인 수도원의 담벼락을 넘어, 지식 상품의 값을 매겨 경쟁하는 시장인 대학으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다.
5. 스콜라 논쟁의 시작
12-13세기 스콜라학은 유럽 세계의 지적 혁명이었다.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하고 설령 질문했다 하더라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을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논리를 통해 접근한 것이다.
-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 성찬식에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축성할 때 빵과 포도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간 신비로 수용해왔던 성찬시 그리스도의 임재를 이성과 논리적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화체설의 정립,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
6. 최초의 대학인 아벨라드두스
마지막 수도원주의자인 안셀무스가 참된 지식을 얻는 믿음을 강조한 것과 반대로, 아벨라르두스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회의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제시한다.
-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 분노한 숙부 퓔레르는 아벨라르두스를 거세 시킨다.
7. 시장에서 태어난 대학
대학은 중세가 만들어낸 여러 제도 중 자율성, 독자성,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오늘까지도 연결된다. 라틴어 ‘우니베르시타스’는 영어 ‘유니버시티’로 옮겨졌고 교약학부와 상위학부는 각각 학부와 대학원 체제로 그 골격을 유지한다.
대학교육은 기본적으로 강독이었다. 수업은 여러 권위있는 주장들을 살펴보고 주장들 사이의 충돌, 주장의 모순점들을 파악, 비교하는 것이었다.
유형의 재화를 생산해 사고파는 여느 길드 조직과 달리 대학은 무형의 재화 지식 서비스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였다.
대학에서 쓰는 마스터 역시 길드의 장인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명확한 것은 대학이 세속을 넘어선 고고한 상아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학은 시장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국제성이 가능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가서 공부하려면 화폐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의 성립과 상업화, 도시화의 영향을 떼어 놓을 수 없다. 도시 혁명이라고 불리는 장기 12세기의 도시 발전, 인구 증가, 시장과 화폐 경제 성장등은 수도원 학교와 성당 부속 학교를 대체하는 고등교육 기관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8. 3학 4과와 교양 교육 수준 향상
자유학예는 3학(언어와 관련된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4과(산수, 기학학, 천문학, 음악)이다.
9.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볼로냐 대학은 학생 중심, 파리 대학은 교사 중심의 대학으로 발전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으로 발전한 철학, 과학 등과 달리 이탈리아의 법학 발전은 로마법 부흥으로 이루어졌다.
볼로냐 대학이 발전한 이유 : 11세기 말 이르네리우스는 ‘로마법 대전’을 해석 적용함으로 법률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교황청이 사법체계를 정비하여 교황권을 높이기 위해 시도했다.
교황청은 파리 대학을 교회 조직의 일부로 수용하여 대학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
대학이 교권과 속권 모두의 지원을 받아 제도적 자율성을 확보했다. 이는 중세 대학이 교황권과 세속권에 필요한 전문 훈련을 받은 지식인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태동과 성장은 중세 도시의 성장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세속권과 교황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과도 맞물린 것이다. 권력의 우위성을 법적, 제도적으로 확보하려는 치열한 세력 다툼에서 대학은 양대 세력 모두 놓치기 여려운 권력이었다.
10. 국민단과 자율권
국민단은 출신 국가별로 구성된 이익집단으로 대학이 속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받으며 자율 활동을 추구했다.
‘중세 대학은 세속성을 향해 가려는 움직임 가운데 태어나 제도적으로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에 속하는 기관’이라고 프랑스 중세사가 자크 르 코프는 말했다.
11. 지적 혁명과 12세기 르네상스
베르나르두스는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보다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더 예민하거나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공중에 들어 올려서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더 멀리, 더 잘 볼 수 있는 것은 과거부터 축적된 힘 때문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은 진보에 대한 인식이고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슬람 문명의 기여를 빼고 12세기 유럽의 발전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슬람 세력이 보존하던 고전 사상과 그들이 발전시킨 주석서, 과학, 의학서 등은 유럽의 지성을 깨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적을 통한 지적 교류는 중세 유럽 문명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아랍 문명이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건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조합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그리스도교의 문명사회는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다.
9장. 가장 큰 빛, 가장 짙은 그림자 - 인노켄티우스 3세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 위기를 반등시킨 공의회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외 20세기 중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카톨릭 공의회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화체설과 고해성사등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가 중요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틀이 이때 놓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전형을 보여준다.
2. 인노켄티우스 3세 시대
그는 교황의 절대군주권을 추구한, 현실적이고도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교회의 도덕성과 내부 조직을 개혁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와 번영을 위해 교황을 최고 지배자요 재판관으로 하는 교황 지배체제를 주장했고 성공적으로 그것을 구현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갑자기 말라리아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는 어린 외아들 프리드리히의 후견인 역할을 부탁한다. 이후 1215년 프리드리히는 20세에 제국 황제로 등극한다.
3. 프랑스 왕의 이혼 문제 간섭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첫 부인 이사벨라의 사망이후 덴마크 공주 잉게보르와 재혼하여 하룻밤을 보낸후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는데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 혼인 무효 결정이 잘못되었다며 1199년 프랑스에 성무정지를 선포한다. 파문이 가톨릭교회 공동체에서 개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가장 큰 징계라면 성무정지는 성직자 개인 혹은 특정 지역에 속한 성직자회에 교회 사무수행 즉 세례, 성찬, 미사, 서품식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성무정지를 명령함으로써 프랑스 전역 교회가 멈춰섰다.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압력을 버텨 냈지만 재혼한 아내가 죽자 교황에게 굴복하고 타협했다.
4. 잉글랜드 왕을 파문시킨 교황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후버트 윌터 사망후 후임자 임명을 놓고 왕과 교황간에 대립이 생긴다. 존 왕은 존 드 그레이를 대주교로 지명하고자 했으나 교황은 스티브 랭턴을 대주교로 추천하여 서임했다. 존 왕이 반발하자 교황은 1208년 잉글랜드에 성무정지를 내린다. 존 왕이 굴복하지 않자 교황은 1209년 그를 파문한다. 이후 주위 심복들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하자 존 왕은 잉글랜드를 교황에게 봉헌하고 스스로 봉신임을 선언한다.
성무정지와 파문이라는 종교적 징계가 상징적인 조치가 아니라 실제로 세속 군주를 무릎꿇린 이유는 대중들의 삶에 가톨릭 신앙이 깊이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 중세 유럽 최대 규모의 공의회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는 408명의 주교, 8백여명의 대수도원장과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과 제후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대표단을 보냈다. 이 회의의 두가지 큰 목적은 1) 성지 회복을 위해 십자군을 재소집하는 것과 2) 교회의 갱신과 개혁이었다.
첫번째 목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교회 개혁을 위해 교황은 70개 조항을 공의회에 제시했다.
교리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화체설을 가톨릭교회의 공식 성찬교리로 확정한 것이었다.(1조)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최소 1년에 한 차례 이상 고해성사를 의무화한 것이 핵심적인 변화였다.(2조)
성직자가 성찬에서 축성하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 변한다는 교리는 성직자의 역할과 능력이 초월적임을 말해준다. 또 매해 속인이 의무적으로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은 교회가 대중들의 삶과 신앙을 밀접하게 돌보고 관리하는 주체로 확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성직주의의 완성이다.
6. 사제 독신 제도 확인
규범 14조는 성적 순결을 지키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사제들의 독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5조는 사제의 음주와 사냥 등의 규정이다. 사제의 수준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궁극적 목적은 교회가 대중들을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체제 완성에 있었다.
19조는 교회 건물도 일반 세속 건물과 차별을 둔다. 성직자 개혁을 통한 교회 개혁 시도는 결국 성직자와 비성직자 사이에 서로 건널 수 없는 ‘성직주의’라는 강을 내었다.
7.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다.
사목 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적절한 설교 제공이었다. 미사는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속인들이 정통 종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속어 소통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10조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하여 올바로 알려주는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중들의 종교적 유익을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할 것을 권하고 있다. 속어 설교는 라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넘어서 언어별, 국가별로 독특한 종교 정체성이 활성화되는 자연스러운 기회가 되었다.
50조에서는 4대까지 연결된 친족까지만 결혼이 금지되고 그 이상을 넘어서는 친족 관계 혼인을 인정했다.
21조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구 사제에게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연례 고해성사를 의무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및 종교적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개선해야했다. 더 나아가 고해성사가 영혼의 구원에 필수 요소로 강조됨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종교적 삶에 집착하게 되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했을 뿐 아니라 사면과 죄책 수행을 선포함으로써 그 지역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할 궁극적 권위자가 되었다.
8. 칠성사 제정의 의미
- 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신품, 병자 성사가 있다.
