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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the tongue is a fire, a world of unrighteousness. The tongue is set among our members, jstaining the whole body, setting on fire the entire course of life,1 and set on fire by hell.2 For every kind of beast and bird, of reptile and sea creature, can be tamed and has been tamed by mankind, but no human being can tame the tongue. It is a restless evil, kfull of deadly poison. With it we bless our Lord and Father, and with it we curse people lwho are made in the likeness of God. 10 From the same mouth come blessing and cursing. My brothers,3 these things ought not to be so. 11 Does a spring pour forth from the same opening both fresh and salt water? 12 Can a fig tree, my brothers, bear olives, or a grapevine produce figs? Neither can a salt pond yield fresh water.

i Ps. 120:2–4; Prov. 16:27

j Matt. 15:18

1 Or wheel of birth

2 Greek Gehenna

k Ps. 140:3; Eccles. 10:11; Rom. 3:13

l See Gen. 1:26

3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3:6–12.

 

 

이제 6절 이하의 본문은 혀를 불로 표현하면서 혀의 파괴적인 위력(혀의 파괴력과 이중성)을 설명해나간다. 

 

6절) 혀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다. 혀는 우리의 신체의 부분중에 온 몸을 더럽게하고 삶의 모든 과정(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혀도 지옥불에 의해서 불탈 것이다. 

(약 3:6, 개정)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새번역)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②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③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 ②또는 '출생의 바퀴' 또는 '자연의 순환' ③지옥 불』

(약 3:6, 쉬운) 『혀도 곧 불입니다. 혀는 우리 몸 가운데 악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불씨가 됩니다. 이 불씨는 지옥 불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의 불의의 세계라는 표현은 ‘호 코스모스 테스 아디키아스’라는 표현으로 불의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눅 16:9에 ‘맘모나 테스 아디키아스’와 같은 구조로 이는 불의의 재물이라는 의미로 본문의 세상은 하나님께 반역한, 타락하고 죄로 물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의미는 혀가 우리의 지체 안에서 불의한 세계가 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혀 안에 타락한 세상의 죄가 들어 있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몸의 작은 부분이 모든 불의의 세계를 내포한다”라는 것이다.  예수 역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강조하시고, 그 입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 나오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설명하셨다(마 15:11, 18–19). 몸의 어떤 지체도 혀만큼 경건한 삶에 파국을 가져오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혀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세계의 분사를 통해 혀의 파괴력을 설명한다. 첫번째로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두번째로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며 세번째로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난다라고 말한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힌다라는 말은 사람의 전 존재에 영적인 오염을 퍼뜨린다는 것이다.(코로나 바이러스) 두번째 삶의 수레바퀴라는 표현은 ‘자연의 주기’라는 표현으로 당시 오르케우스교에서 사용된 종교적인 표현으로 구원을 위해 끝없이 반복되는 환생의 주기를 표현한 말이었는데 야고보 당시 시대에 이미 대중화된 용어로 인간의 삶의 전 과정, 삶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는 혀의 파괴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괴력의 근원이 어디로부터인가에 대해서 야고보는 지옥으로 부터 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지옥은 헬라어 ‘게헨나’라는 표현인데 예수가 최후의 심판의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셨다. 이는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으로 구약 성경과 중간기 시기에 마지막 심판의 장소라는 의미로 악명 높게 사용되었다. 이는 지옥의 통치자인 사탄이 혀에 거대한 파괴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혀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다. 

(마 15:18, 개정)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6절은 혀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세 개의 분사로 종결된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힌다(스필루사)는 말은 혀가 ‘참된 경건’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과 같다. ‘참된 경건’이란 자신을 지켜 세속(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아스필론, aspilon)이기 때문이다. 혀로 짓는 죄는 그 사람 전체에 영적 오염을 퍼뜨린다. 이어 나오는 두 개의 분사를 통해 야고보는 불의 이미지로 돌아가 혀가 초래하는 대재난의 범위와 근원을 각각 설명한다. 자연의 주기(the cycle of nature, 개역개정에는 ‘생의 수레바퀴’로 표현함-역자 주)를 불사른다는 말이 혀가 지닌 잠재적인 파괴성의 크기를 말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는 오르페우스교(Orphic religion)에서 사용된 표현으로서, 구원을 위해 끝없이 반복되는 환생(reincarnation)의 주기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본래는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전문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야고보의 시대에는 이미 ‘대중화’(popularized) 되어 인간의 삶의 과정, 삶의 ‘흥망성쇠’(up and down)를 강조하는 표현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6 그렇다면 요점은 혀가 지닌 맹렬한 파괴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인간의 전 존재(전 생애)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파괴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지옥으로부터 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그는 지옥을 헬라어 게헨나(gehenna)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다시 한 번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친숙함을 보여준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의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신다. 이 용어는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인데, 구약성경과 중간기 시기에 얻은 악명 높은 명성으로 마지막 심판의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지옥의 통치자인 사탄 자신의 힘이 혀에 거대한 파괴력을 제공한다.

  • 야고보는 혀의 파괴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잠언에 열거된 말의 죄, 즉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는 말’(잠 10:8; 12:18; 29:20 참조), 거짓말(잠 12:19), 거만한 자랑(잠 18:12), 험담(잠 10:18) 등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잘못된 소문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때로는 돌이킬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러한 소문은 어떤 산불 보다 진화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5절 참조). 우리가 혹독한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막대기와 돌은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은 결코 나를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고 들었던 어린 시절 어른들의 힐책이 사실은 정반대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대기나 돌로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을 때도 있다.

  • 6 Dibelius, 196–198의 참고문헌과 논의를 보라.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87–189.

 

7-8절) 여기서는 혀의 특성으로 길들일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파괴력을 지옥으로부터 제공 받았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동물을 네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의 분류와 유사하다.(창 1:26)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맡기신 역할이 바로 이 동물들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들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다(완료시제)의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이는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부여된 통치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혀를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혀가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 악인은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 140:3). 혀에서 나온 독은 이웃을 ‘망하게 하고’(잠 11:9), 죄 지은 사람 또한 멸망으로 이끈다(잠 10:8).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1.

 

9절) 우리는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럴 수 없는, 그래서는 안되는 일을 우리는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창조시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파괴하거나 제거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이 남아 있고 이를 얼마나 더 발현시키느냐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주를 더욱 하면 이 형상이 점점 쪼그라들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혀를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면 점점 이 형상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 

 

  • 혀의 위험성에 대한 야고보의 경고는 혀의 ‘이중성’(doubleness)을 지적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른다. 이중성이라는 주제는 야고보가 반복해서 지적하는 문제인데, 차별하는 태도(2:4 참조)와 행함이 없는 믿음의 태도(2:14–26)에서 나타나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모순되고 불안정한 동요가 혀의 경우에도 표현된다. 번연(Bunyan)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 ‘밖에서는 성인이요, 집에서는 악마’였던 ‘수다쟁이’(Talkative)처럼,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말의 모순된 특성으로 말미암아 초점이 없고 안정이 없는 믿음을 보여준다.

  • 야고보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이 찬양의 행위를 가장 높고, 순수하고, 고귀한 언어 형태로 인용한다. 반면에 가장 낮고 더럽고 비천한 언어 형태는 저주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축복의 정반대편에 있는(신 30:19) 저주의 말이 커다란 힘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욕을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오히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었다(눅 6:28; 참조 롬 12:14). 저주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면 우리가 저주를 선언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7절에 창세기 1:26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랍비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저주를 금하였다. “내 이웃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ereshith Rabba 24, 창 5:1에 관하여).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1–192.

