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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Some time after this, the ecupbearer of the king of Egypt and his baker committed an offense against their lord the king of Egypt. And Pharaoh was angry with his two officers, the chief cupbearer and the chief baker, fand he put them in custody in the house of the captain of the guard, in the prison where Joseph was confined. The captain of the guard appointed Joseph to be with them, and he attended them. They continued for some time in custody.

And one night they both dreamed—the cupbearer and the baker of the king of Egypt, who were confined in the prison—each his own dream, and each dream with its own interpretation. When Joseph came to them in the morning, he saw that they were troubled. So he asked Pharaoh’s officers who were with him in custody in his master’s house, g“Why are your faces downcast today?” They said to him, h“We have had dreams, and there is no one to interpret them.” And Joseph said to them, i“Do not interpretations belong to God? Please tell them to me.”

So the chief cupbearer told his dream to Joseph and said to him, “In my dream there was a vine before me, 10 and on the vine there were three branches. As soon as it budded, its blossoms shot forth, and the clusters ripened into grapes. 11 Pharaoh’s cup was in my hand, and I took the grapes and pressed them into Pharaoh’s cup and placed the cup in Pharaoh’s hand.” 12 Then Joseph said to him, j“This is its interpretation: kthe three branches are three days. 13 In three days Pharaoh will llift up your head and restore you to your office, and you shall place Pharaoh’s cup in his hand as formerly, when you were his cupbearer. 14 Only remember me, when it is well with you, and please do me the kindness to mention me to Pharaoh, and so get me out of this house. 15 For mI was indeed stolen out of the land of the Hebrews, and nhere also I have done nothing that they should put me into the pit.”

16 When the chief baker saw that the interpretation was favorable, he said to Joseph, “I also had a dream: there were three cake baskets on my head, 17 and in the uppermost basket there were all sorts of baked food for Pharaoh, but the birds were eating it out of the basket on my head.” 18 And Joseph answered and said, o“This is its interpretation: the three baskets are three days. 19 pIn three days Pharaoh will lift up your head—from you!—and qhang you on a tree. And the birds will eat the flesh from you.”

20 On the third day, which was Pharaoh’s rbirthday, he made a feast for all his servants and slifted up the head of the chief cupbearer and the head of the chief baker among his servants. 21 tHe restored the chief cupbearer to his position, and uhe placed the cup in Pharaoh’s hand. 22 But he vhanged the chief baker, as Joseph had interpreted to them. 23 Yet the chief cupbearer did not remember Joseph, but forgot him.

Joseph Interpr

e Neh. 1:11

f [ch. 39:20]

g [Neh. 2:2]

h ch. 41:15

i ch. 41:16; Dan. 2:28, 47

j ver. 18; ch. 41:12; [Dan. 2:36]

k [ch. 41:26, 27]

l 2 Kgs. 25:27; Jer. 52:31; [ver. 19, 20, 22; Ps. 3:3]

m ch. 37:28

n ch. 39:20

o See ver. 12

p ver. 13

q ver. 22

r Matt. 14:6; Mark 6:21

s ver. 13, 19

t ver. 13

u Neh. 2:1

v ver. 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40:1–23

 

40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40:1–23.

 

 

요셉이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1:1의 꿈의 해몽이 2년 후이고, 이 꿈을 통해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30세이기에 지금 옥에서의 꿈 해몽은 그의 나이 28살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17살에 애굽으로 팔려온 이후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1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노예로서의 시간, 감옥에서 죄수로서의 시간은 그를 여러가지 면에서 단련시키고 성장시켰다. 

 

1-4절) 그 후에(요셉이 감옥에 갇힌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왕에게 범죄하여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곳은 요셉이 갇힌 곳이었다.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였다. 

 

본문에서 애굽 왕에게 범죄하니라라는 표현은 39:9에서 요셉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는 히브리어 ‘하타’로 죄를 짓다, 밤죄하다, 부족해지다, 도달하지 못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을 거부한 요셉과는 대조적으로 이 두 관원장들은 바로에게 죄를 지었다. 당시 애굽 왕은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당시 애굽왕의 안전을 맡은 이 두 관원장은 왕의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지닌, 왕이 총애하는 관원이었다. 느헤미야가 술관원으로(느 1:11) 왕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것처럼 이들도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관원이었는데 왕의 눈밖에 나게 되어서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2절의 관원장이라는 표현은 ‘사리스’, 관원장은 ‘사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보디발에게도 ‘사리스’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37:36, 39:1) 

친위대장이라는 표현도 ‘사르’이다. 3절에 등장하는 친위대장은 보디발이다. 하지만 4절의 친위대장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4절에서 요셉의 역할은 앞서 보디발의 집에서의 역할과 비슷하다는 것(39:4)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9:4 (NKRV)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 40:1 committed an offense against. In 39:9 the same Hebrew verb is translated “sin against.” In contrast to Joseph, who refused to sin against God, the cupbearer and baker have sinned against their lord, who as king of Egypt enjoyed divine status. The repetition of the rarely used expression “king of Egypt” emphasizes the seriousness of their offense. The primary duties of the cupbearer and baker, as their titles suggest, were to provide the king with drink and food, respectively; as royal attendants they had unique access to him, and they were trusted to keep him from being poison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20.

 

본문 3절은 두 관원장이 갇힌 곳이 요셉이 갇힌 곳이라고 언급한다. 요셉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요셉이 갇힌 곳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이다. 물론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본장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꿈 해몽을 통해서 바로왕 앞에 설 수 있는 계기, 기회를 만들고 계신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여러가지 사건, 사고는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5-8절) 옥에 갇힌 두 관원장이 하룻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달랐다. 아침에 요셉이 보니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었다.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왜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자신들이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몽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내게 그 꿈을 이야기해 달라고 말한다. 

 

요셉의 별명이 꿈의 사람이다.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었다. 당대 꿈은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여겨졌고 요셉 또한 여러 꿈을 통해서 자신의 앞날을 예견했다. 둘은 같은 날 서로 다른 꿈을 꾸었고 이로 인해서 근심하였다. 아마도 이들이 왕궁에 있었다면 꿈을 해석할 자들에게 이를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옥안에서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수종드는 이들의 얼굴의 근심 빛을 읽고 그들에게 물었다.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한다. 이후에 요셉을 이 꿈의 해석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된다. 

 

9-15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꿈을 말했다. 

자신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세개의 가지가 있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자신의 손에 바로의 잔이 있으므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바로에게 그 잔을 드렸다라고 했다. 이에 요셉은 세 가지는 사흘로 사흘 안에 당신의 머리를 들고 전직이 회복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요셉은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여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집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며 자신은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로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14절에 요셉은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자카르’라는 단어로 기억하다라는 의미이다. 

14  The propitious time to request a favor from someone is at the moment one has brought to that person an encouraging announcement. The cupbearer must be elated (although the text says nothing of his reaction to the interpretation)—if he can believe Joseph—that his imprisonment will be brief, and that he will shortly be reassigned by the pharaoh to his old position.

Joseph does not command. He requests. And his request is tempered with modesty: So if you still recall my being [zeḵartanî] with you. The cupbearer will see the pharaoh in three days. Is it possible that in three days he might forget all about Joseph? Joseph’s request is that the cupbearer be kind enough (ḥeseḏ)20 to mention (hizkartanî) him to the pharaoh. Just as the cupbearer is unable to interpret his own dream, Joseph is unable to make his own defense before the pharaoh. Each needs the help of the other. “These pleas draw us closer to the man.”21

20 Cf. K. D. Sakenfeld, The Meaning of Ḥesed in the Hebrew Bible, HSM 17 (Missoula, MT: Scholars, 1978), pp. 46–48; F. I. Andersen, “Yahweh, the Kind and Sensitive God,” in God Who Is Rich in Mercy, Fest. D. Knox, ed. P. T. O’Brien and D. G. Peterson (Grand Rapids: Baker, 1987), pp. 56–57.

21 W. L. Humphreys, Joseph and His Family (Columbia, SC: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1988), p. 88.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80.

 

15절에서 요셉은 옥에 갇힐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이는 앞서 자신이 보디발의 아내를 겁탈할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본문의 옥이라는 표현은 ‘보르’로 구덩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린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37:20, 22, 24, 28, 29) 

15  To underscore further his innocence, Joseph appeals to data about which the cupbearer would be ignorant. In v. 14 his appeal is to present action; in v. 15 his appeal is to past action. He claims that he was kidnapped from the land of the Hebrews.22 This is the means by which Joseph identifies himself to the cupbearer as an outsider. He might have done so earlier, had he said to the official: “Do not to Yahweh belong interpretations?” (v. 8b). Until now Joseph has kept a low profile. He makes clear his roots by identifying his birthplace rather than by identifying his God. It is not clear how much meaning this geographical phrase would have to an Egyptian courtier, but it is sufficient to mark Joseph as an alien. Certainly this point produces a greater sense of wonderment and obligation on the cupbearer. He has been helped out of a difficult situation by a foreigner—who owes him nothing, who worships some God different from his, and who has a knowledge of mysteries far surpassing his own.

Joseph’s next statement is a disclaimer that he has done anything to merit confinement. To reinforce the ugliness of the unwarranted treatment he is receiving, he shifts from calling his place of confinement “this house” (habbayiṯ hazzeh, v. 14) to calling it the dungeon (lit., “the pit,” habbôr)—the word used to describe the well into which his brothers first placed him (37:20, 22, 24, 28, 29).

22 See D. B. Redford, “The ‘Land of the Hebrews’ in Gen. XL 15,” VT 15 (1965) 529–32, who comments on the expression as a means of designating Palestine to an Egyptian, as opposed to an expression like “land of Canaan.” Redford observes that “Hebrew” appears for the first time in very late Egyptian texts.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80–481.

 

만약 떡 굽는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먼저 말함으로 이것이 나쁜 내용인것을 알게 되었다면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이 죄가 없기 때문에 떳떳하게 먼저 자신있게 말을 했을 것이도 반대로 떡 굽는 관원장은 자신의 죄가 중함을 알기에 꿈을 말하는데 주저했을 수도 있다. 

 

16-19절) 떡 굽는 관원장이 이 해몽을 듣고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자신의 꿈도 해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자신의 꿈에 흰 떡 세 광주리가 머리위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해 만든 각종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이에 요셉은 세 광주리는 사흘로 사흘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고 새들이 당신을 뜯어 먹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3절과 19절에서는 반복해서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13절에서는 전직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19절에서는 사형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드러났다. 

 

동일한 3일이 이 두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무게,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에 대한 기대감으로 빨리 3일이 지나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떡 굽는 관원장은 공포속에서 요셉의 해몽이 틀렸기를 바라면서 보냈을 것이다. 

 

20-23절)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었다.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그 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바로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었다. 이에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여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려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꿈은 요셉의 해몽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다. 

 

바로의 생일이 진짜 그의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왕위에 오른 날을 기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요즘처럼 왕의 대관식에 대규모 사면이 이루어진 것이다. 큰 잔치를 베풀고 두 관원장을 불러 그들의 머리를 들게 하였다. 

 

3일 후 요셉의 해몽은 현실로 드러났다.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다는 것이다. 이는 관원장이 요셉에게 은혜를 입고도 이를 쉽게 잊었기에 그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가 되자 그가 요셉을 기억했다. 

23  Apparently, in being restored to his position, the cupbearer forgets the favor Joseph had requested of him. Indeed, the narrator emphasizes the cupbearer’s ignoring of Joseph by using two verbs that essentially say the same thing—ignored and forgot—either one of which would have sufficed to underscore the cupbearer’s neglect.

For sharing his sense of divine destiny Joseph finds himself sold by his brothers to some caravaneers going to Egypt (ch. 37). For refusing to compromise his moral standards and sense of duty to his superiors, he is falsely accused and cast into prison (ch. 38). In spite of the fact that he helps a fellow prisoner, that prisoner refuses or forgets to reciprocate when he has the chance to help Joseph. Here is a chain of three aggravating setbacks for Joseph.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83.

 

The reverberation of the neglect of Joseph, “[he] did not remember” (zākar) and “he forgot him,” sounds the certainty of his continued incarceration. For the cupbearer’s neglect, the modern aphorism “Out of sight, out of concern!” aptly fits. The term “remember” echoes Joseph’s impassioned request of the official, “remember me” and “mention me” (v. 14, both from zākar). The role of the word “remember” in Genesis, signaling God’s faithfulness (8:1; 9:15, 16; 19:29; 30:22; cf. 42:9), raises the question as to God’s “remembrance” of Joseph. Hebrew narrative often leaves it to the reader to look beyond the human script for the divine hand that pens the events (e.g., Ruth 2:3; Esth 6:1–2; cf. 1 Sam 6:9). The issue of God’s immanence finds its resolve in the cupbearer’s admission of neglect and sudden remembrance (“reminded” [mazkîr], 41:9). An ancient midrash said it well, “Said the Holy One, blessed be he, to him [cupbearer], ‘You may have forgotten him [Joseph], but I have not forgotten him.’ ”

 K. A. Mathews, Genesis 11:27–50:26, vol. 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5), 752.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이다.(8:1; 19:29; 30:22)

창세기 8:1 (NKRV)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창세기 19:29 (NKRV)

29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30:22 (NKRV)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우리는 앞서 14절에서 요셉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면 자신을 억울함에서 풀어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복직되고 그에게 소식이 언제 올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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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Now Joseph had been brought down to Egypt, and lPotiphar, an officer of Pharaoh, the captain of the guard, an Egyptian, mhad bought him from the nIshmaelites who had brought him down there. o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became a successful man, and he was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him and that the Lord pcaused all that he did to succeed in his hands. So Joseph qfound favor in his sight and attended him, and he made him overseer of his house rand put him in charge of all that he had. From the time that he made him overseer in his house and over all that he had, the Lord blessed the Egyptian’s house sfor Joseph’s sake; the blessing of the Lord was on all that he had, in house and field. So he left all that he had in Joseph’s charge, and because of him he had no concern about anything but the food he ate.

Now Joseph was thandsome in form and appearance. And after a time his master’s wife cast her eyes on Joseph and said, “Lie with me.” But he refused and said to his master’s wife, “Behold, because of me my master has no concern about anything in the house, and uhe has put everything that he has in my charge. He is not greater in this house than I am, nor has he kept back anything from me except you, because you are his wife. How then can I do this great wickedness and vsin against God?” 10 And as she spoke to Joseph day after day, he wwould not listen to her, to lie beside her or to be with her.

11 But one day, when he went into the house to do his work and none of the men of the house was there in the house, 12 xshe caught him by his garment, saying, “Lie with me.” But he left his garment in her hand and fled and got out of the house. 13 And as soon as she saw that he had left his garment in her hand and had fled out of the house, 14 she called to the men of her household and said to them, “See, he has brought among us a Hebrew to laugh at us. He came in to me to lie with me, and I cried out with a loud voice. 15 And as soon as he heard that I lifted up my voice and cried out, he left his garment beside me and fled and got out of the house.” 16 Then she laid up his garment by her until his master came home, 17 and she told him the same story, saying, “The Hebrew servant, whom you have brought among us, came in to me to laugh at me. 18 But as soon as I lifted up my voice and cried, he left his garment beside me and fled out of the house.”

19 As soon as his master heard the words that his wife spoke to him, “This is the way your servant treated me,” his anger was kindled. 20 And Joseph’s master took him and yput him into the zprison, the place where the king’s prisoners were confined, and he was there in prison. 21 But athe Lord was with Joseph and showed him steadfast love band gave him favor in the sight of the keeper of the prison. 22 And the keeper of the prison cput Joseph in charge of all the prisoners who were in the prison. Whatever was done there, he was the one who did it. 23 The keeper of the prison paid no attention to anything that was in Joseph’s charge, because dthe Lord was with him. And whatever he did, the Lord made it succeed.

l ch. 37:36

m ch. 37:28

n ch. 37:25

o ver. 21; Acts 7:9; [ch. 21:22; 26:24, 28; 28:15; 1 Sam. 16:18; 18:14, 28]

p 2 Chr. 26:5; Ps. 1:3

q ver. 21; ch. 19:19; 33:10

r ver. 8

s [ch. 30:27]

t [ch. 29:17; 1 Sam. 16:12]

u ver. 4

v 2 Sam. 12:13; Ps. 51:4

w [Prov. 1:10]

x [Prov. 7:13, 18]

y Ps. 105:18

z ch. 40:3, 5; [ch. 40:15; 41:14]

a ver. 2; Acts 7:9, 10

b Ex. 3:21; 11:3; 12:36

c ch. 40:4

d ver. 2, 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9:1–23.

 

39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9:1–23.

 

 

39장 1절의 이야기는 37:36절과 연결되는 이야기로 다시금 요셉을 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호출하고 있다. 형들의 손에 죽을뻔한 상황에서 요셉은 이스라멜 상인들의 손에 팔려서 바로의 신하인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된다. 

보디발이란 이름은 이집트어로 ‘레(태양신)가 주신 자’라는 의미로 추정되며 요셉의 장인 이름 ‘보디베라’(41:45)와 비슷하다. 

 

2-6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 그의 주인 보디발도 볼 수 있었다 이에 보디발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서 자기의 소유를 요셉의 손에 위탁하였다. 이에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메 그의 집과 밭에 여호와의 복이 임하였다.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 팔려가서 열심히 일했다. 주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39장 본문 전체를 통해서 ‘여호와’라는 표현이 7번 등장하는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는 문장에서만 4번 사용된다.(2, 3, 21, 23절)

요셉이 형통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직접 언약을 베푸시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오직 꿈을 통해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셉을 애굽으로 이끄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그를 형통케 하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그렇게 형통케 된다라는 사실을 애굽 사람, 보디발도 분명히 알았고 이에 그에게 자신의 집의 모든 것을 맡긴 것이다. 옛적에 라반이 야곱으로 인해 많은 축복을 받았던 것이 연상된다. 보디발은 자신의 집안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4, 6, 8절) 본문은 보디발이 자기가 먿는 음식 외에는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기가 먹는 음식은 문자적으로 먹을거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사적인 것, 예를 들어 보디발의 아내를 비롯해 그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6절 하반절은 요셉의 용모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요셉의 어머니 라헬을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29:17) 

창세기 29:17 (NKRV)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이 짧은 요셉의 용모에 대한 묘사는 이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왜 그를 유혹하였는지를 말해준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요셉,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질투가 심했고 결국 노예로 팔렸다. 이제 집주인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 안주인의 총애도 받게 된다. 이로 인해서 그는 또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 

 

2  Three uses of waye punctuate this verse: Yahweh was, he (Joseph) was, he (Joseph) was.20 The first of these three occurrences sounds a key theme that explains, or encapsulates the theology of, the Joseph story: Yahweh was with him. The phrase recalls the promise of Yahweh’s presence with the patriarchs (26:3; 28:15; 31:3, all with the preposition ʿim, and 26:24, with the preposition ʾeṯ). V. 2a, however, is not a promise, but a fact (and comparable to third-person statements such as are found in 21:22; 26:28). Outside vv. 21 and 23 (and excluding Jacob’s word in 49:18), this is the only time the name “Yahweh” occurs in the Joseph narrative. Of the seven uses of the tetragrammaton in ch. 39 (vv. 2, 3 [twice], 5 [twice], 21, 23), four of them occur in the phrase “Yahweh was with Joseph” (vv. 2, 3, 21, 23). The presence of Yahweh uniquely in ch. 39 is not to be explained by appeal to the presence of variant literary traditions.21 Rather, the name Yahweh occurs here at what is the most uncertain moment in the life of Joseph. His future hangs in the balance. He is alone in Egypt, separated from family, vulnerable, with a cloud over his future. Or is he alone? Only the narrator, never any of the characters, uses the name Yahweh. Thus, it is the narrator who tells us, no less than five times, that in a very precarious situation, Joseph is not really alone. Yahweh is with him.22

There is no doubt about Yahweh’s presence with Joseph from this point on in the narrative. Was that presence with Joseph when his brothers were disputing how to dispose of him? Was that presence with Joseph when he was mired in the pit? Was that presence with him when he joined the Ishmaelites as an involuntary passenger to Egypt? We, the readers, know it was, although the phrase is not there. Joseph probably needed a while longer to realize that God was with him.

