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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그리고 목사직(이재철, 홍성사)
 
- 목사가 목사에게 던지는 7가지 질문
1) 나는 지금, 왜 목사로 살고 있는가?
2) 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두 목회자 가운데 어느 유형인가?
3) 나는 목사이기 이전에 전도인인가?
4) 나는 얼마나 자발적으로 고독한가?
5) 나는 얼마나 인간을 알고 있는가?
6) 나는 나의 목회를 소위 더 큰 목회를 위한 징검다리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7)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있는가? 
 
이재철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마치고 사역을 하는 목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날카롭다. 이 질문을 동일하게 사역을 하는 간사들 하고 싶다. 먼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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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교민 연합집회 

2015년 5월 23일(토), 밴쿠버 순복음교회 





주님의 교회(행 13:1)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넘어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한다. 

주님을 나의 주어로 삼고 내가 동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동사가 주어를 콘트롤하는 법은 없다. 동사는 주어에 종속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교회는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임. 에클레시아이다. 

건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를 이루고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동사가 주어를 조종하려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 모두 가난했다. 

새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천명하셨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 장로, 집사, 헌금 많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어로 모신 주님의 동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교회의 정의.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이어야 한다. 

1. 하나의
- 교회의 갯수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분이시다.(엡 4:4-6) 우리를 부리는 주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러개의 동사는 하나의 주어를 위한 것이다. 주어가 두개라면 동사는 갈라지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교회를 섬기지만 한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될 수있다. 
- 하나됨의 증거. 그 증거는 우리의 몸을 보면 알수 있다. 우리는 한몸에 여러 지체를 이루고 있다. 제 뇌가 명령하는대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지체들끼리 서로를 섬기고 돕는다는 것이다. 배고플때 입이 음식을 삼켜준다. 정상적인 지체라면 상호 봉사하게 되어있다. 
- 한 공동체를 이룬 지체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럴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 
- 사람에 대한 호칭 : 영유아, 청소년, 청년, 장년, 이후에 노인과 어른으로 갈라진다.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 된다. 노인의 특징은 자기만 안다. 자기에게만 맞춰주기를 원하는 사람들. 어른은 이전에 알지못하고 품지 못했던 사람을 품고 자신의 것을 나누고 다른이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은 절대로 절로 되지 않는다. 이 갈림은 봉사에 있다.  봉사하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산 사람이 5-60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봉사의 아름다운 마지막 단계은 밑 가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 요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아버지가 농부이심. 중요한 원칙. 교회론을 보여준다. 줄기의 첫번째 가지는 항상 가장 밑에 위치한다. 다음 가지는 그 위에 붙는다. 제일 여린 가지가 윗자리를 차지한다. 겨울이 지나고 다음해에 새로운 가지가 윗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밑가지가 되는 삶. 이 반대의 상황이 되면 나무는 부러진다. 목사, 장로, 창립멤버는 이렇게 밑거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기득권을 주장하고 서로 윗가지가 될려고 하기에 분쟁이 일어난다. 

2. 거룩한 교회
-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다.(고전 1:2)
- 우리는 추악한 죄인임에도 그분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쳐주셨다. 주어가 거룩하기에 동사로 부름받은 우리도 거룩해야할 의무가 있다. 주어에 동원되는 동사는 거룩해져야 한다.(난봉꾼의 동사는?)
- 세상은 동사인 우리를 보고 주님을 알게된다. 교회의 힘은 교인의 머리수로 나타나지 않눈다. 헌금 액수로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의 힘은 거룩에서 나타난다. 거룩은 구별이다. 
- 제네바 콩쿨 : 자유곡과 지정곡, 예선과 본선은 피아노만. 결선은 오케스트라가. 어떤 이의 소리는 오케스트라를 뚫고 들린다. 행사의 규모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지를 보기 위함이다. 공동 1위 이후에 2위. 왜소한 한국 여성. 이유는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파장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폭포를 뚫고 나가는 훈련을 한다. 득음을 위해. 다른 파장을 얻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한번도 유학을 계획하지 않으셨다. 살아생전에 팔레스타인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분의 메시지가 로마의 힘을 압도했다. 이사야의 고백.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 산상수훈.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실 때에도 지극히 절제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씀하셨을 것이다. 진리의 파장. 영원, 빛의 파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 교회가 돈으로 승부한다면 빌 게이츠를 이길수 없다. , 권력의 파장. 교회는 거룩의 파장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힘은 거룩함에 있다. 그 거룩은 구별된 삶으로 드러난다.