 

10-12절)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없음을 몇가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첫번째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으며 두번째는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말한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마 15:11, 18-19; 12:36-37)

(마 15:11, 개정)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8-19, 개정)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 12:36-37, 개정)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베냐민의 유언 6:5에 따르면, “선한 마음은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 욕설과 공경, 평화와 다툼, 위선과 진리, 가난과 부 등의 양극단의 말을 내지 않고, 모든 사람에 대해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의 성향을 가진다.” 그러므로 말의 이중성은 마땅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일관되고 순결한 언어로 마음의 온전함과 순결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3.

 

우리 인간들은 마땅하지 않은 이 일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샘이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고 무화과 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낼 수 없고 짠 샘이 단 물을 낼 수 없음에도 인간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동일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야고보는 이러한 이중성을 극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와짐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이러한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통해서 선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선 내용과 연결한다면 아름다운 혀의 사용,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행함으로 너의 온전한 믿음을 보일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 행함으로. 그 행함의 한 갈래가 바로 말에 실수가 없음을 통해서, 혀의 파괴력을 이해하고 그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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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ot many of you should become teachers, my brothers, for you know that we who teach will be judged with greater strictness. For dwe all stumble in many ways. And if anyone does not stumble in what he says, ehe is a perfect man, fable also to bridle his whole body. If we put gbits into the mouths of horses so that they obey us, we guide their whole bodies as well. Look at the ships also: though they are so large and are driven by strong winds, they are guided by a very small rudder wherever the will of the pilot directs. So also the tongue is a small member, yet hit boasts of great things. How great a forest is set ablaze by such a small fire!

c Matt. 23:8; [Rom. 2:20, 21; 1 Tim. 1:7]

d 1 Kgs. 8:46; Prov. 20:9; Eccles. 7:20; 1 John 1:8

e [Matt. 12:37]

f See ch. 1:26

g Ps. 32:9

h [Ps. 12:3, 4; 73:8, 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3:1–5.

 

3:1-4:12의 내용은 공동체의 불화로 인한 죄를 다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ABA’패턴을 따르고 있다. 

  A 3:1-12 혀의 위험성

    B 3:13-18 위로부터 난 지혜

  A’ 4:1-12 혀의 위험성

 

  • 이 부분은 야고보서 그 어느 곳보다도 광범위한 야고보의 배경을 드러내준다. 통제되지 않는 말(speech)의 문제는 잠언 및 다른 구약성경과 유대 지혜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말의 문제를 그리스와 헬라적 유대 도덕가들에게 인기 있던 실례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실례들은 조금이라도 헬라문화에 친숙한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형태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런 점들을 통해 드러나는 야고보의 모습은 구약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헬라-유대 문화와 언어 그리고 문헌에 매우 친숙한 꽤 교양 있는 유대인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78.

 

1절) '내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통해서 혀의 중요성과 혀의 파괴적인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선생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랍비나 선생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가르치는 은사를 서신서에서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 자리이기에 이 자리를 여러가지 잘못된 이유들을 가지고 얻으려는 이들이 많았다. 잘못된 동기를 가진 선생으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이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더 큰 기대에는 반드시 더 큰 책임이 뒤따른다. 그렇기에 선생의 위치는 더 큰 심판이 뒤따르는 자리인 것이다. 

(눅 12:48, 개정)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Teachers were important in the early church (Acts 2:42; Rom. 12:7; 1 Cor. 12:28; Eph. 4:11), and those who were ambitious sought teacher status for the wrong reasons. However, with greater responsibility comes greater expectations by God (Luke 12:48; Heb. 13:17), and teachers will be judged with greater strictness (lit., “greater judgment”), since they are accountable for more.

lit. literall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5.

 

많이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경고는 반대로 이 선생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하길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애써야 한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렇게 살아갈 책임이 더 막중한 법이다. 야고보에게는 자신과 같이 가르치는 소명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설득하려는 의도가 없다. 오히려 그는 독자들에게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솔하게 또는 이기적인 동기로 그 사역에 입문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기를 원한다.

 

2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말한 그것은 우리의 온 몸을 굴레 씌운다.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반영한다. 결국 우리는 그 사람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 그 사람과 대화해 보면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말에 실수가 없는, 혀를 완벽하게 다스릴줄 아는 사람은 없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실수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타이오(ptaiō)는 ‘넘어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유대교와 신약성경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영적 실패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2:10; 롬 11:11; 벧후 1:19 참조). 그 말은 비교적 작고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강조점은 죄의 숫자가 아니라 죄의 다양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NIV는 ‘우리 모두 여러 가지 면에서 넘어진다’로 번역한다. 이에 반해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짓는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혀로 짓는 죄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더러운 말을 보편적인 죄로 지적하는 것은 야고보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잠언에는 말의 중요성과 위력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10:8, 11; 16:27–28; 18:7–8 참조). 시락의 아들 예수도 야고보처럼 말의 죄를 무의식적인 죄와 연관시킨다. “사람은 가끔 악의 없이 말실수를 하는 수가 있다. 말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집회서 19:16). 야고보는 그 말을 받아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입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고, 거짓말과 신랄한 말과 비방하는 말이 나오기 쉬우며, 다무는 것이 좋을 때도 열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입을 통제하는 사람은 몸의 다른-덜 까다로운-지체를 다스릴 능력을 가진다.

  •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80–181.

3-5절) 야고보는 본 구절들에서 예를 들어 몇가지를 대조하고 있다. 

말과 재갈 / 큰 배와 키 / 큰 숲과 작은 불 이러한 대조는 결국 우리의 온 몸과 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말들의 입의 재갈과 배를 조종하는 키는 모두 작은 것이지만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몸의 가장 작은 기관인 혀가 온 몸을 굴레 씌우고 한 사람의 인격과 행동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비유를 하고 있다. 

The three images that James uses in these verses—bits and horses, rudders and ships, sparks and forest fires—occur together in ancient literature (e.g., Philo, Allegorical Interpretation 3.223–224), and some of them even illustrate the power of speech (Plutarch, de garrulitate 10). The tongue has power that is quite out of proportion with its size relative to other parts of the human body.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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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rothers,1 wshow no partiality as you hold the faith in our Lord Jesus Christ, xthe Lord of glory. For if a man wearing a gold ring and fine clothing comes into your assembly, and a poor man in shabby clothing also comes in, and if you pay attention to the one who wears the fine clothing and say, “You sit here in a good place,” ywhile you say to the poor man, “You stand over there,” or, “Sit down at my feet,” have you not then made distinctions among yourselves and become zjudges with evil thoughts? Listen, my beloved brothers, ahas not God chosen those who are poor in the world to be brich in faith and heirs of cthe kingdom, dwhich he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But you ehave dishonored the poor man. Are not the rich the ones who oppress you, and the ones who fdrag you ginto court? Are they not the ones who blaspheme the honorable hname by which you were called?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5, 14

w ver. 9; Lev. 19:15; Deut. 1:17; 16:19; Prov. 24:23; Rom. 2:11; Eph. 6:9

x 1 Cor. 2:8; [Acts 7:2]

y [Prov. 18:23]

z John 7:24

a 1 Cor. 1:27, 28; [Job 34:19]

b 2 Cor. 8:9; Rev. 2:9; See Luke 12:21

c Matt. 5:3; Luke 6:20; 12:32

d See ch. 1:12

e [1 Cor. 11:22]

f Acts 16:19

g Acts 8:3; 17:6; 18:12; [ch. 5:6]

h [Isa. 63:19; 65:1; Amos 9:12; Acts 15: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2:1–7.