20 waye appears more times in this chapter than in the rest of the entire Joseph story—15 times: vv. 2 (3 times), 5 (2 times), 6, 7, 10, 11, 13, 15, 18, 19, 20, 21. Longacre (Joseph, p. 32) calls attention to “the elaborate paragraph setting in v. 2 where three clauses build on the verb hāyâ, ‘to be’ (a descriptive rather than an event verb).”

21 ”The alleged reasons for the curious employment of divine names in the Joseph story advanced by apologists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are weak in the extreme” (Redford,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p. 130 n. 2).

22 See Longacre, Joseph, p. 45. Westermann (Genesis, 3:62) refers to 39:2–6, 21–23 as “the theological introit to the Joseph story as a whole.”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59.

 

5  Yahweh prospers (ṣālaḥ) Joseph (vv. 2–3), but he blesses (bāraḵ) Potiphar and his household because of his good treatment of Joseph. This verse must be read as fulfillment of 12:3a,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Just as Yahweh blessed Laban because of Jacob (30:27, 30), he now blesses Potiphar because of Joseph.27 Perhaps it is more accurate to say he blessed Laban and Potiphar through the presence of Jacob and Joseph, respectively.

27 See H. W. Wolff, in W. Brueggemann and Wolff, The Vitality of Old Testament Traditions, tr. W. A. Benware, et al., 2nd ed. (Atlanta: John Knox, 1982), pp. 59–6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0–461.

 

7-10절) 그 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동침하기를 청했으나 요셉이 거절하였다. 이는 보디발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모두 자신에게 맡겼고, 주인 외에는 자신보다 큰 이가 없으며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지만 금한 것은 당신(보디발의 아내) 뿐이니 이는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것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하나님앞에 죄를 짓는 일임을 알았다. 이에 여인이 날마나 요셉을 유혹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도 않았고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단 두마디만 한다. ‘나와 동침하자’(Lie with me), 하지만 요셉은 이 직접적인 요구에 대해 거절의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길게 설명한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성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는 르우벤(35:22)과 유다의 행위(38:15-18)과 명백하게 대조를 이룬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었고,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요셉은 분명하게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자신의 주인, 보디발과 하나님께 동시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매우 올바른 판단이었다. 

이 시대는 도리어 반대로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탐하거나, 위계를 이용해 성적인 착취를 하는 것이 마치 힘이고 성공인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에 이러한 유혹 가운데서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요셉은 여인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본문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여인은 매우 끈질기게 요셉에게 접근하여 사람들이 없을 때마다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함께 하기를 청했다. 이에 요셉은 가능한대로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죄는 싹부터 자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며, 먼발치에서라도 죄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도망치는 것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처럼 죄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다. 

 

10  The first few words of v. 10 indicate that Potiphar’s wife spoke to Joseph day after day,16 even though, as already mentioned, her words to him in the narrative are limited to just two in Hebrew (“lie with-me”), repeated twice (vv. 7, 12). By contrast, Joseph’s protestations are elaborate (vv. 8, 9). His lengthy statement of refusal to cooperate is sandwiched between her twice-repeated command. But this command is clearly only a tiny part of her larger, lengthier conversation with Joseph.

The narrator uses to lie beside her in place of Potiphar’s wife’s “Lie with me.” Joseph will give a wide berth to temptation. Not only will he not sleep with her, he will not even lie by her side, if possible.17 As noted above, or with her should not be deleted as an editorial gloss. It confirms just how far Joseph is prepared to go to avoid being caught in a morally compromising position. For if Joseph “could not be stormed [v. 7] he might be coaxed.”18

16 Note that the Testament of Joseph (part of the 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 originally a Jewish composition as early as the 1st or 2nd century b.c.) makes much of Joseph’s repeated refusal, in spite of continued badgering from the woman that included everything from threatened suicide to exposure of her body (T. Joseph 2:1–9:5; translation by H. C. Kee in J. H. Charlesworth, ed.,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2 vols. [Garden City, NY: Doubleday, 1983–85], 1:819–20). Jub. 39:5–8 has Joseph claiming that Potiphar’s wife “begged him for one year.”

17 The LXX always renders šāḵaḇ ʾēṯ/ʿim with koimán meta, but here in v. 10 it renders šāḵaḇ ʿēṣel with katheúdein (met’ autḗs), a verb that never has sexual connotations. Cf. H. M. Orlinsky, “The Hebrew Root škb,” JBL 63 (1944) 34–36.

18 Kidner, Genesis, p. 190. Orlinsky (JBL 63 [1944] 34 n. 19) provides textual reasons for rejecting the phrase as a post-LXX gloss.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4.

 

11-18절) 그러할 때에 요셉이 업무를 보러 집에 들어갔었는데 그 집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에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끌며 동침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자 보디발의 아내가 집 사람을 불러서 주인이 데려온 히브리 사람이 우리를 희롱하였다. 요셉이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 들어왔으나 내가 소리지르자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이후에 자신의 남편 보디발이 돌아오자 요셉의 옷을 보여주면서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도 들어왔는데 자신이 소리를 지르자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음녀의 유혹은 벗어날 수 없는 덫과 같다. 여인은 지금 요셉의 옷을 붙잡고 그를 잠자리로 끌어들이고 있다. 성경에서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거나 겁탈하는 경우들은 많이 있지만 이처럼 여자가 힘으로 남자를 겁탈하려고 한 경우는 유일하다. 빠져나가기 힘든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자기의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쳐 나온다. 앞서 37장에서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겨서 그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증거로 야곱에게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요셉의 옷은 그의 유죄의 증거로 사용된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을 뿌리치고 도망간 요셉에 대해서 수치심과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그를 유혹하던 마음이 이제 그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서 그의 인생을 망치려는 술수를 쓰게 된다. 여인은 요셉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한다. 

그녀는 보디발에게 세가지 사항을 통해 요셉을 올무에 빠드리고 있다. 첫번째 요셉을 자기 집에 들인 사람이 보디발임을 이야기함으로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고 있다.(14, 17) 두번째 요셉이 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인종적인 적대감을 강화시킨다.(14, 17) 세번째 요셉의 행위가 단순히 자신을 욕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보디발의 집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17) 더 나아가 남편에게 책임과 부담을 주기 위해서 19절에서는 ‘당신의 종’이라고 말한다.  

옛적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후 하나님께 말한 것과 비슷하다.

창세기 3:12 (NKRV)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12절. 옷에 대한 표현 Appearing about two hundred times, beḡeḏ is the most widely used term for a garment in the OT.21 It appears that it could refer both to an outer garment (2 K. 7:15) and an inner garment (Ezek. 26:16). According to the end of v. 12 Joseph left all of his beḡeḏ with Potiphar’s wife, which means he left behind either his outer garment or one of his undergarments. V. 12 states that Potiphar’s wife grabbed Joseph “by his garment” (beḇiḡḏô). One finds the same form of this word in Exod. 21:8 (beḇiḡḏô ḇāh), where the expression refers to man who broke faith with his female slave and tried to sell her because she did not please him. By using beḡeḏ at this point, the narrator may be implying something about Joseph’s own emotional involvement in this story. He is on the verge of acting faithlessly to his master. Also,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homonymous Hebrew verb bāḡaḏ is sometimes used for marital unfaithfulness (Jer. 3:7–8, 20; Mal. 2:14).22

21 See J. M. Myers, “Dress and Ornaments,” IDB, 1:869–71; L. G. Running, “Garments,” ISBE, 2:401–7.

22 Kugel, In Potiphar’s House, pp. 96–98; Sarna, Genesis, p. 274.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5.

 

- 14절. 희롱하다는 표현  Once again we encounter the verb ṣāḥaq (v. 14), made famous in the Isaac stories (17:17; 18:12, 15 [twice]; 21:6, 9; 26:8), and occurring once in the Lot stories (19:14). According to the text, Potiphar’s wife claims that her husband brought Joseph into their household to sport in our presence (leṣaḥeq bānû, v. 14), and later to sport in my presence (leṣaḥeq bî, v. 17). What is she suggesting? That Potiphar brought Joseph into the household “to make sport” of them (NIV, NAB)? “to insult‘’ them (RSV, JB)? “to mock” them (AV; cf. NEB)? “to make love” to them (Speiser)?

Speiser’s interpretation is dubious simply because sexual abuse is covered by bāʾ ʾēlay liškaḇ ʿimmî (“he came to lie with me,” v. 14) and by bāʾ ʾēlay (“he came to me,” v. 17), not by leṣaḥeq bānû/bî. The “mock” and “insult” translations suffer from a lack of evidence that ṣāḥaq, in either the Qal or the Piel stem, has such a meaning. Of all the instances where ṣāḥaq occurs, the closest in form to the references here is 19:14—all three use ṣāḥaq in the Piel, followed by the preposition be. I suggested for 19:14 “clowning”—“horsing around,” to use a colloquialism. It seems best to use an equivalent in 39:14, 17.10 Potiphar’s wife claims that what Joseph had in mind by ṣāḥaq was considerably different than what Potiphar had in mind by ṣāḥaq. Joseph was introduced to Potiphar’s family to sport with them, to play games with them.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B The New American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JB Jerusalem Bible

AV 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10 See Sasson, “Worship of the Golden Calf,” p. 155, who notes that Speiser’s translation “to make love to us” “reduces the sarcasm to a mass orgy.”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8.

 

19-23절) 보디발이 자신의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심히 노하여 그를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호아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인자(헤세드)를 더하심으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들을 모두 요셉의 손에 맡기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았다. 

 

요셉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노예로서 그에게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 또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예가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다면 이는 가차없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리고 보디발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하지만 보디발은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둔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아내의 모함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다. 아마도 일반 잡범들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정치범에 해당되는 이들이 갇혀있던 곳으로 요셉은 이곳에서 제국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배울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곳에서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이 임하자 간수장은 요셉에게 은혜를 베푼다. 간수장 또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맡긴 것은 살펴보지 않을 정도였다. 

 

21–23  Joseph moves from one confinement (a hole in the ground, ch. 37) to another confinement (a jail). Within ch. 39 itself he moves from one house (Potiphar’s) to another house (a round house, bêṯ hassōhar).11

In vv. 19–23 a number of items stand out. One is the threefold use of nāṯan with three different subjects: (1) Potiphar placed (wayyittenēhû, v. 20) Joseph in jail; (2) but Yahweh disposed (wayyittēn, v. 21) the chief jailer in his favor; (3) and the jailer placed (wayyittēn, v. 22) the prisoners in Joseph’s charge. Second, these verses contrast the chief jailer’s eyes (v. 21) with the woman’s eyes (v. 7).12 Both the woman and the jailer looked at Joseph and liked what they saw: she saw a male figure to satisfy her sexual lust; he saw a reliable, model prisoner who could be trusted with responsibilities. Third, these verses establish a relationship between the chief jailer and Joseph that resembles the relationship that formerly existed between Joseph and Potiphar. This trusting relationship is indicated by phrases like The chief jailer placed in Joseph’s hands … (v. 22), and the chief jailer did not oversee anything that was in his hands (v. 23). These phrases recall Potiphar’s willingness to relinquish control to Joseph (v. 6). Potiphar “took a liking to Joseph” (lit., “Joseph found grace in his eyes,” v. 4). Yahweh disposed the chief jailer in his favor (lit., “he gave him grace in the eyes of the chief jailer,” v. 22). Fifth, Yahweh was a constant presence with Joseph—before he was accused (v. 2), and after he was jailed (v. 23). The result of that presence was that Yahweh brought succcess or prospered (maṣlîaḥ) every undertaking of Joseph (vv. 3, 23).

11 The possible Egyptian background to this unique Hebrew phrase (only in Gen. 39:20–23 and 40:3, 5) is explored by Vergote, Joseph en Égypte, pp. 25–28. Redford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pp. 47–48) finds wanting all attempts connecting sōhar with a Vorlage in Egyptian.

12 See n. 7 above, and 39: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71–472.

 

우리는 본문속에서 지속적으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형통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형통이 요셉의 소원, 요구와 완전히 일치하였는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그는 애굽의 노예로 잡혀 왔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수의 신분, 강간미수범이 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셉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좀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직 요셉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요셉은 그가 상상하지 못한 지위에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요셉이 해야할 일은 주어진 순간, 역할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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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When Judah sent the young goat by his friend the Adullamite to take back the pledge from the woman’s hand, he did not find her. 21 And he asked the men of the place, “Where is the cult prostitute2 who was at eEnaim at the roadside?” And they said, “No cult prostitute has been here.” 22 So he returned to Judah and said, “I have not found her. Also, the men of the place said, ‘No cult prostitute has been here.’ ” 23 And Judah replied, “Let her keep the things as her own, or we shall be laughed at. You see, I sent this young goat, and you did not find her.”

24 About three months later Judah was told, “Tamar your daughter-in-law fhas been immoral.3 Moreover, she is pregnant by immorality.”4 And Judah said, “Bring her out, and glet her be burned.” 25 As she was being brought out, she sent word to her father-in-law, “By the man to whom these belong, I am pregnant.” And she said, “Please identify whose these are, hthe signet and the cord and the staff.” 26 Then Judah identified them and said, i“She is more righteous than I, since jI did not give her to my son Shelah.” And he did not know her again.

27 When the time of her labor came, there were twins in her womb. 28 And when she was in labor, one put out a hand, and the midwife took and tied a scarlet thread on his hand, saying, “This one came out first.” 29 But as he drew back his hand, behold, his brother came out. And she said, “What a breach you have made for yourself!” Therefore his name was called kPerez.5 30 Afterward his brother came out with the scarlet thread on his hand, and his name was called kZerah.

2 Hebrew sacred woman; a woman who served a pagan deity by prostitution; also verse 22

e ver. 14

f Judg. 19:2

3 Or has committed prostitution

4 Or by prostitution

g Lev. 21:9; [Deut. 22:21; John 8:5]

h ver. 18

i 1 Sam. 24:17

j ver. 14

k ch. 46:12; Num. 26:20; 1 Chr. 2:4; Matt. 1:3

5 Perez means a breach

k [See ver. 29 abov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8:20–30.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1)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2)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1) 히, 크데샤, 가나안 이방 성소의 창녀

2) 터뜨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8:20–30.

 

 

20-23절) 유다가 친구인 아둘람 사람(히라)에게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서 자신과 동침한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인 도장과 끝과 지팡이를 찾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했다. 에나임 길 근처의 사람들에게 여기에 있던 성전 창녀가 어디있는지 묻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창녀가 없다라고 대답한다. 그가 유다에게 돌아와서 그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유다가 이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며 그냥 두라고 말한다. 

 

본문에서 히라는 ‘조나(창녀)’가 어디있는지 묻지 않고 ‘퀘데사(신전 창녀)’가 어디있는지 묻고 있다. 

본문에서 창녀라고 표현하고 있는 단어인 ‘카데쉬’는 이방의 성전에서 몸을 파는 여인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신전 매춘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거룩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도 ‘카도쉬’로 발음이 비슷하다. 

קָדַשׁ (qādaš), q. be holy, withheld from ordinary use, treated with special care, belonging to the sanctuary; ni. show, prove oneself holy, be treated as holy; pi. put something into a state of holiness, i.e., treat according to the procedures of worship, dedicate for use by God, pronounce something to be holy, put someone into a state of holiness, consecrate, establish, appoint a holy period of time, transfer or convey holiness, treat as holy; pu. be made holy; hi. designate as made holy, treat as made holy, God’s declaration of s.o./s.t. to be holy to him, take God to be holy, give as votive offerings; hitp. behave as consecrated, prove o.s. to be holy, put o.s. into the state of dedication (#7727); מִקְדָּשׁ (miqdāš), nom. sanctuary (#5219); קָדֵשׁ (qādēš I), nom. sacred person, temple prostitute (#7728); קוֹדֶשׁ / קֹדֶשׁ (qôdeš / qōdeš), nom. thing filled with holiness, therefore be treated carefully, consecrated gifts, offerings, God’s holiness, something most holy (#7731); קָדוֹשׁ / קָדֹשׁ (qādôš / qādōš), adj. holy, causing anxiety, separated, ordained for (#7705).

q. qal

ni. niphal

pi. piel

pu. pual

hi. hiphil

s.o. someone (in lexical definition)

s.t. something (in lexical definition)

hitp. hitpael

o.s. oneself (in lexical definition)

o.s. oneself (in lexical definitio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877.

 

21–22  In asking the townsmen about Tamar’s whereabouts, Hirah does not say: “Where is the prostitute [zôná]?” Instead, he asks: Where is the cult prostitute [qeḏēšá]?15 They respond that there never has been a qeḏēšá in their locality. Why does Gen. 38 refer to Tamar by two words, prostitute (v. 15) and cult prostitute? The purpose is certainly not to elevate Judah’s behavior from sleeping with street prostitutes to engaging in ritual fornication with a woman (“a holy one”) who is a temple servant and devotee. Note that the narrator reports that Judah thought she was a prostitute (v. 15), but when he relates the conversation of Canaanites with each other (v. 21), he puts in their mouths the designation “cult prostitute.” In other words, what the narrator called a “prostitute” was in the local idiom a “cult prostitute.” Vv. 21–22 are told, then, from the point of view of Hirah and the Enaimites.16 Furthermore, a passage like Deut. 23:18–19 (Eng. 17–18), which collocates qeḏēšá and zôná, suggests that the terms are related but not necessarily synonymous. The two terms are also parallel in Hos. 4:14.