칠성사는 한 개인이 가톨릭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확증이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각 단계에서의 종교적 진행은 성사 수행과 같이 간다. 여기서 핵심은 구원을 향한 개인의 여정에서 그 매개가 교회요 사제라는 점이다. 개인의 구원의 길을 교회가 성사라는 의식을 통해 마련하고 보증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상징적이었던 교회 권력이 이제 대중의 모든 삶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주었다. 도덕성과 종교성을 고양하여 올바른 그리스도교를 만들어간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개인의 삶에 대한 억압과 규제이다.
9. 종교재판소 도입
한 시대에 특정한 교리나 삶의 모습이 강조되면 불가피하게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차별받고 타자화되는 결과로 연결된다. 탄압을 당연히 여기거나 정당화하는 기제가 생긴다.
라테란 공의회의 종교재판소는 사적 제재 대체였지만 변질된 면이 있다. 예를 들면 합법적 절차로 고문이 이용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으로 성직자의 권위가 교회를 통해 개개인을 더욱 강력하게 지배했다. 이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보면 엄청난 성공이지만 성직주의라는 부작용과 대중의 무분별한 종교 행태를 부추겼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 타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0.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단 세력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교회 지배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단과 유대인 및 여러 사회적 소수 계층에 대한 타자화를 제도화했다는 점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교황 중심의 지배 체제가 완성된 시기는 성취일까 타락일까? 성취의 이면은 사제와 비사제의 간극이 깊어진 성직주의였다.
10장. 종교적 공포와 대중의 욕망이 만나다 - 연옥과 면벌부
1. 대중들이 발전시키는 문화
교회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교황, 사제, 수도사 혹은 신학자 / 대중
중세에 대중이 집단으로 등장한 첫 사례는 십자군, 이후 역사에서 주목받은 사건은 이단의 탄생이다.
중세 말 미신적 성물 숭배 및 성인 숭배, 면벌부는 대중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2. 성체와 성모 숭배
13세기 초 화체설이 가톨릭의 공식 성찬 교리로 확정되면서 미사는 공식적으로 사제의 축성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성물이나 면벌부 증서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었다. 가톨릭의 공식 성찬 교리로 화체설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미사에서 대중이 관객으로 참여하여 기적의 드라마를 보는 종교로 변하였다는 의미이다.
마리아에게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과도하게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가톨릭교회가 담지 못한 종교적 헌신과 정서적 측면을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 상크타 마리아(Sancta Maria), 영어 세인트 메리(Saint Mary), 이탈리아어 마돈나(Madonna), 에스파냐어 산타 마리아(Santa Maria), 프랑스어 노트르담(Notre Dame)등 다양하게 불리는 마리아는 가톨릭 신앙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3. 연옥의 출현
연옥(Purgatory)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연옥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을 구제하는 증서인 면벌부는 필요가 없어진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과, 천국과 지옥이라는 분리된 내세의 장벽으로 모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합리적 추론이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이다.
교회는 선한자들을 위한 천국과 사악한 자들을 위한 지옥 외에 제3의 거처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곳은 낙원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내면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 단테의 신곡, 연옥편 / 지옥은 한마디로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반면 연옥은 언젠가는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본질적 희망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연옥은 정화하는 장소이기보다 희망의 장소였다.
4. 면벌부, 종교적 심성을 지배하다.
면벌부는 종교개혁의 단초가 된 타락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면벌부가 중세인들의 구원을 향한 긴 여정에 깊숙이 함께한 도우미이자 종교적 심성의 중요한 지배기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원이란 개인의 노력과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었다. 사후 구원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 것이 가톨릭교회였다. 중세교회는 대중을 위한 영적 제도와 교육을 행하는 제도 기관인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혼 구원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보다 안전한 구원의 길을 담보하는 종교적 이정표를 제시해야 했다.
면벌부는 십자군 원정 전후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대중적으로 유포되던 것을 이후 스콜라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5. 십자군 원정에 등장한 면벌부
중세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한 사람이 고해성사를 할 경우 그가 범한 죄는 신의 은총과 사제의 권능으로 사해진다. 그러나 죄가 만든 후유증은 남게 되는데 이것을 참회자가 해결해야 할 잠벌(temporal punishment)이라 한다. 잠벌은 고해사제가 부과한 참회고행(보속)을 수행해야 사라진다. 고해사제가 죄의 경중에 따라 명하는 금식, 기도문 암송, 성지 순례, 지정된 교회 순례, 자선행위등을 통해 잠벌이 처리되고 경감된다. 일생동안 다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잠벌은 그 분량만큼 연옥에서 정화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면벌은 고해사제가 부과한 참회고행을 행하지 않고도 교황이나 주교의 권한으로 잠벌을 경감시키는 것으로 면벌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발급한 증서이다. 첫 면벌부 수혜자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었다.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는 대가가 현세의 축복이나 보상이 아닌, 내세에 받을 처벌의 완화라는 점은 중세인들의 삶을 지배하던 생사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면벌부는 모든 보속을 면제하는 완전 면벌부와 부분적으로 면제하는 한정 면벌부로 나뉘어진다. 이처럼 처음에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군인들에게 수여되었지만 이후에는 교회 보호를 위한 노력들(성지 방어, 이단 방어)과 믿음을 수호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노력들로도 확대된다. 아퀴나스는 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한 모든 행위에까지 면벌부를 확대했다.(성당 건축 기부금, 공공 건물 도로및 교량 보수 이후에는 라틴 그리스도교에 유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행위)
6. 면벌부를 공론화한 아벨라르두스
아벨라르두스는 면벌부를 발급하는 주교들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으며,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7. 정당화되는 면벌부 개념
연옥이라는 명사를 처음 고안한 성가대장 피에르는 ‘그러므로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베풀어지는 면벌부는 교회의 권위, 성도의 교통, 참회의 노력과 헌신이라는 세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수여될 수 있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개념을 통해 교회가 그 자녀들에게 베푸는 면벌부의 유효성을 논증한다. 그는 이 신비체는 인간의 육체와 닮았다고 본다. 육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지체가 상처를 업었거나 상해에 노출되면 다른 지체가 상처를 싸매고 상해를 막아선다. 이처럼 한 지체가 다른 지체의 부담을 함께 견뎌야 하고 또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유비들이 공식적으로 채택, 체계화된 것이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 학자들이 정리한 공로의 보고(treasury of merits) 개념이다. 교회법학자 호시티엔시스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이 피 흘림을 통해 얻은 잉여의 공로가 교회의 보물창고에 보존되어 있고, 보물창고 열쇠를 교회가 소유하고 있어 필요할 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공로의 보고’ 원리를 기술했다.(마 16:18, 요 20:23)
8. 망자를 위한 면벌부와 신학적 논쟁
초기의 면벌부는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부과된 형벌을 면제하는 데만 효력이 있었다. 망자들의 영혼을 위해 가족이나 친척이 면벌부를 구입해도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진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이다. 신학적으로 불명확했음에도 망자들에게까지 효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 대중의 요구와 시장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요구에 대한 불가피한 추인의 성격이 짙다.
9. 면벌부의 사회적 기능
중세인들에게 죽음과 심판의 문제는 실제적인 고민거리였다.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튀르트의 거친 위협과 내부적으로는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흑사병의 위협에 대중들은 노출되어 있었다. 하여 대중은 어떤 시기보다 성물 수집과 숭배 등 미신적인 신앙행위에 몰두하였다.
대중의 두려움과 교회의 이해관계가 낳은 산물이 면벌부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안전한 자선 행위가 바로 면벌부 구입이었다. 면벌부는 연옥에서의 고통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경감시키려고 현세에서 투자할 수 있는 가장 배당률 높은 펀드와 같았다.
교회는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성사와 전통이라는 권위있는 안내자들을 곳곳에 비치하여 도움을 주고자 했다. 면벌부도 중세의 이런 종교적 심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로서 생겨나고 확장된 것이다. 면벌부는 중세인들의 깊은 종교적 불안을 매개로 자라난 중세 종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면벌부는 오늘날로 말하면 자선 사업과 교육 사업의 국채 발행 기능을 포괄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면벌부 판매 대금은 종교 시설이나 구빈 시설 건축뿐 아니라 학교 설립에까지 사용되었다.
연옥 신앙, 미신적 성물이나 성인 숭배 등이 대중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면벌부는 가톨릭교회 타락의 상징으로 지금껏 인식된 것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자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비판했던 가톨릭 교회의 과도한 미신적 신앙의 원인은 13세기부터 찾을 수 있다. 면벌부는 중세인들의 두려움과 종교적 욕망을 매개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 두려움과 욕망을 제도 교회의 권위, 성인과의 교통, 그리스도인의 참회와 헌신이라는 기제를 통해 정당화했다. 그 결과 중세인들은 제도 종교가 약속하는 손쉬운 구원의 방식을 좇아 분별없는 종교적 욕망을 표현했다.
11장. 교권 강화의 반작용 - 대중 이단과 탁발수도회
1. 제도권 밖 종교운동
중세 유럽사에서 12-13세기는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정점을 향한 시기이다. 교회 혹은 성직자 개혁 요구에 대해 교황청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직주의 강화를 통한 하향식 개혁으로 대응했다.