3 사도적 교회
-  엡 2:20 사도와 선지자의 터위에 세워진 교회. 
- 동사의 삶은 피상적 삶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주춧돌, 주어되시는 주님. 주님의 말씀으로만 사도적 교회를 이룰수 있다. 
-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완독하신 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주님과 무관한 것이다. 결혼을 위해 서로 만나서 알아가야 한다. 
-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삶, 요 14:22. 이것이 주님을 주어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대상만을 드러내기위해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인카네이션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 동아일보 이종찬의 회고록. 존슨 대통령의 방한. 환영 만찬. 1960년대. 만찬 석상에서 정전이 됨. 모두의 시야가 캄캄해짐. 부스럭 소리. 존슨 대통령이 없어짐. 정전되는 순간 화장실로 대피시킴. 경호원이 경호원 다웠는가??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림. 자기를 위해 몸을 던진 경호원을 레이건 대통령은 살려내지 못했다. 
-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드린다고 착각한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망한다. 허사인 것이다. 녹이 쇠를 갉아먹듯이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호원이 될때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4. 보편적 교회
- 라틴어로 기록. 콘스탄티노플 신조. 캐톨릭 처치가 되어야 한다. 1517년 개신교에서는 univesal church로 바꾸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 
- 2000년전은 계급사회였다. 예배당안에서 귀족과 노예가 함께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는 것 거의 불가능했다. 
- 앞의 세가지는 개인적 영성과 관련된 것이다. 보편적 교회는 인간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가 어렵다. 
- 밴쿠버에서 한인교회를 이룬다는 것. 그런데 이곳에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고있는가? 왜 보편적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가? 우리의 주어이신 주님께서 만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나도 보편적 동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주님의 주위에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있지 않았다. 열심당원 시몬뿐만 아니라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님 곁에는 무식한 베드로와 아리마대 요셉. 창기와 니고데모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함께 할 수 없던이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되렀다. 
- 보편적 교회가 됨으로 이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거룩한, 사고적,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 거룩한 공회를 믿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회가 어디이든지 보편적 교회임을 믿는다. 
- 우리 한사람이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보편적 교회.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교회가 인간의 역사에 존재했는가? 
- 안디옥 교회의 구성 : 당회원 명단. 레위인 출신의 전통 유대인 바나바. 니그로 흑인인 시므온 노예출신, 무명의 존재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젓동생(마나엔, 친형제이거나 죽마고우-매국노), 교회를 짓밟던 폭도 바울
- 지중해 전도를 위해 예루살렘교회를 사용하지 않고 안디옥교회를 사용하신 이유. 현실속에서 이런교회가 존재했는가? 
- 양화진 : 무어 선교사, 교회와 학교를 세움. 봉주리의 마을 백정의 아들.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림. 고종의 의사 애디슨을 데리고 백정을 고쳐주기위해 옴. 무어선교사가 그 백정의 이름을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지어줌. 양반들의 항의. 따로 좌석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고 교회를 나가서 따로 교회를 세움. 이에 백정들에게 전도를 함. 나갔던 양반들이 돌아옴. 이 두교회가 다시 합하여 승동교회를 이룸. 아들은 의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고 백정은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왕손출신 이재형?이 장로가 되었다. 함께 당회를 이룸 
- 무어 선교사 한분이 보편적 교회를 이루었을때 조정이 백정을 인간으로 인정했다. 
- 우리가 보편적 교회를 이룰 때 주께서 당신의 교회를 이루실 것이다. 
- 주님을 믿는다면 참된 주님의 사람이 되자. 하나의, 가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룰 이루는 주님의 교회가 되자. 우리 주님은 살아계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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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람(시 39:5-6)





밴쿠버 교민연합집회

2015년 5월 22일(금), 밴쿠버 순복음교회



다윗의 수명 : 70세. 당시 굉장히 장수했다. 70을 살고 그의 삶을 한뼘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테파흐(손바닥) 다윗에게 70인생은 그렇게 짧았다. 인생은 오래 살수록 짧게 느껴진다. 