It is unlikely that Hirah would suppose that the woman who made herself available nowhere near any temple was a cult prostitute.17 Thus it is dubious that Tamar ever intended to pass herself off as anything more than a prostitute. There would certainly be no reason to laugh at a person (see Judah’s concern in v. 23 about being ridiculed) who had engaged in sexual congress with a hierodule of the Canaanite cult. In order to be as polite as possible to the townspeople, Hirah used a euphemism. In private or plain speech Tamar is a prostitute. In public or polite speech Tamar is a “cult prostitute.”18

15 In ch. 38 LXX translates both zônâ and qeḏēšâ by pórnē, “harlot,” apparently taking the two words as synonyms in this context. Elsewhere LXX uses pórnē to translate qeḏēšâ only in Deut. 23:17 (MT 18). The latter verse says that there shall be no qeḏēšâ from among the Israelite women, and no qāḏēš from among the Israelite men. The LXX translates this verse twice. The first translation renders qeḏēšâ as pornē (“prostitute”) and qāḏēš as porneúōn (“fornicator”). The second translation, probably an indication that the translators were uncertain of the correct rendering, renders qeḏēšâ as telesphóros (“female who is associated with a cult”) and qāḏēš as teleskóōenos (“male who is associated with a cult”). In the only other use of qeḏēšâ in the OT besides Gen. 38 and Deut. 23, Hos. 4:14 mentions those who make sacrifice with the qeḏēšôṯ, and the LXX renders the pl. of zōnâ and qeḏešâ as meta tōn pornōn (with the prostitutes”) and meta tōn tetelesménōn (“with the initiates”), respectively. For studies of qeḏēšâ and cultic prostitution, see E. J. Fisher, “Cultic Prostitution in the Ancient Near East? A Reassessment,” BTB 6 (1976) 225–36; E. M. Yamauchi, “Cultic Prostitution,” in Orient and Occident, Fest. C. H. Gordon, ed. H. A. Hoffner, Jr.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73), pp. 213–222; M. I. Gruber, “Hebrew qĕdēšāh and Her Canaanite and Akkadian Cognates,” UF 18 (1986) 133–48; R. Harris, “Woman in the Ancient Near East,” IDBSup, pp. 960–63.

16 See A. Berlin, Poetics and Interpretation of Biblical Narrative (Sheffield: Almond, 1983), pp. 60–61.

17 This point is made by H. L. Ginsberg, “Lexicographical Notes,” Hebräische Wortforschung, Fest. W. Baumgartner, ed. B. Hartmann, et al., VTSup 16 (Leiden: Brill, 1967), p. 75 n. 2.

18 See P. Bird, “The Harlot as Heroine,” Semeia 46 (1989) 126, who notes that the OT often uses euphemisms for both sexual acts and sex organs. Thus words for foot or hand may be used for the phallus. Bird’s nonbiblical illustration of this is the use of “courtesan” for the cruder expression “whore.” See also T. Hamill, “The Bible and the Imagination: A Modest Sounding of Its Harlot’s Evaluation,” ITQ 52 (1986) 107, who speaks of Hirah’s replacing “an ugly word with a holy word.”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46–447.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한 번 잠자리를 가진 창녀와의 약속은 지키지만 자신의 며느리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유다를 보게 된다. 

유다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잃은 대신 염소 새끼를 지키게 되었다. 아마 머리 속에 계산기가 돌아가면서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증표물을 찾기 위해서 더 창녀를 찾다가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일을 덮으면서, 자신을 약속한대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이 상황을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24-26절) 유다와 다말이 동침하고 석 달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유다는 며느리를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다말은 끌려나가면서 사람을 보내어 이 물건의 임자가 나로 임신하게 했다라고 말하며 증표물을 보낸다. 유다가 그 증표물을 알아보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라고 말한다. 이는 유다가 약속한대로 자신의 아들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유다가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누가 유다애게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렸을까? 또한 앞서 누가 다말에게 유다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로 올라갔는지를 알렸을까? 하지만 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누군가 이 내용을 전달했을 것이다. 

We never find out who the informers are in this story. Tamar “was told” (wayyuggaḏ, v. 13) that Judah had gone to Timnah to oversee the sheepshearing. Now Judah is informed (wayyuggaḏ) of Tamar’s sexual adventures and her resulting pregnancy. Who told Tamar about Judah, and who told Judah about Tamar?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48.

 

유다에게 들려온 소식은 수절하고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행음함으로, 다른 말로 몸을 팔아서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유다는 분노하며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한다(신 22:23-24). 성경은 이런 상황에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는데 유다는 더 나아가서 불에 태워 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제사장의 딸이 몸을 팔거나(레 21:9) 한 남자가 아내와 자기의 장모를 함께 범하였을 때 불태워 죽이라고 했다.(레 20:14) 이처럼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은 가장 나쁜 죄에 대한 모욕적인 무서운 처형방법인 것이다. 어쩌면 셋째 아들 셀라를 다말과 결혼시키지 않아도 되는 좋은 명분이 생겼다고 여기며 신속히 일을 처리할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Judah’s prescribed penalty for Tamar is let her be burned, a form of execution that may well be intended to reflect Tamar’s alleged display of unbridled sexual passion. The connection between burning and sexual indiscretions is amply illustrated by Prov. 6:27–29, which compares adultery with taking fire into one’s bosom or walking on hot coals and the inevitable result that occurs.20 Only two instances in OT law call for burning: (1) incest with one’s mother-in-law (Lev. 20:14, which is similar to the Code of Hammurapi, § 157: “If a seignior has lain in the bosom of his mother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they shall burn both of them”);21 (2) prostitution by a priest’s daughter (Lev. 21:9). One may compare Lev. 21:9 with the Code of Hammurapi, § 110, which mandates burning for a cult prostitute (nadītum) or “divine lady” (ēntum, a priestess?) who enters a tavern for a drink.22 It would appear, then, from a consideration of Gen. 38:24; Lev. 20:14; and 21:9 that death by fire in the OT bore a special relationship to illicit sexual behavior.

This verse is also anomalous in other ways. This is the only place in the OT where one individual had the power to order the execution of another for adultery. Furthermore, the penalty for adultery in the OT is stoning by the community, not burning (Lev. 20:10; Deut. 22:21). Nor does it appear that harlotry was a punishable offense in Israelite society. If any later law applies here, it is Lev. 20:12, which calls for the death penalty for both parties if a man lies with his daughter-in-law. Judah is unlikely to invoke that measure! Of course, Judah’s insistence that Tamar be burned is simply an outburst of indignation, a spontaneous reaction, and hardly a reflection of actual juridical enforcement for sins relating to sexual behavior.

20 See C. Carmichael, “Biblical Laws of Talion,” HAR 9 (1985) 118–19.

21 See ANET, p. 172.

22 See ANET, p. 17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49.

 

그런데 본문에서 행음하다라는 표현은 ‘자나’로 매춘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이 소문을 통해서 다말은 자신이 매춘의 행위를 통해서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유다는 증표물을 보고 이 일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말의 탈선은 음행의 이유가 아니라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남편의 대를 잇는 것이 다말이 죽은 남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이자 선이었던 것이다. 

 

"And he did not know her again.”(ESV)

" And he did not sleep with her again.”(NIV)

" And he did not 1have relations with her again.”(NASB)

본문에서 유다는 다시는 그녀를 알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한글 번역은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이후에 유다가 그녀와 근친상간의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표현이 바로 히브리어 ‘야다’이다. 이는 알다, 성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3045. יָדַע 야다으. yada, know, perceive, knowledge, 동침하매, 창(Gen) 4:1, 알지, 출(Ex) 1:8, 알고, 출(Ex) 3:7, 알리라, 민(Nu) 16:30, 알라, 신(Deut) 9:3, 알게 하셨으므로, 렘(Jer) 11:18, 아는, 시(Ps) 88:8.

 맹용길, 스트롱 맹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어 사전 (맹용길, 2016).

 

27-30절) 다말이 해산하게 되었는데 쌍둥이였다. 출산시에 산파가 쌍둥이중에 먼저 나온 아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손에 홍색실을 매어주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그의 아우가 먼저 나왔다. 이에 산파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라고 하며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하였고 후에 손에 홍색실 있는 아이가 나왔는데 그 이름을 ‘세라’라고 하였다. 

 

베레스는 돌파, 헤치고 나옴이라는 의미이다. 세라는 '붉은 빛, 밝음'을 의미한다. 

다말은 두 남편에게서 아이를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의 대한 보상임과 동시에 두 아들을 잃은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다. 장자의 표시로 홍색 실을 묶어준 것은 세라인데 동생인 베레스가 먼저 형을 밀치고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셀라, 베레스, 세라중에 장자권은 누가 받게 될 것인가. 이후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베레스가 장자권을 받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족보나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베레스가 그 계보를 이은 것이다. 형이 아니라 동생을 통해서 대가 이어진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야곱과 에서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고, 이후 요셉의 두아들이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후 베레스를 룻기 4장에서 만난다. 

룻기 4:18–22 (NKRV)

18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결국 베레스는 다윗왕의 조상이 된다. 유다와 그 며느리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통해서 왕의 계보가 이어지게 된것이다. 이후 이 왕의 계보는 마 1장에도 나온다. 특히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이다. 

 

One must also take note of the ten-generation genealogy (matching the ten years in Moab [1:4?]) with which Ruth concludes (Ruth 4:18–22). This linear genealogy begins with Perez and concludes with David. From where, asks the book of Ruth, did Israel’s greatest king come? David’s roots are in a marriage between a son of Jacob and his daughter-in-law, who played the role of a zôná at one point, and in a birthing incident in which, for some mysterious reason, the second born outmaneuvered his older brother. The first and last names in this genealogy—Perez, David—illustrate the same principle, viz., the divine selection of a younger brother over an older one.16

Equally interesting as the Davidic genealogy is that of Christ (Matt. 1:1–17). Tamar is the first of several women in the genealogy of Christ (v. 3a), and her son Perez is a link in the chain that produces David’s greater son (v. 3b). In this genealogy Tamar is included with Rahab (v. 5), Ruth (v. 6), Bathsheba (here mentioned only as “the wife of Uriah,” v. 6), and Mary (v. 16). These are the only five ancestresses of Jesus that Matthew includes. Absent from the genealogy are, for example, the mothers of Israel, Sarah, Rebekah, Rachel, and Leah. Is there a connecting link among the women included, or is there anything that Tamar, Rahab, Ruth, and Bathsheba share with Mary?17 Or might each of the four women preceding Mary in the genealogy represent a different value for Matthew?18

In responding to these questions, scholars have advanced various proposals to explain Matthew’s citation of these four women. First, some have argued that these four were sinners, and thus Matthew has included them to provide an illustration of Jesus’ power to save sinners, and to show that God’s purpose for the Davidic line was achieved despite human sin.19 Given that Matt. 1:2ff. includes the names of males whose sins were well known, and that verses like Gen. 38:26 herald Tamar’s righteousness, it is unlikely that the inclusion of these women would be a productive way to highlight the saving/restoring ministry of Jesus.

Second, is it possible that Matthew’s choice of these women reflects an interest in the salvation of non-Jews?20 Tamar was a Canaanite, as was Rahab; Ruth was a Moabite; and Bathsheba was originally the wife of Uriah the Hittite. One can have no doubt that these women who were foreigners prepare the way for the inclusion of Gentile Christians for Matthew’s audience (cf. Matt. 28:19), but they do not prepare in any way for Mary, who is not a foreigner.

A third suggestion is that the inclusion of these women reflects an intra-Jewish debate over the Messiah’s ancestry.21 On the one hand, advocates of a priestly Messiah pressed their point by underscoring the irregularities in the line of David, i.e., foreign blood and sinful women. On the other hand, the Pharisees defended these irregularities. By including these women, Matthew revealed his disposition to agree with the Pharisees, and therefore affirmed Jesus as son of David.

A fourth suggestion, and one one I find most plausible, is that each of these four women had a highly irregular and potentially scandalous marital union.22 Nevertheless, these unions were, by God’s providence, links in the chain to the Messiah. Accordingly, each of them prepares the way for Mary, whose marital situation is also peculiar, given the fact that she is pregnant but has not yet had sexual relations with her betrothed husband Joseph. Thus the inclusion of the likes of Tamar in this family tree on one hand foreshadows the circumstances of the birth of Christ, and on the other hand blunts any attack on Mary. “God had worked his will in the midst of whispers of scandal.”23

16 Cf. E. F. Campbell Jr., Ruth,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75), pp. 172–73; R. L. Hubbard, Jr., Book of Rut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8), pp. 280–85. In his commentary on Ruth 4:12 (“and may your house be like the house of Perez whom Tamar bore to Judah”), Hubbard (p. 261) points out that both Tamar and Ruth were at first prevented from providing heirs (in Tamar’s case by Judah’s hesitancy to bring Shelah and Tamar together; in Ruth’s case by the relative’s hesitancy to marry her), but that subsequently both these foreign women perpetuated a family line threatened with extinction.

17 For the inclusion of women in genealogies outside the Bible, see G. Mussies, “Parallels to Matthew’s Version of the Pedigree of Jesus,” NovT 28 (1986) 38–39. For the presence of women in OT genealogies, see Gen. 11:29; 22:20–24; 35:22–26; 1 Chr. 2:18–21, 24, 34, 46–49; 7:24.

18 See R. D. Pattison, “God/Father: Tradition and Interpretation,” RefR 42 (1989) 189–206, esp. 198–203, 206 n. 31.

19 This interpretation is as old as Jerome (In Matt. 9) and was perpetuated by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e 3.31.3 ad 5).

20 A recent advocate of this view is J. M. Jones, “Subverting the Textuality of Davidic Messianism: Matthew’s Presentation of the Genealogy and the Davidic Title,” CBQ 56 (1994) 256–72 (“This Messiah … admits into the community of heaven those who are not of the house of Israel” [p. 271]).

21 See M. D. Johnson, The Purpose of the Biblical Genealogi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69), pp. 131–38.

22 This view is advanced by R. E. Brown, The Birth of the Messiah (Garden City, NY: Doubleday, 1977), pp. 71–73; idem, “Matthew’s Genealogy of Jesus Christ: A Challenging Advent Homily,” Worship 60 (1986) 482–90, esp. 488–89 (repr. in A Coming Christ in Advent [Collegeville, MN: Liturgical, 1988], pp. 16–26). See also T. Zahn, Das Evangelium des Matthäus, 4th ed. (Leipzig: Diechert, 1922), pp. 63–67; and E. Schwei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Matthew, tr. D. E. Green (Atlanta: John Knox, 1975), p. 25.

23 See T. H. Graves, “Matthew 1:1–17,” RevExp 86 (1989) 600. See also C. T. Davis, “The Fulfillment of Creation: A Study of Matthew’s Genealogy,” JAAR 41 (1973) 520–35; he believes the emphasis on outsiders in this genealogy is not on Tamar/Rahab/ Ruth/Bathsheba (whose name is not used), but rather Tamar/Rahab/Ruth/Uriah (whose name is used). Thus “Judah’s great name as ancestor of the Messiah rests on the righteousness of Tamar” (p. 52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54–456.

 

우리는 38장에서 전체의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사건을 만난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가고 이어서 그곳에서의 삶이 이야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내용의 전개이지만 창세기 저자는 38장을 통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약속은 순간순간 위기를 맞이한다.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와 아비멜렉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였고 이삭도 마찬가지로 리브가를 여동생이라고 속인다. 하지만 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자손들을 보호하신다. 야곱도 세겜지역에서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히위 사람들에게 흡수 통합될 뻔 했다. 마찬가지로 유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위기에 빠뜨렸을 때 다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게 된다. 결국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축복의 언약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축복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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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It happened at that time that Judah went down from his brothers and oturned aside to a certain pAdullamite, whose name was Hirah. There Judah saw the daughter of a certain Canaanite whose name was qShua. He took her and went in to her, and she conceived and bore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rEr. She conceived again and bore a son, and she called his name rOnan. Yet again she bore a son, and she called his name rShelah. Judah1 was in Chezib when she bore him.

And Judah took a wife for Er his firstborn, and her name was Tamar. But Er, Judah’s firstborn, swas wicked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the Lord put him to death. Then Judah said to Onan, “Go in to tyour brother’s wife and uperform the duty of a brother-in-law to her, and raise up offspring for your brother.” But Onan knew that the offspring would not be his. So whenever he went in to his brother’s wife he would waste the semen on the ground, so as not to give offspring to his brother. 10 And what he did was wicked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put him to death also. 11 Then Judah said to Tamar his daughter-in-law, vRemain a widow in your father’s house, till Shelah my son grows up”—for he feared that he would die, like his brothers. So Tamar went and remained win her father’s house.

12 In the course of time the wife of Judah, Shua’s daughter, died. When Judah xwas comforted, he went up to yTimnah to his sheepshearers, he and his friend Hirah the Adullamite. 13 And when Tamar was told, Your father-in-law is going up to Timnah to shear his sheep,” 14 she took off her widow’s garments zand covered herself with a veil, wrapping herself up, and sat at the entrance to aEnaim, which is on the road to Timnah. For she saw that Shelah was grown up, band she had not been given to him in marriage. 15 When Judah saw her, he thought she was a prostitute, for she had covered her face. 16 He turned to her at the roadside and said, “Come, let me come in to you,” for he did not know that she was his daughter-in-law. She said, “What will you give me, that you may come in to me?” 17 He answered, “I will send you a young goat from the flock.” And she said, “If you give me a pledge, until you send it—” 18 He said, “What pledge shall I give you?” She replied, c“Your signet and your cord and your staff that is in your hand.” So he gave them to her and went in to her, and she conceived by him. 19 Then she arose and went away, and taking off dher veil she put on the garments of her widowhood.

o ver. 16; ch. 19:3; 2 Kgs. 4:8

p 1 Sam. 22:1; 2 Sam. 23:13; 1 Chr. 11:15; Mic. 1:15

q [1 Chr. 2:3]

r ch. 46:12; Num. 26:19, 20

r [See ver. 3 above]

r [See ver. 3 above]

1 Hebrew He

s 1 Chr. 2:3

t Matt. 22:24; Mark 12:19; Luke 20:28

u See Deut. 25:5–10

v [Ruth 1:12, 13]

w Lev. 22:13

x ch. 24:67; 37:35; 2 Sam. 13:39

y Judg. 14:1

z [ver. 19; ch. 24:65]

a ver. 21

b ver. 26

c ver. 25

d ver. 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8:1–19.

 

38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8:1–19.

 

 

창 38장은 요셉이야기 속에 삽입된 이야기로 보인다. 실제 37장 마지막과 39장 1절은 연결된다. 이야기의 흐름상 38장이 없는 것이 더 매끄러워보이지만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이후 요셉의 시련과 연관이 깊다. 