 

야고보는 2:1-13절에서 차별을 금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가 이 주제에 대해 이처럼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이 일이 실제로 독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부자에게 당하고 있는 억압(6–7)의 결과가 일종의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반면, 보다 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모욕하고 경멸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이 들었던 왕의 법을 ‘행하지’ 못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0.

 

1절)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레 19:15, 골 3:11)

야고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함께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별이란 외모(얼굴)을 따라서 받아들이거나 판단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지위나 힘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차별, 배제, 혐오”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되는 태도임에도 도리어 기독교 신앙이 근본주의를 강조하면서 나와 다름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편을 갈라서 매도하고 싸우려는 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는 “용서, 화합,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  차별(partiality)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받아들이다’(receiving the face)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차별을 의미하는 구약 히브리어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된다. ‘얼굴을 받아들이다’라는 말은 신체적 외모나 사회적 지위 또는 인종 등과 같이 외적인 조건들을 토대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0–131.

 

2-4절) 본문의 내용은 교회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차별의 행위를 그리고 있다. 주일 예배에 온몸을 명품 옷과 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외제 차를 타고 온 사람과 더러운 옷을 입고 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때 명품 옷을 입은 자를 보고는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반대로 가난한 이를 향해서는 거기 서 있던지 저 구석에 가서 앉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서로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 최대한 그러한 판단을 자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최대한 모든 이에게 동일한 대우와 도움을 줄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들의 관심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벗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마 7:1-5, 롬 14:4, 고전 5:12)

본문에서 좋은 자리를 상석, 앞자리, 주인이 앉은 옆자리를 의미하고 발등상 아래는 노예들이 주인을 섬기기 위한 자리를 의미한다. 

Assembly probably refers to a Christian house church. Here two types of people arrive: one with a gold ring and fine clothing, and another with shabby clothing. The wealthy person is told to sit here in a good place, a place of honor, perhaps in the front, while the poor person is shown contempt and told either to stand (probably in the back) or sit down at my feet like a servant. Those who make such distinctions show themselves to be judges with evil thoughts. Christians are not to “judge” each other (Matt. 7:1–5; Rom. 14:4; 1 Cor. 5:12), and to do so can only mean one’s mind is consumed with evil “thoughts” (Gk. dialogismos, which can mean “opinions,” “reasoning,” or “conclus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2세기 초 금관을 한 젊은이의 초상화

 

5절) 이렇게 아무나 판단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특별한 은혜를 입는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기에 도리어 영원한 부요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 5:3, 개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God is especially concerned for the poor (Exod 23:11; 1 Sam 2:8; Ps 12:5; Luke 6:20; 1 Cor 1:26–28). inherit the kingdom. The kingdom of God was inaugurated when Jesus first came to earth (Matt 12:28), and believers, who enter it now by faith, anticipate being part of its final glorious manifestation (2 Pet 1:11).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28.

 

  • 예수도 야고보도 가난한 자가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약속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1:9–11의 본문 주석 부분과 본서 서론 부분의 야고보의 신학 단락 참조), ‘가난한 자’는 거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사람과 영적으로 경건한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그 자체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부자들을 모두 배제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가 제자도의 걸림돌로서 부를 경고한 것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막 10:23; 눅 12:34), 또한 그 분도 야고보도 부자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배제시킨 것은 아니다.

  • 야고보는 오직 가난한 사람만 선택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요지는 독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었고, 이 사실이 곧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차별 행위를 정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6–137.

 

6-7절)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도리어 가난한 나를 업신여기고 멸시했다. 그들이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부자를 선대한 이유는 부자는 우리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우리가 부르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비방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억압, 착취는 당시 1세기에 상인이나 지주들이 땅이나 소유물을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시대적인 상황, 극단적인 사회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것이었다.(5:1-6) 야고보는 이렇게 부자들이 구약(암 4:1, 합 1:4, 말 3:5)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들을 법정으로 끌고와 사법제도를 동원해서 그들의 것을 빼앗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을 왜 도리어 존대하는 지에 대해서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oppress you. This oppression, or exploitation, reflects a situation of radical social polarization in the first century, with merchants and landowners taking land and possessions from the poor (cf. 5:1–6). James challenges his Christian readers as to why they would honor the rich in the assembly when it is the rich unbelievers of the world who blaspheme the name of Christ. drag you into court. As frequently recorded in the OT (e.g., Amos 4:1; Hab. 1:4; Mal. 3:5), the wealthy often used the court system to steal from the poor. This situation was the primary reason for the revolts in Galilee that led to the war of a.d. 66–7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 ‘억압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뒤나스튜오(katadynasteuō)는 70인역에서 부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암 4:1 참조), 또는 고아와 과부(겔 22:7)의 착취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참된 경건’(약 1:26–27)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이 부자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고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37.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단지 1세기의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상황속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더 커지고 있고, 부의 불평등과 소득격차는 커진다. 실제 노동의 강도나 역할예 비례해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진 자들은 시스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서 부를 착취하고 불로소득을 가져간다. 약자의 소리는 법정에서 들리지 않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은 여전하다. 대기업의 자제들이나 정치권의 자제들은 마약을 투여하고 음주운전을 해도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한다.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서 하청업체의 젊은이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피와 눈물의 열매를 소수의 자본가들이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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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gKnow this, my beloved brothers: let every person hbe quick to hear, islow to speak, jslow to anger; 20 for the anger of man does not produce the righteousness of God. 21 Therefore kput away all filthiness and rampant wickedness and receive with lmeekness the implanted word, mwhich is able to save your souls.

22 But be ndoers of the word, and not hearers only, deceiving yourselves. 23 For if anyone is a hearer of the word and not a doer, he is like a man who looks intently at his natural face in a mirror. 24 For he looks at himself and goes away and at once forgets what he was like. 25 But the one who looks into the perfect law, othe law of liberty, and perseveres, being no hearer who forgets but a doer who acts, phe will be blessed in his doing.

26 If anyone thinks he is religious qand does not bridle his tongue but deceives his heart, this person’s rreligion is worthless. 27 Religion that is pure and undefiled before God the Father is this: sto visit torphans and widows in their affliction, and uto keep oneself vunstained from the world.

g 1 John 2:21

h [Eccles. 5:1, 2]

i Prov. 10:19; 17:27

j See Prov. 14:29

k Col. 3:8

l ch. 3:13

m 1 Cor. 15:2; Eph. 1:13

n Rom. 2:13; [ch. 2:14–20; Matt. 7:21, 24–27; Luke 8:21; John 13:17]

o ch. 2:12; [Gal. 2:4; 5:1, 13; 1 Pet. 2:16; 2 Pet. 2:19]; See John 8:32

p Ps. 1:1, 2; Luke 11:28

q ch. 3:2, 3; Ps. 39:1; [ch. 3:6; Ps. 34:13; 141:3]

r Acts 26:5

s Matt. 25:36

t Job 31:17, 18; Isa. 1:17, 23

u 1 Tim. 5:22; 1 John 5:18

v 2 Pet. 3: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19–27.

 

19-20절) 성급한 말과 통제되지 않은 분노에 대해서 경고하기전에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그들을 호칭한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서 야고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면서 ‘내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야고보는 혀를 잘못 놀리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잠언에서는 말의 중요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잠 10:19, 개정)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1:12, 개정)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 15:1, 개정)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7:28, 개정)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이 반대로 한다는 것이다. 듣는 것이 부족하고 말은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성급히 하며 성내기에 급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난폭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사람이 성내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내고 분노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당한 분노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이 성내는 것 말하자면 성급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이기적은 분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다. 그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기를 요구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포되는 바울 법적이거나 변론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구약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용법에 더 가깝다.