그마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것 같다. 100년전의 조상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든든히 서있다.(나차브, 인생의 최전성기) 로마, 바벨론의 영광은 허사이다. 

첼렘, 환영-그림자. 있는것 같은데 실은 없는것, 얼마나 많은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200만 밴쿠버, 200명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할때 99.99%가 우리에게는 그림자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헛된 일(헤벨, 공허한 숨) 으르렁거리는 삶을 묘사하는 동사(하마), 진리를 위해 으르렁 거리며 살지 않는다. 

절대 권력자 : 박정희(72)
이병철 : 돈병철(78), 재산이 그들의 삶을 책임져주지 못한다. 
어머니(86세)까지 사셨다. 
우리가 더 으르렁 거리며 살면 더 모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부모 재산 놓고 싸우는 자식들. 

세월이 흐른뒤에 그렇게 모은 재산이 누구의 재산이 될지 알지 못한다. 휘트니 휴스턴의 2000만불이 그녀의 18살(바비 크리스티나) 딸에게 물려졌는데 현재 21살에 엄마와 똑같은 상태로 호텔 욕조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되었다.(동거남, 남편, 친정 어머니의 진흙탕 싸움)

GE만이 130년을 견뎠다. 
삼성과 엘지만 남아있다. 
세계 경제사. 남아있는 기업이 얼마 없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하나님앞에서 없는것과 같고 다른이에게 환영과 같고 재산이 누구것이 될는지 일지 못한다. 
- 솔로몬의 헛되다(헤벨) 헤벨의 5제곱
- 매우 덥다. 덥다 덥다는 히브리어 표현

인생이 이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
시 39:7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허사로 끝나기에 우리의 소망을 주께두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때 주체가 내가 된다(주님을 콘트롤하려한다) 내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주체(주어)가 주님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불이익이 예상되고 모함을 당해도 주님의 사람이라면 그길을 갈 수 있다.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1. 테바(방주)의 사람이 되는 것.
- 홍수 심판 가운데 노아를 부르심. 창 6:15절. 방주의 사이즈를 알려주심 32800톤. 큰 페리호가 3000톤 정도이다. 테바는 거대함의 상징이다. 
- 애굽이 히브리인의 장자를 죽임. 출 2:3. 갈대상자안에 아기를 두고 나일강에 띄움. 이 갈대상자가 테바이다. 
- 축구장 vs 갈대상자. 하나님의 테바의 특징은 무동력에 있다. 제어시스템이 없다. 방향, 석도, 멈춤 찰저하게 하나님께 맞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테바. 
- 테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인셍의 방향, 속도, 멈춤. 하나님께 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지족과 자족 : 지금 나의 삶이 족함을 아는 것. 웅덩이와 가시덤불이 내 인생에 필요함을 알고 인정하는 것. 족한 줄 모른다. 과거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잘 사는가? 우리의 행복지수는 어떤가? 교회에서 지족의 싦을 가르치지 않고 욕망의 삶을 부추긴다. 
- 요셉 : 채색옷에 만족하지 못하던 삶. 광야 웅덩이에 빠짐. 창 37:22-24 하나님이 예비하신 웅덩이. 물이 없었다.(익사) 이 웅덩이가 그에게 테바였다.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됨
- 아브라함 : 모리아산. 가시덤불, 창 22:13 수풀(세바크, 가시덤불) 이 장애물이 수양을 준비한 것이다. 
- 나는 지금 웅덩이에 빠져 있는가? 그럼에도 테바의 사람이 되라. 