제도 교회가 수용하지 못한 이 운동들은 교회에 수용되었을 때에는 교황이 인정하는 수도회가 되어 가톨릭 역사 안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수용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단으로 분리되어 탄압대상이 되었다.
카타리파는 성스러운 것, 속된 것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펼치고 독자적 교회 체계를 만들어간 대표적인 이단운동이었다. 반면 발도파는 성서안에서 그려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운동이었다.
2. 정통 확립과 대중 이단
로버트 그로스테스트가 말하는 이단의 정의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인간의 이해에서 기초해서 생각하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철회하지 않고 완고하게 고집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이단의 역사이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볼 양면성이 존재한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과 고해성사 등을 교리로 확정하면서 성직자의 권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13세기 등장한 이단운동은 제도 종교의 영향력 과잉 반성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청빈의 삶 추구는 동시대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새로운 신앙의 길로 제시되었다.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들이 주로 교리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중세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윤리적, 실천적인 반발이 결국 교리적인 차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3. 종교적 완전성을 지향한 카타리파
카타리는 ‘순결’, ‘청결’을 의미하는 단어로 12세기 중엽 시작되어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발전하면서 서유럽 여러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프랑스 알비 지역에서 큰 세력을 얻어 ‘알비파’라고도 불렸다.
카타리파 신도들은 세상의 어둠속에서 청빈과 정절을 통해 빛을 비추는 삶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했고 육식을 거부했으며 결혼을 포함한 육체적 관계를 부정했다. 이들은 선한 신과 악한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이원론, 단순하고 엄격하고 순결한 삶에 대한 지고한 동경을 주장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대립하는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세를 확장했다. 이에 1209년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모집했다. 이슬람에 대항한 무장 운동이었던 십자군이 유럽 내 유럽인을 처단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이다.
예루살렘 십자군이 회차를 거듭할 수록 순수한 종교적 목적을 넘어서 참가자들의 영토 획득과 사회적 신분 상승이라는 잘못된 목적으로 얼룩졌듯 20년간 지속된 알비파 십자군도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게 되었다.
4. 사도적 삶을 추구한 발도파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 지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과 이탈리아 각지로 흩어진 운동이다. 리옹의 부유한 상인 발도는 성인 알렉시우스의 전기를 통해 감화를 받고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1173년 발도는 자신이 지금껏 지켜 온 가정과 사업과 부를 버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을 택했다. 발도의 금욕적 삶과 검소함과 단순함을 권면하는 설교를 통해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교황은 발도파가 추구하는 종교와 삶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주교의 허락없이 설교하는 것은 가톨릭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보아 설교를 금지한다. 가톨릭 교회는 발도파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발도파를 정통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가톨릭 빈자들(Poor Cathoiics)라는 이름을 내리고 후에 후밀리아티(Humiliati)로 불리기도 했다.
발도파의 신학의 핵심은 성서의 가르침을 교황이나 교회의 결정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국어로 된 성서를 읽고 그 가르침을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성서중심주의의 뿌리를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독자적 흐름을 유지하던 발도파는 신생 프로테스탄트와 연합한다.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고 주변부에 머물던 발도파가 자신들의 종교적 교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장 칼뱅의 개혁교회로 이동한 것이다.
청빈의 삶과 금욕을 추구하고 성서 연구와 대중 설교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것은 탁발수도회와 비슷하다. 미사 중심의 가톨릭 예전에서 성서가 제시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도적 청빈을 주장한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발도파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탄압을 받은 반면 똑같은 역할을 한 탁발수도회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5. 탁발수도회와 사도적 청빈
수도사를 나타내는 몽크(monk)가 단독을 의미하는 모노(mono)에서 유래되었듯 수도사들은 홀로 고행하며 더 노 은 수준의 종교적 삶을 실천했다.
13세기 교황권의 전성기 이후 성직주의가 강화되고, 현세와 내세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교회의 권위는 연옥의 탄생, 면벌부 매매, 성물숭배 등 새로운 종교 현상을 낳았다. 이 모든 것이 성직주의가 그 기반이다. 이에 반발해 대중 이단운동들이 등장하고 가톨릭교회는 십자군과 종교재판을 통해 이들을 치리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가 등장한다. 탁발수도회는 몽크가 아니라 프라이어(friar) 형제로 불렸다. 이들은 기부나 후원을 통해 재산을 유지하던 관행을 거부하고 오직 탁발, 즉 구걸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탁발수도회는 구원이나 더 높은 종교적 가치 추구가 반드시 세속을 벗어나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주어진 의무를 최선을 다해 감당함으로써 신의 뜻을 충족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두개의 위대한 탁발수도회가 시작되었는데 가난과 청빈을 모토로 한 작은 형제회로 불리는 프란체스코회와 설교자 수도회라고 불리는 도미니크회이다.
6. 무소유와 청빈을 추구한 프란체스코회
프란체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중부 아시스의 한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지내다가 1208년 마 10장의 내용을 읽으며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프란체스코가 사도적 청빈이라는 극단적 가치를 들고 나온 이유는 당시 점증하는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중세 도시에서는 빈부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 탁발수도회 운동은 주로 부유한 중산층과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엘리트 운동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청빈의 이상을 구현할 수록 그들의 종교적 진로는 밝아졌다. 탁발수도회 출신으로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수립된 그 세기에 탁발수도회 출신의 교황이 나오기 시작했다, .
점점 세가 확장되면서 조직화가 필요해졌다. 조직화되지 않으면 발도파와 같이 대중 이단운동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기에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무소유를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내용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는 이 운동을 구두로 승인했다.
7. 프란테스코회가 부딪힌 두 문제
교황이 인준한 프란체스코 회칙에는 수도회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돈을 사용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했다. 하지만 수도회가 조직화되고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무소유 원칙은 지켜지기 힘들었다.
두번째 문제는 교육이었다. 프란체스코도 학문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수도회 내에서도 학문탐구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이후 도미니크회와 경쟁하면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보나벤투라,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이 중세 프란체스코회를 대표하던 학자들이다.
8. 설교를 통해 개혁 추구한 도미티크회
프란체스코회가 청빈을 강조했다면 도미니크회는 설교와 가르침을 강조했다.
도미니크회는 카타리파 등을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대중 사목활동을 하려 설립된 수도회였다. 발도파와 프란체스코회가 연결되듯 카타리파와 도미니크회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미니크회는 대도시 대학에 학교를 설립하는데 적극적이었다.(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탁발수도사들은 세속 학문인 교양학부 과정을 거부했고 교황은 이 교양학부 과정을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중세 말 대학의 신학자들이 현실 세계와 담을 쌓고 탁상공론과 언어유희에 가까운 신학 논쟁에 몰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9. 진정한 사도 계승의 요구
대중 이단 운동은 가톨릭 교회가 가진 무소불위의 힘과 강화된 성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했다.
교황은 제도권을 벗어난 종교 운동을 제거하기 위해 십자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중세의 모든 개혁 운동이 수도회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13세기 탁발수도회는 강화된 교권주의, 성직주의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에게 실천적으로 다가갔고, 자발적 청빈과 설교를 통해 대중들이 추구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종교의 길을 제시했다.
탁발수도회는 도시를 중심으로 생성되어 또 다른 도시 제도인 대학과 만나 도시의 종교를 만들었다. 탁발수도회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서 시작한 종교 운동이 엘리트 학문 세계에 정착하여 전혀 다른 성격의 결과물을 생성했다.
교황권의 전성기와 맞물려 등장한 대중 이단 운동이나 탁발수도회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 요구였다. 그 중심을 관통하는 사도적 삶, 사도적 청빈의 실천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교회에 대중이 요구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웅변해준다.
12장. 가톨릭교회, 분열되다 - 아비뇽 유수와 교회 대분열
1. 흑사병과 국민국가 관념 출현
14세기 중엽 유럽 대륙을 강타한 무시무시한 재해인 흑사병은 유럽의 사회및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유럽인들의 세계관과 인간관, 종교관에 근본적 변화가 왔다. 흑사병은 중세의 세계관을 넘어 르네상스와 근대를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
12세기 르네상스로 교역로가 확대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봉건제에 점차 균열이 일어났고 그 균열을 끝낸 것이 흑사병이었다. 봉건제 사회는 노동집약 형태의 농업사회이다. 노동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봉건제를 지탱하던 농노 계층이 해체되고 도시 이주 인구가 늘게 된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면서 사회 갈등은 커졌다.
이 14세기의 변화중 하나가 국민국가라는 관념의 등장이다. 이 민족감정을 강화시킨 사건이 14세기 중반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 전쟁이다.