God is holy and righteous, requiring that his people emulate his righteous character (e.g., Lev. 19:2; Matt. 5:48; 1 Pet. 1:16). “Righteousness” here is not Pauline legal or forensic righteousness proclaimed in God’s court of law (e.g., see notes on Rom. 3:20; 5:10) but is closer to the usage of the OT (Isa. 61:3) and Jesus (Matt. 3:15; 5:6, 10, 20; 6:1, 33; 21:32), in the sense of conducting one’s life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his standard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2.

 

  •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의를 해석하는 세 가지 주요한 견해가 있다. 첫째, 이 말은 속격인 테우(theou, ‘하나님의’)를 주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의로운 지위(신분)’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의’ 이해는 바울서신에서 잘 입증되며(특히 빌 3:9), 야고보는 2:14–26에서 ‘의’라는 명사와 동족어인 ‘의롭게 하다’는 동사를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의’라는 단어를 ‘정의’(justice, NEB 참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신 심판의 수단이기 때문에 사람의 성냄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셈이다(이 경우에 속격 테우는 아마도 소유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 이해는 70인역에서 흔히 발견될 뿐만 아니라, ‘의를 이룬다’(행한다)는 말이 히브리서 11:33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RSV). 셋째, 속격 테우를 목적격의 속격으로 해석하여, ‘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의를 ‘행한다’(포이에오, poieō) 또는 ‘이룬다’(에르가조마이, ergazomai)는 말은 성경 헬라어에서 늘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에르가조마이의 경우 시 15:2; 행 10:35; 히 11:33를 보라). 이들 중에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데, 특히 야고보가 ‘의’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앞에서 말한 첫째 견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용례가 창 15:6의 인용구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의를 행한다’는 말은 2:9의 ‘죄를 행한다’는 말과 정면으로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경솔하고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행위기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70인역에서 ‘행하다’(에르가조마이)와 ‘의’가 유일하게 함께 나오는 시편 15:2은 말(언어)의 죄와 연관된다.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7–118.

 

21절)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의 마음은 항상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새로와지기 위해서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그릇의 크기를 키우거나 혹은 무언가를 덜어내는, 버리는 과정이 선행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듣고 받아도 의미없이 버려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롬 13:12, 개정)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엡 4:22, 개정)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골 3:8, 개정)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본문의 심어진 말씀은 신 30:14과 렘 31:33을 떠올리게 한다. 

(신 30:14, 개정)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렘 31:33, 개정)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심겨진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다. 여기서의 구원은 점진적 성화와 마지막 날에 있을 구원 사역의 완성을 가리킨다. 

Put away all filthiness pictures the stripping off of dirty clothes (cf. Rom. 13:12; Eph. 4:22; Col. 3:8) based on a desire to have nothing to do with the dirt (here, moral evil) ever again. In place of filthy behavior, the implanted word must take root in God’s people. This idea of God planting his revealed truth reflects Deut. 30:14 (“the word is very near you. It is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and especially the new covenant of Jer. 31:33 (“I will put my law within them, and I will write it on their hearts”). Save your souls refers here to progressive sanctification and ultimately the completion of God’s saving work on the last da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2.

 

22-25절) 행함이 없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반면에 행함으로 귀결되는 말씀을 들음은 축복이다.

(롬 2:13, 개정)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자기기만의 죄를 짓게 된다. 복음이 본래 구원하는 능력과 순종에 대한 요청을 모두 포함한다면 한쪽으로만 관계를 맺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야고보가 밝힌 이유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거나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들음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실제(참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앎)의 어머니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2–123.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후에 그 모습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이처럼 행하는 이는 그 행하는 일로 복을 받을 것이다. 

 

25절을 번역함에 있어서 한글 성경은 간직하다, 유지하다라는 표현이 생략되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간직하는 자는 듣고 잊는 자가 아니요 행하는 자니 그는 그의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들여다보고 간직하는, 유지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바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묵상하고 되뇌이고 간직함으로 행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약 1:25, 새번역)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⑦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 ⑦'행한 일로'로 번역할 수도 있음』

 

말씀, 진리의 복음을 듣고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수 있다. 본문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데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롬 7:12) 하지만 그 율법 자체로는 죄로 가득한 인간으로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율법은 복음의 말씀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과 함께 갈때 자유의 법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을 쳐다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혹은 옷에 티가 묻었는데도 이를 떼어내지 않고 돌아갈 수도 있고 이를 자세히 살펴보아서 티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In James, the “law” and the “word” are two different ways of describing the same reality. Earlier, the “word of truth” (1:18) is the gospel of Christ, and the “law” here refers to the OT law as it has been interpreted and fulfilled in Christ. Though the OT law was “holy and righteous and good” (Rom. 7:12), it had no power by itself to enable sinful people to conform to it. Thus, the OT law did not liberate God’s people but enslaved them, as Paul taught (Gal. 3:10–4:7; cf. Rom. 2:1–3:20; 5:20; 6:14–15; 7:1–25). But the law is one of “liberty” when it comes along with the word of the gospel an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o change hearts. See also note on James 2: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 본문을 볼 때, 24절의 ‘잊어버리는 것’과 25절의 ‘간직하다’(remaining) 간의 대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개역개정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율법을 들여다 본다’는 말 뒤 원문에는 ‘간직하다’라는 말이 있다-역자 주). 이러한 강조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와 대조되는 25절 끝 부분에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야고보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효력이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임을 설명하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은 고작 머리를 빗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도 밖에는 말씀으로부터 어떤 지속적인 효력을 얻지 못한다. 이와 달리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간직하는’(파라메이나스, parameinas) 자인데, 이 말은 말씀을 계속 행한다는 뜻이거나(NIV) 또는 계속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GNB)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말씀을 행하는 자는 행동을 통해서 말씀이 자신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4.

 

26-27절)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첫번째로 자기의 혀를 재갈 물려서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이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기에 듣고 행하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고아와 과부(딤전 5:3-16, 신 10:18, 사 1:17, 렘 7:5-7)로 대변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세번째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야고보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야할 참된 예배, 경건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야고보는 종교가 무엇인지 전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언급하는 것이 빠진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들려지지 않으면 행해질 수없다. 하지만 여기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들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행함은 소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이를 행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초대교회가 그러 했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듣되 그것을 간직하며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 알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 않고 주변의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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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uBlessed is the man who remains steadfast under trial, for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vthe crown of life, wwhich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13 Let no one say when he is tempted, “I am being tempted by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and he himself tempts no one. 14 But each person is tempted when he is lured and enticed by his own desire. 15 Then desire xwhen it has conceived gives birth to sin, and ysin when it is fully grown brings forth death.

16 Do not be deceived, my beloved brothers. 17 z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coming down from athe Father of lights, bwith whom there is no variation or shadow due to change.4 18 cOf his own will he dbrought us forth by the word of truth, ethat we should be a kind of ffirstfruits of his creatures.

u ch. 5:11; Matt. 10:22; 1 Pet. 3:14; [Dan. 12:12]

v Rev. 2:10; 3:11; [1 Cor. 9:25; 2 Tim. 4:8; 1 Pet. 5:4]

w ch. 2:5

x Job 15:35; Ps. 7:14; Isa. 59:4

y Rom. 5:12; 6:23

z Ps. 85:12; John 3:27; 1 Cor. 4:7

a 1 John 1:5

b Mal. 3:6

4 Some manuscripts variation due to a shadow of turning

c John 1:13

d [Gal. 4:19; 1 Pet. 1:3, 23]

e [Eph. 1:12]

f Jer. 2:3; Rev. 14:4; [Rom. 8:19–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12–18.