2. 엑소도스의 사람이 되는 것
탈출의 의미. 엑소 밖으로, 도스 그길. 이집트는 죄와 어둠과 사망의 상징이었다. 홍해를 열어주셔서 건너가게 하셨다. 
갈라진 홍해가 갈라진 채로 있지 않았다. 애굽로 돌아갈 길을 차단하신 것이다. 되돌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다. 
-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다. 벗어나게 하신것이 은혜라면 성화의 삶은 우리의 의지이다. 
- 광야에서 헤벨이 되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던, 미련을 가진 히브리인. 
- 아이스호도스, 주님의 길을 가야한다. 
- 퇴장의 의미가 있다. 연극 무대의 배우들. 인생이라는 무대도 마찬가지다. 밤에 화장을 지운다. 인생의 화장을 지울때가 온다. 인생의 스폿라이트를 받을때가 있지만 안젠가 꺼진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 천년만년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
- 퇴장을 아는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기 원했던 내일이다."
- 오늘도 평생 처음 맞는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무의미한 삶을 살겠는가. 
- 변화산의 모습 : 모세와 엘리야. 이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가 눅 9:29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심. 이 죽음이 엑소도스다. 엑소도스의 세번째 의미. 왜 이 메시지를 주시는가? 내가 십자가에 죽지만 이 죽음이 끝이 아니다. 저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온 하늘의 출입문이다. 
- 외과의사 : 예수믿는 사람일수록 안죽으려한다. 기를 쓰고 안죽으려한다. 입에 발린 영생이 아니라 죽음이 영원과 접속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죽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바울이 어떻게 참수형을 당할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진짜 믿지 않는다. 

3. 에네의 사람이 되는것 
시 19:8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눈을 밝게 한다.  이세상을 바로 보게하는 눈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메. 눈들이다. 
- 우리말은 단수로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개의 눈을 주셨다. 이세상은 평면이 아니다. 
- 문명의 발달과 역사의 미래를 볼줄 아는 두눈이 필요하다. 
- 본질이 아니라 외형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두눈이 필요하다. 두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본다. 폭풍속에서 정적을. 모함 속에서 진실을 본다. 
본질을 꿰뚫어 봐야한다. 두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있음을 본다. 유럽의 몽블랑 4807미터. 3842미터. 케이블카. 1905년시작. 1,2차 대전으로 중단. 알프스의 눈덮힌 산. 노약자, 장애인들도 오를 수 있다. 110년전에 보았다. 몽블랑에서 없음에서 있음을 보았다. 
수에즈 운하 192킬로미터. 150년전에. 두눈을 가진 사람들이 이 청년들의 제안을 도왔다. 
- 교회는 이런 청년들을 키우고 밀어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두눈을 가진 청년들을 외눈박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 미국의 독립. 1776년. 하와이(미국 동부에서 8500키로)?
- 1897년 일본이 유큐왕국을 합병했다. 4000키로. 
- 역사의 두눈을가지고 미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땅을 넓히던 시대에 조선땅에서는 부정부패로 땅을 일제에게 빼았겼다. 
- 한국의 청년들은 두눈을 가져야 한다
- 두눈을 가진 사람만 주님의 사람이 될수 있다. 변화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보여주는데 베드로는 외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을 꾸짖고 있다. 외눈을 가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심. 
- 롯과 아브라함. 먼저 선택하게 함. 롯이 보니 소돔과 고모라가 에덴 동산 같았다. 한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멋지고 화려해 보였다. 
- 바울의 고향 다소. 소위 바울의 생가라는 유적터. 우리가 주목하는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쇠퇴하고 사라진다. 건축하는 순간 쇠퇴가 시작된다. 인생은 가는 것이다. 

테바, 엑소도스, 에네의 시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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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5년 5월 21일 오전 10시
장소 : 밴쿠버 소망교회(5825 nelson ave, Burnaby)
강사 : 이재철 목사 




화두 : 어떤 목사가 살아남겠는가?

구약의 중심 메시지 : 그날이 온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다. 먼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심판 대상이다. 