유다와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독립적인 삶을 살다가 지역 원주민들과 결혼했다. 유다는 창녀로 위장한 며느리에게,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유다는 창녀로 여긴 며느리와 동침을 했다면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쳐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유다는 며느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요셉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 

창38장의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불륜 이야기는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 내용을 기록함을 통해서 유다가 이후 야곱의 아들중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또한 이방의 여인인 다말을 통해서 다윗왕으로 연결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1-5절)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넘긴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친하게 지냈다. 유다가 그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데리고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엘, 둘째가 오난, 셋째가 셀라였다. 셋째 셀라를 낳을 때 유다는 거십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둘람은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19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아둘람은 헤브론보다 지형적으로 낮은 지역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내려갔다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지금 유다가 자신의 형제들에게서 떠나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낸다는 이야기는 불길한 사건의 서막과 같다. 여기서 유다와 결혼하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거듭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지 말것을 명령한다. 성경에서 가나안 사람들과의 결혼은 칭찬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본문에서 유다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내와의 관계가 6개의 동사로 묘사된다. 유다는 수아의 딸을 보고, 데리고, 동침했고 수아의 딸은 임신하여, 낳았고, (이름을) 불렀다. 이 두사람을  표현하는 각각의 3개의 동사는 성적인 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실제로 이들이 어떤 부부의 관계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 1-2  A sense of foreboding is conveyed through Judah’s separation from the rest of his family, his friendship with Hirah (v. 1; a native of the Canaanite city of Adullam, about 12 miles [19 km] southwest of Bethlehem), and his marriage to an unnamed Canaanite woman, the daughter of Shua (v. 2). In Genesis, marriages to Canaanites are never applauded (see 24:3; 26:34–35; 28: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16.

 

2  Judah’s marriage to a Canaanite20 girl contrasts boldly with his great-grandfather’s concern that Isaac not marry a Canaanite (24:3) and with Isaac’s concern that Jacob avoid a Canaanite spouse (28:1). One gets the distinct impression that ever since the Dinah incident (ch. 34) Jacob has less and less control over the behavior of his family.

Only the name of Judah’s father-in-law is given: Shua. His wife remains anonymous. Their relationship to each other is conveyed by six verbs: three for him (he meets her, marries her, and has intercourse with her, v. 2), and three for her (she conceives, bears a son, and names the child, v. 3). Judah and his wife relate sexually, but the text says nothing else about their relations.

20 Aberbach and Grossfeld (Targum Onkelos to Genesis, p. 221 n. 1) draw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the versions of Targ. Onqelos read “merchant” (tgrʾ) for kenaʿa, a meaning the translators claim for kenaʿa in Job 40:30; Prov. 31:24; Isa. 23:8; Zech. 14:21. It is more likely that the rabbis gave “Canaanite” its nonethnic meaning because they were well aware of the Torah’s prohibition of marriage to a Canaanite. Yet nowhere do the rabbis try to make Tamar an Israelite. For example, Targ. Pseudo-Jonathan claims that Tamar was a non-Israelite and that Judah made her a proselyte. See J. A. Emerton, “An examination of recent structuralist interpretations of Genesis XXXVIII,” VT 26 (1976) 90–91.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33.

 

엘은 하나님을 뜻하는’엘’과는 다른 단어로 ‘보호, 보호자’라는 의미이다. 오난은 ‘강인한’이라는 의미이며 셀라는 ‘간구,염원’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 1절의 ‘그 후에’를 37장의 사건, 요셉이 17살에 애굽에 팔려간 것으로 본다면  이때 유다의 나이는 20대 중,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유다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그 아들들이 결혼을 하는 시기가 되었고 그렇게 두 아들이 죽고 나서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시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이후 요셉이 4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이 시기에 야곱의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했다면 23년의 기간 안에 유다의 결혼과 그 이후의 자녀의 출산과 자녀의 결혼의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문의 '그 후에’라는 표현은 새번역의 내용처럼 ‘그 무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당해 보인다. 

 

6-11절)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다말을 아내로 데려왔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 후에 유다가 둘째 오난에게 형수에게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된 본분, 즉 형의 후손을 잇게 요청했다. 그러나 오난는 그 씨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줄 알아서 형수와 동침하면서 땅에 설정을 하매 여호와께서 오난을 죽이셨다. 이에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수절하고 셋째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셀라도 그의 형들과 같이 죽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말은 ‘종려나무’라는 뜻을 가진 가나안 이름으로 그녀는 가나안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자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했는데 어떤 악한 일을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오난은 ‘계대 결혼, 형사취수’의 관습을 이행할 것을 요구받지만 그는 이것을 거절한다. 

 

신명기 25:5–10 (NKRV)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오난은 형수와 동침을 하기는 하지만 질외사정을 통해서 형수가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한다. 이는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형의 후손으로 장자권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돌아올 권리가 제한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형이 죽었으니 오난은 자신이 장자가 되어 아버지의 재산의 2/3을 상속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다말을 통해서 형의 후손을 낳게한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1/4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욕심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시므온과 레위가 거룩한 예식인 할례를 짓밟았다면 오난은 당시의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계대 결혼을 질밟은 것이다. 

신 25장에서 계대 결혼이 형제의 의무이지만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었다. 물론 ‘신 벗김 받은자’라는 수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오난은 이런 수치스러운 호칭을 듣는 것은 싫어서 형수와 동침하기는 했지만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 것이다. 

이에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그녀로 말미암아 자신의 두 아들이 죽은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면서 셋째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다말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다는 다말을 위험한 여인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아들의 죽음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악한 행위때문이었다. 

 

12-19절) 얼마 후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고 위로를 받은 후에 유다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에 올라왔다라고 말했다. 이에 다말이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아 있었다. 이는 약속대로 셀라가 장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남편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말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유다가 그녀를 창녀로 여겨 다말과 동침하고자 했다. 그러자 무엇을 주고 들어오겠느냐고 묻고 유다는 염소 새끼를 주겠다라고 한다. 그러자 다말은 그 염소 새끼를 받을 때까지 담보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요구하고 시아버지와 동침한다. 동침한 이후 유다가 떠나가고 나서 다말은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었고 다말은 그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게 되었다. 

 

본절은 최근에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유다와(12절) 여전히 오래전의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과부의 옷을 입고 있는 다말(14절)이 대조를 이룬다. 

 

15절은 다말이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유다는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창녀로 여겼다. 다말이 자신이 셀라와 약혼한 상태이기에 너울을 쓴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자신을 창녀로 위장하기 위해서 너울을 쓴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에나임, ‘두 우물, 두 눈’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자신의 시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렘 3:2은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을 음란한 행위로 여긴다. 

예레미야 3:2 (NKRV)

2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만나서 자신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행할 것을 촉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아버지가 자신을 창녀로 여기고 자신과 동침하기를 원하자 시아버지를 통해 대를 이으려고 한 것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면서 증표를 요구한다. 아마도 시아버지가 약속을 잘 지키기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또한 과부의 신분으로 자신이 임신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증표를 요구한 것이다. 

증표로 요구한 끝은 허리끈이 아니라 도장을 묶어 목에 매는 끈을 의미한다. 지팡이는 권위를 상징하며 당시 지팡이의 머리에 주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물건은 누구의 소유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말은 유다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소지품을 요구한 것이다. 

 

본문속에서 유다는 처음부터 창녀를 찾을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창녀에게 제공할 어떤 물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순간적인 욕망에 휩쓸려 자신의 며느리를 창녀로 여기고 그녀와 동침하게 되는데 인간의 이런 연약함 마저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도구가 됨을 볼 수 있다. 

당시 가나안 문화속에서 성전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식의 성격을 가진다. 이들과 잠자리를 하면 수확이 많아진다는 이유로 씨앗을 파종하거나 짐승의 털을 깎는 시기에 아주 성행했던 ‘풍요와 다산을 위한 문란 행위’였던 것이다. 유다도 어쩌면 짐승들의 털을 깎으러 올라가면서 이런 바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15절은 창녀라는 단어로 ‘조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21절과 22절에서는 ‘콰데쉬’라는 단어로 신전 매춘부, 이교 창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후에 유다는 사람을 보내어 신전 창녀를 찾지만 그곳에서 찾지 못했다. 

결국 시아버지와의 한번의 동침, 관계로 다말은 임신을 하게 된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말의 행동이 매우 충격적으로 보이지만 이후에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26절)라고 말한다. 

 

15  The narrator tells us that Judah assumed (Heb. ḥāšaḇ, lit., “thought”)21 that the incognito Tamar was a zôná, a common prostitute. Part of Tamar’s subterfuge was to “put on a veil” (watteḵas baṣṣāʿîp̄, v. 14), that is, “cover her face” (kisseṯá pāneyhā, v. 15, here translated she had veiled her face).22

Most translations understand v. 15b as causal: “Judah assumed she was a whore, since [so JB, NAB; cf. AV “because”; RSV, NIV “for“] she had veiled her face.” But there is little evidence that prostitutes in Canaan wore veils. Two references, Hos. 2:4 (Eng. 2) and Cant. 1:7, might support this idea. In the first text, Hosea’s wife Gomer is exhorted “to remove her harlotry (or promiscuity, zenûneyhā) from her face.” This is more likely a reference to makeup rather than to veils.23 We do know that prostitutes painted their faces, especially around the eyes (Jer. 4:30; Ezek. 23:40). The second text is Cant. 1:7, which M. Pope translates: “Tell me, my true love, Where do you pasture? Where do you fold at noon? Lest I be as one veiled [keʿōṭe] Among your comrades’ flocks.”24 Pope suggests that the beloved in the Song is concerned that she will appear to be a (veiled) prostitute, if she has to wander around looking for her beloved.25 This is not, however, the only possible interpretation of Cant. 1:7. For example, the veil might be a sign of mourning (e.g., 2 Sam. 15:30), not harlotry. Several ancient versions (Pesh., Vulg., Symm.) suggest the reading “Lest I be a wanderer” (reading keṭōʿîm, i.e., transposing the ʿ and ). The NEB reads “lest I be left off picking lice”!26

Later on (v. 21) Tamar will be referred to as a “cult prostitute” (qeḏēšá). The Middle Assyrian laws state that free Asssyrian women, their daughters, and concubines must veil themselves when they go out on the street. In addition, a married “sacred prostitute” must veil herself when she goes outside. Those who must not be veiled when they are outside are (1) an unmarried sacred prostitute (qadiltu [= qadištu]); (2) a harlot (ḫarīmtu); and (3) female slaves.27 Those who must be veiled in public were married women and women of the upper classes, whether married or not. Also a concubine was to be veiled when traveling with the chief wife in any public area. Thus Assyrian law, at least, would argue that harlots were not veiled. Furthermore, the law states that anybody who sees a prostitute or an ordinary slave girl veiled in a public place must turn her over to the authorities or be subject to a heavy penalty.28 Of course, these laws say nothing about Israelite society or culture. Even the code of the Babylonians has no reference to veiling as either required for some or illegal for others. But note that the Hebrew prophet (Isa. 47:1–3) warns the “daughter of Babylon” (i.e., the high-born women), among other things, to put off their veils in the light of the coming judgment of Yahweh against them.

One might compare Tamar’s veiling herself with Rebekah’s taking a veil and covering herself (24:65) as Isaac drew near. Both veilings are done at the approach of a man (Isaac, Judah), and both precede sexual activity, although the former is clearly in the context of a marriage, the veiling of a bride. I propose that Tamar’s wearing of the veil was not to make Judah think she was a prostitute. Rather, it was intended to prevent him from recognizing her.29 It is not the veil but Tamar’s positioning herself at Enaim (v. 14) that made her appear to be a prostitute.30

Tamar’s taking advantage of Judah for a more noble purpose is not without parallel in the OT. One may think of Esther’s exploitation of Ahasuerus’s sexual desires for the achievement of her praiseworthy aims, that is, the deliverance of her people.31 Or one may think of Naomi, the childless widow, playing on Boaz’s predictable appreciation of Ruth’s beauty. Here then is an instance where the end justifies the means.

21 For another instance of ḥāšaḇ followed by two accusatives in which the preposition le is prefixed to the second accusative, cf. 1 Sam. 1:13: wayyaḥšeḇehā ʿēlî lešikkōrâ. Eli assumed Hannah was drunk; she was not. Judah assumed this person was a prostitute; she was not.

22 For “covering the face” (kāsâ pānîm) cf. Isa. 6:2; Jer. 51:51; Ezek. 12:6, 12; Ps. 44:16 (Eng. 15); 69:8 (Eng. 7); Job 9:24; 15:27; 23:17; Prov. 24:31.

JB Jerusalem Bible

NAB The New American Bible

AV 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3 See F. I. Andersen and D. N. Freedman, Hosea,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80), pp. 224–25.

24 M. Pope, Song of Songs,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77), p. 291. Cf. also NIV, AV mg., RSV mg.

25 Ibid., pp. 330–31. R. E. Murphy (The Song of Song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1990], pp. 130–31) understands the covering to be simply a disguise the woman will have to use as she seeks for her companion in order to avoid identification by her companions.

Pesh. Peshitta

Vulg. Vulgate

Symm. Symmachus (ancient Greek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26 See G. R. Driver, “Lice in the Old Testament,” PEQ 160 (1974) 159–60; J. A. Emerton, review in VT 34 (1984) 502.

27 Middle Assyrian law § 40; see the translation of T. Meek, ANET, p. 183b; cf. M. C. Astour, “Tamar the Hierodule,” JBL 96 (1977) 187. On what harlot clothing Tamar may have worn, besides the veil, see C. M. Carmichael, “Forbidden Mixtures,” VT 32 (1982) 408–9, and his interesting quotation of Jdt. 16:8. The appropriate cuneiform texts are cited also by P. Bird, “The Harlot as Heroine,” Semeia 46 (1989) 134 n. 5.

28 See G. R. Driver, The Assyrian Laws (Oxford: Clarendon, 1935), pp. 129–31. See also “ḫarimtu” (“prostitute”), CAD, Ḫ:101b.

29 See Driver, Assyrian Laws, p. 134. Gen. Rabbah 75:8 says of Judah: “He paid no attention to her. When she covered her face, he thought, ‘If she were a whore, would she have covered her face?’ ” (J. Neusner, Genesis Rabbah, 3 vols. [Atlanta: Scholars, 1985], 3:212).

30 On the prostitute’s habitat (e.g., the public square, Lipit-Ishtar Code § 27) see Bird, Semeia 46 (1989) 134 n. 6.

31 See S. Talmon, “ ‘Wisdom’ in the book of Esther,” VT 13 (1963) 451.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4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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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Now his brothers went to pasture their father’s flock near qShechem. 13 And Israel said to Joseph, “Are not your brothers pasturing the flock at Shechem? Come, I will send you to them.” And he said to him, “Here I am.” 14 So he said to him, “Go now, see if it is well with your brothers and with the flock, and bring me word.” So he sent him from the Valley of rHebron, and he came to Shechem. 15 And a man found him wandering in the fields. And the man asked him, What are you seeking?” 16 “I am seeking my brothers,” he said. “Tell me, please, where they are pasturing the flock.” 17 And the man said, “They have gone away, for I heard them say, ‘Let us go to sDothan.’ ” So Joseph went after his brothers and found them at sDothan.

18 They saw him from afar, and before he came near to them tthey conspired against him to kill him. 19 They said to one another, “Here comes this dreamer. 20 Come now, ulet us kill him and throw him into one of the pits.2 Then we will say that a fierce animal has devoured him, and we will see what will become of his dreams.” 21 But when vReuben heard it, he rescued him out of their hands, saying, “Let us not take his life.” 22 And Reuben said to them, “Shed no blood; throw him into this pit here in the wilderness, but do not lay a hand on him”—wthat he might rescue him out of their hand to restore him to his father. 23 So when Joseph came to his brothers, they stripped him of his robe, xthe robe of many colors that he wore. 24 And they took him and ythrew him into a pit. The pit was empty; there was no water in it.

25 Then they sat down to eat. And looking up they saw a zcaravan of aIshmaelites coming from Gilead, with their camels bearing bgum, balm, and myrrh, on their way to carry it down to Egypt. 26 Then Judah said to his brothers, “What profit is it cif we kill our brother and conceal his blood? 27 Come, let us sell him to the Ishmaelites, and dlet not our hand be upon him, for he is our brother, our own flesh.” And his brothers listened to him. 28 Then eMidianite traders passed by. And they drew Joseph up and lifted him out of the pit, and fsold him to the Ishmaelites for twenty shekels3 of silver. They took Joseph to Egypt.

29 When Reuben returned to the pit and saw that Joseph was not in the pit, he gtore his clothes 30 and returned to his brothers and said, “The boy his gone, and I, where shall I go?” 31 Then they took iJoseph’s robe and slaughtered a goat and dipped the robe in the blood. 32 And they sent the robe of many colors and brought it to their father and said, “This we have found; please identify whether it is your son’s robe or not.” 33 And he identified it and said, “It is my son’s robe. jA fierce animal has devoured him. Joseph is without doubt torn to pieces.” 34 Then Jacob tore his garments and put sackcloth on his loins and mourned for his son many days. 35 All his sons and all his daughters krose up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and said, “No, lI shall go down to Sheol to my son, mourning.” Thus his father wept for him. 36 Meanwhile mthe Midianites had sold him in Egypt to Potiphar, an officer of Pharaoh, nthe captain of the guard.

q See ch. 33:18

r ch. 13:18; 35:27

s 2 Kgs. 6:13

s 2 Kgs. 6:13

t [Ps. 37:12, 32]

u ver. 26

2 Or cisterns; also verses 22, 24

v ch. 42:22

w ver. 29, 30

x ver. 3

y [Jer. 38:6; Lam. 3:53]

z Job 6:19; Isa. 21:13

a [ver. 28, 36; ch. 39:1]

b ch. 43:11; Jer. 8:22; 46:11

c ver. 20

d [1 Sam. 18:17]

e ver. 36; Judg. 8:22, 24

f ch. 45:4; Ps. 105:17; Acts 7:9

3 A shekel was about 2/5 ounce or 11 grams

g ch. 44:13; Num. 14:6; 2 Sam. 1:11; 3:31; Job 1:20

h ch. 42:13, 32, 36; 44:31; Jer. 31:15; Lam. 5:7

i ver. 23

j ver. 20; ch. 44:28

k [2 Sam. 12:17]

l ch. 42:38; 44:29, 31

m ver. 28; [ver. 25; ch. 39:1]

n ch. 40:3, 4; 41:10,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7:12–36.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7:12–36.

 

 

12-17절)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다. 이때 이스라엘(야곱)이 요셉에게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방문하여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자기에게 일려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요셉은 헤브론에서 세겜을 향해가서 형들을 찾는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는 80km정도의 거리이다. 그런데 세겜에 형들이 없어서 물어 물어서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이동한다. 도단은 세겜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20-30km정도의 거리이다. 

 

세겜은 몇년전(2년?)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가서 짐승들을 먹이는 것을 보면 그 지역의 사람들이 야곱의 자손을 이제 너무 두려워해서 상관하지를 않았던지 헤브론 지역에 심한 기근이 들어 짐승들을 먹일 수가 없어서 위험을 무릎쓰고 그 지역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제 세겜 사람들이 양을 치는 무리들이 이전에 자신들의 세겜왕자를 죽이고 도망간 사람들임을 몰랐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야곱은 세겜까지 가서 양을 치는 아들들이 걱정이 되어서 요셉을 아들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야곱은 지금 형제들이 요셉을 얼마나 미워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셉역시 형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요구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세겜은 물이 많고 기름진 곳으로 헤브론에서는 8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17세 소년이 홀로 가기에는 꽤 먼 거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2-3일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형들이 보이지 않았고 방황하는 요셉에게 한 사람이 형제들이 도단이라는 곳으로 갔다고 알려준다. 요셉이 형들을 찾지 못하고 세겜 벌판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한 사람(혹은 천사)이 다가와 그 형들의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 이것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 만약에 이 순간에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지 않았다면 요셉이 애굽을 향하는 미디안 상인의 손에 팔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단은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20-30km 떨어진 곳이었다. 적어도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형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도리어 광야의 위험속에서는 그는 안전할 수 있었지만 도리어 보호를 받아야하는 형들로부터 노예상인들에게 팔리는 운명이 된다. 