2. 오래가지 못한 교황 지배의 시대
인노켄티우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유럽이 교황 지배의 시대로 들어왔음을 알렸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13세기 중엽 가장 유명한 가톨릭교도는 프랑스왕 루이 9세이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4세가 사망한 후 신임교황이 선출되지 않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은둔 수도사가 천사 교황이라 불리는 켈레스티누스 5세가 된다. 그에게는 외교력이 부족했고 이후 보니파키우스 8세가 세워진다. 그는 교황권 강화를 위해서 1300년 희년을 선포하고 로마 성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는 방문객에게 완전사면권을 약속한다.
3. <우남 상크탐>과 필리프 4세
루이 9세의 손자였던 필리프 4세와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성직자 과세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이전 인노켄티우스 3세와 잉글랜드 존 왕의 과세문제로의 충돌때는 교황으 승리했다면 이번에는 교황이 국왕에게 머리를 숙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중세 교황 교서, <우남 상크탐>을 반포한다. 이 교서의 첫 두 단어가 '우남 상크탐'으로 이는 '하나의 거룩한’이라는 의미이다. 우남 상크탐 3조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베드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으로 이어진 한 머리를 둔 한 몸이라고 교회를 규정했다. 우남 상크탐은 교황권의 신적 기원을 주장했던 교황 겔라시우스의 양검론을 인용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했다. 우남 상크탐의 마지막 문장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임을 선언하고, 진술하고, 규정하고, 공표’했다. 보니파키우스는 전성기의 향수를 잊지 못한 중세의 마지막 교황이었다.
4.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 70년
보니파키우스 8세 사후 교황청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탈리아 출신 교황 베테딕투스 11세를 선임하지만 8개월만에 사망한다. 그후 프랑스 추기경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한다. 그는 로마 귀족 가문 사이의 세력 다툼에 불안을 느껴 1309년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머무른다. 이를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고 불렀다. 강제로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달리 교황은 프랑스 왕의 압박으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이라는 세속 군주의 영향력하에 교황이 종속된 시기를 보낸것은 사실이다. 이 아비뇽 유수기간동안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대거 선출되었다.
70년의 아비뇽 체류 이후 교황은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귀환한 이듬해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는데 이때 이탈리아인이었던 우르바누스 6세가 선출된다.
5. 로마 교황이냐 아비뇽 교황이냐
우루바누스 6세가 프랑스 추기경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추기경들은 콘클라베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새로 콘클라베를 진행하여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에 대립교황 체제가 장기화되었고 대립교황은 서로를 파문했다. 이로써 두 명의 정당한 교황이 각각 로마와 아비농에서 추기경단과 행정 기구를 갖추어 완벽한 두 교황청이 생겼다. 이 사태는 40년간 지속되었다. 대중에게 이 사건은 제도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다양한 교회 밖 종교성이 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비뇽 교황청 시기를 살며, 말년에 교회 대분열을 목도한 옥스퍼드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에게 대분열은 교황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생기는 필연적 사건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교회 타락의 정점으로 더 나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다.
이 분열때문에 교황은 유럽 정치 지형도에서 주도권을 크게 상실했다. 이 종교 공백을 각 국민국가가 차지하고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6. 파리 대학의 권고
교황청은 더 이상 유럽 가톨릭 전체를 공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으며 이 분열의 문제는 두 교황과 양측 추기경들 손에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파리대학 신학자들이 공의뢰 개최를 주장했다. 공의회는 교황의 요구로 열리게 되는데 이 경우 이것이 불가능했다. 파리 대학 교수들은 공공선 추구가 교회의 최종 가치여야 하며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공공선 추구를 위해 그에 위배된 결정을 취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7. 실패한 피사 공의회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앞서 파리대학 신학자들의 요구가 있은지 30년만의 일이었다. 공의회는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를 교회 분열 책임을 물어 파문하고 교황직에서 축출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밀라노 추기경 피에트로 필라르기를 새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선출했다.
하지만 프랑스, 잉글랜드, 포르투갈, 보헤미아 등 다수의 국가가 통합 교황알렉산드르를 지지했다. 하지만 나폴리, 독일, 폴란드는 그레고리우스를, 에스파냐와 스코틀랜드는 베네딕투스를 끝까지 지지했다. 두 명의 교황을 폐외시키고 한 명의 교황을 선출하려던 공의회는 한 몸에 세 개의 머리가 있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괴물을 낳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피사 공의회가 남긴 유산은 곧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교회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 아닌 교회 공동체가 보유한다는 주장은 곧 국민국가에 종속될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다.
8. 국민국가 출현을 읽지 못한 가톨릭교회
그간 종교개혁은 16세기 가톨릭의 타락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췄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정당성 확보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로 인한 유럽 분열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각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오래된 분열의 마침표일 뿐이다.
국민국가의 출현과 성장으로 하나의 가톨릭교회는 각 국가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국가교회로 분화되었다. 피사 공의회의 소집과 실패는 교황청의 문제에 세속 군주들 사이의 합의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13장. 주도하는 세속 권력 -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주의
1. 세속 권력이 주도한 공의회
피사 공의회는 대립교황들이 물러나기를 거부함으로써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첫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를 포함하여 동방 교회 지역에서 열렸던 초대교회의 공의회는 모두 황제가 소집하였다. 반면 중세의 공의회는 모두 교황이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집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는 교회 분열 해결, 교회 개혁, 이단 문제 해결등 세가지 목표를 가지고 열렸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주도권을 쥔 교황권주의(papalism)였다. 그런데 공의회주의자들은 전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conciliarism)를 주장했다. 대립 교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 소집을 주장한 공의회주의자들은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라고 주장하였다.
2. 헥 상크타 반포
공의회는 1415년 헥 상크트(haec sancta)를 반포한다. 그 핵심은 적법하게 소집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적 권위는 교황 개인이 아니라 각 국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국민단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주어졌다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3. 후스의 화형과 위클리프 탄핵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문제를 다루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사상이 공의회에 안건으로 제가된 것은 위클리프의 영향력을 가늠해준다. 또한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야의 개혁가 얀 후스도 이 공의회에서 화형당한다.
후스와 보헤미아 개혁 운동은 루터가 추구했던 이상을 한 세기 전에 부분적으로 성취했다. 후스의 사상적 근원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이다.
후스는 화체설을 인정했고 교회란 선택받은 자의 모임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교황이나 주교가 선택받은 자인지 불확실하기에 그는 가톨릭 위계구조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후스파 개혁운동의 핵심중 하나는 성례전이 아니라 설교 중심 교회였다. 후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제도교회에 메이지 않은 그는 교회 개혁의 메시지를 대중 설교를 통해 전달하였다. 설교를 통해 대중뿐 아니라 귀족들, 프라하 시민들, 또 보헤미아 왕실까지 후스의 개혁사상을 지지하게 되었다.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고 일깨우는 설교를 통해 객체로 머물던 대중이 능동적 주체로 바뀌었다.
후스는 피사 교황에게 반발하여 종교적 갈등으로 벌이는 전쟁은 정당성이 없으며, 면벌부 발행은 교황권 남용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후스는 면벌부 판매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고, 세속의 검을 휘두를 권위가 교황에게 없다고 주장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후스에게 안전통행권을 보장하여 공의회에 참석하게 한다. 교황은 후스에게 자유롭게 행동할 권한은 주지만 미사는 금지한다. 후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숙소에서 미사를 집전하다가 체포되어 감금당한다. 이후 그는 약 서른 가지 교리에서 이단판정을 받는다.
교회 구성원은 전적으로 예정된 사람의 모임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뿐이고 전투적 교회가 교황이라는 가시적 우두머리를 가질 필요가 없다며 교황제를 부인했다. 또한 동기가 순수하다고 양심에서 증거한다면 교황이 금지하더라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자 법규는 성서라는 성서중심주의도 펼친다. 결국 후스는 파문되고 콘스탄츠 대성당 기둥에 묶여 화형당한다. 교회일치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소집된 이 역사적 공의회에서 개혁자가 죽임을 당했다. 또한 공의회는 사후 30년이 지난 잉글랜드 신학자 존 위클리프를 파문하고 그의 뼈를 파내어 불사르라는 판결을 내린다.
4. 교황권을 넘어선 공의회주의
이 당시 공의회주의는 교황권주의를 앞섰다. 공의회를 구성하는 국민단이 교황권을 통제함으로써 세속 군주들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됨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 정치와 제도. 측면에서 본다면 교황 중심 교회에서 국민국가가 주도하는 교회로 권력이 분산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5. 공의회주의 패배와 분열된 유럽
공의회주의는 그리 오래 우위에 서지 못했다. 교황이 주도권을 회복했다. 교황은 동-서방 교회 통합을 의제로 들고 나왔다.
동-서방 교회 통합 의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서방 교회에만 도입된 연옥 교리였다. 비잔틴 황제 미하일 5세는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속에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여 연옥교리를 수용한다. 하지만 동방교회 성직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은 사라진다. 동서 교회가 합쳐질 기회가 소멸된 것이다.