목회자(목사)의 위치 : 목사는 스님이나 신부와는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1) 목사 사모의 편지 : 14살때 부터 반주자로, 26살에 목회자와 만나 결혼, 두번의 유산(남편의 무관심), 전임사역, 남편의 욕설, 아내의 잘못은?(사랑받기 원하는, 제대로 목회하기를 바라고 내조하는...)
- 유영모 :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되고, 이 삶이 터지면(열매가 터지듯) 사랑으로 터진다. 목회자는 삶의 전문가이다. 그럴려면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아내를 모르는 이 목사가 교인들의 삶을 알 수 있겠는가? 성경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2) 젊은 목사 부인 : 이상한 팝업창, 계속 성인 사이트에 접속(집, 교회), 아내의 꿈, 강단을 걸고 약속, 목사에게 설교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진정한 설교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목사와 세상 남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돌중, 신부(땡신부), 땡목사 / 목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 목사는 자기 삶을 구별하는 사람이다. 요즘 왠만한 목사 다 그래(교육, 세습, 포르노), 내가 다른 사람을 아는 만큼 나를 알아야 한다. 내 욕망의 산물이 되는 이유는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교인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3) 여집사 : 설교 표절, 주일 설교를 준비하지 못한 목회자의 메마름, 설교를 표절했을때의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가? 설교 도용을 멈추는 것, 하나님을 모르는 목사(고후 2:17-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전하는 자세), 내가 설교하는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지,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야망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고 있는지

4) 하와이에서 사역하는 목사 : 10명정도의 개척목사, 식당에서 일하며 사역중, 자신이 설교를 도용했다는 것을 회개, 

주님 오실때 나는 목사로 살아남겠는가? 나는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겠는가? 

- 목회자의 이중직 : 콜링의 문제(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냐 내가 찾아가는 것이냐), 출발점이 중요한 것이지 이중직은 문제가 아니다. 이 한분을 위해서 인생을 던질수 있는가? 이중직을 갖는 동기가 무엇인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이 아닐때, 한사람에게라도 내 인생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확신이라면 이중직은 아무 문제 없다. 그것을 믿는 전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믿지 못하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항상 왜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 목회자의 자기 관리 : 그리스도인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구별이다. 이것이 숙명인 동시에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큰문제가 생겼을때 큰 이득이 관계되어 있을때 이것을 어떻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들을 주셨다. 하난님께서 왜 우리에게 눈들을 주셨을까? 어떤 큰 유혹이 있어도 현재를 보는 눈과 미래를 보는 눈,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유혹에 빠질 수 없다. 한 눈이기 때문에 돈, 섹스의 문제에 빠딘다. 보이는 것을 보는 눈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가? 이것이 동시에 작동하는가? 

- 설교준비 & 세월호 사건 : 순서 설교, 주일 설교만 하게 되면 목회자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필요한 본문을 설교하게 된다. 구절 설교를 하지만 나머지 본문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설교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spiritual insight를 얻는다. / 세월호 : 방사선 치료(홍천-이시형, 요양마을), 스파의 옷장(소쿠리), 속옷을 접어놓는 사람이 없다. 세월호 자체의 문제로 보면 세월호는 또 터질 수 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준법, 공익 정신, 

- 주님의 사랑, 주님의 교회 / 교회 개혁을 위한 제안 / 이상과 현실의 괴리 : 교회 개혁을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다. 단지 목사라면, 교회라면 이렇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도를 좇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이런 모습이 개혁으로 보여졌다. 한경직 / 이성철 스님 / 법정 / 김수환 추기경 : 이들의 공통점을 자신의 종교의 기득권을 누리지 않았다. 자신의 교회가 커지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많은 목사들이 있다. 개혁은 내가 당연히 누릴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목사를 신뢰한다. 내가 목사로서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내가 이정도는 누릴 수 있어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개혁은 시작된다. 우리의 이상은 나의 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사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 앞장서서 선봉장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자녀들 교육 : 세상의 KS마크를 달지 않아도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게 된다. 
해야된다는 것이 싫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그 현실을 수용해 주는 것이고 그 토대위에 그의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듣지 않아도 미래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현존하는 미래”를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주어야 한다.(학교, 정부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교회마저...)