 

 

18-24절) 형들은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오는 요셉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계략을 짠다. 서로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말하며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하자고 하였다. 이를 장남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고 광야 구덩이에 던져 넣고 손에 피를 흘리지 말자라고 한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자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요셉의 꿈으로 인한 상처가 형들에게는 컸다. 그래서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며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르우벤은 요셉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장자로서의 신임을 받기 위한 것이었는지, 형제에 대한 연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다행히 르우벤의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게 되었다. 

 

본문에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라는 표현은 형들이 요셉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다. 본문의 꿈 꾸는 자는 ‘바알 하 할로못’으로 '꿈들의 통치자, 꿈들의 주인’(the lord of dream)이란 의미이다. 본문의 ‘바알’이 주인, 소유자, 남편, 바알 신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할로못’은 ‘할롬’ 꿈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꿈꾸다(할람)은 27번, 꿈(할롬)은 65번 사용된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할람’이 22번 사용되었다. 이 꿈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1) 행복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수면중에 꾸는 일반적인 꿈(시 126:1; 사 29:7-8; 전 5:7), 2) 거짓 선지자나 헛된 몽상가들의 악한 생각으로부터 온 거짓 혹은 상상의 꿈(렘 23:25, 32; 27:9-10; 29:8; 슥 10:2), 3) 하나님의 뜻과 어떤 장래의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적 성격의 꿈이 있다(창 20:3; 28:12; 민 12:6; 왕상 3:5; 단 2:28). 앞서 요셉의 꿈은 세번째 성격이 강하다. 

- חָלַם (ḥālam II), q. dream, revelatory dream; hi. dream (Jer 29:8) (#2731); חֲלוֹם (ḥalôm), nom. dream, revelatory dream (#2706); Aram. חֵלֶם (ḥēlem), nom. dream, revelatory dream (#10267). Ugar. and Arab. use the root חלם meaning dream, but other ANE languages derive this word from other roots (TDOT 4:421–27).

ANE Individuals in Egyptian (Thutmose IV; Merneptah), Mesopotamian (Gilgamesh, Nabonidus), Hittite (Kessi; Hattushilis), Ugaritic (Dan’el; Keret), Greek (Homer), and biblical (Abimelech of Gerar; Nebuchadnezzar) texts testify to the importance of dreams to non-Israelites. The person who dreamed frequently believed that his dream was revelations from a god or an evil spirit. While some dreams included clear messages, others contained bizarre and symbolic images that needed to be interpreted, usually by a professional dream interpreter. Dream books were compiled to help the interpreters explain the significance of the images or action within dreams. At times individuals tried to have a dream (incubation, through sleeping at the temple), but other dreams were unsolicited (cf TDOT 4:421–26; Gnuse, The Dream Theophany of Samuel, 1984, 11–38; Oppenheim, Interpretation of Dreams in the Ancient Near East, 1956).

OT 1. The Heb. vb. חָלַם occurs 27×, and the nom. חֲלוֹם is used 65× in the OT. The Aram. portion of Daniel uses the nom. חֵלֶם 22×. These dreams can be divided into three groups: (a) natural dreams that reflect the happy or difficult situations of life and are a common part of sleeping at night (Ps 126:1; Isa 29:7–8; Eccl 5:7 [6]; (b) untrue or imaginary dreams from the evil thoughts of a false prophet or empty dreamer (Jer 23:25, 32; 27:9–10; 29:8; Zech 10:2); and (c) revelatory dreams from God, which reveal his will or some future event (Gen 20:3; 28:12; Num 12:6; 1 Kgs 3:5; Dan 2:28). While some dream reports contain only an oral message and have no indication that the person dreaming saw any objects or persons (Gen 20:3, 6; 31:24) this may be due to the biblical author’s wish to omit the unnecessary details and report only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dream. Most dream reports include literal (Gen 31:10) or highly symbolic objects or events (Gen 37:5–7, 9–11; 40:9–19; 41:1–7). (Apocalyptic Literature) When the meaning of the symbolism was unclear, a divine explanation could be provided by a specially gifted person (Joseph; Daniel) who had the ability to interpret dreams (Gen 40:8; Dan 2:28). In a few cases the person having the revelatory dream appears in the dream (Gen 41:17) or dialogues with God in the middle of the dream (1 Kgs 3:5–15). God, the angel of God, or a holy one may speak in a dream. Revelatory dreams and visions were not sharply distinguished (Num 12:6; Job 20:8; 33:15; Dan 7:1–2), but it may be significant that references to dreams are concentrated in Genesis and Daniel when Israelites were living among Gentiles who believed that dreams were a legitimate way of receiving a divine messages (nbʾ, prophecy, #5547). Although relatively few were privileged to receive divine revelations through a dream in the OT, in the future kingdom God will abundantly pour out his Spirit upon all people (some will demonstrate this through dreams or visions; Joel 2:28; cf. Acts 2:17–21).

2. God gave revelatory dreams in order to warn people (even non-Israelites who were the enemies of his people) of evil deeds or attitudes (Gen 20:3; Dan 4:27), to reveal his will concerning the future (Gen 40:9–23), to assure people of his presence with them and his care for them (Gen 31:10; Judg 7:13–15), to test whether people really love God and are willing to keep his commandments (Deut 13:1–5), to show God’s superiority over the ANE gods, and to raise up his servants to positions of authority (Gen 40–41; Dan 1–2; 4).

3. The false prophets, diviners, and dreamers claimed to have revelatory dreams from the Lord, but their words were lies, useless advice that led the people astray (Deut 13:1–5; Jer 23:25–32; 27:9; 29:8–9; Zech 10:2). These prophets where speaking the imaginations of their own hearts and words of peace and victory that the people wanted to hear, not the word of God from his divine council (Jer 23:21–22; 29:1–10).

4. Dreams are used in similes to refer to something that is fleeting or ephemeral (Job 20:8; Ps 73:20).

q. qal

hi. hiphil

Ugar. Ugaratic

ANE Ancient Near East(ern)

TDO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ed. G. J. Botterweck, H. Ringgren, and H.-J. Fabry, tr. J. T. Willis, Grand Rapids, 1974–(ET of TWAT)

ANE Ancient Near East(ern)

TDO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ed. G. J. Botterweck, H. Ringgren, and H.-J. Fabry, tr. J. T. Willis, Grand Rapids, 1974–(ET of TWAT)

ANE Ancient Near East(er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53–155.

 

형제들은 멀리서 오는 요셉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로 채색옷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특별한 애정이 지금은 요셉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요셉을 멀리서 알아 볼 수 없었다면 형들이 요셉을 해할 음모를 꾸밀 시간적 여유가 없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후 42장에서 요셉이 총리로서 애굽에서 형들을 만나는 사건을 알고 있다. 본문에서 먼저 형들은 요셉을 보았고 음모를 꾸몄고 죽이기로 작정했다.(37:18) 훗날 요셉은 형들을 보았고(42:7)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을 꾸몄고(42:8) 형들을 죽이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42:20) 

 

20절에서 형들은 요셉을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형들은 요셉의 꿈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요셉을 죽여서 그가 꾼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하도록 막겠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구덩이(보르)는 구덩이, 웅덩이, 죽은자의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우기 빗물을 모았다가 건조기에 짐승과 사람이 마실 수 있게 하는 물 저장 탱크를 말한다. 흔히 석회석을 파낸 웅덩이 혹은 땅을 파내고 물이 새지 않도록 안쪽에 석회나 진흙을 바르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것은 깊이가 2 미터, 큰 것은 8미터에 달했다. 물이 없을 때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곳이며 완전히 마르지 않은 깊은 웅덩이들은 진흙수렁으로 인해 갇혀 있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cf 렘 38:6). 저자는 이 구덩이가 비어 있었고 그 안에 물이 없었다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24), 요셉이 이 물 웅덩이 속 진흙탕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또 웅덩이 물이 없었다는 것은 위에서 물을 내려 주지 않으면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셉은 웅덩이에 물이 없어서 살았지만, 또 물이 없어서 죽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물 없는 웅덩이에 홀로 갇힘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웅덩이가 말라 있었다는 정보는 이미 12절 주해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때 이 지역에 가뭄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요셉이 이 마른 웅덩이에 계속 감금되어 있게 되면 물에 빠져 죽을 위험은 없겠지만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어서 죽게 된다. 게다가이 웅덩이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광야에 있었으니 그가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구덩이를 빠져나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러므로 당장 형들의 손에 죽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매우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665)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꿈을 막기 위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고, 노예로 팔아넘긴 바로 그 일이 그 꿈의 성취를 이루는 행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일들이 적시에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진행되면서 그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의 계략을 구원의 방법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다. 

 

19–20  I translate baʿal haḥalōmôṯ (lit., “master of dreams”) as master dreamer to indicate that in the mouths of his brothers such a designation is blatantly sarcastic. Heb. baʿal need not contain such a nuance; it may be simply a noun of relation.15 The whole expression would then be equivalent to “dreamer.” I feel, however, that to translate the expression simply as “dreamer” misses the irony of the brothers’ phrase. Heaped on Joseph as a scornful phrase, the expression will later be an appropriate title for Joseph (chs. 40 and 41), who will emerge as master and interpreter of the dreams of others. Note von Rad’s understanding of this phrase along the same lines: “the one empowered to prophetic dreams.”16

Their original plan is to throw Joseph’s corpse into one of the cisterns near Dothan. Perhaps the translation throw for šālaḵ in vv. 20, 22, 24 is inaccurate. The brothers will not “toss” Joseph into a cistern. When used with a person as its object, šālaḵ almost always refers to the placing of a dead body in a grave (e.g., 2 Sam. 18:17; 2 K. 13:21; Jer. 41:9) or to the placing of a living body into what is assumed will be its grave (e.g., Gen. 21:15; 37:24; Jer. 38:6).17 But note that,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Gen. 21:15 and 2 K. 13:21, all these verses refer to the hurried and careless placement of individuals (e.g., Absalom, 2 Sam. 18:17; Jeremiah, Jer. 38:6) who are held in contempt by those who place them.

The brothers are infuriated not only by Joseph’s tattling on some of them to their father (v. 2b), nor only by his possession of a special garment (v. 4), but especially by his grandiose dreams (vv. 7, 9; cf. vv. 19, 20). They identify Joseph not as a favorite of their father, nor as a bearer of tales, but as a “master dreamer.” It is his dreams that their plan will sabotage.

The explanation they devise to cover their own crime—and Jacob will certainly ask about Joseph—is that a wild beast devoured him. The Hebrew for wild beast is ḥayyá rāʿá (lit., “evil beast”). In v. 2b we read that Joseph brought tales (dibbāṯām rāʿá) to his father about several of his brothers. Thus rāʿá occurs twice in this chapter; first Joseph is the author or source of the rāʿá, then he is the victim of the rāʿá. Joseph, himself despicable as far as his brothers are concerned, will meet a rapacious beast, at least in the story the brothers will hatch. Joseph, who dreamed of himself “standing” before his prostrated brothers (qûm, v. 7), is now to be thrown (or lowered, šālaḵ) by his brothers into his grave.

15 See n. 2 above.

16 Von Rad, Genesis p. 353.

17 See H. C. White, “The Initiation Legend of Ishmael,” ZAW 87 (1975) 28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7–418.

 

25-28절)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은채 형제들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상인으로 낙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유대가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는 것보다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손대지 말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아 넘긴다. 이에 상인들은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동생이 구덩이에서 울부짖고 있는데 형들은 지금 그 옆에세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다. 형들의 완악함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창 42:21에는 야곱이 애걸했다라고 말한다. 

창세기 42:21 (NKRV)

21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또한 형들이 자신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길 때 요셉을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을 것이다. 이번에 살려주면 다시는 형들을 고자질하지 않는,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착한 동생이 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형들은 듣지 않았다. 본문에는 요셉의 직접적인 반응이 등장하지 않지만 28절에서 요셉의 이름을 세번 언급함으로 요셉의 비극을 극대화 하고 있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내고, 그를 이스라멜 사람들에게 팔았고,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갔다. 

이 상인들은 이스마엘 사람들로 미디안 상인들이었다. 당시 길르앗에서 애굽을 오가며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본문에서는 이스마엘과 미디안 사람들이 서로 교차해서 사용되고 있다. 미디안 사람들은 광야에 살던 모든 사람들의 호칭으로, 그 중에 이스마엘이 한 족속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삿 8:22-24에서는 이스마엘과 미디안이 같은 인종을 칭하며 교차해서 사용할 수 있는 비슷한 말로 사용된다. 

사사기 8:22–24 (NKRV)

22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23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4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본문에서 유다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상인에게 팔아넘기자고 한 것도 요셉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한 연민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이복동생 요셉을 팔아서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 탐심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노예의 값은 15-30세겔 정도였고,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노예의 값이 20세겔로 정해져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많은 노예들이 전쟁 포로로 잡혀와서 거래되었다. 

 

28  Joseph is sold for twenty pieces of silver to these traders. This was the average price for a male slave in Old Babylonian times (early 2nd millennium b.c.). The price gradually goes higher. At Nuzi (mid-2nd millennium) it was thirty shekels (for both male and female). At Ugarit (mid- to late 2nd millennium) it was forty shekels. In Neo-Babylonian times (1st millennium) it was fifty shekels. In Persian times (late 1st millennium) the price was ninety to one hundred and twenty shekels.16 These are, of course, the general standards from which there were many departures. Joseph’s sale for twenty shekels fits perfectly with the amount a man was to give to the sanctuary if he vows himself or one of his male relatives between the ages of five and twenty (Joseph is seventeen) to the Lord (Lev. 27:5).17

It is widely assumed that this section of Gen. 37 presents the clearest evidence for a conflation of two accounts of the Joseph story. Scholars use three points to substantiate that position. First, here Judah is Joseph’s mediator (vv. 26–27, J), rather than Reuben (vv. 21–22, E). Second, the text shifts back and forth on who actually took Joseph—Midianites (E) or Ishmaelites (J). Third, if the verses under consideration are from one source, then Reuben heard Judah’s proposal to sell Joseph and was present when Joseph was actually sold. Why, then, is he shocked (vv. 29–30) when he returns to find the well empty? These three observations have led to the conclusion that in 37:25ff. we have the following two strands: J, vv. 25–27, 28b; E, vv. 28a, 29–30.18 This breakdown explains, so it is assumed, all the inconsistencies within the text of 37:25–30.

Let us examine another possibility that does not follow the J-E analysis. Judah is not convinced that Reuben’s suggestion is an improvement over the original plan. The brothers have two ways to kill Joseph—immediately or gradually, the brothers’ way or Judah’s way. Of course, Judah is not aware of Reuben’s intentions. Accordingly, he suggests a less hostile proposal—do not kill our brother in any way; rather, sell him to some barterers.

These traders are identified as Midianites and Ishmaelites. Judg. 8:22–28 state clearly that Midianite and Ishmaelite are overlapping, identical terms.19 In other words, the two names were used interchangeably to refer to North Arabian caravaneers who branched off through Gilead (v. 25) from the main transport route on the way to Egypt. This would be but one episode of pastoral groups repeatedly journeying from Northern Arabia and southern Canaan to Egypt, bringing their products of incense to sell at the Pharaoh’s court.20 That Judg. 8:24 in particular equates Ishmaelites with Midianites suggests that in Gideon’s time at least “Midianites” represented a confederation of tribal groups.21 The interchange of “Ishmaelites” and “Midianites” in Gen. 37 suggests that at one time the Ishmaelites were the most prominent confederation of nomads in southern Palestine, and that their name might be attached to and linked with other groups. This would mean that “Ishmaelite” in Gen. 37 is not primarily an ethnic designation but is a catchall term for nomadic travelers. Thus “Ishmaelite” is the more generic term (Bedouin nomad), while “Midianite” is the more specific and ethnic term.

Does the text provide any evidence for this theory? Why identify this new group first by a more general term (v. 25), and then subsequently re-identify them by a different and more specific term (v. 28a)? To answer the first question, I would point to the phrase ʾōreḥaṯ yišmeʿēʾlîm in v. 25, which I have translated “a caravan of Ishmaelites.” One might also render it “an Ishmaelite [i.e., nomadic] caravan,” implying a general name for this group. Who constitutes this ambiguous group of caravaneers is made clear by v. 28a: ʾanāšîm miḏyānîm sōḥarîm, “Midianite men, merchants.”

To answer the second question, note that vv. 18–24 follow the same progression of description as vv. 25–28. First, Joseph (v. 18) and the Ishmaelite caravan (v. 25) are observed approaching the brothers from a distance. Second, Joseph (vv. 19–22) and the caravaneers (vv. 26–27) are talked about by the brothers before either meets the brothers. Third, when Joseph and the Ishmaelites do meet the brothers, the brothers go into action, stripping Joseph and casting him into a cistern (vv. 23–24), and eventually selling Joseph to the Ishmaelites (v. 28). The last unit, vv. 25–30, describes the group that the brothers saw on the horizon, and for this distant sighting it uses the more general term. From afar they appeared to be a group of Bedouin nomads. When this group subsequently comes into closer view they are identified as Midianites.22

This interpretation raises considerably the possibility that the subject of “pulled up” and “sold” in v. 28 is the brothers. As these Ishmaelite caravaneers (i.e., Midianite merchants as they come into focus) pass by, Joseph’s brothers pull him up from the cistern and sell him to these passers-by.23

16 The figures are from I. Mendelsohn, Slavery in the Ancient Near East (New York: Oxford, 1949), pp. 117–18. See also K. C. Hanson, “Slavery,” ISBE, 4:541, who notes the inflation in price throughout the OT from 20 shekels (Gen. 37:28), to 30 in the Covenant Code (Exod. 21:32), to 50 even later (2 K. 15:20).

17 See G. J. Wenham, “Leviticus 27:2–8 and the Price of Slaves,” ZAW 90 (1978) 264–65; idem, Book of Leviticus,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79), p. 338, who suggests that the rationale for the scale in Lev. 27:2–8 is that it represents the price of slaves of different age and sex in Israel.

18 See Jenks, The Elohist and North Israelite Traditions, pp. 28–29. Speiser (Genesis, p. 291) speaks for many when he says of v. 28: “This single verse alone provides a good basis for a constructive documentary analysis of the Pentateuch.” Similarly D. B. Redford (A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Genesis 37–50], VTSup 20 [Leiden: Brill, 1970], p. 145) says: “Generations of Bible students have utilized this discrepancy as a show piece for demonstrating the validity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19 See K. A. Kitchen, Ancient Orient and Old Testament (Chicago: Inter-Varsity, 1966), pp. 119–20; S. Talmon, “The Presentation of Synchroneity and Simultaneity in Biblical Narratives,” Scripta Hierosolymitana 27 (1978) 18–19; M. Anbar, “Changement des noms des tribus nomades dans la relation, d’un même événement,” Bib 49 (1968) 221–32. The incisive contribution of Judg. 8:22–28 to the Ishmaelite/Midianite issue in Gen. 37 was observed as early as Gunkel’s 1st ed. of Genesis in 1901 (here I refer to the 6th ed., p. 409).