공의회주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한형태를 예시하고 있다. 공의회는 성직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세계 내의 다양한 계급과 이해관계자들을 대표하여 보편 교회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공의회주의의 실패가 낳은 필연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공의회주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유럽 카톨릭의 실패를 낳았다.
14장. 한 세기 앞선 미완의 종교개혁 -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1.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롤라드 운동은 옥스퍼드 대학 신학자 위클리프(1330~1384)의 영향을 받아 1380년 시작된 교회 개혁운동으로 대학에서 시작하여 대중에게 확산된, 아카데미와 대중이 결합한 유일한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롤라드는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의 네델란드어 ‘롤레어(lollaer)’에서 나왔다고 본다.
2. 세속 지배론
위클리프는 그의 ‘세속 지배론’에서 ‘치명적인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어떠한 것도 소유할 수 없으며, 신의 은총을 덧입은 사람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배권은 은총을 덧입은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고 이는 구원이 예정된 선택된 자들을 말한다고 했다.
위클리프는 중대한 죄를 범한 성직자는 지배권을 상실하므로 세속 권위가 몰수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왕을 신의 대리자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았다.
3. 제도 교회론에 대한 반대
위클리프에 의하면 참된 교회란 믿는 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구원이 예정된 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교황이 인간 영혼 구원의 궁극적 운명을 알 수 없기에 제도 교회를 진정한 교회라고 할 근거가 사라진다. 그는 또한 복음과 그 복음을 설교하는 의무를 강조했다. 사제의 역할은 성사 집전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4. 화체설 부정
위클리프가 궁극적으로 교회와 단절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한 원인은 성찬론이다. 그는 화체설 교리에서 축성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의 상태에 모순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성찬식에서 사제의 축성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징표 혹은 상징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사제의 축성이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시켰지만 이제는 그 효력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5. 위클리프와 롤라드 학자들의 탄핵
1382년 런던의 도미니크회 종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논제들중 10개(성찬관련)를 이단적으로, 14개를 오류(지배권 관련)로 판결했다.
이로 인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서 추방당하여 루터워스로 유배되고 2년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6. 위클리프 이후 롤라드주의 확산과 탄핵
1407년 캔터베리 대주교 애런들은 13개 조로 구성된 규약을 제정하여 잉글랜드의 롤라드파 탄압을 주도한다. 이는 무면허 설교 금지, 잘못된 성찬 교리, 위클리프의 저작 금서 지정, 성서 영어 번역 금지등의 내용이다.
7. 위클리프주의는 왜 확산, 쇠퇴하였나
그의 사상은 민족주의 의식의 형성, 속권과 교권을 둘러싼 중세 말 유럽의 세력 지형 변화, 대학의 특수성으로 인해 확산되었다.
교회의 본질과 성서의 권위와 더불어 지배론 사상은 국가의 교회 지배에 대한 신학적인 논거를 제공하였다.
위클리프가 속한 대학이라는 제도적 측면, 대학인의 사상 자유 추구라는 내재적 측면에서도 위클리프 사상의 발아와 확산, 쇠퇴를 파악할 수 있다. 1254년 인노켄티우스 4세의 특전은 대학이 주교들이나 왕으로부터 그들의 자유와 면책권을 보호받는 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로 인해 교수가 어떤 주장을 하여 탄핵을 당할 경우 주장을 철회하면 대부분 직분을 회복했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시작한 위클리프 사상이 대중에게 전이되면서 기성의 잉글랜드 사회 질서에 적대적 세력이 형성되게 된다. 결국 국가에 위협적인 이단 세력을 배태한 옥스퍼드 대학은 심각한 사상적 제약을 받게 된다. 대학의 사상이 누린 관용이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8. 후기 위클리프주의와 지식인 롤라드 소멸
대학내 위클리프 사상은 교회 개혁 목소리로 출발했지만 농민 반란 같은 형태로 대중에게 수용되어 사회 불안 세력과 동일시되면서 지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학 롤라드주의자들까지 억압받게 되었다. 대학 탄압으로 지식인 롤라드층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지속적 교회 개혁을 주장하고 이끌 동력이 상실되었다.
9. 대중 롤라드 운동과 성화상 반대
1414년 이후 점차로 롤라드파는 위클리프주의에서 급진적으로 나아가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민중 몰라드의 사상 쟁점은 성화상 반대와 반성직주의 흐름, 문해 이단이라는 세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성화상을 통해 문맹자가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장려하였다. 위클리프는 성화상이 사람의 마음을 창조자에게 고정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허용해도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15세기 초반 이후 롤라드파는 성화상에 대해 불관용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십계명을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성상 숭배는 우상숭배와 거의 같은 행위로 정의하였다.
10. 대중 롤라드 운동과 반성직주의
기존의 교회 계서가 성서에 입각한 바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교회의 본질이 타락했으며, 성직자들은 세상의 재물에 목마르며 부당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자들로 비판받았다. 어떤 롤라드들은 몽매한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부를 취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성화상이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호도하고, 두려움을 자극해 순례 헌금을 착취한다고 비판했다.
롤라드의 성서에 대한 믿음은 반성직주의의 이론적 기초이다. 롤라드는 성서에 기초하지 않은 교회의 성사제도보다 설교 의무가 사제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11. 대중 롤라드 운동과 문해 이단
롤라드파가 신학적 자의식을 가지고 성화상을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속어 성서 읽기의 직접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속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성화상 역할은 재규정된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신들의 경건을 위해 글을 읽을 줄 아는 속인들이 확대되고, 이는 전통적 문해 성직자의 독점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여 롤라드를 문해 이단(literate heresy)이라고 부른다.
12. 미완의 개혁
롤라드 운동은 대학내 지성운동과 대학 바깥 대중 운동이 결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클리프 사후에도 교회 개혁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상적 일관성과 일치성을 가진 롤라드주의가 대학내에서 지속되었다. 하지만 지식인 롤라드들과 대중 롤라드파가 모두 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운동은 급격히 위축된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 사후 파문과 얀 휴스의 화형으로 지식인 롤라드는 종말을 맞이한다.
중세 내내 강조되던 성화상 반대도 롤라드파의 성서해석 결과이고 반성직주의 발전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속어 성서 읽기 및 해석에 대한 자의식 형성이 지식인 위클리프파와 후기 민중 롤라드파의 정체성 구분에서 핵심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확고한 신학적 기반, 성서의 재인식, 세속 지배자의 후원, 서유럽 정세의 변화등 양자가 지녔던 상황적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 달리 위클리프 개혁은 조산한 개혁, 미완의 개혁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교회 개혁은 대중의 열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중을 동력화할 사상적 구심점이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이건 국가이건 개혁을 지지하는 후원 세력의 지지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개혁의 꿈과 이상은 오롯하게 현실에 뿌리 내릴 때에만 실행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1. 왜 콘스탄츠 공의회와 위클리프가 종착역인가?
첫째는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 공의회에서 일어난 후스의 화형과 위클리프의 사후 탄핵은 교회사의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교황이 중심이던 종교지형이 균열된 것이다. 대립 교황이 수습되면서 세속 군주들의 세력이 강해졌고 이탈리아 출신 교황들이 세워지면서 르네상스를 후원하였다.
둘째 교회 대분열로 정치적 위상이 커지게 된 대학과 스콜라학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권력화는 학문의 경직화를 가져왔다. 인문주의는 중세 스콜라주의와 대척점에 서서 발전한 학문운동이다. 지식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권력화되면 상아탑 속 엘리트와 대중은 분리된다. 종교개혁을 스콜라학과 인문주의의 분리, 상아탑과 대중의 분리로 읽을 수 있는 이유이다.
셋째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데보티노 모데르나 운동은 중세 내 운동이었지만 종교개혁과 연결시켜 다루어야 중세와 종교개혁의 연속성 이해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세와의 연결 속에서 읽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신화화된다.
2. 중세교회 여정의 끝에 서서
중세교회의 성취와 실패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교는 그 지역의 기층문화와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형성해 낸 토착화의 결과물이다.
교회와 신학은 사회속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종교의 가치는 선언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감하고 수용할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교회는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주의 감성을 꾸준히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경계와 배척보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세 그리스도교를 낯설다고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노력하는 것도 유용한 한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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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 초대교회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체제 밖을 지향한 공동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구현하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특히 목회자나 기독교의 리더들은 성서의 메시지(텍스트)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컨텍스트)과 연결시켜 해석해 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 역사는 기독교의 교리의 형성과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초대교회를 통해 한국 교회를 고민하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결코 그 시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순간도 현실교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 초대교회의 기록들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도전들 앞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교회사를 신학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게 되면 한계가 있고 또한 교회사의 시대구분이 다분히 서구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인식과 의식의 지평 확대
역사 서술에서 객관이란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객관은 사료를 다루고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1장. 교회의 시작점에 대한 논의-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
첫째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신앙고백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오늘 교회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다.