 

12절) 본문의 생명의 면류관은 앞선 2절의 응답이다. 이는 보석이 장식된 황제의 왕관이 아니라 경기의 승자나 전쟁에 승리한 황제에게 주어지는 월계수 관을 가리킨다.(고전 9:25) 이처럼 시험을 이겨내는 신실한 자에게 약속된 상은 다름아닌 모든 풍성한 복이 동반된 영원한 생명이다.(계 2:10)

 

13절) 앞선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 1:2, 개정)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가지 시험을 우리는 당한다. 이는 시련을 포험한 여러가지이다. 믿음의 시련은 ‘도키미온’이라는 단어로 불순물을 포함한 금이 순금이 되기위해서 거쳐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러 시험은 테스트나 유혹, 시련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신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창 22장), 이스라엘(출 16:4), 히스기야(대하 32:31)를 시험하셨다. 이는 그들을 검증하심으로 그들의 성품이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test) 하시지만 유혹(tempt)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꾀어서 그들로 죄를 저지르도록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이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 13절의 하반부에는 왜 유혹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되는데, 그 분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he cannot be tempted with evil).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택하고 있는 이 번역은 드물게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 아페이라스토스(apeirastos)를 수동의 의미를 지닌 동사적 형용사로 이해하여 ‘유혹받으실 수 없는’(unable to be tempted)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두 개의 가능성도 언급될 수 있다. 호르트는 그 단어를 좀 더 자주 사용되는 유사어 아페이라토스(apeiratos)와 연관시켜 ‘전혀 경험이 없는’(inexperienced)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NEB에 반영되어, ‘하나님은 악과 접촉이 없으시다(untouched)’로 표현된다. 반면에 데이비스(Davids)는 이 단어를 ‘시험받아서는 안 된다(ought not to be tested)’로 번역한다. 그에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06.

 

14-15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짓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심에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를 통해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죄를 낳았고 이것이 자라나 사망을 가져오게 된것이다. 

본문에서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모습은 낚시꾼이 낚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루어 낚시’가 있다. 이는 지렁이나 떡밥과 같은 미끼가 아닌 인조 미끼를 사용하는 낚시를 말한다. 보통 릴 낚시로 루어(미끼)를 멀리 던진후 릴을 감으면서 헤엄치듯 움직여 고기를 유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욕심에 미혹된 인간은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된 성공, 자기만족, 기쁨에 끌려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결국 길을 잃고 멀리 떨어져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벧전 5:8-9, 개정)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욕심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본문은 3대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한다. 욕심이 자라나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죄이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여 새롭게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인 것이다. 결국 욕심(에피티미아)-죄(하말티아)-사망(타나토스)의 사이클이 이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이클을 끊어 내야 한다. 

 

 

James knows the origin of temptation. It is not God, nor is it Satan and Satan alone. It is instead a personal desire born of self-interest that renders us susceptible to the evil inclination and therefore, at times, to the wiles of the evil one. We may wrongly seek to blame others, Satan, or even God, but ultimately we are morally responsible. The key term here is epithymia, which means “desire.” In the New Testament epithymia generally carries a negative meaning, such as “lust,” “selfish ambition,” or “evil desire.”14

Unlike the case in 1:2–8, here peirasmos (“temptation, trial”) is clearly restricted in origin to the internal, to its source lodged within us. This source is the “evil desire,” and James must be thinking again of the yeṣer ha-ra.15 According to him, we are “dragged away” and “enticed” by evil desire. The expressions have their home in the realms of hunting and fishing. The fact that they appear in an odd order (“dragged off” is placed before “enticed”) is best explained by the predilection of the Old Testament to mesh images of snares and nets. So in Ecclesiastes 9:12 we read, “As fish are caught in a cruel net, or birds taken in a snare, so men are trapped by evil times that fall unexpectedly upon them.”

In other words, this verse contains two similar images, not a succession of action within one image. The first pictures the violent action of capture that follows setting a lure, and second the attractive bait that draws an unsuspecting victim. The extraordinary vividness of these images shows how dangerous James believes the evil impulse to be. Evil desire within us acts as both the attractive bait and as the lure. The evil desire is our own, and a bent to be attracted to it is equally our own responsibility. This deep character inclination explains the actions of the double-minded person in 1:6–8 and the wealthy person in 1:10.

14 In Matt. 5:28 Jesus speaks of “lust”; Paul in 2 Tim. 3:6 speaks of those who are swayed by “evil desires”; and Peter in 2 Peter 1:4 speaks of escaping the corruption caused by “evil desires.”

15 See pp. 18, 23–24, 56–58, abov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variety of rabbinic views concerning the yeṣerim (sometimes it is undifferentiated, sometimes clearly evil, and sometimes clearly pure) parallels the intended ambiguity of James’s use of peirasmos.

 David P. Nystrom, Jame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73–74.

 

16-18절) 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다시 설명한다. 앞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시험을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면 이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시련을 당할때 그들을 죄짓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사와 선물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건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그 누구와 달리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복음의 말씀 고후 6:7, 엡 1:13, 골 1:5, 딤후 2:15)을 통해서 우리를 낳으셨다.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 출생한 우리들이 다시금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영적인 생명의 탄생을 말한다면 앞선 15절에서는 죄와 사망의 탄생을 말하고 있댜. 

  • 새 탄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 즉 그 분이 창조한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변함이 없으신 그 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이 영적 탄생을 이루신 수단이 바로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다. 그리고 이 영적 탄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계획의 첫 불입금(첫 열매)이 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좋은 선물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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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the lowly brother boast in his exaltation, 10 and rthe rich in his humiliation, because slike a flower of the grass3 he will pass away. 11 For the sun rises with its scorching heat and twithers the grass; its flower falls, and its beauty perishes. So also will the rich man fade away in the midst of his pursuits.

r Jer. 9:23

s [Ps. 102:4, 11; 1 Cor. 7:31; 1 Pet. 1:24]

3 Or a wild flower

t Isa. 40: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9–11.

 

야고보서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중의 하나가 가난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는 그들이 헤쳐나가야할 가장 어려운 시험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앞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의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 충실함, 일편단심을 가장 힘들게 하는 영역이 바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문제였을 것이다. 

 

9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 

이는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가난한 상태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자랑하라는 것이다. 

가난과 부함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도록 한다. 

  • 낮은(타페이노스, tapeinos) 형제’라는 표현은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비천한 그리스도인, 곧 비교적 가난하고 힘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헬라어 형용사 타페이노스가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로는 첫째로 이 용어가 구약성경에서 빈번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시 10:18; 34:18; 102:17; 사 11:4; 암 2:7 참조)과 둘째로 타페이노스가 본문의 맥락에서 10절의 플루시오스(plousios, 부유한)와 대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야고보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서신을 쓰고 있다고 볼 때, 그의 독자의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우리는 이 시기에 닥친 기근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 의해 추방된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심각한 고통 속에 처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행 11:28–29을 보라). 그러한 고통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으로 비천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높음을 자랑해야 한다. 자랑하다는 말은 이 맥락에서 교만한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소유한 기쁨에 찬 만족감(pride)을 의미한다. ‘높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프소스(hypsos)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오르시고(엡 4:8), 거기로부터 성령이 내려오시는(눅 24:49) 천상의 영역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성도들은 현재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상의 시민으로서 그 영역에 속해있을 뿐만 아니라(빌 3:20), 또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실 주 예수를 하늘로부터 기다리고 있다(빌 3:21). 이런 점에서 높음이란 말 속에는 성도 자신이 현재에 누리고 있는 높아진(고양된) 영적 지위는 물론이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망도 포함되어 있다. 야고보는 휘프소스의 이런 의미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서 2:5에서 이러한 현재의 지위와 미래의 상속에 대한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않으셨느냐.”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97–98.