20 See A. Musil, The Northern Ḥeǧâz (New York: AMS, 1926), pp. 282–83; P. E. Newberry, Beni Hasan I (London: K. Paul, Trench, Trübner, 1893), pp. 69, 72, plates xxviii, xxx, xxxi, xxxviii; A. A. Saleh, “An Open Question on Intermediaries in the Incense Trade during Pharaonic Times,” Or 42 (1973) 378.

21 R. Boling, Judges,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75), p. 160.

22 Longacre, Joseph, p. 31.

23 Ibid., p. 155. He suggests that if the Midianites of v. 28a are a separate and new group of participants, then we would “expect that Hebrew participant introduction and integration … would introduce them not once but twice and in the process would name them as the unambiguous subject of the verbs.”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22–424.

 

29-36절)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길 때 르우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자 르우벤은 자신의 옷을 찢고 애통해 한다.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에 피를 적시고 아버지에게로 가져가서 그것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요셉의 옷인지 확인해달라고 말한다. 아버지 야곱이 그것을 알아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며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르 묶고 애통해 했다. 야곱의 자녀들이 위로하되 그 위로를 받지 않으며 슬퍼하며 요셉을 따라가겠다라고 하며 슬퍼했다. 

그 미디안 상인들은 애굽에서 요셉을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극심한 고뇌와 아픔을 경험할 때 이와 같이 옷을 찢는 행위가 동반된다. 르우벤의 애통해함은 요셉을 잃어버린 것 때문인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을 기회를 놓쳐서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형제들은 숫염소를 사용해서 아버지를 속인다. 이는 이전에 야곱이 자신의 아버지 이삭을 속인 행위와 매우 비슷하다. 그 때 야곱은 에서의 옷과 염소 새끼 가죽을 이용해서 이삭을 속였다.(27:15-16) 결국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에 묻은 채색옷으로 이를 확인한 야곱은 자기의 옷을 찟으면서 슬퍼하며 위로를 받지 않았다. 옷을 찢는 전통은 지금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지되고 있는데 부모가 죽었을 때는 왼쪽 옷자락을, 그 외 가까운 친족이 죽었을 때는 오른 쪽 옷자락을 최소한 10cm 찢어야 한다. 옷을 찢어야 하는 가까운 친족들에 대한 정의는 레 21:1-3에 나와 있다. 

 

36절에서 요셉은 애굽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보디발은 고위직의 죄인들을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나중에 요셉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갇히게 되는데 이곳에서 꿈을 해몽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노예로 팔려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그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36  While Jacob is mourning for Joseph, the Midianites sold Joseph in Egypt to Potiphar, one of the pharaoh’s officials. The subjects of vv. 35b and 36a are placed side by side in the Hebrew text (ʾāḇîw wehammeḏānîm, lit., his father and the Midianites). The effect created by this juxtapositioning of the subjects, separated only by a waw (“and”), is to stress the simultaneous action of the two subjects on Joseph. This is the reason why I retain the translation of waw as And (a literal reading of the Hebrew parataxis; so also AV) instead of the more common “Meanwhile” (so RSV, NIV, NEB, JB, NAB). Alter states: “In this cunningly additive syntax, on the same unbroken narrative continuum in which Jacob is mourning his supposedly devoured son, Midianites are selling the living lad.”19

the Midianites. It may well be that “Medanites” is simply an alternative writing for “Midianites.”20 Note that in Gen. 25:2 Medan (meḏān) and Midian (miḏyān) are brothers. Medianites are mentioned only in 25:2 and 37:36.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elsewhere in the Hebrew Bible (Prov. 6:19; 10:12), meḏānîm (the same cluster of consonants in Gen. 37:36) has the meaning “discord, quarrels.” Prov. 6:19 is instructive: among the seven things that God hates are a false witness breathing out lies, and one “who sows discord [meḏānîm] among brothers” (RSV). At the heart of the trouble in Gen. 37 is discord among brothers, meḏānîm.21

AV 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JB Jerusalem Bible

NAB The New American Bible

19 Alter, Art of Biblical Narrative, p. 5.

20 So Speiser and others. See n. 13 abov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21 See Y. T. Radday, “Humour in Names,” in On Humour and the Comic in the Hebrew Bible, ed. Radday and A. Brenner, JSOTSup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0), pp. 69–7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2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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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s Dreams

37 Jacob lived in gthe land of his father’s sojournings, in the land of Canaan.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Jacob.

Joseph, being seventeen years old, was pasturing the flock with his brothers. He was a boy with the sons of Bilhah and Zilpah, his father’s wives. And Joseph brought ha bad report of them to their father. Now Israel loved Joseph more than any other of his sons, because he was ithe son of his old age. And he made him ja robe of many colors.1 But when his brothers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others,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fully to him.

Now Joseph had a dream, and when he told it to his brothers they hated him even more. He said to them, “Hear this dream that I have dreamed: Behold, we were binding sheaves in the field, and behold, kmy sheaf arose and stood upright. And behold, your sheaves gathered around it and lbowed down to my sheaf.” His brothers said to him, “Are you indeed to reign over us? Or are you indeed to rule over us?” So they hated him even more for his dreams and for his words.

Then he dreamed another dream and told it to his brothers and said, “Behold, I have dreamed another dream. Behold, the sun, the moon, and eleven stars were bowing down to me.” 10 But when he told it to his father and to his brothers, his father rebuk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dream that you have dreamed? Shall I and myour mother and your brothers indeed come nto bow ourselves to the ground before you?” 11 And ohis brothers were jealous of him, pbut his father kept the saying in mind.

g See ch. 36:7

h [1 Sam. 2:23, 24]

i ch. 44:20

j ver. 23, 32

1 See Septuagint, Vulgate; or (with Syriac) a robe with long sleeves. The meaning of the Hebrew is uncertain; also verses 23, 32

k ch. 42:6, 9

l ch. 43:26; 44:14

m [ch. 35:18]

n ver. 7, 9

o Acts 7:9

p [Luke 2:19, 5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7:1–11.

 

37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7:1–11.

 

 

요셉의 인생에 중요한 주제는 꿈과 옷이다. 

요셉은 인격적인 변에서도 아무 아쉬움이나 거리낌없이 의롭게 살았던 가장 훌륭한 이스라엘의 선조였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더 ‘꿈을 먹고 살았다.’ 비록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고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지만, 그는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꿈을 해몽하는 은사까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감옥에 투옥된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해 주었고(40장) 이 일이 근거가 되어 나중에는 바로가 문 꿈을 해몽해 주게 된다"(41 장). 결국 요셉은 꿈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는 역사를 이루어 냈다.

또한 요셉의 이야기는 옷들의 행진으로 묘사될 수 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께 ‘존귀의 옷’을 받았다(37:3). 이 옷을 입은 그는 형제들 사이에 ‘으뜸’이 되고자 했다(37:5-11). 형제들은 그의 ‘존귀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노예의 옷을 입혔다(37:23). 그리고 그를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다"(37:28). 그의 주인이 된 보디발은 요셉에게 노예 옷을 벗고 그의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의 옷’을 입도록 했다(39:4). 그러나 요셉의 안주인은 그의 옷을 벗겨 버렸다(39:12). 그리고 그에게 ‘죄인의 옷을 입혔다(39:20). 세월이 지나 그는 죄수의 옷을 벗고 ‘총리의 옷’을 입게 된다"(41:42). 옷은 이렇게 요셉의 일생을 요약해 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므로 옷과 연관해서 생각할때 그가 훗날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야곱과 반 인질로 이집트로 꿀려온 동생 베냐민에게 옷’을 선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45:22). 그의 삶의 여러 시대를 가장 쉽게 요약하는 것이 그가 입은 다양한 옷이었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난 요셉이 가족들에게 옷을 선물했다는 것은 곧 그가 가족들에게 ‘자신을 드린 것’을 뜻한다.(엑스포지멘터리 647)

 

 

 

1-4절) 1절은 야곱이 가나안 땅 그의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앞서 에서가 세일 산에 거주하였다면 야곱은 아버지가 거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야곱의 족보중에 요셉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제 요셉이 17살이 되었다. 그는 형들과 양을 치면서 이복 형들(빌하(단, 납달리)과 실바(갓, 아셀)의 아들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 앞서 계산한 족장의 연표를 통해서 볼 때 야곱의 나이는 108세, 할아버지 이삭의 나이는 168세 정도였을 것이다. 이삭이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생각되지만(35:27-29) 이삭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후로도 12년을 더 살았다. 

야곱은 요셉이 형들에 대해 고자질 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이복 형들과의 갈등이 더 깊어졌을 것이고 또한 요셉을 편애함으로 채색옷을 그에게만 지어 입혔다. 그로 인해서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다. 

 

부모가 이렇게 한 자녀만을 편애할 때 문제가 생긴다. 형을 고자질 하는 동생, 잘 들어줄 필요도 있지만 고자질 하는 것의 문제점도 알려줘야만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채색옷은 삼하 13:18-19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는 예쁜 색깔의 물감을 들인 화려한 옷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옷들보다 훨씬 더 길어서 자태를 드러내는 예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는 옷의 색깔보다는 옷감과 그 길이가 사람의 신분을 반영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야곱에 요셉에게만 명품 옷을 입게 했다는 것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본인이 진정 사랑했던 라헬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으로 인해서 그녀의 아들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4절의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라는 표현은 새번역으로는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라는 의미이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자식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 채색옷

To that end he engages his tailoring skills (a reflection of Jacob as an ʾîš tām, 25:27?), and makes a special article of clothing for Joseph, a long colorful tunic. The Hebrew phrase for this covering is keṯōneṯ passîm. There is no problem with the translation of keṯōneṯ; the use of “coat” or “long robe” or tunic is quite acceptable, for this word describes a garment worn by a man or by a woman. The problem is encountered with passîm, which occurs only here (37:3, 23, 32, with passîm preceded by the definite article in vv. 23 and 32), and in 2 Sam. 13:18, 19 (the only other instance of the phrase keṯōneṯ [hap]passîm).

The source of AV “coat of many colors” is LXX chitṓna poikílon, “a multicolored frock,” and Vulg. tunicam polymitam. The source behind RSV “a long robe with sleeves” is Aquila’s rendering of passîm by astrágalōn, “(a frock) reaching to the ankles).”

Support for this second reading may be found in two areas. One way is to connect passîm with postbiblical pas, which means the “flat of the hand” (i.e., the palm) and “the flat of the foot” (i.e., the sole). pas as “palm” appears in the Aramaic of Daniel (Dan. 5:5, 24). Thus a keṯōneṯ passîm would be a covering extending to the palms and soles. Furthermore, 2 Sam. 13:18 (LXX) renders keṯōneṯ passîm as chitṓn karpōtós, “a frock with sleeves extending to the wrists.”

Another attempt has been made to connect Heb. passîm with ʾep̄es, “end, extremity,” and with ʾop̄sāyim, “ankles” (cf. Ezek. 47:3). Thus, a keṯōneṯ passîm is a garment extending to the extremities of one’s body (hands and feet).27 Support for the equation of pas and ʾep̄es may be found in the place name Ephes-dammim (1 Sam. 17:1), which is called Pas-dammim in 1 Chr. 11:13.

Those who appeal to cognate languages for elucidation of passîm have been less than convincing in their proposals. For example, G. Mendenhall appeals to Ugaritic, and in particular to the Baal-Yamm conflict in which Yamm’s messengers say to the assembled pantheon

Deliver, O gods, the one whom you obey,

whom the multitudes obey;

Deliver Baʿal and his ʿanan,

The son of Dagon, I shall succeed to his paz [or paḏ].28

Scholars have translated the last two lines quite differently: (1) “Give up Baal [and his partisans]; Dagon’s Son, so that I may inherit his gold”;29 (2) “Give Baal [to me to lord over], Dagon’s son whose spoil I’ll possess”;30 (3) “Give up Baal [and his lackeys], the son of Dagon that I may possess his gold.”31

Mendenhall avoids either “gold” or “spoil” for paḏ, and prefers to connect it with Akk. melammū and puluḫtu, that glory surrounding the deity which provokes fear or awe. For Mendenhall, then, the robe given to Joseph is to be associated with social or political status. The “dazzling” robe marks Joseph as a superior to his brothers. As appealing as Mendenhall’s suggestion is, it falls principally on the ground that the equation of Heb. pas with Ugar. paḏ is most unlikely due to the lack of correspondence between Heb. s and Ugar. , to say nothing of the uncertain nature surrounding the actual meaning of paḏ.

Speiser links keṯōneṯ passîm with Akk. kitu pišannu, a ceremonial robe draped about statues of goddesses and studded with gold ornaments.32 This background may provide some basis for the translation “coat of many colors.” Also possibly related is Phoenician ps, “tablet, piece,” suggesting a garment made of pieces of material sewn together. Finally, we note the possible connection with Akk. paspasu, “brightly colored bird.”

Ancient Mediterranean art provides us with ample illustrations of richly colored clothing. One thinks of the clay figures from Ur, some of which were “human figures clad in a garment composed of a pointed hat and a long robe painted with scales.”33 The Beni-hasan tomb painting (ca. 1800 b.c.) picturing thirty-seven Semites, all dressed in bright, colorful garments, on their way to Egypt is worthy of consideration here.34

A mural fresco from the palace of Zimri-Lim at Mari (ca. 18th century b.c.) reveals a garment made of small rectangular panels of multicolored cloth sewn together into a wide strip and wound around the body like a sari. The next distinctive men’s garment style after this was a sari-like robe edged with fur (16th-15th century b.c.).35 The parallel between the Mari garment and Joseph’s keṯōneṯ passîm argues, indirectly at least, for an early date for the Joseph story.

AV 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LXX Septuagint

Vulg. Vulgat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LXX Septuagint

27 See McCarter, II Samuel, p. 325.

28 G. Mendenhall, The Tenth Generatio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1973), pp. 54–55, referring to UT, 137:18–19, 34–35. The Ugaritic consonant (which Mendenhall transliterates as z) is equivalent to Hebrew z, not s.

29 See C. H. Gordon, Ugarit and Minoan Crete (New York: Norton, 1966), p. 44.

30 See H. L. Ginsberg, ANET, p. 130.

31 See J. C. L. Gibson, Canaanite Myths and Legends, rev. ed. (Edinburgh: T. & T. Clark, 1978), p. 41.

Akk. Akkadian

Ugar. Ugaritic

Ugar. Ugaritic

Akk. Akkadian

32 See Speiser, Genesis, p. 290. See A. L. Oppenheim, “The Golden Garments of the Gods,” JNES 8 (1949) 172–93 (“pišannu was reserved—in the Neo-Babylonian period—exclusively for the clothing of images. It is often made of linen, but dyed wool … is used for its decoration,” p. 179).

Akk. Akkadian

33 H. W. F. Saggs, The Greatness that was Babylon (London: Sidgwick and Sidgwick, 1962), p. 314; E. C. B. MacLaurin, “Joseph and Asaph,” VT 25 (1975) 33–34.

34 For a black-and-white reproduction see ANEP, no. 3; for a color reproduction see Y. Yadin, The Art of Warfare in Biblical Lands, tr. M. Pearlman, 2 vols. (New York: McGraw-Hill, 1963), 1:166–67; J. D. Douglas, et al., eds.,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3 vols. (Wheaton: InterVarsity, 1980), 1:421.

35 See W. F. Albright, “From the Patriarchs to Moses: I. From Abraham to Joseph,” BA 36 (1973) 31–32.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07–409.

 

5-11절) 요셉의 꿈

지금까지 창세기에 나오는 꿈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셔서 말씀하셨다.(20:3: 28:12-15; 31:11, 24) 그런데 요셉의 꿈에서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 

5-8절) 요셉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신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자신의 단을 둘러서 절을 했다라고 말한다. 이 꿈은 해몽도 필요없는 너무나도 분명한 꿈이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네가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라고 말하며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9-11절) 요셉의 두번째 꿈은 하늘의 해와 달과 11별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요셉은 이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이 그를 꾸짖고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형들은 요셉을 더욱 시기하게 되었고 아버지 야곱은 그 말을 간직해 두었다. 야곱이 이를 마음에 간직해 둔 것은 마리아를 연상시킨다.(눅 2:19, 51)

형들은 요셉의 꿈이야기를 듣고 시기했다면, 야곱은 이를 꾸짖었지만 이를 마음에 간직해 두었다. 

 

요셉은 너무 사랑을 받으며 자라서 어찌보면 버릇없어 보인다. 요셉의 꿈이 거짓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 꿈을 이야기할 때 이것이 듣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하나님의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의 교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고 꿈이고 예언, 환상일수 있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를 지혜롭게 전달해야만 한다. 본문 4, 5, 8절에서 세번에 걸쳐서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라고 표현하는데 요셉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 ‘싸네’라는 단어는 미워하다, 증오하다, 가증히 여기다라는 표현이다. 

 

본문에서 이미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사망한 이후이다. 그렇다면 이기 등장하는 달은 레아나, 빌하일 것이다. 요셉의 꿈은 이후에 분명하게 이루어지지만 당시 이 꿈을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집안의 모든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화를 낼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형제들간의 갈등 상황을 계속 접하게 된다.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야곱의 아들들. 결국 이 형제들간의 갈등의 문제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문제에 기인한다. 문제 있는 아이는 없다. 문제 있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가족 안에 이런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통로로 사용하고 계신다. 

 

 

또한 요셉의 꿈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가 꼭 두 개씩 꿈을 꾼다는 것이다. 이는 꿈을 통해 암시된 일이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꿈꾸는 자는 죽지만 꿈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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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yThese are the sons of zSeir the Horite, the inhabitants of the land: Lotan, Shobal, Zibeon, Anah, 21 Dishon, Ezer, and Dishan; these are the chiefs of the Horites, the sons of Seir in the land of Edom. 22 The sons of Lotan were Hori and Hemam; and Lotan’s sister was Timna. 23 These are the sons of Shobal: Alvan, Manahath, Ebal, Shepho, and Onam. 24 These are the sons of Zibeon: Aiah and Anah; he is the Anah who found the hot springs in the wilderness, as he pastured the donkeys of Zibeon his father. 25 These are the children of Anah: Dishon and aOholibamah the daughter of Anah. 26 These are the sons of Dishon: Hemdan, Eshban, Ithran, and Cheran. 27 These are the sons of Ezer: Bilhan, Zaavan, and Akan. 28 These are the sons of Dishan: Uz and Aran. 29 These are the chiefs of the Horites: the bchiefs Lotan, Shobal, Zibeon, Anah, 30 Dishon, Ezer, and Dishan; these are the chiefs of the Horites, chief by chief in the land of Seir.