가톨릭 교회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예수 탄생의 날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 그래서 사제가 행하는 성찬이 중요하다. 화체설이란 사제가 성찬식에서 성체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술취한 사제를 가장 두려워했던 포도주 생산 농민들) 이런 논리의 결과로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베푸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가 깨뜨린 것이 바로 이 논리인데 구원이 교회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교회를 중시했고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겼다.
자유주의 - 인간 예수와 교조화된 그리스도
이들의 기본 입장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최소한 예수를 도덕선생, 율법학자 혹은 선지자로 긍정적으로 그렸다. 20세기 초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했다. 현대화된 예수가 아닌 1세기 당시의 실제 예수를 찾아가려는 시도로 우리가 성서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한 인물일 것으로 보았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미지 혹은 종교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회의 출발은 유대교와 그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된 1세기말에서 2세기 초 정도로 본다.
복음주의 - 예수 승천후 이루어진 교회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를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사두개파 혹은 바리새파처럼 유대교 내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알려졌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죄의 해결을 위해서 유대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린다. 예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구약에서 지시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다. 이제 이땅에 교회를 두심으로 천상사역과 연결점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볼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이 함께 함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이를 깨닫지 못하여 다 도망갔었다. 하니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등장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주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시작이다.
2장.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구약의 세계에서 초대교회의 세계로
신약의 역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를 서술할 때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구약 시대와 신-구약 중간사 시대, 그리고 에수 탄생 시점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초대 기독교외의 역사를 공부하는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 중간사 시대는 인도의 석가모니(기원전 624년경)부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플라톤(기원전 429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와 중국의 공자(기원전 551년), 맹자(기원전 372년)등에 이르는 세계사의 성현들이 탄생한 시기이디고 하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기원전 586년)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서 귀환한 유대인들을 통해 성벽과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 중간기의 시기는 열방들 속에서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시기이고 결국 유대 역사가 끝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드로스의 통치를 거쳐서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의 통치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마카비 왕조의 유대 민족 운동이 일어난다. 이후 기원전 63년에는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100여년후 멸망하게 된다.
구약의 주요 활동배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던 우르와 페르시아만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약의 초대교회는 이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지 않고 유럽으로 서진했다. 왜 성령께서는 바울을 구약의 문화권이 아닌 새로운 문화권으로 부르셨을까? 그리고 그 성장을 촉발시킨 배경은 무엇인가?
중간사 시대 - 동서양의 만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동진하여 페르시아와 일전을 치르면서 동방지역의 헬라화를 성취하였다. 이 시기가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을 이룬 첫 시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오면서 헬라화의 압박(헬라문화와 헬라어 사용 강요)이 심해진다. 이에 항거해 마카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같은 중간기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세분화되면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이후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63년경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주류인 헬레니즘과 소수에 불과하던 헤브리이즘이 만나게 되었고 이 과정이 복음의 수용을 가능케한 토양의 준비인 것이다.
헬레니즘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확산 지역이 구약과 예수의 활동범위를 훌쩍 넘어선 전혀 다른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당시 예배때는 전통 히브리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구사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들은 헬라 문화속에서 유대 문화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문화충돌은 불가피했다. 헬라문화는 문화족 인종주의(타자를 전통, 문화, 종교, 언어, 역사적인 기준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였다면 유대인들은 혈통적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화되기 쉬웠던 반면, 헬라인들이 유대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칠십인 역, 기독교 확산의 언어적 토대
성서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통해서 종교적 일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70인역’ 성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칠십인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별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칠십인역은 헬라 문화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헬라의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헬라인들이 이를 통해 유대 신앙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불리웠다.
상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에수와 그 열두 제자들이 구약의 세계를 벗어나 신약의 세계인 헬라 문화권인 지중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기 전부터 흩어진 유대인들과 칠십인역을 통해서 사전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에 유대 사상 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에도 정통한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서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세계의 범주를 넘어선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큰 그림속에서 로마를 바라본 것이다.
로마와 초대교회
로마는 인근을 정복하면 조약을 체결하여 해당 국가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두고 단지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로마의 법과 행정,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로마가 이런 간접 지배를 기본적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이유는 당시 이미 헬라 문화가 전 지역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예배를 드렸다. 중세교회가 라틴 문화권이라면 초대교회는 헬라 문화권이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 메시야 사상에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와 로마 문화의 토양위에서 확산시켜 나갔다. 그 복음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헬라 철학과 로마법의 영향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복음의 완성과 확산을 위해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됨으로 기독교가 퍼져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졌다. 이러한 준비가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의 전파는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3장.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 유대교와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 분화의 흐름
칠십인역으로 인해 기독교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서 동시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종교로서 유대교가 기독교에 우선권 혹은 정통성은 넘겨주게 되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유대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 즉 구원의 역사를 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대민족의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의 배타성이 가려 놓은 신의 존재와 신에 관한 인식에 존재하던 차별의 장막을 거두어 해방시켰다.
종교라는 관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예언자적 전통, 경전의 존재, 창조와 타락, 종말론의 관념등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 그리고 이후에 미쉬나라고 하는 유대의 재판 기록과 그것을 해석한 탈무드 등의 율법 해석서들을 주요 경전으로 신봉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신봉하며,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주의의 형성과 발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관통하여 기원후 70년, 즉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까지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귀환한 이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그들이 정통으로 서게 되었다. 이들을 귀환 이후 제2성전을 재건하고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의 혼합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특하게 정형화된 형태의 종교를 확립해 나갔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화를 강요하였고 독립한 유대는 업격한 유대주의를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깊은 골과 상처가 생겼다. 초기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등의 분파가 있었지만 기원후 70년의 유대전쟁과 그 후의 박해를 거치면서 유대주의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시점을 랍비 유대교의 출현으로 보는데 이들의 특징은 책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전들이 집대성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기보다는 유대교 여러 종파중의 하나였다. 유대교로 발전하는 바리새파와 정체성을 달리하던 나사렛파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행 24장이나 28장을 보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역초기 자신이 가는 도시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다. 이는 초대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이 학식있는 유대인이있기에 무슨말을 하는지 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회당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자 결국 그를 배척하게 된다.
기독교, 유대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인인 헬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앞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 결과가 폐쇄주의와 배타성이었다. 유대교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면서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하였다. 기독교가 단순히 유대교의 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편 종교 혹은 세계 종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궁극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더불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점은 율법의 종교에서 약속의 종교로 나아간 것이다.
베드로는 선택받은 백성이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라고 가르친다. … 고등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중심성의 극복에 있다. 보편 종교가 되는 것은 그 시대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가능하다. 그 시대 속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할 때 성장하고 꽃을 피워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성장한 시기는 유대교의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 유대 인종, 유대혈통주의와 선민주의를 벗어나서 세계 시민주의를 외쳤을 때이다.
교회의 갱신- 자기 중심성의 극복
오늘 날 기독교가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바리새파 운동도 처음에는 헬라문화에서 오염된 유대인의 신앙을 개혁하는 개혁운동이었다. 하지만 바리새파운동이 그 역동성을 상실했을때 이데올로기로 박제화되어 수구적이고 폐쇄적이 된 것이다.
12세기의 스콜라학 - 13세기 대학의 모태가 됨 하지만 이 스콜라학은 16세기 스콜라주의로 이데올로기화 되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대상이 된다.
신앙의 본질, 삶의 본질에 천착하여 나온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다. 이런 신앙의 정화 운동이었던 바리새 운동이 역동성을 상실했을 때 조직으로 바뀌고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종교를 수용하는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가치는 교리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단순히 유대교가 메시야 예수를 부정했기 때문에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다. 보편적 가치, 신의 인간을 향한 본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유대교의 자멸을 낳은 것이었으며, 반면에 인간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기독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초기 기르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 혹은 헬라인과 유대인과 다른 제 3의 인종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정체성은 헬라인의 문명과 야만의 구분, 유대인의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인종의 벽, 계급의 벽, 문화의 벽, 성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경계를 세우고 나누는 이들이 아니라 넘어서는 이들이었다.
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페허 위에서 돌아보는 초대교회의 성장
초대교회는 그 성장기와 박해기가 중첩된다.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상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되었다.
교회, 대안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제시하다.
초대 교회는 당시 로마의 전통종교가 주지 못했던 것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고 둘째로 기독교회가 내세우고 실천한 인권과 평등사상이며 셋째로 로마인의 인식과 비교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내세관이다.
당시 노예나 하인, 여성이나 아이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복음과 예수가 가르쳐준 인간관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로 치면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빌레몬서에서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주인에게 오네시모를 잘 맞아 줄 것을 바울은 권면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고 비난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앞서간 인식이요 행동이었다.(3세기 로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교황으로 선출)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때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여성을 위하고 보호하는 모습에 두번 놀랐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사상 속에서 역사란 동일한 과정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신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졌다. 이들은 역사란 신의 의지가 역사에 실현되며 역사는 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박해의 순간에 하늘나라의 복락을 고대하며 그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로마의 박해 이유와 양상들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기독교회 안에는 순교자들과 변증가들이 출현했다. 순교자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로마의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변증가들은 기독교 신앙의 편에 서서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서 외친 자들이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제로 이를 ‘피에타스’라 불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겼는데 이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풍습을 가졌다고 여겼으며 근친상간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오해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도리어 로마인들의 눈에는 무신론으로 여겨졌다.