 

10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부한 자의 재물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결국 재물은 일시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구원과 관련되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고 결국  그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낮아지신 그분과 닮아 가야만 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아져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높아질 수 없다. 도리어 낮아져야만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4:10) 

  • 야고보는 가난한 그리스도인과 부한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가난한 성도는 세상의 눈으로는 하찮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신 주님과의 관계를 기뻐해야 한다. 또한 부한 성도는 물질이 풍부하고 윤택하여 세상의 눈으로는 대단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자기를 끝까지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망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받아’ ‘고통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삶을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01.  

 

11절)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부한 자도 그가 추구하는 일에 이렇게 쇠할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것의 심상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이다.

pass away like a wild flower. Familiar biblical imagery for transience (Job 14:2; Ps 103:15–16; Isa 40:6–7; 1 Pet 1:24), referring either to the impermanent wealth of rich Christians or to the ultimate judgment of rich non-Christians.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26.

(사 40:6-7, 개정)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11절은 10절에 언급된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더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이사야 40:6–7의 내용을 계속해서 반영한다. RSV는 11절 상반부에 나오는 4개의 주동사를 현재형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아마도 헬라어 과거시제의 관습적이고, 격언적인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시제는 또한 행위의 갑작스러움을 표현한다.6 빠르게 시드는 꽃의 이미지는 이른 봄에 핀 꽃들이 태양의 무자비한 열기에 갑작스럽게 시드는 것을 일상으로 볼 수 있는 중동 지역의 독자들에게 친숙했을 것이다. ‘뜨거운 바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손(kausōn)은 ‘뜨거운 열기’로도 번역된다(RSV).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동풍’, ‘뜨거운 사막바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몇 번 사용되는데, 주로 심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예컨대 호세아 13:15에는 “그(에브라임)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라” 고 기록되어 있다.

  • 이러한 풀의 꽃 비유의 요지가 11b절에 분명하게 요약된다. 어느 날 만발하게 핀 것으로 보이는 꽃이 어느 날(갑자기) 시들어 죽는 것처럼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할 것’이라는 것이다. 쇠잔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마라이노(marainō)는 여기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행하는 일’로 번역된 헬라어 포레이아(poreia)는 단순히 ‘삶의 방식’(way of life)이란 의미에서 ‘방식’(way)을 의미할 수 있지만, 종종 보다 특정한 의미로 ‘여행’(journey)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본문의 맥락과 뒤에 나오는 야고보서 4:13을 고려할 때, 이 단어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사업 여행을 의미하고, 그 사업 여행 도중에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6 Moule, 12; Adamson, 63.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01–102. 

 

야고보는 교회안의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에게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마음에 두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는 현재 자신의 가난함, 궁핍의 상태에 빠져서 자신의 미래와 신앙인으로서 현재의 위치나 소망을 품비 못한다. 동시에 부자는 자신의 부유함에 취해서 인생의 궁극적 주인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이 부유함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보장해주지 못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지금 야고보는 지금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의 궁극적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꽃이 피는 것 같고 성공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강한 햇빛과 뜨거운 바람이 불면 꽃잎은 지고 풀은 마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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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f any of you lacks wisdom, klet him ask God, lwho gives generously to all without reproach, and it will be given him. But mlet him ask in faith, nwith no doubting, for the one who doubts is like oa wave of the sea that is driven and tossed by the wind. For that person must not suppose that he will receive anything from the Lord; phe is a double-minded man, qunstable in all his ways.

j 1 Kgs. 3:9–12; Prov. 2:3–6

k See Matt. 7:7

l Prov. 28:5

m Mark 11:24

n Matt. 21:21

o [Isa. 57:20; Eph. 4:14]

p ch. 4:8

q [2 Pet. 2:14; 3: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5–8.

 

5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식을 설명했다면 6-8절에서는 우리가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룬다. 

 

5절) 야고보는 앞서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루었다. 결국 시험의 이유는 인내로 온전케 하기 위함인데 이를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을 다루면서 지혜가 부족한 신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혜가 성도들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는 능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지혜는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며 하나님 중심적인 분별력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구하는 이들에게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 

James addresses the believer who lacks wisdom in handling trials. Wisdom, as in the OT, is a God-given and God-centered discernment regarding the practical issues in life. Wisdom comes from prayer for God’s help. God gives generously (with “single-minded” liberality) and without reproach (he does not want anyone to hesitate to come to him).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1.

 

지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목적의 빛 안에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결국 지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통찰과 그것을 실제의 삶에 적용시키는 방법이다.(잠 2:10-19) 시험중에 기뻐하기 위해서 이것이 신자들에게 필요하다. 야고보서에서 이 지혜는 매우 중요한 테마인데 직접적으로 지혜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혀’라는 표현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줄로 믿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잠 2:6, 개정)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마 7:7, 개정)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후히라고 번역된 ‘하플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단일한(single), 단순한(simple)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이 단어가 준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때 단일함의 개념은 관대함의 의미를 지닌다.(고후 8:2; 9:11, 13) 하지만 본문의 이 표현을 후히보다 단일함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야고보의 의도에 더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 후히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하플로스(haplōs)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한번 나타난다. 이 단어는 ‘단일한’(single), 또는 ‘단순한’(simple)이란 기본 의미를 지닌 단어의 파생어인데, 바울이 에베소서 6:5에서 사용한 헬라어 명사 하플로테스(haplotēs)에 그 의미가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종들아…성실한 마음으로(haplotēti kardias) 하라”(골3:22). 준다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때 ‘단일함’의 개념은 관대함의 의미를 지닌다(고후 8:2; 9:11, 13을 보라). 이것이 야고보서 1:5에 대해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채택하고 있는 의미이고, 많은 주석가들도 이에 동조한다(특히 호르트〈Hort〉의 주석에 나타난 전반적인 논의 참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나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표현하는 ‘단일함’의 사상이 야고보의 의도에 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어와 동족 형용사인 하플루스(haplous)가 누가복음 11:34(마 6:22을 보라)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고보는 철저하게 예수의 가르침에 친숙하다. 더욱이 ‘단일한’, ‘주저 없이’란 의미는 이어서 나오는 ‘꾸짖지 아니하시는’이란 표현과 잘 어울리고, 7–8절에 나오는 ‘두 마음을 품은’과 분명한-아마도 의도적인-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의도는 구하는 자들에게 지혜의 선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무조건적이고, 계산하지 않으시며,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려는 데 있다.

  • 3 마 6:22과 눅 11:34에 나오는 하플루스의 의미는 논쟁이 되고 있다. ‘한 마음’(single-minded), ‘순전한’(pure)의 의미에 대해서는 O. Bauernfeind, TDNT, 1, 386;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Eerdmans, 1978), 489를 보라.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92–93.

 

6절) 구하는 방식,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할 것을 설명한다. 