31 cThese are the kings who reigned in the land of Edom, before any king reigned over the Israelites. 32 Bela the son of Beor reigned in Edom, the name of his city being Dinhabah. 33 Bela died, and Jobab the son of Zerah of Bozrah reigned in his place. 34 Jobab died, and Husham of the land of the Temanites reigned in his place. 35 Husham died, and Hadad the son of Bedad, who defeated Midian in the country of Moab, reigned in his place, the name of his city being Avith. 36 Hadad died, and Samlah of Masrekah reigned in his place. 37 Samlah died, and Shaul of dRehoboth on the Euphrates2 reigned in his place. 38 Shaul died, and Baal-hanan the son of Achbor reigned in his place. 39 Baal-hanan the son of Achbor died, and Hadar reigned in his place, the name of his city being Pau; his wife’s name was Mehetabel, the daughter of Matred, daughter of Mezahab. 

40 These are the names of the chiefs of Esau, according to their clans and their dwelling places, by their names: the chiefs Timna, Alvah, Jetheth, 41 Oholibamah, Elah, ePinon, 42 Kenaz, Teman, Mibzar, 43 Magdiel, and Iram; these are the chiefs of Edom (that is, Esau, the father of fEdom), according to their dwelling places in the land of their possession. 

 

y For ver. 20–28, see 1 Chr. 1:38–42

z ch. 14:6; Deut. 2:12, 22

a ver. 2

b ver. 20

c For ver. 31–43, see 1 Chr. 1:43–54

d [ch. 26:22]

2 Hebrew the River

e [Num. 33:42]

f ver. 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6:20–43.

 

 

20 ◎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22 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23 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24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25 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26 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27 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28 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 

29 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었더라 

 

에돔의 왕들 (대상 1:43–54)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2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33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4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5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7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8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9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40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6:20–43.

 

 

20-30절) 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아들들과 족장들과 그의 자녀들

 

  • Two genealogies of Esau’s sons (vv. 9–14, 15–19) are now followed by a genealogy of the sons of Seir the Horite. According to Deut. 2:12 the Horites (= Hurrians?)4 were the original occupants of Edom but were later dispossessed and destroyed by the descendants of Esau. What Israelites did to Canaanites, Esauites did to Horites. Thus Gen. 36 is moving backward from the conquerors (vv. 9–19) to the conquered (vv. 20–30).

  • 4 Believing Heb. ḥōrî to be ambivalent, Speiser (“Horite,” IDB, 2:645, 664) suggested that ḥōrî was left in that form only when it designated pre-Edomites (with ḥōrî meaning “cave” and the Horites being pre-Edomite cave dwellers). ḥōrî was changed to “Hivite” in every case where ḥōrî meant Hurrians. See also R. North, “The Hivites,” Bib 54 (1973) 58–62; J. R. Bartlett, “The Land of Seir and the Brotherhood of Edom,” JTS 20 (1969) 1–20.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97.

 

24절에서 온천을 발견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예밈"인데 이는 온천, 독사, 물고기, 간헐천, 신기루(호수)등으로 해석된다.

  • An otherwise unbroken list is interrupted only by the gloss on Anah, that it was he who discovered lakes [hayyēmim, lit., “waters“] in the wilderness while he was pasturing the asses of Zibeon his father (v. 24b). The best translation of hayyēmim is still uncertain. Even the ancient versions disagreed with each other significantly. The different versions of the LXX simply transliterated the Hebrew word as Iamein, which appears to be a homophone of the Hebrew word for “water, lakes.” Vulg. rendered it with aquae calidae, “thermal springs” (cf. RSV, NIV, JB “hot springs”). Pesh. used “water” (so NAB). SP translated with “the Emim” (the giantlike early inhabitants of Palestine—Deut. 2:10). This rendering is close to “giants” or “mighty ones” (gwbryʾ) of Targ. Onqelos. Even “mules” (so AV, NEB) is suggested by Targ. Pseudo-Jonathan’s pwrnyta (and see Palestinian Talmud Ber. 8.6.12b; T. B. Pes. 54a; Gen. Rabbah 82:14).

  • More recent suggestions are as divided. They include: (1) “water,” with the transposition of hymm to hmym;5 (2) “fish”;6 (3) a “geyser” which was attributed to a demon, and hence the sketchy reference;7 (4) a “mirage,” that is, not something Anah really saw, but something he thought he saw—namely, lakes.8 This last suggestion, if correct, would provide an analogy to a scenario in the Jacob story. Isaac thought he was touching, talking to, and blessing Esau. Now in a chapter mostly about Esau’s descendants we read of Anah who thought what he saw was a lake. In both cases, what one sees is not what one gets.

  • 5 See Speiser, Genesis, pp. 279–80; cf. Westermann, Genesis, 2:559, 560, 564.

  • 6 See G. R. Driver, “Genesis xxxvi 24: Mules or Fishes,” VT 25 (1975) 109–10.

  • 7 See B. Z. Luria, “He is the Anah who Found the yēmim in the Wilderness (Gen. 36:24),” Beth Mikra 30 (1984/85) 262–68 (Hebrew).

  • 8 See A. F. L. Beeston, “What did Anah See?” VT 24 (1974) 109–10.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97–398.

 

31-39절) 에돔의 왕들(대상 1:43-54)

31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후 이스라엘에 왕이 다스리는 시기를 경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텍스트는 후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은 후에 정리되었을 것이다.

본절에서는 에돔을 다스린 8명의 왕의 이름을 기록한다. 여러 도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왕들은 세습된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왕이 죽고나서 그의 아들에게 왕 직이 세습된 것이 아니며 또한 도성의 이름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에 사용된 왕이라는 단어는 '멜렉'으로 왕, 통치자로 신약의 '바실레우스'와 등가를 이룬다.

 

40-43절) 에서의 족장들(11명이 언급됨)

이중에 디나, 오홀리바마, 그나스, 데만은 앞 부분에서 언급된 이름들이다.

 

본 장의 마지막은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로 마무리된다. 앞서 1절에서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와 수미쌍관을 이룬다.

 

  • The major problem with this eleven name list of the clans of Esau is its relationship, if any, to the fourteen names in vv. 15–19, each of which also represents a clan of Esau. As we have seen, only two names (Teman and Kenaz) are common to vv. 15–19 and 40–43. Three solutions are possible. One, vv. 40–43 are an ad hoc creation without any historical value. Two, the list in vv. 40–43 is a list of later chieftains of Edom than those mentioned in vv. 15–19. Three, the names in vv. 15–19 are genealogically arranged, while those in vv. 40–43 are geographically arranged. Vv. 40–43 do refer to Esau’s clans by families (lemišpeḥōṯām) and by dwellings (limqōmōṯām). The names that follow (bišmōṯām) might refer to the names of the dwellings rather than of the chieftains.3

  • 3 A. Malamat (“UMMATUM in Old Babylonian Texts and Its Ugaritic and Biblical Counterparts,” UF 11 [1979] 529, 533) connects the character and structure of 36:40ff. with a tablet from Tell al-Rimah (between the Tigis and the upper Khabur [Habor]) that dates to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b.c. It contains a list of artisans who were recruited from various villages and townships for royal service, either administrative or military. Included is their place of origin and their tribal or family affiliation. The general structure is (1) personal name; (2) the Sumerogram SI.LÁ (which Malamat renders “registered” or “supplied with provisions”) followed by a toponym; (3) the term ummatum together with a personal name. This structure, says Malamat, is exactly what one finds in Gen. 36:40ff., albeit in reverse order.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02.

 

15-19절에서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 족장된 자들 14명을 언급하고, 20-30에서 세일 자손 호리 족속의 족장들 7명과 자손들을 언급한다. 이것을 통해서 저자는 에서의 자손이 세일 지역의 주도권을 점차 확보해 간 것을 보여주고 있다.(신 2:12, 22)

신명기 2:12 (NKRV)

12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신명기 2:22 (NKRV)

22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이제 에서의 족보를 마무리했다. 37장부터는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야곱과 에서의 세대가 마무리되고 이제 새로운 요셉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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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au’s Descendants

36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Esau (that is, gEdom). Esau htook his wives from the Canaanites: Adah the daughter of Elon the Hittite, iOholibamah the daughter of Anah the daughter1 of Zibeon the Hivite, and jBasemath, Ishmael’s daughter, the sister of Nebaioth. And Adah bore to Esau, kEliphaz; Basemath bore Reuel; and Oholibamah bore Jeush, Jalam, and Korah. These are the sons of Esau who were born to him in the land of Canaan.

Then Esau took his wives, his sons, his daughters, and all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his livestock, all his beasts, and all his property that he had acquired in the land of Canaan. He went into a land away from his brother Jacob. lFor their possessions were too great for them to dwell together. mThe land of their sojournings could not support them because of their livestock. So Esau settled in nthe hill country of Seir. (oEsau is Edom.)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Esau the father of pthe Edomites in the hill country of Seir. 10 These are the names of Esau’s sons: qEliphaz the son of Adah the wife of Esau, Reuel the son of Basemath the wife of Esau. 11 The sons of Eliphaz were Teman, Omar, Zepho, Gatam, and Kenaz. 12 (Timna was a concubine of Eliphaz, Esau’s son; she bore rAmalek to Eliphaz.) These are the sons of Adah, Esau’s wife. 13 These are the sons of Reuel: Nahath, Zerah, Shammah, and Mizzah. These are the sons of Basemath, Esau’s wife. 14 These are the sons of sOholibamah the daughter of Anah the daughter of Zibeon, Esau’s wife: she bore to Esau Jeush, Jalam, and Korah.

15 These are tthe chiefs of the sons of Esau. uThe sons of Eliphaz the firstborn of Esau: the chiefs Teman, Omar, Zepho, Kenaz, 16 Korah, Gatam, and Amalek; these are the chiefs of Eliphaz in the land of Edom; these are the sons of Adah. 17 These are the sons of vReuel, Esau’s son: the chiefs Nahath, Zerah, Shammah, and Mizzah; these are the chiefs of Reuel in the land of Edom; these are the sons of Basemath, Esau’s wife. 18 These are the sons of wOholibamah, Esau’s wife: the chiefs Jeush, Jalam, and Korah; these are the chiefs born of Oholibamah the daughter of Anah, Esau’s wife. 19 These are the sons of Esau (xthat is, Edom), and these are their chiefs.

g ch. 25:30

h ch. 26:34

i ver. 14, 18, 25

1 Hebrew; Samaritan, Septuagint, Syriac son; also verse 14

j [ch. 28:9]

k ver. 10; 1 Chr. 1:35

l ch. 13:6

m ch. 17:8; 23:4; 28:4; 37:1; Heb. 11:9

n See ch. 32:3

o ver. 1, 19

p ver. 43

q ver. 4

r Num. 24:20; 1 Sam. 15:2, 3

s ver. 2

t Ex. 15:15

u ver. 11, 12

v ver. 13

w ver. 14

x ver. 1, 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6:1–19.

 

36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9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11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13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4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15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17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8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19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6:1–19.

 

 

본문 창 36장은 에서의 자손, 곧 에돔의 족보에 대해서 다룬다. 앞서 창 25:12-18에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간략히 다룬것과 비슷하다. 창세기는 주요한 자손에 대한 언급에 앞서서 주요하지 않은 자손들을 간략히 먼저 다루고 지나간다. 본문은 주요한 야곱의 후손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에서의 자손들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에서의 자손 가운데서 족장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1-8절) 2, 5, 6절에서 가나안 땅을 거듭 언급한다. 이는 여기 등장하는 자녀들이 모두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태어난 자녀들로 5명의 아들과 여러 딸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후 에서와 야곱이 화해를 하고 나서 이들의 가축들을 모두 함께 기르기에 충분하지 못함으로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나서 세일 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1-5절) 에서, 에돔의 족보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에서는 에돔이 되었다. 본문 속에서 에서는 가나안 여인 두명과 사촌,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앞서 26:34과 28:9에 등장하는 여인들과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창세기 26:34 (NKRV)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창세기 28:9 (NKRV)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위의 두 본문에 등장하는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1)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

2)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

3)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내들은 아래와 같다. 

1)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

2)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3)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이렇게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먼저 창세기가 버전이 다른 전승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에서가 세명 이상의 여인들과 결혼 했을 수도 있고 동일한 여인이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거나 두 여인이 동일한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쨋든 에서가 세일로 이주하기 전에 가나안에서 얻은 아들들의 이름은 다름과 같다. 

- 아다 : 엘리바스(장자)

- 바스맛 : 르우엘-

- 오홀리바마 : 여우스, 얄람, 고라

 

6-8절) 에서가 세일로 이주하다. 

야곱이 에서와 갈라 선 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떠난 것과 같다. 이들은 모두 함께 거하기에는 너무 많은 가축과 재물을 가졌기에 헤어졌다.(7절; 13:6) 하나님께서는 야곱뿐만 아니라 에서의 가문에도 큰 복을 내리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동쪽’으로 갔다. 에서 역시 야곱과 헤어진 후 동쪽으로 가서 에돔 지역 세일산에 거주했다. 에서는 야곱이 가나안에 도착하기전 이미 세일 산에 살고 있었다.(32:3) 본문은 에서가 공식적으로 가나안 땅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야곱과 분리된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미 에서는 세일에서 큰 무리를 이루고 성공하였기에 야곱과 화해하고 그에게 요단강 서편 땅을 양보하였다. 이는 에서가 언약의 수혜자가 아니라 야곱이 언약의 수혜자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처럼 택자와 불택자는 자연스럽게 나뉘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이제 이후 본문은 에서에서 비롯된 에돔 자손을 대표하는 족장들을 열거하고 있다. 각 개인의 삶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에서의 후손들이 번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내용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9-14절) 에서의 아들들과 손자들

본문에서 의아한 점은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의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아들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후 18절에서 이 세아들을 통해서 족속들이 시작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그들의 목록은 빠진 것으로 보인다. 

 

15-19절) 본문에서는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앞선 손자들의 이름에서 본것처럼 오홀리바마는 손자가 아니라 아들들이 언급되고 엘리바스의 아들중에 고라 족장만이 추가된다. 고라는 오홀리바마의 아들과 이름이 같은데 이는 앞서 에서의 아내의 이름에서 본것처럼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In many ways vv. 15–19 presents the same list of Esau’s progeny as did vv. 9–14, suggesting to some scholars that P is the source for vv. 9–14 and J the source for vv. 15–19. There are indeed som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lists. First, vv. 15–19 are simply a list of Esau’s descendants through the third generation. Second, for some unknown reason, the order of two of Eliphaz’s sons is changed. In vv. 9–14 Gatam is the fourth son and Kenaz is the fifth. In vv. 15–16 Gatam is the sixth and Kenaz is fourth. Third, vv. 15–19 list Korah as one of the clans of Eliphaz.1 This inclusion boosts to seven the number of Eliphaz’s sons, whereas vv. 9–14 list only six.2 Adah’s seven children to Eliphaz may be compared with Leah’s seven children to Jacob. Thus there are two Korahs in these genealogies, one who is a fifth son of Esau by Oholibamah, and one who is a fifth clan of Eliphaz. A fourth distinction is that the concluding verse in this unit (v. 19) summarizes not only the data of vv. 9–14 (“these are the sons of Esau”), but also the data of vv. 15–19 (“together with their clans”). The verse serves as a colophon both to the writer’s interest about Esau’s family tree and about political structures emanating from that family tree. In other words, to read vv. 15–19 as simply a duplicate of vv. 9–14 misses the distinct purpose of the later unit.

The most obviously unique element about vv. 15–19 is that the progeny of Esau are introduced not as “the sons of Esau (or their father),” except as an introductory formula, but rather as the clan of (ʾallûp̄), or “the clan leader.” This title appears eighteen times in vv. 15–19, fourteen times in the singular, four in the plural. Traditional translations of this word have been “chiefs” or “dukes” (cf. Vulg. dux), but “clan(s)” appears more accurate. Its uses in vv. 15–19 (and in vv. 20–30, 40–43) are to be understood, more likely, as a reference to a group rather than a person (and cf. Zech. 9:7, “a clan in Judah”; also Zech. 12:5, 6).3

The antiquity of the term is attested by its use in Exod. 15:15, where it is parallel with ʾêlê (“leaders of”) and yōšeḇê (“inhabitants of”). It appears also in the Ras Shamra texts as a title applied to the clan leaders of Hittites, Hurrians, and other foreign neighbors of Ugarit.4

1 SP alone omits any reference to the clan of Korah. The double mention of Korah (vv. 16, 18) probably implies a time in Edomite history when a portion of the Korahites split from the Oholibamah group and joined themselves to the Eliphaz confederation. See Sarna, Genesis, p. 250.

2 See J. M. Sasson, “A Genealogical ‘Convention’ in Biblical Chronography?” ZAW 90 (1978) 179.

Vulg. Vulgate

3 On ʾelep̱/ʾallûp̱ see the seminal study of G. Mendenhall, “The Census Lists of Numbers 1 and 26,” JBL 77 (1968) 52–66. Cf. Gottwald, Tribes of Yahweh, pp. 270–78, who distinguishes two senses of ʾelep̱: a military unit and a social unit. Observe, however, that at least in the early texts ʾelep̱ stands clearly for the entire clan and not just the fighting force (1 Sam. 23:23; Mic. 5:1). See further remarks on ʾelep̱/ʾallûp̱ by D. W. Patten, “The Two Major Censuses in the Book of Numbers,” Proceedings of the Second Seminar of Catastrophism and Ancient History (Los Angeles: C & AH Press, 1985), pp. 19–29; J. Milgrom, “Priestly Terminology and the Political and Social Structure of Pre-monarchic Israel,” JQR 69 (1978) 79–81; idem, Numbers, JPS Torah Commentary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90), pp. 7, 336–39. J. W. Wenham (“Large Numbers in the Old Testament,” TynBul 18 [1967] 24–32) revocalizes in a number of places ʾelep̱ to ʾallûp̱, and interprets the latter as a term for an officer or for a professional, fully armed soldier.

4 See J. Gray, Legacy of Canaan, VTSup 5 (Leiden: Brill, 1957), pp. 189, 19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95–396.

 

본문에 사용되는 족장이라는 단어는 ‘알루프’로 족장, 두령, 친한 벗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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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Then they journeyed from Bethel. When they were still some distance6 from Ephrath, Rachel went into labor, and she had hard labor. 17 And when her labor was at its hardest, the midwife said to her, “Do not fear, for vyou have another son.” 18 And as her soul was departing (for she was dying), she called his name Ben-oni;7 wbut his father called him Benjamin.8 19 So xRachel died, and she was buried on the way to yEphrath (that is, Bethlehem), 20 and Jacob set up a pillar over her tomb. It is zthe pillar of Rachel’s tomb, which is there to this day. 21 Israel journeyed on and pitched his tent beyond the tower of Eder.

22 While Israel lived in that land, Reuben went and alay with Bilhah his father’s concubine. And Israel heard of it.

Now the sons of Jacob were twelve. 23 The sons of Leah: bReuben (Jacob’s firstborn), Simeon, Levi, Judah, Issachar, and Zebulun. 24 The sons of Rachel: Joseph and Benjamin. 25 The sons of Bilhah, Rachel’s servant: Dan and Naphtali. 26 The sons of Zilpah, Leah’s servant: Gad and Asher. These were the sons of Jacob who were born to him in Paddan-aram.