박해 앞에서 순교자들의 의연한 죽음은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큰 용기를 주었다.(폴리갑)
박해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과제
박해로 인해 교회가 정화되고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는 배교한 자들을 교회가 다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말로 증거되기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보였다.
“순교자가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5장.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 교회
라틴 교회, 헬라 문명을 넘어서다.
라틴은 본래 이탈리아 남부 라티움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세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가 나왔다.
초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언어는 헬라어였다. 초대 교회의 발전에서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주교구 교회가 로마, 콘트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로마를 제외한 네지역이 동방이다.
북아프리카, 라틴 신학의 중심에 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의 이주 정책으로 아주 밑바닥부터 라틴 문화가 이식된 지역이다.
도나투스파 운동(경제적 분노와 종교적 열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 -라틴 교회의 빛과 그림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율법이 들어오게 된다. 서방 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회가 결정하여 수용한 전통도 궁극적 권위로 동등하게 인정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뿌리를 형성한 인물로 교회의 정의, 역할, 권위에 대해 다룰때에 철저하게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에서 주장을 이끌어냈다. 그는 라틴어로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남겼는데 이후 몬타누스 이단 운동에 빠져서 성인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로마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발전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지배자의 대중의 언어가 동일한 라틴어였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때 빠르게 문화화 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라틴화에는 두가지 작업이 수반되었는데 먼저는 헬라어로 정착된 신학 개념과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직 진화 단계에 있었던 신학을 라틴어를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증거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동방 신학은 헬라 철학의 바탕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서방신학은 로마법에 기대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속화(엄격한 금욕주의 주장)와 마르키온 주의(마니교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세례는 이 땅에서 살면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박해를 견디는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식을 넘어서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결단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고안하여 처음 사용하였다. 관계성의 층면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라틴 신학, 공로주의의 길을 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대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법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가 공로주의로 가는 카톨릭 신학의 길을 열었다.
6장.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 교회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동양에 관한 인식과 규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헬레니즘은 서구 역사의 뿌리가 아니다. 도리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와 같은 아시아권 문화와 융합했다.
이처럼 역사 해석에 있어서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텍스트 지상주의에 매몰되기 쉽다. 모든 신학이나 사상은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컨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무리하게 다른 컨텍스트에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견해를 기초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환원주의이다.
언어의 전환이 만들어 낸 다른 전통들
헬레니즘 철학과 헬라어라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유하던 문화의 틀이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사고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스테리온(mysterious)과 세크라멘툼(sacramentum) : 신비를 나타내는 헬라어와 라틴어. 신비와 비밀. 신비를 풀려고 해도 쉽사리 풀 수 없는 것. 신비스러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 반면, 비밀은 풀어 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등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 세크라멘툼은 군인이 훈련소에 들어가 선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민간인이 선서를 통해 군인으로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의 변화와 정체성을 법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결단이 내포된 법률적 자격이나 정체성의 변화로 받아들였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죄가 용서되며 성령이 임하는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탐구하며 그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교회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인 선포로 본다면,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가 더 깊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본다.
결혼이 완성되는 순간은? 성혼 선포, 예물교환, 혼인신고, 초야를 치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사의 언어에 대한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교회의 역할의 차이를 가져왔다. 서방 교회에서처럼 법률적 관점에서 성사를 규정하면 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서 교회가 정한 의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이 라틴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카톨릭의 체제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즉 교회가 정한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이러한 틀이 깨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성서를 번역하여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성서와 비교 편집함으로써 언어의 변환으로 인해 생긴 오류를 규명하였다.
동방 교회, 신비를 숙고하다.
일반적으로 헤브라이즘과 신본주의, 헬레니즘과 인본주의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데 사실 헤브라이즘은 철학체계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일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 : 이데아(천상)와 그 그림자인 현실세계 / 신플라톤주의(일자 개념)
서방과 동방의 차이 : 삼위일체, 구원에 대한 이해 / 서방은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면 동방은 신비를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성품을 설명할때 동방은 부정의 신학을 통해 신을 설명한다. 신의 성품을 규정하게 되면 신의 속성중 선함이란 무엇인지, 무한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규정해야 한다. 반면 동일한 내용도 부정문으로 표현하면 신의 진정한 성품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모나키(통치 혹은 시작, 원천 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차이(필리오케 논쟁-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라고 바꿀것을 주장) / 성화상에 대한 입장 차이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컨텍스트에서 사용할 때 다르게 이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근대 선교 운동이 일어났을때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를 하자 이미 토착화된 그리스 정교와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기성의 관념을 흔들 만한 낯설고 다른 것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들은 이렇게도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자세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에 댛해서 도그마를 앞세워 단죄하는 자세로는 신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있다. 물론 이런 포용은 자신이 위치해 있는 신학의 기반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 위에 안정되게 서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7장.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교회사 속에서의 이단의 역할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기독교를 정통 교회, 이단, 신비주의의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과거 그 시대에 있다가 사라져서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비고비마다 유사한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오늘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다.
이단이 무엇인가? 신학적 관점에서 주류 교회나 주류 신학이 가진 신학적 프레임에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보편성이 결여될 문제가 있다. 실천적-사회적 관점에서는 건강한 모습을 띠느냐이다. 그래서 교리적 독특성뿐 아니라 해당 집단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 자명할 때 이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단 - 신비와 논리 사이
정통과 이단의 관계 : 본래부터 정통이 존재했고 이단이 반기를 든것인가? 아니면 여러가지 견해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궁극적으로 이긴 것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
정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함축적인, 암묵적인 정통이었다. 이단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그 정통이 더 잘 설명될 필요가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통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교회사속에서 이단의 도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것을 확인하고 보존하고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교리화의 과정이었다.
1985년 예수 세미나(150명의 성서학자들이 참여) : 이들은 사복음서와 도마복음, 5개의 텍스트를 비교하여 이중에 예수의 진정한 말씀은 붉은 구슬, 정확히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것은 핑크 구슬, 예수의 사상 속에 들어 있었을 정도의 말씀을 첨가한 것이라고 보면 회색 구슬, 후대의 완전한 창장물이라고 판단되면 검은 구슬을 넣어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92%의 찬성으로 최고 득표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은 82%의 득표를 얻었다.(p. 185)
교회에 대해 제기되는 도전에 대해 반이성, 초월성, 신비성만을 강조하여 대응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초월과 신비라는 가치가 제거되는 순간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교회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 교회는 교회의 초월과 신비를 설명하는 교리적인 정밀함이 아닌, 교회다움의 본질로서 거룩을 보여줌으로써 대응해 나가야 한다.
마르키온파와 몬타누스파의 역사적 위치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했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는 율법과 은총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몬타누스파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 엄격한 신앙적 고행,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사라진 이유는 정경이 마련되고 교회 직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재세례파중에 폴란드 츠비카우의 예언자 조직은 독일의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뮌스터시를 점령하여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고 재림을 예언했다.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이 반대파를 암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등의 과격한 행동을 일삼자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이 뮌스터시를 전복시키고 재세례파를 흩어 버린다. 이후 메노 시몬스라는 지도자가 재세례파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당시 재세례파가 국가의 박해를 받은 주요 원인은 유아세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가교회는 해당 영토에 태어나는 자는 자연히 영아세례를 받음으로서 국가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교회란 누구나 다 태어나자마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다르게 정의한 것이다.
개혁 -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정통이 모두가 믿어야할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면 이단이나 이설은 내부의 정통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실상 사회와 제도 교회가 흘러가는 관성을 거스르는 급진적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 운동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반응
첫째, 교회는 정경을 정하였다.
둘째, 믿는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셋째, 교회의 직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제도화, 안정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이는 고착화라는 부수적인 문제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8장.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위치
초대교회의 종교개혁을 이어 주는 중세 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기를 암흑기로 볼 것인가 의미 있는 시기로 볼 것인가?
보통 수도원을 제도 교회와 비교하여 파라처치라고 표현한다. 이는 수도원 운동을 제도 교회, 주류 교회에 대한 주변부적인,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기성 교회 제도가 사회적 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종교성을 상실했을 때 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하는 역할을 감당했다.(영성과 운동성)
세속화를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
313년 콘스탄니누스의 기독교 공인,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교회 역사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기독교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예수를 믿을 때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안믿는 것이 차별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초기 수도원운동은 강력한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기번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종교로 도피한 불행한 삶”을 선택한 이들로, 부르크하르트는 “도피주의자들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세속화를 심각하게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로 평가했다.(당시의 세례 요한)
공동수도회 : 대중적인 운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든 개개인을 위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는 온정주의 차원에서 시작됨 / 사람들이 모이게 되며 모임의 규칙이 강화됨
독거수도회 : 종교적 엘리트를 추구
사막 교부들이 은거한 사막이란 지리적으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장소가 아니었다. 사막은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간 상징적인 장소였다.