믿음 vs 의심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성품과 약속에 근거한 하나님 안에서의 확고한 신뢰와 확신이다(히 11:1) 

의심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세상에 대한 신뢰 혹은 자기 자신의 선천적인 능력들을 신뢰하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으로 구하는 자는 받게 되고 의심하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야고보와 예수님은 이렇게 의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마 21:21-22, 개정)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의심하다는 동사는 기본적으로 ‘구별하다’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디아크리노(diakrinō)의 번역이다. 이 어근의 의미로부터 디아크리노는 ‘판단하다’(고전 14:29, 개역개정에는 ‘분별하다’로 표현-역자 주), ‘논쟁하다’(행 11:2, 개역개정에는 ‘비난하다’로 표현-역자 주)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사용되며, 중간태 형태로 ‘토론하다’, ‘흔들리다’ 또는 ‘의심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야고보는 2:4에서 동일한 단어를 교회 안에서 과도할 정도로 부자를 우대하는 ‘차별’ 또는 ‘구별’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디아크리노는 어떤 지적인 의심 보다는 충성(loyalty)에 대한 기본적인 갈등, 예컨대 하나님과 ‘맘몬’(mammon, 마 6:24), 하나님과 ‘세상’(약 4:4)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94.

 

야고보는 이것을 요동치는 바다 물결로 형상화 한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바다 물결처럼 우리는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이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매순간 같은 모습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움직이는 바다 물결과 같이 마음이 나누인 사람, 두마음을 품은 사람은 이 세상 속에서 쉬지 않고 변화하는 여러가지 사상과 반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게 된다.  

 

7-8절) 두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은 무엇인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이런 사람은 바로 두마음을 품은, 의심하는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신실하지 못하고 일관적이지 못하기에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한다. 

  • 두 마음을 품은(딥쉬코스, dipsychos) 이란 단어는 문자 그대로 ‘두 마음을 가진’(double-souled)의 의미로, 이 사람의 내면이 분열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 단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를 야고보가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 그러나 이 단어가 아무리 새롭다 하더라도 그 사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죄인을 가리켜 ‘두 마음을 가진’ 자로 특징짓고(시 12:2; 호 10:2), 하나님을 ‘전심’(a whole heart)으로 찾는 자에게 복을 선언한다(시 119:2). 랍비들은 사람이 지닌 본질적인 죄성을 마음속에서 서로 싸우는 선과 악이라는 두 경향에서 보았다. 예수 역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서기관의 질문에 신명기 6:5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분열된 태도, 때로는 이 길을, 때로는 저 길을 생각하는 태도, 이러한 태도야말로 야고보가 기도할 때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믿음의 정반대편에 있는 태도이다(6a).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신앙으로 드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하다.

  • 우리는 이 ‘두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인 ‘온전함’(텔레이오스, teleios, 4절)과 하나님의 ‘단일하고’(single), ‘전심어린’(wholehearted) 속성(5절)과 정반대의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단일한 마음과 동기의 순결함에 대한 열망이 2–8절을 지배하는 주제이며, 서신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이기도 하다(특히 4:4–10을 보라).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96–97.

 

5절에서는 지혜를 구할 것을 이야기한다. 지혜가 부족할때 하나님께 구하면 후히 주신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경우 잠언과 같이 하나하나의 절을 따로 따로 볼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맥락속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앞서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이 시힘이 인내를 이루어 온전하가 구바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 이렇게 시험을 대할때 이를 통해 성숙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혜가 필요한데 이렇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6절에서 믿음으로 구하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 5절과 연관되어서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지혜일 수도 있고 좀더 보편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 지혜로 한정해서 보자면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님께 지혜 얻기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하나늠을 두려워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분별력, 통찰력을 의미하기에 의심하는 자는 이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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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unt it all joy, my brothers,2 when you meet trials fof various kinds, for you know that gthe testing of your faith hproduces steadfastness. And let steadfastness have its full effect, that you may be iperfect and complete, lacking in nothing.

e See Matt. 5:12

2 Or brothers and sisters. In New Testament usage, depending on the context, the plural Greek word adelphoi (translated “brothers”) may refer either to brothers or to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6, 19

f 1 Pet. 1:6

g 1 Pet. 1:7

h Rom. 5:3; [ch. 5:11; Heb. 10:36; 2 Pet. 1:6]

i 1 Thess. 5:23; See Matt. 5:4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2–4.

 

2절) 내 형제들아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전체에서 “내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서신 전체에서 14번 등장한다. 이중 세번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용된다. 이 표현은 새로운 단락을 도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험중에 기뻐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때 시험은 영적인 성숙을 가져다 주기에 이를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세상적인, 혹은 일시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안에서의 완전한 기쁨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의 인생가운데 닥쳐오는 다양한 시험, 고난,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야고보의 첫 권면이 바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count it all joy)는 것이다. 이 권면은 어떤 상황에서든 기쁨의 태도를 선택해야 함을 암시하는 무조건적인 성격을 띤다. ‘기쁨’을 수식하는 ‘모든’(all)은 다른 어떤 감정과도 섞이지 않는 기쁨, 즉 ‘기쁨 외에는 없는, 오로지(only) 기쁨으로만 여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기쁨의 양 보다는 기쁨의 질이 더 강조된다. 즉 ‘더할 나위 없는 행복’(supremely happy, NEB역)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이 권면의 놀라운 점은 이 권면이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이라고 말한다.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그 단어는 다음과 같이 죄를 짓게 하는 내적 유혹을 가리킬 수가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둘째, 외부의 고난, 특히 박해를 의미할 수 있다(벧전 4:12 참조). 몇몇 경우에는 그 단어가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마 26:41과 병행절).

  • 본문에서는 ‘당하다’(meet)는 동사가 사용된 것과 페이라스모스를 3절에서 ‘시련’(testing)으로 대치한 것을 미루어 볼 때, 후자의 의미, 즉 외부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여러 가지’라는 수식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고난과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결과로 직면해야 할 특정한 역경 모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질병(5:14 참조), 재정적 어려움(1:9 참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박해(2:6 참조) 등이 모두 여러 가지 시험에 포함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시험(시련)은 성도들이 기뻐해야만 할 상황으로 여겨져야 한다.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86–87.

 

3절) 우리가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믿음의 시련, 믿음의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시험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본문의 시련이라도 번역된 단어는 ‘도키미온’이라는 단어로 어떤 사람의 진정한 믿음을 만들어내기위한 의도로 진행되는 긍정적인 시험을 의미한다.(벧전 1:7) 

  • 헬라어 도키미온(dokimion)은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데, 신약성경의 경우 이곳을 제외하면 베드로전서 1:7에만 나오고 70인역에서는 시편 11:7(개역개정은 시 12:6)과 잠언 27:21에 나타난다. 베드로전서 1:7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과정의 결과, 즉 ‘너희 믿음의 확실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70인역의 두 부분에서 이 단어는 은이나 금을 불로 단련하는 ‘과정’(process)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후자의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난은 믿음을 역경이라는 불로 연단하여, 모든 찌꺼기를 제거하고 정화해서 단단 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험이 한 사람의 믿음의 소유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시험은 이미 주어진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87–88.

 

그 결과는 바로 인내이다. 이는 어려움과 고통가운데서도 신실하게 견뎌내는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휘포모네)는 견고함, 내구력, 영웅적 인내들의 의미이다. 이 인내는 상황에 대한 연약하고 수동적인 굴복이 아니라 기독교의 자족하는 현실이 실천으로 입증되는 강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반응이다. 