27 And Jacob came to his father Isaac at cMamre, or dKiriath-arba (that is, Hebron), where Abraham and Isaac had sojourned. 28 Now the days of Isaac were 180 years. 29 And Isaac breathed his last, and he died eand was gathered to his people, old and full of days. And fhis sons Esau and Jacob buried him.

6 Or about two hours’ distance

v ch. 30:24

7 Ben-oni could mean son of my sorrow, or son of my strength

w [Luke 1:59, 60]

8 Benjamin means son of the right hand

x ch. 48:7

y Ruth 1:2; 4:11; Mic. 5:2; Matt. 2:6, 16–18

z 1 Sam. 10:2; [2 Sam. 18:18]

a ch. 49:4; 1 Chr. 5:1; [2 Sam. 16:22; 20:3; 1 Cor. 5:1]

b For ver. 23–26, see ch. 46:8–27; Ex. 1:2–4

c ch. 13:18; 23:19

d ch. 23:2; Josh. 14:15; 15:13

e ch. 15:15; 25:8

f ch. 25:9; 49:3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5:16–2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3)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4)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들 (대상 2:1–2)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이삭이 죽다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3) 슬픔의 아들

4) 오른손의 아들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5:16–29.

 

 

16-20절)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던 중에 라헬이 출산을 하게 되었다. 난산으로 심히 고생할 때에 산파가 득남한 소식을 알린다. 라헬이 죽어 혼이 떠나가기 전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는데 아버지 야곱은 그를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이어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라헬의 묘비를 세웠다. 

 

라헬은 마지막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다. 이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혹 자들은 ‘내 능력의 아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벤’은 자손,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오니’는 애통, 애도라는 의미로 애통의 아들,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야곱은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어 준다. 이는 ‘내 오른손의 아들’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른손을 힘과 존귀로 여겼다. 이는 야곱이 그 아들을 매우 존귀하고 소중한 자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야곱의 자녀들의 이름은 엄마들이 붙여주었다. 그런데 유독 베냐민의 이름은 야곱이 붙여주었다. 

 

라헬은 죽어서 에브핫에 묻혔다. 성경에서 종종 에브랏과 베들레헴이 같은 곳으로 묘사되지만{cf. 룻 1:2; 4:11; 삼상 17:12; 2:18) 엄밀히 말하자면 에브랏은 베들레햄이 아니다. 에브릿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에브랏이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Sarma), 4세기 역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의 주장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에브랏이 기럇여아림의 옛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고(cf. 대상 2:50), 사무엘이 자주 들렸던 라마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cf Mathews). 훗날 에브랏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이 된다(삼상 10:2). 야곱은 그곳에 아내의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이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불린다(20절). 저자가 지금까지 그곳이 라헬의 묘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이 장소가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장소(reference point) 임을 암시한다"(Mathews).

 

21-22절)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는데 그곳에서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라헬의 여종)와 동침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다. 

 

에델 망대의 위치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베들레헴과 헤브론의 중간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에델’은 양떼, 가축 무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목자들이 이 망대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곳에 잠시 거주하는 동안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였다. 이것이 우발적인 행동인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고 맏아들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행동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무엘하 16:20–23 (NKRV)

20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압살롬은 다윗왕의 후궁들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옥상위에서 동침함으로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반역은 실패하고 만다. 르우벤의 경우도 본절에서 당장 야곱이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지만 이를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이후에 장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야곱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라 더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라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이를 담아두고 응분의 조치를 할 것을 다짐했을까? 이유야 어떻든 그는 마땅히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49:3–4 (NKRV)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역대상 5:1–2 (NKRV)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Reuben went and lay with Bilhah his father’s concubine. While Reuben’s action may have been prompted by inappropriate lust, it challenged Jacob’s position as head of the household. As the firstborn son, Reuben may also have viewed his action as establishing his authority over his brothers (see 2 Sam. 16:20–23). Yet it had the opposite effect (see 1 Chron. 5:1–2; also note on Gen. 48:3–7). Although initially Jacob takes no immediate action against Reuben—implied by the narrator’s brief comment, Israel heard of it—he later denies Reuben his preeminence as the firstborn (49:3–4). Although Jacob’s actions run counter to the provisions for inheritance in Deut. 21:15–17, the unseemly behavior of Reuben means that he will not inherit what he otherwise would have receiv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12.

 

 

23-26절) 야곱의 12아들(레아, 라헬, 실바, 빌하)

 

27-29절) 드디어 야곱이 기럇아르바(헤브론)의 마므레에 도착하였다(13:18; 23:2). 그곳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거류하던 곳이었다. 이때 이삭의 나이가 180세 였고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어 기운이 다하여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이삭을 장사하였다. 

 

앞서 27장에서 이미 이삭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아들에게 축복을 하기 원했다. 하지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이 순간까지 이삭은 살아 있었다. 성경은 이 20여년 간의 이삭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27:7-10에서 아브라함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본분의 이삭의 죽음은 한 시대의 마무리를 보여준다. 49:30-31에 의하면 이삭과 리브가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창세기 49:30–31 (NKRV)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흥미로운 것은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창 35장은 야곱이 헤브론에 도착하자마자 이삭이 죽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야곱의 위향 이후 10-20년간 이삭은 생존해 있었고 심지어 요셉이 실종되어 팔려간 이후에도 오랜기간 생존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야곱의 기도(28:21)이 응답되었음을 강조하며 모든 면에서 야곱의 여정이 끝낫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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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God said to Jacob, “Arise, go up to bBethel and dwell there. Make an altar there to the God who appeared to you cwhen you fled from your brother Esau.” So Jacob said to his dhousehold and to all who were with him, “Put away ethe foreign gods that are among you and fpurify yourselves and change your garments. Then let us arise and go up to Bethel, so that I may make there an altar to the God gwho answers me in the day of my distress and hhas been with me wherever I have gone.” So they gave to Jacob all the foreign gods that they had, and the rings that were in their ears. Jacob hid them under ithe terebinth tree that was near Shechem.

And as they journeyed, a terror from God fell upon the cities that were around them, so that they did not pursue the sons of Jacob. And Jacob came to jLuz (that is, Bethel), which is in the land of Canaan, he and all the people who were with him, and there he built an altar and called the place El-bethel,1 because kthere God had revealed himself to him when he fled from his brother. And lDeborah, Rebekah’s nurse, died, and she was buried under an oak below Bethel. So he called its name Allon-bacuth.2 

God appeared3 to Jacob again, when he came from Paddan-aram, and blessed him. 10 And God said to him, “Your name is Jacob; mno longer shall your name be called Jacob, but nIsrael shall be your name.” So he called his name Israel. 11 And God said to him, o“I am God Almighty:4 be pfruitful and multiply. qA nation and a company of nations shall come from you, and kings shall come from your own body.5 12 rThe land that I gave to Abraham and Isaac I will give to you, and I will give the land to your offspring after you.” 13 Then God swent up from him in the place where he had spoken with him. 14 And Jacob tset up a pillar in the place where he had spoken with him, a pillar of stone. He poured out a drink offering on it and poured oil on it. 15 So Jacob called the name of the place where God had spoken with him uBethel. 

 

b ch. 28:19

c ch. 27:43

d ch. 18:19; Josh. 24:15

e [ch. 31:19; Josh. 24:23; 1 Sam. 7:3]

f Ex. 19:10

g ch. 32:7, 24

h ch. 28:20; 31:3

i Josh. 24:26; Judg. 9:6

j ch. 28:19

1 El-bethel means God of Bethel

k ver. 1

l ch. 24:59

2 Allon-bacuth means oak of weeping

3 Or had appeared

m [ch. 17:5, 15]

n ch. 32:28

o See ch. 17:1

4 Hebrew El Shaddai

p ch. 28:3; 48:4

q ch. 17:5, 6, 16; 26:4

5 Hebrew from your loins

r ch. 12:7; 13:15; 17:8; 26:3; 28:13

s ch. 17:22

t ch. 28:18; 31:45

u ch. 28: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5:1–15.

 

창세기 35:1–15 (NKRV)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1) 벧엘의 하나님

2) 곡함의 상수리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5:1–15.

 

세겜에서 야곱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그 땅의 남자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 땅의 주민들로부터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그에게 이제 하니님께서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갈 것을 말씀하신다.

 

1-4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거주하며 전에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 너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야곱이 집안 사람들과 함께 한 모든 자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이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환난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제단을 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함께 한 이들이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떠났다.

 

야곱의 삶은 '일어나 올라가는' 삶의 연속이었다.

창세기 27:43 (NKRV)

43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창세기 28:2 (NKRV)

2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창세기 31:13 (NKRV)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 1  Jacob’s life has been one of “rising and going.” Such a directive came from his mother (27:43), from his father (28:2), and from the “God of Bethel” (31:13). It is now the God of Bethel who summons Jacob back to Bethel.9

  • 9 qûm beraḥ (27:43); qûm lēḵ (28:2); qûm ṣēʾ (31:13); qûm ʿalēh (35:1).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4.

 

창세기에서 족장들이 제단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12:7, 8; 13:18; 22:9; 26:5; 33:20)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전에 에서와의 화해나 세겜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 It is not uncommon for the patriarchs to build altars (12:7, 8; 13:18; 22:9; 26:5; 33:20). This verse is unique in that it is the one instance in which God tells a patriarch to build an altar. On all other occasions such construction is a spontaneous or responsive action. Interestingly, God’s word to Jacob is a reminder of his distant past, rather than of his immediate past. It is not Jacob’s reconciliation with Esau that is recalled (ch. 33), but his earlier flight in terror from Esau (28:10ff.).

  •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4.

 

이전에 야곱은 그곳에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로 기둥을 세웠다.(28:10) 야곱은 그가 당시 하나님께 서원했던 내용이 매우 신실하게 응답된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제 그곳에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속에 함께 하시며 신실하게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인정한다.(28:20-22)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 제단을 쌓기 위해서 야곱은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첫째 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명령하셨다. 당시 라반의 집은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의 영향을 받았고 라헬도 자기 아버지 라반의 가족 신들의 신상을 훔쳐왔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방 신상들이 제거되고 정결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결예법이 확실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몸을 깨끗하게 하고 의복을 갈아입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서 야곱은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자신에게 응답하셨고 나의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벧엘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본문에서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라는 표현은 현재 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가족들은 야곱의 이 설명을 듣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이것을 땅속 깊이 파묻었다.

이렇게 이방의 신을 버리는 행위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령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수 24:14)

여호수아 24:14 (NKRV)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5절) 야곱이 떠났을 때 하나님이 그 주위의 도시들을 크게 두려움을 내리셔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의 삶을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28:17), 라반에 대한 두려움(31:31), 에서에 대한 두려움(32:8, 12) 누구도 야곱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반전되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심으로 야곱의 대적자들이 야곱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 The only parallel in Genesis to such a “fear from God” is that which overcame Abram when he received the covenant promise (ʾêmá ḥašēḵá ḡeḏôlá, “a deep, dark dread,” 15:12). The unmistakable presence of God with his people, with the resulting paralysis of enemy nations, appears again in the second half of Moses’ song of praise by the Sea (Exod. 15:14–16). These nations—Philistia, Edom, Moab, Canaan—are struck with “terror and dread” (ʾêmāṯá wāp̄aḥaḏ, v. 16), and thus stilled.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7.

 

어떤 형태의 두려움이 이들에게 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에 아비멜렉에게 꿈을 통해서 경고하셨던 하나님께서(20:8; 26:28-29) 복수를 다짐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내리신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남자들을 진멸함으로 지나친 복수를 함으로 두려워하던 야곱(34:30)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다.

 

  • a terror from God. While the precise nature of this terror is unknown, other passages in Genesis record how fear of God is used to protect the patriarchs (e.g., 20:8; 26:28–29). Jacob’s fears expressed in 34:30 are answered by God’s protection, in spite of the excessive vengeance shown by Simeon and Levi (34:25).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11.

 

6-15절) 여기서는 야곱이 벧엘로 올라갔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 지를 보여준다. 세가지 사건들이 있었는데 첫째 하나님의 지시대로 야곱이 제단을 쌓는다.(7) 둘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자 그녀를 장사한다.(8) 셋째 하나님이 또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축복을 내리신다.(9-15절)

 

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러서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내려갈때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창세기 28:16–22 (NKRV)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야곱이 세겜에 쌓았던 제단에 부여한 명칭과 비슷하다.(33:20)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야곱은 이곳 세겜의 제단에서 자신이 만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자 그녀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하였다.

리브가의 유모는 24:59절에 등장한다. 아마도 27:45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리브가가 유모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27:45 (NKRV)

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그렇게 야곱과 함께 하던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벧엘에서 죽었고 그녀를 장사한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는데 이는 '곡함의 상수리'라는 의미이다.

야곱의일생의 시작이 두명의 탄생(에서와 야곱)으로 시작되었다면 야곱으 일생의 마지막은 두명의 죽음(드보라와 라헬)로 시작된다.

 

  • The first factor concerns Rebekah. The last we heard of her was 27:46, well over twenty years before this scene. Without exception Genesis tells us about each patriarch’s death and burial (Abraham, Gen. 25:7–11; Isaac, Gen. 35:29; Jacob, Gen. 49:33). Genesis also tells us about the death and burial of each patriarch’s favorite wife (Sarah, Gen. 23:1–20; Rachel, Gen. 35:19). The exception is Rebekah, apart from the summarizing statement in 49:31. Presumably she died and was buried before Jacob returned from Aram-naharaim, for there is no reference to Jacob being reunited with Rebekah. Rebekah is gone, though survived by her nurse, but only until Jacob arrives. He not only does not get to see his mother, but he is forced to become undertaker for his late mother’s nurse. Thus, one of Jacob’s first experiences after coming back home is confronting death. By including the name Rebekah, the author helps his reader recall her character, she who instigated the deception of Isaac. Her punishment (implied at least) is that she will never get to see her son again.10

  • There is a second reason for its placement here. Deborah’s being buried [wattiqqāḇēr] under the oak tree11 [ʾallôn] parallels Jacob’s burying (wayyiṭmōn) the false gods under a terebinth (ʾēlá), earlier in the chapter. For the gods’ burial the root ṭāman is used. For Deborah’s burial, the more usual root qāḇar is used. The opening unit in the Jacob cycle (25:19–34) contains, among its emphases, the birth of two people, Esau and Jacob. The concluding unit in the Jacob cycle (35:1–22) contains, among its emphases, the death of two people, Deborah and Rachel.12

  • Jacob’s life after the events at Peniel is filled with hardship: the trauma of facing Esau again, the violation of Dinah, the death of his late mother’s nurse, the death of Rachel in childbirth. In the remainder of his life he will face more tragic and distressing situations.

  •  

  • 10 See G. Rendsburg, “Notes on Genesis xxxv,” VT 34 (1984) 364–65.

  • 11 O. Margalith (“Samson’s riddle and Samson’s magic looks,” VT 36 [1986] 228 n. 4) suggests that the reference in v. 8 to Deborah (which means “bee”), the nurse being buried under the oak/tree of weeping, is reminiscent of Cretan Zeus, who was nursed in infancy by Melissa/Melitta, the daughter of Melisseus, who was a bee-god. Also, the reference to Deborah’s being buried under the oak (taḥaṯ hāʾallôn) recalls the judge Deborah, who presided under the palm (taḥaṯ tōmer, Judg. 4:5).

  • 12 M. Fishbane, Text and Texture (New York: Schocken, 1979), p. 42.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8–379.

 

9-15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네 이름이 야곱이나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의 무리들이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이에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

 

먼저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할 때 나타나셨었다면 이제 돌아와서 축복을 주시며 나타나섰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32:29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 주신 것을 다시금 확인하신다.

창세기 32:29 (NKRV)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앞서 아브라함과(24:1) 이삭에게(25:11) 복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를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반열로 올려주고 계신다.

그 증표가 바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가나안땅에 돌아왔다. 앞서 이방 신들을 버렸을 분만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를 버렸다. 마치 정결케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이다.

  • This is the first word that God speaks to Jacob after he arrives in Bethel, back home, so to speak. How appropriate it is on this occasion for God to act (v. 9) and speak (v. 10). Jacob is reminded that he returns to Canaan not as Jacob but as Israel. He is not only to bury the foreign gods, but he is to bury what has become for all practical purposes a foreign nature—a Jacob nature. He who earlier instructed the people to change their garments must live up to his own change of name. The reason, then, for the truncated version in ch. 35 is that it is a reminder and not an alternative account. Only the major point (i.e., the name change) bears repeating.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81.

 

 

  • 35:11–12 God’s second statement emphasizes that Jacob is now heir to the divine promises first given to Abraham and then to Isaac. I am God Almighty. This is how God revealed himself to Abraham (see note on 17:1–2) and is the divine name used by Isaac when he blesses Jacob in 28:3. Much of God’s speech closely resembles what he says to Abraham in 17:5–6 and what Isaac requests for Jacob in 28:3–4. be fruitful and multiply. This instruction goes back to the very creation of humanity (see note on 1:28). A nation and a company of nations shall come from you. While Isaac refers to a “company of peoples” (28:3), God’s comment reveals that he has more than the nation of Israel in view. Given the close connection with the divine promises made to Abraham, this seems to be a development of the idea that Abraham would be the father of many nations (17:4–6). kings shall come from your own body. The promise of royal descendants is first given to Abraham in 17:6. This royal theme reappears in Joseph’s dreams (37:6–10), showing that the ultimate fulfillment of this divine promise will come through Jacob’s descendants. The land that I gave (35:12). The divine promise of the land, which goes back to the call of Abraham in 12:1–3, is renewed to include Jacob and his descendants.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11.

 

13절) 본문의 표현은 17장의 내용과 평행을 이룬다.

  • 13  In several ways ch. 35 parallels ch. 17: El Shaddai is the name used for the deity; a reference to a name change; and a reference to kings among the patriarch’s seed. Even the formula used to conclude the revelation is the same. Cf. 17:22, “God went up from Abraham,” with “God went up from him” (ʿālá mēʿal both times, meaning essentially “disappear”). Only one more time, and that a good bit later, will God address Jacob (46:2–4).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82.

 

13-15절) 본 세 절에서 모두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곳'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앞서 10, 11, 12절에서 등장하는 세 개의 하나님의 계시와 평행을 이룬다.

  • Perhaps the threefold use of “where God/he spoke with him” in vv. 13, 14, 15 is meant to parallel the three oracles of God to Jacob in vv. 10, 11, 12.11

  • 11 See Fokkelman, Narrative Art in Genesis, p. 234.

  •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82.

 

야곱은 오랜 시간의 역경을 거쳐서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에 다시 돌아왔다. 순간 순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그의 삶가운데 신실하게 함께 하셨음을 확인했고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과거 그의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약속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조상이 된다.

하란에서의 험난한 시간들,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에 세겜을 거치면서 그는 더욱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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