은둔 수도사들의 정체성 : 첫째 수도사들은 대개 신학자가 아닌 영성가를 추구했다. 둘째 수도원 운동은 속인 중심의 운동이다.
서방의 수도원들
베테딕투스회의 회칙의 핵심은 순종과 겸손으로 그 핵심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시’, ‘자발적으로’, ‘불평하지 않고’이다.
수도회란 사람을 교육하는 곳이란 의미와 함께 교회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발대이자 정예부대 역할을 하는 엘리트, 종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수도회는 선교와 교육(학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학교가 고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한 것이 대학이다.
전반적으로 수도원에는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의 교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공인되고난후 교회가 부요해졌을때 반대 급부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세속을 떠나 복종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후 서유럽 기독교가 1200년경 최고의 번성기에 이르러 타락하기 시작했을때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여 초대교회처럼 사도적인 청빈을 추구하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당시 루터의 역할도 그러하다. 수도원은 재속 성직자의 규모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수도원이 역동적으로 활동했을 때는 작은 방향타가 거대한 항공모함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 되어 속박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쉼을 얻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섬겨줄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떼제, 라브리, 예수원)
개인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속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부딪치는 소외와 고독의 문제, 박탈감의 문제,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등은 개인의 역량과 역할로만 맡겨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치열하게 이러한 구조를 읽으며 대처해 나가지 못했을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요 5장. 베데스다 연못, 불치병자들을 위한 해결책은 일차적으로 물이 동할때 그들을 그 물에 넣어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베데스다 연못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구원도 개인구원으로 환원시키면 된다. 개인의 책임이고 믿음이 없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상을 제대로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필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야 한다.
수도원은 세상과의 분리, 현실 세계에 대한 무관심, 현실과의 유리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수도원은 한 시대에 바로 명상과 사색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기성교회에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9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하다.
초대교회는 국가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회의 세력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갈등이 불거졌다.
로마가 정복하여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신들을 인정해주면서 그것을 로마화시켜 로마 신화에 포함시켜나가면서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민족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사람의 전체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확장해 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로마에 위협으로 여겨졌고 믿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거나 성서를 압수하고 교회 지자들을 체포하거나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기독교 공인, 교회의 힘에 대한 로마의 인정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며 피정복지의 통치를 그 지역의 본래 지배층의 자율에 맡기고 세금만 걷어가는 방식이었다.
260년경 팔미라 왕국의 분봉왕이었던 제노비아 여왕은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 안디옥 감독으로 사모사타의 바울을 지명하였다. 교회의 감독이 지역의 총독을 맡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은 복잡한 로마의 정치적 지형속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주의 교회의 출발
기독교 공인은 교회에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지만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이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가 제국을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음을 보고 제국안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325년 티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계시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독교의 능력을 체험했고,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했지만 이후의 행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황제로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이교 축전에 참석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국가의 핍박에서 벗어났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이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이후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분열은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닌 교회론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재세례파는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재세례파의 사상은 위정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란 세상과 타협해서 특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라고 보았다.
프랑스에서 피의 혁명이 일어난것과 달리 영국에서 혁명이 없었던 이유는 웨슬리와 메소디스트의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타락하게 된다. (박정희 유신 개헌, 신국부 독재 시절의 교회)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10장.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 니케아 공의회
공의회, 제국 신학의 출발점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후 서방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도나투스파에 의해서, 동방교회는 아리우스파 이단의 출현으로 분열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아리우스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등장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소집은 교회가 아니라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이를 기록한 유세비우는 니케아 공의회를 대단히 큰 기독교의 승리, 박해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고 보았다.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 신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 황제가 제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역사가 학문적인 엄정함을 우구하기보다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배자에게 유리하도록 지배자의 관점과 입장에 함께 하고 뒷받침하도록 쓰여져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로 남아 있는 기록의 효용성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리우스파, 그 길고 긴 논쟁
아리우스는 예수를 이성본질, 즉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인가, 유사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로 나뉘었다. 이오타(i) 하나를 두고 벌어진 어리석은 논쟁 하나가 교회를 찢어 놓았다라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하였다. 유사본질을 강조할 경우 에수의 신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결정을 공의회에서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교회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했으며, 관여한 황제의 결정이 신앙에 기초한 확신이나 엄밀한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기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유세비우스는 이 결정이 정치적인 결정임을 간파하고 황제를 설득하여 아리우스를 복권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되면서 로마(라틴어권), 안디옥(헬라어권), 알렉산드리아(북아프리카), 콘스탄니노플과 예루살렘의 5대 교구체제가 이루어졌다. 동방의 4도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이 경쟁하다가 이슬람의 위협속에 약화되고만다. 8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란ㄴ 위조문서가 로마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니케아 공의회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아들중 둘은 니케아 공의회 결정은 지지하고 하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셋의 충돌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세력을 확보하며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힘을 얻게 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는 동안,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갈릴리인들이라고 비하하는 등의 차별을 가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속에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여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헬라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이교도의 도전에 대응하는 변증신학을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게 많은 핍박과 추방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성이 피폐해지지 않고 도 깊은 영성을 쌓았다.
동방 신학의 황금기
아타아시우스는 망명생활을 통해서 동방과 서방을 두루 경험하며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이어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방 교회 모두에 큰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엄정한 논리로서가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처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난을 통해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을 통해 아리우스파를 제압했고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드러난 세속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본질을 지키려는 수도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리우스파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이겨냈다.
서방신학은 스콜라학의 영향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를 학문의 형식을 따라 이론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라면 동방신학은 ‘신학은 삶’이라는 핵심명제를 따랐다.
루터는 신학자를 만드는 세가지 조건을 첫째는 기도, 둘째는 말씀과 묵상, 셋째는 시험 혹은 고난이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교회에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난속에서 투사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
11장.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역사적인 관점에서 주요 신학이 규정되는 역사는 뒤집어 표현하면 교회의 분화, 분열의 역사이다.
나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계기는 ‘얘수와 하나님이 동등하지 않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세가지 사상을 단죄했다.
첫째로 아몰리나리우스주의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개의 완벽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성서의 어려운 부분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유대교 전통, 즉 유대교의 문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를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을 결합으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리우스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서로 분리함으로 통일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반박이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입지가 강화된 데 따른 불안감으로 인해 제기된 정치적인 성격의 주장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안의 논쟁을 세속 군주에게 들고 나아가 결정을 부탁한,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이단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배척당한 이들로 동방선교에 기여했다.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
칼케돈 공의회는 500여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역대 규모의 공의회로 황제가 소집했다.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분이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타나난다."
이 칼케돈 회의는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하는 부정의 신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공의회가 남긴 유산
교회 공의회의 긍정적인 기여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으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특정하게 정의하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집단들이 떨어져나가게 되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분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2장.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초대교회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시기의 중요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 인식 혹은 역사철학을 정립하여 신의 도성이라는 관념을 제기했기에 주목받는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어 당시 지중해와 소아시아 세계의 주류가되었다. 하지만 소위 정통신학은 당시 세상이 맞닥뜨린 로마의 멸망이란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돌이 양편에서 제기하는 의문앞에서 어떠한 해답도, 영향력도 주지 못했다.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것이 교회의 나아갈 길인지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이 부족했다. 프랑스 혁명, 유럽의 1차 세계대전, 나치의 독일 교회의 예속에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이 지적 여정
아우그스티누스이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이교도였다. 그는 타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이때를 아주 방탕하게 지냈던 때라고 참회록에서 회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했고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다.
그는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 즉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과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결정적으로 ‘톨레레게 톨레레게’(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회심하였다. 이후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 이 삼부작은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공인이후 기독교가 맞닥뜨린 내적인 병폐들과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교회 외적인 문제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이 잘못 적용되어서 모든 문제를 넘어가고 덮어주는 신학적인 문제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낳았다고 보아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았다.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하여 주주 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들을 강조하였다. 반(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간의 원죄와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수용했다.
이러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재현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자신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썼다. 루터는 이를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종교개혁을 루터의 관점이 아니라 에라스무스나 재세례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의식
로마의 멸망은 ‘어떻게 신의 택함을 받은 로마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낳았다. 그는 ‘신국론’을 통해서 제국을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제국 너머의 신국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헬라의 역사관은 순환사관이었다면 히브리의 역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조로부터 완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이 이끌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중요성은 바로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과정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신의 뜻과 목적을 헤아릴 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반대로 천국을 향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추구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이 땅의 부정과 불의, 제도적 구조적 모순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삶을 추구하게 했다.
이후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신의 의지에서 인간 이성(헤겔)으로 대체되었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신의 뜻에 맡겨 버리는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자 적극적인 해석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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