결국 성숙한 신앙인의 지표는 인내라는 것이다.(롬 5:3-4, 벧전 1:6-7) 그런 의미에서 이 인내는 단지 이를 꽉 깨물고 참고 버티는 수준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주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Testing of your faith defines the meaning of a trial for the Christian: as Jesus was “tested” in the wilderness (Matt. 4:1–13), so believers are tested. The Greek dokimion (“testing”) denotes a positive test intended to make one’s faith “genuine” (cf. 1 Pet. 1:7). The result is steadfastness, a life of faithful endurance amid troubles and afflict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1.

 

4절) 인내가 충분히 발휘되게 하여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표현은 ‘인내로 하여금 온전한 효력을 갖게 하라’라는 의미이다. 인내는 궁극적으로 온전함, 완전함으로 이끈다. 신자들은 거룩함안에서 성장하지만 아직 그것의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러한 완전함은 예수님의 재림때에야 비로서 실현될 것이다.  

 

지금 야고보는 자신의 서신을 처음 열면서 사랑하는 형제들을 향하여 첫 권고를 하고 있다. 그 권고의 내용은 바로 너희가 당하는 시험의 이유를 바로 알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이루고 인내를 통하여 온전함과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사실을 힘주어 설명한다. 

우리가 기도하고 추구해야할 삶은 시험의 부재의 삶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온전히 기쁨으로 이를 통해서 온전함에 이르는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시험에 대한 패배적인 굴종의 자세가 아니라 그 시험을 뛰어넘어 구별됨으로 그 시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차원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많은 시련을 기쁨을 견지하며 통과한 사람은 그 삶을 통해서 인내가 온전히 열매를 맺고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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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신약의 서신서에 포함된다. 그런데 서신서를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으로 분류한다. 바울 서신의 특징은 수신자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 후서의 대상은 고린도 교회이고 에베소서의 대상은 에베소 교회이다. 그런데 공동서신(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의 경우에는 그 명칭이 보낸이로 그 대상은 특정한 교회나 개인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두를 대상으로 하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우리의 교회에 좀더 적용할 수 있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저자와 제목

이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야고보로 예수님의 형제(마 13:55)이자 예루살렘의 지도자(행 15장)이다. 대부분 이 서신을 야고보가 썼다는데 동의하지만 몇몇 이들은 아래의 이유로 야고보의 저작설에 반대한다. 

  1. 팔레스타일은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헬리어가 너무 세련되고 수사법이 그리스 적이다. 

  2. 저자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3. 본서에는 믿음과 행위, 칭의, 자유등에 관해 바울 서신의 주제를 다루는데 야고보는 주후 62년경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야고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보다 더 늦게 이 편지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상당한 접촉이 있었고 야고보가 바울 서신의 주제에 대한 반응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안에 있었던 주제를 다룬 것이라고 본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48년경에 썼으므로 그 사이에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반박했을 수도 있다. 

 

AUTHOR

The writer of this letter calls himself simply “Jame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1:1). Of the four men with this name in the NT, only two are prominent enough to identify themselves so simply: James, the brother of John and son of Zebedee, who was one of the 12 original apostles (Mark 1:19), and James, “the Lord’s brother” (Gal 1:19), who was the leader of the early Jerusalem church (Acts 15:13; 21:18; Gal 2:9). The apostle James died at too early a date (AD 44; see Acts 12:2) to have written the letter, so this leaves James, the Lord’s brother, as the letter’s author. Although the matter is often contested, James was probably one of the younger brothers of Jesus (Matt 13:55) born to Joseph and Mary after Jesus’ birth. He was not a disciple during Jesus’ earthly ministry (John 7:5) and was perhaps converted when the resurrected Jesus appeared to him (1 Cor 15:7). James’s wise leadership of the Jerusalem church and the good name he maintained even among Jews earned him the title “James the Just,” according to Jewish and Christian traditions.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23–2524.

 

기록 시기

예수님의 형제 야가보가 주후 62년에 죽었으므로 이 편지의 연대는 그보다 이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40년대 중, 후반으로 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최초로 기록된 서신이다. 다른 이들은 죽기전인 60년대 초반으로 보기도 한다. 40년대로 보는 이들은 이 편지가 예루살렘 공의회(주후 48-49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공의회에서 다룬 주제들이 언급되었을텐데 그렇지 않은 것때문에 그 이전으로 보는 것이다. 

 

주제

야고보서의 일차적인 주제는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단지 말씀을 듣는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을 강조한다. 이 주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사회적 갈등과 교화안의 당파들간의 영적인 갈등의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의 세속성에 대해서 책망하고 그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는 신적인 지혜를 추구할 것을 도전한다. 

 

목적, 계기, 배경

야고보서의 독자는 그의 편지에 등장하듯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혹은 ‘회당’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임이 분명하다. 편지를 통해서 사회적인 상황들을 유추할 수 있다. 환난의 결과로 교회안에 갈등이 생겨났고 그들은 서로 싸우는 파벌들로 나뉘어졌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었고 믿음을 실천하는 것에 시래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과 세상사이에서 표류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되었다. 

 

핵심 주제

1. 하나님은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변함없는 창조주,  심판자, 유일하신 한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간주된다 (1:5, 17~18, 2:5, 13, 19,,4:5~6, 5:1~3 , 9, 15).

2. 지혜는 “위로부터” 오며 사람으로 하여금 시련을 견뎌 내는 동시에 불화가 아닌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한다(1: 5, 3:1317).

3. 하나님은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시지만(1: 2~4) 유혹은 하나님이 아닌 자아와 사탄에게서 나온다. 거기 필요한 반응은 참을성 있는 인내다 ( 1: 3, 13~14, 4:7,  5:7~8).

4. 일차적인 시련은 가난과 부한 자들의 압제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특별한 초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돌보아야 하며 편견을 보이거나 무시해선 안 된다. 부유한 자들은 주제넘은 교만과 가난한 자들에게서 도둑질하는 행위로 인해 정죄받는다(1: 9,  27,  2: 1~5, 15~16, 4:13~17, 5:1~6).

5. 미래의 심판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묵시적인 주제들이 널리 퍼져 있다(1:12, 2:5, 12~13, 3:1, 4:12, 5:1~7, 9, 20).

6. 멸망시키거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혀의 권세가 중간 단락을 지배히는 주제다 (3:1~4:12).

7. 말씀을듣는 것을 넘어서서 말씀을 일상적인 행동속에서 실천하라는 윤리적 명령이 처음부터 명시되 펀지 전체에 걸쳐 암시되어 있다(1:19~27, 2:14~26).

8. 기도는 시련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지만 자기중심적이어선 안 된다. 기도는 고통당하거나 아플 때만이 아니라 기쁠 때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위대한 치유의 능력이 있다(l :5 ~7, 4:2~3 , 5:13~18).

9. 믿음은 행위와 칭의와의 관계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보완한다. 야고보와 바울은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만 찾아오지만 필연적으로 행위로 귀결될 이라고 가르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결과인 행위가 없다면 처음부터 칭의도 없었다 (2 : 14~26).

 

문예적 특징

야고보서는 서신서의 초반에 등장하는 인사말로 시작되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서신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구약에 나타나는 지혜문학 장르와 비슷한 지혜의 모음집에 가깝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표현 방식은 고대 지혜자들의 잠언 또는 경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다음은 동사의 명령법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명령 방식의 표현을 사용한다. 총 108구절중에 50개가 넘는 명령문이 등장한다. 이러한 특성은 저자가 실제적인 것을 선호하는 영향이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특성이 믿음보다는 행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조는 끊임없이 열정적이고 풍자는 피상적이지 않고 꾸짖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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