- 본문연구 / 기도생활 : 한주간 그 본문을 묵상한다. 월요일에 원문 연구를 마쳐진다. 이 원문의 내용을 가지고 한주간 묵상한다. 무릎꿇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분의 관점에서 살아가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 국제 시장 / 이민 목회의 통합(1세대, 2세대) : 이민 역사이후 60년대 이민, 국제시장(시체 딱기, 독일 탄광 사고 현장), 광부, 간호사 출신의 장로 권사님들이 이민 교회의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기득권을 놓치 못하기 때문에, 갑질이 심하다.) 당한만큼 교회에서 행한다. 미국 동부의 교회(네비게이션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장로님들), 노인이 아니라 어른으로 세워드려야 한다. 목회자들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갑질하는 행태 자체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상처와 한을 해결해주어야 한다. 

- 백주년 기념교회 : 본당은 500석, 19지역에서 설교, 39세 미만이 62%이다. 바르게 성령의 통로가 된다면 연령을 초월한다. 

- 목회자가 가져야하는 2개의 눈, 미래 목회의 패러다임  :  각자 자신이 살던 시대가 과학이 발달하고 타락한 시대였다. SNS의 발달(정보의 속도), 2000년전 원형 경기장의 잔인함, 성경에 죄성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 저지를수 있는 모든 죄악이 들어있다. 모양만 다르게 반복된다. 성경 어디에도 절대다수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었던 시대는 없다. 언제나 당신의 그루터기, 좁은문을 걸어가는 소수들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지금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김교신(차전도사) : 1920년대상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이라고 더 어려운 것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 교회다움을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앵글리칸 성공회, 루터란 처치, 루마니안 정교회 : 민족주의에 빠져서 보편적이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면 지금 사람이 많다가 언젠가는 줄어들게 된다. 

-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의 본질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가 놀랐다.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이 가르치는것과 같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분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자 무리들이 놀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하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의 삶의 자리에 충실한 것이다. 

- 동성애 : 성경적인 관점으로 분명히 안되는 것이다. 조계종 이성철 스님 : 스님들이 육식을 하는 것의 문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폐하면 불교의 집이 무너진다. 불교 신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명때문이다. 그 계명만 무너지겠는가? 세월지나면 모든 계명이 무너지는 것이다. 서구사회 교회가 무력해진 것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하나씩 무력화하였다. 그 순간부터 교회는 비는 것이다. 동성애를 무너뜨리면 그것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약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에서 말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것에 동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케이스에 표시해서 흡연이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의 문제(항문 성교의 문제점), 동성애자들 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해야함과 공시에 유해성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신랑 아버님이 결혼 사진을 찍는데 한 청년을 부름(청년의 큰형이 동성애자) 공개장소에서 그를 며느리로 인정할것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 성경적으로 목사로서의 입장은 분명해야하지만 유해성도 정확히 알려야 한다. 무조건 포용만하자는 것은 안된다. 

- 주님의 교회 사역, 가정생활 : 교회와 교인을 위해서 목회자가 희생하는 부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직업적인 목사만은 아니다. 내가 무언가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의 열매가 맺히겠는가? 아내와 자식들도 대상에 포함된다. 가족들과의 시간은 시간의 양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짦은 시간이라도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라. 넥타이도 풀기전에 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가 있다고 아버지의 자리가 빈자리가 되지 않도록 아내가 노력한다. 지금쯤은 아빠가 성경연구할꺼야, 지금쯤 아빠가 심방중일꺼야. “애들아 아빠 오셨다.” 아이들과 아빠의 벽이 없게 만드는 것은 아내의 역항이 중요하다. 시간적인 길이는 짧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교회의 쇠퇴현상, 기독교의 생명력 :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영이신 하나님께는 손과 발이 없다. 그 생명을 전하는 통로가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생명을 주실때 여자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은 희생없이는 전해지지 않는다. 희생은 봉사하고 다르다. 좋은 교회는 봉사자가 많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이다. 희생하면 반드시 생명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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